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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물 없이 지낸 아바나의 첫 밤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
  2005-02-15 오전 11:48:51
  <프레시안> 뉴욕 통신원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가 3주 일정으로 쿠바와 볼리비아 현지 취재를 떠났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와 문제점, 미국-쿠바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고, 볼리비아에선 체 게바라의 무장 게릴라 근거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실패한 투쟁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새겨볼 계획이다. 이 현지취재는 시사월간지 <월간중앙>과 공동협찬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입국 비자 필요 없고 여행자 카드로만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중심이 돼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혁명(1959년)이 올해로 46년을 맞는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지도 벌써 37년을 넘겼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래 지금껏 쿠바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아직껏 이루지 못한 혁명과제들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쿠바혁명을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도록 만든 요인들인가. 중남미를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온 초강대국 미국은 쿠바에게 어떤 존재인가. 쿠바의 일반 민초들과 지식인들은 쿠바혁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아울러 미국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체 게바라가 지구촌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오늘의 쿠바를 어떻게 평가할까.
  
쿠바 아바나 시내 전경 ⓒ김재명

  이런 물음표들을 지닌 채 쿠바 아바나 국제공항에 닿았다. 출입국 사무를 맡은 관리는 여권에다 쿠바 입국 사실을 나타내는 도장을 찍지 않는다. 그 대신 '여행자 카드'라 일컬어지는 조그만 입국서류에다 도장을 찍는다. 쿠바로 가기 전부터 이 여행자 카드 문제로 신경을 써야 했다. 쿠바 여행 안내책자엔 "쿠바 입국 비자를 받아도 되는 대신에, 이 여행자 카드를 들고 가야 한다"고 돼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외교관계도 없는 쿠바에 들어가려면, 문제의 여행자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미국 식민지 유산을 지닌 건물들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있다. 건물 앞 차량들은 아바나 특유의 2인용 '코코' 택시들. ⓒ김재명

  미국에서는 쿠바행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다.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야 한다. 미 부시행정부는 미국인들의 쿠바행을 막기 위해 그런 원칙을 지키도록 여행사와 항공사에게 강요한다. 미국 안에 있는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 표를 사려 해도 불가능하다. 결제과정에서 구매자가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캐나다항공에 전화를 걸어 표를 사려 해도, 미국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알면, "전화를 그만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필자에게 쿠바행 비행기 표를 판 캐나다의 한국인 여행사가 여행자 카드에 관한 정보에 대해선 깜깜했다는 점이다. 쿠바행에 대해 물어오는 한국인 손님이 그만큼 드문 탓이기도 했다. 답답했다. 필자의 쿠바 취재길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행기 표를 산 K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캐나다의 쿠바 대사관에까지 전화를 걸어 "토론토 공항에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기 바로 직전, 공항 출구(gate)에서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그냥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서울로 K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국여행사로부터 6만원을 주고(택배료까지 합쳐 7만원) 그 서류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와아! 항공사에서 거저 나눠주는 서류를 6만원이나 받고 팔다니....쿠바로 떠나는 날 아침 토론토 공항 출국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문제의 그 여행자 카드란, 인천공항에 들어오기 앞서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입국신고서처럼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과 주소 따위를 적어 넣는 아주 간단한 서류였다. 쿠바에서 머물 주소는 일반적으로 아바나에 있는 호텔(Hotel in Havana) 쯤으로 적어 넣으면 됐다.
  
  쿠바가 입국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여행자 카드라는 이름의 간단한 출입국 신고서로 갈음하는 까닭은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과 직접 관련된다. 쿠바의 주요 외화벌이 재원(財源)이 관광산업이다. 해마다 1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고 있다. 기후가 좋고 해변 휴양지가 많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 들어 미국은 쿠바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카스트로 체제 전복과 쿠바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에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인이 멕시코나 캐나다를 거쳐 몰래 쿠바를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 최고 25만 달러의 벌금, 징역 10년을 살도록 돼있다.
  
쿠바는 미국에서 이미 폐차된 지 오래인 중고자동차들의 박물관이라 일컬어진다. 1950년대 만들어진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다니며, 고장 나 길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흔하다. ⓒ김재명

  미국 달러에 매기는 10% '카스트로 혁명세'
  
  법대로라면 미국인의 쿠바여행길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모험이다. 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다 운 없이 쿠바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미국인은 일반적으로 벌금 7천5백달러를 문다. 카스트로 정권은 그런 미국인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쿠바를 다녀올 수 있도록 여행자 카드에만 입국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곤 공항 출국심사장에서 여행자로부터 도로 그 서류를 걷어간다. 따라서 여권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대중교통수단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터라, 2인용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김재명

  우리 한국인들이 쿠바로 미국 달러를 그냥 들고 들어갔다간 손해를 본다. 아바나 공항에서 일부 외국인들은 '카스트로 혁명세'를 바쳐야 한다. '혁명세'란 용어는 물론 없다. 사정을 잘 모르고 미국 달러를 갖고 입국한 사람들이 공항 환전소에서 달러를 현지 화폐로 바꾸려 하면, 10%를 무조건 뗀다. 달러가 아닌, 유로나 엔화를 갖고 들어가면 모두 제값을 쳐서 환전할 수 있지만, 달러는 90%만 값을 쳐주고 10%는 공제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런 특이한 제도가 시행됐다. 카스트로 정권의 설명은 "쿠바를 달러경제의 압박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다.
  
  아바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는 '20달러'의 정액요금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달러'는 미국 달러가 아니다. 카스트로 정권이 지난해 11월 만들어낸 새로운 화폐인 '전환 페소'(Converted Peso)다. 이 돈의 가치는 미국 달러와 거의 같지만, 정확히 말해 10% 더 세다. 100 미국 달러를 환전소에 내면, 90 전환페소를 받는다. 그렇지만 쿠바 현지인들은 이를 그냥 '달러'라 일컫는다. 일반 쿠바국민들은 '모네다 나시오날'(moneda nacional)이란 이름을 지닌 '쿠바 페소'를 주고받지만, '전환 페소'도 함께 쓴다. 시골지역으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카페로 갈수록 '쿠바 페소'가 많이 쓰인다.
  
  우중충한 건물들, 몇십년 된 자동차들
  
  카리브해를 끼고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아바나는 얼핏 보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다. 바닷가를 따라 8km 길이의 말레콘(Malecon) 도로는 서울로 치면 강변도로같은 것이지만, 한켠에 인도를 만들어 연인들의 산책로로선 제격이다. 이 말레콘 도로를 건설한 이는 쿠바인들이 아니다. 1901년 쿠바를 식민지로 다스리던 미국인들이다. 아바나 시내 곳곳에 세워진 대리석의 멋진 건물들도 미국이 쿠바 식민통치를 위해 지은 것들이 많다(서울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중앙청 건물이나 시청 건물이 일제가 지은 사실과 마찬가지다).
  
아바나의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모습이다. ⓒ김재명

  이 글 앞 문장에서 아바나를 가리켜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도시로 들어가면, 결코 아름답지는 못하다.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 그런 건물들이 있다면, 벌써 페인트를 새로 칠했거나 허물어 버렸을 것들이다. 그런 건물들 속에 사는 이들은 방 하나를 여러 사람이 같이 나눠쓴다. 인구는 갈수록 늘어가지만, 주택을 새로 짓지 못하는 탓이다. 나중에 쓰겠지만, 아바나에 사는 한국인 교민(농업노동자로 80년전 이민 온 한국인의 후손) 집에 갔다가, 너무나 처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쿠바의 여인들.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가난하기에 옷 한 벌로 몇 달을 버티는 여인들도 많다.   ⓒ김재명

  아바나의 차량들도 오래된 것들이라 매연을 시꺼멓게 뿜어댄다. 1950년대에 생산된 미국 승용차들이 버젓이 굴러다니는 것이 아바나이고 쿠바다. 그래서 쿠바는 '세계 중고 자동차 전시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길 한가운데 멈춰 본네트를 열고 수리중이거나, 뒤에서 여러명이 차를 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리에서 우리 한국의 중고자동차들도 많다. 구형 소나타에서 티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자동차들이 아바나 길을 메우고 있다.
  
  멕시코를 통해 들여온 이들 한국 자동차들은 쿠바에선 '좋은 차'로 꼽힌다. 워낙 미국차들이 낡은 탓에 상대적으로 새차라서 성능이 낫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전세내 타고 다녔던 차도 현대자동차의 구형 소나타. 운전기사 헤르난데스는 "이 차가 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부속품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언젠가 소나타가 고장 나면 다른 차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의 부품은 쿠바에서 대용품을 자체 개발해 쓰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아바나에서의 첫 밤은 세수는커녕 발도 씻지 못했다.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호텔 쪽 설명으론 그 지역 일대에 수돗물이 끊겼고, 낡은 수도관 탓에 그런 일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호텔 종업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에게 물이 안나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경제 체제 아래 쿠바는 모든 것이 국유다. 부동산 개인 소유는 없다. 오로지 그 집에서 살 권리만 있다. 호텔도 국유고, 따라서 호텔 종업원들은 '국가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안나와 손님이 불평을 하면, "다른 곳을 찾아봐라"는 정도지, 어디선가 물을 날라다 주려 애쓰는 눈치는 전혀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여러 모로 이번 쿠바 취재길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애써 지우며 아바나의 첫 밤을 넘겼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2>
  2005-02-18 오전 10:13:20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900km.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미 해군기지가 있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타고 13시간 걸려 산티아고 드 쿠바를 가서, 다시 택시를 전세내 1시간30분을 달려 관타나모에 닿았다. 애당초 계획은 아바나-관타나모 사이를 하루 1회씩 오가는 국내선 비행기(비행시간 2시간30분)를 타고 가려 했다. 여행사에 가서 알아보니 앞으로 보름 동안엔 여유분 좌석이 없이 모두 팔린 상태였다. 비행기는 소형인데, 찾는 이는 많아서 그렇단다. 나중에 관타나모에서 들은 얘기로는, 예약된 비행기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호기심으로 관타나모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6시에 떠나 밤새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겨야 했다. 버스 안에는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쿠바의 시외버스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아솔(Viazol), 다른 하나는 아스트로(Astro). 비아솔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선진국 수준의’ 높은 요금을 받는다. 쿠바 현지인들도 비아솔 버스를 탈 수는 있지만,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난 비아솔에 비해 훨씬 값이 싼 아스트로는 쿠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수단이다.
  
  말이 ‘대중교통수단’이지, 쿠바 사람들이 아스트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면 적어도 한달, 길게는 두세 달씩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타려는 사람들에 비해 버스 대수가 많지 못한 탓이고, 이웃나라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의 우호적인 원유공급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쿠바의 기름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쿠바-베네수엘라-미국의 미묘한 3각관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교육-의료는 천국, 교통은 지옥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가까운 쿠바군 검문소 앞에 놓인 쿠바국기와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흉상. ⓒ김재명

  카스트로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사람들은 큰 변화를 실감해왔다.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시절 미국인들은 쿠바 농지의 3분의 2를 소유, 현지 쿠바인들을 소작인 또는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부려왔다. 카스트로는 그런 농지들을 모두 몰수, 국영농장으로 바꾸었다. 바티스타 정권 아래선 돈을 가진 집안에서만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으나, 카스트로 혁명으로 초중등 교육은 물론 대학교육까지도 거저가 됐다. 공부할 능력과 의욕만 있다면, 돈이 없어도 대학을 다닐 수 있다. 그런 덕에 현재 쿠바의 문맹율은 제로에 가깝다. 의료혜택도 쿠바혁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입원비가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었다더라“는 얘기는 적어도 쿠바에선 들을 수 없다(쿠바의 교육과 의료체계에 대해선 이 연재에서 별도의 꼭지기사로 다시 다룰 예정이다).
  
  쿠바혁명의 그런 바람직한 성공사례와는 대조적인 부분들이 있다. 도로, 교통, 인터넷, 수도, 전기,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인프라)이 아직은 제대로 구축돼 있지 못하다. 특히 교통 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사회주의 통제국가인 쿠바는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다. 수도 아바나에 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이사갈 수가 없다. 평양에 살고 싶다고 신의주 사는 주민이 이삿짐을 맘대로 꾸릴 수가 없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사를 가고자 하는 쿠바 사람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자리가 바뀌는 등 나름의 그럴듯한 사유를 제시하지 않을 경우, 거절당하기 십상이다.
  
  단기간의 여행은 허가 없이도 떠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동수단이 간단치 않다. 앞에서 적은 대로 아스트로 버스를 타려 해도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기차표 얻기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쿠바에서 오토바이는 아무나 타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경찰이나 업무상 필요하다고 인정된 경우에만 오토바이를 탈 수가 있다. 주말에 경춘가도를 따라 질주하는 즐거움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행위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해악으로 여겨진다. 쿠바 경찰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도 한국 경찰처럼 크지 않아 기름 소비가 적은 것들이다.
  
  아바나 시내를 굴러다니는 1950년대 미국 차들은 너무 낡아 장거리는 엄두를 못 낸다. 이래저래 적절한 이동 수단을 찾지 못한 쿠바 사람들은 지나는 트럭을 세워, 짐칸에 서서 가기도 한다. 산티아고 드 쿠바에서 관타나모로 가는 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빼곡히 실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드 쿠바와 관타나모 사이는 85km. 차로 달리면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비아솔이나 아스트로 버스 모두 두 차례만 오간다. 급한 일이 생긴 사람은 트럭에 올라 타거나 쿠바인들의 소득(월평균 10달러 미만)에 비해 턱없이 비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바가지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관타나모 왕복에 85전환페소(지난번 글에 썼듯, ‘혁명세’ 10%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95달러)를 냈다. 이만한 돈은 쿠바 서민들의 열달치 소득이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전경. ⓒ김재명

  (독자 여러분들이 설마 하고 놀라겠지만, 쿠바인들의 소득수준은 너무 낮다. 경찰과 청소부 등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직종이 가장 많이 월급을 받는데, 그 수준이 30달러다. 대학교수와 의사가 20달러, 나머지 대부분의 직종은 10달러 안팎이다. 식량배급카드로 국가로부터 밀가루, 식용유, 설탕 등을 거저 공급 받아 생활비가 덜 든다. 그러나 그만한 소득으로는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냉장고나 텔레비전 등 상대적으로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나름대로 ‘요령’을 익혀왔고,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를 ‘생존술’이라 정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보겠다.)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캠프 델타 포로수용소. 같은 관타나모 기지 안이라도, 미 해군기지와는 따로 떨어져 있다. ⓒ김재명

  노래 ‘관타나메라’와 호세 마르티
  
  고구마처럼 동서로 길게 뻗은 쿠바의 동쪽 거의 끝부분 남쪽에 자리잡은 관타나모는 인구 20만의 제법 큰 지방도시. 관타나모란 이름 자체는 노래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관타나모 아가씨, 촌뜨기 관타나모 아가씨)로 우리 귀에 익숙한 편이다. 지난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널리 알려진 '관타나메라'는 오래 전부터 쿠바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떠올린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는 쿠바 시인이자 독립영웅으로 식민지 군대인 스페인군에 사살됐던 호세 마르티(1853-1895)다. 쿠바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마르티의 동상과 마주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카스트로 사회주의 혁명정권도 호세 마르티를 인민영웅으로 떠받들어 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와 연결시켜 풀이한다. 한 마디로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보는 쿠바군 관할 고지로 오르기 위해, 그곳 군부대가 설치한 초소 앞에 갔을 때도 마르티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 보도록 쿠바군 관할 고지에 설치된 망원렌즈. ⓒ김재명

  2001년 9.11 사건 뒤 6백명 넘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들을 재판도 없이 가두어놓은 채 인권 침해시비를 낳아온 미 해군기지는 관타나모 도심지와는 뚝 떨어진 관타나모만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쿠바 취재를 계획했을 때부터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자체를 취재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곳은 전세계 미디어의 사각지대다. 부시행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의 보수적 TV 매체 팍스 뉴스(Fox News)조차도 관타나모를 직접 취재하진 못했다. 그저 펜타곤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받아쓸 뿐이다. 그런 관타나모 기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다.
  
  고지에 오르려면 적어도 하루 앞서 지정된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해야 한다. 수수료는 5달러(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환 페소’). 이 이 5달러도 쿠바정부로선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원처럼 느껴졌다. 9.11 뒤 관타나모는 관광상품으로 떠올랐다. 그곳 고지에서 필자를 맞이한 쿠바인 안내원은 군인이 아닌, 쿠바 관광청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단체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 대꼴로 온다.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지만,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고지에서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바라보는 광경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필자가 갖고 간 300mm 렌즈로는 기지 안에서 오가는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어려웠다. 고지에 붙박이로 설치해놓은 전망대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내원 설명에 따르면,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사람 걸어가는 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은 햇살이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맑은 데도 그렇질 못했다. 현재 해군기지 안에는 군인 1천명, 관련 미국인 2천명이 머물고 있다.
  
  “혁명으로 미군 상대 술집과 창녀 사라졌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는 주권국가인 쿠바 영토 안에 파고든 미국 점령지다. 지난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더불어 쿠바를 빼앗으면서, 관타나모만 일대는 미 해군기지로 개발됐다. 쿠바가 1903년 ‘형식적인’ 독립국가로 됐을 때, 관타나모는 영구임대 계약으로 미국에 넘겨졌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국은 쿠바인들에게 영원히 미군 점령지역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미국의 쿠바내정 개입을 인정하고 독립을 얻을 것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쿠바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내정간섭을 합법화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택했다).
  
1950년대 미군 술집과 창녀들로 흥청댔던 관타나모 시가지. 카스트로 혁명으로 술집과 창녀들은 모두 사라졌다. ⓒ김재명

  미국은 해마다 금화 2천개(지금의 화폐가치로 4천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관타나모 기지 임대차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계약 쌍방이 함께 계약을 끝내기로 서로 합의했을 경우에 한해서만(if both parties mutually consent to terminate the lease)' 쿠바인들이 관타나모 기지를 돌려받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관타나모 기지는 영원히 미국인 것이다.
  
  1959년 1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불평등계약조건은 문제가 없었다. 쿠바혁명 뒤 카스트로 정권은 계약 파기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합법적으로 임대계약을 맺었는데 무슨 소리냐. 계약서를 잘 들여다봐라”며 딴전을 펴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혁명이 성공한 바로 뒤 미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소규모 총격전마저 벌였다. 그런 긴장관계 속에 쿠바정부는 미국이 해마다 관타나모 기지를 빌린 대가로 보내오는 4천달러 짜리 수표를 은행에 돌려 현금화하지 않았다.
  
  관타나모 사람들은 미 해군기지를 복합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했다는 고메스(67)를 시내에서 만났다. 그는 1950년대 관타나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전에 관타나모 시내엔 미 해군들로 늘 흥청댔다. 그들 때문에 이 지역경제가 흥청대긴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술집이 즐비했고, 창녀들이 많았다. 술 취한 병사들이 지나는 여인들을 희롱하는 일도 잦았다. 쿠바혁명으로 그런 모습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게 참 다행스런 일이다” 관타나모 주민들은 9.11 뒤 볼썽사납게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채 인권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 해군기지가 하루 빨리 쿠바에게 반환돼, 쿠바 해군기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혁명 근거지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3>
  2005-02-23 오후 5:28:42
  쿠바에선 체 게바라를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거리엔 대형 게바라 초상화가 내걸려 있고, 곳곳에 게바라 관련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카리브 해의 파도가 시원스레 넘실대는 풍경이 바라보이는 아바나 고급호텔의 벽걸이 그림도 게바라다. 빈민가가 들어선 아바나 비에하 지역의 곧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안에 옹색하게 사는 도시빈민의 방에서도 게바라의 눈길과 마주친다. 지난 1967년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던 볼리비아에서도 쉽사리 체 게바라를 만난다. 볼리비아 내륙 제2의 도시 산타 크루즈의 토산품 가게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체 게바라 티셔츠와 그의 얼굴을 새긴 나무조각품들이 늘어서 있다.
  
  쿠바와 볼리비아뿐 아니다. 지구촌 어딜 가나 체 게바라와 만난다.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브랜드라 할 별 달린 모자를 쓴 젊은이들, 가슴에 그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긴 여인들, 그리고 평전을 비롯한 수많은 게바라 관련 책자들, 그의 얼굴을 담은 목걸이, 시계, 재떨이....지난해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다시 한번 대중의 가슴에 다가왔다.
  
  쿠바혁명 이어 남미혁명의 꿈
  
 
볼리비아 산악지대의 체 게바라 활동 근거지를 가리키는 팻말 ⓒ김재명

  1928년 6월 14일생인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스네스토 게바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동쪽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중상류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였다. 1950년, 1953년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길에서 게바라는 빈곤층 민중들의 고단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생각하게 됐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멕시코 툭스판에서 쿠바 정치망명객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그러나 정부군 기습을 받아 15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게바라가 이끄는 일단의 무장군은 1958년 12월 28일 치밀한 작전과 대담한 공격으로 쿠바 중부도시 산타 클라라를 점령, 쿠바혁명 성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바로 뒤 바티스타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9년 1월 2일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를 접수했다. 그 뒤 1964년까지 게바라는 국제사회(특히 제3세계 비동맹권)으로부터 쿠바혁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힘썼다. 유엔을 방문해 연설하고 러시아, 중국을 찾았다. 1960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에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을 이끌기 위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보내고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의였다. 6개월만에 아프리카에서 비밀리에 쿠바로 돌아온 게바라는 다시 볼리비아를 남미혁명기지로 삼기 위한 준비작업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1966년 11월 3일 변장한 채 위조여권으로 라 파즈 공항을 거쳐 볼리비아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11월7일 낭카와수 강변의 혁명기지에 닿았다.
  
1966년말 낭카와수 강변에 세워진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 ⓒ김재명

  낭카와수 강변에 남미 혁명기지 세워
  
  체 게바라가 남미혁명의 꿈을 가슴에 품고 볼리비아에 설치했던 근거지는 남미대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산맥의 기슭이라 할 저지대인 낭카와수 강변.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외딴 지역이다. 그곳을 찾아가려면, 먼저 산타 크루즈에서 버스를 타고 6-8시간쯤 남쪽으로 달려 ‘라구아니스’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로 가야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가까운 곳에 흐르는 낭카와수 강. 리오 그란데 강의 지류다. ⓒ김재명

  중남미에서 아이티와 더불어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는 나라가 볼리비아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연 9백 달러도 안 된다. 그러니 도로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투자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비만 조금 왔다 하면, 도로가 물에 잠기거나 끊기기 십상이다. 버스 승객들마저 힘을 합쳐 파인 도로를 흙이나 나무로 메우는 작업을 거듭하며 나아가곤 했다. 오후 1시에 산타 크루즈를 떠난 버스는 예정 도착시각 7시를 넘겨 밤 10시에야 라구니아스에 닿았다.
  
  문제는 다음날이다. 숙소에서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그치길 마음 졸이며 바라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하늘이 맑게 개인 아침이다. 숙소 주인의 주선으로 마을 주민으로부터 브라질산 4륜 구동차를 빌렸다.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급한 사정으로 현장에 함께 갈 수는 없다”는 말에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볼리비아 군에 입대했다가 휴가차 나왔다는 주인집 아들과 그 남동생이 안내자로 따라 붙었다. 게바라가 설치했던 혁명근거지는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 이 지역 일대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의 한 지류인 낭카와수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까지 닿는 데도 거의 3시간이 걸렸다. 비포장 도로 곳곳의 비포장 도로가 밤새 내린 비로 무너져 내렸거나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탓이었다.
  
체 게바라 혁명기지 터에 살고 있는 볼리비아 원주민. ⓒ김재명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는 지금 누군가의 농장으로 쓰여지고 있다. 현장에 들어서니, 남루한 옷을 입은 소작인 부부가 맞아준다. 그들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닌다. 그 꼬마에게 “체 게바라!”라고 말을 건네자, 그도 잘 알고 있다는 듯 환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해 가느다란 손을 쭉 내민다. 체 게바라는 그곳에 함석지붕으로 된 가건물을 지어놓았다. 그래서 그 혁명기지는 게릴라들 사이에 통칭 ‘함석집’(zinc house)으로 일컬어졌다.
  
  볼리비아 현지세력과의 갈등
  
  체 게바라와 함께한 게릴라는 모두 50명. 국적별로는 쿠바인 18명(체 게바라 포함), 페루인 3명, 볼리비아인 29명이었다. 총인원이 50명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은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과의 협력이 이뤄지지 못한 탓이었다. 1966년 12월 31일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가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을 비밀리에 방문, 체 게바라와 마주 앉았다. 몬헤는 “볼리비아 땅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은 내가 지도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체 게바라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몬헤는 이미 게바라 대열에 합류한 볼리비아 출신 게릴라들에게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당시 쿠바에서 무장훈련을 받은 뒤 낭카와수로 향할 예정이던 볼리비아인들에게도 합류를 거부하도록 명령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자체의 사회혁명보다는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삼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그의 혁명을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파라과이)로 수출한다는 점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의 전략적 목표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볼리비아 현지 좌익세력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게바라에겐 결정적 타격으로 작용했다.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바라를 모스크바와는 이념을 달리하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근거지를 잘못 골랐다“
  
  볼리비아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남미의 심장부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굳건한 혁명기지를 세움으로써 남미에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적어도 3년 전부터 사전준비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작업을 도왔던 인물이‘타니아’(본명은 하이데 타마라 붕케, 1937-1967년)란 이름을 가진 유태계 아르헨티나 여인이다. 1964년 체 게바라는 타니아를 볼리비아로 파견, 사전 탐색작업을 맡겼다(타니아는 1967년 3월 낭카와수 강변의 근거지에 왔다가 게릴라부대에 합류, 그 5개월 뒤 볼리비아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볼리비아에서 극적으로 탈출, 쿠바로 돌아왔던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폼보(아리 빌레가스)가 남긴 한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낭카와수 기지를 후방 안전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실제 게릴라 활동무대는 그보다 훨씬 북쪽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그 지역들에서 무장활동을 펴가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쿠바에서 훈련 받은 볼리비아 게릴라들을 낭카와수 지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럼으로써 볼리비아 내륙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안데스 산맥 줄기를 타고 혁명기지를 넓혀간다는 것이 체 게바라의 복안이었다.
  
체 게바라 게릴라 부대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맥 지류에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재명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폈던 볼리비아인 형제가 있다. 볼리비아 공산당원 출신으로 일찍부터 페루와 아르헨티나 산악지대를 근거로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폈던 ‘코코’(본명은 로베르토 페레도, 1938-1967년), 볼리비아 군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살아남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무너진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기를 노리던 중 사살됐던‘인티’(귀도 알바로 페레도, 1937-1969년)다.
  
  그 두 사람의 동생 오스발도 페레도는 현재 볼리비아 제2의 대도시 산타 크루즈의 시의원.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나온 오스발도도 형들을 따라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볼리비아 산 속의 체 게바라가 날마다 일어난 일과 감상을 적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도 ‘코코와 인티의 동생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곧 합류할 예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쿠바에 머물던 중 체 게바라 피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울었다. 산타 크루즈 시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오스발도 페레도(65)의 증언.
  
  “당시 많은 볼리비아 인들이 체 게바라 대열에 합류할 목적으로 쿠바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대부분이 낭카와수 기지로 가지 않고 이탈했다. 1967년 10월 체 게바라가 죽은 뒤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형 인티를 볼리비아 라파즈의 아지트에서 만나, 무엇 때문에 우리의 혁명투쟁이 실패로 돌아갔는가를 함께 논의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볼리비아 공산당의 배신적 행위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볼리비아 공산당에서 스스로 탈당을 했지, 공산당 지도자 몬헤가 지배하는 당에서 쫓겨난 게 아니다. 몬헤는 배신자로서의 더러운 이름을 지닌 채,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또다른 실패요인은 볼리비아 내륙 낭카와수 강가의 혁명기지가 너무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기엔 적절할지 몰라도, 체 게바라의 사회혁명 이념을 일반민중에 퍼뜨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이 축적된 볼리비아 북부 코차밤바 같은 지역이 혁명 근거지로선 더 적절했을 것이다”
  
  게바라의 품성 말해주는 일화들
  
  볼리비아에서 죽임을 당하기 몇 개월 전부터 체 게바라는 몹시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의 포위공격을 견디느라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일부는 스스로의 오줌을 받아마시기도 했다. 게바라의 몸도 갈수록 쇠약해갔다. 어렸을 때부터의 지병인 기침(기관지 천식)이 도져 그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약은 없었다. 비밀 아지트에 숨겨두었던 기침약은 이미 볼리비아군의 수색으로 뺏겨버린 상태였다. 페레도는 체 게바라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의 펴다 죽었던 형제(코코와 인티)의 친동생인 오스발도 페레도. 그도 모스크바와 쿠바를 거쳐 볼리비아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김재명

  “형 인티가 볼리비아 보안군에게 사살되기 전 라파스의 비밀 아지트에서 내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낭카와수 강변의 함석집 시절 체 게바라는 게릴라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의무를 다하려 했다. 식사 당번이나 청소 당번, 그리고 외곽 보초도 남들처럼 똑같이 섰다. 게바라는 그 무렵 기관지가 약해져 고생을 했다. 천식이 도지자, 동료들이 행군할 때 무거운 배낭 메는 일에서 체 게바라를 뺀 적이 있다. 그러나 게바라는 혁명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곧 배낭을 메고 앞장서 걸어갔다”
  
  다른 게릴라들에 비하면 게바라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튼튼한 편이었다. 그 시절의 체 게바라를 고민하도록 만든 또다른 문제가 게릴라 가운데 병약자와 부상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다가는 행군 속도가 느려, 볼리비아 추적군에게 몰살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페레도의 증언.
  
  “형 인티의 증언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부상자와 병약자들을 버리지 않았다. 게바라는 사단 규모의 볼리비아 군이 주둔 중이던 바예그란데를 기습, 약국에서 약품들을 얻어내 병약자들을 치료한다는 대담한 작전마저 세웠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볼리비아 특수부대원들의 포위를 뚫지 못하고 끝내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부상자들을 버리는 쪽으로 결정했더라면, 아무리 볼리비아군의 포위가 삼엄했다 하더라도 나의 형 인티가 그랬던 것처럼, 게바라도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체 게바라가 콩고(1965년)와 볼리비아(1966-67년)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1960년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고, 유럽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한편으로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지구촌 곳곳에선 좌익게릴라들이 사회변혁을 꾀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던 체 게바라.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남미혁명을 꿈꾸었던 체 게바라는 말 그대로 꿈을 좇았던 몽상적 행동가였나, 아니면 철저한 자기희생에 바탕한 휴머니스트였나.

 

 

 

 

 

  혁명아 체 게바라의 마지막 날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4>
  2005-02-28 오전 10:23:42
  체 게바라(1928-1967년)를 말할 때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인구 20만의 도시 산타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엔 체 게바라 혁명기념탑과 아울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기념관 안엔 체 게바라를 비롯,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무장 게릴라활동을 펴다 죽은 17명의 혁명투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 시신을 산타 클라라로 옮겨온 것은 바로 그곳에서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사에 커다란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산타 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에 타고 들어오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 항복을 받아냈다. 산타 클라라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통보했고, 바티스타는 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 바로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담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초상. ⓒ김재명

  그로부터 8년 뒤, 11개월에 걸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은 끝내 그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샀다. 그냥 빼앗는 일은 없었다. 체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 1966년 9월 2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 일행이 그날 새벽 2,280미터 고지의 외딴 산간마을인 피카초에 들어서자 “농부들이 (우리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식량을 빼앗지 않았고 예의 발랐다”
  
  피카초 마을은 열흘 뒤 게바라가 볼리비아 특수군에 붙잡힌 채 압송돼 와 사살 당했던 라 기에라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이다. 그 마을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던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알레한드리나 스모야(67). 오랜 찌든 가난 탓일까, 이빨이 하나만 남은 게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죽기 열흘 전 그를 만났던 볼리비아 여인(피카초 마을). ⓒ김재명

  “그때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나쁜 사람들이 떼지어 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라디오 같은 게 없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질 잘 몰랐다. 그런 어느 날(1966년 9월 26일) 새벽, 체 게바라 일행이 우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거칠고 거만한 볼리비아 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사선 불을 피워 끓여 먹었다. 몹시 시장해 보였다. 지금도 체 게바라를 기억한다. 그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보였다. 내 어린 아들(시실로 바냐와, 당시 두 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커야한다’고 말해주었다”
  
  1967년 10월 8일 라 기에라 마을 바로 북쪽 유로(Yuro) 계곡에서 부상당한 채 체포된 체 게바라는 곧바로 라 기에라 마을로 압송돼왔다. 그리곤 그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갇혔다. 학교라야 교실 두 개뿐인, 한국으로 치면 분교(分校)쯤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때 함께 붙잡혔던 ‘윌리’와 체 게바라는 각각 다른 교실에 갇혔다. 볼리비아 광산노조 출신으로 1932년생인 윌리의 본명은 시몬 쿠바. 모이세스 게바라가 이끄는 볼리비아 광부 12명과 함께 1967년 2월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인 낭카와수 강변에 이르렀다. 운명의 날인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가 다음날 게바라보다 먼저 처형됐다.
  
  한 여교사의 증언하는 게바라의 최후
  
  체 게바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이 있다. 이름은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8년 전 교단에서 물러난 뒤 바예그란데에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녀가 체 게바라를 만났던 날은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가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라이 귀에라의 한 작은 학교교실에 갇혀 있을 때였다. 훌리아는 그때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시골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체 게바라가 사살된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됐다. ⓒ김재명

  20대 초반의 여인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부인이 됐다. 그녀의 증언.
  
  “오후 어스름할 무렵 체 게라바가 다른 한 명의 포로와 함께 잡혀와 학교 교실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지니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에외였다. 나는 학교 선생이었고, 무엇보다 젊고 예뻤기에 군인들이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때 체 게바라는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두 발도 묶인 채 교실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나 다름 없이 헤어지고 찢어졌고, 신발은 군화가 아닌, 소가죽으로 만든 누런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가 군화를 강물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훌리아의 증언. “게바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다리는 총상을 입은 탓에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체 게바라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에게 왜 이런 투쟁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의 투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의 이상(ideal)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바깥에 나간다면, 당신같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체 게바라가 죽기 직전 앉아있었던 의자. ⓒ김재명
 
  1967년 체 게바라가 죽기 바로 직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전 학교여선생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57).   ⓒ김재명

  “게바라와 밤늦게까지 얘길 나누면서 우린 친구가 됐다. 기억나는 대로 그의 말을 옮긴다면 이렇다. ‘이 학교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학교를 새로 고쳐 짓고 현대적인 학교로 만들겠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주겠다. 트랙터를 보내 길을 넓혀 주겠다.’ 나도 그때 형편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데 한 볼리비아군 장교가 들어서더니,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무장군인들은 체 게바라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때 게바라의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게바라는 마치 아는 누군가가 마을사람들 속에 섞여있나 찾듯이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진을 찍은 뒤 군인들은 다시 게바라를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게바라와 얘길 나누진 못했다. 게바라는 군인들이 지키고 보는 앞에서 나와 얘길 하는 걸 삼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이 대목에서 훌리아는 잠시 울먹이는 표정이 됐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그 총소리는 게바라가 아니라 그와 함께 체포된 윌리를 겨냥한 총소리였다”
  
  “엄마는 체 게바라에게 주려고 조촐한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게 갖다주라고 했다. 게바라는 배가 고팠던 듯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식사는 근래에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나는 빈 접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한두 숫갈을 뜨려 하는데,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바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훌리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당시 현장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존슨 미 행정부와 볼리비아 군부독재정권은 체 게바라의 처리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즉결처형 쪽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체 게바라를 재판에 붙여 국제사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나 볼리비아 양쪽 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바라는 사살된 뒤 다른 게릴라 동료 시신들과 함께 볼리비아 군 헬기로 바예그란데로 실려갔다. 바예그란데는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게바라의 시닌은 그곳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에 눕혀진 채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런 뒤 비밀리에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에 묻혀졌다. 세상엔 그의 시신이 볼리비아 밀림지대에 그냥 내던져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즉결처형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헬리콥터로 옮겨진 다음 일반에 공개됐던 세뇨르 드 말타 병원 빨래터 (바예그란데). ⓒ김재명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정확히 30년 뒤. 게바라는 함께 암매장됐던 동료 게릴라 유해 6구와 함께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볼리비아 혁명과정에서 죽은 다른 11명의 유해도 그 비슷한 시기에 옮겨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게바라가 1958년 쿠바혁명 당시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산타 클라라에 거대한 혁명기념탑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게바라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전사들의 시신을 안장해놓았다.
  
  성취의 땅 쿠바, 좌절의 땅 볼리비아
  
  30대 나이의 체 게바라가 사회혁명의 이상을 품고 투쟁했던 곳이 쿠바와 볼리비아다. 그 두 지역은 게바라 개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선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희망의 땅이었다면, 볼리비아는 좌절과 실패의 땅이다. 볼리비아는 게바라의 혁명적 이상이 움틀 곳은 아니었다. 산타 크루즈 국립대학에서 만났던 로헤르 뚜에로 교수(정치학)는 “우리 볼리비아 지식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정신적 부채를 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예그란데 외곽 체 게바라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던 곳. 1997년 발굴돼 쿠바로 보내졌다. ⓒ김재명

  게바라가 처형됐던 안데스산맥의 작은 마을 라이게라는 따지고 보면, 게바라를 돕기는커녕 외면했던 곳이다. 게바라가 1966-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투쟁하면서 날마다 하룻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해 남긴 <볼리비아 일기>의 한 기록(1967년 9월 27일)에 따르면, 피카초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아침을 때운 게바라 일행이 라 이게라 마을에 들어서자, “남자들은 다들 사라지고 몇몇 부인들만 남아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게바라를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게바라 박물관이며 제법 큰 동상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이제와 체 게바라의 죽음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것이냐”는 눈총을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바라가 라이게라 마을에서 사살된 뒤 헬리콥터에 실려와 일반에 공개됐던 바예그란데(라이게라 북부 50km 지점에 있는 인구 8천의 작은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곳 문화센터가 만들어놓은 관광 프로그램은 체 게바라와 관련된 여러 곳들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라 할 만했다. 체 게바라의 시신이 놓여있던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 그리고 동료 6명과 함께 비밀리에 암매장했던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 그 지역 화가들이 그린 체 게바라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산타클라라 카페 등등...
  
  바예그란데 문화원 안에 있는 박물관 자체가 체 게바라 관련 유품과 지도들을 빼면 볼 것이 없을 정도다. 안데스 산맥말고는 이렇다할 관광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가 볼리비아다. 그런 까닭일까, 체 게바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볼리비아가 다시 그의 죽음을 상품으로 팔아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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