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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가로지르는 책들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니까 책읽을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운수대통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 도저히 깜빡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만큼 푸~욱 잠들어버리지만.....

얼마전에는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문닫히기 전 후다닥 뛰어내렸는데,

하도 깊이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인지 어지러워 한동안 멍때리고 서 있었음 ㅡ.ㅡ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이나, 그나마라도 기록해놓는게 좋을 듯 싶어 몇 자 남겨둔다

 

#1. Eric Hobsbawm. Vintage 1996

 

 

지난 겨울 히말라야 가서 읽기 시작했던 책이다.

저 표지사진............ 책의 내용을 이미 절반은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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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현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소박한 진리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현대사를 이렇게 폭넓게 '조망'해본 적이 없었다.

읽고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벌써 연대기 순서도 뒤죽박죽되고 구체적인 디테일들을 왕창 까먹었지만 (ㅡ.ㅡ),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사건들을 맥락 속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느꼈던 '깨달음'의 즐거움만은 생생하다.  정치와 이념, 문화예술과 과학 -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씨줄날줄을 잘 엮을수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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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은 1930년대 대공황 부분을 기술하면서, 시장지상주의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하고서도 1980-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다시 맹위를 떨치는 현상이 참으로 기이하다고, 그래서 역사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도 또 20년이 지나 전세계적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는 걸 보면, 집단적 기억투쟁이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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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하워드진의 [미국 민중사]와 비교를 하고는 했다. 

[미국민중사]를 읽으면서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과 낙관을 갖게 되었다면,

[극단의 시대]를 읽는 내내 눈이 뜨인다는 이성적 기쁨과는 별개로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주욱 돌아보니,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지구촌에 어떠한 형태든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하는 비관이 스멀스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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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대학시절 세미나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혁명과 중국 혁명에 대해 '차분하게' 돌아보았다. 물론 그 시절에도 들끓는 환호의 마음으로 모든 걸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금 이해의 지평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그 때는 제가 철이 없었어요'  혹은 '속았어요'하며 배신감을 느낀 것도 아니다. 

세상의 복잡성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정도의 지식과 이해밖에 얻기 어려웠던 것이 그시절의 한계일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혁명 당시의 상황은 훨씬 열악했고, 혁명을 통해 과연 그 사회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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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에 인용된 인류학자 Baroja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There's a patent contradiction between one's own life experience - childhood, youth, and old age passed quetly and without major adventures - and the facts of the twentieth centry... the terrible events which humanity has lived through"

20세기는 기이하게 마감되었다.

'평균적인' 물질적 조건들은 개선되었지만, 불평등은 유례없이 심화되고,

전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사라졌지만 국지적 갈등은 이제 그야말로 유비쿼터스.....

 

기관사없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태롭게 질주하는 21세기 지구촌의 운명은 과연 어디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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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런던을 떠나며 영국인들은 다시는 런던을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단다.  세계가 멸망하는 줄 알았다고.....

그러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삶이 지속되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정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2. John Berger < Ways of Seeing> Penguin books 1972

 

 

미술작품, 특히 회화에는 등장인물 (혹은 사물이나 풍경) - 그리는 사람 - 그림을 보는 사람 이 존재한다.

Berger는 통상적인 예술사 기술이 잔뜩 신비화된 미사여구로 등장인물과 화가들의 내면에 대해 소설을 쓰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인물과 화가 의 관계, 그리고 그림과 감상자 혹은 소유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이 BBC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에 기반을 두고 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급진적'인 내용이 공중파 예술프로그램에서 가능한 거구나... ㅡ.ㅡ

 

책의 목적은 서문에 아주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A people or a class which is cut off from its own past is far less free to choose and to act as a people or class than one that has been able to situate itself in history. This is why - and this is the only reason why - the entire art of the past has now become a political issue"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고,

얄팍한 나름의 서양미술사 지식에 토대를 둔 관성적인 스스로의 작품 이해방식을 앗 깜딱이야 하면서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 아주 훌륭한 책....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읽고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경험에 비할만하다)

칼라 도판 없이도 그림책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구나!!!

 

#3. Wilkinson R, Pickett K.   Bloomsbury Press 2009

 

 

미국에 체류 중인 S 샘이 저자 친필 서명까지 얹어 선물로 보내준 책이다.

 

저자들은 주로 선진국들의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득불평등이 다양한 건강과 사회문제 (정신건강, 약물남용, 평균 수명, 비만, 교육성취, 10대 임신, 폭력, 징역/형벌, 사회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인용하거나 참고할만한 수치나 그래프들이 적지 않다- 다만 통계미비로 한국은 분석에 거의 포함되어있지 않음 ㅡ.ㅡ)

 

그래서, 한 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불평등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은 그 사회 모두에게, 특히나 열악한 조건에 처한 이들에게 좀더 집중적으로, 전가되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뿐아니라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등한 사회로 변화해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거나 수천만년 걸리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현실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아주 꼼꼼하고 설득력 있게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결정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도대체 '왜' 불평등이 이러한 여러가지 건강과 사회문제들을 낳는가 말이다.

 

저자는 오랜기간 주장해왔듯, 다시 한번 사회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분명히 중요한 요인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가짐과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으로부터 야기된 힘의 불균형 (이들은 상호강화)이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를 배제시키고, 사회적 투자를 침식함으로써 실제적인 물리적 조건의 변화를 낳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아닐까?

 

OECD 국가들 중 불평등 수준이 가장 심각한 미국의 평균적인 건강수준이 나쁜 것이,

불평등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마음에 병이 나서 그렇다기보다는

계급 혹은 계층적 이해가 달라지면서 공공의 장이 축소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과 사업들이 시행되면서 실질적인 삶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들의 관점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나만이 아니라,

사회역학계에 나름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설명에 대해서는 학술적 논쟁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이 책이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고 그것도 아주 쉽고 간명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나 이 책 반댈세'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설명방식에 대해서 관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불평등이 건강과 사회문제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단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절실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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