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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1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1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들이 정치 총파업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고 ‘이중 권력’을 형성한다.

◀ 사망자들을 공동으로 매장하는 러시아 병사들

러시아 군대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7년까지 전사자 170만, 포로 250만, 부상자 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농민들이 병력으로 차출되고 쟁기를 끌 말이 기마대에 징발되는 바람에 수많은 토지가 경작되지 못한 채 황폐해진다. 대부분의 산업이 군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소비재의 생산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 민중들―전체 인구는 1억 6600만 명이다―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
(잠깐, 지금부터 1918년 2월까지의 날짜는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에 의한 것이다. 율리우스력은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에 비해 13일이 늦다.)

지난 시절 가장 많은 투쟁을 경험한 페트로그라드(옛 페체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이 1917년 1월 대규모 파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2월 18일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 금속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곧 무장 봉기의 성격을 띤 정치 총파업으로 발전한다. 전제정 타도와 전쟁 중지를 외치는 민중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전시라서 페트로그라드에는 군대로 가득 차있었지만 병사들은 2월 27일 혁명적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에 합류한다. 다음날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병사들과 모스크바의 많은 부대가 혁명 진영으로 넘어온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민중들의 압력에 밀려 3월 2일 퇴위 선언문에 서명한다. 다음 날 두마(의회)의 지도부는 자유주의자인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변호사이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인 케렌스키는 법무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러나 민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면서 계속 전진한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1000명 당 1명의 비율로 대기업 공장에서 424명의 대표와 중소기업 공장에서 422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한다.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87%가 선거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아래에서부터 스스로 조직한 것이다. 농민과 병사들도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 평의회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건설된다. 대도시들에서는 소비에트, 민병대,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문화 서클 같은 조직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무수히 생겨난다.

공장위원회는 3월에 벌써 전국 공장 노동자의 75%인 200만 명을 끌어들이며 소비에트 다음으로 큰 조직으로 성장한다. 공장위원회는 경영인에 대한 감시, 원료와 자재의 유출 방지, 공장 안의 치안 유지를 위한 민병대 조직, 식량 확보와 배급, 교육과 문화 등의 각종 행사, 정치 문제에 대한 토론과 선전, 심지어 봉기 시기에는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 중에서 공장을 계속 가동하고 혁명을 수호하는 데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다. 공장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 관리’라고 불린다.

노동자들은 3월 10~1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업인 협회와 협정을 맺고 8시간 노동제와 결사의 자유를 획득한다. 이로써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은 타협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민중 평의회)가 정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인민주의자)이 광활한 러시아를 운영해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와 임시 정부가 공존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소비에트는 독일군의 공격과 반혁명으로부터 러시아와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임시 정부의 ‘전쟁 지속 정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또한 ‘혁명적 조국방위’에 사실상 동의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사회주의자들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부르주아와 연립 내각을 구성한다.

이렇게 혁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인 4월 3일에 레닌이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레닌은 다음날 소비에트 볼셰비키 집회와 볼셰비키·멘셰비키 합동 집회에 연이어 참석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혁명)으로” 바꾸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자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너무나 획기적인 내용이라 멘셰비키들은 ‘터무니없는 잠꼬대’로 조롱하고 대부분의 볼셰비키조차 깜짝 놀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5월에 망명에서 귀환하는 즉시 레닌의 입장을 전폭 지지한다. 트로츠키의 가세로 레닌의 당 내 영향력은 현저히 강화된다. 트로츠키는 이때까지 레닌의 ‘협소한’ 당 조직론에 반대하여 볼셰비키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오고 있었다.

한편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4월 18일에 러시아는 최종 승리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서를 연합국 측에 보낸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의 노동자·병사들이 전쟁 중지와 밀류코프 사퇴, 무병합·무배상의 민주적 강화(講和)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에 들어간다. 시위는 다른 도시로 급속히 퍼져나간다.

다급해진 임시 정부는 소비에트 측에 내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권력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상황에 떠밀린 멘셰비키는 1905년 이래 계속 고수해온 ‘임시 정부 불참여’ 입장을 철회하고 임시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여전히 회피한다. 멘셰비키가 임시 정부에 참여한 목적은 반혁명 세력과 레닌으로 대표되는 과격한 혁명 세력 양쪽으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구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편 농민들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도 임시 정부에 같이 참여한다. 이로써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립 정부가 처음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토지 재분배 문제를 다루기로 한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계속 미루어지자 농민들은 늦봄 이후부터 다시 지주들의 토지를 장악하여 분배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의 봉기는 여름 내내 계속된다. 임시 정부에 참가하고 있는 사회혁명당이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볼셰비키는 농민들의 행동을 전폭 지지함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5월에 들어서면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경제가 악화되자 노사간의 협조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장위원회의 비대해진 권한과 8시간 노동제 때문에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다며 경영인이 자율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주도해야 하고 임시 정부는 경제 정책을 통해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공장위원회가 봉기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이처럼 대결 국면이 조성되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위원회들은 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5월 30일~6월 5일에 ‘1차 전 페트로그라드시 공장위원회 총회’를 개최한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 방향을 판가름할 이 총회에는 수도의 367개 공장에서 총 33만 7천 명을 대표하는 568명의 공장위원회 대표들이 참가한다. 치열한 토론 끝에 소비에트의 권력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공장 경영에 대해서는 임시 정부에 의한 ‘국가 관리’가 아닌 자주적인 ‘노동자 관리’를 85대 336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채택한다.

이 총회에서 볼셰비키 노동자가 적극 주장한 ‘전쟁 즉각 중지’와 ‘노동자 관리’가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그만큼 공장위원회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강화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볼셰비키의 주장이 거부된 데에서 보듯이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다. 반면에 농업·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혁명당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공장위원회와 정치 세력과의 관계는 아주 유동적이다.

공장위원회는 총파업과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연일 분주하게 회의를 소집한다. 그런데 6월 10일의 소비에트 총회에서 볼셰비키조차 총파업과 시위를 만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위원회는 6월 13~20일에 대파업을 전개한다. 푸틸로프 금속 공장 노동자들이 선봉이 되어 가두시위를 벌이자 곧 미숙련공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거리에서 유혈 투쟁이 전개된다. 임금과 식량 배급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던 미숙련공들이 대거 정치 투쟁에 합류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단결이 더욱 강화되고 정치의식도 급성장한다. 나아가 18일에는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구호가 가두시위에서 공공연하게 외쳐진다. 이런 상황을 타고 농촌에서도 봉기의 물결이 확산된다.

겁에 질린 자본가들은 직장폐쇄로 대응한다. 특히 대부분 국영 기업이거나 외국 기업과의 합자 회사인 대기업에서는 경영을 맡고 있던 전제정 시대의 고급 장교나 외국인 기술자들이 아예 도피하거나 작업을 거부한다. 이 바람에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반면에 그런 만큼 공포에 가까운 절망감으로 자본가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노동자 관리’만이 반혁명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급속히 늘어난다. 그리고 반혁명에 저항하는 투쟁에 소극적인 소비에트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 임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다. 하지만 노조는 공장위원회의 활동에 불안감을 표시하면서 노조가 국가 행정 기구의 기능을 맡을 수 없다고 결의한다. 이처럼 소비에트·공장위원회·노조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다급해진 케렌스키는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6월 말에 독일군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개시한 총공세는 러시아 군의 참패를 초래한다. 게다가 7월 초에 징집령까지 내리자 노동자들은 배신감과 위기감에 휩싸인다.

7월 4일 여름궁전 앞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7만 명이 운집한다. 환호와 야유가 교차하던 집회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 타도와 ‘소비에트 권력’을 외치는 정치 시위로 발전한다. 시위대는 정부군과 격렬한 대치 끝에 4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할 것, 부르주아 내각과 결별할 것, 노동자 관리를 실시할 것, 토지를 재분배할 것, 기아를 구제할 것 등을 요구하며 기업인들의 선적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공장을 점거하면서 봉기를 일으킨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70%가 유혈 가두 투쟁에 참가하고 수도에 있던 병사 10만 명 가운데 5만 명이 여기에 가세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봉기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고 볼셰비키는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가 봉기가 확산된 뒤에야 뒤늦게 봉기에 합류한다.

임시 정부는 까자끼 기병대와 기관총 부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다. 소비에트는 임시 정부의 시위 진압을 승인하고 볼셰비키를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는 데에 동의한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독일의 첩자로서 돈을 받고 러시아를 원수에게 팔아넘기기 위해 반전 책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7월 위기’로 인해 볼셰비키 조직은 막대한 손상을 입는다. 레닌은 지하로 잠적했다가 핀란드로 피신한다. 트로츠키는 체포되었다가 한참 만에 풀려난다. 그렇지만 임시 정부의 위상도 극도로 불안정해져 르보프가 사퇴하고 케렌스키가 새로운 내각 수반이 된다.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분쇄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독재자 스타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극우파 출신인 꼬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대독전쟁을 재개한다고 선포한다. 자본가들은 반격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관리 운동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독전선에서 리가가 함락 당했다(8월 20일)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데도 멘셰비키 출신의 노동부 장관 스꼬벨레프는 8월 23일 생산성 하락의 책임을 공장위원회 탓으로 돌리는 공문을 발표한다. 이처럼 임시 정부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나 하층 민중의 관심사나 행동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급속히 지지를 상실한다.

한편 꼬르닐로프는 8월 26일 전권을 자신에게 이양할 것을 케렌스키에게 최후통첩하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한다. 경악한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측에 다시 도움을 청하고 심지어 볼셰비키에게까지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인데도 부르주아지는 군부의 쿠데타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할 만한 행동이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임시 정부는 8월 28일 멍청하게도 노동자 탄압령을 결의한다.

역시, 혁명을 시작했던 노동자들이 혁명 수호에 가장 앞장선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기차를 세우고 무전송신을 차단하면서 쿠데타군의 진격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 세력과 수도의 수백 만 노동자·민중이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군한 쿠데타군을 격퇴하고 코르닐로프를 체포한다. 이로써 우익 세력의 정치력은 완전히 무력해지고 군대의 지휘 체계는 심각하게 붕괴된다. 사회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다.

노동자들은 7월 봉기와 8월 쿠데타를 경험하면서 유산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고 임시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게 되고 소비에트 집행부까지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장위원회 지도부와 적위대(노동자 민병대)와 소비에트 산하의 군사혁명위원회를 더욱 지지하면서 유일한 대안으로서 볼셰비키를 동맹 세력으로 선택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연설에서 민주주의나 입헌 체제라는 단어가 점차 사라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국가’라는 말이 새로운 용어로 등장하여 자주 쓰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어가 된다.

급기야 볼셰비키가 8월 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그리고 9월 초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연이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행부의 지도권을 넘겨받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지난 7월에 볼셰비키에 정식으로 입당한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의장에 선출된다.

노동자들은 7월 이후로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직장폐쇄에 항의하여 9월에 사상 최대의 파업을 전개한다.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는 9월 10일 3차 대표자 회의를 열고 ‘고용·해고·생산·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관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직장폐쇄에 대항해 싸우는 과정에서 ‘노동자 관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고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9월부터 농민 봉기가 다시 격화되고 지방 민족들의 독립·자치 운동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이즈음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대량 체포되고 독일에서는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러한 소식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교전국에서 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고 유럽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세계 혁명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볼셰비키가 무장 봉기로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창건한다.

핀란드에 있던 레닌은 9월 12일과 14일에 봉기의 조건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두 통의 편지를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에 보낸다. 중앙위원회에서 편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10월 10일에는 중앙위원회의 지시로 핀란드에서 돌아온 레닌도 참석한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볼셰비키 세력이 아직 너무 미약하다며 봉기를 격렬히 반대한다. 하지만 중앙위원회는 다수의 찬성으로 봉기 안을 통과시키고 당 조직에 봉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는 다음날 바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봉기를 조직하는 작업을 공공연하게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군사 전술가로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한다.

역사적인 제1차 ‘전 러시아 공장위원회 총회’가 10월 17~22일 새로운 권력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다.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권력’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멘셰비키 국제파인 밀류찐과 라린도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 안을 지지한다.

‘노동자 관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국가’가 생산 과정을 감독하고 통제할 것을 주장한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아래서부터 위로 조직된 ‘생산자 연합’이 전체 생산 과정에 대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린은 제헌의회를 통한 노동자 관리를 주장한다. 공장위원회 대표들은 치열한 토론 끝에 (이상적인 생산자 연합 안이 아닌) 현실적인 노동자 국가 안을 채택한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회의하는 모습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특히 금속 노동자들은 권력을 즉각 인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선동하면서 임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무장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무장 봉기에 필요한 기술자·수송차량·탄약·장비를 지원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후 봉기에서도 혁명의 핵심 주체가 된다. 모스크바·중부지대·도네쯔유전지대·우랄탄광지역의 노조와 군사혁명위원회도 봉기를 돕기 위해 요원들을 페트로그라드에 파견한다. 그리고 10월에는 상당수 노조가 이전과 달리 정치 중립 노선을 버리고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채택한다. 이렇게 되자 소비에트 지도부가 아니라 공장위원회가 노동자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기민하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모든 권력을 노동자·빈농의 소비에트로”로 바꾼다.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눈앞에 닥치자 임시 정부는 10월 24일 아침 볼셰비키의 인쇄소를 폐쇄하는 결정을 내리며 선수를 친다. 레닌은 우물쭈물 하다가 오늘을 넘기면 봉기가 실패할 수 있다며 오늘 바로 거사를 일으킬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수십 년을 압축해놓은 듯한 혁명적 시기에는 시시각각으로 상황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에 예정대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바로 붉은 군대, 발틱 함대의 수병,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를 동원하여 24일 저녁부터 계획했던 대로 신속하게 모든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겨울궁전을 포위한다. 그리하여 25일 밤에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겨울궁전을 함락시키고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정부 각료들을 체포한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네바 강에서 공격에 합세한 순양함 ‘아부로라’ 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쏘아 올린 포성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의 막을 최초로 여는 민중들의 환희에 찬 함성으로 울려 퍼진다.

겨울궁전이 함락되기 직전인 25일 저녁 스몰니에서 개최된 2차 소비에트 대회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임시 혁명 정부―가 창건되었음을 선포한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일주일 후 모스크바에서도 소비에트가 권력을 인수한다. 이 기세를 타고 볼셰비키의 권력 기반은 각 지역으로 확산된다.

새로운 정부는 먼저 모든 교전국에 대해 무병합 무배상의 즉각 강화를 촉구하면서 평화 협상을 위하여 최소한 3개월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조치들을 공표하고 바로 법률로 제정한다. 농민에게는 지주·황실·수도원·교회의 모든 토지를 인민의 소유로 전환하고 노동과 소비를 기준으로 평등하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한다. 노동자들에게는 8시간 노동과 ‘노동자 관리’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천명한다. 러시아의 모든 민족에게는 자치를 약속한다. 그리고 신분제를 철폐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고 교회법이 아닌 민법에 따라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소비에트 정부로 권력을 집중한다.

소비에트 혁명 정부는 11월 12일 오랜 세월 모든 혁명 세력의 공통된 요구였던 ‘헌법제정회의’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한다. 레닌은 선거 실시에 반대한다.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로 실시된 이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혁명의 진원지였던 대도시·공업중심지·군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지해왔던 사회혁명당에 투표한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 우파가 50% 이상, 볼셰비키가 24%, 부르주아·지주정당이 13%, 멘셰비키가 3%를 득표하여 제헌의회에서 옛 소비에트파 사회주의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11~12월에는 사회혁명당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정당을 이루고 있던 사회혁명당 좌파가 정부에 참여한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회주의자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하자’는 안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자 가급적 중립을 지키려던 노조마저도 이들에 대해 실망하고 등을 돌린다. 1월 20일에는 분노한 노동자들이 반혁명 세력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까지 벌인다. 이 사이에 소비에트 정부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은거하고 있던 제헌의회를 기습하여 강제 해산시킨다.

그런데도 민중들은 이를 지지하거나 방관한다. 러시아 민중은 경험한 적이 없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아무런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 볼셰비키 정권이 자신들을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레닌의 ‘국가 자본주의’ 정책과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가 충돌한다.

공장위원회는 혁명 직후부터 모든 산업에서 공장을 강제 점거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노동자 관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자본가들과 격심한 계급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노조가 제안한 ‘전 러시아 노동자 관리 회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자본가들과 멘셰비키는 기업 몰수 행위에 대해 무정부적인 처사로 맹렬히 비난한다. 그런데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 산업 관리를 위해 구성한 ‘중앙·주 노동자관리기구’ 역시 경영에 대한 노동자들의 직접 개입을 금지하는 결의문을 제출한다. 레닌은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노동자 관리’ 운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지만 내심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가 1918년 1월 7~14일에 열린다. 대회는 공장위원회를 노조로 통합하고, 국민 경제를 위해 개별 공장들의 분권 생산보다 중앙 관리를 옹호하며, 지방 경제 기구는 정책 결정 기구가 아니라 집행 기구로 운영한다고 결의한다.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중앙 관리 기구를 선호하는 세력이 아래로부터 형성된 공장위원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세력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혁명당 좌파는 생산 수단과 사유권이 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레닌식의 계급 협조나 중앙 정부에 타협적인 노동자 관리는 오히려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래도 레닌은 공장위원회를 노조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때문에 돈바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과 에까쩨리노다르의 항구 노동자들은 노조로 관리권을 이양하기를 거부하면서 격렬한 시위까지 벌인다.

레닌은 생산력을 빠르게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본가는 재산권과 의사결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영에 대해 책임을 지고 노동자들은 회계를 감독하면서 노동 규율을 책임지는 ‘국가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그리고 스쩨빠노프는 ‘노동자 관리’가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노동자 행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당내 좌파들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 행정’은 관료주의화를 초래하는 이중적인 계급 협조 체제라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하여간 생산과 유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속출한다.

이에 레닌은 공장위원회의 노동자 관리를 소부르주아적이며 무정부적이고도 반혁명적인 생디칼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 자본주의가 점진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박한다. 그리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유화를 무기한 연기하고 테일러 시스템과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하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국가 자본주의’ 정책은 전문 경영인들과 노동자들 쌍방으로부터 반발을 받으면서 중단된다.

당내의 좌파는 ‘노동자 반대파’라는 이름으로 분파를 형성하여 노동자들의 자율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레닌의 중앙집중식 노동 정책을 전면 비판하기 시작한다. 또한 점증하는 식량난과 생산고 하락으로 5~6월에 일부 대기업 노조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인기가 오르면서 ‘볼셰비키 타도’라는 구호가 나돌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자 관리’를 외치며 상부의 지시를 드러내놓고 거부한다. 푸틸로프 공장과 오부꼬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관리’를 위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파업을 시도하거나 생산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식량난과 노동 정책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1918년 상반기 중에 페트로그라드에서만 총 인구의 57%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이 농촌으로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도 인구의 44%가 감소한다. 그에 비례하여 노동자의 수가 감소하고 질도 하락한다.

볼셰비키 정권은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반혁명을 이겨낸다.

소비에트 정권은 1918년 3월 3일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가까스로 전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산업 중심지와 곡창 지대를 잃는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평화도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굴욕적인 강화에 격분하여 연립 정권에서 탈퇴하고 볼셰비키 내에서도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이 강하게 반발한다. 게다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14개 나라가 ‘대외 채무 소멸’을 선언한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5월에 ‘간섭 전쟁’을 일으킨다. 6월에는 반혁명 세력도 반격을 개시하여 동서남북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온다. 레닌은 내전이 일어나자 당 지도부에서 좌파인 오신스끼·부하린·스미르노프를 경질하고 ‘노동자 관리’를 옹호하던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혁명당 좌파를 탄압하면서 일부는 체포하도록 지시한다.

혁명 러시아는 곡창 지대를 상실한 탓에 도시에는 식량 위기가 닥치고, 농촌으로 보낼 공산품은 크게 부족하며, 루블화는 교화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유통 체계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고, 사방이 완전히 봉쇄되어 식량·의류·총기·연료·원료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철도가 발달하지 못해 군대 이동이 신속하지 못한 것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결국 소비에트 정권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그런데 전시 공산주의는 혁명 시기의 원칙들을 하나씩 폐기하게 만든다. 소비에트 정권은 ‘자원제에 의한 민병대’ 대신 ‘징병제에 의한 정규군’을 편성한다. 붉은 군대의 토대인 노동자계급은 수도 적은데다가 이미 전쟁에서 많은 목숨을 잃었고 농촌 출신의 병사들은 자신의 마을을 떠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차르 군대 장교들을 다시 수만 명이나 충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장교를 선거로 뽑는 원칙도 포기하게 된다.

권력 구조도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소비에트는 자신이 선출한 기관인 인민위원회의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 가는 반면 공산당(원)은 공장위원회·노조·소비에트·국가기구·적군에 관료로 진출하여 모든 의사결정권을 장악한다. 내전으로 인해 신속하고 엄격한 명령 체계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정책 논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각종 직책은 선출이 아니라 임명에 의해 충원된다. 업무에서는 정치나 이념 문제보다 행정이나 군사 활동이 중시된다. 이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관료주의가 확산된다.

계급 관계도 변화한다. 정부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빈농위원회를 구성하고 중농의 협력을 얻어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의 토지 분배로 부농과 빈농이 격감하고 중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식량 공출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자 정부는 노동자·병사·관리로 식량공출대를 구성하여 식량을 강제로 공출한다. 이에 대해 일부 농민은 조직적으로 대항한다. 우크라이나의 마흐노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도 반혁명 세력의 백군(白軍)도 아닌 녹군(綠軍)을 자처하면서 중앙의 간섭이 없는 농민 자치를 이루겠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를 빼앗겠다는 백군보다는 토지를 분배해준 적군을 선택한다. 특히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항전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반혁명군은 정치적 분열과 지리적 분산으로 효과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가 1919년 4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자기 나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소련 남부에서 진행하던 군사 개입을 중단한다. 영국 정부 역시 9월에 자국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소련 북부로부터 원정군을 철수시킨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러시아는 이 해 말 옛 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한다. 이전에 러시아 혁명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럽 민중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유럽 민중들의 반란과 투쟁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 전쟁으로부터 혁명 러시아를 구한 것이다.

당과 국가가 중앙집권화하면서 공장위원회는 하부 통제 기구로 전락한다.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의 노동 정책을 살펴보자. 볼셰비키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조직인 공장위원회를 중앙 권력에 종속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내전이 일어난 직후인 1918년 6월 28일 정부는 국유화령을 포고하고 ‘노동자 관리’를 폐기하는 조치들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경영권은 최고국민경제회의에 귀속된다. 정부는 그 동안 저항이 가장 심했던 철도·석탄 산업들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관리위원회들을 강제로 폐쇄하고 공장위원회의 선거 제도도 폐지한다. 또한 노조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해 정부의 정책에 저항해온 인쇄·은행·모스크바공무원 노조 등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정부는 노동자 개인의 자유도 상당히 억압한다. 노동 규율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공장을 폐쇄하고 강제 징집하거나 다른 작업장이나 강제 노역장으로 배치한다. 국유화령 이후에는 모든 노동자가 개인 노동 장부를 지니고 다녀야 하고 이주의 자유가 제한되며 직업 선택과 일상생활까지 노조의 감시를 받게 된다. 또한 이 해 연말에 새 노동법이 제정되어 의무(강제) 노동과 노동 업적 카드제가 신설되고 작업장 이탈과 파업은 반역 행위로 규정된다.

최고국민경제회의는 1919년 3월 특별상여제·추가배급제·돌격노동제를 시행한다. 더 나아가 전러시아인민경제회의는 4월에 총 노동 동원령을 선포하고 “노동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을 살리는 열쇠임”을 강조하면서 노동카드·배급카드·여행허가서·직업증명서를 의무적으로 지니고 다니게 한다. 트로츠키는 11월 9차 당 대표자 회의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의무노동이 자유노동보다 생산성이 더 높고 더 사회주의적이다’라며 붉은 군대의 열성 부대를 노동에 동원하고 모든 노동 이탈자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징계하거나 강제 노역장에 배치하는 방안을 제출한다. 당 대회는 트로츠키의 제안을 채택하고 아울러 경영인은 노동자나 전문가 출신이 아닌 당성에 따라 결정하기로 결의한다. 트로츠키는 더 나아가 1920년 1월 제3차 전 러시아 노조 대회에서 토요일 무보수 노동제와 일인 관리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다. 노조 대회는 앞서의 당 대표자 회의의 결의와 트로츠키의 제안을 수용하여 노조에게 단지 노동 조건과 노동 복지에 관해 건의할 수 있는 기능만을 허용한다고 결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노동자들의 심한 반발과 이탈을 초래한다. 특히 철도 노동자들은 노동 군사화를 실시하는 데에 반대하여 8월에 파업에 들어가 10월에는 거의 모든 철도를 마비시킨다. 연말에는 모스크바 전역에서 노동자 소요가 확산된다. 심지어 국영 기업에서도 파업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 군사화에 반발하고 부족한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통에 전체 노동자의 평균 결근율이 50% 이상에 이르게 된다. 노동 군사화 정책을 실시한 후에는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이 급격히 퇴조하고 당원의 수도 격감한다. 또한 엄밀한 계획 없이 위에서 강제로 실시한 식량 징발, 상품의 집단 교환, 빈농위원회의 계급투쟁, 의무노동, 국가 관리 등은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초래한다.

그럴 때마다 볼셰비키 정권은 백군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무렵부터 볼셰비키 당원 사이에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확산되고 국가가 중앙집권으로 통제하는 체제만을 사회주의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내전의 승리가 확실해질 즈음 정부는 노동 군사화 정책을 철회하는 대신에 중앙의 특별 행정 기구로서 산업중추부를 창설하고 산업과 노동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산업 경영 체계는 당 정치국→산업중추부→인민위원회의→노동인민위원회→최고국민경제회의→소비에트 집행부→소비에트 상부기구→소비에트 하부기구→노동조합의 순서로 권력 서열이 정해진다. 이에 따라 공장위원회는 완전히 노조의 하위 기구로 전락하여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변해간다. 이리하여 내전기 동안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조직은 완전히 파괴된다.

게다가 헌신적이고 뛰어난 선진 노동자들이 내전에서 무수히 목숨을 잃음으로써, 즉 노동자들의 자율적 행동을 이끌 소중한 역량들이 손실됨으로써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된다. 그리고 혁명 이후 대거 당과 국가 기구에 선발되어 간 노동자 출신 간부들은 전시 공산주의 아래서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국가 정책을 수행하거나 노동자를 감독하는 행정 관료로 변질되어 간다. 내전 말기에 당 조직 역시 완전히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성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에 따라 당원들은 하위 기관에서 혁명에 헌신하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거나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노동자국가 관리’는 혁명 당시에는 계급 철폐, 자치권 확보, 직접 관리를 쟁취하기 위한 구호였으나 내전 말기부터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된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7년 동안이나 경제가 황폐해지고―1920년의 농사 수확은 전쟁 전의 60% 수준에 그친다―전시 공산주의 정책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내전 말기에는 인민들의 투쟁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농민들은 1920년 가을에 강제 식량공출에 항의하여 파종량을 줄이고 연말에는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배급제와 강제 노동 동원령에 항의하여 파업을 전개한다. 1921년 초에 산업 생산성은 혁명 이전에 비해 16% 이하로 떨어진다. 여기에 또 다시 식량 배급량의 1/3이 감소하자 2월부터는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모스크바에서 각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타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자 볼셰비키 정부는 이 두 당을 불법화한다. 이로써 러시아는 일당 국가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발틱 해의 크론슈타트 섬의 수병 1만 6천 명이 1921년 3월 초 “권력을 소비에트로!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넘기지 말자!”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볼셰비키 당원과 노동자들도 상당수 가담한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볼셰비키 반대’라기보다는 ‘더 나은 볼셰비키’다. 그렇지만 크론슈타트 반란은 16일 만인 3월 18일에 1000여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된다. 그리고 2500여명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볼셰비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고 수도 방어 지역으로서 의미가 매우 큰 크론슈타트에서의 반란은 레닌에게 큰 충격을 준다. 결국 레닌도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불만이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대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시장 경제가 도입되고 1당 독재 관료화가 심화된다.

공산당 10차 당 대회가 3월 8일에 열린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에 초조해진 볼셰비키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며 ‘당내 분파 금지’와 ‘국가에서 당으로의 권력 집중’을 결정한다.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되어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또한 대회는 노조를 당의 하위에 복속시키고 임금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면서 평등임금제도를 공식 폐지한다. 노조 문제에 대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노조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전위대에 의한 독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 대회는 자본주의적인 개인영업을 대폭 자유화하는 ‘신 경제 정책(NEF)’을 채택한다.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름에 따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운용하던 전시 공산주의 경제를 혼합 경제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로써 곡물 공출은 고정 세금으로 대체되고 잉여 곡물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된다. 국유화되었던 많은 중소기업이 매각·대여되고 대기업은 공공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가격·임금은 시장 원리에 맡겨진다. 신 경제 정책이 시행되자 경제에 활기가 되살아나면서 극히 불안했던 정치 상황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시기의 노동 정책은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유화, 전문적 ‘일인 관리제’, 기술자 우대, 차등임금제, 성과급제, 생필품 배급, 각종 특혜 부여 등인데 이것은 물질적 혜택을 주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을 유발시켜서 산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니 노조 지도부에는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보다도 생산력 향상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정책이 시행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1923년 1월에 임금 격차가 80:1에 이를 정도로 모순과 혼란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유대감보다 서로간의 경쟁과 갈등이 더 커지면서 노동자‘계급’은 해체된다.

한편 물품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길다랗게 늘어선 줄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된다. 이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찰이나 행정관이 늘어나고 이 경찰과 행정관을 임명하거나 물품을 배급하는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료의 권력이 강해지는 만큼 민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화도 심화된다. 또한 ‘분파 금지’가 관료화를 더욱 확대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료들이 행정의 편리함만으로 분파 금지를 바라보게 되면서 분파 금지에 의한 당의 통일성은 민주집중제를 관료집중제로 전화시키고 관료 집단의 전횡을 낳는다. 레닌은 당 관료 기구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다.

1922년 3월 11차 당 대회가 선출한 중앙위원회의 1차 회의에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 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소련)이 출범한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당은 ‘레닌 서거 추모 입당’ 운동을 벌여 당원 수를 대폭 확대한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십 만 명이 새로 입당한다. 이로 인해 당은 경계가 느슨해지고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관료화가 더욱 심화된다. 또한 이에 따라 당 관료들이 평당원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도덕적 부패가 진행되어 특권 관료층을 지칭하는 “sovbour"―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이다―라는 냉소적인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분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중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스탈린이 총서기로 있는 서기국은 신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노멘클라투라―각종 정책 수행에 적합한 인물들의 명부―를 매개로 주요 보직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정치국 구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권력을 집중한다. 이제 승진은 서기국에 대한 충성에 따라 좌우된다. 스탈린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924년 말에 처음으로 한 나라만으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공산당원들 사이에는 신 경제 정책으로 인해 혁명의 이상이 손상되고 있다는 좌절감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높은 실업률, 임금과 노동 조건 개선의 부진, 경영자와 전문가 위주의 임금 체계 등으로 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는 분위기가 확산된다. 결국 적대 세력과 맞서는 팽팽한 긴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피로감과 실망이 소련 대중을 엄습한다. ‘인민의 긍지’는 썰물처럼 밀려나고 소심함과 출세주의가 득세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업화의 속도와 재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부하린은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에 먼저 농업을 발전시켜 공산품 수요를 자극하고 소비재 산업에서 잉여가 발생하면 과세와 가격 정책으로 중공업화 재원을 충당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농업·소비재공업·중공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와 경제이론가인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부하린의 이론에 대해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공업화를 가속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유언장에서 표한 존경심으로 인해 레닌 이후의 최고 지도자로 손꼽히지만 멘셰비키의 전력이 있는 탓에 원로 볼셰비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중앙당 총서기인 스탈린, 레닌그라드 당 총서기인 지노비예프, 모스크바 당 총서기인 카메네프가 반트로츠키 동맹을 형성한다. 이들은 좌익 반대파가 노농동맹의 기조를 위협한다고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에 대한 좌익의 접근을 차단한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군사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다. 그러자 스탈린은 레닌의 사도로 행동하면서 자기 세력을 엄청나게 확장한다.

이에 경악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좌익 반대파의 노선을 차용하여 스탈린에 대항한다. 부하린이 농민들을 지나치게 배려한 탓에 정권이 부농의 인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서기국의 장벽에 걸려 1926년 초에 양대 수도의 당직에서 물러난다.

이제 이 두 사람은 트로츠키와 함께 합동 반대파를 결성한다. 트로츠키는 유럽 혁명 이전이라도 유럽과의 교역이나 유럽의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때가 좋지 않았다. 1926년에 신 경제 정책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데다 1927년에는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5월에는 영국과의 국교가 단절되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나빠지는 등 국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합동 반대파는 오히려 자본주의 적들에 영합하고 소련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며 반역 행위를 일삼는다는 공격을 받는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대한 신념 부족과 급격한 산업화론자라는 양면 공격이 모순이라고 항변하지만 언론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려는 시도도 비밀경찰에 의해 봉쇄된다. 결국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분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중앙위원직을 박탈당하고 이어서 11월에는 당에서도 제명되고 모스크바에서 추방된다.

한편 국가계획위원회가 1927년에 1차 경제 5개년 계획 초안을 내놓는다. 그런데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이 초안에 대해 설정 목표가 낮다고 비판하자 양 기관 사이에 목표를 상향 수정하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1929년에 확정된 최종 계획의 목표―좌익 반대파가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아주 비현실적이게 잡힌다. 계획 기간 중에 노동생산성을 110% 상승시키고 농업 생산을 55% 증가시키겠다는 목표는 지나치게 높게 설정된 것이며 생활수준의 하락 없이도 중공업 투자가 가능하다는 전제는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정부는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인 1928년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노동법규도 개정한다. 2월에 제정된 ‘공업 기업의 행정·기술·경영 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는 공장위원회·전문경영인·당세포 3자가 공동 운영하던 ‘트로이카 체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가 공장 운영을 독점하게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져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 권한’을 법률에서까지 박탈한 것으로서 소련이 노동자 정부라는 껍데기(법)조차 벗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들이 공업화 우선 정책과 강제 농업 집단화 정책에 희생된다.

정부는 공업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곡물 가격을 인하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기관의 수매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이 해 겨울의 곡물조달은 아주 저조해지고 이는 곧바로 도시의 식량 위기로 나타난다.

당 지도부는 비상조치로 곡물 공출을 재개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한다. 몇몇 지역의 당 기구가 1929년 초에 벌써 집단화를 시작하고 가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를 결정한다. 집단화는 당 관료,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군대, 경찰, 특별히 선발된 노동자대오를 동원하여 아주 강력히 추진된다. 그리하여 불과 1년만인 다음 해 3월에 무려 50%의 집단화가 이뤄진다.

소수 민족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다. 그리고 부농에 대한 모호한 규정으로 500만 명에 이르는 농민이 필요 이상으로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고통을 겪는다. 그리하여 신 경제 정책이 실행되던 시기에 농민 인구 중 4~5%를 차지하던 부농계급과 그 비율에 약간 미치지 못하던 도시 부르주아지는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국가가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고 농업 집단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농민들은 내전 이후 조직과 무기를 박탈당한 상태였으므로 대규모 도축과 파종 거부로 저항한다. 가축 도살로 인해 가축에 의한 견인력, 비료로 쓸 배설물, 고기와 낙농 제품이 극심하게 부족해진다.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소련의 농업은 장기간 침체하게 된다. 1931년과 1932년에는 연속으로 대흉작이 발생해 수백만 명이 질병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에 정부는 텃밭을 인정하면서 농민에게 양보 정책을 취하지만 집단화는 계속 추진한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인해 농촌의 수공업과 사적 상업도 붕괴되어 농민들은 각종 물품 부족에 시달린다. 집단 농장의 의장에는 대개 농업과 무관한 노동자가 임명되어 농민보다는 당의 이익을 우선한다. 게다가 수매가는 유명무실하여 농민들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공업화를 위한 강제 저축에서도 농민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집단화의 재앙이 덮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 간다. 그 수는 1930년대 초 3년 동안 해마다 300만 명에 이른다.

1936년에 가서야 농업 생산은 집단화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고 농민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나아지기 시작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 통제가 강화되고 ‘상여금 경쟁’과 ‘돌격대 노동’이 장려된다.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신종 공업이 등장하고 신흥 공업 도시들에 여러 종합 공업 단지가 건설된다. 특히 중공업·토목·금속·연료·수송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그리고 기계 영농이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력도 크게 증대된다. 급속한 공업화는 수백 만 명에 달하던 도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농촌에서 해마다 수백 만 명씩 흘러 들어오는 산업 예비군들까지 흡수한다. 정부는 하층 인텔리겐치아보다 육체노동자를 더 우대하는 정책을 편다. 이 때문에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노동자·민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대개 공업과 관련된 기술이나 경험이 없는 농민 출신의 새로운 노동자는 거칠고 낯선 노동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음주·결근·불복종·이직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당의 최대 관심사였던 노동 생산성과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서 정부는 공장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1930년 12월에 모든 공업 기업들은 허가 없이 자신의 원래 근무지를 떠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1931년 2월에는 근무 기록부 제도가 도입되어 공업·운송 노동자들은 근무 기록부를 제시하지 않으면 이직이나 재취업을 할 수 없게 된다. 1932년에는 경영자와 기술자가 노동자에 대해 해고, 배급 카드 회수, 공장 숙소 제공과 같은 혜택 박탈 등의 권한을 갖게 된다. 8월에 제정된 ‘국영기업·집단농장·협동조합 재산의 보호와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에 관하여’라는 법령은 국가·콜호즈·협동조합·철로·수로에 속하는 재산의 절도는 전 재산의 몰수와 함께 총살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 11월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하루 동안 직장을 결근하면 해고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이 제정된다. 그리고 그 노동자의 집이 근무지와 붙어 있을 경우에는 퇴거 조치를 내릴 수도 있게 된다. 12월에는 누구든지 허가 없이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국내 통행 허가제가 도입된다.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한 노조 대회지만 그조차 1932년 이후 17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는다. 단체 협약도 1934년 이후로는 더 이상 체결되지 않는다. “계획이 경제 발전의 결정적인 요소가 될 때 임금 문제는 그것과 관계없이 따로 결정될 수 없고 임금 조정의 한 형태로서 단체 협약은 그 유용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관료들의 권한과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갈수록 강화된다. 1940년 10월에는 산업 경영진이 인력을 다른 기업이나 기관으로 강제로 전근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1941년 12월에는 허가 없이 군수 업체를 이탈한 노동자에게 5~8년형까지 벌칙을 부과하는 법령이 만들어진다.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는 1928년 단 3만 명에서 1930년 66만, 1931년 200만, 1935년 500만, 1942년 1000만 명으로 급증한다.

정부는 채찍 정책(노동 통제)과 더불어 당근 정책을 다함께 시행한다. 정부는 1931년에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주의적 경쟁”이라고 명명된―그러나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실적에 따른 누진적인 성과급제도’를 도입한다. 이 때문에 소득 격차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평등주의는 계속 뒷걸음친다.

특히 관리자들은 계획된 목표 이상을 달성하면 높은 상여금을 받는다. 그러고도 노동자를 위한 주택·회관·매점·탁아소·유치원을 세우는 데 쓸 ‘기업장 기금’(1936년 제정)까지 전용해서 쓴다. 그리하여 정부의 상급 관리, 기업장, 성공한 작가는 모스크바의 저택, 크리미아의 별장, 한두 대의 자가용, 수명의 하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1만 루블 이상의 상속 재산은 모두 몰수하던 상속세는 이제 10%를 넘지 않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미국의 상속세보다도 매우 낮은 비율이다.

탄광 노동자인 스타하노프는 1935년에 1일 6시간 교대제에서 하루 102톤의 석탄을 채굴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인 기적의 ‘노동 영웅’으로 선정된다. 이어서 개인의 모범을 따라 배우자는 선동이 뒤따르고 성과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는 집단 포상과 특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량의 기준은 “스타하노프제 포상 노동자들의 생산을 다른 노동자들의 평균치와 합산하여 평균”한 것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닦달하는 관리자들의 압력은 더욱 가중된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업무 외 시간’에도 작업장과 도구·원자재를 정리정돈하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일들이 진행되면서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노동 시간은 연장된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태업으로 저항하고 스타하노프 운동원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비난하며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노동자들은 강제 저축, 모든 물품의 배급제,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주택 건설로 인해 생활수준이 하락한다. 조그만 주택 한 채에 심한 경우 7~8가구가 입주함으로써 가정생활이나 사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중공업 우선 정책과 수공업의 소멸로 생필품이 늘 부족하여 암시장이 성행한다.

그렇지만 1934년 이후 경공업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고 1935년에 상거래 체계가 일정 정도 도입되면서 인민들의 생활도 조금씩 개선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실질 임금이 하락하기는 하지만 고용 기회가 확대되어 여성들의 취업이 쉬워짐으로써 가계 수입은 오히려 늘어난다. 공업화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하루 8시간 노동이 원칙으로 지켜진다. 실업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다.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질병에 걸린 노동자는 무료 의료 혜택과 함께 통상 임금의 100%를 보장받는다. 그렇지만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소비재 공업과 농업에 대한 파급 효과는 아직 별로 나타나고 있지 않아서 인민의 생활은 절대 빈곤에서 탈피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이다. 한편 정부는 엄청난 비용을 교육과 훈련에 투자하여 노동자·농민 출신의 ‘붉은’ 전문가를 양산함으로써 체제에 우호적인 전문가 집단을 확보한다.

관료 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지면서 노동자의 창발성이 소진된다.

모든 생산 수단이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옴으로써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집중과 중앙 계획이 가능해진다. 사회가 당 지도부→국가계획위원회→경제담당 인민위원부들→지역→도시→공장으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산업 피라미드로 구축되면서 관료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진다.

그런데 관료들이 현실에 근거한 면밀한 계획보다 상부의 지령을 우선함으로써 관료들의 계획과 예측은 종종 터무니없이 빗나간다. 이로 인해 한쪽에서는 물품이 남아도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품이 모자라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관료들이 제품 가격을 자의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똑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데도 공장마다 관리비와 생산 가격이 서너 배 이상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제 맘대로 날뛰는 가격은 합리적인 계획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계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그러면 중도에 포기하는 사업이 생겨나고 그만큼 물자는 낭비된다. 그런데 관료 자신이 결정한 계획과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지역·부문간의 혼돈과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관료가 충원된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만 하나 더 늘어난 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일단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보자는 식으로 된다. 이제 현장 책임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목표치는 낮추고 성과는 실제보다 부풀려 보고한다. 이 때문에 중앙의 경제 책임자와 일선의 기업 책임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소송이 제기된다.

소송의 주요 항목을 차지하는 것은 품질 문제인데 이것은 관료들이 수치로 나타나는 양을 중요시하고 질을 무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는 무엇이든 기술 수준에 상관없이 규모가 클수록 좋다는 것이 신앙으로 되어있던 상황이니 그럴 만하다. 예를 들어 1928~37년 사이에는 거대 기업 열풍이 불었고 1930년에는 50개의 촌락과 8만 4000ha, 29개의 촌락과 3만 3533ha―1ha는 1만㎡다―를 포괄하는 두 개의 대규모 콜호즈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거대기업이나 콜호즈 둘 다 실패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료주의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질수록 품질 개선을 가능케 할 노동자의 창발성과 책임 의식이 더욱 파괴된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러저러한 노력들은 관료주의에 짓눌려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스탈린은 정적을 숙청하며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당의 지도 체제는 당 대회가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위원회가 13~14명의 정치국원을 선출하며 정치국이 서기장과 서기국원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관료층이 공고화되고 당의 위계질서가 강화될수록 권력은 자연스럽게 서기장에게 집중되어 간다. 더구나 스탈린은 경찰 조직인 내무인민위원부를 이용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기까지 한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8년 샤흐티 사건, 1930년 근로농민당 사건과 공업당 사건, 1931년 멘셰비키 동맹 ‘뷰로 사건’, 1936~38년 대숙청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급의 적’을 만들어낸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36년 8월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볼셰비키 중앙위원 16명을 ‘소련을 전복하기 위해 트로츠키와 협력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한다. 다음해까지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재판이 수차례 열려 지노비에프·카메네프·부하린 등 다수가 사형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숙청으로 인해 수많은 지도자들이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최초로 조직된 볼셰비키 정부의 구성원 15인 가운데 단 한 사람 스탈린만이 대숙청 이후까지 생존한다. 각종 인민위원부의 모든 최고 관리들은 차례대로 숙청당한다. 1935년에 임명된 군사령관 15명 가운데 14명이 배반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한다. 거의 모든 소련 대사들이 숙청당한다. 대숙청 기간 동안 소련 내의 30개 공화국 정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소연방 탈퇴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숙청된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쳐 ‘수령의 1인 독재’가 완성된다. 이것은 정치만 보면 차르의 전제 시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당내 비판 기능이 마비되면서 인간관계는 폐쇄적으로 변해간다. 1920년대 말이래 소비에트 대회와 최고소비에트에서는 모든 결정이 단 하나의 기권표나 수정 제의나 반대 연설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1937년 총선 때 수백 개의 선거구 모두에서 후보자는 오직 한 사람씩만 나온다. 투표율은 98% 이상, 찬성률은 99.9%를 기록한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100% 이상을 득표한다. 유권자가 1617명인데 2122표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스탈린의 정치적 성격은 관료 집단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관료 집단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위협하는 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할 수 있는 무자비한 사람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관료 집단의 인격화로서 스탈린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스탈린이 1922년부터 30년 동안 서기장이라는 권력의 정점에서 점점 신격화 되어간 것은 관료 집단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의 형태와 구조는 그 시대의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관료 집단으로의 권력 집중은 다른 한편에 서있는 민중들의 권력 상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생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이루지 못한 근본적 결함에 기인한 것이자 생산력 향상을 위해 계급투쟁을 포기한 결과이다.

소련 사회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관료계급이 형성된다.

소련은 계급투쟁이 아닌 평화 공존을 외교 정책으로 취한다. 소련은 1929년에 영국 노동당 정부와 1931년에는 프랑스와 1933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1934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1935년에는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는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전쟁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선전하여 인민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인민들은 정부가 무너지면 자본주의로 복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부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인민에게 엄청난 선전 효과를 일으키면서 내부의 정적을 소탕할 구실과 급속한 공업화의 명분을 만들어준다. 정부는 선진국에 비해 50~100년이 뒤진 소련으로서는 길어도 10년 이내에 이들을 따라잡아야 생존도 가능하고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하다며 경제 성장을 독려한다.

소련 사회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소련 군대는 1935년에 혁명에 의해 철폐되었던 장교 제도를 18년 만에 부활시킨다. 이는 사회가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로 갈라져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리고 1936년 6월에 새로 만들어진 헌법은 계급과 산업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선거를 무차별 개인들의 보편·평등·직접·비밀 선거로 바꾼다. 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체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 회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법적으로 청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정부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 사회주의의 대의, 자본주의보다 평등한 사회, 높은 경제 성장률, 서민을 위한 의료 제도와 사회 보장, 교육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일상적으로 강조하여 낙관주의를 고취시킨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유례없는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또한 외국의 공산당과 인민들이 소련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급속한 공업화에 따르는 희생을 감내한다. 당 지도부는 노동자에게 입당의 문턱을 낮추고 일선 경영자에게 거친 대접을 받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당·정부·경찰 기구가 비대해짐에 따라 인텔리겐치아―사무·전문직 노동자―층이 증대한다. 인텔리겐치아는 1928년에 전체 노동 인구의 5.2%에서 1939년에는 16.5%(1100만 명)로 늘어난다. 인텔리겐치아는 공업화 초기에 우익의 지지 세력으로 간주되어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급격한 공업화에 이들의 전문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공격은 1931년 중엽부터 중단된다. 인텔리겐치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순 사무직은 육체노동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

그렇지만 공업경영자·기술전문가·상급행정가인 수십 만 명의 상층 인텔리겐치아는 여러 혜택을 받으며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대졸 기술자는 1928년 4만 7천 명에서 1941년 28만 9천 명으로 증가하고 대졸 취업자 수는 75만 명에 이른다. 같은 직책을 맡고 있는 비대졸자의 수가 여전히 몇 배나 더 많기는 하지만 점차 학력이 중시된다. 숙청이 완화되는 1938년 이후부터는 방대하게 형성된 인텔리겐치아 층이 공업화의 최대 수혜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체제의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등장한다.

소련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질적 도약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소련 경제는 인민들의 헌신, 계획 경제의 장점, 광활한 영토, 풍부한 천연 자원, 노동력의 대규모 투입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소련은 1928~40년까지의 13년 동안 연평균 16%―서방에서는 최저 8.4%에서 최고 13.6%로 추산―에 이르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강력한 공업 국가로 성장한다. 이 기간 동안 산업은 거의 국유화되고 유통 분야는 국유화되거나 협동조합이 장악하게 되며 농업의 집단화 비율은 90%에 이른다.

노동자는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1928년 12.4%에서 1939년 33.7%로 증가한다. 그리고 농민들이 공업 도시로 몰려들면서 그 기간 동안 도시 인구는 3천만 명이나 증가한다. 문맹률은 제정 말기의 75% 이상에서 1939년 23%(여성은 33%)로 격감한다. 노동자들의 문맹은 완전 일소된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고 농업이 집단화되었지만 생산력은 여전히 낙후한 편이다. 중공업 분야는 급속히 발전한 반면 경공업이나 사회 기간 시설 분야에서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계획 경제의 지도부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능력이 부족하고 관료 기구는 점점 비대해져 부패해 가고 있다. 또한 많은 인력이 개인 축재자와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일에 낭비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의 여러 요소들 사이에 여전히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자의 기술 수준과 문화 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보다 많이 뒤쳐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산력인 노동자계급이 여전히 지시 받는 수동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해방’이라는 욕구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 증대라는 생산력 발전에 종속되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노동 생산성이 여전히 낮다. 그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은데도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그만큼 국민 소득과 인민의 생활수준도 아직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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