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그리고 名可名非常名

2013/04/23 17:53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미'라는 (껍데기뿐인 헛된) 이름에 집착한다.

 

대륙의 서쪽에서 리얼리즘에 대해 노미날리즘이 승리를 구가할 때, 대륙의 동쪽에서는 불교에 대해 유교(좌파)가 승리하면서 이제 진리는 형이상자에서 형이하자로, 피안에서 차안으로 넘어오게 된다. 물론 이것이 리얼리즘의 완전 파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고 끊임없이 변종이 등장하였고 그리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 나는 '진리'를 '도'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항상 '도'라고 불러야하는 것은 아니다.(너희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 어떤 사물을 특정 이름으로 부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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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에 관하여

2012/10/12 09:53

질문 하나 : 한국어로 번역된 '죄와 벌'은 러시아 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한국어로 번역된 '죄와 벌'은 한국문학이다. 결코 러시아문학이 아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죄와 벌'은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며 한국문학의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질문 한번 더 : 영어로 번역된 고은의 시는 영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당연히 영문학이다.

 

한림원이 노벨문학상 선정할 때 어떤 판본으로 심사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내 예상으로는 그들이 일어로 하루키를 읽고, 중국어로 모옌을 읽고, 한국어로 고은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노벨문학상은 유럽언어로 쓰여진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 결코 세계의 모든 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 유럽언어로 우리 문학을 많이 번역해야 한다고??? 미쳤냐? 그짓을 우리가 왜 하니? 우리가 미쳤다고 유럽문학을 살찌우냔 말이다? 우리 문학을 유럽 언어로 번역하는 건 지들이 할 일이다. 물론 우리가 거들어 줄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주체일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세계문학을 우리글로 번역하는 것에 매진해야 한다.

 

번역은 우리 문명의 과제다. 아주 중요한. 우리의 지난 문명도 번역해야 하고 유럽문명도 우리의 감성으로 직접 번역해야 한다. 19세기 일본이 했던 일을 지금 우리도 해야 한다. 한가로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문명의 초석을 다지는 것.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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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은 헌장 1조에도 나와 있듯이 개인 및 팀간의 경쟁이지 국가간의 경쟁은 아니다. 따라서 시상식때 국기를 계양하고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다만 선수 선발에서 국가간 지역간 쿼터를 할당했을 뿐이다. 시상식은 어디까지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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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여의사,여선생,여검사 등등 굳이 성별을 밝히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글을 보곤 한다.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 해결책은 신통치 않다. 그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면 여자**라고 꼭 여성임을 밝혀야 하겠느냐,  왜 남검사, 남선생이란 말은 하지 않느냐, 혹은 꼭 이렇게 성별을 따져야만 하는 우리네 사고의 후진성을 탓하면서 끝낸다. 아쉽지만 과녁에서 많이 벗어난 지적이다.

 

우리 글에서 이렇게 여검사, 여선생 등등 직업 앞에 '여'자를 붙이는 버릇(?)이 생긴 연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말에 대명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있다 해도 '그 사람' 할때의 '그' 정도인데 이 '그'에는 성별이 없다. 보통 우리가 성별을 밝히고자 할 때는 '그 남자', '그 여자' 등으로 표현한다. 성별을 밝혀야 직성이 풀리는 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인간의 언어에서 사람을 가리킬 때 성별을 구분하는 언어는 꽤 되지 않는가? 즉, 유럽 언어의 경우 맨 처음에 사람 이름이 등장하고 그 다음부터는 he/she 등으로 부르니 자연스럽게 성별이 드러난다. 따라서 직업 자체에 성별의 구별이 있는 단어가 아니더라도 굳이 teacher에 male teacher, female teacher 등의 구별은 필요 없겠다. 즉, "아무개가 있다. he 어쩌고 저쩌고..." 식으로 글이 전개되니 자연스럽게 아무개가 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말에는 이런 대명사가 거의 없다보니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답답함이 인간 본연의 속성인지 아니면 서양식 사고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왜 굳이 직업에 '여'자를 붙이느냐고 따지지 말고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맞겠다. 내 의견은 이렇다.

 

일단 신문이나 잡지에서의 대처 방안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 등장할 때 괄호에 나이 등을 표기하는데 이때 성별을 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내가 꾸준히 주장하듯이 '사람이름 + 씨'로 부르면 된다. 즉, "홍길동은 여가수다....."가 아니라 "홍길동(여, 26)은 가수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 말과 글과 사고가 본격적으로 결합된 게 대략 60년 밖에 안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언문일치의 걸음마 단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가나 그에 준하는 매우 권위있는 단체, 기구가 나서서 아주 시시콜콜한 것부터 규정을 해 나가야 한다. 철자나 발음 같은 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결제면 어떻고 결재면 어떠냐? 우리말 어법이 어떻고 저떻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회는 급속하게 산업화되고 사고방식도 급속하게 바뀌었고 바뀌고 있는 중인데 그에 걸맞는 언어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생기는 문제가 훨씬 중요하고 훨씬 다급하지 않은가? 존칭, 호칭, 인칭대명사 등등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Better later than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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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자유와 공직

2012/05/23 11:49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했지만 100분 토론 중 진중권씨가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면 공직에 나와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말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말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즉, 우리 사회는 양심의 자유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고 이념/사상의 자유가 허락되고 있지 않는데 이런 상황에서 공직에 나왔으니 자신의 모든 사상을 까발려라? 그리고 뒤에 오는 모든 폭력과 탄압은 내 알바 아니다?

 

진중권씨는 우리 사회에서 허락하는 정도의 사상을 가지고 있느니 마음껏 발언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사회에서 허락되고 있지 않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지? 만약 시민인 "당신은 동성애를 지지하는가?" "당신은 동성애자인가?" 류의 질문을 해도 답변을 해야하는가? 진중권씨의 논리대로라면 답변해야 할 것이다. 공직에 나온 동성애자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밝혀야 한다? 우습지않나?

 

북한인권/북핵/3대세습...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을 우리(남한)땅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 땅에서 세들어 혹은 강점하고 있는 집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는다. 왜? 다른 나라일이니까. 북한을 다른 나라로 규정한다면? 역시 우리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왕정을 하든, 세습을 하든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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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밝히는 알마

2012/05/12 19:06

ㅠㅠ 청소년 성장영화가 청소년관람불가... 웃어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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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세금!

2012/03/19 21:33

부자증세가 아닌 보편적 증세. 이것이 내 주장이다. 물론 현재의 세금 지출 조정으로도 괄목상대할 정도의 복지가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들의 재정적자 공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증세를 주장해야 한다. 어디서? 선거판에서. 그런데 누가? 이것이 문제다. 표를 고민하는 진영은 이말 하기 힘들다. 즉, 민주당이 이런 주장을 하기는 힘들다. 즉, 민주당에게 보편적 증세를 주장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단 뜻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민주당의 어떤 액션을 전제로 한 전략은 무의미하다. 바로 이점이 내가 노무현정부 때의 민노당/진보신당/진중권을 필두로한 떠벌이들이 아무런 전략도 없는 얼치기 집단이었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그들의 모든 주장은 거의 언제나 노무현의 어떤 액션을 전제로 하였다. 심지어 전남대 교수 김상봉이란 자는 민주당/열린우리당이 부르조아민주주의 혁명을 해주지 않으니 우리가 사회주의 혁명을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노무현정부때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일관되게 그들은 노무현의 실책과 실정을 비판하였지만, 자신들의 전략적, 전술적 실패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반성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시종일관 노무현 비판뿐이다. 자신들이 어떻게 포지셔닝을 해서 노무현정부를 자신들에게, 민중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시종일관 노무현에게 요구만 할 뿐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노무현에게 사회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철딱서니 없는 짓이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차가 나를 향해 돌진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나는 반대쪽으로 틀어서 사고를 모면하면 좋겠는데 그 사람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 왼쪽으로 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따라서 나는 왼쪽으로 틀고 그 사람이 반대로 틀어주길 바라는 것은 전술이 아니다. 그건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어떤 행동을 전제로 한 나의 행동지침은 그래서 무의미한 바보짓이다. 나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차를 순간적으로 180도 회전시켜서 충돌하더라도 충격을 줄인달지 하는 것이 한 방안이 될 것이다. 노무현정부 시절, 진보진영은 끊임없이 노무현에게 요구만 하였다. 그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 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를 노무현이 들어주지 않으면 기고만장해서 대중들에게 선언한다. "자! 보십시오. 노무현의 반민중성이 들어났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ㅋㅋㅋ 그냥 좃을 까라! 니 들은 그게 선전/선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구걸이었다. 쉽게 말해 니들은 거지새끼였던 거야. 노무현처럼 모든걸 던져가면서 닥친 상황을 돌파할 용기도, 의지도 없는 거지새끼들. 이를 테면, 이정희. 이사람은 언론플레이는 참 잘한다. 그치만 실제 의정활동에서 보이는 지극히 정치공학적 모습들을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알리가 없다. 실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정희가 보여준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의 몇몇 의원들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이정희는 소수정당이 뭘 할 수 있겠어요? 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보편적 증세. 이 주장을 민주당이 하길 바라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럼 누가?? 당연히 진보신당/통합진보당이 해야 한다. 효과는? 대중에 대한 학습. 그렇다. 선거는 대중을 학습시키고 우리의 이념을 선전하는 공간이다. 민주당은 표를 구걸하겠지만 진보진영은 그러면 안된다. 끊임없이 진보 의제를 제시하고 주장하면서 설득시켜야 한다. 더 많은 세금! 보편적 증세! 이 의제를 사람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면 재정적자라는 역공을 우리는 막을 도리가 없다. 복지는 다시 물 건너 가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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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이 참 이상하다. 점심시간이 무슨 연유로 노동시간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 진보진영 그 어디에서도 이 주장을 듣기가 힘들다. 근로시간에 대한 논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데 점심시간에 대한 논의는 들을 수가 없다. 돌리 패튼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도 있지 않는가?  9 to 5 (http://www.youtube.com/watch?v=mpKAA2VxWY8)  9 to 5가 8시간 노동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노동시간. 점심시간을 노동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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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드대학의 공부벌레들

2012/02/02 21:42

요즘 방송통신대학TV에서 '하바드...벌레들'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방영한다. 1978년 제작된 시즌1이다. 우리나라에 첫 방송된 적은 80년? 81년? 82년? 잘 모르겠다. 대략 그 언저리다.

 

어쨌든 요즘 다시보는데 30년 훨씬 넘은 시기에 만들어진 드라마치고는 볼만하다. 보면서 느끼는 것은 교수와 학생이 대화하는 모습이 참 부럽다는 것이다.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쓸데없는 존칭, 겸손, 딱딱한 자세..이런 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냔 말이다.

 

눈의 띄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1978년 베키라는 여성과 관련된 어퍼머티브 액션 프로그램에 대한 대법원판결에 관한 내용이었다. 즉, 당시 미국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주제를 당시의 드라마가 소재로 삼았고 그것도 진보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우리로 치면 '부러진 화살'이 텔레비젼드라마를 통해, 그것도 몇년이 지나서가 아니고 당대에 전파를 타는 것이다. 무척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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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의 핵심

2012/01/29 14:13

영화 부러진 화살, 그리고 김명호씨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사법부에서 이를 사법부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고 엄중 대처를 결의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와 관련한 수많은 논쟁이 놓치고 있는 바다. 실체적 진실?? 엿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자. 실체적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체적 진실을 대하는 저들, 사법부의 태도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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