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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를 위한 변명 - 1.오영수

살아남은 자를 위한 변명

1.오영수

반성? 왜 역사라는 짐을 내가 반성해야 하는 거지,
너는 아직도 우리가 동지라도 되는 줄 안단 말이냐



날이 흐리다. 어제는 유쾌, 오늘은 흐림. 일진 일퇴.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삶과 별반 다름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존재', 인간처럼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자연처럼 인간은 서로 순응하고 조화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타인으로 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지구당 당원들과 함꼐 도봉산에 올랐다. 당원에 가입하고 처음으로 당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새삼 어색하기도 했지만 사실 되풀이 되던 일상을 벗어나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는 점이 왠지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나이를 먹어서도 이렇게 아이처럼 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칠성 사이다하고 맛동산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냐? ㅋㅋ

어제 후배인 김 혁과 과음한 탓인지 산행 초반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느라고 죽을맛이었다. 그래도 처음보는 다른 당원들에게 술꾼처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4월의 도봉산은 옅은 회색 구름이 해를 가렸지만 상쾌한 물소리와 산내음 만으로도 등산객들의 커진 목소리를 가볍게 감싸주고 있었다.


<형, 형이 정말 제대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해?>
벌겋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혁이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반성? 왜 역사라는 짐을 내가 반성해야 하는 거지, 너는 아직도 우리가 동지라도 되는 줄 안단 말이냐. 우린 패배했어, 그래 인정한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얘긴 임마 벌써 10년이 다 되가는 소리야. 넌 지금 도대체 현실에 발딛고 있긴 한 거니. 반성은 항상 패배자의 몫이었고 변명이었고 스스로의 위안이지 않았던가.

혁이가 민주노동당 사평지구당에 가입하자는 말을 꺼낸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혁은 습관처럼 되풀이 되던 술자리에서 불쑥 그런 말을 꺼냈었다.
<형, 형은 왜 활동하지 않는거죠? 당장 민주노동당 당원부터 가입하고 무엇인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녜요?> 녀석은 대들 것처럼 달겨들었다, 짜아식.
당원? 그래 당원을 해서 무엇을 할 건데? 왜 너도 국회의원 한자리 하고싶냐 아니면 아직 공장에 남은 니 동기들 보기 쪽팔려서? 에라 임마 정신차려라. 국으로 지금 일하는 곳에서 자리잡고 장가갈 생각이나 해 임마..

그날 혁은 과음끝에 술자리에서 먹은 걸 모두 게워내고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엉엉소리내 울고있었다. 영수형, 죽은 혜인이를 난 잊을수가 없어...근데 내가 어떻게 아무렇게나 살 수 있겠어...
씨팔, 아직도 넌 남의 정신에 살려고 하는거냐...남을 위해? 민중과 노동자를 위해? 애들도 웃지않을 순진한 소리하구 자빠졌네...니미럴 새꺄 야리지마...넌 몰라 개새끼야...좆같이 왜 아직도 눈물이 나는거야...

(.....무엇이 변한 걸까...혁과 나는 지난해 파고드는 겨울 칼바람에 숱한 소줏잔이 깨어지고 욕지거리도 지겨워질때쯤 민주노동당 사평지구당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산아래턱에 있는 코다리집에서 뒤풀이가 열렸다. 앞선 이의 발뒤꿈치만 보고 오르내리느라 재대로 보지못했던 당원들의 얼굴들이 형광등 불빛아래로 모여들었다. 아따 고랑내^^

<자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주노동당 사평지구당 위원장 강현종이라고 합니다. 오늘 4.19기념 당원 등반에 참여 해주신 당원여러분께 같이 건배할 것을 제안합니다>
위원장은 살짝 벗겨진 머리만큼이나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혁이는 오래만에 다시 느끼는 분위기 탓일까 토마토같이 벌건 얼굴을 하곤 연방 벙싯벙싯 웃고 있었다. 짜아식 그렇게 좋을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정말 옳은 길일까......에잇 좀 오늘은 혁이처럼 나도 잘한 일이라 아무생각없이 받아들이고 싶다.아줌니 여기 막걸리 한 통 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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