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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들른 곳이 낭성면 호정리다
가덕면에서 미원쪽으로 가다가 낭성 혹은 상당산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낭성면소재비 바로 못미쳐 이정표가 나오고 한 500미터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호정리다
이곳엔 과필헌 고가라는 옛집이 있는데
솔직히 좀 쪽팔리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난 이곳이 과필헌이라는 사람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옆자리의 형님이 "아니 '과'씨라는 성도 있어 ?"
라고 물을때
"그런가봐여...!!" 했다.
근데 알고 보니 과필헌은 호이고 이름은 신후라는 사람의 집이란다.
에구구 쪽팔려.....?...헤헤헤
이 곳 호정리를 오기전에 한 음식점이 있는데
그 곳 근처에도 한국전쟁당시의 민간인 학살지가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충북 대책위에 참여하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 중에 경상대 교수이신 신경득 선생님이 계시다.
이분도 아버님이 국민보도연맹가입혐의로 학살되셨는데
아마 이곳일 거라고 생각되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2번인가 청주에서 가까운 곳의 민간인학살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곳에서 제수용품을 준비해서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적이 있는데
신경득 선생님이 이 곳에서 갑자기 울먹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신경득 선생님은
시력이 나빠 이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실 정도다
그런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기위해
아니 한을 풀지 못할망정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라도 알고 싶어
평생을 노력하신 모습을 보면서
당시 함께간 사람들이 숙연해졌던 것인 눈에 선하다.
이런 학살지를 지나서 처음으로 나오는 동네가 호정리다.
과필헌 고가는 앞의 두 곳보다 그 관리나 보존 상태가 가장 잘된 곳이다.
비록 사랑채가 한번 불이나서 나무 부재들이 시커머케 그름에 그을려 있기 했지만
멀리서 한눈에 보기에도 버젓한 모습이
한옥이 가지는 호젓함과 위용이 자연스럽소 옛스러운 집이다.
지금은 안채나 사랑채엔 사함이 살지않고 건너채에만 사람이 기거하는 듯했다.
가장 전형적인 민도리집으로
아마 청원군 지역의 대표적인 민가집이 아닐런지 싶다.
<사랑채 모습>
집을 짓는대 쓰인 나무 부재들이 큼직큼직한 것이 이집을 지을 당시의 경제적인 부가
상당했으리라 생각이 돤다.
아마 근처의 귀래리 신채호 사당과 귀래리 한옥촌(한옥촌이라기에는 왠지 좀 그런 동네다)과
더불어 보면 옛 스러움의 감동을 쉽게 느낄 수 있지 않을 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3시간 정도의 여행이 아닌 소풍을 다녀왔다.
좀 따스한 겨울날 일요일 오후
한적하니 짧은 시간에
휑하니 돌아본 이런 저런 옛집들과
그집 들이 디딛고 서있는 땅에 서린 사람들의 아품과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나른하니 좋았던것 같다.
함께 했던 좋아하는 형님과 충현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언제나 오롯이 서있는 그 마을들의 그 아품들이
올올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듯해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다들 시간 있으시면
주변의 많은 사연들에 관심 있으시길.....^^!
< 안채의 날개채 맞배지붕>
다음에 들른 곳은 이웃해 있는
고은리에서 차타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가덕면 인차리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원래는 인차리의 신형호 가옥과
구봉영당(?)인가 해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당이 있다는 곳으로 갈려고 했는데
마침 근처 동네인 계산리 5층석탑부터 보게 되었다.
보물 511호로 고려초기 석탑인데
절은 사라지고 오직 탑만 하나 덩그라니 남아 있는 곳이고
왠지 횅하니 사람들 떠난 서글픔만 잔뜩 담고 있는 쓸쓸한 석탑이다.
뭐 여기저기 금가고 깨지고 파이고
꼭 이동네를 닮은 탑이다.
이 동네가 지금 딱 그런 모습이거든
근처에 천주교 신자들의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고
청주근교라는 이유로 근처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는
뭐 하여튼 쓸쓸한 그런 시골도 도시도 아닌 그런 곳이다.
뭐 여하튼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곳은 이 정도만 보고
옛집으로 향했다.
신형호 고가는
새로 단장된 문화재 알림판에 비해 왠지 좀 안스러운 아니 왠지 초라한 옛집이다.
조선말기 고종 18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엔 집안의 많은 부처럼
안채에 사랑채에 건너채에 행랑채까지 딸린 큰 살림집이었단다.
하지만 일제시대 초기
당시 집주인이었던 신장식이라는 사람이
의병들을 집에 재우고 그들의 모임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이 불살라 버려
어렵사리 지금같이 안채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집이 되어 버렸단다.
이 집은 신형호 선생이라는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생가로 더 알려져 있는데
혹시들 아시나 ?
헤헤 물론 저도 모르지요.
뭐 여하튼 신형호 선생님이 독립운동가라니 그렇게 알뿐
더 자세히 알진 못한다. 이 모두가 이 무식한 놈의 짧은 지식때문이니
다들 너그러이 이해하시길....헤헤헤
참고로 이동네 주변인
가덕면, 미원면, 낭성면 일대는 고령 신씨 들이 많이 산다.
그 유명한 그래서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신채호 선생님도
이 고장의 그 무수한 신씨들 중의 한명이었으니
이 신씨들의 자긍심과 애국애족정신은 익히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헤헤헤
솔직히
나같은 일자무식이 무슨 애국애족을 알겠는가 ?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나의 자랑스런(?) 인생에서
이 곳 고령 신씨들 중 한 분과 매우 친하다는 개인적인 연분 정도가 있다고나 할까 ?
달우 아저씨라고
미원면에서 닭을 키우시는데
농민회 일도 열심히 하시고
민주노동당 일도 열심이 하시는 그야말로 열성분자(?)이신데
지금처럼 이름날리기 전의 민주노동당 충북도당을 맡아서
몇년동안 고생고생하셨던 분이다 .
이분은 시골분 답지 않게 또한 산악자전거의 대가이시기도 하다....??...헤헤
한번은 내가 속한 단체에서
미원근처의 폐교에서 행사를 하는데
닭을 10마린가 주셔서 다들 행복한 적도 있었고
우리가 미원면에서 대안학교 활동을 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아 그리고 지역 운동(?) 선배들 중 아저씨라 부르는 딱 두분중의 한분이다.
율동이 아저씨랑 달우 아저씨 ......!!
이런 훌륭한 달우 아저씨가
이 고령 신씨이니
달리 뭘 더 바랄 것인가 ???? 헤헤헤
신채호 선생의 후손 중 이런 훌륭하신 달우 아저씨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이 지방의 고령 신씨는 충분히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다...헤헤헤
순전히 개인적이지만...뭐 내가 이런 생각한다고
손해 볼 사람도 없고 하니
뭐 어떻겠는가 .......헤헤헤
<신형호 고가 정문 >
고령신씨 이야기를 마저 더 하자면
이 곳 신씨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신숙주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세종때에 집현전 학자가 되어
세조를 도와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
그러면서도
맛이 변하기 쉬운 숙주나물과 비교되어
변절자의 대명사로 묘사되는 이가 신숙주다.
즉, 같은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이나 박팽년, 유응부 등과 같은 사육신이나
김시습으로 대표되는 생육신등과 비교당하면서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가 바로 이 곳 신씨들의 조상이다.
뭐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할 것은 없지만
이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집현전 학자라고 해서 다들 같은 생각들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고
필히 성삼문 등의 사육신처럼 단종에 대한 충성만이 곡 올바르다고 보지 않기때문이다.
난 솔직히 당시 사회에서 오히려 단종보다는 세조의 정치가
당시 조선사회에 더욱더 필요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기도하고
속직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도 상당부분 조선 후기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일방적인 평가가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숙주를 단순히 자신의 안위를 변절을 택했다고 보기엔
이후 그의 주요 업적으로 보이는 경국대전 편찬사업이나 기타 율령반포의 업적은
오히려 신숙주가 자신의 조선사회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확신에 찬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 때문이다.
뭐 뭘 모르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신숙주는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것을 사실인듯 싶다.
다만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여하튼 나의 짧은 여행은
이렇게
항일의병의 유적지 겸 한옥 옛집의 감상으로 가덕면을 떠났다.
그래서 원래는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정은 보지도 못하고
또다른 보물인 계산리 석탑으로 대신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오늘은 일요일
아직 익숙치 않는 교회 예배를 보고
교회 아이들과 헉헉대며 농구 한판하고...그러고도 왠지 심심해져 오는 마음 달랠길 없어
집에 오는 길에 얻어 탄 형님 차안에서 갑자기 나들이를 결정했다.
뭐 거창하게 답사니 여행이니 하기엔 왠지 좀 미진해서
그냥 소풍이나 나들이처럼
편안히 훝어보고 올 심산으로 부리나케 떠났다.
뭐 솔직히 부리나케 떠났다는 것 자체가 좀 그런 것이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인 남일면인데다가
바로 이웃동네인 가덕면, 낭성면 정도라서
꼭 떠났다는 표현이외에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지
꼭 그 말 그대로로 받아들이기는 어폐가 있는 듯 싶기도 하다.
뭐 여하튼
사진찍길 좋아하셔서
아트(art)를 할 주변머리는 없고
그저 아트(art) 근처에서 머뭇거리길 좋아하는 천상 주변인인
그저 그런 심미안의 내가 보기엔
대단한 사진작가처럼
못내 부럽기만한 사진실력을 가지신
내가 넘 좋아하는 형님과 함께
그 형님의 아들로 왠지 꿍시렁 거리는 투가 나와 닮은 충현이와 함게
그렇게 떠났다.

< 사랑채 지붕>
처음 들른 곳이
남일면 고은 3리에 있는 이항희 가옥이다.
한 100년이 좀 더 된 가옥이다.(윗 사진)
집에서 출발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으니
출발하자마자 도착했다고나 할까 ?
뭐 어디 한옥이나 비전문가 눈엔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이 가옥은 좀 다른 게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로 지정되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되기 쉬운데
다행이 이 곳은 이돈희(?)라는 사람의 조형연구실인가 뭐 하여튼 미술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사는 집으로 바뀌어 그럭 저럭 사람사는 맛이 나는 집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주변의 내 눈엔 몇 백년되어 보이는 향나무와
소나문진 뭔지 하는 하여튼 큰 나무와 어울려 포근한 집이다.
그 집 앞에 최근에 지은 마을정자가 하나 있고
(졸작이다...관에서 하는 짓이 다 그렇지만 여러 마을의 정자를 도매급으로 업자에게 넘기고
업자는 업자대로 볼품없는 싼 낙엽송과 천장엔 싸구려 합판을 대서
그야말로 졸작으로 지은 정자 )
그 옆에 어디에나 있는 마을회관 겸 노인회관이 있다.
한 3년 전인가 이 회관에 온 적이 있었다.
여러 사회단체들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충북대책위(?)라는 연대단체에서
공동사무국장이라는 이름만 사뭇 거창한 직위에 있으면서
실제로는 뺀질뺀질 일도 안하면서
(그덕에 함께 일한 모단체의 상근자가 무척 고생했다...미안하구려...헤헤헤)
가끔 놀러다니곤 했는데
이 곳 고은 3리 노인회관에 당시 상황을 증언해 주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당시 청주시내 사람들이 자무시 트럭으로 실려와
학살된 곳이 이 마을 바로 앞이었고
근 일주일동안 쉴새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려와 학살당했다는 증언 이었는데
그 중엔 큰 푸대자루에 어린 아이들이나 아기들이 들어 있었데
자루채 개울가에 던져 놓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걸 본 분도 있었다.
이 곳이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국도 변이라 국군이랑 경찰이
퇴각하면서 이런 만행들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참 !!......참내...!!
이렇게 고풍스러운 옛집이 포근하게 자리잡은 곳에 우리가 전혀 모르는
그런 아픔들이 산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분단사회에서 사는 것 만큼이나
어쩌면 우리 피부 가까이에 있는 서글픔 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가볼 곳 대다수가 이런 죽음에 관계된 곳이니
참 이런 우연도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참 흙담과 따스한 겨울날을 사진에 담는 형님과
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길 귀담아 듯는 충현이를 보면서
씁쓰레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역시 여행(?)엔
담배만한 동행자가 없으이....헤헤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의 걸쇠>
여하튼 그때 그 아품이 있던 마을앞 개울은 이미 4차선 도로가 되었고
그 당시 그 일들을 목격한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아니면 영원의 침묵속으로 떠나고........
오직 남은 것은
이렇게 양반집 가옥으로 보수된 멋드러진 옛집이 있는
문화재 알림판이 떡하니 자리잡고
새로 만든 마을 정자가 동네 한가운데 떡하니 폼잡고 있는
그런 흔한 마을만 남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다 기억하고 있진 않은가 보다
오직 기억하고픈 것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도 사람사는 세상이니 오죽하겠나 싶기도 하고.......!!
<참고로 이항희 가옥은 철종12년에 만들어진 집인데 그때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ㄱ 자 형태의 안채다.
사랑채랑 행랑채는 근년에 새로 지은 집이다.
뭐 그럭저럭 폼나는 학술용어로 이야기 하면
쾌 큰 여러 칸살이 집이고 쪽소로가 쓰인 초익공 겹처마 집이고...뭐 그렇다.
장연(긴 서까래)은 옛거이나 부연은 최근에 보수하여
맨질맨질한 것이 보수흔적이 역역히 남아 있다.
집주인이 미대 교수라나는 소릴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집의 구석마다 내가 도저히 감상할 능력이 없는 이상 야릇한
한마디로 형이상학(??)적인 조형물들이 놓여져 있어서
혹여 미술학도나 미술에 대한 대단한 심미안이 있으신 분들은
주말 오후 한가한 시간 때우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다.
가가운 곳에 사시는 분들은 한번 찾아가 보시길....?...헤헤헤
갑자기 무슨 청원군 관광도우미가 된 기분이다.>
토요일 저녁때 쯤
무료하게 집에서 뒹굴뒹굴대다가
휭하니 바람 쐴 생각으로 상당 산성을 갔다.
뭐 워낙 자주 오는 곳이라서 무슨 특별한 감흥이
새롭게 생길리 없다지만
그래도 마지막 겨울을 자축하듯 추운 저녁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그럭저럭 샌티멘탈한 감흥정도는 느껴지도록 한적하니 으스스하니 좋았다.
통일신라 시대때 만들었고
조선시대 대대로 새롭게 축성했다는 것이 실감나도록
선조니 숙종이니 영조니 하는 임금님들의 이름들이 나오고
요즘 칼의 노래에서 때아닌 호황을 맞는 원균이라는 사람이 축성했다는 설명도 나오고
한때 유명했던 이인좌의 난도 나오고
그럭 저럭 오래된 유물임을 한껏 뽐내려는 듯
우리가 알수 있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거론되는 거창한 설명문을 읽으며
해지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남쪽 성벽으로 다가갔다.
뭐 항상 오는 산성이지만
올때마다 나는
무료로 배포하는 산성 설명 리플렛을 받아다가
어디 오타라도 난데 없나 하는 심정으로 꼼꼼이 읽고 또 읽곤 한다.
저번에 친구 녀석과 올땐
이런 나를 보면서
넌 뭐 볼게 있다고 항상 일고 또 읽곤 하느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뭐 ! 그렇든 말든
항상 챙겨서 읽고 집에다가 잘 모셔두곤 한다.
워낙에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유독 연대니 아니면 특정 인물들의 이름 특히, 임금님들의 찬란한 이름들을
외우는데 상당한 곤란함을 겪는 놈이라
이렇게 읽고 또 읽곤 해야 잊어먹지 않는 게 나다.
여하튼 헉헉대고 춥고 배고픈 몸을 끌고 산성을 오르면서
한 눈 팔지 않고 설명서에 눈독을 들이며 걸어 올라가서
멀리 떨어지려는 해의 밑에 뿌옇게 앉아 있는 청주를 쳐다보면서
아 !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도시에나 있는 매한가지인 산성에다가
문화재보수라는 거창한 이름하에 허여멀건한 대리석인지 화강암인지
모르는 비싼 돌로 흉하게 땜질된 산성 성벽위에 있다보면
보기 흉한 땜질 만큼이나 보기 흉한 도시의 풍경들이
아른하게 마음을 시리게 하고
그런 아른한 시린 감정에
아 ! 저녁때 소주나 한잔 해야 겠다는 간절함이 들어서 좋다.
술먹고프면
무슨 핑계를 못대겠냐만은
그래도 이런 도시의 냉정함과
세월을 무시하는 인간들의 추함을 안주 삼아
씨팔개팔하면서 술한잔 하는 것 만큼 복된 술자리도 없지 않는가 ?
맨날 모여서
맨날보는 사람들과 노무현이니 열우당이니 하며 욕하기도 지겹고
민노당이니 민주노총이니 성토하는 것도 그렇고
그 잘난 시민사회단체를 안주삼아 떠드는 것도 지겨운 요즘이면
차라리 무슨 고고한 학자나 된 듯
맨날 저리 우뚝 서있는 산성이나 욕하며
술한잔 하는 여유로움도
가끔은 몸보신 삼아 누릴 수 잇는 즐거움이 아니겠나 싶다.
이 노을 밑에 청주가 있다.
뿌연 도시의 스모그 아래 바삐 움직이는
그저 그런 도시들중에
전혀 특별하지도 않은
그저그런 도시가 하나 있다.
청주라는 이름하에....
솔직히
이 밑에 충주가 있든 대전이 있든 전주가 있든 대구가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안에서 만들어 가는 무엇인가가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보이지 않는 저 어둠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그만큼의 어둠이라는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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