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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05
    대화 -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최선을 다하는 자유
  2. 2005/03/05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최선을 다하는 자유
  3. 2005/03/05
    김지하 달마展 - 가을에서 봄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유
  4. 2005/03/05
    <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인권연대
    최선을 다하는 자유
  5. 2005/03/05
    김영국, <개혁진보진영,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최선을 다하는 자유
  6. 2005/03/05
    언론매체 주소 모음
    최선을 다하는 자유
  7. 2005/03/05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참정연]
    최선을 다하는 자유
  8. 2005/03/05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서양미술 400년 한눈에
    최선을 다하는 자유
  9. 2005/03/05
    폴 크루그만 칼럼
    최선을 다하는 자유
  10. 2005/03/05
    두 개의 잣대
    최선을 다하는 자유

대화 - &quot;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quot;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대화' <1> 전순옥 vs 조주은, '여성, 노동, 그리고 삶'
  2004-05-15 오전 9:11:09
  월 2회 정도 연재될 '대화'는 대다수 대담과 달리 논쟁이 지향점은 아니다. 책이나 글을 매개로 비슷한 지향과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될 '대화'는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공통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게 목적이다. '사회적 소통의 장'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에도 좀더 충실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첫 번째 '대화'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자 노동학자 전순옥씨와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여성학자 조주은씨의 대담을 싣는다. 편집자.
  
  전순옥 이야기
  
  동대문 창신동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인 전순옥(50)씨에게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전순옥씨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씨는 22세까지 봉제의류 공장에서 일했고 그 후 노동조합 활동, 지역운동을 했다. 그녀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 2001년 런던 워릭대에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해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 ⓒ프레시안

  최근 출간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동일방직노조·청계피복노조 등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 1백여명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씨는 유학을 떠나기 전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과 성공회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동대문에서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며 "저소득층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전씨는 또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A Single Spark)을 영어로 옮긴 데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문사진상위원회 등의 한국 민주화운동사 영문 번역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뒤늦게 그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크리스 조엘(61)도 함께하고 있다.
  
  조주은 이야기
  
 
여성학자 조주은 ⓒ프레시안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인 조주은(38)씨는 국내에서 드물게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다. 노동,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조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울산 현대자동차 가족에 대한 <현대가족 이야기>(이가서 펴냄)는 올 상반기에 출간된 노동 관련서 중 도드라졌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곳인 가정은 노동 정책과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상호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우리나라의 학문 풍토에서 조씨는 일찌감치 어려운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런 선택에는 남다른 개인사도 한몫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늦깎이 운동권이 돼 만난 노동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울산에 내려가 '전업 주부'로 살았던 경험은 연구자로서 그녀를 '관찰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노동'과 '가족'을 화두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전순옥ㆍ조주은 이야기
  
  두 사람에게 공통된 이슈는 '여성'과 '노동'이다. 지난 6일 오후 동대문 '참여성복지센터'에서 첫 대면하자마자 둘은 서로의 연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대담은 시작됐다. 대담을 마치면서 전씨는 조씨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남성 연구자에 의해 경제주의적ㆍ고립적 운동으로 폄하돼 왔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은 연구 대상을 '대상화'하는 지금까지 구태의연한 연구 방법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공감을 표시했다.
  
  또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기존의 현학적 풍토에 대한 저항 의식도 비슷했다. 조씨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고, 전씨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얘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의 남성,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도 똑같았다. 조씨는 "대기업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전씨도 "영국의 노조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노조의 조직 이기주의 때문이었다"며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의 대담은 사회자가 별 끼어들 필요, 아니 끼어들 틈 없이 세 시간 넘게 계속됐다.
  
ⓒ프레시안

  대담은 지난 6일 저녁 '참여성복지터'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 폄하로 이어져"
  
  프레시안 : 전순옥 선생의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와 조주은 선생의 책 <현대 가족 이야기>는 상반기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노동 관련 책이다. 서로의 책을 읽은 소감이 있을 듯하다.
  
  조주은 : 먼저 시작하겠다.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는 있는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없었다. 2000년에 개인적인 이유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정말 한 권도 찾을 수 없더라. 일제 강점기 때 부문운동의 하나로 여성노동운동이 좀 언급돼 있고,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강주룡 열사의 얘기 등이 부분적으로 인용될 뿐이었다.
  
  이런 무관심은 자연히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남성이 쓴 많은 노동운동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5년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런 노동운동이 19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여성노동운동의 경제주의와 고립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그건 아닌데', 하면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전순옥 선생님이 쓴 이 책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전순옥 : 나는 일단 <현대가족 이야기>라는 제목이 참 좋더라. 현대에 살고 있는 가족이 파괴되고 있잖아. 난 제목만 보고도 많이 사서 볼 것 같던데. (웃음) 책은 많이 팔렸나?
  
  조주은 : (웃음) 거의 안 팔렸다.
  
  전순옥 :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많은데 실제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구체적 삶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이 참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이론을 사용하기보다는 책에서 서술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그대로 반영하려는 노력, 그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 것도 참 좋았다.
  
  조주은 : 글을 쓸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순옥 : 그런 부분이 나랑 맞았다. 내 책의 주인공들도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전에도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도대체 내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서 인터뷰하는 게 싫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직접 자기 얘기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나는 학자라기보다는 노동자 출신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좀더 유리했고.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도 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대상화한 것은 오류"
  
 
ⓒ프레시안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면서 상대방의 연구에 이견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나?
  
  전순옥 :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됐다. 그들은 아시아 여성노동자들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겪은 희생을 보면서, 여성노동자들을 '희생자로 개념화((victimization)'하곤 한다. 대부분이 이런 접근인데 나는 이렇게 제3세계 여성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3세계 여성들은 무조건 순종적이면서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을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떨쳐 일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의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그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접근이 좀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현대자동차 노동자이긴 하지만 그도 노동자 출신은 아니지 않느냐, 조주은 씨도 마찬가지고. 그러다보니 조주은 씨도 노동자 가족들 속에 파묻히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게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
  
  조주은 : 물론 그런 측면에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사실 울산에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다. 나는 남성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성찰할 부분이 있다면 성찰하고, 너무 일상이나 관성에 젖었던 자기들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스스로 객관화시켜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기를 바랐는데...... 남성 노동자들은 아예 안 읽더라. 남편 동료들한테 책에 대해서 물어보면 말을 안 한다. 왜 자기들 사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우리를 죽일 놈을 만드느냐, 자본가를 욕하고 기업을 욕해야지 왜 우리를 비판하느냐, 이런 식이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도 책을 보면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고 애기했다. 한 여성은 나한테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내 남편이 생산직 노동자가 맞긴 한데 그 책을 보니까 갑자기 내 처지가 서글퍼지더라"고 불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연봉 4~5천만 원씩 받지만 그래봤자 결국 너희는 노동자다, 이렇게 규정하는 게 불편해 보였다.
  
  전순옥 : 실제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까놓고 얘기하는 건 안 좋아한다는 얘긴데, 그게 일반 노동자의 의식이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임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정작 스스로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라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갑갑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렇게 임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은 예외적인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주은 : 이견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될 텐데, 선생님 책을 보면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된 국내 여성학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전순옥 :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은 없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평우회, 여성민우회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성학자들은 1970년대 '여성들이 여성의식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서 단체교섭을 할 때 여성만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거나, 여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은 없었다는 둥. 이런 비판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조금은 무책임한 것이다. 자기들은 그 때 뭘 했나?
  
  프레시안 : 그 당시 여성노동운동을 살펴보면 여성노동자들의 '생활 공동체' 같은 게 존재했다. 그런 모습을 '자생적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순옥 선생님도 '한국적 페미니즘'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여성노동운동은 어떻게 10년을 버텼나"
  
 
ⓒ프레시안

  전순옥 : 그렇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어떻게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10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지적한 그런 데서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연구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해준 것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것보다는 바로 이런 부분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너무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말순이, 섭섭이, 끝단이, 큰년이, 막내로 불리다 공장에 오니까 시다 1번, 미싱사 3번으로 불렸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위원장, 교육선전부장 등 직함으로 불리고. '아, 나한테 이름이 있었구나', 이렇게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자아, 존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공장에서 사장들하고 단체교섭을 하면서 사용자가 "미스 리"라고 부르면 "내 이름은 이총각이고, 지부장이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고 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아 노동조합이야말로 나의 자아를 지켜주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데 헌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프레시안 : 그런 점과 연관해서,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순옥 : 맞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과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개인적으로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하는 성향(individual-oriented)이 있고 여성은 같이 하려는 성향(group-oriented)이 있다고 설명된다. 노동조합 운영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남성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려다 보니 굉장히 비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운영할 때 모든 것을 조합원들과 같이 의논했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조합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려고 했고. YH노조의 최순영 씨 같은 사람은 조합원 3천 명의 이름을 다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단체교섭을 할 때는 '빠다 조건'이라는 게 있다. 노조 지도자가 사용자한테 이번에 임금을 10%에서 1%를 더 올려주면 내가 노동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노조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겠다고 물밑 협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조합원들한테 는 '당신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뽑아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임금을 1% 더 올리겠다'고 말하고.
  
  근데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단체교섭을 할 때 임금 인상률을 지도부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과 함께 결정했다. 1970년대에는 소그룹이 많았는데, 그런 소그룹에서 '이번에 우리가 임금을 얼마를 올려야 하는지' 자기들끼리 논의를 한다.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률을 15%로 결정되면 집행부가 논의를 해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한 결정을 내리고, 공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간부들은 교섭에 들어가서 반드시 15%를 올려야 한다. 조합원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다른 '빠다 조건'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조합원들은 그들대로 내가 주장한 15% 인상을 간부들이 사용자와 교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도부에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여기서 지도부는 또 싸울 용기와 힘을 얻는다.
  
  "혼자 결정하다 보니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돼"
  
  조주은 : 동감한다. 남성 노조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런 얘기들이다.
  
  전순옥 : 맞다. 그런 남성 노조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달려가다 보니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된다. 어용이 되기 쉽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노조를 완전히 어용화시켜 조정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들 몇 명만 잡고 있으면 노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런 분위기 탓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들이 중심이 된 노조는 그럴 수 없고, 비타협적이어서 오히려 박정희한테 큰 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는 민주노조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YH노조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할 때 겨우 여성 2백여 명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관여를 하지 않았느냐. 그만큼 그들의 행동을 큰 타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두 사람을 회유하는 것으로 안 되니까 뿌리째 뽑아서 노조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바로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만들어냈다.
  
  조주은 : 당시에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남성노동자들이 앞장서 방해했었다. 구사대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였고 여성노동자가 출근 투쟁할 때 위협을 가하고, 머리채를 잡으며 폭력을 가했던 게 다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선생의 연구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전순옥 : 섬유나 방직 산업에서도 총 4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남자는 한 5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1천3백 명 있는 공장에서 남자는 1백 명 정도가 있었고, 나도 당시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당시 남성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당했느냐, 같은 노동자들에게 당하는 게 더 분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대답이 놀라웠다. 그들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성노동자들도 결국 사용자에게 고용된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오히려 그런 남성노동자들을 노조 지도부에 넣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계급의식이 훨씬 강했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로 끌어가지 않았다. 만약에 그 남성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자본가들이 바랐던 '노-노(勞-勞) 갈등'이라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록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진 것은 그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 노동운동 썩었다"
  
  프레시안 : 현재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다. 두 분의 연구는 현재 이런 노동운동 경향에 대한 아픈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조주은 :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 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울산에서 직접 보고 들은 차마 얘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집행부를 장악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남성 노동운동가들도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 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오히려 나는 노동운동의 희망이 지금 현재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있는 노동자들의 활동 속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 되지 않는 것이다.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은 결코 자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임금을 조금씩 올려 받으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된 노동자라면 그런 것들을 오히려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임금을 올려 받아도 자본가처럼 잘 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그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임금이 올라가면 자연히 노동조합의 힘은 없어진다. 어느 정도 임금이 되면 노동자 동료들과 함께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각종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노조가 집회를 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영국 노동운동 조직이기주의로 망해. 현 대기업 노조 권력 다툼에 몰입"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국 노동운동이 망했다고 본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비정규직이나 여성노동자들 등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데 등한시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소외됐다.
  
  그것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게 바로 대처다. 1980년대 대처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줄여야 했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국영기업을 사기업으로 만들면서 구조조정을 통해 한 사업장에서 반 수 이상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영국의 노조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이런 공세를 당한 데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영국에 처음 간 1990년 초에 노동자 대회를 갔는데, 2백 명이 참석했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성공할 때가 있고 기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도 이런 것을 똑바로 배워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은 :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서로 조직의 권력을 잡는 데 몰두해 있다. 민주노총 현대자동차 노조 자유게시판을 한번 봐라.
  
  내가 남편하고 5년 정도를 떨어져 있었다. 남들이 남편이 '바람'을 필지도 모른다면서 걱정하곤 할 때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혹시 다른 여자하고 그런 일이 있다면 바로 자유게시판에 뜬다. 눈에 띄는 신인 노동운동가가 부인하고도 떨어져 있는데, 저 뒤를 캐면 속한 조직에 흠집을 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감시를 하는 거다. 남편이 속한 조직의 상대편 조직 사람들이 내 남편을 지켜주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웃음)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우에는 이번에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나왔기 때문에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다. 다음 현대자동차 노조 위원장을 하는 것은, 이후에 누가 울산 북구 국회의원을 하느냐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 말로 못하는 사정들이 너무나 많다.
  
  전순옥 : 사실 우리 노동운동 속에 보기에도 민망한 추악한 계파 싸움이 있다. 다들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명하지만 사실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지 노동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안다. 서로 자기 정파를 살리기 위해서 내분을 하고, 그 때문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던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하고.
  
  이렇게 지도부가 계파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조합원들과 지도부의 괴리감이 커진다. 지도부가 뭘 하고 다니는지 조합원들이 모른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없던 '지도부 불신임'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속에서 노동운동의 노하우가 축적이 안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도부는 능력 없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더 계파 싸움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프레시안 : 조주은 선생의 남편도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가였다. 남편은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조주은 : 남성노동자들을 너무 비하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걸린다고 얘기했다. 예를 들면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인 시선으로 대한다", 이런 단정적인 표현을 "그러기 쉽다" 이렇게 고치는 식으로. (웃음)
  
  전순옥 :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여성은 18명을 인터뷰했는데, 현대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수는 적다. 일부러 아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 얘기를 쓴다고 해도, 부부 양쪽 얘기를 같이 들으면 내용이 더 풍부해졌을 텐데, 왜 그랬나? 남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 아니면 의도적이었나?
  
  조주은 : 약간 의도적이었다. 이 연구를 하기 전에 울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부부를 같이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부인은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거 보면서 같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똑같은 사안을 놓고 부부를 동시해 인터뷰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일 텐데, 울산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 남자들은 대개 "나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너는 뭐라고 했느냐. 너한테 이런 질문 할 테니 이렇게 답해라", 이런 식으로 아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내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프레시안 : 혹시 서로의 책을 읽으면서 세대차나 또는 시각차는 없었나?
  
  조주은 :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전순옥 선생의 책은 남성적 시각이 주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책 전체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노동자 중에도 가장 힘없는 노동자에 마음 가. 그게 바로 여성노동자"
  
  전순옥 : 이 책을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성주의자인지 안다. 또 여기 창신동에 와서 '참여성노동복지터'를 하고 있어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냐'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말한다. (웃음) 페미니즘을 거부하기 때문은 아닌데 어쨌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노동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노동계급의 성향이 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 같은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노동자 쪽에 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항상 그곳에는 여성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괜한 것을 물은 것 같다. 그럼 상대방에 대한 조언이나 바람이 있을 법하다.
  
  전순옥 : 나는 오늘 조주은 선생이랑 같이 얘기를 해보니까 앞으로 같이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 뚜렷해졌다.
  
  앞으로 빈민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한번 해보고 싶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방점은 다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일을 거라고 기대된다.
  
  조주은 : 나도 그 네트워크에 꼭 끼워 달라. (웃음) 나는 전 선생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한 게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는데 거기에 '여성학자 조주은'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때 기분이 참 묘했다. 내 자신부터 여성학자라고 규정되는 게 당혹스러웠다.
  
  나는 전순옥 선생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하는 일이 가장 앞서가는 여성주의적 실천과 연구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목소리 대신 알려주는 게 내 할일"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전순옥 : 내가 연대하고 싶은 사람들, 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었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을 일했고, 얼마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가 하나도 없다. 기존의 통계들은 너무나 공평하지 못하고 자의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은 통계마저도 거부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도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통계, 아니 우리들의 통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내 꿈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마쳤을 때, 그 학교에 자리가 났었다. 사실 고민하면서 영주권 신청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마침 성공회대학에 연구교수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됐는데 거기도 딱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내가 원래 이 지역에서 여성노동자 공동체, 탁아소를 했다. 이제 외국까지 가서 박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까 주변에서 '박사까지 하고 이걸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로 박사까지 했기 때문에 꼭 여기로 돌아와야 했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오빠는 70년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보잘 것 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에 아무도 귀를 안 기울였다. 만약 전태일이 대학생이었어도 그랬을까?
  
  여기서 1960~70년대부터 노동을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16시간씩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니까 인터뷰도 하고, 한마디 하면 신문에도 실리고 그러더라. 그게 바로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주은 : 나는 아직 학위 과정 중에 있으니까 큰 포부를 말하기는 좀 어렵다. 다만 노동자 가족 문제에 계속 천착해 들어갈 생각이다. 솔직히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 안에서도 가장 상층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 연구해보고 싶다. 또 민족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 홀대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
  
  "권력 가진 이들의 정체된 의식이 사회의 정체 낳아"
  
 
  조주은.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각자 영역에서 두 분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나.
  
  전순옥 : 요즘엔 현대 사회와 가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곤 한다. 가족이 어떤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끈끈한 가족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 동안 많이 변했더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열중하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 사회도 거시적인 것보다는 좀더 미시적인 접근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했나. 왜 우리가 그렇게 혁명을 목소리 높였나. 바로 내 삶을, 또 이웃들의 삶을 좀더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나?
  
  그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가치관을 어디다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부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때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를 점검한 다음에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조주은 : 질문에 답하기가 막막했는데 전순옥 선생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이 온다. (웃음) 우리 사회는 현재 엄청난 변화와 정체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서 여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고, 그가 이혼했다는 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
  
  난 두 아이 엄마인데 큰 애가 '가정환경 조사서'를 갖고 왔다. 너무 놀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그 양식 그대로더라. 여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좀더 힘 있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된 의식이 바로 사회의 정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고 힘을 가진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고.
  
  변화의 가능성과 과거의 정체가 혼돈돼 있는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사람들부터 우선 변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사회 남성들부터 조금씩 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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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물 없이 지낸 아바나의 첫 밤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
  2005-02-15 오전 11:48:51
  <프레시안> 뉴욕 통신원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가 3주 일정으로 쿠바와 볼리비아 현지 취재를 떠났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와 문제점, 미국-쿠바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고, 볼리비아에선 체 게바라의 무장 게릴라 근거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실패한 투쟁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새겨볼 계획이다. 이 현지취재는 시사월간지 <월간중앙>과 공동협찬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입국 비자 필요 없고 여행자 카드로만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중심이 돼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혁명(1959년)이 올해로 46년을 맞는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지도 벌써 37년을 넘겼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래 지금껏 쿠바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아직껏 이루지 못한 혁명과제들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쿠바혁명을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도록 만든 요인들인가. 중남미를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온 초강대국 미국은 쿠바에게 어떤 존재인가. 쿠바의 일반 민초들과 지식인들은 쿠바혁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아울러 미국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체 게바라가 지구촌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오늘의 쿠바를 어떻게 평가할까.
  
쿠바 아바나 시내 전경 ⓒ김재명

  이런 물음표들을 지닌 채 쿠바 아바나 국제공항에 닿았다. 출입국 사무를 맡은 관리는 여권에다 쿠바 입국 사실을 나타내는 도장을 찍지 않는다. 그 대신 '여행자 카드'라 일컬어지는 조그만 입국서류에다 도장을 찍는다. 쿠바로 가기 전부터 이 여행자 카드 문제로 신경을 써야 했다. 쿠바 여행 안내책자엔 "쿠바 입국 비자를 받아도 되는 대신에, 이 여행자 카드를 들고 가야 한다"고 돼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외교관계도 없는 쿠바에 들어가려면, 문제의 여행자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미국 식민지 유산을 지닌 건물들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있다. 건물 앞 차량들은 아바나 특유의 2인용 '코코' 택시들. ⓒ김재명

  미국에서는 쿠바행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다.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야 한다. 미 부시행정부는 미국인들의 쿠바행을 막기 위해 그런 원칙을 지키도록 여행사와 항공사에게 강요한다. 미국 안에 있는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 표를 사려 해도 불가능하다. 결제과정에서 구매자가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캐나다항공에 전화를 걸어 표를 사려 해도, 미국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알면, "전화를 그만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필자에게 쿠바행 비행기 표를 판 캐나다의 한국인 여행사가 여행자 카드에 관한 정보에 대해선 깜깜했다는 점이다. 쿠바행에 대해 물어오는 한국인 손님이 그만큼 드문 탓이기도 했다. 답답했다. 필자의 쿠바 취재길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행기 표를 산 K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캐나다의 쿠바 대사관에까지 전화를 걸어 "토론토 공항에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기 바로 직전, 공항 출구(gate)에서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그냥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서울로 K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국여행사로부터 6만원을 주고(택배료까지 합쳐 7만원) 그 서류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와아! 항공사에서 거저 나눠주는 서류를 6만원이나 받고 팔다니....쿠바로 떠나는 날 아침 토론토 공항 출국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문제의 그 여행자 카드란, 인천공항에 들어오기 앞서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입국신고서처럼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과 주소 따위를 적어 넣는 아주 간단한 서류였다. 쿠바에서 머물 주소는 일반적으로 아바나에 있는 호텔(Hotel in Havana) 쯤으로 적어 넣으면 됐다.
  
  쿠바가 입국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여행자 카드라는 이름의 간단한 출입국 신고서로 갈음하는 까닭은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과 직접 관련된다. 쿠바의 주요 외화벌이 재원(財源)이 관광산업이다. 해마다 1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고 있다. 기후가 좋고 해변 휴양지가 많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 들어 미국은 쿠바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카스트로 체제 전복과 쿠바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에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인이 멕시코나 캐나다를 거쳐 몰래 쿠바를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 최고 25만 달러의 벌금, 징역 10년을 살도록 돼있다.
  
쿠바는 미국에서 이미 폐차된 지 오래인 중고자동차들의 박물관이라 일컬어진다. 1950년대 만들어진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다니며, 고장 나 길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흔하다. ⓒ김재명

  미국 달러에 매기는 10% '카스트로 혁명세'
  
  법대로라면 미국인의 쿠바여행길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모험이다. 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다 운 없이 쿠바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미국인은 일반적으로 벌금 7천5백달러를 문다. 카스트로 정권은 그런 미국인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쿠바를 다녀올 수 있도록 여행자 카드에만 입국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곤 공항 출국심사장에서 여행자로부터 도로 그 서류를 걷어간다. 따라서 여권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대중교통수단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터라, 2인용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김재명

  우리 한국인들이 쿠바로 미국 달러를 그냥 들고 들어갔다간 손해를 본다. 아바나 공항에서 일부 외국인들은 '카스트로 혁명세'를 바쳐야 한다. '혁명세'란 용어는 물론 없다. 사정을 잘 모르고 미국 달러를 갖고 입국한 사람들이 공항 환전소에서 달러를 현지 화폐로 바꾸려 하면, 10%를 무조건 뗀다. 달러가 아닌, 유로나 엔화를 갖고 들어가면 모두 제값을 쳐서 환전할 수 있지만, 달러는 90%만 값을 쳐주고 10%는 공제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런 특이한 제도가 시행됐다. 카스트로 정권의 설명은 "쿠바를 달러경제의 압박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다.
  
  아바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는 '20달러'의 정액요금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달러'는 미국 달러가 아니다. 카스트로 정권이 지난해 11월 만들어낸 새로운 화폐인 '전환 페소'(Converted Peso)다. 이 돈의 가치는 미국 달러와 거의 같지만, 정확히 말해 10% 더 세다. 100 미국 달러를 환전소에 내면, 90 전환페소를 받는다. 그렇지만 쿠바 현지인들은 이를 그냥 '달러'라 일컫는다. 일반 쿠바국민들은 '모네다 나시오날'(moneda nacional)이란 이름을 지닌 '쿠바 페소'를 주고받지만, '전환 페소'도 함께 쓴다. 시골지역으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카페로 갈수록 '쿠바 페소'가 많이 쓰인다.
  
  우중충한 건물들, 몇십년 된 자동차들
  
  카리브해를 끼고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아바나는 얼핏 보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다. 바닷가를 따라 8km 길이의 말레콘(Malecon) 도로는 서울로 치면 강변도로같은 것이지만, 한켠에 인도를 만들어 연인들의 산책로로선 제격이다. 이 말레콘 도로를 건설한 이는 쿠바인들이 아니다. 1901년 쿠바를 식민지로 다스리던 미국인들이다. 아바나 시내 곳곳에 세워진 대리석의 멋진 건물들도 미국이 쿠바 식민통치를 위해 지은 것들이 많다(서울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중앙청 건물이나 시청 건물이 일제가 지은 사실과 마찬가지다).
  
아바나의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모습이다. ⓒ김재명

  이 글 앞 문장에서 아바나를 가리켜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도시로 들어가면, 결코 아름답지는 못하다.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 그런 건물들이 있다면, 벌써 페인트를 새로 칠했거나 허물어 버렸을 것들이다. 그런 건물들 속에 사는 이들은 방 하나를 여러 사람이 같이 나눠쓴다. 인구는 갈수록 늘어가지만, 주택을 새로 짓지 못하는 탓이다. 나중에 쓰겠지만, 아바나에 사는 한국인 교민(농업노동자로 80년전 이민 온 한국인의 후손) 집에 갔다가, 너무나 처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쿠바의 여인들.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가난하기에 옷 한 벌로 몇 달을 버티는 여인들도 많다.   ⓒ김재명

  아바나의 차량들도 오래된 것들이라 매연을 시꺼멓게 뿜어댄다. 1950년대에 생산된 미국 승용차들이 버젓이 굴러다니는 것이 아바나이고 쿠바다. 그래서 쿠바는 '세계 중고 자동차 전시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길 한가운데 멈춰 본네트를 열고 수리중이거나, 뒤에서 여러명이 차를 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리에서 우리 한국의 중고자동차들도 많다. 구형 소나타에서 티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자동차들이 아바나 길을 메우고 있다.
  
  멕시코를 통해 들여온 이들 한국 자동차들은 쿠바에선 '좋은 차'로 꼽힌다. 워낙 미국차들이 낡은 탓에 상대적으로 새차라서 성능이 낫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전세내 타고 다녔던 차도 현대자동차의 구형 소나타. 운전기사 헤르난데스는 "이 차가 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부속품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언젠가 소나타가 고장 나면 다른 차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의 부품은 쿠바에서 대용품을 자체 개발해 쓰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아바나에서의 첫 밤은 세수는커녕 발도 씻지 못했다.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호텔 쪽 설명으론 그 지역 일대에 수돗물이 끊겼고, 낡은 수도관 탓에 그런 일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호텔 종업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에게 물이 안나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경제 체제 아래 쿠바는 모든 것이 국유다. 부동산 개인 소유는 없다. 오로지 그 집에서 살 권리만 있다. 호텔도 국유고, 따라서 호텔 종업원들은 '국가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안나와 손님이 불평을 하면, "다른 곳을 찾아봐라"는 정도지, 어디선가 물을 날라다 주려 애쓰는 눈치는 전혀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여러 모로 이번 쿠바 취재길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애써 지우며 아바나의 첫 밤을 넘겼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2>
  2005-02-18 오전 10:13:20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900km.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미 해군기지가 있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타고 13시간 걸려 산티아고 드 쿠바를 가서, 다시 택시를 전세내 1시간30분을 달려 관타나모에 닿았다. 애당초 계획은 아바나-관타나모 사이를 하루 1회씩 오가는 국내선 비행기(비행시간 2시간30분)를 타고 가려 했다. 여행사에 가서 알아보니 앞으로 보름 동안엔 여유분 좌석이 없이 모두 팔린 상태였다. 비행기는 소형인데, 찾는 이는 많아서 그렇단다. 나중에 관타나모에서 들은 얘기로는, 예약된 비행기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호기심으로 관타나모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6시에 떠나 밤새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겨야 했다. 버스 안에는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쿠바의 시외버스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아솔(Viazol), 다른 하나는 아스트로(Astro). 비아솔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선진국 수준의’ 높은 요금을 받는다. 쿠바 현지인들도 비아솔 버스를 탈 수는 있지만,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난 비아솔에 비해 훨씬 값이 싼 아스트로는 쿠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수단이다.
  
  말이 ‘대중교통수단’이지, 쿠바 사람들이 아스트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면 적어도 한달, 길게는 두세 달씩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타려는 사람들에 비해 버스 대수가 많지 못한 탓이고, 이웃나라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의 우호적인 원유공급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쿠바의 기름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쿠바-베네수엘라-미국의 미묘한 3각관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교육-의료는 천국, 교통은 지옥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가까운 쿠바군 검문소 앞에 놓인 쿠바국기와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흉상. ⓒ김재명

  카스트로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사람들은 큰 변화를 실감해왔다.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시절 미국인들은 쿠바 농지의 3분의 2를 소유, 현지 쿠바인들을 소작인 또는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부려왔다. 카스트로는 그런 농지들을 모두 몰수, 국영농장으로 바꾸었다. 바티스타 정권 아래선 돈을 가진 집안에서만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으나, 카스트로 혁명으로 초중등 교육은 물론 대학교육까지도 거저가 됐다. 공부할 능력과 의욕만 있다면, 돈이 없어도 대학을 다닐 수 있다. 그런 덕에 현재 쿠바의 문맹율은 제로에 가깝다. 의료혜택도 쿠바혁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입원비가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었다더라“는 얘기는 적어도 쿠바에선 들을 수 없다(쿠바의 교육과 의료체계에 대해선 이 연재에서 별도의 꼭지기사로 다시 다룰 예정이다).
  
  쿠바혁명의 그런 바람직한 성공사례와는 대조적인 부분들이 있다. 도로, 교통, 인터넷, 수도, 전기,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인프라)이 아직은 제대로 구축돼 있지 못하다. 특히 교통 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사회주의 통제국가인 쿠바는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다. 수도 아바나에 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이사갈 수가 없다. 평양에 살고 싶다고 신의주 사는 주민이 이삿짐을 맘대로 꾸릴 수가 없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사를 가고자 하는 쿠바 사람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자리가 바뀌는 등 나름의 그럴듯한 사유를 제시하지 않을 경우, 거절당하기 십상이다.
  
  단기간의 여행은 허가 없이도 떠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동수단이 간단치 않다. 앞에서 적은 대로 아스트로 버스를 타려 해도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기차표 얻기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쿠바에서 오토바이는 아무나 타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경찰이나 업무상 필요하다고 인정된 경우에만 오토바이를 탈 수가 있다. 주말에 경춘가도를 따라 질주하는 즐거움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행위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해악으로 여겨진다. 쿠바 경찰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도 한국 경찰처럼 크지 않아 기름 소비가 적은 것들이다.
  
  아바나 시내를 굴러다니는 1950년대 미국 차들은 너무 낡아 장거리는 엄두를 못 낸다. 이래저래 적절한 이동 수단을 찾지 못한 쿠바 사람들은 지나는 트럭을 세워, 짐칸에 서서 가기도 한다. 산티아고 드 쿠바에서 관타나모로 가는 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빼곡히 실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드 쿠바와 관타나모 사이는 85km. 차로 달리면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비아솔이나 아스트로 버스 모두 두 차례만 오간다. 급한 일이 생긴 사람은 트럭에 올라 타거나 쿠바인들의 소득(월평균 10달러 미만)에 비해 턱없이 비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바가지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관타나모 왕복에 85전환페소(지난번 글에 썼듯, ‘혁명세’ 10%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95달러)를 냈다. 이만한 돈은 쿠바 서민들의 열달치 소득이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전경. ⓒ김재명

  (독자 여러분들이 설마 하고 놀라겠지만, 쿠바인들의 소득수준은 너무 낮다. 경찰과 청소부 등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직종이 가장 많이 월급을 받는데, 그 수준이 30달러다. 대학교수와 의사가 20달러, 나머지 대부분의 직종은 10달러 안팎이다. 식량배급카드로 국가로부터 밀가루, 식용유, 설탕 등을 거저 공급 받아 생활비가 덜 든다. 그러나 그만한 소득으로는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냉장고나 텔레비전 등 상대적으로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나름대로 ‘요령’을 익혀왔고,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를 ‘생존술’이라 정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보겠다.)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캠프 델타 포로수용소. 같은 관타나모 기지 안이라도, 미 해군기지와는 따로 떨어져 있다. ⓒ김재명

  노래 ‘관타나메라’와 호세 마르티
  
  고구마처럼 동서로 길게 뻗은 쿠바의 동쪽 거의 끝부분 남쪽에 자리잡은 관타나모는 인구 20만의 제법 큰 지방도시. 관타나모란 이름 자체는 노래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관타나모 아가씨, 촌뜨기 관타나모 아가씨)로 우리 귀에 익숙한 편이다. 지난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널리 알려진 '관타나메라'는 오래 전부터 쿠바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떠올린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는 쿠바 시인이자 독립영웅으로 식민지 군대인 스페인군에 사살됐던 호세 마르티(1853-1895)다. 쿠바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마르티의 동상과 마주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카스트로 사회주의 혁명정권도 호세 마르티를 인민영웅으로 떠받들어 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와 연결시켜 풀이한다. 한 마디로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보는 쿠바군 관할 고지로 오르기 위해, 그곳 군부대가 설치한 초소 앞에 갔을 때도 마르티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 보도록 쿠바군 관할 고지에 설치된 망원렌즈. ⓒ김재명

  2001년 9.11 사건 뒤 6백명 넘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들을 재판도 없이 가두어놓은 채 인권 침해시비를 낳아온 미 해군기지는 관타나모 도심지와는 뚝 떨어진 관타나모만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쿠바 취재를 계획했을 때부터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자체를 취재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곳은 전세계 미디어의 사각지대다. 부시행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의 보수적 TV 매체 팍스 뉴스(Fox News)조차도 관타나모를 직접 취재하진 못했다. 그저 펜타곤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받아쓸 뿐이다. 그런 관타나모 기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다.
  
  고지에 오르려면 적어도 하루 앞서 지정된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해야 한다. 수수료는 5달러(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환 페소’). 이 이 5달러도 쿠바정부로선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원처럼 느껴졌다. 9.11 뒤 관타나모는 관광상품으로 떠올랐다. 그곳 고지에서 필자를 맞이한 쿠바인 안내원은 군인이 아닌, 쿠바 관광청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단체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 대꼴로 온다.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지만,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고지에서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바라보는 광경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필자가 갖고 간 300mm 렌즈로는 기지 안에서 오가는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어려웠다. 고지에 붙박이로 설치해놓은 전망대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내원 설명에 따르면,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사람 걸어가는 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은 햇살이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맑은 데도 그렇질 못했다. 현재 해군기지 안에는 군인 1천명, 관련 미국인 2천명이 머물고 있다.
  
  “혁명으로 미군 상대 술집과 창녀 사라졌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는 주권국가인 쿠바 영토 안에 파고든 미국 점령지다. 지난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더불어 쿠바를 빼앗으면서, 관타나모만 일대는 미 해군기지로 개발됐다. 쿠바가 1903년 ‘형식적인’ 독립국가로 됐을 때, 관타나모는 영구임대 계약으로 미국에 넘겨졌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국은 쿠바인들에게 영원히 미군 점령지역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미국의 쿠바내정 개입을 인정하고 독립을 얻을 것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쿠바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내정간섭을 합법화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택했다).
  
1950년대 미군 술집과 창녀들로 흥청댔던 관타나모 시가지. 카스트로 혁명으로 술집과 창녀들은 모두 사라졌다. ⓒ김재명

  미국은 해마다 금화 2천개(지금의 화폐가치로 4천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관타나모 기지 임대차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계약 쌍방이 함께 계약을 끝내기로 서로 합의했을 경우에 한해서만(if both parties mutually consent to terminate the lease)' 쿠바인들이 관타나모 기지를 돌려받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관타나모 기지는 영원히 미국인 것이다.
  
  1959년 1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불평등계약조건은 문제가 없었다. 쿠바혁명 뒤 카스트로 정권은 계약 파기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합법적으로 임대계약을 맺었는데 무슨 소리냐. 계약서를 잘 들여다봐라”며 딴전을 펴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혁명이 성공한 바로 뒤 미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소규모 총격전마저 벌였다. 그런 긴장관계 속에 쿠바정부는 미국이 해마다 관타나모 기지를 빌린 대가로 보내오는 4천달러 짜리 수표를 은행에 돌려 현금화하지 않았다.
  
  관타나모 사람들은 미 해군기지를 복합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했다는 고메스(67)를 시내에서 만났다. 그는 1950년대 관타나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전에 관타나모 시내엔 미 해군들로 늘 흥청댔다. 그들 때문에 이 지역경제가 흥청대긴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술집이 즐비했고, 창녀들이 많았다. 술 취한 병사들이 지나는 여인들을 희롱하는 일도 잦았다. 쿠바혁명으로 그런 모습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게 참 다행스런 일이다” 관타나모 주민들은 9.11 뒤 볼썽사납게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채 인권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 해군기지가 하루 빨리 쿠바에게 반환돼, 쿠바 해군기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혁명 근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3>
  2005-02-23 오후 5:28:42
  쿠바에선 체 게바라를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거리엔 대형 게바라 초상화가 내걸려 있고, 곳곳에 게바라 관련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카리브 해의 파도가 시원스레 넘실대는 풍경이 바라보이는 아바나 고급호텔의 벽걸이 그림도 게바라다. 빈민가가 들어선 아바나 비에하 지역의 곧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안에 옹색하게 사는 도시빈민의 방에서도 게바라의 눈길과 마주친다. 지난 1967년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던 볼리비아에서도 쉽사리 체 게바라를 만난다. 볼리비아 내륙 제2의 도시 산타 크루즈의 토산품 가게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체 게바라 티셔츠와 그의 얼굴을 새긴 나무조각품들이 늘어서 있다.
  
  쿠바와 볼리비아뿐 아니다. 지구촌 어딜 가나 체 게바라와 만난다.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브랜드라 할 별 달린 모자를 쓴 젊은이들, 가슴에 그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긴 여인들, 그리고 평전을 비롯한 수많은 게바라 관련 책자들, 그의 얼굴을 담은 목걸이, 시계, 재떨이....지난해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다시 한번 대중의 가슴에 다가왔다.
  
  쿠바혁명 이어 남미혁명의 꿈
  
 
볼리비아 산악지대의 체 게바라 활동 근거지를 가리키는 팻말 ⓒ김재명

  1928년 6월 14일생인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스네스토 게바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중상류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였다. 1950년, 1953년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길에서 게바라는 빈곤층 민중들의 고단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생각하게 됐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멕시코 툭스판에서 쿠바 정치망명객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그러나 정부군 기습을 받아 1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게바라가 이끄는 일단의 무장군은 1958년 12월 28일 치밀한 작전과 대담한 공격으로 쿠바 중부도시 산타 클라라를 점령, 쿠바혁명 성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바로 뒤 바티스타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9년 1월 2일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를 접수했다. 그 뒤 1964년까지 게바라는 국제사회(특히 제3세계 비동맹권)으로부터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힘썼다. 유엔을 방문해 연설하고 러시아, 중국을 찾았다. 1960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에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을 이끌기 위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보내고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였다. 6개월만에 아프리카에서 비밀리에 쿠바로 돌아온 게바라는 다시 볼리비아를 남미혁명기지로 삼기 위한 준비작업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1966년 11월 3일 변장한 채 위조여권으로 라 파즈 공항을 거쳐 볼리비아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11월7일 낭카와수 강변의 혁명기지에 닿았다.
  
1966년말 낭카와수 강변에 세워진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 ⓒ김재명

  낭카와수 강변에 남미 혁명기지 세워
  
  체 게바라가 남미혁명의 꿈을 가슴에 품고 볼리비아에 설치했던 근거지는 남미대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산맥의 기슭이라 할 저지대인 낭카와수 강변.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외딴 지역이다. 그곳을 찾아가려면, 먼저 산타 크루즈에서 버스를 타고 6-8시간쯤 남쪽으로 달려 ‘라구아니스’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가까운 곳에 흐르는 낭카와수 강. 리오 그란데 강의 지류다. ⓒ김재명

  중남미에서 아이티와 더불어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나라가 볼리비아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연 9백 달러도 안 된다. 그러니 도로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투자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비만 조금 왔다 하면, 도로가 물에 잠기거나 끊기기 십상이다. 버스 승객들마저 힘을 합쳐 파인 도로를 흙이나 나무로 메우는 작업을 거듭하며 나아가곤 했다. 오후 1시에 산타 크루즈를 떠난 버스는 예정 도착시각 7시를 넘겨 밤 10시에야 라구니아스에 닿았다.
  
  문제는 다음날이다. 숙소에서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그치길 마음 졸이며 바라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이다. 숙소 주인의 주선으로 마을 주민으로부터 브라질산 4륜 구동차를 빌렸다.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급한 사정으로 현장에 함께 갈 수는 없다”는 말에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볼리비아 군에 입대했다가 휴가차 나왔다는 주인집 아들과 그 남동생이 안내자로 따라 붙었다. 게바라가 설치했던 혁명근거지는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 이 지역 일대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의 한 지류인 낭카와수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까지 닿는 데도 거의 3시간이 걸렸다. 비포장 도로 곳곳의 비포장 도로가 밤새 내린 비로 무너져 내렸거나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탓이었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에 살고 있는 볼리비아 원주민. ⓒ김재명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는 지금 누군가의 농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현장에 들어서니, 남루한 옷을 입은 소작인 부부가 맞아준다. 그들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닌다. 그 꼬마에게 “체 게바라!”라고 말을 건네자, 그도 잘 알고 있다는 듯 환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해 가느다란 손을 쭉 내민다. 체 게바라는 그곳에 함석지붕으로 된 가건물을 지어놓았다. 그래서 그 혁명기지는 게릴라들 사이에 통칭 ‘함석집’(zinc house)으로 일컬어졌다.
  
  볼리비아 현지세력과의 갈등
  
  체 게바라와 함께한 게릴라는 모두 50명. 국적별로는 쿠바인 18명(체 게바라 포함), 페루인 3명, 볼리비아인 29명이었다. 총인원이 50명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은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과의 협력이 이뤄지지 못한 탓이었다. 1966년 12월 31일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가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을 비밀리에 방문, 체 게바라와 마주 앉았다. 몬헤는 “볼리비아 땅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은 내가 지도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체 게바라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몬헤는 이미 게바라 대열에 합류한 볼리비아 출신 게릴라들에게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당시 쿠바에서 무장훈련을 받은 뒤 낭카와수로 향할 예정이던 볼리비아인들에게도 합류를 거부하도록 명령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자체의 사회혁명보다는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삼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그의 혁명을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라과이)로 수출한다는 점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의 전략적 목표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게바라에겐 결정적 타격으로 작용했다.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바라를 모스크바와는 이념을 달리하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근거지를 잘못 골랐다“
  
  볼리비아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남미의 심장부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굳건한 혁명기지를 세움으로써 남미에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어도 3년 전부터 사전준비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작업을 도왔던 인물이‘타니아’(본명은 하이데 타마라 붕케, 1937-1967년)란 이름을 가진 유태계 아르헨티나 여인이다. 1964년 체 게바라는 타니아를 볼리비아로 파견, 사전 탐색작업을 맡겼다(타니아는 1967년 3월 낭카와수 강변의 근거지에 왔다가 게릴라부대에 합류, 그 5개월 뒤 볼리비아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볼리비아에서 극적으로 탈출, 쿠바로 돌아왔던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폼보(아리 빌레가스)가 남긴 한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낭카와수 기지를 후방 안전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실제 게릴라 활동무대는 그보다 훨씬 북쪽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그 지역들에서 무장활동을 펴가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쿠바에서 훈련 받은 볼리비아 게릴라들을 낭카와수 지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럼으로써 볼리비아 내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 산맥 줄기를 타고 혁명기지를 넓혀간다는 것이 체 게바라의 복안이었다.
  
체 게바라 게릴라 부대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 지류에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재명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폈던 볼리비아인 형제가 있다. 볼리비아 공산당원 출신으로 일찍부터 페루와 아르헨티나 산악지대를 근거로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폈던 ‘코코’(본명은 로베르토 페레도, 1938-1967년), 볼리비아 군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살아남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기를 노리던 중 사살됐던‘인티’(귀도 알바로 페레도, 1937-1969년)다.
  
  그 두 사람의 동생 오스발도 페레도는 현재 볼리비아 제2의 대도시 산타 크루즈의 시의원.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나온 오스발도도 형들을 따라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볼리비아 산 속의 체 게바라가 날마다 일어난 일과 감상을 적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도 ‘코코와 인티의 동생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곧 합류할 예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쿠바에 머물던 중 체 게바라 피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울었다. 산타 크루즈 시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오스발도 페레도(65)의 증언.
  
  “당시 많은 볼리비아 인들이 체 게바라 대열에 합류할 목적으로 쿠바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대부분이 낭카와수 기지로 가지 않고 이탈했다. 1967년 10월 체 게바라가 죽은 뒤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형 인티를 볼리비아 라파즈의 아지트에서 만나, 무엇 때문에 우리의 혁명투쟁이 실패로 돌아갔는가를 함께 논의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볼리비아 공산당의 배신적 행위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볼리비아 공산당에서 스스로 탈당을 했지, 공산당 지도자 몬헤가 지배하는 당에서 쫓겨난 게 아니다. 몬헤는 배신자로서의 더러운 이름을 지닌 채,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또다른 실패요인은 볼리비아 내륙 낭카와수 강가의 혁명기지가 너무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기엔 적절할지 몰라도, 체 게바라의 사회혁명 이념을 일반민중에 퍼뜨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이 축적된 볼리비아 북부 코차밤바 같은 지역이 혁명 근거지로선 더 적절했을 것이다”
  
  게바라의 품성 말해주는 일화들
  
  볼리비아에서 죽임을 당하기 몇 개월 전부터 체 게바라는 몹시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의 포위공격을 견디느라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일부는 스스로의 오줌을 받아마시기도 했다. 게바라의 몸도 갈수록 쇠약해갔다. 어렸을 때부터의 지병인 기침(기관지 천식)이 도져 그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약은 없었다. 비밀 아지트에 숨겨두었던 기침약은 이미 볼리비아군의 수색으로 뺏겨버린 상태였다. 페레도는 체 게바라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의 펴다 죽었던 형제(코코와 인티)의 친동생인 오스발도 페레도. 그도 모스크바와 쿠바를 거쳐 볼리비아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김재명

  “형 인티가 볼리비아 보안군에게 사살되기 전 라파스의 비밀 아지트에서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 시절 체 게바라는 게릴라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의무를 다하려 했다. 식사 당번이나 청소 당번, 그리고 외곽 보초도 남들처럼 똑같이 섰다. 게바라는 그 무렵 기관지가 약해져 고생을 했다. 천식이 도지자, 동료들이 행군할 때 무거운 배낭 메는 일에서 체 게바라를 뺀 적이 있다. 그러나 게바라는 혁명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곧 배낭을 메고 앞장서 걸어갔다”
  
  다른 게릴라들에 비하면 게바라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튼튼한 편이었다. 그 시절의 체 게바라를 고민하도록 만든 또다른 문제가 게릴라 가운데 병약자와 부상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다가는 행군 속도가 느려, 볼리비아 추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페레도의 증언.
  
  “형 인티의 증언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부상자와 병약자들을 버리지 않았다. 게바라는 사단 규모의 볼리비아 군이 주둔 중이던 바예그란데를 기습, 약국에서 약품들을 얻어내 병약자들을 치료한다는 대담한 작전마저 세웠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원들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끝내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부상자들을 버리는 쪽으로 결정했더라면, 아무리 볼리비아군의 포위가 삼엄했다 하더라도 나의 형 인티가 그랬던 것처럼, 게바라도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체 게바라가 콩고(1965년)와 볼리비아(1966-67년)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1960년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유럽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한편으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지구촌 곳곳에선 좌익게릴라들이 사회변혁을 꾀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던 체 게바라.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남미혁명을 꿈꾸었던 체 게바라는 말 그대로 꿈을 좇았던 몽상적 행동가였나, 아니면 철저한 자기희생에 바탕한 휴머니스트였나.

 

 

 

 

 

  혁명아 체 게바라의 마지막 날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4>
  2005-02-28 오전 10:23:42
  체 게바라(1928-1967년)를 말할 때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인구 20만의 도시 산타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엔 체 게바라 혁명기념탑과 아울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기념관 안엔 체 게바라를 비롯,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무장 게릴라활동을 펴다 죽은 17명의 혁명투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 시신을 산타 클라라로 옮겨온 것은 바로 그곳에서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사에 커다란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산타 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에 타고 들어오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 항복을 받아냈다. 산타 클라라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통보했고, 바티스타는 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 바로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담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초상. ⓒ김재명

  그로부터 8년 뒤, 11개월에 걸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은 끝내 그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샀다. 그냥 빼앗는 일은 없었다. 체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 1966년 9월 2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 일행이 그날 새벽 2,280미터 고지의 외딴 산간마을인 피카초에 들어서자 “농부들이 (우리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식량을 빼앗지 않았고 예의 발랐다”
  
  피카초 마을은 열흘 뒤 게바라가 볼리비아 특수군에 붙잡힌 채 압송돼 와 사살 당했던 라 기에라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이다. 그 마을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던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알레한드리나 스모야(67). 오랜 찌든 가난 탓일까, 이빨이 하나만 남은 게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죽기 열흘 전 그를 만났던 볼리비아 여인(피카초 마을). ⓒ김재명

  “그때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나쁜 사람들이 떼지어 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라디오 같은 게 없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질 잘 몰랐다. 그런 어느 날(1966년 9월 26일) 새벽, 체 게바라 일행이 우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거칠고 거만한 볼리비아 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사선 불을 피워 끓여 먹었다. 몹시 시장해 보였다. 지금도 체 게바라를 기억한다. 그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보였다. 내 어린 아들(시실로 바냐와, 당시 두 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커야한다’고 말해주었다”
  
  1967년 10월 8일 라 기에라 마을 바로 북쪽 유로(Yuro) 계곡에서 부상당한 채 체포된 체 게바라는 곧바로 라 기에라 마을로 압송돼왔다. 그리곤 그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갇혔다. 학교라야 교실 두 개뿐인, 한국으로 치면 분교(分校)쯤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때 함께 붙잡혔던 ‘윌리’와 체 게바라는 각각 다른 교실에 갇혔다. 볼리비아 광산노조 출신으로 1932년생인 윌리의 본명은 시몬 쿠바. 모이세스 게바라가 이끄는 볼리비아 광부 12명과 함께 1967년 2월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인 낭카와수 강변에 이르렀다. 운명의 날인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가 다음날 게바라보다 먼저 처형됐다.
  
  한 여교사의 증언하는 게바라의 최후
  
  체 게바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이 있다. 이름은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8년 전 교단에서 물러난 뒤 바예그란데에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녀가 체 게바라를 만났던 날은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가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라이 귀에라의 한 작은 학교교실에 갇혀 있을 때였다. 훌리아는 그때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시골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됐다. ⓒ김재명

  20대 초반의 여인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부인이 됐다. 그녀의 증언.
  
  “오후 어스름할 무렵 체 게라바가 다른 한 명의 포로와 함께 잡혀와 학교 교실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지니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에외였다. 나는 학교 선생이었고, 무엇보다 젊고 예뻤기에 군인들이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때 체 게바라는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두 발도 묶인 채 교실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나 다름 없이 헤어지고 찢어졌고, 신발은 군화가 아닌, 소가죽으로 만든 누런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가 군화를 강물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훌리아의 증언. “게바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다리는 총상을 입은 탓에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체 게바라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에게 왜 이런 투쟁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의 투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의 이상(ideal)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바깥에 나간다면, 당신같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체 게바라가 죽기 직전 앉아있었던 의자. ⓒ김재명
 
  1967년 체 게바라가 죽기 바로 직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전 학교여선생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57).   ⓒ김재명

  “게바라와 밤늦게까지 얘길 나누면서 우린 친구가 됐다. 기억나는 대로 그의 말을 옮긴다면 이렇다. ‘이 학교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학교를 새로 고쳐 짓고 현대적인 학교로 만들겠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주겠다. 트랙터를 보내 길을 넓혀 주겠다.’ 나도 그때 형편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데 한 볼리비아군 장교가 들어서더니,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무장군인들은 체 게바라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때 게바라의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게바라는 마치 아는 누군가가 마을사람들 속에 섞여있나 찾듯이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진을 찍은 뒤 군인들은 다시 게바라를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게바라와 얘길 나누진 못했다. 게바라는 군인들이 지키고 보는 앞에서 나와 얘길 하는 걸 삼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이 대목에서 훌리아는 잠시 울먹이는 표정이 됐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그 총소리는 게바라가 아니라 그와 함께 체포된 윌리를 겨냥한 총소리였다”
  
  “엄마는 체 게바라에게 주려고 조촐한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게 갖다주라고 했다. 게바라는 배가 고팠던 듯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식사는 근래에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나는 빈 접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한두 숫갈을 뜨려 하는데,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바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훌리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당시 현장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존슨 미 행정부와 볼리비아 군부독재정권은 체 게바라의 처리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즉결처형 쪽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체 게바라를 재판에 붙여 국제사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나 볼리비아 양쪽 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바라는 사살된 뒤 다른 게릴라 동료 시신들과 함께 볼리비아 군 헬기로 바예그란데로 실려갔다. 바예그란데는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게바라의 시닌은 그곳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에 눕혀진 채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런 뒤 비밀리에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에 묻혀졌다. 세상엔 그의 시신이 볼리비아 밀림지대에 그냥 내던져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즉결처형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헬리콥터로 옮겨진 다음 일반에 공개됐던 세뇨르 드 말타 병원 빨래터 (바예그란데). ⓒ김재명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정확히 30년 뒤. 게바라는 함께 암매장됐던 동료 게릴라 유해 6구와 함께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볼리비아 혁명과정에서 죽은 다른 11명의 유해도 그 비슷한 시기에 옮겨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게바라가 1958년 쿠바혁명 당시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산타 클라라에 거대한 혁명기념탑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게바라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전사들의 시신을 안장해놓았다.
  
  성취의 땅 쿠바, 좌절의 땅 볼리비아
  
  30대 나이의 체 게바라가 사회혁명의 이상을 품고 투쟁했던 곳이 쿠바와 볼리비아다. 그 두 지역은 게바라 개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선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희망의 땅이었다면, 볼리비아는 좌절과 실패의 땅이다. 볼리비아는 게바라의 혁명적 이상이 움틀 곳은 아니었다. 산타 크루즈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로헤르 뚜에로 교수(정치학)는 “우리 볼리비아 지식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정신적 부채를 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예그란데 외곽 체 게바라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던 곳. 1997년 발굴돼 쿠바로 보내졌다. ⓒ김재명

  게바라가 처형됐던 안데스산맥의 작은 마을 라이게라는 따지고 보면, 게바라를 돕기는커녕 외면했던 곳이다. 게바라가 1966-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투쟁하면서 날마다 하룻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해 남긴 <볼리비아 일기>의 한 기록(1967년 9월 27일)에 따르면, 피카초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아침을 때운 게바라 일행이 라 이게라 마을에 들어서자, “남자들은 다들 사라지고 몇몇 부인들만 남아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게바라를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게바라 박물관이며 제법 큰 동상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이제와 체 게바라의 죽음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것이냐”는 눈총을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바라가 라이게라 마을에서 사살된 뒤 헬리콥터에 실려와 일반에 공개됐던 바예그란데(라이게라 북부 50km 지점에 있는 인구 8천의 작은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곳 문화센터가 만들어놓은 관광 프로그램은 체 게바라와 관련된 여러 곳들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라 할 만했다. 체 게바라의 시신이 놓여있던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 그리고 동료 6명과 함께 비밀리에 암매장했던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 그 지역 화가들이 그린 체 게바라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산타클라라 카페 등등...
  
  바예그란데 문화원 안에 있는 박물관 자체가 체 게바라 관련 유품과 지도들을 빼면 볼 것이 없을 정도다. 안데스 산맥말고는 이렇다할 관광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가 볼리비아다. 그런 까닭일까, 체 게바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볼리비아가 다시 그의 죽음을 상품으로 팔아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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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달마展 - 가을에서 봄까지

  누굴까
  김지하 달마展-가을에서 봄까지 <29ㆍ끝>
ⓒ프레시안

  아주 멀다.
  그러나 가까워온다.
  눈보라 속인 듯 안개 속인 듯 희미하다.
  누굴까?
  달마가 서쪽에서 오는 것인가!
  (達磨西來意)
  아니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니 곧 무궁무궁의 길인가!
  (環中無窮)
  검은 점은 그친다.
  흰 여백만 남는다.
  문득 유달산(儒達山) 기슭의 한 정원이 떠오른다.
  그 정원의 돌연못 속에 눈동자가 하나 열린 채 떠있었다. 옛 주검이다.
  누굴까?
  
  <김지하 시인의 지상 달마展 ‘가을에서 봄까지’의 마지막 회입니다. 연재해주신 김지하 시인과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김지하 시인의 화랑 달마展 ‘지는 꽃 피는 마음’이 3월 2일(수요일)부터 13일(일요일)까지 인사동 학고재 화랑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김지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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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인권연대

 
작금의 시민운동을 개탄한다
[인권연대]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작성날짜: 2005/02/24
인권연대기자

    
시민단체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면서 사실은 시민운동을 이용해 돈벌이나 하고 있다는 비아냥부터 시민운동은 정치적 진출을 위한 발판이다. 정권의 홍위병이다. 대안도 없이 비판만 하는 무책임한 집단이다. 선출되지도 않았고 시민도 없는 집단이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별 이야기가 다 들린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식상한 법인데 듣기에 좋지 않은 이야기인 탓인가, 막상 이런저런 비판을 듣는 시민운동가들은 비판에 대해 상당히 무덤덤해 보인다. 내가 당당하면 그만이지, 내가 깨끗한데 뭐. 일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과도하게’ 부각하면 좋은 뜻을 갖고 고생하는 다수에게 심각한 피해가 갈 수도 있잖아. 뭐 대충 이런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여기다가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불순한 책동이란 생각까지 보태지면 무덤덤한 태도는 이내 방어적으로 변하게 된다. 비판은 모략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에코생협 보도파문으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최 열 환경재단 이사장이 지난달 12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환경단체 신년하례회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시민의신문 DB자료> 이정민 기자 jmlee@ngotimes.net


운동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 자주 내세우는 논리는 실용주의적이다. 명백히 범죄를 구성할 정도의 잘못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까지 엄밀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실용주의 노선의 몇가지 사례이다.  


사례 1: 지역의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지난해 보수적인 색채의 지역개발회로부터 약 2천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지역개발회는 개인 및 장학회 등 법인들이 그 활동가를 위해 목적기탁금 형식으로 모은 돈을 전달했을 뿐이며 ‘어떤 특정한 의도’는 없다고 했고, 활동가가 속한 단체는 “지인 등 20여명이 개별적으로 모아 지원한 후원금을 가지고 우리 단체의 감시. 견제 기능을 문제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활동가는 11년 동안 시민단체에서 일했으며, 지난해 8월 1년간 안식년을 받아 미국의 한 대학으로 NGO 관련 연구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이 단체는 경제정의.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평화적 시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주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례 2: 시민참여, 시민권리 찾기, 시민에 의한 권력 감시, 시민봉사, 재정자립을 주요 활동방향으로 설정하고 활동하는 지역의 대표적 시민단체에 최근 상공회의소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인사가 대표로 취임했다.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에 적임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민단체와 상공회의소의 어색한 간극은 “지금은 보수나 진보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지역 현안을 해결할 때”라는 취임사 한마디로 얼버무려졌다.  


사례 3: 환경운동연합이 최근 원자력발전소 등 감시 대상 기업들에게 물건을 강매했고, 대표가 이사로 있는 자동차 회사에도 대량납품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경련은 “기업에만 판 것은 아니다”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식의 사례는 끝이 없다. 거의 브로커 수준에서 피해자들의 ‘뽀지’나 뜯고 다니다가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시민단체의 잘못이 단순히 일부 인사의 일탈행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말로는 대안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온갖 연줄이 단체를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사례는 너무도 많다. 학연, 지연, 혈연, 정파 등의 패거리가 판을 치고, 패거리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하지 않으면 당장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적당히 밀어주고 당겨주는 구조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쉽지 않다. 패거리의 구조는 연대의 질서라고 불리기도 하고, 동지애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그 배타적이고 속물적인 속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돈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적 풍토에서 회원의 회비만으로 단체를 운영하기 힘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힘든 것과 불가능한 것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시민단체가 이런저런 정부지원금에 눈독을 들이고, 의도가 뻔히 보이는 부당한 지원에 애써 무감각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정부지원금이나 각종 수익사업에 기대 10명이 일하는 것 보다 회비만으로 5명이 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고통스런 선택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세우는 것이 바로 실용주의적 노선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노선이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면 당장에 폐기되어 마땅하다. 운동이 운동이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원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운동에서 원칙이 중요하다고 하여도, 지금이 1987년이 아닌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것이 변했다. 정권교체가 있었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지도 2년이 지났다. 더 이상 운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과연 세상은 바뀌었나?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리던 꿈은 이제 이뤄졌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소외’되고 있고, 아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있으며,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 돈이 없어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 돈이 없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당장의 죽음을 무슨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이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현실은 부의 양극화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근사한 말로 포장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소비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들도 끊임없이 학대당하고 있다. 자연, 공동체, 가족 등 우리가 말로는 소중하다고 인정하는 가치들이 돈과 무한소비 때문에 파괴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상이나 인간은 원래 그래, 현실 사회주의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망해버렸잖아’ 하면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세상이 그래도 희망을 찾아 부단히 움직이고, 큰 방향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고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것 같은 고독 속에서 투쟁에 투쟁을 거듭하는 것이 운동이 아닌가. 운동하는 사람들만이라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원칙을 제시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가난한 민중에게 무엇이 더 유리한가,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골몰하며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이념을 갖고 원칙을 부여잡고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교조적인 태도만 갖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겠냐며 유연한 대응, 즉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실용주의적 노선은 꼭 운동단체가 아니어도 정부, 기업, 언론, 학계 등에서 모두 한결같이 믿고 따르는 노선이 아닌가. 모두들 실용적으로 갈 때,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원칙론자들이 있어야 세상은 그만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운동마저 실용주의적이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운동의 생명과도 같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더 넓은 사무실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인력이나, 이를 통한 더 많은 영향력과 더 많은 일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운동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생명을 잃고서 얻는 더 큰 영향력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 이 글은 [열린사회 2005년 3,4월호]에 게재된 내용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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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매체 주소 모음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참정연]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서양미술 400년 한눈에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서양미술 400년 한눈에
17세기 바로크시대부터 20세기 추상화까지 서양미술의 정수 한자리에
 
이명옥
 
유럽여행, 특히 프랑스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은 누구나 루브르 박물관을 염두에 둘 것이다. 교과서에서 이름만 들었던 거장들의 작품을 대하고 싶다는 것은 미술학도가 아니어도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일이 아닐까?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서양 예술 400년을 한 자리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명옥

 색채의 마술사라는 ‘샤갈전’에 이어 ‘푸생에서 마티스까지’라는 제목의 서양미술 400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2004년 12월 21일부터 2005년 4월 3일까지 열리고 있다.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의 '스키로스의 아킬레우스'     © 뒤프레누아
 
금번 전시회는 프랑스 국공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7세기 바로크 시대 작품부터 20세기 추상화가 라울뒤피와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수 있는 르 부룅, 푸생, 쿠르베, 들라크루아, 앵그르, 다비드,  시슬리, 고갱, 르누아르, 마티스, 모네, 라울뒤피,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을 시대별로 엄선하여 ‘선’ 과 ‘색’이라는 접근법을 통해  서양의 미술사적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앵그로의 작품 '샘'     © 앵그로

‘선’과 ‘색’의 대립은 17세기  푸생과 루벤스로부터  19세기에 사진처럼 명확하고 균형 잡힌 조형미를 추구한 신고전주의 장 오귀스트 도미니끄 앵그르와 강렬한 색채의 동적인 그림을 그린 위젠느 들라크르와의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크 시대부터 20세기 추상파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까지 커다란 물줄기를 따라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하자.
 
17세기- 바로크와 고전주의
 
자끄 블랑샤르, 피에타 반 몰, 야곱 요르단스, 샤를르 뒤프레누아, 니꼴라 푸생, 르 냉, 시몽 부에, 장 엘라르, 삐에르 미나르, 샤를르 르 브룅은 17세기 대표적 화가다.
 
당시는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성서나 신화를 주제로 색감을 살려 강렬한 색의 사용으로 단조로움을 피하는 ‘색’을 중시하는 루벤스 화풍과 명암, 원근법, 섬세한 채색 기법, 15세기 전통적인 풍경화법을 사용한  ‘선’을 중시하는 고전적인 푸생의 양대 화풍을 볼 수 있다.
 
18세기- 로코코 양식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앙뜨완느 쿠아펠, 프랑스와  부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조셉 비앵, 조셉 베르네, 루이 부알리, 장 시몽 베르텔레미, 애마블 파네스트 등을 들 수 있다.
 
▲모네의 작품, '벨일의 바위'     © 모네
 
로코코 양식의 특징인 세부 묘사, 원근법, 소묘법 중시 등 고전적인 기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고  누드를 이상화하는 다비드로 이어지는  기법의 작품도 볼 수 있다.
 
19세기-신고전주의에서 상징주의
 
19세기 대표적 화가로는 장 오귀스트 앵그르, 위젠느 들라크루와, 테오도르 샤세리오, 까미유 코로, 나르시즈 드 라 페나, 귀스타브 쿠르베, 위젠느 부댕, 클로드 모네, 까미유 피사로,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리, 삐에르 퓌비 드 사반, 폴 고갱, 아리스티드 마이욜을 들 수 있다.  
▲라울 뒤피 작 '마리 크리스틴 카지노'     © 라울 뒤피

▲다비드 작, 마라의 죽음     ©다비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기법을 충실하게 이어 신고전주의 기법인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선을 사용하며 ‘선’의 우위를 중시한 앵그르는 감성과 색채를 중요하게 여긴 들라크루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을 반전통적이라고 무시하였으며 그림의 목적은 ‘美의 表現’이라 생각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앵그르가 주장한 ‘선’의 중요성은 드가, 마티스, 피카소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들라크루와는 밑그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세부 묘사보다는 단순한 덩어리를 구성하는 유연한 붓터치가 작품의 가치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금번 전시에 특이한 사실은 전통적인 화두였던 ‘선’ 과 ‘색’ 등 전통적인 법이 아닌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시도한  폴 고갱의 상징주의적 대담성이 가미된 목판화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순수추상미술
 
에두아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 파블로 피카소, 장 퓌, 라울 뒤피, 에밀 베르나르, 앙리 마티스, 소니아 들로네 등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순수추상미술은 구성의 단순화, 평면화, 인상주의 화법의 강렬한 색과 빛의 사용, 모든 전통적 기법들을 변형, 파괴, 해체하여 재창조하는 피카소의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한줄기 맥을 이어온 ‘선’과 ‘색’의 대비와 변형이라는 현대적 기법까지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마티스 작, '어항에서 수영하는 여자'     ©마티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선’과 ‘색’의 대립은 혁명과 예술 혼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자유와 진보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어떤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굳세게 지켜내고자 했던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의 반증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랭스 미술관에 소장된 것이며, 일부 작품들은 루브르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 프랑스 국립 미술관서 가져 왔다고 한다.
 
금번 전시회는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고자 하는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더없이 값진 관람의 기회가 될 것이다.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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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만 칼럼

최근 미 연준 의장 그린스펀이 의원들에게 미 재정적자가 지속불가능하다고 경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장을 삭감하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시가 단행하고 그린스펀도 동의한, 부자들에게 그 혜택이 주로 돌아간 막대한 세금삭감을 다시 환원하는 방법은 경제에 안좋다고 하면서...

그런데 크루그먼은 재정적자가 이렇게 커진 것을 공화당과 부시가 원했다고 하네요. 이를 빌미로 사회보장과 의료보장을 축소하려 하고 있지요. 이게 '맹수 굶기기'론이라 하네요. 어떻든 정부싸이즈를 줄이고 이를 민간에게 이전하겠다(부시정부는 사회보장의 일부를 개인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지요! 부시가 이를 오너 소사이어티, 즉 소유자 사회라 했던가요?)는 부시정부의 신념은 확고한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회보장 혜택이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 폭로되었고, 그래서 미국민들 다수가 이에 반대하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 세금 삭감 등으로 재정적자를 일부러 늘리고 이를 빌미로 사회보장을 축소하려는 '맹수 굶기기' 시나리오는 관철되기 어려울 것으로 크루그먼은 예측하네요. 결국 그린스펀이 예상하는 재정위기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이런 사태는 불편부당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공화당과 부시를 줄곧 편들어온 그린스펀의 사기때문에 초래되었다고 맹공을 퍼붇고 있네요. 그리고 이 위기의 현실화는 이제껏 적자를 메꿔주던 외국자본이 재정적자 감축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알아채고 철수를 할 때이겠지요.

 

March 4, 2005
OP-ED COLUMNIST

Deficits and Deceit

By PAUL KRUGMAN





Four years ago, Alan Greenspan urged Congress to cut taxes, asserting that the federal government was in imminent danger of paying off too much debt.

On Wednesday the Fed chairman warned Congress of the opposite fiscal danger: he asserted that there would be large budget deficits for the foreseeable future, leading to an unsustainable rise in federal debt. But he counseled against reversing the tax cuts, calling instead for cuts in Social Security, Medicare and Medicaid.

Does anyone still take Mr. Greenspan's pose as a nonpartisan font of wisdom seriously?

When Mr. Greenspan made his contorted argument for tax cuts back in 2001, his reputation made it hard for many observers to admit the obvious: he was mainly looking for some way to do the Bush administration a political favor. But there's no reason to be taken in by his equally weak, contorted argument against reversing those cuts today.

To put Mr. Greenspan's game of fiscal three-card monte in perspective, remember that the push for Social Security privatization is only part of the right's strategy for dismantling the New Deal and the Great Society. The other big piece of that strategy is the use of tax cuts to "starve the beast."

Until the 1970's conservatives tended to be open about their disdain for Social Security and Medicare. But honesty was bad politics, because voters value those programs.

So conservative intellectuals proposed a bait-and-switch strategy: First, advocate tax cuts, using whatever tactics you think may work - supply-side economics, inflated budget projections, whatever. Then use the resulting deficits to argue for slashing government spending.

And that's the story of the last four years. In 2001, President Bush and Mr. Greenspan justified tax cuts with sunny predictions that the budget would remain comfortably in surplus. But Mr. Bush's advisers knew that the tax cuts would probably cause budget problems, and welcomed the prospect.

In fact, Mr. Bush celebrated the budget's initial slide into deficit. In the summer of 2001 he called plunging federal revenue "incredibly positive news" because it would "put a straitjacket" on federal spending.

To keep that straitjacket on, however, those who sold tax cuts with the assurance that they were easily affordable must convince the public that the cuts can't be reversed now that those assurances have proved false. And Mr. Greenspan has once again tried to come to the president's aid, insisting this week that we should deal with deficits "primarily, if not wholly," by slashing Social Security and Medicare because tax increases would "pose significant risks to economic growth."

Really? America prospered for half a century under a level of federal taxes higher than the one we face today. According to the administration's own estimates, Mr. Bush's second term will see the lowest tax take as a percentage of G.D.P. since the Truman administration. And don't forget that President Clinton's 1993 tax increase ushered in an economic boom. Why, exactly, are tax increases out of the question?

O.K., enough about Mr. Greenspan. The real news is the growing evidence that the political theory behind the Bush tax cuts was as wrong as the economic theory.

According to starve-the-beast doctrine, right-wing politicians can use the big deficits generated by tax cuts as an excuse to slash social insurance programs. Mr. Bush's advisers thought that it would prove especially easy to sell benefit cuts in the context of Social Security privatization because the president could pretend that a plan that sharply cut benefits would actually be good for workers.

But the theory isn't working. As soon as voters heard that privatization would involve benefit cuts, support for Social Security "reform" plunged. Another sign of the theory's falsity: across the nation, Republican governors, finding that voters really want adequate public services, are talking about tax increases.

The best bet now is that Mr. Bush will manage to make the poor suffer, but fail to make a dent in the great middle-class entitlement programs.

And the consequence of the failure of the starve-the-beast theory is a looming fiscal crisis - Mr. Greenspan isn't wrong about that. The middle class won't give up programs that are essential to its financial security; the right won't give up tax cuts that it sold on false pretenses. The only question now is when foreign investors, who have financed our deficits so far, will decide to pull the plug.


E-mail: krugman@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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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잣대

두 개의 잣대

미국 사회에 살아온게 어언 반 년을 지나면서, 나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던 두 가지 잣대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첫 번째 경향.

정치경제적 토대에 주목하지 않고 단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특히 건강 형평성 관련 논문들) 분석들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다. 이를테면 "세상 물정 모르는걸. 순진하기 이를데 없군. 윤리라는 모호한 대의명분에 호소를 하다니, 자본주의를 물로 보는 거여? ...."

 

두 번째 경향.

현실에서 마주치는 여러가지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유독 "건전한 상식 있는 인간"의 자세를 강조함. 남의 연구 결과를 비판할 때의 냉철함(?)은 사라지고, 대략의 기조는 "이론이고 뭐고 인간들이 저러면 안 되지. 너무 하잖아..."

 

이래서 나타나는 문제점 들로는...

남의 연구는 우습게 보면서 정작 현실에서는 감정과 인의를 내세우면서 통찰력 있는 이론적 작업을 방기...ㅡ.ㅡ

"인권"이 갖는 무 당파성, 계급 은폐적 성격을 과도하게 경계하느라 내가 지향하는 인간 해방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인것처럼 사고...

 

이러한 측면에서, Wright의 책은 대오각성(ㅡ.ㅡ)하게 만들고 있음.

착취(exploitation)라는 단어가 개별 자본가의 도덕성을 힐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존재 조건을 개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상황의 "부도덕성" 에 대한 비판을 여전히 담고 있다는 것이 중요....

 

 사족이지만....

 어렸을 때는 오만방자해서 (지금도 쪼금...) 도대체 누굴 존경할 줄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거의 유일하게 존경했던 부르디외에 이어 Richard Levins, Howard Zinn과 Erick Wright도 조금씩 존경의 마음이 생겨나고 있음... 그 통찰력 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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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미디어운동 활동가들, 긴 대화를 시작하다

* 이 글은 지후님의 [여성미디어운동 활동가들, 긴 대화를 시작하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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