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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논쟁 그리고 현장

<사회주의 포럼 5차 토론회>


사회적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논쟁,
         그리고 현장

 


□ 발제 1. : 사회적합의주의, 노동운동 위기 논쟁에 대하여
            박성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 발제 2. : 울산지역 노동운동 사례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 사회 : 남궁원 (사회주의포럼 회원)


□ 토론자 : 김광수 (평등연대 의장)
            양효식 (현장노동자신문 대표) 
            최영익 (미래를 여는 노동자연대(준) 사무국장)


△ 일시: 2004년 12월 11일 (토) 19:00
△ 장소: 숭실대 사회봉사관

 


      

 

 

 

 

                               2004년 ‘사회적 합의’와 ‘노동운동 위기 논쟁’


                                                                  박성인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비정규직 입법 ‘유보’, 그 정치적 함의?

 

0. 12월 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비정규 입법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고, 몇 가지 쟁점(“기간제 3년 경과한 노동자의 법적 지위 둘러싼 논란” 등)을 둘러 싼 요식적인 논란을 거친 후, 이경재 환노위 위원장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 등 8개 법안이 법안 심사소위로 회부됐다”고 선언했다. 이에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가했던 이석행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정부안을 즉각 백지화 하고 비정규직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방안을 원점에서 재검토 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지난 11월 29일 ‘법안 강행 시 재차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던 민주노총이 ‘법안소위 회부’라는 법적 절차의 강행에 대해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취할 지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논의를 거쳐야 할 과제”라고 입을 다물었다.

 

0. 2004년 비정규직 입법을 둘러 싼 노자간 대립의 1라운드는 ‘강행’이나 ‘철회’가 아닌 ‘유보’로 끝났다. 비정규직 입법의 강행을 공언하던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소위 ‘4대 개혁입법’을 둘러 싼 한나라당과의 극한적인 대립과 이라크파병동의안 처리를 위한 한나라당과의 공조 필요성, 그리고 비정규 입법에 대한 노동계 전체의 저항과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이라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이번 정기국회에서의 처리를 유보했다. 소위 ‘4대 개혁입법’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전선과 비정규입법 전선을 분리하여, 먼저 연내에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한 후, 그 정치적 주도권을 가지고 2월 국회에서 비정규직 입법을 처리해 나가겠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0. 우리가 좀 더 세심하게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비정규직 입법 ‘유보’가 현 계급정세에서 갖는 정치적 함의이다.

첫째, 비정규직 입법은 그 처리 시점이 ‘유보’되었을 뿐, ‘철회’된 것이 아니고 ‘법적인 절차’를 밟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고용유연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고용구조를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로 재편하는 것은 국내외 독점자본의 사활적인 이해가 맞물려 있고, 노무현 정권 역시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다.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해가 걸려 있는 이 사안을 누구의 정치적 주도권 아래 처리할 것인가만 남아있고, 그 주도권을 둘러 싼 대립 전선이 소위 ‘4대 개혁 입법’인 것이다. 따라서 ‘유보’는 ‘처리’를 위한 정치적 주도권 확보 과정에 불과하다.

둘째, 노동자민중진영은 비정규직 입법안을 총파업으로 ‘철회’시켜 내지 못했고, 내년 2월투쟁을 기약(?)하면서 급속히 ‘국가보안법 철폐 전선’으로 이동했다. 민주노동당은 ‘4대 개혁입법을 둘러 싼 열린우리당과의 개혁 공조’와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민생 문제의 독자적인 전선 구축’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비정규직 입법저지를 위한 실질적인 총파업을 밑으로부터 조직하지 못했다. 민주노총 역시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입법 강행이 확인된 이후에야 비정규직 입법저지를 위한 총파업투쟁을 결의했지만, 여전히 교섭을 통한 해결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의회 일정에 매달려 총파업 전술을 계속 후퇴시켰다. 그리고 12월 2일 이후에는 ‘비정규직 입법 저지투쟁’에서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투쟁’으로 투쟁의 기조를 전환했다. 한국노총 역시 민주노총과 공동투쟁본부를 꾸리고 겉으로는 총력투쟁을 외치며 천막농성까지 했지만, 투쟁을 진행할수록 투쟁의 성과를 민주노총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딜레마 때문에, 막판에는 ‘노사정 교섭’을 통한 비정규직 입법 문제 해결 가능성에 더욱 힘을 실었다. ‘유보’를 ‘승리’로 평가하는 데에는 바로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라는 투쟁 방향의 선회와 ‘노사정 교섭틀’의 마련이라는 점이 가로놓여 있다.

셋째, 비정규직 입법저지를 위해 10월 열린우리당 점거투쟁, 11월 크레인 농성투쟁 등 선도적인 투쟁을 조직해 온 비정규직연대회의는 비정규직 문제를 정치사회적으로 쟁점화시켜 내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도록 자극은 할 수 있었지만, ‘유보’를 뛰어넘을 수 있는 현실적 투쟁역량은 조직할 수 없었다. 이는 “주요 요구인 법안 폐기 요구안이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총파업 투쟁을 전개 할 것”을 요구한 전노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 투본회의의 결정 그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독자적인 투쟁동력의 조직화가 없을 때, ‘요구’는 ‘요구 자체’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유보’는 ‘철회’시킬 수 있는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동력의 조직화, 그를 위한 계급적 좌파정치세력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력이 구축되지 않은 현실의 표현이기도 했다.

 

 

‘사회적 합의(대타협)’의 새로운 모색과 ‘노동운동 위기 논쟁’

 

0. 민주노총은 12월 총파업을 유보하면서, 내년 2월에 정부가 비정규입법안을 ‘강행’하려 하면 언제든지 다시 ‘총파업’으로 나설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강행’과 ‘총파업’ 이전에, 2004년 12월과 2005년 2월 사이에는 ‘사회적 합의’의 새로운 모색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민주노총 1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에 대한 심의 결과다. 12월 총파업의 유보로 인한 긴장의 해소, 12월 공공연맹, 금속연맹, 전교조 선거 결과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구성에 끼칠 영향,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비정규입법안 수정 가능성 제안 등이 ‘사회적 교섭’ 안건 심의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노총은 최근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를 위해 한국노총이 적극 나설 뜻을 밝히면서 물론 ‘노사정 교섭틀’의 복원을 계속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는, 청와대의 정책 기조의 변화 가능성이다. 이미 청와대는 이정우 정책기획원장을 중심으로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하여, 노무현 정권의 집권 후반기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빈곤화와 양극화로 귀결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재검토하여 경제 사회 정책 전반에 대한 정책 보고서를 1월 중으로 제출할 계획이다. 그 결과에 따라 한국 경제의 발전 전망, 경제정책, 사회정책, 노동정책 등을 함께 논의하는 사회적 합의틀을 새롭게 구축해 나간다는 구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민주노총이 1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전략을 결정하고, 청와대가 경제사회정책의 변화를 논의할 ‘사회적 합의틀’을 새롭게 제안한다면, 비정규직 입법을 둘러 싼 지형은 ‘강행’ 대 ‘총파업’의 구도가 아닌 ‘사회적 대타협’의 가능성이라는 구도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형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노사정위원회는 최근 ‘업종별 노사정협의회’와 ‘지역별 노사정협의회’를 밑으로부터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0. 예상되는 ‘사회적 합의(대타협)’의 새로운 모색은 몇 가지 점에서 지난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대타협)’와 다른 양상을 띨 가능성이 있다.

첫째,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사회적 합의’ 시도는 ‘IMF 정책 기조’안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개방화, 노동유연화를 추진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면, 새롭게 추진될 ‘사회적 합의’는 그러한 정책 기조에 대한 재검토에 바탕하여, ‘새로운’(?) 경제 사회정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의제 역시 노동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경제 사회정책 전반으로 확대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제의 확대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 강화’라는 방향에서 노동문제를 하위 배치시켜 포섭해 나가려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합의 주체를 노사에 한정하지 않고, 시민사회단체들의 적극적인 결합도 예상된다. 이미 2004년 상반기에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빈곤, 양극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 사회정책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경제사회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넷째, 민주노총 역시, 2004년 상반기에 ‘사회적 교섭’전략과 관련하여, 논의 의제를 확대할 것을 요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지난 9월 이후 민주노총은 ‘투쟁이냐 교섭이냐’의 구도를 쟁점화시키면서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회적 의제’를 쟁점화시키고, ‘노동운동의 발전 전략’과 ‘혁신’의 방향에서 ‘사회적 교섭’전략을 추진해 나간다는 방침을 결정한 바 있다.

 

0. 2004년 하반기에 재현됐던 노동운동 ‘위기’논쟁은 바로 ‘사회적 합의(대타협)’을 겨냥한 것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의 전환에 따른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들의 배부른 투쟁’, ‘노동귀족’, ‘그들만의 노동운동’ 등 -에 뒤 이어 전개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노동운동의 ‘위기’ 자체에 대한 진단, 그 원인과 위기 극복 방향을 둘러싸서 이루어졌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었다.

첫째, 현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더 정확하게는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위기’로 진단하고,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내부’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시기 한국 노동운동이 낮은 조직률로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지 못하고,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되어 대기업 이기주의에 갇혀 있어 “함께 연대해야 할 비정규 노동자가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공격”하는 상황이며, 명분 없는 파업투쟁으로 “자신을 옹호해주는 어떠한 사회세력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는 실정”이 위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진단 속에서는 비정규직-정규직으로 분할 고착화시키고, 양극화시키는 근본원인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노동유연화’의 문제는 은폐된다.

둘째, ‘위기’ 진단과 위기원인을 내부로 돌리는 목표, 즉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겨냥하는 것은 노동운동 내 ‘전투적 좌파’, ‘계급적 좌파’를 향하고 있다. 즉 대중운동 내에서의 전투적 계급적 좌파의 고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의 정체,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대표성의 약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의 분할 고착화, 기업별 노조의 한계, 임단협 중심의 파업투쟁의 빈발,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 등은 노동운동이 극복해야 할 사안들이다. 그런데 노동운동 위기 공세는 이러한 문제들이 ‘계급운동 시각’, ‘계급주의’, ‘노동자 중심적 관점’, ‘계급형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과 조직화 전략’, ‘사회주의 이념’ 등이 가로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셋째,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철학과 방식을 아예 전면 혁신하는 일대 전환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그 방안은 논자에 따라 다양하다. 기업별 노조체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성이나 연대성 회복”하고 “산별 노조의 시급한 건설”을 제안하기도 하고, “노동조합의 조합주의,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 그리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극복을 위한 ‘생태적 대안을 찾는 노동운동“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론은 노동운동이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투쟁을 멈추고,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박승옥), “사회적 대타협”(박태주, 김형기), “거시적 코포라티즘과 사회적 대화전략”(최병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0. 민주노총의 정기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사회적 교섭’전략을 둘러싸서,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전개됐던 쟁점들이 다시 구체화되어 논란이 전개될 것이다. 이에 계급적 좌파진영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의 조직화만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투쟁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현 시기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한다면, “대공장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계급적 투쟁의 주체로 서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강력한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며, “혁명적 정치와 조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는 사회주의 정치진영(계급적 좌파)의 ‘위기’이기도 하고.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대응은 계급적 좌파 정치의 혁신과 연대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제언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울산에서의 계급적 노동운동, 또 한번의 갈림길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편집인)
                                                                                                     2004년 12월 11일


12월 9일 오후 2시반 SBS 인터넷 속보를 시작으로 하여 방송3사를 비롯한 각 언론사들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8천여명 전원이 노동부에 의해 불법파견으로 판정되었다는 뉴스를 앞 다투어 보도한다.

지난 8월 20일 현대자동차 노조가 울산공장 101개 업체 및 전주공장 12개 업체에 대하여 불법파견 진정을 제기한 것에 대한 판정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있었지만, 노동부는 아직 공식 발표를 하지 않은 상태다. 사실은 노동부가 진작 판정 결과를 내려놓고도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어왔던 것인데, 판정 결과를 입수한 기자들이 노동부의 공식 발표를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보도를 해버린 것이다.

노동부가 진정 결과를 발표해야 할 법정 기한은 애초 10월 19일이었으나 그동안 차일피일 연기를 거듭하여 거의 두 달을 늦춰왔다. 현자비정규노조가 먼저 진정을 제기했던 12개 업체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꼼꼼한 현장조사를 거쳐 9월 22일에 내린 바 있기에, 거의 동일한 조건에 있는 업체들에 대한 판정이 이토록 늦추어질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판정 결과 발표에 대한 노동부의 ‘부담’ 혹은 결과 발표를 막거나 최대한 늦추려는 누군가의 ‘압박’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대규모 불법파견 판정을 보도한 12월 9일자 MBC 9시 뉴스데스크는 이어 “노사 모두 당혹”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MBC 9시 뉴스데스크] 노사 모두 당혹

 

● 앵커: 그러나 노동부의 이번 판정에 기업들은 현장 사정을 잘 모르는 결정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정규직화 문제입니다. 전재호 기자입니다.

● 기자: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는 근로자 3명 가운데 1명은 현대자동차 소속이 아닌 하청업체 직원입니다. 이들은 정규직과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부는 이를 불법파견이라며 고발했습니다.

  또한 현대자동차는 하청업체 직원의 임금과 근무시간 등을 직접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노동부가 불법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런데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처럼 하청업체 인사와 노무에 사실상 개입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법파견을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노동부의 이번 결정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 아니냐며 기업들은 반발하고 있고 대기업 노조들도 의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불법을 그만두려면 비정규직을 정리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고민입니다. 울산지역의 노조가 워낙 강하기 때문입니다.

  노조도 속사정은 대기업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바뀌는 규모가 크다면 고용불안이 가중된다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부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현실을 감안해 법대로 처리한 것이 정당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아 노사정 간에 마찰이 불가피합니다.

  MBC뉴스 전재호입니다.

 

 

노사 모두 당혹!

기자는 정곡을 찌른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전혀 잘못 이해한 것인가?

 

9월 22일 첫 번째 불법파견 판정이 나왔을 때, 현대자동차노조가 포함된 <현대차 연대회의>는 즉각 “불법파견 판정받은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화”를 요구한다며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그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는 상황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간의 속사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2004년 3월초 금속연맹 비정규직 사업 관련 수련회에 참석한 현대자동차노조 상집간부는 “현대자동차에는 불법파견이 없다”는 용감무쌍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금속연맹이 2004년에 불법파견 릴레이 진정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현대자동차를 핵심 사업장으로 설정하려는 것에 강한 반대의견을 제기한 사실이 있다.

이후 현대자동차노조는 금속연맹의 불법파견 집단진정 사업 추진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5월 24일 열린 금속연맹 중집에 참석한 현대자동차노조 임원은 5월 27일로 예정된 금속연맹·현자비정규노조·아산하청지회 공동의 불법파견 집단진정 및 기자회견을 중단하라고 매우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현대자동차노조의 강한 압력을 받은 금속연맹이 집단진정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으나, 비정규노조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집단진정 및 기자회견이 겨우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4년 8월 15일자 <매일노동뉴스>에는 “현대차 불법파견 현장조사 정규직 노조가 막고 있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5월 27일 금속연맹과 현자비정규노조·아산하청지회가 공동으로 불법파견 진정을 제기한 것과 관련한 현장조사가 7월 29일부터 시작되었으나 노동부 조사관들이 사무실에서 서류검토만 할 뿐 현장에 직접 나가지를 않는 상황이 보름 넘게 계속되어 그 이유를 따져 묻자 정규직 노조가 현장조사를 막고 있으며 “현대차노조가 계속 조사를 막을 경우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한다고 보고 고발조치하는 것까지 고려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 현자노조의 반론이 있지만, 이 기사가 나간 직후인 8월 17일 오후 전격적으로 현자노조가 8월 20일자로 101개 업체 불법파견 집단진정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하게 되고, 8월 18일부터 노동부 현장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겨 놓는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기자의 상황 오판을 입증하는 것으로 사태가 전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연치 않은 오해들도 모두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만큼 ‘현대자동차 1만여 사내하청의 불법파견 판정’이라는, 이번에 우리가 맞닥뜨린 지점은 한국 노동운동의 향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계급적 단결로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정면돌파 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현대자동차를 넘어 한국 노동운동 전반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구축해 내는 더없는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된 노동운동의 후퇴를 일거에 뒤집어엎는 새로운 도약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기자의 진단대로 정규직노조가 불법파견 판정을 내심 부담스러워 하고 정규직화 투쟁을 회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시늉만 내는 식으로 나간다면, 상황은 매우 힘겹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물론 치열한 투쟁 속에서 결국 얼마간은 뚫고 나아가는 부분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토대 위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의 전통과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갈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힘겹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갈림길에 서기까지,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울산 노동운동은 지난 시기 여러 차례 중요한 갈림길들을 통과해 왔다. 매우 결정적인 패배와 배신도 있었고, 폐허에서 움터나는 새싹처럼 소중한 전진도 있었다.

큰 전환점이 되었던 1998년 이후 현 시기까지 과정을 요약하여 돌아봄으로써, 지금 맞닥뜨린 또 한번의 갈림길이 갖는 의미와 올바른 선택의 방향을 함께 정리할 수 있도록 해보자.

 

 

(1) 첫 번째 갈림길 : 정리해고 저지 투쟁의 패배 (1998년)

 

이른바 IMF 경제위기로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던 1998년 여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종업원 4만 6천 명 (조합원 3만 4천 명) 가운데 1만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는 사측에 맞서 36일간의 전면파업을 전개한다.

당시 노동조합은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경에 의한 일자리 나누기’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많은 조합원들이 사측의 정리해고 위협에 굴복하여 이른바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강제퇴직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였지만, 그 못지않게 많은 조합원들이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노동조합의 깃발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뭉쳤다.

결국 사태는 정면충돌로 치달았다. 사측은 정리해고 대상자 4천여 명에 대한 개별 명단 통보에 나섰고,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의 폭발적인 열기를 바탕으로 노조는 단일 자동차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울산공장을 완전 장악한 채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유난히도 심했던 장마철 폭우도 태풍도 5천여 명 파업대오를 흩트려 놓지 못했다. 울산을 새까맣게 물들였던 1만 명 이상의 전경병력도 오히려 천 명 정도 늘어난 파업대오 전체가 쇠파이프와 온갖 비장의 무기들로 무장하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현대자동차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아니 초국적 자본 및 김대중 정부까지 버티고 있는 총자본에 맞서 정리해고를 저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러한 순간들에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정리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불타고 있었으며, 그러한 희망의 중심에는 노동조합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패배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파업대오 대다수의 완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최소화된 정리해고’란 이름으로 277명의 정리해고 수용을 요지로 사측과 합의를 도출했다. 마지막까지 투쟁에 함께 했던 나머지 정리해고 대상자 2천여 명은 1년 6개월의 무급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 년 후에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당시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정부여당을 대표하여 적극적인 중재(?)에 나선 결과였다.

8월 24일 아침, 노동조합 사수대가 노동조합 집기들을 끌어내서 불태우고 수천 명 파업대오가 황망한 모습으로 현장을 빠져나가며 그렇게 파업은 끝났다. 파업이 끝나고 1주일 후 노사합의가 조합원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반대 63.6%)되었지만, 그러나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추인되지 않은 노사합의는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되었다.

그렇게 조합원들은 패배했다.

그런데 그 패배는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다. 수천 명 조합원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또 가족들까지 나서 그렇게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결국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매우 뜻깊은 교훈(?)을 포함하는 패배였다.

특히 파업투쟁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던, 즉 스스로의 실천과 참여로 민주노조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수천 명 조합원 가운데 대부분은 설령 파업이 공권력에 의해 박살날지언정, 노동조합이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을 스스로 폐기하는 것을 결코, 정말로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정리해고를 수용한 노동조합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부정해 버린 것이었다.

결국 1998년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서 노동조합과의 ‘약속’에 인생을 걸었으나 패배한, 그것도 노동조합 지도부가 약속을 파기하고 배신함으로써 패배한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회의와 절망이 깊이깊이 아로새겨졌다.

 

 

(2) 두 번째 갈림길 : 사내하청 대거 투입에 대한 노사합의 (2000년)

 

1999년을 지나며 현대자동차는 내수와 수출 공히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판매량을 회복해 나갔다. 생산량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회사는 다급해졌다. 1년 6개월 무급휴직자들이 1년여 만에 현장으로 조기 복귀했다. 도저히 복직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정리해고자들도 (그들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투쟁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상황의 변화에 힘입어 생각보다 빨리 복직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태부족이었다. IMF 이전 즉 1997년 수준 이상의 생산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으나, 1998년에 희망퇴직으로 8천여 명을 쫓아냈고 그 이전 1997년에는 5천여 명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소리 소문 없이 쫓아낸 상태였다. 불과 2년여 만에 1만여 명 이상의 인력이 다시 충원되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1998년의 노사합의에 따르면 희망퇴직자를 우선적으로 재고용(리콜)해야 했다. 그러나 사측은 1998년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기존의 근속마저 인정해 주게 될 정규직을 재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빈 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사측에게 있어서는 사태가 거기까지 진행되어야 1998년이 완성되는 셈이었다.

문제는 노동조합이었다. 사측의 입장에서 급격한 생산 확대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된 상황은,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1998년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호조건이 열린 셈이었다.

 

1) 정리해고-무급휴직-희망퇴직으로 밀려났던 노동자들의 현장 복귀 및 그래도 부족하면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도록 관철시킨다.

2) 불과 2년 만에 재고용하게 될 노동자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강요했던 사측으로부터 강도 높은 사과와 반성을 받아낸다.

3) 향후 또다시 고용위기가 왔을 때 노동조합이 제기했던 바처럼 고용보장의 대전제 위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경에 의한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도록 사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아낸다.

 

이것이 마땅히 노동조합이 가야 할 길이었다. 설령 힘의 한계가 있어 온전히 관철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노동조합이 내걸고 힘닿는 데까지 싸워야 할 방향이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노조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노동조합 위원장은 전체 조합원 집회에서 핏대를 올리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사내하청을 들여 놓겠다”는 널리 알려진 발언을 서슴없이 뱉어내고, 아직 1998년의 패배가 안겨준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현장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수만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을 뿐) 집행부의 기조를 사실상 수용한다.

결국 2000년 6월 현대자동차노조는 현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부족한 생산인력은 비정규직(사내하청)을 대거 투입하여 해결하기로 사측과 합의한다.

이른바 ‘완전고용보장합의서’라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이 합의서는 향후 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정규직의 완전 고용을 보장한다는) 점을 내용적으로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희망퇴직으로 밀려나간 옛 동료들의 재고용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하는 것이었다.

 

 

(3) 세 번째 갈림길 : 7·5 총파업 철회 (2001년)

 

효성·태광·민주버스를 비롯한 다수 중소사업장들의 장기파업, 울산지역 전체를 휘감았던 격렬한 가두투쟁과 연대파업.

2001년 울산총력투쟁은 IMF 시대 이후 파상적으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집중되어 터져 나온 투쟁이었다.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효성 투쟁을 계기로 10여년 만에 되살아 난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활발한 연대’야말로 2001년 울산총력투쟁의 핵심 동력이었다.

특히 하청화 저지 및 노조탄압 분쇄를 위해 돌입한 효성노조의 파업투쟁을 공권력이 짓밟던 6월 5일, 자발적으로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튀어나와 7백여명이 밤을 새고 2천여명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산 시내 곳곳에서 가두투쟁을 전개하던 당시의 열기는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

솟구치던 투쟁의 열기는 6월 12일 화섬3사 및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으로 발전하였고, 6월 20일경 ‘울산노동자 총파업’이 민주노총 수준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는 국면으로 나아간다. 현대자동차노조가 파업을 결의하면서 울산 총파업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7·5 총파업이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노조는 7·5 총파업을 직전에 철회하며 전선에서 이탈해 버렸고, 이는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사실상 총파업은 무산되었다. 승리적인 마무리를 눈앞에 두었던 효성과 태광은 7·5 총파업의 무산으로 인해 대책없이 장기파업으로 치닫는데, 한 번 무너진 연대투쟁의 전선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다. 결국 효성과 태광은 수십·수백명의 해고자가 수백억의 손배가압류를 얻어맞고 현장에는 민주노조의 뿌리가 뽑히는 비참한 패배를 맞이한다.

IMF 시대 이후 결정적인 기회로 다가왔던 ‘2001년 울산총력투쟁’은, 만일 승리했다면 울산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고양으로 연결되었을 것이지만, 패배한 결과 효성·태광 등 주요한 노조들을 붕괴시키며 울산 노동운동을 매우 위축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저버린 ‘대공장 실리주의’의 전형이라 할 현대자동차노조의 7·5 총파업 철회는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 패배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5 민주노총 총파업의 핵심 동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현대자동차노조는 7월 4일 확대운영위원회 결정으로 총파업 참여를 철회했다. 현대자동차노조의 총파업 철회 결정은 민주노총 7·5 총파업에 막판 찬물을 끼얹으며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6월 5일 효성노조 폭력경찰 투입 이후 전개된 격렬한 가두투쟁에는 현대자동차노조의 간부 및 현장 활동가들도 어느 노동조합 이상으로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두투쟁에 한 번 이상 참여한 인원이 적어도 1천명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자동차노조는 8일, 12일, 20일에는 잔업거부 지침을 내리며 지역 집회에 조합원의 참여를 조직하기도 했다.

6월 21일 현대자동차노조 임시대의원대회는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 쟁발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날 현대자동차노조의 만장일치 쟁발결의는 다음날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건 7월 5일 정치총파업을 결의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6월 29일 현대자동차노조는 확대운영위를 열어 7월 5일 총파업 돌입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총파업 관련 세부방침은 7월 3일 확대운영위원회를 다시 열어 결정하기로 하고, 이날 회의에서는 7월 2일부터 6일까지 상집간부 철야농성, 대소위원 출근투쟁, 임원 현장순회, 사업부별 교육홍보 및 보고대회 등 총파업 조직을 위한 실천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렇게 확대운영위에서 총파업 돌입이 확인되는 ‘공식적인’ 상황과 달리 과연 현대자동차노조가 총파업 돌입을 결행할 수 있을지 우려를 갖게 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외주 모듈화로 인한 고용불안 때문에 합리화 공사 저지 투쟁을 전개 중이던 승용1공장 대의원회가 6월 27일, 총파업 기간이 포함되어 있는 7월 1일부터 17일까지 물량조절 및 합리화공사를 위한 휴가를 가기로 회사와 전격 합의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합의로 승용1공장 조합원과 연관 부서 조합원 등 5천여명이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조 조합원의 약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6월 26일 총파업 결의를 다지기 위해 열린 민주노총 울산본부 임시대의원대회에 현대자동차 노조 소속 대의원들의 참석이 매우 저조했던 것, 6월 27일과 30일에 있었던 지역 집회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본조 조합원들의 수가 100명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 것도 ‘총파업 불참’의 전조를 보여주는 징후들이었다.

7월 3일 열린 현대자동차노조 확대운영위는 애초 총파업 관련 세부방침을 확정하기 위한 회의였으나, 갑작스럽게 총파업 철회 주장이 임원들로부터 제기되면서 한차례 정회를 거치며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확대운영위는 총파업 결행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회의를 갖게 되었다.

확대운영위 논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현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7월 4일 아침에는 “대의원 만장일치 쟁발결의, 운영위는 번복할 수 없다”(4공장 소위원회), “확대운영위는 총파업을 결행하라”(자주회) 등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7월 4일 10시부터 다시 시작된 확대운영위는 여전히 논란을 거듭하다가 오후 1시경 마침내 총파업을 철회하고 간부파업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확대운영위가 총파업 철회 결정을 내린 직후부터 현대자동차노조의 인터넷 자유게시판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4일 자정까지 12시간 동안 무려 400개가 넘는 글이 쏟아져 올라와 확대운영위의 총파업 철회 결정을 성토했다.

7월 5일 아침 현대자동차노조의 상집간부들은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배포했다. “이 투쟁을 우리가 전부 떠안고 가기에는 노동조합 공백기가 또다시 올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위원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7월 5일과 6일 확대운영위의 총파업 철회 결정을 성토하는 유인물과 대자보가 현장에 쏟아졌다.

“7월 5일 총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한 결과와 조합원 대중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9대 집행부를 출범시킨 조직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민투위, 5일)

“약속을 저버리면 신뢰는 없다.”(민노투, 5일)

“운영위 결정 무효화하고 총력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투쟁지도부 구축을 위해 집행부 총사퇴를 충심으로 촉구한다.”([다시 머리띠를 묶으며], 5일)

“전국 노동형제에 대한 배신행위… 7월 총력투쟁에 현자노조는 전면에 나서야 한다.”(2공장 대의원회, 6일)

“집행부 운영위원 총사퇴와 7월 민주노총 총력투쟁 책임질 비대위를 구성하자.”(활동가 44명 기명 유인물, 6일)

결정적인 순간에 현대자동차만의 실리를 찾기 위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저버리자고 했던 위원장의 ‘결단’은 현장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비록 총파업은 무산되었지만, 현장 속에 노동운동의 희망은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4) 잇따른 패배와 배신이 낳은 결과들

 

잇따른 갈림길에서 반계급적 선택을 거듭한 결과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2000년대 초반 울산지역의 현장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2001년 투쟁의 패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화섬 사업장 중심의 남구 노동운동 전반이 거의 몰락했다. 1990년대 후반 급격하게 후퇴한 현대중공업의 동구 노동운동 또한 노조 비리 사건을 계기로 하여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현대자동차와 몇 개의 부품협력사가 있는 북구 노동운동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외양과 달리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의 실상도 깊이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과 비참한 노동조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사내하청)이 급격하게 확산된 것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와 사측의 합의는 명목상 IMF 직전 비정규직(사내하청) 비율인 16.9%까지 비정규직 투입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 투입이 개별 선거구별로 어떤 통제장치도 없이 수시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불과 1년여 만에 비정규직이 1만여 명(전체 노동자의 30%) 수준으로 급격히 확대된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임금, 작업복·안전화 같은 것들에마저 적용되는 온갖 차별, 산재는 엄두도 못 내고 월차 한번 마음 놓고 쓰지 못하는 억압, 심지어 수시로 욕설과 반말이 횡행하는 비인간적 대우. 게다가 정규직 노동자들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느라 겪어야 하는 노동강도에서의 차별···.

비정규직이 겪어야 하는 온갖 차별과 비참한 노동조건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결코 하나의 계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 조직화되지 못했던 비정규직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현장의 1/3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의 현실이 방치되고 은폐되는 상태가 3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2) 반계급적인 ‘조합원 정서’의 포로가 되어, 과로사·근골격계·모듈화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정규직

자기 부서에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덜 수 있다는 생각,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그들에게 넘기고 정규직은 상대적으로 편한 공정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 1998년의 패배로부터 상처 입은 정규직 조합원들의 마음은 이기적인 유혹 앞에 급속하게 허물어진다.

급기야 새롭게 인원을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전환배치를 통해 정규직 조합원을 받으려는 대의원보다는 비정규직을 들여오는 대의원이 다수의 조합원들 사이에서 ‘능력 있는’ 대의원으로 평가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규직 투입을 고집하다가 조합원들과 심하게 다투는 대의원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심지어 그로 인해 차기 대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일마저 드물지 않은 사건이 된다.

활동가들 스스로가 애초에 충분히 원칙적인 관점과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조합원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비정규직을 고용보장과 노동강도 완화의 도구로 여기는 반(!)계급적인 태도가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활동가들은 이른바 ‘조합원의 정서’에 갇힌 포로가 되어갔다.

같은 현장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고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이들의 고통을 함께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3년여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현대자동차는 매년 생산과 판매에서 신기록을 달성하며 순이익만 1조원을 훌쩍 넘기면서 순풍에 돛단 듯 질주를 거듭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지점에서 계급적 관점과 태도가 무너진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문제 앞에서도 대단히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사상 최대의 호황 속에 생산라인이 정신없이 돌아가게 되자 주야맞교대로 주당 60~70시간을 뛰게 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과로사로 1년에 10여명의 노동자가 세상을 떠나고, 근골격계 골병 환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실질 노동시간 단축’이나 ‘노동강도 완화’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더 많은 임금과 성과급을 따내는 것에 철저히 갇혀 버렸다. 신차 투입에 따른 협상은 철저히 회사 입맛대로 외주 모듈화를 확대하고 라인 속도를 높여 비정규직을 추가 투입하는 양상으로 관철되어 나갔다. 노동조합 선거는 누가 더 많은 돈을 챙겨줄 것인지 경쟁적으로 목표치를 제시하는 이야기들로 도배가 되어 버렸다.

그 즈음 어느 진보적 월간지가 “울산은 이제 노동운동을 포기하는가?”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지만, 활동가들은 좀처럼 그들이 빠진 수렁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게 된 ‘조합원의 정서’라는 수렁에서 말이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1998년의 패배가 안긴 깊은 상처에다가 주요한 고비마다 계급적 배신을 거듭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차곡차곡 쌓였다. 노동조합의 외양은 그럴듯하게 유지되었지만, 정규직 조합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노동조합의 위상은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고용 위기 앞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은 이제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순익만 1조원이 넘는 ‘매우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정규직 조합원들은 언제 잘려나갈지 모른다는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역설 속에 살게 되었고,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큰 만큼 ‘벌 수 있을 때 더 많이 벌어야 한다’면서 더욱 돈에만 매달리는 악순환에 빠져 들었다.
이것이 길게 보아 살 길이 아니고 잘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어차피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이라면 (그나마 벌 수 있을 때) 돈이나 잘 벌게 해주라는 쪽으로 다수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마냥 흘러갔다. 여기에 비정규직을 같은 노동자로 여기지 않는 이기적인 심성들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결합되는 양상이었다.

패배감, 실망감, 이기적인 유혹 등으로 범벅이 된 반(!)계급적인 ‘조합원의 정서’는 노동운동과 활동가들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더욱 고착화하는 가운데 이기적이고 돈밖에 모르는 개인주의를 점점 강화하며 정규직 노동조합의 밑뿌리를 파괴하는 양상으로 무섭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밑바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으로 인해, 노동조합은 과로사·근골격계·모듈화 등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실질적인 대응을 전혀 해내지 못하면서 마냥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3) 내면의 정당성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현장 활동가들

사태는 심각한 악순환의 구조로 전개되었다.

해고와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강렬한 신념과 치열한 실천으로 10여년을 살아왔던 현장 활동가들, 조합원들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활동가들은 이제 조합원을 이끌고 나아갈 방향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조합원의 정서’에 위압당한 활동가들이 갈수록 원칙적인 태도로부터 멀어져 가면, 그런 활동가들을 바라보는 조합원들이 더욱 회의와 환멸을 느끼고 보수화되어 가는 그런 식이었다.
전국 최강의 노동조합이라는 외양은 유지되었지만, 여기저기 곳곳으로 갈라진 틈은 점점 더 깊고 넓어져 언제 송두리째 허물어져 버릴지 모르는 상태로 치달아가는 그런 세월이었다.

 

 

(5) 네 번째 갈림길 : 비정규직의 주체화 (2003~2004년)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속 업체 관리자로부터 아킬레스건을 절단당하는 ‘식칼테러’를 당한다. 그는 업체 규정대로 5일 전에 월차사용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자 항의를 했는데, 비정규직 주제에 감히 권리를 주장한 대가로 관리자로부터 심하게 얻어맞고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항이라고 느꼈는지, 관리자가 깡패들을 데리고 병실을 찾아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세 번 그어놓고 간 것이다.

법정 최저임금을 넘나드는 극심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높은 노동강도, 파리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극심한 고용불안, 기본적인 임금이나 성과급은 물론이고 명절 휴가비나 선물 같은 것에서조차 극명하게 대비되는 차별대우, 막말과 횡포가 만연하는 억압적인 현장 분위기.

그렇게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마저 받지 못하면서도 3년여의 세월 동안 그저 숨죽이고 살아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으나, 식칼테러의 충격은 마침내 그들을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다.
아산공장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당황한 현대자동차는 해당 업체 계약해지 및 소속 노동자 전원의 신규업체 고용승계를 약속했다. 일주일 후 아산공장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아산공장의 사건들은 현대자동차의 주력 생산거점인 울산공장에도 바로 영향을 미쳤다. 한 달 후 울산공장에서도 ‘비정규직투쟁위원회’가 공개적으로 설립되었고, 다시 두 달 후인 7월초에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울산공장에서도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렇게 비정규직 노조가 출범하고 1년 정도는 생존을 둘러싼 투쟁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튼튼한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 채 비정규직 대중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소수의 과감한 결단으로 출범한 노조였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이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비정규직 대중이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규직 노조가 노조신문에 비정규직 노조 출범을 사실상 반대한다고 선언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맞고 번복하는 소동도 있었다. ‘힘을 가진’ 정규직 노조의 비협조적 태도에 실망한 비정규직 대중의 분위기가 움츠려 들면서 결국 비정규직 노조의 조직률은 10%선(1천명)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태로 정체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는 비록 소수지만 해고와 구속을 비롯한 온갖 탄압에 맞서 과감하고 끈질긴 투쟁들을 전개하면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1년을 넘어선 2004년 중반 이후 비정규직 노조는 의미 있는 승리와 성과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6월 24~25일에는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2,200여명의 비정규직 대중을 참여시켜 냈다. 7월 1일 실제 파업은 50여명 소수의 참여로 실패했지만,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이 종결된 이후 사내하청 처우개선에서 제외된 2·3차 하청 노동자들이 7월 16일 독자파업과 철탑농성을 전개하여 사실상 동일적용을 관철시켜 내며 정규직 노조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목표를 달성해 냈다.

곧이어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노린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안기호 위원장의 38일 단식을 비롯한 두 달여의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6개월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응 끝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정을 끌어냄으로써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대중의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갈 발판을 마련하였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총력투쟁본부로 전환한 현자비정규노조는 10월말부터 11월초 사이에 업체별 간담회를 대대적으로 조직한 데 이어, 11월초중순에 각 사업부별로 보고대회를 개최하여 각 사업부 보고대회에 주야간 각 조별로 100명 내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집결시켰고, 이어 11월 24일 및 12월 1일 두차례 울산공장 본관 항의집회를 개최하여 200~3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12월 1일 제2차 본관 항의집회는 3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결하여, 노조 설립 이래 1년 5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명실상부한 대중집회를 성사시키게 되었다.

 

한편 울산 노동운동에서 2003년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해였다. 2003년 이래 최근까지 울산 지역에서는 현자비정규노조, 현중하청노조, 울산건설플랜트노조, 구몬학습지노조, 자치단체비정규직노조 등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이 잇달아 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연대 또한 완연히 비정규직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미 2000년대에 들어설 무렵 ‘비정규직’이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일반적인 존재형태로 되어 버렸다면, 이제 바야흐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6) 또 하나의 갈림길 - 준비되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단’

 

그런데 지난 1년 6개월여 동안 현대자동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본격화하는 국면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은 자기 방향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비정규직을 고용보장의 도구로 인식하는 반(!)계급적 태도’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연대’라는 양 극단 사이를 오가며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조직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늦게나마 비정규직 대량 투입이 몰고 온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며 조금씩 반전을 모색하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 노조가 투쟁 속에서 성장해 오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지원하고 연대한 정규직 활동가들이 없었던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자동차 정규직 활동가들에게 노조를 설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대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실질적인 계급적 연대에 나선다는 것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당혹스러운 과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로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단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들이 합의했던 사내하청 투입을 놓고 노동부마저 ‘불법’이라고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비정규직(사내하청)을 고용보장과 노동강도 완화의 도구로 여겨 왔던 지난 4년여의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방향 재정립이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노동운동’을 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시대의원대회가 있던 20일 아침 만난 전직 노조간부는 현재의 상황을, 전환을 위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국면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 집행부와 전직 위원장들까지 나서서 불법파견을 사용한 것을 노조가 합의 또는 묵인해 준 사실에 대해서 ‘대국민 사과’를 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지도부들이 ‘대오각성’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아 우리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만들어지고 실리주의니 뭐니 해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선택을 지지하고 따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전직 노조간부’의 고민처럼, 지금 현대자동차노조는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국면에 놓여 있다.

 

아마 다음 주 중으로는, 울산공장 101개 업체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이 공식화될 것이다. 현자비정규노조·아산하청지회·전주하연투 등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주체들은, 울산공장의 전면적인 불법파견 판정 이후에도 여전히 현대자동차가 정규직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생산타격을 포함한 총력투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현대자동차노조의 태도가 어떠하든 비정규직 주체들은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비정규직만의 독자적인 투쟁으로 전개된다면 그 위력은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현대자동차노조가 명확한 결단을 내린다면, 1만여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그동안 쌓인 분노들을 화산처럼 폭발시킬 것이다.

 

도저히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현대자동차노조는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과감한 반성과 대전환을 통해 전진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중핵으로 다시 자리 잡을 것인가,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하지 못함으로써 고립과 파탄의 길로 치달을 것인가?

 

비관과 희망이 교차하는 또 하나의 갈림길에서, 한국 노동운동 전반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구축해 내는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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