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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김수행1998

<공산당선언>과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뉴스플러스』, 1998년 6월 18일호, 동아일보사

김 수 행 (서울대 교수. 경제학)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으로서 1847 년 12월에서 1848년 1월 사이에 쓴 글이다. 마르크스가 30살이고 엥겔스가 28살 때의 일이다. 비록 길이는 짧지만 (우리말 번역서는 35쪽 안팎), 이 책만큼 마르크스 사상을 널리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한 책은 없다.

 

 『선언』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헌, 4.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선언』은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 경쟁, 이윤 추구에 힘입어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하고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생산력을 놀랄만큼 발달시키고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인정한다.

 

  "부르주아지는 100년도 채 못되는 그들의 계급 지배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했다. 인간을 위해 자연력들을 정복한 것, 기계류, 화학을 공업과 농업에 응용한 것, 기선 항해, 철도, 전신, 농업경작을 위해 대륙 전체를 개간한 것, 하천의 운하화, 거대한 주민들".

 

  그러나 『선언』은 자본주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투쟁은 자본주의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서로 마주섰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는데, 이 투쟁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재편되었든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했다".

 

  둘째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계급이 점점더 숫적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단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곤 임금노예라는

'쇠사슬'뿐이지만 얻을 것은 새로운 세계 전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본주의에서는 주기적

으로 반복하여 경제위기 또는 공황이 발생하며, 이 경제위기에서는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함

으로써 공장과 기계는 일을 멈추고 쉬지 않을 수 없고 노동자는 대규모로 실직하여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경쟁 및 이윤 추구가 더 이상 생산력을

발달시키거나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

지배계급은 공장이나 기계나 토지 등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

고, 생산의 목적을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로부터 주민들의 욕구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변경시키며, 무정부적인 경쟁 대신에 계획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언』은 비밀결사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궁극목표를 천명할 뿐 아니라 매일매일의 당면과제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토지 소유의 철폐. 2. 고율의 누진세. 3. 상속권의 폐지. 4. 국가자본과 배타

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신용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 5. 통신수단과 수

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 6.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과 생산수단을 증가시킬 것.

7. 모든 사람에게 노동할 의무를 부여할 것. 8. 농업과 공업의 결합. 농촌과 도시의 차이를

점차로 철폐할 것. 9. 모든 어린이에게 공공의 무상교육을 제공할 것. 등등.

이상이 『선언』의 내용이다. 비록 30살에 쓴 글이지만, 그 내용은 49살에 쓴 『자본론』

제1권이나 67살에 쓴 『고타강령 비판』에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선언』의 내용은 마

르크스의 생애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선언』이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다. 70여년 동안 유지되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함으로써, 자본주의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든가 역사는 자본주의와 함께 종말을 고

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타도를 외친

『선언』은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먼저 소련과 동구 등 현실 사회주의가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였는가라는 질문

을 던질 수 있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국유와 계획경제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나 억압을 철폐하고 주민들의 욕망이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는 지상 목표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경제를 계획적으

로 운영했지만, 정부 관료나 기업 경영자가 모든 주민이나 일반 근로자를 억압하고 지배했

던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언』의

공산주의(또는 '새로운 사회')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선언』의 현재적 의의를 살펴 보자.

첫째로 선진자본주의국에서는 1980년대 이래 복지국가의 제도들이 점점더 해체되고 있다.

학교와 병원이 모든 주민들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제는 무료 서비스가 크게

줄어 들면서 사설 학교와 사설 병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주민들의 욕망

이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원리가 퇴보하고 자본가의 이윤 추구가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는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경제위기나 공황에 부닥치고 있다.

1974-75년에는 제1차 석유가격 폭등으로 세계 전체가 위기에 빠졌고, 1981-82년에는 제2차

석유가격 폭등으로 위기에 빠졌으며, 1987년 10월에는 세계 전체의 증권시장이 1929년의 주

가폭락보다 더 큰 폭락에 직면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타이, 인도네시아, 한국이 경제위기

에 빠졌고, 일본은 장기적인 불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나라들

이 모두 경제위기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반복하여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언』의 관점

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위기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도 경제위기가 재벌 때문에 발생했다든지,

노동운동 때문에 발생했다든지, 정경유착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

해 한국의 경제위기는 한국적인 특수사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일반적 속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적인 특수사정이 경제위기의 발생시

기나 발생형태나 계속기간이나 탈출형태를 규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셋째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

이라는 『선언』의 관점은 현재 더욱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

에 노동자계급의 세력이 매우 강력하여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를 철폐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고용을 보장하며, 실업자의 생존과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할 수 있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로 변

혁될 것이다. 사실상 1950-80년의 스웨덴이 그러한 유형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동운동이 패

배하고 IMF와 정부 및 재벌이 일방적으로 승리한다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실업자의 격증,

빈부격차의 심화, 마약과 범죄의 격증,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폭동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넷째로 현재 자본은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이동하기 때문에, 1848년의 『선언』은 자본의

세계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

는 자본의 가치증식욕이 무한하기 때문에 자본은 모든 나라들에 침투할 뿐 아니라 모든 나

라들의 법률이나 조세제도를 동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블루라운드나 그린라운드 등도 예측한 것이다. 또한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하면 노동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국의 노동자계급

은 당연히 맨 먼저 자기 나라의 지배계급을 끝장내야 한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

하라".

『공산당선언』은 150년전의 유물이 아니라, 공황이 빈발하고 대량실업이 발생하며 소수

의 초국적 금융자본이 거대한 투기이득을 얻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최갑수, "[공산당선언]의 현재적 의의" 내용요약

{공산당선언}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지침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기대한 것은 독일에서의 부르주아혁명이었다. 그러나 1848년의 '유럽혁명'은 {선언}이 예상했던 부르주아혁명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끝내 혁명을 배신했다. {선언}과 1848년의 경험과의 괴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선 그것은 {선언}의 역사적 분석의 배경이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전자본주의적인 사회구성인 데서 비롯하였다. {선언}은 세 가지 내지 네 가지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을 가지며, 따라서 '먼 미래'(프롤레타리아혁명)와 '근접 미래'(독일의 자본주의적 미래) 그리고 '근접 과거'(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가 {선언}의 '현재'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 괴리는 저자들의 거시적인 역사관의 핵심인 이중혁명관 자체로부터 말미암았다. 영국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분석의 본보기였고 그들은 영국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상(像)을 그들이 얻어낸 곳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들은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겹쳐놓음으로써 부르주아지와 자본가계급을 동일시하고 혁명적 부르주아지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선언}의 현재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제대로 부르주아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게 {선언}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송가(頌歌)'로,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 포기해서는 안될 역사적 담보물로 보인다.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혁명의 역사적 과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 이룩될 것임을 웅변하고 있다. 세기말의 혼돈을 넘어 {선언}은 21세기가, 외적 팽창의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지양(止揚)의 해체력'을 발견하게 될 것임을 새롭게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선언> 150주년 : '잊기 위하여'!

이해영(연구위원)




인간은 단순히 말만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다. 그들은 쓰고 읽을 수 있는 존재이다. 문자가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먹고 사는 일이 아무리 엄혹하다 하더라도 다른 동물과 구분되고 나아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도 가능해 진다. 문자는 물론 밥이 아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인간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밥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는 존재 필수품이다.

이 고마운 문자로 쓰여진 지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인간답게 잘 살기'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 있다. 단연 여러 경전(經典)이 첫손에 꼽힌다. 그러나 성인의 경서에서 오늘날의 노동자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를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좀 더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세상 어디에 문제가 있으며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지를 좀 쉽게 알려 주는 문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노동자 세상'에 대한 소중한 꿈도 담겨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게다. 말하자면 노동자용 모험소설이라고 할 까?

청년기의 열정과 도전의식으로 가득찬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지금부터 150년 전이다. 사실 이런 류의 구조 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서는 역사적으로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당시 그 어떤 요즘 식의 공산당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좀 '쫀쫀하게' 평하자면 급진적인 국제 지식인 써클 내지 정파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새 세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이긴 하지만 한 때 세상을 바꾸어 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근대 이후 역사에서 이 짧은 팜플렛만큼 세상을 뿌리채 흔든 글도 드물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선언>의 중심사상에 그 이유가 있다.

첫째, <선언>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역사발전의 기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 부당하게도 - 무슨 결정론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만, 이 명제는 세상살이에 먹고 사는 문제의 엄중함과 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말만의 또는 머리속의 좋은 세상이 허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구조' 개혁의 사상이 확립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유관계의 재편을 포함한 사회의 발본적인 혁신 또는 구조 - 요즘말로 '시스템' - 의 개혁 과 교체 없이 노동자 생활의 근본적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선언>은 지금까지의 역사란 것이 그 어떤 달콤한 상부상조의 목가적 꿈의 세계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것도 먹는 계급과 먹히는 계급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세계였음을 보여준다. 이 서늘한 현실주의는 '노동자의 세상'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선언>은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선언>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제시한다. 요즘의 우리 말로 하면 한마디로 '정치세력화'이다. 그것도 단순히 군중이나 몇 몇 집단이 아니라, 전체 계급으로 조직된 정당의 불가피성을 주창한다. 그리고 모든 억압받는 계급과 사회 전체가 해방되지 않은 채, 노동자 자신만의 해방이 가능하지 않음을 <선언>은 강조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이 계급이기주의나 혹은 계급 로비주의와 무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선언>이 오늘날 다시 읽히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기념행사적인 데에 있지 않다. <선언>은 최근의 자본의 '세계화' 또는 이른바 '지구화'의 불가피성과 그 효과를 법칙적인 것으로 본다. 그 동안 체제경쟁으로 가리워 졌던 상황이 그 장막이 걷히면서 - 비교될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 150년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선언>의 대안은 바로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투쟁, 곧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이었다. 지구적인 자본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국적인 노동운동의 현실에 비추어 다시금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선언>과 '우리'사이에는 단지 15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뿐만 아니라, 좌절한 현존사회주의의 실험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 정당의 경험이라는 역사적 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이승과 저승처럼 결코 넘지 못할 그 무엇은 아닐게다.

<선언>이 발표된지 150년, 이제 잊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잊기 위하여', 먼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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