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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2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2

파시즘에 패배하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자 운동이 공장 평의회로 결합하여 혁명적 정세를 만든다.

파업의 물결이 1917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 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노동자들이 1918년부터 관료화된 산별노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부 위원회’라는 새로운 현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당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당원 1000명)의 젊은 활동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와 팔미로 톨리아티는 1919년 메이데이에 [새 질서]라는 주간지를 창간하고 ‘공장의 전체 노동자가 생산 활동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대안 사회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역설하면서 공장 평의회를 건설할 것을 주창한다. [새 질서]그룹의 노력으로 1919년 9월 초 피아트사를 비롯해 토리노의 30개 공장에서 5만 노동자가 내부 위원회를 공장 평의회로 전환할 것을 결의한다. 두 개의 새로운 흐름이 하나로 멋지게 통일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당은 10월 당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1919년 3월 창설, 코민테른 또는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른다―에 가입할 것을 결의한다.

이때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60만 이상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이탈리아의 여론은 연합국과 자국 정부 모두를 성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9년 11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좌파인 보르디가가 선거 불참을 주장했으나 사회당은 선거에 참여하여 총 508석 중 156석을 얻으며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급부상한다. 소농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 계열의 신생 정당인 인민당도 농촌 지역에서 100석을 차지한다. 정당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집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다. 사회당의 당원 수는 전전(戰前) 2만에서 18만으로 늘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5만에서 200만으로 급속히 증대한다.

토리노에서는 공장 평의회 회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자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와 토리노 노동회의소는 12월에 공장 평의회를 공식 노선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당권파인 세라티는 ‘혁명의 주역은 조직 노동자이지 미조직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공장 평의회 노선을 맹렬히 반대한다.) 토리노시지부가 12월 3일 집회 명령을 내리자 공장 평의회 체계를 통해 12만의 노동자가 1시간 만에 집회장으로 모여든다. 사회당의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력이고 행동력이다. 토리노시 지부는 공장 평의원들을 대상으로 12월 한 달 동안 대대적인 정치 교육을 벌인다.

자본가들이 1920년 3월 갑자기 섬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이에 반대하는 내부 위원들을 해고하면서 선제공격을 가한다. 이에 맞서 토리노의 공장 평의회들은 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이어서 금속 노조가 즉각 총파업을 선포하고 노동총동맹도 4월 13일 형식적으로나마 총파업을 선언한다. 그러자 총파업의 중심을 깨기 위해 전국의 헌병대가 토리노로 몰려든다. 반면에 세라티 등의 당권파는 토리노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지역의 행동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토리노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한다.

6월에 다시 수상이 된 지올리티는 ‘경영 참여’를 약속하면서 파업 지도부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낸다. 정부와 노동총동맹 사이에 여름 내내 지루한 협상이 계속된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8월 31일 공장 점거 파업을 재개한다. 공장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노동자들은 경영권까지 요구하면서 일부는 무장까지 갖춘다. 9월 9일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의 합동 회의에서 좌익들은 권력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 아무튼 50만 노동자들이 4주 동안이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이는 열기를 타고 전국에서 공장 평의회가 건설된다.

토리노에서는 피아트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접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매일 37대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고전적인 파업과는 다르게 파업 중에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회당 토리노시 지부의 의식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편 남부의 빈농들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토지 점거 운동을 벌이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의 완전 집단화까지 요구한다. 지올리티 정부는 사태가 더 발전하기 전에 서둘러 노사 협상을 타결한다.

사회당은 11월 지방 선거에서 파업의 성과를 이어받으며 약진한다. 하지만 파업 지도부의 타협은 혁명을 기대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배신으로 비쳤기에 노동자들의 투쟁 전열은 오히려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자본가·지주계급은 극우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노동자 세력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다. 페라라 시청에 사회당의 붉은 깃발이 게양되는 그 시간, 볼로냐 시청 광장의 사회당 승리 기념 대회에는 파시스트 테러단의 폭탄이 투척돼 1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

보르디가의 선거불참파와 그람시의 [새 질서] 그룹은 1921년 1월 사회당 당 대회 도중에 대회에서 철수하여 전광석화처럼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당한다. 4만 명이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그리고 5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5월 총선에서 공산당은 29만 표를 얻어 15석을 획득한다. 사회당은 150만 표를 얻어 123석을 확보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도 35석을 확보한다. 1919~20년의 혁명적 정세는 이제 반동이 우세한 국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무솔리니가 중간 계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으며 독재 권력을 구축한다.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서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전향한다. 무솔리니는 전쟁이 끝나고 떠돌이 제대 군인을 모아 1919년에 ‘전투단’을 조직하고 사회·경제·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파시즘 운동을 전개한다.

무솔리니 추종자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해골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로마군대식 행진에 맞춰 투쟁가를 부르면서 퍼레이드를 벌인다. 상징과 의식을 이용한 이 새로운 행동은 인간의 원시적인 힘과 고대 풍속, 종족 우월성을 환기시키면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검은 파시스트들은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보루로 자처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파업 노동자들에게 조직적인 테러를 가하고 노조 건물을 방화하고 사회주의자 지방 관리들을 집무실에서 몰아내는 만행을 자행한다.

파시스트는 국가·법률·질서·사유재산의 보호자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버무린 이데올로기와 무솔리니의 개성에서 풍기는 매력이 함께 작용하여 단기간에 대중 운동으로서 성공한다. 앞서 보았듯이 파시스트당은 1921년 총선에서 35석을 얻는다.

이에 철도 노조는 1922년에 모든 노동자 세력을 모아 파시스트들에 대항할 노동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파시스트들을 제압할 방안을 모색하던 노동총동맹 지도부도 동참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끝내 불참한다. 이렇게 파시즘을 물리칠 좋은 기회는 흘러가 버린다. 그 후 파시스트들의 테러 공세 속에서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00만에서 80만으로 급감하고 사회당 당원 수는 2만 5천으로 감소한다. 공산당 당원 수는 5천 명까지 감소한다.

무솔리니는 10월에 왕국을 구할 것을 선포하고 파시스트 민병대를 이끌고 ‘로마 진격’을 감행한다. 파시스트를 볼셰비즘에 대한 보루로 활용해왔던 자유주의 연립 내각은 10월 28일 검은 셔츠의 행렬이 수도에 다다르자 당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려한다. 그러나 국왕이 선포를 거부함으로써 내각은 물러나고 무솔리니가 수상으로 임명된다. 무솔리니는 수상으로 임명된 후 몇 달 사이에 전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만든다.

이에 대해 총파업으로 대항하자는 호소는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무산된다. 공산당의 보르디가는 “파시즘은 단순히 부르주아 지배의 연장(延長)일 뿐이며 반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람시는 “파시즘의 성공은 중간 계층의 지지와 동원에 기반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무솔리니의 탄압으로 공산당은 지도자인 보르디가와 면책 특권이 없는 지방 의원과 당원의 1/4이 검거된다. 의원단만 유일한 합법 공간으로 남는다.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는 계급투쟁을 부추기고 국민에게 공론을 일삼게 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당파로 분열시키는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과 대담성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정열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스스로를 ‘두체(지도자)’로 지칭한다. 이러한 ‘지도자의 원칙’은 적지 않은 대중에게 능률적이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무솔리니는 적어도 나태한 이탈리아인들을 움직여 기차가 제시간에 떠나도록 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파시스트는 1924년 선거에서 60%를 득표한다. 공산당은 4%를 득표하여 그람시를 포함하여 19명이 당선된다.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했다가 러시아에 남아있던 그람시는 의원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파시즘 치하의 고국에 돌아온다. 무솔리니는 1925년 1월 독재를 선언하고 탄압을 강화한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국내가 아닌 프랑스 리용에서 당 대회를 갖고 반파시즘 공동 전선과 노농동맹을 전략 노선으로 확정한다. 무솔리니는 1926년 11월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불법화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원단까지 체포한다. (이때 같이 체포된 그람시는 1935년 4월 27일 감옥에서 사망한다.)

무솔리니는 정당이나 지역 선거구가 아니라 경제적 직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대의체를 구성한 ‘조합 국가’가 민주주의의 맹점인 계급투쟁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해결한 진보된 경제 사회라고 선전한다. 이에 따라 전국의 경제생활이 22개 분야로 구분되고 각 경제 분야마다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가하는 조합이 결성되어 3자 대표들이 노동조건·임금·가격·산업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대표로 이루어지는 국가 회의가 이탈리아 경제의 자급자족을 공동으로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서는 각 조합의 경제 회의는 모두 정부로 통합되고 이 회의의 대표는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는 파시스트 노조가 노동자의 유일한 대표 기관으로 인정되고 기업가들은 공장 내에서 무제한의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파시스트는 이후 몇 년 동안 신문을 검열하고, 노조를 해체하고, 선거권을 축소하고, 다른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모든 반대 의사 표명을 금지시키고, 정적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별 재판소와 비밀경찰을 만든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단일 정당을 통해 국가 기구와 관료들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배신한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1917년 11월 3일 혁명을 일으키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사회민주당의 샤이데만은 11월 9일 공화국을 선포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12월 16일 전국 대회를 열고 기간산업의 사회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해체, 국가 기구의 민주화를 촉구한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날,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독점 자본가 대표들과 만나 비밀 협정을 맺으며 “한 사발의 죽에 혁명을 팔아넘긴다.” 혁명을 마치 단순한 노동쟁의인 것처럼 다룬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그 대가로 상당한 양보를 한다. 평상시에는 장기간의 총파업으로도 이룰 수 없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극우파인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보고 차갑게 비웃는다.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상황과는 아주 다르게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제 평의회 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이런 급박한 시기에 독립사회민주당이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12월 30일 독일공산당을 새로 창당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분파였던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은 독립사회민주당에 잔류한다. 그리하여 20대의 무정부주의 청년들이 다수를 이루는 ‘국제 공산주의 그룹’이 독일공산당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에게는 1000표의 투표보다 가두에 있는 10명이 훨씬 가치 있다”고 호기롭게 외친다.

바로 이때 독립사회민주당원인 아이호른이 베를린 경찰서장에서 해임되자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무작정 반란을 일으킨다. 며칠 사이에 무장한 노동자들이 베를린의 철도역·전화국·가스·수도·전기공장·주요건물들을 점령한다. 혁명은 다른 도시로도 확산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임시 정부는 노스케(사회민주당원)를 내세워 2주일 만에 혁명 운동을 진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에 체포되어 살해된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해체 당한다. 세계 최대의 독일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대전을 찬성한 데 이어 두 번째로 민중을 배신한 것이다.

일주일 뒤인 1월 21일 국민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사회민주당이 1111만 표를 획득하고, 독립사회민주당은 218만 표를 얻는다. 제1정당이 된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으로 선출된다. 그렇지만 진정한 승자는 의원수의 54%를 차지한 부르주아 정당들이다. 독일공산당은 이 선거에 불참하고 여름까지 독일 곳곳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노동자들은 3월 3일 ‘노스케·샤이데만·에베르트의 체포, 소련과의 외교 재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단행한다. 그러나 1주일도 못되어 노스케와 폰 루트비츠 장군의 군대에게 진압된다. 투쟁의 주요 거점인 뮌헨에서는 노동자들이 5월 1일까지 도시를 장악하고 항전하지만 역시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당한다.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동지이자 애인이었으며 그녀의 노선을 계승한 독일공산당의 새 지도자 파울 레비와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 지도부는 10월에 당 대회―시간과 장소도 가르쳐주지 않는 편법까지 쓰면서―를 열고 극좌 맹동주의자들을 당에서 쫓아낸다. 10만 7천여 명의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축출된다. 레비는 독일공산당과 독립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노동자계급이 우익 쿠데타를 총파업으로 막아낸다.

1920년 3월 12일, 볼프강 카프 박사와 폰 루트비츠 장군이 이끄는 세력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왕조를 재건하려는 정부를 세운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바이마르정부는 야간에 드레스덴으로 도피한다.

노동자들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3월 14일 총파업에 들어간다. 자유노동조합―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최대 노조연맹―의 주도 아래 기독교 노동조합,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이 조직한 허시-둔커조합, 심지어 ‘황색’(어용)노조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여 총 12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인다. 총파업은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마비시킨다.

폰 루트비츠 장군이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분쇄하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그러자 카프는 3월 17일 스웨덴으로 도피하고 루트비츠는 다음날 장군직에서 물러난다.

그런데도 루르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령하고 파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3월 22일 정부와 노조간의 협정 체결, 카프 일당 처벌, 특정 산업 즉각 사회화, 반동적인 군사 조직 해체, 노스케의 퇴임을 약속 받고서야 파업을 끝낸다. 총파업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자유노동조합의 칼 레기엔이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에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제안한다. 그러나 두 당의 연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 진행된 총선에서 독립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8.8%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1/3이 줄어든다. 그 결과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선다.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좌파와 공동 전선을 형성한다.

독일공산당은 10월에 독립사회민주당과 합당(당원 45만 명)한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정당으로서는 서유럽 최대의 대중 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은 독일공산당을 그대로 계승한다.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1년 3월 만스펠드 광산에서 다시 봉기를 감행한다. 그러나 역시 실패로 끝난다. 이 여파로 당의 지역 조직들이 파괴되고 당원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레비는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우리의 노선’이라는 문건을 통해 코민테른을 격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공세적인 투쟁을 제안하고 기층 당원들과 적극적으로 공동 투쟁을 전개하여 지도부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당 당원들을 견인하자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레비는 당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1년 뒤에 당의 정식 노선으로 채택된다. 코민테른이 1922년 11월 4차 대회에서 파시즘의 대두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결정한 것이다. 독일공산당은 자유주의자인 라테나우 외무상이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파시즘 반대 시위운동을 주도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평의회 건설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막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이라 정세는 1923년에 혁명 전야로까지 발전한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는 작센 주와 튀링겐 주에서 연립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연방 정부가 불법 군사 행동으로 이 연립 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1924년 총선에서 12.6%의 지지율을 획득하며 운동의 성과를 유지한다. 공산당은 1926년 구 독일제국 군주 재산을 몰수하는 데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하면서 사회민주당과 공동 전선 전술을 펼쳐 1500만 표의 찬성을 얻어낸다. 이처럼 통일 전선 전술은 사회주의 세력이 약진하는 발판이 된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사회민주당은 1928년 총선에서 “학교 급식이냐 군함이냐”는 공격적인 구호를 내걸어 모처럼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다시 연정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막상 군함 건조 예산안이 논의되자 우파 정당들과 협력해야 한다며 ‘학교 급식이 아니라 군함’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이끄는 프로이센 주 정부는 1929년 일체의 시위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탄압하여 33명의 ‘형제’를 살해하는 참극을 빚기까지 한다. 이는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는 당 지도부의 극좌적 전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던 의식 있는 공산당 당원들까지 사회민주당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사회민주당은 두 번째로 권력에 오른 시점에서 노쇠 현상을 보인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은 80~100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고령화가 심해 40세 미만의 의원은 10%, 25세 이하 당원은 8%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는 의원의 60%가 40세 미만이었던 나치나 당원의 1/3이 20대였던 공산당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별 인기를 끌지 못한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비엔나에서 무명 화가로 궁핍한 시절을 보낸다. 여기서 비엔나의 풍경인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과 유태계 지식인, 맑스주의(국제주의)에 탐닉한 노동자들에 대해 증오감을 갖게 된다. 그 후 남부 독일 바바리아로 옮겨가 그림물감을 팔며 연명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피 끓는 민족주의에서 숭고함과 해방감, 생의 의미를 확인한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 11월 혁명기에 바바리아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된다. 수다한 경향의 비밀 정치 조직들이 들끓는 바라리아에서 히틀러는 독일노동당에 일곱 번째 당원으로 가입한다. 이 당은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노동당’으로 개칭된다. 나치(Nazi)는 ‘국가적(National)''의 앞 글자와 ‘사회주의(Sozialismus)’의 중간 글자 둘을 합한 용어다.

1923년 프랑스군이 ‘전쟁 배상금 지불 불이행’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이미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굴욕적인 항복을 한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는 1년 전에 있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을 모방하여 나치 행동대인 ‘갈색셔츠단’을 이끌고 뮌헨의 ‘비어홀’(맥주 집) 무대에 뛰어올라가 권총을 발사하면서 ‘국가 혁명의 발발’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폭동은 한판의 우스갯거리로 끝나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는다. 히틀러는 복역 기간 중 인종주의·민족주의·집산주의·역사이론·정치평론이 뒤범벅된 [나의 투쟁]을 출간한다. 무능한 바이마르 정부는 ‘관대하게도’ 1년도 못되어 히틀러를 석방한다.

한편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면서 독일의 경제는 급속히 부흥한다. 그러자 국가사회주의는 호소력을 잃고 히틀러는 ‘정신이상자’로 취급받는다. 이런 상황은 1929년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하고서야 변화된다.

히틀러가 경제 대공황의 혼란을 타고 권력을 잡는다.

1929년 11월 뉴욕 주식 시장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유럽에 대부했던 단기 차관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독일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파시즘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나치는 1930년 12월 총선에서 12석이던 의석을 107석으로 늘리며 제2당으로 급부상한다. 반면에 공산당도 기존 의석에 23석을 추가한다.

그러자 독일의 정치 상황에 대해 불안을 느낀 외국 자본들이 서둘러 독일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차관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해 있던 독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는 1932년 1월 전체 국민의 1/5인 600만에 육박한다. 1929년에 135억 마르크에 이르던 대외 무역은 1932년에 57억으로 감소한다.

사회민주당은 불행하게도 재집권한 지 1년 만에 터진 대공황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무능력을 드러낸다. 공산당은 “나치가 집권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싹쓸이하면 권력은 이제 우리 차례”라며 사회민주당의 무능력에 대해 사정없이 비판하고 나치당과는 거리에서 사실상 내전과 같은 투쟁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1932년에 당원 중 실업자가 85%에 이르게 되면서 노동 현장과 동떨어진 가두 정당으로 변해간다. 나치는 모든 혼란의 책임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전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세력·토지투기업자·고리대금업자·불로소득·과세불평등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다. 나치는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하여 불안과 공포에 질려있는 대중들의 감정을 격앙시키고 반유태주의를 부추기면서 혁명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뿐만 아니라 유태인 자본가를 증오하는 노동자들까지 끌어들인다.

나치는 1932년 4월 총선에서 230석을 획득하면서 과반수는 넘지 못했지만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된다. 나치당의 득표수는 1928년 80만 표에서 1932년 1341만 표로 증가한다. 공산당도 498만 표를 얻어 100석이라는 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한다. 사회민주당은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800만 표 이상을 획득한다. 독일민주당이나 독일통합국민당과 같은 중도파나 우파 정당들은 지지 기반을 상실한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중간 계층이 공산당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끼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자신들을 따르는 노조를 총동원하여 히틀러보다 ‘비교적 덜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지난날의 반동 힌덴부르그 장군을 지지하여 당선시킨다. 힌덴부르그 대통령은 5월에 군부 실권자인 슐라이허 장군의 지원을 받는 파펜을 수상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파펜은 7월 20일 군대를 동원하여 사회민주당의 거점인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산시킨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열흘 뒤의 주 총선에서 심판하면 된다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공산당이 호소한 총파업은 공산당의 노동 현장 기반이 취약하여 공문구에 그친다. 나치당 베를린 지부장 괴벨스는 “붉은 무리들은 그들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10일 나치 당수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히틀러는 다른 정당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집권 즉시 국회의원 재선거를 준비한다. 히틀러는 2월 1일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2월 4일에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신문과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한다. 공교롭게도 투표 1주일 전인 2월 27일 밤에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데 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며―한 달 사이에 1만 명을 체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돌격대(SA: Sturmabteilung)나 친위대(SS: Schutzstaffel)가 운영하는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그래놓고도 나치는 43.9%밖에 얻지 못해 독립국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해서야 간신히 과반수를 넘는 52%를 확보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제거된 약해빠진 의회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고 이어서 자신이 수립한 새 체제를 제1제국(신성 로마제국)과 제2제국(비스마르크가 창건한 호엔촐레른 제국)을 계승한 제3제국으로 명명한다.

나치스 정권은 노동자 조직을 어용 기관으로 만든다.

라이파르트가 이끄는 노동총동맹의 기관지는 4월 29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메이데이를 환영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노동자들에게 나치의 경축일에 참가하라고 호소한다. 라이파르트는 이탈리아 유형(파시즘)에 따라 노조를 재조직하는 일에 응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돌격대원들은 5월 2일 전국에서 노조 사무소를 습격하여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 나치당의 레이 박사는 5월 11일 노동자 조직인 ‘노동전선’을 결성하고 자신이 대표로 앉는다. 정부는 5월 13일 노조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다.

수백만의 세력을 가진 노조는 단 한 번의 투쟁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패퇴한다. 대부분 노조 지도자였던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단은 5월 17일 파시스트 정부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노예처럼 굴종한다. 그런데도 나치는 6월 23일 사회민주당을 폐쇄하고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그래도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한다. 사회주의적·혁명적 성향을 지닌 ‘나치당 초기 대중 운동 지도자들’도 1934년 반체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나치는 1934년 6월 노동전선을 노동자, 고용된 봉급자, 직인, 그리고 자본가까지 포함하여 4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으로 재편성하고 노동자계급을 ‘원자화’하는 일에 착수한다. 노동전선은 2700만 명의 의무 가맹자를 갖고 있지만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한도 없고 파업도 금지된다. 노동전선 내에서 노동자들은 ‘경영 지도자’로 불리는 기업가들에 종속된다. 노동자들은 꼭 소지해야 하는 ‘노동 수첩’을 통해 통제되면서 순종을 강요받고 많은 분야에서 직업이나 공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히틀러가 전쟁 준비를 위해 군수 생산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노동 시간은 점차 연장되고 실질 임금은 격감한다.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1/3 정도 하락한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공포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1936년 올림픽 경기가 열린 베를린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독일은 ‘권위적인 지배 아래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로 비쳐진다. 나치 정부는 ‘기쁨을 얻는 힘’이라는 대규모의 국영 오락 기관을 만들어 다채로운 연극 프로그램에서부터 대중 바캉스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여가 생활을 조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총 3900만 명이 이 기관을 통하여 주말여행이나 해외여행의 혜택을 누린다. 특히 나치가 박차를 가한 대중 바캉스 붐은 오늘날까지 유럽 노동자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남는다.

히틀러는 민중의 수상을 자처하면서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였음”을 강조한다. 나치는 ‘나치 청소년 운동’을 통해 각급 학교와 대학의 자라나는 세대를 나치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는 실업자가 600만 명이었으나 1938년부터는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이 창당되어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조직이 분리된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이러한 급진적 분위기는 1918년 11월에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사회당의 당세 신장과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증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사회당은 1919년에는 종전 후 처음 입당한 청년 당원들이 3/4을 차지하게 되고 11월 총선에서는 득표율이 기존의 17%에서 21%로 성장한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결선 투표에서 보수파와 자유주의자들이 연합하는 바람에 의석은 오히려 102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든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0년 5월 1일 철도 ‘국유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한다. 금속·건축·소매업·운수·부두·광부·가스 노동자들은 노동총동맹의 계획에 따라 10일 동안 ‘3회 연속 파업’으로 철도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 연대 파업은 초기에 좌익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지도부의 준비 부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되지 못하다가 5월 22일 무조건 취소된다. 이 영향으로 1912년 40만에서 1918년 120만, 1919년 말 200만으로 증가하던 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파업 철회 후 1년도 못되어 조합원의 2/3 이상이 탈퇴하여 60만으로 감소한다.

사회당은 1920년 12월 당 대회에서 대의원의 68.7%의 찬성으로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해 5월 프랑스 공산당―정식명칭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으로 당명을 바꾼다. 그러나 당 대회 소수파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잔류하고 68명의 의원 중 55명이 사회당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노조 운동도 분열된다. 공산당은 1922년 사회당과 가까운 노동총동맹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노총인 통일노동총동맹을 창립한다. 공산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1927년 ‘프랑스의 모로코 개입 전쟁’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주도한다. 보수파 정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오던 공산당은 이 총파업 때문에 심지어 의원들까지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고 구속된다.

그렇지만 공산당은 신흥 금속 산업의 노동자, 파리 교외의 노동자 밀집 지역, 북부 산업 지대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여 이들 지역에서 지자체를 장악하고 1920년대 말에는 총선에서 100만 표 가까이 득표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결선 투표 때문에 의원 수는 최대 14명을 넘지 못한다. 반면에 사회당은 전통적 소규모 산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150~200만 표 정도를 획득하지만 결선 투표에서 중도 우파인 급진사회당과 곧잘 선거 연합을 펼치면서 공산당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얻는다.

통일 전선으로 인민전선 정부가 창출되고 노동자 운동이 급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대공황이 뒤늦게 찾아와서 더 오래 지속된다. 프랑스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금융계의 큰손들이 금융 자산 가치를 보장하는 금본위제와 디플레이션 정책을 고집하는 바람에 공황이 더 악화된 탓이다. 이런 상황을 타고 ‘불의 십자가''와 같은 극우 단체들이 급격히 대두한다. 유대인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가 자살한 의문의 사건(1933년 말)에 급진사회당의 고위 정치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의회는 1934년 2월 6일 급진사회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다. 극우파들은 바로 이날을 의회 정치를 전복하고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할 호기로 보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험을 통해 파시스트 정부의 수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노동자 2만 5천 명이 누구의 명령이랄 것도 없이 당일 즉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극우파 시위대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다. 2월 12일에는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이 함께 24시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450만 노동자가 작업장을 나와 시위에 참여한다. 이처럼 먼저 행동에 나선 대중들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반파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연일 시위를 전개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반파쇼 통일 전선을 구성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산당 당원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공산당은 1930년에 토레즈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당내 극좌파를 숙청하고 1932년 암스테르담 반전 국제 대회, 1933년 플레이엘 홀의 반파쇼 유럽 대회 등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당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의 공동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맹공격한다는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결정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공산당은 대중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회당과의 공동 행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1934년 7월 코민테른 13차 집행위원회 간부 회의는 불가리아 출신의 새로운 지도자 디미트로프의 강력한 주창으로 공동 전선 전술을 채택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이 히틀러의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필요로 하고 있던 상황도 작용한다. 아무튼 이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이 7월 27일 역사적인 행동 통일 협정에 서명한다.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10월 9일 처음으로 급진사회당과의 협력을 주장하면서 ‘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인민 전선’을 제시한다.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넘어 중간층을 포함하는 계급 연합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좌파 공동 전선과 급진사회당은 1935년 5월 지방 선거에서 곳곳에서 암묵적인 선거 연합을 맺어 승리를 거둔다. 전통적으로 보수 우파의 아성이었던 파리의 대학가 라탱구에서도 반파쇼투쟁위원회 활동가인 폴 리베 교수가 당선된다. 이는 프랑스에서 우파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던 지식인·대학생들이 좌파로 대거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한 달 뒤인 6월에 급진사회당·사회당·공산당이 어렵사리 선거 강령에 합의한다. 더구나 급진사회당 내 청년터키파가 7월 14일 대혁명 기념일에 깃발을 들고 좌파의 시위에 합류함으로써 이 날은 반파시즘 인민 전선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8월에는 코민테른이 7차 세계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인민 전선을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확정하고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던 노조 운동의 통일과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 건설까지 주창하고 나선다.

노동총동맹과 통일노동총동맹은 성공적인 공동 총파업(1934년)의 기세를 몰아 1936년 3월 툴루즈에서 개최한 전국 노조 대회에서 통합을 달성한다. 대회는 노동자계급이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견을 갖는 것은 묵인하지만 총동맹 내부에서 정치적 분파를 형성하는 것은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통합된 노동총동맹의 강령은 ‘기간산업과 신용 기관의 국유화’와 ‘최고 경제 회의에서의 계획적인 생산과 분배’를 명시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국정 홍보 수단으로 사용한 미국의 루즈벨트 민주당 정부의 영향으로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 연설이 도입된다. 이에 따라 “파시즘의 뒤에는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200대 가문이 있습니다. 200대 가문을 타도합시다!”라는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의 힘찬 발언이 전파를 타고 전국의 가정에 전달된다. 선거 결과 196만 표를 얻은 사회당의 의석은 97석에서 146석으로 증가하고 150만 표를 얻은 공산당의 의석은 10석에서 72석으로 증가한다. 반면에 142만 표를 얻은 급진사회당은 158석에서 116석으로 42석이나 상실한다. 그 동안 중도 우파 급진사회당을 지지한 유권자의 상당수가 사회당으로 이동하고 노동자들의 표가 공산당으로 집중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가 왼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지식인은 좌파 편이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공산당 당원 수는 1931년 3만 명에서 1937년 34만 명으로까지 급증한다. 어쨌든 전체로는 공산당·사회당·급진사회당·(통합)노동총동맹이 결집한 인민전선이 367석을 획득해 원내 다수파가 된다. 군소 정당인 공산당이 통일 전선을 추진하여 정치판 전체를 바꿔놓은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5월 11일, 지방 도시 르 아브르의 브레게 비행기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경찰이 출동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한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우리의 권리와 존엄성을 되찾을 기회!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투쟁은 5~6월에 프랑스 전역에서 무서운 기세로 발전한다. 5월 24일 파리코뮌 기념일에는 파리에 60만 노동자가 집결한다. 투쟁 소식이 시위 노동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노동자들은 이웃 공장의 정보를 듣기 위해 좌파 지자체 사무실을 찾아들고 공산당의 공장 세포들은 자발적으로 파업 선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5월 26일 파리 근교에 있는 뉴폴 비행기 공장에서 처음으로 공장 점거 파업이 시작된다. 이틀 뒤에는 프랑스 산업의 중추인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3만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작업장을 점거한다. 6월 첫째 주까지 파업 대오는 수백만으로 늘어나고 금속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무직·서비스직 노동자들까지 가세한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은 비장함이 아니라 해방감에 들뜬 축제의 분위기가 만발한다.

이런 와중에 출범(6월 4일)한 블룸 인민전선 내각은 바로 다음날 파업 대표자들과 파리 마티뇽 호텔에서 협상을 벌인다. 그 결과 임금 7~15% 인상, 모든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할 권리, (처음으로 실시되는) 산업별 단체 교섭, 직장 위원(산업별 노조의 작업장별 대표) 제도의 확립을 약속하는 ‘마티뇽 협정’이 체결된다. 이에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은행·철도·군수공업을 서둘러 국유화한다. 의회는 40시간 노동과 유급 휴가 등의 노동법안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며칠 만에 통과시킨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급진사회당 출신 장관들은 군대의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공산당 사무총장 토레즈가 6월 11일 집회에서 “파업을 끝내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여러 곳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토레즈의 호소는 파업의 종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다음날 금속 노조가 자본가들과 협상을 체결한다. 그 다음날은 르노의 2만 노동자가 블룸과 토레즈의 사진, 당 깃발을 들고 공장에서 나와 노동자 주거 지역을 행진한다. 이 여름 동안에 노동총동맹 가입자는 100만에서 530만으로 늘어나고 단체 협약은 1936년 29건에서 1938년 3월 5700건으로 급증한다.

자본가들은 자본 해외 유출로 반격을 가하며 인민전선 정부를 내려 앉힌다.

그러나 승리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작년에 집권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프랑코가 7월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블룸 정부가 일찌감치 시련에 닥친 것이다. 영국과의 동맹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유일한 방안으로 보고 있던 블룸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면 동맹 관계를 끊겠다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협박에 굴복하여 7월 25일 무기 수출 금지를 선포한다. 이로써 이웃 나라 파시스트들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반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프랑코의 반군에게 무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7월 31일 장 조레스 추모 대회에서 블룸의 면전에 대고 “스페인에 비행기를!”이라고 외친다. 뜻있는 노동자들은 처음 얻은 여름 유급 휴가를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국제여단 활동에 바친다. 그리고 공산당은 하부 집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여하는 인민전선 전국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인민전선은 상층에서의 단순한 협정에 머문다. 이처럼 인민전선 정부의 개혁을 추동하고 감시할 힘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후 선거 강령의 대부분이 사문화되어 버린다.

자본가들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며 블룸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블룸 정부는 연립 정부 파트너인 급진사회당의 반대 때문에 선거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 ‘자본 유출에 대한 통제’를 단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역 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화 평가절하를 실시하고 인상된 임금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물가 연동 임금제를 도입하려 하지만 상원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처럼 좌파가 다수인 하원에서의 결정은 우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원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힌다. 그러더니 10월에는 공장 점거 노동자들에 대해 최초로 경찰력을 동원하고 1937년 1월에는 잠정적으로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극우파 ‘불의 십자가’가 프랑스사회당―여기서 ‘사회’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합법 정당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3월 16일 파리 외곽의 클리시에서 이 프랑스사회당 시위대와 클리시 인민전선 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충돌하고 경찰 발포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이틀 뒤 숨진 노동자들을 기리는 장례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다. 그 관속에는 인민 전선 정부에 건 희망과 기대 또한 누워 있었다.

6월에 자본 유출이 6백억 프랑에 달하자 블룸은 정부에 강력한 외환 통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원이 거부하고 나선다. 결국 블룸은 6월 20일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까지 포괄했던 인민전선 정부는 이렇게 1년 만에 내려앉는다. 이후에도 인민전선 자체는 유지되지만 급진사회당이 주도하게 된 새 정부는 어떤 진보 정책도 시행하지 않는다. 1938년 3월 잠시 2차 블룸 내각이 시도되지만 단 3주 만에 다시 실각한다. 이 때는 이미 인민전선 정부를 지탱해줄 노동자계급의 힘이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를 되찾은 부르주아 세력은 이제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며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닌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쿠데타에 무너진다.

스페인에서는 1931년에 공화국이 수립된다. 공산당·사회당·무정부생디칼리즘·농민·민족주의자·가톨릭교도·자유주의자로 구성된 민주주의 세력은 1936년 2월 총선에서 253석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로블레스가 이끄는 반동 세력은 153석을 얻는 데 그친다.

공산당은 정부기관·군대·경찰·공장·은행·학교 등에서 반동 세력을 조속히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당과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혁명적 방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자 파시스트들은 자유롭게 반동 책동을 일삼는다. 결국 프랑코 장군이 1936년 7월 모로코에서 폭동을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된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때서야 공동 행동 강령에 합의하고 파시즘 반대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한다. 무정부 생디칼리즘 경향의 전국노동자연맹(170만)과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노조총동맹(190만)도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선다. 그리고 프랑스·이탈리아·독일·폴란드·영국·캐나다·미국 등 세계에서 자원한 의용병들(국제여단)이 파시즘의 반동으로부터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다. 스페인 내전은 민주 세력과 파시즘 세력간의 ‘전쟁’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인민전선 정부는 스페인 노동자·민중의 영웅적인 투쟁과 자발적인 세계 민중의 광범한 연대 투쟁에 힘입어 1938년 3월 내전에서 ‘일단’ 승리한다. 그러나 프랑코 군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다량의 군대와 군수 물자를 원조 받으며 다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인민전선 정부는 지도부가 분열―공산당(스탈린주의)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되면서 점점 열세에 놓인다. 결국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된다.

프랑코는 팔랑헤당(Falangist Party)을 기초로 파시즘 제도 건설에 착수한다. 프랑코는 23개의 산별노조로 노조전국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함께 참가시킨다. 조합원은 의무 가입으로 1천만 명에 달한다. 프랑코는 각급 조합의 고위 간부를 직접 임명하고 조합을 허가 없이 조직하면 소요죄로 취급하여 무거운 금고형에 처한다.

불법화된 노조총동맹과 전국노동자연맹은 상당한 기간을 거쳐 기간 조직을 재건하고 지하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이지만 저항 운동이 크게 발전하고 공공연한 저항에 대해서는 잔인한 형벌이 부과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완만한 혁명’은 완만하게 좌절한다.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요 산업 기지가 있는 슬라브어권 지역들이 따로 독립해나가고 이에 따라 기존의 제국 군대도 철저히 해체되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가 군을 장악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반전의 상징’인 아들러의 후광을 배경으로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도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민주공화국에서 멈춘다. 농촌 지역이 여전히 우파인 기독교사회당에 장악되어 있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여서 연합국이 무력으로 개입하거나 식량과 자원을 끊기만 해도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혁명 없이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며 민주공화국 안에서 급진 개혁을 추진해나가는 게 최상책이라는 판단에서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론은 ‘일국 혁명으로 세계 혁명을 촉진한다’는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수행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919년 2월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에서 총 159석 중 69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이 되어 좌우연정을 주도한다. 렌너가 초대 수상이 되고 바우어는 외무상을, 율리우스 도이치는 국방상을 맡는다. 정부는 소국으로서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편으로 독일과의 통일을 추진한다. 하지만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인 조직 활동’이 노동 현장과 지역 사회에서 굳건히 자리잡아나가야 한다며 “완만한 혁명”의 장도(長途)에 나선다. 바우어는 사회화위원회를 만들어 공동 소유와 이윤 분배를 추진하는데 헝가리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 우파도 이에 동조한다.

하지만 1920년 3월에 헝가리 혁명이 진압되자마자 우파는 사회화위원회를 무력화시킨다. 노동자 평의회는 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계속 축소되다가 선진 노동자 투쟁 조직인 ‘공화국 방어동맹’으로 재편된다.
우파들의 반발로 좌우연정은 6월에 깨지고 기독교사회당이 10월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하여 우파연정이 들어선다. 우파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국가기구·경찰·군대를 우경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게다가 ‘향토방위단’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이 농촌을 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지방 정부에서 개혁을 계속 추진한다. 특히 비엔나에서는 ‘붉은 비엔나’, ‘비엔나의 기적’이라는 말들이 널리 회자될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 결과 비엔나 시민 200만 명 중 50만 명이 사회민주노동당에 ‘당비를 내는’ 당원이 되고 비엔나 유권자의 2/3가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전국적으로도 1923년 총선부터 지지도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여 1927년 총선에서는 42%를 획득한다. 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이 총 단결하는 바람에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된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먼저 파시즘 반대 투쟁에 나선다. 3명의 파시스트가 사회민주노동당 집회장을 습격하여 1명의 병약자와 1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샤텐도르프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7월 14일, 비엔나의 노동자 대중이 당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하고 수만 명의 파업 대오가 보수적인 사법부를 압박하기 위해 대법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우파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여 8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의사당 건물에서 이 참극을 목격하고서도 ‘방어동맹’에 어떠한 반격 명령도 내리지 않고 단지 ‘화해 정부’(대연정)을 구성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기독교사회당 우파는 ‘방어적 폭력’―사회민주노동당이 1926년 린츠 당 대회에서 채택한 전술―이 얼마나 ‘방어적’인지를 이미 확인한 터라 대연정 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향토방위단과 함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행보를 드러내놓고 진행한다.

반면에 무장 반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어동맹의 8만 선진 노동자들은 D-데이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오히려 일상 투쟁에서 괴리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오스트리아에 불어 닥치면서 노조원 수는 1920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다. 그런데 사회민주노동당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라는 국제 자본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등 원내에서도 여전히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자 사회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의 관심과 열의도 점차 식어간다.

돌푸스 수상의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1933년 3월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과 방어동맹을 불법화한다.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도 원내 1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는다. ‘보다 극악한’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덜 사악한’ 기독교사회당의 조치를 묵인할 수도 있다는 당 지도부의 판단 때문이다. 사회민주노동당은 9월 당 대회에서 “파시스트 헌법의 강행, 당 해산, 노조 해산, 비엔나 시청 점령 등의 4개 조건” 중 하나가 감행될 때만 무장 반격에 나선다는 결정을 내린다. 후에 바우어는 “3월에 총파업과 원외 투쟁으로 맞섰어야 했다”고 통렬하게 자기비판 한다.

다음해 1934년 2월 프랑스에서마저도 파시스트가 파리의 거리를 점거하자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3월 12일 바우어의 국외 추방과 방어동맹 간부의 일제 검거를 명령한다. 이에 빈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총파업이 선포된다. 파업은 파시스트 부대의 무력 공격을 받고 폭동으로 변하고 각지에서 방어동맹이 산발로 봉기한다. 4일 동안 벌어진 내전에서 노동자들은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1200명이 사망하고 2만 명이 투옥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화되고 지도자들은 망명한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던 헝가리에서는 1918년 10월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전복되자 12월에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을 창당한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사회당을 만들고 1919년 3월 21일 노조(72만 명)의 힘을 기반으로 카롤라이 부르주아 정부를 붕괴시키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한다. 공산당 지도자 벨라 쿤은 새 정부의 수상이 된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8월에 쿤 정부가 물러나고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이 정부도 반동적인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군대의 연합 공격으로 붕괴된다.

영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노동당 정부와 노조 지도부에게 배신당한다.

클라이드 조선 노동자들이 1919년 1월 전후 최초로 파업을 일으켜 승리를 쟁취한다. 9월엔 철도 노동자들이 단기간 파업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곧 이어 10월 중순에 100만의 탄광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탄광 국유화를 요구하면서 전국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지원 요청을 받은 ‘삼각동맹’의 운수·철도 노조의 지도부는 약속한 파업 날짜를 두 번씩이나 미루더니 광부들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거짓 구실로 투쟁 계획 전체를 취소한다. 그 결과 광부들만 13주 동안이나 외롭게 투쟁한다.

1914년 100만, 1919년 650만, 1920년 834만으로 급속히 성장하던 노조는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해 삼각동맹이 붕괴한 후 2년 만에 200만의 조합원을 잃는다. 그리고 600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1921년 말까지 주급이 8실링 이상 삭감되어 생활에 고통을 겪는다.

영국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독일·일본 같은 경쟁자들에게 통상의 우위를 계속 빼앗기면서 위기를 맞는다. 석탄 수출은 1913년 8900만 톤에서 1924년 6165만 톤으로 감소한다. 선박 건조는 같은 기간에 189만 톤에서 116만 톤으로 감소한다. 강철 생산은 1924년에 1913년의 수준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리하여 실업자가 1920년 2.4%에서 1921년 16.6%로 급증한다. 그 후 실업자는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927(9.6%)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1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1925년에 석탄 산업의 실업률은 25%로 증가하고 캐낸 석탄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런 현상은 영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독일과 벨기에에서도 벌어진다.) 정부의 사회 보장은 극히 인색하여 노동자들은 참담한 빈곤 상태에 빠진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 힘입어 램지 맥도널드가 지도하는 노동당이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처음으로 집권한다. 그런데도 탄광 자본가들은 1921년의 협약이 1925년 7월로 만료되자 평균 13%에서 48%까지의 임금인하, 7시간 노동일의 폐지(8시간으로), 전국 협정을 일련의 지역 협정으로 바꿀 것 등을 요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30일을 기해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노동자들은 곧바로 파업으로 대항한다. 그러자 정부는 황급히 왕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 조사에 나서고 자본가들은 폐쇄 경고를 철회한다.

일단 시간을 번 볼드윈 정부는 이후 8개월 동안 맹렬하게 파업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 정부는 공급 확보 기구를 통해 트럭을 동원하고, 기관차의 특별 차고를 설치하고, 비상시에 이용할 자동차를 준비하고, 파업 파괴 계획을 작성하고, 산업의 중요 위치에 배치할 요원을 훈련시키고, 전국을 10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각 지역에 비상 경제·정치 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군대를 전략 요지에 배치한다. 간단히 말하면 정부는 혁명이라도 격퇴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석탄 산업 왕립위원회가 1926년 3월 11일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탄광 경영자의 입장을 확실하게 반영한 것이어서 수주일 동안에 걸친 교섭은 알맹이 없이 진행된다. 그러자 전국소수파운동(1924년 8월 발족)이 3월에 전국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 참석한 100만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883명의 대의원들은 적극적인 투쟁을 결의한다. 마침내 노조전국회의가 5월 2일 찬성 360만 표(반대 5만 표)로 파업을 결의하고 다음날부터 일제히 직장에 출근하지 않음으로써 총파업에 들어간다. 전국소수파운동이 투쟁을 적극 선도하여 500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가함으로써 기차·버스·전차·신문·상점·전기·탄광·제철·화학공장 등 사회 전체가 마비된다.

그러나 파업 지도부인 총평의회는 처음부터 공포 속에서 크게 당황한다. 그들의 계급협조주의 세계가 바로 목전에서 뒤집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략은 단호한 전술을 통하여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 상황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업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총평의회의 지도자들은 소련 노동자들이 보내준 35만 파운드의 원조금을 거부할 정도로 소심하게 행동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선두에 서게 된 거대한 총파업에 압도되어 크게 위축된다. 그래서 5월 12일 볼드윈 수상을 방문하여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써 총파업은 9일 만에 중단된다. 그러나 탄광 노동자들은 11월까지 수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지도부의 배신으로 인한 총파업 중단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자본가들은 총파업을 격파함으로써 노조에 일대 타격을 가했음을 알고는 전면적인 임금 인하 등 노동 조건을 악화시켜 노조를 무력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것이 즉각 노동자들의 투지에 불을 붙일 가능성을 낳자 임금 삭감 예고를 황급히 취소한다. 그러나 총파업의 열기가 가라앉자 의회는 1927년에 악명 높은 ‘노동쟁의·노조법’을 통과시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들을 모조리 박탈한다. 이제 총파업과 동맹 파업은 엄격히 금지되고 불법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참가한 자는 벌금이나 2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노조는 ‘파업 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한다. 대중 피케팅은 금지되고 보통의 피케팅도 엄격히 제한된다. 또한 산업 손실액을 부담할 조합 기금을 의무적으로 조성하게 된다. 공공시설의 노조는 노조전국회의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고 노조가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히 제한된다.

노조 지도부는 자본가와 작당하여 노동악법이 통과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이전부터 세워놓았던 ‘몬디즘’이라는 계급 협조 계획을 내놓는다. 이것은 악명 높은 미국의 생산 증대 강령인 ‘볼티모어-오하이오 계획’의 영국 판이다. 몬디즘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생산 증대에 내몰리고 노사 협약이 침해되면서 전 산업에서 노동 조건이 악화된다. 이로 인해 노조전국회의는 다음해에 조합원 50만 명을 잃고 650만이던 조합원이 1930년 370만으로 감소한다.

코민테른은 파시즘 반대 투쟁에서 좌우편향의 오류를 범한다.

전쟁이 낳은 폐해가 파시즘을 성장시키는 온상이 된다. 민족주의에 열광하여 영웅적인 애국심으로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젊은이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산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를 동시에 표방하는 파시즘에서 자신들의 좌절을 치유할 희망을 찾는다.

더구나 자유주의 정부가 전후의 경제 침체, 정치 불안, 사회주의 확산, 민족주의의 좌절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냄으로써 시민들은 위기의 시대에 굼뜨게 진행되는 의회를 통한 민주적 절차와 토론에 대해 인내심을 잃는다. 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은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승전국임에도 전리품을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루마니아에서 특히 사회적 긴장을 초래한다.

이들 국가에서 독점 자본의 횡포, 사회주의의 책동, 자유주의 정부의 무능에 진저리치는 다양한 계층―소시민·중산층·노동자―의 사람들이 사회의 안정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파시즘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륙의 20여 개 국가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반대와 사회주의 반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파시즘은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독점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자금을 대는 대신 거대한 이윤을 챙김으로써 밀월 관계를 맺는다. 여러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의회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정상에 도달한다.

이렇게 파시즘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대중들을 획득해 가고 있을 때 좌파 정당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아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좌파 정당들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의 국제 조직으로 나뉜다. 먼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19년 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한다. 이들을 기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공산주의 정당들은 한 달 뒤인 3월에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혁명적 개혁’을 표방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21년 2월 빈에서 중도파들로 ‘2.5인터내셔널’을 결성한다. 2.5인터내셔널은 1923년 5월에 제2인터내셔널로 합류한다.

코민테른은 1차 세계대전에 찬성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배신행위를 뼈아프게 경험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계급 협조’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그리고 고립된 러시아 혁명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독일공산당으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무분별한 여러 차례의 무장 봉기는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1922년 10월에 수상에까지 오르는 사태가 벌어지자 코민테른은 바로 다음달 11월에 열린 4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코민테른은 1924년 6월 5차 대회에서 가입 정당들의 사상을 강화하고 대중 조직으로 성장시키자는 ‘볼셰비키화’를 전술로 채택한다. 이때부터 서유럽의 코민테른 정당들에서도 소련 공산당처럼 중앙위원회 부설기관인 정치부·조직부·서기국이 당의 전권을 장악하고 당내 반대파들을 함부로 내쫓는 게 관행으로 되고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한다. 특히 소련의 관심이 집중된 독일공산당에 대해서는 사실상 코민테른이 당 지도부를 임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은 소련 공산당의 권위에 눌려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창조적인 전술 개발이 어렵게 된다.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전술을 채택한다. 유럽과 중국에서 혁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가 안정기에 들어선 상황에서는 노동자계급을 개량주의로 물들이는 사회민주주의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코민테른은 1935년 7~8월 7차 대회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노동자·농민·인텔리겐치아·소상인 등 모든 계층의 세력들로 구성되는 인민 전선(식민지에서는 민족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1933년)하고 난 한참 뒤이다. 아무튼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정당들과도 협력을 모색한다. 게다가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다.

이처럼 코민테른은 상황보다 뒤늦게 전술을 바꿈으로써 각 나라 공산당들이 패배하는 데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 밑바닥에는 코민테른을 지배하는 소련공산당의 자국 중심의 사고가 깔려 있고 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권위에 눌려 자주적이지 못했던 다른 나라 공산당들의 잘못이 있다.

코민테른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각 나라의 진보 세력들의 통일을 쉽게 하기 위해 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스스로 해산한다.

한편 1928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들은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대항하는 국제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인다. 1933년에 독일공산당이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총 한방 쏘지 않은 채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1933년 7월에 ‘국제 공산주의자 동맹’이 파리에서 결성되고 첫 대회가 1936년 7월 유럽에서 열린다. 이 흐름은 1938년 9월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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