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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05
    두 개의 잣대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2/16
    알렉스 캘리니코스, 21세기 자본주의와 맑스주의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1)
    최선을 다하는 자유

두 개의 잣대

두 개의 잣대

미국 사회에 살아온게 어언 반 년을 지나면서, 나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던 두 가지 잣대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첫 번째 경향.

정치경제적 토대에 주목하지 않고 단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특히 건강 형평성 관련 논문들) 분석들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다. 이를테면 "세상 물정 모르는걸. 순진하기 이를데 없군. 윤리라는 모호한 대의명분에 호소를 하다니, 자본주의를 물로 보는 거여? ...."

 

두 번째 경향.

현실에서 마주치는 여러가지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유독 "건전한 상식 있는 인간"의 자세를 강조함. 남의 연구 결과를 비판할 때의 냉철함(?)은 사라지고, 대략의 기조는 "이론이고 뭐고 인간들이 저러면 안 되지. 너무 하잖아..."

 

이래서 나타나는 문제점 들로는...

남의 연구는 우습게 보면서 정작 현실에서는 감정과 인의를 내세우면서 통찰력 있는 이론적 작업을 방기...ㅡ.ㅡ

"인권"이 갖는 무 당파성, 계급 은폐적 성격을 과도하게 경계하느라 내가 지향하는 인간 해방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인것처럼 사고...

 

이러한 측면에서, Wright의 책은 대오각성(ㅡ.ㅡ)하게 만들고 있음.

착취(exploitation)라는 단어가 개별 자본가의 도덕성을 힐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존재 조건을 개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상황의 "부도덕성" 에 대한 비판을 여전히 담고 있다는 것이 중요....

 

 사족이지만....

 어렸을 때는 오만방자해서 (지금도 쪼금...) 도대체 누굴 존경할 줄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거의 유일하게 존경했던 부르디외에 이어 Richard Levins, Howard Zinn과 Erick Wright도 조금씩 존경의 마음이 생겨나고 있음... 그 통찰력 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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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21세기 자본주의와 맑스주의

21세기 자본주의와 맑스주의

Alex  Callinicos('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의 저자)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초청강연 내용

  

  남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그 투쟁의 규모와 용맹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투쟁이 일어난 이곳에서 연설하는 것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또한 저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돼있는 분들에게 연대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대통령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인권상을 받은 나라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정치적 의견 때문에 수감돼 있다니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방한이 기쁜 일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한국인 민족주의를 고무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한은 오늘의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에 서방 세계인 유럽과 미국에서 남한은 역동적으로 팽창하고 전진하는 경제로,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를 대표하는 모범 사례로 거론됐습니다. 그러나 IMF 위기 전개 이후인 지난 2년간 남한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체제의 모순들을 대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남한이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를 대표한다는 것이 참말일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어쩌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 같습니다. 1990년대의 풍조는, 특히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자본주의적 의기양양이 판을 쳤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동구권이 무너진 이래로 득의 만만한 주장은, 서방식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의기양양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인 중심인 미국에서 월가의 주식 시장이 1990년대 동안 전례없는 호황을 누려 왔다는 사실 덕분에도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의기양양은 지난 주 앨런 그린스펀이라는 사람이 표현했습니다. 그린스펀은 월가의 신입니다. 그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입니다. 지난 주 '새 천 년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인들이 자유 시장에서 발휘하는 생산 능력에 대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증거를 우리가 지난 10년가 미국에서 목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린스펀은 지난해에는 더 나아간 말도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미국 경제가 역사를 넘어, 그 동안 자신의 성장에 가해져 온 모든 전통적 제약들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포스터모더니즘이 갑자기 월가에 자리잡기라도 한 양 매우 보수적인 중앙은행 총재가 '역사를 넘는' 것에 대해 얘기하다니 참으로 기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린스펀의 시각, 즉 신자유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아시아 경제의 추락과 IMF위기는 영미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삼 년 전에 남한 같은 경제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정실 자본주의;'즉 재벌과 국가 관료들 사이의 부패한 연계들이 판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IMF위기는 남한 같은 경제들을 좀더 자유시장 방향으로 구조조정할 기회이자 또한 서구 다국적 기업들이 이런 나라들의 값싼 생산적 자산을 사들일 기회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이 과정에 저항하는 것은 구제 불능의 반동입니다. 경제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각 국민 국가가 자신의 경제를 통제하던 지나간 과거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묘사됩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우리가 세계적 규모로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을 제시하는 방식 치고는 완전히 비생산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화의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의 불모의 논쟁을 피하려면 칼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모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변증법적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즉,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규정하는 모순들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예컨대<공산주의 선언>에서 매우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원동력, 즉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사회관계들에 대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형성하고 부르주아지가 생산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며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한다고 마르크스가 말했을 때 그는 앤써니 기든스와 여타 세계화론자들을 150년이나 앞질렀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본래부터의 결함들을 파악했습니다. 즉, 노동착취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는 위기로 나아가는 본래부터의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시각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프레드릭 제임슨이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공산주의 선언>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겪은 최선의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이라는 점을 이해 할 수 있는 지점으로까지 인식 수준을 어떻게든 높여야 한다." 자본주의는 원리상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어지간한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는 지점까지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류가 겪은 최선의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착취, 부당함, 환경파괴, 위기와 전쟁으로 나아가는 경향 따위 때문에 인류가 겪은 최악의 것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시각이 새 천 년에 들어서는 세계를 인식하는 최상의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세계적 규모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의 전력을 살펴봅시다. IMF와 세계은행이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 정책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15년이 됐습니다. 해마다 UN이 발행하는 <인간 개발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울적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고서가 서술하는 빈곤과 불평등 때문입니다. 세계 인구 중 최부유층 5분의 1의 소득과 최빈곤층 5분의 1의 소득 격차는 1960년 30대 1에서 1990년대 60대 1로 벌어졌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1990년대에 불평등은 훨씬 더 커졌습니다. 1997년에 그 비율은 74대 1로 올랐습니다. 1994년과 1998년 사이에만도 세계 최상위 200대 갑부는 재산이 갑절 이상 늘어났습니다. 4천4백억달러에서 1조 4백2십억 달러로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 단지 세 사람, 즉 빌게이츠와 월마트 회장 월튼과 브루나이국왕의 재산이 세계 최빈국 36개국의 소득 합친 것만 합니다. 서구의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 안에서도 똑같이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증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면, 1973년과 1993년 사이에 미국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실질 임금은 하락했습니다. 1997년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1985년보다 낮았고 최고 수준이었던 1978년 보다는 한참 낮았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처지에서 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흔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더 빈곤해질 것이라고 충분한 증거도 없이 우겨댔다는 비판에 맞서 마르크스를 변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부국인 미국에서 실제로 노동자들이 지난 25년간 더 가난해졌음을 봅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빈곤화라고 부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긋지긋하고 증대하는 불평등의 세계에 직면해 불확실성과 다원성을 창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 같은 것은 제게 그저 경박하고 엉뚱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시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세계적 불평등과 빈곤이라는 이러한 현실을 다루어야 합니다.

 

  세계경제 위기

  이러한 현실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장기간에 걸쳐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선진 자본주의의 세 주요 지역을 봅시다. 유렵대륙은 1990년대 동안 경제가 지지부진했습니다. 일본은 1990년대 동안 악성 디플레 위기를 겪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래로 어떤 주요 경제도 겪은 적이 없는 최악의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한 바 있는 자본주의적 의기양양의 유일한 객관적 근거는 지난 이삼 년가 경제가 비교적 급성장한 미국입니다. 하지만 이 성장은 월 가 주식 시장 호황에 결정적으로 의존한 것입니다.

 

  이 호황에 대해 첫 번째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서양식 정실 자본주의의 사례라는 것입니다. 1년 전, 금융시장에 거액의 투기를 한 롱텀 캐피틀 매니지먼트(LTCM)라는 투기성단기자금 회사가 파산했습니다. 투기 금액이 하도 거액이어서 그 회사의 붕괴는 서구 금융 체제를 파멸시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LTCM을 구하러 개입했습니다. 그 투기성 단기자금 회사의 대표이사가 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고위 임원이었다는 사실과 월 가 은행들이 그 회사를 투기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면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정실자본주의가 아시아의 현상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 하라고 하십시오. 세계 모든 곳에서 자본가들은 서로 속이고 또 서로 뒤를 돌보아 줍니다.

 

  미국 주식시장 호황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간계급 사람들은 사치 소비재에 많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식시장에 돈을 투자했고, 주각가 올랐고, 더 부유해졌다고 느꼈고, 그래서 돈을 더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국 경제에, 또 실제로 세계 경제에 유리한 일인데, 왜냐하면 소비 증대가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간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가가 계속해서 급상승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가는 결국 주식을 발행한 기업들의 이윤에 근거하므로 궁극적으로 주가는 이윤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시작된 현시기 경제 위기를 일으킨 것은 바로 주요 경제들의 이윤율, 즉 투자수익률의 대폭 하락이었습니다. 근래에 미국의 이윤이 회복된 것은 주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식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한 덕분입니다. 그런데도 미국의 이윤율은 현시기 경제 위기가 시작된 1970년대 초보다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식 시장이 근저의 비교적 낮은 이윤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무한정 상승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월 가 주쇼螢 시장은 추락할 것입니다. 비록 이 일이 정확시 언제 일어날 것인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지난 주에 IMF는 그들이 "월 가의 중대한 조정국면"이라고 부른 증시 대폭락의 가능성이 지난 한 해 동안 급증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주식 시장 추락의 충격은 미국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미칠 것입니다.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가 지난해 아시아의 경제추락과 금융 공황을 겪는 동안 세계 경제를 지탱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의 소비 지출은 나머지 세계로부터 미국의 수입을 흡수하는 데 일조했고, 그럼으로써 다른 경제들을 가라앉지 않게 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한 경제학자 말마따나 미국은 세계 전체를 위한 최후 수단으로서 소비자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월 가가 추락한다면 이 과정은 역전될 것입니다. 자기의 주가가 떨어진 중간계급 가구들은 가난해졌다고 느끼고는 돈을 덜 쓸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경제와 십중팔구 세계 경제를 경기 후퇴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70년대 초 이래로 세계 경제가 겪는 네 번째 세계적 불황이 될 것입니다. 단지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의기양양의 분위기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적 경기 후퇴라는 전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결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의 해결책

  지금까지 저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의기양양이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잘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뭘까요? 지금 유럽은 사회민주주의가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최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한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남한에서 이 전통은 지금 민주노동당이라는 형태로 계승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2차세계대전 이래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케인즈적 국가 개입 전략을 통해 자본주의를 개혁하려 해왔습니다. 바탕에 깔린 생각은 시장이 스스로는 잘 돌아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국가가 시장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 생각은 독일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의 이른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가 미국 같은 나라의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사회적인 버전(변형)을 대표한다는 생각과 결부되곤 합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첫 번째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위기의 원천에 대한 피상적인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주의자들은 문제가 금융시장의 불안정과 불합리함에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금융시장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만사형통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근원은 생산관계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특히 그의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으로 표현됐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은 자본가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자본주의 기업은 각각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려고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윤 추구적 투장 행위들의 종합적인 효과는 체제 전체의 세계적인, 즉 일반적인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자본가가 행하는 합리적 행위인 개별 이윤 증대 노력은 세계적으로 비합리적인 효과인 전반적 이윤율의 저하라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이윤율저하 경향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흔히 겪곤 하는 위기의 숨은 원인인 것입니다. 이 위기는 실수나 우연 또는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한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작용 안에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제가 논의하고 있는 전략의 수립자인 케인즈 자신은 실제로 이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본의 한계효율' 저하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 개념은 이윤율과 얼추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이 그가 '투자의 다소 포괄적인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달리 말해, 그는 사회가 자본가들한테서 투자에 대한 통제력을 압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의 생산적 자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지배력을 그들로부터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혁명을 뜻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케인즈 분석의 논리에 두려움을 느껴 뒷걸음질을 칩니다. 그들은 차라리 자본주의를 조절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처 방식의 난점들은 독일의 최근 경험이 보여주었습니다. 독일은 유럽연합의 경제적 중심입니다. 1년 전, 독일은 연방 선거를 통해 16년간의 우파 지배가 끝났습니다.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인 '적록연정' 이 성립됐습니다. 적록정부의 선출은 이전 우파 정부가 추구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대중의 거부을 뜻했습니다. 이것은 정부에서 라퐁텡이 한 역할에 반영됐습니다. 사회민주당 당수인 라퐁텐은 새 정부의 재무장관에 임명됐습니다. 그는 사회민주당내 좌파계 인사이고, 골수 케인즈주의자이며, <세계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책의 지은이입니다. 재무장관에 임명되자마자 그는 유럽 중앙은행에 반대하는 공세를 폈습니다. 그는 경기 부양과 대량실업 완화를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빈곤층에서 부유층으로 조세 부담을 이동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대기업들은 무지무지하게 격노했습니다. 매스 미디어는 라퐁텐을 악마처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선도적인 우파 신문은 1면톱으로 상단에 크게 라퐁텐 사진을 싣고는 헤드라인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이 사람이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가?" 독일의 손꼽히는 기업들은 라퐁텐의 세법개정안이 실행된다면 본사를 독일 밖으로 옮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일단의 손꼽히는 산업체와 은행 경영자들이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드에게 압력을 넣는 공작을 했습니다. 올해 3월초에 그들의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라퐁텐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패퇴에 이어 적록 정부의 급속한 우경화가 뒤따랐습니다. 라퐁텐이 사임한지 겨우 몇 주 안에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독일 외무장관은 요슈카 피셔라는 사람인데, 그는 녹색당 당수로, 전에 혁명가였고 노련한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토의 발칸 전쟁을 앞장서서 옹호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몇 주 안에 슈뢰더는 일연의 신자유주의적 삭감 정책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일괄 정책들의 골자는 부유층에게는 법인세를 삭감하고 빈곤층에게는 연금을 삭감하는 것이었습니다.

 

  라퐁텐 사건은 두가지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그 사건은 자기네가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순전한 자본의 권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라퐁텐은 선거로 뽑힌 정치인이고 그것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선거로 뽑히지 둽은 기업인들에 의해 직위에서 밀려났습니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국민이 투표하지만 기업가들이 결정합니다.

둘째, 라퐁텐 사건은 자본이 자신의 활동에 대한 국민국가의 제한을 전보다 훨신 탐탁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체적인 시야를 갖고 이 두 번째 요점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세계화론자들은 세계화의 정도를 크게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국적 자본들을 마치 영화<인디펜던스 데이>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처럼 그립니다. 그 외계 우주선은 지구 위의 허공을 떠돌아 다니면서 파괴적인 광선을 아래로 세차게 퍼붓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은 국가적 정박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자기네 국민 국가의 후원에 계속 의지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1년 전에 금융 시장이 심각한 공황에 사로잡혔을 때 상황을 진정시켰던 것은 바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EDUXK 중앙은행들이라는 형태의 국가였던 것입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여타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대폭 인하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안심시켰습니다. 자유로이 움직이는 금융 시장조차 국가의 후원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한 세대 동안 자본주의는 더욱 세계적으로 통합됐습니다. 이것은 수입억 달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금융시장 차원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제조업 제품 수출이 미래를 결정하는 대부분의 경제의 국제 무역 차원에도 들어 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갈수록 다국적 기업에 의해 국경을 가로질러 조직되고 있는 생산의 차원에도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 기업들이 자신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국민 국가의 제한을 전보다 훨씬 탐탁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에서 보면 라퐁텐 사건은 본때를 한번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좌파의 선택

  라퐁텐 케인스주의의 실패는 좌파에게 두가지 선택을 남겨 놓습니다. 첫번째 선택은 항복입니다. 이른바 제 3의 길이 이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러분의 대통령이 제 3의 길 찬양자라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가 말하는 제 3의 길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제 3의 길 원조들인 빌 글린턴과 토니 블레어가 말하는 제 3의 길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제 3의 길은 국가 통제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의 대안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국가 통제주의나 신자유주의 모두가 좋지 않으므로 그것들의 대안이 있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제 3의 길은 그러한 대안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외관상의 반대 이면에서 실천상으로 제 3의 길은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받아들립니다. 발칸 전쟁 직후에 두 명의 지도적인 제 3의 길 유럽인들인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슈뢰더는 정책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 정책들은 일단의 신자유주의적 계획안들로서 이른바 유연 노동 시장, 사람들한테서 각종 복지 혜택들을 뺏어가는 것을 뜻하는 사회보장 ‘계혁’따위였습니다. 그러니 제 3의 길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항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강연 앞부분에서 제가 예증한 지긋지긋한 불평등의 증대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혁명적 사회주의입니다. 즉, 자본주의를 개혁 또는 조절하려 하지 말고 완전히 없애고 사회주의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즉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을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그토록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널리 퍼져 있는 생각, 특히 서구의 통념은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옛 소련과 동유럽이 이른바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가 죽은 사상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동유럽 혁명이 ‘역사의 종말’을 뜻한다고 주장한 바도 바로 이것을 가리켰습니다. 미래는 그저 끝없는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이 주장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련과 동유럽 또는 북한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제가 당원으로 있는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전세계 국제사회주의 경향에 속한 자매단체들의 관점임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단지 하나의 마르크스주의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경쟁하는 여러 마르크스주의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이어 나아갈지를 규정하려는 서로 경쟁하는 시도들입니다. 특히 스탈린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전통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에 주창해서 레닌과 볼셰비키 그리고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가 지속시킨 전통입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그것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 근거로서 유물론적 역사 이론과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단지 지적인 도구 또는 특정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해석해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변혁의 정치적 프로젝트(계획)입니다. 그 계획의 핵심은 사회주의에 대한 특정 개념입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일이라는 마르크스의 말로써 정의됩니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써만 이룰 수 있습니다. 당도, 의원도, 노동조합 지도자도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변화는 대중의 투쟁을 통해 아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개념이 이렇다면 옛 소련 동지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와 정반대의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스탈린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은 아래로부터 행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권력은 사회의 맨 꼭대기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셋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 포함됩니다. 오늘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부심이 충만해 고개를 반듯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소련에서 맨 처음으로 관료가 떠올랐을 때부터 레온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가 스탈린에게 도전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의 사회적 근원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문제는 스탈린이 몹쓸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의 문제는 관료 권력이라는 전체 사회 체제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스탈린주의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적인 발전은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창립자인 토니 클리프가 1940년대 말에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책을 썼을 때였습니다. 클리프는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의 한 형태이기는커녕 단지 자본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 말로 ‘노멘클라투라’라는 관료가 노동자 계급을 집합적으로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탈린주의 체제와 서방식 자본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직 하나, 즉 지배계급이 편제되는 방식입니다. 서방에서는 사기업을 통해서, 동구권에서는 국가 권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989년과 1991년의 격변, 즉 소련 등의 붕괴는 특정한 모양을 띠게 됩니다. 1989년과 1991년을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반혁명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낙후한 사회주의에서 현대적 자본주의로 진일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어느 것도 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형태의 자본주의에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 옆걸음질친 것이었습니다.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말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인 자신들이 ‘노멘클라투라’자본주의에 대해 얘기합니다. 바꿔 말해, 옛 관료 지배계급이 민간 자본주의 기업가로 변신함으로써 생존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과두’에 대해 얘기합니다. 과두는 러시아 경제와 러시아 정치를 지배하는 거대 기업 제왕들을 말합니다. 이 과두는 옛 스탈린주의 관료 출신이었던 덕분에 기업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주민 대중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달라진 게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자칭 민주주의자로 자처하지만 그들의 출신은 옛 노멘클라투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한 엘리트 집단에서 다른 엘리트 집단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과거의 혁명들은 그저 한 소수파에서 다른 소수파에게로 권력을 이전시켰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란 거대 다수를 위한 거대 다수의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 혁명은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변혁입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투쟁과 삶을 통해 아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저를 이 강연의 첫 부분으로 도로 데려갑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함께 논의하는 것은 옳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최대 비판자였습니다. <자본>에서 그가 한 분석은 여전히 오늘날 세계 경제 모순들을 이해하는 최상의 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사회변혁의 주체를 규명하지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화에 직면해 절망하기가 쉽습니다.‘초국적 자본이 얼마나 강력한가’, ‘그들이 케인즈주의자인 라퐁텐을 어떻게 쉽게 제거했는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 자본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이 세계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노동자 계급입니다. 노동자 계급은 모든 임금 노동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착취당하는 조건하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이 노동자입니다. 노동자 계급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축적과정의 확산 덕분에 노동자 계급은 전세계 인구의 다수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노동자 계급이 여전히 사회변혁의 결정적 주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와 자율주의

  이런 맥락에서 저는 계급 문제를 다루는 잘못된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별개인 다원적 이해관계와 투쟁으로 사회가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는 계급의 충돌같은 중심적인 충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기껏해야 그 정치는 상이한 사회운동들을 불러 모은 연합체를 건설하려 애씁니다. 정체성 정치는 현대 사회의 현실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왜 마르크스가 자본-노동 관계가 사회 변혁에 그리도 핵심적이라고 주장했는지 정체성 정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중요한 건 유일하게 또는 가장 억압당하는 사회 집단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동자 계급이 중요한 건 자본주의 생산에서 그들이 착취당한다는 사실 덕분에 그들이 자본주의 경제를 집단적으로 마비시키고 심지어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래에 일어난 비교적 부분적이고 제한된 변화에서조차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왜 남한은 근래에 부분적·제한적 정치 자유화를 겪었습니까? 결정적인 이유는 첫째로 1987년의 반란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학생 운동으로 시작돼 산업의 대중 파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둘째로 1997년 1월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대중 파업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계급은 정치 체제의 변화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계급문제를 다루는 두 번째 잘못된 방식은 ‘자율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에 대해 저는 단지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나 질 들뢰즈 같은 일부 유럽 좌파 철학자들과 연관돼 있습니다. 자율주의는 자본 노동 관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권력 관계로 환원시킵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환원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왜 착취가 일어나는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 자본가가 노동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입니까? 단지 그가 심보가 나쁘고 탐욕스런 사람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매우 흔히 자본가들은 심보가 나쁘고 탐욕스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착취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다른 요인들, 특히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이 축척하고 착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리는 방식을 포함해야 합니다. 달리 말해, 생산에서의 착취과정을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에 관한 이론이라는 더 큰 틀 안에 자리 매김해야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출발점에서 출발해, 안토니오 네그리는 그 다음에 이러한 권력 관계를 사회 전체로 적용합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으로 됩니다. 학생도 착취당하고, 주부도 착취당하고, 실업자도 착취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착취 개념을 희석시켜 마침내 그 개념은 더 이상 아무런 명확한 경제적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자율주의자들은 착취에 맞서는 대중의 자생적 반란에 특권적 의의를 부여합니다. 물론 자생적 반란은 아주 좋은 것이고 사실 굉장히 멋진 것이죠. 하지만 흔히 자율주의자들은 자생적 반란의 구호를 이용해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적개심을 정당화 합니다. 물론 노동조합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노동조합은 보통 보수적 노동 지도자들이 득세합니다. 노동 조합은 개량주의 정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노동조합니 노동자 계급대중, 즉 조직이 가장 잘 돼 있고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만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노동자 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노동자 계급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노동자들이 있는 곳, 노동조합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율주의는 단순히 이론상으로 큰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적용된 바 있는 유럽에서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빚은 잘못된 정치 전략으로 끝납니다.

 

 

  맺음말

  저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정체성 정치와 자율주의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중요한 정치 쟁점들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 변혁에서 노동자 계급 대중이 하는 중심적 역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근래에는 이 계급, 노동자 계급이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주요한 투쟁을 치렀습니다. 앞에서 저는 1997년 1월 남한 노동자들의 파업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예들도 있습니다. 1995년 11∼12월 프랑스 공공부문 대중 파업은 프랑스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밀어붙이려다 실패한 주된 경험입니다. 저는 21세기는 자본과 노동이 이제 진짜로 세계적인 규모로 위대한 대결을 계속할 세기라고 믿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과제는 이 투쟁과 연계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따라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21세기에 위대한 미래를 누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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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1

최초의 세계 공황이 초래한 결과

◀ 미국의 노동자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상징인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세계 공황의 파장으로 세계 경제가 장기간 불황에 빠진다.

지난 호황기 동안 가격·이자·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873년에 세계 경제에 공황이 불어 닥친다. 독일의 주가는 1877년까지 호황의 절정기에 비해 60%나 폭락하고 미국의 대규모 철도 회사들이 파산하고 세계의 주요 철 생산 국가에서는 전체 용광로의 거의 절반이 불이 꺼진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1890년대 중반까지 유례없이 장기간의 혼란과 침체를 기록한다. 무엇보다 농업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1894년의 밀 가격은 1867년에 비해 3분의 1 정도로 하락하고 어떤 지역은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쳐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그리하여 1879~94년 사이에 아일랜드·스페인·시칠리아·루마니아 같은 곳에서 농민 봉기와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신세계’를 향해 홍수를 이루던 이민의 무리는 조용한 흐름으로 줄어든다.

1873~96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가격이 10% 이상 하락하여 그만큼 이윤(율)이 감소한다. 게다가 생산비보다 상품 가격이 훨씬 더 유동적으로 변함에 따라―예를 들어 임금은 상품 가격이 하락하는 만큼 빠르게 삭감되지 않음으로써―기업 운영은 더욱 곤란을 겪는다. 그래도 생산성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설비와 장비를 사들여야 하니 압박은 더욱 커진다. 일부 나라에서는 은 가격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지불 수단으로서의) 은과 금의 교환 비율이 예측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1873년의 주식 시장 대폭락 이래로 ‘공황’이란 말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자유 무역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한다.

각 국가는 국제적인 판매 경쟁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상품에 대해 관세를 높게 부과하는 등의 무역 장벽을 설치한다. 그리고 이익 집단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국내 시장에도 개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치와 경제가 점점 더 밀착하게 된다. 이처럼 장기 불황은 그다지도 튼튼히 뿌리내린 것처럼 보였던 1800년대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린다.

이로써 ‘사기업의 자유로운 영업, 개입하지 않는 정부, 자유 무역’이 지배하던 시대는 (1848년 민중 혁명의 성과로 시작되어) 세계 공황의 시작과 함께 막을 내린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주의에 의해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발전의 결과로서 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렇게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이 명멸을 거듭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 사실 상업과 산업은 자유 무역 시대보다 보호 무역 시대(1880~1914년)가 훨씬 더 높은 성장을 기록한다.

한편 영국만은 주요 산업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 무역을 유지한다. 금융·상업·운송서비스 분야에서 최대의 수출국이기 때문에 보호 무역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의 유동이나 국제 금융 거래는 보호 무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기업 합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독점 대기업이 생겨난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과 가격 하락으로 인한 이윤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 합병이 이루어짐으로써 독점 대기업들이 생겨난다.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해짐에 따라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이 융합하여 금융 자본을 형성한다. 군수 산업과 같은 중공업,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 산업, 석유나 전기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 분야, 비누와 담배 같은 대량 소비 제품, 수송 분야 등에서 독과점 업체가 수없이 생겨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해당 지역 석탄 생산의 90%를 장악하고 스탠더드석유는 미국 정유의 90~95%를 통제하며 US제철은 미국 강철의 63%를 생산한다. 1860~1910년 사이의 50년 동안 제조업 공장은 평균하여 자본이 39배, 노동자 수는 7배, 생산액은 19배 이상 증가한다. 엄청난 자본의 집중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과 대기업을 구별하게 만들고 자유 경쟁(시장)을 후퇴시킨다.

대기업에서는 중역·기술자·사무원들이 기업주가 하던 역할들을 대신하게 되고 작업 프로그램은 관리자의 감독 아래 통제된다. 기업 경영에는 과학적인 관리 방식이 도입되고 관리의 핵심은 작업자에게서 더 많은 생산량을 뽑아내는 데에 맞추어진다. 노동 과정을 세세하게 구분하여 초 단위까지 계산하는 ‘테일러 방식’이 도입되고 생산성 향상을 독려하는 상여금과 같은 인센티브 제도가 만들어진다.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에 혈안이 된다.

강대국들은 상품 판매와 자본 투자를 위한 새로운 시장, 석유·고무·비철금속·구리 같은 원자재, 통상의 교두보나 전진 기지로서 가치가 있는 전략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함 외교’로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반)식민지로 삼는다. 이로 인해 대국으로서의 지위는 식민지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신념이 강화된다. 중동 지방의 유전지대, 고무 생산지인 콩고와 아마존, 구리 생산지인 칠레·페루·자이레·잠비아, 금과 금광석 같은 귀금속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남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인 수에즈운하가 있는 이집트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 로디지아였다가 지금은 짐바브웨가 된 곳을 정복할 무렵의 영국인 선교사들의 단체사진

프랑스는 대부분의 서·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영토 확장을 추구한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종단 정책’을 추구한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영국과 경쟁하고 충돌하면서 동남부와 남서부의 해안 지대와 서부의 카메룬과 토고를 식민지로 확보한다. 이탈리아·벨기에·포르투갈·스페인도 경쟁하듯이 자기 몫을 차지한다.

태평양 연안 국가와 아시아도 분할된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 지역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간다. 네덜란드는 오래 전에 진출한 자바와 보르네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다. 독일은 뉴기니의 동북부와 솔로몬 군도를 차지한다. 영토 합병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도 스페인과 전쟁을 치러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고 괌과 필리핀을 수중에 넣는다. 러시아는 보카라, 키바, 만주의 대부분을 탈취한다. 일본은 1884~85년 청일전쟁과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과 조선을 강점한다.

1876~1915년 사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강대국들에게 완전히 분할·지배당한다. 그리하여 지구 땅의 4분의 1이 식민지로 종속된다. 영국은 영토 1300만㎢(주민 2600만 명), 프랑스는 900만㎢, 독일·이탈리아·벨기에는 250만㎢에 이르는 지역을 새롭게 획득한다. 이들보다 적기는 하지만 포르투갈·미국·일본·러시아도 영토를 상당히 확장한다.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른 영토 강탈은 이 시기를 제국주의―이 용어는 1870년대에 처음 등장한다―시대로 만든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토 쟁탈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1823년에 ‘서반구에 대한 유럽 국가의 어떠한 간섭도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고 유럽 국가들도 아메리카 대륙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경제 종속이 심화되어 남과 북의 경제 격차가 확대된다.

세계 경제는 1890년대 중반부터 호황으로 전환하여 1914년에 이르기까지 번창한다. 이 시기는 오늘날까지도 ‘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세계 경제는 ‘불균등 발전’으로 중심이 다원화된다. 1913년의 산업·광업·건설의 총 생산량 중에서 미국은 46%, 독일은 23.5%, 영국은 19.5%, 프랑스는 11%를 차지한다. 독일·미국·프랑스는 철강·자동차·전기·화학분야에서 영국을 앞지르고 독일의 제조업 수출은 모든 측면에서 영국을 누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영국은 해외 투자와 상업 운송에서 여전히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여 세계 경제가 런던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고 영국 화폐(파운드 스털링)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영국은 런던의 상업·금융서비스만으로도 상품 무역에서 초래되는 적자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 자본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유럽 무역의 80%는 발전된 나라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 외의 지역에 대한 무역과 투자도 대부분은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으로 향한다.

공업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경제도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1860년대에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수출품 중 절반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900년이 되면 영국의 몫은 25%로 줄어들고 다른 유럽 나라들은 31%를 차지한다.

공업 후진국들의 경제는 선진국에 종속되면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이들 사이의 경제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부자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과 ‘남’반구에 위치한 가난한 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의 격차는 1830년 무렵에는 2배였으나 1913년에는 7배로 벌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로 인해 (반)식민지의 수십 억 인민은 기아에서 허덕인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우익 세력이 확대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자기 나라의 국민들에게 영광을 안겨다주고 국민들 스스로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고무함으로써 사회 불만과 계급 갈등을 완화시킨다. 군인은 ‘명예로운’ 정복 전쟁에 참가하고 성직자는 ‘미개한’ 원주민을 ‘문명화’시키는 데에서 자기 인종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우익의 근간을 형성한다. 이들은 다윈의 ‘자연 도태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정치·도덕·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유럽인이 우월한 인종이며 영토 정복과 침략 전쟁은 당연하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다윈주의’는 꽤 큰 인기와 반향을 일으키면서 계급 갈등을 표현하는 데에도 쓰인다. 지배계급은 파업 가담자들을 불만에 가득 찬 원주민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제국주의는 자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인종들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단계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도 등장한다. 게다가 많은 일반 노동자와 노조 지도자들이 유색인을 백인 노동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한다. 사실 유색인들의 유럽 이민을 금지시킨 정부의 조처도 노동자들의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

나아가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영국 정부는 1902년에 ‘제국 기념일’을 제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등장한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는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감정과 분위기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킨다.

민족주의는 1800년대 내내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운동들과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동일시되는데 1870년대 들어서는 각 민족의 요구 수준이 ‘국가의 완전한 독립’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마을·부족·교구·길드·집성촌―를 잃어버린 대중들의 공허함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을 지배계급은 애국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사회적 복종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국가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만든다. 유럽의 지배계급들이 1870년대를 기점으로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체제 내로 흡수한 것이다. 나아가 우익은 애국주의를 독점하면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신자라고까지 부른다. 한 유태인을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 정치에 악용한 ‘드레퓌스 사건’은 민족주의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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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2

대량 생산 대량 소비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올림픽 호와 타이타닉 호 (1910)

기술 혁명으로 민중의 소비 생활이 보다 풍요로워진다.

자본이 불황을 탈출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불황은 기술 개발을 더 재촉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불황을 거치며 획기적인 기술 혁명이 이루어진다. 전기와 내연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이 증기력을 대체하기 시작하고 유기 화학과 합성수지가 개발되고 새로운 합금을 이용한 더 정밀하고 강력한 기계가 만들어진다.

이 첨단 기술들이 대중의 가정생활용품을 생산하는 데까지 응용됨으로써 많은 분야에서 대량 생산이 이루어진다. 특히 포드는 1907년에 ‘T모델’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여 대량 생산 시대의 상징이 된다. 기술 혁명에 의한 대량 생산, 이를 ‘2차 산업 혁명’이라 한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모든 산업이 연쇄로 급속히 확장된다. 그만큼 노동자의 수도 급속히 늘어난다.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도 어느 정도 상승한다.

그러나 생산성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초과로 획득되는 엄청난 이윤에 비하면 임금 몇 푼 올려주는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니 총 이윤 중에서 자본가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더 커지고 당연하게도 노동자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작아진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성장의 혜택을 조금 밖에 못 누리면서 (사회의 높아진 평균 생활수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점점 더 빈곤해진다.

일관 생산 작업이 확대되고 ‘테일러 방식’의 노동 통제가 가해지면서 작업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노동 강도가 세어지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된다. 이런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온정적인 정책들이 고안되어 실시된다. 철강·자동차·탄광·철도 산업처럼 자본이 풍부한 대기업들은 노동자공제기금·주택·학교·교회·스포츠클럽·음악회 같은 기업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포드 자동차는 다른 일반 기업에 비해 두 배나 되는 임금을 지급한다.

이처럼 실질 임금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소비품이 등장하고 대량 소비가 이루어진다. 더불어 상업적인 오락도 발전한다. 그리고 대중의 대량 소비는 대중매체·광고산업·신용거래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영국의 신문들은 1890년대에 최초로 100만 부를 돌파하고, 대중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 산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되고, 수입이 적은 사람들도 값비싼 상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할부 판매가 실시된다. 그리하여 진공청소기·가스·주방기기·바나나·백열등·아스피린·전화·무선전신·축음기·영화·자전거·자동차·비행기 등이 생활의 한 장면이 된다.

그리고 유럽 여성들은 아이를 적게 낳고 여성 중등 교육이 확대되고 자유롭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됨으로써 사회적 지위가 보다 개선된다. 그래서 상품 시장도 이들 여성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정치에서는 오히려 배제되어 집안으로 물러나 앉게 된다.

제조업이 급속하게 팽창하고 서비스업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으로 인해 동일한 양의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과 노동력은 급격히 감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수는 호황기 동안에 인상적인 비율로 증가한다. 특히 급격히 팽창하던 거대 도시들의 하부 구조를 구축하는 건축이나 기본적인 에너지원을 생산하는 석탄 산업은 엄청난 수의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낸다.

도시는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어간다. 10만 이상의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진 인구 가운데 3분의 2가 제조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영국의 런던, 소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제외하면 그 나라의 수도가 산업 중심지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량 소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제 막 등장한 다양한 서비스 부문―그러나 미국은 이때 이미 서비스업의 노동자 수가 육체노동자 수보다 많다―이 빠르게 성장한다. 유럽에서 초등학교 교사들의 수는 1870~1914년 사이에 몇 배로 늘어난다. 관료제 역시 더욱 확대된다.

서비스업과 사무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는 육체노동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거리를 둔다. 육체노동자들도 아직 동질의 집단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노동자계급들이라고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야기하곤 한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느끼기는 하지만 체코인 노동자, 폴란드인 노동자, 가톨릭 노동자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수작업 노동자들이 도시와 농촌을 가득 채우고 있고 제조업은 매우 제한된 범위에 분포되어 극도로 지역화해 있으며 민족·종교·언어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개량을 실시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제국주의 국가의 자본가들은 (긴 불황에 뒤이어 찾아온) 엄청난 호황에 따르는 막대한 이윤과 식민지에서 초과 착취로 얻은 초과 이윤을 재원으로 하여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생활 조건의 개선을 선사한다. 공연히 노동 쟁의에 휘말려 떼돈을 왕창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임금 조금 더 올려주고 일을 더 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정부는 노동자가 불가피하게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게 될 거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노동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편다. 그리하여 독일·프랑스·영국·미국에서는 ‘여성과 아동노동 제한, 노동 시간 단축, 산재 보상, 실업과 질병에 대한 배려, 노후 대책’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각 나라의 지배계급은 보통 선거를 도입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물론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보통 선거가 도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보통 선거를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성인 남자의 30~40%가 선거권을 가지게 되고 이 비율은 더욱 확대되어 간다. 또한 여성 참정권이 1890년대부터 미국의 와이오밍 주, 뉴질랜드,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에 도입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정치 민주화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에는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통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의회에 최소한의 권한만 부여된다. 영국에서는 세습적인 성원들로 구성된 상원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의 결의를 무산시킬 수 있는 양원제를 구성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시민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고 특정한 정파의 이해를 위해 선거구를 조작―게리맨더링―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또한 많은 나라가 비밀 투표제를 도입하지 않고 공개 투표를 진행함으로써 자유로운 선택을 곤란하게 만든다. 아니면 투표 연령을 높여 선거인을 줄이기도 한다.

의도야 어쨌든 민주화가 확대되자 중요한 정치 문제는 공개적인 정치 토론의 장에서 사라지고 엘리트들끼리 교제하는 주말의 시골별장·클럽·사교모임·사냥연회와 같은 권력의 회랑에서나 다루어진다. 대중 앞에서는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처럼 정치에서 위선이 판을 침에 따라 정치 풍자가 만발한다. 그리고 대중 선거 유세는 1879년 선거 때에야 비로소 영국의 글래드스턴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용한다. 한편 대중들은 여전히 지도자를 숭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숭배하는 이유가 개인의 인물 됨됨이가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신념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르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지배계급은 1880~1914년 사이에 의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과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과정에서 극우와 극좌 세력은 고립된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의 체제가 온전하게 안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독일 보수당의 경우 선거에서 표의 71%가 시골에서 나오고 대도시에서는 5%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국가는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을 이용한다. 미국 정부는 1880년대 말부터 국기 게양식을 전국의 학교에서 일상 의례로 실시하게 하고 영국 왕은 노동자들의 축제인 축구 결승전에 매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부르주아들은 상당수가 ‘유한계급’이 되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승리하는 부르주아’라는 이미지는 이자 소득과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기생계급의 이미지로 바뀐다. 이로 인해 진보·개혁·자유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의 신념은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세계 공황으로 인해 1870년대를 거치면서 권력에서 밀려난 뒤에는 일시적으로 권력을 탈환한 것을 제외하면 다시는 권력의 중심에 오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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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3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총파업의 불길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메이데이 카툰 (1906).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한 독일 노동자가 러시아 노동자와 악수하고 있다.

반동의 최후 보루였던 러시아의 차르(황제) 정부는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시행하고 자본주의 산업화를 추진한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는 국가 주도로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리하여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고 공장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전제 정치로 인해 노조조차 설립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진 1870년대부터 처음으로 파업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성장한다. 그러다가 1896년에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스부르크의 섬유 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의 노동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전개한 때를 기점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1902년에는 돈 강변의 로스토프 지방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1903년에는 남러시아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파업을 전개하고 1904년에는 오데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투쟁들은 모두 잔혹하게 진압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살해된다. 한편 러시아 군대는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곤경에 처해있던 12월에 바쿠의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빈곤의 바닥에서 고통 받던 노동자·민중들은 파업 투쟁의 승리에 고무되어 1905년 1월 ‘아버지 차르’에게 청원하기 위해 페체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행진한다. 그러나 차르 군대는 14만 명이나 되는 평화 행진 대오를 향해 무차별 발포한다. 이로 인해 1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이 아비귀환 속에서 살해당한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차르에 대한 민중들의 굳은 믿음은 여지없이 박살난다.

노동자들은 페체르스부르크 금속 노동자를 필두로 하여 전국에서 파업에 들어가고 8시간노동일과 차르 타도, 헌법 제정 의회 소집을 요구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성난 시위의 물결이 러시아 전 국토를 휩쓸고 농민들은 2천여 곳에서 귀족들의 영지를 불태우고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한다. 학생들도 도처에서 혁명에 가담한다. 폴란드 지방의 민중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킨다. 6월에는 전함 포촘킨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제 군대까지 반란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계속 전진하여 9월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전국 노조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10월부터는 페체르스부르크를 필두로 전국에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평의회)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혁명은 12월 모스크바 무장 봉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봉기는 차르 군대에게 진압되고 가혹한 테러가 뒤따른다. 그리하여 혁명은 급속히 퇴조한다. 그렇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혁명은 전 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강렬한 충격과 감동과 영감을 불어넣으면서 노동자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의 발전을 촉진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매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념하는 파업을 벌이는데 혁명을 경험한 뒤라 파업은 쉽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테러가 횡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노조를 건설하여 노조가 모든 대도시에 건설된다. 1907년까지 노조는 650개, 조합원은 2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1907년부터 스톨리핀이 반동 정치를 실행하면서 운동은 수년 동안 침체를 겪는다.

1909년부터 불황이 끝나고 호황이 시작되면서 운동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체제의 상징이던 대작가 톨스토이가 1910년에 사망하자 학생들이 차르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고 다음해 초에는 동맹 휴업까지 전개한다. 1911년부터는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1912년 4월 시베리아의 레나 금광에서 헌병대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500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새로운 파업 물결의 도화선이 된다. 레나 학살에 대한 항의 파업에만 40만 노동자가 참여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4대 두마(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4대 두마 선거일인 10월 5일, 정부가 각 공장에서 선출된 대표자 상당수의 자격을 박탈한 데 항의하여 페체르스부르크의 푸틸로프 제철 공장 노동자 1만 4천 명 전원이 파업에 들어간다. 여기에 네프스키 조선소의 6만 5천 명의 노동자가 합류하면서 페체르스부르크 전역이 총파업으로 들끓는다. 의사당과 대공장이 불과 몇㎞ 내에 있는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곧바로 정치권을 뒤흔든다. 파업이 열흘 동안 계속되자 결국 정부는 대표자를 재선출하도록 한다. 4차 두마 개원일인 11월 15일에는 흑해 선단 선원들에 대한 사형선고에 항의하여 3만 노동자들이 하루 파업을 단행한다. 12월 14일에는 6개월 전에 도입된 사회 보험에 대한 사회주의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를 지원하기 위해 6만 6천 명의 노동자들이 지지 결의를 발표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레쓰네르 공장의 노동자들은 1913년 여름에 ‘노동자 스트론긴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장장 102일 동안이나 파업을 전개한다. 이 해에도 수많은 파업들이 일어나고 파업의 열기는 다음해까지 이어진다. 1914년 3월에는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원내 보수 세력들의 군비 증강 비밀 협상―사회주의 의원단이 폭로했다―에 항의하는 파업을 단행한다. 그리고 예산 심사를 막던 좌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강제로 퇴장 당하자 노동자들은 4월 23일에 다시 항의 파업을 벌인다. 이 투쟁은 5월 1일 메이데이 파업으로 발전해 페체르스부르크에서만 25만 명이 참여한다. 7월 1일에는 바쿠 유전 파업에 대한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2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진다. 이에 13만 명의 노동자가 7월 7일 총파업을 벌여 수도를 마비시킨다. 이틀 후인 9일에는 바리케이드가 페체르스부르크 거리에 등장한다. 1905년 혁명 이후 9년 만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열흘 후에 러시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끓어오르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혁명적 열기를 일시에 잠재운다.

그러나 몇 개 산업 도시의 1000명 이상의 대기업에 총 노동 인구의 50%가 집중되어 있고, 1905~14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65%인 950만 명이 파업에 참여한 경험―특히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은 1인당 18회나 된다―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 3년 동안의 격렬했던 투쟁들에 사회주의 운동이 긴밀하게 결합한 성과로 선진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였기에 내일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 혁명은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다.

영국 노동자들이 비공식 파업으로 오랜 침묵을 깨트린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장기 불황까지 겹침에 따라 영국 노동자들의 우세했던 지위도 점차 약화된다. 특히 노조 운동의 무풍지대에 있었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개량 정책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누적되어 간다.

이런 사업장들 중에 하나였던 런던의 성냥 제조 여성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1880년대 중반부터 도래한 호황 국면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1889년에 파업에 들어간다. 노동자 대중이 노조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스스로 떨쳐 일어선 것이다. 멋지게 승리를 쟁취한 이 ‘비공인’ 파업은 수십 년 동안 굳어져온 관료적인 노조 운동에 큰 충격을 주고 침묵 속에 굴종해오던 노동자 대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투쟁을 계기로 단순 작업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파업이 크게 고무되어 ‘신’조합주의운동이 일어난다. 온건한 노조 운동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금속 기계 제조공과 철도 기관사들도 종래의 배타성을 버리고 신조합주의 운동에 연대를 표시한다. 다음해인 1890년의 메이데이에는 20만 노동자가 하이드 파크에 모여 8시간 노동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노조는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금기를 깨트린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을 거치며 조합원이 1년 만에 2.5배나 늘어나 147만 명으로 증가하고 2년이 지난 1891년에는 새로 결성된 지방 노동조합 평의회가 60개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노동당이 결성된다.

한편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농업 생산물의 가격이 산업 생산물의 가격보다 점차 높아지고 이에 따라 실질 임금이 하락하는 현상이 1900년경부터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실질 임금 하락으로 소비가 줄어들면서 1905년경부터는 호황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총파업으로까지 발전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영국 노동자들은 1911년부터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4년까지 4년 동안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특히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는 전국 파업으로 자주 경제를 마비시킨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의식이 높아져 임금과 작업 시간뿐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통제나 작업장 규율에 대한 것까지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조는 새롭게 수많은 단순작업·여성 노동자들을 가입시킨다. 그리하여 노조는 1910년 164만 명에서 1915년 268만 명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또한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산별노조가 모든 부문에서 건설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조들인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삼각동맹을 결성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일거에 중단시킨다. 삼각동맹이 예고했던 총파업은 세계대전으로 중지된다. 노동자 운동은 아직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전투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한다.

◀ 행진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이탈리아에서도 장기 불황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자 바쿠닌을 추종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반도 곳곳에서 봉기가 빈발한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산업화가 추진되고 이에 따라 조직 노동자 운동이 등장하면서 민중 봉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무정부주의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된다.

1891년 밀라노·톨리노·파텐샤 등의 지역에서 지역 노동자 단체들이 연합하여 최초로 ‘노동회의소’를 조직한다. 1893년에는 12개의 지방 노동회의소가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노동회의소연맹을 결성하는데 1902년에는 지방 노동회의소가 76개에 달하게 된다. 각 노동자 조직들은 노동조합·협동조합·사회당지구당·사회당기관지 등이 입주해 있고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술집·진료소까지 갖추고 있는 노동자 회관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노동회의소’라는 이름 아래 회의를 갖고 공동 실천을 전개한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사회 발전이 뒤쳐져 있는―특히 농업이 중심인 남부는 더 그렇다―탓에 대중의 불만이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1890년대 남부 시칠리아에서는 빈농들의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1898년 밀라노에서는 정부의 제분세 인상에 항의하는 격렬한 대중 투쟁이 일어난다. 밀라노의 투쟁으로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탈리아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00년 제노아, 1902년 피렌체, 1903년 로마에서 지역 총파업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총파업은 모두 무력으로 진압된다. 그러자 파업에 대한 여러 차례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전국 총파업이 1904년에 노동회의소연맹의 주도 아래 단행된다. 2주 동안 진행된 이 총파업은 절정에 달했을 때는 참가 인원이 100만 명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거대한 시위가 벌어져 국가 경제의 대부분이 마비된다. 일부 도시에서는 무장 항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파업의 물결은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06년까지 이어진다.

노동자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투쟁의 열기를 모아 1906년 밀라노에서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노동총동맹은 대규모 농장에 고용되어 있는 농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1907년 19만 명에서 1911년 38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호황이 활기를 잃으면서 1912년부터 다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붙기 시작하여 1914년까지 파업이 급증한다. 급기야 6월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반전 시위를 유혈 진압한 데에 항의하는 바리케이드 전투로 발전한다. 그러나 ‘혁명의 문턱’에까지 다다랐던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중단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혁명적 노조’ 운동을 전개한다.

프랑스 노동자 운동은 1871년 파리코뮌의 패배 이후 오랜 기간 침체된다. 그러나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는 혁명프랑스의 후예답게 높은 수준의 대중 투쟁을 전개한다.

드 카르빌의 광산 노동자들은 1886년에 위험 작업에 대한 안전을 노동자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광부안전대표법을 파업을 통해 사회의 쟁점으로 만든다. 또한 카르모 광산노동자들은 1892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광산 노동자의 지도자 칼비냑’을 시장에 당선시킨다. 그런데 광산 소유주인 솔라쥬 가문이 더 이상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칼비냑을 해고시켜버리자 이를 노동자 참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파업으로 대응한다. 나아가 바로 그 다음해 1893년 총선에서는 칼비냑 시장을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조레스를 ‘노동자 후보’로서 국회의원에 당선시킨다. 또한 카르모의 유리병 공장 노동자들은 1895년에 파업이 장기화되자 노조와 협동조합이 ‘자주관리’하는 집단 소유의 유리병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

1901년에 처음으로 단결권이 완전히 인정되자 노동자들은 그 다음해인 1902년에 즉시 노조 전국 조직인 노동총동맹을 건설한다.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노조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전까지 사회당과 맺어왔던 관계를 단절한다.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혁명적 생디칼리즘’(혁명적 노조주의)이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 ‘생디카’는 ‘조합’이라는 말이다―은 정당·선거·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체를 발효시키는 효모’ 역할을 하는 ‘소수 정예’를 중심으로 운동을 이끌면서 총파업이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주장한다. 직접 행동과 총파업을 강조하는 생디칼리즘은 1900년대 초반의 10여 년 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히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유일한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밖의 어떠한 전술도 거부한다. 노동총동맹은 1906년 메이데이 때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으로 벌이고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그리고 1910년에는 철도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을 전개한다. 결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이처럼 이들은 독일 노조의 간부들에 비하면 훨씬 급진적이지만 “언젠가 터뜨릴 장엄한 총파업”이라는 꿈은 하나의 순수한 ‘신앙’으로 전락해간다.

사회당은 당 사무실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고 행동으로 연대하여 노동총동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3년에는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이 파리에서 파리코뮌을 기념하는 동시에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노조가 과거의 ‘혁명’운동에 대해 기념집회를 열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나라에서 정치총파업이 일어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총파업이 벌어진다. 벨기에에서는 1891년·1902년·1913년에, 스웨덴에서는 1902년·1909년에, 네덜란드에서는 1903년에, 핀란드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905년에,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인다. 이처럼 정치총파업이 중요한 정치 투쟁의 하나로 새롭게 구사되기 시작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전진하고 있다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1888년에 최초의 노조 전국 조직인 노조총동맹을 결성하고 수많은 지역·전국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1909년에 모로코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 최초의 ‘반전’ 총파업을 벌여 1주일 동안 공공 기관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식민지 국가 가운데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인도에서는 1905~09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고양된다. 이 중에서 봄베이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 틸락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벌인 6일간의 총파업이 가장 유명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파업이 전쟁 같은 상황으로 전개된다. 칠레 노동자들은 1907년에 벌인 파업에서 수천 명이 살해당한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1919년의 총파업―‘비극적인 일주일’―에서 1500명이 살해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파업 노동자에 대한 학살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독일에서는 노조 관료들이 파업의 물결을 잠재운다.

독일의 철혈(鐵血)재상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 단속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직까지 모조리 공공연하게 파괴한다. 이 법은 세 차례나 연장되어 12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새 황제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가 권좌에서 물러난 1890년에야 이 법이 폐지된다.

그러자 노조 운동은 그 동안의 성과를 모아 전국적인 단결로 나아간다. 전국 규모의 62개 노조에서 파견된 대의원들이 1892년 대회를 열어 전국노조연맹을 결성하고 레기엔을 의장으로 선출한다. 노조는 189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서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단속법’ 시기의 탄압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노조 간부들은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공격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문율로 가지게 되어 총파업 전술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의 광부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이는 독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업의 물결로 이어진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조직 발전의 호기로 삼기보다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재정적 압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1910년에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 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면서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난다. 다시 오랜만에 전투적인 분위기가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레기엔으로 대표되는 우파 노조 지도부―사회민주당의 지도부와 겹친다―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대중들의 투쟁 열기는 다시 가라앉는다.

미국의 노동자 운동은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압살 당한다.

펜실바니아 무연탄전의 탄광 노동자들이 공황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874년 12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장기간 파업을 전개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이 한창일 때는 내전과 같은 상태가 벌어지기도 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한다. 그러자 정부는 비밀 테러 조직의 조직원이라는 날조된 구실로 10명을 교수형 시키고 14명을 장기형에 처하면서 파업을 파괴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77년에는 철도노동자들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파업을 단행한다. 오하이오 주의 흑인과 백인 미조직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시작한 파업은 전국으로 확대된다.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는 바람에 수십 명의 노동자가 살해되고 군인과 회사 폭력 단원들도 사망한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철도 시설을 대량으로 파괴한다.

숙련 노동자들의 조합은 1881년에 노동기사단―1869년에 결성된 전국조직이다―에서 탈퇴하여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시카고의 노동자 35만 명이 1886년 5월 1일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킨다. (3년 뒤인 1889년에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이 날을 기념하여 5월 1일―may day―을 세계 노동자계급이 집회를 열고 투쟁하는 날로 정한다.) 이날 맥코빅 하비스터공장에서는 6명의 파업 노동자가 학살된다. 이에 항의하여 열린 5월 4일 헤이마케트 집회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경찰과 4명의 노동자가 죽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몇 명의 무정부주의 노동자 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날조된 재판으로 4명을 교수형 시키고 2명을 장기형에 처한다. 12년 전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더 치밀한 계획 아래 또 사용한 것이다.

불황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던 1894년에 오하이오 주와 그 주변 지방의 광부 12만 5000명이 임금이 인하된 것에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간다. 1902년에는 펜실바니아 무연탄광 노동자 14만 5천 명이 파업에 들어간다. 수많은 테러가 가해지는데도 파업은 5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같은 해인 1902년, 미국철강회사가 임금 인하를 실시하고 피츠버그 변두리의 홈스테드에서 800명의 숙련공에 대하여 공장 폐쇄를 감행하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회사는 ‘핑크톤 탐정’이라고 불리는 300명의 파업 파괴 전문 부대를 동원하여 공장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자들에게 라이플 총알을 퍼붓는다. 결국 주 방위 부대 병력까지 투입하고서야 다섯 달 동안 지속된 파업이 진압된다. 그리고 1905년 시카고 팀스터즈의 파업에서는 20명이 살해되고 400명이 부상당하고 500명이 체포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지배계급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전쟁에서 적을 대하듯 한다.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이 지배계급과 환상의 ‘악당 콤비’를 이룬다. 곰퍼스 위원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동총동맹 지도부의 비행과 만행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노조 결성을 어렵게 하는 ‘오픈 숍’ 제도와 직업별 노조를 악착같이 고수하고, 갱들에게 폭력을 사주하여 노조를 지배하고, 대기업이 조직한 전국시민연맹을 통해 노조 간부를 계통적으로 매수하고, 타협을 넘어서서 아예 파업을 자본가에게 팔아먹기까지 하고, 노동자를 약탈할 뿐만 아니라 고용주까지 등쳐먹을 정도니 노동총동맹은 그야말로 배신과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인 뎁스와 헤이우드는 1905년에 전투적인 노조들을 모아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시카고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창립한다. 여기에서도 생디칼리즘이 강한 영향을 미치는데 1908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 4회 대회는 강령 전문에서 정치적인 조항을 모두 삭제하고 “산업별로 조직하는 것에 의해, 우리는 낡은 사회의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구조를 창출해 가고 있다”라는 유명한 생디칼리즘 문장을 첨가한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생디칼리즘의 직접 행동을 적극 수용하여 격렬한 파업을 수많이 일으킨다. 특히 1912년 메사추세츠 주의 로렌스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 2만 3천 명의 완강한 파업은 국제적인 주목을 끈다.

지배계급은 노·자·정 협상 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의 혁명성을 거세하려 한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여러 가지 중요한 성과를 쟁취한다. 먼저 임금이 인상되어 약간이나마 생활이 개선된다. 12~15시간이 넘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은 8~10시간으로 줄어들고 현장의 노동 통제는 완화된다. 많은 나라에서 사회 보험이 도입되고 선거권이 개선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단결이 확대된 것에 있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도 1876년에는 200만 명을 넘지 못했는데 1914년에는 1322만 명을 넘어선다. 이처럼 노동자 운동은 총파업을 전개할 정도로까지 발전한 위에서 급속히 성장해 간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거세하기 위해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화해 조정 기구를 만든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는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에서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전국 단위의 단체 교섭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혹자는 이를 ‘담합주의’(corporatism)라고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오랜 투쟁 목표 중의 하나를 달성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힘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해→조정→냉각기간→쟁의행위찬반투표→파업’이라는 복잡하고 정식화된 절차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여과하고 과감한 행동을 규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크게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노조를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가의 동반자로 만들려는 지배계급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사실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노동자들의 성과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정하는 규칙 아래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분배 구조인 노·자·정 협상 기구는 근본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현저히 봉쇄해버린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조 내에서는 관료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뿌리 깊게 형성되어 간다. 이에 따라 지도부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뚜렷하게 갈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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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4

사회주의 대중 정당의 등장과 발전

독일 사회민주당은 합법 의회 활동에 매몰된다.

사회민주노동당과 노동자총연맹은 1875년 고타에서 합당 대회를 열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당인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새로 창당한다. 사회주의노동당은 베를린·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창당 3년 만에 선거에서 40%까지 득표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이에 비스마르크 정권은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해산하는 강수를 두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모든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단속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사회주의노동당은 지하 활동에 들어가고 천 명 가량의 활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된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단속법은 조직·집회·출판물만을 금지하는 것이어서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원내’에서의 합법 활동은 가능하다. 아무튼 사회주의노동당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여 1884년 총선에서 기존 12석의 의석을 24석으로 늘린다. 그런데 다수 의원이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중시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식민 정책의 하나인 ‘증기선 보조금 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당은 한 차례 홍역을 겪는다.

그래도 당은 성장을 계속하여 사회주의자단속법이 폐지된 1980년의 총선에서 143만 표(19.7%)를 득표하여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렇지만 당은 단속법 시기의 공포스런 탄압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직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표를 늘려나가는’ 합법 활동에만 치중하고 대규모 대중 투쟁을 두려워하는 체질로 변해간다. 이에 “청년파”들이 제도 정치권 철수와 선거 보이콧 등을 주장하다가 1890년에 당에서 쫓겨나고 독립사회주의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창당했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사회주의노동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에서 당 대회를 열어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선언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발행하던 비합법 신문 [사회민주주의자] 대신 국내에서 발간하는 합법 신문 [전진]을 창간한다.

그런데 활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최종 목표와 민주화·개혁이라는 당면한 실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혁명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천은 제도 정치에 치중하게 된다. 제국주의로 성장해 가고 있는 독일 경제의 발전과 사회민주당의 급속한 성장, 특히 의석수의 증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러자 베른슈타인은 “내게는 운동이 전부다. 궁극 목표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년)라는 책을 통해 혁명 이론에 ‘수정’을 가한다. 이로써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의 원조가 된다.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침묵과 무시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제 막 당 활동을 시작한 스물일곱 살의 폴란드 계 여성 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만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고 ‘일상 개혁 투쟁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켜 혁명 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고향인 폴란드―이때는 러시아 영토였다―로 돌아가 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와서는 (1891년 벨기에 총파업 때부터 대두한) 정치총파업 전술을 적극 제기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총파업은 경제 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정치 투쟁이란 의회 진출 아니면 무장 봉기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농노의 사촌뻘로 여겨졌던 ‘미숙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봉기는 1905년 1년 내내 유럽의 신문지상을 달구며 유럽의 노동자계급을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반면에 사회민주당의 9월 당 대회는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한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노조 측의 압력에 밀려 다음해 2월에 노조 지도부와 비밀회의를 열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하고 9월 당 대회에서는 노조의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당 대회 결의에 대한 노조 지도부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독일 노동자들의 오랜만의 투쟁의 물결도 다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인 1907년의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이전의 81석의 절반에 불과한 43석만을 얻으며 대패한다. 그런데 1905~06년의 급진화가 선거의 패배를 가져왔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당은 더욱 확실히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이 즈음부터 사회민주당의 최고 기관인 5인으로 구성된 간부회의의 인물도 바뀌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당 상근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첫 세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이후에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가 1906년에 은퇴한 아우어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맡는다. 1911년 예나 당 대회에서는 ‘순수한’ 노동자계급 출신인 필립 샤이데만―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수상이 된다―과 오토 브라운이 간부회의 임원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세대이고 이들에게 당이나 노조의 간부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유일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1910년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지만 당 지도부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을 전개한다. 카우츠키는 대중파업은 발전이 덜된 동유럽 사회에나 적절한 투쟁 형태라며 지도부의 입장을 옹호한다.

사회민주당은 1912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하는 전술을 편 끝에 425만 표(27.7%)에 110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합이 깨져 사회민주당은 다시 주변 세력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100명을 넘어선 국회의원들이 당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된다. 다음 해 8월에는 베벨이 사망하여 당의 이상과 현실 정치를 봉합해주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간부회의가 12인으로 늘어나지만 이 중에 좌파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된다.

프랑스 사회당은 ‘혁명적 개혁’을 추진한다.

사회주의 세력은 파리코뮌 패배 이후 제도 정치에서 배제된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력이 서서히 복구되긴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여러 개의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영국과 같은 대규모 노조 운동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강력한 사회주의 단일 정당은 아직 요원한 상태로 존재한다. 사회주의자들은 1884년에 도입된 지방자치제 선거에 참여하면서 제도 정치에 대한 경험과 실력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들은 1893년 총선에서 모두 50여명이 당선된다. 여러 정파로 찢겨 있는 상황이고 이전까지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약진이다. 이러한 성공의 요인은 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인 파나마운하 관련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면서 개혁파로 인식되어온 공화파 국회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극에 달하고, 이제 막 프랑스에 불어 닥친 불황으로 인해 계급 갈등이 치열해지고, 지방 행정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이 선거를 지원한 데에 있다.

1898년에는 지배 세력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하여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바람에 반동 극우파가 다시 득세한다. 그러나 1년 후 상황이 반전되어 공화파 내에서 개혁성이 강한 급진파가 정부를 구성한다. 그러자 밀르랑이 반동에 대항하여 공화제를 방어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며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격심한 논쟁이 벌어진다. 특히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한 장본인인 갈리페 장군이 내각의 국방상이라는 점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런 사람과 마주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수정주의 논쟁과 얽혀 더욱 복잡한 형국을 이룬다. 이로 인해 한참 무르익어 가던 사회주의 조직들의 통합은 뒤로 미뤄진다.

앞 절에서 본 것처럼 1902년에 결성된 노동총동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위기를 불러일으켜 통합으로 나아가게 한다. 밀르랑의 입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세력들은 합당하여 ‘프랑스의 사회당’을 만들고 나머지 세력들은 프랑스사회당을 창당한다. 그런데 밀르랑이 1903년부터 드러내놓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절하자 프랑스사회당도 밀르랑에게 등을 돌린다.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대회는 프랑스의사회당과 프랑스사회당의 통합을 재촉한다. 여기에 1905년 러시아 혁명이 강한 충격파를 던진다. 결국 1905년 4월에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으로 통합 사회당이 창당된다.

그러나 통합 사회당은 유기적인 당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분파 연합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1908년 툴루즈 당 대회에서는 우파의 개혁 노선과 좌파의 혁명 노선이 첨예하게 맞붙는다.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늘 수식어로 따라붙는 조레스는 대회 막바지에 ‘혁명적 개혁주의’를 당 노선으로 제시하며 회심의 열변을 토한다. 당이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오직 당이 혁명적 성격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하고 역으로 개혁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비로소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개혁과 혁명 사이에는 ‘충돌과 위기, 파탄과 도약’이 있을 거라고 역설한 것이다. 툴루즈 당 대회 이후 조레스는 더욱더 급진적인 행보를 취하면서 차츰 통합 사회당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당내 통합에 일단 성공한 조레스는 총파업 전술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노동총동맹과의 화합에 나선다. 사회당은 1910년 철도파업 때 당 기관지 사무실을 파업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면서 행동으로 연대하여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당하던 노동총동맹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이런 노력의 결과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1913년 파리의 프레 생-제르베에서 파리 코뮌을 기념하고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 군부의 영향력 증대에 맞서 거리낌 없이 정면 대결을 벌임으로써 반군국주의·반전평화 투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사회당은 1914년 총선에서 98명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둔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격렬한 대중 투쟁의 영향으로 급진화한다.

각 지역의 정치 세력들이 1892년에 모여 이탈리아노동자당을 창당하고 3년 후에 이탈리아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회당에는 노동조합·협동조합·노동자공제회 등이 집단으로 가입한다. 앞 절에서 보았던 노동회의소가 당의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회당은 의원단·공장조직·기관지가 따로 따로 독자 행동을 한다. 당 대회와 기관지 [전진]이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 노릇을 한다. 게다가 개혁주의 노선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인 필리포 투라티가 주도하는 사회당 의원단은 의회를 지배하는 남부 지주와 북부 자본가 사이의 담합에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고 북부 산업 지역의 일부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얻어내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 1890년대에 남부 시칠리아에서 빈농들이 대중 운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사회당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도 1898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격렬한 대중 투쟁에 힘입어 사회당은 1900년 총선에서 13%의 지지를 받아 33명을 당선시킨다. 아직 보통 선거가 실시되고 있지 않았기에 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 1904~06년에 이탈리아에서도 파업의 물결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타고 당 기관지 [전진]을 중심으로 당의 최대 목표인 사회주의 혁명을 견지하자는 ‘최대강령파’가 등장한다. 이들은 1900년대 내내 의원단의 개혁주의자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당내 투쟁을 계속하다가 1912년 당 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최초의 ‘성인 남성 보통 선거’로 치러진 이 해의 총선에서 사회당은 79석을 획득한다.

영국 노동당은 순수한 의회 정치를 추구한다.

◀ 창당 당시 영국 노동당의 포스터 : “노동당이 길을 연다”

1889년부터 비공인 파업으로 떨쳐 일어서기 시작한 노동자 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노조와 소규모 좌파 정당·단체의 대표들이 1900년 2월에 ‘노조 활동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제도 정치권 진출을 추진하는’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건설한다. 이 대표위원회는 1906년에 ‘노동당’―노동자 정당의 건설로는 유럽에서 가장 늦다―으로 전환한다. 노동당은 1906년 총선에서 29명을 당선시킨다.

그런데 노동당은 노조가 만든 당이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노동자 정당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노동당은 지지자들이 개별 입당하는 게 아니라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곧바로 당원으로 인정되는 집단 가입 제도로 운영된다. 물론 유럽의 다른 좌파 정당들에서도 이런 식의 집단 가입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개별 입당을 독려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당 대회에서 노조 측 대의원의 표는 자신이 대표하는 조합원의 수에 따라 수만 표, 수십만 표로 환산―블록 투표―하여 집계된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당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노조 간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노조는 일종의 이익 단체 역할을 하고 당은 원내에서 이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의 당 구조야말로 노조의 과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고 당의 임무는 이를 의회 내에서 대변하는 것이라는 의회주의 정치의 가장 순수한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당의 일상 활동은 하원 의원단이 모두 결정한다. 이후에 노동당이 집권하게 될 때는 내각, 그리고 야당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 역할을 하는데 내각은 모두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흔히 ‘당수’로 불리는 당 최고 지도자(수상 혹은 차기 수상)는 의원단 내 선거로 뽑힌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은 의원단에 의한 순수한 의회주의 정당이다.

사실 영국은 지난 200년 동안 한 번도 정치적 격변이 없었고 토지 귀족과 산업 자본가들 사이의 세력 교체는 의회라는 사교 클럽에서 지루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져옴으로써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어온 나라다.

노동당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산별노조 운동이 활성화되자 1918년 당 대회에서 창당 이후 최대의 탈바꿈을 단행한다. 당 대회에서 ‘생산수단·분배·교환에 대한 공동 소유와 산업·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통제’(당헌 4조)를 명시한 당헌이 통과됨으로써 노동당은 비로소 ‘사회주의’ 정당이 된다.

또한 이 당 대회에서 처음으로 개인 입당 제도가 도입된다. 하지만 창당 당시의 구조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당의 주된 기반은 여전히 노조의 집단 가입이다. 개별 입당 당원은 아무리 많아도 60만 수준에 그친 반면 집단 가입한 당원의 수는 600만을 넘어선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단일 정당을 추구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폴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다.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1848년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수십 년 동안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어 고통 받다가 1889년에 통합 대회를 열어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으로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89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를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노동자들이 1906년에 총파업을 경고하여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획득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다음해 1907년 총선에서 87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비엔나 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학생·교수 자유 조합’과 세계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자’ 교수인 칼 그륀베르크의 영향 아래 일급의 사회과학도들이 당과 노동자 운동 주위에 포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청년 세대의 대표자들인 칼 렌너,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오토 바우어 등은 1904년에 나온 이론지 [맑스 연구], 1907년에 창간한 월간 [투쟁], 일간지 [노동자 신문]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학파’를 구성하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교조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사상계를 주름 잡는다. 그러나 이 최초의 맑스주의 ‘학파’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된다.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전쟁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지만 강력한 전통으로 이어져온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이라는 이념 때문에 분당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좌파는 새로운 당(공산당)을 건설하기보다는 당의 좌익화를 지향하고 우파는 좌파에게 당권을 빼앗겼을 때(1917년)도 당을 떠나기보다는 소수파로 잔존하는 길을 택한다. 좌파인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통일의 사상이다. 이는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의 이념이다”라고 주장하고 공산주의자들만의 특수한 당을 건설함으로써 유럽 노동자 운동을 분열시킨 코민테른의 방침은 [공산당 선언]의 정신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혁명과 맞닥뜨린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인해 체제 변혁을 강렬하게 지향한다. 이들은 인민에게 고통만 주는 자본주의 단계―서구적 경로―를 거치지 않고 소생산자들이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촌락 공동체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1870년대 중반부터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을 인민주의자라고 부른다.

인민주의자였던 플레하노프는 유럽으로 망명하여 생활하는 동안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활발한 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1880년대 초에 맑스주의로 전향하여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창시자가 된다. 플레하노프는 자본주의는 가혹하기는 하되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사회주의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거칠 필요가 있는 단계이며, 농민층의 우매한 정치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 필요하고,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레하노프가 주도하는 노동해방단은 외국에서 글을 써서 비밀리에 러시아로 반입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점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한편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심각한 한계에 부딪힌다. 농민들이 차르 숭배에 젖어 있어서 혁명을 선동하는 지식인들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찰에 고발하기까지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농민들에 대한 선전·선동 활동을 포기하고 테러를 통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민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이들은 1901~02년에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테러를 주요 전술로 채택한다. 사회혁명당의 테러리스트들은 차르 정부의 초강경파 요인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암살함으로써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맑스주의자들은 1898년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분파들의 대표자 8명이 모인 이 대회는 창당을 결의한 수준이고 실질적인 창당대회는 되지 못한다. 게다가 무수한 운동 조직들이 비밀경찰에게 추적되어 수시로 깨져나간다. 그래서 레닌은 강한 규율과 민주집중제로 운영되는 비합법 혁명가 조직이 필요하며 또한 이것은 ‘전국 정치 신문’을 통해 단련된 활동가들을 기반으로 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편집진을 해외에 두고 [이스크라(불꽃)]라는 ‘신문’을 발간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성과로 1903년 런던에서 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 대회가 열린다. 그런데 조직 노선을 반영하는 규약 1조의 당원 규정을 두고 레닌과 마르토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레닌은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자고 주장하고 마르토프는 지지자들까지 폭넓게 당원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아무튼 편집국 구성에서 이스크라 진영이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레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러시아 말이다―가 형성되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멘셰비키(소수파)가 형성된다.

2년 후인 1905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민주노동당은 때 이르게 러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사회민주당 내의 여러 분파들은 당면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혁명의 주체가 누구이고 노동자계급이 누구와 동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가 너무나 허약하여 차르를 지지하는 지주와 타협함으로써 혁명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이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농민층을 노동자계급의 확고한 동맹 세력으로 확보하기 위해 토지 국유화를 강령에 넣자고 제안한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와 나란히 그리고 주도적으로 투쟁하되 혁명적 야당으로 남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집권하게 되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주도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하면서 결국 혁명의 진전을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본다. 멘셰비키는 노동자계급만을 중시한 나머지 농민층과 소시민층에 대해서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연속 혁명을 주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그 자체의 동력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환’되는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 혁명적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속 혁명으로 수립되는 사회주의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러시아 혁명은 비극적인 상황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창당한 지 이제 겨우 2년밖에 안 된 사회민주노동당은 노선을 현실화시킬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비록 사회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고 혁명으로 발전해 가는 상황에 힘입어 한때 15만 명 규모의 대중 정당으로 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겪는 혁명이라는 성난 파도 속에서 마치 방향키만 있는 돛단배와 같은 처지다. 그렇지만 그 방향키가 있었기에 1905년 혁명은 1917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초전이 된다.

그런데 1905년 5월 불리긴 수상이 ‘의회 신설’을 타협책으로 내놓자 멘셰비키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다면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혁명이 고양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1906년에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레닌은 4월 당 대회에서 입장을 바꾼다. 지독히 불평등한 간접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과의 접촉면을 늘이기 위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 대회는 ‘선거 불참’으로 결론이 난다. 그런데도 당원 일부가 개별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14명이 의원으로 당선된다. 이는 당 규율을 명백히 위반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레닌은 이들이 의회에 남아 당 의원단으로서 활동할 것을 지지한다. 이후 레닌은 볼셰비키 내에서 선거 불참과 의원단 해체를 주장하는 ‘소환파’들과 지난한 투쟁을 벌인다.

레나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1912년 4월에 볼셰비키는 [프라우다(진실)]라는 신문을 창간한다. 이 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8번이나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1914년 7월에 지령 64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기까지 꾸준히 발간된다. 당은 이외에도 이론지를 따로 발간하고 합법 출판사도 운영한다.

볼셰비키는 전국에서 2중 간선제를 통해 단 6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노동자 선거구―지주·농민·도시 등으로 선거구가 나뉘어 있다―모두에 후보를 내보낸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선거일인 10월 5일의 아침은 공장 대표자들의 자격 박탈에 항의하는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정부의 극악한 탄압으로 인해 선거와 대중 행동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전투적인 볼셰비키 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된다. 선거 결과 전체 442개 의석 중에서 사회민주당이 14석을 차지하는데 노동자 선거구 6곳에서는 모두 볼셰비키가 당선된다. 노동자계급이 250만인 나라에서 볼셰비키가 114만 4천 명의 노동자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14명의 사회민주노동당 의원단에게는 대정부 질의를 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의회활동인데 그나마도 33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들은 원내 활동과 [프라우다] 그리고 활발한 노동자 투쟁을 결합해서 효과적인 정치 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 보험(의료 보험) 투쟁이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사회 보험―6월에 처음 도입되었다―의 확대와 완전한 노동자 통제를 줄기차게 주장하여 대정부 질의를 하는 12월 14일에는 노동자 6만 6천 명의 지지 파업을 이끌어낸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프라우다]와 그 사무실을 매개로 노동자 조직들과 긴밀히 협력한다. 또한 대정부 질의에서 노동 탄압에 항의하거나 장관 항의 면담을 주도하고 공장 정문과 거리에서 연설을 통해 투쟁 상황을 알리고 파업 기금을 모금하면서 앞 절에서 서술한 수많은 투쟁들에 적극 연대한다.

[프라우다]는 이러한 투쟁들을 즉각 보도하여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매일 35개가량의 투고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게 한다. [프라우다]는 하루 4만~6만 부가 판매되는데 절반이 공장에서 팔린다. [프라우다]는 정기구독자 조직과 후원회원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사실상 합법 대중 정당의 기능을 한다. 이제까지 당이나 노조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프라우다]의 기사를 보고 사무실에 찾아와 노동자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각종 조직에 가입한다. 그리고 페체르스부르크의 노조 18개 중 15개, 모스크바의 노조 13개 중 10개가 [프라우다]를 적극 지원한다.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놓고 보면 볼셰비키는 250만의 노동자계급 중 수천 명의 간부와 3만~5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중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멘셰비키 신문 [루취(빛)]는 [프라우다]와 비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당의 방침에 따라 의회가 휴회하는 동안은 지역구를 순회하면서 공장과 지역에서 의정 활동을 설명하고 지방의 노동자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보낸다. 노동자 의원들이 방문한 후에는 대개 파업 투쟁이 분출하고 [프라우다] 구독자가 늘고 당 조직이 강화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이 혁명을 향해 치달아가던 1914년 7월 8일 경찰은 [프라우다] 사무실을 급습하여 강제 폐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전시 동원령이 선포되자마자 곧바로 반전 성명서를 채택하고 전쟁 예산 투표에 반대해 전원 퇴장한다. 이는 세르비아 사회당과 함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의 의원단이 전쟁에 반대한 단 두 개의 사례에 속한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이후 원외 투쟁에 주력하다가 11월에 결국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이로써 볼셰비키의 합법 활동은 또다시 중단된다. 그러나 [프라우다]를 통해 계급의식을 자각한, 그리하여 이후 혁명의 주체가 될 수천 명의 선진 노동자들이 이미 대중 속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난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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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5

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토 재분할을 둘러싸고 충돌로 나아간다.

1876년 이후 30여 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의 독점 자본은 넘쳐나는 과잉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한다. 자본의 축적에는 ‘자연스런 경계선’이란 없으며 자본의 팽창 능력이 그 한계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변화된 세력 관계는 기존의 ‘세력권’을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해결책은 식민지 영토의 재분할이며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필연이다. 남은 것은 누가 먼저 도발하는가이며 그 충돌이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하는 것뿐이다.

프랑스는 1905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에 대해 독일은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여 공세를 편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독일을 가장 위험한 잠재적 적대국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1907년에 영국과 식민지 세력권을 둘러싼 이견을 해결한다. 이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삼국 협상’이 맺어진다. 반면에 독일은 영국의 수준을 능가하는 해군 증강을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은 경쟁하듯이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한다.

1908년 터키에서 혁명이 발생한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는 발칸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다. 이에 대해 삼국 협상 회원국인 러시아·영국·프랑스가 반대를 표명하자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를 군사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한다.

1911년에 모로코를 둘러싸고 다시 위기가 도래하자 독일은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전함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오스만제국이 급속히 약화되는 틈을 타고 이 지역의 국가들―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불가리아·그리스―은 저마다 상치되는 영토권을 요구한다. 그 결과 1912년과 1913년에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일어나 세르비아가 꽤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그 중 얼마를 포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1912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여 권력 장악을 목전에 바라보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의 파업이 1912년부터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봉기를 향해 치닫는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 내의 혼란한 상황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살해한 세르비아 청년

때마침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에 보스니아의 한 학생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빌미로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전폭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도 군사 동원령을 내려 전쟁 태세에 돌입한다. 독일·프랑스·영국도 8월 1~4일 사이에 차례로 군사 동원령을 내리며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은 속전속결을 계획했지만 새로운 전술로 등장한 참호전으로 인해 서부 전선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교착 상태의 늪에 빠진다. 중립을 지켜오던 이탈리아가 1915년 5월 삼국 협상 편에 서서 참전한다. 독일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잠수함으로 선박들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1917년 4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고 참전한다.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한다.

제2인터내셔널(1889년 결성)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강령―레닌이 작성했다―을 채택한다. 그리고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1912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대회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위기가 닥치면 동시 총파업을 포함한 반전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그 동안 정치 총파업 전술을 거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도 이번에는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전쟁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자 프랑스 사회당은 7월 16~17일에 곧바로 임시 당 대회를 열어 군수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전 총파업을 벌일 것을 결의한다. 그런데 세계 반전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레스가 7월 31일 극우파 청년에게 바로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즉사한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다음날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다. 8월 4일 조레스의 장례식에서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한다. 그리고 며칠 안 돼서 사회당은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 지지하며 전시 내각에 합류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혁명적인 지도자라던 쥘 게드가 전쟁 내각의 장관이 되는 판이다. 벨기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 서기국 의장인 에밀 반더벨드가 부르주아 정부의 내각에 참가한다.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인 8월 2일, 전국노조연맹을 좌우하고 있던 레기엔 일파는 자본가들과 산업 평화 협정을 맺으며 전쟁 지지의 물꼬를 튼다. 또 바로 다음날 독일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원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조국 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칼 리프크네히트 의원은 이 해 말의 전쟁 예산안 표결에서는 홀로 반대표를 던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전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당내의 반전 좌파가 다시 결집한다.

러시아에서는 플레하노프를 포함한 상당수의 멘셰비키와 다수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열렬한 조국방위파로 변절하여 그 동안 타도 대상으로 삼아 격렬히 투쟁해왔던 차르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한다.

노조의 관료적인 지도부들도 전쟁을 지지한다. 영국의 노조회의와 노동당은 ‘산업 휴전’을 선언하고 파업권과 같은 노동자의 권리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군수 생산을 최대한으로 증대하는 데 협조한다. 독일의 노조 관료들은 만약 전쟁에 반대한다면 오랜 기간 고생해서 쌓아올린 노조를 정부가 파괴할 거라는 핑계를 대며 정부에 협력한다. 생디칼리즘 운동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의 노동총동맹도 전쟁을 공식 지지한다. 미국에서는 곰퍼스 일파가 정부와 복잡한 계급 협조 협약을 체결하고 조직 노동자의 정치 발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는 전쟁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쟁 전해에 제2인터내셔널은 22개 나라의 27개 사회주의 정당을 포괄하면서 득표수 합계 1200만 표에다가 거의 모든 나라의 의회에서 의원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원 수는 독일 110, 프랑스 103, 핀란드 90, 오스트리아 82, 이탈리아 80, 스웨덴 73, 영국 42, 벨기에 34, 덴마크 32, 노르웨이 23, 러시아 13, 네덜란드 16명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를 받는 노조의 조합원수는 국제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여 적어도 1천만 명이 넘고 따라서 유럽의 노조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유럽의 주요 산업을 한꺼번에 정지시킬 수 있는 전략적 힘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사회민주당은 거대한 협동조합 운동도 장악하고 있었고 전쟁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백 만 명의 지지자를 규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신념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이러한 모든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의 간부들은 수천만 명의 노동자와 민중을 죽음의 전쟁터로 몰아넣는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어쨌건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민족주의 정서가 대중을 휘감는다. 대중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도래할 것 같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국가의 깃발을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징병제가 없는 영국에서도 1914년 8월에서 1915년 6월 사이에 200만 명이 군대 복무를 자원한다. 이것은 제국주의 정치가 국민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들의 가득 찬 불만을 혁명을 향한 계급적 분노로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노동자 파업과 민중 봉기가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다.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의 부활제 주간에 영국의 억압에 반대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의 지도자는 노동자이자 매우 뛰어난 맑스주의자로서 1905년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조직한 제임스 코널리이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애국자들이 4월 24일 반란을 일으켜 더블린을 장악하였으나 4월 29일에 진압되고 반란 주모자들은 5월 12일 사형에 처해진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1917년에는 영국 본토에서 3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한다. 미국에서도 이전의 어느 해보다 가장 많은 1233건의 파업이 발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최대강령파가 당권을 장악하여 전쟁 발발 당시부터 줄곧 반전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식량난과 물가 인상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수준이 급락하면서 1917년 초부터 전쟁 직전의 투쟁 양상이 다시 나타난다. 토리노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파업의 물결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때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한 소식은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부채질하여 파업은 더욱 고양된다. 그리고 사회당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5년 4월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고 반전 투쟁에 돌입한다. 반전 의원도 18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1916년 3월 지도부에 대항해 탈당을 결행하고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독립사회민주당 내의 좌익 분파로 활동한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4월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12월 말에는 탄광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 투쟁을 전개한다. 다음해인 1918년 1월에는 탄약 공장을 중심으로 100만 명이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 총파업을 전개한다. 1월 6일 회담이 열리고 있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는 러시아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강화 조약에 반대하여 대규모 대중 집회가 열린다. 그러자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파업위원회를 러시아 혁명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노동자·병사 평의회로 발전시켜 대안 권력을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립사회민주당에 속한 베를린의 좌파 노조 간부들은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이라는 또 다른 분파를 결성해 은밀하게 무장 봉기를 준비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10월에 타협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한다. 황제가 수상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원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 내각제가 약속되고 사회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이센 주 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진다. 사회민주당은 여기서 집권의 길을 발견하고 주춤거린다. 그러나 민중은 전쟁의 즉각 중지를 원하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한다. 킬의 해군 사병들은 11월 3일 패배가 뻔한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건설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일주일 사이에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확산되고 11월 9일 수도 베를린에서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건설된다. 이 날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한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로서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의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다. 정부는 11월 11일 전쟁 중단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 반전 좌파의 핵심 인물인 프리드리히 아들러―아인슈타인의 막역한 친구로서 아인슈타인을 사회주의로 이끈 장본인이다―는 1916년 10월 전쟁의 즉각 중지를 부르짖으며 수상인 슈튀르크 백작을 암살한다. 테러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러의 행동은 전쟁에 지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1917년 5월에 열린 재판은 “우리의 프리드리히를 구출하자”는 비엔나 시민들의 함성에 파묻히고 결국 황제는 대사면령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아들러와 바우어가 주도하는 좌파는 반전 운동의 도덕적 권위를 업고 가을에 사회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다. 다음해인 1918년에는 100만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이고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총파업의 요구 사항은 아들러의 석방, 즉각적·전면적 강화, 혁명 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강화 회담에 노동자 대표 파견 등이다. 결국 가을에 접어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한다. 그러자 제국 곳곳에서 각 민족이 저마다 임시 정부를 건설한다.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기독교사회당·범게르만당 3당이 주도하여 10월 30일에 임시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11월 12일에 공화국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3월 과거에는 한 나라였던 헝가리에서 소비에트(평의회) 권력이 수립된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노동자·민중들의 반전 투쟁과 혁명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이외에도 수많은 파업과 반전 시위들, 그리고 이 모든 투쟁들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고통 받는 유럽 민중을 구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 지형이 크게 바뀐다.

◀ 파리에서 만난 4거두, 좌측부터 로이드 조지(영국), 올란도(이탈리아), 끌레망소(프랑스), 윌슨(미국)

4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 기간 동안 인류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생산해낸 엄청난 물자가 파괴된다. 게다가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민간인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들을 제외하고서도 900만 명이 죽고 2200만 명이 부상당한다. 이런 끔찍한 파괴력은 과학과 기술의 산물인 탓에 서양 세계의 이념인 진보와 합리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느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물가 폭등으로 실질 임금이 하락하여 더욱 고통 받는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 미국에서만 새로운 백만장자가 1만 8천 명 이상 생겨난다. 승전국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이득은 지배계급에게만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에도 자본의 착취 구조는 어김없이, 아니 더 맹렬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이 전쟁을 고비로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유럽의 힘은 상대적인 하락의 길로 들어선다.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된다. 이 조약은 전쟁의 책임을 오로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전가한다. 승전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식민지 대부분을 왕창 갈라먹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한다. 이런 과도한 조치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4개 제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러시아―이 붕괴된다.

국민을 총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은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만든다. 이제 국가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여러모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사에서 하나의 큰 분수령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다음 장은 세계를 뒤흔든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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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1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들이 정치 총파업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고 ‘이중 권력’을 형성한다.

◀ 사망자들을 공동으로 매장하는 러시아 병사들

러시아 군대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7년까지 전사자 170만, 포로 250만, 부상자 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농민들이 병력으로 차출되고 쟁기를 끌 말이 기마대에 징발되는 바람에 수많은 토지가 경작되지 못한 채 황폐해진다. 대부분의 산업이 군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소비재의 생산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 민중들―전체 인구는 1억 6600만 명이다―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
(잠깐, 지금부터 1918년 2월까지의 날짜는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에 의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은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에 비해 13일이 늦다.)

지난 시절 가장 많은 투쟁을 경험한 페트로그라드(옛 페체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이 1917년 1월 대규모 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2월 18일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 금속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곧 무장 봉기의 성격을 띤 정치 총파업으로 발전한다. 전제정 타도와 전쟁 중지를 외치는 민중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전시라서 페트로그라드에는 군대로 가득 차있었지만 병사들은 2월 27일 혁명적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에 합류한다. 다음날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병사들과 모스크바의 많은 부대가 혁명 진영으로 넘어온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민중들의 압력에 밀려 3월 2일 퇴위 선언문에 서명한다. 다음 날 두마(의회)의 지도부는 자유주의자인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변호사이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인 케렌스키는 법무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러나 민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면서 계속 전진한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1000명 당 1명의 비율로 대기업 공장에서 424명의 대표와 중소기업 공장에서 422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한다.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87%가 선거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아래에서부터 스스로 조직한 것이다. 농민과 병사들도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 평의회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건설된다. 대도시들에서는 소비에트, 민병대,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문화 서클 같은 조직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무수히 생겨난다.

공장위원회는 3월에 벌써 전국 공장 노동자의 75%인 200만 명을 끌어들이며 소비에트 다음으로 큰 조직으로 성장한다. 공장위원회는 경영인에 대한 감시, 원료와 자재의 유출 방지, 공장 안의 치안 유지를 위한 민병대 조직, 식량 확보와 배급, 교육과 문화 등의 각종 행사, 정치 문제에 대한 토론과 선전, 심지어 봉기 시기에는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 중에서 공장을 계속 가동하고 혁명을 수호하는 데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다. 공장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 관리’라고 불린다.

노동자들은 3월 10~1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업인 협회와 협정을 맺고 8시간 노동제와 결사의 자유를 획득한다. 이로써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은 타협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민중 평의회)가 정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인민주의자)이 광활한 러시아를 운영해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와 임시 정부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소비에트는 독일군의 공격과 반혁명으로부터 러시아와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임시 정부의 ‘전쟁 지속 정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또한 ‘혁명적 조국방위’에 사실상 동의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사회주의자들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부르주아와 연립 내각을 구성한다.

이렇게 혁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인 4월 3일에 레닌이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레닌은 다음날 소비에트 볼셰비키 집회와 볼셰비키·멘셰비키 합동 집회에 연이어 참석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혁명)으로” 바꾸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자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너무나 획기적인 내용이라 멘셰비키들은 ‘터무니없는 잠꼬대’로 조롱하고 대부분의 볼셰비키조차 깜짝 놀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5월에 망명에서 귀환하는 즉시 레닌의 입장을 전폭 지지한다. 트로츠키의 가세로 레닌의 당 내 영향력은 현저히 강화된다. 트로츠키는 이때까지 레닌의 ‘협소한’ 당 조직론에 반대하여 볼셰비키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오고 있었다.

한편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4월 18일에 러시아는 최종 승리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서를 연합국 측에 보낸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의 노동자·병사들이 전쟁 중지와 밀류코프 사퇴, 무병합·무배상의 민주적 강화(講和)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에 들어간다. 시위는 다른 도시로 급속히 퍼져나간다.

다급해진 임시 정부는 소비에트 측에 내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권력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상황에 떠밀린 멘셰비키는 1905년 이래 계속 고수해온 ‘임시 정부 불참여’ 입장을 철회하고 임시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여전히 회피한다. 멘셰비키가 임시 정부에 참여한 목적은 반혁명 세력과 레닌으로 대표되는 과격한 혁명 세력 양쪽으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구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편 농민들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도 임시 정부에 같이 참여한다. 이로써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립 정부가 처음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토지 재분배 문제를 다루기로 한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계속 미루어지자 농민들은 늦봄 이후부터 다시 지주들의 토지를 장악하여 분배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의 봉기는 여름 내내 계속된다. 임시 정부에 참가하고 있는 사회혁명당이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볼셰비키는 농민들의 행동을 전폭 지지함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5월에 들어서면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경제가 악화되자 노사간의 협조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장위원회의 비대해진 권한과 8시간 노동제 때문에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다며 경영인이 자율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주도해야 하고 임시 정부는 경제 정책을 통해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공장위원회가 봉기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이처럼 대결 국면이 조성되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위원회들은 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5월 30일~6월 5일에 ‘1차 전 페트로그라드시 공장위원회 총회’를 개최한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 방향을 판가름할 이 총회에는 수도의 367개 공장에서 총 33만 7천 명을 대표하는 568명의 공장위원회 대표들이 참가한다. 치열한 토론 끝에 소비에트의 권력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공장 경영에 대해서는 임시 정부에 의한 ‘국가 관리’가 아닌 자주적인 ‘노동자 관리’를 85대 336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채택한다.

이 총회에서 볼셰비키 노동자가 적극 주장한 ‘전쟁 즉각 중지’와 ‘노동자 관리’가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그만큼 공장위원회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강화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볼셰비키의 주장이 거부된 데에서 보듯이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다. 반면에 농업·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혁명당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공장위원회와 정치 세력과의 관계는 아주 유동적이다.

공장위원회는 총파업과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연일 분주하게 회의를 소집한다. 그런데 6월 10일의 소비에트 총회에서 볼셰비키조차 총파업과 시위를 만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위원회는 6월 13~20일에 대파업을 전개한다. 푸틸로프 금속 공장 노동자들이 선봉이 되어 가두시위를 벌이자 곧 미숙련공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거리에서 유혈 투쟁이 전개된다. 임금과 식량 배급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던 미숙련공들이 대거 정치 투쟁에 합류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단결이 더욱 강화되고 정치의식도 급성장한다. 나아가 18일에는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구호가 가두시위에서 공공연하게 외쳐진다. 이런 상황을 타고 농촌에서도 봉기의 물결이 확산된다.

겁에 질린 자본가들은 직장폐쇄로 대응한다. 특히 대부분 국영 기업이거나 외국 기업과의 합자 회사인 대기업에서는 경영을 맡고 있던 전제정 시대의 고급 장교나 외국인 기술자들이 아예 도피하거나 작업을 거부한다. 이 바람에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반면에 그런 만큼 공포에 가까운 절망감으로 자본가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노동자 관리’만이 반혁명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급속히 늘어난다. 그리고 반혁명에 저항하는 투쟁에 소극적인 소비에트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 임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다. 하지만 노조는 공장위원회의 활동에 불안감을 표시하면서 노조가 국가 행정 기구의 기능을 맡을 수 없다고 결의한다. 이처럼 소비에트·공장위원회·노조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다급해진 케렌스키는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6월 말에 독일군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개시한 총공세는 러시아 군의 참패를 초래한다. 게다가 7월 초에 징집령까지 내리자 노동자들은 배신감과 위기감에 휩싸인다.

7월 4일 여름궁전 앞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7만 명이 운집한다. 환호와 야유가 교차하던 집회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 타도와 ‘소비에트 권력’을 외치는 정치 시위로 발전한다. 시위대는 정부군과 격렬한 대치 끝에 4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할 것, 부르주아 내각과 결별할 것, 노동자 관리를 실시할 것, 토지를 재분배할 것, 기아를 구제할 것 등을 요구하며 기업인들의 선적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공장을 점거하면서 봉기를 일으킨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70%가 유혈 가두 투쟁에 참가하고 수도에 있던 병사 10만 명 가운데 5만 명이 여기에 가세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봉기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고 볼셰비키는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가 봉기가 확산된 뒤에야 뒤늦게 봉기에 합류한다.

임시 정부는 까자끼 기병대와 기관총 부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다. 소비에트는 임시 정부의 시위 진압을 승인하고 볼셰비키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는 데에 동의한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독일의 첩자로서 돈을 받고 러시아를 원수에게 팔아넘기기 위해 반전 책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7월 위기’로 인해 볼셰비키 조직은 막대한 손상을 입는다. 레닌은 지하로 잠적했다가 핀란드로 피신한다. 트로츠키는 체포되었다가 한참 만에 풀려난다. 그렇지만 임시 정부의 위상도 극도로 불안정해져 르보프가 사퇴하고 케렌스키가 새로운 내각 수반이 된다.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분쇄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독재자 스타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극우파 출신인 꼬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대독전쟁을 재개한다고 선포한다. 자본가들은 반격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관리 운동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독전선에서 리가가 함락 당했다(8월 20일)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데도 멘셰비키 출신의 노동부 장관 스꼬벨레프는 8월 23일 생산성 하락의 책임을 공장위원회 탓으로 돌리는 공문을 발표한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나 하층 민중의 관심사나 행동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급속히 지지를 상실한다.

한편 꼬르닐로프는 8월 26일 전권을 자신에게 이양할 것을 케렌스키에게 최후통첩하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한다. 경악한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측에 다시 도움을 청하고 심지어 볼셰비키에게까지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인데도 부르주아지는 군부의 쿠데타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할 만한 행동이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임시 정부는 8월 28일 멍청하게도 노동자 탄압령을 결의한다.

역시, 혁명을 시작했던 노동자들이 혁명 수호에 가장 앞장선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기차를 세우고 무전송신을 차단하면서 쿠데타군의 진격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 세력과 수도의 수백 만 노동자·민중이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군한 쿠데타군을 격퇴하고 코르닐로프를 체포한다. 이로써 우익 세력의 정치력은 완전히 무력해지고 군대의 지휘 체계는 심각하게 붕괴된다. 사회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다.

노동자들은 7월 봉기와 8월 쿠데타를 경험하면서 유산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고 임시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게 되고 소비에트 집행부까지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장위원회 지도부와 적위대(노동자 민병대)와 소비에트 산하의 군사혁명위원회를 더욱 지지하면서 유일한 대안으로서 볼셰비키를 동맹 세력으로 선택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연설에서 민주주의나 입헌 체제라는 단어가 점차 사라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국가’라는 말이 새로운 용어로 등장하여 자주 쓰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어가 된다.

급기야 볼셰비키가 8월 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그리고 9월 초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연이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행부의 지도권을 넘겨받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지난 7월에 볼셰비키에 정식으로 입당한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의장에 선출된다.

노동자들은 7월 이후로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직장폐쇄에 항의하여 9월에 사상 최대의 파업을 전개한다.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는 9월 10일 3차 대표자 회의를 열고 ‘고용·해고·생산·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관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직장폐쇄에 대항해 싸우는 과정에서 ‘노동자 관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9월부터 농민 봉기가 다시 격화되고 지방 민족들의 독립·자치 운동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이즈음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대량 체포되고 독일에서는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러한 소식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교전국에서 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고 유럽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세계 혁명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볼셰비키가 무장 봉기로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창건한다.

핀란드에 있던 레닌은 9월 12일과 14일에 봉기의 조건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두 통의 편지를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에 보낸다. 중앙위원회에서 편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10월 10일에는 중앙위원회의 지시로 핀란드에서 돌아온 레닌도 참석한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볼셰비키 세력이 아직 너무 미약하다며 봉기를 격렬히 반대한다. 하지만 중앙위원회는 다수의 찬성으로 봉기 안을 통과시키고 당 조직에 봉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는 다음날 바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봉기를 조직하는 작업을 공공연하게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군사 전술가로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한다.

역사적인 제1차 ‘전 러시아 공장위원회 총회’가 10월 17~22일 새로운 권력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다.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권력’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멘셰비키 국제파인 밀류찐과 라린도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 안을 지지한다.

‘노동자 관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국가’가 생산 과정을 감독하고 통제할 것을 주장한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아래서부터 위로 조직된 ‘생산자 연합’이 전체 생산 과정에 대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린은 제헌의회를 통한 노동자 관리를 주장한다. 공장위원회 대표들은 치열한 토론 끝에 (이상적인 생산자 연합 안이 아닌) 현실적인 노동자 국가 안을 채택한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회의하는 모습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특히 금속 노동자들은 권력을 즉각 인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선동하면서 임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무장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무장 봉기에 필요한 기술자·수송차량·탄약·장비를 지원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후 봉기에서도 혁명의 핵심 주체가 된다. 모스크바·중부지대·도네쯔유전지대·우랄탄광지역의 노조와 군사혁명위원회도 봉기를 돕기 위해 요원들을 페트로그라드에 파견한다. 그리고 10월에는 상당수 노조가 이전과 달리 정치 중립 노선을 버리고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채택한다. 이렇게 되자 소비에트 지도부가 아니라 공장위원회가 노동자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기민하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모든 권력을 노동자·빈농의 소비에트로”로 바꾼다.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눈앞에 닥치자 임시 정부는 10월 24일 아침 볼셰비키의 인쇄소를 폐쇄하는 결정을 내리며 선수를 친다. 레닌은 우물쭈물 하다가 오늘을 넘기면 봉기가 실패할 수 있다며 오늘 바로 거사를 일으킬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수십 년을 압축해놓은 듯한 혁명적 시기에는 시시각각으로 상황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에 예정대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바로 붉은 군대, 발틱 함대의 수병,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를 동원하여 24일 저녁부터 계획했던 대로 신속하게 모든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겨울궁전을 포위한다. 그리하여 25일 밤에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겨울궁전을 함락시키고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정부 각료들을 체포한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네바 강에서 공격에 합세한 순양함 ‘아부로라’ 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쏘아 올린 포성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의 막을 최초로 여는 민중들의 환희에 찬 함성으로 울려 퍼진다.

겨울궁전이 함락되기 직전인 25일 저녁 스몰니에서 개최된 2차 소비에트 대회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임시 혁명 정부―가 창건되었음을 선포한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일주일 후 모스크바에서도 소비에트가 권력을 인수한다. 이 기세를 타고 볼셰비키의 권력 기반은 각 지역으로 확산된다.

새로운 정부는 먼저 모든 교전국에 대해 무병합 무배상의 즉각 강화를 촉구하면서 평화 협상을 위하여 최소한 3개월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조치들을 공표하고 바로 법률로 제정한다. 농민에게는 지주·황실·수도원·교회의 모든 토지를 인민의 소유로 전환하고 노동과 소비를 기준으로 평등하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한다. 노동자들에게는 8시간 노동과 ‘노동자 관리’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천명한다. 러시아의 모든 민족에게는 자치를 약속한다. 그리고 신분제를 철폐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고 교회법이 아닌 민법에 따라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소비에트 정부로 권력을 집중한다.

소비에트 혁명 정부는 11월 12일 오랜 세월 모든 혁명 세력의 공통된 요구였던 ‘헌법제정회의’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한다. 레닌은 선거 실시에 반대한다.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로 실시된 이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혁명의 진원지였던 대도시·공업중심지·군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지해왔던 사회혁명당에 투표한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 우파가 50% 이상, 볼셰비키가 24%, 부르주아·지주정당이 13%, 멘셰비키가 3%를 득표하여 제헌의회에서 옛 소비에트파 사회주의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11~12월에는 사회혁명당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정당을 이루고 있던 사회혁명당 좌파가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회주의자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하자’는 안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자 가급적 중립을 지키려던 노조마저도 이들에 대해 실망하고 등을 돌린다. 1월 20일에는 분노한 노동자들이 반혁명 세력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까지 벌인다. 이 사이에 소비에트 정부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은거하고 있던 제헌의회를 기습하여 강제 해산시킨다.

그런데도 민중들은 이를 지지하거나 방관한다. 러시아 민중은 경험한 적이 없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아무런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 볼셰비키 정권이 자신들을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레닌의 ‘국가 자본주의’ 정책과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가 충돌한다.

공장위원회는 혁명 직후부터 모든 산업에서 공장을 강제 점거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노동자 관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자본가들과 격심한 계급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노조가 제안한 ‘전 러시아 노동자 관리 회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자본가들과 멘셰비키는 기업 몰수 행위에 대해 무정부적인 처사로 맹렬히 비난한다. 그런데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 산업 관리를 위해 구성한 ‘중앙·주 노동자관리기구’ 역시 경영에 대한 노동자들의 직접 개입을 금지하는 결의문을 제출한다. 레닌은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노동자 관리’ 운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지만 내심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가 1918년 1월 7~14일에 열린다. 대회는 공장위원회를 노조로 통합하고, 국민 경제를 위해 개별 공장들의 분권 생산보다 중앙 관리를 옹호하며, 지방 경제 기구는 정책 결정 기구가 아니라 집행 기구로 운영한다고 결의한다.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중앙 관리 기구를 선호하는 세력이 아래로부터 형성된 공장위원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세력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혁명당 좌파는 생산 수단과 사유권이 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레닌식의 계급 협조나 중앙 정부에 타협적인 노동자 관리는 오히려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래도 레닌은 공장위원회를 노조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때문에 돈바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과 에까쩨리노다르의 항구 노동자들은 노조로 관리권을 이양하기를 거부하면서 격렬한 시위까지 벌인다.

레닌은 생산력을 빠르게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본가는 재산권과 의사결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영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동자들은 회계를 감독하면서 노동 규율을 책임지는 ‘국가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그리고 스쩨빠노프는 ‘노동자 관리’가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노동자 행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당내 좌파들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 행정’은 관료주의화를 초래하는 이중적인 계급 협조 체제라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여간 생산과 유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이에 레닌은 공장위원회의 노동자 관리를 소부르주아적이며 무정부적이고도 반혁명적인 생디칼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 자본주의가 점진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박한다. 그리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유화를 무기한 연기하고 테일러 시스템과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하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국가 자본주의’ 정책은 전문 경영인들과 노동자들 쌍방으로부터 반발을 받으면서 중단된다.

당내의 좌파는 ‘노동자 반대파’라는 이름으로 분파를 형성하여 노동자들의 자율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레닌의 중앙집중식 노동 정책을 전면 비판하기 시작한다. 또한 점증하는 식량난과 생산고 하락으로 5~6월에 일부 대기업 노조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인기가 오르면서 ‘볼셰비키 타도’라는 구호가 나돌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자 관리’를 외치며 상부의 지시를 드러내놓고 거부한다. 푸틸로프 공장과 오부꼬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관리’를 위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파업을 시도하거나 생산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식량난과 노동 정책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1918년 상반기 중에 페트로그라드에서만 총 인구의 57%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이 농촌으로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도 인구의 44%가 감소한다. 그에 비례하여 노동자의 수가 감소하고 질도 하락한다.

볼셰비키 정권은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반혁명을 이겨낸다.

소비에트 정권은 1918년 3월 3일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가까스로 전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산업 중심지와 곡창 지대를 잃는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평화도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굴욕적인 강화에 격분하여 연립 정권에서 탈퇴하고 볼셰비키 내에서도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이 강하게 반발한다. 게다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14개 나라가 ‘대외 채무 소멸’을 선언한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5월에 ‘간섭 전쟁’을 일으킨다. 6월에는 반혁명 세력도 반격을 개시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온다. 레닌은 내전이 일어나자 당 지도부에서 좌파인 오신스끼·부하린·스미르노프를 경질하고 ‘노동자 관리’를 옹호하던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혁명당 좌파를 탄압하면서 일부는 체포하도록 지시한다.

혁명 러시아는 곡창 지대를 상실한 탓에 도시에는 식량 위기가 닥치고, 농촌으로 보낼 공산품은 크게 부족하며, 루블화는 교화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유통 체계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고, 사방이 완전히 봉쇄되어 식량·의류·총기·연료·원료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철도가 발달하지 못해 군대 이동이 신속하지 못한 것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결국 소비에트 정권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그런데 전시 공산주의는 혁명 시기의 원칙들을 하나씩 폐기하게 만든다. 소비에트 정권은 ‘자원제에 의한 민병대’ 대신 ‘징병제에 의한 정규군’을 편성한다. 붉은 군대의 토대인 노동자계급은 수도 적은데다가 이미 전쟁에서 많은 목숨을 잃었고 농촌 출신의 병사들은 자신의 마을을 떠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차르 군대 장교들을 다시 수만 명이나 충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장교를 선거로 뽑는 원칙도 포기하게 된다.

권력 구조도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소비에트는 자신이 선출한 기관인 인민위원회의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 가는 반면 공산당(원)은 공장위원회·노조·소비에트·국가기구·적군에 관료로 진출하여 모든 의사결정권을 장악한다. 내전으로 인해 신속하고 엄격한 명령 체계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정책 논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각종 직책은 선출이 아니라 임명에 의해 충원된다. 업무에서는 정치나 이념 문제보다 행정이나 군사 활동이 중시된다.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관료주의가 확산된다.

계급 관계도 변화한다. 정부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빈농위원회를 구성하고 중농의 협력을 얻어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의 토지 분배로 부농과 빈농이 격감하고 중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식량 공출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자 정부는 노동자·병사·관리로 식량공출대를 구성하여 식량을 강제로 공출한다. 이에 대해 일부 농민은 조직적으로 대항한다. 우크라이나의 마흐노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도 반혁명 세력의 백군(白軍)도 아닌 녹군(綠軍)을 자처하면서 중앙의 간섭이 없는 농민 자치를 이루겠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를 빼앗겠다는 백군보다는 토지를 분배해준 적군을 선택한다. 특히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항전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반혁명군은 정치적 분열과 지리적 분산으로 효과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가 1919년 4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자기 나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소련 남부에서 진행하던 군사 개입을 중단한다. 영국 정부 역시 9월에 자국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소련 북부로부터 원정군을 철수시킨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러시아는 이 해 말 옛 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한다. 이전에 러시아 혁명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럽 민중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유럽 민중들의 반란과 투쟁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 전쟁으로부터 혁명 러시아를 구한 것이다.

당과 국가가 중앙집권화하면서 공장위원회는 하부 통제 기구로 전락한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의 노동 정책을 살펴보자. 볼셰비키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조직인 공장위원회를 중앙 권력에 종속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내전이 일어난 직후인 1918년 6월 28일 정부는 국유화령을 포고하고 ‘노동자 관리’를 폐기하는 조치들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경영권은 최고국민경제회의에 귀속된다. 정부는 그 동안 저항이 가장 심했던 철도·석탄 산업들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관리위원회들을 강제로 폐쇄하고 공장위원회의 선거 제도도 폐지한다. 또한 노조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해 정부의 정책에 저항해온 인쇄·은행·모스크바공무원 노조 등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정부는 노동자 개인의 자유도 상당히 억압한다. 노동 규율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공장을 폐쇄하고 강제 징집하거나 다른 작업장이나 강제 노역장으로 배치한다. 국유화령 이후에는 모든 노동자가 개인 노동 장부를 지니고 다녀야 하고 이주의 자유가 제한되며 직업 선택과 일상생활까지 노조의 감시를 받게 된다. 또한 이 해 연말에 새 노동법이 제정되어 의무(강제) 노동과 노동 업적 카드제가 신설되고 작업장 이탈과 파업은 반역 행위로 규정된다.

최고국민경제회의는 1919년 3월 특별상여제·추가배급제·돌격노동제를 시행한다. 더 나아가 전러시아인민경제회의는 4월에 총 노동 동원령을 선포하고 “노동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을 살리는 열쇠임”을 강조하면서 노동카드·배급카드·여행허가서·직업증명서를 의무적으로 지니고 다니게 한다. 트로츠키는 11월 9차 당 대표자 회의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의무노동이 자유노동보다 생산성이 더 높고 더 사회주의적이다’라며 붉은 군대의 열성 부대를 노동에 동원하고 모든 노동 이탈자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징계하거나 강제 노역장에 배치하는 방안을 제출한다. 당 대회는 트로츠키의 제안을 채택하고 아울러 경영인은 노동자나 전문가 출신이 아닌 당성에 따라 결정하기로 결의한다. 트로츠키는 더 나아가 1920년 1월 제3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에서 토요일 무보수 노동제와 일인 관리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다. 노조 대회는 앞서의 당 대표자 회의의 결의와 트로츠키의 제안을 수용하여 노조에게 단지 노동 조건과 노동 복지에 관해 건의할 수 있는 기능만을 허용한다고 결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노동자들의 심한 반발과 이탈을 초래한다. 특히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 군사화를 실시하는 데에 반대하여 8월에 파업에 들어가 10월에는 거의 모든 철도를 마비시킨다. 연말에는 모스크바 전역에서 노동자 소요가 확산된다. 심지어 국영 기업에서도 파업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 군사화에 반발하고 부족한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통에 전체 노동자의 평균 결근율이 50% 이상에 이르게 된다. 노동 군사화 정책을 실시한 후에는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이 급격히 퇴조하고 당원의 수도 격감한다. 또한 엄밀한 계획 없이 위에서 강제로 실시한 식량 징발, 상품의 집단 교환, 빈농위원회의 계급투쟁, 의무노동, 국가 관리 등은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초래한다.

그럴 때마다 볼셰비키 정권은 백군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무렵부터 볼셰비키 당원 사이에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확산되고 국가가 중앙집권으로 통제하는 체제만을 사회주의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내전의 승리가 확실해질 즈음 정부는 노동 군사화 정책을 철회하는 대신에 중앙의 특별 행정 기구로서 산업중추부를 창설하고 산업과 노동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산업 경영 체계는 당 정치국→산업중추부→인민위원회의→노동인민위원회→최고국민경제회의→소비에트 집행부→소비에트 상부기구→소비에트 하부기구→노동조합의 순서로 권력 서열이 정해진다. 이에 따라 공장위원회는 완전히 노조의 하위 기구로 전락하여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변해간다. 이리하여 내전기 동안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조직은 완전히 파괴된다.

게다가 헌신적이고 뛰어난 선진 노동자들이 내전에서 무수히 목숨을 잃음으로써, 즉 노동자들의 자율적 행동을 이끌 소중한 역량들이 손실됨으로써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된다. 그리고 혁명 이후 대거 당과 국가 기구에 선발되어 간 노동자 출신 간부들은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거나 노동자를 감독하는 행정 관료로 변질되어 간다. 내전 말기에 당 조직 역시 완전히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성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에 따라 당원들은 하위 기관에서 혁명에 헌신하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거나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노동자국가 관리’는 혁명 당시에는 계급 철폐, 자치권 확보, 직접 관리를 쟁취하기 위한 구호였으나 내전 말기부터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된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7년 동안이나 경제가 황폐해지고―1920년의 농사 수확은 전쟁 전의 60% 수준에 그친다―전시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내전 말기에는 인민들의 투쟁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은 1920년 가을에 강제 식량공출에 항의하여 파종량을 줄이고 연말에는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배급제와 강제 노동 동원령에 항의하여 파업을 전개한다. 1921년 초에 산업 생산성은 혁명 이전에 비해 16% 이하로 떨어진다. 여기에 또 다시 식량 배급량의 1/3이 감소하자 2월부터는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모스크바에서 각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자 볼셰비키 정부는 이 두 당을 불법화한다. 이로써 러시아는 일당 국가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발틱 해의 크론슈타트 섬의 수병 1만 6천 명이 1921년 3월 초 “권력을 소비에트로!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넘기지 말자!”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볼셰비키 당원과 노동자들도 상당수 가담한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볼셰비키 반대’라기보다는 ‘더 나은 볼셰비키’다. 그렇지만 크론슈타트 반란은 16일 만인 3월 18일에 1000여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그리고 2500여명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볼셰비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고 수도 방어 지역으로서 의미가 매우 큰 크론슈타트에서의 반란은 레닌에게 큰 충격을 준다. 결국 레닌도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불만이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대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시장 경제가 도입되고 1당 독재 관료화가 심화된다.

공산당 10차 당 대회가 3월 8일에 열린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에 초조해진 볼셰비키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며 ‘당내 분파 금지’와 ‘국가에서 당으로의 권력 집중’을 결정한다.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되어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또한 대회는 노조를 당의 하위에 복속시키고 임금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면서 평등임금제도를 공식 폐지한다. 노조 문제에 대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노조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전위대에 의한 독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 대회는 자본주의적인 개인영업을 대폭 자유화하는 ‘신 경제 정책(NEF)’을 채택한다.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름에 따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운용하던 전시 공산주의 경제를 혼합 경제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로써 곡물 공출은 고정 세금으로 대체되고 잉여 곡물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된다. 국유화되었던 많은 중소기업이 매각·대여되고 대기업은 공공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가격·임금은 시장 원리에 맡겨진다. 신 경제 정책이 시행되자 경제에 활기가 되살아나면서 극히 불안했던 정치 상황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시기의 노동 정책은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유화, 전문적 ‘일인 관리제’, 기술자 우대, 차등임금제, 성과급제, 생필품 배급, 각종 특혜 부여 등인데 이것은 물질적 혜택을 주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을 유발시켜서 산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니 노조 지도부에는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보다도 생산력 향상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정책이 시행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1923년 1월에 임금 격차가 80:1에 이를 정도로 모순과 혼란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유대감보다 서로간의 경쟁과 갈등이 더 커지면서 노동자‘계급’은 해체된다.

한편 물품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길다랗게 늘어선 줄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된다. 이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찰이나 행정관이 늘어나고 이 경찰과 행정관을 임명하거나 물품을 배급하는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료의 권력이 강해지는 만큼 민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화도 심화된다. 또한 ‘분파 금지’가 관료화를 더욱 확대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료들이 행정의 편리함만으로 분파 금지를 바라보게 되면서 분파 금지에 의한 당의 통일성은 민주집중제를 관료집중제로 전화시키고 관료 집단의 전횡을 낳는다. 레닌은 당 관료 기구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다.

1922년 3월 11차 당 대회가 선출한 중앙위원회의 1차 회의에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 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소련)이 출범한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당은 ‘레닌 서거 추모 입당’ 운동을 벌여 당원 수를 대폭 확대한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십 만 명이 새로 입당한다. 이로 인해 당은 경계가 느슨해지고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관료화가 더욱 심화된다. 또한 이에 따라 당 관료들이 평당원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도덕적 부패가 진행되어 특권 관료층을 지칭하는 “sovbour"―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이다―라는 냉소적인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분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스탈린이 총서기로 있는 서기국은 신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노멘클라투라―각종 정책 수행에 적합한 인물들의 명부―를 매개로 주요 보직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정치국 구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권력을 집중한다. 이제 승진은 서기국에 대한 충성에 따라 좌우된다. 스탈린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924년 말에 처음으로 한 나라만으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공산당원들 사이에는 신 경제 정책으로 인해 혁명의 이상이 손상되고 있다는 좌절감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높은 실업률, 임금과 노동 조건 개선의 부진, 경영자와 전문가 위주의 임금 체계 등으로 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결국 적대 세력과 맞서는 팽팽한 긴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피로감과 실망이 소련 대중을 엄습한다. ‘인민의 긍지’는 썰물처럼 밀려나고 소심함과 출세주의가 득세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업화의 속도와 재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부하린은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먼저 농업을 발전시켜 공산품 수요를 자극하고 소비재 산업에서 잉여가 발생하면 과세와 가격 정책으로 중공업화 재원을 충당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농업·소비재공업·중공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와 경제이론가인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부하린의 이론에 대해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공업화를 가속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유언장에서 표한 존경심으로 인해 레닌 이후의 최고 지도자로 손꼽히지만 멘셰비키의 전력이 있는 탓에 원로 볼셰비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중앙당 총서기인 스탈린, 레닌그라드 당 총서기인 지노비예프, 모스크바 당 총서기인 카메네프가 반트로츠키 동맹을 형성한다. 이들은 좌익 반대파가 노농동맹의 기조를 위협한다고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에 대한 좌익의 접근을 차단한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군사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다. 그러자 스탈린은 레닌의 사도로 행동하면서 자기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한다.

이에 경악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좌익 반대파의 노선을 차용하여 스탈린에 대항한다. 부하린이 농민들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에 정권이 부농의 인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서기국의 장벽에 걸려 1926년 초에 양대 수도의 당직에서 물러난다.

이제 이 두 사람은 트로츠키와 함께 합동 반대파를 결성한다. 트로츠키는 유럽 혁명 이전이라도 유럽과의 교역이나 유럽의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때가 좋지 않았다. 1926년에 신 경제 정책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데다 1927년에는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5월에는 영국과의 국교가 단절되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나빠지는 등 국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합동 반대파는 오히려 자본주의 적들에 영합하고 소련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며 반역 행위를 일삼는다는 공격을 받는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대한 신념 부족과 급격한 산업화론자라는 양면 공격이 모순이라고 항변하지만 언론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려는 시도도 비밀경찰에 의해 봉쇄된다. 결국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분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중앙위원직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11월에는 당에서도 제명되고 모스크바에서 추방된다.

한편 국가계획위원회가 1927년에 1차 경제 5개년 계획 초안을 내놓는다. 그런데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이 초안에 대해 설정 목표가 낮다고 비판하자 양 기관 사이에 목표를 상향 수정하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1929년에 확정된 최종 계획의 목표―좌익 반대파가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아주 비현실적이게 잡힌다. 계획 기간 중에 노동생산성을 110% 상승시키고 농업 생산을 55% 증가시키겠다는 목표는 지나치게 높게 설정된 것이며 생활수준의 하락 없이도 중공업 투자가 가능하다는 전제는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정부는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인 1928년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노동법규도 개정한다. 2월에 제정된 ‘공업 기업의 행정·기술·경영 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는 공장위원회·전문경영인·당세포 3자가 공동 운영하던 ‘트로이카 체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가 공장 운영을 독점하게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져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 권한’을 법률에서까지 박탈한 것으로서 소련이 노동자 정부라는 껍데기(법)조차 벗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들이 공업화 우선 정책과 강제 농업 집단화 정책에 희생된다.

정부는 공업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곡물 가격을 인하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기관의 수매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이 해 겨울의 곡물조달은 아주 저조해지고 이는 곧바로 도시의 식량 위기로 나타난다.

당 지도부는 비상조치로 곡물 공출을 재개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한다. 몇몇 지역의 당 기구가 1929년 초에 벌써 집단화를 시작하고 가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를 결정한다. 집단화는 당 관료,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군대, 경찰, 특별히 선발된 노동자대오를 동원하여 아주 강력히 추진된다. 그리하여 불과 1년만인 다음 해 3월에 무려 50%의 집단화가 이뤄진다.

소수 민족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다. 그리고 부농에 대한 모호한 규정으로 500만 명에 이르는 농민이 필요 이상으로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고통을 겪는다. 그리하여 신 경제 정책이 실행되던 시기에 농민 인구 중 4~5%를 차지하던 부농계급과 그 비율에 약간 미치지 못하던 도시 부르주아지는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국가가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고 농업 집단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농민들은 내전 이후 조직과 무기를 박탈당한 상태였으므로 대규모 도축과 파종 거부로 저항한다. 가축 도살로 인해 가축에 의한 견인력, 비료로 쓸 배설물, 고기와 낙농 제품이 극심하게 부족해진다.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소련의 농업은 장기간 침체하게 된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연속으로 대흉작이 발생해 수백만 명이 질병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에 정부는 텃밭을 인정하면서 농민에게 양보 정책을 취하지만 집단화는 계속 추진한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인해 농촌의 수공업과 사적 상업도 붕괴되어 농민들은 각종 물품 부족에 시달린다. 집단 농장의 의장에는 대개 농업과 무관한 노동자가 임명되어 농민보다는 당의 이익을 우선한다. 게다가 수매가는 유명무실하여 농민들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공업화를 위한 강제 저축에서도 농민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집단화의 재앙이 덮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 간다. 그 수는 1930년대 초 3년 동안 해마다 300만 명에 이른다.

1936년에 가서야 농업 생산은 집단화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농민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나아지기 시작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 통제가 강화되고 ‘상여금 경쟁’과 ‘돌격대 노동’이 장려된다.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신종 공업이 등장하고 신흥 공업 도시들에 여러 종합 공업 단지가 건설된다. 특히 중공업·토목·금속·연료·수송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그리고 기계 영농이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력도 크게 증대된다. 급속한 공업화는 수백 만 명에 달하던 도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농촌에서 해마다 수백 만 명씩 흘러 들어오는 산업 예비군들까지 흡수한다. 정부는 하층 인텔리겐치아보다 육체노동자를 더 우대하는 정책을 편다. 이 때문에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노동자·민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대개 공업과 관련된 기술이나 경험이 없는 농민 출신의 새로운 노동자는 거칠고 낯선 노동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음주·결근·불복종·이직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당의 최대 관심사였던 노동 생산성과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서 정부는 공장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1930년 12월에 모든 공업 기업들은 허가 없이 자신의 원래 근무지를 떠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1931년 2월에는 근무 기록부 제도가 도입되어 공업·운송 노동자들은 근무 기록부를 제시하지 않으면 이직이나 재취업을 할 수 없게 된다. 1932년에는 경영자와 기술자가 노동자에 대해 해고, 배급 카드 회수, 공장 숙소 제공과 같은 혜택 박탈 등의 권한을 갖게 된다. 8월에 제정된 ‘국영기업·집단농장·협동조합 재산의 보호와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에 관하여’라는 법령은 국가·콜호즈·협동조합·철로·수로에 속하는 재산의 절도는 전 재산의 몰수와 함께 총살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 11월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하루 동안 직장을 결근하면 해고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이 제정된다. 그리고 그 노동자의 집이 근무지와 붙어 있을 경우에는 퇴거 조치를 내릴 수도 있게 된다. 12월에는 누구든지 허가 없이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국내 통행 허가제가 도입된다.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한 노조 대회지만 그조차 1932년 이후 17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는다. 단체 협약도 1934년 이후로는 더 이상 체결되지 않는다. “계획이 경제 발전의 결정적인 요소가 될 때 임금 문제는 그것과 관계없이 따로 결정될 수 없고 임금 조정의 한 형태로서 단체 협약은 그 유용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관료들의 권한과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갈수록 강화된다. 1940년 10월에는 산업 경영진이 인력을 다른 기업이나 기관으로 강제로 전근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1941년 12월에는 허가 없이 군수 업체를 이탈한 노동자에게 5~8년형까지 벌칙을 부과하는 법령이 만들어진다.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는 1928년 단 3만 명에서 1930년 66만, 1931년 200만, 1935년 500만, 1942년 1000만 명으로 급증한다.

정부는 채찍 정책(노동 통제)과 더불어 당근 정책을 다함께 시행한다. 정부는 1931년에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주의적 경쟁”이라고 명명된―그러나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실적에 따른 누진적인 성과급제도’를 도입한다. 이 때문에 소득 격차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평등주의는 계속 뒷걸음친다.

특히 관리자들은 계획된 목표 이상을 달성하면 높은 상여금을 받는다. 그러고도 노동자를 위한 주택·회관·매점·탁아소·유치원을 세우는 데 쓸 ‘기업장 기금’(1936년 제정)까지 전용해서 쓴다. 그리하여 정부의 상급 관리, 기업장, 성공한 작가는 모스크바의 저택, 크리미아의 별장, 한두 대의 자가용, 수명의 하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1만 루블 이상의 상속 재산은 모두 몰수하던 상속세는 이제 10%를 넘지 않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미국의 상속세보다도 매우 낮은 비율이다.

탄광 노동자인 스타하노프는 1935년에 1일 6시간 교대제에서 하루 102톤의 석탄을 채굴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인 기적의 ‘노동 영웅’으로 선정된다. 이어서 개인의 모범을 따라 배우자는 선동이 뒤따르고 성과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는 집단 포상과 특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량의 기준은 “스타하노프제 포상 노동자들의 생산을 다른 노동자들의 평균치와 합산하여 평균”한 것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닦달하는 관리자들의 압력은 더욱 가중된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업무 외 시간’에도 작업장과 도구·원자재를 정리정돈하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일들이 진행되면서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노동 시간은 연장된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태업으로 저항하고 스타하노프 운동원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비난하며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노동자들은 강제 저축, 모든 물품의 배급제,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주택 건설로 인해 생활수준이 하락한다. 조그만 주택 한 채에 심한 경우 7~8가구가 입주함으로써 가정생활이나 사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중공업 우선 정책과 수공업의 소멸로 생필품이 늘 부족하여 암시장이 성행한다.

그렇지만 1934년 이후 경공업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고 1935년에 상거래 체계가 일정 정도 도입되면서 인민들의 생활도 조금씩 개선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실질 임금이 하락하기는 하지만 고용 기회가 확대되어 여성들의 취업이 쉬워짐으로써 가계 수입은 오히려 늘어난다. 공업화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하루 8시간 노동이 원칙으로 지켜진다. 실업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다.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질병에 걸린 노동자는 무료 의료 혜택과 함께 통상 임금의 100%를 보장받는다. 그렇지만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소비재 공업과 농업에 대한 파급 효과는 아직 별로 나타나고 있지 않아서 인민의 생활은 절대 빈곤에서 탈피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이다. 한편 정부는 엄청난 비용을 교육과 훈련에 투자하여 노동자·농민 출신의 ‘붉은’ 전문가를 양산함으로써 체제에 우호적인 전문가 집단을 확보한다.

관료 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지면서 노동자의 창발성이 소진된다.

모든 생산 수단이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옴으로써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집중과 중앙 계획이 가능해진다. 사회가 당 지도부→국가계획위원회→경제담당 인민위원부들→지역→도시→공장으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산업 피라미드로 구축되면서 관료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진다.

그런데 관료들이 현실에 근거한 면밀한 계획보다 상부의 지령을 우선함으로써 관료들의 계획과 예측은 종종 터무니없이 빗나간다. 이로 인해 한쪽에서는 물품이 남아도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품이 모자라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관료들이 제품 가격을 자의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똑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도 공장마다 관리비와 생산 가격이 서너 배 이상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제 맘대로 날뛰는 가격은 합리적인 계획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계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그러면 중도에 포기하는 사업이 생겨나고 그만큼 물자는 낭비된다. 그런데 관료 자신이 결정한 계획과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지역·부문간의 혼돈과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관료가 충원된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만 하나 더 늘어난 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일단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보자는 식으로 된다. 이제 현장 책임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목표치는 낮추고 성과는 실제보다 부풀려 보고한다. 이 때문에 중앙의 경제 책임자와 일선의 기업 책임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소송이 제기된다.

소송의 주요 항목을 차지하는 것은 품질 문제인데 이것은 관료들이 수치로 나타나는 양을 중요시하고 질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는 무엇이든 기술 수준에 상관없이 규모가 클수록 좋다는 것이 신앙으로 되어있던 상황이니 그럴 만하다. 예를 들어 1928~37년 사이에는 거대 기업 열풍이 불었고 1930년에는 50개의 촌락과 8만 4000ha, 29개의 촌락과 3만 3533ha―1ha는 1만㎡다―를 포괄하는 두 개의 대규모 콜호즈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거대기업이나 콜호즈 둘 다 실패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료주의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질수록 품질 개선을 가능케 할 노동자의 창발성과 책임 의식이 더욱 파괴된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러저러한 노력들은 관료주의에 짓눌려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스탈린은 정적을 숙청하며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당의 지도 체제는 당 대회가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위원회가 13~14명의 정치국원을 선출하며 정치국이 서기장과 서기국원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관료층이 공고화되고 당의 위계질서가 강화될수록 권력은 자연스럽게 서기장에게 집중되어 간다. 더구나 스탈린은 경찰 조직인 내무인민위원부를 이용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기까지 한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8년 샤흐티 사건, 1930년 근로농민당 사건과 공업당 사건, 1931년 멘셰비키 동맹 ‘뷰로 사건’, 1936~38년 대숙청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급의 적’을 만들어낸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36년 8월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볼셰비키 중앙위원 16명을 ‘소련을 전복하기 위해 트로츠키와 협력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한다. 다음해까지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재판이 수차례 열려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다수가 사형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숙청으로 인해 수많은 지도자들이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최초로 조직된 볼셰비키 정부의 구성원 15인 가운데 단 한 사람 스탈린만이 대숙청 이후까지 생존한다. 각종 인민위원부의 모든 최고 관리들은 차례대로 숙청당한다. 1935년에 임명된 군사령관 15명 가운데 14명이 배반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한다. 거의 모든 소련 대사들이 숙청당한다. 대숙청 기간 동안 소련 내의 30개 공화국 정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소연방 탈퇴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숙청된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쳐 ‘수령의 1인 독재’가 완성된다. 이것은 정치만 보면 차르의 전제 시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당내 비판 기능이 마비되면서 인간관계는 폐쇄적으로 변해간다. 1920년대 말이래 소비에트 대회와 최고소비에트에서는 모든 결정이 단 하나의 기권표나 수정 제의나 반대 연설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1937년 총선 때 수백 개의 선거구 모두에서 후보자는 오직 한 사람씩만 나온다. 투표율은 98% 이상, 찬성률은 99.9%를 기록한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100% 이상을 득표한다. 유권자가 1617명인데 2122표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스탈린의 정치적 성격은 관료 집단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관료 집단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위협하는 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할 수 있는 무자비한 사람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관료 집단의 인격화로서 스탈린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스탈린이 1922년부터 30년 동안 서기장이라는 권력의 정점에서 점점 신격화 되어간 것은 관료 집단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의 형태와 구조는 그 시대의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관료 집단으로의 권력 집중은 다른 한편에 서있는 민중들의 권력 상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생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이루지 못한 근본적 결함에 기인한 것이자 생산력 향상을 위해 계급투쟁을 포기한 결과이다.

소련 사회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관료계급이 형성된다.

소련은 계급투쟁이 아닌 평화 공존을 외교 정책으로 취한다. 소련은 1929년에 영국 노동당 정부와 1931년에는 프랑스와 1933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1934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1935년에는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는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전쟁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선전하여 인민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민들은 정부가 무너지면 자본주의로 복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부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인민에게 엄청난 선전 효과를 일으키면서 내부의 정적을 소탕할 구실과 급속한 공업화의 명분을 만들어준다. 정부는 선진국에 비해 50~100년이 뒤진 소련으로서는 길어도 10년 이내에 이들을 따라잡아야 생존도 가능하고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하다며 경제 성장을 독려한다.

소련 사회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소련 군대는 1935년에 혁명에 의해 철폐되었던 장교 제도를 18년 만에 부활시킨다. 이는 사회가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로 갈라져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리고 1936년 6월에 새로 만들어진 헌법은 계급과 산업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선거를 무차별 개인들의 보편·평등·직접·비밀 선거로 바꾼다. 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체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 회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법적으로 청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정부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 사회주의의 대의, 자본주의보다 평등한 사회, 높은 경제 성장률, 서민을 위한 의료 제도와 사회 보장, 교육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일상적으로 강조하여 낙관주의를 고취시킨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유례없는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또한 외국의 공산당과 인민들이 소련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급속한 공업화에 따르는 희생을 감내한다. 당 지도부는 노동자에게 입당의 문턱을 낮추고 일선 경영자에게 거친 대접을 받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당·정부·경찰 기구가 비대해짐에 따라 인텔리겐치아―사무·전문직 노동자―층이 증대한다. 인텔리겐치아는 1928년에 전체 노동 인구의 5.2%에서 1939년에는 16.5%(1100만 명)로 늘어난다. 인텔리겐치아는 공업화 초기에 우익의 지지 세력으로 간주되어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급격한 공업화에 이들의 전문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공격은 1931년 중엽부터 중단된다. 인텔리겐치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순 사무직은 육체노동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지만 공업경영자·기술전문가·상급행정가인 수십 만 명의 상층 인텔리겐치아는 여러 혜택을 받으며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대졸 기술자는 1928년 4만 7천 명에서 1941년 28만 9천 명으로 증가하고 대졸 취업자 수는 75만 명에 이른다. 같은 직책을 맡고 있는 비대졸자의 수가 여전히 몇 배나 더 많기는 하지만 점차 학력이 중시된다. 숙청이 완화되는 1938년 이후부터는 방대하게 형성된 인텔리겐치아 층이 공업화의 최대 수혜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체제의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등장한다.

소련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질적 도약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소련 경제는 인민들의 헌신, 계획 경제의 장점, 광활한 영토, 풍부한 천연 자원, 노동력의 대규모 투입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소련은 1928~40년까지의 13년 동안 연평균 16%―서방에서는 최저 8.4%에서 최고 13.6%로 추산―에 이르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강력한 공업 국가로 성장한다. 이 기간 동안 산업은 거의 국유화되고 유통 분야는 국유화되거나 협동조합이 장악하게 되며 농업의 집단화 비율은 90%에 이른다.

노동자는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1928년 12.4%에서 1939년 33.7%로 증가한다. 그리고 농민들이 공업 도시로 몰려들면서 그 기간 동안 도시 인구는 3천만 명이나 증가한다. 문맹률은 제정 말기의 75% 이상에서 1939년 23%(여성은 33%)로 격감한다. 노동자들의 문맹은 완전 일소된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고 농업이 집단화되었지만 생산력은 여전히 낙후한 편이다. 중공업 분야는 급속히 발전한 반면 경공업이나 사회 기간 시설 분야에서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계획 경제의 지도부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능력이 부족하고 관료 기구는 점점 비대해져 부패해 가고 있다. 또한 많은 인력이 개인 축재자와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일에 낭비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의 여러 요소들 사이에 여전히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자의 기술 수준과 문화 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보다 많이 뒤쳐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산력인 노동자계급이 여전히 지시 받는 수동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해방’이라는 욕구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증대라는 생산력 발전에 종속되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노동 생산성이 여전히 낮다. 그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은데도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그만큼 국민 소득과 인민의 생활수준도 아직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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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2

파시즘에 패배하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자 운동이 공장 평의회로 결합하여 혁명적 정세를 만든다.

파업의 물결이 1917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 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노동자들이 1918년부터 관료화된 산별노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부 위원회’라는 새로운 현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당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당원 1000명)의 젊은 활동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와 팔미로 톨리아티는 1919년 메이데이에 [새 질서]라는 주간지를 창간하고 ‘공장의 전체 노동자가 생산 활동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대안 사회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역설하면서 공장 평의회를 건설할 것을 주창한다. [새 질서]그룹의 노력으로 1919년 9월 초 피아트사를 비롯해 토리노의 30개 공장에서 5만 노동자가 내부 위원회를 공장 평의회로 전환할 것을 결의한다. 두 개의 새로운 흐름이 하나로 멋지게 통일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당은 10월 당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1919년 3월 창설, 코민테른 또는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른다―에 가입할 것을 결의한다.

이때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60만 이상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이탈리아의 여론은 연합국과 자국 정부 모두를 성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9년 11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좌파인 보르디가가 선거 불참을 주장했으나 사회당은 선거에 참여하여 총 508석 중 156석을 얻으며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급부상한다. 소농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 계열의 신생 정당인 인민당도 농촌 지역에서 100석을 차지한다. 정당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집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다. 사회당의 당원 수는 전전(戰前) 2만에서 18만으로 늘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5만에서 200만으로 급속히 증대한다.

토리노에서는 공장 평의회 회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자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와 토리노 노동회의소는 12월에 공장 평의회를 공식 노선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당권파인 세라티는 ‘혁명의 주역은 조직 노동자이지 미조직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공장 평의회 노선을 맹렬히 반대한다.) 토리노시지부가 12월 3일 집회 명령을 내리자 공장 평의회 체계를 통해 12만의 노동자가 1시간 만에 집회장으로 모여든다. 사회당의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력이고 행동력이다. 토리노시 지부는 공장 평의원들을 대상으로 12월 한 달 동안 대대적인 정치 교육을 벌인다.

자본가들이 1920년 3월 갑자기 섬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이에 반대하는 내부 위원들을 해고하면서 선제공격을 가한다. 이에 맞서 토리노의 공장 평의회들은 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이어서 금속 노조가 즉각 총파업을 선포하고 노동총동맹도 4월 13일 형식적으로나마 총파업을 선언한다. 그러자 총파업의 중심을 깨기 위해 전국의 헌병대가 토리노로 몰려든다. 반면에 세라티 등의 당권파는 토리노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지역의 행동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토리노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한다.

6월에 다시 수상이 된 지올리티는 ‘경영 참여’를 약속하면서 파업 지도부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낸다. 정부와 노동총동맹 사이에 여름 내내 지루한 협상이 계속된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8월 31일 공장 점거 파업을 재개한다. 공장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노동자들은 경영권까지 요구하면서 일부는 무장까지 갖춘다. 9월 9일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의 합동 회의에서 좌익들은 권력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 아무튼 50만 노동자들이 4주 동안이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이는 열기를 타고 전국에서 공장 평의회가 건설된다.

토리노에서는 피아트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접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매일 37대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고전적인 파업과는 다르게 파업 중에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의 의식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편 남부의 빈농들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토지 점거 운동을 벌이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의 완전 집단화까지 요구한다. 지올리티 정부는 사태가 더 발전하기 전에 서둘러 노사 협상을 타결한다.

사회당은 11월 지방 선거에서 파업의 성과를 이어받으며 약진한다. 하지만 파업 지도부의 타협은 혁명을 기대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배신으로 비쳤기에 노동자들의 투쟁 전열은 오히려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자본가·지주계급은 극우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노동자 세력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다. 페라라 시청에 사회당의 붉은 깃발이 게양되는 그 시간, 볼로냐 시청 광장의 사회당 승리 기념 대회에는 파시스트 테러단의 폭탄이 투척돼 1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

보르디가의 선거불참파와 그람시의 [새 질서] 그룹은 1921년 1월 사회당 당 대회 도중에 대회에서 철수하여 전광석화처럼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당한다. 4만 명이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그리고 5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5월 총선에서 공산당은 29만 표를 얻어 15석을 획득한다. 사회당은 150만 표를 얻어 123석을 확보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35석을 확보한다. 1919~20년의 혁명적 정세는 이제 반동이 우세한 국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무솔리니가 중간 계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으며 독재 권력을 구축한다.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서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전향한다. 무솔리니는 전쟁이 끝나고 떠돌이 제대 군인을 모아 1919년에 ‘전투단’을 조직하고 사회·경제·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파시즘 운동을 전개한다.

무솔리니 추종자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해골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로마군대식 행진에 맞춰 투쟁가를 부르면서 퍼레이드를 벌인다. 상징과 의식을 이용한 이 새로운 행동은 인간의 원시적인 힘과 고대 풍속, 종족 우월성을 환기시키면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검은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보루로 자처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파업 노동자들에게 조직적인 테러를 가하고 노조 건물을 방화하고 사회주의자 지방 관리들을 집무실에서 몰아내는 만행을 자행한다.

파시스트는 국가·법률·질서·사유재산의 보호자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버무린 이데올로기와 무솔리니의 개성에서 풍기는 매력이 함께 작용하여 단기간에 대중 운동으로서 성공한다. 앞서 보았듯이 파시스트당은 1921년 총선에서 35석을 얻는다.

이에 철도 노조는 1922년에 모든 노동자 세력을 모아 파시스트들에 대항할 노동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파시스트들을 제압할 방안을 모색하던 노동총동맹 지도부도 동참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끝내 불참한다. 이렇게 파시즘을 물리칠 좋은 기회는 흘러가 버린다. 그 후 파시스트들의 테러 공세 속에서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00만에서 80만으로 급감하고 사회당 당원 수는 2만 5천으로 감소한다. 공산당 당원 수는 5천 명까지 감소한다.

무솔리니는 10월에 왕국을 구할 것을 선포하고 파시스트 민병대를 이끌고 ‘로마 진격’을 감행한다. 파시스트를 볼셰비즘에 대한 보루로 활용해왔던 자유주의 연립 내각은 10월 28일 검은 셔츠의 행렬이 수도에 다다르자 당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려한다. 그러나 국왕이 선포를 거부함으로써 내각은 물러나고 무솔리니가 수상으로 임명된다. 무솔리니는 수상으로 임명된 후 몇 달 사이에 전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만든다.

이에 대해 총파업으로 대항하자는 호소는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무산된다. 공산당의 보르디가는 “파시즘은 단순히 부르주아 지배의 연장(延長)일 뿐이며 반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람시는 “파시즘의 성공은 중간 계층의 지지와 동원에 기반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무솔리니의 탄압으로 공산당은 지도자인 보르디가와 면책 특권이 없는 지방 의원과 당원의 1/4이 검거된다. 의원단만 유일한 합법 공간으로 남는다.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는 계급투쟁을 부추기고 국민에게 공론을 일삼게 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당파로 분열시키는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과 대담성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정열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스스로를 ‘두체(지도자)’로 지칭한다. 이러한 ‘지도자의 원칙’은 적지 않은 대중에게 능률적이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무솔리니는 적어도 나태한 이탈리아인들을 움직여 기차가 제시간에 떠나도록 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파시스트는 1924년 선거에서 60%를 득표한다. 공산당은 4%를 득표하여 그람시를 포함하여 19명이 당선된다.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했다가 러시아에 남아있던 그람시는 의원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파시즘 치하의 고국에 돌아온다. 무솔리니는 1925년 1월 독재를 선언하고 탄압을 강화한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국내가 아닌 프랑스 리용에서 당 대회를 갖고 반파시즘 공동 전선과 노농동맹을 전략 노선으로 확정한다. 무솔리니는 1926년 11월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불법화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원단까지 체포한다. (이때 같이 체포된 그람시는 1935년 4월 27일 감옥에서 사망한다.)

무솔리니는 정당이나 지역 선거구가 아니라 경제적 직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대의체를 구성한 ‘조합 국가’가 민주주의의 맹점인 계급투쟁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해결한 진보된 경제 사회라고 선전한다. 이에 따라 전국의 경제생활이 22개 분야로 구분되고 각 경제 분야마다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가하는 조합이 결성되어 3자 대표들이 노동조건·임금·가격·산업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대표로 이루어지는 국가 회의가 이탈리아 경제의 자급자족을 공동으로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서는 각 조합의 경제 회의는 모두 정부로 통합되고 이 회의의 대표는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는 파시스트 노조가 노동자의 유일한 대표 기관으로 인정되고 기업가들은 공장 내에서 무제한의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파시스트는 이후 몇 년 동안 신문을 검열하고, 노조를 해체하고, 선거권을 축소하고, 다른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모든 반대 의사 표명을 금지시키고, 정적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별 재판소와 비밀경찰을 만든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단일 정당을 통해 국가 기구와 관료들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배신한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1917년 11월 3일 혁명을 일으키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사회민주당의 샤이데만은 11월 9일 공화국을 선포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12월 16일 전국 대회를 열고 기간산업의 사회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해체, 국가 기구의 민주화를 촉구한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날,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독점 자본가 대표들과 만나 비밀 협정을 맺으며 “한 사발의 죽에 혁명을 팔아넘긴다.” 혁명을 마치 단순한 노동쟁의인 것처럼 다룬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양보를 한다. 평상시에는 장기간의 총파업으로도 이룰 수 없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극우파인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보고 차갑게 비웃는다.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상황과는 아주 다르게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제 평의회 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이런 급박한 시기에 독립사회민주당이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12월 30일 독일공산당을 새로 창당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분파였던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은 독립사회민주당에 잔류한다. 그리하여 20대의 무정부주의 청년들이 다수를 이루는 ‘국제 공산주의 그룹’이 독일공산당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에게는 1000표의 투표보다 가두에 있는 10명이 훨씬 가치 있다”고 호기롭게 외친다.

바로 이때 독립사회민주당원인 아이호른이 베를린 경찰서장에서 해임되자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무작정 반란을 일으킨다. 며칠 사이에 무장한 노동자들이 베를린의 철도역·전화국·가스·수도·전기공장·주요건물들을 점령한다. 혁명은 다른 도시로도 확산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임시 정부는 노스케(사회민주당원)를 내세워 2주일 만에 혁명 운동을 진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에 체포되어 살해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해체 당한다. 세계 최대의 독일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대전을 찬성한 데 이어 두 번째로 민중을 배신한 것이다.

일주일 뒤인 1월 21일 국민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사회민주당이 1111만 표를 획득하고, 독립사회민주당은 218만 표를 얻는다. 제1정당이 된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으로 선출된다. 그렇지만 진정한 승자는 의원수의 54%를 차지한 부르주아 정당들이다. 독일공산당은 이 선거에 불참하고 여름까지 독일 곳곳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노동자들은 3월 3일 ‘노스케·샤이데만·에베르트의 체포, 소련과의 외교 재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단행한다. 그러나 1주일도 못되어 노스케와 폰 루트비츠 장군의 군대에게 진압된다. 투쟁의 주요 거점인 뮌헨에서는 노동자들이 5월 1일까지 도시를 장악하고 항전하지만 역시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당한다.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동지이자 애인이었으며 그녀의 노선을 계승한 독일공산당의 새 지도자 파울 레비와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 지도부는 10월에 당 대회―시간과 장소도 가르쳐주지 않는 편법까지 쓰면서―를 열고 극좌 맹동주의자들을 당에서 쫓아낸다. 10만 7천여 명의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축출된다. 레비는 독일공산당과 독립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노동자계급이 우익 쿠데타를 총파업으로 막아낸다.

1920년 3월 12일, 볼프강 카프 박사와 폰 루트비츠 장군이 이끄는 세력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왕조를 재건하려는 정부를 세운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바이마르정부는 야간에 드레스덴으로 도피한다.

노동자들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3월 14일 총파업에 들어간다. 자유노동조합―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최대 노조연맹―의 주도 아래 기독교 노동조합,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이 조직한 허시-둔커조합, 심지어 ‘황색’(어용)노조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여 총 12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인다. 총파업은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마비시킨다.

폰 루트비츠 장군이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분쇄하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그러자 카프는 3월 17일 스웨덴으로 도피하고 루트비츠는 다음날 장군직에서 물러난다.

그런데도 루르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령하고 파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3월 22일 정부와 노조간의 협정 체결, 카프 일당 처벌, 특정 산업 즉각 사회화, 반동적인 군사 조직 해체, 노스케의 퇴임을 약속 받고서야 파업을 끝낸다. 총파업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자유노동조합의 칼 레기엔이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에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제안한다. 그러나 두 당의 연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 진행된 총선에서 독립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8.8%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3이 줄어든다. 그 결과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선다.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좌파와 공동 전선을 형성한다.

독일공산당은 10월에 독립사회민주당과 합당(당원 45만 명)한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정당으로서는 서유럽 최대의 대중 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은 독일공산당을 그대로 계승한다.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1년 3월 만스펠드 광산에서 다시 봉기를 감행한다. 그러나 역시 실패로 끝난다. 이 여파로 당의 지역 조직들이 파괴되고 당원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레비는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우리의 노선’이라는 문건을 통해 코민테른을 격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공세적인 투쟁을 제안하고 기층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공동 투쟁을 전개하여 지도부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당 당원들을 견인하자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레비는 당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1년 뒤에 당의 정식 노선으로 채택된다. 코민테른이 1922년 11월 4차 대회에서 파시즘의 대두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결정한 것이다. 독일공산당은 자유주의자인 라테나우 외무상이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파시즘 반대 시위운동을 주도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평의회 건설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막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이라 정세는 1923년에 혁명 전야로까지 발전한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는 작센 주와 튀링겐 주에서 연립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연방 정부가 불법 군사 행동으로 이 연립 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1924년 총선에서 12.6%의 지지율을 획득하며 운동의 성과를 유지한다. 공산당은 1926년 구 독일제국 군주 재산을 몰수하는 데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하면서 사회민주당과 공동 전선 전술을 펼쳐 1500만 표의 찬성을 얻어낸다. 이처럼 통일 전선 전술은 사회주의 세력이 약진하는 발판이 된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사회민주당은 1928년 총선에서 “학교 급식이냐 군함이냐”는 공격적인 구호를 내걸어 모처럼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다시 연정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막상 군함 건조 예산안이 논의되자 우파 정당들과 협력해야 한다며 ‘학교 급식이 아니라 군함’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이끄는 프로이센 주 정부는 1929년 일체의 시위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탄압하여 33명의 ‘형제’를 살해하는 참극을 빚기까지 한다. 이는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는 당 지도부의 극좌적 전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던 의식 있는 공산당 당원들까지 사회민주당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사회민주당은 두 번째로 권력에 오른 시점에서 노쇠 현상을 보인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은 80~100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고령화가 심해 40세 미만의 의원은 10%, 25세 이하 당원은 8%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는 의원의 60%가 40세 미만이었던 나치나 당원의 1/3이 20대였던 공산당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별 인기를 끌지 못한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비엔나에서 무명 화가로 궁핍한 시절을 보낸다. 여기서 비엔나의 풍경인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과 유태계 지식인, 맑스주의(국제주의)에 탐닉한 노동자들에 대해 증오감을 갖게 된다. 그 후 남부 독일 바바리아로 옮겨가 그림물감을 팔며 연명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피 끓는 민족주의에서 숭고함과 해방감, 생의 의미를 확인한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 11월 혁명기에 바바리아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된다. 수다한 경향의 비밀 정치 조직들이 들끓는 바라리아에서 히틀러는 독일노동당에 일곱 번째 당원으로 가입한다. 이 당은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노동당’으로 개칭된다. 나치(Nazi)는 ‘국가적(National)''의 앞 글자와 ‘사회주의(Sozialismus)’의 중간 글자 둘을 합한 용어다.

1923년 프랑스군이 ‘전쟁 배상금 지불 불이행’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이미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는 1년 전에 있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을 모방하여 나치 행동대인 ‘갈색셔츠단’을 이끌고 뮌헨의 ‘비어홀’(맥주 집) 무대에 뛰어올라가 권총을 발사하면서 ‘국가 혁명의 발발’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폭동은 한판의 우스갯거리로 끝나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는다. 히틀러는 복역 기간 중 인종주의·민족주의·집산주의·역사이론·정치평론이 뒤범벅된 [나의 투쟁]을 출간한다. 무능한 바이마르 정부는 ‘관대하게도’ 1년도 못되어 히틀러를 석방한다.

한편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면서 독일의 경제는 급속히 부흥한다. 그러자 국가사회주의는 호소력을 잃고 히틀러는 ‘정신이상자’로 취급받는다. 이런 상황은 1929년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하고서야 변화된다.

히틀러가 경제 대공황의 혼란을 타고 권력을 잡는다.

1929년 11월 뉴욕 주식 시장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유럽에 대부했던 단기 차관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독일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파시즘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나치는 1930년 12월 총선에서 12석이던 의석을 107석으로 늘리며 제2당으로 급부상한다. 반면에 공산당도 기존 의석에 23석을 추가한다.

그러자 독일의 정치 상황에 대해 불안을 느낀 외국 자본들이 서둘러 독일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차관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해 있던 독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는 1932년 1월 전체 국민의 1/5인 600만에 육박한다. 1929년에 135억 마르크에 이르던 대외 무역은 1932년에 57억으로 감소한다.

사회민주당은 불행하게도 재집권한 지 1년 만에 터진 대공황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무능력을 드러낸다. 공산당은 “나치가 집권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싹쓸이하면 권력은 이제 우리 차례”라며 사회민주당의 무능력에 대해 사정없이 비판하고 나치당과는 거리에서 사실상 내전과 같은 투쟁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1932년에 당원 중 실업자가 85%에 이르게 되면서 노동 현장과 동떨어진 가두 정당으로 변해간다. 나치는 모든 혼란의 책임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전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세력·토지투기업자·고리대금업자·불로소득·과세불평등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다. 나치는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하여 불안과 공포에 질려있는 대중들의 감정을 격앙시키고 반유태주의를 부추기면서 혁명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뿐만 아니라 유태인 자본가를 증오하는 노동자들까지 끌어들인다.

나치는 1932년 4월 총선에서 230석을 획득하면서 과반수는 넘지 못했지만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된다. 나치당의 득표수는 1928년 80만 표에서 1932년 1341만 표로 증가한다. 공산당도 498만 표를 얻어 100석이라는 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한다. 사회민주당은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800만 표 이상을 획득한다. 독일민주당이나 독일통합국민당과 같은 중도파나 우파 정당들은 지지 기반을 상실한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중간 계층이 공산당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끼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자신들을 따르는 노조를 총동원하여 히틀러보다 ‘비교적 덜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지난날의 반동 힌덴부르그 장군을 지지하여 당선시킨다. 힌덴부르그 대통령은 5월에 군부 실권자인 슐라이허 장군의 지원을 받는 파펜을 수상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파펜은 7월 20일 군대를 동원하여 사회민주당의 거점인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산시킨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열흘 뒤의 주 총선에서 심판하면 된다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공산당이 호소한 총파업은 공산당의 노동 현장 기반이 취약하여 공문구에 그친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장 괴벨스는 “붉은 무리들은 그들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10일 나치 당수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히틀러는 다른 정당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집권 즉시 국회의원 재선거를 준비한다. 히틀러는 2월 1일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2월 4일에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신문과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한다. 공교롭게도 투표 1주일 전인 2월 27일 밤에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데 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며―한 달 사이에 1만 명을 체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돌격대(SA: Sturmabteilung)나 친위대(SS: Schutzstaffel)가 운영하는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그래놓고도 나치는 43.9%밖에 얻지 못해 독립국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해서야 간신히 과반수를 넘는 52%를 확보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제거된 약해빠진 의회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고 이어서 자신이 수립한 새 체제를 제1제국(신성 로마제국)과 제2제국(비스마르크가 창건한 호엔촐레른 제국)을 계승한 제3제국으로 명명한다.

나치스 정권은 노동자 조직을 어용 기관으로 만든다.

라이파르트가 이끄는 노동총동맹의 기관지는 4월 29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메이데이를 환영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노동자들에게 나치의 경축일에 참가하라고 호소한다. 라이파르트는 이탈리아 유형(파시즘)에 따라 노조를 재조직하는 일에 응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돌격대원들은 5월 2일 전국에서 노조 사무소를 습격하여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 나치당의 레이 박사는 5월 11일 노동자 조직인 ‘노동전선’을 결성하고 자신이 대표로 앉는다. 정부는 5월 13일 노조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다.

수백만의 세력을 가진 노조는 단 한 번의 투쟁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패퇴한다. 대부분 노조 지도자였던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단은 5월 17일 파시스트 정부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노예처럼 굴종한다. 그런데도 나치는 6월 23일 사회민주당을 폐쇄하고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그래도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한다. 사회주의적·혁명적 성향을 지닌 ‘나치당 초기 대중 운동 지도자들’도 1934년 반체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나치는 1934년 6월 노동전선을 노동자, 고용된 봉급자, 직인, 그리고 자본가까지 포함하여 4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으로 재편성하고 노동자계급을 ‘원자화’하는 일에 착수한다. 노동전선은 2700만 명의 의무 가맹자를 갖고 있지만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도 없고 파업도 금지된다. 노동전선 내에서 노동자들은 ‘경영 지도자’로 불리는 기업가들에 종속된다. 노동자들은 꼭 소지해야 하는 ‘노동 수첩’을 통해 통제되면서 순종을 강요받고 많은 분야에서 직업이나 공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히틀러가 전쟁 준비를 위해 군수 생산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노동 시간은 점차 연장되고 실질 임금은 격감한다.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1/3 정도 하락한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공포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1936년 올림픽 경기가 열린 베를린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독일은 ‘권위적인 지배 아래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로 비쳐진다. 나치 정부는 ‘기쁨을 얻는 힘’이라는 대규모의 국영 오락 기관을 만들어 다채로운 연극 프로그램에서부터 대중 바캉스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여가 생활을 조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총 3900만 명이 이 기관을 통하여 주말여행이나 해외여행의 혜택을 누린다. 특히 나치가 박차를 가한 대중 바캉스 붐은 오늘날까지 유럽 노동자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남는다.

히틀러는 민중의 수상을 자처하면서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였음”을 강조한다. 나치는 ‘나치 청소년 운동’을 통해 각급 학교와 대학의 자라나는 세대를 나치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는 실업자가 600만 명이었으나 1938년부터는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이 창당되어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조직이 분리된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이러한 급진적 분위기는 1918년 11월에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사회당의 당세 신장과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증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사회당은 1919년에는 종전 후 처음 입당한 청년 당원들이 3/4을 차지하게 되고 11월 총선에서는 득표율이 기존의 17%에서 21%로 성장한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결선 투표에서 보수파와 자유주의자들이 연합하는 바람에 의석은 오히려 102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든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0년 5월 1일 철도 ‘국유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한다. 금속·건축·소매업·운수·부두·광부·가스 노동자들은 노동총동맹의 계획에 따라 10일 동안 ‘3회 연속 파업’으로 철도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 연대 파업은 초기에 좌익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지도부의 준비 부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되지 못하다가 5월 22일 무조건 취소된다. 이 영향으로 1912년 40만에서 1918년 120만, 1919년 말 200만으로 증가하던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파업 철회 후 1년도 못되어 조합원의 2/3 이상이 탈퇴하여 60만으로 감소한다.

사회당은 1920년 12월 당 대회에서 대의원의 68.7%의 찬성으로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해 5월 프랑스 공산당―정식명칭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으로 당명을 바꾼다. 그러나 당 대회 소수파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잔류하고 68명의 의원 중 55명이 사회당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노조 운동도 분열된다. 공산당은 1922년 사회당과 가까운 노동총동맹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노총인 통일노동총동맹을 창립한다. 공산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1927년 ‘프랑스의 모로코 개입 전쟁’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주도한다. 보수파 정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오던 공산당은 이 총파업 때문에 심지어 의원들까지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고 구속된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신흥 금속 산업의 노동자, 파리 교외의 노동자 밀집 지역, 북부 산업 지대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여 이들 지역에서 지자체를 장악하고 1920년대 말에는 총선에서 100만 표 가까이 득표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결선 투표 때문에 의원 수는 최대 14명을 넘지 못한다. 반면에 사회당은 전통적 소규모 산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150~200만 표 정도를 획득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중도 우파인 급진사회당과 곧잘 선거 연합을 펼치면서 공산당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얻는다.

통일 전선으로 인민전선 정부가 창출되고 노동자 운동이 급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대공황이 뒤늦게 찾아와서 더 오래 지속된다. 프랑스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금융계의 큰손들이 금융 자산 가치를 보장하는 금본위제와 디플레이션 정책을 고집하는 바람에 공황이 더 악화된 탓이다. 이런 상황을 타고 ‘불의 십자가''와 같은 극우 단체들이 급격히 대두한다. 유대인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가 자살한 의문의 사건(1933년 말)에 급진사회당의 고위 정치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의회는 1934년 2월 6일 급진사회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다. 극우파들은 바로 이날을 의회 정치를 전복하고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할 호기로 보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험을 통해 파시스트 정부의 수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노동자 2만 5천 명이 누구의 명령이랄 것도 없이 당일 즉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극우파 시위대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다. 2월 12일에는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이 함께 24시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450만 노동자가 작업장을 나와 시위에 참여한다. 이처럼 먼저 행동에 나선 대중들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반파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연일 시위를 전개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반파쇼 통일 전선을 구성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산당 당원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공산당은 1930년에 토레즈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당내 극좌파를 숙청하고 1932년 암스테르담 반전 국제 대회, 1933년 플레이엘 홀의 반파쇼 유럽 대회 등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당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의 공동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맹공격한다는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결정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공산당은 대중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회당과의 공동 행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1934년 7월 코민테른 13차 집행위원회 간부 회의는 불가리아 출신의 새로운 지도자 디미트로프의 강력한 주창으로 공동 전선 전술을 채택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이 히틀러의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필요로 하고 있던 상황도 작용한다. 아무튼 이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이 7월 27일 역사적인 행동 통일 협정에 서명한다.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10월 9일 처음으로 급진사회당과의 협력을 주장하면서 ‘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인민 전선’을 제시한다.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넘어 중간층을 포함하는 계급 연합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좌파 공동 전선과 급진사회당은 1935년 5월 지방 선거에서 곳곳에서 암묵적인 선거 연합을 맺어 승리를 거둔다. 전통적으로 보수 우파의 아성이었던 파리의 대학가 라탱구에서도 반파쇼투쟁위원회 활동가인 폴 리베 교수가 당선된다. 이는 프랑스에서 우파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던 지식인·대학생들이 좌파로 대거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한 달 뒤인 6월에 급진사회당·사회당·공산당이 어렵사리 선거 강령에 합의한다. 더구나 급진사회당 내 청년터키파가 7월 14일 대혁명 기념일에 깃발을 들고 좌파의 시위에 합류함으로써 이 날은 반파시즘 인민 전선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8월에는 코민테른이 7차 세계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인민 전선을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확정하고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던 노조 운동의 통일과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 건설까지 주창하고 나선다.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성공적인 공동 총파업(1934년)의 기세를 몰아 1936년 3월 툴루즈에서 개최한 전국 노조 대회에서 통합을 달성한다. 대회는 노동자계급이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견을 갖는 것은 묵인하지만 총동맹 내부에서 정치적 분파를 형성하는 것은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통합된 노동총동맹의 강령은 ‘기간산업과 신용 기관의 국유화’와 ‘최고 경제 회의에서의 계획적인 생산과 분배’를 명시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국정 홍보 수단으로 사용한 미국의 루즈벨트 민주당 정부의 영향으로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 연설이 도입된다. 이에 따라 “파시즘의 뒤에는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200대 가문이 있습니다. 200대 가문을 타도합시다!”라는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의 힘찬 발언이 전파를 타고 전국의 가정에 전달된다. 선거 결과 196만 표를 얻은 사회당의 의석은 97석에서 146석으로 증가하고 150만 표를 얻은 공산당의 의석은 10석에서 72석으로 증가한다. 반면에 142만 표를 얻은 급진사회당은 158석에서 116석으로 42석이나 상실한다. 그 동안 중도 우파 급진사회당을 지지한 유권자의 상당수가 사회당으로 이동하고 노동자들의 표가 공산당으로 집중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가 왼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지식인은 좌파 편이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공산당 당원 수는 1931년 3만 명에서 1937년 34만 명으로까지 급증한다. 어쨌든 전체로는 공산당·사회당·급진사회당·(통합)노동총동맹이 결집한 인민전선이 367석을 획득해 원내 다수파가 된다. 군소 정당인 공산당이 통일 전선을 추진하여 정치판 전체를 바꿔놓은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5월 11일, 지방 도시 르 아브르의 브레게 비행기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경찰이 출동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한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우리의 권리와 존엄성을 되찾을 기회!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투쟁은 5~6월에 프랑스 전역에서 무서운 기세로 발전한다. 5월 24일 파리코뮌 기념일에는 파리에 60만 노동자가 집결한다. 투쟁 소식이 시위 노동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노동자들은 이웃 공장의 정보를 듣기 위해 좌파 지자체 사무실을 찾아들고 공산당의 공장 세포들은 자발적으로 파업 선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5월 26일 파리 근교에 있는 뉴폴 비행기 공장에서 처음으로 공장 점거 파업이 시작된다. 이틀 뒤에는 프랑스 산업의 중추인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3만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작업장을 점거한다. 6월 첫째 주까지 파업 대오는 수백만으로 늘어나고 금속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무직·서비스직 노동자들까지 가세한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은 비장함이 아니라 해방감에 들뜬 축제의 분위기가 만발한다.

이런 와중에 출범(6월 4일)한 블룸 인민전선 내각은 바로 다음날 파업 대표자들과 파리 마티뇽 호텔에서 협상을 벌인다. 그 결과 임금 7~15% 인상, 모든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할 권리, (처음으로 실시되는) 산업별 단체 교섭, 직장 위원(산업별 노조의 작업장별 대표) 제도의 확립을 약속하는 ‘마티뇽 협정’이 체결된다. 이에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은행·철도·군수공업을 서둘러 국유화한다. 의회는 40시간 노동과 유급 휴가 등의 노동법안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며칠 만에 통과시킨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급진사회당 출신 장관들은 군대의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가 6월 11일 집회에서 “파업을 끝내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여러 곳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토레즈의 호소는 파업의 종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다음날 금속 노조가 자본가들과 협상을 체결한다. 그 다음날은 르노의 2만 노동자가 블룸과 토레즈의 사진, 당 깃발을 들고 공장에서 나와 노동자 주거 지역을 행진한다. 이 여름 동안에 노동총동맹 가입자는 100만에서 530만으로 늘어나고 단체 협약은 1936년 29건에서 1938년 3월 5700건으로 급증한다.

자본가들은 자본 해외 유출로 반격을 가하며 인민전선 정부를 내려 앉힌다.

그러나 승리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작년에 집권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프랑코가 7월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블룸 정부가 일찌감치 시련에 닥친 것이다. 영국과의 동맹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유일한 방안으로 보고 있던 블룸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면 동맹 관계를 끊겠다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협박에 굴복하여 7월 25일 무기 수출 금지를 선포한다. 이로써 이웃 나라 파시스트들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반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프랑코의 반군에게 무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7월 31일 장 조레스 추모 대회에서 블룸의 면전에 대고 “스페인에 비행기를!”이라고 외친다. 뜻있는 노동자들은 처음 얻은 여름 유급 휴가를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국제여단 활동에 바친다. 그리고 공산당은 하부 집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여하는 인민전선 전국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인민전선은 상층에서의 단순한 협정에 머문다. 이처럼 인민전선 정부의 개혁을 추동하고 감시할 힘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후 선거 강령의 대부분이 사문화되어 버린다.

자본가들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며 블룸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블룸 정부는 연립 정부 파트너인 급진사회당의 반대 때문에 선거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 ‘자본 유출에 대한 통제’를 단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역 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화 평가절하를 실시하고 인상된 임금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물가 연동 임금제를 도입하려 하지만 상원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처럼 좌파가 다수인 하원에서의 결정은 우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원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힌다. 그러더니 10월에는 공장 점거 노동자들에 대해 최초로 경찰력을 동원하고 1937년 1월에는 잠정적으로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극우파 ‘불의 십자가’가 프랑스사회당―여기서 ‘사회’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합법 정당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3월 16일 파리 외곽의 클리시에서 이 프랑스사회당 시위대와 클리시 인민전선 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충돌하고 경찰 발포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이틀 뒤 숨진 노동자들을 기리는 장례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다. 그 관속에는 인민 전선 정부에 건 희망과 기대 또한 누워 있었다.

6월에 자본 유출이 6백억 프랑에 달하자 블룸은 정부에 강력한 외환 통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원이 거부하고 나선다. 결국 블룸은 6월 20일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까지 포괄했던 인민전선 정부는 이렇게 1년 만에 내려앉는다. 이후에도 인민전선 자체는 유지되지만 급진사회당이 주도하게 된 새 정부는 어떤 진보 정책도 시행하지 않는다. 1938년 3월 잠시 2차 블룸 내각이 시도되지만 단 3주 만에 다시 실각한다. 이 때는 이미 인민전선 정부를 지탱해줄 노동자계급의 힘이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를 되찾은 부르주아 세력은 이제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며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닌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쿠데타에 무너진다.

스페인에서는 1931년에 공화국이 수립된다. 공산당·사회당·무정부생디칼리즘·농민·민족주의자·가톨릭교도·자유주의자로 구성된 민주주의 세력은 1936년 2월 총선에서 253석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로블레스가 이끄는 반동 세력은 153석을 얻는 데 그친다.

공산당은 정부기관·군대·경찰·공장·은행·학교 등에서 반동 세력을 조속히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당과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혁명적 방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자 파시스트들은 자유롭게 반동 책동을 일삼는다. 결국 프랑코 장군이 1936년 7월 모로코에서 폭동을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된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때서야 공동 행동 강령에 합의하고 파시즘 반대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한다. 무정부 생디칼리즘 경향의 전국노동자연맹(170만)과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노조총동맹(190만)도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선다. 그리고 프랑스·이탈리아·독일·폴란드·영국·캐나다·미국 등 세계에서 자원한 의용병들(국제여단)이 파시즘의 반동으로부터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다. 스페인 내전은 민주 세력과 파시즘 세력간의 ‘전쟁’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 노동자·민중의 영웅적인 투쟁과 자발적인 세계 민중의 광범한 연대 투쟁에 힘입어 1938년 3월 내전에서 ‘일단’ 승리한다. 그러나 프랑코 군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다량의 군대와 군수 물자를 원조 받으며 다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인민전선 정부는 지도부가 분열―공산당(스탈린주의)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되면서 점점 열세에 놓인다. 결국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된다.

프랑코는 팔랑헤당(Falangist Party)을 기초로 파시즘 제도 건설에 착수한다. 프랑코는 23개의 산별노조로 노조전국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함께 참가시킨다. 조합원은 의무 가입으로 1천만 명에 달한다. 프랑코는 각급 조합의 고위 간부를 직접 임명하고 조합을 허가 없이 조직하면 소요죄로 취급하여 무거운 금고형에 처한다.

불법화된 노조총동맹과 전국노동자연맹은 상당한 기간을 거쳐 기간 조직을 재건하고 지하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이지만 저항 운동이 크게 발전하고 공공연한 저항에 대해서는 잔인한 형벌이 부과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완만한 혁명’은 완만하게 좌절한다.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요 산업 기지가 있는 슬라브어권 지역들이 따로 독립해나가고 이에 따라 기존의 제국 군대도 철저히 해체되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가 군을 장악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반전의 상징’인 아들러의 후광을 배경으로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도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민주공화국에서 멈춘다. 농촌 지역이 여전히 우파인 기독교사회당에 장악되어 있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여서 연합국이 무력으로 개입하거나 식량과 자원을 끊기만 해도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혁명 없이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며 민주공화국 안에서 급진 개혁을 추진해나가는 게 최상책이라는 판단에서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론은 ‘일국 혁명으로 세계 혁명을 촉진한다’는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수행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919년 2월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에서 총 159석 중 69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이 되어 좌우연정을 주도한다. 렌너가 초대 수상이 되고 바우어는 외무상을, 율리우스 도이치는 국방상을 맡는다. 정부는 소국으로서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편으로 독일과의 통일을 추진한다. 하지만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인 조직 활동’이 노동 현장과 지역 사회에서 굳건히 자리잡아나가야 한다며 “완만한 혁명”의 장도(長途)에 나선다. 바우어는 사회화위원회를 만들어 공동 소유와 이윤 분배를 추진하는데 헝가리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 우파도 이에 동조한다.

하지만 1920년 3월에 헝가리 혁명이 진압되자마자 우파는 사회화위원회를 무력화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계속 축소되다가 선진 노동자 투쟁 조직인 ‘공화국 방어동맹’으로 재편된다.
우파들의 반발로 좌우연정은 6월에 깨지고 기독교사회당이 10월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하여 우파연정이 들어선다. 우파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국가기구·경찰·군대를 우경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게다가 ‘향토방위단’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이 농촌을 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지방 정부에서 개혁을 계속 추진한다. 특히 비엔나에서는 ‘붉은 비엔나’, ‘비엔나의 기적’이라는 말들이 널리 회자될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 결과 비엔나 시민 200만 명 중 50만 명이 사회민주노동당에 ‘당비를 내는’ 당원이 되고 비엔나 유권자의 2/3가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전국적으로도 1923년 총선부터 지지도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여 1927년 총선에서는 42%를 획득한다. 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이 총 단결하는 바람에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된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먼저 파시즘 반대 투쟁에 나선다. 3명의 파시스트가 사회민주노동당 집회장을 습격하여 1명의 병약자와 1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샤텐도르프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7월 14일, 비엔나의 노동자 대중이 당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하고 수만 명의 파업 대오가 보수적인 사법부를 압박하기 위해 대법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우파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여 8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의사당 건물에서 이 참극을 목격하고서도 ‘방어동맹’에 어떠한 반격 명령도 내리지 않고 단지 ‘화해 정부’(대연정)을 구성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기독교사회당 우파는 ‘방어적 폭력’―사회민주노동당이 1926년 린츠 당 대회에서 채택한 전술―이 얼마나 ‘방어적’인지를 이미 확인한 터라 대연정 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향토방위단과 함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행보를 드러내놓고 진행한다.

반면에 무장 반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어동맹의 8만 선진 노동자들은 D-데이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오히려 일상 투쟁에서 괴리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오스트리아에 불어 닥치면서 노조원 수는 1920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다. 그런데 사회민주노동당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라는 국제 자본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등 원내에서도 여전히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의 관심과 열의도 점차 식어간다.

돌푸스 수상의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1933년 3월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과 방어동맹을 불법화한다.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도 원내 1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는다. ‘보다 극악한’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덜 사악한’ 기독교사회당의 조치를 묵인할 수도 있다는 당 지도부의 판단 때문이다. 사회민주노동당은 9월 당 대회에서 “파시스트 헌법의 강행, 당 해산, 노조 해산, 비엔나 시청 점령 등의 4개 조건” 중 하나가 감행될 때만 무장 반격에 나선다는 결정을 내린다. 후에 바우어는 “3월에 총파업과 원외 투쟁으로 맞섰어야 했다”고 통렬하게 자기비판 한다.

다음해 1934년 2월 프랑스에서마저도 파시스트가 파리의 거리를 점거하자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3월 12일 바우어의 국외 추방과 방어동맹 간부의 일제 검거를 명령한다. 이에 빈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총파업이 선포된다. 파업은 파시스트 부대의 무력 공격을 받고 폭동으로 변하고 각지에서 방어동맹이 산발로 봉기한다. 4일 동안 벌어진 내전에서 노동자들은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1200명이 사망하고 2만 명이 투옥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화되고 지도자들은 망명한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던 헝가리에서는 1918년 10월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전복되자 12월에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을 창당한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사회당을 만들고 1919년 3월 21일 노조(72만 명)의 힘을 기반으로 카롤라이 부르주아 정부를 붕괴시키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한다. 공산당 지도자 벨라 쿤은 새 정부의 수상이 된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8월에 쿤 정부가 물러나고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이 정부도 반동적인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군대의 연합 공격으로 붕괴된다.

영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노동당 정부와 노조 지도부에게 배신당한다.

클라이드 조선 노동자들이 1919년 1월 전후 최초로 파업을 일으켜 승리를 쟁취한다. 9월엔 철도 노동자들이 단기간 파업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곧 이어 10월 중순에 100만의 탄광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탄광 국유화를 요구하면서 전국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지원 요청을 받은 ‘삼각동맹’의 운수·철도 노조의 지도부는 약속한 파업 날짜를 두 번씩이나 미루더니 광부들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거짓 구실로 투쟁 계획 전체를 취소한다. 그 결과 광부들만 13주 동안이나 외롭게 투쟁한다.

1914년 100만, 1919년 650만, 1920년 834만으로 급속히 성장하던 노조는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해 삼각동맹이 붕괴한 후 2년 만에 200만의 조합원을 잃는다. 그리고 600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1921년 말까지 주급이 8실링 이상 삭감되어 생활에 고통을 겪는다.

영국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독일·일본 같은 경쟁자들에게 통상의 우위를 계속 빼앗기면서 위기를 맞는다. 석탄 수출은 1913년 8900만 톤에서 1924년 6165만 톤으로 감소한다. 선박 건조는 같은 기간에 189만 톤에서 116만 톤으로 감소한다. 강철 생산은 1924년에 1913년의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리하여 실업자가 1920년 2.4%에서 1921년 16.6%로 급증한다. 그 후 실업자는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927(9.6%)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1925년에 석탄 산업의 실업률은 25%로 증가하고 캐낸 석탄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런 현상은 영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독일과 벨기에에서도 벌어진다.) 정부의 사회 보장은 극히 인색하여 노동자들은 참담한 빈곤 상태에 빠진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 힘입어 램지 맥도널드가 지도하는 노동당이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처음으로 집권한다. 그런데도 탄광 자본가들은 1921년의 협약이 1925년 7월로 만료되자 평균 13%에서 48%까지의 임금인하, 7시간 노동일의 폐지(8시간으로), 전국 협정을 일련의 지역 협정으로 바꿀 것 등을 요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30일을 기해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노동자들은 곧바로 파업으로 대항한다. 그러자 정부는 황급히 왕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 조사에 나서고 자본가들은 폐쇄 경고를 철회한다.

일단 시간을 번 볼드윈 정부는 이후 8개월 동안 맹렬하게 파업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 정부는 공급 확보 기구를 통해 트럭을 동원하고, 기관차의 특별 차고를 설치하고, 비상시에 이용할 자동차를 준비하고, 파업 파괴 계획을 작성하고, 산업의 중요 위치에 배치할 요원을 훈련시키고, 전국을 10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각 지역에 비상 경제·정치 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군대를 전략 요지에 배치한다. 간단히 말하면 정부는 혁명이라도 격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석탄 산업 왕립위원회가 1926년 3월 11일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탄광 경영자의 입장을 확실하게 반영한 것이어서 수주일 동안에 걸친 교섭은 알맹이 없이 진행된다. 그러자 전국소수파운동(1924년 8월 발족)이 3월에 전국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 참석한 100만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883명의 대의원들은 적극적인 투쟁을 결의한다. 마침내 노조전국회의가 5월 2일 찬성 360만 표(반대 5만 표)로 파업을 결의하고 다음날부터 일제히 직장에 출근하지 않음으로써 총파업에 들어간다. 전국소수파운동이 투쟁을 적극 선도하여 500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가함으로써 기차·버스·전차·신문·상점·전기·탄광·제철·화학공장 등 사회 전체가 마비된다.

그러나 파업 지도부인 총평의회는 처음부터 공포 속에서 크게 당황한다. 그들의 계급협조주의 세계가 바로 목전에서 뒤집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략은 단호한 전술을 통하여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 상황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업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총평의회의 지도자들은 소련 노동자들이 보내준 35만 파운드의 원조금을 거부할 정도로 소심하게 행동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선두에 서게 된 거대한 총파업에 압도되어 크게 위축된다. 그래서 5월 12일 볼드윈 수상을 방문하여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써 총파업은 9일 만에 중단된다. 그러나 탄광 노동자들은 11월까지 수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한 총파업 중단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자본가들은 총파업을 격파함으로써 노조에 일대 타격을 가했음을 알고는 전면적인 임금 인하 등 노동 조건을 악화시켜 노조를 무력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것이 즉각 노동자들의 투지에 불을 붙일 가능성을 낳자 임금 삭감 예고를 황급히 취소한다. 그러나 총파업의 열기가 가라앉자 의회는 1927년에 악명 높은 ‘노동쟁의·노조법’을 통과시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들을 모조리 박탈한다. 이제 총파업과 동맹 파업은 엄격히 금지되고 불법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참가한 자는 벌금이나 2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노조는 ‘파업 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한다. 대중 피케팅은 금지되고 보통의 피케팅도 엄격히 제한된다. 또한 산업 손실액을 부담할 조합 기금을 의무적으로 조성하게 된다. 공공시설의 노조는 노조전국회의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고 노조가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히 제한된다.

노조 지도부는 자본가와 작당하여 노동악법이 통과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이전부터 세워놓았던 ‘몬디즘’이라는 계급 협조 계획을 내놓는다. 이것은 악명 높은 미국의 생산 증대 강령인 ‘볼티모어-오하이오 계획’의 영국 판이다. 몬디즘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생산 증대에 내몰리고 노사 협약이 침해되면서 전 산업에서 노동 조건이 악화된다. 이로 인해 노조전국회의는 다음해에 조합원 50만 명을 잃고 650만이던 조합원이 1930년 370만으로 감소한다.

코민테른은 파시즘 반대 투쟁에서 좌우편향의 오류를 범한다.

전쟁이 낳은 폐해가 파시즘을 성장시키는 온상이 된다. 민족주의에 열광하여 영웅적인 애국심으로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젊은이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산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를 동시에 표방하는 파시즘에서 자신들의 좌절을 치유할 희망을 찾는다.

더구나 자유주의 정부가 전후의 경제 침체, 정치 불안, 사회주의 확산, 민족주의의 좌절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냄으로써 시민들은 위기의 시대에 굼뜨게 진행되는 의회를 통한 민주적 절차와 토론에 대해 인내심을 잃는다. 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은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승전국임에도 전리품을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루마니아에서 특히 사회적 긴장을 초래한다.

이들 국가에서 독점 자본의 횡포, 사회주의의 책동, 자유주의 정부의 무능에 진저리치는 다양한 계층―소시민·중산층·노동자―의 사람들이 사회의 안정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파시즘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륙의 20여 개 국가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파시즘은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독점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자금을 대는 대신 거대한 이윤을 챙김으로써 밀월 관계를 맺는다. 여러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의회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정상에 도달한다.

이렇게 파시즘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대중들을 획득해 가고 있을 때 좌파 정당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아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좌파 정당들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의 국제 조직으로 나뉜다. 먼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19년 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한다. 이들을 기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공산주의 정당들은 한 달 뒤인 3월에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혁명적 개혁’을 표방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21년 2월 빈에서 중도파들로 ‘2.5인터내셔널’을 결성한다. 2.5인터내셔널은 1923년 5월에 제2인터내셔널로 합류한다.

코민테른은 1차 세계대전에 찬성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배신행위를 뼈아프게 경험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계급 협조’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그리고 고립된 러시아 혁명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독일공산당으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무분별한 여러 차례의 무장 봉기는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1922년 10월에 수상에까지 오르는 사태가 벌어지자 코민테른은 바로 다음달 11월에 열린 4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코민테른은 1924년 6월 5차 대회에서 가입 정당들의 사상을 강화하고 대중 조직으로 성장시키자는 ‘볼셰비키화’를 전술로 채택한다. 이때부터 서유럽의 코민테른 정당들에서도 소련 공산당처럼 중앙위원회 부설기관인 정치부·조직부·서기국이 당의 전권을 장악하고 당내 반대파들을 함부로 내쫓는 게 관행으로 되고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한다. 특히 소련의 관심이 집중된 독일공산당에 대해서는 사실상 코민테른이 당 지도부를 임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은 소련 공산당의 권위에 눌려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창조적인 전술 개발이 어렵게 된다.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전술을 채택한다. 유럽과 중국에서 혁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가 안정기에 들어선 상황에서는 노동자계급을 개량주의로 물들이는 사회민주주의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코민테른은 1935년 7~8월 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노동자·농민·인텔리겐치아·소상인 등 모든 계층의 세력들로 구성되는 인민 전선(식민지에서는 민족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1933년)하고 난 한참 뒤이다. 아무튼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정당들과도 협력을 모색한다. 게다가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다.

이처럼 코민테른은 상황보다 뒤늦게 전술을 바꿈으로써 각 나라 공산당들이 패배하는 데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 밑바닥에는 코민테른을 지배하는 소련공산당의 자국 중심의 사고가 깔려 있고 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권위에 눌려 자주적이지 못했던 다른 나라 공산당들의 잘못이 있다.

코민테른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각 나라의 진보 세력들의 통일을 쉽게 하기 위해 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스스로 해산한다.

한편 1928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들은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대항하는 국제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다. 1933년에 독일공산당이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총 한방 쏘지 않은 채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1933년 7월에 ‘국제 공산주의자 동맹’이 파리에서 결성되고 첫 대회가 1936년 7월 유럽에서 열린다. 이 흐름은 1938년 9월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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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3

미국 노동자들의 산별노조 건설

미국이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기관차가 된다.

미국은 79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채권국이 되어 종전을 맞는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4년 이상 지속된 세계대전으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총 160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전락한다. 세계대전이 세계 경제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이미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1907년부터 대중적인 ‘T모델’ 자동차를 개발·양산하여 자동차 보급 속도를 놀랄 만큼 빠르게 만든다. 1930년까지 등록된 자동차 수가 유럽 전역에서 520만 대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2650만 대나 된다. 포드는 대량 생산을 위해 부품을 규격화하고 작업을 기계화하여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자동 운반 장치를 도입해서 모든 부문의 생산 활동을 일관 조립 작업으로 통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노동 강도가 높아진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동차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강철·기계·유리·고무·전기·석유·건설 산업이 1920년대의 산업 발전을 선도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투기 열풍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미국에 이어 독일·영국·프랑스에서도 1920년대부터 포드주의가 확산된다. 이에 따라 유럽 주요 국가의 산업은 1925년에 전쟁 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고 1920년대 후반에는 패전국 독일까지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

1920년대에는 중요한 기술 발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전에 발명했던 기술들을 완성하고 상품 생산에 응용함으로써 경제가 더욱 발전한다. 라디오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중에 군대에서 사용되었지만, 1920년대 초에 와서 일반인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곧 값싸고 다루기 쉬운 제품으로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200만 대씩 보급된다.

자본주의 예언가들은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포드가 사회주의를 격퇴시켰다. 사회주의는 난센스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다음의 두 시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확장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 뒤의 미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최신의 기술 진보를 토대로 무한한 확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제1의 시대에는 맑스와 라살레가 상징적이었다. 제2의 시대에는 포드가 상징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논한 번영과 공황이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순환적 발전이 들어맞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뿐이다.” “우리는 자유 경쟁과 시장의 맹목성이 지배하던 자본주의 시대를 대체로 극복한 시기에 있으며, 경제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총괄하여 렌쯔는 이렇게 비판한다. “개량주의 이론가들은 노동 조건에 대한 국가 통제의 증대,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 노조가 자본주의 국가의 보조 조직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집행 기관으로 변모한 것들을 가지고 경제상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빠져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노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손실된 실질 임금을 만회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시애틀 노동자들이 1919년 2월에 먼저 파업에 나서자 5월에는 위니펙에서도 파업이 일어나고 9월에는 철강 노동자 36만 명이 전국 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미국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이 파업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사보타지 한다.

1922년 말 50만 철도원의 파업이 패배로 끝날 즈음,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는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는데 협력한다면 노동자에게 큰 이익을 분배하겠다’고 제안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결국 임금이 자동으로 증대하고 노동 조건도 개선되며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도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노동총동맹은 1925년 대회에서 이 제안을 ‘새로운 임금 정책’으로 결정한다. 노조 관료들은 자본가와 손잡고 전진하는 노동자의 미래는 장밋빛이라며 ‘파업은 낡아빠진 방식으로서 노동자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목청을 높인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카버는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저축하여 산업을 점점 사들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푹 빠져 오직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이윤이 대폭 증대하는데도 실질 임금은 1923~26년 사이에 조금(2포인트) 밖에 오르지 않는다. 임금 상승의 혜택도 거의 숙련 노동자에게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시간·노동강도가 오히려 악화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은 산업 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런데 자본가에게 ‘산업 합리화’란 전투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축출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임금 총액을 끊임없이 삭감하고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들은 회사가 자금을 대어 노조를 조직하고 회사편인 사람을 간부 자리에 앉히는 ‘회사조합’을 대규모로 육성한다. 회사조합은 트러스트(독점) 산업을 미조직 상태로 두려는 술책의 하나로서 주로 기간산업에서 만들어진다. 회사조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200개뿐이었는데 1927년에는 900개(100만 명)로 증가한다. 이들 회사조합들은 밀정과 깡패들을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노조 운동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선다.

미국에서부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주식 시장에는 1600만 주가 넘는 매물이 쏟아져 나온다. 주가는 불과 3주 만에 50% 이상 폭락한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 말까지 1600억 달러 이상의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기간산업의 생산이 50% 감소하고, 5761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농업 생산물의 가격은 8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하락한다. 자본가들이 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임금 인하나 대량 해고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모든 산업에서 임금의 45% 이상이 삭감되고 1933년 초까지 17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웃한 캐나다의 산업도 마비되어 100만 노동자가 실직한다. 독일에서는 공업 생산이 45%나 감소하고, 주급은 1929년 42마르크에서 1932년 21마르크(최저 생활비는 38마르크)로 하락하고, 1932년 8월에 완전 실업자만 522만 명에 달하고, 한 달에 3~4달러의 구제 기금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1700만 명에 이르면서, 국민 경제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진다. 영국에서는 공업 생산이 25% 감소하고 실업자는 1929년 116만 명에서 1932년 297만 명으로 증가한다. 영국의 공업 생산이 비교적 적게 감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 불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2년에 완전 실업자가 284만 명, 반실업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프랑스 역시 1932년 6월에 실업자가 230만 명, 반실업자가 561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스칸디나비아국가들·오스트레일리아 등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공황은 (반)식민지에는 더 큰 충격을 미친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실업자 수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농업이 크게 파괴되고 기아가 도처에 확산된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산업과 외국 무역은 50~80%까지 감소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도 없어 인민들이 더욱 비참한 상태에 처한다.

국제 산업 생산은 1929년의 2/4분기에서 1932년의 2/4분기 사이에 42%나 하락한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금본위제가 파탄 나고 자본 수출이 정지된다. 국제 금융은 무질서에 빠지고 국제 무역은 65%나 감소한다. 세계의 실업자 수는 유례없이 증가하여 3~5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 대공황은 1933년부터 심각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지만 그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지속된다.

이 세계 대공황은 부분적인 원인에 의한 일시적인 경기 후퇴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구조 변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생산력은 1890년 이래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기술 혁신과 생산 과정의 재조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높은 수준(미국은 5.9%, 독일은 4.3%)을 기록했다. 전쟁의 피해에서 유럽 국가들이 회복된 이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기는 했지만 산업 생산고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상품의 소비는 생산만큼 빨리 증가하지 않았다. 각 나라에서 국내 수요와 해외 수출은 이 기간을 통해 늘어나던 상품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특히 심각한 빈부 격차가 개선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의 구매력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생산력이 가장 빨리 발전했던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1890~1914년 사이에 매년 1.3%씩 밖에 증가하지 않은 데 비해 산업 생산고는 그보다 4배가 넘는 속도로 성장했고 이런 사정은 ‘번영’을 구가하던 192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상품의 공급 과잉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장기간에 걸친 생산력의 발전은 산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 위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강철·기계·자동차·전기·석유·화학 같은 새로운 산업이 높은 비율로 성장한 반면에 광업·조선·방직 같이 오래된 산업은 정체 내지 위축되었다. 농업은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주식 투기는 이와 같은 불균형 성장을 토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금융 기관의 신용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장기간 누적되어 주가 폭락을 계기로 한꺼번에 대공황으로 폭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대량 해고와 임금 인하에 반대하고 실업 구제와 사회 보장을 요구하면서 적극 투쟁에 나선다. 이에 따라 파업이 급증한다. 1929~32년 사이에 15개 나라에서 1만 8794건의 파업에 851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1468건은 영국, 2700건은 미국, 3601건은 프랑스, 1304건은 독일, 688건은 체코슬로바키아, 1889건은 일본, 1333건은 중국, 480건은 인도에서 발생한다.

루즈벨트가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다. 포드자동차에서만 8만 5천 명이 해고되고 오하이오 주의 5대 공업 도시에서만 1930년 1월부터 2년 반 동안 10만 가구가 퇴거 명령을 받는다. 자연 재해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적십자 구호 같은 구원의 손길도 오지 않는다.

좌파가 주도하는 노조통일연맹과 공산당은 1930년 3월 6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125만 명이 참가한 집회를 열어 ‘기아 행진’을 벌이고 7월 4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위원회를 조직한다. 전국실업자위원회는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는 활동을 벌인다. 이 활동으로 뉴욕의 경우 1932년 6월 30일까지 여덟 달 동안에 퇴거 명령을 받은 18만 5784가구 중에서 7만 7천 가구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부는 이 경제 위기의 원인을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애쓰고 의회는 1930년에 공산당을 조사한답시고 ‘피시 위원회’를 만든다. 자본가들의 폭력도 도를 넘어선다. 포드자동차 해고자들이 1932년 3월 7일 재고용을 요구하며 디어본시 공장으로 행진하자 공장 담 뒤에 숨어있던 포드 폭력단과 총잡이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는다.

재향군인노동자연맹은 4월부터 ‘1차 세계대전 퇴역군인에 대한 연금 지불을 1945년까지 보류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재향군인의 무리가 국가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의사당과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아나코시아 저지대의 황무지로 몰려든다. 이들은 동굴·땅굴·오두막집·천막집에서 담요만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수가 7월에는 2만 5천 명에 다다른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다. 맥아더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기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고 이어서 방독면을 쓴 보병이 최루탄을 던지며 진격하여 퇴역군인들의 무리를 해산시킨다.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2년 여름부터 시작된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자 이때까지 사기와 요행으로 근근이 버티던 미국 경제가 완전히 침몰한다. 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주 전체의 3/4이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 인출을 연기시킨다. 대통령 취임식(1933년 3월 2일)이 있기까지 행정 기관 자금도 동결된다. 돈은 사라지고 임금도 지불되지 않는다. 학교도 문을 닫는다. 파산한 군중들이 텅 빈 예금기관 앞에서 울부짖고 식량조차 살 수 없어 대소동이 일어난다.

민중을 위한 뉴딜 정책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한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구제·부흥·개혁을 내세우고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승인이나 감독 아래 다시 설립될 때까지 모든 은행을 폐쇄하는 긴급은행법, 증권 시장에 광범하게 퍼져있는 사기·부정과 타인의 돈으로 투기하는 행위를 막는 법률들, 공정 거래 기준을 설정하여 산업의 극심한 경쟁을 막고 구매력 증대를 위해 최저 임금과 노동 시간을 합의하도록 규정한 전국산업부흥법 등이 만들어진다.

특히 전국산업부흥법 7조 (A)항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단체 교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공정노동기준법은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을 규정하고 소년 노동을 규제한다. 그리고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조정법이 제정되고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민간 식림 치수단(民間植林治水團)’이 만들어진다. 거대한 공공사업으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찾으면서 흥분과 기쁨이 나라를 채우기 시작한다.

루즈벨트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나라 사이의 우호를, 정복과 제국주의의 중지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집단 안보를 주장한다. 루즈벨트는 라디오를 통해 자주 국민과 대화를 나누며 국민의 친숙한 이웃이자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을 전개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 연안 부두 노동자들이 전국산업부흥법 7조에 고무 받아 노동총동맹 산하 국제부두노동자연맹이란 단체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1933년 9월 노조 간부 4명을 해고하고 노조와의 단체 교섭을 아예 거부한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시애틀·포틀랜드·샌디에이고 등 모든 태평양 연안 항구의 부두 노동자 1만 2천 명이 1934년 5월 9일 일제히 파업에 들어간다. 5월 25일에는 8개 해운 노조의 3만 5천 노동자가 연이어 파업에 들어간다. 미국 노동자계급이 대약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은 이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에 격분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 12만 7천 명이 총파업을 전개하여 시 전체가 유령 도시로 변한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7월 3일에는 경찰과 파업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 7월 5일에는 완전 무장한 2천 명의 주 방위군이 출동하여 최루 가스 대신 구토 가스를 사용하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치고 수십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하루 종일 총성이 울리고 실제 전투와 같은 상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진다. 이에 도장공 노조 1158 지방 지부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곧이어 기계공 노조도 투쟁에 나선다. 7월 10일에는 ‘알라메다 노조 협의회’가 총파업을 정식 승인하고 7월 12일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트럭 운전수 노조 지부가 총파업을 지지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 윌리엄 그린이 파업 금지 전문을 보냈으나 노동총동맹의 160여 개 지부(12만 7천 조합원)가 그 다음날 총파업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모든 노조원들이 7월 16일 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인쇄공과 전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인다. 모든 산업이 정지되고 거리의 전차도 멈추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나 7월 19일 노동총동맹의 보수적인 간부들은 호명 투표를 거부하고 기립 투표를 통해 191 대 174로 총파업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3만 5천 해운 노동자들은 7월 30일에야 국제선원노동조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터로 돌아간다. 몇 주일 후에 부두 노동자들은 하루 6시간 노동과 주30시간 노동을 쟁취한다.

들불 같이 타오르는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지부)들이 수없이 건설된다. 이 새로운 노조들은 (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노조통일연맹이 사용한 투쟁 방식을 따라) 대대적인 피케팅, 노래, 연설, 토론, 회합, 연좌농성, 태업, 시위, 확성기 사용, 여자들을 파업 참가자로 조직하기,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대기 등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용자를 고발하고, 라디오를 이용하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고, 파업 후원회를 조직하고, 파업의 쟁점을 대중에게 알리고, 조합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물으면서 아주 공세적으로 투쟁을 펼쳐나간다. 처음으로 거세게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1935년에 1만 8천여 명이 체포·구금되고 1934~36년 사이에 88명이 파업 중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아주 격렬하게 전개된다.

결국 처음으로 단체 교섭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사용자 측의 노조 방해 활동을 금지하는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이 1935년 7월 5일에 제정된다.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한편 위기의식을 느낀 대기업들은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노조 파괴 활동을 전개한다. 밀정을 고용하여 노조 움직임을 일일이 감시하고 요주의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노조 간부들을 매수하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라 폴레트 상원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230개의 사설탐정회사를 통해 10만 명의 밀정을 고용하여 전국 4만 8천 개의 노조 지부에 침투시켜 적극적인 조합원들을 밀고하여 해고되게 하고 밀정의 상당수가 노조 간부가 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기업 자본가들은 1934년에 노조 파괴 공작에 8천만 달러나 쓰고 ‘반공’을 내세워 오픈 숍―노조 가입과 탈퇴가 개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제도―을 확립하고 뉴딜 정책을 파괴할 목적으로 미국자유연맹을 만든다. 또 제너럴모터스·스탠더드석유·웨스팅하우스 등 전국 12대 대기업은 특별위원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를 노동자와 뉴딜 정책에 대해 반격 작전을 벌이는 신비스러운 비밀 지휘부로 자처한다. 더군다나 재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소련의 끄나풀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를 건설하며 대약진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분위기를 타고 관료적인 노동총동맹 지도부에 비판적인 좌파들이 1935년 11월 워싱턴에서 산업별조직위원회를 결성한다. 새로운 조직의 결성은 수백만 노동자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노동자대중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여러 개의 경쟁적인 직업별 조합으로 자신들을 쪼개서 한 공장 내의 힘을 약화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년의 투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를 이끌고 있어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겨우 여섯 달 만에 2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산업별조직위원회는 단결된 행동으로 거침없이 전진하여 1936년 3월에 ‘미국 전기·라디오·기계노동자 연합회(UE)’라는 거대한 노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동차노조가 5월에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미국자동차노조연합이란 이름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9월에는 UE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곧이어 판유리노조, 철·강철·주석노동자연합회, 고무노동자연합도 가입한다. 노동총동맹 소속 전국기계공조합과 총동맹 산하 지부들 그리고 독립 노조들도 단결의 물결에 합류한다. UE는 연말이 되기 전에 셰넥테디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 공장에도 노조를 조직한다. 이처럼 산업별조직위원회는 새롭게 한창 성장해 나가는 대규모 노조들을 끌어들이며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그러자 노동총동맹 집행위원회는 1936년 8월 4일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담한 노조들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얼마 뒤에는 그 노조들을 제명한다. 그리고 산업별조직위원회가 노조를 둘로 분열시키고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식 비난한다. 더구나 산업별조직위원회가 소련과 내통하여 공산주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12월 28일 파업에 들어간다. 다음해 1937년 1월 4일에는 오하이오 주의 노오우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인디애나 주의 앤더슨과 캔자스시티, 회사 심장부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에서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 파업을 전개한다.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40만 명 가운데 26만 명이 일하고 있고 연간 211만 대(1937년)의 차를 생산하는, 잠자던 사자가 뒤늦게 잠을 깬 것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대한 제너럴모터스의 파업은 자동차 산업을 소비에트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공장 바깥에서는 수천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아내와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응원하면서 추운 겨울인데도 밤낮으로 방송차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파도처럼 움직인다. 결국 파업 44일째인 2월 11일, 제너럴모터스는 노조를 인정하고 전국 단위의 단체 협상을 하겠다고 발표한다. 이것은 아주 큰 승리였다. 마침내 오픈 숍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크론 파업을 본받은 제너럴모터스의 ‘연좌 농성’ 파업―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쟁 방식이다―은 곧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강철 회사인 ‘US강철’은 파업 경고조차 없었는데 임금 10% 인상, 주 40시간 노동, 노조 승인을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에 약속하며 갑자기 항복한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제너럴모터스를 꺾고 승리한 순간에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의 조합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웨스팅하우스와 필코 등 거대 회사에서 노조가 연이어 조직된다. 이로부터 비록 4년 이상이나 걸리긴 해도 ‘포드’에서도 노조가 설립된다.

나아가 흑인 노동자들―노동총동맹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이 백인과 평등한 조건으로 수천 명씩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하고 (섬유·봉재 노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최초로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전기노동자연합과 식품가공노조 등에 가입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1938년에 명칭을 산별노조회의로 바꾼다.

산별노조회의는 철강·자동차·고무·유리·전기·수송·식품가공·통신 등 모든 기간산업에서 오픈 숍을 몰아낸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공장과 지역들에서도 유급 휴가, 유급 휴일, 시간외 근무 수당, 노동 강도 완화, 주 5일 40시간 노동과 같은 값진 성과를 쟁취한다.

산별노조회의의 성장에 자극 받은 노동총동맹은 기계공·트럭운전수·호텔·식당종업원·보일러제작공들을 적극 조직하여 조합원을 100만 명 이상 증가시킨다. 1940년까지 노동총동맹 소속 조합원은 424만 명으로 늘어나고, 산별노조회의는 381만 명, 독립노동조합은 200만 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전체 조합원은 불과 4년 만에 3배나 늘어나 1천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1866년부터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외쳐 온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마침내 많은 산업에서 실현된다.

이처럼 미국 노동자계급은 루즈벨트 시대에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이에 발맞추어 미국의 노동자·민중은 1932·1936·1940·1944년에 네 차례나 연속해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이리하여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노동자·농민·흑인들의 투쟁과 단결이 추진력으로 작용한 대중 운동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자 미국 민주주의 운동의 정점(민중주의)으로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에서) 구원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을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공격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대약진의 기세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원은 ‘비미국 활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디이즈 하원의원의 주도 아래 노조 요시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노조 간부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기 직전에 노동계에 빨갱이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떠들며 청문회를 개최하고 매일같이 산별노조회의가 공산주의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어 신문·라디오·잡지 같은 대중매체의 98%가 쉴 새 없이 산별노조회의를 비난하며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게다가 자경단원들은 빨갱이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산별노조회의의 피켓 대열에 테러를 가한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은 “산별노조회의에 가입해 공산주의 미국 건설을 도웁시다”는 전단 220만 장을 만들어 뿌리는 교활한 술책까지 부린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의 회장을 지낸 프렌티스는 “미국 실업계는 어떤 형태의 위장된 파쇼 독재 체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며 우익 세력을 부추긴다. 독일에서 집권한 뒤 노조를 깡그리 없애버린 히틀러가 수많은 미국 실업가들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포드자동차 사장 포드와 국제사무기계회사 사장 와트슨 등 상당수의 대기업 우두머리들이 히틀러가 주는 훈장을 영광스럽게 받는다. 1940년에는 강력한 친 히틀러 조직인 ‘미국 제1위원회’가 생겨나고 여기에 상당히 많은 미국 산업계 대표들이 참가한다. 자본가들은 탁월한 노동자들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 한마디에 절절 매던 쿨리지 대통령이나 후버 대통령 시대를 그리워한다.

한편 대기업들은 공황을 이용해 자본을 집중시키며 회사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미국 기업의 0.1%에 불과한 거대 기업이 전체 순이익의 50%를 차지하고 4%도 채 안 되는 알짜 대기업들이 총 이윤 가운데 84%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빈부 격차도 심화된다. 미국 총 세대수의 47%가 1년 동안 1천 달러도 안 되는 소득을 얻는 데 비해 1.5%도 안 되는 상류층은 밑바닥 47%의 세대와 같은 액수의 총 수입을 얻는다.

미국 경제는 뉴딜 정책으로 잠시 회복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불경기가 시작된다. 이 불경기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대량의 무기와 전투장비를 소비하는 2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를 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를 구제한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지만 제대로 알면 이상할 것도 없다. 자본은 그 속에 언제나 폭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유 경쟁으로 인한 대공황을 혹독하게 경험하고서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된다.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며, 사기업의 투자와 생산에 대해 재정을 지원하고, 경제 성장 계획에 따라 조세·국채·신용규제를 이용하여 화폐의 순환에 개입한다. 이는 국가 권력과 독점 자본의 유착으로 정치 지배와 경제 착취가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통합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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