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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5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5

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토 재분할을 둘러싸고 충돌로 나아간다.

1876년 이후 30여 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의 독점 자본은 넘쳐나는 과잉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한다. 자본의 축적에는 ‘자연스런 경계선’이란 없으며 자본의 팽창 능력이 그 한계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변화된 세력 관계는 기존의 ‘세력권’을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해결책은 식민지 영토의 재분할이며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필연이다. 남은 것은 누가 먼저 도발하는가이며 그 충돌이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하는 것뿐이다.

프랑스는 1905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에 대해 독일은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여 공세를 편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독일을 가장 위험한 잠재적 적대국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1907년에 영국과 식민지 세력권을 둘러싼 이견을 해결한다. 이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삼국 협상’이 맺어진다. 반면에 독일은 영국의 수준을 능가하는 해군 증강을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은 경쟁하듯이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한다.

1908년 터키에서 혁명이 발생한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는 발칸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다. 이에 대해 삼국 협상 회원국인 러시아·영국·프랑스가 반대를 표명하자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를 군사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한다.

1911년에 모로코를 둘러싸고 다시 위기가 도래하자 독일은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에 전함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오스만제국이 급속히 약화되는 틈을 타고 이 지역의 국가들―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불가리아·그리스―은 저마다 상치되는 영토권을 요구한다. 그 결과 1912년과 1913년에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일어나 세르비아가 꽤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그 중 얼마를 포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1912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여 권력 장악을 목전에 바라보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의 파업이 1912년부터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봉기를 향해 치닫는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 내의 혼란한 상황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살해한 세르비아 청년

때마침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에 보스니아의 한 학생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트리아가 이를 빌미로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전폭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도 군사 동원령을 내려 전쟁 태세에 돌입한다. 독일·프랑스·영국도 8월 1~4일 사이에 차례로 군사 동원령을 내리며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은 속전속결을 계획했지만 새로운 전술로 등장한 참호전으로 인해 서부 전선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교착 상태의 늪에 빠진다. 중립을 지켜오던 이탈리아가 1915년 5월 삼국 협상 편에 서서 참전한다. 독일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잠수함으로 선박들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1917년 4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고 참전한다.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한다.

제2인터내셔널(1889년 결성)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강령―레닌이 작성했다―을 채택한다. 그리고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1912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대회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위기가 닥치면 동시 총파업을 포함한 반전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그 동안 정치 총파업 전술을 거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도 이번에는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전쟁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자 프랑스 사회당은 7월 16~17일에 곧바로 임시 당 대회를 열어 군수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전 총파업을 벌일 것을 결의한다. 그런데 세계 반전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레스가 7월 31일 극우파 청년에게 바로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즉사한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다음날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다. 8월 4일 조레스의 장례식에서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한다. 그리고 며칠 안 돼서 사회당은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 지지하며 전시 내각에 합류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혁명적인 지도자라던 쥘 게드가 전쟁 내각의 장관이 되는 판이다. 벨기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 서기국 의장인 에밀 반더벨드가 부르주아 정부의 내각에 참가한다.

독일이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인 8월 2일, 전국노조연맹을 좌우하고 있던 레기엔 일파는 자본가들과 산업 평화 협정을 맺으며 전쟁 지지의 물꼬를 튼다. 또 바로 다음날 독일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원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조국 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칼 리프크네히트 의원은 이 해 말의 전쟁 예산안 표결에서는 홀로 반대표를 던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전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당내의 반전 좌파가 다시 결집한다.

러시아에서는 플레하노프를 포함한 상당수의 멘셰비키와 다수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열렬한 조국방위파로 변절하여 그 동안 타도 대상으로 삼아 격렬히 투쟁해왔던 차르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한다.

노조의 관료적인 지도부들도 전쟁을 지지한다. 영국의 노조회의와 노동당은 ‘산업 휴전’을 선언하고 파업권과 같은 노동자의 권리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군수 생산을 최대한으로 증대하는 데 협조한다. 독일의 노조 관료들은 만약 전쟁에 반대한다면 오랜 기간 고생해서 쌓아올린 노조를 정부가 파괴할 거라는 핑계를 대며 정부에 협력한다. 생디칼리즘 운동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의 노동총동맹도 전쟁을 공식 지지한다. 미국에서는 곰퍼스 일파가 정부와 복잡한 계급 협조 협약을 체결하고 조직 노동자의 정치 발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는 전쟁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쟁 전해에 제2인터내셔널은 22개 나라의 27개 사회주의 정당을 포괄하면서 득표수 합계 1200만 표에다가 거의 모든 나라의 의회에서 의원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원 수는 독일 110, 프랑스 103, 핀란드 90, 오스트리아 82, 이탈리아 80, 스웨덴 73, 영국 42, 벨기에 34, 덴마크 32, 노르웨이 23, 러시아 13, 네덜란드 16명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를 받는 노조의 조합원수는 국제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여 적어도 1천만 명이 넘고 따라서 유럽의 노조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유럽의 주요 산업을 한꺼번에 정지시킬 수 있는 전략적 힘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사회민주당은 거대한 협동조합 운동도 장악하고 있었고 전쟁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백 만 명의 지지자를 규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신념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이러한 모든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의 간부들은 수천만 명의 노동자와 민중을 죽음의 전쟁터로 몰아넣는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어쨌건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민족주의 정서가 대중을 휘감는다. 대중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도래할 것 같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국가의 깃발을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징병제가 없는 영국에서도 1914년 8월에서 1915년 6월 사이에 200만 명이 군대 복무를 자원한다. 이것은 제국주의 정치가 국민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들의 가득 찬 불만을 혁명을 향한 계급적 분노로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노동자 파업과 민중 봉기가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다.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의 부활제 주간에 영국의 억압에 반대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의 지도자는 노동자이자 매우 뛰어난 맑스주의자로서 1905년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을 조직한 제임스 코널리이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애국자들이 4월 24일 반란을 일으켜 더블린을 장악하였으나 4월 29일에 진압되고 반란 주모자들은 5월 12일 사형에 처해진다.

프랑스에서는 1916년부터 반전 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 폭동이 빈발한다. 1917년에는 영국 본토에서 3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한다. 미국에서도 이전의 어느 해보다 가장 많은 1233건의 파업이 발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최대강령파가 당권을 장악하여 전쟁 발발 당시부터 줄곧 반전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식량난과 물가 인상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수준이 급락하면서 1917년 초부터 전쟁 직전의 투쟁 양상이 다시 나타난다. 토리노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파업의 물결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때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한 소식은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부채질하여 파업은 더욱 고양된다. 그리고 사회당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5년 4월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고 반전 투쟁에 돌입한다. 반전 의원도 18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1916년 3월 지도부에 대항해 탈당을 결행하고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독립사회민주당 내의 좌익 분파로 활동한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4월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12월 말에는 탄광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 투쟁을 전개한다. 다음해인 1918년 1월에는 탄약 공장을 중심으로 100만 명이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 총파업을 전개한다. 1월 6일 회담이 열리고 있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는 러시아 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강화 조약에 반대하여 대규모 대중 집회가 열린다. 그러자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파업위원회를 러시아 혁명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노동자·병사 평의회로 발전시켜 대안 권력을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립사회민주당에 속한 베를린의 좌파 노조 간부들은 ‘혁명적 노조 간부 그룹’이라는 또 다른 분파를 결성해 은밀하게 무장 봉기를 준비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10월에 타협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한다. 황제가 수상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원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 내각제가 약속되고 사회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이센 주 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진다. 사회민주당은 여기서 집권의 길을 발견하고 주춤거린다. 그러나 민중은 전쟁의 즉각 중지를 원하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한다. 킬의 해군 사병들은 11월 3일 패배가 뻔한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건설한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일주일 사이에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확산되고 11월 9일 수도 베를린에서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건설된다. 이 날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한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로서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의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다. 정부는 11월 11일 전쟁 중단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 반전 좌파의 핵심 인물인 프리드리히 아들러―아인슈타인의 막역한 친구로서 아인슈타인을 사회주의로 이끈 장본인이다―는 1916년 10월 전쟁의 즉각 중지를 부르짖으며 수상인 슈튀르크 백작을 암살한다. 테러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러의 행동은 전쟁에 지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1917년 5월에 열린 재판은 “우리의 프리드리히를 구출하자”는 비엔나 시민들의 함성에 파묻히고 결국 황제는 대사면령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아들러와 바우어가 주도하는 좌파는 반전 운동의 도덕적 권위를 업고 가을에 사회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다. 다음해인 1918년에는 100만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이고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총파업의 요구 사항은 아들러의 석방, 즉각적·전면적 강화, 혁명 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강화 회담에 노동자 대표 파견 등이다. 결국 가을에 접어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한다. 그러자 제국 곳곳에서 각 민족이 저마다 임시 정부를 건설한다.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기독교사회당·범게르만당 3당이 주도하여 10월 30일에 임시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11월 12일에 공화국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3월 과거에는 한 나라였던 헝가리에서 소비에트(평의회) 권력이 수립된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노동자·민중들의 반전 투쟁과 혁명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이외에도 수많은 파업과 반전 시위들, 그리고 이 모든 투쟁들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고통 받는 유럽 민중을 구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 지형이 크게 바뀐다.

◀ 파리에서 만난 4거두, 좌측부터 로이드 조지(영국), 올란도(이탈리아), 끌레망소(프랑스), 윌슨(미국)

4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 기간 동안 인류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생산해낸 엄청난 물자가 파괴된다. 게다가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민간인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들을 제외하고서도 900만 명이 죽고 2200만 명이 부상당한다. 이런 끔찍한 파괴력은 과학과 기술의 산물인 탓에 서양 세계의 이념인 진보와 합리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느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물가 폭등으로 실질 임금이 하락하여 더욱 고통 받는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 미국에서만 새로운 백만장자가 1만 8천 명 이상 생겨난다. 승전국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이득은 지배계급에게만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에도 자본의 착취 구조는 어김없이, 아니 더 맹렬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이 전쟁을 고비로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이 서서히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유럽의 힘은 상대적인 하락의 길로 들어선다.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된다. 이 조약은 전쟁의 책임을 오로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전가한다. 승전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식민지 대부분을 왕창 갈라먹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한다. 이런 과도한 조치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4개 제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러시아―이 붕괴된다.

국민을 총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은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만든다. 이제 국가는 경제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여러모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사에서 하나의 큰 분수령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다음 장은 세계를 뒤흔든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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