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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5장]제국주의(1876~1916) 1

세계노동운동사 [5장] 제국주의 (1876~1916) 1

최초의 세계 공황이 초래한 결과

◀ 미국의 노동자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상징인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세계 공황의 파장으로 세계 경제가 장기간 불황에 빠진다.

지난 호황기 동안 가격·이자·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873년에 세계 경제에 공황이 불어 닥친다. 독일의 주가는 1877년까지 호황의 절정기에 비해 60%나 폭락하고 미국의 대규모 철도 회사들이 파산하고 세계의 주요 철 생산 국가에서는 전체 용광로의 거의 절반이 불이 꺼진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1890년대 중반까지 유례없이 장기간의 혼란과 침체를 기록한다. 무엇보다 농업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1894년의 밀 가격은 1867년에 비해 3분의 1 정도로 하락하고 어떤 지역은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쳐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그리하여 1879~94년 사이에 아일랜드·스페인·시칠리아·루마니아 같은 곳에서 농민 봉기와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신세계’를 향해 홍수를 이루던 이민의 무리는 조용한 흐름으로 줄어든다.

1873~96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가격이 10% 이상 하락하여 그만큼 이윤(율)이 감소한다. 게다가 생산비보다 상품 가격이 훨씬 더 유동적으로 변함에 따라―예를 들어 임금은 상품 가격이 하락하는 만큼 빠르게 삭감되지 않음으로써―기업 운영은 더욱 곤란을 겪는다. 그래도 생산성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설비와 장비를 사들여야 하니 압박은 더욱 커진다. 일부 나라에서는 은 가격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지불 수단으로서의) 은과 금의 교환 비율이 예측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1873년의 주식 시장 대폭락 이래로 ‘공황’이란 말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자유 무역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한다.

각 국가는 국제적인 판매 경쟁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상품에 대해 관세를 높게 부과하는 등의 무역 장벽을 설치한다. 그리고 이익 집단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국내 시장에도 개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치와 경제가 점점 더 밀착하게 된다. 이처럼 장기 불황은 그다지도 튼튼히 뿌리내린 것처럼 보였던 1800년대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린다.

이로써 ‘사기업의 자유로운 영업, 개입하지 않는 정부, 자유 무역’이 지배하던 시대는 (1848년 민중 혁명의 성과로 시작되어) 세계 공황의 시작과 함께 막을 내린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주의에 의해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발전의 결과로서 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렇게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이 명멸을 거듭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 사실 상업과 산업은 자유 무역 시대보다 보호 무역 시대(1880~1914년)가 훨씬 더 높은 성장을 기록한다.

한편 영국만은 주요 산업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 무역을 유지한다. 금융·상업·운송서비스 분야에서 최대의 수출국이기 때문에 보호 무역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의 유동이나 국제 금융 거래는 보호 무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기업 합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독점 대기업이 생겨난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과 가격 하락으로 인한 이윤 감소에 대처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 합병이 이루어짐으로써 독점 대기업들이 생겨난다.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해짐에 따라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이 융합하여 금융 자본을 형성한다. 군수 산업과 같은 중공업,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 산업, 석유나 전기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 분야, 비누와 담배 같은 대량 소비 제품, 수송 분야 등에서 독과점 업체가 수없이 생겨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해당 지역 석탄 생산의 90%를 장악하고 스탠더드석유는 미국 정유의 90~95%를 통제하며 US제철은 미국 강철의 63%를 생산한다. 1860~1910년 사이의 50년 동안 제조업 공장은 평균하여 자본이 39배, 노동자 수는 7배, 생산액은 19배 이상 증가한다. 엄청난 자본의 집중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과 대기업을 구별하게 만들고 자유 경쟁(시장)을 후퇴시킨다.

대기업에서는 중역·기술자·사무원들이 기업주가 하던 역할들을 대신하게 되고 작업 프로그램은 관리자의 감독 아래 통제된다. 기업 경영에는 과학적인 관리 방식이 도입되고 관리의 핵심은 작업자에게서 더 많은 생산량을 뽑아내는 데에 맞추어진다. 노동 과정을 세세하게 구분하여 초 단위까지 계산하는 ‘테일러 방식’이 도입되고 생산성 향상을 독려하는 상여금과 같은 인센티브 제도가 만들어진다.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에 혈안이 된다.

강대국들은 상품 판매와 자본 투자를 위한 새로운 시장, 석유·고무·비철금속·구리 같은 원자재, 통상의 교두보나 전진 기지로서 가치가 있는 전략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함 외교’로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반)식민지로 삼는다. 이로 인해 대국으로서의 지위는 식민지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신념이 강화된다. 중동 지방의 유전지대, 고무 생산지인 콩고와 아마존, 구리 생산지인 칠레·페루·자이레·잠비아, 금과 금광석 같은 귀금속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남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인 수에즈운하가 있는 이집트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 로디지아였다가 지금은 짐바브웨가 된 곳을 정복할 무렵의 영국인 선교사들의 단체사진

프랑스는 대부분의 서·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영토 확장을 추구한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종단 정책’을 추구한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영국과 경쟁하고 충돌하면서 동남부와 남서부의 해안 지대와 서부의 카메룬과 토고를 식민지로 확보한다. 이탈리아·벨기에·포르투갈·스페인도 경쟁하듯이 자기 몫을 차지한다.

태평양 연안 국가와 아시아도 분할된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 지역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간다. 네덜란드는 오래 전에 진출한 자바와 보르네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다. 독일은 뉴기니의 동북부와 솔로몬 군도를 차지한다. 영토 합병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도 스페인과 전쟁을 치러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고 괌과 필리핀을 수중에 넣는다. 러시아는 보카라, 키바, 만주의 대부분을 탈취한다. 일본은 1884~85년 청일전쟁과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과 조선을 강점한다.

1876~1915년 사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강대국들에게 완전히 분할·지배당한다. 그리하여 지구 땅의 4분의 1이 식민지로 종속된다. 영국은 영토 1300만㎢(주민 2600만 명), 프랑스는 900만㎢, 독일·이탈리아·벨기에는 250만㎢에 이르는 지역을 새롭게 획득한다. 이들보다 적기는 하지만 포르투갈·미국·일본·러시아도 영토를 상당히 확장한다.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른 영토 강탈은 이 시기를 제국주의―이 용어는 1870년대에 처음 등장한다―시대로 만든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토 쟁탈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1823년에 ‘서반구에 대한 유럽 국가의 어떠한 간섭도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고 유럽 국가들도 아메리카 대륙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경제 종속이 심화되어 남과 북의 경제 격차가 확대된다.

세계 경제는 1890년대 중반부터 호황으로 전환하여 1914년에 이르기까지 번창한다. 이 시기는 오늘날까지도 ‘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를 누린다.

세계 경제는 ‘불균등 발전’으로 중심이 다원화된다. 1913년의 산업·광업·건설의 총 생산량 중에서 미국은 46%, 독일은 23.5%, 영국은 19.5%, 프랑스는 11%를 차지한다. 독일·미국·프랑스는 철강·자동차·전기·화학분야에서 영국을 앞지르고 독일의 제조업 수출은 모든 측면에서 영국을 누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영국은 해외 투자와 상업 운송에서 여전히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여 세계 경제가 런던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고 영국 화폐(파운드 스털링)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영국은 런던의 상업·금융서비스만으로도 상품 무역에서 초래되는 적자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 자본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유럽 무역의 80%는 발전된 나라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 외의 지역에 대한 무역과 투자도 대부분은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으로 향한다.

공업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경제도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1860년대에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수출품 중 절반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900년이 되면 영국의 몫은 25%로 줄어들고 다른 유럽 나라들은 31%를 차지한다.

공업 후진국들의 경제는 선진국에 종속되면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이들 사이의 경제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부자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과 ‘남’반구에 위치한 가난한 나라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의 격차는 1830년 무렵에는 2배였으나 1913년에는 7배로 벌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로 인해 (반)식민지의 수십 억 인민은 기아에서 허덕인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우익 세력이 확대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자기 나라의 국민들에게 영광을 안겨다주고 국민들 스스로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고무함으로써 사회 불만과 계급 갈등을 완화시킨다. 군인은 ‘명예로운’ 정복 전쟁에 참가하고 성직자는 ‘미개한’ 원주민을 ‘문명화’시키는 데에서 자기 인종의 우월감을 느끼면서 우익의 근간을 형성한다. 이들은 다윈의 ‘자연 도태에 의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정치·도덕·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유럽인이 우월한 인종이며 영토 정복과 침략 전쟁은 당연하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다윈주의’는 꽤 큰 인기와 반향을 일으키면서 계급 갈등을 표현하는 데에도 쓰인다. 지배계급은 파업 가담자들을 불만에 가득 찬 원주민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제국주의는 자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인종들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단계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도 등장한다. 게다가 많은 일반 노동자와 노조 지도자들이 유색인을 백인 노동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한다. 사실 유색인들의 유럽 이민을 금지시킨 정부의 조처도 노동자들의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

나아가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영국 정부는 1902년에 ‘제국 기념일’을 제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등장한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는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감정과 분위기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킨다.

민족주의는 1800년대 내내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운동들과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동일시되는데 1870년대 들어서는 각 민족의 요구 수준이 ‘국가의 완전한 독립’으로 높아진다. 그리고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마을·부족·교구·길드·집성촌―를 잃어버린 대중들의 공허함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을 지배계급은 애국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사회적 복종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국가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만든다. 유럽의 지배계급들이 1870년대를 기점으로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을 체제 내로 흡수한 것이다. 나아가 우익은 애국주의를 독점하면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신자라고까지 부른다. 한 유태인을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 정치에 악용한 ‘드레퓌스 사건’은 민족주의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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