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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선택 [건강정책웹진 칼럼]

건강정책포럼/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웹진의 '건강정책칼럼' 한 꼭지를 맡게 되었다.

 

사실, 독자층이 누구인지 파악이 안 돼 좀 고심하다가, 그냥 보건의료/사회정책 분야 언저리에서 공부, 연구, 일하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생각해서 썼다...

정치적 스탠스도 짐작 불가한지라... 역시 두루두루..... ㅡ.ㅡ

그래서, 근자에 쓴 글 중 가장 점잖다! (심지어 본문에 영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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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행복의 지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와 공영 방송 NPR 기자로 일하며 세상의 온갖 불행한 사건·사고 를 알리던 ‘에릭 와이너(Eric Weiner)’가 행복의 정체를 찾아 떠난 유쾌한 여행담입니다. 저자는 국왕이 직접 국민의 행복 지수를 챙긴다는 부탄, 실패를 찬양하는 사회 아이슬란드는 물론, 더 이상 불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이는 몰도바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행복의 근원을 탐색해 봅니다. 여행이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필자는 ‘행복도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쉬운 선택도 아니고 항상 바람직한 선택도 아니지만, 어쨌든 선택’이라는!
 


 

책을 읽으며, 한국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 사회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OECD 최고를 자랑하는 자살률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사회의 행복 수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유달리 존재론적 고뇌의 결행으로써 자살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 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도 간접적 척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라면 굳이 다음 세대의 탄생을 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일찍이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이 확인했듯, 부나 소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들이 증대한다고 행복도 따라서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 성장이 바로 행복과 직결된다면, 우리는 한국 전쟁 이래 거의 백 배 이상 더 행복해졌어야 합니다. 한국은 국민 소득에서 이미 세계의 선두 그룹에 서 있지만, 행복 척도에서는 항상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행복 연구자’들은 행복의 근원을 찾고자 매달렸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신뢰와 관용입니다. 

전 세계 사회과학자 네트워크가 80여 개 사회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가치와 문화에 대한 의견을 주기적으로 조사하는 ‘세계가치 조사(World Values Survey)’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수백 개의 문항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회학자 잉글하트 (Inglehart)는 요인분석을 통해 ‘well-being vs. crude survival’이라는 개념을 도출한 바 있습니 다. 이 요인에는 다음과 같은 변수들이 적재됩니다. 얼마나 행복한가, 삶에 얼마나 만족하나,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 나, 이웃에 범죄자/외국인(이주 노동자)/동성애자/에이즈 감염인 등이 사는 것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나, 일자리가 부족할 때 여 성보다는 남성, 이주 노동자보다는 내국 노동자들에게 우선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데 얼마나 동의하는가…. 쉽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우선 힘들어 죽겠으니 다른 사람이 어찌 되건 말건 우선 나부터 잘 살고 보자고 생각하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 다. OECD 국가들의 점수를 살펴보면, 한국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제외하고 가장 높습니다. 심지어 나머지 다른 국가들과의 점수 차이도 상당합니다. 즉 한국은 ‘well-being’보다 ‘survival’에 지나치게 경도된 사회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런 통계 결과가 없어도 우리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살벌하고 타인의 삶에 무심한지 이미 직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를 특별한 1%로 키우라는 분유 광고, 어떻게 지냈냐는 친구의 인사에 말없이 대형 승용차를 내보이는 TV 광고는 상징적인 일면입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무상 급식을 반대해서라도 정적을 무력화시키겠다는 무모한 열정, 부동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아파트 소유자들 의 끈끈한 짬짜미 연대, 한 달 2천원을 아끼겠다고 최저 임금도 못 받는 고령의 아파트 경비원을 해고하는 일상의 알뜰함도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6개월이 넘도록 냉동고에 가족의 시신을 방치해야만 하는 용산 철거민의 외침은 도무지 메아리가 없고, 평택의 노동자들은 물과 음식, 의약품마저 끊긴 상태에서 자국의 경찰과 힘겨운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온하게 일상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그 외견상의 평온은 OECD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 최저의 행복 수준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극심해지는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후퇴 속에서 나 홀로 행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 유무형의 폭력이 행복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제 고용 불안은 대다수 노동자(소위 직장인)들이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고 부동산 군비 경쟁은 모두를 아파트와 대출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적자생존의 사교육 생태계에서 누구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무엇을 희생해서라도―생태계를 훼손하고, 어린이들의 꿈을 짓밟고,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 잘 살아보자는 우리 사회의 선택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우리 가족부터, 우리 아이부터 잘 살고 보자는 소박함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결국 우리 모두를,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다른 선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신뢰와 관용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그 속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서로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토록 불행한 것은 시류에 편승한 우리의 소극적 무책임, 부당함과 불의에 저항하지 않은 우리의 적극적 무책임 탓 아닐까요? 행복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시민적 연대’ 속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한국 사회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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