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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 6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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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 6주기 추모제

 

○ 박일수 열사 18주기 추모제와 합동으로 진행
○ 일시|2022년 2월 13일(일) 오전 11시
○ 장소|솥발산열사묘역(하북면 삼덕로 288)
○ 문의|010-5135-7957         
○ 참가신청| bit.ly/윤웅태6주기
○ 직접 참석 못하셔도 위 링크에서 윤웅태 동지를 기억하는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윤웅태동지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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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문제] 거주자에게 살 집을 : 오두막에 평화를, 궁전에 전쟁을!

 거주자에게 살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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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재산보다 생존권이 중요하다!” (러시아혁명의 벽 슬로건)

 

독일 헌법재판소가 베를린 임대료 상한제를 번복함에 따라부동산 로비는 의미심장한 승리를 자축했다만장일치의 판결에 의하면베를린의 임대료 상한제는 헌법과 양립할 수 없으며따라서 무효다.” 이에 증시는 독일 주택(Deutsche Wohnen)”의 주가는 6.8%, “아들러 그룹(Adler group)”은 7.6%, “보노비아(Vonovia)”는 2.9%로 상승했다현재 수천의 임차인들이 대유행 시기 엄청난 임대료 급등 및 체납으로 위협받고 있다만약 갚을 수 없다면그들은 집을 몰수당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부르주아 정의는 부자들의 재산만을 보호하지생존권은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임대료 상한제는 임대료의 급격한 상승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절대 아니었다그것은 언제나 일시적이었으며허점으로 가득했고집주인과 사기꾼 부동산 업자들은 임대료를 둘러싼 그들의 방식을 습관적으로 기만했다상한제에도 불구하고임대료는 5% 증가했다그러한 개념으로 볼 때그것은 언제나 2018/19년 임대인들의 항의에 대한 상원의 진정제였다물론 상원이 SPD(독일사회민주당)와 Linkspartei(좌파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잊어버리기 위한 바람에서였다그들은 2002년과 2011년 사이 자산기업들에 수십만 채의 집을 헐값에 넘겼었다이런 식으로 그들은 지난 10년간 임대료의 106% 증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또한 최근의 상한제가 사라졌으니이러한 경향이 지속할 확률이 높다...

 

주택 부족 및 임대료의 급상승은 결코 베를린만의 현상이 아니다전 세계적으로 임대료가 급격히 올랐다현재 뮌헨의 평균 임대료는 평방 미터당 18.48유로프랑크푸르트는 15.75유로슈투트가르트는 14.74유로를 보인다유일하게 13.68유로인 베를린은 그 배경에 흔적이 있다교외 및 도시 외곽도 이러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지는 못한다한편순이익의 거의 40%가 임대료로 쓰인다당신 머리 위 지붕의 미심쩍은 사치를 위해임차인들은 더욱 열심히 노동하고음식과 옷을 줄이고/줄이거나 가장 독특한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강요받는다여성 임차인과 저소득자들이 특히 많다퇴거 발생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이로써 수많은 이들이 즉각적으로 주택 비상사태와 노숙의 위협에 처해있다.

 

주택 부족 자본주의의 비극

 

물론 시장경제 논리 안에서라면 이러한 개발을 시도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이 논리에 따르면대도심에 주택은 턱없이 부족한 것에 비해 인구는 너무나 많을 뿐이다결과적으로 건설사와 부동산회사에 더욱더 많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데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다시 한번 맞추기 위해서다그러나 자본주의 주택 시장에 있어서그토록 수익성 있는 자원이란 바로 충당할만한 주택의 부족이라는 점이다저렴한 주택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만큼더 높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우리가 직면하는 다른 문제 모두와 함께꾸준히 증가하는 주택 부족을 겪는 것은실재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분명 진정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이 아니기 때문이며오히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기대이윤이 비용을 현저히 능가하는 지역에만 주택 시장의 투자가 이루어진다이는 값싼 사회적 주택을 지어서는 거의 불가능하다초호화 주택과 콘도의 건설뿐만 아니라값비싼 새로운 임대의 현대화 및 /보수를 통해서는 더욱 요원할 뿐이다결과적으로 사회적 주택의 양은 곤두박질쳤다매년 4만 3천의 가구가 사회적 소유권에서 박탈되는 한편가입자 수는 더욱 적다.

 

위기와 콘크리트 황금으로의 탈출

 

이러한 환경에서글로벌 자본주의 위기의 타격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다전후 호황이 끝난 1970년대 초이전의 모든 호황을 능가했던 축적 또한 끝났다이윤율을 보상하기 위해 세계 자본은 생산 과정의 구조조정 및 폭발적인 착취율 증가에 의지했다변칙적이며 불안정한 고용 조건을 확대함으로써자본주의는 자신을 서비스 경제로 개조하기 시작했다동시에임금노동을 통해 이룩한 부는 최근 10여 년간 금융 분야로 옮겨졌다이곳에서 화폐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고(하지만 진정으로 어떠한 새로운 창출하지 못한 채), 투기가 성행한다2008년 금융 위기의 충격이 이런 개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세계 경제가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중앙은행은 통화량을 늘렸다수익성이 좋은 투자 기회를 찾아특히 이윤율이 혹은 0에 근접하면막대한 양의 자본이 이른바 콘크리트 황금으로 불리는 곳으로 흘러가 부동산과 토지 가격을 천문학적으로 상승시킨다주택 부족에 근거한 주택 투기가 성행하는 것이다특히 대도시는 투자 자금상장 기업부유한 개인그리고 기타 장사꾼들을 위한 장으로 변모한다그들의 사업 모델인 주택은 투자 자산이 되고유지 비용이 최소화되며임대로 증대를 위한 기회들이 최대화된다이에 따른 결과를 거의 모든 이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존 거짓 속의 사회화?

 

이러한 개발은 더는 중산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현재 목소리들이 점차 증가해 부르주아 진영에까지 닿고 있는데민간 주택 시장 개발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규제 능력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도이체보넨 주식회사 국유화 캠페인과 더불어최대 부동산회사의 국유화에 대한 국민투표(1)를 요구하는 (연합단체가 베를린에서 결성되었다이 단체의 대변인들은 동시에 부르주아 법칙에 확고히 바탕을 두고 사회화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켰다고 주장한다이들 모두는 사실이다하지만이것은 모든 의미의 사회화라는 용어를 훔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사회주의로 퇴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부동산 로비와 부르주아 정당의 넋두리 덕분에제기된 사회화는 초기에는 외견상으로는 급진적 수용이다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2000년대에 상원에 의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팔린 주택 약 20만 채에 대한 “재자치화 철회에 대한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이들은 베를린 운송 회사의 모델에 따라 "공법 기관"의 소유로 이관될 예정이다이 모든 것은 부동산 기업에 비례 보상 지급으로첫 매매가의 최소 10배에 달할 것이다그렇다면 상당한 액수가 공정한 임대료와 이자에서 상환되어야 한다즉 임대업자의 수중으로 내던져져야 한다결국개혁주의는 필연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기이한 숫자 게임과 실현 가능성의 계산에는 개별 주택단지에 대한 재자치화”, “국유화”, 혹은 사회화”(이들 용어는 의도에 따라 다양하다.)로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도심 지역의 임대 계약과 퇴거를 중단시키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로 밀어낼 수 있으리라는 헛된 환상을 동반한다하지만 여러 운동 전략가들에게는 너무도 유감스럽게도합법적 재산이라는 명칭으로는 주택 소유에 대한 자본주의적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다위기는 주택 부족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국가도지역공영도협동조합 소유의 건설회사도자본주의 착취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더구나 이른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위해 좌파 국가주의자들이 외쳤던 구호를 고려할 때우리는 일찍이 1872년에 이 주제에 관하여 훌륭한 동지가 했던 말을 다시금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계속 존재하는 한주택 문제나 노동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사회적 문제의 고립된 해결책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해결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철폐하고 노동계급 자신에 의한 모든 생활수단과 노동의 전유에 있다.” (엥겔스주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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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에 평화를궁전에 전쟁을!

 

임차인들의 항의에서 자주 제기되는 주택은 상품이 아니어야 한다는 요구는 정확하고 중요한 것이다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회의 권력 관계와 지배 관계에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주택의 진정한 사회화는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은 말할 것도 없고국민투표를 통해서도 거의 시행될 수 없다이 문제는 은행 통제”, “부자들에 대한 강력한 세금 부과”, 혹은 주택 회사의 국유화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국가 통제의 자본주의는 어떤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소련의 스탈린주의와 그 외의 경험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해 왔다자본주의 이윤의 논리로부터의 분명한 분리지배계급의 무력화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생산양식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새로운 사회가 가능해질 수 있다착취의 증가와 마찬가지로 주택 위기에서 명백히 드러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인간의 경멸은처음에는 이 체제의 즉각적인 영향에 대항하여 점점 더 저항을 불러일으킨다임대료 인상과 임금 삭감에 저항하는 투쟁은 지배계급이 좁은 경계를 긋는 곳에서 연대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다그러나 그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다우리는 코뮤니스트다우리는 우리의 견해와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우리는 인간에 대한 전술적” 도구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우리는 모든 대리주의 정치를 거부한다우리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중심을 두고 계급투쟁을 지원하며그러한 투쟁의 한계를 비판하고임금 노동자의 자기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이를 위해 조직적 체계계급투쟁 개입을 위한 정치적 도구즉 국제적 구조와 기반을 둔 국제주의자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이 길고 어려운 과정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지배계급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

 

 

2021년 6월 10

국제주의코뮤니스트그룹(GIK)

 

 

<편집자 주>

2019년 독일에서는 거대 부동산기업들의 임대주택 몰수와 국유화를 요구하는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이 일어났다지난 9월 26일에는 베를린에서 주민투표가 성사되었고, 56.4%의 찬성으로 임대주택 국유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하지만 이러한 '결의안'만으로 국유화를 이루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국유화(국가 통제의 자본주의)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주택 문제는 코뮤니스트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착취를 종식해야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관련 글>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상승 대책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31

코뮤니즘 세상에서... 도시와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47
 

 

<출처>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6-10/homes-to-those-who-live-in-them

http://www.leftcom.org/de/articles/2021-05-21/die-wohnungen-denen-die-drin-woh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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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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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정치군사적)을 갖는다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그 뿌리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단지 부르주아지의 손에 있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의 꼭두각시 인형극에 불과하다그들은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선거는 부르주아지의 (의회/대통령제민주주의가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인을 선출할 자유를 양보하는 순간이다그들이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계급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줄 세력/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따라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이러한 민주적 신비화를 지지하고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독재를 돕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4,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지 의회/대통령 선거의 사기극에 맞서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다시 제기해야 한다이것은 분명히 무관심과 정치적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혁명당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통령 선출이나 의회 다수파 장악을 통한 정권장악의 길은 결코 임금노동의 착취를 폐지하지 못하며지속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권리마저도 쟁취-유지 못할 것이다오직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자본이 잠시나마 노동자에게 일부를 양보할 수 있게 한다프롤레타리아혁명만이 착취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에 대한 질문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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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반(反)노동자 악법을 만든 주역들이 규칙을 정한 자본주의 선거에서

노동자는 승리할 수도, 권력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노동자는 선거에서 차악이냐 차선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죽이고 위기를 전가하는 세력에 권력을 바치는 "선거냐"

 

노동자를 살리고 스스로 권력을 갖는 "투쟁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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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고 불온한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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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고 불온한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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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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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다가올수록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진보/보수 프레임공정과 능력반공지역주의민족주의 등이슈의 용광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물론 부르주아 선거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이슈를 잠재우는 블랙홀 역할이 기본이다게다가 부르주아 정당/정치인 사이의 진흙탕 싸움(비리 의혹 공방)으로 정치 무관심이라는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계급 착취와 각종 비리의 토대를 제공한다결국 부르주아 선거판은 철저히 노동계급의 현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었다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는 그동안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1)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선거를 통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작동 기제와 이를 통한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방식에 대해 언급하겠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능력주의

 

대의제 방식인 부르주아민주주의는 45년을 주기로 대통령국회의원지자체장/지방의원을 선출한다대의제에서 후보로 등록하거나 뽑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부르주아거나 쁘띠부르주아 혹은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그들이 대부분이다자유민주주의라는 포장물의 내용은 부르주아민주주의(부르주아 독재)이다부르주아정당을 통해 그들은 선거 후보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그 특별한 능력이란 돈권력학벌 중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을 가지는 것이다선거를 바탕으로 한 부르주아의 화려한 능력의 배경은 자원과 부의 사회구조적 독점이다부의 독점이 선거를 통해 능력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진행된다물론 이러한 과정은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능력은 오롯이 개인적 부분만이 아닌 개인이 소속된 계급의 영향과 사회적 배경이 절대적이다능력주의는 자본에 의한 노동계급 착취에 대한 정당성 부여와 차별을 합리화 시킨다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장동 게이트는 자본법조계정치권을 포함한 지배계급 게이트이다대장동 게이트는 능력주의를 내세워 어떻게 착취하고 합리화시키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해결책으로 등장한 민간개발 이익 환수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민간개발 이익 환수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방식과 엘리트주의/능력주의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국민의 위임을 받은 능력 있는 권력자만이 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2)

 

지배계급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으로 형식적 경쟁을 한다처음부터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그것이 능력주의의 핵심이다능력주의는 지배계급에 의한 경제적 지배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전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정치적 지배 역시 능력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능력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피지배계급의 고통이다무능력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된다그러면서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은 은폐되고 미화된다.

 

진보 대 보수

 

진보 대 보수의 프레임은 자유주의자들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자유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바뀌었다민주 대 반민주도 마찬가지이지만진보 대 보수의 구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대립과 계급역량을 왜곡은폐시켰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겉으로는 국민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진보다 보수다 딱지를 붙이고 정쟁을 한다운동세력 역시 이러한 구도에 갇혀 계급 대립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고 있다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며 지배계급 세력사이에 이익 쟁취를 위한 이전투구에 불과하다더 정확히는 자본을 위한 정책이다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가장 대표적 사례이다. 2020년 이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이었다한마디로 집값 억제가 아니라 집값 폭락을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말로는 집값 상승 억제를 주장했지만, 20여 차례에 걸친 부동산 대책은 주거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부동산 가격을 끝없이 수직으로 상승시켰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진보 대 보수라는 구도를 이용해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와 계급대립을 은폐시킨다또한 진보와 보수정권의 주기적인 교체를 통해 이상적 정치제도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조장한다.

 

의회 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러한 환상은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계급투쟁을 무력화시켜 순종이 피지배 계급의 도덕인양 찬양하게 만든다결과적으로 부르주아 지배의 철옹성이 세워지는 것이다.

 

선거환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동화

 

선거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과 지배이데올로기에 동화된 것도 그 중 하나다노동조합을 비롯한 운동세력 내부에 팽배한 관료주의권위주의노동계급에 대한 피상적 인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의 토양이 된다또한 코뮤니즘에 대한 전망 부재는 야권연대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토양이 되면서 진보 대 보수의 구도에 스스로 갇혀버렸다급기야 선거환상에 빠지면서 선거를 통해 어떤 체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체제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능력주의관료주의권위주의

 

부르주아 선거전술에서 노동자후보는 계급의 역량과 분리된 채 대부분 명망가 위주이다이것은 노동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노동계급의 수동성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강화시킨다.

 

노동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따라서 혁명당(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계급 안에서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혁명강령을 방어하는 집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노동자 후보/선거연합계급연합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아직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서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코뮤니스트」 12, 2020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형로)

 

자본의 좌파의 실패한 선거전술의 반복 – 코뮤니즘에 대한 전망 부재

 

내년 대통령선거지방선거에서도 여러 운동세력은 실패한 선거전술을 되풀이하고 있다사회주의(?)좌파 공투본민중경선자유주의 정치인 지지 등이 그것이다하지만 그들의 낡은 선거전술은 이미 수차례 실패로 끝났다.

 

그동안 선거에 개입했던 노동자정당진보정당들은 완전한 의회주의 정당으로 자리 잡았고이들을 지지했던 민주노총의 정치는 파산상태에 이르렀다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수많은 배신과 운동권 출세주의를 양산했다.”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국제코뮤니스트전망)

 

그럼에도 사회변혁노동자당을 비롯한 이른바 좌파단위에서는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직접 대선후보 공약을 만들고 후보를 선출하는 등 선거 대응 취지로 한국 사회 체제 전환을 위한 사회주의·좌파 대통령 선거·지방 선거 공동투쟁본부를 제안했다그러면서 소수 재벌과 자산 불로소득자를 위한 경제를 모든 사회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경제로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경제위기와 노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또한 더 많은 이윤·더 많은 소비를 하며 더 많은 노동·더 많은 자연 수탈로 지탱되는 자본주의를 필요한 만큼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더 적은 노동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

 

마치 체제 전환이 사회주의 정치인 양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를 필요한 만큼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자고 주장한다. 10년 전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는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 개입이야말로 코뮤니스트운동을 급격하게 퇴보시키는 정치적 타락행위라고 비판했다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그들은 사회주의 정치는 자본주의 개혁이라는 점을 스스로 시인했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선거에서의 공약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류의 미래가 걸린 계급투쟁의 최종 목표와 코뮤니스트혁명의 전망을 가질 때만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사회주의 간판으로 후보를 내고 자본주의 전복-노동자 자기 권력의 과정이 빠진 채 체제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기회주의자들의 오래된 습성인 사회주의 희화화일 뿐이다.

 

민주노총 일부에서는 노동자민중의 대선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노동자민중경선을 추진하고 있다또한 민족주의 계열과 일부에서는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한다이 역시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낡은 전술이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는 현 위기와 모순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문제로 나아가지 못했다방어적인 노동자 기본권 요구에 머물렀던 노동자 운동 진영은 대선에서도 자신들의 현안과 쟁점을 계급투쟁-권력 투쟁으로 모아내지 못했다오히려 극우 친자본 세력의 강성노조’ 공격이 쟁점이 되었을 때자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지 못하고 억울함과 노동 존중을 호소하는 데 그쳤다촛불투쟁의 주역이었다는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은 대선에서 공세적이지 못했다노조 할 권리최저임금 인상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최소한의 방어적 요구도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지 투쟁으로 쟁취하겠다.'는 계급적 요구가 아니라 '투쟁과 정책협약'을 병행하는 애매모호한 시민적 요구에 그쳤다.“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2017년 6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형로)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노동자 운동 내 모든 선거참여 시도는 실패한 선거전술의 반복이 분명하다그들 중 이른바 좌파는 말로만 사회주의를 주장했지만코뮤니즘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전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투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자칭 사회주의 세력은 코뮤니즘이 아닌 자본의 좌파 입장에서 선거 때마다 실패한 전술을 반복했다.

 

노동자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물도 선거를 통해 얻을 수 없다선거제도 자체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제도와 통치기구를 유지하고노동자들에게 투표 기계로서 수동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부르주아 정치에서는 대중 투쟁의 성과조차도 전문 정치인들이 위임받아 정파적으로 이용한다우리는 그동안 부르주아 정치에 의탁한 투쟁이 어떠한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투쟁으로 지켜내지 못한 권리가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지는지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코뮤니즘을 노동자계급의 미래로, 2020국제코뮤니스트전망)

 

부르주아 선거가 아닌 계급투쟁으로

 

또한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6·4 지방선거에 부쳐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코뮤니스트」 4, 2014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부르주아 선거를 통해 노동계급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해졌다그럼에도 자본의 좌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규칙과 선거제도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그들은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오히려 부르주아 잔치판의 들러리로서 노동계급 투쟁에 혼란만 가중시키는 기회주의 역할로만 기여할 뿐이다노동계급의 미래는 다른 계급이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노동계급 스스로 투쟁하고 개척해야한다.

 

사람들의 대대적인 변화는 반드시 코뮤니스트 의식의 이러한 대대적인 공조 속에서 확인되는데왜냐하면 그러한 변화는 단지 하나의 실천적인 운동즉 혁명 속에서만 실행 가능해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혁명이 단지 지배 계급을 전복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을 전복한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낡은 체제의 모든 썩은 것들을 쓸어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맑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강화시켜주는 부르주아 정치 참여가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로만 지배계급을 전복시키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따라서 선거 시기 부르주아 서커스 쇼에 노동자들을 대상화하는 선거전술이 아니라 모든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투쟁과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노동자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자신들이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는 하나의 계급임을 깨닫는다물론 투쟁만으로는 계급의식이 발전하지 않는다그것은 작업장을 넘어부문과 지역을 넘어민족과 국가를 넘어 연대하고 투쟁하는 국제주의 원칙이 노동자 의식에 자리 잡아야 가능하기 때문에일상에서의 꾸준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의 실천이 필요하다자본주의 위기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여전히 노동계급이 자신의 운동 속에서 그동안 투쟁을 패배로 이끈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이번 선거에서는 선거주의라는 고질병과 같은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코뮤니스트 정치와 노동자 투쟁이 직접 만나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노동자 투쟁을 교란하고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선거주의와 단절하자!

부르주아 정치/선거참여는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이자 사기극이다!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투쟁과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만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

 

 

2021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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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

-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12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2012년 10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오세철)

-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13년 4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 ‘촛불광장과 부르주아 대선’ (2017년 6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그것은 의회와 선거개입에 대한 전술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를 유지하고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이다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개입그것과 관련된 각종 선거 연합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강령들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2) 개발이익 환수는 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방식으로 시세차익과 이윤을 목적으로 한 투기와 생산에서 비롯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에 토대를 두고 진행된다.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상승 대책’, 코뮤니스트」 13호 참고)

 

3) ‘사회주의·좌파 대통령·지방 선거 공동투쟁본부 함께하자’,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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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을 내면서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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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가까워졌다선거 이야기에 앞서 기회주의자들이 그토록 고려한다는 현실에 대해 살펴보자.

 

현실의 청년들은 갈수록 악화하는 삶의 조건(취업 경쟁열악한 주거부채높은 실업률 및 저임금/과로/위험/불안정노동 등)에 수없이 좌절하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 물고기의 삶을 살고 있다이러한 고단한 삶은 가진 것 없는 중노년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그러나 한편에서는 연간 2억을 써도 백화점 VIP 회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기사가 뉴스 사이트에 올라온다기사에 따르면 "올해는 지난해보다 약 4,000~5,000만 원을 더 소비해야 안정적으로 최상위 등급에 속할 전망이다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보복 소비로 명품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백화점마다 사상 최대 실적을 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코로나19 이후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고계급 사이의 신분 이동은 몇 세대를 지나도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이러한 체제의 근본적 문제를 선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까설령 급진적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청와대와 국회 밖에 있는 더 큰 권력을 제압하고 공약 그대로 실현할 수 있을까?

 

기성 정치인의 민생 공약조차 그대로 믿고 투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이른바 사회주의 후보가 선거를 통해 체제를 바꾸겠다고 내건 공약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오히려 대중은 선거를 통해 얻은 수많은 경험이 있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선거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이것이 득표가 아닌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겪게 될 현실이다.

 

이번에는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더는 통합진보당’, ‘진보정치’, ‘좌파정치’ 운운하면서 고리타분한 대립을 논하지 말자가까이에서 보든멀리에서 보든우리 주변에 펼쳐진 노동자 투쟁 정치와 미디어에 비친 진보정치는 그 어느 것도 공통점이 없다정확히 말해, 96~7년 노동자 총파업 투쟁 이후, ‘민주노총 정치방침으로 형성된 진보정당(정치)’시대는 끝이 났다그러나 여전히 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말하면서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가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고 있다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지금 필요한 것은진보정당에 제물을 올리고 축문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니다그렇다고 야권연대 진보정당을 비판하면서이른바 지도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공동전선(통일전선)을 통한 노동자 독자정당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정치노선적으로 실체도 불분명한 민족해방 좌파중앙파현장파를 포함한 공동전선 당은 무엇보다한국 프롤레타리아 정치운동의 위기를 계급정치의 부활이 아닌 지도력의 정치에서 찾는 점에서 노동계급에 치명적이다또한통일전선 당은 그간에 진행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당 건설 공동 활동 경험과 노력을 폐기한다대선 정국과 맞물려 진행되는 공동전선 당 전략은 기껏해야 계급성과 혁명성도 애매한 진보좌파연합으로 수렴될 것이다.

 

계급투쟁의 무기력함에서 오는 비관주의와 조급성여러 차례 패배의 자책감 등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미래를 내다보고 활동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그러나 (...) 파업과 거리투쟁을 통해서 동지를 찾아내고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새롭게 올라오는 대중의 잠재적 힘을 주목해야 한다시류에 흔들리지 않고다시금 혁명운동의 정치원칙을 강인하게 사고해야 할 때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국제코뮤니스트전망)

 

10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정당 이름과 문구 몇 개만 바꾸면 현재 상황과 거의 같을 정도로 변한 게 없다통합진보당 대신 정의당과 진보당노동자 독자정당 대신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간 진보정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강령 통일과 실천에 따른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대신 의회주의 좌파 정당에 흡수된 이른바 사회주의 대중정당그리고 노동자 운동 내부의 선거주의 고착화가 변화의 전부이다이렇게 후퇴와 타락을 거듭한 운동 속에서 선거주의자들은 어떠한 반성과 성찰도 없이또다시 '혼돈또는 '최악'이라는 부르주아 선거판에 뛰어들어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현실 선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다부르주아 선거판은 온갖 거짓과 비방혐오음모론으로 가득 찬 하수 처리장이 된 지 오래다부르주아 정치는 이러한 악취 나는 권력투쟁이 본질이지만민주적 선거를 통해 위기관리와 계급투쟁 완화 역할을 한다부르주아지의 민주적 통치에는 오염된 정치를 정화하겠다는 급진적 부르주아 분파도 필요하고이른바 노동/진보/좌파의 참여도 필요하다그들을 부르주아 정치로 흡수해 계급 간 대립을 체제 내에서 관리하고선거 시기에는 노동자 대중이 정치혐오와 정치 참여 사이를 오가면서 선거 환상 속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동/진보/좌파 진영의 단일후보 선출(민중 경선)이 무산되었다이번 후보 단일화 무산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민주노총에 일부 기반을 두었지만부르주아 진영에 속하거나 민족주의/계급협조 세력에 포함되는 이른바 진보정당과의 후보 단일화(선거연합)는 계급적 원칙과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과어떠한 명분으로도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나 사회주의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만약 계급적 원칙이 우선이었다면그동안 계급을 배신하고 투쟁을 교란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부르주아 정치와의 단절을 전제조건으로 선거를 넘어 공동투쟁에 나섰어야 했다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권력이라는 목표와 노동자민주주의라는 계급의 원칙을 명확히 하지 않는 선거-정치 연합은 부르주아 정치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없고자본주의 체제와 싸울 무기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암울한 현실에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에 관한 코뮤니스트 원칙을 근본적으로 밝히고 현실 투쟁에 복무하기 위해 사상투쟁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선거홍보물 비판이나 선거에 대한 강령(전략적원칙을 반복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우리 비판의 핵심은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세력의 운동적 퇴보와 그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낡은 후보 전술이 계급의식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공공연한 선거주의자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교주주의라 왜곡해서 비난하고다른 한편에서는 의회주의-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선거 참여는 전술일 뿐이라며 선거 자체를 거부하는 우리를 초좌익으로 몰아가며 깎아내린다후자의 논리는 대부분 레닌 저서(좌익 공산주의유아적 무질서)와 트로츠키 입당 전술(1934프랑스 전환)의 무비판적 수용에 기인한다역사 학습에 게으르거나 한쪽만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인 운동가들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러시아에서는 적합할 수 있으나 서유럽에는 맞지 않고 오히려 기회주의자들에게 문을 열어 준낡은 문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고 계급의식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번의 선거 전술 실패 사례만 살펴보아도 선거주의자들의 거짓은 쉽게 드러난다우리는 지난 10년간 그들의 선거 참여가 계급의식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퇴보하는 운동의 역사는 오류를 반성하지 않는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지만혁명적인 운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근본적으로 밝혀내 바로잡는 것으로 운동을 발전시킨다혁명운동의 걸림돌은 좌익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타격을 받는 것보다 기회주의자들이 계급 운동에 들어와 계급의식을 후퇴시키고 투쟁을 교란하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기어서라도 국회에 가겠다."라는 선거주의 폐해를 노동자 운동에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타락한 운동의 상징일 것이다.

 

부르주아 선거에 임하는 코뮤니스트 원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 평의회 국제 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당연시했던 것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발간했고코뮤니스트 좌파의 의회/선거 강령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한국 선거 평가()의회주의 투쟁 역사까지 전반적으로 다루었다우리는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앞으로 노동계급이 주기적으로 치르게 될 모든 부르주아 선거에서 계급적 입장과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발간한다.

 

마지막으로 계급의 대변자를 자임했던 자들이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경우는 탄압받을 때가 아니라 선거 기간이며노동자들이 희망을 갖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투쟁에 나섰을 때라는 것을 강조한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를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빅토르 세르주)

 

폭력의 힘에 맞서는 수단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의 전부가 오로지 비폭력적 희망으로 존재한다면

희망이라는 힘이여!

우리에게도 격렬한 희망을 다오

격렬을 뛰어넘어망각과 평화와 저항마저도 뛰어넘어

희망에게도 폭력적인 희망이 존재할 수 있게 해다오

(...)

희망을 빼앗고 절망조차 넘겨받은 힘없는 희망들이

이제 곧 격렬한 희망으로 길바닥 나뒹구는 돌맹이가 되리니...”

(격렬한 희망임성용)

 

 

2022년 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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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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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빵과 서커스-
 
 
차례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을 내면서
 
 
□ 코뮤니스트 좌파의 의회/선거 강령
 
▸반(反)의회주의 혁명전략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의회와 선거의 신비화 
▸의회 
 
 
□ 2012~2022년 한국 선거
 
▸2022년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2020년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2020년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코뮤니즘을 노동계급의 미래로 
▸2020년 4월 총선 엎어버리자! 
▸2012년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2012년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첫 번째 포고 
▸2013년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2017년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전면적 투쟁으로!!! 
▸2017년 촛불광장과 부르주아 대선 
 
 
□ 의회주의/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헤르만 호르터)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아마데오 보르디가) 
▸여성 의원 (실비아 팽크허스트)
▸1934년, 프랑스 전환 
▸투표하지 말자 : 1948년 이탈리아 선거 
▸부르주아 선거(주의)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 
▸노동자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부르주아 선거에 임하는 코뮤니스트 원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 평의회 국제 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당연시했던 것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발간했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의회/선거 강령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한국 선거 평가, 반(反)의회주의 투쟁 역사까지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우리는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앞으로 노동계급이 주기적으로 치르게 될 모든 부르주아 선거에서 계급적 입장과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발간한다. 
 
마지막으로 계급의 대변자를 자임했던 자들이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경우는 탄압받을 때가 아니라 선거 기간이며, 노동자들이 희망을 갖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투쟁에 나섰을 때라는 것을 강조한다.”
 
 
펴낸곳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발행일 : 2022년 1월 25일
 
 
□ 가격 :  10,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에서도 판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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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열사의 시대가 죽음의 시대 산 자에게

열사의 시대가 죽음의 시대 산 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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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하늘

한진중공업 김주익

 

 

가을엔 외롭다고 하지 말자

외로움마저 끊어버린 사람에게

너무 쉽게 외로움을 말하는 건

외로움이 싸움이란 걸 모르는 소리

 

저 나무는 생선가시처럼,

 

파랗게 떨며 혼자 가슴 태워도

끝내 피우지 못한 외로움의 연기

허공의 문을 닫고 꺼지지 않는 불붙여

죽어가는 하늘 끝 겨우 매달린 가을에

 

시 ┃ 임성용

 

 

 

 

지옥에서 핀 꽃

세원테크 이해남이현중

 

 

노동자가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나라

이런 나라인 줄 알았으면

정말로 이 나라에 태어나지 말 걸

 

너희가 정녕 내 숨통을

끊어놓기를 원한다면

오냐죽어주마!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나는 지옥에서 핀 꽃이었다

비바람 몰아치면 비바람이 되고

폭설이 내리면 폭설이 되어

나는 기필코 이 세상의 끝을 보리라

 

시 ┃ 임성용

 

 

 

 

2013년 1월 28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윤주형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혹여 어울리지 않는 열사의 칭호를 던지지 마세요

 

버티는 일조차 힘이 들더라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더라

 

세상에 나온 건 누구나 평등해도 사는 일은 그렇지 않았는데

나에게 참 다행인 것은 내 죽음을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네

 

주지 못한 뜨거운 마음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그럴 수 있다면 가난한 내 살과 영혼을 주고 싶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형제들은 출근의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 벨 것이며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어두운 강가에서 저녁 노을 바라보며

나는 꺼져가는 눈물을 흘리겠지요

 

시 ┃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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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땅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1.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운 때는 이미 지나갔다

너무 잘 먹은 것이 죄다 독이다

 

독에 중독된 몸은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고통조차 두려워 모르핀 쇼크로 죽어갈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촘촘하게 삥 뜯기며 죽어갈 것이다

 

이제 몸은 이윤의 새로운 세계시장이 되었다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의 전장이 되었다

 

식탐을 이기지 못하는 곳에 이윤이 있고

증상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 이윤이 있다

한 줌의 알약으로 완치를 꿈꾸었으나

스스로 몸에 뿌린 제초제였다

몸의 면역체계는 이윤이 되지 못했다

 

약을 팔아먹기 위해

질병을 기획하고

아픈 몸을 대량 생산했다

약을 팔아먹기 위해

새로운 세균과 바이러스를 대서특필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생명이 아닌 것이 자본주의였다.

 

독극물 백신이라고 쓰고 몸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읽는다

 

곧 백신 접종 여부가 출입증이 되고 여권이 되며

국민의 새로운 신분증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난 국가 밖에서 출입증 없이여권 없이신분증 없이 난민으로 살 것이다

 

2.

 

내 의지는 혁명을 꿈꾸었으나

내 혀는 자본주의에 길들여 있었다

매일 매일 자본주의에 길든 혀들이 돋아났다

먹음직하고 자극적인 것들 뒤에서 질병이 오고

이윤이사적소유가명령과 위계가,

감시와 통제가 부활했다

이것은 모든 혁명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정치적 기형에 대한 이야기다

 

비어 있으라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싸움이다

 

비워 내고 비어 있는 몸에 땅을 들여야 한다

 

GMO제초제도농약도화학비료도다량의 질소도

착취다

이윤이다

땅에 어떤 짓도 하지 마라

몸에 어떤 짓도 하지 마라

모든 치유는 자연치유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1)

 

아픈 몸은 사유하는 몸이다

때에 맞춰 살아갈 뿐

불치도 완치도 없는 것이 삶이다”2)

전문가에게 의탁하지 마라

누구나 아무나 배워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내 몸에 하는 침뜸은

몸에서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를 성찰하는 일이고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통제권을 갖는 일이다

 

치유는 땅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서로를 꿈꾸고

풀 한 포기까지 이름을 얻는 것이다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풀꽃처럼 춤을 추는 것이다

 

꼼지락

꼼지락

미생물처럼 땅에 깃들어

간신히 살아간”3) 이의

혁명론을 읽는 저녁이 있다

 

시 ┃ 조성웅

 

<>

 

1) 돌쑥내 몸에 침뜸하기」 강의 중에서 인용

2) 돌쑥내 몸에 침뜸하기」 강의 중에서 인용

3) 간신히 살아간다” 권정생 선생의 말씀

 

 

 

<편집자 주위의 시는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작품으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기고 글/작품에 대한 반론과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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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호주의 봉쇄 반대 시위와 노동계급 행동

호주의 봉쇄 반대 시위와 노동계급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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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명서를 작성하는 동안 현재 호주의 확진된 코비드19 환자 수는 23,000명을 약간 넘어서고 있으며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와 빅토리아(Victoria)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두 주 사이에하루 평균 약 2,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팬데믹이 시작된 이래로 현재까지 거의 1,400명이 죽었다그리고 거의 300명이 중환자실에 있다뉴사우스웨일스는 6월 말부터 그리고 빅토리아는 8월 초부터 봉쇄되었다전국적으로, 16세 이상 인구의 58%가 약간 넘는 사람들이 현재 2차 백신접종을 했다.

 

7월 이후호주의 주요 도시와 일부 소도시에서 정기적인 시위와 폭동(“자유 집회로 알려진)이 발생했으며그중 가장 큰 도시는 멜버른(Melbourne), 시드니(Sydney), 애들레이드(Adelaide), 퍼스(Perth), 브리스번(Brisbane)이다이 행사 참석자들은 의무적인 예방접종에 반대하고 국가가 시행하는 사이비 봉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대체로 노동자들이 집에 머무르거나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돈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이 같은 대중은 또한 일반적으로 마스크와 백신을 거부한다실제로그들 중 많은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위협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존재한다는 모든 경험적 증거에 반하여 부인한다.

 

이 집회는 노동자의 복지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부르주아 요소가 지배해왔으며대신 봉쇄 기간 그들이 더 적은 이윤을 얻게 되는 기업의 강제 폐쇄에 반대하는 행동을 했다건설업과 같은 영향을 받는 업종 내의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그 중 우세하다()유대주의 음모론을 여러 차례 퍼뜨리고 극우파에서 가장 악랄하게 외국인을 혐오하는 인물들을 열렬하게 포용해 온 것도 바로 이러한 사회적 요소이다.

 

비록 노동자들이 이러한 행사에 참여해왔지만그들 중 일부는 공공보건 제한에 대한 개별적인 저항의 시위로 소규모 연좌시위나 고속도로 봉쇄에 참여했을 수도 있지만그들은 어떤 종류의 진정한 계급적 대응도 대변하지 않는다이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 한 그룹의 사장들즉 소자본가들이 다른 거대 자본가들과 국가 관료주의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동원되도록 허용한 또 다른 비극적인 사례이다통상적으로이러한 사건들은 특히 건설과 운송과 같은 산업 내에서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왔다착취에 맞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에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으기보다는 그들은 이러한 전망을 상당히 축소해왔다.

 

이러한 시위를 통해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의 대응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운동의 기반을 고려할 때그것의 구체적인 요구로부터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오히려 팬데믹 기간 동안 사업이 엉망이 된 것을 본 소부르주아들이다한 가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응은그 대신 이러한 시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비필수 사업 폐쇄재택 및 검사예방 접종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낸 것은 다수의 의료 및 건설노동자들이었다.

 

진정한 노동계급 행동

 

구성뿐만 아니라 요구조직전투 전술이 모두 소부르주아의 특징인 이들 시위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호주 내 공중보건과 경제위기에 대한 진정한 계급적 대응이 비록 노동자 자신들의 노력에도 이 투쟁을 특정 부문과 작업장에 국한시키려는 노조의 틀 내에서 일어났지만올해 9월과 10월에 실질적인 파업행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반면에팬데믹으로 인한 대응으로 정부가 발표한 봉쇄 조치로 인해 사람들은 온라인 쇼핑과 "긱 경제", 즉 21세기 단편적인 일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그 결과 우체국과 배달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이 운영하고 의존하는 물류 인프라도 완전히 압도당했고팬데믹 기간 가장 많은 이윤을 얻고 가장 큰 성장을 보인 회사들은 총수요 증가를 보상하기 위해 신규채용인원을 늘리지 않았다그 결과 이러한 산업 노동자들은 같은 임금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분명히그들은 자신의 상황과 사측에 대한 향상된 교섭력 모두에 주목했다. 9월 마지막 주 내내수천 명의 스타트랙(Startrack)과 페덱스(FedEx)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여 두 번의 개별 24시간 행사 동안 전국에서 작업을 중단했는데고용안정 보장과 정규직과 동일한 조건 및 복리후생을 요구했다.(1)

 

멜버른에서는 수백 명의 캐드베리(Cadbury) 초콜릿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 동안 파업을 벌였다.(2) 이곳의 노동자들은 고용 안정을 확대하지 않고 임시 계약에 의존하는 회사의 정책에 항의해 왔다실제로그 공장의 일부 노동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임시계약직으로 일을 해 왔다남반구에서 가장 큰 와일너리인 베리 에스테이트(Berri Estates)의 노동자 280명 중 약 170명이 현재의 노동조건 악화를 막기 위해서 파업에 돌입했다.(3) 사장이 수개월 동안 협상을 거부하자뉴사우스웨일스의 철도 기관사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4시간 동안 파업을 했다그들 사이에서 추가적인 파업 조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4)

 

노동계급의 실질적인 반격의 필요성

 

이러한 봉쇄반대 집회는 이윤 추구를 위한 공공질서를 유지하려는 경찰뿐만 아니라 거리의 무고한 구경꾼에 대해서도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5)

 

코뮤니스트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는 이러한 사건들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시위 참가자에게 실질적 영향을 미칠 기회 없이, 단지 개인(시위대 자신경찰 또는 바이러스 노출 여부에 관계없이)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유감스럽게도전염병과 계급이 견뎌야 하는 조건에 대한 노동계급의 실질적인 투쟁이 필요하다여느 때와 같이 위기가 발생하면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노동계급에 대해서 고용 불안정임금 동결 및 감소지급유예 해제임대료 및 공과금 인상복지 혜택 삭감 등의 형태로 지속적이고 새롭게 공격하는 것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 반격에 필요한 기반의 일부가 된다소부르주아지와 나란히 줄을 서는 것보다 코뮤니스트이자 노동자로서 우리는 현재의 코로나바이러스 발병을 부채질하는 데 도움이 된 백신 출시에 허둥대고, 봉쇄재택 명령 및 재정적 보상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무능함을 규탄한다그러나 냉소적으로 불리는 이러한 "자유 집회"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라 이른바 이러한 재앙적인 정책에 대해 "두 배를 걸겠다(도박)"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2021년 10월 6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

 

(1) 호주 스타트랙 파업 
    https://thenewdaily.com.au/news/national/2021/09/23/star-track-strike-australia/

 

(2) 캐드베리 노동자들이 더 나은 협상을 위한 파업

https://thenewdaily.com.au/news/national/2021/09/23/star-track-strike-australia/

 

(3) 베리 와이너리 파업 

https://www.abc.net.au/news/2021-09-23/winery-strike/100485944

 

(4) NSW 열차 운행 중단을 위한 파업
    https://www.sheppnews.com.au/national-news/2021/09/27/5274779/strike-to-cause-disruptions-to-nsw-trains

 

(5) 멜버른에서 폐쇄 반대 시위대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
    https://www.theguardian.com/australia-news/2021/aug/21/australia-anti-lockdown-rallies-protesters-violently-clash-with-police-in-melbourne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10-08/anti-lockdown-protests-and-working-class-activity-in-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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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추모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photo_2021-01-07_14-48-26.jpg1919년 1월 15일,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여성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photo_2021-01-07_14-46-49.jpg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동지들, 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 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 합니다 : 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 사실로 만들며, 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이상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 1918)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룩셈부르크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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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사회민주당(SPD)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KPD),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코뮤니스트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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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혁명가에 대한 왜곡과 제대로 된 계승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 가증스러운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Rene Lefeuvre)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은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反)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민주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다.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코뮤니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코뮤니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敵)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 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후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증스러운 선전이 유행했다.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지배계급에 대항한 “진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동문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敵)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었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논리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의 배후에는 코뮤니즘에 대한 불신과 혁명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혁명가들이 살해된 지 103년이 지난 지금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더욱더 강화되고 있다. 현재의 우리가 혁명가들의 경험과 교훈을 제대로 계승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혁명가(운동)에 대한 온전한 복원과 평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소중한 역사와 자산을 왜곡하는 기회주의자들과의 단호한 투쟁이 전제되어야 한다.

 

2022년 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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