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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2/27
    두가지 전략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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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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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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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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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을 다하는 자유

두가지 전략과 선택

 

노동운동에서의 두 가지 전략과 노동자 투사들의 선택

(개량주의 전략에 맞서 노동해방주의 전략을

단호하게 제창한다!)



1. 개량주의자들의 전략 제시를 환영한다!


  민주노총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노동조합주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개량주의와 타협성을 합리화하고 하나의 체계적인 정책으로까지 격상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집대성한 ꡐ노동운동 발전 전략ꡑ이 탄생했다. 아직 이것은 ꡐ초안ꡑ 정도의 공식성을 띠고 있지만 그것이 이후 완성된 형태로 노동자들 앞에 제시될 ꡐ개량주의 전략ꡑ의 핵심을 모두 담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완성된 전략이란 오직 이 초안에 더 현란하게 ꡐ노동자적ꡑ인 옷을 입히고, 투사들의 비판을 교묘하게 회피하기 위한 모호한 추상적 공문구를 덧붙이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ꡐ노동운동 발전 전략ꡑ은 전혀 새롭지 않다. 우선 그것은 이제껏 한국 노동운동을 질식시켜 왔고, 노동자계급의 역동적 힘을 매장시켜왔으며, 노동대중의 생존권을 자본가 승냥이들에게 송두리째 갖다 바쳐왔던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배신과 굴종, 타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남아공 코사투를 지배하는 개량주의자들이 전투적인 남아공 노동자들을 세뇌하고 타협과 굴종의 길로 이끌기 위해 사용했던 ꡐ셉템버 위원회 보고서ꡑ를 한국에 적용한 ꡒ모방품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온통 개량주의적 입장으로 채워진 셉템버 위원회 보고서와 ꡐ노동운동 발전 전략ꡑ이 차별성이 있다면, 그것은 여기에 담겨 있는 정신이 아니라 그 정신이 고려해야만 하는 객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양자 모두를 관통하는 정신은 분명하다. 그것은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기는 타협과 굴종, 배신, 개량주의의 정신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ꡐ노동운동 발전 전략ꡑ은 ꡒ노동해방 투사들ꡓ에게는 새로운 것이며, 하나의 소중한 기회다. 그것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노동운동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펼쳐지는 자본과의 전투를 통해 ꡐ발전ꡑ한다. 이 세 가지 전장에서의 전투의 결과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전체로서 노동운동에 발전과 후퇴를 명한다. 가령 구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를 가장한 변종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일어난 정치그룹의 전향과 변절의 물결은 선진 노동자들로부터 ꡐ이데올로기ꡑ를 앗아갔다. 낡은 민중주의는 파산했지만 노동해방주의라는 새로운 대안이 선진 투사들에게 제시되지 못하는 불행한 상황에서 형편없는 노골적 개량주의가 파고들었다. 결국 ꡒ노동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ꡓ 전투에서 선진 노동자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과 구 소련의 붕괴와 함께 현실에서 명백히 파산한 낡은 민중주의 이데올로기(전략)로는 서구 사민주의 전략을 계승하는 이 노골적 개량주의 이데올로기와 결코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계급적 목표와 운동의 방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표류하게 된 선진 노동자들의 무기력성을 거침없이 파고들면서 개량주의 세력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 노동운동 내에서 펼쳐진 ꡐ자본가계급, 소부르주아계급의 분견대들과 전투적 노동자 투사들 사이의 투쟁ꡑ에서 힘의 저울추가 명백히 개량주의자들 편으로 기울어진 것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전장에서 노동자 투사들이 패배함으로써 출발하지 않았다. 노동자 투사들의 패배는 ꡐ이데올로기 전장ꡑ에서의 패배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정치투쟁 전장에서의 패배로 나아가고, 최종적으로 ꡐ경제투쟁 전장ꡑ에서의 패배로 귀착되었을 때 한국 개량주의 세력은 압도적인 승리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목표와 방향, 다시 말해 노동운동의 전략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는 노동운동의 ꡐ미래ꡑ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이 이데올로기는 자본과 정부에 맞선 직접적인 투쟁인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ꡐ정신ꡑ을 규정하며, 그것이 나아가는 ꡐ방향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노동해방 투사들과 개량주의자들 사이의 전투가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먼저 전면화되고, 여기에서 노동해방 투사들이 명백히 패배한 이후에 ꡐ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전장ꡑ에서 패배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전진해야 할 목적지와 방향을 잃어버린 투사들에게 매번의 일상적 전투에서 강하고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기를 기대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기대일 뿐 현실화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물론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전장에서의 패배는 이데올로기 전장에서의 후퇴를 가속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세 가지 전장은 따로 전투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참호와 도로, 철도, 보급 창고, 진지를 통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전투가 펼쳐지는 총체적인 전장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 전장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다른 전장에서의 승리와 패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오직 이 세 전장 모두에서 나란히 협동하고 무기를 예리하게 다듬어 내지 않는다면 진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의 노동자 투사들은 경제투쟁에만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왔을 뿐 정치투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에 제대로 착수하지 못했다. 그나마 정치투쟁과 관련해서는 공권력과의 부단한 충돌로부터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어렴풋하게 자각해오기는 했지만, 이데올로기 투쟁과 관련해서는 침묵과 무관심이 팽배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비극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국제노동운동에서는 이미 무척 낡은 것을 새롭게 광을 내고 예리하게 벼린 무기로 포장해 맹렬히 공격해 들어오지만 이에 맞서 대적할 수 있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무기를 전혀 갖지 못한 노동자 투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 수단이란 ꡐ이데올로기 전장을 포기하고 경제투쟁 전장으로 퇴각하는 것ꡑ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맨 몸으로 개량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검과 대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장기적인 대응책이 될 수는 없었다.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승리한 개량주의자들은 이 승리를 그것에만 제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투쟁 전장으로 철수해, 거기서 진지를 구축하고 포복하고 있는 노동자 투사들을 제압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확보한 진지들을 동원했다. 현장 경제투쟁에서 맹렬한 반격을 당할 때마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소리쳤다. ꡒ당신들은 노동해방을 하자는 것이냐? 그러나 사회주의는 명백히 파산했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노동자 해방의 대안이 없는 한, 당분간 우리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위배하는 지나치게 과격한 요구는 자제해야 하며,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제한된 수준으로만 보호해야만 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회사와 자본주의 산업을 정상화시키고, 나라를 살리는 것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에서 우리의 경제적 요구를 제시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 점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당신들 투사들은 무정부적이며, 대안 없이 단지 소리만 치고 있는 무책임한 분자들일 뿐이다. 전략, 대안을 제기할 수 없다면 잠자코 있으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불충분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다. 전투적인 현장 경제투쟁은 노동해방적 대안이 있을 경우에만 유효하다. 그것을 제시할 수 없다면 우리의 소심하고도 타협적인 안을 받아들여라!ꡓ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나아갔다. 그들 개량주의 노조관료들은 아예 노동조합으로부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힘을 앗아가려 했다. ꡒ노동조합은 경제투쟁, 정당은 정치투쟁ꡓ이라는 이분법을 들이밀면서 그들은 ꡒ변혁적 정치투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은 정당이 하는 것이며 노동조합은 잠자코 경제투쟁만 하면 된다ꡓ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치투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거부하고 이것과 분리된 경제투쟁에만 자신을 제한하는 노동조합, 그것은 개량주의 노동조합일 뿐만 아니라 경제투쟁 영역에서도 타협과 굴종으로 일관하는 무기력한 노동조합일 수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자본가 정부에 맞서 정치적으로 투쟁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은 모든 경제 파업에서 무참히 학살당하고 박살나는 그런 허약한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으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노동자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대치시키지 못하는 노동조합은 자신이 벌이는 투쟁의 정당성을 당당히 제출할 수 없으며, 그리고 이 투쟁을 통해 전진해야 할 방향성을 원대하게 제시하지도 못하는 편협하고도 소심한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무혈입성하여 전리품을 쟁취한 개량주의 세력이 그 전리품을 이런 식으로 경제투쟁 전장에서도 동원하여 조여오는 한, 경제투쟁 전장에서도 노동자 투사들은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전개해야만 했다. 결국 여기서도 하나 하나씩 투쟁 진지들이 개량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의 최종 결과는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 개량주의자들의 주도권 하에 확고하게 장악된 것이었다. 역으로 이처럼 경제투쟁 영역에서도 개량주의자들의 주도권을 허용하게 되자 한국 노동운동은 완전히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하게 되었고, 운동은 온통 개량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경제투쟁 영역에만 여전히 웅크리고 있으려 한다면, 노동자 투사들은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완전하게 패배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 이데올로기 전장에서의 완전한 패배, 그것도 공공연한 열린 전투에서의 패배는 재차 정치, 경제투쟁 전장에 영향을 미쳐 노동자 투사들에게 더욱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펼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껏 이어져 온 역사적 패배를 단호하게 거부하고자 한다면 개량주의자들이 던진 ꡐ결투의 장갑ꡑ을 받아야 한다. ꡐ공공연한 이데올로기 전투!ꡑ 바로 그것이 전투적 투사들 앞에 던져진 당면의 절박한 과업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개량주의자들이 공공연한 방식으로 결투의 장갑을 던지고, 공개적인 대중적 무대에서 한 판 겨룰 것을 신청한 이상 이 전투에서 물러서서 ꡐ이데올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장 경제투쟁이 중요하다ꡑ고 응답하는 것은 ꡐ전투를 회피하고 항복하는 것ꡑ에 다름 아니라는 점이 대중적으로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회복하기 힘든 거대한 상처를 투사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ꡒ단호한 응답을 통해 개량주의자들을 공개적인 무대에서 폭로하고 우리의 투쟁깃발을 당당하게 휘날리는 것!ꡓ 바로 그것이 진지한 투사들에게 제기되는 절박한 새로운 과업이다.


  둘째, ꡐ민주노총 노동운동 발전 전략ꡑ은 ꡒ우리 노동운동이 전진해야 할 목표와 방향ꡓ을 세워내는 절박한 과업과 관련, 또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운동,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수단들을 분명히 하지 못하는 운동은 생명력이 없다. 기껏해야 기존 운동(자본주의 체제의 운동)에 반대할 수 있을 뿐 새로운 사회를 우뚝 세워내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운동이 아니라면 승리에 이르기까지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 원대한 운동으로 발돋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현존 사회의 모순과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 명확한 대안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만이 이 비판에 강한 힘을 실어주며, 다른 무엇보다도 이 비판의 주체에게 확신과 당당함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낡은 것을 타도하는 작업은 오직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전해지고 결연해지며, 낡은 것을 비판하는 작업은 오직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비로소 철저해진다. 역으로 낡고 부당한 것에 대한 규탄과 비판, 저항은 이러한 건설적이고 창조적이며 대안적인 활동을 부단히 성장시키고 지배적인 힘으로 끌어올린다는 견지에서만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지금은 반동화되었지만 부르주아 계급을 비롯한 모든 계급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했으며,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낡은 계급을 타도하고 주인으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그 점에 비추어보자면 한국 노동운동의 가장 결정적 취약점은 낡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한 저항과 분노, 비판의식을 노동계급의 위대한 건설적 전망, 대안과 긴밀하게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한계에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자본의 공격에 본질적으로 항상 수세적으로 대항해야 했으며, 개량주의자들의 배신을 근본적으로 타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크고 작은 저항과 투쟁, 비판을 우리가 주인되는 노동해방을 향한 출격으로 일관되게 성장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나아가서 이런 취약성의 결과, 우리는 저항과 비판에서도 불철저할 수밖에 없었으며, 항상 좁은 범위에서만 자본주의 체제와 맞설 수 있을 뿐이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퇴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개량주의자들의 ꡐ노동운동 매장 전략ꡑ은 우리 노동운동이 반드시 응답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노동운동이 반드시 제시해야 할 목표와 수단들에 대해서 ꡐ개량주의적으로 일그러진 결론ꡑ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결론에 노동해방주의의 결론을 대치시키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우리 노동운동의 ꡒ계급적이고 노동해방적인 전략ꡓ을 곧추 세워내는 과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개량주의 전략에 대한 단순한 비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의 진실한 전략을 세워낸다는 관점에서 ꡐ노동운동 매장 전략ꡑ에 대처하는 것은 그 가치가 빛난다.


  셋째, ꡐ노동운동 발전 전략ꡑ 비판은 도탄에 빠진 현장 노동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당면 투쟁에서도 소중한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검토해온 한국 노동운동의 뼈저린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서로 손을 맞잡고 나란히 전진할 수밖에 없는, ꡒ경제투쟁, 정치투쟁, 이데올로기 투쟁ꡓ 영역 모두에서 투사들의 진지를 구축할 필요성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펼쳐지는 대중적 경제투쟁과 긴밀히 연결되며, 이 투쟁의 성장을 체계적으로 돕고 방향과 정신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것은 강단 교수들의 허약하고 아카데믹한 정신을 표현하거나 아니면 노조, 연맹, 민주노총의 사무실의 편안한 소파에 앉아 서류를 뒤척이면서 정책대안을 고민하는 관료들의 실무적인 정신을 표현할 뿐 현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한 복판에서 자본에 맞선 맹렬한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노동해방 지도자들의 계급적 정신을 표현할 수 없다.

  진정 노동자계급의 투쟁 방향을 지시하고, 이끄는 전투교본으로서 전략은 이들처럼 현장 투사들과 분리되어 있는 관료들, 강단 교수들로부터는 절대 탄생할 수 없다. 오직 현장에서 맹렬히 분투하는 투사들이 현장 한 복판에서 절실하게 떠오르는 과제들과 씨름하는 가운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략을 모색할 때만이 그 이름에 부합하는 노동운동 전략은 탄생할 수 있다. 현장에서 노동대중과 함께 전선을 밀어나가는 투사들만이 이 전략을 행동으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관료들과 교수들의 머리와 서류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간절한 열망과 진지한 모색으로부터 떠오르며, 바로 그렇기에 현장의 경제투쟁을 지도하는 전투 교본이 될 수 있으며 정치투쟁과도 긴밀하게 결합할 수 있다. 그런 전략만이 절충과 모호함, 시시콜콜함으로 범벅된 쓰레기와 같은 전략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조항이 현장에서 생생한 투쟁으로 현실화되는 엄격한 행동지침으로서의 전략이 될 수 있다.


  투사들은 대기업 임단협 안을 꽉 채우는 그 수백 가지 조항의 대부분이 사문화되어 단지 서류 상의 조항으로만 남게 되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런 서류상의 조항이 결연코 아니다. 단 서너 가지의 투박한 조항일지라도 그것이 현장에서 떠오르는 절박한 요구를 정확히 담고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한 무더기의 서류가 아니다. 구 전노협 시절의 요구안이 바로 그랬다. 요구안은 분임토론을 통해 현장 대중들 한 복판에서 떠올랐고, 그것은 헌신적인 행동으로 뒷받침되었다. 투사들에게 그것은 목숨처럼 소중한 지침이었고, ꡐ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ꡑ는 결연함으로 집행되었다. 그렇다! 이런 단사 요구안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의의를 갖는 노동자계급의 전략은 ꡐ노동해방을 위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ꡑ를 알고 싶어하고, 그것을 목숨을 다바쳐 행동으로 승인할 수 있으며, 현장 한 복판에서 노동대중과 함께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견결한 투사들에 의해 논의될 때만이 진정 전략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현장 투사들에게는 현장 투쟁을 선도하고 그것에 방향타를 부여하며, 노동자 해방을 향해 진군할 수 있는 ꡒ정확한 나침반ꡓ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싹둑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검은 이제 단순한 현장 경제투쟁만으로는 벼려낼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대중화되어 현장에서 일정하게 뿌리를 내린 한국 노동운동은 이 뿌리에 노동자계급의 해방전략이라는 자양분을 공급해야 성장할 수 있을 만한 발전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양분이 제 때 공급되지 못한 결과 뿌리는 말라 비틀어지고 있으며, 썩어버릴 위험성과 맞닥뜨리고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ꡒ노동운동 발전 전략ꡓ을 검토해야 하는 가장 본질적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지금 노동자계급의 해방전략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ꡐ노동운동 매장 전략ꡑ과 같은 장난감이 제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성장 그 자체가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ꡐ우리 노동계급의 해방전략ꡑ을 세워내도록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우리가 ꡐ노동운동 매장 전략ꡑ을 새롭고도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을 명확히 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모색하고 세워내야 할 전략은 오직 현장에 뿌리박은 진실한 투사들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당연히 이 전략은 현장의 투쟁요구,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가운데 확립되는 것이며, 현장투쟁의 사활적 요구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논의의 주체는 현장 투사들이어야 하며, 논의의 결과물은 현장으로 응당 돌려져야 한다. 현장에서 분투하는 투사들이 주저없이 견해를 제시하고, 진지한 토론에 착수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선결 조건이다. 바로 거기에 노동자계급의 해방 전략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진실한 투사들, 자본주의를 제압할 수 있는 미래의 거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2. 개량주의 전략과 노동해방주의 전략, 노동운동의 두 가지 전략 노선


  이 글은 개량주의자들의 ꡐ전략ꡑ을 검토하면서 우리의 전략을 대치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비록 우리의 전략적 입장을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데는 부적합할 수는 있지만, 개량주의 전략과 노동해방주의 전략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데는 적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 글은 2000년 9월 30일에 '민주노총ꡐ에 공식 제출된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 초안?(이하 ꡐ초안ꡑ)의 체계를 따라 서술되게 되었다. 이 점을 참고 바란다.

  ꡐ초안ꡑ은 ꡒ발전전략위원회(이하 ꡐ위원회ꡑ)의 구성, 경과ꡓ에 대한 보고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우선 한 눈에 드러나는 사실은 이 위원회가 현장 투사들의 절박한 투쟁요구를 받아안지 않았으며, 그들과 긴밀히 결합하지도 못했다는 기본적인 사실이다. 올해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랜드, 롯데, 전사노와 같은 투쟁사업장들,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비정규직, 중소기업 투쟁 사업장들에서 분투하는 현장 투사들은 단 한 명도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들의 절실한 목소리를 수렴하기 위한 간담회나 토론회는 단 한 차례도 조직하지 않았다. 이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 위원회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위원회는 ꡐ조직발전전략ꡑ이라는 항목에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고, 특히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사업장을 조직하는 작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한다면서 이러저러한 대안들과 정책들을 열거한다.

  그러나 진정 현장에서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업체 운동을 이끌어가고 있고, 조직을 사수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보기 좋은 서류상의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ꡐ자본과 정부에 맞선 현장투쟁의 한 복판ꡑ에서 절박하게 떠오르는 요구들로서, ꡐ어떻게 적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ꡑ라는 단 하나의 핵심으로 집약된다. 이런 핵심을 포착하고 전략, 전술로 구체화하는 작업은 당연히 이 투사들과의 긴밀한 호흡,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투쟁 현장 한 복판에서 그들과 함께 투쟁하고 책임지는 실천활동을 요구한다. 최소한 이런 실천활동에 종사하는 투사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실천적 주장을 정책으로 집약하기 위한 진지한 대화를 요청한다. 불행하게도 위원회는 이런 가장 기초적인 활동에 대해 전혀 보고하고 있지 않은 채 단지 상급 단체와 대기업 노조의 관료들과 교수들이 구성하는 위원회 분과들을 열거하고 그들이 사무실에서 벌이는 세미나의 일정에 대해 나열하는 것으로 보고를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무언가 현장 투쟁에 도움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ꡐ썩은 나무에서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ꡑ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왕 쓰레기 매립장에 들어선 이상 우리는 구토할 각오를 하고 쓰레기 더미를 파헤쳐야 한다.


  제1장 ꡒ민주노총의 현재와 과제ꡓ의 3절 ꡐ민주노조운동의 투쟁과 성과ꡑ에서 ꡐ초안ꡑ은 그 악명높은 ꡐ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ꡑ과 동일한 연장선에서 몰계급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ꡒ사회, 경제민주화를 통한 사회전체의 보편 이익 실현 노력ꡓ(p.11)

  불행하게도 이 주장은 민주노총의 ꡐ성과ꡑ가 아니라 이제껏 민주노총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아온 ꡐ한계와 오류ꡑ를 반영할 뿐이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 화해할 수 없도록 대립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ꡐ사회전체의 보편 이익ꡑ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개량주의자들의 머리 속에서나 있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이익을 얻는 자본가들과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해야만 자신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ꡐ공동의 이익ꡑ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ꡐ이런 공동의 이익ꡑ을 추구하려 한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노사협조주의의 늪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익이건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거둔 이익은 모두 자본가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맹렬한 투쟁의 결과였지 ꡐ자본가들, 노동자들, 중간계급들 모두의 보편 이익ꡑ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확보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ꡒ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ꡓ 류의 ꡐ사회전체의 보편 이익 실현 노력ꡑ이란 신기루에 현혹된 결과, 우리는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근로자파견제와 같은 ꡐ노동자 죽이기ꡑ를 용납했고 절박한 노동자의 이익을 희생해야 했다. 만일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진정 획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자본가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진실인 것이 아니다.


  사회전체의 보편 이익이 진정 실현될 수 있는 무계급 사회, 즉 착취가 없는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그들의 이익을 송두리째 제거해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착취를 종식시키는 노동자 해방은 오직 자본가 착취자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자본)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소유로 전화시키는 사회화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데, 그것은 이제껏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거대한 부의 성을 건설해 왔고 그로부터 온갖 이익을 향유하던 자본가들에게는 ꡐ자신들의 이익을 모두 제거하는 것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 번 양보하여 ꡐ계급 사회를 종식시켜 무계급 사회로 이행한다는 측면ꡑ에서 ꡐ사회전체의 보편 이익 실현ꡑ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ꡒ사회, 경제 민주화ꡓ 따위로 가능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착취자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노동자 정부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장악하는 노동해방적 행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즉 사회전체의 보편 이해는 오직 노동자 해방을 통해 계급 제도를 종식시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추구될 수 없는 것이며(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을 추구하려고 할 때 그것은 명백하게 ꡐ노사협조주의ꡑ로 귀착된다), 따라서 그 시기 이전에는 우리는 사회전체의 보편 이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ꡒ압도적 다수의 노동자계급의 이익이냐 아니면 한줌 자본가 착취자들의 이익이냐ꡓ만을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우리의 결론은 ꡒ자본가계급에 맞선 맹렬한 계급투쟁ꡓ이다.


1. 사회개혁투쟁 ?? 개량주의 캠페인


  이런 비판이 단지 말꼬리 붙잡기가 아니라는 점은 ꡐ초안ꡑ의 주장의 구체적 항목으로 들어가면 더욱 분명해진다. ꡐ사회개혁투쟁ꡑ이라는 악명높은 개량주의 캠페인을 기간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성과의 한 항목으로 제시하면서 ꡐ초안ꡑ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개혁투쟁; 사회개혁투쟁과 관련하여 크게 주목을 받고 실질적으로 변화가 진전된 부분은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제도 개선이라 할 수 있음. 사회개혁투쟁의 사회복지제도 개선 요구들은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와 보험적용 확대, 연금기금의 민주적 관리 운용, 고용보험 및 산재보험 적용확대, 사회복지예산의 증액 등으로서 일정 부분 관철되었으며, 이는 일정 정도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음. 한편 사회개혁투쟁의 경제민주화 요구는 재벌그룹 소유분산,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전문경영인 제도 도입, 상호지급보증제도 및 상호 출자제도 폐지, 연결재무재표 의무화, 재벌총수 퇴진과 재벌2세 세습 금지 등 재벌체제 개혁과 관련된 요구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이전부터 시민단체들과 함께 제기해온 정경유착과 재벌체제 재생산의 핵심 기제인 전경련의 해체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음. (p.11)


  우선 다음을 분명히 하자. 자본주의 체제의 ꡐ개혁ꡑ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온 몸에 생산자둘의 피를 묻히고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착취하지 않았던 적은 결코 없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고 성장해 왔으며, 노동자들을 짓밟고 가두고 죽이면서 생존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ꡐ개혁ꡑ의 대상이 아니라 ꡐ폐지ꡑ의 대상이다.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는 노동자 생산 공동체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착취적이고 억압적이며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조금이라도 ꡐ개혁ꡑ할 수 있다고 믿으며, 모종의 ꡐ개혁 방침ꡑ을 제시하는 ꡐ초안ꡑ은 자본주의 체제를 수선하여 말끔하게 새단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개량주의를 노골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이는 물을 것이다. ꡒ자본주의 체제 중에서 일정 착취가 제한된 사회도 있지 않은가? 가령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부처럼ꡓ

  그러나 노동자의 전략은 대단히 분명해야 하며, 정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혼란을 조장하며, 노동자가 전진해야 할 방향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 점에서 어떤 의도에서 제출되건 사회개혁투쟁 주장은 전진하는 노동자 투사들의 발목을 붙잡고, 환상을 조장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단 한번도 개혁된 적이 없다. 자본주의의 본성은 항상 반노동자적이었고, 이런 본성은 경쟁과 축적의 증대에 따라 더욱 철저해졌을 따름이다. 무언가 노동자들에게 조금 나은 상황이 조성되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개혁된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이 마음대로 발휘되지 못하도록 ꡒ노동자들이 투쟁한 결과ꡓ였고, 특히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노동자 해방 투쟁이 성장하는 것에 위협받은 자본가계급이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에게 양보한 결과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동자 투쟁의 성과는 있을 수 있지만, 사회개혁투쟁의 성과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다. 한국 노동자들이 무언가 성과를 얻어냈다면 그것은 사회개혁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 투쟁의 결과였을 뿐이다. ꡐ초안ꡑ의 주장이 완벽한 개량주의라는 점은 사회개혁투쟁의 구체적 항목들로 들어가면 의심할 여지없이 더욱 분명해진다.

  ꡐ경제민주화ꡑ(여기서는 그들의 용어법에 대해 문제삼지 않도록 하자)에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진전되었다고? 물론 아주 충분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단 그것은 성과가 아니라 ꡐ후퇴ꡑ로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70% 대 부유한 30%의 사회에서 90 대 10의 사회로 현격한 후퇴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공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것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창조한 부를 확대되는 비율로 더욱 강하게 착취해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피한 역사적 결과다. 그런데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런 ꡐ부익부 빈익빈ꡑ 현상을 우리의 위원회 성원들은 애써 무시하면서 ꡐ경제민주화ꡑ에서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이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계속 논의를 진전시켜 보자.

  ꡐ사회복지제도 개선ꡑ에서의 실질적인 진전? 이것 또한 완전한 허깨비다. 의료보험의 경우 적용범위가 미미하나마 확대된 것에 비하면 노동자들이 지불해야 하는 의료비용은 훨씬 더 증대했다. 의료보험은 통합 일원화되었지만, 그것의 성과는 오직 자본가 정부만이 독식하면서 전사노 노동자들에게 고용위기과 강화된 노동강도를 강요하고 있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경우 그것은 물론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를 떠돌고, 700만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半실업자가 되어 항상적인 고용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대가로 확대된 것이다.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해 위험하고 유해한 노동을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이,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채 수행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산재가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발생한 결과 산재 보험은 확대되었다. 이런 것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ꡒ사회복지제도의 개선ꡓ인가? 당신들은 이것들을 가지고 우리 노동자들에게 ꡐ사회개혁투쟁의 빛나는 성과ꡑ를 인정하라고 떠벌이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성과인가? 아주 훌륭한 성과!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성과가 아니라 지옥같이 열악한 처지를 뜻할 뿐이다.

  사회개혁투쟁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지는 영역은 이른바 경제민주화 요구와 관련해서다. 여기서는 조합주의자들, 민중주의자들의 ꡐ재벌해체론ꡑ과 ꡐ전문경영인 도입론ꡑ이 찬란하게 등장한다. ꡐ재벌그룹의 소유분산ꡑ, ꡐ상호지급보증제도 및 상호 출자제도 폐지ꡑ, ꡐ연결재무제표 의무화ꡑ, ꡐ재벌 총수 퇴진과 재벌2세 세습 금지ꡑ 등과 같은 착취자들의 소유 형태를 변형시킨 것을 그들은 ꡐ경제민주화ꡑ로 간주한다. 이것은 경실련과 같은 자본가 단체의 입장이지 노동자 조직의 입장이 아니다. 노동자를 갈취하는 착취자들이 10명에서 20명으로 증대하는 것이 ꡐ경제민주화ꡑ인가? 물론 그것은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민주화일 수 있다. 거대 기업 경영주가 한 명에서 3명으로 늘어나면 그들 착취자들에게는 그것은 ꡐ소유가 민주화ꡑ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으며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자유롭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경실련과 같은 자본가 단체들이 떠드는 ꡐ경제민주화의 진전ꡑ과 같은 허깨비 주장과는 달리 이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으며 ꡐ경제민주화ꡑ는 후퇴하고 있음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ꡐ발전전략위원회ꡑ의 정신은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정신이 아니라 서로 기업의 오너가 되려 발버둥치는 자본가들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노동자 조직의 정신이 아니라 경실련과 같은 자본가 단체(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려는 경실련이 자본가 단체가 아니라면 무엇인가!)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너무나 쉽게 알게 된다.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강화된 착취를 의미할 뿐이며, 오직 자본가들 사이에서나 관심사가 되는 이러저러한 사안들에 목을 매달고 그것을 ꡐ경제민주화ꡑ의 실질적 성과로 받아들이는 이 따위 작자들이 감히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ꡐ노동운동 발전 전략ꡑ을 제시하고 있다니 얼마나 비통한 현실인가?

  악취는 계속 이어진다. ꡐ초안ꡑ은 착취의 직접적 담당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개입할 것을 주문한다. ꡐ소유와 경영의 분리, 전문경영인 제도ꡑ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노동자들은 자신을 쥐어짤 노예 경영인을 직접적인 소유자 대신에 전문적 경영인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받는다. 그런데 ꡐ전문경영인ꡑ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소유자를 대신해서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ꡐ소유과 경영의 분리ꡑ란 소유자들은 주식배당금으로 휴양지와 호텔을 떠돌면서 놀고먹는 반면 전문 경영인은 이들을 대행해서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하는 역할 분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미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에서는 보편화된 것으로 자본가들로서는 이것을 꺼릴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노동자들에 대한 강화된 착취라는 점에서 보자면 전문경영인 제도 도입은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체로서의 자본가들에게는, 그들의 공동의 이익은 ꡐ노동자들을 얼마나 많이 쥐어짜느냐ꡑ에 의해서만 확대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분할되건 파이는 모두 노동자들의 ꡐ공짜 노동ꡑ으로부터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전문적인 착취자를 이용하는 것은 이 파이의 크기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이런 ꡐ소유와 경영의 분리ꡑ, ꡐ전문 경영인 제도ꡑ가 보편화되는 것이다. 만일 기업 오너가 꺼린다면 그것은 대주주가 직접 경영을 담당하면서 빼돌렸던 특별이윤이 사라지고, 그것을 다른 주주들과 경영진이 함께 나누어 먹게 되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런데 자신을 쥐어짜서 확보한 이윤을 착취자들이 서로 어떻게 나누어 먹는가의 문제에 노동자들이 개입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따라서 ꡐ초안ꡑ의 주장은 결국 다음으로 요약된다. ꡒ노동자 조직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더 강하게 착취당하기 위해 투쟁하라는 호소! 착취자들 사이의 소유권 문제에 개입해서 가능하면 오너 착취자들의 수를 늘리라는 호소! 바로 이것이 사회개혁투쟁과 경제민주화의 객관적 실체다!ꡓ

 



2. 사회적 합의주의


  초안의 개량주의 입장은 총노동과 총자본, 자본가 정부 사이의 대타협에 의지하면서 노동과 자본, 자본가 권력 사이의 ꡐ공동의 이해ꡑ를 추구하는 ꡐ사회적 협조주의ꡑ로 나아간다. 이른바 ꡐ사회적 합의주의ꡑ로 일컬어지는 이런 협조주의는 발전전략위원회의 내심에 자리잡은 포괄적인 계획인데, 이 계획이 의미하는 결론은 이미 그 유명한 노사정 위원회에서 명백하게 입증된 바 있다. 그것은 자본에게서 약간의 사소한 떡고물을 얻어낸 대가로 노동자의 생명 같은 권리를 헌납하는 것이며, 노동대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대가로 민주노총과 연맹의 상층 관료들의 합법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생생한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소중한 권리를 쟁취했던 것은 노사정 위원회와 같은 ꡐ협상과 타협ꡑ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협상 테이블 ꡐ바깥ꡑ에서 펼쳐지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졌음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이런 분명한 경험들로부터 노동자들은 ꡐ노동자 죽이는 기구ꡑ로 판명된 노사정 위원회로부터 철수하도록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압박했으며, 그 결과 이들은 내심과는 달리 일단 이 위원회로부터 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대중들과 투사들을 호도할 명분만 생기면 이 노사정 위원회로 복귀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으며, 여러 방식으로 복귀 명분을 쌓고 있다.

  이들에게는 노사정 위원회에 불참하는 이유는 그것이 참된 ꡐ타협과 조정ꡑ의 기관이 아니라 ꡐ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배제ꡑ하는 기관이라는 한계 때문이기에, 언제든지 타협의 가능성이 열리면 복귀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은 ꡐ사회적 합의주의ꡑ와 같은 타협주의, 협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ꡐ사회적 합의주의ꡑ에 입각해 제대로 타협과 조정이 이뤄지는 기구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 투사들과 노동해방주의자들이 노사정 위원회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타협과 조정의 기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타협과 조정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협조주의를 불어넣고, 투쟁 대신에 자본주의 체제와의 협상에 매달리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노동해방을 향해 진군하고자 하는 노동운동에 해방이 아닌 개량과 타협을 설파하고, 자본과 정부에 맞선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투쟁이 아닌 교섭과 협상을 제시해 점차 노동운동을 자본과 정부의 시혜에 의지하는 볼품없는 운동으로 찌그러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해방을 페스트보다 싫어하고, 투쟁을 겁내는 개량주의자들의 정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대표하는 발전전략위원회는 노동해방적 전략이 없기에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체제 내의 개량을 최고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이른바 사회적 합의주의로 명명된 타협 전략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과 정부와 공생할 수 있는 길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란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인 반면 자본가들은 노예주인 그런 극악한 착취제도이며, 따라서 이 체제 내에서 이뤄지는 타협과 조정이란 오직 임금노예제도를 용인한 가운데 임금노예의 발에 칭칭감긴 사슬의 조임을 늦추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이 전략은 노동자들을 해방으로 인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이 집착하는 개량적 성과조차 선사할 수 없다. 그것은 ꡐ진정 유의미한 개량은 노동해방적 투쟁의 부산물ꡑ일 뿐이며, 따라서 노동해방 투쟁을 멈추고 타협과 조정에 의지하는 노동운동은 심지어 개량적 성과물을 쟁취하는 데서도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적 합의기구가 형성되고, 거기서 무언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개량들이 제시되었다면, 그것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해방 투쟁에 위험을 느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결박하고 투쟁의 기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단기적으로 양보한 결과에 불과하다. 유럽과 남아공을 비롯해, 사회적 합의주의자들에게 칭송받고 모델로 간주되는 합의기구들은 모두 이처럼 노동자들의 해방 투쟁을 제압하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의도를 표현했으며, 마찬가지로 노동해방적 노동운동을 두려워하는 개량주의자들의 책동을 반영했다. 사회적 합의기구, 그것은 노동해방적 노동운동에 대항하는 ꡒ자본가계급과 개량주의자들의 신성동맹ꡓ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의 사회적 조합주의자들의 비극은 이들은 이런 해방적 투쟁 없이도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사회적 합의기구라는 개량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데 있다. 이런 믿음은 노사정 위원회가 개량을 하사하기는커녕 자본가들의 요구를 일방 집행하는 기구라는 점이 명백해지자 산산조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ꡐ그것은 사이비 사회적 합의기구ꡑ라고 소리치면서 ꡐ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기구ꡑ 건설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사회적 합의기구란 실현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실현되는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변혁적 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책동을 의미할 뿐이기에 어떤 경우건 노동운동이 받아들일 수 없는 반동 기구일 뿐이다. 하지만 발전전략위원회는 여전히 사회적 합의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단지 개량주의자들이 그것을 작동시키기에는 노동해방적 노동운동이 아직 충분하게 발전하지 못했기에 그것을 ꡐ당장의 대안ꡑ으로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사회적 합의기구가 도래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축하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다. ꡐ초안ꡑ은 다음처럼 주장한다.


  2)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조합이 산별노조 체계로 전환하고 사용자들과 사회적 수준에서 교섭하고 투쟁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 이 기초 위에서 필요하다면 경제사회협약 등과 같은 노사, 혹은 노사정 3자 합의 기구를 통한 전국적 계급협약 정책을 추진하는 것.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서 오랫동안 정형화되어 있었던 노사관계로의 전환. 한국에 있어서 정권의 종속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자본의 노동배제적 합리화정책 등으로 판단해볼 때 사회적 합의구도는 중단기적으로는 실현 불가. … 사회적 합의주의는 현실적으로 중단기적으로 실현불가능하며 나머지는 모두 민주노총의 대응기조와 방향에 따라서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될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체제임. (p.19)


  초안의 이 주장은 위원회의 실체를 수줍은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노사정 위원회의 실패로부터 아주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타협과 조정(이것의 핵심은 노동해방적 투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개량주의적인 떡고물을 약간 얻어내 이것으로 노동대중을 길들이고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다)이 현 한국에서는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이미 밝힌 바대로 그것은 아직 노동해방적 노동자 투쟁이 본격화되지 않았기에 자본가계급이 개량의 보따리를 일시적으로라도 풀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건 개량주의자들의 입지는 상당히 약하다.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전면화시키기 위해서는 자본가계급이 시혜하는 개량적 보따리가 간절하게 필요한데, 아직 한국 자본가계급은 그런 양보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건 자신들이 대중들의 압력과 자본가들의 강경함 사이에 끼어 압착당할 위험성을 깨닫고 이것이 지금 당장에는 ꡒ실현불가능하다ꡓ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상당히 영리하며 노동대중들을 호도하는 데 숙달된 관료들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그들은 ꡐ사회적 합의주의ꡑ라는 개량주의 전략을 절대 폐기하지 않고 있다. 그 반대다. 그들은 내심 오직 이것만이 노동운동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ꡐ일본식 기업별 협조주의ꡑ, ꡐ사이비 합의주의ꡑ에 대해서는 ꡐ바람직하지 못하다ꡑ고 명백히 반대하고 있지만 ꡐ사회적 합의주의ꡑ에 대해서는 단지 ꡐ현실적으로 중단기적으로는 실현불가능하다ꡑ고 말할 뿐이다.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구하되, 단지 그것이 중단기적으로는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그것을 직접적인 전략으로 제시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결국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게 된다. ꡒ위원회가 사회적 합의주의를 전면에 내걸 때, 다시 말해 그것이 실현가능해질 때는 과연 언제인가? 그 시기는 노동해방 투쟁이 성장하고, 그리하여 이 노동해방적 투쟁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할 필요가 자본가계급에게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는 시기다. 이 때 자본가계급은 단기적으로 약간의 개량들을 제공함으로써 근본 변혁을 비껴가고 마비시키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이런 자본가계급의 저항에 화답하여 노동운동을 타협과 굴종의 늪으로 끌고 사소한 개량에 만족하도록 만들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2중대, 방파제로 기능할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다름 아니라 그 시기에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노동운동에 개량의 마취제를 주입할 개량주의 지도자들이고, 사회적 합의주의자이며, 전략위원회의 이데올로그들이다. 이런 개량주의 전략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분명하다. ꡐ자본가계급의 2중대로서 지금 노동자 투쟁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이 작자들은 노동자들의 해방 투쟁이 성장하여 노동해방이 눈앞에 다가올 때 자본주의 체제를 구원하는 전면에 설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전략에 노동해방주의자들의 해방 전략으로 정확히 맞받아쳐야 한다. 노동과 자본, 자본가 정부 사이에 무언가 이끌어낼 수 있는 합의란 없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들과 이들의 정부에 맞선 단호한 투쟁을 통해서만, 그것도 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고, 노동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략은 사회적 합의주의 따위를 단호하게 걷어내고 해방적 계급투쟁을 곧추 세워내는 단호한 투쟁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ꡑ   

  위원회의 ꡐ사회적 합의주의ꡑ 전략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전략을 전면에 내걸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에 나선다. 이들은 파산한 노사정 위원회의 또다른 이름인 ꡐ노정 합의ꡑ를 예쁘게 포장해 내밀며, 노사정 위원회를 개편해 여기에 복귀할 명분을 조성하려 한다. 이런 책동은 산별노조의 중앙교섭 체계를 완성해서 보다 고도한 유형의 노사정 위원회를 설치하려 하는 데로 나아간다.

 

  현재 민주노총이 요구하고 있는 노정간 직접 교섭, 산별노조 건설과 발맞추어 제기되고 있는 산별 중앙교섭 요구 등은 크게 보면 사회적 합의의 툴을 벗어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위한 실질적인 전제조건을 만들어 나가자는 요구이며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사정위원회에의 참여 여부는 실질적인 쟁점은 아니다. 민주노총이 제기하는 전제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다시 참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은 노사정위원회의 개편을 요구할 수도 있다. … 노사정위원회 참여 여부는 그 구성과 운영의 개선 여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에 말한 실질적인 전제조건들의 충족 여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 민주노총이 요구하는 노정간 직접교섭의 성사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사용자들이 산별노조의 실체를 인정하고 산별교섭에 응하여 사회적 수준에서의 노동 규준을 산별협약의 형태를 설정해 나가는데 동의하도록 하는 것 역시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p.127)


  개량주의 관료들의 정신 상태를 해부하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공통점은 이들이 치장하는 ꡐ투쟁을 결합해야 한다ꡑ는 약간의 공문구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투쟁을 죽도록 겁내며 모든 것을 자신들 관료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협상과 타협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런 정신을 대변하는 ꡐ초안ꡑ은 몇몇 구절에 ꡐ투쟁을 교섭에 결합시켜야 한다ꡑ는 말을 포함시키는 것을 제외한다면, 거의 99%의 항목을 ꡐ효과적인 교섭 체계ꡑ가 무엇이 되어야 하며, 이에 맞게 ꡐ민주노총의 체계가 어떻게 정비되어야 하는가ꡑ에 할당한다. 역으로 ꡐ초안ꡑ은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투쟁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며, 어떻게 자본과 정부를 투쟁으로 압박할 것인가와 관련된 투쟁조직화 방도, 위력적인 투쟁전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약간 언급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온통 개량주의적인 소심한 타협 전술, 압력용 전술로 채워진다. 한 예를 살펴보자.


  산별노조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업장 내에서 조직력을 갖추고 파업투쟁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건에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의 형식만으로는 투쟁참가가 어렵다. 따라서 파업의 사회적 파급력 있는 사업장의 파업과 수많은 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두집회투쟁을 주요한 투쟁유형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는 총연맹의 투쟁이 정부나 경총, 전경련 등 총자본을 상대로 하는 투쟁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1분과에서 세우고 있는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주요한 투쟁방식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p.124)


  자본을 압박하는 노동자들의 투쟁력은 생산을 멈추는 파업투쟁으로부터 발전한다. 어떤 노동자 투쟁이건 그것이 완강하고 철저하게 전개될 때는 파업을 그 기초로 삼는다. 이 점에서는 중소 영세업체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건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그런데 ꡐ초안ꡑ은 이들로부터 파업투쟁의 힘을 앗아가고 가두집회투쟁으로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하지만 2000년 내내 벌어진 영세사업장들과 비정규직 투쟁들은 하나같이 파업투쟁을 기초로 삼았고, 바로 이로부터 투쟁력을 끌어냈다. 임창인쇄, 마마전자, 이랜드, 삼창프라자, 볼보기계건설코리아, 일진중공업, 한통 계약직 등등 모든 투쟁들은 파업 없이는 아무런 힘도 동원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이 편협하게 ꡐ작업장 점거냐 가두집회 투쟁이냐ꡑ는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긴밀하게 결합해야 하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초안은 중소 영세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으로부터 파업 투쟁의 힘을 앗아가 단지 가두집회투쟁에 가두려 한다는 점에서 왕창 빗나가고 있다. 이는 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투쟁의 한 복판에 있지 않고 사무실이나 연구실에서 이 투쟁을 제단하면서 투쟁전술을 고민하는 관료들과 교수들의 시야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뿐만 아니다. 초안은 노동자가 채택하는 일상적 투쟁전술을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노동해방 투쟁전술로 치환함으로써 ꡐ투쟁전술에서 개량주의의 본모습ꡑ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대사업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여타 부문의 노동자들의 가두집회투쟁을 결합하는 것이 ꡐ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주요한 투쟁방식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업이나 가두집회투쟁은 노동자가 동원하는 ꡐ하나의 투쟁방식ꡑ이지 전체가 아니며, 또한 가장 결정적인 투쟁방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해방의 시기에 동원하는 노동자 투쟁방식은 파업과 가두집회를 기초로 하되, 그것을 종합하고 확장하며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ꡐ변혁적 투쟁방식ꡑ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해방운동이 전면화되면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 사희의 전면에 떠오를, 군대, 경찰, 감옥, 정보기구와 같은 자본가 국가권력의 물리력들과 투쟁해서 이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해방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 자본가 국가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면적인 투쟁방식을 채택할 필요성을 조금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작업장 단위에서 떠오르는 자주적 노동자 투쟁기구들을 강화시키고 이것들을 종합함으로써 노동자의 해방부대를 창조해야 하며, 이를 사병들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창조할 새로운 병사 기구와 긴밀하게 결합시켜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본가 권력의 반동적 억압기구들과 맞서 싸워 그것들은 완전히 해체시켜야 한다. 노동운동을 단지 파업과 가두집회 투쟁에 제한하면서, 이것을 ꡒ새로운 사회를 건설ꡓ하는 ꡐ유일한 투쟁방식ꡑ으로 제출할 때 그것은 단호한 계급투쟁 대신 평화적인 방식으로 노동해방을 달성하고자 하는 개량주의 전략이 투쟁전술에 투영된 것으로 분명히 간주할 수 있다.


  당연히 이들은 ꡐ가두집회투쟁ꡑ의 진실한 의의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침을 제시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은 대사업장 투쟁을 파업만이 아니라 가두집회투쟁으로 확대시킬 필요성을 제출할 수 없으며,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의 파업투쟁을 강화시킬 방도를 밝힐 수도 없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분리된 파업과 가두집회투쟁을 ꡐ대사업장의 파업과 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두집회를 결합시킨다ꡑ는 기묘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두집회투쟁의 참된 의의는 그것이 경찰과 검찰, 정보기구, 감옥 등과 같은 자본가계급의 폭압기구들에 맞선 투쟁력을 배양함으로써 미래의 해방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힘을 축적해 나간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중소 영세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대사업장 노동자들 또한 파업투쟁을 전투적인 가두집회투쟁과 긴밀히 결합시킬 것을 중요한 투쟁전술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노동해방주의자들은 가두집회투쟁이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폴리스라인에 갇힌 박제화된 소심한 투쟁이 아니라 폴리스라인을 과감히 돌파하면서 자본가 권력의 기구들과 맞서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가두집회투쟁 때마다 터져나오는 노동자 투사들의 분노와 그 때마다 입증되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합법주의와 소심함은 정치투쟁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은 작업장 단위에서 직접민주주의에 입각해 떠오르는 노동자 투쟁기관들을 대체 권력으로 수립해, 노동자 권력을 수립하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에 그들은 자본가 국가권력을 민주적으로 수정하고, 약간의 압력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이 자신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파업에도 경찰을 투입하기를 꺼려하지 않는 억압적인 반동 권력에 대한 환상을 보여줄 뿐이며, 변혁적 정치투쟁 없이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평화주의를 표현할 뿐이다. 이처럼 단호한 투쟁 없는 노동해방을 꿈꾸는 것은 모든 나라의 개량주의자들의 특징인데, 하지만 철저한 계급투쟁을 거세시킨 노동해방이란 완전히 빈껍데기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변혁적 계급투쟁 없이 노동자계급이 해방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량주의자들이 희망하는 길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환상적인 길이다.


3. 연약함과 소심함의 극치


  이처럼 근본적 전략에서 출발해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투쟁전술에서도 개량주의자들과 노동해방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는 아주 명확하다. 양자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적대적인 두 세력이며, 모든 사안 하나 하나에서 첨예하게 충돌하며 정반대의 정신을 갖고 임한다. 그 정신적 차이의 핵심은 개량주의자들은 노동해방 없는 노동운동을 꿈꾸는 반면 노동해방주의자들은 노동해방이라는 견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노동해방적 원칙을 잃은 개량주의자들은 모든 부분적 투쟁에서조차 결코 결연하지 못하다. 노동해방주의자들은 해방을 향한 힘을 배양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체제가 강요하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모든 문제에서 결연하게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당당하게 내걸고 완강한 투쟁을 조직할 것을 호소하는 반면 개량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용인할 수 있는 ꡐ가능한 한 최대치ꡑ에 요구를 제한하고 합법적 울타리에 투쟁을 가둘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에서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절박한 생존의 요구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양자의 입장은 확연하게 갈라진다. 정리해고제와 비정규직 제도에 대해 위원회는 지극히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현재의 정리해고제는 법률상의 미비점과 법률 시행상의 불법행위 만연 등으로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크게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 따라서 정리해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함. … 정리해고 관련조항들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정리해고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거나 정리해고자 선정이 자의적인 경우가 많음. (p.48)


  정리해고 철폐투쟁은 임금노예로서라도 최소한 생명은 부지하겠다는 가장 절박하고 기본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만일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수호하고자 한다면 노동운동이 절대로 용납해서는 정리해고제에 대해 위원회는 ꡐ철폐ꡑ 대신에 ꡐ규제 강화ꡑ를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소심함의 극치로서 ꡐ적들에게 칼자루를 넘겨주고서 단지 그 칼의 사용에 대해 규제ꡑ하고자 할 뿐인 병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식의 태도를 갖는 노동운동이란 자본가계급을 제압하고 세상을 호령하는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없으며, 단지 칼을 든 주인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간절히 요구하는 가장 비참한 처지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위원회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리해고를 인정하되, 단지 그것이 무분별하게 이뤄지지 않도록 규제하는 데 요구를 제한하도록 충고하고, 심지어는 이 살생부에 올라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선정에서 자본가들이 자의적이지 않도록 요구하라고 주장하는 것, 그것은 노동운동의 원칙과 절대 양립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동료들에 대한 해고를 받아들이되, 단지 그 해고자 명단이 공정하도록 자본에게 요구한다면, 노동자들의 집단적 정신은 완전히 죽어버릴 것이다. 동료에 대한 살생부 자체에 반대하면서 ꡐ단 한 명의 동료도 차가운 거리를 떠돌게 할 수 없다ꡑ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ꡐ동료들을 사형시키는 기준을 엄격하게 설정하라ꡑ고 요구하는 것, 그것은 노동운동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노동운동이 ꡐ살생부를 작성하는 기준ꡑ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단 말인가? 노동자들에게 ꡒ합리적인 해고 기준ꡓ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이윤의 관점에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해고자와 고용자를 선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본가들이나 고민할 수 있는 ꡐ기준ꡑ이지 해고에 반대하여 생존권을 사수하려 하며 집단주의적인 대의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노동자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ꡐ기준ꡑ인 것이다. 그런데 위원회는 노동자들에게 이 ꡐ기준ꡑ을 합리적으로 설정하기 위해 고민하고 투쟁하라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영역에서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지 초안은 세 줄의 각주를 달면서 ꡐ정리해고제 문제와 관련해서는 내부에 이견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는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철폐를 공식 방침으로 하고 있음ꡑ을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초안에 담긴 정신은 다시 한번 분명하다. ꡒ자본가들의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가운데 이 정리해고가 조금이라도 노동자들에게 덜 불리하게 적용되도록 만드는 것!ꡓ 이런 한심하고 소심한 굴종의 정신이 초안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료에 대한 해고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숨걸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집단주의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비굴한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ꡐ비정규직 문제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서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여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고 이들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각종 사회보험제도를 개편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용 대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들의 생활권을 보장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3권을 보장하고 이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화함으로써 이들을 노동조합이 대변하고 보호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임. (p.49)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그로부터 극도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당면 투쟁 목표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은 ꡐ비정규직 제도를 박살내는 것ꡑ이다. 실제로 모든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ꡐ비정규직의 정규직화ꡑ는 가장 기본적인 대중적 투쟁슬로건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의 테두리에 완전히 갇혀 있기에 자본이 강요하는 질서를 전혀 넘어설 의지가 없는 개량주의 관료들은 이 비정규직 제도를 온존한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려 한다. 이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개선할 수 있는 것이란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를 용인한 가운데 이 굴레의 조임을 약간 완화하는 정도의 것일 뿐이다. 초안이 제시하는 요구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700만에 달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노동자들의 과반수가 비정규직화된 상태에서 위원회는 ꡐ비정규직의 확산을 막는 것ꡑ을 처방으로 제시하며, 이들 이미 비정규직화된 다수 노동자들과 관련해서는 ꡐ법적 보호, 사회보험적용ꡑ 정도의 것들, 다시 말해 비정규직 제도를 인정하는 대신 비정규직의 처지를 약간 개선하는 데 비정규직 투쟁을 제한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심함은 그들의 전략 노선을 관통하는 정신을 볼 때 불가피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승인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려 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노선이기에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논리를 승인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대판 半실업자들인 비정규직들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에(자본주의 체제에서 그것은 진실이다) 그들은 비정규직의 철폐란 불가능하다고 마음 속으로 확신한다. 그 결과 그들은 노동자들의 강한 투쟁열망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ꡐ그것은 실현불가능하다ꡑ고 생각하면서, 비정규직 제도를 인정하면서 그 파멸적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 노동운동을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확신이 표현된 것, 바로 그것이 ꡐ초안ꡑ의 비정규직 항목이다.

  그렇다면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것이 비정규직이건 아니면 다른 형태이건 半실업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부정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반대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형태로건 아니면 다른 형태로건 半실업자들(유동적 실업자들)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런 과학적인 확신은 위원회의 확신과 어떤 점에서 확연하게 구별되는가? 이것을 검토하는 것은 위원회의 개량주의 전략과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전략 사이의 질적 경계선을 무엇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노동해방주의자들은 그런 확신으로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半실업자들의 도탄에 빠진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해야 한다는 노동해방적 전망을 끌어낸다. 이런 노동해방적 전망에 입각하고 있기에 노동해방주의자들은 ꡐ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실현가능성ꡑ 여부와는 무관하게 ꡐ비정규직 제도 철폐ꡑ를 전면에 내건다. 그것은 이런 투쟁 하나 하나를 통해 노동자들은 이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절박한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노동해방적 자각을 키워나가기 때문이며, 또한 노동해방을 수행할 수 있는 주체로 자신을 조직해 나가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투쟁이 전진함에 따라, 아직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자신들의 절박한 요구들을 쟁취하고자 갈망하는 노동대중들 속으로 노동해방주의의 전망을 나를 소중한 수단들과 경험들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노동해방주의자들은 ꡐ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실현가능성ꡑ에 기초해 투쟁을 배치하지 않으며, 오직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조직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느냐, 그리하여 진정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노동해방을 달성할 힘을 축적하느냐에 입각해 투쟁을 배치한다. 그렇기에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半실업 문제가 해결가능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ꡐ비정규직의 정규직화ꡑ, ꡐ모든 유형의 해고와 실업 철폐ꡑ라는 투쟁요구를 전면에 휘날리고 기운차게 투쟁할 수 있다.


  반면 노동조합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이런 노동해방적 전망을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半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동일한 과학적 확신으로부터 정반대의 결론을 끌어낸다. 그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ꡐ과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실현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공상이다. 노동운동은 실현가능한 투쟁에 자신을 제한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비정규직 제도를 인정한 가운데 법적으로 약간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실업 기금을 비롯한 사회복지제도를 적용받도록 투쟁하는 것을 뜻한다. 실현가능한 현실적 노동운동!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정반대의 상이한 전략으로부터 당면 노동자 투쟁의 요구들과 관련해서도 확연하게 구별되는 투쟁요구들과 지침, 노선이 도출되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의 입장은 실업문제에 대한 초안의 입장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대량실업을 가져오는 근본원인은 정부와 자본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인력삭감형의 구조조정정책과 유연화 정책임.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바탕을 둔 노동시장정책은 근본적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정책과 노동시장 유연화 일변도의 정책을 전환하여 사회통합적 구조조정정책과 노동시장 유연화 일변도의 정책을 전환하여 사회통합적 구조조정과 고용창출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임. (p.56)


  실업의 근본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의 고유한 모순이다. 생산에 대한 사회적 계획화가 아닌 자본가들 개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정부적 생산에 의지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불가피하게 과잉생산을 낳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생산의 사회적 연결망을 따라 전체 자본주의 체제로 파급되면 공황으로 폭발한다. 동시에 이는 ꡐ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ꡑ의 결과이기도 하다. 압도적 다수의 소비자들인 노동자들이 나날이 증대하는 생산량에 비해 작은 일부만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산량의 비약적인 증대가 과잉생산을 초래하고 이것이 노동자들의 실업과 소비축소를 낳아 확대되는 악순환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처럼 생산의 무정부성과 ꡐ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ꡑ이 공황을 야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수시로 대량의 실업문제와 맞닥뜨린다. 그렇기에 대량실업을 가져오는 근본원인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이며, 실업을 해결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철폐하여 생산을 사회적으로 계획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여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노동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런 모순들을 자본주의 체제에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ꡐ잘못된 정책ꡑ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설혹 그것을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간주하더라도 자본주의를 뛰어넘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일종의 ꡐ필요악ꡑ 정도로 생각하는 개량주의자들은 실업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엉뚱한 곳에서 찾게 된다. 그들은 실업문제를 자본가들이 구사하는 하나의 정책(가령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여기기에 이 정책을 다른 정책(가령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통합적 구조조정과 고용창출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대체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최소한 그것만이 채택가능한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믿는다. 바로 이런 사고들이 ꡐ신자유주의 반대ꡑ를 주장하는 조합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의 머리를 관통하는 핵심적 실이다.

  반면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실업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현상이며, 또한 노동유연화와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을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억압과 착취의 ꡐ현대적 형태ꡑ로 간주하기에 ꡐ신자유주의 반대ꡑ가 아닌 ꡐ자본주의 반대ꡑ를 내걸며, ꡐ사회통합적 구조조정과 고용창출적 노동시장 정책(이것이, 국가가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근로사업을 계발하라는 ꡑ케인즈주의 정책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ꡐ자본주의 철폐라는 노동해방적 구조조정과 임금노예제도의 철폐, 그리고 모든 형태의 해고와 실업 반대ꡑ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본가계급의 하나의 정책을 다른 하나의 자본가 정책으로 대체하는 데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죽이는 정책을 야기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데서, 그리고 이 체제에 맞선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는 데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차이는 자본가 국가에 대한 태도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가 국가에 압력을 행사해 국가의 정책을 노동배제 정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책으로 바꾸는 데 집착하며, 자본가 국가를 설득하려 무한히 애쓴다. 애당초 그들은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세워내는 노동해방 정치를 거부하므로 그들로서는 자본가 정부에 의존하는 그런 개량적 정치말고는 선택할 것이 없다. 이들 개량주의 정치 내에서의 차이는 고작 이런 것에 있을 뿐이다; ꡐ노골적인 자본가 정당 중 온건한 부위를 비판적으로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자본가 국가를 침해하지 않는 개량주의 당을 건설해 집권할 것이냐?ꡑ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유럽의 자본주의 역사가 분명히 증명한 것처럼 실업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개량주의 정치는 무수한 약속을 늘어놓은 것을 제외한다면 실업 문제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수천만 번 ꡐ실현가능한 투쟁ꡑ을 떠벌였지만, 아무 것도 실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 ꡐ실현가능하느냐ꡑ는 질문은 개량주의자들 자신에게 정면으로 던져져야 하는 것이다. ꡒ당신들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이오!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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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론에 대한 비판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반격을!
 맑스 코뮤날레 제1차 쟁점토론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보고

기관지노힘  제39호
송석현 (노동자의 힘 회원)


신자유주의 반동이 세계를 지배 통치하는 오늘날 맑스주의의 반격을 준비하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맑스 코뮤날레가 조직되었다. 지난 5월 제1회 맑스 코뮤날레 학술문화대회를 마치고 나서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몇 가지 주제를 좀더 심도 있게 토론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시도가 9월5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주제로 개최된 쟁점토론회이다.
이날 토론회 사회는 김세균 교수가 맡았으며, 손호철·윤수종·정성진·조정환 선생 등 4분의 진보진영의 학자가 발제 및 토론자로 나서 네 시간 여에 걸쳐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지면에서는 이 날 토론에서 주되게 쟁점을 형성하였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내 나름의 문제제기와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토론 내용 중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나의 무지 또는 오해의 소치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쟁점 1. 반세계화 운동은 과연 반동인가?

토론회는 손호철 선생의 대단히 도발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손호철 선생은 지난 수년 간 자신이 적극 참가했던 반세계화 운동이 반동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저작 {제국}을 보고 쇠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제국}에 드러난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전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적 지배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전통적 좌파의 주장이 반동적이고 해롭다는 것이다. 손호철 선생은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제국}의 핵심 가설 네 가지를 내세우면서 비판하였다: "제국과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며 필연이다(가설1). 제국과 지구화는 역사적 진보이다(가설2). 따라서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이다(가설3). 우리의 대안은 (반지구화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는 것, 이를 통해 대항지구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再轉有權)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가설4)."
손호철 선생은 위의 가설은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며, 따라서 '제국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가설을 인정하고 분명하게 논쟁할 것을 요구하였다. 먼저,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WTO 반대, 자유무역협정, 투자협정 반대 투쟁 등이 반동적이며 해로운 것인가?
이에 대해서 윤수종 선생은 전혀 반동적인 것이 아니며 그와 같은 투쟁을 지지한다고 답변했다. 다만, 운동에 反=안티가 붙었을 때,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자율주의자들은 반대 투쟁을 경계하며, 권력에 반대하면서 권력을 닮아 가는 행태를 비판적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자율주의자가 보기에,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이 뭔가 새로운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그와 같은 반대투쟁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윤수종 선생은 네그리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면서, 네그리는 제노바 투쟁을 '대항세계화' 운동으로 표현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본의 지구화는 노동의 지구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화 찬성이 자본의 지구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정환 선생은 '반동적reactive'이라는 표현은 능동적이지 않고 즉자적인 반발이나 소극적인 반작용적 실천 또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또, 국지성과 민족국가에 기초한 반세계화 투쟁과 다중(Multitudes)의 역능에 기초한 전지구적 반세계화 투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손호철 선생은 전자에 입각한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조정환 선생은 반세계화 투쟁을 문제제기 차원과 문제해결(대안적) 차원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제제기의 차원은 다중의 현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정치 경제 문화적 어려움을 호소함으로써 공동의 경험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다. 여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미국과 이태리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에 자율주의 활동가들이 동참하고 있다. 문제해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민족국가적 차원에서 풀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반동적, 반작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이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조정환 선생은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자는 네그리의 주장을 손호철 선생이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즉,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운동이 잠재적으로 축적해 가는 다중의 추진력, 네트워크적 힘들을 통해 자본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 네그리의 의도이며, 이것이 대항지구화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손호철 선생은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은 농민의 기본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비록 국지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지만 반대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즉, "민족주의와 국지적 정체성이 억압성을 내재하고 있고 국제주의와 대항지구화라는 지구적 연대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여 국지적 것을 방어하는 반지구화투쟁은 그 나름의 진보성을 갖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시애틀 항쟁을 들었다. 시애틀 항쟁은 "{제국}이 바라는 대로 대항지구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자본의 전지구화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부터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려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하려는 반지구화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손호철 선생은 이와 같은 반지구화투쟁과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적인 대항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는 대항지구화투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쟁점 2.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제국(Empire)인가, 제국주의(Imperialism)인가

토론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또 다른 핵심 쟁점은 과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세계 자본주의를 '제국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성진 선생이 신랄하게 '제국론'을 비판하면서 포화를 열었다.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은 세계화 담론들을 들뢰즈·가타리의 포스트 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비록 복수의 맑스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전 맑스주의와 대립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천적으로도 '제국론'은 혁명적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개량주의 정치의 헤게모니에 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성진 선생은 그 이유로 '제국론'이 노동가치론과 공황론을 무시함으로써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부정하고 있으며, 국가간 경쟁이라는 제국주의론의 핵심을 폐기함으로써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국가간 경쟁이 약화된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 현상을 봐서도 맞지 않으며, 이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미국 제국주의 지배 현실의 부정,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의 부정, 세계화 찬양, 노동자운동의 중심성 부정 등을 들어 '제국론'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고전적 맑스주의 패러다임에서 얼마나 이탈했는가를 통해 '제국'을 봐서는 안 되며, 자신은 그와 같은 '틀'을 인정할 수 없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제국 주권의 특징을 통해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제국'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1)제국적 질서 아래에서 생산은 공장 기반을 떠나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상품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제국은 탈영토적 질서를 의미한다. 2)제국에서는 낡은 생산 기반, 유통 수단, 주권 기관들은 새로운 생산 기반, 유통 수단들, 그리고 주권기관들과 더불어 네트워크를 이루어 헤게모니적 명령 구조에 종속되는 총체적인 질서를 갖는다. 3)제국은 주권들의 합성체 혹은 혼합체이다. 통합세력으로서 미국-G8강대국들-군사, 경제, 정치, 금융, 무역 등에 걸친 이질적 연합체들, 절합세력으로서 초국적 기업들-지역적·영토적 민족국가들의 연합체, 대의세력으로서 개별 민족국가-미디어와 종교-NGO들의 주권합성체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중의 삶을 억누르고 통제하며, 포획하는 장치이자 '마디'이다. '제국주의론' 옹호자들은 '미국'만을 중심으로 본다. 이 주권합성체는 정치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서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삶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각 마디들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다. 제국 속에서도 '경향으로서의 제국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제국은 그 자체가 위기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며, 그래서 제국 네트워크의 각 단, 각 층에서 움직이는 마디들(기구들, 국가들, 기업들, 연합체들, 그리고 미국 등)을 절합하고 통합하는 일은, 그 과정 속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불안정성을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같은 낡은 경향들이 때로는 제국의 혼합적 총체성의 균형을 뚫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부시의 일방주의적 패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국적 주권 패러다임을 파괴하거나 대체할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제국론'에 따르면, 부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어 조정환 선생은 '제국주의론'을 객관주의적 발전단계론, 국가주의, 가치중심적 관점과 프롤레타리아트 희생자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제국주의론은 자본/노동의 적대가 감추어지고 자본주의 한계내로 문제를 설정하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론'이 '독점자본/비독점자본 간 갈등'의 해결이나 '중심부국가/주변부국가 간 갈등의 해결'로 문제의식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설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능동성이나 자기가치화 능력을 갖지 못한 희생자로 묘사되며 그것이 혁명적 호명을 받을 때조차도 부르주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원되는 피동적 동원군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대 관계에서 적보다 우리의 행위에 주목하는 다중 주체의 대응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손호철 선생은 현실 속에 '제국'의 '요소'와 '계기'가 현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낡은' 제국주의적 요소와 계기도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으므로 제국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며 제국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잉일반화 내지 과장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의 자본 소유의 규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 전쟁,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그리고 보다 주요하게는 부시의 일방주의와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를 들었다. 또, "하트는 세계가 '제국'이 아니라 낡은 미국의 제국주의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계를 자신들이 주장해온 '제국'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 '전세계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현재 세계가 제국이라는 주장에 강한 의문을 던졌다.

쟁점 3. 개량인가, 혁명인가?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이 말하는 세 가지 요구, 즉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을 위한 투쟁은 분명 개량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과거 70년대 아우토미아의 '노동거부' 투쟁에는 혁명적 경향성이 있었는데, 지금 {제국}에서는 이마저 상실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제국론'이 '제3의 길'과 뭐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또, 개량이라는 것은 '국가'를 전제한 것인데, '국가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전제로 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모순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개량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혁명적인 요구임을 강조했다. 지구적 시민권은 이민 이동 분산들 속에서 국가적 경계선을 철거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인데, 시민권을 획득한다면 노동자 또는 다중 차원에서 단결하게 됨을 말했다. 자본에 의해서 분할 통치되는 상황에서 이것은 분명 혁명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임금권은 자율주의 운동 이전 60년대에 나온 임금 형태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삶에 적정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내자는 것인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안임을 역설했다. 끝으로,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생산수단을 재장악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성진 선생은 이 세 가지 요구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제국론'에서 국가를 매개로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허공에 대고서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즉, 세 가지 요구 중에서 세 번째 '재전유' 부분은 추상적이라서 그렇고, 시민권과 임금권은 국가 매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현실은 국민국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이행기 강령의 설정 속에서 그와 같은 요구를 제기한다면 부정할 이유가 없으며, 이런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개량적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 문제, 즉 국가분쇄와 소멸의 문제 설정을 회피한다면, 또한 '개량주의'라고 말했다. 손호철 선생도 세계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국민국가 또는 국민국가간의 합의를 통해서 실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통해 비록 혁명적인 주장이라고 할 지라도 국민국가 문제는 여전히 이슈로 남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요지의 의견을 밝혔다. 이로써 쟁점은 자연스럽게 현대 세계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문제로 넘어갔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국가를 매개로 한 문제가 아니며 어떤 국가가 이것을 보장해 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전지구적 다중의 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운동 주체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윤수종 선생도 '제국론'은 주민대중을 훈육하는 장치로 국민국가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힘의 논리가 작동하며 힘 관계에서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대항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보완하였다. 계속해서 조정환 선생은, 제국 속에서 국민국가가 제국주의보다 쇠퇴한 것은 사실이며, 그렇다고 국민국가가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국의 '명령'을 받아서 국민국가가 다중을 분할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또, 시애틀 투쟁 등이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WTO 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이 '제국'의 실재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제국'에서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양극화가 아니라 계급적 양극화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자립성과 자립적 국가들의 연대'를 대안으로 사고하면서 그것을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에서 찾는 것은 이제 명령관계로 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폐절이라는 당면 과제를 미래로 유보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문제는 대안 정치의 전망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다.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제국론'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설명하기도,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성진 선생의 지적대로 '제국론'은 '제국주의' 국가간, 그리고 독점자본간의 경쟁과 갈등을 고려하지 않는 '초제국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드러난 국민국가 간의 대립은 미국의 '어리석은 지도자'의 쿠데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독점 자본의 이해와 이해 관철을 위한 경쟁의 표현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분열과 대립의 구도는 중부유럽, 동유럽, 발트해 지역, 카스피해-카프카즈 지역, 중앙아시아, 중동을 잇는 지역의 자원과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둘러싼 제국주의간의 쟁투를 의미하며 이것은 군사적 쟁투, 군수독점자본간, 석유독점자본간, 기축통화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번 칸쿤에서의 사례를 보면, '주권합성체'의 한 영역인 WTO에서도 이들 국민국가(선진국 대 개도국) 간의 이해 대립이 완강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민국가의 조절 역할은 여전히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제국론'에서 말하는 '포획'과 '훈육'은 애초부터 국민국가의 가장 주요한 기능과 역할이었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포획'과 '훈육'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원래부터 꿈꾸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자본이 자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가속화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점차 거세게 일어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96-97년 총파업 투쟁, 02년 아르헨티나 항전, 서유럽에서의 무수한 파업 등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것이 비록 일국에서의 투쟁이라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제국'이 부여한 위계와 명령으로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칸쿤에서의 투쟁은 '국지성'에 기초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국제주의적 연대와 실천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투쟁의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물론 현재의 반세계화 투쟁이 넘어야 할 과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은 민족주의적 관념으로부터 반자본주의 계급 대립 관계에 입각한 투쟁으로의 뚜렷한 전회이다. 물론 '제국론'에서도 계급 적대와 자본의 착취를 폐절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론'이 말하듯이 다중의 네트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통해서 실현된다기보다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대안 사회의 정치적 전망을 갖고서 반세계화 투쟁이 전면적으로 벌어져야 함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을 구축하고 그것을 기초로 단결하고 국제주의적 실천을 벌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은 사회적 생산에 걸맞게 소유를 사회적으로 재전유하는 데에 중심성을 두고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성 위에서 미시적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대안 사회의 상을 그릴 수 있다. '대항제국'은 운동의 중심성 없이 네크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과대평가하고 있을 뿐, '지구적 시민권'과 '사회적 임금권', 나아가 '재전유권'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중심 주체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제국론'은 그 대상에서 '지구'라는 거대한 설정을 하였지만, 주체의 운동에서는 중심없는 미시적 공간만을 파고든다는 느낌을 준다. 이래서는 대안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정치 전망은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주체로서 낡은 부르주아 지배 장치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을 대중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며, 이것에 복무할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조직의 건설이 시급한 과제이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일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노동자계급이 대안 사회 건설의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투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수 있는 투쟁의 전망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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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의원 선고공판 연기

337. 권영길 의원 선고 공판, 3월18일 이후로 연기
등록일: 2005.02.15 12:38:18   조회수: 107  

권영길 의원 선고 공판, 3월18일 이후로 연기
- 국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법률안 처리 예정

○ 2005. 2. 16 14:00에 열릴 예정이었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에 대한 제3자개입금지 등에 의한 항소심 선고공판(사건번호 2001노 1474)이 검찰 측의 심리 ‘재개’ 요청을 재판부가 수용함에 따라 2005. 3. 18. 14:00, 서울중앙지방법원 320호실에서 열릴 추가 심리 이후로 연기됐다. 따라서 권영길 의원에 대한 선고 공판일정은 3월 18일 이후로 확정될 전망이다.

○ 검찰의 재개 요청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이 시작 된지 10년이 지나 상황과 조건이 많이 변했을 뿐 아니라 수 차례에 걸친 담당 검사의 변경으로 인해 사건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정리가 필요하다는 상황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 졌다. 그 결과 2005. 1. 14 로 마무리된 심리가 ‘재개’된다고 권영길 의원의 변호를 담당하고 있는 이덕우 변호사는 밝혔다.

○ 한편, 권영길 의원에 대한 선고 공판 일정이 다가옴에 따라 시민사회, 노동계, 국회 환경노동위 소속 국회의원 등 사회 각계의 탄원과 의견서 제출이 계속되고, ‘권영길 의원 구하기’라는 신조어가 만들어 지는 등 언론과 국민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특히, 국회에서는 2005. 2. 4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법률안이 단병호의원 대표발의로 제출됐다. 이 법률개정안은 2월 임시회기 중 소관상임위인 국회환경노동위원회에서 처리 될 전망이다. 법률개정의 취지와 내용은 희대의 반민주악법으로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자 민주화의 대상이었던 제3자개입금지법이 오랜 노력 끝에 사문화된 마당에 다시 적용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법률 적용의 근거가 되고 있는 부칙조항을 삭제하는 것이다.


■ 담당: 이호성보좌관 (017-245-9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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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비정규직노조 지도부와의 인터뷰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 사무국장 직무대행
조가영 동지와의 인터뷰



현재자본이 파업노동자들과 외부와의 연대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업거점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잘 전해지고 있지 못하다. 현자불파투쟁의 면모를 더 자세히 알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우리는 5공장 파업농성장에서 투쟁을 이끌고 있는 현자비정규직노동조합 사무국장 직무대행 조가영 동지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불법파견 철폐투쟁의 선봉에서 파업을 전개하고 있는 5공장 도장부 파업거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활동과 투쟁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조가영 동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파업농성장과 파업참가자들의 심리와 의식적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문] 5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답] 우선 지난해 5공장 정리해고 분쇄투쟁이 있었다. 40명의 해고자 중 전원이 복직되는 완전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정리해고된 노동자들 가운데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노동자들이 복직되는 것을 보면서 노동자들에게 ‘투쟁하지 않으면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무관심한 듯 보였지만, 정리해고 분쇄투쟁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배우고 있었다. 5공장 도장부의 경우 1년 동안 수차례의 교육을 진행하여 축적된 성과들이 있었다. 또한 정영미 동지를 중심으로 여유인원 확보 등 차별과 탄압에 맞선 투쟁을 진행했던 경험도 있었다.

현장의 일상적인 투쟁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쟁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원하청 자본가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하는 정영미 동지의 헌신적인 모습은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투쟁은 가능하다는 대중적 신뢰를 획득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일상적인 투쟁의 누적된 성과들은 이후 꾸준한 현장활동으로 이어졌고, 불법파견 철폐투쟁 국면에서 자본이 불법대체인력투입을 강행하면서 도장부 40여명이 즉각적인 항의투쟁에 돌입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자본이 불법 대체인력 저지투쟁에 나섰던 정영미 동지를 비롯한 노동자들을 부당해고, 고소고발, 손해배상청구 등으로 탄압해오자 파업으로 연결된 것이다.

[문] 파업참가자가 계속 확대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답] 5공장 비정규직은 주야간을 합쳐서 430여명이다. 생산물량의 축소로 절반가량인 215명이 휴가 중이다. 나머지 215명 중 120명 정도가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라인의 절반이상이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도장부에서 시작된 투쟁은 의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B조 중심이었으나 A조의 파업참여가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처음 도장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의하면서 토론을 통해 업체 탈의실에 파업거점을 잡은 것이 파업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파업거점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오는 의장부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교육했다. 활동하는 동지들의 참가도 있었지만, 탈의실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업체 다수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파업의 중심축도 이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도장부 아주머니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노동자들이 중심축으로 일어서고 있다. 젊은 층의 경우 “아주머니들은 할 만큼 했다. 이제 우리가 아주머니들을 지킨다”며 높은 투쟁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아주머니 조합원들도 젊은 노동자들을 동생처럼 챙기고 있다. 그리고 젊은 노동자들의 경우 부서를 뛰어넘어 또래들과 어울리며 동지애를 쌓아가고 있다.

[문] 파업에 참가한 5공장 노동자들은 평범한 노동자들이라고 전해져 있다.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가?

[답] 한 업체 20여명의 노동자들이 “파업하러 왔다”며 찾아왔다. 노동자들은 “업체 소장이 1년 후에 정규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입사했고, 그동안 단 한 번도 월차, 연차를 쓰지 않고 성심껏 일해 왔다. 그런데 신규채용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고, 서럽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겠다!”며 자신이 투쟁에 나선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이 같은 투쟁의 확대는 대체인력이 투입되면서 라인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노동자들은 이제 자본에 허리를 굽히려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투쟁을 통해 정규직을 쟁취하겠다고 의지를 세워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가장 큰 변화는 자주적인 활동과 투쟁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파업거점은 조 체계로 활동과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노동자들은 아주 강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다. 조장이 된 노동자의 경우 달라지는 모습이 확연히 보이고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굳건한 책임감과 헌신성으로 조를 운영하고 있다. 조원들도 조장을 중심으로 응집력 있게 뭉치고 있다. 평소에 잘 알지 못하던 다른 업체 사람들과도 친밀감을 높이며 동지애를 쌓고 있다. 동료들의 파업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전화기를 돌리기도 한다.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성이 크게 향상되고 있는 것이다.

[문] 파업대열이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는데, 규율은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가?

[답] 명문화된 규율은 없다. 조별 규율 토론을 진행했고, 조별 규율만 있다. 똘똘 뭉친다, 무임승차 없다, 끝까지 함께 한다, 3인 1조로 움직인다 등 일반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지만 조합원(파업참가자들이 대부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들은 자발적으로 철저하게 파업규율을 지키고 있다. 파업농성장을 계속 사수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으나, 급한 사정이 생길 경우 외출을 허용하기로 했다. 하루에 조별로 1명만 외출을 허용하고 약속시간에 반드시 돌아올 것을 결의했다. 아직까지 한 명의 조합원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처음으로 투쟁에 참여한 업체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농성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집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 믿고 보냈는데 단 한 명의 이탈 없이 모두 복귀했다. 현대자본이 파업노동자들의 집에 악선동을 해서 부모님이 와서 설득해도 “내가 빠지면 나도 죽지만, 동료들도 다 죽는다. 그래서 빠질 수 없다.”며 강한 동지애를 보여주고 있다.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집단적 의식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한 가지 명시된 규율은 지도부가 박수 3번치면 30초 만에 조별로 대열을 정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기호 위원장님을 중심으로 파업대오가 하나로 단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 파업대오는 강한 결속력과 일사불란함으로 사수되고 있다.

[문] 파업사수를 위한 선봉대가 조직되었는데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답] 선봉대는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젊은 남성조합원들 20명가량이 참가하고 있다. 선봉대는 “아줌마는 우리가 지킨다.”는 결의로 파업을 사수하고 있다. 도장부 아주머니 조합원들의 투쟁은 젊은 남성조합원들에게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들의 경우 투쟁하다 깨져도 밖에서 깃발을 세우고 싸우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

선봉대는 따로 조직할 경우 무규율해질 우려가 있고, 당사자들도 전체 일정에서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조별 활동을 함께 진행하면서 선봉대를 하고 있다. 선봉대는 파업거점 앞을 사수하면서 원하청 관리자들의 침탈을 막고, 출입자들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선봉대의 교육은 따로 진행하지 않고 파업대오 전체 교육에 함께 하고 있다.

[문] 정규직화 쟁취를 주요 요구로 내걸고 있다. 집배원, 캐리어와 같은 경우 정규직이 되자 투쟁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는 비정규직 투쟁이 아직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인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는가?

[답] 투쟁이 정규직화 쟁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임금은 올라가겠지만 잔업, 특근과 고된 노동은 정규직이 되더라도 계속된다. 투쟁동지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보장받기 위한 정규직화라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차라리 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료들과 운명을 같이 할 줄 알며, 단결하여 투쟁할 줄 아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는 것이 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합원들에게 왜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토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정규직이 되더라도 우리의 연대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가자고 매일 약속하고 있다. 부품사업장, 이주노동자의 사례를 들며 우리보다 어렵고 힘들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자고 강조하고 있다.

세원의 이야기도 자주 언급한다. “만약 현자 정규직 노조에서 몇 시간이라도 라인을 끊었다면 세원의 두 동지가 열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억울하게 당하는 세원테크와 같은 노동자를 더 이상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규직이 되면 대의원, 소위원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자고 이야기하는데, 조합원들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대의원, 소위원이 되면 유인물만 쓰는 간부가 되지 말고 발로 뛰는 간부가 되자!”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정규직 노조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진정한 간부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조합원들의 의식이 정규직화 쟁취를 뛰어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본다.

[문] 20일 오전에 5공장 도장부 현장진입투쟁이 진행되었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전술이었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조직되고 진행되었는가?

[답] 현자 정규직에서 한시하청(1개월 계약자)을 합법적인 형태의 대체근로라며 대체인력투입을 막지 않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파업을 진행하는 중에도 라인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 도장부 노동자들은 라인을 세우는 적극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혔다. 밤을 새며 투쟁전술논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도장부에 진입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결정했다.

도장부 문을 관리자들이 막아서 현장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단련되어가고 있다. 이제 관리자 수십, 수백 명이 와도 전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현장진입투쟁 후 조합원들은 “좋았다, 또 가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합원들은 더 효과적인 형태의 투쟁이 없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도장부 진입투쟁 동안 사측 관리자들이 농성장을 기웃거리며 도발하자 남아있던 조합원들은 “올 테면 와 봐라”며 구호와 노래에 맞춰 발을 구르며 힘차게 투쟁했다. 농성장이 2층인데, 발을 구르면 의장부 조립라인이 쿵쿵 크게 울린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아래층에서 일하던 정규직 대의원, 소위원들이 비상이 걸려서 농성장으로 뛰어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문] 파업참가자와 정규직과의 관계 변화는 어떠한가?

[답] 현자노동조합과의 관계는 이전과 차이가 별로 없다. 5공장의 경우, 소수의 민주파 대의원과 소위원들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연대하고 있다. 현자노조가 대체인력을 허용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소위원들은 단체로 조퇴를 하기도 했다. 이들은 비정규직에게 잔업거부 투쟁하라고 부추기고 대체근로를 못 막는 것이 쪽팔려서 조퇴했다고 한다. 이들 정규직 활동가들은 이 투쟁으로 현장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경우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호의적이다. 조기축구회나 현장라인 모임에서 투쟁기금이 들어오고 있다. 현자노조보다 오히려 라인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형님, 아우로 지내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적극적인 연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정규직 조합원들도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의 투쟁에 반대하고 있지 않다. 특히 파업에 참가하고 있는 비정규직 조합원들과 정규직 조합원들은 평소에 형성되어 있던 동료애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찾아오면 우리 조합원들이 달려가서 부둥켜안는 광경을 보면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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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회한, 김광수

현자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회한
김광수   | 2005·01·23 23:41 | HIT : 19 | VOTE : 0 |

    
안기호위원장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위원장이다. 이 안기호 위원장은 평등연대의 창립멤버였다. 울산에서 송철호 시장후보가 뻘짓을 하는 통에 불거진 문제로 당을 떠났고, 평등연대마저 떠났다. 그 잘난 북구청장 이상범이가 국회의원되는 것을 막았다고 야합운운하며 중상모략을 하는 당내 분위기에 질려버린 탓도 있고, 무언가 확실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런 탈당을 결심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안기호 위원장은 90년대 초반 효성금속 위원장을 역임했었다. 전노협 시절에 울산에서 가장 큰 전노협 가입 사업장을 이끌었다. 현총련이다 해서 기업별 체계에서 노닥거리던 현대계열사 노조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출발이었다. 연대파업으로, 단위사업장 파업으로 2번이나 감옥에 갔고, 노진추 사건(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사건)으로 3번째 감옥을 갔다왔다.
효성금속은 주력이 컨테이너 제작이었는데, 우리나라 컨테이너 제작산업은 90년대 중반 중국의 등쌀로 없어졌다. 그래서 1500명이 넘던 대형사업장이었던 효성금속이 없어졌고, 안기호 위원장은 회사의 적만 두면 월급을 주겠다는 회유책도 마다하고 조합원과 함께 실업자가 되었다.
그런 전노협의 기간투사가 생계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고 또 한번 현실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지금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을 하고 있는 이상욱은 안기호 위원장이 전노협 주력사업장중의 하나를 이끌고 있을 때 현총련 소속의 그것도 별볼일 없는 어용사업장 조합원일 뿐이었다.
그런 이상욱이 안기호 위원장앞에서 절차를 운운하며 거드름을 피고 있다. 왜 쪼그만 비정규직 노조에서 정규직노조의 윤허도 없이 투쟁일정을 짜고 연대해 달라고 엉기냐고 야단을 치고 있다. 안기호 위원장이야 워낙 점잖은 동지니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입장에서는 속에서 불이난다.  
까놓고 말하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민주노동당에 남아 당의 혁신이다, 사회주의 실천강화다 하며 이러저리 굴러다는 나도 생각해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안위원장은 도대체 이게 뭔가? 솔직히 탈당을 한 안위원장을 보며 한편으로는 부러운 맘도 있었다. 더러운 꼴은 안볼테니 하는 뭐 그런생각이다. 그런 생각은 도대체 사회주의 노동운동근처에는 꼴도 안보이던 놈들이 사회주의자 운운하며 꼴갑을 떨때도 나고, 다함께니 뭐니 하는 국제 00이들이 노동운동에 대해 헛소리 할때도 나고, 개골목인가 하는 친구가 막말할 때도 나고, 신문사 기자가 대표할 때도 나고, 정윤광위원장이 근본도 잘 모르는 아줌마한테 대표경선에서 질 때도 났다. 허영구니 주대환같은 사람들이 정책위의장 선거에 나오는 걸 볼 때도 났다.
그런데 안위원장의 최근 모습을 보면 내가 겪는 수모와 절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40일동안 단식하고, 추석연휴때 농성장을 좀 쓰게 해달라고 애걸을 해도 돌아오는 말은 비정규직이 설쳐서 정규직 노조가 상처받았다는 말이고, 이제는 내 살점같은 조합원이 몸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별힘도 주지 못하고 바깥에서 변죽이나 올리는 처지에서 더 화가 나는 것은 불파투쟁과 관련해서 노동운동권이 보여준 비겁과 몰염치다. 불파와 관련해서 비정규직 노조가 기획한 집회가 12일과 19일이었다. 이 집회에 참여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나도 이바닥에서 20년인데, 참 별꼴을 다봤다.
먼저 노동위원회 회의, 불파투쟁에 결합하자는 제안에 아이구 노동위원회 반응은 정말 끝내주었다. 별 핑계를 다대며 빠져나갈 구실만 찾았다.
의원실, 12일 현대하이닉스집회가 있어 갈 수 없다고 말하는 보좌관의 낯빛이 환하다. 끝내주는 핑계거리가 있었거든!
금속연맹, 12일은 하이닉스, 19일은 상근자 수련회, 아이구 신나라
민주노총 : 비정규, 미조직담당인 신승철 부위원장 중심으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소위 좌파단위들, 비정규직 투쟁하는데 비정규직 노조사무실에는 슬쩍 혹은 아예 모습을 안보이고 이상욱을 배출한 민투위 사무실에 득실거린다. 말은 뻔지르하거든 노동자의 힘? 이름바꿔라, 이상욱의 힘!
더럽다, 치사하다. 막말좀 더 보태면,  인간이 되라! 이 더러운 것들아






DEO
김광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곳에 가끔 들러서 제가 배울것이 있나하고 들르는 실업 노동자 입니다. 내부적인 상황에 대해 글을 올리셔서 상황이 이렇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출내기인 제가 보기에 님께서 올린 글의 목적, 효과 등을 생각한다면 좀더 말을 아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군요.
힘드시더라도 님같은 분들을 따라 전선에 나서려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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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전진>의 전술 제안


2005 당 대회에 즈음해 <전진>이 당원과 대의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

- 세 가지 투쟁제언과 한 가지 약속 -





2005년, 우리가 놓여있는 정세


원내진출의 감동, 의회 제3당 지위확보, 국민 지지 15%를 받고 있는 명실상부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2004년은 참으로 감동스런 한해였습니다. 그런 감동을 딛고 희망차게 맞이해야 할 2005년, 그러나 우리 민주노동당 앞에는 놓여있는 정세는 매우 준엄합니다.


그 첫째는 ‘사회 양극구조’의 고착화입니다. IMF사태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빈부격차가 확대돼 더 이상 회복이 불능할 정도로 빈부의 양극구조가 고착되었습니다. 급기야 굶어죽는 아이가 나오고, 노인들은 자살하며,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청년들은 실업과 반실업을 오가며 하루에도 몇 번이나 까닭모를 분노와 우울증 사이를 헤매고 있습니다. 개혁을 자처하는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지금 이 나라에는 ‘두 개의 국민’ 체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결과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극도의 한반도 긴장체제’입니다. 이 정세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미국의 대북 압박과 한국 정부의 대미 종속이 빚어낸 것이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북한 정부 역시 핵무기 보유라는 극단적 카드로 선택지를 좁혀나가고 있습니다. 이 긴장체제에서는 다른 누구보다 남북한 민중들이 희생양입니다. 전쟁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반도 민중의 고통은 배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2005년 당 대회, 다음 3대 투쟁을 결의합시다!


2005년 당 대회는 이와 같은 엄중한 정세에서 치러집니다. 당 대회는 이 두 가지 정세, ‘빈부양극화 구조의 고착화’와 ‘극도의 한반도 긴장체제’에 맞서는 민주노동당의 적극적인 실천을 결의하는 장이 돼야 합니다. 이에 <전진>은 당원과 대의원 동지들에게 다음 세 가지 실천투쟁을 제안합니다.


그 세 가지는 ‘비정규직 철폐투쟁’, ‘부유세 도입과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공보육 쟁취투쟁’, ‘평화군축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통일투쟁’ 등 3대 투쟁입니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민주노총이 조직하고, 당은 필요할 때 연대하는 그런 투쟁이 아닙니다. 비정규 노동자 조직은 민주노동당의 집권과제입니다. 즉,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투쟁이 난맥상에 빠져있을 때조차도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투쟁에 몸을 내던져야 합니다. 민주노동당이 먼저 나서서 지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듣고, 그들의 계급적 각성을 촉구하며, 조직적 단결을 지원해야 합니다. 각 지역위원회는 지역의 민주노총과 함께 비정규직 투쟁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할 것입니다. 올해 만들어지는 비정규직 철폐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전당적인 실천을 결의합시다.


<부유세 도입,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공보육 쟁취투쟁>은 우리가 지난 총선에서 민중들에게 했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지난 수십년간 노동자․민중으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었던 이 계급적 구호에, 우리 민중들은 몇 날 몇 일을 고민한 끝에 단 한 명의 의원도 없는 군소정치세력 민주노동당에 자신의 소중한 주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부유세 도입과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공보육 쟁취’를 하나로 묶는 전 당적 실천기구를 건설하고, 각 지역에서 민중들의 뜻을 모아나갑시다. 보수파가 장악한 시의회에 맞서, 민중들을 투쟁의 주체로 우뚝 세워 ‘참여예산제’를 관철시켰던 브라질 노동자당(PT) 당원들의 헌신을 우리 민주노동당원들도 이 땅 민중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민중들이 우리에게 듣고 싶은 것은 ‘299명중 10명’이라는 누구나 아는 변명이 아닐 것입니다.


<평화군축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통일투쟁>을 벌여나가야 합니다. 그동안의 통일운동은 남북교류나 방북성사투쟁 등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의 원칙,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군축’은 얼마나 강조되었습니까. 물론, 평화군축 투쟁은 명백히 미국의 한반도 긴장책동에 초점을 맞춰 진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남북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평화군축투쟁이 오히려 미국의 대북위협을 완화, 종식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임을 민주노동당은 남과 북의 민중들에게 호소하고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상의 세가지 과제를 당 대회에서 결의할 것을 동지들께 제언 드립니다. 그리고, 결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전진>이 드리는 한 가지 약속! 대중을 향한, 실천하는 당 대회를!


우리 민주노동당내에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당원들과 그룹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난 한 해 이들 각 주체들은 대중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투쟁함으로써, 대중들의 지지를 당과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데 충실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 내에만 머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만 매몰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파, 어느 의견그룹을 막론하고 제3당으로서 변화된 위상에 걸맞는 당의 실천과제, 실천양태에 대한 모범을 제출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모범은 단순간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각 의견그룹들과 당원들이 서로의 한계를 인정한 채 머리를 맞대고 공동의 실천과제를 도출할 때에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당에 필요한 것은 ‘당의 다수파가 돼 당권을 거머쥐는 데 집중하는 정파’가 아닐 것입니다. 변화된 정세, 변화된 환경에서 당을 살찌우고, 당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닦는 의견그룹이 필요할 것입니다. 당내 모든 의견그룹, 정치세력들이 이를 위해 경쟁할 것을 제안 드리며, <전진>도 당원과 대의원 동지들에게 실천하는 당 대회를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변화된 조건, 변화된 정세에 맞는 혁신적 투쟁으로 2006년을 맞이합시다!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참으로 많은 변화와 부침을 겪었습니다. 7만 당원, 전국 1백50개의 지역조직, 1천여 분회의 활성화, 시도당의 내실화, 10명의 국회의원과 전문 보좌관 및 정책연구원의 확충, 그리고 각 영역을 나눈 최고위원회와 중앙당 등 민주노동당은 이전까지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조직이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각 영역의 활동에서 서로 긴장관계와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최고위와 의원단 활동의 삐걱거림, 최고위와 정책연구원간의 갈등, 언론과의 긴장관계, 전문인력의 사퇴, 지역조직 재정비를 둘러싼 난맥상 등 많은 문제점들이 그것입니다. 이 많은 문제들은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지만, 한가지만큼은 모두가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정세와 조건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어야 할 과제는 새로운 것인데 그것을 풀 수단은 과거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늘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당의 지도력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과제를 명확히 제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당내 다양한 세력의 견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지도부는 스스로 혁신해야 합니다. 지도부에 있는 동지들은 늘 자신의 견해가 당의 다양한 목소리를 옳게 반영하고 있는지, 과연 통합적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의 지난 모습에서 이러한 통합적 지도력이 없었던 점은 반드시 평가되고, 혁신돼야 할 대목입니다.


둘째는, 당의 지도력의 이원화 현상을 극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당은 최고위원회라는 ‘당 내부적, 조직적, 실질적 지도력’과 의원단이라는 ‘당 외부적, 국민적, 상징적 지도력’이 하나의 지도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회주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도입했던 ‘당직-공직 분리’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통합적 지도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실질적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당원, 대의원 동지들의 헌신 없이는 결코 볼 수 없을 민주노동당의 승리!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민주노동당이 믿는 유일한 힘의 원천은 바로 민중의 열망, 그리고 당원동지들의 땀과 눈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2004년의 성과가 있었지만, 빈부양극화와 한반도 긴장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은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가 흘려야 할 땀과 눈물이 많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땀과 눈물 없는 민주노동당의 승리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05년 당 대회에 참여하는 모든 대의원 동지들에게 연대의 인사를 다시 전하며, <전진>도 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2005.2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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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논쟁 그리고 현장

<사회주의 포럼 5차 토론회>


사회적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논쟁,
         그리고 현장

 


□ 발제 1. : 사회적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 논쟁에 대하여
            박성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 발제 2. : 울산지역 노동운동 사례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 사회 : 남궁원 (사회주의포럼 회원)


□ 토론자 : 김광수 (평등연대 의장)
            양효식 (현장노동자신문 대표) 
            최영익 (미래를 여는 노동자연대(준) 사무국장)


△ 일시: 2004년 12월 11일 (토) 19:00
△ 장소: 숭실대 사회봉사관

 


      

 

 

 

 

                               2004년 ‘사회적 합의’와 ‘노동운동 위기 논쟁’


                                                                  박성인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비정규직 입법 ‘유보’, 그 정치적 함의?

 

0. 12월 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비정규 입법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고, 몇 가지 쟁점(“기간제 3년 경과한 노동자의 법적 지위 둘러싼 논란” 등)을 둘러 싼 요식적인 논란을 거친 후, 이경재 환노위 위원장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 등 8개 법안이 법안 심사소위로 회부됐다”고 선언했다. 이에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가했던 이석행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정부안을 즉각 백지화 하고 비정규직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방안을 원점에서 재검토 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지난 11월 29일 ‘법안 강행 시 재차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던 민주노총이 ‘법안소위 회부’라는 법적 절차의 강행에 대해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취할 지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논의를 거쳐야 할 과제”라고 입을 다물었다.

 

0. 2004년 비정규직 입법을 둘러 싼 노자간 대립의 1라운드는 ‘강행’이나 ‘철회’가 아닌 ‘유보’로 끝났다. 비정규직 입법의 강행을 공언하던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소위 ‘4대 개혁입법’을 둘러 싼 한나라당과의 극한적인 대립과 이라크파병동의안 처리를 위한 한나라당과의 공조 필요성, 그리고 비정규 입법에 대한 노동계 전체의 저항과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이라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이번 정기국회에서의 처리를 유보했다. 소위 ‘4대 개혁입법’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전선과 비정규입법 전선을 분리하여, 먼저 연내에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한 후, 그 정치적 주도권을 가지고 2월 국회에서 비정규직 입법을 처리해 나가겠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0. 우리가 좀 더 세심하게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비정규직 입법 ‘유보’가 현 계급정세에서 갖는 정치적 함의이다.

첫째, 비정규직 입법은 그 처리 시점이 ‘유보’되었을 뿐, ‘철회’된 것이 아니고 ‘법적인 절차’를 밟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고용유연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고용구조를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로 재편하는 것은 국내외 독점자본의 사활적인 이해가 맞물려 있고, 노무현 정권 역시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다.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해가 걸려 있는 이 사안을 누구의 정치적 주도권 아래 처리할 것인가만 남아있고, 그 주도권을 둘러 싼 대립 전선이 소위 ‘4대 개혁 입법’인 것이다. 따라서 ‘유보’는 ‘처리’를 위한 정치적 주도권 확보 과정에 불과하다.

둘째, 노동자민중진영은 비정규직 입법안을 총파업으로 ‘철회’시켜 내지 못했고, 내년 2월투쟁을 기약(?)하면서 급속히 ‘국가보안법 철폐 전선’으로 이동했다. 민주노동당은 ‘4대 개혁입법을 둘러 싼 열린우리당과의 개혁 공조’와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민생 문제의 독자적인 전선 구축’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비정규직 입법저지를 위한 실질적인 총파업을 밑으로부터 조직하지 못했다. 민주노총 역시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입법 강행이 확인된 이후에야 비정규직 입법저지를 위한 총파업투쟁을 결의했지만, 여전히 교섭을 통한 해결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의회 일정에 매달려 총파업 전술을 계속 후퇴시켰다. 그리고 12월 2일 이후에는 ‘비정규직 입법 저지투쟁’에서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투쟁’으로 투쟁의 기조를 전환했다. 한국노총 역시 민주노총과 공동투쟁본부를 꾸리고 겉으로는 총력투쟁을 외치며 천막농성까지 했지만, 투쟁을 진행할수록 투쟁의 성과를 민주노총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딜레마 때문에, 막판에는 ‘노사정 교섭’을 통한 비정규직 입법 문제 해결 가능성에 더욱 힘을 실었다. ‘유보’를 ‘승리’로 평가하는 데에는 바로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라는 투쟁 방향의 선회와 ‘노사정 교섭틀’의 마련이라는 점이 가로놓여 있다.

셋째, 비정규직 입법저지를 위해 10월 열린우리당 점거투쟁, 11월 크레인 농성투쟁 등 선도적인 투쟁을 조직해 온 비정규직연대회의는 비정규직 문제를 정치사회적으로 쟁점화시켜 내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도록 자극은 할 수 있었지만, ‘유보’를 뛰어넘을 수 있는 현실적 투쟁역량은 조직할 수 없었다. 이는 “주요 요구인 법안 폐기 요구안이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총파업 투쟁을 전개 할 것”을 요구한 전노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 투본회의의 결정 그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독자적인 투쟁동력의 조직화가 없을 때, ‘요구’는 ‘요구 자체’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유보’는 ‘철회’시킬 수 있는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동력의 조직화, 그를 위한 계급적 좌파정치세력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력이 구축되지 않은 현실의 표현이기도 했다.

 

 

‘사회적 합의(대타협)’의 새로운 모색과 ‘노동운동 위기 논쟁’

 

0. 민주노총은 12월 총파업을 유보하면서, 내년 2월에 정부가 비정규입법안을 ‘강행’하려 하면 언제든지 다시 ‘총파업’으로 나설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강행’과 ‘총파업’ 이전에, 2004년 12월과 2005년 2월 사이에는 ‘사회적 합의’의 새로운 모색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민주노총 1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에 대한 심의 결과다. 12월 총파업의 유보로 인한 긴장의 해소, 12월 공공연맹, 금속연맹, 전교조 선거 결과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구성에 끼칠 영향,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비정규입법안 수정 가능성 제안 등이 ‘사회적 교섭’ 안건 심의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노총은 최근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를 위해 한국노총이 적극 나설 뜻을 밝히면서 물론 ‘노사정 교섭틀’의 복원을 계속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는, 청와대의 정책 기조의 변화 가능성이다. 이미 청와대는 이정우 정책기획원장을 중심으로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하여, 노무현 정권의 집권 후반기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빈곤화와 양극화로 귀결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재검토하여 경제 사회 정책 전반에 대한 정책 보고서를 1월 중으로 제출할 계획이다. 그 결과에 따라 한국 경제의 발전 전망, 경제정책, 사회정책, 노동정책 등을 함께 논의하는 사회적 합의틀을 새롭게 구축해 나간다는 구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민주노총이 1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전략을 결정하고, 청와대가 경제사회정책의 변화를 논의할 ‘사회적 합의틀’을 새롭게 제안한다면, 비정규직 입법을 둘러 싼 지형은 ‘강행’ 대 ‘총파업’의 구도가 아닌 ‘사회적 대타협’의 가능성이라는 구도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형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노사정위원회는 최근 ‘업종별 노사정협의회’와 ‘지역별 노사정협의회’를 밑으로부터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0. 예상되는 ‘사회적 합의(대타협)’의 새로운 모색은 몇 가지 점에서 지난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대타협)’와 다른 양상을 띨 가능성이 있다.

첫째,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사회적 합의’ 시도는 ‘IMF 정책 기조’안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개방화, 노동유연화를 추진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면, 새롭게 추진될 ‘사회적 합의’는 그러한 정책 기조에 대한 재검토에 바탕하여, ‘새로운’(?) 경제 사회정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의제 역시 노동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경제 사회정책 전반으로 확대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제의 확대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 강화’라는 방향에서 노동문제를 하위 배치시켜 포섭해 나가려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합의 주체를 노사에 한정하지 않고, 시민사회단체들의 적극적인 결합도 예상된다. 이미 2004년 상반기에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빈곤, 양극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 사회정책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경제사회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넷째, 민주노총 역시, 2004년 상반기에 ‘사회적 교섭’전략과 관련하여, 논의 의제를 확대할 것을 요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지난 9월 이후 민주노총은 ‘투쟁이냐 교섭이냐’의 구도를 쟁점화시키면서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회적 의제’를 쟁점화시키고, ‘노동운동의 발전 전략’과 ‘혁신’의 방향에서 ‘사회적 교섭’전략을 추진해 나간다는 방침을 결정한 바 있다.

 

0. 2004년 하반기에 재현됐던 노동운동 ‘위기’논쟁은 바로 ‘사회적 합의(대타협)’을 겨냥한 것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의 전환에 따른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들의 배부른 투쟁’, ‘노동귀족’, ‘그들만의 노동운동’ 등 -에 뒤 이어 전개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노동운동의 ‘위기’ 자체에 대한 진단, 그 원인과 위기 극복 방향을 둘러싸서 이루어졌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었다.

첫째, 현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더 정확하게는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위기’로 진단하고,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내부’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시기 한국 노동운동이 낮은 조직률로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지 못하고,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되어 대기업 이기주의에 갇혀 있어 “함께 연대해야 할 비정규 노동자가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공격”하는 상황이며, 명분 없는 파업투쟁으로 “자신을 옹호해주는 어떠한 사회세력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는 실정”이 위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진단 속에서는 비정규직-정규직으로 분할 고착화시키고, 양극화시키는 근본원인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노동유연화’의 문제는 은폐된다.

둘째, ‘위기’ 진단과 위기원인을 내부로 돌리는 목표, 즉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겨냥하는 것은 노동운동 내 ‘전투적 좌파’, ‘계급적 좌파’를 향하고 있다. 즉 대중운동 내에서의 전투적 계급적 좌파의 고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의 정체,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대표성의 약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의 분할 고착화, 기업별 노조의 한계, 임단협 중심의 파업투쟁의 빈발,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 등은 노동운동이 극복해야 할 사안들이다. 그런데 노동운동 위기 공세는 이러한 문제들이 ‘계급운동 시각’, ‘계급주의’, ‘노동자 중심적 관점’, ‘계급형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과 조직화 전략’, ‘사회주의 이념’ 등이 가로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셋째,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철학과 방식을 아예 전면 혁신하는 일대 전환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그 방안은 논자에 따라 다양하다. 기업별 노조체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성이나 연대성 회복”하고 “산별 노조의 시급한 건설”을 제안하기도 하고, “노동조합의 조합주의,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 그리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극복을 위한 ‘생태적 대안을 찾는 노동운동“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론은 노동운동이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투쟁을 멈추고,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박승옥), “사회적 대타협”(박태주, 김형기), “거시적 코포라티즘과 사회적 대화전략”(최병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0. 민주노총의 정기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사회적 교섭’전략을 둘러싸서,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개됐던 쟁점들이 다시 구체화되어 논란이 전개될 것이다. 이에 계급적 좌파진영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의 조직화만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투쟁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현 시기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한다면, “대공장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계급적 투쟁의 주체로 서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강력한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며, “혁명적 정치와 조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는 사회주의 정치진영(계급적 좌파)의 ‘위기’이기도 하고.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대응은 계급적 좌파 정치의 혁신과 연대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제언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울산에서의 계급적 노동운동, 또 한번의 갈림길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편집인)
                                                                                                     2004년 12월 11일


12월 9일 오후 2시반 SBS 인터넷 속보를 시작으로 하여 방송3사를 비롯한 각 언론사들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8천여명 전원이 노동부에 의해 불법파견으로 판정되었다는 뉴스를 앞 다투어 보도한다.

지난 8월 20일 현대자동차 노조가 울산공장 101개 업체 및 전주공장 12개 업체에 대하여 불법파견 진정을 제기한 것에 대한 판정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있었지만, 노동부는 아직 공식 발표를 하지 않은 상태다. 사실은 노동부가 진작 판정 결과를 내려놓고도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어왔던 것인데, 판정 결과를 입수한 기자들이 노동부의 공식 발표를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보도를 해버린 것이다.

노동부가 진정 결과를 발표해야 할 법정 기한은 애초 10월 19일이었으나 그동안 차일피일 연기를 거듭하여 거의 두 달을 늦춰왔다. 현자비정규노조가 먼저 진정을 제기했던 12개 업체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꼼꼼한 현장조사를 거쳐 9월 22일에 내린 바 있기에, 거의 동일한 조건에 있는 업체들에 대한 판정이 이토록 늦추어질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판정 결과 발표에 대한 노동부의 ‘부담’ 혹은 결과 발표를 막거나 최대한 늦추려는 누군가의 ‘압박’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대규모 불법파견 판정을 보도한 12월 9일자 MBC 9시 뉴스데스크는 이어 “노사 모두 당혹”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MBC 9시 뉴스데스크] 노사 모두 당혹

 

● 앵커: 그러나 노동부의 이번 판정에 기업들은 현장 사정을 잘 모르는 결정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정규직화 문제입니다. 전재호 기자입니다.

● 기자: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는 근로자 3명 가운데 1명은 현대자동차 소속이 아닌 하청업체 직원입니다. 이들은 정규직과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부는 이를 불법파견이라며 고발했습니다.

  또한 현대자동차는 하청업체 직원의 임금과 근무시간 등을 직접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노동부가 불법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런데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처럼 하청업체 인사와 노무에 사실상 개입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법파견을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노동부의 이번 결정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 아니냐며 기업들은 반발하고 있고 대기업 노조들도 의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불법을 그만두려면 비정규직을 정리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고민입니다. 울산지역의 노조가 워낙 강하기 때문입니다.

  노조도 속사정은 대기업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바뀌는 규모가 크다면 고용불안이 가중된다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부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현실을 감안해 법대로 처리한 것이 정당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아 노사정 간에 마찰이 불가피합니다.

  MBC뉴스 전재호입니다.

 

 

노사 모두 당혹!

기자는 정곡을 찌른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전혀 잘못 이해한 것인가?

 

9월 22일 첫 번째 불법파견 판정이 나왔을 때, 현대자동차노조가 포함된 <현대차 연대회의>는 즉각 “불법파견 판정받은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화”를 요구한다며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그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는 상황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간의 속사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2004년 3월초 금속연맹 비정규직 사업 관련 수련회에 참석한 현대자동차노조 상집간부는 “현대자동차에는 불법파견이 없다”는 용감무쌍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금속연맹이 2004년에 불법파견 릴레이 진정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현대자동차를 핵심 사업장으로 설정하려는 것에 강한 반대의견을 제기한 사실이 있다.

이후 현대자동차노조는 금속연맹의 불법파견 집단진정 사업 추진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5월 24일 열린 금속연맹 중집에 참석한 현대자동차노조 임원은 5월 27일로 예정된 금속연맹·현자비정규노조·아산하청지회 공동의 불법파견 집단진정 및 기자회견을 중단하라고 매우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현대자동차노조의 강한 압력을 받은 금속연맹이 집단진정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으나, 비정규노조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집단진정 및 기자회견이 겨우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4년 8월 15일자 <매일노동뉴스>에는 “현대차 불법파견 현장조사 정규직 노조가 막고 있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5월 27일 금속연맹과 현자비정규노조·아산하청지회가 공동으로 불법파견 진정을 제기한 것과 관련한 현장조사가 7월 29일부터 시작되었으나 노동부 조사관들이 사무실에서 서류검토만 할 뿐 현장에 직접 나가지를 않는 상황이 보름 넘게 계속되어 그 이유를 따져 묻자 정규직 노조가 현장조사를 막고 있으며 “현대차노조가 계속 조사를 막을 경우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한다고 보고 고발조치하는 것까지 고려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 현자노조의 반론이 있지만, 이 기사가 나간 직후인 8월 17일 오후 전격적으로 현자노조가 8월 20일자로 101개 업체 불법파견 집단진정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하게 되고, 8월 18일부터 노동부 현장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겨 놓는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기자의 상황 오판을 입증하는 것으로 사태가 전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연치 않은 오해들도 모두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만큼 ‘현대자동차 1만여 사내하청의 불법파견 판정’이라는, 이번에 우리가 맞닥뜨린 지점은 한국 노동운동의 향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계급적 단결로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정면돌파 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현대자동차를 넘어 한국 노동운동 전반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구축해 내는 더없는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된 노동운동의 후퇴를 일거에 뒤집어엎는 새로운 도약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기자의 진단대로 정규직노조가 불법파견 판정을 내심 부담스러워 하고 정규직화 투쟁을 회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시늉만 내는 식으로 나간다면, 상황은 매우 힘겹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물론 치열한 투쟁 속에서 결국 얼마간은 뚫고 나아가는 부분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토대 위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의 전통과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갈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힘겹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갈림길에 서기까지,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울산 노동운동은 지난 시기 여러 차례 중요한 갈림길들을 통과해 왔다. 매우 결정적인 패배와 배신도 있었고, 폐허에서 움터나는 새싹처럼 소중한 전진도 있었다.

큰 전환점이 되었던 1998년 이후 현 시기까지 과정을 요약하여 돌아봄으로써, 지금 맞닥뜨린 또 한번의 갈림길이 갖는 의미와 올바른 선택의 방향을 함께 정리할 수 있도록 해보자.

 

 

(1) 첫 번째 갈림길 : 정리해고 저지 투쟁의 패배 (1998년)

 

이른바 IMF 경제위기로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던 1998년 여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종업원 4만 6천 명 (조합원 3만 4천 명) 가운데 1만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는 사측에 맞서 36일간의 전면파업을 전개한다.

당시 노동조합은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경에 의한 일자리 나누기’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많은 조합원들이 사측의 정리해고 위협에 굴복하여 이른바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강제퇴직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였지만, 그 못지않게 많은 조합원들이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노동조합의 깃발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뭉쳤다.

결국 사태는 정면충돌로 치달았다. 사측은 정리해고 대상자 4천여 명에 대한 개별 명단 통보에 나섰고,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의 폭발적인 열기를 바탕으로 노조는 단일 자동차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울산공장을 완전 장악한 채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유난히도 심했던 장마철 폭우도 태풍도 5천여 명 파업대오를 흩트려 놓지 못했다. 울산을 새까맣게 물들였던 1만 명 이상의 전경병력도 오히려 천 명 정도 늘어난 파업대오 전체가 쇠파이프와 온갖 비장의 무기들로 무장하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현대자동차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아니 초국적 자본 및 김대중 정부까지 버티고 있는 총자본에 맞서 정리해고를 저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러한 순간들에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정리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불타고 있었으며, 그러한 희망의 중심에는 노동조합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패배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파업대오 대다수의 완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최소화된 정리해고’란 이름으로 277명의 정리해고 수용을 요지로 사측과 합의를 도출했다. 마지막까지 투쟁에 함께 했던 나머지 정리해고 대상자 2천여 명은 1년 6개월의 무급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 년 후에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당시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정부여당을 대표하여 적극적인 중재(?)에 나선 결과였다.

8월 24일 아침, 노동조합 사수대가 노동조합 집기들을 끌어내서 불태우고 수천 명 파업대오가 황망한 모습으로 현장을 빠져나가며 그렇게 파업은 끝났다. 파업이 끝나고 1주일 후 노사합의가 조합원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반대 63.6%)되었지만, 그러나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추인되지 않은 노사합의는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되었다.

그렇게 조합원들은 패배했다.

그런데 그 패배는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다. 수천 명 조합원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또 가족들까지 나서 그렇게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결국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매우 뜻깊은 교훈(?)을 포함하는 패배였다.

특히 파업투쟁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던, 즉 스스로의 실천과 참여로 민주노조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수천 명 조합원 가운데 대부분은 설령 파업이 공권력에 의해 박살날지언정, 노동조합이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을 스스로 폐기하는 것을 결코, 정말로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정리해고를 수용한 노동조합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부정해 버린 것이었다.

결국 1998년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서 노동조합과의 ‘약속’에 인생을 걸었으나 패배한, 그것도 노동조합 지도부가 약속을 파기하고 배신함으로써 패배한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회의와 절망이 깊이깊이 아로새겨졌다.

 

 

(2) 두 번째 갈림길 : 사내하청 대거 투입에 대한 노사합의 (2000년)

 

1999년을 지나며 현대자동차는 내수와 수출 공히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판매량을 회복해 나갔다. 생산량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회사는 다급해졌다. 1년 6개월 무급휴직자들이 1년여 만에 현장으로 조기 복귀했다. 도저히 복직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정리해고자들도 (그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투쟁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상황의 변화에 힘입어 생각보다 빨리 복직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태부족이었다. IMF 이전 즉 1997년 수준 이상의 생산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으나, 1998년에 희망퇴직으로 8천여 명을 쫓아냈고 그 이전 1997년에는 5천여 명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소리 소문 없이 쫓아낸 상태였다. 불과 2년여 만에 1만여 명 이상의 인력이 다시 충원되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1998년의 노사합의에 따르면 희망퇴직자를 우선적으로 재고용(리콜)해야 했다. 그러나 사측은 1998년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기존의 근속마저 인정해 주게 될 정규직을 재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빈 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사측에게 있어서는 사태가 거기까지 진행되어야 1998년이 완성되는 셈이었다.

문제는 노동조합이었다. 사측의 입장에서 급격한 생산 확대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된 상황은,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1998년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호조건이 열린 셈이었다.

 

1) 정리해고-무급휴직-희망퇴직으로 밀려났던 노동자들의 현장 복귀 및 그래도 부족하면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도록 관철시킨다.

2) 불과 2년 만에 재고용하게 될 노동자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강요했던 사측으로부터 강도 높은 사과와 반성을 받아낸다.

3) 향후 또다시 고용위기가 왔을 때 노동조합이 제기했던 바처럼 고용보장의 대전제 위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경에 의한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도록 사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아낸다.

 

이것이 마땅히 노동조합이 가야 할 길이었다. 설령 힘의 한계가 있어 온전히 관철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노동조합이 내걸고 힘닿는 데까지 싸워야 할 방향이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노조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노동조합 위원장은 전체 조합원 집회에서 핏대를 올리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사내하청을 들여 놓겠다”는 널리 알려진 발언을 서슴없이 뱉어내고, 아직 1998년의 패배가 안겨준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현장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수만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을 뿐) 집행부의 기조를 사실상 수용한다.

결국 2000년 6월 현대자동차노조는 현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부족한 생산인력은 비정규직(사내하청)을 대거 투입하여 해결하기로 사측과 합의한다.

이른바 ‘완전고용보장합의서’라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이 합의서는 향후 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정규직의 완전 고용을 보장한다는) 점을 내용적으로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희망퇴직으로 밀려나간 옛 동료들의 재고용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하는 것이었다.

 

 

(3) 세 번째 갈림길 : 7·5 총파업 철회 (2001년)

 

효성·태광·민주버스를 비롯한 다수 중소사업장들의 장기파업, 울산지역 전체를 휘감았던 격렬한 가두투쟁과 연대파업.

2001년 울산총력투쟁은 IMF 시대 이후 파상적으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집중되어 터져 나온 투쟁이었다.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효성 투쟁을 계기로 10여년 만에 되살아 난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활발한 연대’야말로 2001년 울산총력투쟁의 핵심 동력이었다.

특히 하청화 저지 및 노조탄압 분쇄를 위해 돌입한 효성노조의 파업투쟁을 공권력이 짓밟던 6월 5일, 자발적으로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튀어나와 7백여명이 밤을 새고 2천여명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산 시내 곳곳에서 가두투쟁을 전개하던 당시의 열기는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

솟구치던 투쟁의 열기는 6월 12일 화섬3사 및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으로 발전하였고, 6월 20일경 ‘울산노동자 총파업’이 민주노총 수준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는 국면으로 나아간다. 현대자동차노조가 파업을 결의하면서 울산 총파업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7·5 총파업이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노조는 7·5 총파업을 직전에 철회하며 전선에서 이탈해 버렸고, 이는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사실상 총파업은 무산되었다. 승리적인 마무리를 눈앞에 두었던 효성과 태광은 7·5 총파업의 무산으로 인해 대책없이 장기파업으로 치닫는데, 한 번 무너진 연대투쟁의 전선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다. 결국 효성과 태광은 수십·수백명의 해고자가 수백억의 손배가압류를 얻어맞고 현장에는 민주노조의 뿌리가 뽑히는 비참한 패배를 맞이한다.

IMF 시대 이후 결정적인 기회로 다가왔던 ‘2001년 울산총력투쟁’은, 만일 승리했다면 울산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고양으로 연결되었을 것이지만, 패배한 결과 효성·태광 등 주요한 노조들을 붕괴시키며 울산 노동운동을 매우 위축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저버린 ‘대공장 실리주의’의 전형이라 할 현대자동차노조의 7·5 총파업 철회는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 패배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5 민주노총 총파업의 핵심 동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현대자동차노조는 7월 4일 확대운영위원회 결정으로 총파업 참여를 철회했다. 현대자동차노조의 총파업 철회 결정은 민주노총 7·5 총파업에 막판 찬물을 끼얹으며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6월 5일 효성노조 폭력경찰 투입 이후 전개된 격렬한 가두투쟁에는 현대자동차노조의 간부 및 현장 활동가들도 어느 노동조합 이상으로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두투쟁에 한 번 이상 참여한 인원이 적어도 1천명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자동차노조는 8일, 12일, 20일에는 잔업거부 지침을 내리며 지역 집회에 조합원의 참여를 조직하기도 했다.

6월 21일 현대자동차노조 임시대의원대회는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 쟁발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날 현대자동차노조의 만장일치 쟁발결의는 다음날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건 7월 5일 정치총파업을 결의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6월 29일 현대자동차노조는 확대운영위를 열어 7월 5일 총파업 돌입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총파업 관련 세부방침은 7월 3일 확대운영위원회를 다시 열어 결정하기로 하고, 이날 회의에서는 7월 2일부터 6일까지 상집간부 철야농성, 대소위원 출근투쟁, 임원 현장순회, 사업부별 교육홍보 및 보고대회 등 총파업 조직을 위한 실천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렇게 확대운영위에서 총파업 돌입이 확인되는 ‘공식적인’ 상황과 달리 과연 현대자동차노조가 총파업 돌입을 결행할 수 있을지 우려를 갖게 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외주 모듈화로 인한 고용불안 때문에 합리화 공사 저지 투쟁을 전개 중이던 승용1공장 대의원회가 6월 27일, 총파업 기간이 포함되어 있는 7월 1일부터 17일까지 물량조절 및 합리화공사를 위한 휴가를 가기로 회사와 전격 합의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합의로 승용1공장 조합원과 연관 부서 조합원 등 5천여명이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조 조합원의 약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6월 26일 총파업 결의를 다지기 위해 열린 민주노총 울산본부 임시대의원대회에 현대자동차 노조 소속 대의원들의 참석이 매우 저조했던 것, 6월 27일과 30일에 있었던 지역 집회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본조 조합원들의 수가 100명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 것도 ‘총파업 불참’의 전조를 보여주는 징후들이었다.

7월 3일 열린 현대자동차노조 확대운영위는 애초 총파업 관련 세부방침을 확정하기 위한 회의였으나, 갑작스럽게 총파업 철회 주장이 임원들로부터 제기되면서 한차례 정회를 거치며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확대운영위는 총파업 결행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회의를 갖게 되었다.

확대운영위 논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현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7월 4일 아침에는 “대의원 만장일치 쟁발결의, 운영위는 번복할 수 없다”(4공장 소위원회), “확대운영위는 총파업을 결행하라”(자주회) 등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7월 4일 10시부터 다시 시작된 확대운영위는 여전히 논란을 거듭하다가 오후 1시경 마침내 총파업을 철회하고 간부파업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확대운영위가 총파업 철회 결정을 내린 직후부터 현대자동차노조의 인터넷 자유게시판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4일 자정까지 12시간 동안 무려 400개가 넘는 글이 쏟아져 올라와 확대운영위의 총파업 철회 결정을 성토했다.

7월 5일 아침 현대자동차노조의 상집간부들은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배포했다. “이 투쟁을 우리가 전부 떠안고 가기에는 노동조합 공백기가 또다시 올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위원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7월 5일과 6일 확대운영위의 총파업 철회 결정을 성토하는 유인물과 대자보가 현장에 쏟아졌다.

“7월 5일 총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한 결과와 조합원 대중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9대 집행부를 출범시킨 조직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민투위, 5일)

“약속을 저버리면 신뢰는 없다.”(민노투, 5일)

“운영위 결정 무효화하고 총력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투쟁지도부 구축을 위해 집행부 총사퇴를 충심으로 촉구한다.”([다시 머리띠를 묶으며], 5일)

“전국 노동형제에 대한 배신행위… 7월 총력투쟁에 현자노조는 전면에 나서야 한다.”(2공장 대의원회, 6일)

“집행부 운영위원 총사퇴와 7월 민주노총 총력투쟁 책임질 비대위를 구성하자.”(활동가 44명 기명 유인물, 6일)

결정적인 순간에 현대자동차만의 실리를 찾기 위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저버리자고 했던 위원장의 ‘결단’은 현장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비록 총파업은 무산되었지만, 현장 속에 노동운동의 희망은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4) 잇따른 패배와 배신이 낳은 결과들

 

잇따른 갈림길에서 반계급적 선택을 거듭한 결과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2000년대 초반 울산지역의 현장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2001년 투쟁의 패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화섬 사업장 중심의 남구 노동운동 전반이 거의 몰락했다. 1990년대 후반 급격하게 후퇴한 현대중공업의 동구 노동운동 또한 노조 비리 사건을 계기로 하여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현대자동차와 몇 개의 부품협력사가 있는 북구 노동운동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외양과 달리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의 실상도 깊이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과 비참한 노동조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사내하청)이 급격하게 확산된 것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와 사측의 합의는 명목상 IMF 직전 비정규직(사내하청) 비율인 16.9%까지 비정규직 투입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 투입이 개별 선거구별로 어떤 통제장치도 없이 수시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불과 1년여 만에 비정규직이 1만여 명(전체 노동자의 30%) 수준으로 급격히 확대된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임금, 작업복·안전화 같은 것들에마저 적용되는 온갖 차별, 산재는 엄두도 못 내고 월차 한번 마음 놓고 쓰지 못하는 억압, 심지어 수시로 욕설과 반말이 횡행하는 비인간적 대우. 게다가 정규직 노동자들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느라 겪어야 하는 노동강도에서의 차별···.

비정규직이 겪어야 하는 온갖 차별과 비참한 노동조건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결코 하나의 계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 조직화되지 못했던 비정규직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현장의 1/3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의 현실이 방치되고 은폐되는 상태가 3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2) 반계급적인 ‘조합원 정서’의 포로가 되어, 과로사·근골격계·모듈화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정규직

자기 부서에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덜 수 있다는 생각,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그들에게 넘기고 정규직은 상대적으로 편한 공정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 1998년의 패배로부터 상처 입은 정규직 조합원들의 마음은 이기적인 유혹 앞에 급속하게 허물어진다.

급기야 새롭게 인원을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전환배치를 통해 정규직 조합원을 받으려는 대의원보다는 비정규직을 들여오는 대의원이 다수의 조합원들 사이에서 ‘능력 있는’ 대의원으로 평가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규직 투입을 고집하다가 조합원들과 심하게 다투는 대의원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심지어 그로 인해 차기 대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일마저 드물지 않은 사건이 된다.

활동가들 스스로가 애초에 충분히 원칙적인 관점과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조합원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비정규직을 고용보장과 노동강도 완화의 도구로 여기는 반(!)계급적인 태도가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활동가들은 이른바 ‘조합원의 정서’에 갇힌 포로가 되어갔다.

같은 현장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고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이들의 고통을 함께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3년여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현대자동차는 매년 생산과 판매에서 신기록을 달성하며 순이익만 1조원을 훌쩍 넘기면서 순풍에 돛단 듯 질주를 거듭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지점에서 계급적 관점과 태도가 무너진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문제 앞에서도 대단히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사상 최대의 호황 속에 생산라인이 정신없이 돌아가게 되자 주야맞교대로 주당 60~70시간을 뛰게 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과로사로 1년에 10여명의 노동자가 세상을 떠나고, 근골격계 골병 환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실질 노동시간 단축’이나 ‘노동강도 완화’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더 많은 임금과 성과급을 따내는 것에 철저히 갇혀 버렸다. 신차 투입에 따른 협상은 철저히 회사 입맛대로 외주 모듈화를 확대하고 라인 속도를 높여 비정규직을 추가 투입하는 양상으로 관철되어 나갔다. 노동조합 선거는 누가 더 많은 돈을 챙겨줄 것인지 경쟁적으로 목표치를 제시하는 이야기들로 도배가 되어 버렸다.

그 즈음 어느 진보적 월간지가 “울산은 이제 노동운동을 포기하는가?”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지만, 활동가들은 좀처럼 그들이 빠진 수렁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게 된 ‘조합원의 정서’라는 수렁에서 말이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1998년의 패배가 안긴 깊은 상처에다가 주요한 고비마다 계급적 배신을 거듭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차곡차곡 쌓였다. 노동조합의 외양은 그럴듯하게 유지되었지만, 정규직 조합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노동조합의 위상은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고용 위기 앞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은 이제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순익만 1조원이 넘는 ‘매우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정규직 조합원들은 언제 잘려나갈지 모른다는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역설 속에 살게 되었고,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큰 만큼 ‘벌 수 있을 때 더 많이 벌어야 한다’면서 더욱 돈에만 매달리는 악순환에 빠져 들었다.
이것이 길게 보아 살 길이 아니고 잘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어차피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이라면 (그나마 벌 수 있을 때) 돈이나 잘 벌게 해주라는 쪽으로 다수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마냥 흘러갔다. 여기에 비정규직을 같은 노동자로 여기지 않는 이기적인 심성들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결합되는 양상이었다.

패배감, 실망감, 이기적인 유혹 등으로 범벅이 된 반(!)계급적인 ‘조합원의 정서’는 노동운동과 활동가들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더욱 고착화하는 가운데 이기적이고 돈밖에 모르는 개인주의를 점점 강화하며 정규직 노동조합의 밑뿌리를 파괴하는 양상으로 무섭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밑바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으로 인해, 노동조합은 과로사·근골격계·모듈화 등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실질적인 대응을 전혀 해내지 못하면서 마냥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3) 내면의 정당성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현장 활동가들

사태는 심각한 악순환의 구조로 전개되었다.

해고와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강렬한 신념과 치열한 실천으로 10여년을 살아왔던 현장 활동가들, 조합원들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활동가들은 이제 조합원을 이끌고 나아갈 방향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조합원의 정서’에 위압당한 활동가들이 갈수록 원칙적인 태도로부터 멀어져 가면, 그런 활동가들을 바라보는 조합원들이 더욱 회의와 환멸을 느끼고 보수화되어 가는 그런 식이었다.
전국 최강의 노동조합이라는 외양은 유지되었지만, 여기저기 곳곳으로 갈라진 틈은 점점 더 깊고 넓어져 언제 송두리째 허물어져 버릴지 모르는 상태로 치달아가는 그런 세월이었다.

 

 

(5) 네 번째 갈림길 : 비정규직의 주체화 (2003~2004년)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속 업체 관리자로부터 아킬레스건을 절단당하는 ‘식칼테러’를 당한다. 그는 업체 규정대로 5일 전에 월차사용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자 항의를 했는데, 비정규직 주제에 감히 권리를 주장한 대가로 관리자로부터 심하게 얻어맞고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항이라고 느꼈는지, 관리자가 깡패들을 데리고 병실을 찾아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세 번 그어놓고 간 것이다.

법정 최저임금을 넘나드는 극심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높은 노동강도, 파리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극심한 고용불안, 기본적인 임금이나 성과급은 물론이고 명절 휴가비나 선물 같은 것에서조차 극명하게 대비되는 차별대우, 막말과 횡포가 만연하는 억압적인 현장 분위기.

그렇게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마저 받지 못하면서도 3년여의 세월 동안 그저 숨죽이고 살아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으나, 식칼테러의 충격은 마침내 그들을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다.
아산공장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당황한 현대자동차는 해당 업체 계약해지 및 소속 노동자 전원의 신규업체 고용승계를 약속했다. 일주일 후 아산공장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아산공장의 사건들은 현대자동차의 주력 생산거점인 울산공장에도 바로 영향을 미쳤다. 한 달 후 울산공장에서도 ‘비정규직투쟁위원회’가 공개적으로 설립되었고, 다시 두 달 후인 7월초에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울산공장에서도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렇게 비정규직 노조가 출범하고 1년 정도는 생존을 둘러싼 투쟁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튼튼한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 채 비정규직 대중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소수의 과감한 결단으로 출범한 노조였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이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비정규직 대중이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규직 노조가 노조신문에 비정규직 노조 출범을 사실상 반대한다고 선언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맞고 번복하는 소동도 있었다. ‘힘을 가진’ 정규직 노조의 비협조적 태도에 실망한 비정규직 대중의 분위기가 움츠려 들면서 결국 비정규직 노조의 조직률은 10%선(1천명)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태로 정체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는 비록 소수지만 해고와 구속을 비롯한 온갖 탄압에 맞서 과감하고 끈질긴 투쟁들을 전개하면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1년을 넘어선 2004년 중반 이후 비정규직 노조는 의미 있는 승리와 성과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6월 24~25일에는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2,200여명의 비정규직 대중을 참여시켜 냈다. 7월 1일 실제 파업은 50여명 소수의 참여로 실패했지만,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이 종결된 이후 사내하청 처우개선에서 제외된 2·3차 하청 노동자들이 7월 16일 독자파업과 철탑농성을 전개하여 사실상 동일적용을 관철시켜 내며 정규직 노조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목표를 달성해 냈다.

곧이어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노린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안기호 위원장의 38일 단식을 비롯한 두 달여의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6개월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응 끝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정을 끌어냄으로써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대중의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갈 발판을 마련하였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총력투쟁본부로 전환한 현자비정규노조는 10월말부터 11월초 사이에 업체별 간담회를 대대적으로 조직한 데 이어, 11월초중순에 각 사업부별로 보고대회를 개최하여 각 사업부 보고대회에 주야간 각 조별로 100명 내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집결시켰고, 이어 11월 24일 및 12월 1일 두차례 울산공장 본관 항의집회를 개최하여 200~3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12월 1일 제2차 본관 항의집회는 3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결하여, 노조 설립 이래 1년 5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명실상부한 대중집회를 성사시키게 되었다.

 

한편 울산 노동운동에서 2003년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해였다. 2003년 이래 최근까지 울산 지역에서는 현자비정규노조, 현중하청노조, 울산건설플랜트노조, 구몬학습지노조, 자치단체비정규직노조 등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이 잇달아 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연대 또한 완연히 비정규직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미 2000년대에 들어설 무렵 ‘비정규직’이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일반적인 존재형태로 되어 버렸다면, 이제 바야흐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6) 또 하나의 갈림길 - 준비되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단’

 

그런데 지난 1년 6개월여 동안 현대자동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본격화하는 국면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은 자기 방향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비정규직을 고용보장의 도구로 인식하는 반(!)계급적 태도’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연대’라는 양 극단 사이를 오가며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조직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늦게나마 비정규직 대량 투입이 몰고 온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며 조금씩 반전을 모색하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 노조가 투쟁 속에서 성장해 오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지원하고 연대한 정규직 활동가들이 없었던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자동차 정규직 활동가들에게 노조를 설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대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실질적인 계급적 연대에 나선다는 것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당혹스러운 과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로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단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들이 합의했던 사내하청 투입을 놓고 노동부마저 ‘불법’이라고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비정규직(사내하청)을 고용보장과 노동강도 완화의 도구로 여겨 왔던 지난 4년여의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방향 재정립이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노동운동’을 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시대의원대회가 있던 20일 아침 만난 전직 노조간부는 현재의 상황을, 전환을 위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국면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 집행부와 전직 위원장들까지 나서서 불법파견을 사용한 것을 노조가 합의 또는 묵인해 준 사실에 대해서 ‘대국민 사과’를 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지도부들이 ‘대오각성’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아 우리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만들어지고 실리주의니 뭐니 해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선택을 지지하고 따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전직 노조간부’의 고민처럼, 지금 현대자동차노조는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국면에 놓여 있다.

 

아마 다음 주 중으로는, 울산공장 101개 업체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이 공식화될 것이다. 현자비정규노조·아산하청지회·전주하연투 등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주체들은, 울산공장의 전면적인 불법파견 판정 이후에도 여전히 현대자동차가 정규직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생산타격을 포함한 총력투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현대자동차노조의 태도가 어떠하든 비정규직 주체들은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비정규직만의 독자적인 투쟁으로 전개된다면 그 위력은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현대자동차노조가 명확한 결단을 내린다면, 1만여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그동안 쌓인 분노들을 화산처럼 폭발시킬 것이다.

 

도저히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현대자동차노조는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과감한 반성과 대전환을 통해 전진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중핵으로 다시 자리 잡을 것인가,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하지 못함으로써 고립과 파탄의 길로 치달을 것인가?

 

비관과 희망이 교차하는 또 하나의 갈림길에서, 한국 노동운동 전반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구축해 내는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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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사회주의 국가와 당 그리고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전망

<빛나는 전망 사회이론연구소 기획세미나>

         맑스주의, 사회주의 국가와 당 그리고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전망

 


제2주제 <레닌과 당> 초청발표 세미나 발제문

 


              레닌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

                                                      김 세균

 

 

1. 주요저술들

 

1) 1870.4.10.- 1924.1.21. / (급진적)인민주의적 소양, 이후 맑스주의자로

 

2)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혁명활동에 참여(1898년에 결혼): 인민주의자들 및 합법적 맑스주 의자들과의 투쟁의 단계 (Plechanov, Lenin 등이 주도)

"인민의 벗은 누구인가?"(1894): Lenin의 최초의 주요저술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1898-1900)
"우리는 어떤 유산을 청산했는가?"(1902)

 

3) 당건설과 멘세비키와의 투쟁 -민주혁명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형태와 과제:

"무엇을 할 것인가?"(1902)
"일보전진 이보후퇴"(1904)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시작"(1905)
"민주혁명에서 사회민주당의 두 개의 전술"(1905)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4) 전쟁시기의 혁명적 정치:

"사회주의와 전쟁"(1915년 여름) - '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 (1915-16년 작성)
"혁명적 상황의 징후들"(1915년 여름)
[철학노트] (1914-15)

 

5)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권력장악의 문제:

"현시기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4월 테제)(1917년 4월)
"이중권력"(1917.4.9.)
[국가와 혁명](1917. 8. - 9.)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1917. 9.10.- 14.)
"볼세비키는 국가권력을 보유할 수 잇는가?"(1917. 9.)

 

6) 소비에트국가의 진로와 사회주의 건설 문제:

"소비에트정부의 긴급한 과제"(1918.4.)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91918. 10. - 11.)
"위대한 착수"(1919.5.)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1921.3.15.)
"현 시기와 사회주의의 완전승리 이후에 있어 금의 중요성"(1921.11.6. - 7.)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1922.3. - 4.)
"협동조합에 관하여"(1923.1.)
"노농감독부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1923.1.)

 

7) 세계혁명과 식민지-민족문제와의 대결

 

 

2. 레닌에 대한 평가의 문제

 

- 레닌을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운동사에서 가장 탁월한 전술가-전략가"(F. Fischer)로 보는 데에는, 그리고 레닌에 의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전통'이 복원되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레닌의 찬양자이든 반대자이든 모두 견해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론가 (또는 철학자)로서의 레닌에 대해서는 , 그리고 '맑스주의의 레닌주의적 발전단계'를 설정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 레닌 사후 맑스주의의 레닌주의적 단계 설정 여부는 주요한 논쟁점을 형성했다. 이후 그러한 단계 설정이 당의 공식견해로서 채택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레닌주의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발전단계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시기의 맑스주의, "우리 시대의 맑스주의이며, 세계노동자계급의 유일하고 완벽하고,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 이론", '현대의 맑스주의는 맑스-레닌주의이다' 등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그간의 소련의 공식견해는 레닌이론 발전과정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 레닌의 신격화와 레닌이론의 신비화-교리화(속류화), 레닌이론의 사실상의 스탈린주의화와 같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레닌에 의한 이런 평가는 소련의 경우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와 흔들리다가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초기: '레닌주의로의 회귀' -> 중기: 레닌의 문제점 -> 후기: 스탈린의 원조로서의 레닌 -> 레닌의 원조로서의 맑스)

- 이와는 달리 '이론가'로서의 레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레닌 사망 직후부터 있었다. Rjazanov에 의하면, 제국주의현상에 대한 Hilferding, Luxemburg 분석의 이론적 탁월성과 독창성에 비해 볼 때, 레닌의 분석은 그렇지 못하며, 그의 공헌은 보편적인 혁명철학으로서의 맑스주의를 러시아에 적용하여 그것을 계획된 혁명으로 발전시킨 실천전략을 수립한 데에 있다.(이와는 달리 그간의 소련의 공식견해는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이론적 정초가 놓인 맑스주의의 방법과 이론을 레닌이 완전한 형태로 발전시켯다고 평가한다) Lenin und Philosoph의 저자인 A. Pannenkeok나 H. Gorter 등의 서구 좌파공산주의자들과 그외 인본주의적 서구 맑스주의자들 역시 '이론가로서의 레닌'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 맑스주의의 레닌주의적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옳은 지의 여부를 떠나서, 레닌의 실천과 이론이 맑스주의 발전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Lenin의 이론과 실천에는 많은 역사적-시대적 한계가 존재하지만, Lenin의 이론-실천을 무시하고 맑스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레닌을 이해함이 없이 혁명적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혼'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3. 레닌이론의 제 측면들

 

- 맑스주의자로서의 레닌의 최초의 이론적 활동은 처음에는 주로 정치적 반동의 강화 , 자본주의의 예상을 넘는 발전 및 노동자투쟁의 고양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적 테러리즘과 결부된 농촌계몽주의에서 개량주의세력으로 전락한, 미하일로프스키(N. K. Michailowski) 등의 "인민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비판 및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려 자본주의발전을 위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한, 스트루브(Struve), 불가코프(Bulgakow) 등의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인민주의자들 및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투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짜리즘체제 말기에 고양되기 시작한 노동자-농민대중의 혁명적 투쟁에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제공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노동운동과 융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그런데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 표명, 이로부터 자본주의적 발전을 경유함이 없이 러시아의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수립해야 한다고 구상한다.

특히 인민주의자들과의 결별은 레닌의 경우 '자신의 과거의 정치적-이론적 양심과의 결별'(인적 관계의 청산도 포함)의 의미를 지닌다. 다른 한편 1890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로서 확고히 뿌리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1897년 당시 동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있던 레닌은 "현 시기에는 ...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천적 행위가 가장 긴급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적 측면은 이미 첨예한 논쟁의 시기를 지났기 때문이다. ..... 사회민주주의자의 이론적 견지는 이제 그 주요하고 근본적인 특징에서 충분히 설명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평가내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레닌이 이 시기에 수용한 맑스주의는 크게 보면 카우츠키주의로 대변되는 제2인터내셔날 마르크스주의와 그 러시아적 대변자라 할 수 있는 플레하노프의 마르크스주의관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 당시 러시아에서는 한편으로는 자본-임노동과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지주계급( 및 이를 지탱한 짜르체제)과 광범위한 농민과의 모순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민주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음이 입증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레닌의 마르크스주의관은 1905년의 혁명 전후의 고양된 대중투쟁과 특히 예상을 뛰어넘는 혁명성을 보이고 전개되기 시작한 농민투쟁의 경험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질적으로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혁명의 성격과 형태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플레하노프 등과 크게 대립하게 된다( 이 대립은 그 이후 볼세비키와 멘세비키의 분열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됨)

이때 플레하노프는 역사발전의 일반법칙을 강조한 반면 , 즉 현 시기는 부르주아혁명의 시기이므로 혁명의 주도세력은 부르주아지가 되어야하고, 노동자계급은 보조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부르주아혁명이후 자본주의가 성숙한 다음에야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정에 오를 수 있다는 입장을 주창한다. 반면, 레닌은 지주-농민과의 모순을 주요모순으로 보는 입장에서 당면한 혁명의 성격이 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임을 인정하면서도, 러시아에서의 그 혁명의 지닌 특수성을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민주주의혁명에서의 노동자-농민의 주도적 역할 강조, 이 민주주의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전화시킬 수 있는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독재체제'의 구축을 옹호함)

'민주주의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전화론'은 노동자-농민의 주도적 개입에 기초하여 '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을 '(반자본 내지 반독점)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지닌 것인데, '2단계 혁명론'이라 할 수 있는 이 혁명론은 이후 제3세계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론'으로 발전한다(중국에서 마오는 이러한 혁명을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지칭한다)

그런데 레닌은 이후 러시아가 독점자본주의체제로 이행했다는 판단 하에서 - 그러나 그는 동시에 러시아제국주의를 제국주의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로서도 파악했음 - 그의 혁명론은 '사회주의혁명론으로의 성장-전화론'에서 그 자체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간주한 (노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반독점 인민민주주의혁명론', 즉 '1단계 혁명론'으로 변화하는데, 이 이론은 이후 동유럽에서의 '(반파쇼) 반독점인민민주주의론'으로 계승된다. 그렇지만 '반파쇼 반독점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을 우경적으로 해석하면, '반파쇼 민주주의혁명 -> 사회주의혁명'이라는 '2단계혁명론' 역시 성립되는데, 유로코뮤니즘노선은 '반파쇼 반독점인민민주주의혁명론'에 대한 우경적 해석에 기초한 2단계 혁명론으로 규정될 수 있다. 반면 스탈린은은 2차대전 후 동유럽에 성립된 초기인민정권을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한 형태 내지 초기적 형태로 보기보다는 (그가 ‘법적-제도적으로 확보한 공산당지도체제’로 규정한) 프롤레타리아독재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국가체제로 규정했는데, 이 경우에도 인민혁명은 2단계혁명론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 레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플레하노프는 레닌이 인류사발전의 보편적인 '변증법적' 발전법칙을 무시한다고 비판하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 추상적 진리는 없다", "맑스주의의 살아 있는 혼은 구체적 진리의 파악이다" 등을 주장하면서 반격을 가한다. 이 과정에서 레닌의 이론과 실천을 특징짓는 그의 핵심적인 논거점이 마련되는데, 이는 역사과정에 대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개입은 '전 연쇄고리를 움켜 쥘 수 있는 핵심고리의 포착'을 목표로 하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레닌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모순들의 증층적 결정구조의 파악을 강조하고,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정세적', '정치적-실천적 진리'를 옹호하며, 역사발전에 관한 추상적 발전법칙에 관한 변증법이 아니라, 역사과정에 대한 혁명적 정치의 개입에 이바지하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을 강조한다. 그런데 플레하노프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레닌은 "맑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 전적으로 무관한다" 고 주장했지만,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 당시에는 이론적으로 반성된 주장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수준에서 나온 주장이라는 한계를 지녔었다. 헤겔적 변증법과 구분되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이후 [철학노트]에서 (미완성된 형태이지만) 구체화된다.

이처럼 레닌의 이론은 역사적인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입각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개입해야 할 '핵심고리'의 포착에 기여하는 '정세적 진리'의 포착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구체적 상황과 무관한 추상적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계급투쟁의 양상과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의 논지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 레닌이론이 지닌 이런 성격 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레닌이론의 비일관성, 모순성, 자가당착성' 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런 주장은 레닌의 진리관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나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레닌의 글은 항상 레닌이 그 글을 쓸 시기의 계급투쟁의 구체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지, 그와는 달리 '정세와 무관한 진리나 주의주장, 교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후 소련의 레닌해석에서는 레닌이론을 정세와 무관한 진리나 교리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 레닌의 프롤레타리아운동론은 '전위당론' 그 자체라기보다는 '자생성, 민주성, 창의성' 과 '목적의식성, 집중성, 과학성'의 모순적인 변증법적 결합론이며, 그의 전위당은 그러한 운동론의 한 축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당론은 이후 당원들간의 관계에서는 '민주집중제'로 정의된다. 즉,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쓸 무렵 레닌은 대중의 자생적인 투쟁이 엄청나게 고양되고 있는 반면, 그 운동을 목적의식적인 변혁운동으로 전화시킬 정치조직의 결여를 그 시기 운동의 가장 약한 주체적인 조건으로 파악하면서, 목적의식성, 집중성 등을 크게 강조한다. 이후 제2차 당대회를 통해 당이 기존의 느슨한 연합체적 성격을 벗어나 중앙집중적인 단일적 조직으로 일정하게 전화하는데, 이를 배경으로 레닌은 "이스크라편집국에게 보낸 편지", "당에 호소한다", "당의 재건에 관하여" 등에서 '집중성'의 확보로 인해 훼손될 수 있는 '민주성'의 확보를 크게 강조한다. 이어 1905년 제3차 당대회에서 혁명당의 조직원리로서 '민주집중제'를 확립하는데, 레닌에 의해 정식화된 민주집중제적 원리는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민주와 집중의 매개고리로서의 공개성, 보고의 의무'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동시에 '분파 형성의 자유'가 사실상 용인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레닌이론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모순적인 것들의 결합론'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민주집중제는 스탈린에 이르면 집중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일괴암적 조직론'을 옹호하는 원리로 전화하게 된다.)

 

- 레닌의 제국주의론:

 

1) 제국주의의 5개지표: 생산의 집적과 독점을 통한 산업독점체와 운행독점체의 성립, 금융자본의 형성과 금융과두제의 성립, 자본수출, 자본가단체들에 의한 세계분할, 열강들에 의한 세계분할

2) [자본론]과 [제국주의론]과의 관계 - '지표분해'의 필요성
[자본론]: 자본일반 + 경쟁자본주의 / 생산양식 수준의 분석
[제국주의론]: 독점자본주의 + 정세론 / 경제에서 정치로의 상승

3) 실천적 결론:
자본주의 모순의 전세계적 확산과 자본주의의 불균형적 발전 / 모순의 전위와 재베치, 응축과 폭발(세계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가장 격렬한 모순들의 응축과 폭발의 가능성) -> '제국주의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 "(동일시 - 역동일시 - 반동일시, 새로운 주체로의 호명론) / 구체적 가능성으로 전화된 프롤레타리아혁명, 사회주의로의 비동시적 이행,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반제민족해방운동과의 결합 /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을 추상적 가능성으로서는 인정, -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위기와 혁명 등을 거쳐야 할 것인가?'가 레닌의 기본입장이었음

 

- 국가론:
부르주아국가의 폐기와 PT국가의 사멸론 제기/ 국가유형수준의 국가규정으로서의 부르주아독재와 프롤레타리아독재.
*. 레닌 시기의 국가 = 'PT독재의 공개적으로 독재적인 형태'로 규정가능한다. 그 민주적 형태로의 이행문제를 과제로서 제기하긴 했지만, 그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실천적 지침들으 마련하지 못했다.

 

- 사회주의건설론:
혁명이전의 사회주의관은 [국가와 혁명]에서 집중적으로 표시되어있지만, 이후 사회주의 건서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그의 사회주의관 역시 변화한다.

 

1) 혁명직후의 초기국면

2) 전시공산주의단계: 일시적인 과도기적 조치로 이해하다가 공산주의로의 직접이행론에 경 도, 이후 경제침체와 노농동맹의 파괴현상 등을 목격하면서 전시공산주의노선을 폐기한다. 그 시기의 적합한 생산조직으로서 '1인경영독재와 총회민주주의의 결합론' 제기 (레닌 사후에는 1인 경영독재론이 절대화되고 총회민주주의는 형식화된다)

3) NEP 시기: 경제적 수준에서 노농동맹의 회복 ,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정치적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NEP 노선을 애초에는 일시적 후퇴로 보다가 이후에는 사회주의로의 '장기적인 이행기'로 간주한다.

 

4) 말년: 사회주의관의 근본적인 혁신?
협동조합 등을 긍정적으로 인식. / 관료주의화의 경향을 목격하면서 그 극복을 위한 제안: 노농감독부의 설치, 문화혁명론 등을 제창. 이를 '레닌의 마지막 투쟁'으로 부르기도 하는 데, 그 극복을 위한 확고한 정치적 조치의 마련에는 실패했다. 최후에는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의 성공가능성에 대해 많은 회의감이 생겨난 것으로 평가된다.

 

5) 세계혁명
- 코민테른 창설(1919.3.)
- 코민테른 활동은 ‘누가 운동을 지도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할 경우 다음의 3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① 레닌 지도 하에서 활동한 초기: 코민테른 창립대회가 열린 1919년 3월부터 5차대회가 열린 1924년 6월 이전까지

② 스탈린 지도체제에로의 이행기 내지 제 분파들 간의 갈등이 노출되는 속에서 스탈린 지도가 확립되어 간 중기: 5차대회가 열린 1924년 6월부터 6차대회가 열린 1928년 7월 이전까지

③ 스탈린의 전일적 지도체제가 확립된 후기:  6차대회가 열린 1928년 7월부터 제3인터내셔널이 해산된 1943년 6월까지

-코민테른 활동은 운동노선의 변화를 기준으로 해서는 아래의 4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① 혁명적 위기가 지속되는 속에서 ‘전면적 공세를 위한 준비’가 강조된 제1기: 1919년 3월 창립대회부터 1921년 6월의 3차대회 개최 이전까지
*. 레닌, ?‘좌익급진주의’, 공산주의 내의 소아병?(1920.4.); Lenin, "Der 'linke Radikaismus', die Krankheit im Kommunismus," in Werke 31, pp. 1- 106 참조.  

② 퇴조기의 정세 속에서 ‘밑으로부터의 노동자통일전선’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요새를 포위하는 전술’이 강조된 제2기: 1921년 6월의 3차대회부터 1928년 7월의 6차대회 개최 이전까지
1926년 스탈린 중국문제와 관련하여 ‘4계급블록론’, ‘좌우합작 민족당’노선 제창 /

③ 혁명적 정세가 재도래했다는 인식 하에서 ‘계급 대 계급 전술’이 채택된 제3기: 1928년 7월의 6차대회부터 1935년 7월의 제7차 대회 개최 이전까지)

④ 파시즘의 공세와 전쟁이 진행되는 정세 속에서 반파시즘-반전 ‘인민전선 전술’이 채택된 제4기: 1935년 7월의 7차대회부터 1943년 6월 코민테른이 해산되기까지

 

 

6) 식민지-민족문제

- 코민테른 2차 대회(1920년 7월)“ 레닌이 참가하는 가운데 행해진 ‘민족문제와 식민지문제 위원회’에서의 결정: 부르주아혁명의 성격을 지닌 반제반봉건혁명혁명론 재차. 반제적 민족부르주아지와의 동맹 필요(‘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전화’)

-  1926년 스탈린, 중국문제와 관련하여 ‘4계급불록론’과 ‘좌우합작에 기초한 민족당 건설’ 옹호

-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 주요타격대상으로서의 민족부르주아지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의 12월테제(민족부르주아지와 동맹 배격, 파벌 등의 이유로 조공 해산, 혁명적 노조, 농조 건설): 일제하 한국사회주의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침이었음 (1945.8. 박헌영의 8월테제)

- 1935년 7차대회 반제를 위한 광범위한 계급연합 옹호
  
- 철학에서의 레닌주의단계는 설정가능한가?. 본인의 글,  "레닌의 철학적 실천과 유물변증법 구상", [이론], 93년 봄호 참조.

 

 

<평가>

 

1. 맑스주의의 새로운 발전국면으로서의 레닌이론('레닌을 경유하는 맑스주의'): 그러나 물론 맑스이론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구체적 진리'를 지향하는 '정세적 이론'으로서의 레닌이론: 이는 동시에 그의 이론은 그의 기본정신을 계승하는 가운데 정세의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로운 정세적 이론 내지 구체적 진리로 전화해야 그의 이론이 살아있는 이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이후 소련에서 레닌이론의 거창한 일반이론화 및 역사철학화가 이루어졌다.

 

3. 대립적인 것의 모순적인 결합체제로서의 레닌이론: 이는 그의 이론이 그 모순을 생산적으로 가동시켜 (모순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이론'으로 전화하고 그 자체로서는 소멸해야 하는 이론의 성격을 지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는 맑스, 레닌으로의 회귀란 그 회귀에 기반하여 다시 맑스, 레닌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레닌이론은 이후 소련에서 무모순적인 체계로서 이해되고, 레닌이론의 단순화, 속류화, 교조화, 화석화 등이 발생했는데, 이 과정은 당의 국가기관화를 통해 (스탈린에 의해 재해석된 레닌주의라 할 수 있는) '맑스-레닌주의'의 국가이데올로기화, 지배이데올로기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4. 레닌의 이론의 일반적 측면과 특수적 측면 내지 '특수성 속의 보편성'에 대한 파악 요.

 

5. 문제점: 이론의 외부로부터의 유입론 / 당-의식론 / 레닌에게도 남아있는 역사발전에 대한 진화론적 결정론 / 자본주의의 기생성, 부패성으로 인한 '사멸하는 제국주의론' 등에서 표시되는 '정세적인 것'의 절대화, 즉 단계론과 정세론의 혼유 / '국가로 전화하는 당'의 가능성을 인지했지만, 적극적인 대결이 부족했다. / 'PT독재의 민주적 형태'로의 이행에 대한 본격적인 대결의 부족 등

 

<참고문헌>
크룹스카야, 레닌전기 등
R. C. Tucker(ed.), "Introduction", The Lenin Anthology, New York: W.W. Norton & Company, New York, 1975
스보로프, [레닌주의의 재해석], 세계, 1988(1974년 당시의 소련의 공식견해를 대변, 맑스주            의철학에서의 레닌주의 단계의 의의 분석)
데이비트 레인, [레닌이즘], 청사, 1985( 그의 강점으로서 '방법론' 강조, 레닌의 정치적 실천          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에른스트 피셔, [레닌주의의 일노구조], 전예원, 1987(프라크푸르트학파계보의 학자,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운동의 탁월한 전술가라는 관점에서 분석)
Andreas Arndt, Lenin - Politik und Philosophie: Zur Entwicklung eienr Konzeption                materialistischer Dialektik, Bochum: Germianl Verlag, 1982
L. Althusser, Lenin und Philosophie
Neil Harding, Lenin's Political Thought, Vol I, II, Chiester, Sussex: Macmillan Press,               1977
김세균, "레닌의 철학적 실천과 유물변증법 구상", [이론], 93년 봄호 등

 

 

 

 


<빛나는 전망 사회이론연구소>

<번역요약 발제>

                    Lenin and Revolutionary Party


                                         폴 르 블랑, 레닌과 혁명당,  1990년

                             서문: 어네스트 만델


- 블랑의 책은 레닌의 혁명당 개념의 발전에 대하여 그 발단부터 10월 혁명 직후까지 분석한 탁월한 연구서이다. 이 개념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조차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노동계급의 자아활동과 자아 조직화라는 맑스의 개념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확실히 레닌의 사상속에는 두가지 구성적 요소 사이의 역동적 균형이 있다. 레닌은 위대한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출중한 실천적 정치가였다. 그는 가끔 한쪽으로 막대구부리를 했지만 원칙 있는 정치가로서 전단계의 논쟁과 활동의 대차대조표가 나오면 항상 다른 방향으로 막대구부리기를 하였다.

 

-이러한 역동적 균형은 대중활동의 고양과 침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르셀 리브만이 지적한대로 레닌에게 전형적인 것은 혁명적 상황에는 노동계급의 자아조직화를 강조하였는데 소비에트에 초점을 맞춘 “국가와 혁명”의 경우 ‘ 당의 지도적 역할’ 이라는 말은 한번도 안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블랑은 레닌의 혁명당 개념의 근원을 정확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가 이 책의 결론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나도 이미 비슷한 분석을 한 바가 있다. 혁명당의 건설은 우선 조직적 필요, 즉 지방적, 부문적 및 작업장 활동을 집중화하고 정치적 목적에 그것을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직적 집중에 대한 필요 배후에는 논쟁의 시작부터 90년이 지났지만 레닌의 당개념에 대한 반대가 결코 대안적 해답을 주지 못했다,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역사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계급의식의 출현과 발전의 기초로서 살아있고 투쟁하는 경험의 집중화 문제이다.

 


- 다른 말로 전위당의 필요성을 삶의 조건, 일의 조건, 전투성의 정도, 정치적 과거, 역사적 뿌리와 형성단계 및 기타요소와 관련된 노동계급의 매일 매일의 분열로부터 나온다. 그 필요성은 계급의 자아의식의 통일성과 동질화의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계급 대중활동의 불연속적 성격을 전제했으며 계급의 대부분의 소수를 포괄하는 노동조합이나 정당에서 통일성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다. 오로지 전위만이 연속적 활동의 질적으로 높은 수준에 기반을 둔 통일성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인 pt혁명과 계급 없는 사회 건설의 가능성은 지속적 정치활동의 최고수준을 달성하기 위한 주기적인 노동자 대중의 활동에 달려있다. 혁명적 전위당과 임금노동자 대중의 대중적 자아활동과 자아조직화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는 최종분석에서는 지속적인 전위적 전투성과 불연속적인 대중 활동 사이의 역동적 ‘긴장’으로부터 나온다.

 

 

 

- 일반적인 언급을 제외하고, 르 블랑의 책은 10월혁명 이후는 다루지 않는다. 소련의 그 이후 발전과정에 비추어 볼 때, 수 십년 동안 역사학자 사이에 그리고 국제노동운동 내부에서 논의 되었던 중심적 질문을 다루지 않고 있다.

 

- 소비에트 러시아 내부에서 일어난 극적인 조건의 압력하에서 1918년, 1920년, 그리고 1921년 이후 소비에트와 전위당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레닌은 바꾸었는가? 소비에트의 점진적 무력화는 당에 대한 레닌의 초기 개념의 불가피한 산물이었나? 그러한 무력화의 끔찍한 함의를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는가 등 등

 

- 러시아의 경제적 및 문화적 후진성은 내전의 파괴와 외세 제국주의의 개입과 차단 때문에 급속히 악화되었다.  생산력의 파국적 저하는 1919-20년에 노동계급의 파국적 저하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활동의 심대한 저하를 초래하였다.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은 볼세비키의 음모에 의해 소비에트로부터 축출된 것이 아니라 적군에서 싸우기 위하여 그리고 농촌에서 감자를 구하려고 떠난 것이었다.

 

 

 

- 내전, 제국주의 개입 및 폴란드 전쟁의 정점에서 다른 대안적 경로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논쟁을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이던 이는 대체로 학문적 논쟁일 수 밖에 없다. 노동계급의 수가 3분의 2로 줄어들고 일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평균의 절반으로 줄때 직접적 노동자권력의 객관적 공간은 적을 수 밖에 없다.

 

- 실제 전환점은 1921년에 일어났다. 내전이 끝나고 반혁명이 군사적으로 제압되고 외국의 군사개입이 중단되었다. 생산력의 저하는 신경제정책의 도입으로 역전되었다. 노동자의 실질 소비는 증가되었고 임금노동자의 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 바로 그 순간, 레닌의 힘아래 있었던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세비키 지도부는 아이작 도이치가 지적한대로 비극적 실수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결정을 하게된다. 볼세비키는 세력의 사회관계가 우호적인 진화를 보이자 노동계급의 정치적 재활성화를 자극하기 위하여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대폭 확대를 의제에 올리는 결론을 도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반소비에트조직 (멘세비키, 무정부주의자)을 금지하고 볼세비키당 내부의 분파를 금지함으로서 (물론 ‘경향’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를 협애화 하였다.

 

- 이러한 정치적 퇴행이 근거하고 있는 논리적 설명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내전이 승리하고 신경제정책(소상품 생산) 아래에서 생산력이 증진되었기 때문에 혁명의 잃어버린 정치권력의 위험이 줄지 않고 증가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정복하고 유지하는데 막대한 힘을 집중시켰지만 생산력 저하의 타격을 받아 비계급화 되었던 프로레타리아트는 그 전 시기보다 느슨해지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훨씬 덜 열정적이게 되었다.NEP이나 쿨락(부농) 같은 친자본주의 세력은 노동자의 권력을 침해하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위험에 대항하여 독재는 강화되어야만 했고 이는 당간부의 권력집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이러한 논거는 적어도 세 가지 정치- 이론적 실책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쿨락이 Kolchak, Wrangel 또는 Pilsudski 보다 소비에트 권력의 전복에 더 큰 위협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복은 점진적 사회경제적 진화 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필요로 한다. 쿨락은 사회적으로 너무 흩어져 있고, 정치적으로 비윤리적이어서 적어도 단기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것은 쿨락에게만 의존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쿨락과 도시친 부르조아 세력(외세도움과 압력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역시 외세의 대항 압력과 함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에 의존했는데 핵심 변수는 대다수 중농과 연합하기 위한 전자나 후자의 능력이었다.

둘째로, 노동계급에서의 “에너지의 이완” (비동원화와 비정치화)을 향한 흐름을 중립화 시키거나 역전시키는 것과는 달리 소비에트와 당내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모든 수단은 이완의 경향을 심대하게 증대시켰고 결국 노동자권력을 와해시키고 약화시켰다.

 

셋째, 노동자 권력을 정치 권력과 동일시하는 대리주의는 당간부로 하여금 당 자체를 관료화 시키는 과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당 기구는 1919년 몇 백명의 정규 간부가 1922년에 15,000명으로 증가했다.

 

- 확실히 당서기장으로서 스탈린의 선출은 그 과정을 더욱 촉진시켰다. 일당체제 아래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삶의 저하는 당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성원에게 불가피하게 타격을 입혔다. “ 노동자권력= 당권력= 당간부 권력= 당지도력” 이라는 공식은 “ 노동자권력=당 권력= 당지도력= 당기구 권력= 관료주의 권력”으로 전환되었다. 당 관료주의는 국가 관료주의와 재빨리 혼합되었고, 양자는 일치되었다.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당은 총체적으로 점점 관료주의의 도구가 되었다.

 

- 물론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라이코프,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라코프스키, 프레보브라젠스키, 피아티코프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관료주의가 아닌 노동계급을 위하여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곧 테미도르의 위험을 보았는데 1922년 레닌이, 1922-23년에 트로츠키가, 1925-1926년에 지노비에프가 1927-28년에 부하린이 그랬다. 반동에 대한 명확한 공통계획없이 분산된 길로 그 위험을 인식할 때까지 관료화의 과정은 이미 진전되어 있었고, 그것은 비극적인 1921년의 역사적 대차대조표이다.

 

 

 

 

- 노동계급의 혁명적 이론가이며 정치가로서의 레닌의 일상적 위업은 그가 사회, 국가, 당에서의 관료화 과정을 인식한 민첩성 그리고 그에 대응하고 곧 느낀 절망감에 의해 더욱 높혀졌다.

우리는 트로츠키도 마찬가지이지만 레닌을 권력에 목마른 인물로 묘사하는 것을 폐기하여야 한다. 레닌이 에너지의 특별한 집중, 일상적인 단일 목적성, 그리고 그 목적성을 지지한 엄청난 자기 확신을 지녔음은 진실이다. “ 러시아 노동계급의 눈으로 볼 때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은 자아분석과 자아비판에 적극적이며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뜻한다.

 

- 사실 레닌의 삶의 마지막 2년은 점증하는 절망의 비극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레닌은 러시아와 러시아 공산당에서의 관료적 외화과정을 의식했지만, 무력감과 그를 막을 수 없는 무능력에 강박되어 있었다. M.Lewin이 그의 책에서 레닌의 마지막 투쟁에 대해 썼지만 그것은 조지아문제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조지아의 소수 민족문제를 놓고 괴롭히는 전술에 대항했던 레닌의 투쟁이었다. 1922년과 1923년의 글과 연설은 관료화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투쟁속에서 레닌은 당기구의 관료적 퇴화를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유일한 해독제로 그는 볼세비키 중앙 지도력에 공장노동자 간부와 농민간부 같은 직접 생산자가 강력하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 당내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노동자 볼쉐비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을 가로막는 당기구가 레닌의 제안의 실용성이 공개적으로 의문시되는 정도로까지 관료화됐음을 알 필요가 있다.

 

- 노동자의 탈정치화와 탈동원화의 정도가 1922-23년에 급격히 증가했다. 레닌의 의식적 통찰력과 그릇된 당내 다수의 길을 역전시키는 능력 사이의 핵심 고리는 1917년 4월, 1918년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시 였는데 그때는 당내 뿐만아니라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노동계급 전위가 있었다. 그러나 1922-23에 이러한 고리는 실종되었다.

 

- 기본적으로 그것은 왜 레닌의 관료화된 당지도력에 대한 1922-23투쟁과 트로츠키의 1923년이 패배했는가의 이유이다. 그 이유 때문에 스탈린은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부카린의 도움을 받아 당기구를 통한 당장악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물리적으로 볼쉐비키당을 파괴할 유혈적 독재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다.

 

- 다시 말해 이러한 과정을 역전시킬 결정적 순간은 1920-21년 이었다.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결정적 방법은 소비에트와 당내 민주주의의 제한이 아닌 확대뿐이었다. 레닌은 이러한 면에서 의식적으로 자아비판을 할 시간이 없었다. 부카린과 특히 트로츠키는 그럴 시간이 있었고 그렇게 했다.

 

- 물론 1922-23년에는 레닌이 죄수가 될 만큼 막강한 당기구가 출현하고 있었다. N. Harding이 기술하듯이 “매일의 섭생에 대한 지시, (당 문헌의 접근 금지를 포함한)책과 신문 금지, 의사소통금지로 당기구는 그를 통제했다. 레닌은 그가 짜놓은 그물에 걸려 질식 당했다.”

 

 


- 레닌은 그의 생애 마지막 정치적 투쟁기간 동안 국가와 당기구의 관료적 퇴화와 싸우는 가장 효율적 방법에 대해 주저하였다. 스탈린 기구에 대항하는 평당원(노동자 볼쉐비키)에 대한 호소와 당지도부에 대한 교정의 호소와 어느 정도 연결시켜야 하는가? 그러한 호소는 당 밖에서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호소와는 어느 정도 보완적인가? 러시아 공산당 내부에서의 연속적인 반대운동, 즉 1919년 민주중앙파, 1920-21년 노동자 반대파, 1922-23년 레닌, 1923년 트로츠키파의 좌익반대파, 1926-27년 통합반대파, 1927-30년 부카린-라이코프 그룹, 1927년 이후의 좌익반대파는 모두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 그 문제가 레닌에게 진정한 딜레마로 전환된 것은 (그 후 부카린에게도)노동계급에서의 구조적인 장기 부족사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당 독재를 사회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1920-21년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설정은 1917-20년 시기 뿐만 아니라 1905-08년 그리고 그 이전의 견해와는 현격한 반대 입장에 있는 것이다.

 

- (전위로부터 대중으로의 전달벨트론 같은)견해는 그러한 구조적 분석의 표현이다. 1921년 이후 그의 그의 글과 연설에서 이러한 견해는 사라지지만 그의 사상에서 완전하게 초월되지는 않았다. 이론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정치적 난제는 풀리지 않는다.

 

- 내부 핵심으로 들어가면 그 문제는 간단하다. 1920-21년 러시아 노동계급의 탈계급화 국면이 그 당시 러시아의 생산력의 급격한 저하의 결과였고 그것이 더욱 적극적 발전과정에 의해 점진적으로 극복될 수 있었는가? 또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혁명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행동에 미치는 과거 부르주아사회의 효과로부터 결과되는, “정상적”자본주의 조건에서조차 나타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원한 국면인가? 후자의 경우에는 노동계급은 적어도 예측가능한 미래에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직접 “그의” 독재를 행사하는 것을 맞지 않는다, 독재는 오직 당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문제를 과감하게 발본적이고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해법을 모색한 정직하고 심오한 혁명적 이론가로서의 레닌의 위업이 여기에 있다, 스탈린, 모택동과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게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레닌이 1920-21년의 그릇된 기획으로부터 1922-23년에는 물러섰지만 명백한 반대입장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 1923년에 시작하여 반대입장을 확실하게 취했던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역사적 장점이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 뿐만아니라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의 입장에 대항한 그들의 불굴의 투쟁은 러시아내 뿐만 아니라 세계에 실재로 존재했던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 확실히 그 혁명적 잠재성은 어느 곳에서나 매일, 매달, 매해, 심지어 매10년 마다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고양과 침체, 반동과 혁명적 분출의 시기를 거친다. 그러나 그 분출이 불가피할 때 계속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한 최선의 가능한 조건을 창출하는데 과정의 성숙을 지원하고 노력을 집중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임무이다. 러시아의 당 정책에서 볼 때 그것은 정치적, 문화적 도전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조건도 의미했다.

 

- 말할 필요도 없이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입장은 제4인터와 공유하는 바와 같이 맑스와 엥겔스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엥겔스 사상의 본질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어떤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어떤 다른 사회 세력과 비교해 볼때 노동계급이 독특한 우월성을 부여하는,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정치-경제적 힘과 정신의 예외적 조합이 바로 노동계급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같이 좌익 반대파의 강령은 맑스주의의 본질적 요소의 “순수한” 산물이고 그 응용이다.

 

- 1921-22년 이러한 본질적 질문에 대한 레닌의 주저는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새로운 강화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빨리 새로운 전투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국제 자본주의의 “잠정적인 강화”가 진행되는 전환점에서 어느 정도 장기적 혁명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 만일 레닌이 두 번째 노출혈로 고통을 받지 않고 1923년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모든 극적인 전개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면 그해 트로츠키와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비슷하게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이론가와 동시에 실천적 정치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무엇이 한단계 전진인가”의 프리즘을 통하여 문제를 바라보았다. 1923년 상황에서 그 프리즘은 그의 대립을 변형시켰다.

 

- 관료주의는 썩었고 결정적으로 약화시켜야 한다. 당기구는 이미 핵심까지 관료화되어 사회를 옥죄는 관료주의를 깨뜨릴 힘이 없다. 노동계급은 아직 부분적으로 탈계급화되고 탈도덕화되어서 새로운 길로 즉각 나가는 투쟁은 적합하지 않다. 부분적으로 탈정치화와 탈도덕화의 방향으로 나가는 노동자 볼쉐비키는 적어도 단기간에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절망적으로 레닌은 급격한 변동을 위한 역사적 처분의 유일한 도구로서 최고 당 지도자에게 돌리게 되었다,

 

- 그러나 중앙지도부는 각각 장점과 약점을 지닌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레닌의 유언은 (초기에는 사회학적 용어로 문제를 제기 했지만) 개인적인 접근으로 즉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제거하라는 개인적 제안으로 끝나고 만다.

 

- 물론 문제에 대한 접근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진행되는 관료화 과정의 본질적 국면, 즉 당기구에 대한 스탈린의 총체적 장악과 그 장악의 셀 수 없는 결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불충분하고 논리적으로 모호한 것이 틀림없다.

 

- 스탈린이 이미 당과 권력을 장악했다면 어떻게 몇 십 명중의 한 표가 그 권력을 깨뜨릴 수 있는가? 보다 넓은 세력의 동원이 그 결과를 달성할 필수적 요건이지 않았던가? 그러한 논리의 선상에 집중해서 도출할 결론은 잘못된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중앙지도부의 태도와 결정에 따라 돌려진다면 그러한 지도력의 단일화는 소비에트권력을 보존하기 위한 싸움에 열쇠가 된다는 말이다.

 

- 레닌은 그의 위치의 명백한 모순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유언장은 당 전체와 열릴 예정인 12차 당 대회에 대한 편지였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스탈린과 동요하는 정치국에 대항하는 의회대표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고 그가 수백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중앙위원회에 통합할 것을 제안했을때 그는 사실 중앙당 지도부 밖의 세력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어렴풋한 테미도르 반동에 반대하는 투쟁의 단기 목표로서 당의 통일성의 질문을 던지므로써 레닌은 스탈린 이전의 구 볼쉐비키의 계속되는 복종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할 개념틀을 창출하였다.

 

- 이것은 1921년 전 레닌당과 분파의 실질적 전통과 모순되는 것으로 의의가 크다. 볼쉐비키의 최고지도자들은 레닌이 1917년 4월 브레스트-리토브스크 논쟁중이나 여려 경우 했던 것처럼 당지도부의 그릇된 결정에 대항하여 당원들에게 호소한바 있다. 당 지도자들은 레닌과 당다수파와 공유하지 않는 이론적 입장을 발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러 경우에 그들은 결정적으로 오류라고 생각하는 다수파의 정치적 입장에 반대하여 일반 노동계급대중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 레닌은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때로는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당내 억압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이들 지도적 볼쉐비키들과 동지적. 우호적 협력을 가로막지도 않았다. 이는 트로츠키의 “경향”과 볼쉐비키와의 혼합 이후 그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서도 동일했다. 노동조합문제 이전에 두 사람 사이의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1923년초 조지아문제에 대한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의 편에 섰다.

 

- 중앙당 지도부에 담겨진 차이를 유지하기 위한 이러한 집착은 볼쉐비키 전통과 일치하지도 않고 변증논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 1914년 제국주의 전쟁전 사회민주주의의 재앙적 항복에 직면했을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당의 통일성”을 의문시하는 것을 거절했어야만 했는가? 그리고 1926-30년 스탈린의 재앙적인 농업정책에 직면했을때 그 “통일성”에 의문을 던지는 것을 거절했어야만 했는가? 20세기 국제 노동계급의 최악의 재앙이었던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권력획득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제 3시기”초좌익주의에 직면했을 때 그 “통일성”에 의문을 던지는 것을 거절했어야 했는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 최종분석에서 레닌의 딜레마의 해결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잠재성에 대한 질문에 조건지워 있다.

 

- 적어도 예측가능한 미래에 그 잠재성을 부정한다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은 사회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관료주의가 물질적 특권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이러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국가를 건설하고 그것이 소멸되는, 즉 스스로의 억압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작업하는 의지가 남아있다고 믿는 것은 역사유물론의 ABC를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증거는 그 반대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즉 당, 당 기구(당 관료주의 규칙을 의미하는)는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활동과 자기 조직에 대한 장기적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자기 활동과 자기 조직이 현실가능성이 없다면 사회주의도 현실 가능성이 없다.

 

- 그러나 만일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의 전투성이 급격히 하강하는 시기에도 이 하강이 잠정적이고 확고한 현상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전위의 의제가 되는 것은 반혁명 위험에 대한 투쟁이 노동계급 전투성의 부활을 돕는 정책과 함께 해야 한다는 지속적 작업이다. 그러한 경우에 “당 지도부의 통일성”이 아닌 “당의 통일성”은 그러한 부활이 가능하게 하는 정책을 위한 투쟁에 종족되어야만 한다. 트로츠키가 관료주의적 퇴화에 대한 투쟁에서 러시아공산당원에게, 그리고 그 이후 당 안팎의 노동계급에게 호소한 것은 옳았다. 부카린과 구 볼쉐비키가 결정적 단계로부터 후퇴하여 스탈린의 폭력적 독재로의 길을 열어준 것은 잘못 되었다. 레닌은 중간 입장을 취했다. 그가 트로츠기의 입장으로 조절했다면 그의 삶은 조금 더 연장되었을 것이다.

 

 

 

-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세기의 사회주의 문제, 아니 인류의 전반적 운명의 문제에 중심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역사는 우리 시대에 혁명과 반혁명의 펼쳐지는 드라마의 모든 주요 주체들에게 그 질문을 부여하고 있다. 희생을 무릅쓰고 “당 정통성”을 유지하는 교조는 근본적으로 “당은 항상 옳다”는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 레닌의 사상과 저작 어느 곳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러한 신화는 스탈린주의화된 공산당에서 일반적으로 용인 되었다. 티토가 코민테른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을때 이러한 신화는 결정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이는 티토의 스스로의 권위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내부에서 그 도전이 열려있음을 의미했다.

 

- 마오는 당 소수파가 당 다수파보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스탈린주의 신화에 대한 도전을 성문화하였다. 그러므로 마오는 역사의 기본적 교훈을 정치적으로 그릇된 당 다수파 지도부에 대한 반란을 포함한 “반란은 항상 정당화 된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관료화된 당 기구와 지도부에 대항하여 청년학생에게 호소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실천에서는 심대하게 제약되었다. 반란은 모택동 사상과 지도력에 대한 반란을 제외하고 정당화되었다. 유소기와 등소평이 이끄는 당 기구에 대항하여 마오가 반항적인 청년에게 호소하는 것은 혁명적이고 유와 등이 마오의 당 기구에 대항하여 노동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반 혁명적 이었다.

 

- 맑스주의 사상은 전복된다.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소부르주아이며 반혁명적이 아니라면 “경제주의자”다. 전투적 노동자에 대립하는 소부르주아 청년 학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 생산관계가 아닌 이데올로기(허위 사회의식)가 정치적 행위자의 계급적 본질을 결정한다. 프롤레타리아 당 지도력과 계급의 자기활동 사이의 실질적 상호작용 대신에 이념적 당기구(관료화되고 이념적 특권을 지닌)와 프롤레타리아를 동일시하게 된다. 실제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의 PT본질이 이념적 이유 때문에 간단하게 부정된다. 이런 종류의 “맑스주의”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에서의 승리한 혁명의 지도자로서 모택동의 역사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국에서 오래가지 않았다.

(그레나다의 사례 생략)

 

- 스탈린주의자, 신 스탈린주의자 그리고 그 후예들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관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특히 스탈린과 특히 스탈린과 브레즈네프에 의해 자행 되었다던 관료주의의 죄악을 비판했던 사실을 “공산당 통일성”의 교리에 매달리기 위하여 강조하고 있다. 만일 당이 항상 옳지 안다면 적어도 장기적으로 자아비판과 자기개혁의 시작을 위한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 논쟁의 비일관성은 요란스럽다. 첫째, 당지도력은 끔찍한 참상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것은 적어도 50년 이상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결국 이를 인정하는 사실이 30년, 40년, 50년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당 통일성을 위하여 재앙을 방지하고 범죄에 대해 투쟁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당화 하는가?

 

- 오늘날 소련 내부에서 일들이 한 바뀌 돈 것 같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토론이 1920년대 제기 되었던 바로 그 문제, 즉 1922년 레닌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 민주중앙파, 노동자 반대파, 트로츠키, 좌익 반대파에 의해 제기 되었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목격하는 것은 흥미롭다.

 

- 혁명적 맑스주의자는 수정주의 사상이나 압력의 잠정적인 무게가 있더라도 그 논쟁의 결과부터 두려울 것이 없다. 60개가 넘는 국가에서 100년이 넘는 계급투쟁의 역사적 증거를 담고 있는 확고한 총문헌이 있다. 소련 노동자계급을 시작으로 노동계급의 무게는 오늘날 1920년대 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유물론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논쟁의 힘이 어떻더라도 그 무게는 논쟁의 결과를 결정하는데 사소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위대한 로자 룩셈브르크가 말한바와 같이 미래는 모든 곳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와 함께 있다.

 

 

 

어네스트 만델

 

제1장 진정한 레닌주의

 

1, 레닌주의가 아닌 것

볼쉐비키 혁명의 승리로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 현상유지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그들은 레닌과 그의 저작, 특히 혁명당 개념이 법, 질서, 인간존엄성 그리고 서구 문명에 대한 끔찍한 위협이라는 논조를 퍼트리는데 온갖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다.

(보기: 미국 FBI국장 J.Edger Hoover는 그의 책 Masters of Deceit에서 “레닌은 당을 혁명의 수레바퀴로 보고 있다...... 당은 작고 단단하게 통제되고, 깊이 충성하는 집단이여야만 한다. 당원이 아닌 열광주의가 열쇠이다. 당원은 혁명을 살고, 먹고, 숨쉬고, 꿈꿔야 한다. 그들이 당에 봉사하려면 속이고 살인해야 한다. 규율은 엄격해야 한다.... 레닌은 징기스칸 또는 아틸라를 능가하는 악과 악행의 새로운 차원을 인간관계에 도입했다.)

 

이러한 해석은 “서구문명”을 방어하는데 관여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학자와 지식인들에 의해 보다 세련되고 학문적으로 나타난다. 그 문명의 본질적 요소는 대기업의 막강한 힘과 미국외교정책의 공격적인 친자본주의적 추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피할 수 없는” 불평등과 “유감스러운”일의 불의의 덩어리이다.

 

또 다른 강력한 왜곡은 공산주의운동 자체로부터 발생된다. 1917년 이후 혁명당으로 성장해온 볼쉐비키의 경험과 관련이 없는 레닌의 생각을 해석하고 있다. 1924년 레닌사후 지배적인 경직되고 과장된 개념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그들이다.

 

스탈린은 레닌주의 원칙의 가장 비타협적 방어자로서 “레닌주의로부터의 전진”을 묘사했다.
(레닌의 장례식 발언)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볼쉐비키 당사 연구가 그 창건자요 지도자인 레닌과 그이 최고의 제자 스탈린의 주요저작에 대한 지식 없이 불가능하다”라고 배우고 있다.

“일괴암으로서의 볼쉐비키당” 개념은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그인 V. Sorin의 "Lenin's Teachings About the Party"에서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을 위하여 정교하게 꾸며졌으며 1930년대 초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위와 같은 레닌주의의 지도자 추종원리 개념은 공산주의 운동의 스탈린의 지도력에 의해 발전된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적 혁명당원의 위험을 극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초의 세계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조직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1917년 이후 사회민주주의 흐름은 레닌주의를 권위주의적으로 규정하면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내의 선거정치로 민주주의를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악을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개혁입법을 선호했다.

 

최근의 또 하나의 레닌주의에 대한 왜곡이 있는데 소련역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서구학자들이다. 이들은 스탈린시대에 대하여 “덜 판단적인 접근”을 한다.

 

S. Fitzpatrick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은 “공포, 진보 그리고 상승이동”이다. 상승이동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신분상승을, 진보는 산업화와 근대화를, 공포는 스탈린 치하에서의 인명살상과 폭력 등이다. 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은 스탈린이 정적을 제거할 때 레닌주의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레닌주당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레닌은 다양성과 자발성을 허용하는 느슨한 대중조직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2, 살아있는 유기체와 발전의 단계

1890년대로부터 1917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 레닌의 조직적 관점의 연속성이 있지만 동시에 볼쉐비키 활동의 맥락 속에서의 경험의 축적과 변화를 반영함으로써 레닌 사상의 중요한 전이가 일어난다. 이러한 레닌주의의 변증법적 국면을 이해 했을 때 진정한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레닌의 조직원칙을 위치 지움으로써 그 실질적 의미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 운동의 조직적 표현은 우선 러사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특히 1903-1912까지 볼쉐비키 분파, 그리고 1917년 이후 러시아 공산당이된 독립적 볼쉐비키당에 집중한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의 조직적 관점은 1900-1923년까지 여섯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친다.

 

1)1900-1904:이스크라에서 상세히 설명된 혁명계획과 중앙집권적 조직개념으로 RSDLP건설을 위한 레닌과 기타 맑스주의자의 투쟁, 이스크라파와 RSDLP가 다수와 소수로 분리(볼쉐비키와 멘쉐비키), 레닌의 볼쉐비키는 가장 일관되게 중앙 집중적이고 비타협적 혁명지향을 추구, 그러나 이 시기에 RSDLP는 대부분 급진지식인이고 노동자가 소수였고 프롤레타리아 기반이 약했다.

2)1905-1906:1905년 혁명적 분출은 볼쉐비키와 멘쉐비키 모두를 놀라게 함. 두 분파는 노동자의 혁명적 열정에 의해 휩쓸림. 극적으로 급진화되는 노동계급속에서 느슨하고 민주적인 규범이 RSDLP의 뿌리를 든든히 한다는 이해가 레닌의 중앙집권주의를 완화시킴. 볼쉐비키와 멘쉐비키의 지향성의 수렴이 진행됨

3)1907-1912:혁명적 물결의 패배와 반동의 승리가 러시아에서의 RSDLP의 대중기반을 파괴할 새로운 상황에서 두 분파의 수렴은 1905년에 이미 보였던 근본적 계획차이 때문에 깨지고 다시 분리하게 만듦, 짜르 절대주의와의 투쟁에서 멘쉐비키는 노동계급과 “자본적”부르조아와의 연대에 큰 비중을 두었지만 볼쉐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연대를 강조함. 멘쉐비키 중에는 혁명노동자당을 개혁적 노동자 조직으로 청산하려는 강력한 충동을 보임.

볼쉐비키 중에는 실제 계급투쟁에 참여하는 기회를 맞아 기권주의자의 길로 가려고 위협하는 초좌익적 분파적 충동을 보임. 레닌은 청산주의자와 기권주의자 모두에 대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함. 후자를 볼쉐비키에서, 저자를 RSDLP에서 축출하는 시도를 함. 양쪽 모두 레닌이 너무 강경하다고 두려워하고 RSDLP보존을 위하여 “화해”를 모색한 레닌은 독립적인 RSDLP(볼쉐비키)당을 분리 결성함.

4)1912-1914:혁명적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통일된 볼쉐비키당은 노동계급 전투성의 새로운 물결이 닥쳤을 때 비 볼쉐비키 RSDLP의 오합지졸이며 말다툼하는 찌꺼기를 앞서 나아감.

5)1914-1917:세계1차대전 발발은 솟아오르는 전투성의 물결을 애국주의적 히스테리와 살육으로 굴절시킴. 볼쉐비키와 소수의 국제주의자 멘쉐비키는 러시아의 전쟁 참여를 격렬히 반대하였고 야만적으로 억압당함. 개량적인 친전쟁적인 멘쉐비키 다수파는 노동운동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음.

6)1917-1923:1차 대전의 파괴는 러시아 대중을 급진화 시키는 양향을 크게 미쳤고 극도로 약화된 짜르체제는 자발적인 혁명의 분출로 전복되었음. 새로운 상황에서 개량주의자와 흔들리는 멘쉐비키는 대중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 볼쉐비키당에의해 다시 압도되었음. 전쟁, 내전, 외세의 봉쇄와 개입의 효과는 경제적 붕괴와 정치세력으로서의 노동계급의 붕괴를 가져옴. 볼쉐비키는 피폐하고 유혈적인 러시아의 참담한 고립을 끝낼 선진 산업사회인 서구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승리가 있기를 기다리지만, 러시아 전체에서 그리고 그들 당 내부에서 점점 제한적 수단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됨.

0 레닌의 조직 지향성의 보편적 적용가능성

①계급투쟁을 혁명적 사회주의로 이끄는 혁명계획(원칙, 일반분석, 목표, 전술)의 절대적 우선성.

②혁명계획에 헌신하는 활동가로 구성된 혁명 전위당 개념.

③혁명계획을 실재에 적용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직적 중앙 집권주의와 조직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것.

 

 

제13장 결론

0 1920년 레닌은 스스로의 상황에 유용할 수 있는 러시아의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을 찾는 다른 나라에서의 혁명가들을 위해 볼쉐비키의 역사를 검토하였다. “정치사상과 정당의 한 흐름으로 볼쉐비즘은 1903년 이래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전 기간동안 볼쉐비즘의 역사만이 가장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철칙을 세우고 유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

0 레닌은 혁명승리를 위해 필요한 규율의 세 가지 전제조건을 열거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주요한 요소로서 혁명에 대한 헌신과 계급의식(레닌의 용어로는 혁명적 전위);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가 폭넓은 노동대중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 혁명적 전위의 정치지도력의 올바름과 경험에 기초한 폭넓은 이해. “이러한 조건 없이 부르주아를 전복하고 사회전체를 변혁할 사명을 지닌 선진계급의 당이 될 수 있는 혁명당에서의 규율도 될 수 없다. .....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조건은 동시에 나타날 수 없다. 그 창출은 교조가 아닌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지만 진정으로 대중적이고 진정으로 혁명적 운동의 실제적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을 때 마지막 형태를 갖춘다”

0 이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첫째, 레닌이 강조한 “규율”이라는 말을 생각해야 한다. 웹스터의 신세계사전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정의된다. 한편으로 “자아통제. 성격 정돈 그리고 효율을 개발하는 훈련”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와 통제에의 복종” 그리고 “교정하고 벌을 주는 처치”를 뜻한다. 레닌이 말하는 것은 후자보다는 전자이다. 혁명적 전위는 단순히 그 존재를 주장하고 그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복종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는 속으로 증명해야 한다.

0 종국적으로 전위의 어렵게 획득한 전위는 반동적이고 자본주의적 세력의 권력과 효율을 극복할 수 있는 전국적인 조정으로 결과 되어야 한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철의 규율이며 이는 자아통제, 자아주도, 효율 그리고 창조성이 대규모로 혼합된,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규율인 것이다.

0 민주집중제가 레닌의 독특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 운동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레닌이 1890년부터 1920년대 까지 괄목할 만한 일관성을 보였던 조직적 규범(혁명적 활동의 구조화와 조정)에 대한 심각하고 원칙적 태도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 원칙이 여러 상황에 적용되는 방식에는 융통성이 많다. 그러나 초기 학습 써클이나 활동가 위원회 네트워크로부터 대중적 노동계급 전위당의 시기까지 레닌은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민주적으로 결정된 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을 통합하는 조직형식과 원칙에 복무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의미를 “권위주의적”이라고 거부한 사람들, 최근에 “레닌주의”가 혁명적 시기에만 적합하다고 논쟁하는 사람들은 「노동계급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함께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활동가 조직」이라는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다.

0 우리는 우리의 연구로부터 레닌의 조직적 관점이 기본적인 원칙, 목표 그리고 그 적용에서 기본적으로 민주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원칙, “과학적 사회주의”, 그리고 맑스, 엥겔스의 정치사상을 특징지우는 실천적 혁명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다만 레닌 휘하의 볼쉐비즘의 마지막 시기, 1918-24년 동안, 심각한 모호함과 모순이 레닌의 관점 속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적인 러시아의 상황에 내재해 있던 문제들, 맑스주의와 20세기 현실에 있었던 문제로부터 온 것이지 레닌 자신의 특유한 조직적 개념 속에 있는 권위주의적 문제 틀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다.

 

 

1, 레닌주의당에 대한 성찰

 

0 맑스주의의 상투어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에 의해 정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로 맑스-엥겔스가 말했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계급당과 반대되는 별개의 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 그들은 운동을 형성시키고 주동하는 그들 자신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서는 안 된다”이다. 이러한 논점은 레닌주의 기본가정과 배치되는 것으로 가끔 이해된다. 루카치에 의하면 레닌주의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실체적인 구체화”이다. 거기서 계급의식은 노동자들의 실제 존재하는 사상과 전망으로 단순히 정의되기 보다는 “하나의 계급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형성, 부르주아 지배권의 전복,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의 정복이라는 당면한 목적”과 함께 노동계급의 본질과 총체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 루카치는 공산주의당 선언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성과 전체계급과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안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밖의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구별되는 것은 오직,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적에 상관없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단계들에서 항상 전체운동의 이해 관계를 대변한다는 점 뿐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당들 가운데 가장 단호한 , 언제나 더 멀리 밀고 나가는 부분이며, 이론적으로는 그 밖의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 진행, 일반적 결과 등에 대한 통찰에서 앞선다.”

0 레닌 조직론의 구체적 분석을 위하여 만델이 적시한 “세가지 요소의 변증법적 통일”을 살펴보자. “제국주의 시대에 저개발국가를 위한 혁명의 실재성 이론 (그 후 자본주의 일반위기의 시대에 전세계에 확장 적용 된다.) ;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불연속적이고 모순적 발전에 대한 그리고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에 대한 이론 ; 한편으론 과학, 다른 한편으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대한 구체적 관계에 대한 이론.

0 만델의 세가지 요소를 적용해 보자. 혁명의 실재성의 면에서 보면, 1905년의 가능성에 대해 레닌은 그 동지들보다 깨어 있었고 그것은 1912-14년 특별한 역동성을 볼쉐비키당에 불어 넣었으며 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극적으로 심화되고 확대되어 1917년의 결정적 승리에 공헌하게 된다.

0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불균등하고 모순적 발전에 대해서 살펴보면 1890년대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노동자운동과의 접촉을 통하여 그는 노동자운동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 의식의 발전이 단순하지 않고 자동적이지 않음을 알고 혁명가의 입장에서 그 의식의 발전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조심스럽고 확고한 노력이 필요했다. 객관적 조건과 사건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0 끝으로 맑스주의 이론이 과학과 계급투쟁과 맺는 관계는 초기 그의 저작과 활동에서 강조된바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철학노트]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 [국가와 혁명]에 그 결실이 나와 있다]

0 우리가 검토한 정치적 지향성과 레닌주의와 관련된 조직형식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민주집중제를 표상한다”라고 만델은 말한다. 그러나 집중이라는 단어는 조직차원으로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관리적 용어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집중은 실제적 전투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경험의 집중, 지식의 집중, 결론의 집중을 뜻한다. 경험의 집중이 없다면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를 것이다. 그것은 행동을 위한 적절한 결정을 못하게 하는 분파주의와 분열주의의 위험이다.

0 1924년 위대한 이태리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볼쉐비키의 승리를 이끈 내적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볼쉐비키당이 러시아의 지도정당이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 선택과정은 30년을 지속하였다. ........”

0 이러한 조직은 단순히 맑스주의에 기초해야만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계급의 경험과 문화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2, 레닌주의의 문제

 

0 제 5장에서 우리는 레닌주의의 조직개념 속에 내재해있는 긴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조직 형식 속에는 분파주의적 교만과 엘리트주의가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복된 후 관료적 독재로 퇴화될 뿐만 아니라 생동하는 사회투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되는 분파로 퇴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한 레닌의 조직지향성의 반박으로 묘사되는 룩셈브르크의 초기 비판이 레닌의 틀 속에 통합된다면 더욱 높이 평가되고 활용될 수 있다는 것도 토론했다.

0 발본주의 경향 중에 레닌주의에 대한 영향력 있는 비판중의 하나는 IS일원이었던 SWP당원인 영국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역사학자 Sheila Rowbotham이 있다. 제4인터에서 분리된 이 그룹은 레닌주의 좌파로 불리면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을 주창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집중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음을 지도자와 성원 사이의 가치관 차이, 초인간적 지도자 상등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0 그녀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당과 그 성원이 기능하는 (노동조합, 공동체 조직, 여성해방 집단, 반전집단 등) 넓은 사회운동과 비 당적 조직사이의 관계이다.

0 그러나 그녀 입장의 가장 심각한 한계는 레닌주의에 대한 대안이 극히 모호하면서 레닌주의 대한 근본적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는 점이다. “레닌주의에 내재한 사고와 느낌의 구조는 지속적으론 대안의 의식에 제동을 건다.”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협소한 견해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나는 이것을 (그녀가 주장하는 조직) 비 권위주의적 조직의 모형을 고안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지속적 깨달음에 대한 집합적 각성으로, 우리가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비판까지 할 수 있는 기꺼움, 다양성의 창조성에 대한 관계의 개방적 유형에 대한 지속적 추구를 의미한다.”

0 이러한 견해는 평가 절하될 필요는 없지만 레닌의 조직 개념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녀도 그것을 깨닫고 있다. “가장 사려 깊은 수준에서 레닌주의는 우리가 반드시 이룩해야 할 혁명적 이론과 실천의 열정적이고 복잡한 문화적 전통을 제공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상은 레닌주의 이전에도 있었고 반 레닌주의 일수도 있다. 그러나 레닌이후 명백한 혁명적 전통은 아직 없다.

 

(미국에서의 불행한 레닌주의 역사 서술 -생략)

 

0 이 연구의 기본 가정은 미국에서 새로운 레닌주의 유파가 의미 있을 것 이라는 점이다. 다음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새롭다는 말이다. ①볼쉐비키들 스스로의 경험에 대한 깊은 이해 ②1920년대 이래  혁명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었던 경험에 대한 이해 ③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최근 발전에 대한 심각한 분석 ④그러한 이해와 분석에 비추어 조직의 규범과 조직의 정치기능에 대한 비판적(자아비판적)형성

0 만델에 따르면 1912-13년까지 볼쉐비키는 전위당을 만들지 못했다. 전위당이 된다는 것은 “영원한”투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당은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검증하고, 자아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다.

0 레닌주의에 대한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 이해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의 부문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지금 시기에 더 특별한 연관이 있어 필요하다. 한 나라의 인민은 대중적인 정치의식 수준과 다른 하나의 계급투쟁과 해방투쟁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지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국제적 수준에서의 혁명적 노력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 ......... 더욱 필요한 것은 볼쉐비키를 지도했던 목표, 전략, 조직 규범이 이 시대와 투쟁의 열망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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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씨의 2002년 대선관련 견해

오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나의 생각        
        
        1. 한국의 대통령제는 집권후 단 한 사람이 5년 동안 중요한 국민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중앙집권제의 전형입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다중의 활력의 나날의 표현을 통한 사회발전'이라는 이상과 정면에서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각제는 좀더 확대된 대통령제일 뿐입니다.) 권력의 이러한 중앙집중은 다중이 투쟁을 통해 파괴시켜 나가야할 구조입니다. 이것이 다중의 자기가치화적 체제이자 행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입니다.

2.2002년 12월 19일에 있을 대선은 자본의 권력 재생산을 위한 시간이지 다중의 활력의 시간이 아닙니다. 대통령 후보는 점점 더 많이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미디어가 점점 더 당선자의 범위를 사전결정하고 있습니다. 당선가능성은 다중의 욕구의 예상이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예측입니다. 오늘날 이회창과 노무현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이미 사전결정된 구도는 미디어가 그려내고 또 현실화시킨 구도일 뿐 오늘날 다중의 정치적 욕구의 배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날 미디어는 권력 재생산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오늘날 그는 미디어와 권력을 분점할 수 밖에 없습니다.

3.다중은 정치의 진정한 주체입니다. 다중은 당을 통해 비로소 정치세력화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정치세력화되어 가고 있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다중은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박탈하려고 하는 자본의 정치세력과 대치하게 됩니다. 다가오는 선거는 다중의 투쟁을 그 활력적 현실에서 벗겨내어 재현의 회로 속으로 흐르도록 하기 위해 자본이 설치한 장치입니다. 이번의 선거가 자본의 시간이지 다중의 시간이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4.그러나 다중은 선거 자체와 대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중의 코뮨적 사회에서도 선거는 의사결정의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선거는 다중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너무 적게 갖고 있으며 다중의 의사를 굴절시킬 장치를 너무 많이 갖고 있습니다. 흑색선전, 미디어조작, 금품살포, 밀실협상이 진지함, 지식, 경청하기, 사랑, 창조성 등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5. 다중은 늘 '유익성의 투표', '이해관계의 투표'를 하도록 선동되어 왔습니다.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다중의 이익과 반하는 후보라도 찍어서 현실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는 선동 말입니다. 다중은 일반적으로 선거가 자신의 시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유익함의 투표'론에 쉽게 양보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현행 선거의 정치적 목적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해관계들 속에서 다중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 사회내에서 다중들은 이질적 이해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존엄성과 적대의 지평, 다중이 서로 연합할 수 있는 삶의 욕구의 지평을 감춥니다. 경쟁을 부채질하는 것, 그래서 다중을 경쟁관계의 지평으로 일차원화하는 것이 현행 선거의 계급투쟁적 효과입니다. 이 지평에서 다중은 결코 자신의 해방적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노무현은 김대중이 그러했듯이 권위주의에 반대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형태로 좀더 유연화된 '권위주의'를 도입할 것입니다.)

6.다중은 선거에서 '무엇이 나의 현재의 생활에 더 유익한가'라는 점을 고려하기보다 '어떻게 다중의 투쟁의 유통과 연합을 그 각각의 다양성과 차이를 훼손함이 없이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따라 선거를 바라보고 또 행동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심에 따른 투표'보다도 한층 더 강한 자각적 자기조직화의 관점을 요구합니다.

7.다행히 이번 선거에서 다중은 자신의 투쟁에 대립하기보다 그 투쟁에 동참하는 경향을 갖는 두 명의 후보를 갖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과 사회당의 김영규 두 명의 후보가 그들입니다. (노무현 역시 80년와 90년대 초에는 다중의 투쟁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김대중 정부 내내 다중의 투쟁을 억압해온 민주당의 후보이며 이제 재벌당인 정몽준과의 권력분점 합의를 통해 다중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져 가고 있는 후보입니다. 노무현의 당선으로 인해 어떤 이익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그에 대한 지지로 인해 발생하는 다중의 존엄성과 자기가치화의 독자성의 훼손을 상쇄하지 못할 것입니다.)

8. 권영길과 김영규는 지금까지 다중을 억압한 경험이 없으며 다중의 투쟁에서 발생하여 다중의 투쟁과 함께하는 정당의 후보라는 점에서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보조를 같이하는 후보들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이들이 이번의 대선에서 투표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는 이유입니다. 이 두 후보들 중 누구에게 투표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를 일률적으로정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경험과 지혜 속에서 평가해도 좋을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이들 역시 현존하는 권력체제 속에서 집권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를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빠르면 1918년 이후, 늦으면 1991년 이후 역사적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의 이념이 아니라 권력의 이념으로 전화했습니다. 민노당이나 사회당 혹은 또 다른 유형의 좌파정당의 (단독적 혹은 다른 정당들과의 연합을 통한) 집권은 언젠가는 혹은 머지 않아서 올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이들이 다중의 투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는 오직 다중의 자기가치화하고 자기조직화하는 투쟁과 함께 하려는 그들의 정책적, 실천적 태도와 노력(즉 다중의 자기가치화와 자기조직화에 대한 지지 혹은 동참)일 뿐인 만큼 이들의 행동이 다중의 자기조직화를 돕지 않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그만큼 이들에 대한 비판을 늘리고 지지를 약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10. 그러나 선거에 대한 이 생각은 다중 누구에게도 강요되지 말아야 할 하나의 제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투표 행동에 대한 어떤 생각을 누구나가 받아들여야할 일반적 원리로서 격상시키는 것은 다중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질 권리를 억압할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는 권영길과 김영규가 (그리고 얼마만큼은 노무현이) 우리의 투표를 받을 만한 정당의 후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들이 노무현이나 이회창 혹은 그 누구에게 투표하거나 혹은 어떤 후보에게도 투표하지 않을 때에도 그 각자의 정치적 선택의 존엄함을 인정하고 그들과 '자본의 시간'이 아닌 '우리의 시간'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거를 통해서 올 수 있는 (좋거나 나쁜) 변화의 가치는 그것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다중의 자기연합의 가치보다 더 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                                          *
우리가 바라는 정당, 우리가 바라는 후보는 우리 앞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정당-후보들이나 우리 위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정당-후보들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서로 묻는 정당-후보들입니다. 그럴 때 그 후보와 정당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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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21세기 자본주의와 맑스주의

21세기 자본주의와 맑스주의

Alex  Callinicos('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의 저자)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초청강연 내용

  

  남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그 투쟁의 규모와 용맹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투쟁이 일어난 이곳에서 연설하는 것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또한 저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돼있는 분들에게 연대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대통령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인권상을 받은 나라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정치적 의견 때문에 수감돼 있다니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방한이 기쁜 일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한국인 민족주의를 고무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한은 오늘의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에 서방 세계인 유럽과 미국에서 남한은 역동적으로 팽창하고 전진하는 경제로,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를 대표하는 모범 사례로 거론됐습니다. 그러나 IMF 위기 전개 이후인 지난 2년간 남한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체제의 모순들을 대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남한이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를 대표한다는 것이 참말일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어쩌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 같습니다. 1990년대의 풍조는, 특히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자본주의적 의기양양이 판을 쳤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동구권이 무너진 이래로 득의 만만한 주장은, 서방식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의기양양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인 중심인 미국에서 월가의 주식 시장이 1990년대 동안 전례없는 호황을 누려 왔다는 사실 덕분에도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의기양양은 지난 주 앨런 그린스펀이라는 사람이 표현했습니다. 그린스펀은 월가의 신입니다. 그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입니다. 지난 주 '새 천 년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인들이 자유 시장에서 발휘하는 생산 능력에 대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증거를 우리가 지난 10년가 미국에서 목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린스펀은 지난해에는 더 나아간 말도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미국 경제가 역사를 넘어, 그 동안 자신의 성장에 가해져 온 모든 전통적 제약들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포스터모더니즘이 갑자기 월가에 자리잡기라도 한 양 매우 보수적인 중앙은행 총재가 '역사를 넘는' 것에 대해 얘기하다니 참으로 기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린스펀의 시각, 즉 신자유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아시아 경제의 추락과 IMF위기는 영미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삼 년 전에 남한 같은 경제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정실 자본주의;'즉 재벌과 국가 관료들 사이의 부패한 연계들이 판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IMF위기는 남한 같은 경제들을 좀더 자유시장 방향으로 구조조정할 기회이자 또한 서구 다국적 기업들이 이런 나라들의 값싼 생산적 자산을 사들일 기회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이 과정에 저항하는 것은 구제 불능의 반동입니다. 경제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각 국민 국가가 자신의 경제를 통제하던 지나간 과거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묘사됩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우리가 세계적 규모로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을 제시하는 방식 치고는 완전히 비생산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화의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의 불모의 논쟁을 피하려면 칼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모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변증법적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즉,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규정하는 모순들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예컨대<공산주의 선언>에서 매우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원동력, 즉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사회관계들에 대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형성하고 부르주아지가 생산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며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한다고 마르크스가 말했을 때 그는 앤써니 기든스와 여타 세계화론자들을 150년이나 앞질렀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본래부터의 결함들을 파악했습니다. 즉, 노동착취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는 위기로 나아가는 본래부터의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시각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프레드릭 제임슨이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공산주의 선언>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겪은 최선의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이라는 점을 이해 할 수 있는 지점으로까지 인식 수준을 어떻게든 높여야 한다." 자본주의는 원리상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어지간한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는 지점까지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류가 겪은 최선의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착취, 부당함, 환경파괴, 위기와 전쟁으로 나아가는 경향 따위 때문에 인류가 겪은 최악의 것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시각이 새 천 년에 들어서는 세계를 인식하는 최상의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세계적 규모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의 전력을 살펴봅시다. IMF와 세계은행이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 정책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15년이 됐습니다. 해마다 UN이 발행하는 <인간 개발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울적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고서가 서술하는 빈곤과 불평등 때문입니다. 세계 인구 중 최부유층 5분의 1의 소득과 최빈곤층 5분의 1의 소득 격차는 1960년 30대 1에서 1990년대 60대 1로 벌어졌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1990년대에 불평등은 훨씬 더 커졌습니다. 1997년에 그 비율은 74대 1로 올랐습니다. 1994년과 1998년 사이에만도 세계 최상위 200대 갑부는 재산이 갑절 이상 늘어났습니다. 4천4백억달러에서 1조 4백2십억 달러로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 단지 세 사람, 즉 빌게이츠와 월마트 회장 월튼과 브루나이국왕의 재산이 세계 최빈국 36개국의 소득 합친 것만 합니다. 서구의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 안에서도 똑같이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증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면, 1973년과 1993년 사이에 미국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실질 임금은 하락했습니다. 1997년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1985년보다 낮았고 최고 수준이었던 1978년 보다는 한참 낮았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처지에서 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흔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더 빈곤해질 것이라고 충분한 증거도 없이 우겨댔다는 비판에 맞서 마르크스를 변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부국인 미국에서 실제로 노동자들이 지난 25년간 더 가난해졌음을 봅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빈곤화라고 부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긋지긋하고 증대하는 불평등의 세계에 직면해 불확실성과 다원성을 창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 같은 것은 제게 그저 경박하고 엉뚱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시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세계적 불평등과 빈곤이라는 이러한 현실을 다루어야 합니다.

 

  세계경제 위기

  이러한 현실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장기간에 걸쳐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선진 자본주의의 세 주요 지역을 봅시다. 유렵대륙은 1990년대 동안 경제가 지지부진했습니다. 일본은 1990년대 동안 악성 디플레 위기를 겪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래로 어떤 주요 경제도 겪은 적이 없는 최악의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한 바 있는 자본주의적 의기양양의 유일한 객관적 근거는 지난 이삼 년가 경제가 비교적 급성장한 미국입니다. 하지만 이 성장은 월 가 주식 시장 호황에 결정적으로 의존한 것입니다.

 

  이 호황에 대해 첫 번째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서양식 정실 자본주의의 사례라는 것입니다. 1년 전, 금융시장에 거액의 투기를 한 롱텀 캐피틀 매니지먼트(LTCM)라는 투기성단기자금 회사가 파산했습니다. 투기 금액이 하도 거액이어서 그 회사의 붕괴는 서구 금융 체제를 파멸시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LTCM을 구하러 개입했습니다. 그 투기성 단기자금 회사의 대표이사가 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고위 임원이었다는 사실과 월 가 은행들이 그 회사를 투기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면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정실자본주의가 아시아의 현상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 하라고 하십시오. 세계 모든 곳에서 자본가들은 서로 속이고 또 서로 뒤를 돌보아 줍니다.

 

  미국 주식시장 호황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간계급 사람들은 사치 소비재에 많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식시장에 돈을 투자했고, 주각가 올랐고, 더 부유해졌다고 느꼈고, 그래서 돈을 더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국 경제에, 또 실제로 세계 경제에 유리한 일인데, 왜냐하면 소비 증대가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간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가가 계속해서 급상승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가는 결국 주식을 발행한 기업들의 이윤에 근거하므로 궁극적으로 주가는 이윤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시작된 현시기 경제 위기를 일으킨 것은 바로 주요 경제들의 이윤율, 즉 투자수익률의 대폭 하락이었습니다. 근래에 미국의 이윤이 회복된 것은 주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식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한 덕분입니다. 그런데도 미국의 이윤율은 현시기 경제 위기가 시작된 1970년대 초보다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식 시장이 근저의 비교적 낮은 이윤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무한정 상승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월 가 주쇼螢 시장은 추락할 것입니다. 비록 이 일이 정확시 언제 일어날 것인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지난 주에 IMF는 그들이 "월 가의 중대한 조정국면"이라고 부른 증시 대폭락의 가능성이 지난 한 해 동안 급증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주식 시장 추락의 충격은 미국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미칠 것입니다.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가 지난해 아시아의 경제추락과 금융 공황을 겪는 동안 세계 경제를 지탱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의 소비 지출은 나머지 세계로부터 미국의 수입을 흡수하는 데 일조했고, 그럼으로써 다른 경제들을 가라앉지 않게 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한 경제학자 말마따나 미국은 세계 전체를 위한 최후 수단으로서 소비자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월 가가 추락한다면 이 과정은 역전될 것입니다. 자기의 주가가 떨어진 중간계급 가구들은 가난해졌다고 느끼고는 돈을 덜 쓸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경제와 십중팔구 세계 경제를 경기 후퇴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70년대 초 이래로 세계 경제가 겪는 네 번째 세계적 불황이 될 것입니다. 단지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의기양양의 분위기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적 경기 후퇴라는 전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결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의 해결책

  지금까지 저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의기양양이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잘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뭘까요? 지금 유럽은 사회민주주의가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최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한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남한에서 이 전통은 지금 민주노동당이라는 형태로 계승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2차세계대전 이래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케인즈적 국가 개입 전략을 통해 자본주의를 개혁하려 해왔습니다. 바탕에 깔린 생각은 시장이 스스로는 잘 돌아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국가가 시장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 생각은 독일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의 이른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가 미국 같은 나라의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사회적인 버전(변형)을 대표한다는 생각과 결부되곤 합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첫 번째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위기의 원천에 대한 피상적인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주의자들은 문제가 금융시장의 불안정과 불합리함에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금융시장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만사형통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근원은 생산관계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특히 그의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으로 표현됐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은 자본가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자본주의 기업은 각각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려고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윤 추구적 투장 행위들의 종합적인 효과는 체제 전체의 세계적인, 즉 일반적인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자본가가 행하는 합리적 행위인 개별 이윤 증대 노력은 세계적으로 비합리적인 효과인 전반적 이윤율의 저하라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이윤율저하 경향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흔히 겪곤 하는 위기의 숨은 원인인 것입니다. 이 위기는 실수나 우연 또는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한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작용 안에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제가 논의하고 있는 전략의 수립자인 케인즈 자신은 실제로 이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본의 한계효율' 저하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 개념은 이윤율과 얼추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이 그가 '투자의 다소 포괄적인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달리 말해, 그는 사회가 자본가들한테서 투자에 대한 통제력을 압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의 생산적 자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지배력을 그들로부터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혁명을 뜻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케인즈 분석의 논리에 두려움을 느껴 뒷걸음질을 칩니다. 그들은 차라리 자본주의를 조절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처 방식의 난점들은 독일의 최근 경험이 보여주었습니다. 독일은 유럽연합의 경제적 중심입니다. 1년 전, 독일은 연방 선거를 통해 16년간의 우파 지배가 끝났습니다.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인 '적록연정' 이 성립됐습니다. 적록정부의 선출은 이전 우파 정부가 추구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대중의 거부을 뜻했습니다. 이것은 정부에서 라퐁텡이 한 역할에 반영됐습니다. 사회민주당 당수인 라퐁텐은 새 정부의 재무장관에 임명됐습니다. 그는 사회민주당내 좌파계 인사이고, 골수 케인즈주의자이며, <세계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책의 지은이입니다. 재무장관에 임명되자마자 그는 유럽 중앙은행에 반대하는 공세를 폈습니다. 그는 경기 부양과 대량실업 완화를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빈곤층에서 부유층으로 조세 부담을 이동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대기업들은 무지무지하게 격노했습니다. 매스 미디어는 라퐁텐을 악마처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선도적인 우파 신문은 1면톱으로 상단에 크게 라퐁텐 사진을 싣고는 헤드라인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이 사람이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가?" 독일의 손꼽히는 기업들은 라퐁텐의 세법개정안이 실행된다면 본사를 독일 밖으로 옮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일단의 손꼽히는 산업체와 은행 경영자들이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드에게 압력을 넣는 공작을 했습니다. 올해 3월초에 그들의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라퐁텐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패퇴에 이어 적록 정부의 급속한 우경화가 뒤따랐습니다. 라퐁텐이 사임한지 겨우 몇 주 안에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독일 외무장관은 요슈카 피셔라는 사람인데, 그는 녹색당 당수로, 전에 혁명가였고 노련한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토의 발칸 전쟁을 앞장서서 옹호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몇 주 안에 슈뢰더는 일연의 신자유주의적 삭감 정책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일괄 정책들의 골자는 부유층에게는 법인세를 삭감하고 빈곤층에게는 연금을 삭감하는 것이었습니다.

 

  라퐁텐 사건은 두가지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그 사건은 자기네가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순전한 자본의 권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라퐁텐은 선거로 뽑힌 정치인이고 그것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선거로 뽑히지 둽은 기업인들에 의해 직위에서 밀려났습니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국민이 투표하지만 기업가들이 결정합니다.

둘째, 라퐁텐 사건은 자본이 자신의 활동에 대한 국민국가의 제한을 전보다 훨신 탐탁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체적인 시야를 갖고 이 두 번째 요점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세계화론자들은 세계화의 정도를 크게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국적 자본들을 마치 영화<인디펜던스 데이>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처럼 그립니다. 그 외계 우주선은 지구 위의 허공을 떠돌아 다니면서 파괴적인 광선을 아래로 세차게 퍼붓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은 국가적 정박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자기네 국민 국가의 후원에 계속 의지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1년 전에 금융 시장이 심각한 공황에 사로잡혔을 때 상황을 진정시켰던 것은 바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EDUXK 중앙은행들이라는 형태의 국가였던 것입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여타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대폭 인하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안심시켰습니다. 자유로이 움직이는 금융 시장조차 국가의 후원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한 세대 동안 자본주의는 더욱 세계적으로 통합됐습니다. 이것은 수입억 달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금융시장 차원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제조업 제품 수출이 미래를 결정하는 대부분의 경제의 국제 무역 차원에도 들어 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갈수록 다국적 기업에 의해 국경을 가로질러 조직되고 있는 생산의 차원에도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 기업들이 자신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국민 국가의 제한을 전보다 훨씬 탐탁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에서 보면 라퐁텐 사건은 본때를 한번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좌파의 선택

  라퐁텐 케인스주의의 실패는 좌파에게 두가지 선택을 남겨 놓습니다. 첫번째 선택은 항복입니다. 이른바 제 3의 길이 이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러분의 대통령이 제 3의 길 찬양자라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가 말하는 제 3의 길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제 3의 길 원조들인 빌 글린턴과 토니 블레어가 말하는 제 3의 길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제 3의 길은 국가 통제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의 대안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국가 통제주의나 신자유주의 모두가 좋지 않으므로 그것들의 대안이 있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제 3의 길은 그러한 대안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외관상의 반대 이면에서 실천상으로 제 3의 길은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받아들립니다. 발칸 전쟁 직후에 두 명의 지도적인 제 3의 길 유럽인들인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슈뢰더는 정책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 정책들은 일단의 신자유주의적 계획안들로서 이른바 유연 노동 시장, 사람들한테서 각종 복지 혜택들을 뺏어가는 것을 뜻하는 사회보장 ‘계혁’따위였습니다. 그러니 제 3의 길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항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강연 앞부분에서 제가 예증한 지긋지긋한 불평등의 증대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혁명적 사회주의입니다. 즉, 자본주의를 개혁 또는 조절하려 하지 말고 완전히 없애고 사회주의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즉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을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그토록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널리 퍼져 있는 생각, 특히 서구의 통념은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옛 소련과 동유럽이 이른바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가 죽은 사상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동유럽 혁명이 ‘역사의 종말’을 뜻한다고 주장한 바도 바로 이것을 가리켰습니다. 미래는 그저 끝없는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이 주장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련과 동유럽 또는 북한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제가 당원으로 있는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전세계 국제사회주의 경향에 속한 자매단체들의 관점임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단지 하나의 마르크스주의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경쟁하는 여러 마르크스주의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이어 나아갈지를 규정하려는 서로 경쟁하는 시도들입니다. 특히 스탈린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전통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에 주창해서 레닌과 볼셰비키 그리고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가 지속시킨 전통입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그것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 근거로서 유물론적 역사 이론과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단지 지적인 도구 또는 특정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해석해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변혁의 정치적 프로젝트(계획)입니다. 그 계획의 핵심은 사회주의에 대한 특정 개념입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일이라는 마르크스의 말로써 정의됩니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써만 이룰 수 있습니다. 당도, 의원도, 노동조합 지도자도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변화는 대중의 투쟁을 통해 아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개념이 이렇다면 옛 소련 동지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와 정반대의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스탈린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은 아래로부터 행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권력은 사회의 맨 꼭대기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셋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 포함됩니다. 오늘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부심이 충만해 고개를 반듯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소련에서 맨 처음으로 관료가 떠올랐을 때부터 레온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가 스탈린에게 도전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의 사회적 근원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문제는 스탈린이 몹쓸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의 문제는 관료 권력이라는 전체 사회 체제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스탈린주의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적인 발전은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창립자인 토니 클리프가 1940년대 말에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책을 썼을 때였습니다. 클리프는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의 한 형태이기는커녕 단지 자본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 말로 ‘노멘클라투라’라는 관료가 노동자 계급을 집합적으로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탈린주의 체제와 서방식 자본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직 하나, 즉 지배계급이 편제되는 방식입니다. 서방에서는 사기업을 통해서, 동구권에서는 국가 권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989년과 1991년의 격변, 즉 소련 등의 붕괴는 특정한 모양을 띠게 됩니다. 1989년과 1991년을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반혁명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낙후한 사회주의에서 현대적 자본주의로 진일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어느 것도 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형태의 자본주의에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 옆걸음질친 것이었습니다.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말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인 자신들이 ‘노멘클라투라’자본주의에 대해 얘기합니다. 바꿔 말해, 옛 관료 지배계급이 민간 자본주의 기업가로 변신함으로써 생존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과두’에 대해 얘기합니다. 과두는 러시아 경제와 러시아 정치를 지배하는 거대 기업 제왕들을 말합니다. 이 과두는 옛 스탈린주의 관료 출신이었던 덕분에 기업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주민 대중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달라진 게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자칭 민주주의자로 자처하지만 그들의 출신은 옛 노멘클라투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한 엘리트 집단에서 다른 엘리트 집단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과거의 혁명들은 그저 한 소수파에서 다른 소수파에게로 권력을 이전시켰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란 거대 다수를 위한 거대 다수의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 혁명은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변혁입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투쟁과 삶을 통해 아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저를 이 강연의 첫 부분으로 도로 데려갑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함께 논의하는 것은 옳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최대 비판자였습니다. <자본>에서 그가 한 분석은 여전히 오늘날 세계 경제 모순들을 이해하는 최상의 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사회변혁의 주체를 규명하지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화에 직면해 절망하기가 쉽습니다.‘초국적 자본이 얼마나 강력한가’, ‘그들이 케인즈주의자인 라퐁텐을 어떻게 쉽게 제거했는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 자본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이 세계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노동자 계급입니다. 노동자 계급은 모든 임금 노동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착취당하는 조건하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이 노동자입니다. 노동자 계급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축적과정의 확산 덕분에 노동자 계급은 전세계 인구의 다수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노동자 계급이 여전히 사회변혁의 결정적 주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와 자율주의

  이런 맥락에서 저는 계급 문제를 다루는 잘못된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별개인 다원적 이해관계와 투쟁으로 사회가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는 계급의 충돌같은 중심적인 충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기껏해야 그 정치는 상이한 사회운동들을 불러 모은 연합체를 건설하려 애씁니다. 정체성 정치는 현대 사회의 현실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왜 마르크스가 자본-노동 관계가 사회 변혁에 그리도 핵심적이라고 주장했는지 정체성 정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중요한 건 유일하게 또는 가장 억압당하는 사회 집단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동자 계급이 중요한 건 자본주의 생산에서 그들이 착취당한다는 사실 덕분에 그들이 자본주의 경제를 집단적으로 마비시키고 심지어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래에 일어난 비교적 부분적이고 제한된 변화에서조차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왜 남한은 근래에 부분적·제한적 정치 자유화를 겪었습니까? 결정적인 이유는 첫째로 1987년의 반란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학생 운동으로 시작돼 산업의 대중 파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둘째로 1997년 1월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대중 파업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계급은 정치 체제의 변화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계급문제를 다루는 두 번째 잘못된 방식은 ‘자율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에 대해 저는 단지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나 질 들뢰즈 같은 일부 유럽 좌파 철학자들과 연관돼 있습니다. 자율주의는 자본 노동 관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권력 관계로 환원시킵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환원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왜 착취가 일어나는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 자본가가 노동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입니까? 단지 그가 심보가 나쁘고 탐욕스런 사람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매우 흔히 자본가들은 심보가 나쁘고 탐욕스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착취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다른 요인들, 특히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이 축척하고 착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리는 방식을 포함해야 합니다. 달리 말해, 생산에서의 착취과정을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에 관한 이론이라는 더 큰 틀 안에 자리 매김해야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출발점에서 출발해, 안토니오 네그리는 그 다음에 이러한 권력 관계를 사회 전체로 적용합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으로 됩니다. 학생도 착취당하고, 주부도 착취당하고, 실업자도 착취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착취 개념을 희석시켜 마침내 그 개념은 더 이상 아무런 명확한 경제적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자율주의자들은 착취에 맞서는 대중의 자생적 반란에 특권적 의의를 부여합니다. 물론 자생적 반란은 아주 좋은 것이고 사실 굉장히 멋진 것이죠. 하지만 흔히 자율주의자들은 자생적 반란의 구호를 이용해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적개심을 정당화 합니다. 물론 노동조합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노동조합은 보통 보수적 노동 지도자들이 득세합니다. 노동 조합은 개량주의 정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노동조합니 노동자 계급대중, 즉 조직이 가장 잘 돼 있고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만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노동자 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노동자 계급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노동자들이 있는 곳, 노동조합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율주의는 단순히 이론상으로 큰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적용된 바 있는 유럽에서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빚은 잘못된 정치 전략으로 끝납니다.

 

 

  맺음말

  저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정체성 정치와 자율주의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중요한 정치 쟁점들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 변혁에서 노동자 계급 대중이 하는 중심적 역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근래에는 이 계급, 노동자 계급이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주요한 투쟁을 치렀습니다. 앞에서 저는 1997년 1월 남한 노동자들의 파업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예들도 있습니다. 1995년 11∼12월 프랑스 공공부문 대중 파업은 프랑스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밀어붙이려다 실패한 주된 경험입니다. 저는 21세기는 자본과 노동이 이제 진짜로 세계적인 규모로 위대한 대결을 계속할 세기라고 믿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과제는 이 투쟁과 연계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따라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21세기에 위대한 미래를 누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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