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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4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4

사회주의 대중 정당의 등장과 발전

독일 사회민주당은 합법 의회 활동에 매몰된다.

사회민주노동당과 노동자총연맹은 1875년 고타에서 합당 대회를 열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당인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새로 창당한다. 사회주의노동당은 베를린·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창당 3년 만에 선거에서 40%까지 득표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이에 비스마르크 정권은 1878년에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해산하는 강수를 두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모든 조직·집회·출판물을 금지하는 사회주의자단속법을 통과시킨다. 이에 사회주의노동당은 지하 활동에 들어가고 천 명 가량의 활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된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단속법은 조직·집회·출판물만을 금지하는 것이어서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원내’에서의 합법 활동은 가능하다. 아무튼 사회주의노동당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여 1884년 총선에서 기존 12석의 의석을 24석으로 늘린다. 그런데 다수 의원이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중시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식민 정책의 하나인 ‘증기선 보조금 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당은 한 차례 홍역을 겪는다.

그래도 당은 성장을 계속하여 사회주의자단속법이 폐지된 1980년의 총선에서 143만 표(19.7%)를 득표하여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렇지만 당은 단속법 시기의 공포스런 탄압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직을 지키면서 착실하게 표를 늘려나가는’ 합법 활동에만 치중하고 대규모 대중 투쟁을 두려워하는 체질로 변해간다. 이에 “청년파”들이 제도 정치권 철수와 선거 보이콧 등을 주장하다가 1890년에 당에서 쫓겨나고 독립사회주의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창당했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사회주의노동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에서 당 대회를 열어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선언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발행하던 비합법 신문 [사회민주주의자] 대신 국내에서 발간하는 합법 신문 [전진]을 창간한다.

그런데 활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최종 목표와 민주화·개혁이라는 당면한 실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혁명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천은 제도 정치에 치중하게 된다. 제국주의로 성장해 가고 있는 독일 경제의 발전과 사회민주당의 급속한 성장, 특히 의석수의 증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러자 베른슈타인은 “내게는 운동이 전부다. 궁극 목표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년)라는 책을 통해 혁명 이론에 ‘수정’을 가한다. 이로써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의 원조가 된다.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침묵과 무시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제 막 당 활동을 시작한 스물일곱 살의 폴란드 계 여성 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만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고 ‘일상 개혁 투쟁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켜 혁명 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고향인 폴란드―이때는 러시아 영토였다―로 돌아가 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와서는 (1891년 벨기에 총파업 때부터 대두한) 정치총파업 전술을 적극 제기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총파업은 경제 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정치 투쟁이란 의회 진출 아니면 무장 봉기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농노의 사촌뻘로 여겨졌던 ‘미숙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봉기는 1905년 1년 내내 유럽의 신문지상을 달구며 유럽의 노동자계급을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5월의 쾰른 노조 대회에서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다. 반면에 사회민주당의 9월 당 대회는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한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노조 측의 압력에 밀려 다음해 2월에 노조 지도부와 비밀회의를 열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하고 9월 당 대회에서는 노조의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당 대회 결의에 대한 노조 지도부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독일 노동자들의 오랜만의 투쟁의 물결도 다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인 1907년의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이전의 81석의 절반에 불과한 43석만을 얻으며 대패한다. 그런데 1905~06년의 급진화가 선거의 패배를 가져왔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당은 더욱 확실히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이 즈음부터 사회민주당의 최고 기관인 5인으로 구성된 간부회의의 인물도 바뀌기 시작한다.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당 상근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첫 세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이후에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가 1906년에 은퇴한 아우어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맡는다. 1911년 예나 당 대회에서는 ‘순수한’ 노동자계급 출신인 필립 샤이데만―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수상이 된다―과 오토 브라운이 간부회의 임원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세대이고 이들에게 당이나 노조의 간부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유일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1910년 2~3월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지만 당 지도부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 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을 전개한다. 카우츠키는 대중파업은 발전이 덜된 동유럽 사회에나 적절한 투쟁 형태라며 지도부의 입장을 옹호한다.

사회민주당은 1912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하는 전술을 편 끝에 425만 표(27.7%)에 110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합이 깨져 사회민주당은 다시 주변 세력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100명을 넘어선 국회의원들이 당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된다. 다음 해 8월에는 베벨이 사망하여 당의 이상과 현실 정치를 봉합해주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간부회의가 12인으로 늘어나지만 이 중에 좌파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된다.

프랑스 사회당은 ‘혁명적 개혁’을 추진한다.

사회주의 세력은 파리코뮌 패배 이후 제도 정치에서 배제된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력이 서서히 복구되긴 하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여러 개의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영국과 같은 대규모 노조 운동이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강력한 사회주의 단일 정당은 아직 요원한 상태로 존재한다. 사회주의자들은 1884년에 도입된 지방자치제 선거에 참여하면서 제도 정치에 대한 경험과 실력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들은 1893년 총선에서 모두 50여명이 당선된다. 여러 정파로 찢겨 있는 상황이고 이전까지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기적과도 같은 약진이다. 이러한 성공의 요인은 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인 파나마운하 관련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면서 개혁파로 인식되어온 공화파 국회의원들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극에 달하고, 이제 막 프랑스에 불어 닥친 불황으로 인해 계급 갈등이 치열해지고, 지방 행정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이 선거를 지원한 데에 있다.

1898년에는 지배 세력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하여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바람에 반동 극우파가 다시 득세한다. 그러나 1년 후 상황이 반전되어 공화파 내에서 개혁성이 강한 급진파가 정부를 구성한다. 그러자 밀르랑이 반동에 대항하여 공화제를 방어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며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격심한 논쟁이 벌어진다. 특히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한 장본인인 갈리페 장군이 내각의 국방상이라는 점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런 사람과 마주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수정주의 논쟁과 얽혀 더욱 복잡한 형국을 이룬다. 이로 인해 한참 무르익어 가던 사회주의 조직들의 통합은 뒤로 미뤄진다.

앞 절에서 본 것처럼 1902년에 결성된 노동총동맹은 사회주의 정당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위기를 불러일으켜 통합으로 나아가게 한다. 밀르랑의 입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세력들은 합당하여 ‘프랑스의 사회당’을 만들고 나머지 세력들은 프랑스사회당을 창당한다. 그런데 밀르랑이 1903년부터 드러내놓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절하자 프랑스사회당도 밀르랑에게 등을 돌린다.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대회는 프랑스의사회당과 프랑스사회당의 통합을 재촉한다. 여기에 1905년 러시아 혁명이 강한 충격파를 던진다. 결국 1905년 4월에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으로 통합 사회당이 창당된다.

그러나 통합 사회당은 유기적인 당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분파 연합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1908년 툴루즈 당 대회에서는 우파의 개혁 노선과 좌파의 혁명 노선이 첨예하게 맞붙는다.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늘 수식어로 따라붙는 조레스는 대회 막바지에 ‘혁명적 개혁주의’를 당 노선으로 제시하며 회심의 열변을 토한다. 당이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오직 당이 혁명적 성격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하고 역으로 개혁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비로소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개혁과 혁명 사이에는 ‘충돌과 위기, 파탄과 도약’이 있을 거라고 역설한 것이다. 툴루즈 당 대회 이후 조레스는 더욱더 급진적인 행보를 취하면서 차츰 통합 사회당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당내 통합에 일단 성공한 조레스는 총파업 전술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노동총동맹과의 화합에 나선다. 사회당은 1910년 철도파업 때 당 기관지 사무실을 파업 투쟁 본부로 사용하게 하면서 행동으로 연대하여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당하던 노동총동맹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이런 노력의 결과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1913년 파리의 프레 생-제르베에서 파리 코뮌을 기념하고 정부의 병역 3년 연장 기도에 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연합 집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 군부의 영향력 증대에 맞서 거리낌 없이 정면 대결을 벌임으로써 반군국주의·반전평화 투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사회당은 1914년 총선에서 98명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둔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격렬한 대중 투쟁의 영향으로 급진화한다.

각 지역의 정치 세력들이 1892년에 모여 이탈리아노동자당을 창당하고 3년 후에 이탈리아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회당에는 노동조합·협동조합·노동자공제회 등이 집단으로 가입한다. 앞 절에서 보았던 노동회의소가 당의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회당은 의원단·공장조직·기관지가 따로 따로 독자 행동을 한다. 당 대회와 기관지 [전진]이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 노릇을 한다. 게다가 개혁주의 노선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인 필리포 투라티가 주도하는 사회당 의원단은 의회를 지배하는 남부 지주와 북부 자본가 사이의 담합에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고 북부 산업 지역의 일부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얻어내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 1890년대에 남부 시칠리아에서 빈농들이 대중 운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사회당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도 1898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격렬한 대중 투쟁에 힘입어 사회당은 1900년 총선에서 13%의 지지를 받아 33명을 당선시킨다. 아직 보통 선거가 실시되고 있지 않았기에 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 1904~06년에 이탈리아에서도 파업의 물결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타고 당 기관지 [전진]을 중심으로 당의 최대 목표인 사회주의 혁명을 견지하자는 ‘최대강령파’가 등장한다. 이들은 1900년대 내내 의원단의 개혁주의자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당내 투쟁을 계속하다가 1912년 당 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최초의 ‘성인 남성 보통 선거’로 치러진 이 해의 총선에서 사회당은 79석을 획득한다.

영국 노동당은 순수한 의회 정치를 추구한다.

◀ 창당 당시 영국 노동당의 포스터 : “노동당이 길을 연다”

1889년부터 비공인 파업으로 떨쳐 일어서기 시작한 노동자 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노조와 소규모 좌파 정당·단체의 대표들이 1900년 2월에 ‘노조 활동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제도 정치권 진출을 추진하는’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건설한다. 이 대표위원회는 1906년에 ‘노동당’―노동자 정당의 건설로는 유럽에서 가장 늦다―으로 전환한다. 노동당은 1906년 총선에서 29명을 당선시킨다.

그런데 노동당은 노조가 만든 당이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노동자 정당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노동당은 지지자들이 개별 입당하는 게 아니라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곧바로 당원으로 인정되는 집단 가입 제도로 운영된다. 물론 유럽의 다른 좌파 정당들에서도 이런 식의 집단 가입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개별 입당을 독려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당 대회에서 노조 측 대의원의 표는 자신이 대표하는 조합원의 수에 따라 수만 표, 수십만 표로 환산―블록 투표―하여 집계된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당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노조 간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노조는 일종의 이익 단체 역할을 하고 당은 원내에서 이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의 당 구조야말로 노조의 과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고 당의 임무는 이를 의회 내에서 대변하는 것이라는 의회주의 정치의 가장 순수한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당의 일상 활동은 하원 의원단이 모두 결정한다. 이후에 노동당이 집권하게 될 때는 내각, 그리고 야당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 역할을 하는데 내각은 모두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흔히 ‘당수’로 불리는 당 최고 지도자(수상 혹은 차기 수상)는 의원단 내 선거로 뽑힌다. 이런 점에서 노동당은 의원단에 의한 순수한 의회주의 정당이다.

사실 영국은 지난 200년 동안 한 번도 정치적 격변이 없었고 토지 귀족과 산업 자본가들 사이의 세력 교체는 의회라는 사교 클럽에서 지루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져옴으로써 의회가 ‘정치’의 모든 것이 되어온 나라다.

노동당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산별노조 운동이 활성화되자 1918년 당 대회에서 창당 이후 최대의 탈바꿈을 단행한다. 당 대회에서 ‘생산수단·분배·교환에 대한 공동 소유와 산업·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통제’(당헌 4조)를 명시한 당헌이 통과됨으로써 노동당은 비로소 ‘사회주의’ 정당이 된다.

또한 이 당 대회에서 처음으로 개인 입당 제도가 도입된다. 하지만 창당 당시의 구조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당의 주된 기반은 여전히 노조의 집단 가입이다. 개별 입당 당원은 아무리 많아도 60만 수준에 그친 반면 집단 가입한 당원의 수는 600만을 넘어선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단일 정당을 추구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폴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다.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1848년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수십 년 동안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어 고통 받다가 1889년에 통합 대회를 열어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으로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89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를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노동자들이 1906년에 총파업을 경고하여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획득한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다음해 1907년 총선에서 87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비엔나 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학생·교수 자유 조합’과 세계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자’ 교수인 칼 그륀베르크의 영향 아래 일급의 사회과학도들이 당과 노동자 운동 주위에 포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청년 세대의 대표자들인 칼 렌너,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오토 바우어 등은 1904년에 나온 이론지 [맑스 연구], 1907년에 창간한 월간 [투쟁], 일간지 [노동자 신문]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학파’를 구성하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교조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사상계를 주름 잡는다. 그러나 이 최초의 맑스주의 ‘학파’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된다.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전쟁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지만 강력한 전통으로 이어져온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이라는 이념 때문에 분당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좌파는 새로운 당(공산당)을 건설하기보다는 당의 좌익화를 지향하고 우파는 좌파에게 당권을 빼앗겼을 때(1917년)도 당을 떠나기보다는 소수파로 잔존하는 길을 택한다. 좌파인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통일의 사상이다. 이는 노동자계급 단일 정당의 이념이다”라고 주장하고 공산주의자들만의 특수한 당을 건설함으로써 유럽 노동자 운동을 분열시킨 코민테른의 방침은 [공산당 선언]의 정신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혁명과 맞닥뜨린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인해 체제 변혁을 강렬하게 지향한다. 이들은 인민에게 고통만 주는 자본주의 단계―서구적 경로―를 거치지 않고 소생산자들이 토지를 평등하게 소유하는 촌락 공동체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1870년대 중반부터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을 인민주의자라고 부른다.

인민주의자였던 플레하노프는 유럽으로 망명하여 생활하는 동안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활발한 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1880년대 초에 맑스주의로 전향하여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창시자가 된다. 플레하노프는 자본주의는 가혹하기는 하되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사회주의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반드시 거칠 필요가 있는 단계이며, 농민층의 우매한 정치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 필요하고,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레하노프가 주도하는 노동해방단은 외국에서 글을 써서 비밀리에 러시아로 반입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점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한편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심각한 한계에 부딪힌다. 농민들이 차르 숭배에 젖어 있어서 혁명을 선동하는 지식인들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찰에 고발하기까지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농민들에 대한 선전·선동 활동을 포기하고 테러를 통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민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이들은 1901~02년에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테러를 주요 전술로 채택한다. 사회혁명당의 테러리스트들은 차르 정부의 초강경파 요인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암살함으로써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맑스주의자들은 1898년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분파들의 대표자 8명이 모인 이 대회는 창당을 결의한 수준이고 실질적인 창당대회는 되지 못한다. 게다가 무수한 운동 조직들이 비밀경찰에게 추적되어 수시로 깨져나간다. 그래서 레닌은 강한 규율과 민주집중제로 운영되는 비합법 혁명가 조직이 필요하며 또한 이것은 ‘전국 정치 신문’을 통해 단련된 활동가들을 기반으로 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편집진을 해외에 두고 [이스크라(불꽃)]라는 ‘신문’을 발간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성과로 1903년 런던에서 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 대회가 열린다. 그런데 조직 노선을 반영하는 규약 1조의 당원 규정을 두고 레닌과 마르토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레닌은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자고 주장하고 마르토프는 지지자들까지 폭넓게 당원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아무튼 편집국 구성에서 이스크라 진영이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레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러시아 말이다―가 형성되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멘셰비키(소수파)가 형성된다.

2년 후인 1905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민주노동당은 때 이르게 러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사회민주당 내의 여러 분파들은 당면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혁명의 주체가 누구이고 노동자계급이 누구와 동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가 너무나 허약하여 차르를 지지하는 지주와 타협함으로써 혁명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이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농민층을 노동자계급의 확고한 동맹 세력으로 확보하기 위해 토지 국유화를 강령에 넣자고 제안한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와 나란히 그리고 주도적으로 투쟁하되 혁명적 야당으로 남자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집권하게 되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주도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하면서 결국 혁명의 진전을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본다. 멘셰비키는 노동자계급만을 중시한 나머지 농민층과 소시민층에 대해서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연속 혁명을 주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그 자체의 동력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환’되는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 혁명적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속 혁명으로 수립되는 사회주의 권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부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러시아 혁명은 비극적인 상황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창당한 지 이제 겨우 2년밖에 안 된 사회민주노동당은 노선을 현실화시킬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비록 사회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고 혁명으로 발전해 가는 상황에 힘입어 한때 15만 명 규모의 대중 정당으로 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겪는 혁명이라는 성난 파도 속에서 마치 방향키만 있는 돛단배와 같은 처지다. 그렇지만 그 방향키가 있었기에 1905년 혁명은 1917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초전이 된다.

그런데 1905년 5월 불리긴 수상이 ‘의회 신설’을 타협책으로 내놓자 멘셰비키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다면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혁명이 고양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1906년에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레닌은 4월 당 대회에서 입장을 바꾼다. 지독히 불평등한 간접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과의 접촉면을 늘이기 위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 대회는 ‘선거 불참’으로 결론이 난다. 그런데도 당원 일부가 개별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14명이 의원으로 당선된다. 이는 당 규율을 명백히 위반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레닌은 이들이 의회에 남아 당 의원단으로서 활동할 것을 지지한다. 이후 레닌은 볼셰비키 내에서 선거 불참과 의원단 해체를 주장하는 ‘소환파’들과 지난한 투쟁을 벌인다.

레나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1912년 4월에 볼셰비키는 [프라우다(진실)]라는 신문을 창간한다. 이 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8번이나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1914년 7월에 지령 64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기까지 꾸준히 발간된다. 당은 이외에도 이론지를 따로 발간하고 합법 출판사도 운영한다.

볼셰비키는 전국에서 2중 간선제를 통해 단 6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노동자 선거구―지주·농민·도시 등으로 선거구가 나뉘어 있다―모두에 후보를 내보낸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선거일인 10월 5일의 아침은 공장 대표자들의 자격 박탈에 항의하는 페체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정부의 극악한 탄압으로 인해 선거와 대중 행동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전투적인 볼셰비키 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된다. 선거 결과 전체 442개 의석 중에서 사회민주당이 14석을 차지하는데 노동자 선거구 6곳에서는 모두 볼셰비키가 당선된다. 노동자계급이 250만인 나라에서 볼셰비키가 114만 4천 명의 노동자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14명의 사회민주노동당 의원단에게는 대정부 질의를 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의회활동인데 그나마도 33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들은 원내 활동과 [프라우다] 그리고 활발한 노동자 투쟁을 결합해서 효과적인 정치 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 보험(의료 보험) 투쟁이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사회 보험―6월에 처음 도입되었다―의 확대와 완전한 노동자 통제를 줄기차게 주장하여 대정부 질의를 하는 12월 14일에는 노동자 6만 6천 명의 지지 파업을 이끌어낸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프라우다]와 그 사무실을 매개로 노동자 조직들과 긴밀히 협력한다. 또한 대정부 질의에서 노동 탄압에 항의하거나 장관 항의 면담을 주도하고 공장 정문과 거리에서 연설을 통해 투쟁 상황을 알리고 파업 기금을 모금하면서 앞 절에서 서술한 수많은 투쟁들에 적극 연대한다.

[프라우다]는 이러한 투쟁들을 즉각 보도하여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매일 35개가량의 투고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게 한다. [프라우다]는 하루 4만~6만 부가 판매되는데 절반이 공장에서 팔린다. [프라우다]는 정기구독자 조직과 후원회원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사실상 합법 대중 정당의 기능을 한다. 이제까지 당이나 노조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프라우다]의 기사를 보고 사무실에 찾아와 노동자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각종 조직에 가입한다. 그리고 페체르스부르크의 노조 18개 중 15개, 모스크바의 노조 13개 중 10개가 [프라우다]를 적극 지원한다.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놓고 보면 볼셰비키는 250만의 노동자계급 중 수천 명의 간부와 3만~5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중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멘셰비키 신문 [루취(빛)]는 [프라우다]와 비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당의 방침에 따라 의회가 휴회하는 동안은 지역구를 순회하면서 공장과 지역에서 의정 활동을 설명하고 지방의 노동자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보낸다. 노동자 의원들이 방문한 후에는 대개 파업 투쟁이 분출하고 [프라우다] 구독자가 늘고 당 조직이 강화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이 혁명을 향해 치달아가던 1914년 7월 8일 경찰은 [프라우다] 사무실을 급습하여 강제 폐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전시 동원령이 선포되자마자 곧바로 반전 성명서를 채택하고 전쟁 예산 투표에 반대해 전원 퇴장한다. 이는 세르비아 사회당과 함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의 의원단이 전쟁에 반대한 단 두 개의 사례에 속한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이후 원외 투쟁에 주력하다가 11월에 결국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이로써 볼셰비키의 합법 활동은 또다시 중단된다. 그러나 [프라우다]를 통해 계급의식을 자각한, 그리하여 이후 혁명의 주체가 될 수천 명의 선진 노동자들이 이미 대중 속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난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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