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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3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3

미국 노동자들의 산별노조 건설

미국이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기관차가 된다.

미국은 79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채권국이 되어 종전을 맞는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은 4년 이상 지속된 세계대전으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총 160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으로 전락한다. 세계대전이 세계 경제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이미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1907년부터 대중적인 ‘T모델’ 자동차를 개발·양산하여 자동차 보급 속도를 놀랄 만큼 빠르게 만든다. 1930년까지 등록된 자동차 수가 유럽 전역에서 520만 대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2650만 대나 된다. 포드는 대량 생산을 위해 부품을 규격화하고 작업을 기계화하여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자동 운반 장치를 도입해서 모든 부문의 생산 활동을 일관 조립 작업으로 통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노동 강도가 높아진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자동차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강철·기계·유리·고무·전기·석유·건설 산업이 1920년대의 산업 발전을 선도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투기 열풍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미국에 이어 독일·영국·프랑스에서도 1920년대부터 포드주의가 확산된다. 이에 따라 유럽 주요 국가의 산업은 1925년에 전쟁 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고 1920년대 후반에는 패전국 독일까지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

1920년대에는 중요한 기술 발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전에 발명했던 기술들을 완성하고 상품 생산에 응용함으로써 경제가 더욱 발전한다. 라디오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중에 군대에서 사용되었지만, 1920년대 초에 와서 일반인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곧 값싸고 다루기 쉬운 제품으로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200만 대씩 보급된다.

자본주의 예언가들은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포드가 사회주의를 격퇴시켰다. 사회주의는 난센스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다음의 두 시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확장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 뒤의 미국자본주의 시대, 이 시대에는 최신의 기술 진보를 토대로 무한한 확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제1의 시대에는 맑스와 라살레가 상징적이었다. 제2의 시대에는 포드가 상징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논한 번영과 공황이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순환적 발전이 들어맞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뿐이다.” “우리는 자유 경쟁과 시장의 맹목성이 지배하던 자본주의 시대를 대체로 극복한 시기에 있으며, 경제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경향을 총괄하여 렌쯔는 이렇게 비판한다. “개량주의 이론가들은 노동 조건에 대한 국가 통제의 증대,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 노조가 자본주의 국가의 보조 조직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집행 기관으로 변모한 것들을 가지고 경제상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 접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빠져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노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손실된 실질 임금을 만회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시애틀 노동자들이 1919년 2월에 먼저 파업에 나서자 5월에는 위니펙에서도 파업이 일어나고 9월에는 철강 노동자 36만 명이 전국 파업을 전개한다. 그러나 미국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이 파업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사보타지 한다.

1922년 말 50만 철도원의 파업이 패배로 끝날 즈음,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는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는데 협력한다면 노동자에게 큰 이익을 분배하겠다’고 제안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결국 임금이 자동으로 증대하고 노동 조건도 개선되며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도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노동총동맹은 1925년 대회에서 이 제안을 ‘새로운 임금 정책’으로 결정한다. 노조 관료들은 자본가와 손잡고 전진하는 노동자의 미래는 장밋빛이라며 ‘파업은 낡아빠진 방식으로서 노동자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목청을 높인다.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카버는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저축하여 산업을 점점 사들이고 있으며 그리하여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노조 지도부는 ‘영원한 번영’이라는 환상에 푹 빠져 오직 생산 증대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고 자본가의 이윤이 대폭 증대하는데도 실질 임금은 1923~26년 사이에 조금(2포인트) 밖에 오르지 않는다. 임금 상승의 혜택도 거의 숙련 노동자에게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시간·노동강도가 오히려 악화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은 산업 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런데 자본가에게 ‘산업 합리화’란 전투적인 활동가들을 대량 축출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임금 총액을 끊임없이 삭감하고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들은 회사가 자금을 대어 노조를 조직하고 회사편인 사람을 간부 자리에 앉히는 ‘회사조합’을 대규모로 육성한다. 회사조합은 트러스트(독점) 산업을 미조직 상태로 두려는 술책의 하나로서 주로 기간산업에서 만들어진다. 회사조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200개뿐이었는데 1927년에는 900개(100만 명)로 증가한다. 이들 회사조합들은 밀정과 깡패들을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노조 운동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선다.

미국에서부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주식 시장에는 1600만 주가 넘는 매물이 쏟아져 나온다. 주가는 불과 3주 만에 50% 이상 폭락한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 말까지 1600억 달러 이상의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기간산업의 생산이 50% 감소하고, 5761개의 은행이 파산하고, 농업 생산물의 가격은 8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하락한다. 자본가들이 공황으로 인한 손실을 임금 인하나 대량 해고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모든 산업에서 임금의 45% 이상이 삭감되고 1933년 초까지 17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웃한 캐나다의 산업도 마비되어 100만 노동자가 실직한다. 독일에서는 공업 생산이 45%나 감소하고, 주급은 1929년 42마르크에서 1932년 21마르크(최저 생활비는 38마르크)로 하락하고, 1932년 8월에 완전 실업자만 522만 명에 달하고, 한 달에 3~4달러의 구제 기금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1700만 명에 이르면서, 국민 경제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진다. 영국에서는 공업 생산이 25% 감소하고 실업자는 1929년 116만 명에서 1932년 297만 명으로 증가한다. 영국의 공업 생산이 비교적 적게 감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 불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32년에 완전 실업자가 284만 명, 반실업자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프랑스 역시 1932년 6월에 실업자가 230만 명, 반실업자가 561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스칸디나비아국가들·오스트레일리아 등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공황은 (반)식민지에는 더 큰 충격을 미친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실업자 수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농업이 크게 파괴되고 기아가 도처에 확산된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산업과 외국 무역은 50~80%까지 감소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도 없어 인민들이 더욱 비참한 상태에 처한다.

국제 산업 생산은 1929년의 2/4분기에서 1932년의 2/4분기 사이에 42%나 하락한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금본위제가 파탄 나고 자본 수출이 정지된다. 국제 금융은 무질서에 빠지고 국제 무역은 65%나 감소한다. 세계의 실업자 수는 유례없이 증가하여 3~5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 대공황은 1933년부터 심각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지만 그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지속된다.

이 세계 대공황은 부분적인 원인에 의한 일시적인 경기 후퇴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구조 변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생산력은 1890년 이래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기술 혁신과 생산 과정의 재조직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높은 수준(미국은 5.9%, 독일은 4.3%)을 기록했다. 전쟁의 피해에서 유럽 국가들이 회복된 이후에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기는 했지만 산업 생산고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상품의 소비는 생산만큼 빨리 증가하지 않았다. 각 나라에서 국내 수요와 해외 수출은 이 기간을 통해 늘어나던 상품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특히 심각한 빈부 격차가 개선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의 구매력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생산력이 가장 빨리 발전했던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1890~1914년 사이에 매년 1.3%씩 밖에 증가하지 않은 데 비해 산업 생산고는 그보다 4배가 넘는 속도로 성장했고 이런 사정은 ‘번영’을 구가하던 192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상품의 공급 과잉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장기간에 걸친 생산력의 발전은 산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 위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강철·기계·자동차·전기·석유·화학 같은 새로운 산업이 높은 비율로 성장한 반면에 광업·조선·방직 같이 오래된 산업은 정체 내지 위축되었다. 농업은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주식 투기는 이와 같은 불균형 성장을 토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금융 기관의 신용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장기간 누적되어 주가 폭락을 계기로 한꺼번에 대공황으로 폭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대량 해고와 임금 인하에 반대하고 실업 구제와 사회 보장을 요구하면서 적극 투쟁에 나선다. 이에 따라 파업이 급증한다. 1929~32년 사이에 15개 나라에서 1만 8794건의 파업에 851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1468건은 영국, 2700건은 미국, 3601건은 프랑스, 1304건은 독일, 688건은 체코슬로바키아, 1889건은 일본, 1333건은 중국, 480건은 인도에서 발생한다.

루즈벨트가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다. 포드자동차에서만 8만 5천 명이 해고되고 오하이오 주의 5대 공업 도시에서만 1930년 1월부터 2년 반 동안 10만 가구가 퇴거 명령을 받는다. 자연 재해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적십자 구호 같은 구원의 손길도 오지 않는다.

좌파가 주도하는 노조통일연맹과 공산당은 1930년 3월 6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125만 명이 참가한 집회를 열어 ‘기아 행진’을 벌이고 7월 4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위원회를 조직한다. 전국실업자위원회는 주요한 활동의 하나로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는 활동을 벌인다. 이 활동으로 뉴욕의 경우 1932년 6월 30일까지 여덟 달 동안에 퇴거 명령을 받은 18만 5784가구 중에서 7만 7천 가구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부는 이 경제 위기의 원인을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애쓰고 의회는 1930년에 공산당을 조사한답시고 ‘피시 위원회’를 만든다. 자본가들의 폭력도 도를 넘어선다. 포드자동차 해고자들이 1932년 3월 7일 재고용을 요구하며 디어본시 공장으로 행진하자 공장 담 뒤에 숨어있던 포드 폭력단과 총잡이들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는다.

재향군인노동자연맹은 4월부터 ‘1차 세계대전 퇴역군인에 대한 연금 지불을 1945년까지 보류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재향군인의 무리가 국가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의사당과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아나코시아 저지대의 황무지로 몰려든다. 이들은 동굴·땅굴·오두막집·천막집에서 담요만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수가 7월에는 2만 5천 명에 다다른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다. 맥아더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기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고 이어서 방독면을 쓴 보병이 최루탄을 던지며 진격하여 퇴역군인들의 무리를 해산시킨다.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2년 여름부터 시작된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서민들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자 이때까지 사기와 요행으로 근근이 버티던 미국 경제가 완전히 침몰한다. 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주 전체의 3/4이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 인출을 연기시킨다. 대통령 취임식(1933년 3월 2일)이 있기까지 행정 기관 자금도 동결된다. 돈은 사라지고 임금도 지불되지 않는다. 학교도 문을 닫는다. 파산한 군중들이 텅 빈 예금기관 앞에서 울부짖고 식량조차 살 수 없어 대소동이 일어난다.

민중을 위한 뉴딜 정책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한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구제·부흥·개혁을 내세우고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승인이나 감독 아래 다시 설립될 때까지 모든 은행을 폐쇄하는 긴급은행법, 증권 시장에 광범하게 퍼져있는 사기·부정과 타인의 돈으로 투기하는 행위를 막는 법률들, 공정 거래 기준을 설정하여 산업의 극심한 경쟁을 막고 구매력 증대를 위해 최저 임금과 노동 시간을 합의하도록 규정한 전국산업부흥법 등이 만들어진다.

특히 전국산업부흥법 7조 (A)항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단체 교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공정노동기준법은 최대 노동 시간과 최저 임금을 규정하고 소년 노동을 규제한다. 그리고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조정법이 제정되고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민간 식림 치수단(民間植林治水團)’이 만들어진다. 거대한 공공사업으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찾으면서 흥분과 기쁨이 나라를 채우기 시작한다.

루즈벨트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나라 사이의 우호를, 정복과 제국주의의 중지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집단 안보를 주장한다. 루즈벨트는 라디오를 통해 자주 국민과 대화를 나누며 국민의 친숙한 이웃이자 세계적인 인물이 된다.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을 전개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 연안 부두 노동자들이 전국산업부흥법 7조에 고무 받아 노동총동맹 산하 국제부두노동자연맹이란 단체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1933년 9월 노조 간부 4명을 해고하고 노조와의 단체 교섭을 아예 거부한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시애틀·포틀랜드·샌디에이고 등 모든 태평양 연안 항구의 부두 노동자 1만 2천 명이 1934년 5월 9일 일제히 파업에 들어간다. 5월 25일에는 8개 해운 노조의 3만 5천 노동자가 연이어 파업에 들어간다. 미국 노동자계급이 대약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은 이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에 격분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 12만 7천 명이 총파업을 전개하여 시 전체가 유령 도시로 변한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7월 3일에는 경찰과 파업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 7월 5일에는 완전 무장한 2천 명의 주 방위군이 출동하여 최루 가스 대신 구토 가스를 사용하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치고 수십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하루 종일 총성이 울리고 실제 전투와 같은 상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진다. 이에 도장공 노조 1158 지방 지부가 총파업을 선언하고 곧이어 기계공 노조도 투쟁에 나선다. 7월 10일에는 ‘알라메다 노조 협의회’가 총파업을 정식 승인하고 7월 12일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트럭 운전수 노조 지부가 총파업을 지지한다.

노동총동맹 지도자 윌리엄 그린이 파업 금지 전문을 보냈으나 노동총동맹의 160여 개 지부(12만 7천 조합원)가 그 다음날 총파업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모든 노조원들이 7월 16일 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인쇄공과 전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인다. 모든 산업이 정지되고 거리의 전차도 멈추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나 7월 19일 노동총동맹의 보수적인 간부들은 호명 투표를 거부하고 기립 투표를 통해 191 대 174로 총파업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3만 5천 해운 노동자들은 7월 30일에야 국제선원노동조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터로 돌아간다. 몇 주일 후에 부두 노동자들은 하루 6시간 노동과 주30시간 노동을 쟁취한다.

들불 같이 타오르는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지부)들이 수없이 건설된다. 이 새로운 노조들은 (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노조통일연맹이 사용한 투쟁 방식을 따라) 대대적인 피케팅, 노래, 연설, 토론, 회합, 연좌농성, 태업, 시위, 확성기 사용, 여자들을 파업 참가자로 조직하기,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대기 등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용자를 고발하고, 라디오를 이용하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고, 파업 후원회를 조직하고, 파업의 쟁점을 대중에게 알리고, 조합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물으면서 아주 공세적으로 투쟁을 펼쳐나간다. 처음으로 거세게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1935년에 1만 8천여 명이 체포·구금되고 1934~36년 사이에 88명이 파업 중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아주 격렬하게 전개된다.

결국 처음으로 단체 교섭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사용자 측의 노조 방해 활동을 금지하는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이 1935년 7월 5일에 제정된다.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한편 위기의식을 느낀 대기업들은 전례 없이 대대적으로 노조 파괴 활동을 전개한다. 밀정을 고용하여 노조 움직임을 일일이 감시하고 요주의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노조 간부들을 매수하고 때로는 폭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파괴하기까지 한다. ‘라 폴레트 상원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230개의 사설탐정회사를 통해 10만 명의 밀정을 고용하여 전국 4만 8천 개의 노조 지부에 침투시켜 적극적인 조합원들을 밀고하여 해고되게 하고 밀정의 상당수가 노조 간부가 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기업 자본가들은 1934년에 노조 파괴 공작에 8천만 달러나 쓰고 ‘반공’을 내세워 오픈 숍―노조 가입과 탈퇴가 개인의 의사에 달려있는 제도―을 확립하고 뉴딜 정책을 파괴할 목적으로 미국자유연맹을 만든다. 또 제너럴모터스·스탠더드석유·웨스팅하우스 등 전국 12대 대기업은 특별위원회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를 노동자와 뉴딜 정책에 대해 반격 작전을 벌이는 신비스러운 비밀 지휘부로 자처한다. 더군다나 재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소련의 끄나풀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산별노조를 건설하며 대약진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분위기를 타고 관료적인 노동총동맹 지도부에 비판적인 좌파들이 1935년 11월 워싱턴에서 산업별조직위원회를 결성한다. 새로운 조직의 결성은 수백만 노동자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다. 노동자대중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여러 개의 경쟁적인 직업별 조합으로 자신들을 쪼개서 한 공장 내의 힘을 약화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년의 투쟁에서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를 이끌고 있어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겨우 여섯 달 만에 2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산업별조직위원회는 단결된 행동으로 거침없이 전진하여 1936년 3월에 ‘미국 전기·라디오·기계노동자 연합회(UE)’라는 거대한 노조를 조직한다. 그리고 자동차노조가 5월에 노동총동맹을 탈퇴하고 미국자동차노조연합이란 이름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9월에는 UE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한다. 곧이어 판유리노조, 철·강철·주석노동자연합회, 고무노동자연합도 가입한다. 노동총동맹 소속 전국기계공조합과 총동맹 산하 지부들 그리고 독립 노조들도 단결의 물결에 합류한다. UE는 연말이 되기 전에 셰넥테디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 공장에도 노조를 조직한다. 이처럼 산업별조직위원회는 새롭게 한창 성장해 나가는 대규모 노조들을 끌어들이며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그러자 노동총동맹 집행위원회는 1936년 8월 4일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담한 노조들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얼마 뒤에는 그 노조들을 제명한다. 그리고 산업별조직위원회가 노조를 둘로 분열시키고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식 비난한다. 더구나 산업별조직위원회가 소련과 내통하여 공산주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12월 28일 파업에 들어간다. 다음해 1937년 1월 4일에는 오하이오 주의 노오우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인디애나 주의 앤더슨과 캔자스시티, 회사 심장부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에서 제너럴모터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 파업을 전개한다.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40만 명 가운데 26만 명이 일하고 있고 연간 211만 대(1937년)의 차를 생산하는, 잠자던 사자가 뒤늦게 잠을 깬 것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대한 제너럴모터스의 파업은 자동차 산업을 소비에트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공장 바깥에서는 수천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아내와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응원하면서 추운 겨울인데도 밤낮으로 방송차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파도처럼 움직인다. 결국 파업 44일째인 2월 11일, 제너럴모터스는 노조를 인정하고 전국 단위의 단체 협상을 하겠다고 발표한다. 이것은 아주 큰 승리였다. 마침내 오픈 숍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크론 파업을 본받은 제너럴모터스의 ‘연좌 농성’ 파업―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쟁 방식이다―은 곧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강철 회사인 ‘US강철’은 파업 경고조차 없었는데 임금 10% 인상, 주 40시간 노동, 노조 승인을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에 약속하며 갑자기 항복한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제너럴모터스를 꺾고 승리한 순간에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의 조합원이 1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웨스팅하우스와 필코 등 거대 회사에서 노조가 연이어 조직된다. 이로부터 비록 4년 이상이나 걸리긴 해도 ‘포드’에서도 노조가 설립된다.

나아가 흑인 노동자들―노동총동맹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이 백인과 평등한 조건으로 수천 명씩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입하고 (섬유·봉재 노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최초로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전기노동자연합과 식품가공노조 등에 가입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산업별조직위원회는 1938년에 명칭을 산별노조회의로 바꾼다.

산별노조회의는 철강·자동차·고무·유리·전기·수송·식품가공·통신 등 모든 기간산업에서 오픈 숍을 몰아낸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공장과 지역들에서도 유급 휴가, 유급 휴일, 시간외 근무 수당, 노동 강도 완화, 주 5일 40시간 노동과 같은 값진 성과를 쟁취한다.

산별노조회의의 성장에 자극 받은 노동총동맹은 기계공·트럭운전수·호텔·식당종업원·보일러제작공들을 적극 조직하여 조합원을 100만 명 이상 증가시킨다. 1940년까지 노동총동맹 소속 조합원은 424만 명으로 늘어나고, 산별노조회의는 381만 명, 독립노동조합은 200만 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전체 조합원은 불과 4년 만에 3배나 늘어나 1천만 명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1866년부터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외쳐 온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마침내 많은 산업에서 실현된다.

이처럼 미국 노동자계급은 루즈벨트 시대에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이에 발맞추어 미국의 노동자·민중은 1932·1936·1940·1944년에 네 차례나 연속해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이리하여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노동자·농민·흑인들의 투쟁과 단결이 추진력으로 작용한 대중 운동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자 미국 민주주의 운동의 정점(민중주의)으로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에서) 구원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을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공격한다.

독점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대약진의 기세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원은 ‘비미국 활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디이즈 하원의원의 주도 아래 노조 요시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노조 간부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기 직전에 노동계에 빨갱이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떠들며 청문회를 개최하고 매일같이 산별노조회의가 공산주의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에 장단을 맞추어 신문·라디오·잡지 같은 대중매체의 98%가 쉴 새 없이 산별노조회의를 비난하며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게다가 자경단원들은 빨갱이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산별노조회의의 피켓 대열에 테러를 가한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은 “산별노조회의에 가입해 공산주의 미국 건설을 도웁시다”는 전단 220만 장을 만들어 뿌리는 교활한 술책까지 부린다. 전국제조업자연합의 회장을 지낸 프렌티스는 “미국 실업계는 어떤 형태의 위장된 파쇼 독재 체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며 우익 세력을 부추긴다. 독일에서 집권한 뒤 노조를 깡그리 없애버린 히틀러가 수많은 미국 실업가들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포드자동차 사장 포드와 국제사무기계회사 사장 와트슨 등 상당수의 대기업 우두머리들이 히틀러가 주는 훈장을 영광스럽게 받는다. 1940년에는 강력한 친 히틀러 조직인 ‘미국 제1위원회’가 생겨나고 여기에 상당히 많은 미국 산업계 대표들이 참가한다. 자본가들은 탁월한 노동자들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 한마디에 절절 매던 쿨리지 대통령이나 후버 대통령 시대를 그리워한다.

한편 대기업들은 공황을 이용해 자본을 집중시키며 회사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미국 기업의 0.1%에 불과한 거대 기업이 전체 순이익의 50%를 차지하고 4%도 채 안 되는 알짜 대기업들이 총 이윤 가운데 84%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빈부 격차도 심화된다. 미국 총 세대수의 47%가 1년 동안 1천 달러도 안 되는 소득을 얻는 데 비해 1.5%도 안 되는 상류층은 밑바닥 47%의 세대와 같은 액수의 총 수입을 얻는다.

미국 경제는 뉴딜 정책으로 잠시 회복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불경기가 시작된다. 이 불경기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대량의 무기와 전투장비를 소비하는 2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를 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를 구제한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지만 제대로 알면 이상할 것도 없다. 자본은 그 속에 언제나 폭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유 경쟁으로 인한 대공황을 혹독하게 경험하고서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된다.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복지 정책을 시행하며, 사기업의 투자와 생산에 대해 재정을 지원하고, 경제 성장 계획에 따라 조세·국채·신용규제를 이용하여 화폐의 순환에 개입한다. 이는 국가 권력과 독점 자본의 유착으로 정치 지배와 경제 착취가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통합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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