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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6장]사회주의대파시즘(1917~1945) 4

세계노동운동사 [6장] 사회주의 대 파시즘 (1917~1945) 4

중국 노동자 혁명의 패배와 농민 혁명으로의 전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제2 정부’를 구성하고 제국주의 반대 투쟁으로 나아간다.

청나라는 1909년부터 입헌군주정으로의 개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11년 5월 철도 건설을 외국 차관단에 위임하자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10월에 여러 성에서 일어난다. 쑨원은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국민당을 조직한다. 북양군을 이끄는 위안스카이는 부의 황제를 퇴임시키고 1912년 1월 각 성의 대표들을 난징에 모아 중화민국(공화정)을 수립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에 앉힌다. 쑨원의 국민당은 1913년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자신이 대통총의 자리에 앉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21개조의 요구’를 위안스카이에게 강요한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에 죽자 지방의 군벌들이 각 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할거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 경제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 특수’로 급속히 발전한다. 수출은 1913~19년 사이에 40%나 증가하고 공업 기계류의 수입은 1915~21년 사이에 13배나 증가한다. 이에 비례해서 산업 노동자도 증가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주요 도시들에 총 150만 명의 산업 노동자가 존재하게 된다.

중국 대표단은 전쟁이 끝나고 열린 1919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베르사유 회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 재분할로 끝난다. 그러자 3천 명의 학생들이 5월 4일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민족주의 시위를 벌인다. 이 5·4운동은 전국 규모의 항의 운동으로 발전한다. 베이징 정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자 주요 공업 중심지인 상하이에서는 6~9만 명의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1일 파업’에 들어가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천두슈·리다자오·취추바이·마오쩌뚱 등 12인의 대표가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공산당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1년부터 시작된 불황의 영향으로 1922년에는 100회 이상의 파업이 일어나고 연인원 30만 명이 파업에 참가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고 공산당은 1922년 5월 광저우에서 제1회 전 중국 노동자 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12개 도시에 있는 200개 노조의 3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162명의 대의원이 참석한다. 나아가 공산당은 농민 협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1924년 중국 최초로 전국 노조를 설립한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소련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산주의 운동과 연대한다는 ‘연소용공(連蘇容共)’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이 개별로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국민당은 9월에 반동적인 봉건 군벌을 타파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북벌’을 시작한다. 그런데 자유주의자 쑨원이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진다. 그 뒤를 이어 쑨원의 동서―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동생인 쑹메이링의 남편―인 장제스가 국민당을 장악한다.

상하이에 있는 일본 자본의 직물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이 5월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파업 노동자들과 공안 부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 젊은 노동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노동자·학생 수천 명이 5월 30일 항의 행진을 벌인다. 조계 당국은 영국·미국·일본·이탈리아의 육군 전투 부대를 상륙시켜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하여 12명이 숨진다. 그러자 이틀 후인 6월 1일 공산당이 이끄는 상하이 노조총연맹이 외국인 소유 공장과 부두를 시작으로 총파업을 단행한다. 6월 13일에는 16만 명의 노동자가 가두 투쟁을 벌인다.

파업과 가두시위가 다른 도시로 급속히 확산된다. 6월 23일 광저우에서는 영국·프랑스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52명이 사망한다.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서도 총파업이 벌어져 6월 말에 이르러 5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홍콩을 떠난다. 13명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와 800여 명의 파업노동자대표자회의가 투쟁 전체를 총괄한다. 이 파업위원회는 이후 벗과 적 모두로부터 ‘제2 정부’로 불리게 된다. 총파업은 1926년 10월까지 16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국민당은 1925년 7월 전국으로 확산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기반으로 광저우에서 국민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장개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을 조직한다. 국민당 군대는 1926년 7월 북벌을 재개하여 11월에는 근거지를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선발 정찰대 역할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농민 반란을 고무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1926년 초에 1천 명도 안 되던 당원이 불과 1년 만에 3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다.

상하이의 섬유·금속·철도 노동자들은 1927년 2월 다시 총파업을 일으킨다. 경제적 요구로 시작된 총파업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전국으로 확대되어 수개월 동안 계속된다.

공산당의 좌우편향으로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붕괴된다.

대지주·고리대금업자·제국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장제스는 국민당 북벌군을 상하이로 집결시킨다. 위기를 직감한 파업 노동자 70만 명은 파업을 계속하면서도 잘 훈련된 노동자 민병대로 도시 전 지역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상황이 이러 하자 국민당 군대는 상하이 외곽에 이미 도착하고서도 5일 후인 3월 26일에야 상하이로 들어온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자본가들 및 지하 갱단의 두목들과 일련의 회합을 갖고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할 세력을 규합해나간다. 드디어 4월 12일 새벽 암흑가의 암살단이 도시 전 지역에서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여 하루 동안 400~700명을 살해한다.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훈령에 따라 거의 모든 무기를 땅에 파묻거나 장제스 군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궤멸 당한다.

이 잔혹한 습격이 있기 바로 일주일 전인 4월 5일에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에 대해 “우익들은 군대를 지휘할 능력 있는 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부유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레몬처럼 다 쥐어짜고 나서 내던져 버리면 된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쥐어 짜인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돕는 것이 공산당의 임무라며 운동의 ‘과도함’을 자제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혁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스탈린이었다.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공산당원이 국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그런데 다음날 창사를 지배하던 군벌이 노조와 농민 조직들을 파괴하면서 대규모 처형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지방의 지도자들이 창사를 공격하기 위해 수천 명의 농민 군대를 동원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번에도 (5월 27일) “더 이상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정부 관리들을 기다려주기 바란다”는 전보를 타전하며 농민들의 투쟁 의지를 눌러버린다. 그렇지만 학살은 다른 성으로까지 계속 퍼져나가고 7월에는 국민당 정부까지 이 학살에 가담한다. 그리하여 총 2만 명 이상의 노동자·농민이 목숨을 잃는다. 7월 말에는 모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불법화된다. 이로써 국공합작이 끝장나고 반혁명이 도시와 농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역량을 상당히 손실한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번에는 “새로운 혁명적 고조!”를 선언한다. 코민테른은 전국 공세에 착수하기 위해 농민 군대가 전략 도시들을 공격한다는 계획 아래 ‘추수 봉기’로 알려진 일련의 무장 봉기를 명령한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8월 1일 허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개 군단을 편성하고 주더로 하여금 2만 명을 이끌고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한다. 공산당은 이후에 이날을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로 삼는다. 마오쩌뚱은 2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창사를 공격하다가 한 차례의 전투에서 부대의 절반을 잃고 바로 후퇴한다. 일부 다른 부대들도 겨우 탈출하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금새 몰살당하고 봉기는 7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마오쩌뚱은 9월에 자기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 접경의 황량한 후진 지역인 징강산으로 퇴각한다.

이후로도 계속된 11월 하이루펑 소비에트 건설, 12월 ‘광둥 코뮌’ 건설, 1928년 8월 후난성 남부 대도시들에서의 봉기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다. 이 ‘도시 봉기’들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진행됨으로써 무자비한 학살만 초래하고 끝난다. 공산당은 1928년 8월 7일 장시성 회의에서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좌편향 노선을 스스로 비판한다. 이에 따라 천두슈가 당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취추바이가 주요 책임자가 된다.

그러나 1930년 5월 장제스·풍옥산·옌시산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리리산으로 대표되는 좌익 모험주의가 다시 당의 지도기관을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6월에 전국의 홍군을 동원하여 난창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7월에는 장시에서 소비에트를 건설하지만 불과 9일 만에 무너진다. 9월 당 전체회의는 리리산의 노선을 (노선상의 오류가 아닌) 전술상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마오쩌뚱은 농촌을 근거지로 삼고 국공합작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마오쩌뚱은 무리한 공격을 피하면서 징강산에서 역량을 보존하여 1만 명으로 노농홍군 4군단을 편성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혁명 근거지를 확대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3대 규율’과 ‘6항주의’라는 생활 규율을 세운다. 3대 규율이란 일체의 행동은 반드시 지휘를 따른다, 인민에게서 바늘 한 개나 실 한 오라기도 뺐지 않는다, 지방 유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물건은 반드시 전체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항주의란 매매는 공정하게, 대화는 부드럽게, 잠잘 때 사용하던 문짝은 원래 제자리에 갖다놓고 바닥에 깔았던 짚은 묶어놓는다,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주고 부서진 것은 반드시 보상한다,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 포로의 지갑에 손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1928년 12월 근거지 주변의 농촌에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가족 수에 따라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홍군 4군단은 규율 엄수와 토지 개혁을 기반으로 농민들과 공고한 관계를 형성한다.

장제스는 1930년 말부터 1931년 6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장시성 남부를 중심으로 공산당 토벌 작전을 실시한다. 그러나 홍군은 적이 진격해오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멈추면 우리가 그들을 교란시킨다,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가 공격한다,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진격한다는 네 가지 게릴라 전술로 유격전을 펼쳐 장제스 군대를 괴롭힌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다. 그러자 10월에 상하이에서 80만 노동자가 항일구국연합회와 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나선다. 민중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과 경제 절교 운동을 전개한다. 1932년 상하이 항전 때는 상하이의 상공회의소와 은행협회가 자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등 민족 부르주아까지 투쟁에 참가한다.

장제스는 1933년 10월 일본과의 전투는 접어둔 채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홍군을 포위 공격한다. 1934년 10월이 되자 ‘해방구’의 중심부까지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홍군은 포위를 뚫고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해 점점 더 중국 서부의 오지로 깊숙이 들어간다. 결국엔 산시성에 있는 ‘소비에트 구(區)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으로 남는다. 마오쩌뚱은 이 방안을 집요하게 주장함으로써 공산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자리를 굳힌다.

출발할 때 8~9만 명이었던 부대는 중국횡단 2만 5천 리(1만㎞)의 대장정을 마치고 1년 후에 구이저우성 준이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4천 명만 남는다. 새로운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지역들에 남았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 5만 명이 넘게 죽었으니 대장정은 그야말로 인간 인내심의 대서사시다.

공산당은 1935년 1월 준이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마오쩌뚱에 넘기고 장원텐을 당 총서기로 선출하면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는 8월에 항일 구국 통일 전선을 전술로 채택한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힘을 뭉치자는 주장은 전국 인민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후청은 공산당과 연대하여 일본에 대항하자는 ‘연공항일(聯共抗日)’을 장제스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여전히 공산당을 박살내야 한다는 ‘초공(剿共)’의 입장을 취하면서 장쉐량과 양후청을 해직시키려 한다. 이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전투를 격려하러 시안에 온 장제스를 억류하여 망국적인 반공 내전을 중지하고 연공항일의 조건을 수락하게 한다.

일본 군대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를 습격하면서부터 한 달여 동안 11세 소녀에서부터 60세 노파까지도 마구잡이로 폭행·유린하면서 무자비하게 30만 명이 넘는 중국 인민을 학살―난징 학살이 대표적이다―한다. 이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제히 대일 항전에 합류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발전하자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9월 23일 (공산당이 7월에 제안한) 국공합작을 정식으로 공포한다. 장제스도 할 수 없이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하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로써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공산당은 통일 전선을 펼치면서도 독자적인 유격전과 항일 근거지 건설에 주력한다. 그런데 항일 투쟁이 진척되면서 왕징웨이 집단의 패배주의적 망국론과 근거 없이 낙관적인 속승론(速勝論)이 대두한다. 이에 마오쩌뚱은 1938년 5월 항일 전쟁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구전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지역과 산업에서 비밀 노조를 조직하면서 끈기 있게 활동한다.

그러나 장제스 일파는 1938년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 노동자협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파업 반대와 공산주의 반대를 표방하면서 엄중히 통제한다. 그리고 국민당 대부르주아 친일파 왕징웨이 집단은 1939년 적에게 투항한다. 이 때문에 국공합작으로 고조되던 인민의 항전 분위기가 다시 침체된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마오쩌뚱은 1940년 1월 신민주주의 강령을 발표한다. 신민주주의 강령은 중국 혁명의 임무를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반제 반봉건이라고 규정하고 1단계에서는 반(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를 독립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고 2단계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근거지에 항일 민주 정권을 세우고 정부 기관과 민간 기관에서 공산당원·진보분자(소부르주아계급)·중간분자(중산계급·노동자·농민)가 각각 1/3을 차지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도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학풍에서의 주관주의, 당풍에서의 분파주의, 문풍에서의 공론을 배격하자는 정풍 운동을 전개한다.

공산당은 항일 전쟁에서 가장 선두에 섬으로써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권력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1937년에 3만 명이던 당원과 4만 명이던 홍군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각각 80만 명과 50만 명으로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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