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아 ! 해답은 현실인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 등록일
    2005/03/11 00:03
  • 수정일
    2005/03/11 00:03

역쉬 진한 감동입니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책보다는

아니 평소에 많이 읽었던 게바라의 어떤 글보다도

그 진정성이나 깊이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영화라고는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남미의 척박함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창백한 사람들의 모습이란....^^;

 

글에서만 보아 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보는 사람들을 한없이 침잔하게 만드는

그 현실의 창백함이란.............에구구....^^;;

 

영화(비디오)를 보는내내 아 ! 어디론가 훌쩍 떠나

현재의 나를 버리고 한층더 현실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좀더 현실을 바꾸어 볼 힘들이 생길까 하는

나만의 서글픔에 연달아서 담배를 물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온전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과 사회작동원리들을 체험하며

그들과의 연대를 굼꿀 수 있을까 ?

 

신자유주의의 밖에서

진정한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를 발견할 수 있을까 ?

 

정답은 아마도

게바라에게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들 모르게 분열되고 파편화된 삶을

어떻게 같은 이상과 희망으로 삶들을 재구성해나가고 사회를 재조직화 나갈 것인가 ?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역시 정답은 현실이겠지요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

 

어차피

여행이란

과거의 나약하며 기만스러운 나의 삶과의 작별일뿐

언제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법일테니까요.....^^;

 

여행이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순간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도피일테니......

 

그래서 우리가 꿈꿔야할 여행은

현실로 돌아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

현실로 돌아와 어떻게 삶을 재구성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니까여.....^^;

 

 

이 장면에서

게바라가 현실을 고민하며 남미의 현실을 바라보게되는데

전 그 말 하나하나 보다는

영화의 어느 순간 흑백사진처럼

아니 박제된 정물화처럼

사진기 앞에서 멋적은 웃음을 지며 쓸쓸히 서 있는 그 사람들의

그 주름 패인 얼굴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 여운으로 남더 군요.

 

역시 여행은 마음속에 사람을 심고 오는 것이 아닐지.....!!


 

 

나병 환자촌을 떠나며

그들과 작별하지만

이는 이번 여행의 끝일뿐

게바라는 의사로써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동반자로써

저들에게 돌아갔었죠.....!

 

그것도 매우 아프게.......

그렇게 볼리비아 산 골짜기에 자기 피를 흘리며

그렇게 아파하던 저들에게 아픈 마음과 육신을 이끌고

언제까지나 친구로써 남아 있겠죠....

그들의 아품 마디마디 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알아서 기기...??...[자율적 복종]을 읽고

  • 등록일
    2005/03/10 12:57
  • 수정일
    2005/03/10 12:57

아 !......그렇구나.....크크

 

책을 읽었다.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가 쓴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 ! 글의 짧음과 반비례하는 이 느낌이란.........^^;;

 

그랬던 거다.

 

우리들은 어쩌면 강압적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적이 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서 그 수많은 고통들을 참고 인내하면서 스스로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 보에티가 1548년에 18살이라는 나이에 쓴 이 책을 읽다보면

어저면 우리들 스스로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노무현 탄핵사태부터 지금의 민주노총 사회적 타협안이나...뭐 이런 것들이

어쩌면 우리들 스스로 그런 신자유주의의 고통들을 감내하면서

잘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아 !!....

 

왜 사람들은

그런 고통들을 감내하면서까지

스스로 복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일까 ?

그런 복종의 길에

그러한 길들임에 젖어들어가면서도

전혀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왜 오늘도 내일도 아니 우리 미래가지 저당잡혀가면서

우리는 스스로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일까 ??

 

다시 읽어 봐야 겠다.....^^;;

 

다들 혹시 시간있음 읽어 보시길......

 

잼나고

읽다가 중간중간 허걱 하는 이 심장의 떨림.....!!

 

 다시 읽어야 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때 그사람들은 안녕할까 ?

  • 등록일
    2005/03/08 12:24
  • 수정일
    2005/03/08 12:24

원래는 청주 읍성 사진들과 성안길내 옛 한옥집들

혹은 그런 비슷한 류의 사진들을 찍으로 갔다가

무심코 드는 생각에 취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때 그 사람들

선배들과 동기들은 다들 안녕할까 ?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여 이런 저런 것들에 기욱거리고 있을때

그때 누군가가 죽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맞아 죽었는데

연이어서 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갔다...........!!......!!

 

그때

도서관에서 보았던 그 많은 대자보들의 글들과

스스로 알수 없는 분노와 같은 혼란한 감정들.......그리고 .............!!

 

뭐 그렇게 해서 데모라는 것을 나갔다.

수업이고 뭐도 없이

학교에서는 동맹휴업들이 외쳐지고.......정문에서 후문에서..

심지어 교내에서 까지

전경들과 선배, 동기들이 어우러져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매케한 연기에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 돌날르고 던지고........쇠파이프 잡고....!!

 

그러던 어느 날

과 동기인 친구 소개로 만난 선배의

아주 우연한 제안으로 시내로 진출하게 되었다.

뭐 시내에서 데모한다는 것에 특별한 두려움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뭐 알지도 못했기도 했고

알았어도 당시 분위기는 누구든지 나가지 않을 수 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 1차 집결지인 고속버스 터미날 앞 도로를 점거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번잡한 도로인 이곳에서

도로가에 서있다가

사범대 한 선배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나가 정권퇴진 구호를 외치고

순식간에 주변에 서 있던 우리들이 뛰어나가고

그에 맞추어 어디서 왔는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경들이 에워싸고......!!

 

그렇게 한 10여분 끝까지 이 자리를 사수하여

정권퇴진을 이루자고 외쳤었다.

 

그렇게 10 여분이 흘러가고 당연하지만 당시엔 전혀 몰랐던

갑자기 리드하던 선배가 튀어 하면서 마구 골목으로 뛰어 나가고

우리 일학년 몇몇은 이게 뭔짓인가 하는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전경에게 잡혀

닭장차에 끌려 들어가 청주경찰서로 잡혀갔다.

 

뭐 엄청나게 영웅적이지도

그렇다고 어디 내세우기엔 좀 창피한

뭐 그런 얼떨떨한 상황으로 경찰서에서 하루를 보내고 훈방되어 나왔던 기억.......^^;;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없는

고속버스터미날은 이사가고 까르프라는 외국 할인마트가 들어선 이 자리를

나 혼자서 멍하니 헤헤 하며 생각에 잠겨 쳐다 보았다.

 

  

 

그러고 보면

도시라는 것이

사람들의 기억을 머금고 살아가다가

그런 기억을 망각하며 애써 지우며 생존하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까르프 앞에는 한때 충북을 대표한다던

마치 불패의 신화를 자랑할 것 처럼 지역민들에게 도도하게 굴었던

그러면서도 합병당할때는 마치 없어지면 충북이 끝장날 것 같이 울며불며 호소하던

웃기지도 않았던  충북은행본부가 있었다.

 

 

지금은

충북은행을 인수한 후 충북으로 본점을 옮기겠다고 약속하고서도

합병하자마자 모르는 척하며 딴짓하고

충북민들이 소외감 느끼지 않게 지역은행의 역할도 하겠다던 요란한 구호도 잊어버린

그 문제의 조흥은행 충북본부가 있다.

아 ! 욕 먹느니 욕하기로 하고  이젠 CHB은행이란다........??......뭐야 이건...???...헤헤헤

 

충북 -    C

싫어 -    Hate 싫어

바보야 - B

 한때 이런 말장난을 한적이 있었다...?...헤헤헤 유치하긴 하지만

충북싫어 바보야 은행....괜찮지 않나 ???........헤헤헤

 

뭐 여하튼

아직은 충북은행이던 시절

 

그날 내가 첫경험한 날

나에게 시내 가투(거리투쟁)나가자고 말했던 경영대 선배가 일하던 직장이다.

지금은 일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선배 착하긴 무척 착했었는데.....

그 이후 학교에서 날 보면 무척 친하게 굴었었다.

 

물론 다른 선배들과 비슷하게 3학년이 되어서는

일절 운동에는 관여하지 않고 취업공부에 몰두하여

누구나 부럽게 생각하던 은행권에 취업도 당당히 되고......!!

그 선배

그 이후로 나에게 무척 미안해 한 것 같기도 한 그 선배...........!!

 

잘 지내고 있을까 ?

이런 생각들이 갑자기 퍼득 들었다.

 

내가 대학을 관두고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우리 단체 사업 이외에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연락안하고

선배는 선배대로 직장다니느라 바빠서 연락 안해서...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이 서로를 외면하게 된 ......

그 선배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이 끊긴 당시 같이 거리투쟁한다고 뛰어 다니던 그 많은 선배들은

다들 잘 지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만나는 동기들이나

아직도 이런 운동들에서 멀어지지 않고 일하는 선배, 후배들을 만나면서 듣게 되는 이야기는

왠지 좀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작년까지

이런 선배들을 만나는데 주저한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였던 것 같다.

 

우선 나를 보면서 못내 미안해하는 그 표정

마치 나에게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미안해 하는 그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화가나서....자구 짜증이 나서 외면했다.

 

그리고

지금은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면서도

나만 만나면 엄청난 투사인것처럼

지금이 학생운동하던 시절인것처럼

끊임없이 논쟁하고 주장하고 ...............그러고선 이젠 세상이 변했으니

너도 그 짓 그만하고 돈벌어라.....뭐 이딴식으로 말을 맺는

누구말대로 잘나가는 사람이 된 선배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서......뭐 이따위 인간이 있나 뭐 그런...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외면했던 것 같다.

 

언젠가

한때 PD운동권에서 학생회 선거까지 나갔던 선배를 만났는데

나와 같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면서도 열심히 노사모 활동한다고 나에게 자랑하던

나에게 민주노동당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열우당을 밀어주어야 한다는

뭔 이상한 괴변아닌 괴변을 늘어 놓던 그 선배는

여전히

노무현을 보며

아직도 밀어주길 잘했다고 생각할까 ?

아님 이번엔 분개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왜 열심히 운동하지 않느냐고 닥달할까 ?

 

사람이 사람에게 미안해 하고

사람이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사람이 서로에게 배신감 혹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

 

그건 아마도 책임이라는 것

자신이 영향을 끼쳤고 함께 했고 주장했던 바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한다.

 

후배를 만나도

여전히 자기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배를 보면 짜증이 나고....

여전히 후배를 보면 죄스러워하는 선배를 만나면 연민이 느껴지고.....

이런것이 어쩌면 자신이 살아온 삶속에서 관계되었던 사람과 사건들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한다.

 

책임

 

나에 대하여 지는 책임과

나의 이웃들에게 지는 책임과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책임들.........^^

 

이젠

충북은행에 다녔던

그 선배를 어디 길거리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서로 그저 당당히 인사하고 술한잔 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도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으로써는 어쩔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고

당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고

그렇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후배에게 미안해 하며 살았고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살아온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몇몇 운동권 선배들처럼

철저한 기득권자가 되어서 철저한 자본가가 되어서

그들 말대로 사람답게 부자스럽게 살고있으면서도

어떤 책임의식 없이 또다른 주장들을 마구마구 쏟아내는

그 무책임한 입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 !!

괜한 생각에 술 생각만 나는 구나....?....헤헤헤

 

기억은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애잔함에 빠뜨리는 것 같다.....^^;

 

아자 ! 아자 ! 화이팅 !!

백수가 너무 말이 많은 것 같다....!!

 

돈벌어야지.....?....헤헤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해미읍성...성벽을 걷다.

  • 등록일
    2005/03/08 06:10
  • 수정일
    2005/03/08 06:10

해미읍성을 갔다.

 

갈때마다

그 들넓은 성안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 만만찮은 곳이다.

 

 

워낙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고

특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은 곳으로도 유명하여

거의 성지가 되어버린 읍성이다.

 

원래는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인데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내가 살고 있는 청주로 옮겨지면서 도시의 기능이 퇴락하고

따라서 읍성의 기능도 퇴락되었단다.....

 

집이나 도시나 그 운명이라는 것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무슨 필요에 의해 쓰임을 받다가도

비슷한 놈들끼리의 싸움에서 밀려나면 도태되기 마련이고

그런 도태를 경험하면 이렇게 옹색하게 변해버리니 말이다.

 

원래는 성벽 자체나 성읍이 지금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성의 남쪽문 즉, 진남문만 남아 있었고

성안에도 우체국이니 민가들이 들어와 있었단다.

그러던 것을 70년댄가 부터 지금처럼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같이 횡한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복원을 할때 성벽을 복원하더라도 안의 민가들이 그냥 있었다면

이렇게 쓸쓸하거나 허망해 보이진 않을텐데............!

 

한 설명에는 이런 성벽 복원과 관광지화에

천주교가 무척 많은 노력을 했단다.

 

지금도 천주교 신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다는 회회나무가 서있고

순교기념비가 옛 감옥터에 대리석으로 서있고 .............!!

 

 

하늘을 향해 묘하게 휘어져 있는 이 나무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처절한 마음으로 세상을 벼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피값으로 이 나무는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입구인 진남문에서 성벽을 바라보는 느낌은

마치 거대한 과거의 벽에 턱하니 숨막히듯 부디치는 느낌이다.

세월을 켜켜히 쌓아 만든 이 돌덩이들의 무늬속에서

언제나 황당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여유없는 옹졸함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나 할까 ........?

 

 

크고 작은 돌들 사이에서 간신히 자기자리를 차지한 듯 힘겹게 끼어있는 작은 돌들마저도

크기와 상관없이 똑같은 세월을 버티고 이렇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 아닌가 !

하지만 어디 인간세상이라는 것이 그러한가

 

특히 요즘처럼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세월에 도시라는 공간속에

아님 사람답게 살수 없어

소리소문없이 주위에서 증발해버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어떤 집단도

작지만 나름의 의미대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손잡고

힘들지만 그 위치에서 함게 버티고 살아보자 손잡아 주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한 집단이 있겠는가..............!!

 



 

성안으로 들어가면 어디나 그렇듯 정면에 우뚝 서있는

화려하게 단청된 한옥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왠만하면

무시하고 바로 성벽으로 올라가 성을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길 권한다.

뭐 한옥이라곤 해도

거의다가 최근 몇십년안쪽에 복원해서

건축적 특징도 없이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크기가 웅장한 기형적인 느낌의

사람 흔적없는 세트장 같은 느낌밖에 없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인간도 어쩔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성벽을 따라

성안의 횡함과

성밖의 분주함을 지켜보며 유유자적 흐느적 거리며 둘러보는 재미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늦은 오후시간에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느긋하게 저녁의 풍광을 즐기며

산책하듯 걸어보는 것 만큼 읍성의 그리고 성벽의 그리고 세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또 있으랴.......

 


 

그렇게 점점 더 어두워지는 시간속으로 사라져 보는 것 만큼

자신을 온전히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속에 맡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으랴....

 



 

그렇게 문루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 아니 이제가지 살아 온 나만의 세월을 한번 반성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

 



성벽 넘어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담배 한대 입에 물고

멍하니 사진기 들이대면서

그렇게 해미읍성을 어둠속에서 빠져 나왔다.

 

읍성을 빠져 나와 시장끼를 느끼면

순대국밥을 한번 드셔 보시길.....................^^

 

뭐 세월의 강을 건너 오느라 많이 들 힘들텐데

이럴때 뜨거운 순대국밥 한 그릇이면

새로운 원기가 보충되어

힘차게 구구질구질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인정이 있어서 살아볼만한

그런 삶을 힘차게 굳세게 살아 가고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

 


 


읍성 바로 앞에 식당이 있는데

순대국밥이 맛있다.

 

내 기억으로는 다른 어느 곳 보다도 맛나게 먹은 기억이다.

후르릅 쩝쩝하면서....................헤헤헤

 

아 ! 순대 국밥의 맛에 취해

순대 사가지고 오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듯....

국밥은 맛있었는데

사가지고 와서 먹어보니

양도 적고

국밥맛과는 좀 다른

그저 그런 맛이더라......^^;;

 

국밥은 진짜로 맛났었는데......헤헤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절망...풀이 눕다.......[김수영 시선]을 읽고

  • 등록일
    2005/03/07 16:34
  • 수정일
    2005/03/07 16:34

 

간만에

정말 간만에

거의 잊고 지내다가 간만에

김수영 시집을 샀다.

 

원래는 다른 책들을 구경갔다가

거의 충동적인 구매욕이 들어서

집에 분명 김수영 시집이 한 권 있는데도

참을 수가 없어서 샀다.

 

역시 좋았다.

눈물나게 좋았다.....큭큭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아 ! 넘 좋지 않나 ?

마치 나의 이야기인것처럼

시는 그렇게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 같다.

시가 사람을 바꾼다면 아마도 이성이 아니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일 것이다.

아니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성이 아닐까 .......^^;;

 

김수영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때이다.

뭐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3학년때

도서부장 하면서

도서관의 책이란 책은 다 읽기 시작했을땐데

그때는 뭔 소린지 몰라도 그냥 아 ! 좋군...뭐 이따위 생각으로 읽었었는데

 

고등학교시절

한창 까뮈를 읽고 있을때 시 한편이 아 ! 난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막막한 느낌을 주었을때 그 이후로 시집을 사서 읽고 읽고 또 읽고 ...........

그렇게하면서 좋아졌다.

 

그때 시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다.

한없이 소심하고 한없이 쪼잔하기만 했던

그 쪼잔함에 그 소심함에 기가죽어 자취방에 틀어박혀 지낼때

아 ! 뭔가 울컥하는 것이 느껴진 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우습지 않느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1965. 11. 4>

 

항상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에 분노하면서

항상 중요한 일들에 비껴서서 묻어 가기만 하는 삶

두렵기도 하고 뭔가 용기도 안난다는 이유로

괜히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화내고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면서 가는

어쩌면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자본주의의 전형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눈이 마음이 시큰하지 않는가 ?

 

그때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다.

용기있게 살자고

조금만

단지 한 발자국 정도 라도

남의 아품에, 시대의 아품에,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앞서지는 못하더라도 단지 한 발자국이라도 용기있게 다가가는 삶을 살자고........

 

지금 생각하고 반성하고...골똘이 골똘이 챙겨보아도

과연 이 나이되도록

그렇게 살아 오기는 했는지....한숨만 나온다.

 

               절 망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65. 8. 28>

 

솔직히 요즘 그동안 해오던 시민사회단체일들을 정리하고

하루벌어 하루먹는

돈벌어야 사는 삶을 살고 있는 요즘은

왠지 스스로 의기소침하고 누구말대로

너 ! 절망했냐 ? 라는 식의 말을 듣는 지금

어쩌면 나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그동안 해왔던 활동들에 대한 정리들 없이

너무나 성급히

너무나 생각없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

우리가 꿈꾸던 사회

자본과 재벌과 모든 독점과 차별을 철폐하는

진정한 자유와 인간다움과 연대와 활력이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꿈과 필요성...살고싶은 욕구가 줄어들기는 커녕

한국사회에서 나날이 이런 사회로의 발전가능성이 줄어들고

사람들은 극단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나란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싸워야 할까 ?

 

          아 ....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敵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善良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民主主義者를 假裝하고
자기들이 良民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選良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會社員이라고도 하고
電車를 타고 自動車를 타고
料理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雜談하고
同精하고 眞摯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原稿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海邊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散步도 하고
映畵館에도 가고
愛嬌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戰線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延禧高地도 아니다
우리들의 戰線은 地圖冊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職場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洞里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焦土作戰이나
[건 힐의 昊齒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歡談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土木工事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市場에 가서 비린 생선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戀愛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
授業을 할 때도 退勤時에도
싸일렌소리에 時計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있다
民主主義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民主主義式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民主主義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다……
아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 그래 ……
응응…… 응 …… 뭐?
아 그래 …… 그래 그래.

<1960. 4. 3>

 

그럴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이젠 도입이 아니라 삶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어딘들

내 가정 나의 인간관계속에서든

신자유주의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있으랴

어디든 그런 버려야 할 것들이 넘쳐나지 않는 곳이 있으랴.................

 

적은 언제나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동지라고 생각했던

민주노동당 혹은 민주노총 혹은 시민사회단체에도

결국은 우리의 신자유주의자인 적들이 있을 것이다.

그냥 시집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의 한심함과 내 자신의 소심함을 보며......................

 

오늘도 술한잔을 할 것 같다.

그래도 김수영 시를 읽었는데

이런 날 맘편이 술한잔 안하면 넘 슬프지 않겠나........!!

죽어서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어서

더욱더 시인이 되어버린 김수영의 마지막 시란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술먹고

그냥 누워서 자야 겠다.....오늘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산시 옛집기행(3)--공세성당

  • 등록일
    2005/03/07 11:30
  • 수정일
    2005/03/07 11:30

내친 김에 들렀다.

 

아산방조제가 보이는 곳의 작은 동산위에 우뚝(?) 서있는 성당이다.

누군가가 이 곳에 피정을 온 적이 있다는 아사미사한 이야기를 듣고

아 ! 피정...음....뭐 이런 적이 있었던 그 성당이다.

 

이 곳 근처에 무수하게 많은 순교 성지중의 한 곳이고

따라서 나 같은 어줍잖은 사람들보단 신자들이 찾으면 더욱더 감회가 새로울 그런 성당이다.

 

 

이 근처 혹은 아마 충청도 에선 제일 먼저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축이다.

워낙 어디 사진에서나 보아오던 고딕양식이니 하는 단어가 생뚱맞아서

건물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보단

그냥 아 ! 좋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는 맛이 좋은 그런 성당이다.

 

 

아직 쌀쌀한 바람 탓인지

하늘이 파란만큼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날씨였는데도

왠지 답답한 마음이 확 열리는 그런 기분으로 멍하니 첨탑 끝을 쳐다보았다.

 

 

아 ! 높군......크크크.....^^

 

원래 이 곳은

공세곶지로

일명 공세조세창이었던 곳이다.

일명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조세미를 보관하고 있다가 바로옆의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싣고 가던 그런 곳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세금은 매우 중요했음으로

이곳에는 창고를 중심으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포구쪽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나중에는 박해받던 천주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런 곳에 숨어 들어 왔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는지 나중에 잡혀가 결국 순교했단다.

 

나중에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이 곳 공세에서 시작되어

결국 청나라가 쫓겨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킨게 된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고...............................!!

사람 통행이 많다보니

이런 저런 아픈 기억들, 사연들이 많은 곳이다.

 

 

 

성당 건물은 1922년(?) 정도에 건립된 것으로

성당과 교육관이 있다.

 

 

작은 동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산 주위를 따라 산책코스도 있고

그 산책코스를 따라서 예수가 본디오 빌라드의 재판부터 못박혀 죽기까지의 일생이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다.

 

성당 내부는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엄숙함과 고요함.....그리고 뭔지 모를 이끌림이 있다고 할까 ?

 

 

부는 바람만큼이나 왠지 조용하게 만드는 곳이다.

 

물론 성당에는 당시 순교한 박씨 3형제의 묘와 비석이 남아 있고

언덕 아래로 오즘사람들의 피정을 위한 신축 건물이 있다.

 

성당 앞 마당 지하에 성체조배실이 있는데 그곳을 따라

옛 성채의 일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당 자체가 성벽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도 옛 성백이 무너지지 않고 쓸쓸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고즈넉함을 넘어선 뭔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난 이런 풍경을 볼때마다

세월이랄가 하는 뭐 그런 무게감을 느낀다.

그 영화롭던 세월은 다가고

이렇게 성벽은 어떤 빈가의 담이 되고

어떤 성당의 담이 되고

온갖 잡목들에 둘러싸여진 음침한 곳으로 물러나 앉아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든다.

 


 

이집 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성벽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다.

지금은 이 집마저 폐가가되어

마치 성벽이 폐가를 감싸고 있으면서

같이 폐가가 되어버린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드러낸다.

 

그 길을 다라 조금 더 내려오면 보이는 것이 일부만 남아있는 성벽과 비석들이다.

 


지금은 어떤 집의 담장으로 쓰이는데 담장 높이가 거의 그 집의 지붕만큼 올라가 있다.

 

 

공세 조세창이 있었다는 설명문과

해운판관비석들이 찾는이 없는 어느 담장 넘어에 외로이 서있는 것이

이젠 어느 조그마한 시골동네로 전락해 있는 공세라는 동네 만큼이나

안스럽고 서글픈 표정들이다.

 



둔덕처럼 변한 성벽위에서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저 대나무 처럼

사철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의 인생도, 마을의 풍경도

어느 누구하나 기억못할 정도로

문득 잠에서 깨면 바뀌어 있는 것일까 ?

 

바다나 보러 가야 겠다.........................^^

 

  


바다에 한 발적시고 있는 저 끈처럼

역시 공세에서 봤던

서글픔은 바다를 닮았던 것 같다.

보면볼수록

공세라는 마을이 안고 있는 세월의 풍상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듯

세월의 때가 느껴지는 바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백수 달리다.....?...헤헤

  • 등록일
    2005/03/07 10:01
  • 수정일
    2005/03/07 10:01

근 두 달째 놀고있다.

좋은 표현으론 기다리는 것이요,

활동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요,

쉼과 회복의 시간이라고 할까 ?

뭐 이런 저런 거 다 치우면 할일없어 놀고 있는 것이다.

 

놀다 보면

그래도 백수 체면을 생각해서

좀 바쁘게 지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돈 안드는 답사들을 다니는 중이고( 물론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 삼아서.....)

이것저것 배워볼 요량으로 기웃기웃 손을 놀리는 중이다.

 

한 한 달전부터 디카라는 것을 구해서

잠시 돌아다니는 답사여행 사진도 찍고

이런 저런 귀동냥으로 사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달리는 차안에서 무지하게 달리는 사진을 수십방 찍었더니

마치 내가 무슨 폭주족처럼 그 속의 속도에 현기증이 느껴진다.

 

 

백수라는 것이 원래 한량이요, 한량이라는 것이 원래 건달이니

건들건들 몇달을 지내다가

난데없이 이런 분주한 속도전에 가세하면

당연히 속이 메스껍고 현기증이 나게 마련이라지만

좀 찍어논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점차 애달픈 심정이랄까...묘한 향수에 젖어든다.

 

 

아마도

잠시 쉰 것이 탈이났던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꼬여 있든지.........

 


솔직히

매일 먹는 술에 쩔어서

변변한

운전면허증하나 없어서

폭주족이니 뭐 그런 속도를 즐기는 스포츠(?)를 해본 적은 없으니

이런 속도감에 향수병걸릴리 없고..........

 

워낙 인간이 못나서

사람많은 곳은 체질적으로 맞질 않으니

뭐 도시환경이 부러워 향수에 젖을리도 만무하고......!

난 오히려 이런 적막한 시골길 가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다보니........!!

 

 

한참을 달려서 이런 시골길 나오면

잠시내려 담배한대 피워물고

지나가는 찬바람을 마셔본다...... 

 


사람사는 동네에 사람 흔적없이

조용히 바람 흔적만 느껴질때쯤

다시 차에 올라타 도시로 돌아오다보면..........

 


 

멀리서 불야성 이룬 도시의 불빛이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나에게 다가온다.

이러니 이런 속도감에서 현기증이야 당연히 따라붙는 진드기라하더라도

왠 난데없는 향수란 말이냐...............

 


 

다시 달리는 차속에서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궁리들을 하고 또하고.....

에이..씨벌 하는 욕지기가 목구멍가지 올라 올 때 쯤이면.............

 

 

도시 변두리의 집에 도착한다.

..............

 

뭐 백수가 달려봤자

얼마나 달리겠는가.....

그래도 돈안드는 집구석에 돌아와

대자로 누워

이런 저런 마저 다하지 못한 생각들을 이어서 하다보면

다시 술 한잔 생각이 나고

술한잔하면

그때서야 또렷해진 정신에 퍼득 떠오르는 것이다............!!

 

아 ! 내가 너무 쉬었구나......!

 

이러다가

살아가는 속도마저 잃어버릴가 싶어

안달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곧 봄도 오는데

할일을 찾아야 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산시 옛집 답사(2)--신항리 행평윤씨촌(윤보선생가)

  • 등록일
    2005/03/07 08:52
  • 수정일
    2005/03/07 08:52

아산시에서 두번째로 들른 곳이 둔포면 신항리다.

 

보통 이 곳 아산시는 청주에서 1시간에서 2시간 내의 가가운 곳이라서

자주 답사 내지 바람 쐬러 오는 곳이다.

 

특히, 이번 답사에서는 빠졌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이나 맹씨행단은 1년에 2-3번씩은 오는 곳이다.

 

그런에도 아산시 북쪽에 있는 이 곳은

계속 오려고 눈여겨 보긴 했지만

왠지 멀게느껴지는 심리적 거리감으로 인해 한번도 와보지 못했던 곳이다.

막상 차로 달려보니 맹씨 행단에서 20여분 정도의 시간밖에 안걸리는데도

왠지 멀게만 느꼈던 것으로 보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요상하긴 한가보다.

 

아산시에서 잘닦여진 45번 국도를 따라 둔포방면으로 가다보면

신항리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 한 5분이 안되게 들어가면

해평 윤시들의 한옥을 볼 수 있다.

보통 길가의 이정표를 신항리보다 윤보선대통령 생가라는 표지가 훨씬 크게 나와 있다.

이 표지판을 보고 오면 윤보선 전대통령의 생가이자 해평윤씨들이 지은

약 100년이 좀 넘어보이는 한옥집들이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마을을 들어가다보면 중간쯤에 솟을대문이 나온다.

다른 어떤 마을에서도 본적없는 독특한 솟을대문이

이 마을의 해평윤씨 한옥집들의 특징을 말해준다.

 


이 솟을 대문과 그에딸린 행랑채가 끝나는 왼족에 원래는 담이 있어야 할 곳에

지금은 길이나 있다. 그리고 물론 대문도 잠겨져 있다.

 

 

그 잠겨진 대문 안쪽으로는 지금은 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데

그 너머에 당연히 나와야 할 사랑채 혹은 안채 뭐 이런

한옥의 일반적인 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잡들이 서너채가 나온다.

 

마치 이 솟을 대문이 이 마을 전체의 대문 역할을 하듯이

덩그란이 독립된 형태로 서 있고 그 안쪽으로 한옥집들이 별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서원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처럼

이 문이 해평윤시 일가들이 모여 사는 이 한옥들의 전체 대문 역할들을 하고

안에 있는 한옥들은 일면 평범해 보이는 기능성이 강조된 작은 대문들을 가지고 있다.

 

처음 나오는 집은 대문을 통과하여 계속 진행되는 길을 중심으로 옆으로 늘어서 있다.

 

방향이 거의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납쪽 혹은 동남쪽을 향하지 않고

그저 대문을 통과한 동선에 맞추어 길옆에 요즘의 무슨 가게처럼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퇴락한채 쓸쓸히 망가져 가는 듯한 인상이다.

형식은 민도리집으로 조선말 혹은 일제초기의 전형적인 한옥집의 양식이다.

 

 

그 건축의 시대적인 특징인지는 모르지만

집안 곳곳에 이 문처럼 서양양식이 가미된듯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년대가 100년정도 즉, 조선 개항후임을 알수가 있다.

 

 


 

길을따라 늘어섰다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시원한 마당의 느낌 뭐 이런 것보다는 왠지 답답한 느낌이 주로 들 정도로

전통 흙담이나 붉은 벽돌로 막아 놓아서 공간공간들이 독립적이긴해도

막힌 느낌이 많이나는 편이다.

 

 

다음 집도 비슷하게 길을 따라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 사람이 현재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는 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현재 살고 있는 집들은 거의 대다수가 문을 잠가두고 집주인이 외출한 관계로

들어가 보지 못해 많은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져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로 걸어갔다.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는 솟을대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바로 보인다.

높은 담에 둘러싸여 있고 유일하게 별도의 솟을대문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아 ! 저기가 거기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솟을 대문 자체가 이빚이 처음생길때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전체적인 이 동네의 집들을 보아서는 윤보선대통령이 이후 정치적인 출세를 거듭하면서

개축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솟을 대문 옆으로 담장이 이어져 있지 않고 차가 들어갈수 있도록 담의 일부를 헐어버려서

누구나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집구경을 할 수 있는 집이다.

한옥집이 아무도 살지 않아도 집이 금방 퇴락하지만

사람이 살면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이정도의 개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냥 대문밖에 주차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시골동네임에도 꼭 차를 대문안까지 끌고 들어가기 위해 담을 헐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실제 그 집에서 살지않고

그냥 이렇게 구경만 다니는 관광객의 입장이기에 생기는 감정이리라 자위했다.

 

여기서 참고로 윤보선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면

워낙 최근가지 생존했던 사람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노파심에서 이야기하면

우리나가 제 4대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만 보면 이승만 다음이고 선거로 보면 4대 대통령이고

헌법의 개정으로 보면 제 2공화국 대통령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내각책임제로 인하여

그 실권을 갖지 못해 사람들이 대통령인 것은 알지만 언제인가 잘 모르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사람이다.

 

4.19 혁명이후 들어선 정권 자체가 단명한 이유도 있지만

내각제 실시로 인해 총리 이름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 정권을 장면정권 혹은 장면내각이라 부르니

당시 대통령인 윤보선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경향인 것이다.

 

여하튼

박정희의 군사구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고도

1990년까지 생존했으니 그 뼈져린 감흥이야 어떠했으랴.......


실제 장면 내각이 집권했을 당시 민주당의 신,구파의 분열과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스러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실제 그렇게 크게 잘못한 부분이 없음에도

당시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정권탈취는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장면과 윤보선 등에게 무능과 무절제, 부패의 이미지를 온통 뒤짚어 씌웠고

이로인해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우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중

솔직히 윤보선이나 장면보다 비리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대통령이 누가 있겠는가 ?

 

실제 박정희는 자신이 집권한 후에도 이들 윤보선과 장면에게 정치활동을 못하게 했을망정

어떠한 비리나 잘못을 처벌하지 못했던것처럼

사실은 이들은 아직 채 자신들의 어떤 정책들을 펴보지도 못한 채로 박정희의 권력욕에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던 것 같다.

 

솔직히 아직 4.19 이후의 상황에 대한 명확한 검증들이 없고

아직도 박정희 망령이 한국사회를 옥죄는 상황에서

그 잘난 노태우니, 전두환이니, 김영삼이니 하는 정치범죄형에 가가운 대통령들의 생가도

복원하고 관광지로 만드는 판에 문화재적 가치가지 있는

또 한명의 전임대통령의 생가는 퇴락한 채로 방치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윤보선이나 장면은

국민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으로 인해 욕을 먹었지만

노태우나 전두환이나 김영삼은

최대한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한 공로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

 

당시 박정희의 집권을 바라본 김수영시인이

" 이제 한국은 다시는 자유를 만끽하지도

만끽한 자유에 대한 책임의식을 배울기회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배울 기회도 잃어버렸다 " 고 울면서 이야기 했단다.

 

자유가 지나쳐 다소 방종하기로서니,

민주주의를 실행하면서 다소 혼란스럽다고해서

반만년만에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훼손할 만큼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꼭 이렇게 군대처럼 국민들을 일렬로 줄세우고 무책임하게 강요하고

개패듯이 몰아부쳐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던

김수영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제대로 자유니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식이니 하는 것들을 배워보지도 못하고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 요즘에도

어느 한 정치인도 국민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고

어느 한 개인들도 공동체적인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국민성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배우려 했는데

총칼로 위협해 배우지 못하게 한 박정희와 그 떨거지들이

이제와서 국민들에게 책임의식좀 가져라 소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 가 중요한 것이다.

 

자유란 책임이므로.....

 

갑자기 오바를 했다.

뭐 여하튼

이런 것이 답사의 재미 아니겠나 싶다.

잊혀진 것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되짚어보게하는 힘.....!

 

 

새로 지은 솟을대문만이 위로 덩그라니 솟아 있고

왠지 사람들이 사는 집임에도 퇴락해 보이는 윤보선 생가를 보면서

언듯 박정희생가가 떠올랐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자신의 친척까지도 밀고했던 박정희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민족까지도 팔아먹었던 박정희를

뭐 기억할게 있다고 생가를 복원하는지 말이다.

 

그곳에 가서 구경하면서

아 ! 나도 친척 팔아먹고

민족 팔아먹고

자유 짓밟아서 권력만 잡으면 된다...뭐 이런 생각하려고 기념하는 것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산시 옛집답사(1)...맹씨행단

  • 등록일
    2005/03/06 15:09
  • 수정일
    2005/03/06 15:09

청주에서 천천히 가면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가늘 길이야 많지만

난 청주에서 조치원을 거쳐 1번국도를따라서 천안방면으로 가다가

행정리에서 광덕사 이정표를 보고 가다가 아산시로 넘어가는 길을 택한다.

 

가기전에 광덕사에 들러 절구경을 하고 난 후

쉬엄쉬엄 고개하나를 넘으면 나타나는 곳이 맹씨행단이다.

 

원래는 고려말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고 했다고 어린 시절 누누이 들었던

그 이상한 사람 최영장군이 살던 곳이다.

뭐 황금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모를까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런 명언을 남긴 사람의 집이니

검소하리라 생각하지만

널찍한 집터에 작은 성이 연상될 정도로 돌담이 인상적인 집이다.

 

 

 

위대한 사람들 특히, 오랫동안 사람들 입과 귀에 오르내리는 사람치고

이런 저런 야담스러운 전설이 없겠냐만은

최영장군의 이런 말은 약간 거스리는 경향이 아직도 있다.

실제 최영장군은 그 평가가 극과극을 달리는 사람이다.

 

누구는 이성계에 맞서 끝까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을 높이산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이런 야담 즉, 세상의 명리(이해관계)에 초탈하고 오직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절만이

드높았다는 식으로 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

 

최영장군은 고려를 위해 끝가지 충절을 다한 것은 맞을 수 있지만

다른 부분 즉, 청렴결백하다는 식의 평가들은 충분히 문제가 있다.

 

최영장군은 고려에 충성을 다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딸을 왕비 자리에 앉혔고

다라서 어떻게 보면 자신의 딸 혹은 사위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쳤다는 의혹을 사기도 하고

이성계가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세우게 되는데

실은 가장 일조한 인물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군사력을 가졌고 그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딸을 왕비에 앉히고

그리고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려한 것 또한 의혹을 받는 한가지 사실이다.

(아 ! 물론 그런것가지를 포함에서 고려에 대한 충성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면 뭐...뭐라 할 이야기는 없지만 말이다....?...헤헤헤)

 

 

뭐 여하튼 그런 최영장군이 터를 잡았던 곳이 이곳 맹씨 행단이다.

최영장군이 옆집에 살던 어린 맹사성을 보고 그 영특함이 탐이나 자신의 손녀를 시집보내고

나중에는 이집가지 물려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원래 맹사성은 고려 수도인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온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도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온 것은 맹사성의 아버지가 당시 개성의 혼란스러움을 피해 이사왔다.

이사 당시 맹사성은 5-10세 사이의 소년이었다.

 

원래 맹사성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에서 관직을 지낸 귀족가문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조선개국후 두문동 72현에 속했을 정도로 고려에 대한 충절이 있는 집안이었다.

두문동 72현 지금의 개성시 인근의 개풍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계곡으로

나중에 이성계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맹사성의 아버지 또한 함께 두문동 72현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하튼 살아남아서 이곳 맹씨행단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여하튼 최영장군이 집을 주었다기 보다

최영장군이 이성게일파에게 집안이 풍지박산 난후 이웃에 살던 맹사성 즉,

손녀사위에게  재산이 이어졌을 것이다.

맹사성이 고려파였던 최영장군 집안과 혼인을 맺은 것도 이러한 집안의 가풍탓일것이다.

 

우선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맹사성 유물전시관이다.

맹사성이 사용하던 옥피리와 기타 맹사성의 글씨들 뭐 그런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평소에는 거의 잠겨있어서 보려면 맹사성 고택안에 있는 집에서 사시는  

21대 후손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면된다.

 

 

주차장 옆길로 바로 나타나는 것이 높게 솟은 대문이고 이 대문을 들어서면

처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21대 후손 할아버지가 사시는 집이다.

 

 

종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할아버지는 꽤 친절하시다.

다만 할아버지께 이런 저런 설명 듣고나면

할아버지의 은행 좀 사가라는 말을 뿌리칠 수 없어서

5000원 정도라도 투자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뭐 그 정도는 이 집을 감상하는 비용정도로 생각하면 생각보다 많이

듬뿍듬뿍 퍼주시는 그 손길이 더욱더 정겨워 집구경하는 기분이 더 좋아지니

그럭저럭 사가지고 오는 재미도 있다.

(솔직히  집에와서 맥주 안주로 한 움큼 먹으면 그 맛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지만...헤헤)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은행나무 행단과 고택이 나온다

와 ! 하는 탄성이 나올정도로 큰 은행나무가 두그루 있는데

두 그루 모두 몇개의 나무가 함게 자란 형국이라 딱히 두그루라 이야기하긴

좀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따지지 않고 보면 와 ! 하는 감탄이 나온다.

다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때 가면 더욱더 입이 벌어지는 나무다.

이번에 갔을땐 잎도 자라지 않아 좀 그 위용이 실감나지 않지만

언젠가 보았던 가을날의 풍경은 아직도 찐한 여운을 준다.

 


이 은행나무 정면 앞쪽으로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한문으로 공(  )자 형태인데

고려시대 민가양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식이다.

오늘날 흔히 보는 ㄷ자형집의 시조격으로 보이는 구조인데

양쪽 날개채와 가운데 대청마루 부분의 처마선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어서

그냥 지붕만 보면 정사각형의 ㅁ자형 집처럼 보이지만 평면도 상으로 보면 완벽한

공(  )자형 집이다.

 

 

 

그리고 양 날개채는 구들방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날개채는 맞배지붕이고 뒤쪽으로 높게 굴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한옥집을 구경다니면

이런 굴뚝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특히 어느 집이나 거의 대동소이한 집의 구조에 반해

굴뚝은 그 집주인의 취향과 그 집의 집터에 영향을 받아 제각각인 경우가 많고

특히 그 높이나 장식은 마치 절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탑처럼

예술적 감흥을 나에게 준다.

 

                               < 굴뚝의 지붕 >

 

또한 이렇게 날개채가 앞뒤로 약간씩 튀어 나옴으로서 옆에서 본 칸살이는

거의 정사면체의 면처럼 느껴지며 정확히 삼등분된 칸살이를 보여준다.

 

 

보통 ㄷ자형 한옥집에서는 옆면의 칸살이가 이렇게 정확한 3칸살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자형의 중심의 칸살이는 대들보의 길이에 좌우되고 날개채는 도리의 칸살이에

맞추다 보니 생기는 약간씩의 변형인데

이집은 중앙부분의 대들보에 의한 칸살이 길이를 양 날개채로 튀어나감으로써

묘한 안정감을 갖게 된 것 같다.

  

 

고택 뒤로 세덕사라는 사당채가 있고 이런 고택과 사당채를 둘러싸고 돌담이 한 겹 두르고

그 한겹 두른 돌담 밖에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그 밖으로 또 한 겹의 돌담이 두르고 있다.

 

21대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안쪽 돌담은 싸은지 오래되지 않았고

바깥쪽 돌담은 옛날부터 있었던 돌담이란다.

 

 

바깥 돌담으로 짐작해 보는 집의 규모는 상당해서

청백리의 표상이자 지붕이 세어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고불 맹사성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이 부분에서도

실제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 있다.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서울에서 관직을 갖게되면

서울 도성안 혹은 남산 근처에 자신이 거주할 집들을 구입하였다.

물론 경제적인 차이로 그 크기나 장소가 정해지기는 하지만

한번 이렇게 도성안에다 집을 마련하면 아예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할때까지는 수십년동안 기거를 해야 했기에 요즘같이 전세집을 얻는 방식이아니라

아예 집을 샀다는 것이다.

 

특히 맹사성같이 48년이나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했던 정승들은

당연히 집을 구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맹사성은 가족 대부분을 자신의 세거지인 이곳 아산시에 남겨두고

끝가지 서울에다가 주거지를 마련하지 않은 모양이다.

따라서 서울의 거쳐는 언제나 요즘 전세살이 처럼 허름한 집을

그때그때 옮겨다니며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맹사성이 이렇게 당시의 관료들과 다르게 자신의 주거지를 서울로 옮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집안의 내력때문이리라

 

맹사성의 할아버지가 두문동 72현의 한분이고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끝까지 따르지 못한 죄책감과

여전히 조선을 인정할 수 없었던 마음이 남아 있었고

누구보다도 이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맹사성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의 관직에 나아갔지만 언제라도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세거지로 내려갈 생각으로 서울에서의 그런 궁핍한 삶을 살았으리라.

 

실제 이곳 맹씨행단이 있는 곳은 광덕산의 서쪽 줄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조선을 반대하며 죽어갔던 곳이

개성의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문동이고 보면

같은 지명의 서쪽 기슭에 세거지를 정하면서까지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려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세거지를 서울로 옮길 수 는 없었지 않았겠나 ?

 

이런 맹사성네 3부자의 관계는 당시 매우 유명하여

조선전기에 제작 배포된 효에 관련된 삼강행실도에 삽화와 일화로 소개되었을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집이 누추했던 것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던 곳이니 애써 고칠 이유가 없어 그냥 살은 탓일게다.

다만 청백리였던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이는 그 스스로 할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져버리고 조선의 관직에 나간 이상

성리학자로서의 실천에 입각한 활동이외에

스스로 부귀공명을 꾀하기엔 스스로의 모순된 행동이며

주변의 따가운 시선들을 의식해서라도 감히 부정을 탐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고려에 대한 충절과 조선에 대한 충절 사이에서 언제나 고민했던

한 지식인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곳이 이곳 맹씨 행단이다.

 

이 돌담 넘어로 쪽문을 지나면 구괴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원래는 황희정승과 독수 권진이라는 정승, 그리고 맹사성이

이곳에서 서로의 생각과 국정운영방안등을 논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무 3 그루씩 9그루를 심었었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 2그루에다가 소마누가 대여섯개 높게 자라있어서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마치 맹씨 고택의 부속된 정원처럼 바로 인근에 있어서

고려시기의 원림 즉, 정원의 조경에 대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듯 보이나

실제 이에 대한 연구나 조사된 바가 없으니 나같은 초짜가 뭐라 말할 순 없겠다 싶다.

 

다만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돌담과 그 인근의 산책로를 겸한 정가가 있는 곳이

언젠가 답사했던 의성군 산운마을의 한 민가의 잘 조성된 원림처럼 느껴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람들...기억속에서 길을 잃다.(2)

  • 등록일
    2005/03/06 14:22
  • 수정일
    2005/03/06 14:22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의 존재 혹은 삶의 의미를 기억 혹은 추억속에서 찾는 경향이 두드러 질수록

허리우드의 영화속 한장면처럼

인간은 자신들의 기억 혹은 추억들을 조작 혹은 재구성하는 등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처럼 기억들도 그런 상황들이 가능할까 ?

 

어쩌면이 아니라 우린 영화속에서 이런 것들을 자주 보곤한다.

가령 과거의 어떤 시점의 기억들속에서

맺어진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사건들이

자신의 무의적이든 아니면 의식적이든

그러한 노력들에 의해 재구성되곤 한다.

 

가령

일본영화 [라쇼몽]에서처럼

아내와 사무라이 남편과, 지나가는 산적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

각자의 삶에 나름대로의 영향들을 끼치듯이

결국 각자의 사적인 이해에 기반하여 인식되어지고

이러한 것들이 결국 자신의 기억들을 자신의 사적이해를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재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

 

 

홍상수 감독의 [오 ! 수정]에서처럼

과거의 어느 한시점에서의 연애라는 것은

어떤 오해라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억 혹은 추억을

오로지 자신의 입맛대로 재구성하는데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

 

아니면 [생활의 발견]에서 처럼, 혹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처럼

어떤 형태로든 결국 자신의 기억들은 스스로의 자기이해들에 의해

조작되고 재구성되어지는 것 같다.

 

     

 

실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존재의의미를 찾게되는 그런 기억들을

수동적인 무의식이 아닌 적극적인 행위로써의 몸에 밴 무의식으로

재구성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스스로 그런 기억들이 남과 상관없다라고 생각되어지는

연애니, 생활속에서의 자잘한 기억들, 학창시절, 여행담 속에서는

더욱더 진하게 조작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이 보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문제에서는 어떨까 ?

 

혹시 사회적이고 공적인 부분에서마저도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이나 조작은 가능하지 않을까 ?

 

가령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에서 보여지는 기억의 부재에 따른 단편적인 메모에 의한 재구성은

어쩌면 왜 사람들이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 혹은 조작이라는 것에 적극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이 눈뜨는 순간부터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기위한 자신의 기억에 대한 재구성은

진실에 대하여 접근할수록 점점더 광적으로 혹은 자신 스스로의 조작에 의해서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스로 메모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새로운 기억을 집어넣어서라도

재구성하려는 이러한 기억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자신의 단순한 사적 이해차원보다도 확대되어진

공적인 영역에서의 기억 조작들이 가능함과 그것이 어던식으로든

광폭함을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롤랑 죠페 감독의 [미션]에서 보여지는

남미의 선교과정에서의 개인적 욕망과 그 초월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인 성숙이라는 기억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종교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끔직한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재구성한다.

즉,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범죄들을

개인들의 희생 그리고 성숙이라는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당시의 범죄가 마치 종교적 차원이 아닌 그저 단순한 사람 즉, 개인의 미성숙에의한

철저한 개인의 잘못으로 재구성되어지면서

사람들 기억에 여전히 종교는 선한 것,

그리고 신은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식으로

영화가 끝나고 남는 기억을

사람은 없어지고 신과 종교만이 남도록 재구성한다.

 

 

이와 유사한 영화가 난 플래툰으로 본다.

언제나 이러한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대중적 인기도 그리고 작가(?)로써의 명망도 얻으려 시도하는

전형적인 허리우드 영화의 선봉장인 올리버 스톤 감독은

미국사회 혹은 월남전과 관계된 모든 세계인들에게

철저히 사회의 집단적 기억들을 조작하여

참여한 몇몇 군인들의 잘못으로 월남전의 그 수많은 인명살상의 기억들을 몰아감으로써

독보적인 감독으로

그리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플래툰에서

전쟁은 당시 미국도 그리고 전쟁터에서 살아가야 했던 베트남사람들에게도

아무상관없는 그야말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문제로

그리고 그들의 미성숙과 광기로 인한 문제로 취부되는 듯하다.

 

즉,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신이 참여했던 그 광기어린 시대의 아픈 기억들

스스로의 자괴감에 빠져들게하는 범죄 방조자로서의 자각들을 버리고

갑자기 성숙한 정신적 문제에 골몰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사회집단적 기억의 재구성으로 한발 나아간다.

 

이런 사회전체의 집단적 기억의 재조작은

결국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알량한 사적 이익에 기반한

그 수많은 인류애적 범죄들을 오히려 앞서서 실천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는 최근 일본에서의 전쟁범죄가 희석화되고 재구성되고

결국 똑같은 일들의 반복가능성까지 내비치는 일본 사회를 보면

이런 기억의 조작들이 왜 사회전체에 집단적으로 진행되었을때의

광폭함이 두려운지 알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들을 할까 ?

 

영화속에서 보면

로베르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처럼

전쟁이라는 그리고 전쟁상황속에서의 수용소라는 막다른 골목에서조차도

자식에게는 전혀 다른 인생의 아름다운 기억들만을 물려주려 노력하는

눈물겨운(?) 노력들을 볼 수 있다.

 

그 아들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과연 어떠한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갈까 ?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간 그 수용소를 떠올릴때마다

과연 무슨 생각들 무슨 의미들을 찾을 수 있을까 ?

 

아마도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전쟁의 고아기속에서도 보여지는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까 ?

 

이러한 기억의 조작 혹은 재구성 아니면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어른들에 의한 기억의 간섭적 조작들은

실은 어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들 혹은 기억들을 방해하고

자신들의 가치관 즉, 기성사회의 가치관에 맞는 그러한 사실들로 재 조직된 기억들은

실은 사실을 은폐하고 훨씬더 작은 단위의 개인 기억들로 파편화시키는 경향은 아닐까 ?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아임 낫 스퀘어드]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악이 넘치는 어른세계와는 다르게 순수한 동심의 우정을 그렸다고 보기엔

왠지 찜찜한 영화이다.

차라리

어린 아이들마저

자신의 어린시절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몸부림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

 

누구나 보아도 알수있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

심지어는 모든 마을사람들이

인신매매범인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동심의 순수한 눈으로 보이던

마을사람들과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지키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안타가운 아이의 몸부림이 아닐까 ?

 

 

이런 몸부림에 솔직히 우리들

소위 진보적이고 운동권적인(?) 사람들마저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

 

모든 운동권 선배들이 어저면 그렇게 똑같이

추억속의 기억속의 운동들은 그렇게 열정적이고

심신을 다해 활동했다고 이야기 할까 ?

 

최근에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체 게바라의 영화를 보면서

왠지 어줍잖이 향수에 젖어드는

아 ! 나도 한때는 저런 열정과 저런 사회에 대한 인식들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의 생각들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아닐지 ......!!

 

나 스스로도

이러한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정당화의 한 방편적인 자기 기억 조작의 길에

접어든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내가 스스로 그런 자기 합리화 자기 미화의 길에 젖어들었다면

차라리 씨네마 천국의 주인공처럼

그저 세월에 짤린

무수한 조각난 필름들을 감상하며 눈물 흘리기 보단

오늘부터 쌓이게 되는 나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나의 미래, 지향하는 바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과거에 대한 편리이라면

이제부터의 기억은 차라리 내 삶에 대한 능동적인 개입이 되기를 바란다는 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