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3

5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06
    386세대에 대한 분석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3/06
    메이데이 114주년 기념 평등연대 성명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3/06
    평등연대 선언문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3/06
    김광수 평등연대 의장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3/06
    대화 - 홍세화 vs 고종석, '사회연대'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3/05
    대화 -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3/05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3/05
    김지하 달마展 - 가을에서 봄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3/05
    <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인권연대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3/05
    김영국, <개혁진보진영,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최선을 다하는 자유

386세대에 대한 분석


 [퍼옴] 전주사파들이 수구주사파들의 급소를 찌르는 글...

 글쓴이 : 자유인간
 등록일 : 2004-11-23   20:32:00 조회수 조회 : 27    추천수 추천 : 0    반대수 반대 : 0    
   


이제야 제대로된 양심선언이 나오는군요.  지금까지 김정권을 장군님으로 모시는 수구적 주사파들이 듣고서 뜨끔할얘기같습니다.
민노당에도 상당한 세력이 주사파쪽 출신인데 자 이제는 부정할수없겠죠. 이제 진중권이 말처럼 커밍아웃하시죠..다들...

-------------------------------------------------------

제1주제 발표문>
잃어버린 세대 386(?)

- 386에 대한 성찰적 회고 -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1. 386운동은 사회주의운동

80년대 대학가를 배경으로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60년대 출생세대 386! 우리는 평균주의적 정책을 선호했던 좌경도 아니었고, 공산주의에 대해 호감을 갖는 용공도 아니었다.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자 그 자체였다.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거나 북한식 김일성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강력한 이념세대였다.

운동의 핵심부 몇몇뿐만 아니라 각급 과학생회 단위, 학습 동아리 모임까지 맑스레닌주의와 김일성주체사상을 교육하고 토론하고 조직했던 이념세대였다. 80년대 초중반에는 일본의 맑스레닌주의서적을 번역해서 학습을 진행하였고, 중후반에는 소련과 북한의 국정교과서나 기타 출판물을 핵심적인 의식화교재로 활용하였다.

4.19학생의거를 일으켰던 세대나 7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가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규정한 자유민주주의 수준 내에서 단절적으로, 사안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진행하였던 반면, 386세대는 사회주의이념에 기초하여 조직적이고, 연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4.19세대와 7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은 민주화 자체가 목적이었던 반면, 386에게 민주화는 사회주의나 북한화 통일(변혁과 통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화는 전술이었다.

80년대 소련의 해체가 준비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로 방향전환을 선언한 이후에 사회주의를 꿈꾼 것은 시간의 상실을 의미하며, 역사에 ‘잃어버린 세대’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386들이 사회의 저변에서, 각계각층에서 그리고 권력의 핵심에서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경향적으로 80년대 습득했던 가치를 진보라 믿으며 실현하려 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넘어 국민 모두를 혼돈의 시간 속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신들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우며, 그것이 애국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의 정체와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 긍정성과 부정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견마지로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것은 386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 때문이고, 혼돈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여 세계화시대에 회복하기 힘든 시간의 손실을 막아보자는 충정에서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사회주의(반미친김일성)운동이었거나 최소한 사회주의자(주사파)가 거의 완벽하게 주도권을 갖고 진행된 것이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의 민주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혁명의 전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학생운동에서 모색되고 정립되는 혁명노선은 상층 재야민주화단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 농민, 빈민운동계에는 물론이고, 종교운동계에도 해방신학 등과 연계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은 직접적인 현장투신과 연구능력, 전투적인 운동능력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였다. 공공연히 전위대(정당)를 자처하며 사회주의를 정강으로 설정했던 조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나 근거는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통계는 없지만 수천 개에 달했을 학습조직의 의식화 커리큘럼, 수많이 명멸했던 조직들의 창립 강령, 혹은 선언문, 총학생회로 대표되는 각급 대중조직의 사명문, 출범선언문, 각급 단체에서 발행했던 기관지나, 선전물, 창작되고, 불려졌던 노래 등 무수하다.

2. 386 사회주의운동의 탄생 배경 및 전개과정

80년대 한국사회는 사회주의자가 자리 잡기에는 매우 불리한 사회여건이었다.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기 시작했고, 경제는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국민들과 청년층의 불만이 적거나 있더라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 발달 수준도 동일수준의 다른 나라 이를테면 대만이나, 싱가폴과 비교하여도 낮다고 볼 수 없었으며, 제3세계나 사회주의권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사회주의자들이 배태되기에는 매우 열악한 조건에 있었던 한국사회가 아주 짧은 시간에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전투적이고, 조직적이며 열정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민주화와 변혁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객관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이었고, 주체적으로는 초기 운동세력의 운동능력(이론능력, 조직능력, 전개력 등)이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또한 민주화를 일관되게 추동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세력 부재도 386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지 못한 한 상황조건으로 되었다.

80년 광주는 학생들에게 충격이었다. 4.19나 70년대 민주화운동같이 단순하고 단절적인 운동, 반복적인 반대나 청원식 운동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 386들은 정권이 금서로 정한 사회주의와 기타 이념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의 체제서적, 박제화된 논리는 비판의 겨를 없이 386의 영혼 속에 스며들었다. 80년대는 자유주의자들의 영역이 실종된 상태에서 사회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의 충돌양상으로 민주화운동이 형해화 되고 말았다.

1980년대의 사회주의운동은 중반을 경과하면서 PD와 NL로 분화하였다.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계급모순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민주변혁과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걷는 386들은 민중민주파 PD로 되었다. 김일성주의에 기초하여 한국(남조선)을 미제와 대리정권의 식민지로 파악하고 이것을 여타 사회문제(독재와 분단)의 근본원인으로 설정한 386들은 민족해방파 NL되었다.

물론 PD내에도 무수히 많은 그룹들이 존재했으며 상대적으로 잘 통합되어 있었던 NL도 수령관을 인정한 그룹, 인정하지 않은 그룹, 한민전 방침의 수용여부(전면적 혹은 실사적 수용)에 따라 약간의 차이들은 존재했다. 오늘날 진보의 가치로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반미친북의 노선은 이 NL그룹의 핵심 주장이었다.



치열한 노선투쟁을 전개하던 양대 그룹은 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경과하며 주사파 NL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표적인 사회운동(전민련 등)도 이런 입장을 지니게 된다. PD그룹은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라는 소비에트적 구호를 들어 대중의 동의를 받기 어려웠던 반면 “직선제로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었던 NL주사파가 학생과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게 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주사파는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전대협(87년)과 한총련(93년)을 조직하게 되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90년을 전후하여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PD그룹은 급격하게 쇠락하게 된다.

그러나 주사파는 김정일이 썼다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로작(?)을 받아들고 동구사회주의 몰락을 나름대로 분석하며 주 세력이 거의 이탈하지 않고 생존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하는 반미의 구호와 정례적 통일운동은 NL주사파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감성적, 실천적 근거였다. 결국 PD는 소련사회주의와 공동운명체였고, NL주사파는 북한 김정일체제와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NL 주사파도 90년대 중후반을 경과하면서 일선운동세력으로서는 크게 쇠락을 거듭한다. 북한 주민의 현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학생과 국민대중의 일방적 지지가 약화되었고, NL주사파의 대부 김영환과 그 동료들이 공개적인 자기반성을 하고 북한민주화운동을 추진함에 따라 주사파 운동권의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주체철학의 제기자 황장엽의 망명과 김일성주의에 대한 비판도 영향을 주었다.

3. 386의 특징 및 功過

한국 386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사회(민주)주의운동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세대이다.



1) 386의 1차적 특징은 속성재배에 있다.

유럽의 좌파는 최소한 루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한국 좌파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단절된 채 ‘80년 광주’이후 돌연 출연하였다. 해방정국 당시의 좌파운동과 실천적, 조직적, 인적 연계가 단절된 채 자생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통혁당이나 남민전 같은 로동당 하부 조직은 추후 주사파NL이 복권한 것이지 이들이 386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단절된 채 자생적으로 성장한 386 사회주의자들이 몇 년 만에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참으로 세계 사회주의운동에서도 보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속성재배는 몇 가지 큰 문제를 배태하게 된다.

2) 그것은 심각한 지적 빈곤, 문화지체현상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좌파들은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 기타 무수한 좌파 변종들과의 논쟁과정에서 자신들을 스스로 진화시키고 내실화해 왔다. 20세기 초반부터 직접 정권을 책임지고 운영해 보기도 했다. 소비에트의 전체주의를 목도하였고,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폐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토의했다. 폴포트의 킬링필드는 좌파들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했다.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도 소화해야 했으며, 중국과 베트남간의 전쟁,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절망해야 했다. 사회민주주의 시책들의 실패도 뼈저리게 감수해야 했다. 그들의 사색에는 북한 수령체제의 몰상식성, 비인간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386은 이런 지적 반성, 수렴과정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덩샤오핑과 중국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진정시키고 개혁개방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리영희 교수의 책을 읽고 문혁을 동경하고 있었다. 소련이 체제모순을 견디다 못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는 시점에 소련 국정교과서인 세계철학사를 습득하고 실천이념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이 같은 지적 빈곤을 넘어 수많은 인류의 실천적, 이론적 경험 속에서 배움을 확장하려는 노력은 PD그룹의 경우 동구사회주의몰락 이후에 시작된다. NL그룹은 북한의 대규모 식량난을 전후해서 김영환의 문제제기로 본격적인 자기 검토를 시작한다. 그러나 생활인이 된 NL386은 이러한 자기 검토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김정일 추종세력들은 자기 검토를 거부하고 지적 정체 속에 퇴행적인 80년대 정치구호를 되뇌이고 있다. 대한민국 50년사를 악으로 규정하고, 386자신을 선이며 도덕적 가치로 확신하는 황당함은 이러한 속성재배와 지적 빈곤, 계급주의의 반영이며, 변종이다.

3) 한국 386의 특징 중에 전투성과 헌신성, 이념성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사회주의운동사에서 이렇듯 속성재배된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렵지만 전투성과 헌신성도 매우 드문 유례이다. ‘학생은 쁘띠부르조아로서 기본적으로 동요계층’이라고 말한 맑스의 명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불나비처럼 공장으로, 농촌으로, 빈민가로 뛰어들었다. 9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시민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한다. 정확하게 숫자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학업을 마치거나 중단하고 공장 등으로 들어갔다. 함께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책하며 정신적으로 부채의식을 걸머졌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는 오월대, 녹두대, 투호대, 의혈대 등 수많은 전투조직들이 대학 내에서 만들어지고, 각종 시위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전투조직들은 단기적으로 시위공간을 창출하고 시위대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미제국주의와 전쟁을 치르는 ‘전사’를 양성하는 곳으로 교육되었다.

다른 나라 운동에서도 테러까지 이르는 과격한 학생운동이 출몰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운동, 혹은 학생의 극히 일부분이었지 세대 전체를 대표하거나 특징짓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 386은 이와 다르게 세대 대다수가 사회문제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이념과 시대문제에 몰입하거나 부채의식을 지녔다. 그것을 거부하는 세력이나 사람은 철저히 주변부화되었다. NL주사파는 이론적으로 학생을 혁명의 주력군 지위에 올려놓았으며, 게다가 선봉대의 임무까지 맡길 정도였다.



4) 386의 공감대 친북반미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386은 반미친북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90년대와 2000년대 중반에 이른 지금 386의 핵심 정체성은 반미친북이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서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수용, 세계화와 지식사회화의 진전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지향은 실제적으로 사라지고 있으며 평등적 가치 지향, 국가개입적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정치권에 진출한 386들은 세계화와 지식사회화, 자유주의의 한국적 수용, 세계인권신장에 기여라는 진보적 가치를 능동적으로 실현해 가는 대신에 과거에 얽매여 그것도 좌파적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며, 소모적인 논쟁을 촉발하여, 지지세력의 결집과 편가르기만을 초래하고 있다. 사회주의 지향성의 약화와 분화에도 불구하고 친북반미적인 입장과 태도는 여전히 폭넓게 작동하며 범 386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북한인권현실을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설사 마지못해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그 핵심원인이 미국의 봉쇄와 위협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수백만이 굶어죽고, 수십만이 정치범수용소에 있으며, 김정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천부인권의 초보적 권리마저 송두리째 박탈당한 것을 인정하지도 않거니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나마도 이 모든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강변한다. 히틀러의 게르만주의보다 더욱 파괴적인 ‘우리민족끼리’라는 시대착오적 담론에 매몰되어 있다.

UN인권위의 대북인권결의안 채택과정에서, 그리고 미국의 북한인권법안 성립과정에서 386의원들이 보여준 모습은 반미-반인권-친김정일의 사고경향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 386은 김정일과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김일성주의를 학습하고 한민전 지침을 따르며, 변혁과 통일을 추구했던 80년대에는 물론이거니와 김정일 정권의 상상을 초월한 인권탄압과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옹호하는 지금도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좋은 예가 있다. 일본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 와다 하루끼(도쿄대 명에교수)는 김정일 정권이 일본인을 납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 없는 모략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김정일이 고이즈미와의 회담에서 납치를 시인하면서 정치적으로 파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비에트를 옹호했던 소비에트주의자들은 소비에트의 철권통치가 알려지면서 정치적 몰락을 겪었다.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사실에 기초해서 자신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세대로서의 386, 특히 정치인 386들은 김정일 정권이 그 폭압과 독재, 학살과 경제파탄으로 인해 붕괴되었을 때 정신적 패닉상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

5) 386의 功, 민주화

역사에서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긍정적 역할이 컸는가, 부정적 측면이 주요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는 한국현대사에서 과보다 공이 훨씬 크다고 평가될 것이다. 사회주의권을 포함하여 국가주도형 발전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몇 안 되는 나라중 하나이고, 정치적으로도 사회주의권과는 비교도 안 되며 동급의 개발도상국에 비해 뒤지지 않는 수준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왔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민주주의의 발전은 열악한 경제에서는 불가하다고 할 때 그와 그 세대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를 제로로 평가하는 것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



386세대에게도 공이 존재한다.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장, 시민들의 자율성 고양에서 보여준 386의 헌신성은 이미 평가되었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22%나 되는 비율로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었다. 이는 이들의 공에 대한 국민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세력이 그 공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모습을 제때에 극복하지 못해 청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처럼, 민주화세력이 친북반미적 사고, 사회주의적 경향성을 공개적이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역사의 평가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4. 오늘날의 386

80년대의 386들은 오늘날 크게 4가지 유형으로 존재한다. 여전히 김일성주의에 기초하여 북한화통일,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 여기에 맑스주의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들이 함께 존재한다. 두 번째 유형으로는 이른바 486으로 업그레이드된 386이 있다. 이들은 자유주의를 수용했거나 한국에 진정한 자유주의가 정착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역사를 현재에 기여한 것에 맞게 평가하고자 하며, 세계와 나라의 발전방향을 세계화, 지식정보사회화, 국제인권 중시의 길로 파악하고 이에 기여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정치권 386이다. 이들은 4.19세대나 6.3세대, 민청학련 세대와 비교하여 월등히 젊은 나이에 가장 많은 수가 정치권에 진출해 있다. 이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줄곧 현실운동과 정치에 참여해 왔기 때문에 첫 번째 유형처럼 김일성주의나 맑스주의를 가지고 북한화 통일이나 사회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반미친북적 성향과 사고, 그리고 80년대적 경향성을 가지고 현실사회와 역사를 바라보고 있고,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이들은 그것이 개혁이고 진보라고 믿으며, 치열하고 공개적인 자기 검토를 회피하고 있다. 국가운영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생각의 변천 과정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그에 기초한 자신의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때 이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네 번째로는 생활인 386이다. 앞서 말한 세 부류와 달리 이들은 80년대식 사고를 가지고 일찍부터 사회생활에 참여하였다. 사회생활 초기에 이들은 20대 초중반에 받아들였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그때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였다. 운동의 시급성을 뒤로 하고 생활을 챙겼다는 미안함 때문에 부채의식까지 작용하여 80년대식 사고를 더욱 완강하게 유지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러나 386의 절반이 40대에 접어든 지금, 이들은 많이 바뀌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실정으로 경제가 침체하고 나라가 혼란스럽게 되자 현 정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40대의 현 정권 지지율이 가장 낮은 것이 그 구체적 징표다.

5. 'upgrade 386=486'을 향하여

우리는 80년대에 국민들 앞에서 혹은 법정에서 좌경이 아니라고 하였다. 용공도 아니고, 주사파도 아니라고 하였다. 모 대학 총장이 우리의 명예를 모욕할 뿐이라고 하였고, 안기부나 검찰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학생이고, 민주주의자라 하였다. 좌경용공 운운은 국민들이 가진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해 독재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모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말이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386 세대는 다른 세대와 다르게 단순한 민주주의세력이 아니라 사회주의자가 주도한 세대였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아 어떤 정치인은 두 번이나 큰 곤욕을 치렀는데, 이것과 비교해도 反대한민국의 길을 걸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매우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김일성주의에 대해, 맑스주의에 대해, 북한정권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여전히 그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줄뿐이다. 김정일 정권의 인권탄압상이 드러나고 북한이 민주화과정에 돌입하게 되면 한국 정신적, 연령적 386정치인들은 와다 하루끼 교수이상의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386세대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며, 사회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우리 한국에서 386의 상실을 의미하며, 나름대로 사회에 대한 애정과 헌신성이 높은 장점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386은 잃어버린 세대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활발하게 386 업그레이드론을 지피고자 하는 것은 크게는 한국사회를 위해서이지만 작게는 386의 건강함을 회복하고 장기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제2주제 발표문>

선진화의 길, 자유주의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한 역사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50년사는 성공의 역사다. 공산주의의 위협 앞에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양대 과제를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낸 나라는 찾기 힘들다. 물론 일부 부작용과 그에 따른 아픔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역사가 결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그래서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오욕의 역사는 아니다. 자부심과 긍지를 갖기에 충분한 영광의 역사다.

1962년 세계은행에서 3,400만 달러를 빌리려고 하는데 보증을 서줄 나라가 없어 서독에 파견된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의 봉급을 독일은행에 강제 예치함으로써 성사시킨 일화가 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서독 방문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듯 無에서 有를 창조한 역사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역시 모범적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과 권력의 하향분산화, 평화적 정권교체 등의 과제를 사회 안정을 유지해 나가면서 성취하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자학사관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정과 청산’이 아닌 ‘계승과 발전’의 역사관이다.

현 단계의 과제, 선진화

그렇다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선진국 진입이다. 선진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모든 방면에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격조 높은 나라를 가리킨다.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

선진화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도출된 실천적 개념이다. 그것은 산업화(正)와 민주화(反)를 뛰어넘어 한국사회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자는 변증법적 합(合)의 개념이다. 산업화세력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민주주의를 희생시켰다. 반면 민주화세력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권력의 하향분산화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는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선진화는 산업화와 민주화 양 흐름의 장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단점을 극복하여 대한민국의 지향을 밝히는 21세기 신노선이다.

왜 자유주의인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은 자유주의에 있다. 먼저 경제를 보자.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주도형 중상주의 시스템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2만 달러 시대 개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간의 창의력을 중시하는 시장주도형 자유주의 시스템만이 그 해결사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정부-큰 시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을 완전히 극복한 일본이 주는 교훈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정부여당의 한국판 뉴딜정책 검토는 시대역행적이다. 보다 자율적인 환경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 개혁은 정경유착의 폐해를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다음으로 정치를 보자. 17대 총선으로 행정권력 뿐만 아니라 의회권력까지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손에 넘어갔건만,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80년대식 민중민주주의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신장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제약하는 신문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제?개정 움직임을 보면 현 정권이 표방하는 참여민주주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 아니할 수 없다. 여당 의원들의 헌법재판소에 대한 공격은 자유주의의 핵심 구성원리인 법치주의와 입헌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집단이익을 초월해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성찰적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결핍은 21세기 문명의 이기인 사이버공간을 전자민주주의가 아닌 인터넷 포퓰리즘의 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제2기 민주화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그 핵심은 자유화운동이다. 자유와 민주가 항상 한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긴장관계에 놓일 때도 있다. 특히 민주의 이름으로 자유를 제약하거나 침해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보아왔다. 한국의 현 상황도 이에 해당된다. 이제 우리는 제1기 민주화운동의 성과물인 절차적 민주주의와 권력의 하향분산화에 이어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 ‘제2기 민주화운동=자유화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문화를 보자. 우리 사회의 갈등수준은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는 사회심리가 한국인의 특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역시 자유주의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이제 우리는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기회의 균등을 제공하되 경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는 합리적 사회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는 결코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는 청부(淸富)를 사랑하며 빈부격차의 해소가 아닌 빈곤의 해소를 추구한다.

구우파(old right)와 구좌파(old left)의 저급한 선악 이분법과 색깔론(‘빨갱이’와 ‘수구꼴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자유주의가 필요하다. 다원주의는 자유주의의 핵심가치다. 이 다원주의가 있어야 서로 다름의 공존이 가능해 지고 관용과 상생의 문화가 싹튼다. 17대 국회의 대국민 약속인 상생의 정치가 구두선에 그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여야 공히 자유주의 소양이 부족한데 어찌 상생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어떤 자유주의인가?

자유주의의 스펙트럼은 꽤 넓다. 사회민주주의에 근접한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도 있고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려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도 있다.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21세기형 자유주의는 다양한 자유주의 이념들의 최대공약수에 기초한다. 무엇보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인 법치주의(입헌주의)와 자기책임 원칙이 정착되어야 한다. 법치주의(rule of law)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그런데 최근 여당 의원들의 ‘수구 헌재의 사법 쿠데타’ 운운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계급주의적 법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김선일씨 피살사건은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 구성원리인 자기책임 원칙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희박함을 보여주었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받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자기책임 원칙의 확립이 시급하다.

어떤 자유주의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의 허용범위다. J. S. Mill은 그것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라고 규정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옳다.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특정집단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위해 불특정 다수의 교통 불편을 초래하는 현행 집시법은 바뀌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질서자유주의’다.

IMF 금융위기의 처방전이었던 DJ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사오정 양산 등으로 많은 이들의 웃음을 앗아갔다. 또한 금융기관의 헐값 매각으로 국부를 유출시켰다. 일한만큼 대접받는 경쟁적 시장경제는 자유주의의 대전제이지만, 그것이 비정한 약육강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의 인간화’라는 다소 모순 된 과제가 부여된다. 우리는 그것을 ‘상생의 자유주의’, 또는 ‘공동체 자유주의(communitarian liberalism)’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되 21세기에 걸 맞는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와의 조화를 도모하는 자유주의다.

그런데 한국의 현 상황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전투성을 요구한다. “독재를 돕던 단체들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를 누리고 있어 조금 제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그가 자유주의에 관한 한 교양필수 미필임을 드러냈다. 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는 80년대 운동권이 주창했던 민중민주주의의 노무현 버전이다. 지배계급 교체, 기존질서 해체 등의 발상은 민중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지하듯이 민중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종이다.

이 시대는 위기에 처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구출해 낼 ‘전투적 자유주의자’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과거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운, 한번도 기득권을 누려본 적이 없는 젊고 건강한 자유주의자들이 무대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 그들의 철학과 영혼, 배고픔 속에서의 청렴함이 젊은이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투자는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얌체 보수’, 중도 운운하면서 전선의 성격을 흐려놓은 ‘회색 지식인’들,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면서 행동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강단 자유주의자’는 우리의 진정한 벗이 될 수 없다. 오늘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강단에서 해방되어 실천의 장으로 나온 날이다. 우리 모두 자유주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힘차게 진군하자. 한국 자유주의운동이 가는 길에 시련은 있을지라도 좌절은 있을 수 없다.
추천하기 반대하기


(1)

고시생2004-11-23   21:25:59 쪽글 삭제
누구보다 민주화를 열망하고 가장 민주주의적 소양을 갖추었으리라고 믿었던 젊은 세대 386세대는 아무도 그들을 믿지않습니다.내부에서 조차 그런 논의는 용납되지않습니다.비건한 예로 386세대는 자녀가 2명정도고 초등,중등에 다니는 학생이 있을것입니다.자신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를 보십시요.이거 가만히 놔두고 진보니 사회주의니 민주화니 민주화의 주역이니 이런 말이 나오니 참 기가 막힙니다.아무도 예외일수 없고 자신할수는 없지만 좀 당해보니 기가막힙니다.유아들의 교육은 어떻습니까?어린이집,유치원...세상에 이런 부모가 없을지경입니다.이것도 당해보니 그렇습니다.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아닙니다.거리에서 정치일선에서만 민주화그러지말고 이런데를 돌아봅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메이데이 114주년 기념 평등연대 성명


[114주년 메이데이를 맞이하여 전 세계 진보진영의 희망인 남한 노동자계급에게 평등연대가 보내는 메시지]

 

 



자본가권력을 분쇄하지 않고서는 안정된 직장과 평등한 사회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메이데이는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확인하는 날이다.

114년 전 교수형을 선고받은 5명의 미국노동자는 자본가들의 음모로 형장에 섰지만 아무도 살려달라고 구걸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내면의 분노를,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존을 지켰다. 그들은 죽음으로 노동의 역사가 채찍과 말발굽, 그리고 심지어 생명을 뺏는 것으로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역사적 진실을 지킨 것이다. 이렇게 메이데이는 시작되었고, 114년이 지난 오늘 인간이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피를 닮은 혁명의 깃발은 나부낀다.

자본가들과 동요하는 자들은 결코 지킬 수 없는 것을 우리 노동자는 혁명의 대의 앞에 지켜왔다. 1871년 세계최초로 노동자 공화국을 건설했던 빠리꼬뮨이 무너지자, 혁명적 노동자들, 흔히 꼬뮤니스트라 불리는 전사들을 집단적으로 학살되었다. 총살을 기다리는 대오속에 이제 겨우 13살밖에 안된 어린 노동자도 있었다. 이 아이는 총살직전에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유품인 회중시계를 갖다 드리고 올테니 자신의 처형 순서를 뒤로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프러시아 장교는 그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면서 속으로 제발 돌아오지 말라고 빌었다. 그러나 아동노동에 진저리를 치고 혁명운동에 뛰어든 우리 어린 꼬뮤니스트는 어머니에게 회중시계를 주고 작별포옹을 하고는 헐레벌떡 형장으로 돌아와 당당히 처형대에 섰다.

그렇다. 우리는 지킨다. 한번 한 약속은 지킨다. 너희 자본가놈들은 공포앞에서 한강물에 떨어질 용기는 있어도, 검찰소사를 받으러 오후에 가겠노라 는 검사와의 약속은 지킬 배짱이 없는 놈들이다.  

우리는 배달호열사, 김주익열사, 이해남열사, 이용석열사, 곽재구열사, 박일수열사의 꿈과 희망을 지킬 것이다.  

손배가압류, 단협파기, 노동조합말살, 비정규직차별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열사들의 염원은 이 땅을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정당한 꿈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번영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은 차별없는 평등한 관계속에서 지속될 수 있고,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심 없는 연대의 정신이다. 노동조합은 바로 경쟁과 차별의 자본주의 바다에서 평등과 연대를 실현해가는 노동자의 섬이다. 열사들은 이 섬에서 자라 차가운 바닷물을 가르고 해방세상으로 노동자계급을 인도한 선지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가른 바닷길을 지키는 해방투사인 것이다.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만이 이 드라마의 결론이다.

2004년 4월 15일 민주노동당은 10명의 의원을 배출시켰다. 불과 4년전에 단 한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한 정당이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다. 평등연대는 이 일을 5만 민주노동당 당원과 70만 민주노총 조합원, 10만 전농 회원, 그리고 이 땅 2000만에 이르는 근로인민의 쾌거로 기쁨을 함께 한다. 특히 계급투표를 실천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과가 바로 노동자가 권력을 향하는 도정에 비로소 첫발을 내딛었음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혁명적 열정을 지닌 패기 있고, 낙관적인 노동자들의 참여로 발전할 수 있으며 민주노동당은 다가오는 5월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건설함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은 이제 꿈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을 실현할 햇수는 작업장에서 온전한 손을 유지한 노동자라면 손가락만 가지고도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권력장악은 투표함에서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가두와 골목에서 살아숨쉬는 정치적 노동운동의 강화로서 현실이 될 것이다.

전세계 노동자계급은 전세계를 파괴에서 구할 연대와 단결의 기치를 지키고 있다.

이라크에서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미국, 팔레스타인 민중을 사냥하고 있는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 우크라이나 민중을 기아선상으로 떨어트리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권력을 분쇄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대지에 굳게 서있는 혁명자 노동자와 근로인민의 세계적 단결이다. 그러한 단결 하에서만 전쟁과 착취로 파괴되고 있는 수천년 노동의 성과는 파괴를 면할 수 있다. 남한 노동자계급은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는 미국의 꼭두각시 노무현 정권을 밀어붙여 전 세계진보세력
에게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미제국주의에 투쟁하고 있는 전세계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의 굳건한 연대는 제국주의와 꼭두각시 정권과의 정치투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연대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 동지와의 굳은 약속을 지키자

그러나 바다건너 노동자들과의 연대와 함께 차별의 바다에서 익사직전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굳건한 연대를 실현하는 과제가 한순간도 잊혀져서는 안 된다. 남한 노동자계급은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엉터리 주술로 근로인민을 파탄의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는 자본가권력을 노동자권력으로 대치해야할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고통받는 현실과의 약속이고, 다가올 해방세상의 미래와
의 약속이다. 인간이기에 지켜야 할 정치적 약속이다.  

열사들의 피와 땀은 노동자들 사이의 평등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동맥에서 흐르고, 열사와 함께 했던 불길은 혁명적 노동자의 가슴속에 해방의 염원으로 작열하고 있다. 이제 세상은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 모든 패를 다 걸었다.

일어나라 남한 노동자계급이여, 잃은 것은 모욕과 채찍이요, 얻을 것은 자존과 해방이다!

계급투표 승리 만세!
비정규직 철폐 투쟁 만세!
이라크 민중과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투쟁만세!
세계 전투적 노동자의 중핵, 남한 노동자계급의 해방투쟁 만세!

2004년 5월 1일

전 세계 노동자계급, 근로인민과 연대하는 평등연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평등연대 선언문

정파분석문건 5)평등연대선언문

 글쓴이 : 오한강
 등록일 : 2004-11-05   10:26:27 조회수 조회 : 203    추천수 추천 : 0    반대수 반대 : 0    
   


오늘 우리는 세상을 바꾸어 내겠다는 포부와 결의를 갖고 노동운동, 민중운동, 민주노동당의 혁신을 선도할 [평등세상을 위한 노동자·민중 실천연대](약칭 평등연대)의 창립을 선언한다.

[평등연대]의 창립을 둘러싼 정세는 매우 엄중하다. 경제위기를 극복하였다는 김대중정권의 선전이 거짓으로 판명나고 IMF공황사태의 고통에서조차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이 엄습하고 있다. 제2차구조조정의 공세속에 수많은 노동자, 민중이 일자리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리고 있으며 추운 겨울날씨 속에 노숙자의 행렬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농민들은 자신의 농산물을 불태우며 절규하고 있다. TV에서는 연일,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아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방송하고 있다. 스산함과 불안, 분노와 좌절이 온나라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 김대중정권은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전체사회를 더욱더 깊은 수렁속으로 몰아놓고 있다. 권력형비리사건은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고 있으며 집권세력은 내부권력다툼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소심한 학자들조차 국가전복의 위험성을 경고하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경제위기와 사회전반의 총체적 위기는 당장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의 위기는 농민들의 투쟁에서처럼 자본과 김대중정권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불만과 투쟁을 격화시키고 있다. 반복되고 일상화되고 있는 위기는 생존을 위해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만 한다는 대중의 자각과 열망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선두에서 저지하고 대중의 열망을 받아 안아야 할 운동의 선진부대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자기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정권과 자본측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수년간 수세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지도부의 권위가 무너지고 조직적으로 취약해져 있으며 현장장악력이 크게 훼손되어 있다. 상층지도부는 자주성과 투쟁성을 상실하고 관료화, 개량화되었으며 자본과 정권의 구조조정 공세에 일관성있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조합원들에 대한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다.

현장은 전체적인 전선이 붕괴된 상태에서 순차적으로 각개격파당하여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거나 대응력이 약화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의 창당으로 우리 운동은 노동자, 민중의 정치활동을 전면화하고 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이루어갈 조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총선실패 이후 당대오를 정비하고 초보적인 당활동을 전개해왔지만 자본과 정권에 맞선 대중적 정치전선의 형성에 실패하고 의료, 교육 등 당면현안문제에 대한 선진적 정책제시와 실천에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부진으로 당은 정체상태에 빠져있다. 전체전선운동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여 투쟁력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과 김대중정권의 2차 구조조정공세에 저지선을 치고 새로운 경제위기,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변혁의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민중운동, 민주노동당의 총체적 혁신을 통해 주체의 상태를 재편해가는 일이 시급하다. 현재와 같은 주체적 상태가 계속될 경우 전체운동은 전진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위협받게 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더욱 무기력화되어 향후 반격의 여력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며 민주노동당은 대중적 영향력을 갖는 정당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점을 직시하고 운동의 위기로부터의 탈출과 새로운 전진을 위해 전체운동의 혁신을 선도할 [평등연대]를 결성하려 한다.


1. [평등연대]는 노동운동, 민중운동, 민주노동당의 총체적 혁신을 목표로 한다.


1) [평등연대]는 노동운동을 다음과 같이 혁신해 갈 것이다.

첫째, 노동운동의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을 복원하고 변혁성을 강화해갈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노동운동 내에 퍼져있는 노사협조주의, 개량주의를 철저히 극복해갈 것이다. 노사협조주의 세력은 민주노총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들러리 세우는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등 투쟁이 아니라 협상과 청원을 통해 목표를 획득하려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자주적, 전투적 전통을 훼손해왔다. 또한 노동자 대중의 정서와 요구와 괴리된 상층중심의 관료주의를 배격하고 노동운동이 철저히 현장 노동자대중중심의 민주적 노동운동이 되도록 투쟁해갈 것이며 노동해방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실현하여 노동운동의 변혁성을 강화해갈 것이다.

둘째, 민주노총을 혁신 강화한다. 노동운동의 혁신을 위해 핵심적으로 민주노총을 혁신·강화해간다. 민주노총을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의 투쟁을 전개하는 투쟁의 무기로 만들고 민주노총의 조직혁신을 통해 직선제, 소환제, 주요사안에 대한 조합원 투표 등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해간다. 이를 통해 실추된 조합원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고 민주노총이 명실상부한 전국적 투쟁센터가 되도록 한다. 민주노총의 전투성, 투쟁성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변혁적 이념을 확립해간다.

현재 2기 보궐지도부가 제출하고 있는 '노동운동발전전략'의 노사협조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투쟁적이고 변혁적인 이념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한다. 계급적 단결과 투쟁력을 강화하는 산별노조를 건설해간다. 투쟁을 통해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서는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기업별노조의 형식적 통합이 아닌 정규직, 비정규직, 실업자까지 포괄하는 실질적인 산별노조를 건설해간다. 현장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강화하여 현장을 자본으로부터 탈환한다. 현장조직력의 강화와 전투성의 복원으로 단위노조의 역량을 강화하고 현장의 일상투쟁을 통해 현장조직을 강화한다.

2) [평등연대]는 당혁신의 주체로서 민주노동당을 다음과 같이 혁신해갈 것이다.

첫째, 노동해방을 실현하는 노동운동의 선진부대로서의 당관을 확립하고 실천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해방을 실현하는 노동운동의 선진부대로서 '해방의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당은 정치활동을 선거중심으로 협소화하지 않고 노동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전면화하여야 한다.

둘째, 당으로서의 역할에 맞게 민주노동당이 대중적 정치전선을 선두에서 형성하게 한다. 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역량만으로도 최대한 대중적 정치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투쟁하여야 한다. 이러한 활동을 축적해감에 따라 당의 역량도 확대되고 대중적 정치전선의 규모와 질이 확대될 것이다.

셋째, 민주노동당이 당면 현안문제에 대한 정책제시와 실천을 적극화하도록 한다. 민주노동당은 전교조의 핵심투쟁과제인 7차교육과정에 대한 대응문제에서 당의 관점에서 정책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노동운동내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노동운동발전전략'에 대해서도 당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또 논의를 조직하여야 한다.

넷째, 활발한 정치활동을 통해 당원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당원 수를 대폭 확대하도록 한다. 주체역량을 탓하기 전에 현재의 역량을 최대한 가동하여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당원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당원의 확대도 현재의 조건에서는 활발한 정치활동의 전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섯째, 역동적 지도력이 형성되도록 한다.

여섯째, 사업계획 수립, 평가의 체계가 형성되도록 한다. 2001년 사업계획은 과거와 달리 면밀하게 준비되고 당원들의 사전토론이 충분하게 이루어져 명실상부한 실천계획이 되어야 한다.

일곱째, 진보진영의 대통합을 선도하도록 한다.  당은 재창당을 적극적으로 실천해갈 뿐만 아니라 재창당을 뛰어넘는 대통합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여덟째, 현장정치활동을 강화하도록 한다. 지금까지의 진보정당운동의 가두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현장에 확고한 조직적 기초를 구축해야 하고 생산현장과 밀접히 결합한 정치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현장속에서 기초조직(당원 소모임, 분회)을 건설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하고 현장정치활동의 전형을 창출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3) [평등연대]는 전선운동의 강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전선운동의 강화를 위해서는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의 내부혁신에 기초하여 전선운동의 구심체를 형성하고 당과 전선체 사이에 새로운 협력관계를 형성한다.

2. [평등연대]는 이상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평등연대]준비모임의 성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갈 것이다. <생략 http://www.pdyd.org/ 참조>


3. [평등연대]와 함께 미래를 개척해가자!


오랜기간 자본과 김대중정권의 공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밀려오면서 전체 진보세력은 정세를 돌파할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경제위기는 변혁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과 실천의지를 만들어 내기 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전투적, 변혁적 세력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로가 누적되고 막막함이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인내심과 통찰력을 갖고 정세를 바라 볼 때 한국사회는 새로운 역사적 변혁시기에 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때 전투적, 변혁적 세력은 관성적인 관점을 극복하고 웅대한 전망과 각오를 갖고 새로이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현재의 운동위기는 자본과 김대중정권의 공세 때문만으로 발생한 것도, 대중투쟁의 침체 때문만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다. 위기의 진정한 이유는 노동운동, 민중운동, 민주노동당 지도부들이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현시기 요구되는 과제를 올바로 인식,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평등연대]가 전체운동의 혁신을 난국돌파의 핵심고리로 설정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운동을 바로 세우는 임무가 전투적, 변혁적 세력 모두에게 부여되고 있다.

[평등연대]는 이러한 과제를 선도적으로 실천해갈 것이다.
[평등연대]는 현장의 고통과 분노, 열망을 조직적으로 결집해서 운동을 바로세우고 이를 토대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해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어찌 우리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건강한 당내외의 역량이 결집할 때만 이는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평등연대]와 함께 결집하여 우리 모두 현재의 난국을 돌파하고 미래를 개척해가자! 그리하여 썩을 대로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희망찬 새세상을 만들어가자!


                          2000. 12. 16.

추천하기 반대하기


(1)

오한강2004-11-05   10:28:51 쪽글 삭제
http://www.pdyd.org/ 평등연대 사이트입니다. 평등연대는 이와 별도로 평등세상이라는 웹진도 운영 중입니다. http://www.pdss.net/

평등연대는 사회주의 의견그룹을 건설하자는 제안문을 최근에 올렸고 위 문건은 4년 전 평등연대 창립문건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광수 평등연대 의장

 
 김광수 (평등연대 의장)

 글쓴이 : 웹진평등세상
 등록일 : 2005-02-13   08:58:37 조회수 조회 : 349    추천수 추천 : 2    반대수 반대 : 1    
   



김광수 (평등연대 의장)



1. 민주노총 사회적 교섭에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사회적 합의주의의 전면화이며, 노동운동 퇴보의 측면이다
- 평등세상을 위한 민주노조운동 전략의 정체
- 불황기에 대중은 투쟁하지 않고 지도부는 교섭에 의존하기 때문에 혼란


사회적 교섭과 사회적 합의주의는 큰 차이가 없다. 노동조합운동이 발전하면서 이른바 정부와의 교섭틀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법외노조였던 전노협과 달리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국민연금기금운영위원회, 국민연금이사회, 최저임금위원회라든지, 이런 것에 다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나서 점점 확대되어왔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을 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교섭을 한다/안한다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주의를 전면화하겠다는 것이다. 용어가 '사회적 교섭 전략'이라고해서 사회적 교섭이냐, 사회적 합의주의냐 구분하는데, 별 의미가 없다. 현실적으로 보면 사회적 합의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원인을 어떻게 보는가?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이 필요한 이유로 민주노조 운동이 성장하게 되면 사회적 교섭의 틀을 자연스럽게 맞닿뜨릴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사회적 교섭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고 한다. 노동조합운동의 성장/발전에 따라서 사회적 교섭의 의제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편으로 맞는 말이다. 노동조합이 갖는 우리 사회에서 비중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주체로서 점점 더 많이 참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 시기 사회적 교섭이 전면화되는 이유는 주체들의 자신감 결여 때문이다. 조합원들의 투쟁력 자체가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단위노조 위원장이 동의하더라도 총파업이 제대로 이뤄지겠는가라며, 투쟁에 대한 자심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여의 과정이 지금 몇 년째 지속되고 있다. 98년도에도, 총파업이 직전에 가서 좌절되었는데, 그 이후에 총파업 결정과정에서 '연맹 지도부 - 단위노조 위원장 - 조합원' 이라는 '선언 - 실행 - 참여'하는 주체간의 괴리가 지속되어왔다. 결국은 투쟁으로 뭔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니까, 투쟁만 얘기할 게 아니라 민주노총 지위도 올라갔는데 교섭해서 뭐좀 따와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이를 발전의 측면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퇴조의 측면으로 이야기한다.
민주노조운동은 전투적이고 조직률이 11%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을 선도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왔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투쟁해서 임금을 올리면 가이드 라인처럼 되어서,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비슷하게 오르고, 생산직이 오르면 사무직도 저절로 올랐다. 이러면서 실제로 노동조합 조직률에 걸맞지 않게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평등세상 이루는 민주노조 운동이 그 역할이 어느 순간 막히기 시작했다. 가장 큰 게 비정규직 문제이다. 즉 계급대표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자, 정규직이 오를려면 비정규직이 많아져야 한다는 이런 공식이 성립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우리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민주노조 운동이 어느 순간부터 전략 자체가 가로막혀있다. 이런 정체화 측면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뭐냐면, 노조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태도가 노조 지도부가 '싸움을 하겠다'고 하고 '총파업을 선언'하고 하는 것보다, '뭔가 따내와라', '뭔가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따내와야 한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이 바로 이수호 집행부이다.

그런데 문제는 따올게 없다는 것이다. 불황기에 따올게 없다는 것이다. 호황이라, 경제가 잘 나가고 교섭해서 집행부가 뭘 따오면 혼란은 없다. 불황인데 싸움이 거세게 일어나고 투쟁이 일어나면 이런 혼란은 없다. 문제는 불황인데 즉, 경제가 어렵고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안되니까 엉망인 과정에서, 오히려 교섭에 의존하니까 혼란이 오고 있다. 혼란이라 하는데 개념의 혼란, 전략과 전술의 혼란도 아니다.

그러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스웨덴 마이드너-랜 모델, 남아공 네드락 모델을 폄하해선 안된다고 본다. 거기에는 어떤 사회적 기치가 녹아있다. 전자는 연대와 평등이라는 사민당의 기치가 녹아있다. 자본측이든, 정부측이든, 노동측이든 해결은 다르더라도 하나의 기치로 합의가 되었다. 그래서 뭔가 진전이 되는 것이다. 네드락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뭘 기치로 내걸 수 있고 어떤 기치가 서로 공유할 수 있는가? 가장 극단적인 예가 작년 상반기 이수호 집행부가, 파병반대를 말하면서 노무현 정권 물러나라고 아침에 얘기했던 사람들이, 저녁에 노사정대표자 회의에 참석해서 노무현 정권과 이야기하고 있다. 정신분열이 아니라, 거기에는 어떤 공동의 기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세계화? 반전도 아니었다. 사회적 합의라는 것은 공동이 소중히 세워야할 기치가 존재할 때 된다. 그리고 실제 되는 경우는 사민당이 정권을 잡거나, 사회가 그런 합의나 공동의 기치로 모아졌을 때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린 의미가 없다.
더더욱 민주노총이 사회연대적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반전/한반도평화통일도 들어가 있는데, 민주노총은 이를 일반화시켜서 우리 사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적대적인 노무현 정권과 무슨 합의가 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운동의 퇴보를 발전으로 오해하고 있는 아주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2. 사회적 교섭 (또는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서 반대한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노동조합을 사회주의 운동의 거점으로
- 과도적 요구, 과도강령을 통해 지도력의 위기를 돌파하자!


노동조합운동이 성장하면서 사회, 국가운영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과 자기 발언을 개진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혀가고 있다. 그간의 경험과 성과가 있기도 하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공기업 민영화 투쟁을 시작으로 공공성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민주노총이 참여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공식적인 위원회에서, 공공성 강화를 자기 의제로 삼고, 이제까지 싸워왔고 성과를 내어왔다. 이처럼 노사정위원회와는 무관하게 노동조합운동이 사회 여러 제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개입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지침의 문제는 일정하게 확보가 되어있다. 더 발전해야하지만, 공공성 강화가 중요한 화두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불황 때에도 된다. 네덜란드도 경제위기가 왔을 때 사회적 합의를 했다. 그러나 불황 때 교섭이 이루어지면 결과는 다 양보교섭이다. 노동자의 대폭적인 양보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양보교섭 가능했던 것은, 역적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이나 실업 등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대대에서 쇠파이프가 난무하지 않았는가!

대안은 무엇인가? 대중의 투쟁력이 높아지지 않은 가운데, 투쟁력에 기반해서 무엇인가 따내고 정권을 강제해서 무엇인가 따내는 것, 예를 들어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쟁취한다든지, 최저임금을 높여가지고 임금연대를 모색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는 안된다는 것이다. 투쟁력이 높다면 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뭔가 모색 중이고, 투쟁력으로 안 되니까 뭔가 해보자는 것이다.
남는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될 것 같다. ▼ 어떻게 현장투쟁력을 높여갈 것인가, ▼ 어떻게 노동조합운동에서 지도력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문제는 사회적 교섭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경제가 어렵고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중이 투쟁에 나서지 않는가?'이다. 대안을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하면 간단해진다.
현장투쟁력을 높여야 한다면, 불황기에 투쟁에 나서야 하는 절박한 필요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하는지 명확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노동자 주체의 입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가 좋다고 하고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의 전제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런 전제 하에서, 현장투쟁력의 강화, 지도력의 어려움을 해소할 있는 전망을 밝힐 수 있다.

소위 사회적 합의주의, 계급 타협에 기초한 사민주의가 왜 나쁜가? 스웨덴이 좋다면 좋게 말해야 하고, 노동자가 원하게 이해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스웨덴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얘기하긴 쉽다. 그게 무엇인가 얘기하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막힌다. 자본가의 대폭적 양보와 노동자의 수용, 둘이 타협해서 조금씩 양보해서 잘 나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가 어려운 이유는 사민주의 사회가 좋다고 해도 어떻게 갈 수 있는가가 막힌다는 것이다. 좋은 자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안은 노동조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문제이다.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어떻게 사회주의적으로 전취할 것인가?이다. 위기를 적극적으로 폭로해야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를 이해하고 원할 수 있도록 과도적 요구를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의제를 제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사회적 의제로 삼기 위해서 굳이 사회적 교섭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대중에게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싸움을 조직하는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의 정치의식을 끌어올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선택받는 지도력을 확보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대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사민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사회적 교섭이 아니라면, 사회주의 운동의 강화이고, 노동조합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의 거점으로 만들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 속에서 조직적으로 산별노조 등등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대안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를 설명하고,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가 정말 좋다고 여기게끔 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과 그것을 매개할 수 있는 투쟁, 과도적 요구와 과도 강령이 아니겠는가!
 


(1)

오늘2005-02-13   20:32:57 쪽글 삭제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하기 전에는 사회적 합의 뭐 이런게 가능하지가 않다면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했을 때 왜 사회적 합의를 합니까?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면 되죠.

좋은 자본가? 이 단어는 왜그리들 좋아하는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화 - 홍세화 vs 고종석, '사회연대'

 
"'불관용'마저 '관용'할 순 없다"
  '대화' <2> 홍세화 vs 고종석, '사회 연대' (상)
  2004-06-02 오후 1:42:07
  사회주의자 홍세화
  
  잘 알려져 있듯이 홍세화(57) <한겨레> 기획위원은 살아온 궤적이 남다르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조국을 등진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망명객 생활을 20년 이상 했다. 이 망명 생활 동안 그는 '삼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가난한 외국인에게 닥친 물질적 어려움이 겉으로 드러난 고통이었다면, 고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을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과 동포들의 외면과 따돌림은 속 깊은 상처로 남았다.
  
  이 '삼중의 고통'은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경기중.고, 서울대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는 한국사회에서 최상층에 속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다. 이런 그에게 프랑스에서의 긴 망명 생활은 스스로와 한국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계기가 됐다.
  
 그는 1995년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창비 펴냄)라는 다소 낭만적인 제목의 책으로 망명 15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삼중의 고통'을 온 몸으로 떠안는 삶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 이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그는 '똘레랑스(tolerance : 관용)'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던졌다. 그 후 그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의 빨간 신호등>(이상 한겨레신문사 펴냄) 등의 책을 통해 '똘레랑스'로 시작된 그의 목소리를 '공공성(공익)'에 대한 강조로 확장하고 있다.
  
  망명객이 꿈꾼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그의 존재가 한국 사회에 큰 복임은 틀림없다. 그는 2002년 2월 영구 귀국 후, 사생활을 희생하면서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주제들인 언론 개혁, 교육 개혁, 양심적 병역거부의 최전선에 항상 그가 있었다. <한겨레>의 칼럼니스트이자 기획위원, '학벌 없는 사회' 공동대표, 병역 거부자들과 지지자들의 모임인 '전쟁 없는 세상' 후원회장 등 그가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이 그 증거다.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소수가 혁명적인 생각을 갖는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더 혁명적"이라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그람시의 말에 동의한다. 그는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사회민주주의 개혁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믿는다. 그가 2002년 한겨레신문사 내에서 당적 보유 논란을 겪으면서도 민주노동당 당원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런 전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 고종석
  
  고종석(45)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자다. 역설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라고 내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좌ㆍ우 양쪽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어려운 '포지션'을 기꺼이 자청했고, 비교적 그 전략은 성공했다.
  
  한 문학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 ⓒ프레시안

  당대 가장 독특한 문장을 소유한 이로 꼽히기도 하는 그는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책을 낸 에세이스트이자 세 권의 작품을 낸 소설가이기도 하다.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펴냄),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펴냄), <언문세설>(열림원 펴냄), <국어의 풍경들>(문학과지성사 펴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펴냄)는 많은 인문주의자들의 애독서로 자리 잡았고, <기자들>(민음사 펴냄), <제망매>(문학동네 펴냄),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 펴냄) 등의 소설 역시 평단과 대중 양쪽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그는 최근 <엘리아의 제야>에 대한 <조선일보> 동인문학상 심사를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기자이다.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겨레신문>을 거쳐 1999년부터는 <한국일보>에 몸담고 있다. 그가 재직하던 당시 <한겨레신문> 문화면은 "가장 빛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21세기에 '희망의 원리'보다는 '책임의 원리'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윤리는 선에 대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다. 선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악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철저한 '휴머니스트'로 규정한다. 그가 "우리는 모두 이라크 인"이라고 주장할 때, 파병 반대 집회에 사람들이 적게 모이는 것에 마음 아파할 때, 그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만남
  
  띠 동갑인 홍세화 위원과 고종석 위원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1992년 고종석 위원이 언론인 연수를 프랑스에서 받으면서 처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고 위원이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더욱 사이가 긴밀해졌다. 고 위원은 프랑스에서 "홍세화 선배에게 기대 살았다"고 그 때를 회고했다. 그 때문에 고 위원의 소설에는 홍 위원을 짐작케 하는 인물이 등장해 독자들을 즐겁게 하곤 한다.
  
  이런 각별한 관계를 미리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불꽃 튀는 논쟁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다. '사회 연대'를 화두로 진행된 대화는 엇나가기보다는 한 목소리로 모아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우선 두 사람은 선거를 통한 정치적 변화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똬리를 틀고 있는 기득권 집단에 맞서 각 분야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언론 개혁, 교육 개혁, 빈부 격차의 심화에 대한 대응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런 개혁에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또 그 지지자들이 좀더 나서지 않는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개혁', '실용주의' 같은 말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때에 소모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개혁을 주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두 사람이 가장 큰 이견을 보인 것은 북한 체제의 개혁을 어떻게 이끌어 낼지에 대한 문제였다. 두 사람 다 공통적으로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 끼치는 미국의 해악에 대한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정부의 대미종속적인 외교ㆍ국방 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고 위원이 그것과 함께 북한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대한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과 달리, 홍 위원은 미국의 규정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의제기가 더 시급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후배 기자들 앞에서 다소 어색하게 시작된 대화는 금방 활기를 띠어 대담 장소의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4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프레시안

  대담 전문을 2회에 나누어 싣는다.
  
  "기자 정당 가입 자유로워야 언론 감시 가능"
  
  프레시안 : 최근에 홍세화 선생의 '똘레랑스'에 관한 기사가 <프레시안>에 실렸는데, 감정적인 댓글이 많았다. 홍세화 선생의 민주노동당 지지 활동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주로 노무현 지지자들인 것 같은데,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언론인의 정당 활동에 부정적이다.
  
  홍세화 : 나는 <프레시안>이나 <한겨레>나 일종의 견제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상황에서 진보정당은 견제 세력이지 주도 세력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과 민주노동당 지지를 밝히는 것은 좀 차원이 다른 문제일 것이다.
  
  고종석 : 그런데 홍 선배의 논리를 더 밀고 나가면 언론인이 주도 세력인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에도 가입할 수 있다.
  
  홍세화 : 물론 앞으로는 그렇게 돼야지. 이제 앞으로 기자들의 정당 가입 여부가 관심거리가 안 되는 상황이 올 것이다. 또 그렇게 (기자들의 정당 가입이) 자유로워야 오히려 언론에 대한 감시가 가능하다.
  
  프레시안 : 고종석 선생은 기자들의 당원 가입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 것 같다.
  
  고종석 : 사실 생각이 없다. 현재도 당적이 없고, 앞으로도 당적을 가질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원래 '당' 자체에 별로......
  
  홍세화 : (웃음) '당'이 일종의 '무리'잖아. 고 형은 '무리'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야.
  
  프레시안 : 그것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고종석 선생 말씀이 있다. 지난 목요일(5월20일)에 방송된 에서 고 선생은 "나는 한번도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적이 없었다"고 얘기했다.
  
  덧붙여 고 선생은 "인간이 선천적 측면이 더 지배적이냐, 후천적 측면이 더 지배적이냐. 선천적인 게 더 큰 것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면 위험하니까 후천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인상 깊게 들었다.
  
  홍세화 : 사실 맞는 말이지.
  
  "인간은 다른 존재 배제하려는 '저급한 속성' 가져, 끊임없는 성찰 필요"
  
 
  ⓒ프레시안

  프레시안 : 최근 한 강연에서 홍세화 선생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 "인간이 끊임없이 이성을 통한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기와 다른 존재를 배제하고 억누르려는 '저급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고 선생도 방금 언급한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제 인간은 '희망의 원리'보다는 '책임의 원리'를 강조해야 할 때"라며 "인간은 언제든지 추악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하면 덜 추악해질 수 있을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얘기는 사회생물학자나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고종석 : 나는 사회생물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우익 인종주의자들의 논리 체계의 유사성을 부각시켜 비난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을 합리화하게 된다.
  
  프레시안 :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진화심리학자들의 상당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그들도 홍 선생이나 고 선생의 주장처럼 '이성의 자기 성찰'을 중요하게 여긴다. 인간은 가만히 두면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제든 동물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성의 자기 성찰'과 제도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종석 : 물론 그런 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딱 그 논리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우익 인종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그 점을 우려해야 한다.
  
  프레시안 : 연관해서 교육의 효과에 대해서도 시각차가 있을 것 같다. 홍세화 선생의 경우 교육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굉장히 강조하시는데 고종석 선생은 생각이 좀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고종석 : 교육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도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을 거다. 홍 선배가 좀더 낙관적이다. 난 충분히 교육을 해야 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변화는 좀 덜하지 않나 생각한다. (웃음)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도 환경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 교육이나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킬 여지는 많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라면 국가보안법 폐지 앞장서야"
  
  프레시안 : 고종석 선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로 꼽힌다. 본인은 이런 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종석 : 남들이 다 그렇게 얘길 하는데, 내가 생각해봐도 자유주의자가 가장 적당한 것 같다.
  
  홍세화 : 한국에서는 '자유'라는 말이 아주 이상하게 쓰인다. '자유세계'처럼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오지 않았나. 자유의 이름으로 사실상 억압하는 시대였던 셈이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종석 :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독재정권이 주도해 성장을 해온 나라이다. '자유세계'라는 수사 뒤에 실제로 자유를 끔찍하게 억압하는 체제가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자유'가 오용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어서, 일본의 우익들도 자기들 사관을 '자유사관'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라면 국가보안법은 완전히 없애자고 얘기해야 한다. 대체 입법하는 식이 아니라 완전히 없애야 한다. 간첩죄는 형법으로 다 처벌이 가능하다. 송두율 선생도 국가보안법만 아니면 감옥에 가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집단에 기대 있거나 숨어 있는 '벌(閥)'을 잡아야"
  
 
  ⓒ프레시안

  프레시안 : 자유주의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에 대한 사회적 기반이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한번도 개인주의에 대해서 제대로 고민을 해본 경험이 없다.
  
  고종석 : 제대로 된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탓이다. '독립적이면서 연대하는 개인들'을 시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시민들이 사실상 부재했다. 프랑스나 영국은 왕의 목을 날려본 경험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국가나 집단에 자기를 동일시하게 됐고. 단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같은 독재자가 죽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말 '엉엉' 운 사실을 상기해보라.
  
  오늘 주제인 '사회 연대'는 상당히 프랑스적인 개념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프랑스 제 3공화정에 레옹 부르주아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온건좌파로 국회의원도 여러 번하고 나중에 총리도 했다. 그때 부르주아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제3의 길로 '연대주의'를 주창했었다.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제도를 매개로 사회를 통합해 나가는 방식.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가 생각한 집단과 개인 사이의 제3의 길인 '연대주의'다.
  
  프랑스인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서로 동화되지 않으며 힘을 합치기(se rassembler sans se ressembler)'라는 말이 있다. 이게 개인과 집단 사이의 연대와 통하는 것 같다.
  
  홍세화 : 개인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연대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우리의 경우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사촌쯤 되는 걸로 인식한다. 우리나라는, 이게 실상인지 허상인지 따져 봐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공동체ㆍ집단에 개인들을 끊임없이 동일시해 왔다. 이것을 국가, 민족 등의 개념을 통해 독재 권력과 같은 기득권 집단이 이용해왔고.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집단 속에 숨어있는 이기주의자'들만 양산됐다. '사회 연대'라는 부분이 빈 데서 생긴 결과이다.
  
  고종석 : 동의한다. 개인들은 이기적이고, 이 이기적인 개인들이 흉측한 집단으로 통합된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다.
  
  홍세화 : 집단에 기대 있거나 집단에 숨어 있는 '벌(閥)' 같은 것들. 이 '벌'을 잡아야 한다. 재벌, 학벌, 족벌, 파벌처럼 '벌' 속에 숨어서 '벌'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 이것을 개혁하지 않으면 결코 한국 사회의 개혁과 성숙을 모색할 수 없다.
  
  "자유주의 세력인 열린우리당은 '벌(閥)'을 얼마나 잡을까"
  
  프레시안 : 정치적으로는 스스로를 자유주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열린우리당이 의회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개혁은 정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소득격차의 심화, 교육문제, 언론개혁, 지역차별 등 자유로운 개인이 바로 서는 것과 사회 연대를 가로막는 많은 문제들이 산재한다.
  
  고종석 : 넓게 보면 열린우리당은 자유주의 세력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달하겠지만. 이들이 정말 자유주의 정치 세력인지는 홍 선배가 말했던 벌을 타파하는데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판별할 문제다.
  
  그러나 사회 연대라는 측면에서 열린우리당은 턱 없이 모자라는 정당이다. 열린우리당은 프랑스와 비교하자면 시라크를 정점으로 한 현재 프랑스 집권당인 우파 정당과 비슷한 이념적 스펙트럼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사회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실 이론적인 이념 체계라기보다 유럽 사민주의 정당의 정책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폭이 아주 넓다. 적어도 프랑스 사회당 정도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정책을 가지고 이어야 사회 연대를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 열린우리당에게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개인들을 각종 '벌'로부터 해방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는 있지 않을까?
  
  홍세화 : 열린우리당이 지'벌', 즉 지역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구닥다리 문'벌'에 반대해 호주제 등을 폐지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만큼 다른 '벌'들에도 단호한 모습을 보여줄지는 좀 두고 봐야겠다.
  
  특히 자유주의와 관련해 한국 사회의 재'벌'에서 '벌'적 성격을 뺄 수 있을 것이냐, 또 학'벌'에 반대할 수 있을 것이냐, 이게 굉장히 첨예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사회 연대가 필요한데, 열린우리당이 그런 세력은 못 되는 것 같다.
  
  고 형이 프랑스 우파와 열린우리당이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에 한편 동의하면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엔 공화주의 전통이 있었고 이게 우파에도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비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 연대를 주로 좌파 정당이 강조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꼭 연대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공화주의에는 '공익성'이 포함돼 있다. 한국에는 이런 공화주의가 제대로 정립돼 있지 못하다. 이 부분이라도 열린우리당이 제대로 해주길 바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선언만 있고 내용 없어"
  
  고종석 : 홍 선배가 말씀하신 공화주의를 열린우리당에서 기대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다. 공화주의는 시민혁명의 결과로 조금씩 쌓여온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민혁명의 전통이 없다. 거기다 우리는 미국을 추종하는데, 미국을 프랑스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미국이 공화주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종종 얘기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상징적인 것인데, 프랑스에서는 대통령이 선서를 헌법 앞에서 한다. 미국 사람들은 성경을 놓고 한다. 거기서부터 큰 차이를 드러낸다. 프랑스는 미국보다 훨씬 세속적, 비종교적이다. 종교가 사회생활에 침투하지 않는다.
  
  또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프랑스의 공화주의에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보다 사민주의적 자본주의의 가치가 더 많이 들어가 있다. 경제적 가치보다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고, 막연한 자유보다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유럽의 공화주의 정신을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홍 선배가 공화주의를 얘기하는 건 참 적절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만 있고, 선언의 내용을 채워 넣기 위한 노력이 지금까지는 없었다. 홍 선배가 얘기한 공화주의 정신, '공익성'에 대한 강조를 열린우리당과 같은 자유주의 정파나 민주노동당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홍세화 : 한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그 가치를 공유하고 다듬어나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헌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그런 규정을 통해서 과연 구성원들이 무슨 가치를 공유하고 있느냐, 참으로 참담하다. 나는 그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결국 공화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그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적인 이익이다. 공익성이 공화국의 출발 정신이다. 프랑스에서 흔히 얘기하는 공화주의는 바로 공익성에서 출발해 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이게 그들이 연대로 갈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이다.
  
  그건 마치 우리 조상이 홍익인간이라는 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상통한다. 가령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가치를 토대로 해서 정치를 제도화했다면 그 제도에는 분명 홍익인간이라는 정신이 살아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이상 적어도 그 어원에 담겨있는 정신은 같이 공유할 수 있도록 교육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공화국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오직 대통령을 뽑는 것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공화주의의 공익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종석 : 프랑스 사람들은 '통합되고 나뉠 수 없는' 공화국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 그 안에는 '벌'로 나누어 배제하는 게 아니라 다 끌어안는, 사회 연대라는 가치가 담겨져 있다.
  
  "앵똘레랑(불관용)마저 똘레랑(관용)할 순 없다"
  
  프레시안 : 똘레랑스는 홍세화 선생을 통해 한국에서 중요한 사회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잠시 얘기해보자.
  
  고종석 : 홍 선배가 유행어를 만들었다. (웃음) 볼테르가 했다는 유명한 말도. '난 네 견해를 반대한다. 그렇지만 네 견해 때문에 네가 탄압을 받는다면 네 편에 서겠다.'
  
  프레시안 : 홍세화 선생이 똘레랑스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프랑스 맥락에서 쓰이는 똘레랑스를 한국 사회에 그대로 대입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홍세화 : 프랑스에서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엥똘레랑스하다는 걸 반영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와 비교해보면 특히 그렇다. 네덜란드의 경우 동성애자의 결혼권이 인정되고, 연성 마약도 허용되고 있는데 프랑스는 금지돼 있다.
  
  프랑스가 과거에 너무 엥똘레랑스가 많았기 때문에 똘레랑스가 요구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도 대단히 엥똘레랑스한 사회기 때문에 똘레랑스를 얘기하는 것이다. 내가 똘레랑스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프레시안 : 고종석 선생은 똘레랑스에 대한 이견은 없나?
  
  고종석 : 전혀 없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똘레랑스라는 개념에는 앵똘레랑(intolreran : 불관용)을 똘레랑할 수 없다는 게 포함돼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 사회의 극우파, 스탈린 시기의 소련,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 크메르루즈 시기의 캄보디아, 이런 것에 대해선 결코 똘레랑해서는 안 된다. 안 되면 힘을 써서라도 제거해야지. (웃음)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북한이다. 북한은 현재 주석이 가장이고 나머지 인민들이 가족과 같은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어서 그 체제와 민중을 분리하기가 참 어렵다. 이런 북한 체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하기 어렵다. 물론 50여년동안 미국의 경제적 봉쇄를 겪고, 지금은 없지만 핵무기가 휴전선에 배치돼 있는 위협 속에서 정상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해도 용납할 수 없다.
  
  북한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이전 봉건 왕조 국가다. 물론 용천역 폭발 사고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계속해서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 역시 거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에 짓눌린 북한, 현재가 최선인가"
  
 
  ⓒ프레시안

  프레시안 : 그런 주장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같은 우파의 주장과 연결될 수 있다.
  
  고종석 : 나도 우파적 시각과 겹쳐 찜찜하다. 홍 선배는 어떤가?
  
  홍세화 : 글쎄...... 나는 지금 북한 체제에 대해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게 유효한가, 이런 의문이 든다. 나도 물론 북한 체제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고 형도 얘기했듯이 더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고종석 :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홍 선배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의 크기를 비교하자면 그게 훨씬 더 큰 문제다. 미국에 짓눌려 북한 체제가 뒤틀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뒤틀린 정도와 형상이 저렇게 추해도 되는가, 그 상황에서 과연 저런 모습이 최선이었는지 안타깝다.
  
  홍세화 : 그건 역사적 맥락과 관련이 있다. 북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민 혁명을 거치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은 조선시대까지는 정말 변방이었다. 그들은 반상구분에 따르면 '상놈'이었다. 반란도 항상 그 지역에서 일어났고, 또 항상 실패했다. 늘 객체였는데 비로소 주체 대접을 해 주는 권력이 들어섰다. 그게 북한 인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수세기에 걸쳐 처음으로 자기들이 주인인 사회를 만든 것이다.
  
  고종석 : 초기 북한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현재 북한 인민은 동질적이지 않다. 그 안에도 공산주의 하에 노멘클라투라(관료)처럼 특권층이 있을 것이다. 또 평양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인민들과 그렇지 못한 인민들이 있다.
  
  홍세화 : 나는 현재 그런 체제를 강요한 것에도 미국에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고리는 역시 미국이다. 북한이 '악의 축'이 아니라, 미국이야말로 항상 악의 축이 필요한 국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북미관계에 남북관계를 종속시키고 있는 점에서 참여정부가 김대중 정부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북핵문제가 북미 간 문제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런 미국이 만든 판에 묶여 있으니...
  
  고종석 : 미국이 이라크에서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후세인 정권을 우리가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라크 전쟁의 동기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서 미국을 비판해야 하지만 그것이 후세인 정권에 대한 동정으로 가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둘 다 사이좋은 동업자 사이였는데, 힘센 쪽에서 배신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 아닌가?
  
  홍세화 : 그 부분은 좀더 정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과연 한반도 평화를 바랄까?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현재 남한은 북한보다 여러모로 우위에 있다. 남한이 이렇게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쥐고 있을 때 북한의 인권 문제나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해야 할 것이냐, 이것은 굉장히 고민되는 부분이다.
  
  고종석 : 나도 그런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까 나왔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그런 맥락 속에 배치돼 버리는 게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 자체가 굉장히 비정상적이고 조금이라도 교정해야 할 체제인 것은 사실이다. 홍 선배 말대로 미국이 평화를 원하지는 않겠지만 한반도 자체가 미국의 영향권 하에 드는 통일을 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평화적으로 안 되면 무력으로라도 말이다.
  
  홍세화 : 그 지점에서는 생각이 다르다. 한반도의 긴장이 지속될수록 미국 자본의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나?
  
  통일된 한반도를 미국이 자신의 영향권하에 두고 싶을 때는 중국에 대한 견제가 노골화된 뒤일 것이다. 지금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골화하지 않은 채 북한에 대한 견제를 빌미로 일본을 끌어들일 수 있고, 또 일본과 남한에 MD를 팔아먹을 수 있다.
  
  "미국-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가 최선"
  
  프레시안 : 우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미국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중국, 일본과 함께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미국 헤게모니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고종석 선생은 비관적으로 보는 것 같다. 홍세화 선생도 결코 쉽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설사 미국 헤게모니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중국과 일본의 팽창적 민족주의에 저항해야 할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고종석 : 이건 국제문제 전문가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인데. (웃음)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비록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통일 자체가 미국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지난한 과정이 될 수도 있고.
  
  또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가 문제가 될 텐데, 특히 향후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 중국과의 관계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그게 그 나라가 가진 속성이든, 큰 나라의 속성이든 미국보다 우리나라에게 좀더 친절할 거라는 확신은 없다. 통일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지금 미국과의 관계보다 더 좋을 것 같지 않다.
  
  프레시안 : 현재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에서 두 사람이 미국을 보는 시각은 사뭇 다르다. 허동현 교수는 "우리나라가 미국 헤게모니 밑에 있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박노자 교수는 이에 반대해 미국 헤게모니에 벗어나야 할 당위를 얘기했고.
  
  고종석 : 물론 우리가 미국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우리나라에게 결코 친절한 친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과거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종속 관계'가 아니라 '동아시아 외교 질서'라고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중국도 그렇게 생각할까? 중국이 우리나라를 보는 시각은 과거 속국이라고 보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이자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중국의 힘을 빌려서 미국의 힘을 견제하는 그런 방법 말이다. 장기적으로 국민국가가 해체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홍세화 : 결국 기본적인 출발점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갈등의 정점에 분단국인 우리나라가 위치해 있다는 것일 테다. 대륙 세력은 러시아와 중국이 되겠고, 해양 세력이 미국과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반도국이 갖고 있는 일종의 운명이다.
  
  과거 유일한 강대국이었던 중국에 편입돼 있었던 것이, 해양 세력이 강해지면서 결국 갈등의 장소가 됐고 이것이 가장 나쁜 상태로 균형을 이루면서 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반도국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최근의 6자 회담도 결국 이런 한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또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거기다 현재는 일본이 사실상 미국의 강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가 강대국 사이에서 능동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겠다. 방금 고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양대 세력 사이에서 긴장 관계를 가지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아까 잠시 얘기가 나왔지만, 참여정부의 외교ㆍ국방 정책은 그런 점에서 크게 미흡하다.
  
  "이라크전도 북핵위기도 모두 미국 문제"
  
  홍세화 : 그렇다. 특히 나는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 미국이 큰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절실하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식을 바탕에 깔고 지금이야말로 기존의 외교ㆍ국방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모색해야 할 때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외교ㆍ국방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체가 미국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이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 세력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과연 이런 외교ㆍ국방의 변화에 대한 긴장감 없이 말해지는 '동북아 번영' 이런 얘기가 얼마나 내실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현재 남북 교역은 북핵 문제의 원활한 해결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현재 노무현 대통령 등은 '북핵 위기'라는 미국의 입장에서 나온 얘기를 그대로 믿고 있다. '북핵 위기'라는 말이 과연 온당한 말인가? '북핵 위기'가 어떻게 증폭됐는지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북한의 문제라기보다는 미국의 문제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마치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스라엘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듯이, 북핵 문제 역시 미국에 입장에서 세계 언론에 유포되는 균형 감각이 없는 얘기들만이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식의 주장들에 국내 언론들도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또 한국 사람들도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종석 : 리영희 선생이 1970년대에 이미 '베트남 문제가 아니라 미국 문제로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라크 문제도 사실은 미국 문제이고, 북한 문제도 결국 미국 문제라는 얘기에 동의한다.
  
  홍세화 :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오는 한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남북관계를 북핵 문제란 북미관계에 종속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관계를 동북아 평화체제의 관점에서 보면서 자신 있게 밀고 나갈 때, 그것이 북미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그 속에서 북한 체제의 변화를 얘기할 여지도 생길 것이다.
  
  "미국은 유일하게 문화ㆍ역사적 우위 없는 제국"
  
  고종석 : 미국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게 여전히 중요한 것 같다. 최근에 한 외신에서 '이라크 포로 학대'에 관한 특집을 봤다. 기자가 이번에 포로를 학대한 잉글랜드 일병의 고향을 찾아갔다. 물론 잉글랜드 일병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수 주민들은 "잉글랜드는 소풍간 게 아니라 싸우러 간 것이다. 이라크도 테러로 우리 시민들 수천명을 죽이지 않았느냐", 이렇게 얘기하더라.
  
  놀랍게도 9ㆍ11 테러에 이라크가 연루돼 있다고 믿는 미국 시민들이 많다.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진실을 미국인들만 모른다. 여기에는 미국의 자본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언론 탓도 크겠지만. 미국 유권자들의 이런 현실은 참담하다.
  
  홍세화 : 고 형이 좋은 지적을 했다. 한 프랑스 지식인이 "지구의 미래가 어둡다"는 얘기를 했다. 미국 얘기를 한 것이다.
  
  그는 미국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제국과는 큰 차별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누구한테도 견제당하지 않는 '전일적인 패권'을 가지고 있다. 또 전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지적은 매우 흥미로운데, 지금까지 존재했던 제국들은 정치, 경제, 군사적 우위와 함께 문화, 역사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에는 바로 이 문화, 역사적인 우위가 없다. 이것이 부시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이유일 테고, 고 선생이 지적한 미국 사람의 현 상황에 대한 인식 수준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국제법도 유명무실해졌고, 국제연합(UN)의 권위도 사실상 사라졌다. 이제 미국을 좀더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 최근 이라크 파병 문제도 그렇고. 좀더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고종석 : 한 가지 덧붙여 얘기할 게 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전후 변화가 매우 궁금하다.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너무 달라지지 않았느냐?
  
  이 양반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던 것인지, 당선된 후에 달라진 것인지... 이것은 혼자 해본 생각인데 미국을 방문해 '오버'할 때는 끔찍한 압력을 받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 게 아니고서는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줄 거면 주는 사람답게 당당하게 처신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국내 정치에서 당당한 모습과 너무 차이가 나서 기이했다. 홍 선배는 그런 생각은 좀 해봤나?
  
  홍세화 : 나도 미국에 대한 인식, 노사 관계 이런 면에서 왜 그렇게 쉽게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지역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완고한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타 사안에 대해서 매우 피상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노사관계만 해도 사회구조적인 고민을 하기보다 인권변호사 활동하던 시절에 시혜적인 자세, 이렇게만 생각했고. 그것이 막상 대통령이 되자 편리한 방향으로 합리화됐고. 안타깝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고종석 : 그를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피상적 인식'이라는 말을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웃음) 혹시 육체적 공포를 느낄 정도로 미국이 강한 위협을 가한 게 아니겠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 복권 후 또 총선 후 열린우리당은 실용주의를 얘기한다. 이게 홍세화 선생이 앞에서 지적한 '피상적 인식'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세화 : 나는 잘 모르겠다. 구체적인 어떤 정책이나 이런 것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야 하는데, 말만 무성하다. 말로 실용주의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미리 몸조심하는 수준에서 내놓는 면피용 아닐까? 잘 모르겠다. 내용이 있어야지.
  
  고종석 : 동감이다. 이제 개혁이란 말은 좀 안 들어도 좋다. 대신 국가보안법 폐지 할 건가, 말 건가, 이런 식으로 아주 구체적인 정책으로 얘기 했으면 좋겠다. 사법개혁도 말하지만 말고 구체적으로 뭘 할 건지, 그런 얘기를 듣고 싶다. 하는 일마다 개혁을 표방하는데 구체적 행동은 없고, 실제로 개혁되는 것이 없으니, 개혁이 이제 지겹다. '개혁 피로감'이란 말도 생기지 않았나.
  
  "뒤집힌 거 바로 잡을 때에 '김혁규 논쟁' 해야 하다니..."
  
 
  ⓒ프레시안


  홍세화 : '피상적 인식', 이런 말을 들으면 노무현 지지자들이 또 섭섭해 할 텐데. 갑갑하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는 일도 있다. 어제(5월21일) 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를 선고했다. 이것은 대단한 진전이라고 본다. 앞으로도 계속 싸움을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희망을 보여주는 일 때문에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고종석 : 앞으로 상급 법원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홍세화 : 그런 점에서 나는 노무현 지지자들한테 정말로 궁금한 게 있다. 이제 열린우리당이 의회 권력을 장악했다. 지금이야말로 참여정부가 진짜 개혁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을 때다. 그런데 왜 개혁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주저하나? 또 노무현 지지자들은 왜 그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안 하나?
  
  고종석 : 아직 17개 국회가 개원도 안 했다. 좀더 두고 보자.
  
  홍세화 : 고작 얘기되는 게 언론개혁이다. 이제 충분히 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는데 열린우리당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안 보인다. 또 처음부터 지지자들이 적극적으로 견인하는 모습을 보여야 국회의원들도 좀더 긴장을 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렇게 위태위태한데 그들은 왜 문제제기를 안 하는가? 나는 이렇게 신뢰가 안 가는데. 내가 노무현 지지자가 아니라서, 그들에게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걸까?
  
  프레시안 : 요즘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김혁규 총리 지명'이 큰 논란거리다.
  
  홍세화 : 그런 게 개혁 세력의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아직 우리나라에 아까 말했던 공화주의, 공익성이 부재한 탓이다. 나는 일제 부역 세력을 정리하지 못한 채, 민족을 배반한 그들이 다시 지배 세력이 된 데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그 때문에 사익 추구 집단이 지배세력이 됐고, 그 뒤로 모든 공적 행위가 공익성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사익 추구 행위로 변질됐다. 지금은 바로 그 뒤집어 입은 옷을 바로 입을 수 있는 중요한 때이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고작 그런 논란을 벌이고 있다니......
  
  고종석 : 나는 도무지 김혁규 씨를 총리로 지명하는 노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그래 일 잘할 수 있다는 거 인정하자. 선거를 위해서 영남 출신을 총리로 지명해야 한다는 정치공학적 사고도 인정하자. 그런데 왜 굳이 한나라당에서 온 사람한테 이 개혁 시기에 총리를 맡겨야 하나? 다른 영남 출신 중에도 총리를 시킬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텐데. 왜 한나라당 사람을 총리를 만들어야 하는 건지.
  
  홍세화 : 그런 게 실용주의 아닌가. (웃음) 나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식 수준이 차이가 나는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능력이라는 게 뭔가? 김혁규 씨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하더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능력이 아니지 않는가?
  
  고종석 : 반세기 만에 역사적 전환기라는 얘기도 들리고, 열린우리당이 의회 권력도 장악했는데, 요즘 노 대통령의 스타일을 보면서 또 한번 마음이 뒤숭숭하다. 당선 후 계속 실망스럽고 그렇다.
  
  프레시안 : 고종석 선생은 끊임없이 노 대통령에게 실망하고 있는 것 같다. (웃음)
  
  고종석 : 맞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어느 정당에서도 자유로운 것 같다. 민주노동당이 의미 있는 정당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 있는 많은 분파들 중에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원칙주의자들도 많은 것 같고.
  
  홍세화 : 들어와서 바꾸면 되지. 감당하기 어렵다고 불평만 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시민의식이 부족한 거야. (웃음)
  
  "패권적 지역주의, 저항적 지역주의, 덩달아 지역주의"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문제에 아주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역시 지역주의 타파를 얘기하면서 지역주의를 이용한 측면이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지역문제, 지역차별의 문제는 아주 뿌리 깊다. 지역주의라는 게 사실 시민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지배 카르텔이 쳐놓은 망에 포섭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말이다.
  
  고종석 : 경제적, 정치적 이익은 아닐 수 있어도 정서적, 감정적 이익은 있을 수 있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어서 지역주의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자신이 없다. (웃음)
  
  나는 일단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민주당 분당 과정은 크게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열린우리당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논리는 민주당은 지역당, 구체적으로 호남당이어서 앞으로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남 의석을 얻기 위해서 호남 의석을 버리는 것, 이것은 기존에 한나라당이 했던 '영남 지역주의'로 가자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도 실패한 전략으로 드러났다.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많은 표를 얻었는가? 결코 아니다. 또 설사 이런 전략으로 열린우리당이 영남 표를 많이 얻을 수 있었더라도 이것은 명백히 지역주의에 굴복한 것이다.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덕분에 약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비율이 너무 낮아서 혜택을 받았다고 하기가 민망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하고 싶다. 영남 유권자 상당수가 지역구는 한나라당을 찍고 비례대표는 민주노동당을 찍었다. 이것은 절대 민주노동당의 지지표가 아니다. 제 정신이 아니라면 그런 투표 성향을 보일 수 있겠나. 이게 과연 민주노동당 지지인가? 대단히 회의적이다.
  
  홍세화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나라당에 간 지역구 표야말로 영남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지역주의 산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도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은 거의 1% 내외의 지지율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고 형은 영남의 민주노동당 표가 단순히 열린우리당을 반대하기 위한 표라는 걸 지적한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남 유권자들이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얘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고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고종석 : 프랑스에서 사회당에 한 표 주고 르펭의 인민전선(FN)에 한 표 주는 투표가 제 정신인가?
  
  홍세화 : (웃음) 그건 프랑스의 예이고 우리나라와 전혀 다르다.
  
  일단 민주당이 궤멸한 것은 지역주의의 성격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세 개가 있다. 우선 영남의 가장 강고한 '패권적 지역주의'가 있다. 이것의 어떤 부류는 구제불능 수준이다. 두 번째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가 있다. 이것은 마치 민족주의가 팽창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가 있는 것처럼 저항적 성격이 있다. 호남의 그것은 당연히 독재 정권 하에서 저항적 지역주의가 가진 상대적인 건강성을 가졌다. 이런 호남의 지역주의와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
  
  이 둘보다 훨씬 그 강고성이 약한 충청도의 '덩달아 지역주의'가 있다. 이것이 지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였는데, 이번에 행정수도 이전 등이 맞물리면서 선거 결과 사실상 해소됐다. 그럼 민주당이 왜 이렇게 궤멸됐느냐, 그것은 민주당이 저항성을 갖고 있던 호남 지역주의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공조한 탄핵은 패권적 지역주의와 순방향이다. 이것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와는 완전히 역방향이기 때문에 결국 그 저항성을 스스로 배반한 결과가 된 셈이다. 그리고 그 공백을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고종석 :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선거 전략은 호남에서 표를 안 얻는 게 선거 전략이었다. 이 쪽에서 얻으면 영남에서 깎이니까. 영남 인구가 많으니 호남 표가 필요 없었다. 나는 이런 호남 배제 전략을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이 썼다는 게 정말 실망스러웠다.
  
  정치적 지역주의는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시작됐다고 본다. 그것이 뚜렷하게 그 모습을 띠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1980년 5월 광주 학살이었고. 그래 좋다.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제조건이 있다. 최소한 영남 유권자들이 전두환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서 제거를 해줘야 하지 않느냐. 그런 학살과 연루된 사람들이 들어간 한나라당은 정서적으로, 윤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화해는 가해자 쪽에서 용서를 빌 때 시작되는데, 최소한 영남 유권자들이 그런 사람들은 정치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그 때 우파정당이라고 하더라도 반공화주의 세력은 아니구나, 이런 안심이 들고. 그런 수준이 돼야 한나라당 후보가 호남에 와서 지지를 호소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권자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을 공천하는 한나라당 지도부도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내가 전라도 출신으로 말하기 어려운 얘기긴 하지만, 한나라당이나 영남 유권자들은 호남 몰표 이게 뭐냐, 너희들 먼저 열어라, 이런 말할 자격은 없다고 본다.
  
  물론 민주당이 탄핵으로 용서할 수 없는 정당이 되면서 나는 내심 호남 유권자들의 반 정도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거의 다 열린우리당으로 갔는데 이게 바로 호남 유권자들의 한계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호남 유권자들한테 왜 너희들은 한나라당 안 찍었느냐,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 얻은 지지율이 더 높다, 이런 식의 반론은 사태를 왜곡해 보는 것이다.
  
  홍세화 : 나는 다시 한번 민주노동당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개혁이니 뭐니 이런 얘길 하면서도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변질되고 왜곡 되는 데에는 그것을 떠드는 사람들이 왼쪽 날개가 아니라는 데 있다. 흔히 얘기되듯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지금까지는 왼쪽 날개가 없었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것이 움틀 몸통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날개라는 게 몸통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몸통이 없으니 당연히 내가 말했던 공익성 같은 게 있을 턱이 없고. 이제 몇 번의 유산 끝에 막 아기가 태어나려고 한다. 이제 겨우 왼쪽 날개가 움트는 순간이다. 고 형도 감당 못 한다, 이런 얘기만 하지 말고 민주노동당에 들어와라. (웃음)
  
  고종석 : 홍 선배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노력해보겠다. 어쨌든 민주노동당 원내진출은 역사적이다. 진짜 잘해야 할 텐데. 기대는 하면서 계속 지켜볼 것이다. 4년 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이 얻기를 바란다.
  
  "비례대표제 확대, 국민 대표성 실현 문제"
  
  홍세화 : 아까 고 형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이익을 봤다고 하던데, 지지율 13%에 10석이면 대표성이 왜곡돼도 너무 왜곡된 거다.
  
  고종석 : 맞다. 열린우리당이 해야 할 일인데 과연 해줄지 의문이다. 사실 열린우리당도 40%도 안 되는 지지율로 과반수를 얻은 셈이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다 현 선거제도의 수혜자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싸우고 밖에서 여론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열린우리당 지지자도 정당명부 비례대표 확대에 동참하는 것이 이익이다. 거창하게 나라를 위한다, 이런 얘기 할 것도 없이 열린우리당을 위해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확대되면 한나라당을 위축시키고 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늘어나는 효과가 생길 수 있다.
  
  홍세화 : 한나라당의 박세일 씨가 처음 정치개혁협의회에서 비례대표 의석을 100석 제안했지 않느냐. 그런 수준으로 열린우리당이 개혁을 추진할지 한번 지켜보겠다. 바로 그런 게 열린우리당이 추구하는 게 개혁인지 아닌지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물론 또 그 때가 되면 열린우리당은 그것은 다른 사안에 비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말이다. (웃음)
  
  고종석 : 한번 기대를 해 보자. (웃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국민 대표성이 얼마나 실현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여러 가지 개혁 과제가 있겠지만 가장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언론개혁일 것이다. 이것은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얘기할 '사회 연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학벌ㆍ족벌ㆍ파벌, '벌(閥)'을 해체하라"
  '대화' <2> 홍세화 vs 고종석, '사회 연대' (하)
  2004-06-05 오전 9:04:27
  사회주의자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과 자유주의자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
  
  10여 년간 지인(知人)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두 사람의 대담은 정치적 민주화는 확장됐지만 빈부 격차 등 사회ㆍ경제적 민주화는 오히려 축소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 연대'라는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답을 찾는 것으로 모아졌다.
  
  앞서 두 사람은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 사회는 각종 집단주의가 독재정권에 의해 정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는 과정을 거쳐, 그 결과 '집단 속에 숨어있는 이기주의자'들을 양산했다고 입을 모았다.
  
  외부로부터 이식된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재벌, 학벌, 족벌, 파벌 등 집단에 기대 있거나 집단에 숨어 있는 '벌(閥)'을 해체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사회 연대'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이번 4월 총선을 통해 의회 권력이 보수 우익 세력에서 자유주의 정당이라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으로 넘어간 것에 일정 정도 의미를 부여했다. 단 열린우리당이 진정한 자유주의 세력이라면 '벌'을 타파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특히 이들은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지금이야말로 노무현 정부가 개혁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는데, 정작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개혁에 나서는 것에 주저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두 사람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개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시간 동안 진행됐던 두 사람의 대담 뒷 부분에서는 언론 개혁, 교육 개혁 등 구체적인 개혁 과제와 관련된 얘기가 주로 오갔다.
  
ⓒ프레시안

  다음은 대담 뒷 부분.
  
  "상층 부르주아로 포섭된 기자들"
  
  프레시안 : 여러 가지 개혁 과제가 있겠지만 가장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언론 개혁일 것이다. 이것은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얘기할 '사회 연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언론 개혁이 말해진 지는 굉장히 오래됐는데 가시적인 성과는 여전히 안 보이는 것 같다. 언론 개혁을 추진하는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이 존재하고.
  
  고종석 :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언론 개혁이) 될 것처럼 얘기하는데 별로 기대는 안 갖고 있다. 신기남 의장이 구상하고 있는 상위 몇 개 신문사의 시장 점유율을 제한해 현재의 왜곡된 시장 구도에 변화를 가하는 식의 제도적 조치들이 이뤄진다 해도 여론시장을 바꾸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과점 언론들 즉 조중동 논조가 왜 그렇게 보수적이냐. 사주들이 정말 친자본적이고 수구적인 사람이라서 그럴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기자 개개인이 부르주아가 됐다. 그전까지는 기자들 월급이 한국 사회 평균이거나 더 아래였다. 그래서 아래에서 한국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 등은 월급쟁이가 받는 최고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이미 '결단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상층부에 기자들이 들어간 것이다. 편집권 독립을 얘기하는데, 기자들이 편집장을 뽑는다고 좀 다른 논조를 주장하는 편집장이 뽑힐까? 데스크 눈치 보지 말고 마음대로 기사를 쓰라고 하면 기자들의 논조가 바뀔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층 부르주아에 포섭됐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홍세화 : 고 형이 잘 지적했다. 프랑스 <르몽드> 기자들의 평균 봉급은 2만4천프랑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월 5백만원, 연봉 6천만원 정도다.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을 감안하면 거칠게 환산할 때 한 연봉 3천만원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와 비교해볼 때 조중동이나 방송사의 임금 수준은 너무 높다.
  
  고종석 : 이미 기자 개개인이 부르주아화한 현실에서 언론 개혁이 쉽지 않을 것이다. 방송만 해도 그렇다. MBC는 노조가 잘 떠받들어줘서 사장이 바뀌어도 개혁적인 논조다. 개혁적 사장이 간 KBS보다 더 개혁적이다. 하지만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우익잡지인 <한국논단>에서 사상 검증할 때 방송 3사가 다 생중계했다. 이게 1996년, 고작 8년 전 일이다. 정치적 성황이 달라지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한겨레>가 창간된 지 16년이 넘었다. 물론 <한겨레>가 사회를 이만큼 바꾸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나도 그 신문사에서 한 때 월급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겨레>가 시장점유율에서 조중동을 뛰어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자본력에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한겨레>에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들어가면 <한겨레>의 성격이나 기자들의 성향이 변할 게 뻔한다. 아무래도 기자는 좀 가난해야 할 것 같다. 너무 가난해서는 안 되지만...... 여론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회가 너무 안락해서 '이대로 살아도 괜찮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다. 기자들은 약간 부족한 상태가 좋은데...... 이런 걸 법으로 못 만드나. (웃음)
  
  '조선일보 품질이 좋다'는 건 '한나라당 품질 좋은 정당' 격
  
  프레시안 : (웃음) 자유주의자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최근에 민주노동당 노회찬 총장이 <조선일보> 기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 논란이 됐다.
  
  고종석 : 민주노동당 노회찬 총장이 <조선일보>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강연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데, 일부 언론에서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홍세화 : 노회찬 씨한테 노무현 지지자들이 엉겨 붙어서.......
  
  고종석 :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노조가 초청해서 간 게 무슨 잘못이냐', 이런 식의 해명은 사태를 잘못 보고 있거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에서 일하면서 노조 가입자라고 생각이 다를까. 너무 계급 환원적인가? 물론 나는 지식인이고 계급을 초월해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걸 감안한다면 노 총장이 '<조선일보> 노조 초청' 핑계를 대는 것은 찝찝하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노회찬 총장을 비판하기 전에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조선일보> 인터뷰 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열린우리당 인사들에게는 그런 기준을 적용 못 하나?
  
  홍세화 :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아쉬운 게 바로 그런 부족한 균형 감각이다. '안티조선'이란 대의에서 출발했다면 그런 부분을 짚어줘야 한다.
  
  나는 노회찬 총장 사건과 관련해서 딱 한 마디만 하겠다. 나는 '<조선일보>가 품질이 좋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한겨레>에 몸을 담고 있어서 때문은 아니다. 그런 노회찬 씨의 말은 내가 민주노동당에 있는 노회찬 씨에게 '한나라당이 품질 좋은 정당'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얘기다.
  
  고종석 : 노회찬 씨가 잠을 못 이루겠다. (웃음)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신문사에서도 <조선일보>는 안 본다. 그래서 품질이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겠다. 내 경험 공간에 <조선일보>가 없기 때문에 관심 끄고 산다.
  
  "언론 개혁, 결국 국민 의식 문제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홍세화 선생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없나?
  
  홍세화 : 고 형은 주로 기자들의 부르주아화에 주안점을 뒀다. 물론 중요한 부분이다. 조중동은 철저한 사익추구 집단이다. 그들이 가진 자본의 극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를 위해 언론 권력도 활용하는 것이다. 신문을 아주 성실하고 철저하게 자본의 극대화를 위한 무기로 사용한다. 그런 게 '편집이 좋다', 이런 걸로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이냐, 제도화를 통해서 뭐가 가능할까? 그 폭은 아주 좁디좁다. 물론 좁은 폭이라도 제도적 개선은 꼭 필요하다.
  
  결국은 국민들 의식의 문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프랑스에서 '국민의 신문' <한겨레신문>이 뜬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 정말 소통이 되고 올바른 여론이 만들어지겠다'는 기대를 가졌다.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 않다. 신문이나 언론이 (국민 의식을) 따라오는 것이지 언론만으로 변화가 가능한 게 아니다. 조중동은 특히 더욱더 그렇다. 언론 개혁도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 : 신문 자체의 영향력이야 점점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 신문에서 인터넷 매체로 간다고 해서 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거대 자본이 인터넷 매체에 뛰어들지 않고 있지만, <조선일보> 자체의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조선일보> 자본이 인터넷 매체와 방송에 진입할 수도 있다.
  
  어려운 얘긴지만 언론 개혁은 작고 날렵한 게릴라 언론, 풀뿌리 언론, 이런 것들이 아주 많이 만들어질 때, 결국 인터넷 매체 형태가 되겠지만, 이런 매체가 여러 가지 분야에 포진해서 각개 약진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희망은 인터넷 매체에 있다.
  
  한 가지, 과점 신문에 바라는 건 악의적인 오보를 안 하는 것이다. '기자적 양심'에서 거짓말을 쓰지 않는 것 정도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약자의 시각에서 봐라', '네 계급을 버리고 존재 이전을 해라', 이건 어려운 얘기이다. 미디어가 사회를 선도하는 건 여론 투쟁인데, 연대가 독립적 개인들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이듯 작은 언론들, 자본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언론들이 많이 생겨서 덩치는 안 되니까 수로 에워싸면서 싸우는 게 필요하다.
  
  홍세화 : 그런 면에서 독립 언론, 인터넷 신문, 비주류 신문, 공영방송의 노조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더라도 연대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게 참 힘들다. 경쟁대상끼리는 극복대상 앞에서 서로 차이가 있더라도 연대를 해야 한다. 이게 바로 기본 원칙이다.
  
  "우리는 모두 이라크인이다"
  
 
  ⓒ프레시안

  고종석 : 생물체로서 감각 기관에 한계가 있으니까 멀리 있는 것은 잘 안 보이는 법이다. 탄핵 정국에 수만명이 모여 광화문 촛불 시위하는 등 대처를 잘 했다. 요새 며칠 사이에 이라크 전쟁 반대 촛불시위를 했다. 오늘도 촛불 시위를 하는데 얼마나 모일지 걱정이다.
  
  전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우리는 '다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얘기다. '우리는 모두 이라크인이다'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연대의 감수성이 인류 바깥으로 못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난 철저한 '휴머니스트'이다. 그런 면에서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에 얼른 동감이 안 간다. 인간들 사이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데....... (웃음) 소말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에 억압받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그들에게 연민과 연대를 하기 위해 자기 감각을 열어놓으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다. 이라크도 문제지만 팔레스타인도 심각한 문제이다. 일제 시대 때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팔레스타인이 처해 있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미국 아닌가? 이스라엘, 영국, 일본은 사실 미국의 한 주나 다름없는 나라로 전락했다.
  
  프레시안 : 그런 면에서 언론에 불만이 많을 것 같다.
  
  고종석 : 프랑스 <르몽드>를 보면 바깥 문제, 특히 제3세계를 다룬 기사가 1면에 실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우리 신문은 국제 소식이 크게 다뤄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라크 포로 학대' 문제를 <프레시안>에서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잘한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문제를 <프레시안>에서 처음 보고, <르몽드> 등을 들어가 봤더니 다들 난리더라. 근데 한국은 조용했다. 한국 신문이 그 문제를 도배할 때까지 한 2~3일이 걸렸다. 우리는 다 그리스인이고 이라크 인이다. 인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물론 자연에도 관심을 가지면 더 좋겠지만......
  
  홍세화 : 휴머니스트이니까 더욱더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고 형도 말로는 그렇지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 형 지적대로 한국 언론, 특히 공영 방송이 내놓는 외국 뉴스는 전부 토픽이다. 그걸 보고 참담했다.
  
  방금 '우린 모두 그리스인이다, 이라크인이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 사람은 그 부분에 있어서 한 가지는 돼 있다. 바로 '우리는 모두 미국인' 이런 식으로. 이라크인이나 그리스인은 못 될지언정 미국인은 다 돼 있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미국의 홍수, 정전 사태도 마치 한국의 일처럼 크게 다룬다.
  
  고종석 : 내 표현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다. 주를 붙여야겠다. '그리스를 미국으로 대치할 수는 없다' 이렇게. (웃음)
  
  홍세화 : 지난 9.11 테러 당시 장 마리 콜롱바니 <르몽드> 사장이 '우리는 바로 미국인이다'라고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내가 칼럼에서 '우리는 뉴욕 사람일 수는 있지만 미국인이고 싶지는 않다'고 썼다.
  
  고종석 : 한국 사람들은 미국인 한 사람의 무게와 제3세계 한 사람의 무게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결국은 아주 정확하게 에너지 소비량과 맞먹는다. 나이지리아 한 사람이 미국 사람 한 사람의 150분의 1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나이지리아 사람 1백50명과 미국 한 명이 동일한 비중, 심지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서울대 개혁, 우선 정원이라도 줄였으면"
  
  홍세화 : 아까 결국 의식이 문제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있는 것은 교육 개혁이다.
  
  고종석 : 홍 선배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오라면 기꺼이 가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홍 선배 전략은 그람시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겠다. '헤게모니를 쟁취하자.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더 많은 동의를 얻어내자.'
  
  최근 서울대 폐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대가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현실적 권력이 온존하는 한 이런 논의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변화를 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지만 완전히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가든가. 학부를 유지하더라도 순수 인문학, 자연과학 등 소수의 학생들만 뽑아 엘리트 교육을 시키고 나머지 대학은 평준화하는 등 개혁을 해야 하는데 이건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예전에 박정희 정권 시절에 고교 평준화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기고 출신들이 얼마나 저항을 많이 했는데. 지금 서울대 출신들이 전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데 서울대에 변화를 주기란 어렵다. 서울대 출신이 아닌 상층부 사람들도 자기 자식들이 서울대에 갈 가능성이 높으니 더욱더 그렇다.
  
  나는 우선 서울대 학생수라도 지금보다 확 줄였으면 한다. 서울대가 규모도 크니까 점점 엄청난 권력 집단이 된다. 아주 뛰어난 사람들인데 수가 작다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작을 텐데...... 최소한 지금보다 정원이라도 줄이라고 요구해야 할 것 같다.
  
  프레시안 : 서울대 개혁의 한 축이 돼야할 교수들도 너무나 기득권에 익숙해, 외부에서 서울대를 어떻게 보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 하고 있다.
  
  홍세화 : 나는 한국에서 교육자본이란 측면에서는 특혜자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인식 못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인 내 자식들이 교육을 받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단호하게 서울대 문제를 바라보게 됐다.
  
  정원을 줄이는 수준에서는 문제해결이 전혀 안 된다. 권력학교라는 게 무너져야 한다. 서울대는 지식과 부와 지위, 이 모든 걸 독점하는 거대한 기득권 집단이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엄청난 박탈감을 안겨준다. 서울대의 권력독점 문제로 일어나는 사회악이 너무 심각하다.
  
  고종석 :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저항도 엄청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홍세화 : 그러니 싸워야 한다. 교육혁신위에서 공동학위제 얘기가 나오는 등 과거에 비해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이 기회에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판갈이가 있어야 한다.
  
  대학서열화로 고등학교 교육이 완전히 왜곡돼 있다. 유엔 아동권리위에서 제기했듯 교육과정 자체가 인권침해 과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인권 의식을 가질 수 없다. 또 아주 심한 경쟁체제라서 연대 의식을 가질 수도 없고.
  
  "한국은 사회구성원들이 일생동안 두 번만 긴장"
  
 
ⓒ프레시안

  고종석 : 끔찍한 계급투쟁의 연속이다. 입시는 계급투쟁이다. 궁극적으로어느 대학이든 들어가기는 쉽고 졸업하기는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경쟁력하고도 부합한다.
  
  홍세화 : 동의한다. 입시 위주 교육으로 경쟁의식만 가득 차고 비판의식은 갖지 못한다. 기득권 세력들은 엘리트 교육과 교육 경쟁력을 얘기하곤 하는데, 한국의 엘리트가 엘리트냐. 엘리트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엘리트는 능력도 부족하고 사회적 책임 의식도 없다. 극심한 경쟁 과정을 통해서 선택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상 심리만 있다. 이게 서울대 출신 기득권자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경쟁력은 경쟁력을 외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단적으로 서울대가 학문 경쟁력이 있는가?
  
  고종석 : 입학만 하면 졸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세화 : 대학이 서열화 돼 있기 때문에 입학과 동시에 경쟁이 이완된다. 졸업장만 받으면 되니까 자기 성숙은 절대 모색 하지 않는다.
  
  한국은 사회 구성원들이 일생에 걸쳐 딱 두 번밖에 긴장하지 않는다.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력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 성숙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계발하는 것에서 나온다. 이런 게 없으니 한국은 애초 석학이나 뛰어난 과학자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경쟁력을 위해서도 권력 학교인 서울대는 퇴출돼야 한다. 아니면 권력과 관계없는 인문학, 기초과학 이런 부분에서 소수의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남든지. 그것도 자신 없으면 국ㆍ공립대 평준화를 통해 걸러진 아이들이 학문 공동체 속에서 연마되는 식으로 가야 한다.
  
  고종석 : 학벌 사회와 학벌 없는 사회는 사회 전체 행복의 총량이 큰 차이가 날 것이다.
  
  홍세화 : 프랑스는 대학입학자격 시험을 통해 대학에 들어간다. 대개 고교 졸업자의 70%가 시험을 봐서 70% 정도가 합격한다. 이 중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바로 올라가는 학생이 28%에 불과하다. 2년 과정을 3년 안에 마치지 못하면 대학을 떠나야 한다. 유급은 한번만 인정한다. 결국 56%가 하지 못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이력서에 대학입학자격 시험을 보고 몇 년 만에 수료했는지를 아주 중요하게 기재한다. 그러니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ㆍ고등학교 때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은 미리부터 직업학교를 선택한다.
  
  물론 프랑스도 엘리트 교육 한다. 프랑스는 아주 소규모로 일종의 직업 전문학교를 운영해 엘리트 교육을 한다. 그게 서울대와 같은 학교는 절대 아니다. 그들이 패거리를 지어봐야 아주 작은 규모도, 또 그들끼리 좌ㆍ우 이념에 따라 경쟁을 한다.
  
  고종석 : 권력과 학위가 유착돼 있는 것도 문제다.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 학교라 할 수 있는 고등사범학교에서는 박사 학위를 못 받는다. 여기 출신은 무조건 국립 중ㆍ고등학교 선생을 일정 기간 해야 한다. 그것을 안 하면 그간 받은 돈을 물어내야 한다. 그리고 학위를 받고 싶으면 일반 대학으로 가야 한다.
  
  홍세화 : 일부에서는 서울대가 없어지면 금방 연ㆍ고대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서울대 없앤다고 해서 서울대 졸업생이 없어지나? 서울대 졸업생이 '연ㆍ고대가 제2의 서울대가 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또 서울대를 없애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싸움이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면 연ㆍ고대 중심으로 학벌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공교육 획일성, 평준화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주의가 문제"
  
  프레시안 : 우리나라는 평준화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평준화를 옹호하는 전교조와 평준화 해체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나 수구 기득권 세력이 대립해왔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면 평준화를 근간으로 하는 공교육이 자율성이나 창조성과는 배치돼 평균적인 국민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고종석 : 나는 당연히 평준화에 동의한다. 평준화가 아니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을 입시전쟁에 내몰게 된다.
  
  평준화라기보다는 공교육이 국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중체제가 되어야 한다. 여러 종류의 사립학교를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사학에는 국가에서 일체 지원을 안 하는 식으로. 국가에서 지원하는 공교육은 철저히 평준화로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홍세화 : 사회 구성원의 사회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교육이다. 교육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 소양을 갖춘다는 점에서 시민 의식이 기본 출발점이 돼야 한다. 사립학교도 시민의식을 갖춰야 한다는 약속은 지켜줘야 할 것이다.
  
  지금 공교육이 창의성, 개성을 죽이는 이유는 평준화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국가주의 때문이다. 주입식 또는 의식화 교육, 과거에는 반공 의식화를 계속하지 않았나.
  
  그 다음에 중요한 부분이 국가의 재정 지원이다. 이는 무상교육 문제와 결부되는데, 공화주의 관점, 시민의식이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고종석 : 이게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 바깥에서 국가주의가 척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가 국가주의, 애국심의 함양기관이 되기 쉽다. 학교 바깥의 시민의식이 충만해 있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국가주의가 학교를 통해 쉽게 주입되지 않나.
  
  홍세화 : 교장 임용 제도 등 각종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국가 권력 요구를 충실하게 따를수록 교장, 교감이 되고 학교를 반(反)민주주의적이면서 권위적인 구조로 온존시키고 있다. 교장이 국가주의 교육의 충실한 마름이면서 단위학교의 제왕이 돼 있는 구조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고리다. 이를 제도 속에서 분쇄해내는 게 개혁정권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병영구조다. 실제 이 땅에 근대학교를 세운 게 군국주의 일본인데, 일본이 뭘 본 따서 만들었겠냐. 바로 군대이다. 정말 나쁜 의미의 국가주의 교육이다. 반세기동안 축적돼 있는 이런 부분에 대한 반전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육 과잉상태, 무상교육하고도 남아"
  
 
  ⓒ프레시안

  프레시안 : 홍세화 선생은 아까 무상교육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홍세화 : 내가 연대와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상교육 문제다. 정말 한국의 교육계가 얼마나 무책임한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경제력이 커가는 것과 비례해서 무상교육이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무상교육 제도는 흔히 말하는 '사회 연대'의 구체적 실현의 모습이다. 서민들의 고통의 주요 내용이 교육비 문제다. 또 사교육비 문제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공교육을 무상으로 하는 게 그 해결의 중요한 열쇠다.
  
  지금 50여년간 공교육 제도를 하면서 얼마나 물적 토대가 늘어났나. 그 과정에서 법적으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의무 교육화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대학교육까지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교육까지 받지 않고는 사회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를 강제하고 있는 사회다. 그런데 그 비용의 대부분을 개인에게 맡기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 있어야 된다.
  
  이미 한국의 교육은 과잉상태다. 왜곡돼 있기 때문에 과잉이 된 거다. 그만큼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무상교육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상태다. 대학까지 무상교육은 가능한 일이고 해야 되는 일이다.
  
  프레시안 : '사회 연대'의 측면에 더 주목해서 얘기해보자.
  
  홍세화 : 무상교육을 통해 '사회 연대'라는 중요한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무상교육은 계층 간 '사회 연대'이고, 세대 간 '사회 연대'의 실현이다. 교육자본의 사회화라는 개념이 개입할 가능성이 열린다. 지금은 각자 획득한 교육자본이 사유화 돼 있다. 그러나 부모 세대로부터 또 국가와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은 성원들이 쌓은 교육 자본은 자기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
  
  지금처럼 자기 자본을 들여, 자기가 잘나서 치열한 경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책임 의식을 기대하는 것도, '사회 연대'도 불가능하다. 무상교육 제도를 갖추는 것은 그 사회의 책임 의식과 '사회 연대'의 가능성을 연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고종석 : 앞에서 얘기한 레옹 부르주아도 무상교육을 '사회 연대'의 중요한 가치로 보고 있다.
  
  홍 선배 말대로 교육과 관련해 우리사회 개혁 과제 중 중요한 두 가지는 학벌 카르텔을 타파하기 위한 서울대 폐지와 교육 자본의 고스란한 재생산을 막을 수 있는 대학 교육까지의 무상화일 것이다.
  
  "계층 고착화로 '개천에서 용 난다' 불가능"
  
  홍세화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난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요새는 불가능하다. 계층의 고착화가 이뤄지기 전에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계층의 고착화가 돼 가는 과정에서 강남 얘들이 점유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프랑스의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층 계급이 경제적 자본에 의해 상징 자본도 같이 점유해나가는 문제를 지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사회도 불평등 구조가 더 심화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서울대 혁파와 무상교육 문제는 더욱더 중요하다. '사회 연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고종석 : 교육 자본을 포함해 상징 자본과 경제적 자본 사이에 파열을 내야 한다. 다 고스란히 독점하는 게 아니라.
  
  좀 다른 얘기지만 예전에 김영삼 정부에서 권력과 부를 같이 갖지 못하도록 하겠다면서 고위 공직자들 재산 신고를 하도록 제도화했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자본을 가진 사람이 한꺼번에 그것들을 다 갖는 게 아니라, 이런 자본이 있으면 저런 자본은 좀 덜 갖도록 하는 제도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좀 모자르게 하는 그런 제도 말이다. 이것 참, 자유주의자가 할 소리는 아닌데...... (웃음)
  
  홍세화 : 그러니까 말로만 하지 말고, 민주노동당에 가입하라니까. (웃음)
  
ⓒ프레시안

  "경제적 민주화 진전하기 전에 '2004년 체제' 말할 수 없어"
  
  프레시안 : 오늘 대담 내용만 놓고 보면 고종석 선생은 자유주의자가 아닌 것 같다. (웃음)
  
  마지막 주제로 넘어가겠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많이 진전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 민주주의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중 하나가 경제적 격차가 심해지면서 개인이 이 사회에서 행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권리가 제약받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이다.
  
  고종석 : 최근 <한겨레21>에서 탄핵 정국의 결과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된 현 상황에 대해 '2004년 체제'라는 말을 썼다. '1987년 체제'가 끝나고 '2004년 체제'라는 얘기인데, 전혀 말이 안 된다.
  
  1987년에는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6월10일을 기점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 항쟁을 통해 6월29일 노태우 씨가 6ㆍ29선언을 했고 그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의 틀이 만들어졌다.
  
  또 그해 7, 8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서 그렇게 일어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1987년 체제'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두 개의 큰 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6ㆍ10으로 시작한 정치적 민주화의 흐름과 7ㆍ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시작하는 사회ㆍ경제적 민주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정치적 민주화의 측면은 '1987년 체제'가 꽤 진화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 사회보호법이 있지만... 녹음기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 욕을 노골적으로 할 수도 있으니 세상이 많이 좋아진 게 아닌가? (웃음)
  
  그러나 또 하나의 축인 7ㆍ8월 노동자 투쟁이 던진 과제는 진전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유행처럼 들어오면서 또 국내 경제가 흔들리는 과정에서 '노동의 유연화'니 이런 것들이 한국사회를 점령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되는데 빈부격차는 더 거치는 과정에 서 있다. '1987년 체제'의 기둥이 나란히 가는 게 아니라 기울어서 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을 '1987년 체제'를 극복한 '2004년 체제'의 출발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87년 체제'에서 그 다음 체제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레시안 :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고종석 : 맞다. 사회ㆍ경제적 민주화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체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해결이 쉽지 않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해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강조하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탄핵 시위 이상의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가 있어야 한다. 또 우리나라에 와있는 이주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시위가 그 정도 열정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의식과 감각을 다 쏟아 부어 '1987년 체제'를 완성시켜 나가야한다. 그게 언제 될지는 모르지만.
  
  이게 단순히 남한 민중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기에 더욱더 국제 연대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이라크 인이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웃음)
  
  홍세화 : 지금 애기하는 걸 들어보면 민주노동당에 왜 안 들어오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웃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것을 지향하는 당은 버겁다고 그러는지.
  
  프레시안 : (웃음) 고종석 선생을 옹호해야겠다. 고 선생은 책에서 "집단화되지 않는 불우한 개인들"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당'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사회 연대'는 측은지심의 일반화"
  
  홍세화 : 결국 17대 국회가 개원하면 가시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민권 차원의 문제다. 호주제, 국가보안법, 언론 개혁,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유 등은 어느 정도 티격태격하는 중에 진전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 권리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또 한국이 가지고 있는 대외 의존도 등을 감안할 때 참 한계가 많다. 거기다 이라크 파병 반대 목소리도 아주 작고. 참 어려운 과제이다. 긍정적인 전망을 하기가 어렵다.
  
  고종석 : '사회 연대'는 결국 자기가 있는 처지에서 사회ㆍ정치적, 상징적 자본이 모자란 사람들과의 연대를 의미한다. 그걸 연민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나는 '연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다 못났는데 못난 사람들끼리 한번 통해보자, 이렇게 말이다. 맹자가 얘기한 어짐의 끝머리는 측은지심이다. '사회 연대'가 측은지심의 일반화가 아닐까?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민음사 펴냄)이라는 책에서 지적한 열림도 연대의 태도고 측은지심의 일반화가 아닌가 싶다.
  
 
  고종석, <엘리아의 제야> (문학과지성사 펴냄) ⓒ프레시안

  홍세화 : 그런 '열림'을 '열린'우리당에 요구해야 하는데 말야. (웃음)
  
  고종석 : 내가 열린우리당 당원도 아니고, 노무현 지지자도 아니라서 요구하기가 참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으로 해야겠다. (웃음)
  
  홍세화 :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왜 연대 의식과 멀어졌나. 인권과 관련해 부채 의식이 있다고 본다.
  
  바로 한국전쟁기에 있었던 학살 문제이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모르지만 민간인에 대한 엄청난 학살이 있었다. 왜 죽었는가. '공산당'의 '공'자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게 일제 부역세력을 정리하지 못한 것만큼 큰 상처를 남겼다.
  
  하나는 가해자들에게 공격성을 더 줬다. 피해자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채 의식을 줬고. 어떻게든 누명을 벗겨줬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이런 것들이 결국 한국 사회 구성원들을 '사회 연대'보다는 이기주의에 기반을 둔 추한 자본주의 신봉자들로 몰고 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6ㆍ25 특별법 제정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고종석 :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정작 중요한 얘기는 다 못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내가 고백 하나 해야겠다. 나는 사실 '추빠(추미애 전의원 지지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나는 아주 호감을 갖고 있다. 최근의 행보는 안타깝지만 또 연민이 가기도 한다. '추빠'로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추미애 씨가 적극적으로 그 제정에 관여했던 '4.3 특별법'도 방금 홍 선배가 지적한 그런 치유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웃음)
  
  프레시안 : 앞으로 한번 더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웃음)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화 - &quot;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quot;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대화' <1> 전순옥 vs 조주은, '여성, 노동, 그리고 삶'
  2004-05-15 오전 9:11:09
  월 2회 정도 연재될 '대화'는 대다수 대담과 달리 논쟁이 지향점은 아니다. 책이나 글을 매개로 비슷한 지향과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될 '대화'는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공통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게 목적이다. '사회적 소통의 장'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에도 좀더 충실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첫 번째 '대화'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자 노동학자 전순옥씨와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여성학자 조주은씨의 대담을 싣는다. 편집자.
  
  전순옥 이야기
  
  동대문 창신동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인 전순옥(50)씨에게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전순옥씨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씨는 22세까지 봉제의류 공장에서 일했고 그 후 노동조합 활동, 지역운동을 했다. 그녀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 2001년 런던 워릭대에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해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 ⓒ프레시안

  최근 출간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동일방직노조·청계피복노조 등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 1백여명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씨는 유학을 떠나기 전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과 성공회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동대문에서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며 "저소득층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전씨는 또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A Single Spark)을 영어로 옮긴 데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문사진상위원회 등의 한국 민주화운동사 영문 번역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뒤늦게 그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크리스 조엘(61)도 함께하고 있다.
  
  조주은 이야기
  
 
여성학자 조주은 ⓒ프레시안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인 조주은(38)씨는 국내에서 드물게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다. 노동,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조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울산 현대자동차 가족에 대한 <현대가족 이야기>(이가서 펴냄)는 올 상반기에 출간된 노동 관련서 중 도드라졌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곳인 가정은 노동 정책과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상호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우리나라의 학문 풍토에서 조씨는 일찌감치 어려운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런 선택에는 남다른 개인사도 한몫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늦깎이 운동권이 돼 만난 노동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울산에 내려가 '전업 주부'로 살았던 경험은 연구자로서 그녀를 '관찰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노동'과 '가족'을 화두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전순옥ㆍ조주은 이야기
  
  두 사람에게 공통된 이슈는 '여성'과 '노동'이다. 지난 6일 오후 동대문 '참여성복지센터'에서 첫 대면하자마자 둘은 서로의 연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대담은 시작됐다. 대담을 마치면서 전씨는 조씨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남성 연구자에 의해 경제주의적ㆍ고립적 운동으로 폄하돼 왔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은 연구 대상을 '대상화'하는 지금까지 구태의연한 연구 방법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공감을 표시했다.
  
  또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기존의 현학적 풍토에 대한 저항 의식도 비슷했다. 조씨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고, 전씨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얘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의 남성,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도 똑같았다. 조씨는 "대기업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전씨도 "영국의 노조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노조의 조직 이기주의 때문이었다"며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의 대담은 사회자가 별 끼어들 필요, 아니 끼어들 틈 없이 세 시간 넘게 계속됐다.
  
ⓒ프레시안

  대담은 지난 6일 저녁 '참여성복지터'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 폄하로 이어져"
  
  프레시안 : 전순옥 선생의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와 조주은 선생의 책 <현대 가족 이야기>는 상반기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노동 관련 책이다. 서로의 책을 읽은 소감이 있을 듯하다.
  
  조주은 : 먼저 시작하겠다.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는 있는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없었다. 2000년에 개인적인 이유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정말 한 권도 찾을 수 없더라. 일제 강점기 때 부문운동의 하나로 여성노동운동이 좀 언급돼 있고,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강주룡 열사의 얘기 등이 부분적으로 인용될 뿐이었다.
  
  이런 무관심은 자연히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남성이 쓴 많은 노동운동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5년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런 노동운동이 19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여성노동운동의 경제주의와 고립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그건 아닌데', 하면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전순옥 선생님이 쓴 이 책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전순옥 : 나는 일단 <현대가족 이야기>라는 제목이 참 좋더라. 현대에 살고 있는 가족이 파괴되고 있잖아. 난 제목만 보고도 많이 사서 볼 것 같던데. (웃음) 책은 많이 팔렸나?
  
  조주은 : (웃음) 거의 안 팔렸다.
  
  전순옥 :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많은데 실제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구체적 삶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이 참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이론을 사용하기보다는 책에서 서술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그대로 반영하려는 노력, 그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 것도 참 좋았다.
  
  조주은 : 글을 쓸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순옥 : 그런 부분이 나랑 맞았다. 내 책의 주인공들도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전에도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도대체 내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서 인터뷰하는 게 싫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직접 자기 얘기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나는 학자라기보다는 노동자 출신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좀더 유리했고.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도 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대상화한 것은 오류"
  
 
ⓒ프레시안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면서 상대방의 연구에 이견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나?
  
  전순옥 :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됐다. 그들은 아시아 여성노동자들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겪은 희생을 보면서, 여성노동자들을 '희생자로 개념화((victimization)'하곤 한다. 대부분이 이런 접근인데 나는 이렇게 제3세계 여성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3세계 여성들은 무조건 순종적이면서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을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떨쳐 일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의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그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접근이 좀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현대자동차 노동자이긴 하지만 그도 노동자 출신은 아니지 않느냐, 조주은 씨도 마찬가지고. 그러다보니 조주은 씨도 노동자 가족들 속에 파묻히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게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
  
  조주은 : 물론 그런 측면에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사실 울산에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다. 나는 남성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성찰할 부분이 있다면 성찰하고, 너무 일상이나 관성에 젖었던 자기들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스스로 객관화시켜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기를 바랐는데...... 남성 노동자들은 아예 안 읽더라. 남편 동료들한테 책에 대해서 물어보면 말을 안 한다. 왜 자기들 사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우리를 죽일 놈을 만드느냐, 자본가를 욕하고 기업을 욕해야지 왜 우리를 비판하느냐, 이런 식이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도 책을 보면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고 애기했다. 한 여성은 나한테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내 남편이 생산직 노동자가 맞긴 한데 그 책을 보니까 갑자기 내 처지가 서글퍼지더라"고 불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연봉 4~5천만 원씩 받지만 그래봤자 결국 너희는 노동자다, 이렇게 규정하는 게 불편해 보였다.
  
  전순옥 : 실제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까놓고 얘기하는 건 안 좋아한다는 얘긴데, 그게 일반 노동자의 의식이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임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정작 스스로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라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갑갑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렇게 임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은 예외적인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주은 : 이견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될 텐데, 선생님 책을 보면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된 국내 여성학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전순옥 :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은 없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평우회, 여성민우회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성학자들은 1970년대 '여성들이 여성의식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서 단체교섭을 할 때 여성만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거나, 여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은 없었다는 둥. 이런 비판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조금은 무책임한 것이다. 자기들은 그 때 뭘 했나?
  
  프레시안 : 그 당시 여성노동운동을 살펴보면 여성노동자들의 '생활 공동체' 같은 게 존재했다. 그런 모습을 '자생적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순옥 선생님도 '한국적 페미니즘'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여성노동운동은 어떻게 10년을 버텼나"
  
 
ⓒ프레시안

  전순옥 : 그렇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어떻게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10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지적한 그런 데서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연구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해준 것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것보다는 바로 이런 부분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너무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말순이, 섭섭이, 끝단이, 큰년이, 막내로 불리다 공장에 오니까 시다 1번, 미싱사 3번으로 불렸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위원장, 교육선전부장 등 직함으로 불리고. '아, 나한테 이름이 있었구나', 이렇게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자아, 존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공장에서 사장들하고 단체교섭을 하면서 사용자가 "미스 리"라고 부르면 "내 이름은 이총각이고, 지부장이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고 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아 노동조합이야말로 나의 자아를 지켜주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데 헌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프레시안 : 그런 점과 연관해서,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순옥 : 맞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과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개인적으로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하는 성향(individual-oriented)이 있고 여성은 같이 하려는 성향(group-oriented)이 있다고 설명된다. 노동조합 운영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남성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려다 보니 굉장히 비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운영할 때 모든 것을 조합원들과 같이 의논했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조합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려고 했고. YH노조의 최순영 씨 같은 사람은 조합원 3천 명의 이름을 다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단체교섭을 할 때는 '빠다 조건'이라는 게 있다. 노조 지도자가 사용자한테 이번에 임금을 10%에서 1%를 더 올려주면 내가 노동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노조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겠다고 물밑 협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조합원들한테 는 '당신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뽑아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임금을 1% 더 올리겠다'고 말하고.
  
  근데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단체교섭을 할 때 임금 인상률을 지도부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과 함께 결정했다. 1970년대에는 소그룹이 많았는데, 그런 소그룹에서 '이번에 우리가 임금을 얼마를 올려야 하는지' 자기들끼리 논의를 한다.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률을 15%로 결정되면 집행부가 논의를 해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한 결정을 내리고, 공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간부들은 교섭에 들어가서 반드시 15%를 올려야 한다. 조합원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다른 '빠다 조건'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조합원들은 그들대로 내가 주장한 15% 인상을 간부들이 사용자와 교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도부에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여기서 지도부는 또 싸울 용기와 힘을 얻는다.
  
  "혼자 결정하다 보니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돼"
  
  조주은 : 동감한다. 남성 노조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런 얘기들이다.
  
  전순옥 : 맞다. 그런 남성 노조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달려가다 보니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된다. 어용이 되기 쉽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노조를 완전히 어용화시켜 조정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들 몇 명만 잡고 있으면 노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런 분위기 탓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들이 중심이 된 노조는 그럴 수 없고, 비타협적이어서 오히려 박정희한테 큰 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는 민주노조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YH노조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할 때 겨우 여성 2백여 명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관여를 하지 않았느냐. 그만큼 그들의 행동을 큰 타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두 사람을 회유하는 것으로 안 되니까 뿌리째 뽑아서 노조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바로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만들어냈다.
  
  조주은 : 당시에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남성노동자들이 앞장서 방해했었다. 구사대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였고 여성노동자가 출근 투쟁할 때 위협을 가하고, 머리채를 잡으며 폭력을 가했던 게 다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선생의 연구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전순옥 : 섬유나 방직 산업에서도 총 4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남자는 한 5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1천3백 명 있는 공장에서 남자는 1백 명 정도가 있었고, 나도 당시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당시 남성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당했느냐, 같은 노동자들에게 당하는 게 더 분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대답이 놀라웠다. 그들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성노동자들도 결국 사용자에게 고용된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오히려 그런 남성노동자들을 노조 지도부에 넣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계급의식이 훨씬 강했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로 끌어가지 않았다. 만약에 그 남성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자본가들이 바랐던 '노-노(勞-勞) 갈등'이라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록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진 것은 그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 노동운동 썩었다"
  
  프레시안 : 현재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다. 두 분의 연구는 현재 이런 노동운동 경향에 대한 아픈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조주은 :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 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울산에서 직접 보고 들은 차마 얘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집행부를 장악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남성 노동운동가들도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 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오히려 나는 노동운동의 희망이 지금 현재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있는 노동자들의 활동 속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 되지 않는 것이다.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은 결코 자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임금을 조금씩 올려 받으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된 노동자라면 그런 것들을 오히려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임금을 올려 받아도 자본가처럼 잘 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그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임금이 올라가면 자연히 노동조합의 힘은 없어진다. 어느 정도 임금이 되면 노동자 동료들과 함께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각종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노조가 집회를 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영국 노동운동 조직이기주의로 망해. 현 대기업 노조 권력 다툼에 몰입"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국 노동운동이 망했다고 본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비정규직이나 여성노동자들 등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데 등한시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소외됐다.
  
  그것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게 바로 대처다. 1980년대 대처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줄여야 했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국영기업을 사기업으로 만들면서 구조조정을 통해 한 사업장에서 반 수 이상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영국의 노조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이런 공세를 당한 데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영국에 처음 간 1990년 초에 노동자 대회를 갔는데, 2백 명이 참석했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성공할 때가 있고 기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도 이런 것을 똑바로 배워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은 :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서로 조직의 권력을 잡는 데 몰두해 있다. 민주노총 현대자동차 노조 자유게시판을 한번 봐라.
  
  내가 남편하고 5년 정도를 떨어져 있었다. 남들이 남편이 '바람'을 필지도 모른다면서 걱정하곤 할 때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혹시 다른 여자하고 그런 일이 있다면 바로 자유게시판에 뜬다. 눈에 띄는 신인 노동운동가가 부인하고도 떨어져 있는데, 저 뒤를 캐면 속한 조직에 흠집을 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감시를 하는 거다. 남편이 속한 조직의 상대편 조직 사람들이 내 남편을 지켜주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웃음)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우에는 이번에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나왔기 때문에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다. 다음 현대자동차 노조 위원장을 하는 것은, 이후에 누가 울산 북구 국회의원을 하느냐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 말로 못하는 사정들이 너무나 많다.
  
  전순옥 : 사실 우리 노동운동 속에 보기에도 민망한 추악한 계파 싸움이 있다. 다들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명하지만 사실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지 노동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안다. 서로 자기 정파를 살리기 위해서 내분을 하고, 그 때문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던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하고.
  
  이렇게 지도부가 계파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조합원들과 지도부의 괴리감이 커진다. 지도부가 뭘 하고 다니는지 조합원들이 모른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없던 '지도부 불신임'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속에서 노동운동의 노하우가 축적이 안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도부는 능력 없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더 계파 싸움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프레시안 : 조주은 선생의 남편도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가였다. 남편은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조주은 : 남성노동자들을 너무 비하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걸린다고 얘기했다. 예를 들면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인 시선으로 대한다", 이런 단정적인 표현을 "그러기 쉽다" 이렇게 고치는 식으로. (웃음)
  
  전순옥 :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여성은 18명을 인터뷰했는데, 현대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수는 적다. 일부러 아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 얘기를 쓴다고 해도, 부부 양쪽 얘기를 같이 들으면 내용이 더 풍부해졌을 텐데, 왜 그랬나? 남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 아니면 의도적이었나?
  
  조주은 : 약간 의도적이었다. 이 연구를 하기 전에 울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부부를 같이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부인은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거 보면서 같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똑같은 사안을 놓고 부부를 동시해 인터뷰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일 텐데, 울산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 남자들은 대개 "나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너는 뭐라고 했느냐. 너한테 이런 질문 할 테니 이렇게 답해라", 이런 식으로 아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내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프레시안 : 혹시 서로의 책을 읽으면서 세대차나 또는 시각차는 없었나?
  
  조주은 :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전순옥 선생의 책은 남성적 시각이 주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책 전체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노동자 중에도 가장 힘없는 노동자에 마음 가. 그게 바로 여성노동자"
  
  전순옥 : 이 책을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성주의자인지 안다. 또 여기 창신동에 와서 '참여성노동복지터'를 하고 있어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냐'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말한다. (웃음) 페미니즘을 거부하기 때문은 아닌데 어쨌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노동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노동계급의 성향이 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 같은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노동자 쪽에 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항상 그곳에는 여성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괜한 것을 물은 것 같다. 그럼 상대방에 대한 조언이나 바람이 있을 법하다.
  
  전순옥 : 나는 오늘 조주은 선생이랑 같이 얘기를 해보니까 앞으로 같이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 뚜렷해졌다.
  
  앞으로 빈민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한번 해보고 싶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방점은 다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일을 거라고 기대된다.
  
  조주은 : 나도 그 네트워크에 꼭 끼워 달라. (웃음) 나는 전 선생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한 게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는데 거기에 '여성학자 조주은'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때 기분이 참 묘했다. 내 자신부터 여성학자라고 규정되는 게 당혹스러웠다.
  
  나는 전순옥 선생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하는 일이 가장 앞서가는 여성주의적 실천과 연구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목소리 대신 알려주는 게 내 할일"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전순옥 : 내가 연대하고 싶은 사람들, 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었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을 일했고, 얼마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가 하나도 없다. 기존의 통계들은 너무나 공평하지 못하고 자의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은 통계마저도 거부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도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통계, 아니 우리들의 통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내 꿈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마쳤을 때, 그 학교에 자리가 났었다. 사실 고민하면서 영주권 신청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마침 성공회대학에 연구교수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됐는데 거기도 딱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내가 원래 이 지역에서 여성노동자 공동체, 탁아소를 했다. 이제 외국까지 가서 박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까 주변에서 '박사까지 하고 이걸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로 박사까지 했기 때문에 꼭 여기로 돌아와야 했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오빠는 70년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보잘 것 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에 아무도 귀를 안 기울였다. 만약 전태일이 대학생이었어도 그랬을까?
  
  여기서 1960~70년대부터 노동을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16시간씩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니까 인터뷰도 하고, 한마디 하면 신문에도 실리고 그러더라. 그게 바로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주은 : 나는 아직 학위 과정 중에 있으니까 큰 포부를 말하기는 좀 어렵다. 다만 노동자 가족 문제에 계속 천착해 들어갈 생각이다. 솔직히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 안에서도 가장 상층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 연구해보고 싶다. 또 민족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 홀대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
  
  "권력 가진 이들의 정체된 의식이 사회의 정체 낳아"
  
 
  조주은.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각자 영역에서 두 분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나.
  
  전순옥 : 요즘엔 현대 사회와 가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곤 한다. 가족이 어떤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끈끈한 가족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 동안 많이 변했더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열중하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 사회도 거시적인 것보다는 좀더 미시적인 접근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했나. 왜 우리가 그렇게 혁명을 목소리 높였나. 바로 내 삶을, 또 이웃들의 삶을 좀더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나?
  
  그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가치관을 어디다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부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때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를 점검한 다음에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조주은 : 질문에 답하기가 막막했는데 전순옥 선생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이 온다. (웃음) 우리 사회는 현재 엄청난 변화와 정체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서 여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고, 그가 이혼했다는 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
  
  난 두 아이 엄마인데 큰 애가 '가정환경 조사서'를 갖고 왔다. 너무 놀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그 양식 그대로더라. 여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좀더 힘 있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된 의식이 바로 사회의 정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고 힘을 가진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고.
  
  변화의 가능성과 과거의 정체가 혼돈돼 있는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사람들부터 우선 변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사회 남성들부터 조금씩 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물 없이 지낸 아바나의 첫 밤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
  2005-02-15 오전 11:48:51
  <프레시안> 뉴욕 통신원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가 3주 일정으로 쿠바와 볼리비아 현지 취재를 떠났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와 문제점, 미국-쿠바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고, 볼리비아에선 체 게바라의 무장 게릴라 근거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실패한 투쟁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새겨볼 계획이다. 이 현지취재는 시사월간지 <월간중앙>과 공동협찬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입국 비자 필요 없고 여행자 카드로만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중심이 돼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혁명(1959년)이 올해로 46년을 맞는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지도 벌써 37년을 넘겼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래 지금껏 쿠바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아직껏 이루지 못한 혁명과제들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쿠바혁명을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도록 만든 요인들인가. 중남미를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온 초강대국 미국은 쿠바에게 어떤 존재인가. 쿠바의 일반 민초들과 지식인들은 쿠바혁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아울러 미국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체 게바라가 지구촌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오늘의 쿠바를 어떻게 평가할까.
  
쿠바 아바나 시내 전경 ⓒ김재명

  이런 물음표들을 지닌 채 쿠바 아바나 국제공항에 닿았다. 출입국 사무를 맡은 관리는 여권에다 쿠바 입국 사실을 나타내는 도장을 찍지 않는다. 그 대신 '여행자 카드'라 일컬어지는 조그만 입국서류에다 도장을 찍는다. 쿠바로 가기 전부터 이 여행자 카드 문제로 신경을 써야 했다. 쿠바 여행 안내책자엔 "쿠바 입국 비자를 받아도 되는 대신에, 이 여행자 카드를 들고 가야 한다"고 돼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외교관계도 없는 쿠바에 들어가려면, 문제의 여행자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미국 식민지 유산을 지닌 건물들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있다. 건물 앞 차량들은 아바나 특유의 2인용 '코코' 택시들. ⓒ김재명

  미국에서는 쿠바행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다.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야 한다. 미 부시행정부는 미국인들의 쿠바행을 막기 위해 그런 원칙을 지키도록 여행사와 항공사에게 강요한다. 미국 안에 있는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 표를 사려 해도 불가능하다. 결제과정에서 구매자가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캐나다항공에 전화를 걸어 표를 사려 해도, 미국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알면, "전화를 그만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필자에게 쿠바행 비행기 표를 판 캐나다의 한국인 여행사가 여행자 카드에 관한 정보에 대해선 깜깜했다는 점이다. 쿠바행에 대해 물어오는 한국인 손님이 그만큼 드문 탓이기도 했다. 답답했다. 필자의 쿠바 취재길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행기 표를 산 K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캐나다의 쿠바 대사관에까지 전화를 걸어 "토론토 공항에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기 바로 직전, 공항 출구(gate)에서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그냥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서울로 K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국여행사로부터 6만원을 주고(택배료까지 합쳐 7만원) 그 서류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와아! 항공사에서 거저 나눠주는 서류를 6만원이나 받고 팔다니....쿠바로 떠나는 날 아침 토론토 공항 출국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문제의 그 여행자 카드란, 인천공항에 들어오기 앞서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입국신고서처럼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과 주소 따위를 적어 넣는 아주 간단한 서류였다. 쿠바에서 머물 주소는 일반적으로 아바나에 있는 호텔(Hotel in Havana) 쯤으로 적어 넣으면 됐다.
  
  쿠바가 입국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여행자 카드라는 이름의 간단한 출입국 신고서로 갈음하는 까닭은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과 직접 관련된다. 쿠바의 주요 외화벌이 재원(財源)이 관광산업이다. 해마다 1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고 있다. 기후가 좋고 해변 휴양지가 많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 들어 미국은 쿠바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카스트로 체제 전복과 쿠바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에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인이 멕시코나 캐나다를 거쳐 몰래 쿠바를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 최고 25만 달러의 벌금, 징역 10년을 살도록 돼있다.
  
쿠바는 미국에서 이미 폐차된 지 오래인 중고자동차들의 박물관이라 일컬어진다. 1950년대 만들어진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다니며, 고장 나 길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흔하다. ⓒ김재명

  미국 달러에 매기는 10% '카스트로 혁명세'
  
  법대로라면 미국인의 쿠바여행길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모험이다. 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다 운 없이 쿠바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미국인은 일반적으로 벌금 7천5백달러를 문다. 카스트로 정권은 그런 미국인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쿠바를 다녀올 수 있도록 여행자 카드에만 입국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곤 공항 출국심사장에서 여행자로부터 도로 그 서류를 걷어간다. 따라서 여권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대중교통수단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터라, 2인용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김재명

  우리 한국인들이 쿠바로 미국 달러를 그냥 들고 들어갔다간 손해를 본다. 아바나 공항에서 일부 외국인들은 '카스트로 혁명세'를 바쳐야 한다. '혁명세'란 용어는 물론 없다. 사정을 잘 모르고 미국 달러를 갖고 입국한 사람들이 공항 환전소에서 달러를 현지 화폐로 바꾸려 하면, 10%를 무조건 뗀다. 달러가 아닌, 유로나 엔화를 갖고 들어가면 모두 제값을 쳐서 환전할 수 있지만, 달러는 90%만 값을 쳐주고 10%는 공제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런 특이한 제도가 시행됐다. 카스트로 정권의 설명은 "쿠바를 달러경제의 압박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다.
  
  아바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는 '20달러'의 정액요금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달러'는 미국 달러가 아니다. 카스트로 정권이 지난해 11월 만들어낸 새로운 화폐인 '전환 페소'(Converted Peso)다. 이 돈의 가치는 미국 달러와 거의 같지만, 정확히 말해 10% 더 세다. 100 미국 달러를 환전소에 내면, 90 전환페소를 받는다. 그렇지만 쿠바 현지인들은 이를 그냥 '달러'라 일컫는다. 일반 쿠바국민들은 '모네다 나시오날'(moneda nacional)이란 이름을 지닌 '쿠바 페소'를 주고받지만, '전환 페소'도 함께 쓴다. 시골지역으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카페로 갈수록 '쿠바 페소'가 많이 쓰인다.
  
  우중충한 건물들, 몇십년 된 자동차들
  
  카리브해를 끼고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아바나는 얼핏 보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다. 바닷가를 따라 8km 길이의 말레콘(Malecon) 도로는 서울로 치면 강변도로같은 것이지만, 한켠에 인도를 만들어 연인들의 산책로로선 제격이다. 이 말레콘 도로를 건설한 이는 쿠바인들이 아니다. 1901년 쿠바를 식민지로 다스리던 미국인들이다. 아바나 시내 곳곳에 세워진 대리석의 멋진 건물들도 미국이 쿠바 식민통치를 위해 지은 것들이 많다(서울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중앙청 건물이나 시청 건물이 일제가 지은 사실과 마찬가지다).
  
아바나의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모습이다. ⓒ김재명

  이 글 앞 문장에서 아바나를 가리켜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도시로 들어가면, 결코 아름답지는 못하다.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 그런 건물들이 있다면, 벌써 페인트를 새로 칠했거나 허물어 버렸을 것들이다. 그런 건물들 속에 사는 이들은 방 하나를 여러 사람이 같이 나눠쓴다. 인구는 갈수록 늘어가지만, 주택을 새로 짓지 못하는 탓이다. 나중에 쓰겠지만, 아바나에 사는 한국인 교민(농업노동자로 80년전 이민 온 한국인의 후손) 집에 갔다가, 너무나 처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쿠바의 여인들.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가난하기에 옷 한 벌로 몇 달을 버티는 여인들도 많다.   ⓒ김재명

  아바나의 차량들도 오래된 것들이라 매연을 시꺼멓게 뿜어댄다. 1950년대에 생산된 미국 승용차들이 버젓이 굴러다니는 것이 아바나이고 쿠바다. 그래서 쿠바는 '세계 중고 자동차 전시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길 한가운데 멈춰 본네트를 열고 수리중이거나, 뒤에서 여러명이 차를 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리에서 우리 한국의 중고자동차들도 많다. 구형 소나타에서 티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자동차들이 아바나 길을 메우고 있다.
  
  멕시코를 통해 들여온 이들 한국 자동차들은 쿠바에선 '좋은 차'로 꼽힌다. 워낙 미국차들이 낡은 탓에 상대적으로 새차라서 성능이 낫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전세내 타고 다녔던 차도 현대자동차의 구형 소나타. 운전기사 헤르난데스는 "이 차가 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부속품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언젠가 소나타가 고장 나면 다른 차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의 부품은 쿠바에서 대용품을 자체 개발해 쓰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아바나에서의 첫 밤은 세수는커녕 발도 씻지 못했다.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호텔 쪽 설명으론 그 지역 일대에 수돗물이 끊겼고, 낡은 수도관 탓에 그런 일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호텔 종업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에게 물이 안나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경제 체제 아래 쿠바는 모든 것이 국유다. 부동산 개인 소유는 없다. 오로지 그 집에서 살 권리만 있다. 호텔도 국유고, 따라서 호텔 종업원들은 '국가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안나와 손님이 불평을 하면, "다른 곳을 찾아봐라"는 정도지, 어디선가 물을 날라다 주려 애쓰는 눈치는 전혀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여러 모로 이번 쿠바 취재길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애써 지우며 아바나의 첫 밤을 넘겼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2>
  2005-02-18 오전 10:13:20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900km.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미 해군기지가 있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타고 13시간 걸려 산티아고 드 쿠바를 가서, 다시 택시를 전세내 1시간30분을 달려 관타나모에 닿았다. 애당초 계획은 아바나-관타나모 사이를 하루 1회씩 오가는 국내선 비행기(비행시간 2시간30분)를 타고 가려 했다. 여행사에 가서 알아보니 앞으로 보름 동안엔 여유분 좌석이 없이 모두 팔린 상태였다. 비행기는 소형인데, 찾는 이는 많아서 그렇단다. 나중에 관타나모에서 들은 얘기로는, 예약된 비행기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호기심으로 관타나모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6시에 떠나 밤새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겨야 했다. 버스 안에는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쿠바의 시외버스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아솔(Viazol), 다른 하나는 아스트로(Astro). 비아솔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선진국 수준의’ 높은 요금을 받는다. 쿠바 현지인들도 비아솔 버스를 탈 수는 있지만,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난 비아솔에 비해 훨씬 값이 싼 아스트로는 쿠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수단이다.
  
  말이 ‘대중교통수단’이지, 쿠바 사람들이 아스트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면 적어도 한달, 길게는 두세 달씩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타려는 사람들에 비해 버스 대수가 많지 못한 탓이고, 이웃나라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의 우호적인 원유공급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쿠바의 기름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쿠바-베네수엘라-미국의 미묘한 3각관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교육-의료는 천국, 교통은 지옥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가까운 쿠바군 검문소 앞에 놓인 쿠바국기와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흉상. ⓒ김재명

  카스트로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사람들은 큰 변화를 실감해왔다.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시절 미국인들은 쿠바 농지의 3분의 2를 소유, 현지 쿠바인들을 소작인 또는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부려왔다. 카스트로는 그런 농지들을 모두 몰수, 국영농장으로 바꾸었다. 바티스타 정권 아래선 돈을 가진 집안에서만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으나, 카스트로 혁명으로 초중등 교육은 물론 대학교육까지도 거저가 됐다. 공부할 능력과 의욕만 있다면, 돈이 없어도 대학을 다닐 수 있다. 그런 덕에 현재 쿠바의 문맹율은 제로에 가깝다. 의료혜택도 쿠바혁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입원비가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었다더라“는 얘기는 적어도 쿠바에선 들을 수 없다(쿠바의 교육과 의료체계에 대해선 이 연재에서 별도의 꼭지기사로 다시 다룰 예정이다).
  
  쿠바혁명의 그런 바람직한 성공사례와는 대조적인 부분들이 있다. 도로, 교통, 인터넷, 수도, 전기,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인프라)이 아직은 제대로 구축돼 있지 못하다. 특히 교통 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사회주의 통제국가인 쿠바는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다. 수도 아바나에 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이사갈 수가 없다. 평양에 살고 싶다고 신의주 사는 주민이 이삿짐을 맘대로 꾸릴 수가 없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사를 가고자 하는 쿠바 사람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자리가 바뀌는 등 나름의 그럴듯한 사유를 제시하지 않을 경우, 거절당하기 십상이다.
  
  단기간의 여행은 허가 없이도 떠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동수단이 간단치 않다. 앞에서 적은 대로 아스트로 버스를 타려 해도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기차표 얻기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쿠바에서 오토바이는 아무나 타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경찰이나 업무상 필요하다고 인정된 경우에만 오토바이를 탈 수가 있다. 주말에 경춘가도를 따라 질주하는 즐거움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행위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해악으로 여겨진다. 쿠바 경찰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도 한국 경찰처럼 크지 않아 기름 소비가 적은 것들이다.
  
  아바나 시내를 굴러다니는 1950년대 미국 차들은 너무 낡아 장거리는 엄두를 못 낸다. 이래저래 적절한 이동 수단을 찾지 못한 쿠바 사람들은 지나는 트럭을 세워, 짐칸에 서서 가기도 한다. 산티아고 드 쿠바에서 관타나모로 가는 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빼곡히 실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드 쿠바와 관타나모 사이는 85km. 차로 달리면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비아솔이나 아스트로 버스 모두 두 차례만 오간다. 급한 일이 생긴 사람은 트럭에 올라 타거나 쿠바인들의 소득(월평균 10달러 미만)에 비해 턱없이 비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바가지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관타나모 왕복에 85전환페소(지난번 글에 썼듯, ‘혁명세’ 10%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95달러)를 냈다. 이만한 돈은 쿠바 서민들의 열달치 소득이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전경. ⓒ김재명

  (독자 여러분들이 설마 하고 놀라겠지만, 쿠바인들의 소득수준은 너무 낮다. 경찰과 청소부 등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직종이 가장 많이 월급을 받는데, 그 수준이 30달러다. 대학교수와 의사가 20달러, 나머지 대부분의 직종은 10달러 안팎이다. 식량배급카드로 국가로부터 밀가루, 식용유, 설탕 등을 거저 공급 받아 생활비가 덜 든다. 그러나 그만한 소득으로는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냉장고나 텔레비전 등 상대적으로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나름대로 ‘요령’을 익혀왔고,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를 ‘생존술’이라 정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보겠다.)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캠프 델타 포로수용소. 같은 관타나모 기지 안이라도, 미 해군기지와는 따로 떨어져 있다. ⓒ김재명

  노래 ‘관타나메라’와 호세 마르티
  
  고구마처럼 동서로 길게 뻗은 쿠바의 동쪽 거의 끝부분 남쪽에 자리잡은 관타나모는 인구 20만의 제법 큰 지방도시. 관타나모란 이름 자체는 노래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관타나모 아가씨, 촌뜨기 관타나모 아가씨)로 우리 귀에 익숙한 편이다. 지난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널리 알려진 '관타나메라'는 오래 전부터 쿠바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떠올린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는 쿠바 시인이자 독립영웅으로 식민지 군대인 스페인군에 사살됐던 호세 마르티(1853-1895)다. 쿠바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마르티의 동상과 마주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카스트로 사회주의 혁명정권도 호세 마르티를 인민영웅으로 떠받들어 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와 연결시켜 풀이한다. 한 마디로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보는 쿠바군 관할 고지로 오르기 위해, 그곳 군부대가 설치한 초소 앞에 갔을 때도 마르티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 보도록 쿠바군 관할 고지에 설치된 망원렌즈. ⓒ김재명

  2001년 9.11 사건 뒤 6백명 넘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들을 재판도 없이 가두어놓은 채 인권 침해시비를 낳아온 미 해군기지는 관타나모 도심지와는 뚝 떨어진 관타나모만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쿠바 취재를 계획했을 때부터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자체를 취재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곳은 전세계 미디어의 사각지대다. 부시행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의 보수적 TV 매체 팍스 뉴스(Fox News)조차도 관타나모를 직접 취재하진 못했다. 그저 펜타곤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받아쓸 뿐이다. 그런 관타나모 기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다.
  
  고지에 오르려면 적어도 하루 앞서 지정된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해야 한다. 수수료는 5달러(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환 페소’). 이 이 5달러도 쿠바정부로선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원처럼 느껴졌다. 9.11 뒤 관타나모는 관광상품으로 떠올랐다. 그곳 고지에서 필자를 맞이한 쿠바인 안내원은 군인이 아닌, 쿠바 관광청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단체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 대꼴로 온다.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지만,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고지에서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바라보는 광경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필자가 갖고 간 300mm 렌즈로는 기지 안에서 오가는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어려웠다. 고지에 붙박이로 설치해놓은 전망대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내원 설명에 따르면,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사람 걸어가는 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은 햇살이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맑은 데도 그렇질 못했다. 현재 해군기지 안에는 군인 1천명, 관련 미국인 2천명이 머물고 있다.
  
  “혁명으로 미군 상대 술집과 창녀 사라졌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는 주권국가인 쿠바 영토 안에 파고든 미국 점령지다. 지난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더불어 쿠바를 빼앗으면서, 관타나모만 일대는 미 해군기지로 개발됐다. 쿠바가 1903년 ‘형식적인’ 독립국가로 됐을 때, 관타나모는 영구임대 계약으로 미국에 넘겨졌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국은 쿠바인들에게 영원히 미군 점령지역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미국의 쿠바내정 개입을 인정하고 독립을 얻을 것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쿠바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내정간섭을 합법화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택했다).
  
1950년대 미군 술집과 창녀들로 흥청댔던 관타나모 시가지. 카스트로 혁명으로 술집과 창녀들은 모두 사라졌다. ⓒ김재명

  미국은 해마다 금화 2천개(지금의 화폐가치로 4천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관타나모 기지 임대차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계약 쌍방이 함께 계약을 끝내기로 서로 합의했을 경우에 한해서만(if both parties mutually consent to terminate the lease)' 쿠바인들이 관타나모 기지를 돌려받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관타나모 기지는 영원히 미국인 것이다.
  
  1959년 1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불평등계약조건은 문제가 없었다. 쿠바혁명 뒤 카스트로 정권은 계약 파기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합법적으로 임대계약을 맺었는데 무슨 소리냐. 계약서를 잘 들여다봐라”며 딴전을 펴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혁명이 성공한 바로 뒤 미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소규모 총격전마저 벌였다. 그런 긴장관계 속에 쿠바정부는 미국이 해마다 관타나모 기지를 빌린 대가로 보내오는 4천달러 짜리 수표를 은행에 돌려 현금화하지 않았다.
  
  관타나모 사람들은 미 해군기지를 복합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했다는 고메스(67)를 시내에서 만났다. 그는 1950년대 관타나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전에 관타나모 시내엔 미 해군들로 늘 흥청댔다. 그들 때문에 이 지역경제가 흥청대긴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술집이 즐비했고, 창녀들이 많았다. 술 취한 병사들이 지나는 여인들을 희롱하는 일도 잦았다. 쿠바혁명으로 그런 모습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게 참 다행스런 일이다” 관타나모 주민들은 9.11 뒤 볼썽사납게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채 인권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 해군기지가 하루 빨리 쿠바에게 반환돼, 쿠바 해군기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혁명 근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3>
  2005-02-23 오후 5:28:42
  쿠바에선 체 게바라를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거리엔 대형 게바라 초상화가 내걸려 있고, 곳곳에 게바라 관련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카리브 해의 파도가 시원스레 넘실대는 풍경이 바라보이는 아바나 고급호텔의 벽걸이 그림도 게바라다. 빈민가가 들어선 아바나 비에하 지역의 곧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안에 옹색하게 사는 도시빈민의 방에서도 게바라의 눈길과 마주친다. 지난 1967년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던 볼리비아에서도 쉽사리 체 게바라를 만난다. 볼리비아 내륙 제2의 도시 산타 크루즈의 토산품 가게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체 게바라 티셔츠와 그의 얼굴을 새긴 나무조각품들이 늘어서 있다.
  
  쿠바와 볼리비아뿐 아니다. 지구촌 어딜 가나 체 게바라와 만난다.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브랜드라 할 별 달린 모자를 쓴 젊은이들, 가슴에 그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긴 여인들, 그리고 평전을 비롯한 수많은 게바라 관련 책자들, 그의 얼굴을 담은 목걸이, 시계, 재떨이....지난해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다시 한번 대중의 가슴에 다가왔다.
  
  쿠바혁명 이어 남미혁명의 꿈
  
 
볼리비아 산악지대의 체 게바라 활동 근거지를 가리키는 팻말 ⓒ김재명

  1928년 6월 14일생인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스네스토 게바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중상류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였다. 1950년, 1953년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길에서 게바라는 빈곤층 민중들의 고단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생각하게 됐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멕시코 툭스판에서 쿠바 정치망명객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그러나 정부군 기습을 받아 1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게바라가 이끄는 일단의 무장군은 1958년 12월 28일 치밀한 작전과 대담한 공격으로 쿠바 중부도시 산타 클라라를 점령, 쿠바혁명 성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바로 뒤 바티스타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9년 1월 2일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를 접수했다. 그 뒤 1964년까지 게바라는 국제사회(특히 제3세계 비동맹권)으로부터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힘썼다. 유엔을 방문해 연설하고 러시아, 중국을 찾았다. 1960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에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을 이끌기 위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보내고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였다. 6개월만에 아프리카에서 비밀리에 쿠바로 돌아온 게바라는 다시 볼리비아를 남미혁명기지로 삼기 위한 준비작업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1966년 11월 3일 변장한 채 위조여권으로 라 파즈 공항을 거쳐 볼리비아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11월7일 낭카와수 강변의 혁명기지에 닿았다.
  
1966년말 낭카와수 강변에 세워진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 ⓒ김재명

  낭카와수 강변에 남미 혁명기지 세워
  
  체 게바라가 남미혁명의 꿈을 가슴에 품고 볼리비아에 설치했던 근거지는 남미대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산맥의 기슭이라 할 저지대인 낭카와수 강변.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외딴 지역이다. 그곳을 찾아가려면, 먼저 산타 크루즈에서 버스를 타고 6-8시간쯤 남쪽으로 달려 ‘라구아니스’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가까운 곳에 흐르는 낭카와수 강. 리오 그란데 강의 지류다. ⓒ김재명

  중남미에서 아이티와 더불어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나라가 볼리비아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연 9백 달러도 안 된다. 그러니 도로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투자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비만 조금 왔다 하면, 도로가 물에 잠기거나 끊기기 십상이다. 버스 승객들마저 힘을 합쳐 파인 도로를 흙이나 나무로 메우는 작업을 거듭하며 나아가곤 했다. 오후 1시에 산타 크루즈를 떠난 버스는 예정 도착시각 7시를 넘겨 밤 10시에야 라구니아스에 닿았다.
  
  문제는 다음날이다. 숙소에서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그치길 마음 졸이며 바라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이다. 숙소 주인의 주선으로 마을 주민으로부터 브라질산 4륜 구동차를 빌렸다.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급한 사정으로 현장에 함께 갈 수는 없다”는 말에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볼리비아 군에 입대했다가 휴가차 나왔다는 주인집 아들과 그 남동생이 안내자로 따라 붙었다. 게바라가 설치했던 혁명근거지는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 이 지역 일대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의 한 지류인 낭카와수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까지 닿는 데도 거의 3시간이 걸렸다. 비포장 도로 곳곳의 비포장 도로가 밤새 내린 비로 무너져 내렸거나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탓이었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에 살고 있는 볼리비아 원주민. ⓒ김재명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는 지금 누군가의 농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현장에 들어서니, 남루한 옷을 입은 소작인 부부가 맞아준다. 그들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닌다. 그 꼬마에게 “체 게바라!”라고 말을 건네자, 그도 잘 알고 있다는 듯 환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해 가느다란 손을 쭉 내민다. 체 게바라는 그곳에 함석지붕으로 된 가건물을 지어놓았다. 그래서 그 혁명기지는 게릴라들 사이에 통칭 ‘함석집’(zinc house)으로 일컬어졌다.
  
  볼리비아 현지세력과의 갈등
  
  체 게바라와 함께한 게릴라는 모두 50명. 국적별로는 쿠바인 18명(체 게바라 포함), 페루인 3명, 볼리비아인 29명이었다. 총인원이 50명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은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과의 협력이 이뤄지지 못한 탓이었다. 1966년 12월 31일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가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을 비밀리에 방문, 체 게바라와 마주 앉았다. 몬헤는 “볼리비아 땅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은 내가 지도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체 게바라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몬헤는 이미 게바라 대열에 합류한 볼리비아 출신 게릴라들에게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당시 쿠바에서 무장훈련을 받은 뒤 낭카와수로 향할 예정이던 볼리비아인들에게도 합류를 거부하도록 명령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자체의 사회혁명보다는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삼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그의 혁명을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라과이)로 수출한다는 점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의 전략적 목표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게바라에겐 결정적 타격으로 작용했다.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바라를 모스크바와는 이념을 달리하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근거지를 잘못 골랐다“
  
  볼리비아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남미의 심장부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굳건한 혁명기지를 세움으로써 남미에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어도 3년 전부터 사전준비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작업을 도왔던 인물이‘타니아’(본명은 하이데 타마라 붕케, 1937-1967년)란 이름을 가진 유태계 아르헨티나 여인이다. 1964년 체 게바라는 타니아를 볼리비아로 파견, 사전 탐색작업을 맡겼다(타니아는 1967년 3월 낭카와수 강변의 근거지에 왔다가 게릴라부대에 합류, 그 5개월 뒤 볼리비아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볼리비아에서 극적으로 탈출, 쿠바로 돌아왔던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폼보(아리 빌레가스)가 남긴 한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낭카와수 기지를 후방 안전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실제 게릴라 활동무대는 그보다 훨씬 북쪽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그 지역들에서 무장활동을 펴가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쿠바에서 훈련 받은 볼리비아 게릴라들을 낭카와수 지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럼으로써 볼리비아 내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 산맥 줄기를 타고 혁명기지를 넓혀간다는 것이 체 게바라의 복안이었다.
  
체 게바라 게릴라 부대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 지류에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재명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폈던 볼리비아인 형제가 있다. 볼리비아 공산당원 출신으로 일찍부터 페루와 아르헨티나 산악지대를 근거로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폈던 ‘코코’(본명은 로베르토 페레도, 1938-1967년), 볼리비아 군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살아남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기를 노리던 중 사살됐던‘인티’(귀도 알바로 페레도, 1937-1969년)다.
  
  그 두 사람의 동생 오스발도 페레도는 현재 볼리비아 제2의 대도시 산타 크루즈의 시의원.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나온 오스발도도 형들을 따라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볼리비아 산 속의 체 게바라가 날마다 일어난 일과 감상을 적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도 ‘코코와 인티의 동생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곧 합류할 예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쿠바에 머물던 중 체 게바라 피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울었다. 산타 크루즈 시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오스발도 페레도(65)의 증언.
  
  “당시 많은 볼리비아 인들이 체 게바라 대열에 합류할 목적으로 쿠바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대부분이 낭카와수 기지로 가지 않고 이탈했다. 1967년 10월 체 게바라가 죽은 뒤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형 인티를 볼리비아 라파즈의 아지트에서 만나, 무엇 때문에 우리의 혁명투쟁이 실패로 돌아갔는가를 함께 논의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볼리비아 공산당의 배신적 행위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볼리비아 공산당에서 스스로 탈당을 했지, 공산당 지도자 몬헤가 지배하는 당에서 쫓겨난 게 아니다. 몬헤는 배신자로서의 더러운 이름을 지닌 채,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또다른 실패요인은 볼리비아 내륙 낭카와수 강가의 혁명기지가 너무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기엔 적절할지 몰라도, 체 게바라의 사회혁명 이념을 일반민중에 퍼뜨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이 축적된 볼리비아 북부 코차밤바 같은 지역이 혁명 근거지로선 더 적절했을 것이다”
  
  게바라의 품성 말해주는 일화들
  
  볼리비아에서 죽임을 당하기 몇 개월 전부터 체 게바라는 몹시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의 포위공격을 견디느라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일부는 스스로의 오줌을 받아마시기도 했다. 게바라의 몸도 갈수록 쇠약해갔다. 어렸을 때부터의 지병인 기침(기관지 천식)이 도져 그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약은 없었다. 비밀 아지트에 숨겨두었던 기침약은 이미 볼리비아군의 수색으로 뺏겨버린 상태였다. 페레도는 체 게바라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의 펴다 죽었던 형제(코코와 인티)의 친동생인 오스발도 페레도. 그도 모스크바와 쿠바를 거쳐 볼리비아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김재명

  “형 인티가 볼리비아 보안군에게 사살되기 전 라파스의 비밀 아지트에서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 시절 체 게바라는 게릴라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의무를 다하려 했다. 식사 당번이나 청소 당번, 그리고 외곽 보초도 남들처럼 똑같이 섰다. 게바라는 그 무렵 기관지가 약해져 고생을 했다. 천식이 도지자, 동료들이 행군할 때 무거운 배낭 메는 일에서 체 게바라를 뺀 적이 있다. 그러나 게바라는 혁명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곧 배낭을 메고 앞장서 걸어갔다”
  
  다른 게릴라들에 비하면 게바라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튼튼한 편이었다. 그 시절의 체 게바라를 고민하도록 만든 또다른 문제가 게릴라 가운데 병약자와 부상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다가는 행군 속도가 느려, 볼리비아 추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페레도의 증언.
  
  “형 인티의 증언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부상자와 병약자들을 버리지 않았다. 게바라는 사단 규모의 볼리비아 군이 주둔 중이던 바예그란데를 기습, 약국에서 약품들을 얻어내 병약자들을 치료한다는 대담한 작전마저 세웠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원들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끝내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부상자들을 버리는 쪽으로 결정했더라면, 아무리 볼리비아군의 포위가 삼엄했다 하더라도 나의 형 인티가 그랬던 것처럼, 게바라도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체 게바라가 콩고(1965년)와 볼리비아(1966-67년)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1960년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유럽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한편으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지구촌 곳곳에선 좌익게릴라들이 사회변혁을 꾀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던 체 게바라.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남미혁명을 꿈꾸었던 체 게바라는 말 그대로 꿈을 좇았던 몽상적 행동가였나, 아니면 철저한 자기희생에 바탕한 휴머니스트였나.

 

 

 

 

 

  혁명아 체 게바라의 마지막 날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4>
  2005-02-28 오전 10:23:42
  체 게바라(1928-1967년)를 말할 때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인구 20만의 도시 산타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엔 체 게바라 혁명기념탑과 아울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기념관 안엔 체 게바라를 비롯,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무장 게릴라활동을 펴다 죽은 17명의 혁명투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 시신을 산타 클라라로 옮겨온 것은 바로 그곳에서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사에 커다란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산타 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에 타고 들어오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 항복을 받아냈다. 산타 클라라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통보했고, 바티스타는 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 바로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담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초상. ⓒ김재명

  그로부터 8년 뒤, 11개월에 걸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은 끝내 그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샀다. 그냥 빼앗는 일은 없었다. 체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 1966년 9월 2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 일행이 그날 새벽 2,280미터 고지의 외딴 산간마을인 피카초에 들어서자 “농부들이 (우리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식량을 빼앗지 않았고 예의 발랐다”
  
  피카초 마을은 열흘 뒤 게바라가 볼리비아 특수군에 붙잡힌 채 압송돼 와 사살 당했던 라 기에라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이다. 그 마을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던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알레한드리나 스모야(67). 오랜 찌든 가난 탓일까, 이빨이 하나만 남은 게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죽기 열흘 전 그를 만났던 볼리비아 여인(피카초 마을). ⓒ김재명

  “그때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나쁜 사람들이 떼지어 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라디오 같은 게 없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질 잘 몰랐다. 그런 어느 날(1966년 9월 26일) 새벽, 체 게바라 일행이 우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거칠고 거만한 볼리비아 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사선 불을 피워 끓여 먹었다. 몹시 시장해 보였다. 지금도 체 게바라를 기억한다. 그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보였다. 내 어린 아들(시실로 바냐와, 당시 두 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커야한다’고 말해주었다”
  
  1967년 10월 8일 라 기에라 마을 바로 북쪽 유로(Yuro) 계곡에서 부상당한 채 체포된 체 게바라는 곧바로 라 기에라 마을로 압송돼왔다. 그리곤 그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갇혔다. 학교라야 교실 두 개뿐인, 한국으로 치면 분교(分校)쯤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때 함께 붙잡혔던 ‘윌리’와 체 게바라는 각각 다른 교실에 갇혔다. 볼리비아 광산노조 출신으로 1932년생인 윌리의 본명은 시몬 쿠바. 모이세스 게바라가 이끄는 볼리비아 광부 12명과 함께 1967년 2월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인 낭카와수 강변에 이르렀다. 운명의 날인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가 다음날 게바라보다 먼저 처형됐다.
  
  한 여교사의 증언하는 게바라의 최후
  
  체 게바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이 있다. 이름은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8년 전 교단에서 물러난 뒤 바예그란데에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녀가 체 게바라를 만났던 날은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가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라이 귀에라의 한 작은 학교교실에 갇혀 있을 때였다. 훌리아는 그때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시골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됐다. ⓒ김재명

  20대 초반의 여인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부인이 됐다. 그녀의 증언.
  
  “오후 어스름할 무렵 체 게라바가 다른 한 명의 포로와 함께 잡혀와 학교 교실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지니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에외였다. 나는 학교 선생이었고, 무엇보다 젊고 예뻤기에 군인들이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때 체 게바라는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두 발도 묶인 채 교실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나 다름 없이 헤어지고 찢어졌고, 신발은 군화가 아닌, 소가죽으로 만든 누런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가 군화를 강물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훌리아의 증언. “게바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다리는 총상을 입은 탓에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체 게바라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에게 왜 이런 투쟁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의 투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의 이상(ideal)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바깥에 나간다면, 당신같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체 게바라가 죽기 직전 앉아있었던 의자. ⓒ김재명
 
  1967년 체 게바라가 죽기 바로 직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전 학교여선생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57).   ⓒ김재명

  “게바라와 밤늦게까지 얘길 나누면서 우린 친구가 됐다. 기억나는 대로 그의 말을 옮긴다면 이렇다. ‘이 학교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학교를 새로 고쳐 짓고 현대적인 학교로 만들겠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주겠다. 트랙터를 보내 길을 넓혀 주겠다.’ 나도 그때 형편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데 한 볼리비아군 장교가 들어서더니,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무장군인들은 체 게바라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때 게바라의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게바라는 마치 아는 누군가가 마을사람들 속에 섞여있나 찾듯이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진을 찍은 뒤 군인들은 다시 게바라를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게바라와 얘길 나누진 못했다. 게바라는 군인들이 지키고 보는 앞에서 나와 얘길 하는 걸 삼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이 대목에서 훌리아는 잠시 울먹이는 표정이 됐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그 총소리는 게바라가 아니라 그와 함께 체포된 윌리를 겨냥한 총소리였다”
  
  “엄마는 체 게바라에게 주려고 조촐한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게 갖다주라고 했다. 게바라는 배가 고팠던 듯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식사는 근래에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나는 빈 접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한두 숫갈을 뜨려 하는데,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바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훌리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당시 현장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존슨 미 행정부와 볼리비아 군부독재정권은 체 게바라의 처리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즉결처형 쪽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체 게바라를 재판에 붙여 국제사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나 볼리비아 양쪽 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바라는 사살된 뒤 다른 게릴라 동료 시신들과 함께 볼리비아 군 헬기로 바예그란데로 실려갔다. 바예그란데는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게바라의 시닌은 그곳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에 눕혀진 채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런 뒤 비밀리에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에 묻혀졌다. 세상엔 그의 시신이 볼리비아 밀림지대에 그냥 내던져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즉결처형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헬리콥터로 옮겨진 다음 일반에 공개됐던 세뇨르 드 말타 병원 빨래터 (바예그란데). ⓒ김재명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정확히 30년 뒤. 게바라는 함께 암매장됐던 동료 게릴라 유해 6구와 함께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볼리비아 혁명과정에서 죽은 다른 11명의 유해도 그 비슷한 시기에 옮겨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게바라가 1958년 쿠바혁명 당시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산타 클라라에 거대한 혁명기념탑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게바라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전사들의 시신을 안장해놓았다.
  
  성취의 땅 쿠바, 좌절의 땅 볼리비아
  
  30대 나이의 체 게바라가 사회혁명의 이상을 품고 투쟁했던 곳이 쿠바와 볼리비아다. 그 두 지역은 게바라 개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선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희망의 땅이었다면, 볼리비아는 좌절과 실패의 땅이다. 볼리비아는 게바라의 혁명적 이상이 움틀 곳은 아니었다. 산타 크루즈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로헤르 뚜에로 교수(정치학)는 “우리 볼리비아 지식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정신적 부채를 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예그란데 외곽 체 게바라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던 곳. 1997년 발굴돼 쿠바로 보내졌다. ⓒ김재명

  게바라가 처형됐던 안데스산맥의 작은 마을 라이게라는 따지고 보면, 게바라를 돕기는커녕 외면했던 곳이다. 게바라가 1966-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투쟁하면서 날마다 하룻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해 남긴 <볼리비아 일기>의 한 기록(1967년 9월 27일)에 따르면, 피카초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아침을 때운 게바라 일행이 라 이게라 마을에 들어서자, “남자들은 다들 사라지고 몇몇 부인들만 남아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게바라를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게바라 박물관이며 제법 큰 동상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이제와 체 게바라의 죽음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것이냐”는 눈총을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바라가 라이게라 마을에서 사살된 뒤 헬리콥터에 실려와 일반에 공개됐던 바예그란데(라이게라 북부 50km 지점에 있는 인구 8천의 작은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곳 문화센터가 만들어놓은 관광 프로그램은 체 게바라와 관련된 여러 곳들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라 할 만했다. 체 게바라의 시신이 놓여있던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 그리고 동료 6명과 함께 비밀리에 암매장했던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 그 지역 화가들이 그린 체 게바라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산타클라라 카페 등등...
  
  바예그란데 문화원 안에 있는 박물관 자체가 체 게바라 관련 유품과 지도들을 빼면 볼 것이 없을 정도다. 안데스 산맥말고는 이렇다할 관광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가 볼리비아다. 그런 까닭일까, 체 게바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볼리비아가 다시 그의 죽음을 상품으로 팔아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지하 달마展 - 가을에서 봄까지

  누굴까
  김지하 달마展-가을에서 봄까지 <29ㆍ끝>
ⓒ프레시안

  아주 멀다.
  그러나 가까워온다.
  눈보라 속인 듯 안개 속인 듯 희미하다.
  누굴까?
  달마가 서쪽에서 오는 것인가!
  (達磨西來意)
  아니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니 곧 무궁무궁의 길인가!
  (環中無窮)
  검은 점은 그친다.
  흰 여백만 남는다.
  문득 유달산(儒達山) 기슭의 한 정원이 떠오른다.
  그 정원의 돌연못 속에 눈동자가 하나 열린 채 떠있었다. 옛 주검이다.
  누굴까?
  
  <김지하 시인의 지상 달마展 ‘가을에서 봄까지’의 마지막 회입니다. 연재해주신 김지하 시인과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김지하 시인의 화랑 달마展 ‘지는 꽃 피는 마음’이 3월 2일(수요일)부터 13일(일요일)까지 인사동 학고재 화랑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김지하/시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인권연대

 
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
[인권연대]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작성날짜: 2005/02/24
인권연대기자

    
시민단체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면서 사실은 시민운동을 이용해 돈벌이나 하고 있다는 비아냥부터 시민운동은 정치적 진출을 위한 발판이다. 정권의 홍위병이다. 대안도 없이 비판만 하는 무책임한 집단이다. 선출되지도 않았고 시민도 없는 집단이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별 이야기가 다 들린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식상한 법인데 듣기에 좋지 않은 이야기인 탓인가, 막상 이런저런 비판을 듣는 시민운동가들은 비판에 대해 상당히 무덤덤해 보인다. 내가 당당하면 그만이지, 내가 깨끗한데 뭐. 일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과도하게’ 부각하면 좋은 뜻을 갖고 고생하는 다수에게 심각한 피해가 갈 수도 있잖아. 뭐 대충 이런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여기다가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불순한 책동이란 생각까지 보태지면 무덤덤한 태도는 이내 방어적으로 변하게 된다. 비판은 모략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에코생협 보도파문으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최 열 환경재단 이사장이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환경단체 신년하례회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시민의신문 DB자료> 이정민 기자 jmlee@ngotimes.net


운동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 자주 내세우는 논리는 실용주의적이다. 명백히 범죄를 구성할 정도의 잘못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까지 엄밀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실용주의 노선의 몇가지 사례이다.  


사례 1: 지역의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지난해 보수적인 색채의 지역개발회로부터 약 2천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지역개발회는 개인 및 장학회 등 법인들이 그 활동가를 위해 목적기탁금 형식으로 모은 돈을 전달했을 뿐이며 ‘어떤 특정한 의도’는 없다고 했고, 활동가가 속한 단체는 “지인 등 20여명이 개별적으로 모아 지원한 후원금을 가지고 우리 단체의 감시. 견제 기능을 문제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활동가는 11년 동안 시민단체에서 일했으며, 지난해 8월 1년간 안식년을 받아 미국의 한 대학으로 NGO 관련 연구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이 단체는 경제정의.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평화적 시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주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례 2: 시민참여, 시민권리 찾기, 시민에 의한 권력 감시, 시민봉사, 재정자립을 주요 활동방향으로 설정하고 활동하는 지역의 대표적 시민단체에 최근 상공회의소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인사가 대표로 취임했다.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에 적임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민단체와 상공회의소의 어색한 간극은 “지금은 보수나 진보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지역 현안을 해결할 때”라는 취임사 한마디로 얼버무려졌다.  


사례 3: 환경운동연합이 최근 원자력발전소 등 감시 대상 기업들에게 물건을 강매했고, 대표가 이사로 있는 자동차 회사에도 대량납품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경련은 “기업에만 판 것은 아니다”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식의 사례는 끝이 없다. 거의 브로커 수준에서 피해자들의 ‘뽀지’나 뜯고 다니다가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시민단체의 잘못이 단순히 일부 인사의 일탈행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말로는 대안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온갖 연줄이 단체를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사례는 너무도 많다. 학연, 지연, 혈연, 정파 등의 패거리가 판을 치고, 패거리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하지 않으면 당장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적당히 밀어주고 당겨주는 구조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쉽지 않다. 패거리의 구조는 연대의 질서라고 불리기도 하고, 동지애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그 배타적이고 속물적인 속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돈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적 풍토에서 회원의 회비만으로 단체를 운영하기 힘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힘든 것과 불가능한 것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시민단체가 이런저런 정부지원금에 눈독을 들이고, 의도가 뻔히 보이는 부당한 지원에 애써 무감각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정부지원금이나 각종 수익사업에 기대 10명이 일하는 것 보다 회비만으로 5명이 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고통스런 선택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세우는 것이 바로 실용주의적 노선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노선이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면 당장에 폐기되어 마땅하다. 운동이 운동이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원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운동에서 원칙이 중요하다고 하여도, 지금이 1987년이 아닌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것이 변했다. 정권교체가 있었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지도 2년이 지났다. 더 이상 운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과연 세상은 바뀌었나?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리던 꿈은 이제 이뤄졌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소외’되고 있고, 아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있으며,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 돈이 없어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 돈이 없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당장의 죽음을 무슨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이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현실은 부의 양극화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근사한 말로 포장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소비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들도 끊임없이 학대당하고 있다. 자연, 공동체, 가족 등 우리가 말로는 소중하다고 인정하는 가치들이 돈과 무한소비 때문에 파괴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상이나 인간은 원래 그래, 현실 사회주의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망해버렸잖아’ 하면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세상이 그래도 희망을 찾아 부단히 움직이고, 큰 방향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고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것 같은 고독 속에서 투쟁에 투쟁을 거듭하는 것이 운동이 아닌가. 운동하는 사람들만이라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원칙을 제시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가난한 민중에게 무엇이 더 유리한가,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골몰하며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이념을 갖고 원칙을 부여잡고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교조적인 태도만 갖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겠냐며 유연한 대응, 즉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실용주의적 노선은 꼭 운동단체가 아니어도 정부, 기업, 언론, 학계 등에서 모두 한결같이 믿고 따르는 노선이 아닌가. 모두들 실용적으로 갈 때,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원칙론자들이 있어야 세상은 그만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운동마저 실용주의적이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운동의 생명과도 같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더 넓은 사무실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인력이나, 이를 통한 더 많은 영향력과 더 많은 일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운동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생명을 잃고서 얻는 더 큰 영향력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 이 글은 [열린사회 2005년 3,4월호]에 게재된 내용임을 밝혀 둡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언론매체 주소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