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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투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 체르니셰프스끼의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해방 투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이어야 하는가?
체르니셰프스끼의 ≪무엇을 할 것인가≫




“정당에서는 필연성이 이미 자유가 된다. 그 결과 정당의 내부규율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가치가 만들어진다. 이 규율은 성장잠재력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정당 생활의 요소로는 줏대(과거의 문화가 주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 절개(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 없는 의지), 긍지(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를 들 수 있다.” 이렇게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하나의 정당이 형성되는 데 필수적인 조건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했다. 이 요약은 단순히 추상적 사유로부터 획득한 결론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요약의 지대한 의의는 그가 이끌었던 이탈리아공산당의 경험, 더 나아가 코민테른의 경험을 사유를 통해 일반화함으로써 도출한 결론이라는 데 있다. 운동의 새로운 혁신적 요소를 대변하는 노동해방정당은 자신이 대변하는 요소의 특징에 부합하는 성격을 확립함으로서만 형성될 수 있다.



줏대, 절개, 긍지



그렇다면 낡은 것이 가하는 어떤 타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보존할 수 있을 만큼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새로운 정당의 맹아가 창출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이 정당이 붕괴되지 않고서 일관되게 성장하면서 낡은 것을 압도하고 낡은 것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인가?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것은 당연히 극도로 미약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 새로운 것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누리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는 거대한 낡은 것에 굴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이유는 낡은 것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우월감, 단호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람시는 정당 생활의 요소로서 줏대, 절개, 긍지로 요약했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필수적 요소를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면 어떤 식으로도 새로운 것은 자신을 지켜낼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낡은 것이 가하는 영향력에 의해 질식당하거나 포섭되어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는 탄압과 회유, 이데올로기와 정치, 문화와 도덕, 관습과 전통, 법과 의회 등 모든 유형의 직간접적 영향력이 포함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 가능성은 이 줏대, 절개, 긍지가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만약 이 요소들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면 성장할 수 없으며 살아남을 수도 없다. 노동해방정당의 맹아는 이 요소들이 일정한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여, 낡은 것이 행사하는 어떠한 영향력에도 굽힘없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때에 이르러 정확하게 탄생한다. 즉 새로운 것을 반영하여 등장한 모든 맹아들이 생명력 있는 것으로 증명되지는 않으며, 그것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하여 충분한 수준의 줏대, 절개, 긍지가 확립되고서야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노동해방정당의 맹아는 등장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정당의 맹아는 자신이 확립하고 있는 줏대, 절개, 의지를 부단히 보다 넓은 범위의 노동자계급에게로 확대시켜 나가며,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확고한 노동해방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확립되어 가면 노동해방운동은 강력한 내부규율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과업에 대한 자신감과 부동의 확신, 고귀한 긍지에 입각한 활동은 강제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따라서 규율은 관료적 강제가 아니라 집단적 영향력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해방운동에서 각 구성원들의 행위는 성문화된 규약이 존재하느냐의 유무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유의지에 입각한 것이 되며, 규율은 필연성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해방 조직은 내부규율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힘을 확립하게 되며, 이는 엄격하게 규율 잡혀 있으며 통일된 세력을 낳게 된다. 따라서 어떤 노동운동 조직의 성장잠재력은 그 조직에서 확립된 내부규율의 정도에 의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내부규율의 정도는 정확히 조직이 확립하고 있는 줏대, 절개, 의지 정도와 일치하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노동해방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의 핵심과제인 이곳 한국에서도 이제까지 새로운 것을 대변하고자 했으며 노동자당을 창건하고자 했던 크고 작은 무수한 세력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하나의 세력도 그러한 임무를 완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단 하나의 세력도 노동해방정당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명력 있는 맹아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크고 작은 정치조류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났지만 그 모든 조류들은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에 의해 질식당해 붕괴하여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의 영향력에 포섭되어 초라한 개량주의 세력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낡은 것이 가하는 영향력을 이겨낼 만한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하는 데 실패했고 당연히 내적규율을 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관된 노동해방 투사



그렇다면 한국노동운동에서 노동해방정당이 창건 가능한 시기는 언제에 이르러서일까? 그 시기는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맞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정치경향이 등장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것을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일관되게 대변하는 노동해방 정치세력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이 세력은 정당의 맹아를 확립할 만큼의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해방운동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해야만 한다. 강철 같은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자들은 다름 아닌 노동해방 투사들이며, 이들이 구성하는 조직이 곧 노동해방정당이다. 우리 운동이 진정한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맹아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노동해방 투사들이 충분히 육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한 토대는 닦였다. 그것은 노동해방 투사들이 기반하고 있는 사상이 줏대, 절개, 의지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도록 충분한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사상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현장활동, 문화, 도덕, 조직, 동지, 결혼, 관습, 가족 등 모든 측면에서 낡은 부르주아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력에 단호하게 맞설만한 줏대, 절개, 긍지를 확립한 일관된 노동해방 투사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투사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1800년대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권유한다. 그것은 “체르니셰프스끼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진지한 사람은 누구나 다 혁명가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다음과 같은 것, 즉 혁명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어야 하며 그는 어떤 행동규칙을 준수해야 하고, 어떻게 그의 목표를 수행해 나가야 하며, 그리고 어떤 수단에 의해서 그것을 달성해야만 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는 데에 있기”(레닌)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의의를 지녔던 체르니셰프스끼의 이 소설은 당연히 자신을 단호한 투사로 단련시키면서 노동해방정당을 창건하고자 했던 위대한 노동운동가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마야꼬프스키와 같은 러시아의 대표적 혁명가들은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레닌은 특별히 이 책을 좋아했으며, 그는 ≪맑스엥겔스전집≫과 나란히 이 책을 꼽아놓고는 틈만 나면 이 소설을 읽었다. 심지어 그는 1902년에 쓴 자신의 유명한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제목을 바로 이 소설에서 빌려올 정도였다. 그는 “그 소설은 나의 형을 사로잡았고 나 또한 사로잡았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내걸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소설이다”라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자신이 받은 감명을 표현했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은 단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만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 아니었다. 맑스 또한 체르니셰프스끼 소설의 의의를 극찬했고, 직접 체르니셰프스끼의 전기를 집필하여 서유럽의 노동해방 운동가들에게 보급하려 했을 정도였다(건강상의 이유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는 않았다). 맑스와 그의 아내와 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또 읽었으며,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이 소설이 제기한 규범과 생활방식을 따르려고 했다. 이처럼 당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이 소설을 극찬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소설이 노동해방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인적 요소로서 노동해방 투사들을 배양하기 위한 방도와 투사의 모범적 상을 뛰어나게 형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노동해방정당 건설이라는 과업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영감을 끌어내야만 하며, 이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단련해 나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체르니셰프스끼



사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그와 같은 혁혁한 의의를 획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체르니셰프스끼는 러시아에서 수많은 투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적극적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에 착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투철한 투사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결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삶을 다루지 않는다면 이 소설의 의의를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28년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말에 이미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고 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맑스와는 독립적인 길을 따라 독창적으로 유물론을 받아들였으며, 러시아에서 유물론의 전통을 확립한 창시자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에서 만든다.”(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는 당시 러시아의 급진적 조류 중 바쿠닌주의로 대표되는 ‘주의주의’적인 관념론적 태도와 뚜렷하게 구별되면서 사상적으로 양대 경향을 형성하고 있던 체르니셰프스끼 사상의 근간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운동이 전진함에 따라 러시아에서는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이 지배권을 획득해 나가게 된다. 사실 맑스가 체르니셰프스끼의 전기를 집필하여 제1인터내셔널에 보급하고자 했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터내셔널에서 발호하던 바쿠닌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데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것이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외부에서는 마치 러시아 운동이 바쿠닌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러시아에서는 바쿠닌주의의 관념론적 입장이 퇴조하면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유물론적 입장이 젊은 층의 다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따라서 ‘러시아 운동가들은 모두 나를 따르고 있다’는 바쿠닌의 허장성세를 폭로하면서 유물론적 입장을 전파하는 데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처럼 효과적인 것은 없었던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측면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제1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주의 입장에 섰다가 이후에 이 소설에 충격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버리고 맑스주의로 전향한 쥘 게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파리꼬뮌 투사로서 망명 중이던 게드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는 자신의 ‘주의주의’적 입장을 버리고는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유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운동가의 주관적 의지만이 아니라 현실의 객관적 토대에 입각하여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 맑스주의에 입각한 최초의 정당으로서 사회당을 건설하는 창립자이자 맑스주의를 프랑스에 보급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유물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곧 소설 형식으로 쓰인 유물론의 보고(寶庫)이다.

또한 체르니셰프스끼는 러시아에서 노동해방운동이 발생하기 이전 시기에 혁명적이며 적극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인민주의 운동’의 주요한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1851년에 교사가 된 그는 학생들에게 자유와 혁명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동시대인≫지에 참가하여 정치평론을 통해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나갔다. 레닌은 당시에 그가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농업개혁이 도입되기 시작했을 뿐인 당시에 (당시 그것은 유럽에서조차 아직 적절하게 해명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그처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사회와 국가가 근로인민과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으로 되고, 농민계급이 그들의 토지몰수와 파멸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사회계급들에 의해 지배,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르니셰프스끼와 같은 천재성이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는 이러한 농업개혁에 저항하고 그것을 저주했으며 그것이 실패하기를, 그래서 러시아 곳곳에서 계급투쟁을 고취시킬 충돌이 발생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는 아직 혁명성과 진보적 의의를 잃지 않고 있던 19세기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을 대표했다.

그의 영향력이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져가자 짜르 당국은 1862년에 그를 체포하여 형무소의 강제노역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도 그의 적극적인 활동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는 검열관의 부주의를 틈타서, 그리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교묘한 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서술함으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시대인≫에 기고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기저기에서 검열관을 속이기 위한 장치와 생략이 포함된 이 소설은 상당히 난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한 운동가들은 이 소설의 거대한 의의를 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이 소설은 러시아 전역의 혁명적 지식인들을 뒤흔들었다. 이들은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능동적이며 위대하고 헌신적인 선각자들의 모습을 따라 인민의 운동 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불탔다. 이른바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이 소설의 영향력 하에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낡은 체제에 맞서고자 하는 줏대, 절개, 긍지를 발전시킨 무수한 젊은 운동가들이 기존 사회가 가하는 전통과 영향력, 억압을 모든 영역에서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이 책을 들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한마디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후에 볼셰비키로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의 표현이자 추동력이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레닌이 볼셰비즘 성립의 3가지 원천 중 하나로 규정한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성공은 짜르 당국으로 하여금 체르니셰프스끼를 더욱 강력하게 억압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나마 누리던 약간의 집필권까지 박탈당한 채 20년간 강제노동과 유배에 시달리다, 1889년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20여년의 감옥생활과 짜르 정부의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았으며, 일관되게 투사의 자세를 견지했고, 모든 러시아 운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체르니셰프스끼는 유배 말년에는 맑스주의에 거의 접근했었다(그는 러시아 농촌공동체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해갔다). 만약 그가 유형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서유럽의 운동과 교류할 수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러시아 노동해방운동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운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체르니셰프스끼의 젊은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를 건설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적인 바쿠닌 사상을 거부하면서 확고하게 맑스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플레하노프와 같은 러시아 노동해방운동의 1세대가 탄생했다. 이처럼 그의 삶 자체가 투사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이 소설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노동해방 투사의 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새로운 인간형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베로치까, 로뿌호프, 끼르사노프, 라흐메또프이다. 베로치까는 평범한 한 여인에서 혁명가로 성장해 나가는 인물로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당시의 봉건적 러시아에서 여성은 사회의 낡은 찌꺼기들이 모조리 침전되어 이중 삼중으로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존재였으므로, 베로치까와 같은 여성을 ‘평범한 사람에서 혁명가로 나아가는 전형’으로 도입한 것은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낡은 요소들에 맞서면서 새로운 요소가 성장해 나가는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주인공들인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는 기본적으로는 완성된 혁명가의 상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이지만 검열을 속일 필요성 때문에 그것을 순수하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불충분하게만 드러난 혁명가의 상을 보충하기 위한 주변인물로서 라흐메또프가 슬쩍 도입된다. 그와 로뿌호프, 끼르사노프를 결합시키면 그것이 바로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고자 했던 완성된 혁명가의 상이다.

이 소설에 등장한 혁명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살펴보자. 그들은 공히 삶에 있어서 진지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일관되게 추구하며, 단호하다. 낡은 사회의 관습이나 편견, 제약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들을 고려하지만 (가령 로뿌호프는 결혼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베로치까를 속물적이고 봉건적인 가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마찬가지로 자살극을 통해 새로운 신분을 얻음으로써 법률적으로 베로치까가 자유롭게 끼르사노프와 재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발한 재치를 발휘한다) 그것들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면서 이겨나간다. 그리고 자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확립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낡은 사회가 행사하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의지로서 줏대, 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의 두려움 없는 의지로서 절개의 화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올바른 것과 그른 것(소설에서는 ‘이기주의 이론’이라고 재미있게 포장된 것)을 냉철하고도 극히 현실적인 유물론적 분석에 입각하여 구별해낸다. 그들은 대충 피상적으로 사고하면서 진지하지 못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사물의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충분하고도 심사숙고된 분석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며, 한번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한 추진력에 입각하여 행동에 옮긴다. 그들은 원대한 이상에 입각하여 행동하지만, 그 이상을 현실이 제공하는 실제 수단을 통해 구현하려 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이 소설은 투사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물론적 방법을 채택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는 협동조합 작업의 우월성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기하는 방식은 추상화된 이론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여공들이 노동하는 데에서 어떻게 집단 작업이 개인 작업에 비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수행하는 노동이 자본가의 감독 아래 강제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에 비해 어떻게 더욱 높은 생산능력을 발휘하는가, 그리고 생활하는 데서도 어떻게 집단생활이 훨씬 더 유리한가를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식으로, 심지어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까지 보여줌으로써 입증하는 방식이다.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을 마지막 하나의 요소에 이르기까지 냉철하게 분석한다. 최악의 가능성에 항상 대비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며, 말에 대한 책임성에서 확고하다. 그들은 유물론자이자 진지한 사람들이다.



솔직함



다음으로 그들은 자신과 동료에게 진실로 솔직하다. 그들은 자신과 동료를 기만하는 일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맞대면하면서 오류를 인정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원인을 끝까지 파헤쳐 들어가서 실제적인 해결책을 마련한다. 그리고 잘못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엄격하게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동료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비판을 가하며 반대로 동료의 타당한 비판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게나 동료에게나 솔직하지 않는 것은 가장 커다란 죄악이며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에게는 자신이 택한 삶이 결코 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삶을 택한 것은 그 삶이 자신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기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통해 명예나 부, 높은 지위와 같은 어떤 대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긍지)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 긍지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그들은 자신에게나 동료들 간에서나 이 긍지에 입각하여 엄격한 자발적 규율을 강제한다. 그들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상호간에서나 엄격하게 규율 잡혀 있지만, 이 규율은 타율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내적 결속력과 연대성은 강력하다.

가령 체르니셰프스끼가 혁명가의 상을 드러내기 위한 매개체로 설정한 사랑의 감정을 둘러싸고 베로치까, 로뿌호프, 끼르사노프가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 간에 취한 태도를 살펴보자. 로뿌호프의 도움으로 봉건적 굴레로부터 탈출한 베로치까는 그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로뿌호프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녀를 구원했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베로치까가 성장하여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립적인 인간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녀는 차츰 로뿌호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심과 고마움이 겹친 그런 감정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는 로뿌호프와는 성격이 맞지 않았고, 오히려 로뿌호프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 진실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베로치까였지만, 점차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이를 솔직하게 로뿌호프에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독립적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더라도 진실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솔직함을 얻어갔던 것이다.

진정 놀라운 것은 로뿌호프의 태도다. 로뿌호프는 베로치까가 꿈 이야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어렴풋이 드러낸 진실을 예리하게 추적해 들어가서 먼저 깨닫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 생활을 잃어야만 한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베로치까가 아직 어린 상황에서는 자신이 훨씬 일찍 진실을 파악해야만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질책한다. 또한 진실을 받아들이고는 끼르사노프와 베로치까의 결합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 끼르사노프도 마찬가지다. 그는 베로치까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엄격하게 절제한다. 그는 동료인 로뿌호프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면서 극도로 엄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것이다. 하지만 베로치까의 감정이 분명해진 이후에 그와 로뿌호프는 정말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 사이의 동료적 관계는 조금도 손상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로 자신의 불철저함을 들며 서로 책임을 지려 했지 동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 않았다.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가 취한 이러한 태도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자신과 동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하며, 어떤 규율을 확립해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자발적이지만 극도로 엄격한 규율, 자신에 대한 깊은 확신과 동료에 대한 깊은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규율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 규율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신과 서로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며, 어떤 기만도 거부하면서 솔직한 태도로 임한다. 즉 이들이 자신과 상호간에 맺는 관계는 노동해방운동, 노동해방정당에 필요한 자발적 내부규율이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는 투사들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서 줏대, 절개, 긍지가 어떤 것인가, 이들 상호간에 집단적으로 맺어야만 하는 관계의 원칙과 자발적인 내부규율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사물을 유물론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의 시대적 제약



그런데 이 소설을 보는 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당시의 러시아 인민주의 운동의 흔적과 시대적 한계가 이 소설에 불가피하게 배어있다는 점이다. 비록 체르니셰프스끼가 이미 유물론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는 가장 최초로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에 주목한 운동가였지만 이 소설이 쓰인 1862년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우선 체르니셰프스끼가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는 아직 진정한 노동해방운동은 러시아에서 태동하지 않았으며, 아직 자본가계급이 진보성을 잃지 않았고 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소설에서는 자본가들이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적 갈등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맨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상복을 입은 수수께끼의 여인은 테러리스트 혁명가(이 소설에서는 사냥꾼으로 묘사된다)를 남편으로 두었다가 남편을 잃은 여인이다. 인민주의 진영에서 테러리즘이 번성했던 것을 반영하여 체르니셰프스끼는 테러리스트를 혁명가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아직 러시아에서 노동운동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 다시 말해 투사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인 집단에서 배출되던 시절에 나왔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당시에 대부분의 혁명가를 제공하던 특정한 배타적 집단, 즉 혁명적 지식인들이다.

아울러 당시는 러시아에서 노동대중의 투쟁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투쟁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이란 옷을 만드는 협동조합공장에 참여하는 여성노동자들뿐인데, 이들은 계급투쟁을 통해 해방되기를 추구하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공장에 참여함으로써 해방되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이 협동조합공장을 묘사하면서 체르니셰프스끼는 베로치까가 이들을 자주적 존재로 대하고 그들이 스스로 집단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도록 배려하는 방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노동자를 완전히 수동적인 위치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지식인들이 ‘인민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서 취해야만 하는 태도 즉, ‘인민의 해방은 인민 자신의 운동이다’라는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민들, 특히 노동자계급 대중의 투쟁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이 소설을 썼고, 당연히 그들의 자주적 운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들 속에서 떠오르는 투사의 상을 그려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의 하층, 다시 말해 가장 평범한 대중 속에서 발생하는 운동과 그 운동 속에서 배출되는 투사의 상을 그려내지는 못한다. 이 약점은 그의 한계라기보다는 그가 발 딛고 있는 시대의 한계였으며, 당시 러시아의 사회운동이 직면하고 있었던 불가피한 한계의 반영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소설을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읽어야만 하며, 시대가 변화한 지금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가치 있는 것을 추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 시대의 잣대와 기준으로 이 소설을 보려 한다면 아마 금방 식상해질 것이며,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시대의 맥박을 느낄 수 있으며, 운동을 역사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라



이 소설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였으므로, 그것은 시대가 전진함에 따라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노동해방운동의 등장과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투쟁의 발전, 그리고 노동운동의 전진에 따라 평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다수의 투사들이 떠오르게 되면서 러시아소설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고리끼의 소설이다.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 이제 주인공은 평범한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다. 주인공인 평범한 노동자가 거대한 계급투쟁에 참여하면서 노동해방 투사로 발전하는 과정, 마찬가지로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의 영향 아래 투쟁에 눈떠가는 과정이 그 소설의 줄거리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위로부터 해방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스스로 해방되어 가는 능동적인 존재이며, 투사는 특수한 사회집단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노동대중으로부터 떠오른다. 고리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속에서 투사들이 배출되는 훨씬 발전한 운동단계에서 소설을 썼고, 당연히 그것을 반영했던 것이다.

이처럼 체르니셰프스끼의 소설과 고리끼의 소설은 전혀 다른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집단을 반영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는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소설 모두 ‘새로운 것’의 본질적 특성을 반영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을 다시 요약하면, 줏대(과거의 문화가 주는 압력에 대항한 저항), 절개(새로운 유형의 문화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한 두려움 없는 의지), 긍지(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각)이다.

노동해방 투사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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