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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3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총파업의 불길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메이데이 카툰 (1906).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한 독일 노동자가 러시아 노동자와 악수하고 있다.

반동의 최후 보루였던 러시아의 차르(황제) 정부는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시행하고 자본주의 산업화를 추진한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는 국가 주도로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리하여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고 공장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전제 정치로 인해 노조조차 설립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진 1870년대부터 처음으로 파업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성장한다. 그러다가 1896년에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스부르크의 섬유 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의 노동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전개한 때를 기점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1902년에는 돈 강변의 로스토프 지방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1903년에는 남러시아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파업을 전개하고 1904년에는 오데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투쟁들은 모두 잔혹하게 진압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살해된다. 한편 러시아 군대는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곤경에 처해있던 12월에 바쿠의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빈곤의 바닥에서 고통 받던 노동자·민중들은 파업 투쟁의 승리에 고무되어 1905년 1월 ‘아버지 차르’에게 청원하기 위해 페체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행진한다. 그러나 차르 군대는 14만 명이나 되는 평화 행진 대오를 향해 무차별 발포한다. 이로 인해 1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이 아비귀환 속에서 살해당한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차르에 대한 민중들의 굳은 믿음은 여지없이 박살난다.

노동자들은 페체르스부르크 금속 노동자를 필두로 하여 전국에서 파업에 들어가고 8시간노동일과 차르 타도, 헌법 제정 의회 소집을 요구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성난 시위의 물결이 러시아 전 국토를 휩쓸고 농민들은 2천여 곳에서 귀족들의 영지를 불태우고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한다. 학생들도 도처에서 혁명에 가담한다. 폴란드 지방의 민중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킨다. 6월에는 전함 포촘킨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제 군대까지 반란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계속 전진하여 9월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전국 노조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10월부터는 페체르스부르크를 필두로 전국에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평의회)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혁명은 12월 모스크바 무장 봉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봉기는 차르 군대에게 진압되고 가혹한 테러가 뒤따른다. 그리하여 혁명은 급속히 퇴조한다. 그렇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혁명은 전 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강렬한 충격과 감동과 영감을 불어넣으면서 노동자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의 발전을 촉진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매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념하는 파업을 벌이는데 혁명을 경험한 뒤라 파업은 쉽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테러가 횡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노조를 건설하여 노조가 모든 대도시에 건설된다. 1907년까지 노조는 650개, 조합원은 2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1907년부터 스톨리핀이 반동 정치를 실행하면서 운동은 수년 동안 침체를 겪는다.

1909년부터 불황이 끝나고 호황이 시작되면서 운동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체제의 상징이던 대작가 톨스토이가 1910년에 사망하자 학생들이 차르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고 다음해 초에는 동맹 휴업까지 전개한다. 1911년부터는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1912년 4월 시베리아의 레나 금광에서 헌병대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500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새로운 파업 물결의 도화선이 된다. 레나 학살에 대한 항의 파업에만 40만 노동자가 참여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4대 두마(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4대 두마 선거일인 10월 5일, 정부가 각 공장에서 선출된 대표자 상당수의 자격을 박탈한 데 항의하여 페체르스부르크의 푸틸로프 제철 공장 노동자 1만 4천 명 전원이 파업에 들어간다. 여기에 네프스키 조선소의 6만 5천 명의 노동자가 합류하면서 페체르스부르크 전역이 총파업으로 들끓는다. 의사당과 대공장이 불과 몇㎞ 내에 있는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곧바로 정치권을 뒤흔든다. 파업이 열흘 동안 계속되자 결국 정부는 대표자를 재선출하도록 한다. 4차 두마 개원일인 11월 15일에는 흑해 선단 선원들에 대한 사형선고에 항의하여 3만 노동자들이 하루 파업을 단행한다. 12월 14일에는 6개월 전에 도입된 사회 보험에 대한 사회주의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를 지원하기 위해 6만 6천 명의 노동자들이 지지 결의를 발표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레쓰네르 공장의 노동자들은 1913년 여름에 ‘노동자 스트론긴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장장 102일 동안이나 파업을 전개한다. 이 해에도 수많은 파업들이 일어나고 파업의 열기는 다음해까지 이어진다. 1914년 3월에는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원내 보수 세력들의 군비 증강 비밀 협상―사회주의 의원단이 폭로했다―에 항의하는 파업을 단행한다. 그리고 예산 심사를 막던 좌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강제로 퇴장 당하자 노동자들은 4월 23일에 다시 항의 파업을 벌인다. 이 투쟁은 5월 1일 메이데이 파업으로 발전해 페체르스부르크에서만 25만 명이 참여한다. 7월 1일에는 바쿠 유전 파업에 대한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2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진다. 이에 13만 명의 노동자가 7월 7일 총파업을 벌여 수도를 마비시킨다. 이틀 후인 9일에는 바리케이드가 페체르스부르크 거리에 등장한다. 1905년 혁명 이후 9년 만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열흘 후에 러시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끓어오르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혁명적 열기를 일시에 잠재운다.

그러나 몇 개 산업 도시의 1000명 이상의 대기업에 총 노동 인구의 50%가 집중되어 있고, 1905~14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65%인 950만 명이 파업에 참여한 경험―특히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은 1인당 18회나 된다―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 3년 동안의 격렬했던 투쟁들에 사회주의 운동이 긴밀하게 결합한 성과로 선진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였기에 내일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 혁명은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다.

영국 노동자들이 비공식 파업으로 오랜 침묵을 깨트린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장기 불황까지 겹침에 따라 영국 노동자들의 우세했던 지위도 점차 약화된다. 특히 노조 운동의 무풍지대에 있었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개량 정책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누적되어 간다.

이런 사업장들 중에 하나였던 런던의 성냥 제조 여성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1880년대 중반부터 도래한 호황 국면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1889년에 파업에 들어간다. 노동자 대중이 노조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스스로 떨쳐 일어선 것이다. 멋지게 승리를 쟁취한 이 ‘비공인’ 파업은 수십 년 동안 굳어져온 관료적인 노조 운동에 큰 충격을 주고 침묵 속에 굴종해오던 노동자 대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투쟁을 계기로 단순 작업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파업이 크게 고무되어 ‘신’조합주의운동이 일어난다. 온건한 노조 운동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금속 기계 제조공과 철도 기관사들도 종래의 배타성을 버리고 신조합주의 운동에 연대를 표시한다. 다음해인 1890년의 메이데이에는 20만 노동자가 하이드 파크에 모여 8시간 노동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노조는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금기를 깨트린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을 거치며 조합원이 1년 만에 2.5배나 늘어나 147만 명으로 증가하고 2년이 지난 1891년에는 새로 결성된 지방 노동조합 평의회가 60개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노동당이 결성된다.

한편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농업 생산물의 가격이 산업 생산물의 가격보다 점차 높아지고 이에 따라 실질 임금이 하락하는 현상이 1900년경부터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실질 임금 하락으로 소비가 줄어들면서 1905년경부터는 호황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총파업으로까지 발전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영국 노동자들은 1911년부터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4년까지 4년 동안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특히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는 전국 파업으로 자주 경제를 마비시킨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의식이 높아져 임금과 작업 시간뿐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통제나 작업장 규율에 대한 것까지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조는 새롭게 수많은 단순작업·여성 노동자들을 가입시킨다. 그리하여 노조는 1910년 164만 명에서 1915년 268만 명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또한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산별노조가 모든 부문에서 건설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조들인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삼각동맹을 결성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일거에 중단시킨다. 삼각동맹이 예고했던 총파업은 세계대전으로 중지된다. 노동자 운동은 아직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전투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한다.

◀ 행진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이탈리아에서도 장기 불황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자 바쿠닌을 추종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반도 곳곳에서 봉기가 빈발한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산업화가 추진되고 이에 따라 조직 노동자 운동이 등장하면서 민중 봉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무정부주의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된다.

1891년 밀라노·톨리노·파텐샤 등의 지역에서 지역 노동자 단체들이 연합하여 최초로 ‘노동회의소’를 조직한다. 1893년에는 12개의 지방 노동회의소가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노동회의소연맹을 결성하는데 1902년에는 지방 노동회의소가 76개에 달하게 된다. 각 노동자 조직들은 노동조합·협동조합·사회당지구당·사회당기관지 등이 입주해 있고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술집·진료소까지 갖추고 있는 노동자 회관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노동회의소’라는 이름 아래 회의를 갖고 공동 실천을 전개한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사회 발전이 뒤쳐져 있는―특히 농업이 중심인 남부는 더 그렇다―탓에 대중의 불만이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1890년대 남부 시칠리아에서는 빈농들의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1898년 밀라노에서는 정부의 제분세 인상에 항의하는 격렬한 대중 투쟁이 일어난다. 밀라노의 투쟁으로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탈리아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00년 제노아, 1902년 피렌체, 1903년 로마에서 지역 총파업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총파업은 모두 무력으로 진압된다. 그러자 파업에 대한 여러 차례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전국 총파업이 1904년에 노동회의소연맹의 주도 아래 단행된다. 2주 동안 진행된 이 총파업은 절정에 달했을 때는 참가 인원이 100만 명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거대한 시위가 벌어져 국가 경제의 대부분이 마비된다. 일부 도시에서는 무장 항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파업의 물결은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06년까지 이어진다.

노동자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투쟁의 열기를 모아 1906년 밀라노에서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노동총동맹은 대규모 농장에 고용되어 있는 농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1907년 19만 명에서 1911년 38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호황이 활기를 잃으면서 1912년부터 다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붙기 시작하여 1914년까지 파업이 급증한다. 급기야 6월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반전 시위를 유혈 진압한 데에 항의하는 바리케이드 전투로 발전한다. 그러나 ‘혁명의 문턱’에까지 다다랐던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중단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혁명적 노조’ 운동을 전개한다.

프랑스 노동자 운동은 1871년 파리코뮌의 패배 이후 오랜 기간 침체된다. 그러나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는 혁명프랑스의 후예답게 높은 수준의 대중 투쟁을 전개한다.

드 카르빌의 광산 노동자들은 1886년에 위험 작업에 대한 안전을 노동자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광부안전대표법을 파업을 통해 사회의 쟁점으로 만든다. 또한 카르모 광산노동자들은 1892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광산 노동자의 지도자 칼비냑’을 시장에 당선시킨다. 그런데 광산 소유주인 솔라쥬 가문이 더 이상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칼비냑을 해고시켜버리자 이를 노동자 참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파업으로 대응한다. 나아가 바로 그 다음해 1893년 총선에서는 칼비냑 시장을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조레스를 ‘노동자 후보’로서 국회의원에 당선시킨다. 또한 카르모의 유리병 공장 노동자들은 1895년에 파업이 장기화되자 노조와 협동조합이 ‘자주관리’하는 집단 소유의 유리병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

1901년에 처음으로 단결권이 완전히 인정되자 노동자들은 그 다음해인 1902년에 즉시 노조 전국 조직인 노동총동맹을 건설한다.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노조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전까지 사회당과 맺어왔던 관계를 단절한다.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혁명적 생디칼리즘’(혁명적 노조주의)이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 ‘생디카’는 ‘조합’이라는 말이다―은 정당·선거·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체를 발효시키는 효모’ 역할을 하는 ‘소수 정예’를 중심으로 운동을 이끌면서 총파업이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주장한다. 직접 행동과 총파업을 강조하는 생디칼리즘은 1900년대 초반의 10여 년 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히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유일한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밖의 어떠한 전술도 거부한다. 노동총동맹은 1906년 메이데이 때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으로 벌이고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그리고 1910년에는 철도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을 전개한다. 결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이처럼 이들은 독일 노조의 간부들에 비하면 훨씬 급진적이지만 “언젠가 터뜨릴 장엄한 총파업”이라는 꿈은 하나의 순수한 ‘신앙’으로 전락해간다.

사회당은 당 사무실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고 행동으로 연대하여 노동총동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3년에는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이 파리에서 파리코뮌을 기념하는 동시에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노조가 과거의 ‘혁명’운동에 대해 기념집회를 열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나라에서 정치총파업이 일어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총파업이 벌어진다. 벨기에에서는 1891년·1902년·1913년에, 스웨덴에서는 1902년·1909년에, 네덜란드에서는 1903년에, 핀란드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905년에,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인다. 이처럼 정치총파업이 중요한 정치 투쟁의 하나로 새롭게 구사되기 시작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전진하고 있다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1888년에 최초의 노조 전국 조직인 노조총동맹을 결성하고 수많은 지역·전국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1909년에 모로코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 최초의 ‘반전’ 총파업을 벌여 1주일 동안 공공 기관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식민지 국가 가운데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인도에서는 1905~09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고양된다. 이 중에서 봄베이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 틸락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벌인 6일간의 총파업이 가장 유명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파업이 전쟁 같은 상황으로 전개된다. 칠레 노동자들은 1907년에 벌인 파업에서 수천 명이 살해당한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1919년의 총파업―‘비극적인 일주일’―에서 1500명이 살해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파업 노동자에 대한 학살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독일에서는 노조 관료들이 파업의 물결을 잠재운다.

독일의 철혈(鐵血)재상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 단속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직까지 모조리 공공연하게 파괴한다. 이 법은 세 차례나 연장되어 12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새 황제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가 권좌에서 물러난 1890년에야 이 법이 폐지된다.

그러자 노조 운동은 그 동안의 성과를 모아 전국적인 단결로 나아간다. 전국 규모의 62개 노조에서 파견된 대의원들이 1892년 대회를 열어 전국노조연맹을 결성하고 레기엔을 의장으로 선출한다. 노조는 189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서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단속법’ 시기의 탄압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노조 간부들은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공격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문율로 가지게 되어 총파업 전술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의 광부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이는 독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업의 물결로 이어진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조직 발전의 호기로 삼기보다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재정적 압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1910년에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 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면서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난다. 다시 오랜만에 전투적인 분위기가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레기엔으로 대표되는 우파 노조 지도부―사회민주당의 지도부와 겹친다―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대중들의 투쟁 열기는 다시 가라앉는다.

미국의 노동자 운동은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압살 당한다.

펜실바니아 무연탄전의 탄광 노동자들이 공황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874년 12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장기간 파업을 전개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이 한창일 때는 내전과 같은 상태가 벌어지기도 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한다. 그러자 정부는 비밀 테러 조직의 조직원이라는 날조된 구실로 10명을 교수형 시키고 14명을 장기형에 처하면서 파업을 파괴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77년에는 철도노동자들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파업을 단행한다. 오하이오 주의 흑인과 백인 미조직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시작한 파업은 전국으로 확대된다.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는 바람에 수십 명의 노동자가 살해되고 군인과 회사 폭력 단원들도 사망한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철도 시설을 대량으로 파괴한다.

숙련 노동자들의 조합은 1881년에 노동기사단―1869년에 결성된 전국조직이다―에서 탈퇴하여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시카고의 노동자 35만 명이 1886년 5월 1일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킨다. (3년 뒤인 1889년에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이 날을 기념하여 5월 1일―may day―을 세계 노동자계급이 집회를 열고 투쟁하는 날로 정한다.) 이날 맥코빅 하비스터공장에서는 6명의 파업 노동자가 학살된다. 이에 항의하여 열린 5월 4일 헤이마케트 집회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경찰과 4명의 노동자가 죽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몇 명의 무정부주의 노동자 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날조된 재판으로 4명을 교수형 시키고 2명을 장기형에 처한다. 12년 전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더 치밀한 계획 아래 또 사용한 것이다.

불황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던 1894년에 오하이오 주와 그 주변 지방의 광부 12만 5000명이 임금이 인하된 것에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간다. 1902년에는 펜실바니아 무연탄광 노동자 14만 5천 명이 파업에 들어간다. 수많은 테러가 가해지는데도 파업은 5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같은 해인 1902년, 미국철강회사가 임금 인하를 실시하고 피츠버그 변두리의 홈스테드에서 800명의 숙련공에 대하여 공장 폐쇄를 감행하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회사는 ‘핑크톤 탐정’이라고 불리는 300명의 파업 파괴 전문 부대를 동원하여 공장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자들에게 라이플 총알을 퍼붓는다. 결국 주 방위 부대 병력까지 투입하고서야 다섯 달 동안 지속된 파업이 진압된다. 그리고 1905년 시카고 팀스터즈의 파업에서는 20명이 살해되고 400명이 부상당하고 500명이 체포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지배계급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전쟁에서 적을 대하듯 한다.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이 지배계급과 환상의 ‘악당 콤비’를 이룬다. 곰퍼스 위원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동총동맹 지도부의 비행과 만행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노조 결성을 어렵게 하는 ‘오픈 숍’ 제도와 직업별 노조를 악착같이 고수하고, 갱들에게 폭력을 사주하여 노조를 지배하고, 대기업이 조직한 전국시민연맹을 통해 노조 간부를 계통적으로 매수하고, 타협을 넘어서서 아예 파업을 자본가에게 팔아먹기까지 하고, 노동자를 약탈할 뿐만 아니라 고용주까지 등쳐먹을 정도니 노동총동맹은 그야말로 배신과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인 뎁스와 헤이우드는 1905년에 전투적인 노조들을 모아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시카고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창립한다. 여기에서도 생디칼리즘이 강한 영향을 미치는데 1908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 4회 대회는 강령 전문에서 정치적인 조항을 모두 삭제하고 “산업별로 조직하는 것에 의해, 우리는 낡은 사회의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구조를 창출해 가고 있다”라는 유명한 생디칼리즘 문장을 첨가한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생디칼리즘의 직접 행동을 적극 수용하여 격렬한 파업을 수많이 일으킨다. 특히 1912년 메사추세츠 주의 로렌스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 2만 3천 명의 완강한 파업은 국제적인 주목을 끈다.

지배계급은 노·자·정 협상 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의 혁명성을 거세하려 한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여러 가지 중요한 성과를 쟁취한다. 먼저 임금이 인상되어 약간이나마 생활이 개선된다. 12~15시간이 넘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은 8~10시간으로 줄어들고 현장의 노동 통제는 완화된다. 많은 나라에서 사회 보험이 도입되고 선거권이 개선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단결이 확대된 것에 있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도 1876년에는 200만 명을 넘지 못했는데 1914년에는 1322만 명을 넘어선다. 이처럼 노동자 운동은 총파업을 전개할 정도로까지 발전한 위에서 급속히 성장해 간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거세하기 위해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화해 조정 기구를 만든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는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에서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전국 단위의 단체 교섭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혹자는 이를 ‘담합주의’(corporatism)라고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오랜 투쟁 목표 중의 하나를 달성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힘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해→조정→냉각기간→쟁의행위찬반투표→파업’이라는 복잡하고 정식화된 절차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여과하고 과감한 행동을 규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크게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노조를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가의 동반자로 만들려는 지배계급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사실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노동자들의 성과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정하는 규칙 아래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분배 구조인 노·자·정 협상 기구는 근본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현저히 봉쇄해버린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조 내에서는 관료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뿌리 깊게 형성되어 간다. 이에 따라 지도부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뚜렷하게 갈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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