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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기억속에서 길을 잃다.(1)

  • 등록일
    2005/03/06 07:31
  • 수정일
    2005/03/06 07:31

영화를 좋아한다.

왠만한 영화는 닥치는대로 보는 편이다.

물론 돈없고 시간없고 뭐 이런 저런 영향으로

남이 보여주는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다 비디오로 보는 편이지만 말이다.

 

이런 나에게도

몇몇 영화는

바보 짓같지만 충동적으로 소장용 DVD를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 가타카, 뭐 이런 것들이고

매트릭스는 아직도 돈이 생기길 바라고 바라는 형편에 있다.

 

아 ! 물론 DVD를 우리 집에서는 볼 수가 없지만 말이다.....헤헤

 

그래서 주로 가지고 있다고

과감히 눈물을 머금고 친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지만 말이다.....헤헤

 

그중에서도

언제나 영화를 추천하면 꼭 들어가는 것이 [블레이드 러너]다

 

 


 

리들리 스콧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의 1982년 작품으로

뭐 내용은 다 아시다 시피 지구로 몰래 숨어들어 온 인조인간을 처단하는

인조인간 사냥꾼 이야기다.

 

세기말의 우울한 영상속에서

흐느적거리 듯 살아가는 사람들속에서

사람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끌려 간다.

자신의 어렸을때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해 술로 괴로워하는 사냥꾼과

가지지 못한 기억이라는 것을 찾아 영생하고픈 인조인간들........!

 

나 이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아 ! 과연 인간이 살아가고 본재하는 것에서 우리가 간직한 기억이라는 것이주는

힘이랄까 아니면 존재 방식이랄까  뭐 이런 것들에 항상 전율하는 편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인간인지 혹은 인간이 아닌지를 판별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한 추억이 있는지 없는 지로 판별한다는 것......!

 

이;런 기억의 방식에 의한 현실의 저당잡힘이 어쩌면

집단적인 히스테리들 가령 민족분쟁들이나 인종청소...이런 것들의 태동의

기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의 존재 내지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에서

꼭 보아야 할 영화중에 몇몇은 온전히 이런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기억 혹은 추억에서 찾는 영화가 많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영화인 공각기동대를 보아도

영화내내 여전히 인간의 실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결국 추억 혹은 갖지 못한 기억들에 대하여

그런 기억의 상실과 그로 인한 실존의 문제처럼 보이는 다양한 장치들

그 속에서 헤어나려 몸부림치는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떨림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이제가지의 삶에 대한 것들

어쩌면 기억이라는 추억이라는

자신의 삶의 공간들을 시공간적으로 매꾸어주는 이런 부산물들이

자신의 삶의 주요 존재방식으로 전이될때

사람은 상실감 혹은 극단적인 히스테리, 혹은 집착에 얽매이는 것이 아닐런지....!!

 

솔직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어쩌면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에 혹은 추억들에 대한 향수와

그런 것들을 자신의 삶의 기반으로 삼는 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이미 공허함이나 슬픔 심지어는 아품들을

그 기반으로 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옛날 주말의 영화에서 참 재미없게 보았다가

한참 지나서 다시 보고서 아 ! 하던 영화가 있다.

누구나 다 아시는 그 영화 !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다.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기차타고 고생하며 남편을 찾아가지만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살아가고

이에 쓸쓸히 혼자 돌아온다는 애절한(?) 영화다.

이 영화가 더욱더 애절한 것은

여주인공이 지난 과거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 비극성이 증대되고

확연히 그 추억들과 이별할때 폭발하게 된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거를 자양분으로 버티는 듯 살아가는 여인과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 대다수는 이렇게 스스로 집착하는 경향으로 인한

극단적인 상실감의 공유로 인해 영화가 끝날때쯤 우리 어머니 처럼

눈에서 눈물 몇방울 뚝뚝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기억 혹은 과거의 추억과 이별하는 경험을 하게되고

이런 이별의 감정들을 삶의 기반에 깔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그걸 극복하든 거기에 연연하든지 말이다.

 

최근엔

영화 자체가 허리우드식 아니면

보기 힘든 것처럼

미국의 힘에의한 기억들이 많아진다.

 

과거 영화들처럼

기억 혹은 추억이 사람에게 어떤 것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요즘 말로하면 좀 머리아픈 것들을 주제로 했다면

보편화된 허리우드 방식에서는

철저히 게임이나 놀이처럼 이런 기억 혹은 추억들을 가지고 노는 경향이다.

 

아 ! 그럼에도 이런 인간에게 있어서의 기억과 추억의 중요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매트릭스에서 보면

사람들의 신체에너지를 이용하여 살아남는 기계들이

이런 자신들의 일종의 에너지 원인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기억 혹은 추억에 대한 조작이다.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 혹은 가상현실에서

다양한 삶들을 추억으로 제공함으로써 인간들은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고

몇몇 선각자(?) 이외에는 실제 그런 가상이지만

기억이나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허리우드 식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끔직함은

그들의 자신감처럼

언제든지 이런 기억과 추억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들을 언제나 그들의 힘의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끔직함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기억이니 추억과 같이

과거의 기억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

 

이제 술먹을때 군대이야기하고 옛날 학교 이야기하는

이런 쓸데없는 짓을 관둬야 겠다.

혹시 아나

 

나 스스로도 이미 과거에 사는 사람일지................!!

 

아니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느 지점에서 헤매고 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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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을 보다....[한국유학사상사]를 읽고

  • 등록일
    2005/03/06 06:29
  • 수정일
    2005/03/06 06:29

 

한때

심심할때마다

이 책 저 책 마구 읽었던 적이 있었다.

 

남이 뭐라든

맑스도 읽고 푸코도 읽고 데리다, 네그리, 그람시....

퇴계, 율곡, 남명, 기대승도 읽고.......

추리소설, 무협지, 만화도 읽고.......

토지, 태백산맥, 아리랑, 임꺽정, 장길산도 읽고...... 

 

이렇게 읽고도

뭐하나 아는 것 없어

묵묵히 술만 마실때도 있었다.

 

뭐 그렇다고 지금 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이런식의 책읽기에 질려갈 때쯤

손에 잡힌 것이 이 책이었다.

그땐 이것보다도 약간 두깨가 앒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증보판이라 좀 더 내용이 채워진 것 같다.

 

윤사순 교수가 쓴 [한국유학사상론].........!!

 

실제로

우리가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심성론이니

뭐 이런 것들을 주변에서 쉽게 접하지도 못할뿐만 아니라

한창 영어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시기에

뒤늦게 한자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해하기 힘든 이런 책을 붙들고

며칠을 끙끙 앓다보면

잡생각 사라지게 하고 잠 많이 자게 만들어 주는데는 딱이다....헤헤헤

 

뭐 읽다보면

무슨 수가 생긴다고

며칠동안 읽고 또 읽다보니

그럭저럭

뭔 말인지는 아는 정도가 되었고

그런 초보적인 지식으로 그 후에

여러 지역의 한옥이니 문화재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많은 도움도 되었던 것 같다.

그러기를 몇년...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다.

 

순전히 심심해서

책장에 꽂혀 있은지 몇년되는 책을 끄집어 내어

술먹은 정신에 쳐다보고 있자니

술기운인듯 예전보다는 읽는 것이 한결 편해지고

읽는 속도도 그럭 저럭 소설책 읽는 정도는 되는 듯하니

그 사이 나도 모르게 옛 것에 대한 이해가

제법 도통한 듯하여 히죽거리며 웃었다.

 

뭐 !! 어떠랴

지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아는 만큼의 이해정도에서

나 정도면 도통했다 말한들.....남이 알리도 없고 말이다.

 

솔직히

여전히 한문에는 잼병인 수준이고

현실에 대한 이해도 그냥 그런 정도인데

이렇게 제법 알아듣고 이해하는 정도가 나아진 것은

아마도 역사, 혹은 세상에 대해서 바라보는 몇가지 원칙들이

바뀌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맑스가 준 절대적인 영향때문인지

혹은 내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워낙 강성(?)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몇 년째 특별한 변화등을 겪지 못해 답답한 상황들에

억눌려서 그런지

역사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뀐 것같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떨치려했던

어떤 조건이나 과정에 대한 집착과 법칙화 혹은 결정론적 시각을

최근들어 거의 하지 않게 된 탓이 많은 듯 하다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것중에

역사를 역사적 사실들의 재발견으로 보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발생과 진행 과정 즉 역사법칙에 의한 과정으로만 인식하다보니

전반적으로 현실에서 괴리된

그야말로 역사적 법칙과 과정을 위한 역사만이 남은 것

이런 결정론적 시각이 확대되어 폭력과 전체주의와 같은 극한의 상황이 나타난 다는 지적.

이런 무정치적 상황의 연속이 현대사회라는 것......!!

 

뭐 솔직히 전적으로 한나 아렌트에게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사실에 대한 접근 시각과 방식은

어느정도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다만 적절히 표현하지 못했을 뿐.........!

 

노동자들의 책무니

원시공산제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까지를

그리고 다양한 반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들속에서

최근 나 스스로도

그런 결정적인 어떤 조건과 과정의 국면, 책무등

이런 것들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많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된 고민들의 정리가 없어서

어떤 식으로의 결정을 유보한 채 이런 저런 고민들많이 진행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런 생각에서 읽게된 한국유학사상론이라는 책은

오랫만에 다시 만난 잼나는 친구였다.

 

그덕에 연달아서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다.

 

조광조와 사도세자와 영정조 시대 사상들, 율곡학파 등......!!

 

아 무엇 보다도 격몽요결을 다시 읽은 것은 진짜로 행복했는데....?

헤헤헤

 

다음에 시간되면 이런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 것들을 적어볼 생각이다....아 ! 물론 기대하진 마시길.....!!

 

강건하시길....다들.......밖이 좀 추워졌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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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변했을까 - 손곡(蓀谷) 이달 [李達] 시집을 읽고

  • 등록일
    2005/03/06 05:56
  • 수정일
    2005/03/06 05:56

손곡(蓀谷) 이달 [李達] 시집을 샀다.

그리고 읽었다.

좋았다.

 

아니......?.....실은 좀 어려웠지만 좋았다.

 

한시를 읽는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워낙 한자에 강점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누군가의 번역본으로 그 시인의 정취를 느껴야만 하고

특히 손곡(蓀谷) 이달 [李達]처럼 슬프고 감성적인 애달픈 시들을 주로 쓴 사람의 시는

한자를 보고 나 스스로  번역해 읽지 않는 한은

전적으로 번역한 사람의 감흥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아 ! 물론 영시나 뭐 이런 것들도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영어로 된 시의 번역본에 비해

한시의 번역본이 그 시적 감흥에서 훨씬 그 격이 떨어지는 듯 하다.

아마도 한학자들의 시적 감흥이 여전히

시인으로서의 감흥보다는 학자로서의 감흥이 강해서가 아닐런지......!!

 

뭐 여하튼

그런 저런 사정들을 감안하고 나서도 이 시집은 좋았다.

 

 습수요 []

 

田間拾穗村童語(전간습수촌동어)

盡日東西不滿筐(진일동서불만광)

今歲刈禾人亦巧(금세예화인역교)

盡收遺穗上官倉(진수유수상관창)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의 말이

하루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찬다네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서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

 

좋지 않나 ?....헤헤헤

 

실은 이 시를 읽으면서 거의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이리 적절한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지면

어쩌면 사람의 인정 또한 줄어 들듯이

그나마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주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세상이 힘들어지면 그 논의 일꾼들은 더더욱 깨끗이 추수하여

이삭한톨 남기지 않는 다는 것....

그 남김없는 이삭 한 톨은 가난한 사람의 수중에서 빼앗아

가진 사람들 혹은 그런 권력들에게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그런 일들은 누구보다도 사정을 잘아는 일꾼들에 자행된다는 것.

 

..................!!........

 

최근 비정규직일들

그리고 민주노총 일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그 수없이 외쳐대는 민주노조, 노동해방...뭐 이런 구호들이

과연 그들 실제의 삶속에서 얼마나 구현될까 하는 생각들.........

 

최근들어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다 보면

오히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적어도 이삭 한톨 흘려주는 사람의 인정마저 없어진

그야말로 황폐해진 세상을 볼수가 있다.

 

뭐 나도 이달처럼 시대에 화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들을 살고 있지만 말이다.

 

다만 이달은

이런 세상을 떠돌며 시를 썼지만

난 이런 세상 신나게 욕이나 하면 술을 마신다는 것

 

아마도 이달에 비하여 한참이나 격이 떨어지는

그야말로

세상의 부유물이 아닐까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손곡 이달만큼의 시나 시대적 아품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이런 것들에 대한

초월적 감성들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상에 빌어먹고

세상에 널린 술을 좋아해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것은  닮아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헤헤헤

 

혼자 술이라도 한잔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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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지랄입니다.

  • 등록일
    2005/02/25 15:12
  • 수정일
    2005/02/25 15:12

* 이 글은 NeoScrum님의 [게바라는 니네 상품이 아니라니깐!!] 에 관련된 글입니다.

진짜로 지랄입니다.

아마도 돈 지랄하는 모양입니다.

 

진짜로 누구 쿠바에 아는 사람 있으면

아니면 게바라의 딸 한테라도 연락해서

소송걸도록 해야겠습니다.

 

어떻게 된 세상이

갈수록 돈을 위해서 모든 것들을 다 버리려고 하나 봅니다.

 

에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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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옛집기행(2)

  • 등록일
    2005/02/25 07:54
  • 수정일
    2005/02/25 07:54

칠성을 뒤로 하고 쌍곡 계곡을 거쳐

화양동으로 해서 청천으로 나아갔다.

 

원래는 중간에 화양계곡에서

만동묘며 암서재며 여하튼 우암 송시열 관련 유적을 볼까도 했는데

내가 워낙 송시열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입장료 핑계 시간 핑계대며 그냥 지나쳤다.

 

그리곤 곧바로 청전으로 갔다.

 


청천은 매우 작은 면소재지다.

 

소재지를 통과하는데 차로 2분도 채 안걸리는

그야말로 지천에 널려있는 그 작디작은 마을이다.

속리산 화양계곡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는 무리없어 보이지만

살기 힘든 사람들의 속내야 나같은 떠돌이가 알 수 없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 곳에서도

참 힘들겠구나 하는 전국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균적인 삶이

언듯 보인 것은

청천 시장에서 벌어지는 이 공사를 보면서다.

 

이젠 전국 어느 시장을 가도 다 이 모양으로 바뀔 모양이다.

아마 재래시장이 망해가는 것을 막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처럼

다들 시장마다 이런 시설물로 다 바꾸는 모양이다.


청천에도 옛날집이 있다.

 

여기서 잠깐 퀴즈.....??

 

위 사진에서 문화재 이름은 ?????

헤헤헤 충북 양로원이다.

 

그럭저럭 때려 맞춰도 갈색 이정표면 문화재 아니겠나 싶다.

이 이정표를 보고 골목으로 쭉 따라 들어가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나온다

양로원 건물이냐구 ?? 글쎄...그것이.....헤헤헤

 

 

이 골목 정면으로 보이는 기와지붕위로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물이 중요민속자료이다.

 

 

 

이 건물은 조선말 충청가사를 지낸 송시현의 별당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44년 충북양로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문화재 이름이 충북양로원이 되었단다.

지금도 이 건물은 옆의 새로 지은 충북양로원 건물의 마당에 위치해 있다.

 

난 가끔 이런 것을 보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대개의 문화재 특히

가옥의 경우는 현 소유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동방오현 중 한 명이라는 일두 정여창 고택도

문화재 명은 정경호 가옥이란다.

이유는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소유자 이름이 정경호씨라서 그런단다.

이 얼마나 웃긴 말이냐

누구 말대로 가옥 소유주가 청주시면 문화재 명도 청주시가 되는 거란다.

중요민속자료 청주시....우하하하...웃기지 않나 ?

 

송시현이라는 사람이 지었으면 차라리 송시현 가옥이라고 하지

충북양로원이라고 하니 누가 한옥집인 줄 알고 찾아 오겠는가 ?

참 한심한 공무원 편의주의다.

 

여하튼 각설하고

이 건물은 사랑채 안채가 옆으로 병렬식으로 지어진 것 같다.

지은지 100여년 정도 되었고

최근까지 사람이 살아서 그런지 관리는 매우 잘된 편이다.

건물은 민도리집에 ㄷ자형 집인데

골추녀를 쓰지 않고 서까래를 그냥 겹친 방식으로 지었는데

충청도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오히려 강원도 강릉이나 고성 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의 집이다.

솔직히 골추녀를 쓰지 않은 곳은 그곳 이외에

거의 본적이 없기도 하다.



 

 

이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서

한옥이 가지는 중첩의 이미지 즉, 아늑하고 정돈된 느낌보다

왠지 개별적이고 횡한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곳이다.

뭐랄까 .......좀 사람의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

 



 


 

그래도 좋았던 것은

안채 마당에 늘어진 이 장독대였다.

아마도 양로원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사용되는

장독일 것 같은데 이렇게 쳐다보니 나름대로 정겹기는 했다.

 

이 건물들은 건물 개개별로는 잘 지어진 건물이다.

 

 

특히 위 사진처럼

추녀 서까래의 곡선이

최근 청원군이나 괴산군에서 본 것 중에서는 제일이지 않나 싶게

운취가 있었다.

 

서둘러서 충북양로원을 구경하고

(?? 거봐...도대채 문화재명이 양로원이니 글을 써도 뭔가 이상하지 않나....에구구)

청주로 오려다가 우연찮게 하나 더 보았다.

급하게 사진만 찍고 제대로 보진 않았는데

그건 우암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한옥집이었다.

 

 

저 길로 올라가면 묘소가 나온단다.

뭐 송시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굳이올라갈 이유를 못찾아 이렇게 묘소 입구에서 사진한장 찍는 것으로 끝냈다.

 

 

송시열 신도비가 있는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송시열의 신도비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때면

눈물인가 핏물인가 뭐 여하튼 그런 것을 흘린단다.

아마도 송시열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신도비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거란다.

난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가 무슨......?....헤헤헤

 

난 솔직히 송시열은 성리학자로서나 조선의 정치가로서나

전혀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단지 처세에 능하고 편협하고 자기당파의 이익이외에 거들떠도 보지 않은

그야말로 한국사 최고의 불한당이라 생각한다.

 

오직 송나라 주희만을 유일무이한 스승으로 받든 철저한 사대주의자고

주자와 다르게 성리학 사상을 전개했다하여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죽이고...

 

특히 윤휴가 죽으면서

나와 사상이 다르면 관리로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에도

눈하나 깜짝안하고 죽인 그가

관리도 아니면서 병자호란중에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사람보고

관리이면서도 자신은 남한산성 임금 품안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싸워보지도 않은 사람이

포로로 잡혔던 윤선거를 비겁자겸 군자가 아닌 졸장부라 욕하던 사람이

무슨 죽어서까지 국가를 걱정했겠는가

아마도

죽어서까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거짓 눈물을 흘리는 듯하여 더 짜증이 났다.

 

여하튼 괴산군 청전면은 그야말로 송시열의 고장이다.

송시열관련 유적지가 있고

묘소가 있고

신도비가 있고........

 

그런 송시열을 뒤로하며

담배를 입에물고 추운 옷깃을 여미며 부리나케 청주로 향했다.

어두워지기전에 돌아올 요량으로.........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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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옛집기행(1)

  • 등록일
    2005/02/25 07:09
  • 수정일
    2005/02/25 07:09

드디어 갔다.

 

멀지도 않고

맨날 근처를 지나다니면서도

멍하니 벽돌공장 굴뚝만 쳐다보다가

오랫만에 찾아온 겨울날의 봄날씨속에

근질대는 몸뚱아릴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거의 떼쓰다시피 해서 다녀 왔다.

 

괴산군이다....^^...

 

청주에서 증평을 거쳐

새로 뚤린 4차선 도로를 따라 휭하니 달리면 괴산이다.

새로난 길을 가다보면

괴산읍내를 거치지 않아 좋긴 하지만

가는 길 언저리에 눈이 선한 홍명희 생가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쉬웠다.

 

다만 함께 간 친구의

작은 아버지(?)가 홍명희 생가 옆 한옥집에서

몇년 살았었다는 (에구구)

별루 도움 안되는 이야기로 대신하며 내쳐 달려 도착한 곳이 칠성이다.

 

 

 

괴산군 칠성면이다.

난 언제나 칠성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 벽돌공장 굴뚝이다.

멀리서도 한눈에

우뚝 솟은 것이 확연히 돋보이는 이 굴뚝만 쳐다보며

칠성을 지나친 것이 몇해나 된다.

 

지나가던 학생(? 한 고등 아니면 대학생 ???)들에게

율원리 김기응 고가를 물었더니 아마도 둔율리라 하기에

이 벽돌공장 이 있는 마을로 찾아 갔더니

아무리 돌아봐도 김기응 고가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김참판댁이라고 하시면서 갈론계곡 방향으로 다시가야 한단다.

 

에구구

역시 문화재든 옛날 집이든

하다 못해 이웃동네 이름도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관심밖인가 보다

당당히 이 동네에 산다고 밝힌 친구들인데도

타지 사람들에게 이리 엉뚱한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을 보면.....^^;;

역시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길을 묻거나 어떤 곳을 찾을땐

우리에 일꾼 할머니들 만한 안내자가 없는 듯하다..............................헤헤

 

 

      <사진.. 괴산군청 홈피 > - 전경사진을 못 찍어 이것만 퍼옴

 

김기응 가옥이다.

1900년 전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김기응이 누구인지 기록해 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나 보다

그럼에도 김참판댁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지역의 대지주 거부였을 것 같다.

어느 동네나 딱히 불를 이름 없으면 부르는 것이 참판댁이니 말이다.

 

 

한 100여년 정도된 한옥집이라서 그런지

벽체나 건축양식들이 많이 화려하고

또한 다른 고가처럼 옛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특히 충청도 양식이라 불리는 이 지역 양식이 아니라는 것이 흥미로운 집이다.

 

구조 자체도 대문을 지나 행랑채를 지나 사랑채, 안채가

매우 독특하게 배치되어 있고

특히 집을 둘러싼 흙담이 매우 독특한  집이다.

 




 

불행이도

집이 안으로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진 못했는데

밖에서 담장 너머로 기웃기웃 거리며 보는 재미가 그런대로 잼났다.

 

집은 야트막한 소나무 동산을 배경으로 남쪽을 보며 자리잡았고

앞으로는 높은 산이 안산 혹은 조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보통 집을 지을때
사랑채의 대청에서 바라 보이는 안산 혹은 조산은

그집에 거주하는 사람의 심성을 반영한다하여

너무 높고 뾰족하거나

아니면 너무 밋밋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한 산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매일 바라보게 되는 앞산이

너무 뾰족하면 그 사람의 심성이 흉폭하게 되고

너무 밋밋하면

그사람이 우유부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높으면서도 모나지 않은 산을 선택하는 데

이집은 매우 높고 뾰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이런 집 터를 고르는 안목도

기우는 조선의 국운 만큼이나 잊혀져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런 집터 선정방식이 고리타분할 수 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요즘 아파트를 지을 때도 조망권 이야기가 있듯이

교육환경을 이야기 할때 누누이 거론되는

아이들의 시각적 중요성 이야기와 상통하지 않을까 한다.

 

즉 삭막한 아파트만 쳐다보고 자란 아이들이

삭막해 진다는 이야기다.....헤헤헤

 


앞산이 지붕을 닮은 듯하여 찍어 보았다.

 

참고로

이 김기응 가옥이 있는 마을은 칠성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칠성댐은 정식 명칭이 괴산댐 혹은 괴산 수력발전소인데

우리나라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댐이란다.

50년대에 만들었대나....?..하여튼 오래된 댐이다.

 

근데 잼나는 것은

이 댐이 생기기 전에 이미 댐이 생길걸 사람들은 알았단다.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이 노수신이 기거하던 곳을 찾아

풍류를 즐기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곳은 산이 막혀 강이 될거라고 예언하고는

자신은 속리산 화양계곡에다가 거처를 정했다는 거다...

거참 ..용하기도 하다 ???...헤헤헤

아 그리고 댐이 들어선 마을중에

두천리가 있는데

그 마을 이름이 막을 두(杜),  내 천(川) 두천리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댐이 들어설 당시에

감탄했단다.

그들도 왜 마을 이름이 이렇게 생겼는지 몰랐는데

아하 !!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내를 막았으니 두천리요 곧 댐이라는 거다.

그러니 앞으로 이름도 잘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헤헤헤

 

솔직히 김기응가옥은 닫혀 있는 관계로 참 아쉽다는 생각을 해서

담에 꼭 한번 다시 찾아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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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침에 이리 일찍 깼을까 ?

  • 등록일
    2005/02/21 07:42
  • 수정일
    2005/02/21 07:42

오늘은 아침 일찍 깼다.

아마도 어제 먹은 술이 넘 부족했던지

아님 오늘 무언가 무척 바쁜일이 있던지.....

 

한데 막상 넘 일찍 일어나니

할일이 없고

이렇게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주엔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생길런지....크크크

 

좀 정신좀 챙겨서 살아봐야 겠다.

 

아자아자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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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기운이 있나 ? ?

  • 등록일
    2005/02/14 18:06
  • 수정일
    2005/02/14 18:06

감기기운이 있나보다.

 

코가 간질간질하고

어깨가 으실으실한 것이

뜨거운 거실바닥에 한참을 녹여 보아도

영 신통치가 않다.......;;^^;;

 

 

집에 돌아오는 좌석버스 안에서 한장 찍었다.

 

원래는 850원하는 시내버스 타고 오려다가

영 몸이 으실으실한 것이 기분이 안좋아져서

무려 1300원하는 좌석버스를 탔다.

 

실은 볼일 다 보고 바로 집으로 바로 돌아왔으면 괜찮은 것을

시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나의 놀이터인 서점에도 들르고 하는 동안 몸이 대간했나 보다

 

 

 

일선문고다

 

원래는 성안길 북쪽입구 쪽에 있었는데

돈을 많이 벌었는지

성안길 남쪽 입구쪽에 이렇게 버젓한 4층 건물을 올리고 이사왔다.

 

뭐 그럭저럭 청주 시내에서 가장크지 않나 싶다.

 

하두 일선문고를 들락거렸더니

일선문고 책진열방식에 익숙해져서

다른 서점에가면 책 찾아서 읽는게 좀 짜증이 난다.

 

일선문고는

출판사이름의  가나다 순으로 정리가 되있는데

그럭저럭 책들이 많은 편이다.(청주에서는....헤헤)

 

아마 이 서점에서 산 책만

000권은 될 거다.

 

뭐 세어 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처음에 이 사진을 찍어 올때만 해도 이런 저런 이야길 늘어 놓아볼까 ? 하는 생각이었는데

몸이 노곤한 것이 쉬어야 겠다.

 

다음에 마음이 동하면 그때 이런저런 수다나 떨던지 해야지....^^;

 

다들 건강 조심하시길......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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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그리고 아픔2....(청원군 옛집기행3)

  • 등록일
    2005/02/13 23:15
  • 수정일
    2005/02/13 23:15

다음으로 들른 곳이 낭성면 호정리다

가덕면에서 미원쪽으로 가다가 낭성 혹은 상당산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낭성면소재비 바로 못미쳐 이정표가 나오고 한 500미터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호정리다

 

이곳엔 과필헌 고가라는 옛집이 있는데

솔직히 좀 쪽팔리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난 이곳이 과필헌이라는 사람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옆자리의 형님이 "아니 '과'씨라는 성도 있어 ?"

라고 물을때

"그런가봐여...!!" 했다.

근데 알고 보니 과필헌은 호이고 이름은 신후라는 사람의 집이란다.

에구구 쪽팔려.....?...헤헤헤

 

이 곳 호정리를 오기전에 한 음식점이 있는데

그 곳 근처에도 한국전쟁당시의 민간인 학살지가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충북 대책위에 참여하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 중에 경상대 교수이신 신경득 선생님이 계시다.

이분도 아버님이 국민보도연맹가입혐의로 학살되셨는데

아마 이곳일 거라고 생각되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2번인가 청주에서 가까운 곳의 민간인학살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곳에서 제수용품을 준비해서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적이 있는데

신경득 선생님이 이 곳에서 갑자기 울먹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신경득 선생님은

시력이 나빠 이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실 정도다

그런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기위해

아니 한을 풀지 못할망정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라도 알고 싶어

평생을 노력하신 모습을 보면서

당시 함께간 사람들이 숙연해졌던 것인 눈에 선하다.

 

이런 학살지를 지나서 처음으로 나오는 동네가 호정리다.

 

과필헌 고가는 앞의 두 곳보다 그 관리나 보존 상태가 가장 잘된 곳이다.

비록 사랑채가 한번 불이나서 나무 부재들이 시커머케 그름에 그을려 있기 했지만

멀리서 한눈에 보기에도 버젓한 모습이

한옥이 가지는 호젓함과 위용이 자연스럽소 옛스러운 집이다.

지금은 안채나 사랑채엔 사함이 살지않고 건너채에만 사람이 기거하는 듯했다.

 

가장 전형적인 민도리집으로

아마 청원군 지역의 대표적인 민가집이 아닐런지 싶다.

 

 


  <사랑채 모습>

 

집을 짓는대 쓰인 나무 부재들이 큼직큼직한 것이 이집을 지을 당시의 경제적인 부가

상당했으리라 생각이 돤다.

 

아마 근처의 귀래리 신채호 사당과 귀래리 한옥촌(한옥촌이라기에는 왠지 좀 그런 동네다)과

더불어 보면 옛 스러움의 감동을 쉽게 느낄 수 있지 않을 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3시간 정도의 여행이 아닌 소풍을 다녀왔다.

좀 따스한 겨울날 일요일 오후

한적하니 짧은 시간에

휑하니 돌아본 이런 저런 옛집들과

그집 들이 디딛고 서있는 땅에 서린 사람들의 아품과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나른하니 좋았던것 같다.

 

함께 했던 좋아하는 형님과 충현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언제나 오롯이 서있는 그 마을들의 그 아품들이

올올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듯해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다들 시간 있으시면

주변의 많은 사연들에 관심 있으시길.....^^!

 

 

   < 안채의 날개채 맞배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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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그 만큼의 사연들...(청원 옛집기행-2)

  • 등록일
    2005/02/13 21:08
  • 수정일
    2005/02/13 21:08

다음에 들른 곳은 이웃해 있는

고은리에서 차타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가덕면 인차리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원래는 인차리의 신형호 가옥과

구봉영당(?)인가 해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당이 있다는 곳으로 갈려고 했는데

마침 근처 동네인 계산리 5층석탑부터 보게 되었다.

 

보물 511호로 고려초기 석탑인데

절은 사라지고 오직 탑만 하나 덩그라니 남아 있는 곳이고

왠지 횅하니 사람들 떠난 서글픔만 잔뜩 담고 있는 쓸쓸한 석탑이다.

 

 

뭐 여기저기 금가고 깨지고 파이고

꼭 이동네를 닮은 탑이다.

 

이 동네가 지금 딱 그런 모습이거든

근처에 천주교 신자들의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고

청주근교라는 이유로 근처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는

뭐 하여튼 쓸쓸한 그런 시골도 도시도 아닌 그런 곳이다.

 

뭐 여하튼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곳은 이 정도만 보고

옛집으로 향했다.

 

신형호 고가는

새로 단장된 문화재 알림판에 비해 왠지 좀 안스러운 아니 왠지 초라한 옛집이다.

조선말기 고종 18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엔 집안의 많은 부처럼

안채에 사랑채에 건너채에 행랑채까지 딸린 큰 살림집이었단다.

 

하지만 일제시대 초기

당시 집주인이었던 신장식이라는 사람이

의병들을 집에 재우고 그들의 모임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이 불살라 버려

어렵사리 지금같이 안채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집이 되어 버렸단다.

 

이 집은 신형호 선생이라는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생가로 더 알려져 있는데

혹시들 아시나 ?

 

헤헤 물론 저도 모르지요.

뭐 여하튼 신형호 선생님이 독립운동가라니 그렇게 알뿐

더 자세히 알진 못한다. 이 모두가 이 무식한 놈의 짧은 지식때문이니

다들 너그러이 이해하시길....헤헤헤

 

참고로 이동네 주변인 

가덕면, 미원면, 낭성면 일대는 고령 신씨 들이 많이 산다.

그 유명한 그래서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신채호 선생님도

이 고장의 그 무수한 신씨들 중의 한명이었으니  

이 신씨들의 자긍심과 애국애족정신은 익히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헤헤헤

 

솔직히

나같은 일자무식이 무슨 애국애족을 알겠는가 ?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나의 자랑스런(?) 인생에서

이 곳 고령 신씨들 중 한 분과 매우 친하다는 개인적인 연분 정도가 있다고나 할까 ?

 

달우 아저씨라고

미원면에서 닭을 키우시는데

농민회 일도 열심히 하시고

민주노동당 일도 열심이 하시는 그야말로 열성분자(?)이신데

지금처럼 이름날리기 전의 민주노동당 충북도당을 맡아서

몇년동안 고생고생하셨던 분이다 .

이분은 시골분 답지 않게 또한 산악자전거의 대가이시기도 하다....??...헤헤

 

한번은 내가 속한 단체에서

미원근처의 폐교에서 행사를 하는데

닭을 10마린가 주셔서 다들 행복한 적도 있었고

우리가 미원면에서 대안학교 활동을 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아 그리고 지역 운동(?) 선배들 중 아저씨라 부르는 딱 두분중의 한분이다.

율동이 아저씨랑 달우 아저씨 ......!!

 

이런 훌륭한 달우 아저씨가

이 고령 신씨이니

달리 뭘 더 바랄 것인가 ???? 헤헤헤

 

신채호 선생의 후손 중 이런 훌륭하신 달우 아저씨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이 지방의 고령 신씨는 충분히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다...헤헤헤

순전히 개인적이지만...뭐 내가 이런 생각한다고

손해 볼 사람도 없고 하니

뭐 어떻겠는가 .......헤헤헤

 

 


 

 <신형호 고가 정문 >

 

고령신씨 이야기를 마저 더 하자면

이 곳 신씨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신숙주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세종때에 집현전 학자가 되어

세조를 도와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

 

그러면서도

맛이 변하기 쉬운 숙주나물과 비교되어

변절자의 대명사로 묘사되는 이가 신숙주다.

즉, 같은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이나 박팽년, 유응부 등과 같은 사육신이나

김시습으로 대표되는 생육신등과 비교당하면서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가 바로 이 곳 신씨들의 조상이다.

 

뭐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할 것은 없지만

이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집현전 학자라고 해서 다들 같은 생각들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고

필히 성삼문 등의 사육신처럼 단종에 대한 충성만이 곡 올바르다고 보지 않기때문이다.

난 솔직히 당시 사회에서 오히려 단종보다는 세조의 정치가

당시 조선사회에 더욱더 필요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기도하고

속직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도 상당부분 조선 후기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일방적인 평가가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숙주를 단순히 자신의 안위를 변절을 택했다고 보기엔

이후 그의 주요 업적으로 보이는 경국대전 편찬사업이나 기타 율령반포의 업적은

오히려 신숙주가 자신의 조선사회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확신에 찬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 때문이다.

 

뭐 뭘 모르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신숙주는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것을 사실인듯 싶다.

다만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여하튼 나의 짧은 여행은

이렇게

항일의병의 유적지 겸 한옥 옛집의 감상으로 가덕면을 떠났다.

그래서 원래는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정은 보지도 못하고

또다른 보물인 계산리 석탑으로 대신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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