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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2/18
    조정환씨의 2002년 대선관련 견해
    최선을 다하는 자유

조정환씨의 2002년 대선관련 견해

오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나의 생각        
        
        1. 한국의 대통령제는 집권후 단 한 사람이 5년 동안 중요한 국민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중앙집권제의 전형입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다중의 활력의 나날의 표현을 통한 사회발전'이라는 이상과 정면에서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각제는 좀더 확대된 대통령제일 뿐입니다.) 권력의 이러한 중앙집중은 다중이 투쟁을 통해 파괴시켜 나가야할 구조입니다. 이것이 다중의 자기가치화적 체제이자 행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입니다.

2.2002년 12월 19일에 있을 대선은 자본의 권력 재생산을 위한 시간이지 다중의 활력의 시간이 아닙니다. 대통령 후보는 점점 더 많이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미디어가 점점 더 당선자의 범위를 사전결정하고 있습니다. 당선가능성은 다중의 욕구의 예상이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예측입니다. 오늘날 이회창과 노무현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이미 사전결정된 구도는 미디어가 그려내고 또 현실화시킨 구도일 뿐 오늘날 다중의 정치적 욕구의 배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날 미디어는 권력 재생산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오늘날 그는 미디어와 권력을 분점할 수 밖에 없습니다.

3.다중은 정치의 진정한 주체입니다. 다중은 당을 통해 비로소 정치세력화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정치세력화되어 가고 있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다중은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박탈하려고 하는 자본의 정치세력과 대치하게 됩니다. 다가오는 선거는 다중의 투쟁을 그 활력적 현실에서 벗겨내어 재현의 회로 속으로 흐르도록 하기 위해 자본이 설치한 장치입니다. 이번의 선거가 자본의 시간이지 다중의 시간이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4.그러나 다중은 선거 자체와 대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중의 코뮨적 사회에서도 선거는 의사결정의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선거는 다중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너무 적게 갖고 있으며 다중의 의사를 굴절시킬 장치를 너무 많이 갖고 있습니다. 흑색선전, 미디어조작, 금품살포, 밀실협상이 진지함, 지식, 경청하기, 사랑, 창조성 등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5. 다중은 늘 '유익성의 투표', '이해관계의 투표'를 하도록 선동되어 왔습니다.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다중의 이익과 반하는 후보라도 찍어서 현실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는 선동 말입니다. 다중은 일반적으로 선거가 자신의 시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유익함의 투표'론에 쉽게 양보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현행 선거의 정치적 목적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해관계들 속에서 다중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 사회내에서 다중들은 이질적 이해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존엄성과 적대의 지평, 다중이 서로 연합할 수 있는 삶의 욕구의 지평을 감춥니다. 경쟁을 부채질하는 것, 그래서 다중을 경쟁관계의 지평으로 일차원화하는 것이 현행 선거의 계급투쟁적 효과입니다. 이 지평에서 다중은 결코 자신의 해방적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노무현은 김대중이 그러했듯이 권위주의에 반대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형태로 좀더 유연화된 '권위주의'를 도입할 것입니다.)

6.다중은 선거에서 '무엇이 나의 현재의 생활에 더 유익한가'라는 점을 고려하기보다 '어떻게 다중의 투쟁의 유통과 연합을 그 각각의 다양성과 차이를 훼손함이 없이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따라 선거를 바라보고 또 행동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심에 따른 투표'보다도 한층 더 강한 자각적 자기조직화의 관점을 요구합니다.

7.다행히 이번 선거에서 다중은 자신의 투쟁에 대립하기보다 그 투쟁에 동참하는 경향을 갖는 두 명의 후보를 갖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과 사회당의 김영규 두 명의 후보가 그들입니다. (노무현 역시 80년와 90년대 초에는 다중의 투쟁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김대중 정부 내내 다중의 투쟁을 억압해온 민주당의 후보이며 이제 재벌당인 정몽준과의 권력분점 합의를 통해 다중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져 가고 있는 후보입니다. 노무현의 당선으로 인해 어떤 이익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그에 대한 지지로 인해 발생하는 다중의 존엄성과 자기가치화의 독자성의 훼손을 상쇄하지 못할 것입니다.)

8. 권영길과 김영규는 지금까지 다중을 억압한 경험이 없으며 다중의 투쟁에서 발생하여 다중의 투쟁과 함께하는 정당의 후보라는 점에서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보조를 같이하는 후보들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이들이 이번의 대선에서 투표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는 이유입니다. 이 두 후보들 중 누구에게 투표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를 일률적으로정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경험과 지혜 속에서 평가해도 좋을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이들 역시 현존하는 권력체제 속에서 집권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를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빠르면 1918년 이후, 늦으면 1991년 이후 역사적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의 이념이 아니라 권력의 이념으로 전화했습니다. 민노당이나 사회당 혹은 또 다른 유형의 좌파정당의 (단독적 혹은 다른 정당들과의 연합을 통한) 집권은 언젠가는 혹은 머지 않아서 올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이들이 다중의 투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는 오직 다중의 자기가치화하고 자기조직화하는 투쟁과 함께 하려는 그들의 정책적, 실천적 태도와 노력(즉 다중의 자기가치화와 자기조직화에 대한 지지 혹은 동참)일 뿐인 만큼 이들의 행동이 다중의 자기조직화를 돕지 않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그만큼 이들에 대한 비판을 늘리고 지지를 약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10. 그러나 선거에 대한 이 생각은 다중 누구에게도 강요되지 말아야 할 하나의 제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투표 행동에 대한 어떤 생각을 누구나가 받아들여야할 일반적 원리로서 격상시키는 것은 다중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질 권리를 억압할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는 권영길과 김영규가 (그리고 얼마만큼은 노무현이) 우리의 투표를 받을 만한 정당의 후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들이 노무현이나 이회창 혹은 그 누구에게 투표하거나 혹은 어떤 후보에게도 투표하지 않을 때에도 그 각자의 정치적 선택의 존엄함을 인정하고 그들과 '자본의 시간'이 아닌 '우리의 시간'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거를 통해서 올 수 있는 (좋거나 나쁜) 변화의 가치는 그것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다중의 자기연합의 가치보다 더 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                                          *
우리가 바라는 정당, 우리가 바라는 후보는 우리 앞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정당-후보들이나 우리 위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정당-후보들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서로 묻는 정당-후보들입니다. 그럴 때 그 후보와 정당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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