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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3
    비정규직투쟁관련, 미래연대의 정세분석과 전술방침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1/23
    1.19 현자비정규직 현장배포 미래연대 유인물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1/23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방침'에 대한 <전진>의 입장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1/21
    2004년 계급투쟁 평가와 과제, 노동자정치신문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1/19
    부유세 정책연구원 사표제풀한 이유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1/18
    현자비정규노조 현장에서(2005.1.12)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1/18
    감옥에서 보낸 한 노동자의 편지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1/18
    현중노조대의원선거,민주파 또 참패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1/18
    울노신, 이상범울산북구청장의 공무원노조에 대한 태도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1.19 현자비정규직 현장배포 미래연대 유인물

단호한 인간선언! 현자 비정규직투쟁 -
승리를 위해 투쟁하자! 연대하자!



(1월 19일에 울산 집회 및 현장에 뿌려진 미래연대 유인물입니다.)


현대자동차에서 불법파견에 맞선 노동자투쟁은 지금 전국 노동자투쟁의 뇌관이자, 사방팔방으로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의 본격적 분출을 선도하는 시발점이다. 현자, 울산에서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곳에서 이 투쟁을 지지하고 엄호하면서, 전체 노동자투쟁의 불꽃을 사수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 “현자에서의 불법파견투쟁은 바로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당신들은 더 이상
우리를 마음대로 쥐어짤 수 없다 !


현행 자본가법률 하에서도 불법이라 판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비정규직제도 확산의 물결은 작업장에서 불법, 합법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갔다. 비정규직제도를 통해 한국자본가들은 1,000만 비정규직노동자들로부터 흡혈귀처럼 이윤을 빨아먹으면서 생존해왔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이 일정에 오르자 상황은 단번에 바뀌어버렸다. 현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오늘 우리는 생산을 중단한다!”고 만천하에 선포했다. 저임금, 목숨을 담보로 하는 열악한 작업환경, 노동조합 활동의 권리 유린, 언제든지 계약해지로 잘려나가는 하루살이 인생은 끝났다.

자본가들이여, 두 눈 뜨고 똑바로 보라! 단호한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힘없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자본의 협박과 탄압에 물러서지 않고 옥쇄농성장으로 모여드는 비정규직 동지들의 의연한 눈빛 속에 굴종적 태도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들 스스로 무기력을 떨치고 단결과 투쟁의 힘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답게 살겠다고 단결하고, 투쟁을 통해 자신의 위력을 확인한 현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이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굴종의 세월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비정규직이란 이름은 현자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투쟁과 단결이 사슬을 끊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활동가들, 이제 단호한 연대행동으로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자 !
현장에 다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 숨 쉬게 하자 !


이제 거듭나서 노동운동의 대의를 위해 복무할 결의와 용기를 갖고 있는 전투적 현장조직들은 비정규직제도를 받아들였던 과거의 오류에 대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자기비판’을 전체 운동 앞에 조직하고, 이를 당면의 비정규직노조 불법파견 분쇄투쟁에 대한 실천적 결합을 통해 행동으로 입증해야 한다. 이것은 현자 정규직 운동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역할을 하려는 진지한 집단이라면 반드시 회피해서는 안 될 의무다. 만약 대체인력 투입을 용인한다면 현자 정규직 운동은 더 이상 민주노조, 노동운동을 말할 수 없다!

다행히도 현장에서 아래로부터 터져 나오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결의에 찬 연대행동들이 솟구치고 있다. 5공장의 민주파 소위원들은 5공장 투쟁을 엄호하는 결단을 내리고 있다. 3공장에서는 정규직 대의원들이 관리자들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라인을 끊는 과감한 연대행동을 조직했다. 바로 이것이다! 지난 10년간 지속해서 하강해왔던 현장투쟁력을 복원하고, 현자 민주노조운동을 노동운동의 대의에 입각해 재조직하는 거대한 작업은 바로 그렇게만 시작될 수 있다.

‘실력’은 이번 투쟁을 계기로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오랫동안 야금야금 성장했던 어용과 노사협조주의자들이 불행하게도 기세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상처’는 고름이 터져야만 회복할 수 있다. 지금이 기회다. 더 늦기 전에 ‘진짜 민주파와 가짜 민주파’를 연대행동을 통해 확연히 갈라치자. 그래서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에 충실한 진짜 민주파를 중심으로 현장을 재건하자.

합법이든, 불법이든 대체인력 투입을 거부하는 최소한의 행동만으로도 이미 불꽃이 점화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하기에 충분하다. 정규직 활동가들이 해고를 불사하면서, 대체인력 투입을 차단하는 용기 있는 행동에 돌입한다면 승리는 90% 이상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용기 있는 행동은 어용 대의원들에 맞선 원칙적인 투쟁, 조합원들의 일시적인 동요와 혼란을 뚫고 비록 당장은 고립되더라도 계급적 행동에 돌입할 수 있는 단호한 책임감, 심지어는 노동조합 집행부가 배신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계급적 대의를 지키겠다는 결의를 절실하게 요청한다. 모든 진실한 투사들은 그간의 관성과 나태함, 불철저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비정규직노동조합 투쟁에 적극 연대하고 엄호하면서, 현장에 계급적 단결의 기운을 과감히 확산시켜야 한다.


“현자 불법파견투쟁을 전국 노동자투쟁의 불꽃으로 !”


이번 현자 불파투쟁은 대단한 잠재력을 갖춘 의미심장한 투쟁이다. 이 투쟁을 통해 1,000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사슬을 끊어낼 ‘비정규직제도 완전철폐’의 깃발이 솟구칠 것이다. 우리의 모든 힘을 결집하자! 아래로부터 투쟁과 노동자연대의 망을 확장하자. “현자 불법파견투쟁을 전국 노동자투쟁의 불꽃으로!”가 2005년 상반기에 모든 노동자투사들이 기필코 쟁취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목표다. 그것을 향해 전진 또 전진하자! 전면적인 투쟁에 나선 현자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뜨거운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

대체인력 투입금지, 노조활동 보장,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쟁취하자!

현자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을 엄호하자!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하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동파업대열로 단결하자! 정규직도 잔업, 특근거부에 돌입하자!

2005년 1월 19일 미래를여는노동자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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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방침'에 대한 <전진>의 입장


□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방침’에 대한 <전진>의 입장 □


현 시기 ‘사회적 교섭방침'(노사정위 복귀)은
첨단무기로 중무장한 적진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격이다.
사회적 교섭방침 폐기하고 투쟁방침의 실현을 위해 집중하자!


1. 자본주의라는 조건에서 모든 사회적 교섭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원천적으로 사회적 교섭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노동조합만으로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혁명적 조합주의자(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노동대중의 관심과 투쟁동력을 근간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에서 교섭이란 전술적으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요소이며, 때로는 한 시기의 투쟁이 교섭으로 시작하여 교섭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교섭은 상황에 따라 노-사, 노-정, 노-사-정 교섭, 그리고 사회적 교섭 등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이뤄질 수 있다. 특히 사회적 교섭은 노-사-정 교섭으로 곧바로 등치될 수도 있고, 그보다 훨씬 다양한 교섭주체들이 참여하는 틀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회적 교섭은 일상적 교섭형태가 아니며, 각각의 교섭 주체들이 노사간 일상적 교섭의 경우보다는 훨씬 고도의 전략을 가지고 임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으로서는 자신의 주체역량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과 상대 교섭 주체들, 그 가운데 특히 자본과 정권의 전략을 면밀히 분석한 연후에 판단해야 한다. 더욱이 노동조합이 반드시 성사시키거나 응해야만 하는 교섭이 아니라, 전략전술적 효용성과 가치가 참가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면 더욱 다양한 시각으로 유․불리함을 세심하게 살펴본 연후에 판단해야 한다.


2.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교섭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다.

1) 신자유주의 하 한국경제는 노동자에게 양보할 그 어떤 것도 없다.

2004년 4월 기준으로 상장기업의 주식 43%가 초국적 자본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한국경제가 급속도로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대부분의 자본은 노동자에게 양보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나마도 의문이 가지만 제한적 경영참여 정도가 그들이 양보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수준이다.
IMF 이후 급속하게 미국주도의 경제 질서에 편입되고, 다양한 다자간․양자간 국제적 무역협정으로 인해 중심을 잡지 못한 한국경제의 어려움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이며, 대기업 역시 시장개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비용의 축소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뿐이다. 전 산업에 걸친 해고의 완전한 자유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2) 정부와 자본, 언론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전체 노사관계의 변화를 노리고 있다.

노무현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동맹은 강력하다. 성장제일주의, 경쟁과 효율 중심의 경제정책, 그리고 이를 강요하는 국제압력 아래 정부와 자본은 한 몸이 되어 돌아가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상징되는 각종 조치는 현 정부가 힘의 균형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입만 열면 귀족노조와 대공장 노조의 횡포를 언급하는 노무현대통령과 언론의 입장은 교섭을 임함에 있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공세적으로(?) 교섭을 요구한다 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28일, 중앙일보 경제포럼에 참가한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민주노총이 조건없이 노사정위에 복귀하라는 것이 국민 대다수의 여론”이라며 “민주노총이 조건부 복귀를 고집하면 사회적 대타협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김대환이 1월 13일 전경련 강연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조 전임자는 노조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므로 노조가 해결하는 것이 맞다. 산별로 가든지 스스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2007년이면 노조 전임자 급여지급 금지, 복수노조 허용 등이 진행되는데 올해부터 준비해야 제대로 된 법적 제도적 틀을 만들 수 있다. 이는 상당한 갈등을 발생시킬 소지가 크며 정부의 기본 입장은 노사간 심도깊은 논의를 통해 공동의 합의안을 마련하길 바라되 그렇지 못할 경우 기존에 마련된 안대로 갈 수박에 없지 않은가? 비정규법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사용자에게 고용의 유연성은 허용하되 차별은 시정하자는 것이다. 노사 모두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다른 내용의 불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균형을 취한 법안으로 보고 기존 골격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곧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의 일단이다.
한편 정부와 자본은 한국노총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4기 집행부 기간 동안 노사관계 전반의 변화를 노리고 있다. 한국노총은 80년대 이전에는 군사정권의 정치적 지원체제, 80년 이후에는 정부의 경제적 지원체제 역할을 해 왔으나 민주노총 성장과 함께 그 역할의 상당부분이 축소되었다. 따라서 이제 민주노총만 정리하면 정부와 자본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착시킬 수 있다. 결국 민주노총의 참여는 현 정부의 소위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로드맵 관철에 들러리를 서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현 시기 사회적 교섭방침은 타협주의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현재의 조건에서는 설령 합의가 성사되어도 이행될 수 있는 사안이 없다.

반대로 가정해서 설사 정부와 자본이 한통속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로선 정부의 자본에 대한 통제력이 미약하다. 이미 국제화된 자본은 정권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자본이 아니다. 경총과 상의 등의 완강한 태도가 그것을 잘 입증한다. 설령 합의한다 해도 자본의 입장에서 불리한 부분은 결코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2004년 초 정부와 경총, 한국노총이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을 체결했지만 이행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공무원노조, 실업자의 노조가입 허용 등 굵직한 합의에 대한 일방통행 또는 불이행은 차치하고, 국민-주택은행 합병투쟁 등 단위노조의 투쟁에 대한 합의조차 올바로 이행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회보험노조에서 보듯 사측이 합의사항을 불이행함으로써 야기된 갈등의 불씨를 의도적으로 악화시켜 대대적인 탄압의 기회로 삼고 있다. 참여와 협력이라는 구호 뒤에서 손배소 청구, 공권력 투입, 구속 수배의 남발 등이 이루어져 왔다. “무엇으로 우리가 조합원에게 타협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한국노총 금융노조 한 간부의 말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만일 불가피하게 교섭에 참가하려 한다면 최소한 이런 불신을 씻을 수 있는 선결과제를 정부와 자본이 해결해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4) 준비 없는 사회적 교섭, 국민여론으로부터 고립된 노동운동의 비상구가 될 수 없다.

급변하고 있는 한국사회를 볼 때 사회적 교섭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는 하다. 내부적인 조건으로 볼 때도 노동운동이 바뀌어야 할 지점이 상당하다. 광범한 비정규직의 문제, 기업별 노조활동의 한계, 개방화와 자유화에 대한 대응 미흡, 산별노조 교섭의 어려움, 요구관철에 미흡한 투쟁력, 대공장 중심의 노조운동의 한계 극복 등을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부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채 외부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교섭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단위노조 차원의 일상 활동을 넘어서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동의와 투쟁체계를 갖추는 것이 선결과제다. 교섭을 한다면 사회적 교섭이 ‘투쟁을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 ‘굳은 투쟁결의만 있다면 교섭이 두려울 게 없다는 점’ 등을 말하기 전에,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지’가 분명해져야 하고, 그에 대한 동의가 뒤따라야 하며, 아래로부터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깊은 골짜기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이 큰 강을 향해 모여들듯 투쟁의 물결이 모아지는 가운데 교섭을 요청해도 늦지 않는다.
한편 국민여론, 이는 다름 아닌 자본과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언론일 것이다. 민주노총이 2005년 대의원대회를 통해 사회적 교섭기구 참가를 결정하는 순간 그 언론은 대대적으로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언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하여 좋은 결실이 맺어지길 기대 한다.’고.
유감스럽게도 현재 한국의 노동자는 반발짝도 양보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럼에도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에게 주는 척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법 제도적으로 형편없는 수준으로 개악하기 위해 깔아놓은 자락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따라서 그 가운데 일부를 철회하거나 거둬들여도 언론은 정부와 자본이 엄청난 것을 양보했다며 대서특필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언론조차 위협을 느끼는 투쟁으로 돌파해야 하는데 정권과 자본이 바보가 아닌 이상 96~97 노개투 총파업 직전과 같은 상황을 조성하며 무리수를 둘 리 만무하다.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다시피 노동계급 내부를 철저히 분열시키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킬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교섭기구 참가로 얻은 여론의 효과는 순간이요, 운동발전은커녕 실리적으로도 득볼 게 없는 오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준비 없는 사회적 교섭은 결코 국민여론으로부터 고립된 노동운동의 비상구가 될 수 없다.


3. 사회적 교섭방침 폐기하고, 투쟁방침의 실현을 위해 총력 집중하자!

1) 민주노총의 정세인식과 사회적 교섭방침은 서로 충돌한다.

민주노총의 정세인식(민주노총 1차 중앙위 자료)에 의하면, 올 해 노동자계급은 매우 엄중한 상황에 놓여 있다. 비정규 개악안과 노사관계 로드맵 등 신자유주의 노사관계 완성 강행, 시장개방 압력의 가속화, 제국주의세력과 반세계화세력 간 일대격돌 예상, 수출저하와 경제성장 둔화로 고용불안 심화, 사회 양극화와 자본의 공세 격화, 대외개방정책 전면화, 한반도 위기와 중․미 간 긴장고조 등 어느 것 하나 우리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유리한 조건이 없다.
이는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지점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투쟁의 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정세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방침을 채택한다면 투쟁전선은 교란될 것이다. 교섭에 핑계를 대면서 투쟁을 힘 있게 조직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게 될 것이다. 결국 중심의 위치에 서야 할 투쟁의 조직화가 부차적 위치로 떨어지고, 오히려 교섭이 중심의 위치에 서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민주노총 4기 집행부의 정세인식과 사회적 교섭방침은 명백히 엇박자가 아닐 수 없다.

2) 사회적 교섭방침 폐기하고 최선을 다해 투쟁을 조직하자.

결론적으로 많은 도전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정치․사회․경제적 측면 등을 종합해서 볼 때 현재는 사회적 교섭을 고려할 때가 아니다.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에 대한 희망마저 잃어버리면 노동운동은 끝이라는 심정으로 사회적 교섭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민주노총의 투쟁과 민주노동당의 투쟁을 결합하고, 사회적 의제를 만드는 방향 속에서 각종 전술과 전략을 입안해야 한다.
이제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더 이상의 논의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혼란일 뿐이다. 이 시기 핵심적 과제는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과 고용안정이며, 또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을 구하는 일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사회적 교섭의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노무현 정부가 이미 사회적 교섭의 틀 밖에서 비정규직 확대를 강행하고 빈곤을 심화시키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사회적 교섭을 활용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의 혼란을 종식하고 투쟁전열을 정비하자.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투쟁을 조직하는 사업에 집중하자.


2005년 1월 19일.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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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세 정책연구원 사표제풀한 이유

윤종훈 정책연구원 사표제출
부유세가 100일 농성해서 될 일이면 얼마나 좋겠냐?
조회수 2109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윤종훈 회계사가 14일 '사직서'를 제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윤회계사는 " 작년에 조세개혁 법안이 1차로 최고위원회에서부터 부결됐다. 당시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1시간 설전을 벌이면서 좌절감을 느꼈다. '소위 말해 지도부의 인식이 이 정도구나'하고 굉장히 충격 받았다." 라고 말해 당이 부유세를 추진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점을 사퇴의 첫 번째 이유로 밝혔다.


윤종훈 회계사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부유세 문제는 단순한 법안 하나가 아니다. 누가 얼만큼 벌고 얼만큼 갖고 있는지 철저히 파악해 조세의 기본을 다시 세우는 시스템 구축 과정이다. 여기에 따를 엄청난 저항에 대응하려면 세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물론, 설득할 수 있는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위 진짜 '선수'들을 모아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당력을 총집결시켜도 힘든 문제인데, 그간 당 지도부나 간부들이 보여준 몰이해를 봤을 때,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프레시안 인터뷰) 라고 밝혔다.

윤종훈 연구원은

"(인력 충원에 대해서도) 적어도 단 한명이라도 더 뽑아야지 이대로는 못간다고 경고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현 지도부의 부유세에 대한 진정한 의지와 동력에 의구심이 들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국보법 철폐'에 올인하면서 부유세에 당력을 기울이는 게 낭비라는 분위기가 당내에 분명히 있었다."
 

"내가 조세원칙을 지키는 게 (최고위원회에) 눈엣가시인 것 같다...세금 내리는 것을 반대하는 게 민주노동당 원칙이고 그 과정 속에서 개인이나 조직, 그 주변 지지자들이 단기적으로 손해 볼 수도 있다. 당장 자기 부분을 손해봐도 감수해야 한다.... 2005년 사업(계획)도 정치적 이벤트만 있고 비정규직 철폐나 부유세 도입은 끼워 맞추기"


"부유세가 100일 단식농성해서 될 일이면 얼마나 좋겠냐.... 그런데도 당은 모든 것을 나의 원맨쇼로 해결하려고 한다...게다가 최근 분위기가 많이 안좋았다.... 출근부 사태나 당기위 문제…. 이런 상황에서 과연 희생할 가치가 있나 싶었다."


"모든 의제를 민주노동당 가치인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인이나 조직, 정파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진다. 그러니 (정책에 대한 주장이) 호소력을 갖겠나. 최고위원회 회의에 2번 들어가보니 절망스럽더라. 토론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오마이 뉴스 인터뷰) 등의 문제점들을 밝히며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윤 종훈 연구원은 경제적인 문제도 중요한 문제라고 밝혔다.

"제일 큰 문제 중 하나는 급여다. 사실 모든 직장이 그렇듯 급여 높으면 더럽고 치사해도 버틴다. 지금 내가 받는 돈이 160만원인데 사람 만나다 보면 집에 가져가는 돈이 한 100만원 정도 된다. 아내도 벌이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하고 큰애가 고 2고, 작은 애도 초등학교 6학년이다." (오마이 뉴스 인터뷰)

주대환 정책위의장은 "윤 연구원에게 1달 정도 기간을 달라고 했다"면서 "당이 인간에 대한  대우를 너무 소홀히 하는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기사입력시간 : 2005년 01월17일 [12:25] ⓒ 진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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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비정규노조 현장에서(2005.1.12)

모이자, 정문 앞으로! 그동안 얼마나 당해왔는가, 이제는 갚아주자!

현자비정규노조 (1/12)

울분과 설움! 눈치보지 말고 떨쳐 일어서자!
모이자, 정문 앞으로! 그동안 얼마나 당해왔는가, 이제는 갚아주자!


쾌속 질주를 구가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저임금 중간착취로 현대자동차가 벌어들이는 순이익만 1년에 2조원!

“현대자동차 그룹이 질주에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계열분리 당시 현대차그룹은 6개 계열사에 매출액 36조원대, 당기순이익은 1조원이 갓 넘었다. 그러나 2003년 말 현재 26개 계열사에 매출액 56조6,000억원, 순이익 2조8,000억원을 내는 거대그룹으로 성장했다. 올해 현대차그룹의 당기순이익은 3조원을 훌쩍 뛰어 넘을 전망이다” (헤럴드경제신문 김성홍 대기업전문기자)

98년 대규모 정리해고 직후 현대자동차는 정리해고로 빈 자리에 저임금 비정규직을 채워왔으며, 어느새 그 규모는 울산공장에만 1만명에 육박하는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현대자동차(주)의 순이익은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제 그 규모는 무려 2조원대에 달한다.

다시말해 현대자동차(주)는 불법적인 파견근로를 사용하며 중간착취와 이중착취를 통해 배를 불려온 것이다!!

사람장사, 인신매매에 식칼테러! 현대판 도적떼들 하청 사장!

하청업체 사장들은 원청 자본에 기생하며 그동안 사람장사·인신매매를 자행해왔다. 아무런 자본도, 기술력도, 전문성도 없이 단지 현대자동차(주) 과거 임직원이었거나 특수관계인이라는 덕택에 원청과 계약을 체결하여 우리들을 노예부리듯 써온 것이다.

▲ 2003년 3월 18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월차 하나 쓰려다 식칼테러를 당했던 하청노동자. 하청노동자들에게 공장은 생산현장이 아니라 군대였고,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야 했다!
하청 사장들은 성과와 무관하게 하청노동자들을 얼마나 장시간노동·초과노동을 시켰는가에 따라 엄청난 이윤을 보장받아왔다. 원청에서 내려오는 돈마저 떼어먹기 일쑤였고, 회식 한번 제대로 시켜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사업소 세금과 하청노동자 4대보험금까지도 원청이 계산해주었고, 하청 사장들 하는 일이란 하청노동자들에게 연월차휴가 한번도 쓰지 못하도록 만들며 잔업특근 뺑뺑이 돌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산공장에서는 월차 하나 쓰려다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끊기는 잔혹한 테러행위가 하청업체들에 의해 벌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위 사진) 그야말로 하청 사장들은 현대판 도적떼들이었던 것이다!

사장들 그동안 비정규직 단물 많이도 빼먹었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불법파견 쪽팔리지도 않나 정규직화 실시해라
사람차별 그만하고 떳떳하게 돈벌어라



현대자동차 정규직,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비정규 투쟁을 지지하고 엄호해 주십시오!

군대에서 누구나 전우애를 느껴봤을 것입니다. 힘든 작전과 훈련, 상부의 터무니없는 명령과 고참의 구박 등 … 힘들고 지친 고비마다에 당신을 일으켜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향의 부모님? 애인의 편지? 친구의 격려? 아니면 포상휴가? 하지만 가장 큰 힘은 함께 땀흘리고 함께 혼나고 함께 훈련하며 서로를 부축하고 격려하며 남몰래 건빵 한 알 나눠먹던 전우 아닙니까?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현장이 강해집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현장이 활기차 집니다. 비정규직 문제 하나만 제대로 풀면 임단협 몇 번 승리한 것보다 더 큰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 전우애를 발휘해주십시오. 지금 싸우지 않으면 더 힘들게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 아닙니다. 비정규직 투쟁을 지지하고 현장에서 옹호해 주십시오. 작은 불편을 인내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격려해 주십시오. 이 싸움의 승리를 모두의 승리로 기쁘게 맞이합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이번이 마지막 절호의 기회입니다!

“가장 강력한 우리편은 바로 우리다!” 정규직 노조도, 상급단체도, 이웃 사업장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에 싸우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혼자일 때 우리는 외롭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서로 격려하고 부추겨주며 갈데까지 가봅시다!

“가만 있으면 네가 정규직 1순위”라는 사장들의 사기술에 또 넘어갈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투쟁만 승리하면 비정규직 졸업하고 동료들과 함께 모두가 정규직화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눈치보지 말고 12일, 19일 집회에 동료들 손잡고 정문 앞으로 모입시다! 20일부터 잔업거부투쟁에 당당하게 나섭시다!

인생의 패배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싸워서 정규직화 쟁취할 것인가!

가자! 정문 앞으로!
싸우지 않으면 영원히 비정규직!
싸워서 정규직화 쟁취하자!



비정규직노조 이후 투쟁일정

불법파견 전원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1차 총력투쟁 결의대회
- 일시 : 1월 12일(수) 오늘! 오후 5시 20분
- 장소 : 본관 정문

○ 1/19(수) 오후 5시 본관 정문 : 불법파견 전원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2차 총력투쟁 결의대회

○ 1/20(목) 잔업거부 돌입 (주야간 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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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한 노동자의 편지

2005년, 노동자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

서쌍용 (현자비정규노조 사무국장) - 현자 현장투 (1/12)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구호가 2004년 노동운동의 쟁점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뒤돌아보지 않고 옆 눈치 보지 않으면서 앞만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왔습니다.
달려오면서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은 희망을 가져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연말을 맞이하고 보니 아직까지 아무 것도 이뤄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의,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의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대접하라”는 절규가 아직까지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활동하고 투쟁에서 단호했는지, 열사의 피맺힌 절규를 가슴에 담았는지,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열사들의 목숨으로 외쳤던 절규가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자들의 귀에는 지나가는 개 하품소리였을 것이며 자본가들에게는 옆집 개 배고프다고 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 추모사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우리가 투쟁하지 않고 연대하지 못하고 단결하지 못함으로 인해 자본가에게 우리는 깨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깨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미래가 모든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는 것이어야겠습니까?
현대자동차에서는 1만여 명이 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 밝혀졌지만 현대자동차는 그동안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당장 전환해도 모자를 판에 비정규직을 더 늘리겠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불법이 아니면 이익을 낼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현대자동차는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공장 안에서 집회를 한 것이 불법이라며 고발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현대자동차의 위법은 단죄하지 못한 채 불법시위를 주도했다며 저를 감옥에 가두는 것에는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그것은 비정규직이 조직돼 있지 못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활동하는 우리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쌍용
현자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다시 한번 투쟁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다시 묶으면서 투쟁전선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면서 외쳤던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외침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노동자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 우리가 살 길이고 노동운동의 희망을 만드는 길이며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길입니다.
현장에서 희망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밤, 낮을 가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동지들이 계시기에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그 희망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5년 한 해를 노동해방의 기초를 이루는 한 해로 일궈냈으면 합니다. 저의 조그만 힘을 보태겠습니다.

- 2004년 12월 22일. 울산구치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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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노조대의원선거,민주파 또 참패

현중노조 19대 대의원 선거, 민주파 또 참패

구조조정 가시화 속에 사측의 현장 장악력 확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위원장 탁학수)의 제19대 대의원 선거가 1차투표(11월 30일)와 결선투표(12월 2일)를 거쳐 마무리 되었다.
지난 9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금속연맹에서 제명된 이후 처음 치러진 이번 대의원 선거에서, 민주파는 전체 대의원 195명 가운데 3명이 당선되어 4명을 당선시킨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참패’를 기록했다.
현대중공업 민주파를 대표하는 분과동지회연합(상임의장 김형균)은 이번 선거에 60여명을 출마시켰는데, 처음 선거를 준비할 당시 조합원들이 불만을 많이 토로하는 것을 볼 때 이번 선거에서는 더 많은 당선자를 낼 것으로 기대했으나 작년과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한편 이번 선거에서 사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낙선을 주문했고 지지율을 떨어뜨려 출마자들의 기를 꺾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번 선거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다시 출마할 수 없도록 만들려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민주파의 당선을 거의 완벽하게 저지해 냄으로써, 사측이 여전히 현장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선거를 통해서도 확인된 셈이다.

한편 최근 들어 현대중공업이 중역 30여명을 정리했고 곧이어 중견 관리자들을 정리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아가 구조조정이 현장 노동자들까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플랜트 사업부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는데, 이제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구조조정이 조선 수주가 떨어져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하청 노동자를 더욱 확대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분석되는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민주파 활동가들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낙담하는 분위기다.
사측의 극악한 방법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회사의 압력에 굴복한 조합원들에 대한 실망감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합원들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민주파 활동가들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많은 조합원들 역시 괴로웠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분과동지회연합은 조만간 지금의 현실을 평가하고 이후 2005년에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한다.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슬기롭게 잘 평가하고 긴 안목을 가지고 활동을 전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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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노신, 이상범울산북구청장의 공무원노조에 대한 태도

민주노동당 구청장의 공무원노조 파업 징계, 이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다!

민주노동당 소속 이상범 울산북구청장이 지난 12월 1일 기자회견을 갖고 중징계를 요구하는 행정자치부 지침과 별도로 자체 기준을 갖고 지난 11·15 공무원노조 파업 가담자를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이상범 구청장은 이에 따라 파업에 단순 가담한 205명은 훈계조치하고 주동자 8명에 대해서는 조만간 자체 징계위원회를 열어 감봉과 견책 등 징계를 내릴 계획이다.

이상범 구청장은 이 결정이 “자치단체장에게 부여된 권한과 의무에 따르고 양심과 소신에 따라 내린 것”이라면서, “공무원노조의 노동 3권 요구는 인정하더라도 공무원으로서 하루 무단결근하는 등 근무지를 이탈해 주민에게 불편과 불안감을 안겨준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민주노동당·민주노총 자유로울 수 없다!” ― 분명한 입장 밝혀야

이상범 구청장 스스로 “공무원노조의 파업이 정당하기 때문에 징계대상이 아니라는 민주노동당이나 노조 측의 기대와도 배치되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및 민주노조운동이 ‘나 몰라라’ 하거나 두리뭉실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실제 민주노동당은 이상범 구청장의 기자회견 직후부터 소환을 요구하는 당원들의 의견이 쏟아지는 등 상당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중앙당에서 진상조사단이 파견되고 이상범 구청장에게 징계 철회를 권고하였지만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민주노총 또한 이 문제를 놓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넘어갈 수 없다. 민주노총이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이상범 구청장을 후보로 선출한 것은 2002년 4월 민주노총울산본부와 민주노동당울산시지부의 합동총회였으며, 이상범 구청장은 민주노동당 후보일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후보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또한 이상범 구청장의 행보와 처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구청장이라면, 노동3권 부정하는 중앙정부에 맞서 싸워라!

이상범 구청장의 논리는 핵심적으로 ‘불법파업 무단결근이라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파업권을 불법으로 내몬 노무현 정부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너무나 한심스럽고 반노동자적인 주장이다.
민주노동당 소속 구청장이 할 일은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중앙 정부에 맞서 싸우며 공무원노조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혹자는 행자부 지침으로 수백명이 파면·해임을 당하는 국면에서 경징계를 하여 일사부재리로 중징계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현명한 대안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얄팍한 편법이 정말 공무원노조 사수와 노동3권 쟁취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구청장 개인이 고난을 회피하며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기 위해 필요한 편법 아닐까?

이상범 구청장은 지금이라도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한 징계 입장을 철회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본모습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한 징계를 강행한다면 민주노동당·민주노총은 단호한 대응에 나서야

만일 이상범 구청장이 끝내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한 징계를 강행한다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불가피하게 그에 상응하는 단호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몇몇 개인의 출세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정치사회적으로 관철시켜 가는 거대한 대중운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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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1

최초의 세계 공황이 초래한 결과

◀ 미국의 노동자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상징인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세계 공황의 파장으로 세계 경제가 장기간 불황에 빠진다.

지난 호황기 동안 가격·이자·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873년에 세계 경제에 공황이 불어 닥친다. 독일의 주가는 1877년까지 호황의 절정기에 비해 60%나 폭락하고 미국의 대규모 철도 회사들이 파산하고 세계의 주요 철 생산 국가에서는 전체 용광로의 거의 절반이 불이 꺼진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1890년대 중반까지 유례없이 장기간의 혼란과 침체를 기록한다. 무엇보다 농업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1894년의 밀 가격은 1867년에 비해 3분의 1 정도로 하락하고 어떤 지역은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쳐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그리하여 1879~94년 사이에 아일랜드·스페인·시칠리아·루마니아 같은 곳에서 농민 봉기와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신세계’를 향해 홍수를 이루던 이민의 무리는 조용한 흐름으로 줄어든다.

1873~96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가격이 10% 이상 하락하여 그만큼 이윤(율)이 감소한다. 게다가 생산비보다 상품 가격이 훨씬 더 유동적으로 변함에 따라―예를 들어 임금은 상품 가격이 하락하는 만큼 빠르게 삭감되지 않음으로써―기업 운영은 더욱 곤란을 겪는다. 그래도 생산성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설비와 장비를 사들여야 하니 압박은 더욱 커진다. 일부 나라에서는 은 가격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지불 수단으로서의) 은과 금의 교환 비율이 예측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1873년의 주식 시장 대폭락 이래로 ‘공황’이란 말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자유 무역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한다.

각 국가는 국제적인 판매 경쟁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상품에 대해 관세를 높게 부과하는 등의 무역 장벽을 설치한다. 그리고 이익 집단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국내 시장에도 개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치와 경제가 점점 더 밀착하게 된다. 이처럼 장기 불황은 그다지도 튼튼히 뿌리내린 것처럼 보였던 1800년대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린다.

이로써 ‘사기업의 자유로운 영업, 개입하지 않는 정부, 자유 무역’이 지배하던 시대는 (1848년 민중 혁명의 성과로 시작되어) 세계 공황의 시작과 함께 막을 내린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주의에 의해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발전의 결과로서 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렇게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이 명멸을 거듭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 사실 상업과 산업은 자유 무역 시대보다 보호 무역 시대(1880~1914년)가 훨씬 더 높은 성장을 기록한다.

한편 영국만은 주요 산업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 무역을 유지한다. 금융·상업·운송서비스 분야에서 최대의 수출국이기 때문에 보호 무역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의 유동이나 국제 금융 거래는 보호 무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기업 합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독점 대기업이 생겨난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과 가격 하락으로 인한 이윤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 합병이 이루어짐으로써 독점 대기업들이 생겨난다.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해짐에 따라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이 융합하여 금융 자본을 형성한다. 군수 산업과 같은 중공업,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 산업, 석유나 전기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 분야, 비누와 담배 같은 대량 소비 제품, 수송 분야 등에서 독과점 업체가 수없이 생겨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해당 지역 석탄 생산의 90%를 장악하고 스탠더드석유는 미국 정유의 90~95%를 통제하며 US제철은 미국 강철의 63%를 생산한다. 1860~1910년 사이의 50년 동안 제조업 공장은 평균하여 자본이 39배, 노동자 수는 7배, 생산액은 19배 이상 증가한다. 엄청난 자본의 집중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과 대기업을 구별하게 만들고 자유 경쟁(시장)을 후퇴시킨다.

대기업에서는 중역·기술자·사무원들이 기업주가 하던 역할들을 대신하게 되고 작업 프로그램은 관리자의 감독 아래 통제된다. 기업 경영에는 과학적인 관리 방식이 도입되고 관리의 핵심은 작업자에게서 더 많은 생산량을 뽑아내는 데에 맞추어진다. 노동 과정을 세세하게 구분하여 초 단위까지 계산하는 ‘테일러 방식’이 도입되고 생산성 향상을 독려하는 상여금과 같은 인센티브 제도가 만들어진다.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에 혈안이 된다.

강대국들은 상품 판매와 자본 투자를 위한 새로운 시장, 석유·고무·비철금속·구리 같은 원자재, 통상의 교두보나 전진 기지로서 가치가 있는 전략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함 외교’로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반)식민지로 삼는다. 이로 인해 대국으로서의 지위는 식민지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신념이 강화된다. 중동 지방의 유전지대, 고무 생산지인 콩고와 아마존, 구리 생산지인 칠레·페루·자이레·잠비아, 금과 금광석 같은 귀금속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남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인 수에즈운하가 있는 이집트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 로디지아였다가 지금은 짐바브웨가 된 곳을 정복할 무렵의 영국인 선교사들의 단체사진

프랑스는 대부분의 서·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영토 확장을 추구한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종단 정책’을 추구한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영국과 경쟁하고 충돌하면서 동남부와 남서부의 해안 지대와 서부의 카메룬과 토고를 식민지로 확보한다. 이탈리아·벨기에·포르투갈·스페인도 경쟁하듯이 자기 몫을 차지한다.

태평양 연안 국가와 아시아도 분할된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 지역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간다. 네덜란드는 오래 전에 진출한 자바와 보르네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다. 독일은 뉴기니의 동북부와 솔로몬 군도를 차지한다. 영토 합병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도 스페인과 전쟁을 치러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고 괌과 필리핀을 수중에 넣는다. 러시아는 보카라, 키바, 만주의 대부분을 탈취한다. 일본은 1884~85년 청일전쟁과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과 조선을 강점한다.

1876~1915년 사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강대국들에게 완전히 분할·지배당한다. 그리하여 지구 땅의 4분의 1이 식민지로 종속된다. 영국은 영토 1300만㎢(주민 2600만 명), 프랑스는 900만㎢, 독일·이탈리아·벨기에는 250만㎢에 이르는 지역을 새롭게 획득한다. 이들보다 적기는 하지만 포르투갈·미국·일본·러시아도 영토를 상당히 확장한다.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른 영토 강탈은 이 시기를 제국주의―이 용어는 1870년대에 처음 등장한다―시대로 만든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토 쟁탈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1823년에 ‘서반구에 대한 유럽 국가의 어떠한 간섭도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고 유럽 국가들도 아메리카 대륙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경제 종속이 심화되어 남과 북의 경제 격차가 확대된다.

세계 경제는 1890년대 중반부터 호황으로 전환하여 1914년에 이르기까지 번창한다. 이 시기는 오늘날까지도 ‘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세계 경제는 ‘불균등 발전’으로 중심이 다원화된다. 1913년의 산업·광업·건설의 총 생산량 중에서 미국은 46%, 독일은 23.5%, 영국은 19.5%, 프랑스는 11%를 차지한다. 독일·미국·프랑스는 철강·자동차·전기·화학분야에서 영국을 앞지르고 독일의 제조업 수출은 모든 측면에서 영국을 누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영국은 해외 투자와 상업 운송에서 여전히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여 세계 경제가 런던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고 영국 화폐(파운드 스털링)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영국은 런던의 상업·금융서비스만으로도 상품 무역에서 초래되는 적자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 자본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유럽 무역의 80%는 발전된 나라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 외의 지역에 대한 무역과 투자도 대부분은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으로 향한다.

공업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경제도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1860년대에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수출품 중 절반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900년이 되면 영국의 몫은 25%로 줄어들고 다른 유럽 나라들은 31%를 차지한다.

공업 후진국들의 경제는 선진국에 종속되면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이들 사이의 경제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부자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과 ‘남’반구에 위치한 가난한 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의 격차는 1830년 무렵에는 2배였으나 1913년에는 7배로 벌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로 인해 (반)식민지의 수십 억 인민은 기아에서 허덕인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우익 세력이 확대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자기 나라의 국민들에게 영광을 안겨다주고 국민들 스스로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고무함으로써 사회 불만과 계급 갈등을 완화시킨다. 군인은 ‘명예로운’ 정복 전쟁에 참가하고 성직자는 ‘미개한’ 원주민을 ‘문명화’시키는 데에서 자기 인종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우익의 근간을 형성한다. 이들은 다윈의 ‘자연 도태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정치·도덕·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유럽인이 우월한 인종이며 영토 정복과 침략 전쟁은 당연하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다윈주의’는 꽤 큰 인기와 반향을 일으키면서 계급 갈등을 표현하는 데에도 쓰인다. 지배계급은 파업 가담자들을 불만에 가득 찬 원주민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제국주의는 자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인종들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단계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도 등장한다. 게다가 많은 일반 노동자와 노조 지도자들이 유색인을 백인 노동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한다. 사실 유색인들의 유럽 이민을 금지시킨 정부의 조처도 노동자들의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

나아가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영국 정부는 1902년에 ‘제국 기념일’을 제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등장한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는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감정과 분위기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킨다.

민족주의는 1800년대 내내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운동들과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동일시되는데 1870년대 들어서는 각 민족의 요구 수준이 ‘국가의 완전한 독립’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마을·부족·교구·길드·집성촌―를 잃어버린 대중들의 공허함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을 지배계급은 애국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사회적 복종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국가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만든다. 유럽의 지배계급들이 1870년대를 기점으로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체제 내로 흡수한 것이다. 나아가 우익은 애국주의를 독점하면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신자라고까지 부른다. 한 유태인을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 정치에 악용한 ‘드레퓌스 사건’은 민족주의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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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2

대량 생산 대량 소비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올림픽 호와 타이타닉 호 (1910)

기술 혁명으로 민중의 소비 생활이 보다 풍요로워진다.

자본이 불황을 탈출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불황은 기술 개발을 더 재촉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불황을 거치며 획기적인 기술 혁명이 이루어진다. 전기와 내연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이 증기력을 대체하기 시작하고 유기 화학과 합성수지가 개발되고 새로운 합금을 이용한 더 정밀하고 강력한 기계가 만들어진다.

이 첨단 기술들이 대중의 가정생활용품을 생산하는 데까지 응용됨으로써 많은 분야에서 대량 생산이 이루어진다. 특히 포드는 1907년에 ‘T모델’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여 대량 생산 시대의 상징이 된다. 기술 혁명에 의한 대량 생산, 이를 ‘2차 산업 혁명’이라 한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모든 산업이 연쇄로 급속히 확장된다. 그만큼 노동자의 수도 급속히 늘어난다.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도 어느 정도 상승한다.

그러나 생산성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초과로 획득되는 엄청난 이윤에 비하면 임금 몇 푼 올려주는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니 총 이윤 중에서 자본가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더 커지고 당연하게도 노동자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작아진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성장의 혜택을 조금 밖에 못 누리면서 (사회의 높아진 평균 생활수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점점 더 빈곤해진다.

일관 생산 작업이 확대되고 ‘테일러 방식’의 노동 통제가 가해지면서 작업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노동 강도가 세어지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된다. 이런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온정적인 정책들이 고안되어 실시된다. 철강·자동차·탄광·철도 산업처럼 자본이 풍부한 대기업들은 노동자공제기금·주택·학교·교회·스포츠클럽·음악회 같은 기업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포드 자동차는 다른 일반 기업에 비해 두 배나 되는 임금을 지급한다.

이처럼 실질 임금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소비품이 등장하고 대량 소비가 이루어진다. 더불어 상업적인 오락도 발전한다. 그리고 대중의 대량 소비는 대중매체·광고산업·신용거래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영국의 신문들은 1890년대에 최초로 100만 부를 돌파하고, 대중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 산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되고, 수입이 적은 사람들도 값비싼 상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할부 판매가 실시된다. 그리하여 진공청소기·가스·주방기기·바나나·백열등·아스피린·전화·무선전신·축음기·영화·자전거·자동차·비행기 등이 생활의 한 장면이 된다.

그리고 유럽 여성들은 아이를 적게 낳고 여성 중등 교육이 확대되고 자유롭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됨으로써 사회적 지위가 보다 개선된다. 그래서 상품 시장도 이들 여성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정치에서는 오히려 배제되어 집안으로 물러나 앉게 된다.

제조업이 급속하게 팽창하고 서비스업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으로 인해 동일한 양의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과 노동력은 급격히 감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수는 호황기 동안에 인상적인 비율로 증가한다. 특히 급격히 팽창하던 거대 도시들의 하부 구조를 구축하는 건축이나 기본적인 에너지원을 생산하는 석탄 산업은 엄청난 수의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낸다.

도시는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어간다. 10만 이상의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진 인구 가운데 3분의 2가 제조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영국의 런던, 소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제외하면 그 나라의 수도가 산업 중심지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량 소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제 막 등장한 다양한 서비스 부문―그러나 미국은 이때 이미 서비스업의 노동자 수가 육체노동자 수보다 많다―이 빠르게 성장한다. 유럽에서 초등학교 교사들의 수는 1870~1914년 사이에 몇 배로 늘어난다. 관료제 역시 더욱 확대된다.

서비스업과 사무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는 육체노동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거리를 둔다. 육체노동자들도 아직 동질의 집단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노동자계급들이라고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야기하곤 한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느끼기는 하지만 체코인 노동자, 폴란드인 노동자, 가톨릭 노동자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수작업 노동자들이 도시와 농촌을 가득 채우고 있고 제조업은 매우 제한된 범위에 분포되어 극도로 지역화해 있으며 민족·종교·언어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개량을 실시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제국주의 국가의 자본가들은 (긴 불황에 뒤이어 찾아온) 엄청난 호황에 따르는 막대한 이윤과 식민지에서 초과 착취로 얻은 초과 이윤을 재원으로 하여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생활 조건의 개선을 선사한다. 공연히 노동 쟁의에 휘말려 떼돈을 왕창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임금 조금 더 올려주고 일을 더 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정부는 노동자가 불가피하게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게 될 거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노동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편다. 그리하여 독일·프랑스·영국·미국에서는 ‘여성과 아동노동 제한, 노동 시간 단축, 산재 보상, 실업과 질병에 대한 배려, 노후 대책’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각 나라의 지배계급은 보통 선거를 도입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물론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보통 선거가 도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보통 선거를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성인 남자의 30~40%가 선거권을 가지게 되고 이 비율은 더욱 확대되어 간다. 또한 여성 참정권이 1890년대부터 미국의 와이오밍 주, 뉴질랜드,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에 도입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정치 민주화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에는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통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의회에 최소한의 권한만 부여된다. 영국에서는 세습적인 성원들로 구성된 상원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의 결의를 무산시킬 수 있는 양원제를 구성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시민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고 특정한 정파의 이해를 위해 선거구를 조작―게리맨더링―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또한 많은 나라가 비밀 투표제를 도입하지 않고 공개 투표를 진행함으로써 자유로운 선택을 곤란하게 만든다. 아니면 투표 연령을 높여 선거인을 줄이기도 한다.

의도야 어쨌든 민주화가 확대되자 중요한 정치 문제는 공개적인 정치 토론의 장에서 사라지고 엘리트들끼리 교제하는 주말의 시골별장·클럽·사교모임·사냥연회와 같은 권력의 회랑에서나 다루어진다. 대중 앞에서는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처럼 정치에서 위선이 판을 침에 따라 정치 풍자가 만발한다. 그리고 대중 선거 유세는 1879년 선거 때에야 비로소 영국의 글래드스턴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용한다. 한편 대중들은 여전히 지도자를 숭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숭배하는 이유가 개인의 인물 됨됨이가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신념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르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지배계급은 1880~1914년 사이에 의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과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과정에서 극우와 극좌 세력은 고립된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의 체제가 온전하게 안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독일 보수당의 경우 선거에서 표의 71%가 시골에서 나오고 대도시에서는 5%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국가는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을 이용한다. 미국 정부는 1880년대 말부터 국기 게양식을 전국의 학교에서 일상 의례로 실시하게 하고 영국 왕은 노동자들의 축제인 축구 결승전에 매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부르주아들은 상당수가 ‘유한계급’이 되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승리하는 부르주아’라는 이미지는 이자 소득과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기생계급의 이미지로 바뀐다. 이로 인해 진보·개혁·자유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의 신념은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세계 공황으로 인해 1870년대를 거치면서 권력에서 밀려난 뒤에는 일시적으로 권력을 탈환한 것을 제외하면 다시는 권력의 중심에 오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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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3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총파업의 불길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메이데이 카툰 (1906).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한 독일 노동자가 러시아 노동자와 악수하고 있다.

반동의 최후 보루였던 러시아의 차르(황제) 정부는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시행하고 자본주의 산업화를 추진한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는 국가 주도로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리하여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고 공장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전제 정치로 인해 노조조차 설립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진 1870년대부터 처음으로 파업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성장한다. 그러다가 1896년에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스부르크의 섬유 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의 노동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전개한 때를 기점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1902년에는 돈 강변의 로스토프 지방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1903년에는 남러시아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파업을 전개하고 1904년에는 오데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투쟁들은 모두 잔혹하게 진압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살해된다. 한편 러시아 군대는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곤경에 처해있던 12월에 바쿠의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빈곤의 바닥에서 고통 받던 노동자·민중들은 파업 투쟁의 승리에 고무되어 1905년 1월 ‘아버지 차르’에게 청원하기 위해 페체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행진한다. 그러나 차르 군대는 14만 명이나 되는 평화 행진 대오를 향해 무차별 발포한다. 이로 인해 1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이 아비귀환 속에서 살해당한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차르에 대한 민중들의 굳은 믿음은 여지없이 박살난다.

노동자들은 페체르스부르크 금속 노동자를 필두로 하여 전국에서 파업에 들어가고 8시간노동일과 차르 타도, 헌법 제정 의회 소집을 요구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성난 시위의 물결이 러시아 전 국토를 휩쓸고 농민들은 2천여 곳에서 귀족들의 영지를 불태우고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한다. 학생들도 도처에서 혁명에 가담한다. 폴란드 지방의 민중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킨다. 6월에는 전함 포촘킨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제 군대까지 반란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계속 전진하여 9월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전국 노조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10월부터는 페체르스부르크를 필두로 전국에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평의회)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혁명은 12월 모스크바 무장 봉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봉기는 차르 군대에게 진압되고 가혹한 테러가 뒤따른다. 그리하여 혁명은 급속히 퇴조한다. 그렇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혁명은 전 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강렬한 충격과 감동과 영감을 불어넣으면서 노동자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의 발전을 촉진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매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념하는 파업을 벌이는데 혁명을 경험한 뒤라 파업은 쉽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테러가 횡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노조를 건설하여 노조가 모든 대도시에 건설된다. 1907년까지 노조는 650개, 조합원은 2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1907년부터 스톨리핀이 반동 정치를 실행하면서 운동은 수년 동안 침체를 겪는다.

1909년부터 불황이 끝나고 호황이 시작되면서 운동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체제의 상징이던 대작가 톨스토이가 1910년에 사망하자 학생들이 차르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고 다음해 초에는 동맹 휴업까지 전개한다. 1911년부터는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1912년 4월 시베리아의 레나 금광에서 헌병대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500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새로운 파업 물결의 도화선이 된다. 레나 학살에 대한 항의 파업에만 40만 노동자가 참여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4대 두마(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4대 두마 선거일인 10월 5일, 정부가 각 공장에서 선출된 대표자 상당수의 자격을 박탈한 데 항의하여 페체르스부르크의 푸틸로프 제철 공장 노동자 1만 4천 명 전원이 파업에 들어간다. 여기에 네프스키 조선소의 6만 5천 명의 노동자가 합류하면서 페체르스부르크 전역이 총파업으로 들끓는다. 의사당과 대공장이 불과 몇㎞ 내에 있는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곧바로 정치권을 뒤흔든다. 파업이 열흘 동안 계속되자 결국 정부는 대표자를 재선출하도록 한다. 4차 두마 개원일인 11월 15일에는 흑해 선단 선원들에 대한 사형선고에 항의하여 3만 노동자들이 하루 파업을 단행한다. 12월 14일에는 6개월 전에 도입된 사회 보험에 대한 사회주의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를 지원하기 위해 6만 6천 명의 노동자들이 지지 결의를 발표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레쓰네르 공장의 노동자들은 1913년 여름에 ‘노동자 스트론긴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장장 102일 동안이나 파업을 전개한다. 이 해에도 수많은 파업들이 일어나고 파업의 열기는 다음해까지 이어진다. 1914년 3월에는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원내 보수 세력들의 군비 증강 비밀 협상―사회주의 의원단이 폭로했다―에 항의하는 파업을 단행한다. 그리고 예산 심사를 막던 좌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강제로 퇴장 당하자 노동자들은 4월 23일에 다시 항의 파업을 벌인다. 이 투쟁은 5월 1일 메이데이 파업으로 발전해 페체르스부르크에서만 25만 명이 참여한다. 7월 1일에는 바쿠 유전 파업에 대한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2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진다. 이에 13만 명의 노동자가 7월 7일 총파업을 벌여 수도를 마비시킨다. 이틀 후인 9일에는 바리케이드가 페체르스부르크 거리에 등장한다. 1905년 혁명 이후 9년 만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열흘 후에 러시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끓어오르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혁명적 열기를 일시에 잠재운다.

그러나 몇 개 산업 도시의 1000명 이상의 대기업에 총 노동 인구의 50%가 집중되어 있고, 1905~14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65%인 950만 명이 파업에 참여한 경험―특히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은 1인당 18회나 된다―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 3년 동안의 격렬했던 투쟁들에 사회주의 운동이 긴밀하게 결합한 성과로 선진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였기에 내일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 혁명은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다.

영국 노동자들이 비공식 파업으로 오랜 침묵을 깨트린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장기 불황까지 겹침에 따라 영국 노동자들의 우세했던 지위도 점차 약화된다. 특히 노조 운동의 무풍지대에 있었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개량 정책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누적되어 간다.

이런 사업장들 중에 하나였던 런던의 성냥 제조 여성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1880년대 중반부터 도래한 호황 국면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1889년에 파업에 들어간다. 노동자 대중이 노조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스스로 떨쳐 일어선 것이다. 멋지게 승리를 쟁취한 이 ‘비공인’ 파업은 수십 년 동안 굳어져온 관료적인 노조 운동에 큰 충격을 주고 침묵 속에 굴종해오던 노동자 대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투쟁을 계기로 단순 작업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파업이 크게 고무되어 ‘신’조합주의운동이 일어난다. 온건한 노조 운동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금속 기계 제조공과 철도 기관사들도 종래의 배타성을 버리고 신조합주의 운동에 연대를 표시한다. 다음해인 1890년의 메이데이에는 20만 노동자가 하이드 파크에 모여 8시간 노동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노조는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금기를 깨트린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을 거치며 조합원이 1년 만에 2.5배나 늘어나 147만 명으로 증가하고 2년이 지난 1891년에는 새로 결성된 지방 노동조합 평의회가 60개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노동당이 결성된다.

한편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농업 생산물의 가격이 산업 생산물의 가격보다 점차 높아지고 이에 따라 실질 임금이 하락하는 현상이 1900년경부터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실질 임금 하락으로 소비가 줄어들면서 1905년경부터는 호황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총파업으로까지 발전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영국 노동자들은 1911년부터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4년까지 4년 동안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특히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는 전국 파업으로 자주 경제를 마비시킨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의식이 높아져 임금과 작업 시간뿐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통제나 작업장 규율에 대한 것까지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조는 새롭게 수많은 단순작업·여성 노동자들을 가입시킨다. 그리하여 노조는 1910년 164만 명에서 1915년 268만 명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또한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산별노조가 모든 부문에서 건설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조들인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삼각동맹을 결성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일거에 중단시킨다. 삼각동맹이 예고했던 총파업은 세계대전으로 중지된다. 노동자 운동은 아직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전투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한다.

◀ 행진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이탈리아에서도 장기 불황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자 바쿠닌을 추종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반도 곳곳에서 봉기가 빈발한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산업화가 추진되고 이에 따라 조직 노동자 운동이 등장하면서 민중 봉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무정부주의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된다.

1891년 밀라노·톨리노·파텐샤 등의 지역에서 지역 노동자 단체들이 연합하여 최초로 ‘노동회의소’를 조직한다. 1893년에는 12개의 지방 노동회의소가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노동회의소연맹을 결성하는데 1902년에는 지방 노동회의소가 76개에 달하게 된다. 각 노동자 조직들은 노동조합·협동조합·사회당지구당·사회당기관지 등이 입주해 있고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술집·진료소까지 갖추고 있는 노동자 회관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노동회의소’라는 이름 아래 회의를 갖고 공동 실천을 전개한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사회 발전이 뒤쳐져 있는―특히 농업이 중심인 남부는 더 그렇다―탓에 대중의 불만이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1890년대 남부 시칠리아에서는 빈농들의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1898년 밀라노에서는 정부의 제분세 인상에 항의하는 격렬한 대중 투쟁이 일어난다. 밀라노의 투쟁으로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탈리아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00년 제노아, 1902년 피렌체, 1903년 로마에서 지역 총파업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총파업은 모두 무력으로 진압된다. 그러자 파업에 대한 여러 차례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전국 총파업이 1904년에 노동회의소연맹의 주도 아래 단행된다. 2주 동안 진행된 이 총파업은 절정에 달했을 때는 참가 인원이 100만 명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거대한 시위가 벌어져 국가 경제의 대부분이 마비된다. 일부 도시에서는 무장 항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파업의 물결은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06년까지 이어진다.

노동자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투쟁의 열기를 모아 1906년 밀라노에서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노동총동맹은 대규모 농장에 고용되어 있는 농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1907년 19만 명에서 1911년 38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호황이 활기를 잃으면서 1912년부터 다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붙기 시작하여 1914년까지 파업이 급증한다. 급기야 6월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반전 시위를 유혈 진압한 데에 항의하는 바리케이드 전투로 발전한다. 그러나 ‘혁명의 문턱’에까지 다다랐던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중단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혁명적 노조’ 운동을 전개한다.

프랑스 노동자 운동은 1871년 파리코뮌의 패배 이후 오랜 기간 침체된다. 그러나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는 혁명프랑스의 후예답게 높은 수준의 대중 투쟁을 전개한다.

드 카르빌의 광산 노동자들은 1886년에 위험 작업에 대한 안전을 노동자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광부안전대표법을 파업을 통해 사회의 쟁점으로 만든다. 또한 카르모 광산노동자들은 1892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광산 노동자의 지도자 칼비냑’을 시장에 당선시킨다. 그런데 광산 소유주인 솔라쥬 가문이 더 이상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칼비냑을 해고시켜버리자 이를 노동자 참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파업으로 대응한다. 나아가 바로 그 다음해 1893년 총선에서는 칼비냑 시장을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조레스를 ‘노동자 후보’로서 국회의원에 당선시킨다. 또한 카르모의 유리병 공장 노동자들은 1895년에 파업이 장기화되자 노조와 협동조합이 ‘자주관리’하는 집단 소유의 유리병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

1901년에 처음으로 단결권이 완전히 인정되자 노동자들은 그 다음해인 1902년에 즉시 노조 전국 조직인 노동총동맹을 건설한다.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노조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전까지 사회당과 맺어왔던 관계를 단절한다.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혁명적 생디칼리즘’(혁명적 노조주의)이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 ‘생디카’는 ‘조합’이라는 말이다―은 정당·선거·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체를 발효시키는 효모’ 역할을 하는 ‘소수 정예’를 중심으로 운동을 이끌면서 총파업이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주장한다. 직접 행동과 총파업을 강조하는 생디칼리즘은 1900년대 초반의 10여 년 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히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유일한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밖의 어떠한 전술도 거부한다. 노동총동맹은 1906년 메이데이 때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으로 벌이고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그리고 1910년에는 철도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을 전개한다. 결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이처럼 이들은 독일 노조의 간부들에 비하면 훨씬 급진적이지만 “언젠가 터뜨릴 장엄한 총파업”이라는 꿈은 하나의 순수한 ‘신앙’으로 전락해간다.

사회당은 당 사무실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고 행동으로 연대하여 노동총동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3년에는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이 파리에서 파리코뮌을 기념하는 동시에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노조가 과거의 ‘혁명’운동에 대해 기념집회를 열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나라에서 정치총파업이 일어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총파업이 벌어진다. 벨기에에서는 1891년·1902년·1913년에, 스웨덴에서는 1902년·1909년에, 네덜란드에서는 1903년에, 핀란드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905년에,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인다. 이처럼 정치총파업이 중요한 정치 투쟁의 하나로 새롭게 구사되기 시작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전진하고 있다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1888년에 최초의 노조 전국 조직인 노조총동맹을 결성하고 수많은 지역·전국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1909년에 모로코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 최초의 ‘반전’ 총파업을 벌여 1주일 동안 공공 기관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식민지 국가 가운데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인도에서는 1905~09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고양된다. 이 중에서 봄베이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 틸락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벌인 6일간의 총파업이 가장 유명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파업이 전쟁 같은 상황으로 전개된다. 칠레 노동자들은 1907년에 벌인 파업에서 수천 명이 살해당한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1919년의 총파업―‘비극적인 일주일’―에서 1500명이 살해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파업 노동자에 대한 학살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독일에서는 노조 관료들이 파업의 물결을 잠재운다.

독일의 철혈(鐵血)재상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 단속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직까지 모조리 공공연하게 파괴한다. 이 법은 세 차례나 연장되어 12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새 황제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가 권좌에서 물러난 1890년에야 이 법이 폐지된다.

그러자 노조 운동은 그 동안의 성과를 모아 전국적인 단결로 나아간다. 전국 규모의 62개 노조에서 파견된 대의원들이 1892년 대회를 열어 전국노조연맹을 결성하고 레기엔을 의장으로 선출한다. 노조는 189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서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단속법’ 시기의 탄압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노조 간부들은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공격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문율로 가지게 되어 총파업 전술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의 광부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이는 독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업의 물결로 이어진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조직 발전의 호기로 삼기보다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재정적 압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1910년에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 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면서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난다. 다시 오랜만에 전투적인 분위기가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레기엔으로 대표되는 우파 노조 지도부―사회민주당의 지도부와 겹친다―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대중들의 투쟁 열기는 다시 가라앉는다.

미국의 노동자 운동은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압살 당한다.

펜실바니아 무연탄전의 탄광 노동자들이 공황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874년 12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장기간 파업을 전개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이 한창일 때는 내전과 같은 상태가 벌어지기도 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한다. 그러자 정부는 비밀 테러 조직의 조직원이라는 날조된 구실로 10명을 교수형 시키고 14명을 장기형에 처하면서 파업을 파괴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77년에는 철도노동자들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파업을 단행한다. 오하이오 주의 흑인과 백인 미조직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시작한 파업은 전국으로 확대된다.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는 바람에 수십 명의 노동자가 살해되고 군인과 회사 폭력 단원들도 사망한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철도 시설을 대량으로 파괴한다.

숙련 노동자들의 조합은 1881년에 노동기사단―1869년에 결성된 전국조직이다―에서 탈퇴하여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시카고의 노동자 35만 명이 1886년 5월 1일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킨다. (3년 뒤인 1889년에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이 날을 기념하여 5월 1일―may day―을 세계 노동자계급이 집회를 열고 투쟁하는 날로 정한다.) 이날 맥코빅 하비스터공장에서는 6명의 파업 노동자가 학살된다. 이에 항의하여 열린 5월 4일 헤이마케트 집회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경찰과 4명의 노동자가 죽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몇 명의 무정부주의 노동자 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날조된 재판으로 4명을 교수형 시키고 2명을 장기형에 처한다. 12년 전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더 치밀한 계획 아래 또 사용한 것이다.

불황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던 1894년에 오하이오 주와 그 주변 지방의 광부 12만 5000명이 임금이 인하된 것에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간다. 1902년에는 펜실바니아 무연탄광 노동자 14만 5천 명이 파업에 들어간다. 수많은 테러가 가해지는데도 파업은 5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같은 해인 1902년, 미국철강회사가 임금 인하를 실시하고 피츠버그 변두리의 홈스테드에서 800명의 숙련공에 대하여 공장 폐쇄를 감행하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회사는 ‘핑크톤 탐정’이라고 불리는 300명의 파업 파괴 전문 부대를 동원하여 공장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자들에게 라이플 총알을 퍼붓는다. 결국 주 방위 부대 병력까지 투입하고서야 다섯 달 동안 지속된 파업이 진압된다. 그리고 1905년 시카고 팀스터즈의 파업에서는 20명이 살해되고 400명이 부상당하고 500명이 체포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지배계급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전쟁에서 적을 대하듯 한다.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이 지배계급과 환상의 ‘악당 콤비’를 이룬다. 곰퍼스 위원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동총동맹 지도부의 비행과 만행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노조 결성을 어렵게 하는 ‘오픈 숍’ 제도와 직업별 노조를 악착같이 고수하고, 갱들에게 폭력을 사주하여 노조를 지배하고, 대기업이 조직한 전국시민연맹을 통해 노조 간부를 계통적으로 매수하고, 타협을 넘어서서 아예 파업을 자본가에게 팔아먹기까지 하고, 노동자를 약탈할 뿐만 아니라 고용주까지 등쳐먹을 정도니 노동총동맹은 그야말로 배신과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인 뎁스와 헤이우드는 1905년에 전투적인 노조들을 모아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시카고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창립한다. 여기에서도 생디칼리즘이 강한 영향을 미치는데 1908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 4회 대회는 강령 전문에서 정치적인 조항을 모두 삭제하고 “산업별로 조직하는 것에 의해, 우리는 낡은 사회의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구조를 창출해 가고 있다”라는 유명한 생디칼리즘 문장을 첨가한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생디칼리즘의 직접 행동을 적극 수용하여 격렬한 파업을 수많이 일으킨다. 특히 1912년 메사추세츠 주의 로렌스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 2만 3천 명의 완강한 파업은 국제적인 주목을 끈다.

지배계급은 노·자·정 협상 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의 혁명성을 거세하려 한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여러 가지 중요한 성과를 쟁취한다. 먼저 임금이 인상되어 약간이나마 생활이 개선된다. 12~15시간이 넘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은 8~10시간으로 줄어들고 현장의 노동 통제는 완화된다. 많은 나라에서 사회 보험이 도입되고 선거권이 개선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단결이 확대된 것에 있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도 1876년에는 200만 명을 넘지 못했는데 1914년에는 1322만 명을 넘어선다. 이처럼 노동자 운동은 총파업을 전개할 정도로까지 발전한 위에서 급속히 성장해 간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거세하기 위해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화해 조정 기구를 만든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는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에서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전국 단위의 단체 교섭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혹자는 이를 ‘담합주의’(corporatism)라고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오랜 투쟁 목표 중의 하나를 달성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힘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해→조정→냉각기간→쟁의행위찬반투표→파업’이라는 복잡하고 정식화된 절차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여과하고 과감한 행동을 규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크게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노조를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가의 동반자로 만들려는 지배계급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사실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노동자들의 성과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정하는 규칙 아래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분배 구조인 노·자·정 협상 기구는 근본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현저히 봉쇄해버린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조 내에서는 관료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뿌리 깊게 형성되어 간다. 이에 따라 지도부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뚜렷하게 갈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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