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와 한자

2017/10/18 17:19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2음절 개념어들은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서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번역어들이다. 비록 사용된 글자 하나하나는 한자이고 종종 오리지날 어휘와 개념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두 개의 한자가 하나로 결합되는 순간 구조적 변형이 일어난다. 이는 김용옥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온 바이다. experience의 번역어로 선택된 ‘경험’이란 단어의 뜻은 결코 經과 驗이란 어휘의 뜻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경험이란 단어를 이해하려면 經과 驗이란 한자어를 이해하기보다는 experience라는 영어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김용옥이 지적하듯이 조선 시대 텍스트에 나오는 經驗은 지금 우리가 쓰는 ‘경험’과는 다르다. 자연은 nature를 뜻하는 명사이지만 自然은 문장이고, 자유는 freedom을 뜻하지만 自由는 방종에 가까웠다. reason을 이성(理性)으로 번역하였다고 해서 reason을 이기(理氣)논쟁에서의 이(理)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개별 한자를 알면 한자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 자체는 이해는 하지만 과장된 측면이 많다. 우리말에서 한자 병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굳이 들자면 지나치게 많은 동음이의어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뿐이다(그마저도 문맥 속에서 구별되는 경우가 많지만). 즉, 한자를 괄호에 표기하는 것은 그 한자를 통해서 해당 어휘의 뜻을 이해하라는 측면보다 같은 모양을 가진 여러 단어 중에서 내가 원하는 단어를 가리키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 수소와 산소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물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안되듯이 개별 한자에 대한 지식과 2음절 이상의 한자어에 대한 이해는 별개이다. 한자 교육을 받지 않아서 우리말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하소연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말 텍스트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독서를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한자교육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다. 언어는 쓰이는 문맥 속에서 이해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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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의 눈물, 닭싸움이 된 태권도

2016/08/24 17:21

~손홍민이 병역혜택의 기회를 놓쳐서 울었다고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지금처럼 메달로 선수를 우롱하는 제도는 폐지해야 한다. 병역혜택은 성과가 아니라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국가대표로서 참여한 기간에 대해 주어져야 한다. 대회기간은 100% 인정하고, 대회를 위한 사전 소집은 그 기간의 몇%를 최대 얼마까지 인정하는 식이다. 굳이 성과를 반영한다면 메달을 따면 며칠을 추가하면 된다. 금메달 딴 사람만 자랑스런 우리 대표선수가 아니다. 출전해서 전패했을 지라도 정정당당하게 땀을 흘리고 경기에 임한 선수들 모두 우리 대표선수다.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줘야 한다. 지금처럼 선수 앞에다 금메달을 흔들며 “물어랏! 쉿! 쉿!”하는 역겨운 짓은 그만둬야 한다. 병역근무도 몇 달씩 끊어서 여러 해에 걸쳐 복무하는 방식도 허용하자. 일회성 포상이야 그렇다쳐도 메달에 따른 연금도 폐지해야 한다. 금메달리스트로 평생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된다. 우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일상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로컬룰을 과감히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봐서 재밌으면 되는 것 아닌가? 공격축구가 유리하게 룰을 만들자. 승패와 득점차를 함께 승점에 반영하면 어떤가? 승점이 같을 경우만 골득실을 따진다면 골득실이 순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적다. 대신 골득실차이의 10%만큼 승패에 따라 플러스, 마이너스를 부여한다면(3:1로 승부가 난 경우 승자는 3.2, 패자는 -0.2), 이기고 있는 팀은 더 골을 넣으려고 할 것이고 지고 있는 팀은 어떻게든 한골이라도 만회하려고 할 것이다.

태권도의 현실은 참담하다. 어쩌다가 태권도가 닭싸움으로 비하되고 있다. 하루속히 스포츠의 역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몇 가지 제안을 하자면. 너무 예민한 헤드기어센서가 문제긴 하지만 나는 전자호구 자체는 효용성이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그것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전자호구는 결과만 알려줄 뿐 과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권투에서 오픈가격은 점수로 인정하지 않듯이 태권도도 동작에 대한 규격화가 필요하다. 지금도 돌려차기는 배점이 더 높듯이, 발을 땅에 붙인 상태에서의 공격, 연속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가산점을 크게 주고, 발을 든 상태에서의 공격은 무효, 나아가 벌점을 줘야한다. 3점인 얼굴가격도, 충격에 따라 100%의 가산점, 두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진 상태인 경우 역시 100%(이른바 이단 옆차기), 선제공격인 경우 가산점을, 역습인 경우 일부만 인정하는 식 등등으로 다양화해야 한다. 경기장은 정방형이 아니라 겨루기의 긴장감을 확보할 수 있게 폭을 1미터 정도로 줄여야한다. 좌우로 경기장을 나가는 경우는 곧바로 패배가 선언되어야 한다. 뒤로 경기장을 벗어나는 경우도 상당한 감점을 줘서 선수로 하여금 벼랑끝 승부를 하게 유도해야 한다. 심하게 말해 이단옆차기 얼굴공격 한방으로 경기가 끝날 수 있어야 한다. 유도가 재밌는 이유는 언제라도 한판 역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태권도가 ‘재미있어진’ 결정적 계기는 품새에서 겨루기로의 전환이었다. 그 겨루기 정신을 극대화해야 한다. 한때 태권도는 ‘코리안 카라테’로 통했지만 태권도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태권도는 우리 고유의 브랜드가 되었다. 금메달따야 종주국의 명예인가? 아무도 축구최강국 브라질을 축구종주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태권도는 우리 것이니 금메달 걱정하지 말고 재밌게 만들 궁리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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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 ; 밥과 반찬

2015/08/07 17:11

밥과 반찬을 한자로 주식, 부식으로 표현하다보니 영어로 번역할 때도 main dish, side dish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밥과 반찬을 서양의 main dish와 side dish로 번역을 하면 좀 곤란한 점이 생긴다. 서양요리에서 side dish는 보통 없어도 그만인 경우가 많다. 설령 꼭 있어야 하는 경우라도 사람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피클 먹을려고 피자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음식에서 반찬은 오히려 주된 관심사다. 아래 예를 보자.

1. 퇴근후 집으로 돌아가는 Tom. 아내가 저녁으로 무엇을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이 경우 톰이 궁금한것은 main dish일까 side dish일까?

2. 퇴근후 집으로 돌아가는 홍길동. 아내가 저녁으로 무엇을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이 경우 홍길동이 궁금한것은 밥이 쌀밥이냐 잡곡밥이냐일까? 아니면 반찬이 김치찌개냐 된장찌개냐일까?

위 두 예를 비교해보면 서양음식에서 주된 관심은 main dish이지만 우리는 반찬이다. 식당을 이햐기할 때도, 어떤 집은 스테이크가 맛있다, 돈까스가 맛있다, 피자가 맛있다, 추어탕 잘한다, 김치찌개 맛있다, 칼국수 맛있다 등등으로 말한다. 즉, 스테이크, 돈까스, 피자, 추어탕, 김치찌개, 칼국수 등은 우리의 사고에서 같은 층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반찬을 side dish로 번역하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다. 어찌보면 차라리 반찬을 main dish라하고 밥을 side dish라 하고 싶을 지경이다. 또는 밥과 반찬을 모두 main dish라고 하는 것도 나름 타당해 보인다.

우리나라 음식은 냉면이나 칼국수처럼 하나의 그릇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밥'이 나오고 밥만 먹으면 곤란하니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이런저런 반찬이 나오는 걸로 이해할 수 있다. 샐러드 없이 스테이크만 먹을 수는 있지만 밥 없이 김치찌개만 먹는 경우 본 적 있는가?

나는 보통 외국인에게 설명할 때 밥은 primary dish라 하고 반찬은 main dish라고 말한다. 그리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정도다.

 

생각난 김에 이른바 한식을 외국에 보급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뭐든지 오리지날부터 시작하면 안된다. 처음에는 눈높이를 낮춰서 일단 퓨전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입맛이 점점 길들여지면 조금씩 조금씩 오리지날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생각해보라. 우리가 첨부터 지금처럼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즐겼는가? 우리가 첨부터 지금처럼 다양한 파스타/피자를 즐겼는가? 아니다. 첨에는 아주 간단한 수준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원래의 오리지날에 대한 갈증이 생기면서 종류가 다양해졌다. 외국에 한식이 보급되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처럼 밥과 다양한 반찬을 탁자에 진열하는 식은 곤란하다. 특히나 반찬이나 찌개를 같이 먹도록 하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 기본반찬은 반드시 1인용으로 준비해야하고 갯수도 한두가지 정도로 줄여야한다. 핵심 요리(추어탕, 김치찌개 등과 같은 우리가 그 식당에 가는 근본 이유인 메뉴)가 나오고 곁들여서 '약간의' 밥이 제공되는 정도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기본 셋팅이다. 나아가 밥 대신에 면도 가능하다고 본다. 즉, 예를 들어 추어탕/찌개/잡채 등을 면과 함께 먹는 식이다. 방법이야 아주 많겠지만 일단 첨에는 현지의 음식 문화와 퓨전을 해야한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먹는 방식 그대로 들이대면 안된다는 거다. 외국 나가서 한국식당 가면, 대부분 현지인을 위한 한국식당이 아니라 한국인(주로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다.

얼마전 프라하에서 한국식당에 갔다. 모든게 한국과 같다. 심지어 기본반찬이 많이 나오고 남은 반찬을 재활용하는 것까지 똑같다. 그 식당에서 일하는 체코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친구들에게 "한국식당에서는 남은 반찬을 다른 손님에게 제공한다"고 말할텐데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한국식당에 가보고 싶을까....?

외국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현지인이 요리를 하는 한국식당.... 내가 보고 싶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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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우리 동네 고등학교는 일요일이면 근처 교회의 주차장으로 변한다. 학교에 돈을 내고 학교주차장을 자신들의 주차장으로 쓰는 거다. 나는 이게 교육의 공공성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장에게 항의를 하였더니 학교운영위의 결정사항이라고 답변하였다.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하니(아마 열 번 정도는 한 듯 싶다) 담당이 전화를 해서 대충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나 : 학교 운동장을 교회 주차장으로 쓰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

담당 : 학교 운동장을 교회주차장으로 쓰는 것이 교육적이지 않은지의 판단은 교장의 권한이다.

나 : 그것이 교장의 권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학교 운동장이 교회 주차장으로 쓰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당신의 철학적 판단이 중요하다.

담당 : 내가 왜 그런 판단을 해야하는가? 그 판단은 온전히 교장이 하게 되어 있다. 규정이 그렇다.

나 : 무슨 소리냐? 지금 교육의 공공성이 무너지고 있는데 태평하게 규정 따지고 책임 따질때냐?

담당 : 왜 그러느냐? 혹시 조기 축구회원이냐? 축구 못해서 그러느냐?

 

학교 운동장을 교회 주차장으로 쓰는 결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그렇게도 중요할까? 교장은 학교운영위의 결정을 집행하는 영혼없는 한낱 쓰레기 부품에 불과한가? 교장의 결정에 교육청 관리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하는가?

 

관료주의의 역사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길다. 나는 고려의 성립과 함께 관료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은 송, 일본은 도쿠카와 막부 정도라고 본다. 조선과 함께 후기관료주의의 막이 오르고 관료주의의 최고 번성기가 시작된다. 중국은 대충 명,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후기관료주의로 이행했다고 나는 본다. 메이지유신의 지향점은, 겉으로는 서양 배끼기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관료주의를 운영원리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바로 조선 되겠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의 일본의 번성은 일본이 처한 역사적 발전단계와 관료주의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결과다. 우리로 치면 조선 전기 되겠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관료주의의 약발은 임진란 이후 급격히 떨어진다. 임진란 이후 우리 역사의 방황은 관료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운영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새로운 원리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이미 안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하느냐 되겠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의무, 책임으로 이해된다. 자신의 권한과 책임 너머의 일은 아몰랑!이다. 관료주의는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넷 댓글 : 가수가 노래나 하지 왜 정치에 관여하냐? 우리 사회의 호칭 구조인 홍과장(님)은 홍이라는 성(집단의 이름)과 과장이라는 타이틀 즉, 그에 해당하는 책임과 권한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 홍길동은 매우 이상한 존재다. 이름 뒤에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야 비로소 우리는 안심한다. 홍길동 시장, 홍길동 장관, 홍길동 타자, 홍길동 선수, 홍길동 기사……..

 

맨 앞의 장면에서 만약 교장이 “학교 운영비가 부족하여 부득이 교회에 임대하였다. 나도 못내 불편하다. 하루속히 이런 식의 수익사업을 하지 않고도 학생들이 여름에 편하게 냉방이 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때가 오면 좋겠다”고 답했다면? 만약 교육청 관리가 “아! 그것 참 곤란한 상황이군요. 교장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혹은 “당신의 민원을 보고 상황을 알아본 결과 당신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학교 운영 예산과 학생들의 공부환경 등을 종합해봤을 때 교장의 선택은 부득이한 것으로 보인다. 양해를 바란다.” 뭐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면? 나는 이들을 칭찬하는 글을 지금 쓰고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야할 의무가 있다. 학교 안에서는 교장이고 학교 밖에서는 시민인 것이 아니다. 시민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교장이 된 것이고, 시민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이고, 시민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자가 되는 것이다. 교장과 교육청 관리는 그 시민적 의무를 저버렸다. 자신들의 업무 분장내에서 그들은 무죄일 지 몰라도 공화국의 법정에서 그들은 유죄다.

 

율리우스 푸치크라는 체코 기자가 있다. 나치한테 끌려가 죽었다. 교수대의 비망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그는 나치대원은 정열이라도 있지만 체코 간수나 행정관료는 영혼없는 나무 인형으로 비유한다. 관료주의는 인간의 영혼을 빨아먹는 암이다. 치밀한 업무 분장, 그럴듯한 책임과 권한의 분배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보면서 흐뭇해할 지도 모르지만, 뼈와 뼈 사이에 관절이 필요하듯(그리고 문제는 거의 항상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조직과 조직, 업무와 업무 사이에 반드시 관절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정부 관료의 답은 언제나 똑같다. 우리 관할이 아니다. 우리 업무 밖의 일이다. 우리는 매뉴얼대로 처리했다. 결국 아무도 잘 못한 사람은 없는데 일은 엉망이 되어 있는 현실만 우리는 갖게 된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홍길동부장이 어떤 일을 해야 했는데 잊고 못했다. 혹은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홍길동과장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홍과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결국 일이 잘못 되었다. 이 경우 당신은 누구를 해고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홍과장을 해고한다. 홍부장은 단지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그에 맞는 다른 일을 맡기면 된다. 그러나 홍과장은 조직의 암이다. 즉시 제거해야하는 악성 종양이다.

 

시민적 권리와 책임. 이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학교주차장 사용의 결정이 운영위에 있다면 교장은 넋놓고 바라봐야 하는가? 결정권이 교장에 있다면 다른 교사 혹은 교육청은 바라만 봐야 하는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니 국민은 그저 대통령이 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가? 그런데 왜 그토록 사람들은 청계광장에 모이는가? 그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하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자신들이 공화국의 일원임을 믿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대사에 시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와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전적으로 옹호한다.

 

유럽은 개인(individual)을 처음으로 개념화하였다. 그리고 그 개념은 자유주의라는 사상으로 자란다. 동아시아의 어떤 사회도 아직 개인을 개념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하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 문명 앞에 놓인 문명적 과제는 바로 인민각개의 탄생이다. 그때 우리는 사회의 단위를 더 이상 가정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보게 될 터이고, 민주주의를 운영원리로 하는 공화국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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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인민각개의 탄생

2014/06/03 21:13

세월호는 우리에게 2가지 과제를 던진다. 하나는 사회와 국가의 기본 운영원리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우리 문명의 근본 틀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사회와 국가의 기본 운영원리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나는 "투표 똑바로 하자"는 댓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권재민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서의 참정권을 투표권으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보통 저 문구는 "우리가 주권을 행사할 길이 투표말고는 없으니 이거라도 제대로하자"는 대단히 자조적이고 패배적이고 지극히 수동적인 맥락에서 쓰인다는 것이 문제다. 참정권을 투표권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보편적 참정권이 화두가 된 이래로 지배계급과 기득권층들이 줄곧 애용한 수법이다. 당연히! 투표권은 참정권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세월호와 관련한 각종 운동(집회, 모임, 선언 등등)들이 반정부투쟁을 그 중점목표로 삼는 것도 반대한다. 세월호는 나쁜 정치인 몰아내고 좋은 정치인 앉힌다고 해서, 나쁜 관료 몰아내고 좋은 관료 앉힌다고 해서 해결될 물제가 아니다. 박그네 몰아내고 그자리에 철수를 앉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김대중/노무현을 앉혀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박그네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호 때문이 아니라 부정선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느 주인이 아랫것들한테 일을 맡겨놓고 4년이나 5년에 한번 보고받고 결재하는가? 도대체 어느 사장이 4년이나 5년에 한번 보고받고 결재받는가? 어느 회사 사장이나 다들 매일매일 보고받고, 의논하고, 토론하고 결재한다. 그렇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상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전문가의 식견은 그것을 보조할 뿐, 결코 국가와 사회의 초석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주장한다.

(1) 사법에서 배심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라.

(2) 입법 배심제를 실시하자. 국회의원 정족수의 3~5배 정도의 입법배심단을 구성하고 국회의원과 입법배심원들이 법안 표결에 참여한다. 국회의원은 동료 국회의원을 설득하는 대신 입법배심원을 설득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 국회는 마땅히 국민 전체를 골고루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국회에서 최대 집단은 사법인들이다. 누가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우리의 이익은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 무작위 추첨으로 선정한 입법배심원단이 지금의 국회의원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크다고 믿는다.

(3) 행정 배심제를 실시하자. 행정의 주요 현안에 대해 배심담을 구성하여 관료의 정책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도록 하자.

(4) 대법원장, 검찰총장, 경찰총장, 고등법원장, 고등검찰총장, 광역지방경찰청장을 직선으로!

(5) 헌법재판소의 구성을 법관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꿔야한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농민, 공무원, 자영업자, 중소기업, 대기업, 청년학생, 노인 층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사람들로 헌법재판소를 구성하여야 한다.(구체적인 항목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위 집단표에 여성을 넣을 것이지를 계속 고민중이다.)

다들 기억하자고 한다. 그런데 뭘 기억할건가??? 시민의 상식이 전문가/관료의 전문지식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2. 우리 문명의 틀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근대라는 단어 자체는 좋아하지 않지만 방편적으로 사용하자면, 나는 조선을 이땅의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인민의 정치 제도권 진입이 조선보다 더 광범위하게 허용되었던 사회가 당시 있었는가? 조선은 과거제가 가장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던 국가였다. 조선초 성리학은 근대사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16세기 후반부터 흐름이 크게 흔들리면서 결국 19세기말 이후 일본의 간섭 그리고 미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이른바 '근대성'의 획득 혹은 '근대적 개인'의 성립이 크게 억압받았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문명의 과제는 바로 '개인'의 출현이다. 공동체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주체적 개인의 탄생!

나는 주장한다.

(1) 선거 및 피선거 연령을 만 16세로 낮춰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 및 자신의 친구가 시의원이되고 시장이 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물론 실수를 할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 어른들이 있는 것 아닌가?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한다. 어른들은 메밀밭의 파수꾼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2) 존대어법을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가능한한 반말 중심으로 우리의 말글살이를 재편해야 한다. 몇년전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추락에서 밝혀졌듯이 지금 우리 언어생활은 상사/어른에 대한 존대와 예의가 지나치다. 히딩크는 운동장에서 선후배가 말을 놓게 했다. 물론 존대어를 쓰면서도 얼마든지 논쟁은 가능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 현실에서 한사람은 반말을, 한사람은 경어를 쓰면 이게 평등한 대화가 안된다. 존칭은 그 자체가 권력을 나타낸다. 존대어. 정말 너무너무 많다. 과감히 줄이자. 이걸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 초등학교부터 교육시키자. 어차피 서른살 넘은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 살다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각종 드라마 등을 통해서 비존대어법을 보급하자. 그럴려면 당연히 비존대어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라고 전문가가 있는 것이다.

(3) 모든 사물은 그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신문기사 보라. "....박원순시장은 이명박전대통령과 오세훈전 서울시장을 만났고 이자리에 홍길동비서실장과 김길동 전관세청장이 있었고....박시장은...이전대톨령은...오전시장은...홀비서실장은...김전청장은..."이렇게 나온다. 구역질 나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사회면을 보라. "홍길동씨는 길을 가다 김길동씨와 만나서 함께 이길동씨 집에 가서...홍씨는...김씨는...이씨는..." 염병할! 국가의 주인은 홍씨 이씨 김씨로 부르고 주인의 종들은 꼬박꼬박 직함으로 불러준다. 이러면 안된다. 영어처럼 직함은 이름 앞에 오고 이름 뒤에는 씨를 쓰거나 그냥 생략해야 한다. 즉, 기사 처음에는 "오세훈 전서울시장"이 아니라 "전서울시장 오세훈"은..전대통령 이명박은...이렇께 쓰고, 이후에는 이명박은...오세훈은..박원순은.... 이렇게 기사를 써야한다. 첨에는 공무원이나 공직자부터 시작하고 점점 일반 시민사회로 퍼져나가게 한다. 역시 드라마를 통해서 대중을 교육시킨다. 그래서 회사에서 "홍부장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홍길동! 이라고 부르게 되기까지(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지속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어야한다. 또한 친구들 사이에 이름을 부를 때 뒤에 접사를 생략하도록 한다. 즉, 길동아! 라고 부르는 대신 홍길동! 혹은 길동! 이라고 부르게 한다. 왜냐하면, 선/후배 간에 이름을 부를 때 선배는 길동아! 라고 부르는데 후배는 길동형! 이라고 부르는게 현실이다. 이러면 안된다. 이름 부르는 순간에 벌써 두사람의 권력관계가 성립해버린다. 이름 뒤에 접사를 생략하도록 어릴 때부터 습관을 갖도록 하자.

(4) 우리 언어의 큰 약점 중 하나가 2인칭 대명사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남녀노소가 상대를 부를 수 있는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영어 유(you)를 직수입할 것을 제안한다. 역시 드라마나 광고등을 통해서 대중들이 익숙해지도록 유도한다.

(5) 목록을 만들자면 한도끝도 없다. 원칙은 하나. 공동체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민각개의 탄생을 위해 과감하게, 다소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법적, 제도적 굴레를 없애야 한다.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설령 내게 유리하더라도 국가가 시키면 하기 싫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밀어부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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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

2013/09/04 11:15

며칠전 '지정학은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하다'는 환추시보의 사설을 읽었다. 뻔한 순망치한이야기였지만 눈길을 끄는 건 그런 상황이 명나라 이후 줄곧 유지되었다는 그들의 역사 인식이었다. 즉, 명나라 이후 혹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일본문명이 중국문명에 명백한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그들은 임진왜란을 어쩌면 일본문명과 중국문명의 격돌(조금 양보하면 일본 대 중국-조선연합.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역할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해전은 몰라도 육전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분명한 건 임진왜란 출정은 명나라가 무너지는데 결정타였다는 것이다.)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사가 수능의 필수과목이 될 것같다.(딱 잘라서 말하자면, 나는 국사과목의 필수지정에 반대하지도 않지만 찬성하지도 않는다. 여기서는 국사는 당연히 동아시아 문명사라는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만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 와중에 교학사 국사교과서가 논란이다. 오래전부터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퍽 궁금했다. 처녀가 강간당하고나서 강간범 덕분에 섹스를 알게되었으니 고마와해야한다는 이 해괴망측한 논리를 버젓이 주장하는 그들의 심리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현재까지 내가 이해한바로는, 19세기 후반에서 식민지시대를 통해 마주친 일본 문명에 압도당했다라는 것이다. 아마 식민지시대 많은 조선인들이 그런 심정적 절벽을 느꼈을 것이다. 19세기 마주친 일본문명은 16세기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 그 위압감은 곧바로 자괴감으로, 자괴감은 자학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식민지근대화론을 구성했다는 것이 나의 인식이다.(1910년대 일본은 연평균 20%라는 가공할 만한 성장으로 미국과 함께 세계경제의 양대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 하나.(이 부분은 내가 정확한 사실관계에 대해 자신이 없다. 그냥 상상정도로 이해해도 좋다.) 정묘/병자호란 때 일어난 의병에 대해 들은 바가 별로 없다. 워낙 속전속결로 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임진왜란 때 의병장에 대해 국가가 얼마나 부당하게 대접했는가에 대한 민중들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앞으로 30년 50년 이후를 상상해보자. 만약 미국의 패권적 지위(혹은 능력)이 조금씩 약해지면서 동아시아에서 그들의 지분이 지금의 러시아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남는 것은 중국과 일본. 이 경우 중국은 수세적이고 일본은 공세적이다. 그리고 만약 남북이 여전히 통일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남쪽은 일본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는 건 필연일 터. 어쩌면 국민투표를 통해 남한이 일본연방에 귀속하게 되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물론 통일이 된 상태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어쩌면 우리 손자 세대들은 지금 우리가 영어에 몰두하듯이 일어를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히라가나로 쓰여진 게다가 그에 대한 한글 표기조차도 없는 가게 간판을 보면 문득문득 이런 끔찍한 상상이 떠오른다.) 학습효과에 의해 무수히 많은 자발적 친일파가 등장할 것이다. 임진왜란이 16세기말, 식민지가 19세기말이었으니 다음번은 21세기 말쯤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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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본질에 관하여

2013/05/16 13:20

윤창중 보도와 댓글에 흔히 달라 붙는 '나랏망신'이란 표현. 나는 심히 거슬린다. 윤창중의 성추행(혹은 폭력)은 나랏망신이 아니다. 그건 그 개인의 잘못일 뿐이다. 몇년전 미국 총기 사고 때 죄송해서 몸둘바 모르던 한국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명백한 현행범을 도피시킨 청와대의 작태는 확실히 나랏망신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론 보도에서 보이는 태도는 왜 하필 남의 나라 가서 일을 저질렀냐는 것이다. 한국땅에서 했으면 아무 탈 없었을 텐데. 왜 방상훈이를 본받지 않았느냐? 나는 국가주의가 싫다. 장자연의 죄목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지 않은 것인가? 도미니크 칸 때, 그것을 프랑스의 수치라고 표현한 언론은 없었다. 그러나 10여년전 빼땡이 대선 결선 투표에 진출했을 때 그것을 프랑스의 수치라고 많은 언론이 망연자실했다. 윤창중이 나랏망신이라고? 뭐 그까이 것 가지고~ 서울 광장에 모여 부시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영어로 설교하고 "Bombard north Korea!!"를 외치던 그 수많은 기독교도분들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하자는 전라도 새끼보다 전라도 새끼들 학살한 내 고향사람이 좋다던 87년 대선 당시 800만 대구.경북분들에 비할 바는 더더욱 아닌듯. 아! 경상민국을 외치면서 주구장창 한나라당만 지지하는 분들은 또 어떤가?

 

성폭력, 성매매, 불륜 등의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 '딸같은 여자'라는 표현도 참으로 거슬리다. 딸같은 여자랑 섹스하면 안되는가? 딸같은 여자랑 연애하면 안되는가? 딸같은 여자는 강간하면 안되고 딸같지 않은 여자는 강간해도 된다? 딸같은 여자랑 불륜에 빠지면 안되고 딸같지 않은 여자랑은 불륜에 빠져도 된다? 뭐 이런 엿같은 가족주의가 있는가? 나는 가족주의가 싫다. 언젠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새끼. 기자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는 '식당 아주머니인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강간해도 되는 여자가 있고 하면 안되는 여자가 있는가?

 

수잔 브라운밀러는 'against our will'에서 강간범은 모든 남성의 전위부대라는 탁월한 그리고 완벽한 분석을 하였다. 강간을 하는 나쁜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착한' 남성을 찾고 그에 의탁하려는 여성의 모습. 그것이 성폭력이 세상의 여성들에게 부여한 가장 최악의 선물이다. 강간을 아주 나쁜 범죄로 묘사하고 강간범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하면 할수록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이 역설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폭력을 이해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겠다. 어디까지나 예일 뿐이다. 아래 두가지 상황.

1. 강간당하는 여자가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상황.

2. 강간당한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경찰에 신고하고, 친구들에게 혹은 회사 동료들에게(남자든 여자든) '아! 재수없어. 나 어제 집에 가다 강간당했다."라고 말하는 상황.

 

위 두가지 상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길가다 소매치기 당하면 수치심에 부르르 떠는가? 어떤 미친 놈이 당신 뺨을 때리면 부끄러워서 회사 사람들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는가? 강간당한 것을 부끄러운 그 무엇, 치욕스러운 그 무엇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의 여성 지배를 관철시키려는 남성의 음모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성폭력의 본질은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폭력에 그 이외의 어떤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강간범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그러면 강간은 줄어들지언정 강간살인은 폭증할 것이다(증거인멸을 위해). 당신에게 두가지 선택이 있다. 강간당하고 집에 가는 것. 그리고 강간당하고 죽는 것. 물론 기꺼이 두번째를 선택하겠다는 이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다수의 선택은 다를 거라고 본다. 성폭력에 치를 떠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아름다운가? 그친구가 일반적인 폭력에는 덤덤하면서 유난히 성폭력에 치를 떤다면 곰곰히 고민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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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금'을 읽었다. 소금의 문학적 성취는 잘 모르겠으나 계급적 착취구조가 혈연 가족을 매개로해서 작동한다는 그의 인식은 참으로 탁월하다. 같은 시기에 the giver라는 에스에프소설을 읽었다.

 

"세상에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가족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대처의 말(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은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을 이용해 먹으려는 개수작일 뿐이다. 일제식민지시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파시즘의 시절, 분명하고 명백한 불의 앞에 저항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용기부족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자본의 노예신세를 기꺼이 인내하는 이유. 가족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회복지란 가족 단위의 생존 전략을 사회 전체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개별 가족의 불평등을 사회적으로 해소하자는 것. 플라톤이 왜 부인을 공유하자고 했겠는가? 상속과 증여가 사라진다면,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갈까?

 

존 레넌은 천국이 사라지고, 소유가 사라지고, 국가가 사라진 모습을 상상했다. 소유는 가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가 사라진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가족이냐? 사회냐? 그 대립구도가 분명하다. 단언컨데 혈연가족은 세상 거의 모든 악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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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동성애 / 여성동성애

2013/04/26 16:45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동성애보다 남성동성애가 훨씬 더 혐오의 대상이다. 심지어 여성동성애는 관능적으로까지 묘사되기도 하지만 남성동성애는 그렇지 않다.

 

인간에 대한 모든 진리는 인간이 몸뚱아리로 존재한다는 그 생물학적 한계를 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은 권력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게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어차피 피지배자가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않는가 말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남성에게 관심이 없는 여성동성애자는 괘씸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동성애자가 그다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어쨌든 여성동성애자도 얘는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강간을 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성애 여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성동성애자는 남성에게 그다지 혐오의 대상이 아니며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남성의 성취감을 자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포르노그라피에서 레즈비안을 강간하면서 "이년아 어떠냐. 딜도보다 진짜 남자 좃이 훨씬 좋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여성동성애자는 설령 출산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여성의 육아를 도와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레너드 쉴레인은 인간유전자 풀에 동성애유전자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한다.

 

반면 남성동성애의 경우를 보자. 어찌 생각해보면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동성애자는 짝짓기 경쟁에서 일부 남성이 기권하는 것이므로 남성동성애를 반겨야 할 것 이다. 아주 잘생기고 돈많은 남자가 동성애자라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여성이 남성동성애자를 싫어하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그렇지만 남성동성애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는? 그것은 첫째, 남성동성애는 생식에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종보전의 본능이다. 남성동성애자는 아무리 이쁜 여자를 보아도 발기가 되지 않는 약점이 있다. 둘째, 남성동성애는 남성성의 훼손으로 간주된다. 남성성은 거의 언제나 폭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남자가 여자보다 잘하는 것이 다섯가지 있다. 살인, 강도, 강간, 폭력 그리고 전쟁. 이런 폭력성에 기초한 남성성은 주로 여성에 대한 심리적, 물리적 폭력을 통해 학습되고 강화된다. 같은 남성에 대한 폭력을 통해서 폭력성을 기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따르므로 기본적으로 남성의 전략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남성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성을 언제든지 힘으로 찍어누르고 여성의 성기에 자신의 깃발을 꽂아넣을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남성성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문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기에 관심이 없는 남자동성애자는 남성일반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이런 남성의 관점을 여성들이 수용하게 되는 것은 지배/피지배자 사이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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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대한 사회적 통제_1부1처

2013/04/24 17:13

굳이 분류하자면 1부1처제는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 가깝다. '부인도 공유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이해하는 얼간이는 없으리라 본다. 군집생활하는 동물의 경우 강한 수컷이 무리의 암컷을 거의 독점해버리는 경우는 흔히 발생한다. 즉, 인간의 경우에도 강한 자가 다수의 이성을 품에 안게 되면서 공동체의 많은 개체가 짝이 없이 지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지금은 남자가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강한남자(경제력, 성, 외모 등에서)가 다수의 여성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결국 1부1처제는 능력있는 남자의 욕망에 대한 사회적 통제로 작용하게 되며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약자에게도 짝짓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장치인 셈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1부1처제가 반드시 결혼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1부1처제는 특정 시기에 성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약자 우대 정책'이라면, 결혼은 미래에 성적 약자로 전락할 지도 모르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종의 사회안전망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결국 스와핑(혹은 스윙잉)은 능력있는 남성이 주도하게 되어 있다. 스와핑을 해도 자신의 짝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만이 스와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실제에서는 스와핑을 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짝을 잃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특히 능력이 떨어지는 남자(경제적, 외모, 성능력 등등에서)의 경우에는 그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하겠다. 결국 스와핑이 자본가의 포르노그라피라면 네토라레는 노동자 버젼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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