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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02/28 19:22

예전엔 강의동 세우기 바빴는데 잘 나가는 대학은 사정이 틀린가보다.

조합원 부당해고 관련 교섭 때문에 가봤다가 우연히 '찰칵'했는데,

다음부턴 좋은 일로 찾아갈 수 있길...

소복히 쌓인 모습이 더 좋았는데 내 카메라는 발빠른 아줌마의 손길보다 게을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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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8 19:22 2005/02/2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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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5/02/23 10:39

원래는 동의하지 않으면 광고성 스팸메일 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던 멀쩡한 법을 뜯어 고쳐,
수신거부를 하기 전까지는 보낼 수 있도록 해놓고...

 

이 덕분에 스팸메일 판 치는 세상을 결국 본 것 아니던가?

 

그러더니 이젠 수신자가 스팸할 이메일주소를 nospam.go.kr 에 등록시켜놓고
혹시나 등록된 메일주소로 스팸을 보내면 불법이 되도록 고친다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아니고,
국고 낭비 한번 제대로 하는구만.

 

* 음 하긴 전 스팸을 무지 싫어하는 편견있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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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3 10:39 2005/02/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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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02/21 18:10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2월, 꼭 껴입은 옷 사이사이로 칼바람이 스며든다.
같은 시기 몰아치는 또 하나의 칼바람, 보육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해고 바람이다.

 

언제나 2월이 되면 날리는 해고 바람의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다던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거다.

2월이 되면 어린이집 부모들은 설날로 잔뜩 비는 빨간색 휴일들을 바라보면서, 학교 입학 준비를 해야 하는 7세 아이들을 학원으로 옮기면서, 그렇게 원아들은 하나 둘씩 줄어간다.
원장들은 3월이 되면 다시 원아로 빼곡히 채워질 반임에도 불구하고 앞뒤 생각 없이 과감히 ‘경영상의 이유’로 교사에게 해고의 칼날을 들이댄다.
여성부 예산도 ‘보육료 지원 증가, 인건비 지원 감소’ 된 마당에 원장의 앓는 소리는 점점 높아만 간다.



혹시나 이 바람이 아니라면 다른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부담임이나 보조교사 또는 인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정체 모를 직책들이 어린이집 밖으로 쫓겨나가는 바로 그것이다. 대체로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이나 2월말 쯤 취업하여 일반 평교사와 동일한 근로시간을 가지면서도 계약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자신의 임금이 얼마인지 제대로 한번 묻지도 못한 채 ‘잘 보여 평교사 되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업무에 임한다.

 

올해 2월에도 어김없이 인턴으로 일하던 한 교사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근로계약서도 없고 근로기간 명시도 없이 그저 인턴이라 불리웠던 선생님의 자리.
1년만 지나면 인턴 딱지 떼고 정교사가 될 거라는 생각에, 동일근무시간에 동일업무를 하여도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봉투를 꿋꿋이 참아냈는데 결국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1년짜리 계약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그 어린이집 관계자중 하나가 지나가는 말로 던진 한마디는 바로 ‘인턴 1년 더 해볼래?’

 

그렇군. ‘우린 전문직’이라고 말로만 외쳐왔는데 결국 사용주가 인정해주는 건가? 2년이나 인턴 시키려고 하는 걸 보니 ...
그런데 왜 기간만 강요하나? 웬만하면 근로조건도 좀 맞춰 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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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1 18:10 2005/02/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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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2/13 20:46

[갤러리 현대]는 경복궁 오른쪽면의 '미술관의 거리'에 있는데 오늘 처음 가봤다.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다. 좁지만 깔끔.

그래도 왠지 Andreas Gursky 와 Thomas Struth 두 사람의 작품을 같이 전시하기엔 왠지 너무 좁아 아쉬웠던 공간...




토마스와 안드레아스는 독일사진의 미래라 불리우는 사람들이란다.

이번 작품들은 모두 사진이고, 가로 또는 세로 길이중 하나는 반드시 내 키보다 큰 작품이었다.

 

먼저 지하 1층의 토마스 작품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Thomas Struth

 

[Paradise 25]이라는 이 작품은 브라질의 열대우림인가보다. 우림을 보면 항상 느끼는게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인간이란 존재는 발디딜 틈이 없어보인다. 마치 오지 말라고 밀어내고 있는 것 같다.

희한하게도 계속 쳐다보면 사진의 가로 가운데, 세로 아래에서 1/3 지점으로 눈의 초점이 돌아와버린다. 그건 바로 그 지점 말고는 초점이 다 깨져서이다. 눈을 어디 둬도 소용돌이처럼 그 지점으로 고정된다.

 

 

[Pargamon Museum 2]인 이 작품은 베를린의 박물관인가보다.

박물관의 사이즈에 놀라워해야 할지^^;;, 어떤 건축물인지 몰라도 외벽을 통째로 옮겨놨다.

박물관에 갇힌 것 자체는 굉장히 답답해보이면서, 반대로 박물관안의 디스플레이만 생각하면 매우 세련되고 숨통 트여보인다.

 

[National Museum of Art Tokyo] 인 이 작품은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 그림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우러러보고 있다.

일본의 집단의식으로 해석할지 혁명에 대한 경외로 해석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하층민의 봉기가 조명발 좋은 두꺼운 유리안에서 번쩍이고 있는 이 언밸런스한 상황 또한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Andreas Gursky

 

[Klitschko]인 이 작품은 가운데 사각 링이 있는 걸 보니, 복싱 아니면 레슬링이나 격투기 같은데 잘 모르겠다. 가운데 메인 빼고도 스탠드만 3 단인 이 거대한 공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가은데 링만을 주시하고 있다.

묘하게 눈길을 끄는 사진이다. 사진과 동일한 사이즈 포스터가 있다면 사고 싶을 정도인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Hong Kong Stock Exchange], 이 엄청난 사람들이 보이는 사진은 가로로 나란히 걸려있었다.

오로지 주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이런 사진은 언제나 현대인의 공포를 자극하기 충분하다.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보다도 가치없어 보이는 자신...

 

 [Parada III], 이 작품은 프라다 매장의 검은 니트 옷이 엄청 곱게 접혀 전시되어 있다.

배경색도 좋고 디스플레이도 좋고...

그러나 공허함이 느껴지는 저 청결함에 질려버릴 것 같다.

 

 

이상하게도 토마스의 작품은 볼때마다 뭔가 불편하다.

사진을 못찍은 것 같지도 않고, 꽤 있을법한 장면들인데도 말이다.

이 불편함은 마치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곳에 뭔가가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간혹 그런 존재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물건이 되기도 한다. 

 

반면 안드레아스의 사진은 공허하다. 매번 깨닫는 사실인데도 현대는 정말 공허하다. 그리고 이젠 좀 적응될만도 한데 사진을 보니 또 느껴버렸다.

절어버린 사람들에게 잠시 눈감고 있었던 사실을 회귀하여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사진...

 

* 맨처음건 내가 찍은 거, 나머지는 : http://www.galleryhyund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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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3 20:46 2005/02/13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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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5/02/04 16:03

아니 뭐,

내가 일이 많아서 정신없었던 건 아니고

오히려 일해야 하는데 나의 머리속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심심치 않게 많았달까?

 

남들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나에게는 의미가 커보인 여러 일들이 촘촘이 들어선 한 주였다.



2일...

 

노조 소식지를 공공연맹 마스터기에 빌붙어 복사하려고 아침부터 공공연맹 사무실에 갔으나 마스터기 고장~~ 헉-________-;;

그러다가 간만에 본 감비에게서 커피 한잔 얻어먹으면서 1일 총연맹 임시대의원대회에 대해 들었다.

집에 TV도 없는지라 멍하게 듣고 있다가 금방 분위기 눈치 채버렸다.

나같은 허접한 인간하고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는 감비의 말 속에 침통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솔직히 매우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좀 쪽팔리고 비통하긴 한데,

언론의 근본을 파헤치지 못하는 보도 방식에 열받긴 한데,

한편 말로만 심각하다고 외친 '비정규', 노조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젠 더이상 빼도박도 못하고 물러설 수 없는 부분임이 확고해진 느낌도 있다.

 

사무실로 돌아와 미디어참세상 영상을 보는데,

머리속으로는 '전국비정규직 일반노조' 만들자고 해야 하나, 대의원부터 따내야 하는거였냐 같은 온갖 잡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3일...

 

사무실 이사 가야하는데 같이 가기로 한 단체 중 하나가 파토를 내버려서

갑자기 이틀안에 실평수 10평짜리 사무실 자리를 미친듯이 알아보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몇군데 찍어놓고 사무처장이 부동산 찾아보러 나갔다.

 

좀 있다가 여연 활동가가 문을 벌컥 열더니 "호주제 불합치 결정났어!"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좀 있다 다른 단체 활동가들도 돌아가면서 소식을 전해준다.

그래,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 불합치 결정이 났다.

3층 계단에선 여기저기 소식 알리기 바쁜 사람들이,

2층 계단에선 열받은 유림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저녁 11시가 되니 지율스님이 단식을 푸셨단다.

며칠전 정토회관 인터뷰가 더 충격적이었는데, 가시는 마지막길 잘 봐드릴 예정이라고...

사람은 이렇게도 죽는 거구나 싶다.

제발 별 탈없이 건강 회복하셨으면 좋겠다.

 

4일...

 

아침에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지율스님 옆에 계신 정토회관 스님의 전화인터뷰가 있었다.

공사중단도 아니고 조사나 한번 해달라는 거였는데 사람 죽일 뻔 했다.

 

법원에서 새만금 사업이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만큼 사업계획을 취소하거나 변경해야한다고 판결 났다.

 

YTN 에 갔더니 돌발영상에 "패러디"라는 영상이 올라가있다.

민주노총의 국회 패러디... 근데 얘네도 강경파라 쓰는군.. 음..

혹시나 궁금한 사람들을 위하여 URL을 ==> http://www.ytn.co.kr/spnews/sudden_list_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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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4 16:03 2005/02/0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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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2/01 20:18

.광개토대왕시기의 고구려

(아래의 내용은 호태왕비에 수록된 것임)

 

- 남만주 지역에 고구려 건국 100년전부터 중원의 지방정원인 현도군과 요동군 존재.

현도군은 한무제때 조선 동북부와 동만주를 지배. 그 뒤 고구려 판도내에 귀속되면서 혈전.

요동군은 중원 정권의 한개 변방 군현. 고구려에 의해 현도군이 무순으로 쫓기자 요동군이 부분을 현도군에 주고 고구려에 대항(400여년간).

5호 16국시대 모용선비 쳐들어와 미천왕 무덤 유물 도굴당하고 봉호라는 신하호칭 받는 치욕받음.

광개토대왕때 모용선비가 신성과 남소성 침략하자 숙군성 공격하고 요하벌 진출. 이후 북연과 중원들과 화친.

장수왕도 안정 고수. 이후 남방진출 도모

 

- 내몽골 동부 선비족은 거란, 고막해 ->8개부로 발전.

광개토대왕시기 392년 친히 거란 정벌. 포로 500여명. 소수림왕시기의 고구려 포로 10,000여명 귀환.

8개부중 비려가 계속 침략. 395년 다시 정벌.

당시 고구려군은 중국의 富山, 負山 거쳐 염수까지 들어가 무순 이남지방의 비려 3개 부락 600~700영 점령.

그 뒤 거란은 오늘의 대릉하 동쪽에 정착.

 

- 동부여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 초기 강성. 3대 대무신왕에 패해 고구려 부속국으로 전락. 훗날 중원과 연맹해 고구려 견제.

태조왕태 현도, 요동 등의 군현 및 고구려와 대적. 242년 관구검 침입시 위를 도움.

광개토대왕 말년 고구려는 동명왕 때부터 부여가 속국임을 운운하며 410년 국도 함락. 494년 완전 통합.

 

- 311년 고구려의 낙랑군(평양벌) 점유와 백제의 대방군(한강벌) 점유로 국경 접한 고구려 백제 100년간 혈전. 고국원왕때 백제가 평양성까지 침입.

광개토대왕 즉위후 첫해(391) 13개 백제성과 관미성(백제의 북침거점) 함락.

5개성 찾은 백제는 394, 395년 고구려 침입. 396년 고구려는 백제 정벌 단행. 한강 건너 서울까지. 백제는 항복후 1,000명 포로, 베 천필, 58개성, 700여 촌 바침.

황해 남, 경기 북, 서해안이 고구려에 복속됨. 광개토대왕은 백제왕의 아우와 10여명의 대신 데리고 개선.

397년 백제는 왜와 손잡고 398년 한산 북쪽까지 군사 출동. 다음해 신라 공격.

고구려는 신라의 군병 요청에 4000년인 해 50,000 보병과 기병 파견, 신라 구함. 신라는 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찾아가 감사.

404년 백, 왜 연합이 대방지구까지 침입. 적의 허리를 끊는 광개토대왕의 전술로 왜 침은 끝남.

407년 백제 정벌.



.위 기록은 호태왕비에 수록됨

 

- 그러나 중국고서적과 삼국사기사이에 어긋난 점이 있다. 신빙성은 크지만 글자 마모가 심해 해석 논쟁이 끊임없음.

국내성 지역은 청조부터 200년간 봉금지역. 청 말 봉금령 해제되면서 호태왕비 발견됨.

처음엔 이끼로 인해 몇자만 탁본. 초기 쌍구본 탁본 -> 석회탁본 : 학술상 글자 모양 논쟁 조성됨. 의도적 역사 왜곡 논쟁 야기(석회로 글자변조).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일본이 왜곡한 왜, 도, 해, 파(矮, 渡, 海, 破) 자를 폭로.

기타 나라에선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백제, 왜, 신라를 파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고 해석.

이 밖에 20년대 초 화재, 관리 부실, 글자체 뒤섞임으로 해석 어려움.

 

 

.호태왕비는 태왕릉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이 없다. 규모 어울림. 태왕릉과 비 사이엔 다름 무덤들이 있다.

묘비석 안치 습관이 광개토대왕부터 무덤위로 바뀌었다는 것이 태왕릉비에 나옴.

태왕릉은 서향, 비는 동남향.

태왕릉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은 고구려 이후 후세의 것. 비와 장군묘 사이엔 큰 개울이 흐름.

무덤이 무너질까봐 비는 평지에 세운 것이다.

방향은 시대적 차이(묘는 광개토대왕 시기, 비는 장수왕 시기)로써 관념이 교체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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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0:18 2005/02/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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