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7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성공회대 교수 이남주씨의 칼럼 중 아주 정확한 내용이 있어서 그대로 옮긴다.

 

"....한국의 진보는 현재 서구의 진보들이 수행했던 과제만이 아니라 보수 혹은 자유주의적 세력이 수행했던 과제도 같이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면서 드레퓌스 사건 때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의 행동을 예로 들었다.

 

진보에 대한 나의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강고한 통일전선의 형성. 그를 방해하는 자는 적이다. 진보라고 생각하는 자는 단 한순간도 이 과제를 잊어서는 안된다. 강력한 통일전선. 힘있는 자는 힘으로, 돈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있는 자는 지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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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화살 그리고 진중권의 닥질

2012/01/25 22:11

진중권의 목표는 우리 사회의 한걸음 진보가 아니다.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자신의 아이덴터티. 그것이 그의 목표다.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면 사회가 진보하리라는 학비리의 모습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김명호씨 재판의 실재적 진실을 어찌 법원 판결문이나 속기록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형식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는 내가 평소에 보았던 진중권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데?

 

김명호, 그리고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핵심은 이렇다. 영화에서는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김명호의 교수재임용탈락과정, 혈흔 감정 및 증인 채택 청구 기각, 사건의 실재적 진실을 파악하려고 하기 전에 미리 어떤 판단을 예단한 법관들의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을 하기도 전에 전국 법원장들이 모여서 이 사건을 사법부에 대한 테러라고 규정하고 엄중하게 다뤄야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몇년전 촛불 재판에서 담당 판사들에게 이메일로 이러저러한 지시를 한 신영철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재판과정에서 김명호씨는 몇몇 장면에서 비이성적이고 매우 꼬장꼬장한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그런 태도를 앞뒤 정황과 무관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김명호씨는 매우 불공정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런 경우 진중권씨처럼 매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진중권씨에게는 교수라는게 그다지 의미가 없을 수 있겠지만 김명호씨는 아닐 수 있다. 개인적 성향의 차이도 있을 수 있고, 진중권씨는 누가 봐도 정치적 탈락이었으니 나름대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도 있고 또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김명호씨의 경우는 사람들이 과연 진중권씨 경우처럼 일방적으로 김명호를 지지했을까? 김명호씨는 사람들이 반신반의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그런 분위기라면, 그리고 그가 정말 부당하게 탈락했다면 얼마나 억울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즉, "재임용탈락 =>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분 => 심리적 안정"이라는 과정이 있을 수 있고, "재임용탈락 => 사람들이 긴가민가 => 심리적 억울함"이라는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몇몇 돌출적인 행동을 가지고 전체를 싸잡아버리는 것. 이게 옳지 않다는 건 진중권 자신이 더 잘 알것이다. 난 그렇게 믿고 싶다. 내가 아는 진중권은 또라이기는 하지만 꼴통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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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런 신문기사 : "...김대중대통령은 이명박전서울시장과 박근혜전한나라당대표를 만났고 이자리에에는 김영삼전대통령 시절 청와대수석비서관을 지낸 이재동(가칭)전수석비서관이 있었는데.....이날 박전한나라당대표는 이전서울시장과...또한 이전수석비서관은 김전대통령의 뜻을...김대통령은..." 뭐 대충 이렇다. 기사 뒤에 가면 성에 직함만 붙어 나온다. 정말 헛갈려 돌아버리겠다.

 

그런데 일반인들에 대한 기사는 이렇다. "...홍길동씨는...고길동씨를....이에 고씨는 홍씨를...."

 

일단 첫째 : 일반인들은 그냥 씨라 부르고 윗넘들은 다들 직함을 붙인다. 씨바 이게 말이되냐? 일반 시민들은 하대해도되고 관료들은 깍듯이 직함을 붙인다? 좃도 이건 말이 안된다. 이런 구역질나는 태도를 버려야한다.

 

두번째 : 애시당초 윗대가리넘들을 무슨무슨 직함으로 부르는 것 자체를 바꿔야 한다. 뭐? 우리말의 특징이라고? 좃을 까라! 그따위 특징은 버려도되지 않을까? 직함으로 부르는 관습을 혁명적으로 때려부숴야 할 때이다.

 

이게 일반인들의 삶에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렵다. 언론이 앞장서서 바꿔야한다. TV, 신문 등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관련된 사람을 씨로 불러야 한다. 직함이 필요한 경우는 이름 앞에 적으면 된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아니라 전대통령 김영삼씨로 불러야 한다. 이건 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부터서는 그냥 김영삼씨로 부르면 된다. TV토론등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차츰 일반인들의 삶으로 퍼질 수 있게 된다.

 

또하나,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드라마 등에서 이런 호칭을 쓰도록 권고하는 방법이 있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나 쓸 수법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나는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사장을 홍사장님!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씨! 라고 부르는 장면. 물론 처음에는 매우 낯설것이다. 당연하다. 수백년을 지켜온 버릇인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바꿔야 한다. 1945년 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 부재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바꿔나가야 한다. Better later than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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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웃자고 하는 의도든 걱정해서 하는 소리든 제발 개인적인 질문은 안할 수 없을까? 그 사람이 결혼을 안하든 못하든 저런 질문은 당사자가 직접 하면 모를까 다른 사람이 먼저 화제로 꺼낼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만약 그사람이 그런 류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사람은 얼마나 괴로울까? 만약 그사람이 독신주의라면,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면, 그 사람이 이미 이혼을 하고나서 결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 그때마다 그사람은 뭐라 해명을 해야하나?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저런 질문은 "나 그리고 우리는 결혼했는데 너는 왜 안하느냐?" 정도의 패거리성 질문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왜 얘가 없느냐?

얼굴이 안좋아 보인다.

얼굴이 좋아보인다.

기타 등등...

 

한국 전쟁의 영향이 크다고는 하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 횡횡하기에 매우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건 이념 이전의 문제다. 우리 사회는 아주 많~~~~이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진보? 엿같은 진보는 그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등이 집권했을 때, 어느날 갑자기 비밀경찰이 사람들을 잡아가는 세상이 오지 말란 법이 없다고. 그건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 물론 진보진영에 있는 사람들 자체는 그런 방식을 좋아할 리는 없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세상은, 사람들은 이념의 원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기독교의 모습이 예수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유교의 모습이 공.맹이 원했던 것도 아니다. 어떤 선진 집단에서 제시한 이념이 당대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해석되는 모습은 그 이념을 제시한 집단의 원래 의도와 얼마든지 달리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정부 출범 때에도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우리의 과제는 진보/보수가 아니다라고. 여전히 우리의 과제는 상식/몰상식, 합리/비합리의 갈등이라고. 진보? 보수? 누가 진보고 누가 보수지? 한나라당,좃선일보,검찰 등등이 보수라고? *지 껌씹는 소리 그만하자. 저놈들은 그냥 깡패일뿐이다. 그 깡패들이 우리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틀어쥐고 있다. 그리고 그 깡패들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이 38%이다. 나머지는 온전한가? 심지어 나마저도 나는 온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십년을 어처구니 없는 사회에서 살았는데 온전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정말 개같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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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관계 정상화에 관한 단상

2011/12/20 23:15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북미관계에 대처하는 북의 자세 혹은 김정일을 포함한 북의 지도층의 태도에 대하여 언급할 때 그들이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충 2가지를 짚겠다.

 

먼저 질문 하나 : 소위 6자회담 참가국 중에 북.미 관계 정상화를 가장 바라는 쪽은 누구인가? 당연히 북한이다. 그럼 북미관계 정상화의 상대국인 미국은 북.미관계 정상화를 바라나? yes/no로 답하라 한다면 나는 no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미국 입장에서 공짜로 북.미관계가 정상화된다면, 즉, 북한이 미국의 영향권으로 제발로 들어온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를 위해 미국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수로 문제에서 보다시피 미국은 북미관계 정상화의 댓가를 자신이 지불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 비용을 어떻게 하든 주변국(물론 남한이 상당한 몫을 치뤄야겠지만)이 분담하기를 바란다. 소련 붕괴이후 북한은 20년 넘게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구하였다. 중국의 투자 제의를 한사코 거부해가면서 남북/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하였다. 비극은 미국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야 남한이 자신들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데 굳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 가면서까지 북한까지 포섭해야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현상유지, 관리만 되면 OK였겠지. 난 미국을 믿지 않는다. 제네바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든게 누구인가? 북한이 아무리 양보를 했다손 치더라도 북미관계는 애초에 정상화될 수 없는 난제였다.

 

둘째.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북한이 엄~~~청나게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까지? 65년 한일국교수립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비굴한 수준. 내 스스로 내 입장 정리가 잘 안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식량난으로 대변되는 북한의 문제, 1차적 책임? 당연히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의 지도층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한일국교수립의 수준을 넘는 비굴한 조건을 감수하면서라도 북미관계를 정상화해야 했던가? 만약 그런 조건을 감수하기만 하면 북미관계가 정상화되고 따라서 식량난이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나의 대답은 yes이다. 문제는...그렇다면 65년 박정희의 선택은 옳았단 말인가.....? 이 부분이 정말 헛갈린다...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다고 김정일을 포함한 북 지도층을 씹어대는 진보진영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김정일이 틀렸는가? 그렇다면 박정희는 옳았는가? 베트남 파병은 옳았는가? 이라크 파병은? 그걸 거절했다면 미국이 가만 두었을까? 혼란스럽다.

 

김정일/김일성 비판은 차라리 왜 친중국 노선을 좀더 아주 일찍 과감하고 광범위하게 하지 않았느냐에 맞춰져야 한다. 즉, 핵이 없어도 중국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과감하게 믿어버리고, 최악의 경우 중국에 주권의 상당부분을 양보해 버리더라도(남을 봐라! 군사작전권도 미국이 가지고 있지 않느냐?) 남북/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신기루를 포기했어야 했다. 너무 오랫동안 헛고생을 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미국에 대한 판단이 어리석었다. 미국은 애초에 신뢰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 남한? 뭘 바라나? 뭘 같이 할려고 해도 가이방해야 할 것 아닌가? 따라서 북한은 중국에게 브라자 빤쓰 다 벗어던져가면서 애걸했어야 했다. 그러면서 이를 가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판단을 아무리 늦어도 90년대 중반에는 내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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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동영상?

2011/12/06 17:34

도대체 무엇이 음란하다는 말인가???

 

모 방송인의 섹스동영상이 화제다. 쩝~ 솔직이 말해 나도 기회가 있으면 볼 것이고, 보면서 자위행위를 신나게 할 것이다. 이점 비난 및 비판을 달게 받겠다. 다만, 도대체 기사의 제목이 왜 음란동영상이냔 말이다! 그냥 섹스동영상, 아니면 성행위동영상 등등으로 부르면 안될까?

 

막말로 떼씹을 해도 음란하다고 규정할 수는 없을터인데 단둘이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섹스한 걸 음란하다??? 씨바 그럼 세상에 음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냐?

 

어제 '섹스 앤 루시아"라는 영화를 보았다. '북극의 연인들'이라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란다. '북극의 연인들'은 예전에 재밌게 봤다. '..루시아'도 재밌다. 그런데..... 제발 인간의 몸뚱아리에 뿌연 분탕질좀 하지 말자. 나나 너나 다 그 구멍을 통해 세상에 나오지 않았느냔 말이다. 인간의 몸이다. 거기에 털이 좀 나 있을 뿐이고. 음란하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영화 보는 내내 왕짜증이었다. 저 아름다운 몸에 할 짓이 아니다.

 

해당 방송인...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야 한다. 부끄럽고 쪽팔리지만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누가 비슷한 이야기 하면, 봤냐? 하면서 가볍게 응대해주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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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011/12/04 19:54

별로 재미없는, 뻔한 미국식 애니매이션이다. 그런데...

 

오프닝타이틀에서 눈이 번쩍 띄이는 게 있었다. a film by a lot of people.

내 기억에 a film by 다음에 감독 이름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이게 유일하다. 저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가? 조금 된 이야기지만 한 때 미국 시나리오 작가들이 파업을 한 적이 있었다. the usual suspects, the sixth sense 등의 성공에 힘입어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a film by 다음에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도 넣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파업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다. 그정도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재미없을 것이 확실하였지만 오로지 저 문구에 감동먹어서 끝까지 보았다. 물론 재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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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yes도 no도 아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때문에 식민지가 되었다는 시각은, 첫째 일제의 아주 편리한 해석이었고, 둘째 다카끼 마사오가 수출드라이브를 펴면서 민중을 탄압할 때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도구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주체적이고 독립된 시각의 결여를 보여준다. 처음 두가지는 설명안해도 알 것이고, 세번째만 조금 부연하겠다.

 

우리가 조선후기를 공부할 때 지겹게 듣는 단어가 있다. 바로 '실학'이다. 그러나 김용옥씨가 '독기학설'에서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실학자는 성리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른바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의 꿈은 성리학에 기반한 제대로된 국가였다. 조선초의 건강한 유교국가로 돌아가자! 이게 그들의 목표였다. 정약용은 결코 조선, 그리고 성리학을 갈아 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그리고 성리학은 정약용, 그리고 대다수 성리학자들에게는 처음과 끝이었다. 그들 성리학자 말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최한기. 이 이야기를 왜하냐고?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말하고자 함이다. 김용옥씨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독립하지는 못했다. 독립? 그렇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독립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이후 일제식민지라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뭐랄까... anything but 쪽팔이라고나 할까? 일제가 조선은 봉건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은 봉건주의라고 주장해야했다. 일제가 조선에는 자본주의 맹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에는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해야 했다. 일제가 자신들은 개방해서 흥했고 너희는 쇄국해서 망했다고 주장했다. 이건 맞는 말인것 같았다.

 

내 생각은 이렇다. 조선은 봉건주의 아니다. 역사적으로 봉건제는 매우 특이한 제도이며 중세유럽, 중국 주나라, 일본 막부 이렇게 세가지 버전이 있다. 자본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봉건제가 필요하다? 마르크스가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다. 마르크스는 영국이 봉건제에서 어떻게 자본주의로 발전했는가를 보였을 뿐, 그 흐름이(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모든 나라에 일관되게 적용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편지에서 남기기도 했다. 자 어쨌든! 우리는 매우 기본적인 미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필연인가? 자본주의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불가피한 것인가? 산업화, 민주화 등은 자본주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가? 등등에 대한 질문을 하여야 한다.

 

쇄국정책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개방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런 정책의 기반을 어디에서 찾는가이다. 즉, 쇄국정책의 기반을 구시대의 기득권층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떠오르는 중인 그리고 광범위한 민중에게서 찾을 것인가? 이것이 본질적인 질문이어야 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난 당시의 흐름에서는 쇄국정책이 더 타당했다고 본다. 물론 문 걸어잠그고 눈가리고 아웅하자는 말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쇄국을 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핵심사항은 선별해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열강들이 주장하는 통상개방은 결코 우리에게 유리한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정권의 기반을 민중, 중인에게서 찾았어야 했다. 즉, 동학혁명의 그 세력들, 만민공동회의 그 세력들, 성리학을 훌쩍 뛰어넘어 자연과학에 기반한 패러다임으로 무장했던 지식인들. 바로 그들에 기반해서 정책(그것이 개방이든 쇄국이든 간에)을 추진했어야 했다. 이것이 본질이다. 쇄국때문에 망했다고?? 매우 편리한 방식이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다.

 

장하준씨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무역으로 성장하였다. 80년대 말만 해도 외국에서 뭔가를 수입할 때 껀껀이 국가에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씹새끼야. 우리가 수출로 먹고사는데 너는 니 혼자 잘먹고 잘살자고 외국에서 수입을 하냐 이 호로새끼야!"하고 말하는 관리의 눈초리말이다.

 

한미FTA는 우리에겐 너무 급격한 변화이며 너무나 큰 risk를 지는 것이다. 물론 찬성론자들의 기대대로 결과적으로 잘 될 수도 있다. 별다른 희생없이 양적 질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risk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가 잃을 게 없을 때는 마구 인파이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규모면에서 여타의 FTA완 비교가 되지 않고 내용에서도 매우 중차대한 사항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상대는 깡패국가 미국이다. 난 우리나라가 미국과 '평등'하게 '호혜'적인 조약 혹은 협정을 맺을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 너무 패배적이라고? 씨바 한미SOFA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본질적으로 지금 우리는 미국과 대등하게 협정을 맺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너무 미국 편향적이고 너무 편파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고 있고 미국의 시선으로 세상을 심지어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한나라당이 무슨 주장을 해도 무조건 한나라를 지지하는 38%가 있는데 씨바 무슨놈의 대등한 협정!

 

한미FTA는 할려면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일차개방, 이차개방...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너무 성급하고 조급했다. 물론 첫단추를 잘못 꿴 노무현의 실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진보진영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노무현 집권 기간동안 진보진영은 노무현과 소통을 하지 못했다. 거의 전적으로 노무현한테 이래라 저래라 요구만 했을 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노무현(및 주변세력)과 접점을 넓히면서 연대의 전선을 공고히 하여 전선 저쪽의 한나라당, 독점자본, 수구세력들과 대결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 이게 내가 민노당/진보신당 등등의 사람들에게 갖는 아쉬움이다. 진중권을 보면서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놈이 원하는 건 무얼까?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한 걸음 진보일까? 전자라면 그는 성공했다. 그러나 후자라면? 한심한 놈일 뿐이다. 목수정으로 해서 김상봉으로 해서 노회찬 기타등등...목소리 키우고 항상 옳은 말만 한다고 해서 사회가 진보하냐? 씨바 그러면 인류는 이미 옛날 옛적에 지상낙원을 건설했을 것이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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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생각해보는 영어공영어론

2011/10/09 19:50

90년대 후반에 영어공영어논쟁이 있었다. 복거일씨가 문제를 제기해서 발생했는데 찬성진영의 요지는 대략, 영어 잘해야 경제활동이 편해지고, 세계와 의사소통이 편해지고, 영어로 된 지식.정보를 좀더 쉽게 습득할 수 있다...뭐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첨부터 모국어로 습득시키자는 주장인데, 영어로 된 텍스트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오리지날 텍스트가 영어인 것만 따지자면 조금 계산이 달라진다. 즉, 원 텍스트가 프랑스어이고 그걸 영어로 번역한 텍스트가 있다면 그건 프랑스어로 쓰여진 텍스트를 영어사용자가 이해한 것이다. 영어로 쓰여진 그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과 원래의 프랑스어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해, 영어로 쓰여진 그 수많은 텍스트는 영어사용자가 이해한 세상이지 세상에 대한 그 자체의 지식은 아니다. 물량공세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법. 난 오히려, 영어로 된 텍스트를 잘 이해한다는 측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사용자보다 더 유리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약간의 역설이지만, 내 똥냄새를 맡아본 사람이 남의 똥 냄새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반대로 남의 똥 냄새를 맡아봐야 내 똥 냄새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오늘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뭐 이런 세세한 내용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난 영어공영어론에 찬성하지도 않지만 발악발악 반대하지도 않는다. 뭐 우리가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당시 복거일씨가 좀더 근복적인 문제제기를 했기를 바랬다. 지금 대충 찬성론자의 말을 훑어보면 문제의식이 얼마나 얕은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그럼 내가 바랬던 그 '근본적'인 문제제기란 무엇인가? 영어공영어론이 우리말의 약점을 공론화했다면 민족주의니 뭐니에 휩쓸려버리기보다는 좀더 우리말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뜻이다.

 

1945년 소위 해방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부재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는 존칭어법의 개발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다시피 존칭은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부분이 비산업사회에서 발생한 것이고 이는 현재의 산업사회에서 너무나 큰 불편함을 초래하고 있다. 이 부분을 국가와 국어학계가 개입해서 좀더 간편한 존칭어법을 개발하고 보급했어야 하며,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극단적으로 반말을 표준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존칭때문에 우리 내부의 의사소통이 걸리적거려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생면부지의 상대방을 부르는 2인칭대명사의 부재도 문제다. 심지어 남영신씨는 영어의 '유'를 도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녀노소가 같이 쓸 수 있는 2인칭대명사의 개발을 요구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참고로 남영신씨가 쓴 국어사전 정말 강추다. 왜? 그 사전에서 '껍데기'라는 표제어를 보면 답이 나온다. 아마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다.

 

철자법을 보자. 우리나라 어느 누구도 'ㅔ'발음과 'ㅐ'발음을 귀나 입으로 구별하는 사람이 없다.(글쎄..몇명은 아직 가능할까?ㅋㅋ)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는 당연히 양자의 발음이 구별되었다.(구별되니 구별해서 썼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예를 들어보자. '부부'의 경우, 앞의 ㅂ과 뒤의 ㅂ이 발음이 다르다. 귀는 구별못하지만 입은 구별해서 발음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달리 발음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달리 발음된다는 뜻이다. 뒤의 ㅂ은 순경음ㅂ이라고도 한다. 유성음과 유성음 사이에서 무성음ㅂ이 유성음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발음이 구별되지만 우리는 굳이 구별해서 쓰지 않는다. 그런데 'ㅔ'와 'ㅐ'는? 귀도 입도 구별못하는데 굳이 구별해서 써야할까?

 

이런 등등의 문제에 대해 해방이후 우리사회는 아무런 해법을 고민하지 않은 채 지금껏 흘러온 것이다. 이것에 대해 영어공영어 논쟁이 아주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영어공영어 진영에서 좀더 정확한 관점에서 문제제기를 했다면 말이다. 봐라. 우리말 존칭때문에 좃나 피곤하다. 영어쓰면 지위 고하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우리말 씨바 호칭때문에 좃나 피곤하다. 영어를 쓰면 아무나 상대방을 이름이나 '유'라고 부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뭐 대충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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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

2011/10/08 17:15

심심풀이 퀴즈 하나 : 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 아니면 아름답다? daum이나 naver의 사전을 보면 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으로 나온다. 그런데 '아름다운'으로 검색을 하면(한영모드에서) '아름다운'이라는 표제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하다. 국어사전에 '아름다운'은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은 '아름답다'의 많은 활용형 중 하나일 뿐이니까. 다시 daum이나 naver의 한영사전에서 '아름답다'를 검색하면 beautiful이 나온다. 즉, 한영모드와 영한모드에 비대칭이 발생한다. beautiful의 뜻을 아름답다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운으로 해야 하는가?

 

우리말은 동사, 형용사, 체언(+서술형어미)이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지만 영어는 서술어의 기능을 동사가 독점한다. 예를 들어 "나 학생"이라는 글자의 집합을 보여주고 즉각 떠오르는 문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많은 우리나라 사람은 "나는 학생이다"라는 문장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 당연하다. 우리말은 체언이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나는 학생을 보았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긴몰라도 드물것이다. 왜냐하면 '보다'라는 새로운 단어를 추가하기보다는 주어진 단어만 가지고 자족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를테니. 그런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에게 "I student"(좀더 정확히는 I a student가 되겠지만)를 보여주면 그들도 "I am a student"라는 문장을 떠올릴까? 아마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I saw a student" "I hit a student" 등등 말이다. 세상에 서술어 없는 언어는 없다. 영어는 동사가 서술어의 기능을 독점한다. 따라서 영어는 반드시 동사가 필요하다.

 

두개의 언어에서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단적으로 우리말의 조사 중에 영어에 없는 것이 있다. '학교에"에서의 조사 '에'는 to로 번역되지만 '나는'에서 조사 '는'은 영어로 번역될 수 없다. 사실상 I 자체에 '는'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I의 뜻은 '나'라고 보기 보다는 '나는'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일반명사인 경우는? Tom의 뜻은 무엇인가? 경우에 따라서 톰은, 톰을, 톰에게 등등을 뜻한다. 문장의 위치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는 거다.(그때 그때 달라요~)

 

나는 beautiful의 뜻을 '아름답다'로 사전에 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I am beautiful"에서 am의 뜻은? 없다! 우리말로 번역이 안된다. 단지 문장의 주어와 시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허사일 뿐이다. '아름답다'란 뜻은 beautiful이라는 단어에서 온전히 주어진다. 그러면 'a beautiful flower'는? 당근 '아름다운 꽃'이다. 이때 beautiful은 아름다운으로 번역될 뿐이다. 똑같은 Tom이 어떨때는 '톰은'으로 어떨때는 '톰을'로 번역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시콜콜하다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사전은 아주 시시콜콜해야한다. 아주 정교해야 한다. 우리말에 대한 매우 깊고 정교한 이해를 토대로 '영한'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 '만들었어야 했다...." 언제? 1945년 이후에. 해방후 아주 한참동안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을 그냥 그대로 베꼈다. 아주 쉬었다. 표제어, 뜻 할 것없이 그냥 그대로 베꼈다. 당시 울나라 지식인들 일어를 얼마나 잘했나? 영일사전 펼쳐놓고 영어단어 쓰고 옆에 일본어로 된 해석 한글로 옮기는 것..여반장이었을 것이다. 소위 해방후 울나라에 일한사전이 새로 출판된 것이 대략 196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 일한사전은 필요가 없었다는 말씀이다. 해방 후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한사전이 새로 편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말과 일어가 차이가 많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좀더 주체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일본어는 우리말과 너무나 비슷하다. 영어. 프랑스어를 번역하는 것에 비하면 일본어번역은 정말 식은 죽 먹기다. 해방이후에도 수많은 서양책들이 일본어를 통해 번역된 소이연이다. 그말은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서양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이해했다는 뜻이다.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영일사전을 통째로 영한사전으로 베낀 결과 일본식 어휘들이 대거 우리말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해방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 부재'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즉, 국어학자들이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영한사전을 만드는 과정에 아주 많은 참여를 했어야 했다. 생각해보시라! 당신은 일년에 국어사전 몇번이나 보는가? 그리고 영한사전은 몇번이나 보는가? 즉, 우리말을 갈고 닦는데 국어사전보다 오히려 영한사전이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제대로된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다고? 그렇다면 제대로된 영한사전을 만들여야 한다. 사전에서 anniversary 찾아보라. '기념일, 주기, 기념제..'등등이 나온다. 그런데 1891년 영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콧이 만든 영한사전에는 '돌'이라는 풀이가 있다. blind 뜻풀이가 '발'로 나온 영한사전 본 적이 있는가?

 

시시콜콜하다고? 언어에 대해선 좀더 시시콜콜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도 일본인처럼 우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democracy를 일본인들이 '민주주의'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서양 근대국가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democracy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에게 알려준 '민주주의'일 뿐, 우리 스스로 이해한 democracy는 없다고 본다... 나는 이것이 슬프다. 우리 스스로 독자적으로 이해한 세상...나는 그것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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