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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3

노동해방투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 체르니셰프스끼의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해방 투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
체르니셰프스끼의 ≪무엇을 할 것인가≫




“정당에서는 필연성이 이미 자유가 된다. 그 결과 정당의 내부규율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가치가 만들어진다. 이 규율은 성장잠재력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정당 생활의 요소로는 줏대(과거의 문화가 주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 절개(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 없는 의지), 긍지(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를 들 수 있다.” 이렇게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하나의 정당이 형성되는 데 필수적인 조건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했다. 이 요약은 단순히 추상적 사유로부터 획득한 결론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요약의 지대한 의의는 그가 이끌었던 이탈리아공산당의 경험, 더 나아가 코민테른의 경험을 사유를 통해 일반화함으로써 도출한 결론이라는 데 있다. 운동의 새로운 혁신적 요소를 대변하는 노동해방정당은 자신이 대변하는 요소의 특징에 부합하는 성격을 확립함으로서만 형성될 수 있다.



줏대, 절개, 긍지



그렇다면 낡은 것이 가하는 어떤 타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보존할 수 있을 만큼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새로운 정당의 맹아가 창출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이 정당이 붕괴되지 않고서 일관되게 성장하면서 낡은 것을 압도하고 낡은 것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인가?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것은 당연히 극도로 미약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 새로운 것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누리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는 거대한 낡은 것에 굴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이유는 낡은 것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우월감, 단호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람시는 정당 생활의 요소로서 줏대, 절개, 긍지로 요약했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필수적 요소를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면 어떤 식으로도 새로운 것은 자신을 지켜낼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낡은 것이 가하는 영향력에 의해 질식당하거나 포섭되어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는 탄압과 회유, 이데올로기와 정치, 문화와 도덕, 관습과 전통, 법과 의회 등 모든 유형의 직간접적 영향력이 포함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 가능성은 이 줏대, 절개, 긍지가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만약 이 요소들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면 성장할 수 없으며 살아남을 수도 없다. 노동해방정당의 맹아는 이 요소들이 일정한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여, 낡은 것이 행사하는 어떠한 영향력에도 굽힘없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때에 이르러 정확하게 탄생한다. 즉 새로운 것을 반영하여 등장한 모든 맹아들이 생명력 있는 것으로 증명되지는 않으며, 그것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하여 충분한 수준의 줏대, 절개, 긍지가 확립되고서야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노동해방정당의 맹아는 등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정당의 맹아는 자신이 확립하고 있는 줏대, 절개, 의지를 부단히 보다 넓은 범위의 노동자계급에게로 확대시켜 나가며,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확고한 노동해방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확립되어 가면 노동해방운동은 강력한 내부규율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과업에 대한 자신감과 부동의 확신, 고귀한 긍지에 입각한 활동은 강제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따라서 규율은 관료적 강제가 아니라 집단적 영향력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해방운동에서 각 구성원들의 행위는 성문화된 규약이 존재하느냐의 유무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유의지에 입각한 것이 되며, 규율은 필연성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해방 조직은 내부규율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힘을 확립하게 되며, 이는 엄격하게 규율 잡혀 있으며 통일된 세력을 낳게 된다. 따라서 어떤 노동운동 조직의 성장잠재력은 그 조직에서 확립된 내부규율의 정도에 의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내부규율의 정도는 정확히 조직이 확립하고 있는 줏대, 절개, 의지 정도와 일치하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노동해방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의 핵심과제인 이곳 한국에서도 이제까지 새로운 것을 대변하고자 했으며 노동자당을 창건하고자 했던 크고 작은 무수한 세력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하나의 세력도 그러한 임무를 완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단 하나의 세력도 노동해방정당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력 있는 맹아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크고 작은 정치조류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났지만 그 모든 조류들은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에 의해 질식당해 붕괴하여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의 영향력에 포섭되어 초라한 개량주의 세력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낡은 것이 가하는 영향력을 이겨낼 만한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하는 데 실패했고 당연히 내적규율을 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관된 노동해방 투사



그렇다면 한국노동운동에서 노동해방정당이 창건 가능한 시기는 언제에 이르러서일까? 그 시기는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맞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정치경향이 등장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것을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일관되게 대변하는 노동해방 정치세력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이 세력은 정당의 맹아를 확립할 만큼의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해방운동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해야만 한다. 강철 같은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자들은 다름 아닌 노동해방 투사들이며, 이들이 구성하는 조직이 곧 노동해방정당이다. 우리 운동이 진정한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맹아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노동해방 투사들이 충분히 육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한 토대는 닦였다. 그것은 노동해방 투사들이 기반하고 있는 사상이 줏대, 절개, 의지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도록 충분한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사상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현장활동, 문화, 도덕, 조직, 동지, 결혼, 관습, 가족 등 모든 측면에서 낡은 부르주아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력에 단호하게 맞설만한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일관된 노동해방 투사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투사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1800년대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권유한다. 그것은 “체르니셰프스끼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진지한 사람은 누구나 다 혁명가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다음과 같은 것, 즉 혁명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어야 하며 그는 어떤 행동규칙을 준수해야 하고, 어떻게 그의 목표를 수행해 나가야 하며, 그리고 어떤 수단에 의해서 그것을 달성해야만 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는 데에 있기”(레닌)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의의를 지녔던 체르니셰프스끼의 이 소설은 당연히 자신을 단호한 투사로 단련시키면서 노동해방정당을 창건하고자 했던 위대한 노동운동가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마야꼬프스키와 같은 러시아의 대표적 혁명가들은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레닌은 특별히 이 책을 좋아했으며, 그는 ≪맑스엥겔스전집≫과 나란히 이 책을 꼽아놓고는 틈만 나면 이 소설을 읽었다. 심지어 그는 1902년에 쓴 자신의 유명한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제목을 바로 이 소설에서 빌려올 정도였다. 그는 “그 소설은 나의 형을 사로잡았고 나 또한 사로잡았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내걸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소설이다”라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자신이 받은 감명을 표현했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은 단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만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 아니었다. 맑스 또한 체르니셰프스끼 소설의 의의를 극찬했고, 직접 체르니셰프스끼의 전기를 집필하여 서유럽의 노동해방 운동가들에게 보급하려 했을 정도였다(건강상의 이유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는 않았다). 맑스와 그의 아내와 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또 읽었으며,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이 소설이 제기한 규범과 생활방식을 따르려고 했다. 이처럼 당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이 소설을 극찬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소설이 노동해방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인적 요소로서 노동해방 투사들을 배양하기 위한 방도와 투사의 모범적 상을 뛰어나게 형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노동해방정당 건설이라는 과업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영감을 끌어내야만 하며, 이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단련해 나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체르니셰프스끼



사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그와 같은 혁혁한 의의를 획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체르니셰프스끼는 러시아에서 수많은 투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적극적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에 착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투철한 투사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결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삶을 다루지 않는다면 이 소설의 의의를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28년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말에 이미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고 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맑스와는 독립적인 길을 따라 독창적으로 유물론을 받아들였으며, 러시아에서 유물론의 전통을 확립한 창시자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에서 만든다.”(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는 당시 러시아의 급진적 조류 중 바쿠닌주의로 대표되는 ‘주의주의’적인 관념론적 태도와 뚜렷하게 구별되면서 사상적으로 양대 경향을 형성하고 있던 체르니셰프스끼 사상의 근간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운동이 전진함에 따라 러시아에서는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이 지배권을 획득해 나가게 된다. 사실 맑스가 체르니셰프스끼의 전기를 집필하여 제1인터내셔널에 보급하고자 했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터내셔널에서 발호하던 바쿠닌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데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것이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외부에서는 마치 러시아 운동이 바쿠닌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러시아에서는 바쿠닌주의의 관념론적 입장이 퇴조하면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이 젊은 층의 다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따라서 ‘러시아 운동가들은 모두 나를 따르고 있다’는 바쿠닌의 허장성세를 폭로하면서 유물론적 입장을 전파하는 데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처럼 효과적인 것은 없었던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측면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제1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주의 입장에 섰다가 이후에 이 소설에 충격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버리고 맑스주의로 전향한 쥘 게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파리꼬뮌 투사로서 망명 중이던 게드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는 자신의 ‘주의주의’적 입장을 버리고는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유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운동가의 주관적 의지만이 아니라 현실의 객관적 토대에 입각하여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 맑스주의에 입각한 최초의 정당으로서 사회당을 건설하는 창립자이자 맑스주의를 프랑스에 보급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유물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곧 소설 형식으로 쓰인 유물론의 보고(寶庫)이다.

또한 체르니셰프스끼는 러시아에서 노동해방운동이 발생하기 이전 시기에 혁명적이며 적극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인민주의 운동’의 주요한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1851년에 교사가 된 그는 학생들에게 자유와 혁명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동시대인≫지에 참가하여 정치평론을 통해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나갔다. 레닌은 당시에 그가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농업개혁이 도입되기 시작했을 뿐인 당시에 (당시 그것은 유럽에서조차 아직 적절하게 해명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그처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사회와 국가가 근로인민과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으로 되고, 농민계급이 그들의 토지몰수와 파멸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사회계급들에 의해 지배,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르니셰프스끼와 같은 천재성이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는 이러한 농업개혁에 저항하고 그것을 저주했으며 그것이 실패하기를, 그래서 러시아 곳곳에서 계급투쟁을 고취시킬 충돌이 발생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는 아직 혁명성과 진보적 의의를 잃지 않고 있던 19세기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을 대표했다.

그의 영향력이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져가자 짜르 당국은 1862년에 그를 체포하여 형무소의 강제노역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도 그의 적극적인 활동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는 검열관의 부주의를 틈타서, 그리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교묘한 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서술함으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시대인≫에 기고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기저기에서 검열관을 속이기 위한 장치와 생략이 포함된 이 소설은 상당히 난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한 운동가들은 이 소설의 거대한 의의를 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이 소설은 러시아 전역의 혁명적 지식인들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능동적이며 위대하고 헌신적인 선각자들의 모습을 따라 인민의 운동 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불탔다. 이른바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이 소설의 영향력 하에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낡은 체제에 맞서고자 하는 줏대, 절개, 긍지를 발전시킨 무수한 젊은 운동가들이 기존 사회가 가하는 전통과 영향력, 억압을 모든 영역에서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이 책을 들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한마디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후에 볼셰비키로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의 표현이자 추동력이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레닌이 볼셰비즘 성립의 3가지 원천 중 하나로 규정한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성공은 짜르 당국으로 하여금 체르니셰프스끼를 더욱 강력하게 억압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나마 누리던 약간의 집필권까지 박탈당한 채 20년간 강제노동과 유배에 시달리다, 1889년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20여년의 감옥생활과 짜르 정부의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았으며, 일관되게 투사의 자세를 견지했고, 모든 러시아 운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체르니셰프스끼는 유배 말년에는 맑스주의에 거의 접근했었다(그는 러시아 농촌공동체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해갔다). 만약 그가 유형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서유럽의 운동과 교류할 수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러시아 노동해방운동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운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젊은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를 건설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적인 바쿠닌 사상을 거부하면서 확고하게 맑스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플레하노프와 같은 러시아 노동해방운동의 1세대가 탄생했다. 이처럼 그의 삶 자체가 투사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이 소설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노동해방 투사의 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새로운 인간형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베로치까, 로뿌호프, 끼르사노프, 라흐메또프이다. 베로치까는 평범한 한 여인에서 혁명가로 성장해 나가는 인물로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당시의 봉건적 러시아에서 여성은 사회의 낡은 찌꺼기들이 모조리 침전되어 이중 삼중으로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존재였으므로, 베로치까와 같은 여성을 ‘평범한 사람에서 혁명가로 나아가는 전형’으로 도입한 것은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낡은 요소들에 맞서면서 새로운 요소가 성장해 나가는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주인공들인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는 기본적으로는 완성된 혁명가의 상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이지만 검열을 속일 필요성 때문에 그것을 순수하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불충분하게만 드러난 혁명가의 상을 보충하기 위한 주변인물로서 라흐메또프가 슬쩍 도입된다. 그와 로뿌호프, 끼르사노프를 결합시키면 그것이 바로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고자 했던 완성된 혁명가의 상이다.

이 소설에 등장한 혁명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살펴보자. 그들은 공히 삶에 있어서 진지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일관되게 추구하며, 단호하다. 낡은 사회의 관습이나 편견, 제약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들을 고려하지만 (가령 로뿌호프는 결혼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베로치까를 속물적이고 봉건적인 가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마찬가지로 자살극을 통해 새로운 신분을 얻음으로써 법률적으로 베로치까가 자유롭게 끼르사노프와 재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발한 재치를 발휘한다) 그것들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면서 이겨나간다. 그리고 자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확립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낡은 사회가 행사하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의지로서 줏대, 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의 두려움 없는 의지로서 절개의 화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올바른 것과 그른 것(소설에서는 ‘이기주의 이론’이라고 재미있게 포장된 것)을 냉철하고도 극히 현실적인 유물론적 분석에 입각하여 구별해낸다. 그들은 대충 피상적으로 사고하면서 진지하지 못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사물의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충분하고도 심사숙고된 분석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며, 한번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한 추진력에 입각하여 행동에 옮긴다. 그들은 원대한 이상에 입각하여 행동하지만, 그 이상을 현실이 제공하는 실제 수단을 통해 구현하려 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이 소설은 투사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물론적 방법을 채택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는 협동조합 작업의 우월성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기하는 방식은 추상화된 이론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여공들이 노동하는 데에서 어떻게 집단 작업이 개인 작업에 비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수행하는 노동이 자본가의 감독 아래 강제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에 비해 어떻게 더욱 높은 생산능력을 발휘하는가, 그리고 생활하는 데서도 어떻게 집단생활이 훨씬 더 유리한가를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식으로, 심지어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까지 보여줌으로써 입증하는 방식이다.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을 마지막 하나의 요소에 이르기까지 냉철하게 분석한다. 최악의 가능성에 항상 대비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며, 말에 대한 책임성에서 확고하다. 그들은 유물론자이자 진지한 사람들이다.



솔직함



다음으로 그들은 자신과 동료에게 진실로 솔직하다. 그들은 자신과 동료를 기만하는 일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맞대면하면서 오류를 인정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원인을 끝까지 파헤쳐 들어가서 실제적인 해결책을 마련한다. 그리고 잘못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엄격하게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동료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비판을 가하며 반대로 동료의 타당한 비판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게나 동료에게나 솔직하지 않는 것은 가장 커다란 죄악이며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에게는 자신이 택한 삶이 결코 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삶을 택한 것은 그 삶이 자신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기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통해 명예나 부, 높은 지위와 같은 어떤 대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긍지)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 긍지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그들은 자신에게나 동료들 간에서나 이 긍지에 입각하여 엄격한 자발적 규율을 강제한다. 그들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상호간에서나 엄격하게 규율 잡혀 있지만, 이 규율은 타율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내적 결속력과 연대성은 강력하다.

가령 체르니셰프스끼가 혁명가의 상을 드러내기 위한 매개체로 설정한 사랑의 감정을 둘러싸고 베로치까, 로뿌호프, 끼르사노프가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 간에 취한 태도를 살펴보자. 로뿌호프의 도움으로 봉건적 굴레로부터 탈출한 베로치까는 그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로뿌호프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녀를 구원했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베로치까가 성장하여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립적인 인간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녀는 차츰 로뿌호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심과 고마움이 겹친 그런 감정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는 로뿌호프와는 성격이 맞지 않았고, 오히려 로뿌호프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 진실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베로치까였지만, 점차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를 솔직하게 로뿌호프에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독립적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더라도 진실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솔직함을 얻어갔던 것이다.

진정 놀라운 것은 로뿌호프의 태도다. 로뿌호프는 베로치까가 꿈 이야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어렴풋이 드러낸 진실을 예리하게 추적해 들어가서 먼저 깨닫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 생활을 잃어야만 한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베로치까가 아직 어린 상황에서는 자신이 훨씬 일찍 진실을 파악해야만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질책한다. 또한 진실을 받아들이고는 끼르사노프와 베로치까의 결합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 끼르사노프도 마찬가지다. 그는 베로치까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엄격하게 절제한다. 그는 동료인 로뿌호프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면서 극도로 엄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것이다. 하지만 베로치까의 감정이 분명해진 이후에 그와 로뿌호프는 정말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 사이의 동료적 관계는 조금도 손상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로 자신의 불철저함을 들며 서로 책임을 지려 했지 동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 않았다.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가 취한 이러한 태도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자신과 동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하며, 어떤 규율을 확립해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자발적이지만 극도로 엄격한 규율, 자신에 대한 깊은 확신과 동료에 대한 깊은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규율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 규율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신과 서로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며, 어떤 기만도 거부하면서 솔직한 태도로 임한다. 즉 이들이 자신과 상호간에 맺는 관계는 노동해방운동, 노동해방정당에 필요한 자발적 내부규율이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는 투사들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서 줏대, 절개, 긍지가 어떤 것인가, 이들 상호간에 집단적으로 맺어야만 하는 관계의 원칙과 자발적인 내부규율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사물을 유물론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의 시대적 제약



그런데 이 소설을 보는 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당시의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의 흔적과 시대적 한계가 이 소설에 불가피하게 배어있다는 점이다. 비록 체르니셰프스끼가 이미 유물론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는 가장 최초로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에 주목한 운동가였지만 이 소설이 쓰인 1862년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우선 체르니셰프스끼가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는 아직 진정한 노동해방운동은 러시아에서 태동하지 않았으며, 아직 자본가계급이 진보성을 잃지 않았고 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소설에서는 자본가들이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적 갈등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맨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상복을 입은 수수께끼의 여인은 테러리스트 혁명가(이 소설에서는 사냥꾼으로 묘사된다)를 남편으로 두었다가 남편을 잃은 여인이다. 인민주의 진영에서 테러리즘이 번성했던 것을 반영하여 체르니셰프스끼는 테러리스트를 혁명가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아직 러시아에서 노동운동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 다시 말해 투사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인 집단에서 배출되던 시절에 나왔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당시에 대부분의 혁명가를 제공하던 특정한 배타적 집단, 즉 혁명적 지식인들이다.

아울러 당시는 러시아에서 노동대중의 투쟁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투쟁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이란 옷을 만드는 협동조합공장에 참여하는 여성노동자들뿐인데, 이들은 계급투쟁을 통해 해방되기를 추구하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공장에 참여함으로써 해방되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이 협동조합공장을 묘사하면서 체르니셰프스끼는 베로치까가 이들을 자주적 존재로 대하고 그들이 스스로 집단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도록 배려하는 방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노동자를 완전히 수동적인 위치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지식인들이 ‘인민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서 취해야만 하는 태도 즉, ‘인민의 해방은 인민 자신의 운동이다’라는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민들, 특히 노동자계급 대중의 투쟁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이 소설을 썼고, 당연히 그들의 자주적 운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들 속에서 떠오르는 투사의 상을 그려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의 하층, 다시 말해 가장 평범한 대중 속에서 발생하는 운동과 그 운동 속에서 배출되는 투사의 상을 그려내지는 못한다. 이 약점은 그의 한계라기보다는 그가 발 딛고 있는 시대의 한계였으며, 당시 러시아의 사회운동이 직면하고 있었던 불가피한 한계의 반영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소설을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읽어야만 하며, 시대가 변화한 지금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가치 있는 것을 추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 시대의 잣대와 기준으로 이 소설을 보려 한다면 아마 금방 식상해질 것이며,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시대의 맥박을 느낄 수 있으며, 운동을 역사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라



이 소설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였으므로, 그것은 시대가 전진함에 따라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노동해방운동의 등장과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투쟁의 발전, 그리고 노동운동의 전진에 따라 평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다수의 투사들이 떠오르게 되면서 러시아소설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고리끼의 소설이다.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 이제 주인공은 평범한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다. 주인공인 평범한 노동자가 거대한 계급투쟁에 참여하면서 노동해방 투사로 발전하는 과정, 마찬가지로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의 영향 아래 투쟁에 눈떠가는 과정이 그 소설의 줄거리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위로부터 해방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스스로 해방되어 가는 능동적인 존재이며, 투사는 특수한 사회집단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노동대중으로부터 떠오른다. 고리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속에서 투사들이 배출되는 훨씬 발전한 운동단계에서 소설을 썼고, 당연히 그것을 반영했던 것이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과 고리끼의 소설은 전혀 다른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집단을 반영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는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소설 모두 ‘새로운 것’의 본질적 특성을 반영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을 다시 요약하면, 줏대(과거의 문화가 주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 절개(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 없는 의지), 긍지(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이다.

노동해방 투사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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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4-조갑제와 황장엽, 주사파와 민주노동당

조갑제와 황장엽, 주사파와 민주노동당
[진보의 개념4] 한국의 김일성주의자가 진보세력에서 이탈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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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 등을 간단하게 언급했는데, 김일성 주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논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몇 가지를 확인해두고자 한다.

우선, 혹자는 한국에 김일성주의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적어도 한명은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하기도 힘든 살인범이 분명히 우리 사회에 살고 있고,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하는 이름모를 독지가도 있듯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는 마당에 특정한 사상, 즉 김일성주의를 받아들인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고작 한 명을 가지고 어떠한 글을 쓴다는 것은 비정상적으로 보일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논쟁은 일대일일 경우가 많으니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아래에 밝히겠다. 이처럼 이 글은 한국에 존재하리라고 판단되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니 행여나 이 글을 보는 수구세력, 수구신문이 한 명을 만 명으로 잘못 읽고 호들갑을 떨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본론에 앞서 또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글의 한계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행여나 김일성주의자가 이 글에 반박을 하고 싶어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다.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을 각오해야 하기에 힘들고, 설령 무기명으로 내용이 전달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어줄 인터넷 사이트도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논쟁은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국가보안법 폐지만을 기다려 필요한 논쟁을 무기한 연기하는 것 또한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선언했고 이러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 김일성주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느 정도의 타협선을 찾아 글을 전개할까 한다. 즉, 김일성주의의 틀린 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왜 김일성주의와 김일성주의자가 서로 모순적인지, 왜 그들의 행보가 어리석은지에 대해 집중해서 논하려고 한다. 이 정도로 타협한다면, 김일성주의자의 반론이 없더라도 너무 일방적인 논쟁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이 글에서 말하는 김일성주의자란, 주체사상을 수용한 것, 더 구체적으로 김일성 수령론을 수용한 자를 일컫는다.

이런 김일성주의자는 그 가능성 면에서 한나라당 내에도 있을 수 있고, 조선일보 내에도 있을 수 있으며 민주노동당 내에도 있을 수 있다. 나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내에 있는 김일성주의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민주노동당 내에 있을 수 있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것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소지도 있으나, 이미 말했듯이 이는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 7만 명 중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에 대한 글일 따름이다.

짐작컨대, 민주노동당 내에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 이런 이유에서 민주노동당을 택했을 것이다. 즉, 아마도 김일성주의자는 민주노동당이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 입장에서 사상의 자유를 논하고 북한에 가장 덜 적대적이라는 것을 이유로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기독교인이 전도하듯 김일성주의를 전파하는 곳으로 민주노동당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하다면 김일성주의자는 엄청난 착각을 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중에 기본인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을 위해 북한에 덜 적대적이라고 해서 김일성주의가 다른 곳보다 잘 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이다. 실제는 그와 정반대로 민주노동당이야말로 김일성주의가 퍼져가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진보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제일 앞장섰다는 것은 진보세력이 어떠한 형식의 사상 탄압, 양심 탄압, 정치적 자유 억제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즉, 진보세력이 한국 내에서 이러한 기본적 민주주의적 가치의 수호에 가장 최선두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보세력은 개인숭배, 정치적 자유 실종, 절차적 민주주의 무시로 대표되는 김일성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진보세력 내에서 김일성주의가 잘 퍼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거꾸로 한국 내에서 김일성주의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곳은 다름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 집단이다. 구체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 반대를 외치는, 몸은 21세기 사람이면서도 머리는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모인 그러한 곳이 김일성주의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곳이다. 즉, 김일성주의자가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곳은 수구세력, 수구신문의 내부라는 것이다.

김일성주의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다. 민주주의의 가치에 무지한 이런 이들이 현재 외치는 구호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 외피가 아니라 그 본질적인 사고체계에 주목해야 한다. 그 본질적인 사고체계가 동일하면, 이들을 거꾸로만 세워 놓으면 당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수구세력의 싱크탱크를 자처하는 조갑제가 평양 주체사상의 거두 황장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주주의 추종자에게 김일성주의를 이식하려면 그의 사상체계를 완전히 해체해야 하는 “고달픔”이 따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대신 박정희교에 몸담아 개인을 숭배하는 것에 이골이 난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주의에서 김일성을 박정희로 대체하기만 하면 아무런 저항이 없다. 실제로 황장엽은 조갑제의 우상이 되기 위해 주체사상을 해체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김일성을 욕하는 것으로 그들은 굳건한 동지가 될 수 있었다. 그 사상적 뿌리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박정희교를 김일성주의로 “개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지 박정희라는 자리에 김일성을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박정희는 친일했고, 김일성은 항일했으니 김일성주의자의 포교가 효과를 볼지도 모르겠다. 박정희의 친일 행각이 너무나 자주 거론되어 맘이 상한 수구세력에게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마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민주노동당 내에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김일성주의자가 하루빨리 민주노동당을 떠나야 하는 첫째 이유이다.

김일성주의자는 그 이유에 다시 한번 주목해주기 바란다. 서두에 밝힌 대로, 김일성주의의 옳고 그름이 논거의 핵심이 아니다. 김일성주의자가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세력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의 골자이다.

요컨대, 음습한 곳에서 독버섯이 잘 자라듯 김일성주의자는 수구세력을 주목해야 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진보세력 내에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독버섯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곳에서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미련한 판단이다.

어쨌든,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가 이러한 착각으로 민주노동당에 있다면, 그는 다른 한편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바라고 있다고 보아야 맞다. 이는 그가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세력이 융성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가정을 해보자. 어떤 우연한 계기로, 또는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낀 수구세력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검사의 끈질긴 수사로 민주노동당 내의 김일성주의자가 세상에 드러났다고 치자. 이것은 과연 민주노동당에게 득이 될까 해가 될까. 두말할 필요 없이 해가 된다. 그렇지 않아도 서구의 우파수준에도 못 미치는 정책이 과격하다고 공격받는 마당에 이런 사건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해악을 끼칠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내에 있는 한 명의 김일성주의자는 그 존재 자체로 민주노동당에게 해를 가져오고 발전을 저해한다. 사실, 이런 류의 사건은 한 명이면 족하다. 이 한 명이 민주노동당 내의 간부와 일면식이라도 있다면 파장은 더 클 수 있다. 이것이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김일성주의자에 대해 이런 류의 글을 써야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일성주의자는 정말 민주노동당을 위하는 마음에서 거기에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예에서 보듯이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민주노동당에게는 전혀 득이 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진정으로 민주노동당이 잘되는 것을 바란다면 지금 당장 민주노동당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을 떠나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완전한 정치적 자유가 도래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김일성주의자는 어떠한 행보를 보일까. 십중팔구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맞지 않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퍼부을 것이다. 반대로 민주노동당의 절대다수는 이런 김일성주의자에 대해 체계적이고도 강력한 비판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출당조치를 내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 내에 김일성주의자의 존재가 알려져도 민주노동당에게 그렇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 김일성주의자에 반대하고 출당까지 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아 김일성주의자가 보이지 않게 숨어 있고, 들리지 않게 속삭이고 있다면 두 번째로 들었던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터질 수도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의 김일성주의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다. 김일성주의자가 백주대낮에 상식적인 토론을 벌인다면 그가 두렵기보다는 우습게 될 가능성이 많다. 현재 김일성주의자의 영향력이 1이라면 국가보안법 폐지 이후는 0.01로 줄어들 것이다.

그 존재 자체도 제대로 알 수 없고, 공개적 토론도 할 수 없어 제대로 된 비판과 출당조처 등이 없다는 것을 배경으로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 내에 있다면 이건 공정한 게임이 되지 못한다. 김일성주의자도 표면적으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랄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지금 당장 야만적 국가보안법에 의해 보장 받는 당신의 지위를 반납하고 진보세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김일성주의자는 한국의 수구세력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의 철저한 반대자라고 단언할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주의자가 민주노동당에서 나와야 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아마, 김일성주의자는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나는 김일성주의를 받아들이라고 할 생각이 없다. 다만, 과도한 친미, 과도한 북한 증오를 교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 진보세력을 떠나 수구세력 내부로 가야 한다. 진보세력은 그 정도의 인식수준은 되며, 수구세력의 인식수준만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김일성주의자가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을 대표로 한 진보세력을 떠나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면 김일성주의자는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까.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이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자.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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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 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논단] 행복하지 않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우리 안의 위선에 관한 성찰
 
김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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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진보, 폐품좌파, 금간 불판을 넘어
김대중의 정권교체와 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으로 우리 사회에 ‘참여’와 ‘진보’란 테제만큼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도 드물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운동의 완성이라며 환호했던 노무현 정부도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개혁.진보진영은 두 테제에 얼마나 충실했고 얼마만큼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1/3쯤 채워진 물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기대수준의 차이만큼 다양할 것 같다. 현 정치판에서 그에 관한 논쟁도 곧바로 당돌벌이 소스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많은 이들은 경험적으로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성과의 정도를 말하기 전에 참여와 진보는 ‘마냥 좋은 것’ 또는 ‘그것만이 살 길’라는 일념으로만 달려온 것은 아닌지 자문을 해본다.

개혁.진보진영이 두 테제를 위해 앞만 보고 줄달음쳐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겠지만 기실 우리가 선 자리는 여전히 출발선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말로 단순한 참여와 진보가 아닌 ‘어떤 참여’, ‘어떤 진보’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구체화해야 될 때가 아닐까.

‘참여’를 줄기차게 외쳤으나 정작 우리의 삶은 황폐화되었고, 신권력층으로 진입한 개혁장사꾼(개장사)들에게 개뼉따귀만 갖다 바친 참여는 아니었는지, ‘진보’를 강변했으나 관념적 희열을 위해 스스로의 삶은 내팽개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단식을 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참여, 그런 진보가 과연 행복했는가. 국민의 93%가 빈부격차가 심각하고 생활수준은 더 나빠졌다며 절규하고 있다는 오늘의 여론조사가 말해주듯이 많은 이들의 답변이 뻔히 예상되지만 ‘그래도 세상은 전진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습관적인 자위,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정권 또는 기득권 옹위에만 몰입하는 경향도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여해서 더 나은(진보적인) 세상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은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 집단적 열정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 지금 청와대까지 진출해서 쌍꺼풀(?) 수술하고, 재벌연구소 찾아가 경제 공부하며 폼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억압과 소외에 짓눌린 탓에 우린 참여와 진보의 참 의미를 돌아볼 새도 없이 남에게 돌던져 머리 터지게 해놓고 ‘그것도 내 자유다’라고 외치던, 해방공간에서 광분하던 민중들의 모습을 답습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머리를 위한’ 진보와 ‘생존을 위한’ 진보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장을 해왔고, 문명화되었다는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 인구의 절대다수가 비정규직과 실직자, 신용불량자, 신빈곤층이란 ‘제3 신분’으로 떨어져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양극화, 초극화로 명명되는 ‘빈곤의 문제’를 가장 심각한 과제로 올려놓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주식시장의 활황이 덮어놓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란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 의문을 갖게 되기까지 꼬박 50여년의 세월을 정권과 자본의 잘짜여진 프로파겐다에 현혹되어 충견역할에 머물러 왔던 것은 아닐까.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중들이 가슴속에 품어왔던 ‘참여’의 열기를 쏟아내자 이제는 개장사들이 개혁을 팔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고 곧바로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본색을 들어내며 개혁과 진보의 의미를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걸 목도하고 있다.

개도 얻어맞을 골목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노 정권마저 임기 중반을 넘어서자 김영삼, 김대중 정권처럼 수구언론과 재벌가의 뒷골목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보다 선명하게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들도 권력의 중심에 서면’이라는 의문의 꼬리표를 달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진보를 꽃피우기 위해 국보법이라는 이념적 장벽을 걷어내는데 천명이 넘는 사람이 단식을 해가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비정규직 악법 철폐와 권리보장 입법 같은 정작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진보에는 단식을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회적 무관심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던 사람들이 이따금씩 분신과 자살을 하거나, 찬바람 쌩쌩 부는 고공 타위크레인에 올라가 호소했을 뿐이다.

머리를 위한 진보는 ‘단식’을 하지만 생존을 위한 진보는 ‘단념’을 잘한다.
과연 그런 진보가 누구를 위하여, 누구에게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하지 않는 진보와 개혁은 짝퉁이요, 위선이며, 쓸모없는 짓이라고 까지 말한다면 오바인가.

와각지쟁(蝸角之爭)

고문을 자행했다는 한 의원은 특종에 굶주린 언론에 의해 전국적인 화제거리로 만들어지지만 800만 비정규직의 현존하는 ‘생존고문’에 우리 사회는 별 관심이 없다.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리고자 환장한 개장사들의 ‘참여놀이’에는 촌수도 없는 가계도까지 그려가며 분석해대지만 수백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의 탄생 뿌리와 해결책에는 ‘재미없다’는 것이다.

이기명과 전여옥의 논개잡설 중계와 조갑제의 홈페이지나 뒤지고, 김용갑 의원의 입만 쳐다보며 써갈겨 대는 기자정신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담항설(街談巷說)이나 즐길 요량이면 차라리 ‘정치 선데이서울’로 제호를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현상은 비단 언론뿐만 아니라 서민대중은 물론 입만 열면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습성화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앞서 예로 든, 잡설에 가까운 정치기사에는 댓글놀이까지 즐기며 왁자지껄한 소동을 빚으면서 방학중 1000만원 짜리 해외연수를 떠나는 부자동네 아이들의 사교육비와 5만원 짜리 교습소를 찾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무료급식과 교회 공부방을 전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로 뛰며 스케치한 기사는 진보적 인터넷신문에 댓글 한 줄 없이 방치돼 있다.

어른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즐거운 방학이 어느덧 우리 아이들에게는 빈곤의 대물림 기간이 되었다는 기자의 고발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분노하고 있는가. 틈만나면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우리는 진정 이 나라 교육을 말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하는 개혁장사꾼들 그리고 우리안의 위선

정치권 특히 열린우리당내에서 개혁파란 이미지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안달하는 사람들이 자당이 얼마나 ‘친기업적이고 반서민적인’ 실용주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고민과 반발은 커녕 뭐가 문제인지 조차도 모르는 듯 보인다. 이는 비정규직 정부법안을 대하는 그들의 무관심과 안이한 태도만 보더라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부나 열린우리당의 경제관련 정책담당자들이 분배가 벗겨진 동반성장론의 가면을 쓰고 연일 수구 기득권에 가까운, 친기업 반노동자적 경향성을 노골화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그들이 개혁정당은 고사하고 중도정당에 몸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넌센스(nonsense)이다.

그들 또한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해대는 잘 짜여진 개혁 프로파겐다로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는 개판이고, 노조는 썩었다며 욕하고 뒤돌아서기 좋아하는 서민대중들은 어떤가. ‘비정규직 법안’이 자신들은 물론 향후 자녀 둘 중 하나는, 아니 둘 모두 심한 차별을 강요당하는 제3 신분으로 고착화하는 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을까.

사회적 교섭 참여 여부를 놓고 시너를 뿌리며 저항하는 노조를 욕하는데만 몰두한 채 격렬한 대립의 원인이 정권과 자본, 언론의 일방적인 폭격에 맞서 비정규직 법안 개악을 저지하고 권리보장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전략, 전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건 아닌가.

노조를 관료화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이기주의 집단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자신들은 물론 자녀들의 먹고사는 미래가 걸린 비정규직 법안의 해악을 걷어내야 한다는 대명제의 당위성과 절박성마저 씹어 삼켜서는 안된다.

노 정권이 아무리 열녀전(개혁)을 끼고 서방질(보수화)해가며 국보법을 비롯한 4대 개혁입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기만했다고 해서 그 법안 취지의 당위성마저 부정되는 것이 아닌것처럼.

노무현 정권이 재벌, 수구언론과 한통속이 되어 탄생시킨 각종 친재벌적 정책들과 노동 관련법들이 향후 우리 사회 양극화의 심화와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비판적 참여 없이 훗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만 늘어 놓는다면 과연 양심적인 일인가.

새 이정표 세우기

이제 우리는 참여속의 진보라는 슬로건 자체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참여이며 진보인가를 분명히 해야 될 때가 됐다. 서민대중의 삶의 황폐화를 의미하는 경제적 양극화라는 아젠다를 ‘우리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논쟁과 참여에 관심과 정열를 쏟아부을 때이다.

북핵위기가 고조될수록 한반도 평화와 통일 기반 구축을 위해서도 개성공단 사업 같은 남북경협 활성화라는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 모두가 상생하는 길위에서 돌파구를 찾겠다는 진짜 실용주의다운 자세를 견지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적 사회발전이란 정당한 ‘분노’들이 사회적 운동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결집, 조직되어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표출될 때 비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건 수많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염원하는 경제적 아젠다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고, 개혁.진보진영은 진가를 발휘할 호기를 맞고 있음에도 자기모순적 시행착오와 분열, 도덕적 헤게모니마저 날려버릴 자중지란을 노정하면서 이렇다할 대응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갈수록 보수화되는 정권과 자본의 의지대로 현 상황이 굴러가도록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듯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끝내 현재의 개혁, 진보정당이나 단체들이 성에 안차 ‘새로운 정치주체의 탄생’이란 큰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면 비정규직, 실직자 등과 같이 제3 신분으로 굳어지고 있으면서 법과 노조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지켜주는 등대이기를 고대한다.

개혁.진보적인 단체와 언론매체, 지식인, 네티즌들의 분발을 거듭 당부하고 싶다.

물 한방울 없고,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담벼락도 여럿이 손잡고 한뼘 한뼘 올라가 기어이 넘어서고 마는 진보 담쟁이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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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진보의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 진보세력내 개별흐름 파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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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우리나라 정치세력은 크게 수구세력, 중도세력, 진보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사실 진보세력 내부에도 상이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한 내부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 전의 민주노동당 내 열린우리당과의 관계 관련 문건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재차 확인되고 있다.

해당 사안별로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단순히 각종 사안별로 논의하는 것은 본질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 사안에 대한 표면적 대립은 보이지 않는 다른 내부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국 문제는 그 근본적 차이로 환원되어 버린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번 글은 그 첫 번째로 해당 주장이나 정치세력이 진보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이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만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21세기의 누가 보더라도 진보적인 사고라고 인정할 것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발호될 무렵 이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발언이 진보적이라는 데에는 이미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보았던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여겨 볼 것은, 이처럼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명징한 것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비유를 빌자면 당시대 사람들은 허구의 동굴에 갇혀 그 2차원적인 그림자가 본질이며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성화가 아닌데도 여성을 나체로 그렸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마네가 진보적이라기보다 그냥 상식적일 뿐이지만 당시에는 “과격”했던 것이다. “여성의 나체는 성화에서만”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였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이러한 것의 살아있는 생생한 예이다. 과거에는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간첩 비슷하게 매도되었고, 실제로 처벌받기도 했다. 그 주장 자체가 금기시된 사회였다. 현재 국민의 반 정도가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 발전의 증거이며 우리가 이 사안에 관해 평가가 바뀌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단언컨대 우리의 후손들은 21세기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에 대해 폐지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비문명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지표로 기록할 것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천년이 흐른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사회를 우리가 과거의 노예제도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 그보다 더하게 야만적이고 후진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른다.

예컨대, 우리와 동시대인인 라깡은 자본주의 체제는 정신분열적인 체제라고 하였다. 한 쪽에서는 1년에 8억 명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농산물의 값이 하락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농산물을 바다에 퍼붓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병원하나 변변치 못한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나마 있는 것마저 전투기와 미사일로 박살을 내고 있다. 그 파괴적인 군사예산의 2%를 10년만 투자하면 이 세계의 기아가 사라질 텐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본다면 우리 사회가 불변할 것이고 존재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1천년 후에도 동일하게 평가되기란 힘들 것이다. 서양의 한 사상가가 이런 의미에서 사회가 유기체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생물이 진화하듯 우리 사회도 진화한다는 판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 사회와 현존 체제의 불합리한 바를 한발 앞서 지적하는 이런 선취성은 이처럼 당대에는 논란거리가 되지만 수십 세대가 지난 후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에는 극단, 과격이라고 비난받는 주장을 선지자적인 진보적 주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소극적인 자를 진보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이유는 이러한 “선취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 백 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더라도 그런 주장이 진보가 될 수 없는 것도 여기에는 가까운 미래에는 상식이 될 “선취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해당 사안이 선취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퇴행적인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컨대 반미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모든 선의 대변자이고 미국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가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국을 증오해서 무고한 미국시민을 학살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경우를 본다면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 증오를 유지, 증폭시키는 매우 퇴행적인 것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보다 세분화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한 그 하위 기준으로 “과잉/과소의 문제”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거칠게 말하면 해당 사회에서 과잉화된 주장을 재차 반복하는 것은 선취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진보적일 수도 없다.

즉, 미국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목표로 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에서 반미는 분명히 과잉이기 때문에 반미는 전혀 선취성이 없다. 즉, 이 해당 사회에서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미군이 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도 변변한 조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는 엄청난 과소였고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의 반미운동은 선취적이며 진보적이다.

국내의 자타칭 진보인사인 진중권 씨가 효순, 미선의 영정을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걸었다고 비난했던 것은 이 사람이 우리 사회의 과잉/과소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성원 중 일부에게 반미는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전체로 보자면 반미는 분명히 과소였다. 다른 나라 같으면 여중생 사건은 초기부터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몇 달이나 지나서야 겨우 쟁점화가 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2005년 현재까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반미가 과소인지는 더욱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쓸 기회가 있겠지만, 대략 본다면 일반적인 반미 감정은 과소단계를 지났으며, 각론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본다면 여전히 과소의 단계라고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도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 때 정권 흔들기 용으로 자본가의 유도한 노동자의 파업은, 파업 자체가 항상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90년 대초 영국 한 군수회사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실업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회사 폐업을 위한 파업을 한 것은 이러한 퇴행적 파업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사회는 분명 자본에 비해 노동 쪽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선취성이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 비정규직 문제도 노동운동의 불균형성의 한 예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지역문제와 수구신문의 이미지 조작술을 제기함으로써 진보적이 될 수 있었다. 강준만은 정치적으로 중도세력이지만 적어도 이 두 지점에 있어서 강준만은 국내 진보세력보다 더 선취적이고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작년 총선 당시 호남의 지역감정을 이용하려는 정당을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감정적 이미지 덮어씌우기 방식으로 한 정치인을 매도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선취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강준만의 이러한 몰락은 정치에 관한 한 우리사회가 아직도 증오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세력이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중도세력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의 이미지 덮어씌우기와 다른 차원으로 진보세력을 비판하는 중도세력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증오만을 먹고 산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정치토론은 과소이며 감정적 찌꺼기 배출로서의 정치토론은 과잉이다.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체의 정치적 주장은 근본적으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과소/과잉의 불균형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체적 차이를 우스갯거리의 소재로 삼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진보란, 선취성이란 이처럼 거대한 담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곳곳의 자질구레한 문제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과잉/과소”라는 기준은 거시담론이 미처 포괄하지 못한 영역을 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지난 90년 대 북한의 동포가 기아에 허덕일 때 진보세력이 아니라 종교단체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북한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세력 내 한 그룹은 북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으며 다른 그룹은 북한이 기아에 허덕인다는 것을 북한을 깎아내리려는 수구세력의 여론몰이로 판단하여 이 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에 대해 과소와 과잉만이 있었던 것이 과거 진보세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북한 증오” 과잉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북한 증오”가 과잉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평화주의세력이 과소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 내부의 과잉, 과소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보세력의 주장을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려는 수구언론이 신문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노동조합 비리에 접해 민주노동당이 격렬한 비난을 하지 못한 속사정도 사실은 이러한 전반적인 과잉/과소의 문제점을 고려했던 것이라고 할 때, 균형잡힌 태도가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다른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진보세력도 그 내부에서 배타적인 편가르기가 과잉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극단적 배타성만을 내세운다면 이는 바로 그 때문에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 사실, 진보성, 선취성이 아니라 과잉/과소라는 기준틀을 제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적 진보”라는 것을 상정하기 힘든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선취성”이 제기하는 진보에 관한 미묘한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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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무정부주의와 윌러스타인, 진보의 선취성

무정부주의와 월러스타인, 진보의 선취성
[진보의 개념2] 진보의 ‘선취성’만으로는 진보의 ‘진정성’ 이룰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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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지난 글에서 진보성의 필수조건으로 선취성 여부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선취성 여부”의 기준은 매우 미묘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지금은 핵무기가 논란의 중심에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런 논란은 코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한다. 군대와 경찰이라는 “국가의 폭력”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입장에서는 핵무기로 논란이 이는 것 자체가 비겁이요, 본질 흐리기가 될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진보세력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을 격렬히 비난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국가라는 존재의 “합법적 폭력”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가리는 매우 교묘한 위장술일 따름일 것이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입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들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기란 어렵다. 인간이 몇 천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식의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모든 합법적 폭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 몇 천년이 흐른 후 어떠한 판단을 받을지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무정부주의자들을 진보세력에서 가장 선취적인 자들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과연 어떤 점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유사한 예를 좀 더 들어보자.

왈러쉬타인은 현존 세계의 발전을 전혀 “발전”이 아니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의료의 진보는 다른 종류의 질병을 낳았으며, 제 3세계까지 포함한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지난 세기 진보한 것이 아니라 퇴보한 것이 된다. 그것도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퇴보한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가 보기엔 칼 맑스도 산업성장주의에 오염된 비진보적인 사상가로 취급된다.

왈러쉬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의 정규직에 대한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논쟁으로 보인다. 그가 보기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그가 받는 월급의 적어도 절반을 아프리카의 굶어 죽는 어린 아이 돕기에 써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논쟁 자체가 전 세계 기아문제를 가리는 교묘한 핵심가리기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단지 학문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극좌파로 분류되는 유럽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유럽의회가 토빈세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토빈세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과격한 일”이라고 공격해 왔던 미국 금융자본으로서는 대환영할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 그 내부에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토빈세에 반대한 것은 “토빈세는 결국 유럽의 금융자본 좋은 일만 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본질적인 문제로 따지자면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도 진보세력에게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어차피 좌파는 자본보다는 노동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보기에 한국의 진보세력이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자본가들의 구호”일 것이다. 중소자본가를 이롭게 하고 결국 한국 자본의 질을 높이려는 이런 구호는 “반노동자적인 구호”이고 그 뒤에는 “교활한 자본”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우리가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진보를 옹호하면서 이들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현존 체제가 인류가 이룩한 최고의 체제이며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사고하는 보수주의자에겐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는 다른 진보세력과 함께 같이 묶어서 비판하면 되지만 진보세력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그리 녹록치 않다.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주의의 과격성을 비판하자니 자신이 스스로 보수주의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이제까지 해온 모든 주장이 너무나 “수구적”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진보세력은 그들의 주장이 너무 과격하다고 말하기가 꺼려질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스스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보를 위해 싸웠던 일마저 과거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과격”하다고 공격받아 왔기 때문일 터이다.
 
다음으로 일반적 진보주의자에게, 상대가 자신보다 더 한발 나갔기 때문에 즉 더 선취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해야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비판할 때 그들이 “틀려서”라고 하고 싶지, “너무 진보적이어서”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의 근저에는 중도세력이나 수구세력과 같은 입장에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기가 꺼려진다는 것도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이 진보인가”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내용의 선도성, 선취성, 본질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판단컨대, 우리가 다른 준거틀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넘어서는 점점 더 근본적인 주장만을 하는 세력이 진보세력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서 제시한 (1) 선취성은 진보의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진보는 필연적으로 선취성을 가지지만 선취성만을 앞세운다고 하여 모두 “진정한 진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선취성만을 내세운다면 진보는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포교에 힘쓰는 종교인에 비하면 종교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선취성과 함께 요구되는 진보의 다른 조건은 과연 무언인가.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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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개념2-어느 길이 가장 진보에 빨리 다가서나

어느 길이 가장 진보에 빨리 다가서나
[진보의 개념2] 진보세력은 선취성과 함께 현실의 운동성과 연관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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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진보의 필수 조건으로 선취성 여부를 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예로 들면서 선취성이 가진 함정을 지적하였다. 이 글에서는 그 함정의 본질을 살펴보고 선취성과 구별되는 진보의 필수적 요건을 살펴볼까 한다.

일반적으로 극좌파로 분류되는 이러한 세력들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과격해서 일까.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지적이다. 87년 당시 직선제 개헌도 “과격”한 것이었고, 김대중도 “과격”했다고 공격받았다. 과격하다는 주장은 색깔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프랑스가 월급의 50% 정도를 세금으로 내고 덴마크는 60%부터 시작하여 점점 올라가는데 이들 나라 수준으로 세제를 개혁하자고 하면 한국사회에서 엄청나게 과격한 주장이 된다. 맞다. 과격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해야할 사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격하기 때문에 틀렸다는 주장은 그 주장의 합리성을 판단하기 이전에 선입관을 개입시키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피해야할 논거 방식이다. 이런 식이면 자비와 사랑을 핵심기치로 내건 석가와 예수도 과격하기 때문에 틀릴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은 한국에 맞는 진보주의, 진보세력 육성에 나서야 할 것이다. 표지는 안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생각의나무, 2001
실제, 본질적 의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어떠한 형식의 폭력적 시스템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사회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도 굶어죽는 이가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과격하다고 배척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좌파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로 압축된다. 그것은 이러한 주장이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 실현을 저지한다는 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이들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느린 방도를 제안하고 있다.

예컨대, 유럽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토빈세 도입 반대의 근거로 “유럽의 금융자본 강화를 도와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럽의 금융자본을 약화시키는 목적이 그것을 미국 금융자본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세계 금융자본의 약화, 통제가 그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의 통제로부터도 자유롭게 “날뛰는” 미국 금융자본을 통제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바라는 유럽 금융자본의 통제도 용이하게 할 것이다. 결국 토빈세의 도입은 이러한 것을 가장 빨리 현실화시킬 방도이지만, 이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목표를 가장 늦게 실현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의 핵심적인 문제는 그러한 주의에 근거한 운동이 결국은 그 주의에서 말하는 바의 사회를 가장 늦게 현실화시킨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극좌파의 주장은 자기모순적이고 결국 무의미한 주장이 되고 만다.

결국 문제는 모든 주의주장은 “현실의 운동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야 된다는 것과 직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문제는 “어느 길이 가장 빨리 그 길에 이를 수 있는 길인가”로 압축된다.

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놓쳤을 때 진보세력이든, 극좌파든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 세계에서 현 한국 인구를 웃도는 5천5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2차 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찌즘은, 초기에 그 가장 반대편에 있어야 할 좌파, 극좌파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극좌파, 좌파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배경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레닌의 2단계 연속혁명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1)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것은 (2)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런데 후대의 좌파는 (2)를 보지 못하고 (1)만을 진리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요컨대, 파시즘 하에서는 파시즘을 끝장내는 것이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흐려진 또 다른 이유는 우파입장에서도 파시즘을 타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우파에게 득이 되는 것은 좌파에게는 독이다”는 선입관이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요컨대 “무엇이 가장 빠른 길인가”가 모든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본질적인 내용이 빠졌을 때 결국은 가장 늦게 가는 길을 택하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현실의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운동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을 때야만 진보가 진정한 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운동성 쪽에만 집착하여 앞서 말한 “선취성”을 망각한다면 이는 또다른 역편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세력은 이 두가지 기준, 즉 선취성과 현실의 운동성 사이에서 끊임없는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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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매일 4명씩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quot;-산재...

“매일 4명씩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노동부, 산재사망 줄이기 대책 마련 나서
 
노동부가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수를 줄이기 위해 다음달 중으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등 적극 나설 방침이다. 특히 노동부는 업무상 질병에 따른 사망재해에 비해 단기간 내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업무상 사고에 따른 사망재해 줄이기에 우선 초점을 둘 계획이다.

3일 노동부에 따르면 업무상 사고에 따른 사망자수가 지난 99년 1,456명, 2000년 1,414명, 2001년 1,551명, 2002년 1,378명, 2003년 1,533명, 지난해 1,537명 등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매년 하루에 4명씩 죽어가는 셈이다.<표참조>
 
업무상 사망재해 발생 현황
연도 '99 '00 '01 '02 '03 '04
업무상 사망자수
(만인율)
 2,291
 2,528
 2,748
 2.605
 2,923
 2,825
 3.08
 2.67
 2.60
 2.46
 2.76
 2.70
업무상질병 사망자수
(만인율)
 835
 1,114
 1,197
 1,227
 1,390
 1,288
 1.12
 1.18
 1.13
 1.16
 1.31
 1.23
업무상사고 사망자수
(만인율)
 1,456
 1,414
 1,551
 1,378
 1,533
 1,537
 1.96
 1.49
 1.47
 1.30
 1.45
 1.47

 
우리나라의 업무상 사고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 당 사망자수)은 1.47로 미국 0.60, 일본 0.33, 독일 0.29 등 다른 나라(2001년 기준)와 비교할 때 최대 5배 정도 높게 나타나고 있어 상황이 심각하다. 특히 업무상 사고의 상당수가 추락, 감전, 협착, 낙하 등 재래형 산재라는 점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이유이며 건설업(42.9%)과 제조업(25.1%)이 전체 사고의 68%를 차지하고 있어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들 업종의 예방대책 수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노동부는 “지금까지 사고를 유발한 사업장에 대해 사법처리, 영업정지 요청 등 사후규제 위주로 사망사고 예방노력을 유도했으나 일정한 한계가 있다”며 “사고가 다발하는 사망재해에 대해 근본적인 사고원인을 찾아내 개선토록 지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노동부는 양대 노총, 학계, 재해예방단체 전문가 등 약 20명으로 구성된 ‘사망재해감소대책 T/F팀’을 3일부터 가동시켰다. 대책팀은 사망사고 다발작업에 대해 현행 제도 개선사항을 마련하는 등 종합적인 대책을 4월 중 발표할 계획이다.
 
김소연 기자  dandy@labortoday.co.kr
     
2005-03-03 오후 4:30:13  입력  / 2005-03-03 오후 5:36:04 수정(1차)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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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파업 안하면 민주노조 깃발 내려라&quot;, 공공연맹

"파업 안하면 민주노조 깃발 내려라" 잇단 강경발언
공공연맹, 정기대의원대회서 총력투쟁본부 구성 결의…양경규, 총파업 돌입 호소
 
공공연맹(위원장 양경규)이 민주노총 산하 산별연맹 가운데 처음으로 4월 비정규법안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본부 구성을 결의했다. 특히 연맹 지도부가 그 어느 때보다 파업돌입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공공연맹은 2일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정기대의원대회를 열어 이런 내용을 포함, 2005년도 사업계획을 확정했다<사진>.
 
 ⓒ 매일노동뉴스


공공연맹은 오는 9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총력투쟁본부로 전환하기로 결의했으며 4월에는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공공연맹은 총파업 조직과 관련, 3월부터 현장순회 간담회를 시작해 단위노조 파업투쟁 결의, 4월 임시국회 개회에 맞춰 준법투쟁 등을 벌일 예정이다.

이런 공공연맹 결정은 4월 총파업을 결의할 예정인 3일 민주노총 중집회의와 비정규법안 강행처리 시 총파업을 결의한 지난 1월 민주노총 정기대의원 결정사항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공공연맹 지도부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양경규 위원장은 이날 대의원대회에 앞서 열린 기념식에서 대회사를 통해 “(각 조직이)기업별노조 의식에 머문다면 연맹위원장으로서 용납할 수가 없다”며 비정규투쟁과 4월 총파업 돌입을 호소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태도 돌변으로 민주노총이 총파업 돌입을 결의했던 지난 달 23일에도 양 위원장은 “파업에 돌입하지 않는 노조는 민주노조 깃발을 내려라”고 지침을 내리는 등 강한 어조로 파업돌입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연맹 내에서는 서울지하철노조와 전북평등노조가 파업돌입을 결의하기도 했다.

양 위원장 발언에 대해 연맹 관계자는 “비정규 투쟁에 함께 하지 않으면 연맹 '식구'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더 이상 금속산업연맹만 참가하는 총파업은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필수공익 사업장 등 업종 특성상 금속 등 제조사업장에 비해 파업돌입에 제한을 받아 왔던 공공연맹이 이처럼 실질적인 파업돌입 의사를 강하게 내비침에 따라 향후 상황전개 추이가 주목된다.

연맹은 이날 대의원대회에서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 △2006년 산별전환을 위한 산별추진위 구성 △비정규직 투쟁을 위한 미조직·비정규조직화 전략사업단 설치 등 올해 주요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한편, 이날 공공연맹 대의원대회에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축사를 해 지난 달 1일 임시대의원대회 파행 이후 오랜만에 공식적인 행사자리에 모습을 보였다.
 
김학태 기자  tae@labortoday.co.kr
     
2005-03-02 오후 5:35:49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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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작가 설총식, 유인원의 '자리 만들기'

명퇴를 앞둔 고릴라처럼, 살려고 날뛰는 침팬지처럼
유원인(類猿人)의 ‘자리 만들기’…조소작가 설총식, 노동의 소외·생존경쟁 담아
 
조소작가 설총식이 만든 우화적 주제의 입체작업 다섯 점 <자리 만들기>는 ‘다섯 마리의 사람들’을 엮어놓은 입체 작품이다. 유인원(類人猿)에 빗댄 유원인(類猿人)의 생존경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를 닮은 사람들이 현대사회 생존경쟁의 장에서 연출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직립보행이 가능한 유인원인 고릴라와 침팬지는 사람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동물인데, 이들의 골격에 사람의 모습을 담고 옷을 입힌 것이 <자리 만들기> 연작들이다.

한 때 많은 예술가들 사이에 억센 팔뚝의 노동자, 농민을 통해서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정서를 담으려는 도식이 횡행했다면, 근간에는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의 비애 섞인 모습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또다른 전형성을 만들어 냈다. 이 때 이전과 다른 모습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러스트레이션의 형상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일러스트 기법이 도입된 점이다.

설총식의 작업들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의인화한 동물의 형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다섯 점은 동일한 모티브로 ‘동물+사람 이미지’를 자신감 있게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위기에 놓인 직장인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의 비애를 담아내는 일, 그 가운데서도 넥타이에 서양식 정장을 입은 남성 직장인의 모습으로 현대인을 다루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그리 넓지 않을 법도 하다. 설총식이 이 식상함을 넘어서는 방식은 의인화한 우화적 요소, 입체에 그림 그리기 또는 설치구조물을 통한 일련의 이야기 구조 등이다.

설총식은 1968년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1996년)와 같은 학교 대학원(2004)을 졸업했다. 2002년에 첫 번째 개인전 <설총식: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관훈갤러리)를 열었으며, 이번에 두 번째 개인전 <설총식:자리 만들기>를 열었다.

‘그림 그리는 소조각가(塑彫刻家)’라는 점은 설총식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의 입체조형 작업은 그냥 덩어리와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그림을 그려넣어 회화적 일루전을 입체 작품에 가미함으로써 비로소 마무리된다. 말하자면 ‘그림 소조각(painting sculpture)’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폴리코트 작업에 색을 입히는 작업은 브론즈의 느낌을 내기 위한 단순한 채색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설총식의 작업은 입체조형 작업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그림 그리는 작업에 의해 보다 강렬한 네러티브를 획득한다. 머리카락과 잔털, 면도자국, 피부의 잔주름과 옷깃의 그림자들까지 섬세하게 그려 넣는 소조각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입체를 빚어내는 손길과 그 위에 색채와 형태를 불어넣는 붓질의 만남을 새삼 경이롭게 관찰하게 된다는 점. 이것이 설총식의 도드라지는 매력이다.

이러한 유원인 조형 작업들은 일련의 파이프 구조물 장치를 통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일련의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실업의 우울함을 담은 실직자의 모습 뒤로, 이직을 앞두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눈치를 보는 침팬지와 과감하게 다른 구조물로 건나가는 침팬지가 이어진다. 건너오는 침팬지를 향해 맹렬하게 짖어대며 방어기재를 작동하는 녀석이 있고, 그 옆에 명퇴를 앞둔 고릴라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유인원들의 동물적인 본능에 의한 공격성과 방어기재들을 확인하면서 유원인의 삶 속에도 생존경쟁의 원천적인 모습들이 배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노동 개념을 묶어두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소외 현상을 안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의 노동은 불안과 위기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설총식의 구두 진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의 일반적인 삶의 전형을 가지고 소외된 노동의 면면을 얘기하고 있다. 설총식이라는 예술가 자신의 삶 속에도 자본주의 조직사회의 경쟁관계가 침윤되어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화적 에피소드를 모티브로 하는 <자리 만들기> 연작들이 총체적 세계 인식의 층위를 거대담론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에피소드와 총체성 사이에 드리운 커다란 간극을 넘어서려는 무모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가 노동의 소외와 고용불안의 증후군을 다루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 드리운 현대인의 깊은 신음을 토해내는 겸손한 성찰의 과정이다. 예술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깊은 자기 투영의 산물인지/이어야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김준기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05-03-04 오후 1:33:09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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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담합분쇄 전노투 참가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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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투 울산위원회  (울해협,  전노투 현중모임, 
현자민투위 현자동지회 현중 사내하청노조 )
○  수도권 투쟁위원회  (도시철도노조 현장회, 
전국버스 노민추 사회보험노조 현장회 ,  사회보험노조 해복투,  전해투 )
○  전북 전노투  (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  전북교육연구소,  현자 전주공장 민투위, 노해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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