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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18
    현자비정규노조 현장에서(2005.1.12)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1/18
    감옥에서 보낸 한 노동자의 편지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1/18
    현중노조대의원선거,민주파 또 참패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1/18
    울노신, 이상범울산북구청장의 공무원노조에 대한 태도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1/18
    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최선을 다하는 자유

현자비정규노조 현장에서(2005.1.12)

모이자, 정문 앞으로! 그동안 얼마나 당해왔는가, 이제는 갚아주자!

현자비정규노조 (1/12)

울분과 설움! 눈치보지 말고 떨쳐 일어서자!
모이자, 정문 앞으로! 그동안 얼마나 당해왔는가, 이제는 갚아주자!


쾌속 질주를 구가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저임금 중간착취로 현대자동차가 벌어들이는 순이익만 1년에 2조원!

“현대자동차 그룹이 질주에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계열분리 당시 현대차그룹은 6개 계열사에 매출액 36조원대, 당기순이익은 1조원이 갓 넘었다. 그러나 2003년 말 현재 26개 계열사에 매출액 56조6,000억원, 순이익 2조8,000억원을 내는 거대그룹으로 성장했다. 올해 현대차그룹의 당기순이익은 3조원을 훌쩍 뛰어 넘을 전망이다” (헤럴드경제신문 김성홍 대기업전문기자)

98년 대규모 정리해고 직후 현대자동차는 정리해고로 빈 자리에 저임금 비정규직을 채워왔으며, 어느새 그 규모는 울산공장에만 1만명에 육박하는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현대자동차(주)의 순이익은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제 그 규모는 무려 2조원대에 달한다.

다시말해 현대자동차(주)는 불법적인 파견근로를 사용하며 중간착취와 이중착취를 통해 배를 불려온 것이다!!

사람장사, 인신매매에 식칼테러! 현대판 도적떼들 하청 사장!

하청업체 사장들은 원청 자본에 기생하며 그동안 사람장사·인신매매를 자행해왔다. 아무런 자본도, 기술력도, 전문성도 없이 단지 현대자동차(주) 과거 임직원이었거나 특수관계인이라는 덕택에 원청과 계약을 체결하여 우리들을 노예부리듯 써온 것이다.

▲ 2003년 3월 18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월차 하나 쓰려다 식칼테러를 당했던 하청노동자. 하청노동자들에게 공장은 생산현장이 아니라 군대였고,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야 했다!
하청 사장들은 성과와 무관하게 하청노동자들을 얼마나 장시간노동·초과노동을 시켰는가에 따라 엄청난 이윤을 보장받아왔다. 원청에서 내려오는 돈마저 떼어먹기 일쑤였고, 회식 한번 제대로 시켜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사업소 세금과 하청노동자 4대보험금까지도 원청이 계산해주었고, 하청 사장들 하는 일이란 하청노동자들에게 연월차휴가 한번도 쓰지 못하도록 만들며 잔업특근 뺑뺑이 돌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산공장에서는 월차 하나 쓰려다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끊기는 잔혹한 테러행위가 하청업체들에 의해 벌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위 사진) 그야말로 하청 사장들은 현대판 도적떼들이었던 것이다!

사장들 그동안 비정규직 단물 많이도 빼먹었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불법파견 쪽팔리지도 않나 정규직화 실시해라
사람차별 그만하고 떳떳하게 돈벌어라



현대자동차 정규직,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비정규 투쟁을 지지하고 엄호해 주십시오!

군대에서 누구나 전우애를 느껴봤을 것입니다. 힘든 작전과 훈련, 상부의 터무니없는 명령과 고참의 구박 등 … 힘들고 지친 고비마다에 당신을 일으켜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향의 부모님? 애인의 편지? 친구의 격려? 아니면 포상휴가? 하지만 가장 큰 힘은 함께 땀흘리고 함께 혼나고 함께 훈련하며 서로를 부축하고 격려하며 남몰래 건빵 한 알 나눠먹던 전우 아닙니까?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현장이 강해집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현장이 활기차 집니다. 비정규직 문제 하나만 제대로 풀면 임단협 몇 번 승리한 것보다 더 큰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 전우애를 발휘해주십시오. 지금 싸우지 않으면 더 힘들게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 아닙니다. 비정규직 투쟁을 지지하고 현장에서 옹호해 주십시오. 작은 불편을 인내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격려해 주십시오. 이 싸움의 승리를 모두의 승리로 기쁘게 맞이합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이번이 마지막 절호의 기회입니다!

“가장 강력한 우리편은 바로 우리다!” 정규직 노조도, 상급단체도, 이웃 사업장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에 싸우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혼자일 때 우리는 외롭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서로 격려하고 부추겨주며 갈데까지 가봅시다!

“가만 있으면 네가 정규직 1순위”라는 사장들의 사기술에 또 넘어갈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투쟁만 승리하면 비정규직 졸업하고 동료들과 함께 모두가 정규직화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눈치보지 말고 12일, 19일 집회에 동료들 손잡고 정문 앞으로 모입시다! 20일부터 잔업거부투쟁에 당당하게 나섭시다!

인생의 패배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싸워서 정규직화 쟁취할 것인가!

가자! 정문 앞으로!
싸우지 않으면 영원히 비정규직!
싸워서 정규직화 쟁취하자!



비정규직노조 이후 투쟁일정

불법파견 전원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1차 총력투쟁 결의대회
- 일시 : 1월 12일(수) 오늘! 오후 5시 20분
- 장소 : 본관 정문

○ 1/19(수) 오후 5시 본관 정문 : 불법파견 전원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2차 총력투쟁 결의대회

○ 1/20(목) 잔업거부 돌입 (주야간 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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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한 노동자의 편지

2005년, 노동자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

서쌍용 (현자비정규노조 사무국장) - 현자 현장투 (1/12)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구호가 2004년 노동운동의 쟁점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뒤돌아보지 않고 옆 눈치 보지 않으면서 앞만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왔습니다.
달려오면서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은 희망을 가져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연말을 맞이하고 보니 아직까지 아무 것도 이뤄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의,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의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대접하라”는 절규가 아직까지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활동하고 투쟁에서 단호했는지, 열사의 피맺힌 절규를 가슴에 담았는지,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열사들의 목숨으로 외쳤던 절규가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자들의 귀에는 지나가는 개 하품소리였을 것이며 자본가들에게는 옆집 개 배고프다고 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 추모사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우리가 투쟁하지 않고 연대하지 못하고 단결하지 못함으로 인해 자본가에게 우리는 깨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깨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미래가 모든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는 것이어야겠습니까?
현대자동차에서는 1만여 명이 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 밝혀졌지만 현대자동차는 그동안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당장 전환해도 모자를 판에 비정규직을 더 늘리겠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불법이 아니면 이익을 낼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현대자동차는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공장 안에서 집회를 한 것이 불법이라며 고발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현대자동차의 위법은 단죄하지 못한 채 불법시위를 주도했다며 저를 감옥에 가두는 것에는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그것은 비정규직이 조직돼 있지 못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활동하는 우리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쌍용
현자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다시 한번 투쟁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다시 묶으면서 투쟁전선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면서 외쳤던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외침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노동자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 우리가 살 길이고 노동운동의 희망을 만드는 길이며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길입니다.
현장에서 희망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밤, 낮을 가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동지들이 계시기에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그 희망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5년 한 해를 노동해방의 기초를 이루는 한 해로 일궈냈으면 합니다. 저의 조그만 힘을 보태겠습니다.

- 2004년 12월 22일. 울산구치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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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노조대의원선거,민주파 또 참패

현중노조 19대 대의원 선거, 민주파 또 참패

구조조정 가시화 속에 사측의 현장 장악력 확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위원장 탁학수)의 제19대 대의원 선거가 1차투표(11월 30일)와 결선투표(12월 2일)를 거쳐 마무리 되었다.
지난 9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금속연맹에서 제명된 이후 처음 치러진 이번 대의원 선거에서, 민주파는 전체 대의원 195명 가운데 3명이 당선되어 4명을 당선시킨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참패’를 기록했다.
현대중공업 민주파를 대표하는 분과동지회연합(상임의장 김형균)은 이번 선거에 60여명을 출마시켰는데, 처음 선거를 준비할 당시 조합원들이 불만을 많이 토로하는 것을 볼 때 이번 선거에서는 더 많은 당선자를 낼 것으로 기대했으나 작년과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한편 이번 선거에서 사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낙선을 주문했고 지지율을 떨어뜨려 출마자들의 기를 꺾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번 선거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다시 출마할 수 없도록 만들려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민주파의 당선을 거의 완벽하게 저지해 냄으로써, 사측이 여전히 현장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선거를 통해서도 확인된 셈이다.

한편 최근 들어 현대중공업이 중역 30여명을 정리했고 곧이어 중견 관리자들을 정리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아가 구조조정이 현장 노동자들까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플랜트 사업부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는데, 이제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구조조정이 조선 수주가 떨어져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하청 노동자를 더욱 확대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분석되는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민주파 활동가들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낙담하는 분위기다.
사측의 극악한 방법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회사의 압력에 굴복한 조합원들에 대한 실망감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합원들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민주파 활동가들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많은 조합원들 역시 괴로웠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분과동지회연합은 조만간 지금의 현실을 평가하고 이후 2005년에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한다.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슬기롭게 잘 평가하고 긴 안목을 가지고 활동을 전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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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노신, 이상범울산북구청장의 공무원노조에 대한 태도

민주노동당 구청장의 공무원노조 파업 징계, 이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다!

민주노동당 소속 이상범 울산북구청장이 지난 12월 1일 기자회견을 갖고 중징계를 요구하는 행정자치부 지침과 별도로 자체 기준을 갖고 지난 11·15 공무원노조 파업 가담자를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이상범 구청장은 이에 따라 파업에 단순 가담한 205명은 훈계조치하고 주동자 8명에 대해서는 조만간 자체 징계위원회를 열어 감봉과 견책 등 징계를 내릴 계획이다.

이상범 구청장은 이 결정이 “자치단체장에게 부여된 권한과 의무에 따르고 양심과 소신에 따라 내린 것”이라면서, “공무원노조의 노동 3권 요구는 인정하더라도 공무원으로서 하루 무단결근하는 등 근무지를 이탈해 주민에게 불편과 불안감을 안겨준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민주노동당·민주노총 자유로울 수 없다!” ― 분명한 입장 밝혀야

이상범 구청장 스스로 “공무원노조의 파업이 정당하기 때문에 징계대상이 아니라는 민주노동당이나 노조 측의 기대와도 배치되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및 민주노조운동이 ‘나 몰라라’ 하거나 두리뭉실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실제 민주노동당은 이상범 구청장의 기자회견 직후부터 소환을 요구하는 당원들의 의견이 쏟아지는 등 상당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중앙당에서 진상조사단이 파견되고 이상범 구청장에게 징계 철회를 권고하였지만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민주노총 또한 이 문제를 놓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넘어갈 수 없다. 민주노총이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이상범 구청장을 후보로 선출한 것은 2002년 4월 민주노총울산본부와 민주노동당울산시지부의 합동총회였으며, 이상범 구청장은 민주노동당 후보일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후보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또한 이상범 구청장의 행보와 처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구청장이라면, 노동3권 부정하는 중앙정부에 맞서 싸워라!

이상범 구청장의 논리는 핵심적으로 ‘불법파업 무단결근이라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파업권을 불법으로 내몬 노무현 정부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너무나 한심스럽고 반노동자적인 주장이다.
민주노동당 소속 구청장이 할 일은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중앙 정부에 맞서 싸우며 공무원노조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혹자는 행자부 지침으로 수백명이 파면·해임을 당하는 국면에서 경징계를 하여 일사부재리로 중징계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현명한 대안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얄팍한 편법이 정말 공무원노조 사수와 노동3권 쟁취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구청장 개인이 고난을 회피하며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기 위해 필요한 편법 아닐까?

이상범 구청장은 지금이라도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한 징계 입장을 철회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본모습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한 징계를 강행한다면 민주노동당·민주노총은 단호한 대응에 나서야

만일 이상범 구청장이 끝내 공무원노조 파업에 대한 징계를 강행한다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불가피하게 그에 상응하는 단호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몇몇 개인의 출세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정치사회적으로 관철시켜 가는 거대한 대중운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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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1

최초의 세계 공황이 초래한 결과

◀ 미국의 노동자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상징인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세계 공황의 파장으로 세계 경제가 장기간 불황에 빠진다.

지난 호황기 동안 가격·이자·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873년에 세계 경제에 공황이 불어 닥친다. 독일의 주가는 1877년까지 호황의 절정기에 비해 60%나 폭락하고 미국의 대규모 철도 회사들이 파산하고 세계의 주요 철 생산 국가에서는 전체 용광로의 거의 절반이 불이 꺼진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1890년대 중반까지 유례없이 장기간의 혼란과 침체를 기록한다. 무엇보다 농업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1894년의 밀 가격은 1867년에 비해 3분의 1 정도로 하락하고 어떤 지역은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쳐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그리하여 1879~94년 사이에 아일랜드·스페인·시칠리아·루마니아 같은 곳에서 농민 봉기와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신세계’를 향해 홍수를 이루던 이민의 무리는 조용한 흐름으로 줄어든다.

1873~96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가격이 10% 이상 하락하여 그만큼 이윤(율)이 감소한다. 게다가 생산비보다 상품 가격이 훨씬 더 유동적으로 변함에 따라―예를 들어 임금은 상품 가격이 하락하는 만큼 빠르게 삭감되지 않음으로써―기업 운영은 더욱 곤란을 겪는다. 그래도 생산성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설비와 장비를 사들여야 하니 압박은 더욱 커진다. 일부 나라에서는 은 가격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지불 수단으로서의) 은과 금의 교환 비율이 예측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1873년의 주식 시장 대폭락 이래로 ‘공황’이란 말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자유 무역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한다.

각 국가는 국제적인 판매 경쟁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상품에 대해 관세를 높게 부과하는 등의 무역 장벽을 설치한다. 그리고 이익 집단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국내 시장에도 개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치와 경제가 점점 더 밀착하게 된다. 이처럼 장기 불황은 그다지도 튼튼히 뿌리내린 것처럼 보였던 1800년대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린다.

이로써 ‘사기업의 자유로운 영업, 개입하지 않는 정부, 자유 무역’이 지배하던 시대는 (1848년 민중 혁명의 성과로 시작되어) 세계 공황의 시작과 함께 막을 내린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주의에 의해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발전의 결과로서 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렇게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이 명멸을 거듭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 사실 상업과 산업은 자유 무역 시대보다 보호 무역 시대(1880~1914년)가 훨씬 더 높은 성장을 기록한다.

한편 영국만은 주요 산업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 무역을 유지한다. 금융·상업·운송서비스 분야에서 최대의 수출국이기 때문에 보호 무역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의 유동이나 국제 금융 거래는 보호 무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기업 합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독점 대기업이 생겨난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과 가격 하락으로 인한 이윤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 합병이 이루어짐으로써 독점 대기업들이 생겨난다.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해짐에 따라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이 융합하여 금융 자본을 형성한다. 군수 산업과 같은 중공업,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 산업, 석유나 전기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 분야, 비누와 담배 같은 대량 소비 제품, 수송 분야 등에서 독과점 업체가 수없이 생겨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해당 지역 석탄 생산의 90%를 장악하고 스탠더드석유는 미국 정유의 90~95%를 통제하며 US제철은 미국 강철의 63%를 생산한다. 1860~1910년 사이의 50년 동안 제조업 공장은 평균하여 자본이 39배, 노동자 수는 7배, 생산액은 19배 이상 증가한다. 엄청난 자본의 집중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과 대기업을 구별하게 만들고 자유 경쟁(시장)을 후퇴시킨다.

대기업에서는 중역·기술자·사무원들이 기업주가 하던 역할들을 대신하게 되고 작업 프로그램은 관리자의 감독 아래 통제된다. 기업 경영에는 과학적인 관리 방식이 도입되고 관리의 핵심은 작업자에게서 더 많은 생산량을 뽑아내는 데에 맞추어진다. 노동 과정을 세세하게 구분하여 초 단위까지 계산하는 ‘테일러 방식’이 도입되고 생산성 향상을 독려하는 상여금과 같은 인센티브 제도가 만들어진다.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에 혈안이 된다.

강대국들은 상품 판매와 자본 투자를 위한 새로운 시장, 석유·고무·비철금속·구리 같은 원자재, 통상의 교두보나 전진 기지로서 가치가 있는 전략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함 외교’로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반)식민지로 삼는다. 이로 인해 대국으로서의 지위는 식민지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신념이 강화된다. 중동 지방의 유전지대, 고무 생산지인 콩고와 아마존, 구리 생산지인 칠레·페루·자이레·잠비아, 금과 금광석 같은 귀금속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남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인 수에즈운하가 있는 이집트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 로디지아였다가 지금은 짐바브웨가 된 곳을 정복할 무렵의 영국인 선교사들의 단체사진

프랑스는 대부분의 서·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영토 확장을 추구한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종단 정책’을 추구한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영국과 경쟁하고 충돌하면서 동남부와 남서부의 해안 지대와 서부의 카메룬과 토고를 식민지로 확보한다. 이탈리아·벨기에·포르투갈·스페인도 경쟁하듯이 자기 몫을 차지한다.

태평양 연안 국가와 아시아도 분할된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 지역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간다. 네덜란드는 오래 전에 진출한 자바와 보르네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다. 독일은 뉴기니의 동북부와 솔로몬 군도를 차지한다. 영토 합병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도 스페인과 전쟁을 치러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고 괌과 필리핀을 수중에 넣는다. 러시아는 보카라, 키바, 만주의 대부분을 탈취한다. 일본은 1884~85년 청일전쟁과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과 조선을 강점한다.

1876~1915년 사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강대국들에게 완전히 분할·지배당한다. 그리하여 지구 땅의 4분의 1이 식민지로 종속된다. 영국은 영토 1300만㎢(주민 2600만 명), 프랑스는 900만㎢, 독일·이탈리아·벨기에는 250만㎢에 이르는 지역을 새롭게 획득한다. 이들보다 적기는 하지만 포르투갈·미국·일본·러시아도 영토를 상당히 확장한다.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른 영토 강탈은 이 시기를 제국주의―이 용어는 1870년대에 처음 등장한다―시대로 만든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토 쟁탈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1823년에 ‘서반구에 대한 유럽 국가의 어떠한 간섭도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고 유럽 국가들도 아메리카 대륙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경제 종속이 심화되어 남과 북의 경제 격차가 확대된다.

세계 경제는 1890년대 중반부터 호황으로 전환하여 1914년에 이르기까지 번창한다. 이 시기는 오늘날까지도 ‘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세계 경제는 ‘불균등 발전’으로 중심이 다원화된다. 1913년의 산업·광업·건설의 총 생산량 중에서 미국은 46%, 독일은 23.5%, 영국은 19.5%, 프랑스는 11%를 차지한다. 독일·미국·프랑스는 철강·자동차·전기·화학분야에서 영국을 앞지르고 독일의 제조업 수출은 모든 측면에서 영국을 누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영국은 해외 투자와 상업 운송에서 여전히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여 세계 경제가 런던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고 영국 화폐(파운드 스털링)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영국은 런던의 상업·금융서비스만으로도 상품 무역에서 초래되는 적자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 자본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유럽 무역의 80%는 발전된 나라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 외의 지역에 대한 무역과 투자도 대부분은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으로 향한다.

공업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경제도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1860년대에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수출품 중 절반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900년이 되면 영국의 몫은 25%로 줄어들고 다른 유럽 나라들은 31%를 차지한다.

공업 후진국들의 경제는 선진국에 종속되면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이들 사이의 경제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부자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과 ‘남’반구에 위치한 가난한 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의 격차는 1830년 무렵에는 2배였으나 1913년에는 7배로 벌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로 인해 (반)식민지의 수십 억 인민은 기아에서 허덕인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우익 세력이 확대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자기 나라의 국민들에게 영광을 안겨다주고 국민들 스스로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고무함으로써 사회 불만과 계급 갈등을 완화시킨다. 군인은 ‘명예로운’ 정복 전쟁에 참가하고 성직자는 ‘미개한’ 원주민을 ‘문명화’시키는 데에서 자기 인종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우익의 근간을 형성한다. 이들은 다윈의 ‘자연 도태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정치·도덕·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유럽인이 우월한 인종이며 영토 정복과 침략 전쟁은 당연하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다윈주의’는 꽤 큰 인기와 반향을 일으키면서 계급 갈등을 표현하는 데에도 쓰인다. 지배계급은 파업 가담자들을 불만에 가득 찬 원주민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제국주의는 자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인종들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단계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도 등장한다. 게다가 많은 일반 노동자와 노조 지도자들이 유색인을 백인 노동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한다. 사실 유색인들의 유럽 이민을 금지시킨 정부의 조처도 노동자들의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

나아가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영국 정부는 1902년에 ‘제국 기념일’을 제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등장한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는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감정과 분위기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킨다.

민족주의는 1800년대 내내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운동들과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동일시되는데 1870년대 들어서는 각 민족의 요구 수준이 ‘국가의 완전한 독립’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마을·부족·교구·길드·집성촌―를 잃어버린 대중들의 공허함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을 지배계급은 애국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사회적 복종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국가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만든다. 유럽의 지배계급들이 1870년대를 기점으로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체제 내로 흡수한 것이다. 나아가 우익은 애국주의를 독점하면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신자라고까지 부른다. 한 유태인을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 정치에 악용한 ‘드레퓌스 사건’은 민족주의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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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2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2

대량 생산 대량 소비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올림픽 호와 타이타닉 호 (1910)

기술 혁명으로 민중의 소비 생활이 보다 풍요로워진다.

자본이 불황을 탈출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불황은 기술 개발을 더 재촉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불황을 거치며 획기적인 기술 혁명이 이루어진다. 전기와 내연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이 증기력을 대체하기 시작하고 유기 화학과 합성수지가 개발되고 새로운 합금을 이용한 더 정밀하고 강력한 기계가 만들어진다.

이 첨단 기술들이 대중의 가정생활용품을 생산하는 데까지 응용됨으로써 많은 분야에서 대량 생산이 이루어진다. 특히 포드는 1907년에 ‘T모델’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여 대량 생산 시대의 상징이 된다. 기술 혁명에 의한 대량 생산, 이를 ‘2차 산업 혁명’이라 한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모든 산업이 연쇄로 급속히 확장된다. 그만큼 노동자의 수도 급속히 늘어난다.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도 어느 정도 상승한다.

그러나 생산성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초과로 획득되는 엄청난 이윤에 비하면 임금 몇 푼 올려주는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니 총 이윤 중에서 자본가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더 커지고 당연하게도 노동자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작아진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성장의 혜택을 조금 밖에 못 누리면서 (사회의 높아진 평균 생활수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점점 더 빈곤해진다.

일관 생산 작업이 확대되고 ‘테일러 방식’의 노동 통제가 가해지면서 작업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노동 강도가 세어지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된다. 이런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온정적인 정책들이 고안되어 실시된다. 철강·자동차·탄광·철도 산업처럼 자본이 풍부한 대기업들은 노동자공제기금·주택·학교·교회·스포츠클럽·음악회 같은 기업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포드 자동차는 다른 일반 기업에 비해 두 배나 되는 임금을 지급한다.

이처럼 실질 임금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소비품이 등장하고 대량 소비가 이루어진다. 더불어 상업적인 오락도 발전한다. 그리고 대중의 대량 소비는 대중매체·광고산업·신용거래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영국의 신문들은 1890년대에 최초로 100만 부를 돌파하고, 대중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 산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되고, 수입이 적은 사람들도 값비싼 상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할부 판매가 실시된다. 그리하여 진공청소기·가스·주방기기·바나나·백열등·아스피린·전화·무선전신·축음기·영화·자전거·자동차·비행기 등이 생활의 한 장면이 된다.

그리고 유럽 여성들은 아이를 적게 낳고 여성 중등 교육이 확대되고 자유롭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됨으로써 사회적 지위가 보다 개선된다. 그래서 상품 시장도 이들 여성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정치에서는 오히려 배제되어 집안으로 물러나 앉게 된다.

제조업이 급속하게 팽창하고 서비스업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으로 인해 동일한 양의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과 노동력은 급격히 감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수는 호황기 동안에 인상적인 비율로 증가한다. 특히 급격히 팽창하던 거대 도시들의 하부 구조를 구축하는 건축이나 기본적인 에너지원을 생산하는 석탄 산업은 엄청난 수의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낸다.

도시는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어간다. 10만 이상의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진 인구 가운데 3분의 2가 제조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영국의 런던, 소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제외하면 그 나라의 수도가 산업 중심지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량 소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제 막 등장한 다양한 서비스 부문―그러나 미국은 이때 이미 서비스업의 노동자 수가 육체노동자 수보다 많다―이 빠르게 성장한다. 유럽에서 초등학교 교사들의 수는 1870~1914년 사이에 몇 배로 늘어난다. 관료제 역시 더욱 확대된다.

서비스업과 사무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는 육체노동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거리를 둔다. 육체노동자들도 아직 동질의 집단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노동자계급들이라고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야기하곤 한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느끼기는 하지만 체코인 노동자, 폴란드인 노동자, 가톨릭 노동자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수작업 노동자들이 도시와 농촌을 가득 채우고 있고 제조업은 매우 제한된 범위에 분포되어 극도로 지역화해 있으며 민족·종교·언어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개량을 실시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제국주의 국가의 자본가들은 (긴 불황에 뒤이어 찾아온) 엄청난 호황에 따르는 막대한 이윤과 식민지에서 초과 착취로 얻은 초과 이윤을 재원으로 하여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생활 조건의 개선을 선사한다. 공연히 노동 쟁의에 휘말려 떼돈을 왕창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임금 조금 더 올려주고 일을 더 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정부는 노동자가 불가피하게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게 될 거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노동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편다. 그리하여 독일·프랑스·영국·미국에서는 ‘여성과 아동노동 제한, 노동 시간 단축, 산재 보상, 실업과 질병에 대한 배려, 노후 대책’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각 나라의 지배계급은 보통 선거를 도입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물론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보통 선거가 도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보통 선거를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성인 남자의 30~40%가 선거권을 가지게 되고 이 비율은 더욱 확대되어 간다. 또한 여성 참정권이 1890년대부터 미국의 와이오밍 주, 뉴질랜드,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에 도입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정치 민주화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에는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통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의회에 최소한의 권한만 부여된다. 영국에서는 세습적인 성원들로 구성된 상원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의 결의를 무산시킬 수 있는 양원제를 구성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시민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고 특정한 정파의 이해를 위해 선거구를 조작―게리맨더링―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또한 많은 나라가 비밀 투표제를 도입하지 않고 공개 투표를 진행함으로써 자유로운 선택을 곤란하게 만든다. 아니면 투표 연령을 높여 선거인을 줄이기도 한다.

의도야 어쨌든 민주화가 확대되자 중요한 정치 문제는 공개적인 정치 토론의 장에서 사라지고 엘리트들끼리 교제하는 주말의 시골별장·클럽·사교모임·사냥연회와 같은 권력의 회랑에서나 다루어진다. 대중 앞에서는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처럼 정치에서 위선이 판을 침에 따라 정치 풍자가 만발한다. 그리고 대중 선거 유세는 1879년 선거 때에야 비로소 영국의 글래드스턴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용한다. 한편 대중들은 여전히 지도자를 숭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숭배하는 이유가 개인의 인물 됨됨이가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신념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르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지배계급은 1880~1914년 사이에 의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과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과정에서 극우와 극좌 세력은 고립된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의 체제가 온전하게 안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독일 보수당의 경우 선거에서 표의 71%가 시골에서 나오고 대도시에서는 5%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국가는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을 이용한다. 미국 정부는 1880년대 말부터 국기 게양식을 전국의 학교에서 일상 의례로 실시하게 하고 영국 왕은 노동자들의 축제인 축구 결승전에 매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부르주아들은 상당수가 ‘유한계급’이 되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승리하는 부르주아’라는 이미지는 이자 소득과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기생계급의 이미지로 바뀐다. 이로 인해 진보·개혁·자유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의 신념은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세계 공황으로 인해 1870년대를 거치면서 권력에서 밀려난 뒤에는 일시적으로 권력을 탈환한 것을 제외하면 다시는 권력의 중심에 오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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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3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3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총파업의 불길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메이데이 카툰 (1906).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한 독일 노동자가 러시아 노동자와 악수하고 있다.

반동의 최후 보루였던 러시아의 차르(황제) 정부는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시행하고 자본주의 산업화를 추진한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는 국가 주도로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리하여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고 공장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전제 정치로 인해 노조조차 설립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진 1870년대부터 처음으로 파업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성장한다. 그러다가 1896년에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스부르크의 섬유 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의 노동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전개한 때를 기점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1902년에는 돈 강변의 로스토프 지방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1903년에는 남러시아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파업을 전개하고 1904년에는 오데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투쟁들은 모두 잔혹하게 진압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살해된다. 한편 러시아 군대는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곤경에 처해있던 12월에 바쿠의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빈곤의 바닥에서 고통 받던 노동자·민중들은 파업 투쟁의 승리에 고무되어 1905년 1월 ‘아버지 차르’에게 청원하기 위해 페체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행진한다. 그러나 차르 군대는 14만 명이나 되는 평화 행진 대오를 향해 무차별 발포한다. 이로 인해 1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이 아비귀환 속에서 살해당한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차르에 대한 민중들의 굳은 믿음은 여지없이 박살난다.

노동자들은 페체르스부르크 금속 노동자를 필두로 하여 전국에서 파업에 들어가고 8시간노동일과 차르 타도, 헌법 제정 의회 소집을 요구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성난 시위의 물결이 러시아 전 국토를 휩쓸고 농민들은 2천여 곳에서 귀족들의 영지를 불태우고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한다. 학생들도 도처에서 혁명에 가담한다. 폴란드 지방의 민중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킨다. 6월에는 전함 포촘킨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제 군대까지 반란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계속 전진하여 9월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전국 노조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10월부터는 페체르스부르크를 필두로 전국에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평의회)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혁명은 12월 모스크바 무장 봉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봉기는 차르 군대에게 진압되고 가혹한 테러가 뒤따른다. 그리하여 혁명은 급속히 퇴조한다. 그렇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혁명은 전 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강렬한 충격과 감동과 영감을 불어넣으면서 노동자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의 발전을 촉진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매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념하는 파업을 벌이는데 혁명을 경험한 뒤라 파업은 쉽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테러가 횡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노조를 건설하여 노조가 모든 대도시에 건설된다. 1907년까지 노조는 650개, 조합원은 25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1907년부터 스톨리핀이 반동 정치를 실행하면서 운동은 수년 동안 침체를 겪는다.

1909년부터 불황이 끝나고 호황이 시작되면서 운동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체제의 상징이던 대작가 톨스토이가 1910년에 사망하자 학생들이 차르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고 다음해 초에는 동맹 휴업까지 전개한다. 1911년부터는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1912년 4월 시베리아의 레나 금광에서 헌병대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500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새로운 파업 물결의 도화선이 된다. 레나 학살에 대한 항의 파업에만 40만 노동자가 참여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4대 두마(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4대 두마 선거일인 10월 5일, 정부가 각 공장에서 선출된 대표자 상당수의 자격을 박탈한 데 항의하여 페체르스부르크의 푸틸로프 제철 공장 노동자 1만 4천 명 전원이 파업에 들어간다. 여기에 네프스키 조선소의 6만 5천 명의 노동자가 합류하면서 페체르스부르크 전역이 총파업으로 들끓는다. 의사당과 대공장이 불과 몇㎞ 내에 있는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투쟁은 곧바로 정치권을 뒤흔든다. 파업이 열흘 동안 계속되자 결국 정부는 대표자를 재선출하도록 한다. 4차 두마 개원일인 11월 15일에는 흑해 선단 선원들에 대한 사형선고에 항의하여 3만 노동자들이 하루 파업을 단행한다. 12월 14일에는 6개월 전에 도입된 사회 보험에 대한 사회주의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를 지원하기 위해 6만 6천 명의 노동자들이 지지 결의를 발표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레쓰네르 공장의 노동자들은 1913년 여름에 ‘노동자 스트론긴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장장 102일 동안이나 파업을 전개한다. 이 해에도 수많은 파업들이 일어나고 파업의 열기는 다음해까지 이어진다. 1914년 3월에는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원내 보수 세력들의 군비 증강 비밀 협상―사회주의 의원단이 폭로했다―에 항의하는 파업을 단행한다. 그리고 예산 심사를 막던 좌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강제로 퇴장 당하자 노동자들은 4월 23일에 다시 항의 파업을 벌인다. 이 투쟁은 5월 1일 메이데이 파업으로 발전해 페체르스부르크에서만 25만 명이 참여한다. 7월 1일에는 바쿠 유전 파업에 대한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2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진다. 이에 13만 명의 노동자가 7월 7일 총파업을 벌여 수도를 마비시킨다. 이틀 후인 9일에는 바리케이드가 페체르스부르크 거리에 등장한다. 1905년 혁명 이후 9년 만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열흘 후에 러시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끓어오르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혁명적 열기를 일시에 잠재운다.

그러나 몇 개 산업 도시의 1000명 이상의 대기업에 총 노동 인구의 50%가 집중되어 있고, 1905~14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65%인 950만 명이 파업에 참여한 경험―특히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은 1인당 18회나 된다―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 3년 동안의 격렬했던 투쟁들에 사회주의 운동이 긴밀하게 결합한 성과로 선진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였기에 내일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 혁명은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다.

영국 노동자들이 비공식 파업으로 오랜 침묵을 깨트린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장기 불황까지 겹침에 따라 영국 노동자들의 우세했던 지위도 점차 약화된다. 특히 노조 운동의 무풍지대에 있었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개량 정책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누적되어 간다.

이런 사업장들 중에 하나였던 런던의 성냥 제조 여성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1880년대 중반부터 도래한 호황 국면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1889년에 파업에 들어간다. 노동자 대중이 노조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스스로 떨쳐 일어선 것이다. 멋지게 승리를 쟁취한 이 ‘비공인’ 파업은 수십 년 동안 굳어져온 관료적인 노조 운동에 큰 충격을 주고 침묵 속에 굴종해오던 노동자 대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투쟁을 계기로 단순 작업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파업이 크게 고무되어 ‘신’조합주의운동이 일어난다. 온건한 노조 운동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금속 기계 제조공과 철도 기관사들도 종래의 배타성을 버리고 신조합주의 운동에 연대를 표시한다. 다음해인 1890년의 메이데이에는 20만 노동자가 하이드 파크에 모여 8시간 노동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노조는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금기를 깨트린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을 거치며 조합원이 1년 만에 2.5배나 늘어나 147만 명으로 증가하고 2년이 지난 1891년에는 새로 결성된 지방 노동조합 평의회가 60개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노동당이 결성된다.

한편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농업 생산물의 가격이 산업 생산물의 가격보다 점차 높아지고 이에 따라 실질 임금이 하락하는 현상이 1900년경부터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실질 임금 하락으로 소비가 줄어들면서 1905년경부터는 호황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총파업으로까지 발전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영국 노동자들은 1911년부터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4년까지 4년 동안 수많은 파업이 일어난다. 특히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는 전국 파업으로 자주 경제를 마비시킨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의식이 높아져 임금과 작업 시간뿐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통제나 작업장 규율에 대한 것까지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조는 새롭게 수많은 단순작업·여성 노동자들을 가입시킨다. 그리하여 노조는 1910년 164만 명에서 1915년 268만 명으로 급속히 성장한다. 또한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산별노조가 모든 부문에서 건설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조들인 탄광·철도·일반운수 노조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삼각동맹을 결성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일거에 중단시킨다. 삼각동맹이 예고했던 총파업은 세계대전으로 중지된다. 노동자 운동은 아직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전투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한다.

◀ 행진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이탈리아에서도 장기 불황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자 바쿠닌을 추종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반도 곳곳에서 봉기가 빈발한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산업화가 추진되고 이에 따라 조직 노동자 운동이 등장하면서 민중 봉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무정부주의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된다.

1891년 밀라노·톨리노·파텐샤 등의 지역에서 지역 노동자 단체들이 연합하여 최초로 ‘노동회의소’를 조직한다. 1893년에는 12개의 지방 노동회의소가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노동회의소연맹을 결성하는데 1902년에는 지방 노동회의소가 76개에 달하게 된다. 각 노동자 조직들은 노동조합·협동조합·사회당지구당·사회당기관지 등이 입주해 있고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술집·진료소까지 갖추고 있는 노동자 회관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노동회의소’라는 이름 아래 회의를 갖고 공동 실천을 전개한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사회 발전이 뒤쳐져 있는―특히 농업이 중심인 남부는 더 그렇다―탓에 대중의 불만이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1890년대 남부 시칠리아에서는 빈농들의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1898년 밀라노에서는 정부의 제분세 인상에 항의하는 격렬한 대중 투쟁이 일어난다. 밀라노의 투쟁으로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탈리아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00년 제노아, 1902년 피렌체, 1903년 로마에서 지역 총파업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총파업은 모두 무력으로 진압된다. 그러자 파업에 대한 여러 차례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전국 총파업이 1904년에 노동회의소연맹의 주도 아래 단행된다. 2주 동안 진행된 이 총파업은 절정에 달했을 때는 참가 인원이 100만 명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거대한 시위가 벌어져 국가 경제의 대부분이 마비된다. 일부 도시에서는 무장 항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파업의 물결은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06년까지 이어진다.

노동자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투쟁의 열기를 모아 1906년 밀라노에서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노동총동맹은 대규모 농장에 고용되어 있는 농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1907년 19만 명에서 1911년 38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호황이 활기를 잃으면서 1912년부터 다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붙기 시작하여 1914년까지 파업이 급증한다. 급기야 6월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반전 시위를 유혈 진압한 데에 항의하는 바리케이드 전투로 발전한다. 그러나 ‘혁명의 문턱’에까지 다다랐던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중단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혁명적 노조’ 운동을 전개한다.

프랑스 노동자 운동은 1871년 파리코뮌의 패배 이후 오랜 기간 침체된다. 그러나 다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는 혁명프랑스의 후예답게 높은 수준의 대중 투쟁을 전개한다.

드 카르빌의 광산 노동자들은 1886년에 위험 작업에 대한 안전을 노동자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광부안전대표법을 파업을 통해 사회의 쟁점으로 만든다. 또한 카르모 광산노동자들은 1892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광산 노동자의 지도자 칼비냑’을 시장에 당선시킨다. 그런데 광산 소유주인 솔라쥬 가문이 더 이상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칼비냑을 해고시켜버리자 이를 노동자 참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파업으로 대응한다. 나아가 바로 그 다음해 1893년 총선에서는 칼비냑 시장을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조레스를 ‘노동자 후보’로서 국회의원에 당선시킨다. 또한 카르모의 유리병 공장 노동자들은 1895년에 파업이 장기화되자 노조와 협동조합이 ‘자주관리’하는 집단 소유의 유리병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

1901년에 처음으로 단결권이 완전히 인정되자 노동자들은 그 다음해인 1902년에 즉시 노조 전국 조직인 노동총동맹을 건설한다.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노조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전까지 사회당과 맺어왔던 관계를 단절한다.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혁명적 생디칼리즘’(혁명적 노조주의)이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 ‘생디카’는 ‘조합’이라는 말이다―은 정당·선거·의회에 참가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전체를 발효시키는 효모’ 역할을 하는 ‘소수 정예’를 중심으로 운동을 이끌면서 총파업이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주장한다. 직접 행동과 총파업을 강조하는 생디칼리즘은 1900년대 초반의 10여 년 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히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유일한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밖의 어떠한 전술도 거부한다. 노동총동맹은 1906년 메이데이 때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으로 벌이고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그리고 1910년에는 철도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을 전개한다. 결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이처럼 이들은 독일 노조의 간부들에 비하면 훨씬 급진적이지만 “언젠가 터뜨릴 장엄한 총파업”이라는 꿈은 하나의 순수한 ‘신앙’으로 전락해간다.

사회당은 당 사무실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고 행동으로 연대하여 노동총동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13년에는 노동총동맹과 사회당이 파리에서 파리코뮌을 기념하는 동시에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노조가 과거의 ‘혁명’운동에 대해 기념집회를 열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나라에서 정치총파업이 일어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총파업이 벌어진다. 벨기에에서는 1891년·1902년·1913년에, 스웨덴에서는 1902년·1909년에, 네덜란드에서는 1903년에, 핀란드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905년에,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인다. 이처럼 정치총파업이 중요한 정치 투쟁의 하나로 새롭게 구사되기 시작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전진하고 있다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1888년에 최초의 노조 전국 조직인 노조총동맹을 결성하고 수많은 지역·전국 총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1909년에 모로코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 최초의 ‘반전’ 총파업을 벌여 1주일 동안 공공 기관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식민지 국가 가운데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인도에서는 1905~09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고양된다. 이 중에서 봄베이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 틸락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벌인 6일간의 총파업이 가장 유명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파업이 전쟁 같은 상황으로 전개된다. 칠레 노동자들은 1907년에 벌인 파업에서 수천 명이 살해당한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1919년의 총파업―‘비극적인 일주일’―에서 1500명이 살해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파업 노동자에 대한 학살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독일에서는 노조 관료들이 파업의 물결을 잠재운다.

독일의 철혈(鐵血)재상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 단속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직까지 모조리 공공연하게 파괴한다. 이 법은 세 차례나 연장되어 12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새 황제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가 권좌에서 물러난 1890년에야 이 법이 폐지된다.

그러자 노조 운동은 그 동안의 성과를 모아 전국적인 단결로 나아간다. 전국 규모의 62개 노조에서 파견된 대의원들이 1892년 대회를 열어 전국노조연맹을 결성하고 레기엔을 의장으로 선출한다. 노조는 189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서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단속법’ 시기의 탄압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노조 간부들은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공격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문율로 가지게 되어 총파업 전술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의 광부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이는 독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업의 물결로 이어진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조직 발전의 호기로 삼기보다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재정적 압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1910년에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 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면서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난다. 다시 오랜만에 전투적인 분위기가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레기엔으로 대표되는 우파 노조 지도부―사회민주당의 지도부와 겹친다―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대중들의 투쟁 열기는 다시 가라앉는다.

미국의 노동자 운동은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압살 당한다.

펜실바니아 무연탄전의 탄광 노동자들이 공황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874년 12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장기간 파업을 전개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이 한창일 때는 내전과 같은 상태가 벌어지기도 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한다. 그러자 정부는 비밀 테러 조직의 조직원이라는 날조된 구실로 10명을 교수형 시키고 14명을 장기형에 처하면서 파업을 파괴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77년에는 철도노동자들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파업을 단행한다. 오하이오 주의 흑인과 백인 미조직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시작한 파업은 전국으로 확대된다.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을 진압하는 바람에 수십 명의 노동자가 살해되고 군인과 회사 폭력 단원들도 사망한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철도 시설을 대량으로 파괴한다.

숙련 노동자들의 조합은 1881년에 노동기사단―1869년에 결성된 전국조직이다―에서 탈퇴하여 노동총동맹을 결성한다.

시카고의 노동자 35만 명이 1886년 5월 1일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킨다. (3년 뒤인 1889년에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이 날을 기념하여 5월 1일―may day―을 세계 노동자계급이 집회를 열고 투쟁하는 날로 정한다.) 이날 맥코빅 하비스터공장에서는 6명의 파업 노동자가 학살된다. 이에 항의하여 열린 5월 4일 헤이마케트 집회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경찰과 4명의 노동자가 죽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몇 명의 무정부주의 노동자 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날조된 재판으로 4명을 교수형 시키고 2명을 장기형에 처한다. 12년 전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더 치밀한 계획 아래 또 사용한 것이다.

불황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던 1894년에 오하이오 주와 그 주변 지방의 광부 12만 5000명이 임금이 인하된 것에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간다. 1902년에는 펜실바니아 무연탄광 노동자 14만 5천 명이 파업에 들어간다. 수많은 테러가 가해지는데도 파업은 5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같은 해인 1902년, 미국철강회사가 임금 인하를 실시하고 피츠버그 변두리의 홈스테드에서 800명의 숙련공에 대하여 공장 폐쇄를 감행하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회사는 ‘핑크톤 탐정’이라고 불리는 300명의 파업 파괴 전문 부대를 동원하여 공장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자들에게 라이플 총알을 퍼붓는다. 결국 주 방위 부대 병력까지 투입하고서야 다섯 달 동안 지속된 파업이 진압된다. 그리고 1905년 시카고 팀스터즈의 파업에서는 20명이 살해되고 400명이 부상당하고 500명이 체포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지배계급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전쟁에서 적을 대하듯 한다.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는 이 지배계급과 환상의 ‘악당 콤비’를 이룬다. 곰퍼스 위원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동총동맹 지도부의 비행과 만행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노조 결성을 어렵게 하는 ‘오픈 숍’ 제도와 직업별 노조를 악착같이 고수하고, 갱들에게 폭력을 사주하여 노조를 지배하고, 대기업이 조직한 전국시민연맹을 통해 노조 간부를 계통적으로 매수하고, 타협을 넘어서서 아예 파업을 자본가에게 팔아먹기까지 하고, 노동자를 약탈할 뿐만 아니라 고용주까지 등쳐먹을 정도니 노동총동맹은 그야말로 배신과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인 뎁스와 헤이우드는 1905년에 전투적인 노조들을 모아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시카고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창립한다. 여기에서도 생디칼리즘이 강한 영향을 미치는데 1908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 4회 대회는 강령 전문에서 정치적인 조항을 모두 삭제하고 “산업별로 조직하는 것에 의해, 우리는 낡은 사회의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구조를 창출해 가고 있다”라는 유명한 생디칼리즘 문장을 첨가한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생디칼리즘의 직접 행동을 적극 수용하여 격렬한 파업을 수많이 일으킨다. 특히 1912년 메사추세츠 주의 로렌스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 2만 3천 명의 완강한 파업은 국제적인 주목을 끈다.

지배계급은 노·자·정 협상 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의 혁명성을 거세하려 한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여러 가지 중요한 성과를 쟁취한다. 먼저 임금이 인상되어 약간이나마 생활이 개선된다. 12~15시간이 넘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은 8~10시간으로 줄어들고 현장의 노동 통제는 완화된다. 많은 나라에서 사회 보험이 도입되고 선거권이 개선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단결이 확대된 것에 있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도 1876년에는 200만 명을 넘지 못했는데 1914년에는 1322만 명을 넘어선다. 이처럼 노동자 운동은 총파업을 전개할 정도로까지 발전한 위에서 급속히 성장해 간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거세하기 위해 노동자·자본가·정부 3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화해 조정 기구를 만든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는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에서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전국 단위의 단체 교섭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혹자는 이를 ‘담합주의’(corporatism)라고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오랜 투쟁 목표 중의 하나를 달성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힘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해→조정→냉각기간→쟁의행위찬반투표→파업’이라는 복잡하고 정식화된 절차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여과하고 과감한 행동을 규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크게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노조를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가의 동반자로 만들려는 지배계급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사실 노·자·정 협상기구를 통한 노동자들의 성과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정하는 규칙 아래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분배 구조인 노·자·정 협상 기구는 근본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현저히 봉쇄해버린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조 내에서는 관료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뿌리 깊게 형성되어 간다. 이에 따라 지도부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뚜렷하게 갈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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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4

사회주의 대중 정당의 등장과 발전

독일 사회민주당은 합법 의회 활동에 매몰된다.

사회민주노동당과 노동자총연맹은 1875년 고타에서 합당 대회를 열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당인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새로 창당한다. 사회주의노동당은 베를린·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창당 3년 만에 선거에서 40%까지 득표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이에 비스마르크 정권은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해산하는 강수를 두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모든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단속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사회주의노동당은 지하 활동에 들어가고 천 명 가량의 활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된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단속법은 조직·집회·출판물만을 금지하는 것이어서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원내’에서의 합법 활동은 가능하다. 아무튼 사회주의노동당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여 1884년 총선에서 기존 12석의 의석을 24석으로 늘린다. 그런데 다수 의원이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중시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식민 정책의 하나인 ‘증기선 보조금 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당은 한 차례 홍역을 겪는다.

그래도 당은 성장을 계속하여 사회주의자단속법이 폐지된 1980년의 총선에서 143만 표(19.7%)를 득표하여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렇지만 당은 단속법 시기의 공포스런 탄압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직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표를 늘려나가는’ 합법 활동에만 치중하고 대규모 대중 투쟁을 두려워하는 체질로 변해간다. 이에 “청년파”들이 제도 정치권 철수와 선거 보이콧 등을 주장하다가 1890년에 당에서 쫓겨나고 독립사회주의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창당했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사회주의노동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에서 당 대회를 열어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선언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발행하던 비합법 신문 [사회민주주의자] 대신 국내에서 발간하는 합법 신문 [전진]을 창간한다.

그런데 활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최종 목표와 민주화·개혁이라는 당면한 실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혁명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천은 제도 정치에 치중하게 된다. 제국주의로 성장해 가고 있는 독일 경제의 발전과 사회민주당의 급속한 성장, 특히 의석수의 증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러자 베른슈타인은 “내게는 운동이 전부다. 궁극 목표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년)라는 책을 통해 혁명 이론에 ‘수정’을 가한다. 이로써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의 원조가 된다.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침묵과 무시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제 막 당 활동을 시작한 스물일곱 살의 폴란드 계 여성 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만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고 ‘일상 개혁 투쟁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켜 혁명 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고향인 폴란드―이때는 러시아 영토였다―로 돌아가 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와서는 (1891년 벨기에 총파업 때부터 대두한) 정치총파업 전술을 적극 제기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총파업은 경제 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정치 투쟁이란 의회 진출 아니면 무장 봉기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농노의 사촌뻘로 여겨졌던 ‘미숙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봉기는 1905년 1년 내내 유럽의 신문지상을 달구며 유럽의 노동자계급을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반면에 사회민주당의 9월 당 대회는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한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노조 측의 압력에 밀려 다음해 2월에 노조 지도부와 비밀회의를 열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하고 9월 당 대회에서는 노조의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당 대회 결의에 대한 노조 지도부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독일 노동자들의 오랜만의 투쟁의 물결도 다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인 1907년의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이전의 81석의 절반에 불과한 43석만을 얻으며 대패한다. 그런데 1905~06년의 급진화가 선거의 패배를 가져왔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당은 더욱 확실히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이 즈음부터 사회민주당의 최고 기관인 5인으로 구성된 간부회의의 인물도 바뀌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당 상근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첫 세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이후에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가 1906년에 은퇴한 아우어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맡는다. 1911년 예나 당 대회에서는 ‘순수한’ 노동자계급 출신인 필립 샤이데만―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수상이 된다―과 오토 브라운이 간부회의 임원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세대이고 이들에게 당이나 노조의 간부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유일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1910년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지만 당 지도부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을 전개한다. 카우츠키는 대중파업은 발전이 덜된 동유럽 사회에나 적절한 투쟁 형태라며 지도부의 입장을 옹호한다.

사회민주당은 1912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하는 전술을 편 끝에 425만 표(27.7%)에 110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합이 깨져 사회민주당은 다시 주변 세력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100명을 넘어선 국회의원들이 당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된다. 다음 해 8월에는 베벨이 사망하여 당의 이상과 현실 정치를 봉합해주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간부회의가 12인으로 늘어나지만 이 중에 좌파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된다.

프랑스 사회당은 ‘혁명적 개혁’을 추진한다.

사회주의 세력은 파리코뮌 패배 이후 제도 정치에서 배제된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력이 서서히 복구되긴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여러 개의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영국과 같은 대규모 노조 운동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강력한 사회주의 단일 정당은 아직 요원한 상태로 존재한다. 사회주의자들은 1884년에 도입된 지방자치제 선거에 참여하면서 제도 정치에 대한 경험과 실력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들은 1893년 총선에서 모두 50여명이 당선된다. 여러 정파로 찢겨 있는 상황이고 이전까지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약진이다. 이러한 성공의 요인은 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인 파나마운하 관련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면서 개혁파로 인식되어온 공화파 국회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극에 달하고, 이제 막 프랑스에 불어 닥친 불황으로 인해 계급 갈등이 치열해지고, 지방 행정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이 선거를 지원한 데에 있다.

1898년에는 지배 세력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하여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바람에 반동 극우파가 다시 득세한다. 그러나 1년 후 상황이 반전되어 공화파 내에서 개혁성이 강한 급진파가 정부를 구성한다. 그러자 밀르랑이 반동에 대항하여 공화제를 방어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며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격심한 논쟁이 벌어진다. 특히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한 장본인인 갈리페 장군이 내각의 국방상이라는 점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런 사람과 마주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수정주의 논쟁과 얽혀 더욱 복잡한 형국을 이룬다. 이로 인해 한참 무르익어 가던 사회주의 조직들의 통합은 뒤로 미뤄진다.

앞 절에서 본 것처럼 1902년에 결성된 노동총동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위기를 불러일으켜 통합으로 나아가게 한다. 밀르랑의 입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세력들은 합당하여 ‘프랑스의 사회당’을 만들고 나머지 세력들은 프랑스사회당을 창당한다. 그런데 밀르랑이 1903년부터 드러내놓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절하자 프랑스사회당도 밀르랑에게 등을 돌린다.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대회는 프랑스의사회당과 프랑스사회당의 통합을 재촉한다. 여기에 1905년 러시아 혁명이 강한 충격파를 던진다. 결국 1905년 4월에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으로 통합 사회당이 창당된다.

그러나 통합 사회당은 유기적인 당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분파 연합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1908년 툴루즈 당 대회에서는 우파의 개혁 노선과 좌파의 혁명 노선이 첨예하게 맞붙는다.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늘 수식어로 따라붙는 조레스는 대회 막바지에 ‘혁명적 개혁주의’를 당 노선으로 제시하며 회심의 열변을 토한다. 당이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오직 당이 혁명적 성격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하고 역으로 개혁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비로소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개혁과 혁명 사이에는 ‘충돌과 위기, 파탄과 도약’이 있을 거라고 역설한 것이다. 툴루즈 당 대회 이후 조레스는 더욱더 급진적인 행보를 취하면서 차츰 통합 사회당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당내 통합에 일단 성공한 조레스는 총파업 전술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노동총동맹과의 화합에 나선다. 사회당은 1910년 철도파업 때 당 기관지 사무실을 파업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면서 행동으로 연대하여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당하던 노동총동맹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이런 노력의 결과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1913년 파리의 프레 생-제르베에서 파리 코뮌을 기념하고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 군부의 영향력 증대에 맞서 거리낌 없이 정면 대결을 벌임으로써 반군국주의·반전평화 투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사회당은 1914년 총선에서 98명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둔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격렬한 대중 투쟁의 영향으로 급진화한다.

각 지역의 정치 세력들이 1892년에 모여 이탈리아노동자당을 창당하고 3년 후에 이탈리아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회당에는 노동조합·협동조합·노동자공제회 등이 집단으로 가입한다. 앞 절에서 보았던 노동회의소가 당의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회당은 의원단·공장조직·기관지가 따로 따로 독자 행동을 한다. 당 대회와 기관지 [전진]이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 노릇을 한다. 게다가 개혁주의 노선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인 필리포 투라티가 주도하는 사회당 의원단은 의회를 지배하는 남부 지주와 북부 자본가 사이의 담합에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고 북부 산업 지역의 일부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얻어내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 1890년대에 남부 시칠리아에서 빈농들이 대중 운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사회당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도 1898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격렬한 대중 투쟁에 힘입어 사회당은 1900년 총선에서 13%의 지지를 받아 33명을 당선시킨다. 아직 보통 선거가 실시되고 있지 않았기에 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 1904~06년에 이탈리아에서도 파업의 물결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타고 당 기관지 [전진]을 중심으로 당의 최대 목표인 사회주의 혁명을 견지하자는 ‘최대강령파’가 등장한다. 이들은 1900년대 내내 의원단의 개혁주의자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당내 투쟁을 계속하다가 1912년 당 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최초의 ‘성인 남성 보통 선거’로 치러진 이 해의 총선에서 사회당은 79석을 획득한다.

영국 노동당은 순수한 의회 정치를 추구한다.

◀ 창당 당시 영국 노동당의 포스터 : “노동당이 길을 연다”

1889년부터 비공인 파업으로 떨쳐 일어서기 시작한 노동자 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노조와 소규모 좌파 정당·단체의 대표들이 1900년 2월에 ‘노조 활동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제도 정치권 진출을 추진하는’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건설한다. 이 대표위원회는 1906년에 ‘노동당’―노동자 정당의 건설로는 유럽에서 가장 늦다―으로 전환한다. 노동당은 1906년 총선에서 29명을 당선시킨다.

그런데 노동당은 노조가 만든 당이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노동자 정당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노동당은 지지자들이 개별 입당하는 게 아니라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곧바로 당원으로 인정되는 집단 가입 제도로 운영된다. 물론 유럽의 다른 좌파 정당들에서도 이런 식의 집단 가입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개별 입당을 독려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당 대회에서 노조 측 대의원의 표는 자신이 대표하는 조합원의 수에 따라 수만 표, 수십만 표로 환산―블록 투표―하여 집계된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당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노조 간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노조는 일종의 이익 단체 역할을 하고 당은 원내에서 이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의 당 구조야말로 노조의 과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고 당의 임무는 이를 의회 내에서 대변하는 것이라는 의회주의 정치의 가장 순수한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당의 일상 활동은 하원 의원단이 모두 결정한다. 이후에 노동당이 집권하게 될 때는 내각, 그리고 야당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 역할을 하는데 내각은 모두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흔히 ‘당수’로 불리는 당 최고 지도자(수상 혹은 차기 수상)는 의원단 내 선거로 뽑힌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은 의원단에 의한 순수한 의회주의 정당이다.

사실 영국은 지난 200년 동안 한 번도 정치적 격변이 없었고 토지 귀족과 산업 자본가들 사이의 세력 교체는 의회라는 사교 클럽에서 지루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져옴으로써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어온 나라다.

노동당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산별노조 운동이 활성화되자 1918년 당 대회에서 창당 이후 최대의 탈바꿈을 단행한다. 당 대회에서 ‘생산수단·분배·교환에 대한 공동 소유와 산업·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통제’(당헌 4조)를 명시한 당헌이 통과됨으로써 노동당은 비로소 ‘사회주의’ 정당이 된다.

또한 이 당 대회에서 처음으로 개인 입당 제도가 도입된다. 하지만 창당 당시의 구조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당의 주된 기반은 여전히 노조의 집단 가입이다. 개별 입당 당원은 아무리 많아도 60만 수준에 그친 반면 집단 가입한 당원의 수는 600만을 넘어선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단일 정당을 추구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폴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다.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1848년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수십 년 동안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어 고통 받다가 1889년에 통합 대회를 열어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으로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89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를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노동자들이 1906년에 총파업을 경고하여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획득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다음해 1907년 총선에서 87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비엔나 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학생·교수 자유 조합’과 세계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자’ 교수인 칼 그륀베르크의 영향 아래 일급의 사회과학도들이 당과 노동자 운동 주위에 포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청년 세대의 대표자들인 칼 렌너,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오토 바우어 등은 1904년에 나온 이론지 [맑스 연구], 1907년에 창간한 월간 [투쟁], 일간지 [노동자 신문]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학파’를 구성하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교조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사상계를 주름 잡는다. 그러나 이 최초의 맑스주의 ‘학파’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된다.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전쟁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지만 강력한 전통으로 이어져온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이라는 이념 때문에 분당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좌파는 새로운 당(공산당)을 건설하기보다는 당의 좌익화를 지향하고 우파는 좌파에게 당권을 빼앗겼을 때(1917년)도 당을 떠나기보다는 소수파로 잔존하는 길을 택한다. 좌파인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통일의 사상이다. 이는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의 이념이다”라고 주장하고 공산주의자들만의 특수한 당을 건설함으로써 유럽 노동자 운동을 분열시킨 코민테른의 방침은 [공산당 선언]의 정신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혁명과 맞닥뜨린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인해 체제 변혁을 강렬하게 지향한다. 이들은 인민에게 고통만 주는 자본주의 단계―서구적 경로―를 거치지 않고 소생산자들이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촌락 공동체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1870년대 중반부터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을 인민주의자라고 부른다.

인민주의자였던 플레하노프는 유럽으로 망명하여 생활하는 동안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활발한 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1880년대 초에 맑스주의로 전향하여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창시자가 된다. 플레하노프는 자본주의는 가혹하기는 하되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사회주의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거칠 필요가 있는 단계이며, 농민층의 우매한 정치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 필요하고,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레하노프가 주도하는 노동해방단은 외국에서 글을 써서 비밀리에 러시아로 반입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점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한편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심각한 한계에 부딪힌다. 농민들이 차르 숭배에 젖어 있어서 혁명을 선동하는 지식인들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찰에 고발하기까지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농민들에 대한 선전·선동 활동을 포기하고 테러를 통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민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이들은 1901~02년에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테러를 주요 전술로 채택한다. 사회혁명당의 테러리스트들은 차르 정부의 초강경파 요인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암살함으로써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맑스주의자들은 1898년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분파들의 대표자 8명이 모인 이 대회는 창당을 결의한 수준이고 실질적인 창당대회는 되지 못한다. 게다가 무수한 운동 조직들이 비밀경찰에게 추적되어 수시로 깨져나간다. 그래서 레닌은 강한 규율과 민주집중제로 운영되는 비합법 혁명가 조직이 필요하며 또한 이것은 ‘전국 정치 신문’을 통해 단련된 활동가들을 기반으로 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편집진을 해외에 두고 [이스크라(불꽃)]라는 ‘신문’을 발간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성과로 1903년 런던에서 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 대회가 열린다. 그런데 조직 노선을 반영하는 규약 1조의 당원 규정을 두고 레닌과 마르토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레닌은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자고 주장하고 마르토프는 지지자들까지 폭넓게 당원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아무튼 편집국 구성에서 이스크라 진영이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레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러시아 말이다―가 형성되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멘셰비키(소수파)가 형성된다.

2년 후인 1905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민주노동당은 때 이르게 러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사회민주당 내의 여러 분파들은 당면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혁명의 주체가 누구이고 노동자계급이 누구와 동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가 너무나 허약하여 차르를 지지하는 지주와 타협함으로써 혁명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이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농민층을 노동자계급의 확고한 동맹 세력으로 확보하기 위해 토지 국유화를 강령에 넣자고 제안한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와 나란히 그리고 주도적으로 투쟁하되 혁명적 야당으로 남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집권하게 되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주도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하면서 결국 혁명의 진전을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본다. 멘셰비키는 노동자계급만을 중시한 나머지 농민층과 소시민층에 대해서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연속 혁명을 주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그 자체의 동력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환’되는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 혁명적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속 혁명으로 수립되는 사회주의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러시아 혁명은 비극적인 상황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창당한 지 이제 겨우 2년밖에 안 된 사회민주노동당은 노선을 현실화시킬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비록 사회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고 혁명으로 발전해 가는 상황에 힘입어 한때 15만 명 규모의 대중 정당으로 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겪는 혁명이라는 성난 파도 속에서 마치 방향키만 있는 돛단배와 같은 처지다. 그렇지만 그 방향키가 있었기에 1905년 혁명은 1917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초전이 된다.

그런데 1905년 5월 불리긴 수상이 ‘의회 신설’을 타협책으로 내놓자 멘셰비키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다면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혁명이 고양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1906년에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레닌은 4월 당 대회에서 입장을 바꾼다. 지독히 불평등한 간접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과의 접촉면을 늘이기 위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 대회는 ‘선거 불참’으로 결론이 난다. 그런데도 당원 일부가 개별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14명이 의원으로 당선된다. 이는 당 규율을 명백히 위반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레닌은 이들이 의회에 남아 당 의원단으로서 활동할 것을 지지한다. 이후 레닌은 볼셰비키 내에서 선거 불참과 의원단 해체를 주장하는 ‘소환파’들과 지난한 투쟁을 벌인다.

레나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1912년 4월에 볼셰비키는 [프라우다(진실)]라는 신문을 창간한다. 이 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8번이나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1914년 7월에 지령 64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기까지 꾸준히 발간된다. 당은 이외에도 이론지를 따로 발간하고 합법 출판사도 운영한다.

볼셰비키는 전국에서 2중 간선제를 통해 단 6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노동자 선거구―지주·농민·도시 등으로 선거구가 나뉘어 있다―모두에 후보를 내보낸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선거일인 10월 5일의 아침은 공장 대표자들의 자격 박탈에 항의하는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정부의 극악한 탄압으로 인해 선거와 대중 행동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전투적인 볼셰비키 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된다. 선거 결과 전체 442개 의석 중에서 사회민주당이 14석을 차지하는데 노동자 선거구 6곳에서는 모두 볼셰비키가 당선된다. 노동자계급이 250만인 나라에서 볼셰비키가 114만 4천 명의 노동자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14명의 사회민주노동당 의원단에게는 대정부 질의를 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의회활동인데 그나마도 33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들은 원내 활동과 [프라우다] 그리고 활발한 노동자 투쟁을 결합해서 효과적인 정치 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 보험(의료 보험) 투쟁이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사회 보험―6월에 처음 도입되었다―의 확대와 완전한 노동자 통제를 줄기차게 주장하여 대정부 질의를 하는 12월 14일에는 노동자 6만 6천 명의 지지 파업을 이끌어낸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프라우다]와 그 사무실을 매개로 노동자 조직들과 긴밀히 협력한다. 또한 대정부 질의에서 노동 탄압에 항의하거나 장관 항의 면담을 주도하고 공장 정문과 거리에서 연설을 통해 투쟁 상황을 알리고 파업 기금을 모금하면서 앞 절에서 서술한 수많은 투쟁들에 적극 연대한다.

[프라우다]는 이러한 투쟁들을 즉각 보도하여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매일 35개가량의 투고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게 한다. [프라우다]는 하루 4만~6만 부가 판매되는데 절반이 공장에서 팔린다. [프라우다]는 정기구독자 조직과 후원회원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사실상 합법 대중 정당의 기능을 한다. 이제까지 당이나 노조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프라우다]의 기사를 보고 사무실에 찾아와 노동자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각종 조직에 가입한다. 그리고 페체르스부르크의 노조 18개 중 15개, 모스크바의 노조 13개 중 10개가 [프라우다]를 적극 지원한다.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놓고 보면 볼셰비키는 250만의 노동자계급 중 수천 명의 간부와 3만~5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중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멘셰비키 신문 [루취(빛)]는 [프라우다]와 비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당의 방침에 따라 의회가 휴회하는 동안은 지역구를 순회하면서 공장과 지역에서 의정 활동을 설명하고 지방의 노동자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보낸다. 노동자 의원들이 방문한 후에는 대개 파업 투쟁이 분출하고 [프라우다] 구독자가 늘고 당 조직이 강화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이 혁명을 향해 치달아가던 1914년 7월 8일 경찰은 [프라우다] 사무실을 급습하여 강제 폐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전시 동원령이 선포되자마자 곧바로 반전 성명서를 채택하고 전쟁 예산 투표에 반대해 전원 퇴장한다. 이는 세르비아 사회당과 함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의 의원단이 전쟁에 반대한 단 두 개의 사례에 속한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이후 원외 투쟁에 주력하다가 11월에 결국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이로써 볼셰비키의 합법 활동은 또다시 중단된다. 그러나 [프라우다]를 통해 계급의식을 자각한, 그리하여 이후 혁명의 주체가 될 수천 명의 선진 노동자들이 이미 대중 속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난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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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5

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토 재분할을 둘러싸고 충돌로 나아간다.

1876년 이후 30여 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의 독점 자본은 넘쳐나는 과잉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한다. 자본의 축적에는 ‘자연스런 경계선’이란 없으며 자본의 팽창 능력이 그 한계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변화된 세력 관계는 기존의 ‘세력권’을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해결책은 식민지 영토의 재분할이며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필연이다. 남은 것은 누가 먼저 도발하는가이며 그 충돌이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하는 것뿐이다.

프랑스는 1905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에 대해 독일은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여 공세를 편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독일을 가장 위험한 잠재적 적대국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1907년에 영국과 식민지 세력권을 둘러싼 이견을 해결한다. 이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삼국 협상’이 맺어진다. 반면에 독일은 영국의 수준을 능가하는 해군 증강을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은 경쟁하듯이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한다.

1908년 터키에서 혁명이 발생한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는 발칸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다. 이에 대해 삼국 협상 회원국인 러시아·영국·프랑스가 반대를 표명하자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를 군사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한다.

1911년에 모로코를 둘러싸고 다시 위기가 도래하자 독일은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전함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오스만제국이 급속히 약화되는 틈을 타고 이 지역의 국가들―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불가리아·그리스―은 저마다 상치되는 영토권을 요구한다. 그 결과 1912년과 1913년에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일어나 세르비아가 꽤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그 중 얼마를 포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1912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여 권력 장악을 목전에 바라보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의 파업이 1912년부터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봉기를 향해 치닫는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 내의 혼란한 상황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살해한 세르비아 청년

때마침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에 보스니아의 한 학생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빌미로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전폭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도 군사 동원령을 내려 전쟁 태세에 돌입한다. 독일·프랑스·영국도 8월 1~4일 사이에 차례로 군사 동원령을 내리며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은 속전속결을 계획했지만 새로운 전술로 등장한 참호전으로 인해 서부 전선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교착 상태의 늪에 빠진다. 중립을 지켜오던 이탈리아가 1915년 5월 삼국 협상 편에 서서 참전한다. 독일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잠수함으로 선박들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1917년 4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고 참전한다.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한다.

제2인터내셔널(1889년 결성)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강령―레닌이 작성했다―을 채택한다. 그리고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1912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대회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위기가 닥치면 동시 총파업을 포함한 반전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그 동안 정치 총파업 전술을 거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도 이번에는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전쟁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자 프랑스 사회당은 7월 16~17일에 곧바로 임시 당 대회를 열어 군수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전 총파업을 벌일 것을 결의한다. 그런데 세계 반전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레스가 7월 31일 극우파 청년에게 바로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즉사한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다음날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다. 8월 4일 조레스의 장례식에서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한다. 그리고 며칠 안 돼서 사회당은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 지지하며 전시 내각에 합류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혁명적인 지도자라던 쥘 게드가 전쟁 내각의 장관이 되는 판이다. 벨기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 서기국 의장인 에밀 반더벨드가 부르주아 정부의 내각에 참가한다.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인 8월 2일, 전국노조연맹을 좌우하고 있던 레기엔 일파는 자본가들과 산업 평화 협정을 맺으며 전쟁 지지의 물꼬를 튼다. 또 바로 다음날 독일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원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조국 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칼 리프크네히트 의원은 이 해 말의 전쟁 예산안 표결에서는 홀로 반대표를 던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전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당내의 반전 좌파가 다시 결집한다.

러시아에서는 플레하노프를 포함한 상당수의 멘셰비키와 다수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열렬한 조국방위파로 변절하여 그 동안 타도 대상으로 삼아 격렬히 투쟁해왔던 차르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한다.

노조의 관료적인 지도부들도 전쟁을 지지한다. 영국의 노조회의와 노동당은 ‘산업 휴전’을 선언하고 파업권과 같은 노동자의 권리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군수 생산을 최대한으로 증대하는 데 협조한다. 독일의 노조 관료들은 만약 전쟁에 반대한다면 오랜 기간 고생해서 쌓아올린 노조를 정부가 파괴할 거라는 핑계를 대며 정부에 협력한다. 생디칼리즘 운동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의 노동총동맹도 전쟁을 공식 지지한다. 미국에서는 곰퍼스 일파가 정부와 복잡한 계급 협조 협약을 체결하고 조직 노동자의 정치 발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는 전쟁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쟁 전해에 제2인터내셔널은 22개 나라의 27개 사회주의 정당을 포괄하면서 득표수 합계 1200만 표에다가 거의 모든 나라의 의회에서 의원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원 수는 독일 110, 프랑스 103, 핀란드 90, 오스트리아 82, 이탈리아 80, 스웨덴 73, 영국 42, 벨기에 34, 덴마크 32, 노르웨이 23, 러시아 13, 네덜란드 16명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를 받는 노조의 조합원수는 국제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여 적어도 1천만 명이 넘고 따라서 유럽의 노조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유럽의 주요 산업을 한꺼번에 정지시킬 수 있는 전략적 힘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사회민주당은 거대한 협동조합 운동도 장악하고 있었고 전쟁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백 만 명의 지지자를 규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신념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이러한 모든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의 간부들은 수천만 명의 노동자와 민중을 죽음의 전쟁터로 몰아넣는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어쨌건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민족주의 정서가 대중을 휘감는다. 대중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도래할 것 같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국가의 깃발을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징병제가 없는 영국에서도 1914년 8월에서 1915년 6월 사이에 200만 명이 군대 복무를 자원한다. 이것은 제국주의 정치가 국민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들의 가득 찬 불만을 혁명을 향한 계급적 분노로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노동자 파업과 민중 봉기가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다.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의 부활제 주간에 영국의 억압에 반대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의 지도자는 노동자이자 매우 뛰어난 맑스주의자로서 1905년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조직한 제임스 코널리이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애국자들이 4월 24일 반란을 일으켜 더블린을 장악하였으나 4월 29일에 진압되고 반란 주모자들은 5월 12일 사형에 처해진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1917년에는 영국 본토에서 3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한다. 미국에서도 이전의 어느 해보다 가장 많은 1233건의 파업이 발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최대강령파가 당권을 장악하여 전쟁 발발 당시부터 줄곧 반전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식량난과 물가 인상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수준이 급락하면서 1917년 초부터 전쟁 직전의 투쟁 양상이 다시 나타난다. 토리노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파업의 물결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때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한 소식은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부채질하여 파업은 더욱 고양된다. 그리고 사회당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5년 4월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고 반전 투쟁에 돌입한다. 반전 의원도 18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1916년 3월 지도부에 대항해 탈당을 결행하고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독립사회민주당 내의 좌익 분파로 활동한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4월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12월 말에는 탄광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 투쟁을 전개한다. 다음해인 1918년 1월에는 탄약 공장을 중심으로 100만 명이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 총파업을 전개한다. 1월 6일 회담이 열리고 있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는 러시아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강화 조약에 반대하여 대규모 대중 집회가 열린다. 그러자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파업위원회를 러시아 혁명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노동자·병사 평의회로 발전시켜 대안 권력을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립사회민주당에 속한 베를린의 좌파 노조 간부들은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이라는 또 다른 분파를 결성해 은밀하게 무장 봉기를 준비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10월에 타협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한다. 황제가 수상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원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 내각제가 약속되고 사회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이센 주 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진다. 사회민주당은 여기서 집권의 길을 발견하고 주춤거린다. 그러나 민중은 전쟁의 즉각 중지를 원하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한다. 킬의 해군 사병들은 11월 3일 패배가 뻔한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건설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일주일 사이에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확산되고 11월 9일 수도 베를린에서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건설된다. 이 날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한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로서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의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다. 정부는 11월 11일 전쟁 중단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 반전 좌파의 핵심 인물인 프리드리히 아들러―아인슈타인의 막역한 친구로서 아인슈타인을 사회주의로 이끈 장본인이다―는 1916년 10월 전쟁의 즉각 중지를 부르짖으며 수상인 슈튀르크 백작을 암살한다. 테러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러의 행동은 전쟁에 지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1917년 5월에 열린 재판은 “우리의 프리드리히를 구출하자”는 비엔나 시민들의 함성에 파묻히고 결국 황제는 대사면령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아들러와 바우어가 주도하는 좌파는 반전 운동의 도덕적 권위를 업고 가을에 사회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다. 다음해인 1918년에는 100만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이고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총파업의 요구 사항은 아들러의 석방, 즉각적·전면적 강화, 혁명 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강화 회담에 노동자 대표 파견 등이다. 결국 가을에 접어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한다. 그러자 제국 곳곳에서 각 민족이 저마다 임시 정부를 건설한다.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기독교사회당·범게르만당 3당이 주도하여 10월 30일에 임시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11월 12일에 공화국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3월 과거에는 한 나라였던 헝가리에서 소비에트(평의회) 권력이 수립된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노동자·민중들의 반전 투쟁과 혁명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이외에도 수많은 파업과 반전 시위들, 그리고 이 모든 투쟁들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고통 받는 유럽 민중을 구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 지형이 크게 바뀐다.

◀ 파리에서 만난 4거두, 좌측부터 로이드 조지(영국), 올란도(이탈리아), 끌레망소(프랑스), 윌슨(미국)

4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 기간 동안 인류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생산해낸 엄청난 물자가 파괴된다. 게다가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민간인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들을 제외하고서도 900만 명이 죽고 2200만 명이 부상당한다. 이런 끔찍한 파괴력은 과학과 기술의 산물인 탓에 서양 세계의 이념인 진보와 합리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느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물가 폭등으로 실질 임금이 하락하여 더욱 고통 받는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 미국에서만 새로운 백만장자가 1만 8천 명 이상 생겨난다. 승전국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이득은 지배계급에게만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에도 자본의 착취 구조는 어김없이, 아니 더 맹렬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이 전쟁을 고비로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유럽의 힘은 상대적인 하락의 길로 들어선다.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된다. 이 조약은 전쟁의 책임을 오로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전가한다. 승전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식민지 대부분을 왕창 갈라먹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한다. 이런 과도한 조치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4개 제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러시아―이 붕괴된다.

국민을 총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은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만든다. 이제 국가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여러모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사에서 하나의 큰 분수령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다음 장은 세계를 뒤흔든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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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1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들이 정치 총파업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고 ‘이중 권력’을 형성한다.

◀ 사망자들을 공동으로 매장하는 러시아 병사들

러시아 군대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7년까지 전사자 170만, 포로 250만, 부상자 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농민들이 병력으로 차출되고 쟁기를 끌 말이 기마대에 징발되는 바람에 수많은 토지가 경작되지 못한 채 황폐해진다. 대부분의 산업이 군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소비재의 생산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 민중들―전체 인구는 1억 6600만 명이다―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
(잠깐, 지금부터 1918년 2월까지의 날짜는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에 의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은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에 비해 13일이 늦다.)

지난 시절 가장 많은 투쟁을 경험한 페트로그라드(옛 페체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이 1917년 1월 대규모 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2월 18일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 금속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곧 무장 봉기의 성격을 띤 정치 총파업으로 발전한다. 전제정 타도와 전쟁 중지를 외치는 민중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전시라서 페트로그라드에는 군대로 가득 차있었지만 병사들은 2월 27일 혁명적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에 합류한다. 다음날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병사들과 모스크바의 많은 부대가 혁명 진영으로 넘어온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민중들의 압력에 밀려 3월 2일 퇴위 선언문에 서명한다. 다음 날 두마(의회)의 지도부는 자유주의자인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변호사이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인 케렌스키는 법무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러나 민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면서 계속 전진한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1000명 당 1명의 비율로 대기업 공장에서 424명의 대표와 중소기업 공장에서 422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한다.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87%가 선거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아래에서부터 스스로 조직한 것이다. 농민과 병사들도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 평의회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건설된다. 대도시들에서는 소비에트, 민병대,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문화 서클 같은 조직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무수히 생겨난다.

공장위원회는 3월에 벌써 전국 공장 노동자의 75%인 200만 명을 끌어들이며 소비에트 다음으로 큰 조직으로 성장한다. 공장위원회는 경영인에 대한 감시, 원료와 자재의 유출 방지, 공장 안의 치안 유지를 위한 민병대 조직, 식량 확보와 배급, 교육과 문화 등의 각종 행사, 정치 문제에 대한 토론과 선전, 심지어 봉기 시기에는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 중에서 공장을 계속 가동하고 혁명을 수호하는 데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다. 공장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 관리’라고 불린다.

노동자들은 3월 10~1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업인 협회와 협정을 맺고 8시간 노동제와 결사의 자유를 획득한다. 이로써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은 타협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민중 평의회)가 정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인민주의자)이 광활한 러시아를 운영해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와 임시 정부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소비에트는 독일군의 공격과 반혁명으로부터 러시아와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임시 정부의 ‘전쟁 지속 정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또한 ‘혁명적 조국방위’에 사실상 동의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사회주의자들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부르주아와 연립 내각을 구성한다.

이렇게 혁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인 4월 3일에 레닌이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레닌은 다음날 소비에트 볼셰비키 집회와 볼셰비키·멘셰비키 합동 집회에 연이어 참석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혁명)으로” 바꾸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자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너무나 획기적인 내용이라 멘셰비키들은 ‘터무니없는 잠꼬대’로 조롱하고 대부분의 볼셰비키조차 깜짝 놀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5월에 망명에서 귀환하는 즉시 레닌의 입장을 전폭 지지한다. 트로츠키의 가세로 레닌의 당 내 영향력은 현저히 강화된다. 트로츠키는 이때까지 레닌의 ‘협소한’ 당 조직론에 반대하여 볼셰비키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오고 있었다.

한편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4월 18일에 러시아는 최종 승리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서를 연합국 측에 보낸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의 노동자·병사들이 전쟁 중지와 밀류코프 사퇴, 무병합·무배상의 민주적 강화(講和)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에 들어간다. 시위는 다른 도시로 급속히 퍼져나간다.

다급해진 임시 정부는 소비에트 측에 내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권력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상황에 떠밀린 멘셰비키는 1905년 이래 계속 고수해온 ‘임시 정부 불참여’ 입장을 철회하고 임시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여전히 회피한다. 멘셰비키가 임시 정부에 참여한 목적은 반혁명 세력과 레닌으로 대표되는 과격한 혁명 세력 양쪽으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구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편 농민들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도 임시 정부에 같이 참여한다. 이로써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립 정부가 처음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토지 재분배 문제를 다루기로 한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계속 미루어지자 농민들은 늦봄 이후부터 다시 지주들의 토지를 장악하여 분배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의 봉기는 여름 내내 계속된다. 임시 정부에 참가하고 있는 사회혁명당이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볼셰비키는 농민들의 행동을 전폭 지지함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5월에 들어서면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경제가 악화되자 노사간의 협조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장위원회의 비대해진 권한과 8시간 노동제 때문에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다며 경영인이 자율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주도해야 하고 임시 정부는 경제 정책을 통해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공장위원회가 봉기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이처럼 대결 국면이 조성되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위원회들은 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5월 30일~6월 5일에 ‘1차 전 페트로그라드시 공장위원회 총회’를 개최한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 방향을 판가름할 이 총회에는 수도의 367개 공장에서 총 33만 7천 명을 대표하는 568명의 공장위원회 대표들이 참가한다. 치열한 토론 끝에 소비에트의 권력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공장 경영에 대해서는 임시 정부에 의한 ‘국가 관리’가 아닌 자주적인 ‘노동자 관리’를 85대 336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채택한다.

이 총회에서 볼셰비키 노동자가 적극 주장한 ‘전쟁 즉각 중지’와 ‘노동자 관리’가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그만큼 공장위원회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강화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볼셰비키의 주장이 거부된 데에서 보듯이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다. 반면에 농업·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혁명당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공장위원회와 정치 세력과의 관계는 아주 유동적이다.

공장위원회는 총파업과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연일 분주하게 회의를 소집한다. 그런데 6월 10일의 소비에트 총회에서 볼셰비키조차 총파업과 시위를 만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위원회는 6월 13~20일에 대파업을 전개한다. 푸틸로프 금속 공장 노동자들이 선봉이 되어 가두시위를 벌이자 곧 미숙련공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거리에서 유혈 투쟁이 전개된다. 임금과 식량 배급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던 미숙련공들이 대거 정치 투쟁에 합류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단결이 더욱 강화되고 정치의식도 급성장한다. 나아가 18일에는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구호가 가두시위에서 공공연하게 외쳐진다. 이런 상황을 타고 농촌에서도 봉기의 물결이 확산된다.

겁에 질린 자본가들은 직장폐쇄로 대응한다. 특히 대부분 국영 기업이거나 외국 기업과의 합자 회사인 대기업에서는 경영을 맡고 있던 전제정 시대의 고급 장교나 외국인 기술자들이 아예 도피하거나 작업을 거부한다. 이 바람에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반면에 그런 만큼 공포에 가까운 절망감으로 자본가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노동자 관리’만이 반혁명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급속히 늘어난다. 그리고 반혁명에 저항하는 투쟁에 소극적인 소비에트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 임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다. 하지만 노조는 공장위원회의 활동에 불안감을 표시하면서 노조가 국가 행정 기구의 기능을 맡을 수 없다고 결의한다. 이처럼 소비에트·공장위원회·노조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다급해진 케렌스키는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6월 말에 독일군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개시한 총공세는 러시아 군의 참패를 초래한다. 게다가 7월 초에 징집령까지 내리자 노동자들은 배신감과 위기감에 휩싸인다.

7월 4일 여름궁전 앞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7만 명이 운집한다. 환호와 야유가 교차하던 집회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 타도와 ‘소비에트 권력’을 외치는 정치 시위로 발전한다. 시위대는 정부군과 격렬한 대치 끝에 4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할 것, 부르주아 내각과 결별할 것, 노동자 관리를 실시할 것, 토지를 재분배할 것, 기아를 구제할 것 등을 요구하며 기업인들의 선적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공장을 점거하면서 봉기를 일으킨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70%가 유혈 가두 투쟁에 참가하고 수도에 있던 병사 10만 명 가운데 5만 명이 여기에 가세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봉기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고 볼셰비키는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가 봉기가 확산된 뒤에야 뒤늦게 봉기에 합류한다.

임시 정부는 까자끼 기병대와 기관총 부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다. 소비에트는 임시 정부의 시위 진압을 승인하고 볼셰비키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는 데에 동의한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독일의 첩자로서 돈을 받고 러시아를 원수에게 팔아넘기기 위해 반전 책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7월 위기’로 인해 볼셰비키 조직은 막대한 손상을 입는다. 레닌은 지하로 잠적했다가 핀란드로 피신한다. 트로츠키는 체포되었다가 한참 만에 풀려난다. 그렇지만 임시 정부의 위상도 극도로 불안정해져 르보프가 사퇴하고 케렌스키가 새로운 내각 수반이 된다.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분쇄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독재자 스타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극우파 출신인 꼬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대독전쟁을 재개한다고 선포한다. 자본가들은 반격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관리 운동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독전선에서 리가가 함락 당했다(8월 20일)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데도 멘셰비키 출신의 노동부 장관 스꼬벨레프는 8월 23일 생산성 하락의 책임을 공장위원회 탓으로 돌리는 공문을 발표한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나 하층 민중의 관심사나 행동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급속히 지지를 상실한다.

한편 꼬르닐로프는 8월 26일 전권을 자신에게 이양할 것을 케렌스키에게 최후통첩하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한다. 경악한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측에 다시 도움을 청하고 심지어 볼셰비키에게까지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인데도 부르주아지는 군부의 쿠데타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할 만한 행동이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임시 정부는 8월 28일 멍청하게도 노동자 탄압령을 결의한다.

역시, 혁명을 시작했던 노동자들이 혁명 수호에 가장 앞장선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기차를 세우고 무전송신을 차단하면서 쿠데타군의 진격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 세력과 수도의 수백 만 노동자·민중이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군한 쿠데타군을 격퇴하고 코르닐로프를 체포한다. 이로써 우익 세력의 정치력은 완전히 무력해지고 군대의 지휘 체계는 심각하게 붕괴된다. 사회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다.

노동자들은 7월 봉기와 8월 쿠데타를 경험하면서 유산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고 임시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게 되고 소비에트 집행부까지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장위원회 지도부와 적위대(노동자 민병대)와 소비에트 산하의 군사혁명위원회를 더욱 지지하면서 유일한 대안으로서 볼셰비키를 동맹 세력으로 선택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연설에서 민주주의나 입헌 체제라는 단어가 점차 사라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국가’라는 말이 새로운 용어로 등장하여 자주 쓰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어가 된다.

급기야 볼셰비키가 8월 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그리고 9월 초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연이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행부의 지도권을 넘겨받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지난 7월에 볼셰비키에 정식으로 입당한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의장에 선출된다.

노동자들은 7월 이후로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직장폐쇄에 항의하여 9월에 사상 최대의 파업을 전개한다.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는 9월 10일 3차 대표자 회의를 열고 ‘고용·해고·생산·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관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직장폐쇄에 대항해 싸우는 과정에서 ‘노동자 관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9월부터 농민 봉기가 다시 격화되고 지방 민족들의 독립·자치 운동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이즈음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대량 체포되고 독일에서는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러한 소식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교전국에서 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고 유럽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세계 혁명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볼셰비키가 무장 봉기로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창건한다.

핀란드에 있던 레닌은 9월 12일과 14일에 봉기의 조건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두 통의 편지를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에 보낸다. 중앙위원회에서 편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10월 10일에는 중앙위원회의 지시로 핀란드에서 돌아온 레닌도 참석한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볼셰비키 세력이 아직 너무 미약하다며 봉기를 격렬히 반대한다. 하지만 중앙위원회는 다수의 찬성으로 봉기 안을 통과시키고 당 조직에 봉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는 다음날 바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봉기를 조직하는 작업을 공공연하게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군사 전술가로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한다.

역사적인 제1차 ‘전 러시아 공장위원회 총회’가 10월 17~22일 새로운 권력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다.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권력’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멘셰비키 국제파인 밀류찐과 라린도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 안을 지지한다.

‘노동자 관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국가’가 생산 과정을 감독하고 통제할 것을 주장한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아래서부터 위로 조직된 ‘생산자 연합’이 전체 생산 과정에 대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린은 제헌의회를 통한 노동자 관리를 주장한다. 공장위원회 대표들은 치열한 토론 끝에 (이상적인 생산자 연합 안이 아닌) 현실적인 노동자 국가 안을 채택한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회의하는 모습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특히 금속 노동자들은 권력을 즉각 인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선동하면서 임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무장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무장 봉기에 필요한 기술자·수송차량·탄약·장비를 지원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후 봉기에서도 혁명의 핵심 주체가 된다. 모스크바·중부지대·도네쯔유전지대·우랄탄광지역의 노조와 군사혁명위원회도 봉기를 돕기 위해 요원들을 페트로그라드에 파견한다. 그리고 10월에는 상당수 노조가 이전과 달리 정치 중립 노선을 버리고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채택한다. 이렇게 되자 소비에트 지도부가 아니라 공장위원회가 노동자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기민하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모든 권력을 노동자·빈농의 소비에트로”로 바꾼다.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눈앞에 닥치자 임시 정부는 10월 24일 아침 볼셰비키의 인쇄소를 폐쇄하는 결정을 내리며 선수를 친다. 레닌은 우물쭈물 하다가 오늘을 넘기면 봉기가 실패할 수 있다며 오늘 바로 거사를 일으킬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수십 년을 압축해놓은 듯한 혁명적 시기에는 시시각각으로 상황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에 예정대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바로 붉은 군대, 발틱 함대의 수병,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를 동원하여 24일 저녁부터 계획했던 대로 신속하게 모든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겨울궁전을 포위한다. 그리하여 25일 밤에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겨울궁전을 함락시키고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정부 각료들을 체포한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네바 강에서 공격에 합세한 순양함 ‘아부로라’ 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쏘아 올린 포성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의 막을 최초로 여는 민중들의 환희에 찬 함성으로 울려 퍼진다.

겨울궁전이 함락되기 직전인 25일 저녁 스몰니에서 개최된 2차 소비에트 대회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임시 혁명 정부―가 창건되었음을 선포한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일주일 후 모스크바에서도 소비에트가 권력을 인수한다. 이 기세를 타고 볼셰비키의 권력 기반은 각 지역으로 확산된다.

새로운 정부는 먼저 모든 교전국에 대해 무병합 무배상의 즉각 강화를 촉구하면서 평화 협상을 위하여 최소한 3개월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조치들을 공표하고 바로 법률로 제정한다. 농민에게는 지주·황실·수도원·교회의 모든 토지를 인민의 소유로 전환하고 노동과 소비를 기준으로 평등하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한다. 노동자들에게는 8시간 노동과 ‘노동자 관리’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천명한다. 러시아의 모든 민족에게는 자치를 약속한다. 그리고 신분제를 철폐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고 교회법이 아닌 민법에 따라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소비에트 정부로 권력을 집중한다.

소비에트 혁명 정부는 11월 12일 오랜 세월 모든 혁명 세력의 공통된 요구였던 ‘헌법제정회의’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한다. 레닌은 선거 실시에 반대한다.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로 실시된 이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혁명의 진원지였던 대도시·공업중심지·군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지해왔던 사회혁명당에 투표한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 우파가 50% 이상, 볼셰비키가 24%, 부르주아·지주정당이 13%, 멘셰비키가 3%를 득표하여 제헌의회에서 옛 소비에트파 사회주의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11~12월에는 사회혁명당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정당을 이루고 있던 사회혁명당 좌파가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회주의자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하자’는 안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자 가급적 중립을 지키려던 노조마저도 이들에 대해 실망하고 등을 돌린다. 1월 20일에는 분노한 노동자들이 반혁명 세력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까지 벌인다. 이 사이에 소비에트 정부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은거하고 있던 제헌의회를 기습하여 강제 해산시킨다.

그런데도 민중들은 이를 지지하거나 방관한다. 러시아 민중은 경험한 적이 없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아무런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 볼셰비키 정권이 자신들을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레닌의 ‘국가 자본주의’ 정책과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가 충돌한다.

공장위원회는 혁명 직후부터 모든 산업에서 공장을 강제 점거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노동자 관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자본가들과 격심한 계급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노조가 제안한 ‘전 러시아 노동자 관리 회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자본가들과 멘셰비키는 기업 몰수 행위에 대해 무정부적인 처사로 맹렬히 비난한다. 그런데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 산업 관리를 위해 구성한 ‘중앙·주 노동자관리기구’ 역시 경영에 대한 노동자들의 직접 개입을 금지하는 결의문을 제출한다. 레닌은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노동자 관리’ 운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지만 내심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가 1918년 1월 7~14일에 열린다. 대회는 공장위원회를 노조로 통합하고, 국민 경제를 위해 개별 공장들의 분권 생산보다 중앙 관리를 옹호하며, 지방 경제 기구는 정책 결정 기구가 아니라 집행 기구로 운영한다고 결의한다.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중앙 관리 기구를 선호하는 세력이 아래로부터 형성된 공장위원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세력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혁명당 좌파는 생산 수단과 사유권이 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레닌식의 계급 협조나 중앙 정부에 타협적인 노동자 관리는 오히려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래도 레닌은 공장위원회를 노조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때문에 돈바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과 에까쩨리노다르의 항구 노동자들은 노조로 관리권을 이양하기를 거부하면서 격렬한 시위까지 벌인다.

레닌은 생산력을 빠르게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본가는 재산권과 의사결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영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동자들은 회계를 감독하면서 노동 규율을 책임지는 ‘국가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그리고 스쩨빠노프는 ‘노동자 관리’가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노동자 행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당내 좌파들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 행정’은 관료주의화를 초래하는 이중적인 계급 협조 체제라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여간 생산과 유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이에 레닌은 공장위원회의 노동자 관리를 소부르주아적이며 무정부적이고도 반혁명적인 생디칼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 자본주의가 점진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박한다. 그리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유화를 무기한 연기하고 테일러 시스템과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하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국가 자본주의’ 정책은 전문 경영인들과 노동자들 쌍방으로부터 반발을 받으면서 중단된다.

당내의 좌파는 ‘노동자 반대파’라는 이름으로 분파를 형성하여 노동자들의 자율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레닌의 중앙집중식 노동 정책을 전면 비판하기 시작한다. 또한 점증하는 식량난과 생산고 하락으로 5~6월에 일부 대기업 노조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인기가 오르면서 ‘볼셰비키 타도’라는 구호가 나돌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자 관리’를 외치며 상부의 지시를 드러내놓고 거부한다. 푸틸로프 공장과 오부꼬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관리’를 위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파업을 시도하거나 생산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식량난과 노동 정책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1918년 상반기 중에 페트로그라드에서만 총 인구의 57%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이 농촌으로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도 인구의 44%가 감소한다. 그에 비례하여 노동자의 수가 감소하고 질도 하락한다.

볼셰비키 정권은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반혁명을 이겨낸다.

소비에트 정권은 1918년 3월 3일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가까스로 전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산업 중심지와 곡창 지대를 잃는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평화도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굴욕적인 강화에 격분하여 연립 정권에서 탈퇴하고 볼셰비키 내에서도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이 강하게 반발한다. 게다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14개 나라가 ‘대외 채무 소멸’을 선언한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5월에 ‘간섭 전쟁’을 일으킨다. 6월에는 반혁명 세력도 반격을 개시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온다. 레닌은 내전이 일어나자 당 지도부에서 좌파인 오신스끼·부하린·스미르노프를 경질하고 ‘노동자 관리’를 옹호하던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혁명당 좌파를 탄압하면서 일부는 체포하도록 지시한다.

혁명 러시아는 곡창 지대를 상실한 탓에 도시에는 식량 위기가 닥치고, 농촌으로 보낼 공산품은 크게 부족하며, 루블화는 교화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유통 체계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고, 사방이 완전히 봉쇄되어 식량·의류·총기·연료·원료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철도가 발달하지 못해 군대 이동이 신속하지 못한 것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결국 소비에트 정권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그런데 전시 공산주의는 혁명 시기의 원칙들을 하나씩 폐기하게 만든다. 소비에트 정권은 ‘자원제에 의한 민병대’ 대신 ‘징병제에 의한 정규군’을 편성한다. 붉은 군대의 토대인 노동자계급은 수도 적은데다가 이미 전쟁에서 많은 목숨을 잃었고 농촌 출신의 병사들은 자신의 마을을 떠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차르 군대 장교들을 다시 수만 명이나 충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장교를 선거로 뽑는 원칙도 포기하게 된다.

권력 구조도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소비에트는 자신이 선출한 기관인 인민위원회의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 가는 반면 공산당(원)은 공장위원회·노조·소비에트·국가기구·적군에 관료로 진출하여 모든 의사결정권을 장악한다. 내전으로 인해 신속하고 엄격한 명령 체계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정책 논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각종 직책은 선출이 아니라 임명에 의해 충원된다. 업무에서는 정치나 이념 문제보다 행정이나 군사 활동이 중시된다.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관료주의가 확산된다.

계급 관계도 변화한다. 정부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빈농위원회를 구성하고 중농의 협력을 얻어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의 토지 분배로 부농과 빈농이 격감하고 중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식량 공출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자 정부는 노동자·병사·관리로 식량공출대를 구성하여 식량을 강제로 공출한다. 이에 대해 일부 농민은 조직적으로 대항한다. 우크라이나의 마흐노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도 반혁명 세력의 백군(白軍)도 아닌 녹군(綠軍)을 자처하면서 중앙의 간섭이 없는 농민 자치를 이루겠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를 빼앗겠다는 백군보다는 토지를 분배해준 적군을 선택한다. 특히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항전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반혁명군은 정치적 분열과 지리적 분산으로 효과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가 1919년 4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자기 나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소련 남부에서 진행하던 군사 개입을 중단한다. 영국 정부 역시 9월에 자국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소련 북부로부터 원정군을 철수시킨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러시아는 이 해 말 옛 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한다. 이전에 러시아 혁명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럽 민중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유럽 민중들의 반란과 투쟁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 전쟁으로부터 혁명 러시아를 구한 것이다.

당과 국가가 중앙집권화하면서 공장위원회는 하부 통제 기구로 전락한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의 노동 정책을 살펴보자. 볼셰비키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조직인 공장위원회를 중앙 권력에 종속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내전이 일어난 직후인 1918년 6월 28일 정부는 국유화령을 포고하고 ‘노동자 관리’를 폐기하는 조치들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경영권은 최고국민경제회의에 귀속된다. 정부는 그 동안 저항이 가장 심했던 철도·석탄 산업들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관리위원회들을 강제로 폐쇄하고 공장위원회의 선거 제도도 폐지한다. 또한 노조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해 정부의 정책에 저항해온 인쇄·은행·모스크바공무원 노조 등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정부는 노동자 개인의 자유도 상당히 억압한다. 노동 규율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공장을 폐쇄하고 강제 징집하거나 다른 작업장이나 강제 노역장으로 배치한다. 국유화령 이후에는 모든 노동자가 개인 노동 장부를 지니고 다녀야 하고 이주의 자유가 제한되며 직업 선택과 일상생활까지 노조의 감시를 받게 된다. 또한 이 해 연말에 새 노동법이 제정되어 의무(강제) 노동과 노동 업적 카드제가 신설되고 작업장 이탈과 파업은 반역 행위로 규정된다.

최고국민경제회의는 1919년 3월 특별상여제·추가배급제·돌격노동제를 시행한다. 더 나아가 전러시아인민경제회의는 4월에 총 노동 동원령을 선포하고 “노동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을 살리는 열쇠임”을 강조하면서 노동카드·배급카드·여행허가서·직업증명서를 의무적으로 지니고 다니게 한다. 트로츠키는 11월 9차 당 대표자 회의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의무노동이 자유노동보다 생산성이 더 높고 더 사회주의적이다’라며 붉은 군대의 열성 부대를 노동에 동원하고 모든 노동 이탈자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징계하거나 강제 노역장에 배치하는 방안을 제출한다. 당 대회는 트로츠키의 제안을 채택하고 아울러 경영인은 노동자나 전문가 출신이 아닌 당성에 따라 결정하기로 결의한다. 트로츠키는 더 나아가 1920년 1월 제3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에서 토요일 무보수 노동제와 일인 관리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다. 노조 대회는 앞서의 당 대표자 회의의 결의와 트로츠키의 제안을 수용하여 노조에게 단지 노동 조건과 노동 복지에 관해 건의할 수 있는 기능만을 허용한다고 결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노동자들의 심한 반발과 이탈을 초래한다. 특히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 군사화를 실시하는 데에 반대하여 8월에 파업에 들어가 10월에는 거의 모든 철도를 마비시킨다. 연말에는 모스크바 전역에서 노동자 소요가 확산된다. 심지어 국영 기업에서도 파업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 군사화에 반발하고 부족한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통에 전체 노동자의 평균 결근율이 50% 이상에 이르게 된다. 노동 군사화 정책을 실시한 후에는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이 급격히 퇴조하고 당원의 수도 격감한다. 또한 엄밀한 계획 없이 위에서 강제로 실시한 식량 징발, 상품의 집단 교환, 빈농위원회의 계급투쟁, 의무노동, 국가 관리 등은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초래한다.

그럴 때마다 볼셰비키 정권은 백군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무렵부터 볼셰비키 당원 사이에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확산되고 국가가 중앙집권으로 통제하는 체제만을 사회주의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내전의 승리가 확실해질 즈음 정부는 노동 군사화 정책을 철회하는 대신에 중앙의 특별 행정 기구로서 산업중추부를 창설하고 산업과 노동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산업 경영 체계는 당 정치국→산업중추부→인민위원회의→노동인민위원회→최고국민경제회의→소비에트 집행부→소비에트 상부기구→소비에트 하부기구→노동조합의 순서로 권력 서열이 정해진다. 이에 따라 공장위원회는 완전히 노조의 하위 기구로 전락하여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변해간다. 이리하여 내전기 동안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조직은 완전히 파괴된다.

게다가 헌신적이고 뛰어난 선진 노동자들이 내전에서 무수히 목숨을 잃음으로써, 즉 노동자들의 자율적 행동을 이끌 소중한 역량들이 손실됨으로써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된다. 그리고 혁명 이후 대거 당과 국가 기구에 선발되어 간 노동자 출신 간부들은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거나 노동자를 감독하는 행정 관료로 변질되어 간다. 내전 말기에 당 조직 역시 완전히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성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에 따라 당원들은 하위 기관에서 혁명에 헌신하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거나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노동자국가 관리’는 혁명 당시에는 계급 철폐, 자치권 확보, 직접 관리를 쟁취하기 위한 구호였으나 내전 말기부터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된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7년 동안이나 경제가 황폐해지고―1920년의 농사 수확은 전쟁 전의 60% 수준에 그친다―전시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내전 말기에는 인민들의 투쟁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은 1920년 가을에 강제 식량공출에 항의하여 파종량을 줄이고 연말에는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배급제와 강제 노동 동원령에 항의하여 파업을 전개한다. 1921년 초에 산업 생산성은 혁명 이전에 비해 16% 이하로 떨어진다. 여기에 또 다시 식량 배급량의 1/3이 감소하자 2월부터는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모스크바에서 각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자 볼셰비키 정부는 이 두 당을 불법화한다. 이로써 러시아는 일당 국가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발틱 해의 크론슈타트 섬의 수병 1만 6천 명이 1921년 3월 초 “권력을 소비에트로!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넘기지 말자!”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볼셰비키 당원과 노동자들도 상당수 가담한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볼셰비키 반대’라기보다는 ‘더 나은 볼셰비키’다. 그렇지만 크론슈타트 반란은 16일 만인 3월 18일에 1000여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그리고 2500여명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볼셰비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고 수도 방어 지역으로서 의미가 매우 큰 크론슈타트에서의 반란은 레닌에게 큰 충격을 준다. 결국 레닌도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불만이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대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시장 경제가 도입되고 1당 독재 관료화가 심화된다.

공산당 10차 당 대회가 3월 8일에 열린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에 초조해진 볼셰비키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며 ‘당내 분파 금지’와 ‘국가에서 당으로의 권력 집중’을 결정한다.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되어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또한 대회는 노조를 당의 하위에 복속시키고 임금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면서 평등임금제도를 공식 폐지한다. 노조 문제에 대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노조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전위대에 의한 독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 대회는 자본주의적인 개인영업을 대폭 자유화하는 ‘신 경제 정책(NEF)’을 채택한다.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름에 따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운용하던 전시 공산주의 경제를 혼합 경제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로써 곡물 공출은 고정 세금으로 대체되고 잉여 곡물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된다. 국유화되었던 많은 중소기업이 매각·대여되고 대기업은 공공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가격·임금은 시장 원리에 맡겨진다. 신 경제 정책이 시행되자 경제에 활기가 되살아나면서 극히 불안했던 정치 상황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시기의 노동 정책은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유화, 전문적 ‘일인 관리제’, 기술자 우대, 차등임금제, 성과급제, 생필품 배급, 각종 특혜 부여 등인데 이것은 물질적 혜택을 주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을 유발시켜서 산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니 노조 지도부에는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보다도 생산력 향상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정책이 시행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1923년 1월에 임금 격차가 80:1에 이를 정도로 모순과 혼란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유대감보다 서로간의 경쟁과 갈등이 더 커지면서 노동자‘계급’은 해체된다.

한편 물품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길다랗게 늘어선 줄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된다. 이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찰이나 행정관이 늘어나고 이 경찰과 행정관을 임명하거나 물품을 배급하는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료의 권력이 강해지는 만큼 민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화도 심화된다. 또한 ‘분파 금지’가 관료화를 더욱 확대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료들이 행정의 편리함만으로 분파 금지를 바라보게 되면서 분파 금지에 의한 당의 통일성은 민주집중제를 관료집중제로 전화시키고 관료 집단의 전횡을 낳는다. 레닌은 당 관료 기구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다.

1922년 3월 11차 당 대회가 선출한 중앙위원회의 1차 회의에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 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소련)이 출범한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당은 ‘레닌 서거 추모 입당’ 운동을 벌여 당원 수를 대폭 확대한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십 만 명이 새로 입당한다. 이로 인해 당은 경계가 느슨해지고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관료화가 더욱 심화된다. 또한 이에 따라 당 관료들이 평당원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도덕적 부패가 진행되어 특권 관료층을 지칭하는 “sovbour"―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이다―라는 냉소적인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분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스탈린이 총서기로 있는 서기국은 신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노멘클라투라―각종 정책 수행에 적합한 인물들의 명부―를 매개로 주요 보직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정치국 구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권력을 집중한다. 이제 승진은 서기국에 대한 충성에 따라 좌우된다. 스탈린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924년 말에 처음으로 한 나라만으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공산당원들 사이에는 신 경제 정책으로 인해 혁명의 이상이 손상되고 있다는 좌절감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높은 실업률, 임금과 노동 조건 개선의 부진, 경영자와 전문가 위주의 임금 체계 등으로 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결국 적대 세력과 맞서는 팽팽한 긴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피로감과 실망이 소련 대중을 엄습한다. ‘인민의 긍지’는 썰물처럼 밀려나고 소심함과 출세주의가 득세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업화의 속도와 재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부하린은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먼저 농업을 발전시켜 공산품 수요를 자극하고 소비재 산업에서 잉여가 발생하면 과세와 가격 정책으로 중공업화 재원을 충당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농업·소비재공업·중공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와 경제이론가인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부하린의 이론에 대해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공업화를 가속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유언장에서 표한 존경심으로 인해 레닌 이후의 최고 지도자로 손꼽히지만 멘셰비키의 전력이 있는 탓에 원로 볼셰비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중앙당 총서기인 스탈린, 레닌그라드 당 총서기인 지노비예프, 모스크바 당 총서기인 카메네프가 반트로츠키 동맹을 형성한다. 이들은 좌익 반대파가 노농동맹의 기조를 위협한다고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에 대한 좌익의 접근을 차단한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군사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다. 그러자 스탈린은 레닌의 사도로 행동하면서 자기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한다.

이에 경악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좌익 반대파의 노선을 차용하여 스탈린에 대항한다. 부하린이 농민들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에 정권이 부농의 인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서기국의 장벽에 걸려 1926년 초에 양대 수도의 당직에서 물러난다.

이제 이 두 사람은 트로츠키와 함께 합동 반대파를 결성한다. 트로츠키는 유럽 혁명 이전이라도 유럽과의 교역이나 유럽의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때가 좋지 않았다. 1926년에 신 경제 정책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데다 1927년에는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5월에는 영국과의 국교가 단절되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나빠지는 등 국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합동 반대파는 오히려 자본주의 적들에 영합하고 소련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며 반역 행위를 일삼는다는 공격을 받는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대한 신념 부족과 급격한 산업화론자라는 양면 공격이 모순이라고 항변하지만 언론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려는 시도도 비밀경찰에 의해 봉쇄된다. 결국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분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중앙위원직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11월에는 당에서도 제명되고 모스크바에서 추방된다.

한편 국가계획위원회가 1927년에 1차 경제 5개년 계획 초안을 내놓는다. 그런데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이 초안에 대해 설정 목표가 낮다고 비판하자 양 기관 사이에 목표를 상향 수정하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1929년에 확정된 최종 계획의 목표―좌익 반대파가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아주 비현실적이게 잡힌다. 계획 기간 중에 노동생산성을 110% 상승시키고 농업 생산을 55% 증가시키겠다는 목표는 지나치게 높게 설정된 것이며 생활수준의 하락 없이도 중공업 투자가 가능하다는 전제는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정부는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인 1928년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노동법규도 개정한다. 2월에 제정된 ‘공업 기업의 행정·기술·경영 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는 공장위원회·전문경영인·당세포 3자가 공동 운영하던 ‘트로이카 체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가 공장 운영을 독점하게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져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 권한’을 법률에서까지 박탈한 것으로서 소련이 노동자 정부라는 껍데기(법)조차 벗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들이 공업화 우선 정책과 강제 농업 집단화 정책에 희생된다.

정부는 공업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곡물 가격을 인하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기관의 수매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이 해 겨울의 곡물조달은 아주 저조해지고 이는 곧바로 도시의 식량 위기로 나타난다.

당 지도부는 비상조치로 곡물 공출을 재개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한다. 몇몇 지역의 당 기구가 1929년 초에 벌써 집단화를 시작하고 가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를 결정한다. 집단화는 당 관료,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군대, 경찰, 특별히 선발된 노동자대오를 동원하여 아주 강력히 추진된다. 그리하여 불과 1년만인 다음 해 3월에 무려 50%의 집단화가 이뤄진다.

소수 민족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다. 그리고 부농에 대한 모호한 규정으로 500만 명에 이르는 농민이 필요 이상으로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고통을 겪는다. 그리하여 신 경제 정책이 실행되던 시기에 농민 인구 중 4~5%를 차지하던 부농계급과 그 비율에 약간 미치지 못하던 도시 부르주아지는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국가가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고 농업 집단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농민들은 내전 이후 조직과 무기를 박탈당한 상태였으므로 대규모 도축과 파종 거부로 저항한다. 가축 도살로 인해 가축에 의한 견인력, 비료로 쓸 배설물, 고기와 낙농 제품이 극심하게 부족해진다.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소련의 농업은 장기간 침체하게 된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연속으로 대흉작이 발생해 수백만 명이 질병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에 정부는 텃밭을 인정하면서 농민에게 양보 정책을 취하지만 집단화는 계속 추진한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인해 농촌의 수공업과 사적 상업도 붕괴되어 농민들은 각종 물품 부족에 시달린다. 집단 농장의 의장에는 대개 농업과 무관한 노동자가 임명되어 농민보다는 당의 이익을 우선한다. 게다가 수매가는 유명무실하여 농민들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공업화를 위한 강제 저축에서도 농민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집단화의 재앙이 덮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 간다. 그 수는 1930년대 초 3년 동안 해마다 300만 명에 이른다.

1936년에 가서야 농업 생산은 집단화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농민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나아지기 시작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 통제가 강화되고 ‘상여금 경쟁’과 ‘돌격대 노동’이 장려된다.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신종 공업이 등장하고 신흥 공업 도시들에 여러 종합 공업 단지가 건설된다. 특히 중공업·토목·금속·연료·수송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그리고 기계 영농이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력도 크게 증대된다. 급속한 공업화는 수백 만 명에 달하던 도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농촌에서 해마다 수백 만 명씩 흘러 들어오는 산업 예비군들까지 흡수한다. 정부는 하층 인텔리겐치아보다 육체노동자를 더 우대하는 정책을 편다. 이 때문에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노동자·민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대개 공업과 관련된 기술이나 경험이 없는 농민 출신의 새로운 노동자는 거칠고 낯선 노동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음주·결근·불복종·이직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당의 최대 관심사였던 노동 생산성과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서 정부는 공장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1930년 12월에 모든 공업 기업들은 허가 없이 자신의 원래 근무지를 떠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1931년 2월에는 근무 기록부 제도가 도입되어 공업·운송 노동자들은 근무 기록부를 제시하지 않으면 이직이나 재취업을 할 수 없게 된다. 1932년에는 경영자와 기술자가 노동자에 대해 해고, 배급 카드 회수, 공장 숙소 제공과 같은 혜택 박탈 등의 권한을 갖게 된다. 8월에 제정된 ‘국영기업·집단농장·협동조합 재산의 보호와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에 관하여’라는 법령은 국가·콜호즈·협동조합·철로·수로에 속하는 재산의 절도는 전 재산의 몰수와 함께 총살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 11월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하루 동안 직장을 결근하면 해고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이 제정된다. 그리고 그 노동자의 집이 근무지와 붙어 있을 경우에는 퇴거 조치를 내릴 수도 있게 된다. 12월에는 누구든지 허가 없이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국내 통행 허가제가 도입된다.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한 노조 대회지만 그조차 1932년 이후 17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는다. 단체 협약도 1934년 이후로는 더 이상 체결되지 않는다. “계획이 경제 발전의 결정적인 요소가 될 때 임금 문제는 그것과 관계없이 따로 결정될 수 없고 임금 조정의 한 형태로서 단체 협약은 그 유용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관료들의 권한과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갈수록 강화된다. 1940년 10월에는 산업 경영진이 인력을 다른 기업이나 기관으로 강제로 전근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1941년 12월에는 허가 없이 군수 업체를 이탈한 노동자에게 5~8년형까지 벌칙을 부과하는 법령이 만들어진다.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는 1928년 단 3만 명에서 1930년 66만, 1931년 200만, 1935년 500만, 1942년 1000만 명으로 급증한다.

정부는 채찍 정책(노동 통제)과 더불어 당근 정책을 다함께 시행한다. 정부는 1931년에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주의적 경쟁”이라고 명명된―그러나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실적에 따른 누진적인 성과급제도’를 도입한다. 이 때문에 소득 격차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평등주의는 계속 뒷걸음친다.

특히 관리자들은 계획된 목표 이상을 달성하면 높은 상여금을 받는다. 그러고도 노동자를 위한 주택·회관·매점·탁아소·유치원을 세우는 데 쓸 ‘기업장 기금’(1936년 제정)까지 전용해서 쓴다. 그리하여 정부의 상급 관리, 기업장, 성공한 작가는 모스크바의 저택, 크리미아의 별장, 한두 대의 자가용, 수명의 하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1만 루블 이상의 상속 재산은 모두 몰수하던 상속세는 이제 10%를 넘지 않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미국의 상속세보다도 매우 낮은 비율이다.

탄광 노동자인 스타하노프는 1935년에 1일 6시간 교대제에서 하루 102톤의 석탄을 채굴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인 기적의 ‘노동 영웅’으로 선정된다. 이어서 개인의 모범을 따라 배우자는 선동이 뒤따르고 성과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는 집단 포상과 특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량의 기준은 “스타하노프제 포상 노동자들의 생산을 다른 노동자들의 평균치와 합산하여 평균”한 것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닦달하는 관리자들의 압력은 더욱 가중된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업무 외 시간’에도 작업장과 도구·원자재를 정리정돈하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일들이 진행되면서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노동 시간은 연장된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태업으로 저항하고 스타하노프 운동원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비난하며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노동자들은 강제 저축, 모든 물품의 배급제,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주택 건설로 인해 생활수준이 하락한다. 조그만 주택 한 채에 심한 경우 7~8가구가 입주함으로써 가정생활이나 사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중공업 우선 정책과 수공업의 소멸로 생필품이 늘 부족하여 암시장이 성행한다.

그렇지만 1934년 이후 경공업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고 1935년에 상거래 체계가 일정 정도 도입되면서 인민들의 생활도 조금씩 개선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실질 임금이 하락하기는 하지만 고용 기회가 확대되어 여성들의 취업이 쉬워짐으로써 가계 수입은 오히려 늘어난다. 공업화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하루 8시간 노동이 원칙으로 지켜진다. 실업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다.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질병에 걸린 노동자는 무료 의료 혜택과 함께 통상 임금의 100%를 보장받는다. 그렇지만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소비재 공업과 농업에 대한 파급 효과는 아직 별로 나타나고 있지 않아서 인민의 생활은 절대 빈곤에서 탈피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이다. 한편 정부는 엄청난 비용을 교육과 훈련에 투자하여 노동자·농민 출신의 ‘붉은’ 전문가를 양산함으로써 체제에 우호적인 전문가 집단을 확보한다.

관료 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지면서 노동자의 창발성이 소진된다.

모든 생산 수단이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옴으로써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집중과 중앙 계획이 가능해진다. 사회가 당 지도부→국가계획위원회→경제담당 인민위원부들→지역→도시→공장으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산업 피라미드로 구축되면서 관료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진다.

그런데 관료들이 현실에 근거한 면밀한 계획보다 상부의 지령을 우선함으로써 관료들의 계획과 예측은 종종 터무니없이 빗나간다. 이로 인해 한쪽에서는 물품이 남아도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품이 모자라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관료들이 제품 가격을 자의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똑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도 공장마다 관리비와 생산 가격이 서너 배 이상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제 맘대로 날뛰는 가격은 합리적인 계획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계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그러면 중도에 포기하는 사업이 생겨나고 그만큼 물자는 낭비된다. 그런데 관료 자신이 결정한 계획과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지역·부문간의 혼돈과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관료가 충원된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만 하나 더 늘어난 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일단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보자는 식으로 된다. 이제 현장 책임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목표치는 낮추고 성과는 실제보다 부풀려 보고한다. 이 때문에 중앙의 경제 책임자와 일선의 기업 책임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소송이 제기된다.

소송의 주요 항목을 차지하는 것은 품질 문제인데 이것은 관료들이 수치로 나타나는 양을 중요시하고 질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는 무엇이든 기술 수준에 상관없이 규모가 클수록 좋다는 것이 신앙으로 되어있던 상황이니 그럴 만하다. 예를 들어 1928~37년 사이에는 거대 기업 열풍이 불었고 1930년에는 50개의 촌락과 8만 4000ha, 29개의 촌락과 3만 3533ha―1ha는 1만㎡다―를 포괄하는 두 개의 대규모 콜호즈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거대기업이나 콜호즈 둘 다 실패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료주의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질수록 품질 개선을 가능케 할 노동자의 창발성과 책임 의식이 더욱 파괴된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러저러한 노력들은 관료주의에 짓눌려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스탈린은 정적을 숙청하며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당의 지도 체제는 당 대회가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위원회가 13~14명의 정치국원을 선출하며 정치국이 서기장과 서기국원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관료층이 공고화되고 당의 위계질서가 강화될수록 권력은 자연스럽게 서기장에게 집중되어 간다. 더구나 스탈린은 경찰 조직인 내무인민위원부를 이용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기까지 한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8년 샤흐티 사건, 1930년 근로농민당 사건과 공업당 사건, 1931년 멘셰비키 동맹 ‘뷰로 사건’, 1936~38년 대숙청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급의 적’을 만들어낸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36년 8월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볼셰비키 중앙위원 16명을 ‘소련을 전복하기 위해 트로츠키와 협력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한다. 다음해까지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재판이 수차례 열려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다수가 사형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숙청으로 인해 수많은 지도자들이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최초로 조직된 볼셰비키 정부의 구성원 15인 가운데 단 한 사람 스탈린만이 대숙청 이후까지 생존한다. 각종 인민위원부의 모든 최고 관리들은 차례대로 숙청당한다. 1935년에 임명된 군사령관 15명 가운데 14명이 배반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한다. 거의 모든 소련 대사들이 숙청당한다. 대숙청 기간 동안 소련 내의 30개 공화국 정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소연방 탈퇴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숙청된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쳐 ‘수령의 1인 독재’가 완성된다. 이것은 정치만 보면 차르의 전제 시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당내 비판 기능이 마비되면서 인간관계는 폐쇄적으로 변해간다. 1920년대 말이래 소비에트 대회와 최고소비에트에서는 모든 결정이 단 하나의 기권표나 수정 제의나 반대 연설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1937년 총선 때 수백 개의 선거구 모두에서 후보자는 오직 한 사람씩만 나온다. 투표율은 98% 이상, 찬성률은 99.9%를 기록한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100% 이상을 득표한다. 유권자가 1617명인데 2122표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스탈린의 정치적 성격은 관료 집단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관료 집단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위협하는 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할 수 있는 무자비한 사람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관료 집단의 인격화로서 스탈린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스탈린이 1922년부터 30년 동안 서기장이라는 권력의 정점에서 점점 신격화 되어간 것은 관료 집단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의 형태와 구조는 그 시대의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관료 집단으로의 권력 집중은 다른 한편에 서있는 민중들의 권력 상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생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이루지 못한 근본적 결함에 기인한 것이자 생산력 향상을 위해 계급투쟁을 포기한 결과이다.

소련 사회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관료계급이 형성된다.

소련은 계급투쟁이 아닌 평화 공존을 외교 정책으로 취한다. 소련은 1929년에 영국 노동당 정부와 1931년에는 프랑스와 1933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1934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1935년에는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는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전쟁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선전하여 인민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민들은 정부가 무너지면 자본주의로 복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부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인민에게 엄청난 선전 효과를 일으키면서 내부의 정적을 소탕할 구실과 급속한 공업화의 명분을 만들어준다. 정부는 선진국에 비해 50~100년이 뒤진 소련으로서는 길어도 10년 이내에 이들을 따라잡아야 생존도 가능하고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하다며 경제 성장을 독려한다.

소련 사회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소련 군대는 1935년에 혁명에 의해 철폐되었던 장교 제도를 18년 만에 부활시킨다. 이는 사회가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로 갈라져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리고 1936년 6월에 새로 만들어진 헌법은 계급과 산업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선거를 무차별 개인들의 보편·평등·직접·비밀 선거로 바꾼다. 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체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 회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법적으로 청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정부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 사회주의의 대의, 자본주의보다 평등한 사회, 높은 경제 성장률, 서민을 위한 의료 제도와 사회 보장, 교육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일상적으로 강조하여 낙관주의를 고취시킨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유례없는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또한 외국의 공산당과 인민들이 소련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급속한 공업화에 따르는 희생을 감내한다. 당 지도부는 노동자에게 입당의 문턱을 낮추고 일선 경영자에게 거친 대접을 받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당·정부·경찰 기구가 비대해짐에 따라 인텔리겐치아―사무·전문직 노동자―층이 증대한다. 인텔리겐치아는 1928년에 전체 노동 인구의 5.2%에서 1939년에는 16.5%(1100만 명)로 늘어난다. 인텔리겐치아는 공업화 초기에 우익의 지지 세력으로 간주되어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급격한 공업화에 이들의 전문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공격은 1931년 중엽부터 중단된다. 인텔리겐치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순 사무직은 육체노동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지만 공업경영자·기술전문가·상급행정가인 수십 만 명의 상층 인텔리겐치아는 여러 혜택을 받으며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대졸 기술자는 1928년 4만 7천 명에서 1941년 28만 9천 명으로 증가하고 대졸 취업자 수는 75만 명에 이른다. 같은 직책을 맡고 있는 비대졸자의 수가 여전히 몇 배나 더 많기는 하지만 점차 학력이 중시된다. 숙청이 완화되는 1938년 이후부터는 방대하게 형성된 인텔리겐치아 층이 공업화의 최대 수혜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체제의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등장한다.

소련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질적 도약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소련 경제는 인민들의 헌신, 계획 경제의 장점, 광활한 영토, 풍부한 천연 자원, 노동력의 대규모 투입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소련은 1928~40년까지의 13년 동안 연평균 16%―서방에서는 최저 8.4%에서 최고 13.6%로 추산―에 이르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강력한 공업 국가로 성장한다. 이 기간 동안 산업은 거의 국유화되고 유통 분야는 국유화되거나 협동조합이 장악하게 되며 농업의 집단화 비율은 90%에 이른다.

노동자는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1928년 12.4%에서 1939년 33.7%로 증가한다. 그리고 농민들이 공업 도시로 몰려들면서 그 기간 동안 도시 인구는 3천만 명이나 증가한다. 문맹률은 제정 말기의 75% 이상에서 1939년 23%(여성은 33%)로 격감한다. 노동자들의 문맹은 완전 일소된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고 농업이 집단화되었지만 생산력은 여전히 낙후한 편이다. 중공업 분야는 급속히 발전한 반면 경공업이나 사회 기간 시설 분야에서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계획 경제의 지도부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능력이 부족하고 관료 기구는 점점 비대해져 부패해 가고 있다. 또한 많은 인력이 개인 축재자와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일에 낭비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의 여러 요소들 사이에 여전히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자의 기술 수준과 문화 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보다 많이 뒤쳐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산력인 노동자계급이 여전히 지시 받는 수동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해방’이라는 욕구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증대라는 생산력 발전에 종속되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노동 생산성이 여전히 낮다. 그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은데도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그만큼 국민 소득과 인민의 생활수준도 아직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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