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27

 

꿈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왔다.

두분다 돌아가신 분들이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에 남아있는 게 많지 않다.

할머니는 재작년 돌아가셨다.

 

아무튼 꿈에서,

할머니 댁 같은, 시골 집이었다.

할머니 집과 똑 같은 곳은 아닌데, 느낌 상 비슷했다.

마당이 있고, 마당 한 켠에 집이 있다.

시간은 깜깜한 밤이다.

먼저 할아버지가 내 품에서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뒤에 할머니가 내 품에 있었는데, 돌아가시는 과정이 어렵다.

쉽게 떠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힘들어 하셨다.

한편 나나 할머니 모두 벌거벗고 있어, 민망하다는 생각에 내 성기를 가리고 있다.

(아담같이?)

 

앞인지 뒤인지 잘 모르겠지만, 집 밖에 나갔다 왔는데,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다.

부엌에 가스 불이 여기저기 켜져있다. 식당에서 쓰는 큰 가스렌지.

바람이 막 불어와서 불이 위태롭다. 나는 불을 1개? 2개?만 남겨놓고 다 불어서 끈다.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방문이 따로 없고 창문 같은 곳을 넘어간다.

머리를 먼저 밀어넣고 방바닥으로 손을 짚는다.

옷이 걸려서 몸이 잘 안 들어간다.

 

장면이 바뀌어서,

미국이라는 것 같다.

이름은 하버드 대학이지만 짝퉁임에 틀림없다.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쓴다.

점심으로 빵을 싸와서 나눠 먹는다.

천천히, 천천히 빵을 꼭꼭 씹어먹는다.

밥을 먹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누구에게 말하고,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밥을 먹지 않고 빵이나 먹는다고 말한다.

수업을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전학생인가? 수업을 처음 들어가는 거고,

강의실을 못 찾는다.

층은 맞게 올라간 것 같은데 강의실을 못 찾아 계속 헤멘다.

 

강의실에 들어가고서, 바로인지, 장면이 또 바뀐건지,

강의실에 혼자? 혹은 매우 적은 사람이 있다.

... 그 다음 잘 생각이 안나네..

2011/04/27 09:17 2011/04/27 09:17

지나간다번역

번역에 능숙하지 않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헤메고 있다.

 

페페 에스코바의 글보다 제임스 페트라스의 글 번역이 왜 더 난감한지 생각해봤다.

 

페트라스의 글에는 그가 만든 개념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그 개념어를 번역하는 것은, 그 맥락적인 의미에 상응할 만한 한국말을 새롭게 지어내야 하는 일이다.

반면 에스코바의 글은 대개 누군가 먼저 만들어 놓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번역어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페트라스의 문장은 깔끔해서, 문맥이 막히는 곳은 많지 않은데, 단어를 고르는 게 여간 골머리다.

이를테면, clan-class 라는 말을 계속 쓰고 있는데, 난 이걸 어떤 단어로 번역해야할지 고르지 못하고 있다. 구글링을 해봐도, 페트라스가 이번 글에서 처음 사용한 듯하다. 자본주의 임노동관계의 계급이 아니라, 대물림되는 세습계급이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음..

 

시간이 여유로우니, 이렇게 하고 있지,

원....;;

2011/04/25 14:12 2011/04/25 14:12

보는거초능력자

별 기대없이, 생각없이, 멍때리면서 봤다.

 

이러저러해서 이러저러했다는 이해하겠는데,

별로 긴장감도 없고,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오로라 일색이어서 연기가 단면적이다.

 

다른 얘기로,

극중 고수가 맡은 역,

너무 싫었다.

난 저런 인간을 견딜수가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정의에 세상 모두를 복속시키는 족속들.

그/녀의 분노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에 기반하는 게 아니다.

 

영화보면서 이렇게 열폭할 것 까지는 없는데,

저런 유형의 인간은 눈에 보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러워지니..

현실에도 저런 인간은 많다.

정의의 이름으로 리비아를 침공하고 있는 군대도 떠오르고.

 

차라리 강동원이 맡은 역이 '인간적'이다.

2011/04/16 09:45 2011/04/16 09:45

지나간다2011/04/14

열심히 글 번역하고 있었는데..

잘 모르겠는 문맥들을 찾다보니,

헉, 이미 누가 번역을 해놓았다.

ㅠㅜ

그래도 꿋꿋이 번역했다.

다 하고 나서 컨닝해봤더니, 내거 오역 투성이..

ㅠㅜ

조용히 뜯어 고쳤다.

 

나 번역한거

http://arab.jinbo.net/node/403

 

다른 분이 번역한거

http://blog.naver.com/saranmul/20125538081

 

2011/04/14 23:08 2011/04/14 23:08

지나간다2011/04/10

내가 사는 곳은 밤이 되면 가로등 때문에, 주황빛 거리가 된다. 영락없이 빛바랜 사진이다. 여기서 몇발짝만 벗어나면 총천연색의 간판들이 번쩍거린다. 나를 갉아 달라고, 나를 핥아달라고, 애잔한 외침들. 종내는 빛바랜 퇴물이 되기위해 소모하고 있다.

2011/04/10 22:17 2011/04/10 22:17

지나간다쉬기

쉬는 방법을,

영 다 잊어버렸다.

 

시간이 남아도,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한동안 시간이 안 남을 땐, 드라마 안 보고 살았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뭔가 여유부리며 살 때도 드라마는 안 봤었다.

그런데 요즘 시간이 남으니, 드라마를 본다.

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보는 거, 별로 유쾌하지 않아. ㅠ

보고 나면 찜찜하다.

 

대체 어떻게 쉬어야지?

뭘 하면서 놀아야지??

음..

예전엔 그냥 풀숲에 눕는 것 만으로도 시간을 잘 보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시간이 남는 것 만으로도 불안감이 몰려온다.

어쩌다, 인간이 이 모냥이 됐나..ㅠ

 

게으른 것과 여유있는 건 거의 반대편에 있는 말이고,

난 지금 어지간히 게으르다.

뭔가 해볼 마음이 생겼다가도, 귀찮아서 내던지고.

몸을 안 움직인다. 피곤하기도 하고.

안 움직이니까, 더 피곤해지는 거 같다.

안 보던 드라마나 보고 있고.

이러다 1박2일이니 무한도전이니 이런 것 까지 보게되는 거 아니냐는 두려움이 물씬.

 

 

어쨋든, 우연히 첫화를 보게 돼서 그냥 보고 있는 49일.

어쩜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인간과 사건의 나열이래니.

그걸 꼬박꼬박 보고 있는 난 또 뭐고. ㅠ

계속 보게 되는 건, 거기 나오는 판타지들을 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 한데,

손발 오그라드는 그 판타지들에서, 좀 자유로워져야 삶이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게으름 말고 여유를.

게으를 바에야 차라리 일을.

아. 일중독.

2011/04/06 23:42 2011/04/06 23:42

지나간다온 몸이 찌뿌둥

쑤시는 곳을 꼬집을 순 없지만,

온 몸이 축 묵직하다. 늘어진다. 말랑거린다. 녹아내린다.

 

농성장에서의 하룻밤이 이렇게 힘들었나?

늙어가는 게지..

 

요즘은, 하루하루가 곤욕이다.

일을 해야하는데, 일이 안주어지는 상황도 깝깝하구나..

 

명함은 민망할 따름..

2011/04/04 10:57 2011/04/04 10:57

보는거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소식지에 실으려고 쓴 글..;;

 

 

 

영화에서 김복남은 섬에 고립된 여성이다. 섬사람 모두는 한편이 되어 잔인하리만치 김복남을 핍박한다. 그리고 이들은 김복남이 겪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다. 김복남은 섬 바깥에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했다.
얼핏보면 이 영화는 그렇게 당해온 김복남의 복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얽혀있는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 섬에 쉬러온 복남의 친구 해원은 모든 상황을 보고서도 끼어들지 않는다. 해원에게 복남은 철저히 타인일 뿐이다. 복남은 해원에게 넌 다 알고 있지 않느냐며 도와 달라 요청하지만, 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며 외면한다. 복수를 시작한 복남은 자신을 괴롭혔던 마을 사람 뿐만 아니라 해원에게도 낫을 겨눈다.
 
김복남은 곳곳에 있다
이 영화는 단어를 몇 개만 바꾸면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현대차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 전북버스노동자, 이외 외롭게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전북에서는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이 100일을 넘겼다. 행정당국, 버스회사, 경찰은 한 몸이 되어 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오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들의 무관심한 태도도 큰 이유로 작용한다. 시는 이런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무리하게 대체버스를 운행하며 시민들의 불편을 없애려 노력해왔다. 버스 운행률이 90%를 넘어섰고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은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에 관심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
이 영화는 이런 시민들에게 죄가 없는지, 이 시민들과 버스회사는 한 편이 아닌지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조자는 직접 가해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해에서 책임을 면할 것인가? 도로를 막고 시민들의 불편을 야기하는 노동자들의 복수는 과도하고 비난받을 일인가?
 
이 복수는 과도한가?
영화에서 해원은 거짓말을 했고, 가해에 동참한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명시적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흐릿하게 엉켜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곳곳에서 언제나 있지만 관심 가지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조차 않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외면했다고 탓할 수 있을까? 힘없는 이들의 싸움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사회는 이런 식으로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유로운(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만든 사회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사회와 구성원들은 서로 면죄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누군가는 실제로 고통 받으며 스러져가고 있다. 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제3세계 아동이 맨몸으로 농장에 농약을 뿌리고 있고,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을 얻는다. 해원처럼 ‘난 아무것도 몰랐다’며 발뺌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있다.
 
복수는 누구에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오랫동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해마다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선전물로 열사를 알릴 때 마다, 난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 박종태 열사가, 김주익 열사가, 배달호 열사가, 김진숙씨가.. 이런 사람들이 내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잔인한 복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복수의 방식보다는, 집요하게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캐묻는다. 김복남의 낫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우리 모두를 향해 겨눠지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오랫동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해마다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선전물로 열사를 알릴 때 마다, 난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 박종태 열사가, 김주익 열사가, 배달호 열사가, 김진숙씨가.. 이런 사람들이 내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잔인한 복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복수의 방식보다는, 집요하게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캐묻는다. 김복남의 낫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우리 모두를 향해 겨눠지지 않을까?김복남은 섬에 고립된 여성이다. 섬사람 모두는 한편이 되어 잔인하리만치 김복남을 핍박한다. 그리고 이들은 김복남이 겪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다. 김복남은 섬 바깥에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했다.
얼핏보면 이 영화는 그렇게 당해온 김복남의 복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얽혀있는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 섬에 쉬러온 복남의 친구 해원은 모든 상황을 보고서도 끼어들지 않는다. 해원에게 복남은 철저히 타인일 뿐이다. 복남은 해원에게 넌 다 알고 있지 않느냐며 도와 달라 요청하지만, 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며 외면한다. 복수를 시작한 복남은 자신을 괴롭혔던 마을 사람 뿐만 아니라 해원에게도 낫을 겨눈다.
 
김복남은 곳곳에 있다
이 영화는 단어를 몇 개만 바꾸면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현대차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 전북버스노동자, 이외 외롭게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전북에서는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이 100일을 넘겼다. 행정당국, 버스회사, 경찰은 한 몸이 되어 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오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들의 무관심한 태도도 큰 이유로 작용한다. 시는 이런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무리하게 대체버스를 운행하며 시민들의 불편을 없애려 노력해왔다. 버스 운행률이 90%를 넘어섰고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람들은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에 관심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
이 영화는 이런 시민들에게 죄가 없는지, 이 시민들과 버스회사는 한 편이 아닌지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조자는 직접 가해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해에서 책임을 면할 것인가? 도로를 막고 시민들의 불편을 야기하는 노동자들의 복수는 과도하고 비난받을 일인가?
 
이 복수는 과도한가?
영화에서 해원은 거짓말을 했고, 가해에 동참한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명시적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흐릿하게 엉켜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곳곳에서 언제나 있지만 관심 가지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조차 않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외면했다고 탓할 수 있을까? 힘없는 이들의 싸움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사회는 이런 식으로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유로운(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만든 사회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사회와 구성원들은 서로 면죄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해도, 누군가는 실제로 고통 받으며 스러져가고 있다. 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제3세계 아동이 맨몸으로 농장에 농약을 뿌리고 있고,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을 얻는다. 해원처럼 ‘난 아무것도 몰랐다’며 발뺌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있다.
 
복수는 누구에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오랫동안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해마다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선전물로 열사를 알릴 때 마다, 난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 박종태 열사가, 김주익 열사가, 배달호 열사가, 김진숙씨가.. 이런 사람들이 내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잔인한 복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복수의 방식보다는, 집요하게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지를 캐묻는다. 김복남의 낫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우리 모두를 향해 겨눠지지 않을까?
2011/03/31 11:23 2011/03/31 11:23

지나간다평양스타일

스티브 공이란 사람이 찍은 평양의 모습을 봤다.

http://vimeo.com/19901182

참.. 가까운 곳인데, 어쩜 이렇게 서로 모르고 지낼까 싶다. 이 영상에 담겨있는 것은 전체 중 어느만큼일까?

북에는 차도 안다니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지하철도 끝까지 안다니고.. 등등.. 학교에서는 은연중 이런 내용의 교육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래서 북은 우리와 공유할 것이 없는 완전한 타자이고, 만나기 위해서는 구원 혹은 정복 밖에 길이 없다.

 

참 우스웠던 것 중 하나가, 몇몇 단체들에서 대북선동을 하는데, '가난하고 불쌍한 북한 민중들아, 남쪽은 이리 잘살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dvd'를 북쪽에 뿌린다는 것이었다. 당장 밥굶고 있으니 불쌍하다고 얘기하면서 왠 dvd? 그 월척없는 몰상식이 너무 가엽다. 뭐, 양극화가 심해 일부 가정에만 dvd가 갖춰져있다 쳐도, 그럼 그 집에서 남쪽 홍보 영상을 보고난 뒤 가난한 북한 민중을 이끌어 김정일 괴뢰정부에 맞서게 될까? 백번 양보해봐야, 쇼다. 지금 연평도 가서 지랄발광하고 계신가 보던데, 그분들 그냥 직접 넘어가셨으면 좋겠다.

암튼, 세상엔 모를 일이 너무 많다...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질수록, 어떤 것들은 더욱 감춰진다.

2011/03/27 11:34 2011/03/27 11:34

지나간다리비아

난 리비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카다피라는 사람도 최근에 기사를 읽고서야 알았다. 재미삼아 통계 숫자를 비교해보던 지리부도엔 나와있을지언정, 내 삶 속에 존재하지는 않았던 국가다. 잘은 몰라도, 리비아에 관해선 나 정도가 한국 평균이리라 싶다.

 

하지만 이집트에 이어 리비아 민중들의 저항 소식이 알려지면서 누구나 리비아 전문가가 되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글들이 올라온다.(사실 인터넷 댓글들은 정의감 보다는 훨씬 차원 낮은 즉흥적인 감정배설도 많긴 했다. 어쨋든 그런 글들이 아니어도, 정말 리비아 민중을 걱정하는 듯한 말들도 많았고, 또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 글들은 카다피를 절대악쯤으로 그려내는 언론들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며 한점 의심 없이 단호하게 카다피 타도를 주장했다.

 

그런데 우선 리비아를 언론이 다루는 방식이 대단히 불쾌했다. 이집트 항쟁에 대해서는 '사태' 쯤으로 표현하던 주류 언론들이 리비아에 대해서는 독재자를 몰아내는 혁명적인 저항이라고 추앙했다. 의지가 부족해 객관적으로 비교해보지는 못했지만, 얼핏봐도 할애하는 지면의 양이 달랐다. 명시적이진 않지만 리비아에 북을 대입시키는 게 어렵지는 않다. 카다피가 현재는 일개 독재자일지 모르지만 한때는 민족주의적(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고 그로인해 리비아는 미국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국가로 남아있다. 리비아의 붕괴를 축하하는 이들에게는 이 또한 현실사회주의가 타락한 한 모습이며 자유!민주!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함과 승리를 증명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이 잣대는 한치의 수정도 없이 언제든 북에게 적용될 것이다.

 

지금 전세계에서 리비아는 이런 식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리비아 민중에게 해방을, 참 올바르고 착한 구호다. 그런데 이렇게 인류애와 정의감에 가득차 카다피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은 리비아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의 삶 속에는 리비아가 존재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리비아는 언론 기사 몇 개로 며칠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그 알량한 지식으로 수많은 민중을 구원하겠다 드는 것은 오만하지 않은가? 그 발언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남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이상, '난 올바른 사람', '난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발언이 될 뿐이다.

 

물론 모조리 알아야만 발언할 수 있다면 발언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거야 안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발언하지만, 그 개별 사안과 노동자들을 나는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발언할 수 있는 것은 내 발언에 책임질 수 있고, 언제든 그 현실에 뛰어들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리비아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고, 리비아에 대해 내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이 리비아 전체 모습 중 어느만큼인지도 갸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미국, 프랑스, 영국군 등이 트리폴리를 공습하고 있다. 조선일보 치들은 애초 생겨먹은 게 저러니 그렇다 치고, 정의감에 불타 리비아 민중의 편에 서겠다던 이들은 아직 아무말도 없다. 트리폴리에는 인간이 없는건가? 왜 이렇게 불공정할까. 불공정한 게 아니라 다만 그곳에서는 인간을 보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들의 인간은 현실의 구체적 인간이 아닌 뇌내망상 인간이라, 망상을 위해선 재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트리폴리에서는 재료가 공급되지 않잖은가.

 

그런데 그런 치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알량한 휴머니즘에 기대 보이지 않는 모든 인간을 걱정하는 이들. 구체적 인간을 시야에서 잃어버리고 산재해있는 이미지들을 좇아 연대 혹은 타도해야할 대상을 뇌내망상한다. 이 망상은 자신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남기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리비아 민중 편에 선다던 그네들의 생각과 뱉은 말은 지금 공습과 직접 이어져 있다.

 

말은 말에서 그치지 않고 효과를 가지며, 그 효과는 말의 지시적 의미와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생각과 내뱉은 말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실상 카다피 같은 독재자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별반 다르지 않기 싶상이다.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뿌리깊은 투쟁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현실에서 실현시킬 이야기를 뱉고 고민하라"가 마르크스 이래 정초된 유물론적인 세계관이며, 이와 구별되는 여타 세계관이 관념론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리비아 민중과 연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준비되지 않은 이상, 트리폴리에 공습이 시작됐는데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않는 이상 그동안 리비아에 대해 넘쳐났던 말들은 그저 유희에 불과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말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tv에서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을 보니, 산속에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는 개를 '구조'한다. 춥고 배고픔으로부터 구조하겠단다. 저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고 '들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구조한단다. 그래서 '구조'하기 위해 그 개들을 삶터에서 강제로 끄집어내 추위와 배고픔이 없는 인간들의 따뜻한 품으로 안겨준다. 저 오만한 친절이 구역질난다. 리비아를, 북한을 다루는 사람들의 시각은 저기서 얼마나 다를까? 식민주의는 지금 이곳에 있다. 리비아에 공습이 시작되었고, 한반도는 언제나 표적이다.

2011/03/20 18:38 2011/03/20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