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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2...

곰탱이님의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 에 관련된 글.

 

 

3.

 

우리가 생산해야 할 진지의 거점은 현실적으로 일단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생산 장소로서의 지역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초까지 대학은 모든 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모든 운동 인자들을 생산하던 생산기지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미약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활동가들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고 또한 살려야 한다. 총연맹이나 산별 연맹 등의 노조 중심적인 체계는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노동계급 생산 기지 역할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체계는 자본과 직접적으로 격돌하여 싸우는 전장이기 때문이다.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이 행정 단위 구역으로 거의 조직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설령 조직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장소, 즉 예를 들면 노동회관 같은 자치의 장소가 확보되어 있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은 대체로 행정 구역 단위로 분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행정구역상 가까운 지역의 대학으로 아이들을 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대학에서 같은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서로 모여서 대학생 언니, 형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자치조직을 꾸려 가면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를 들어 쌍용차 아이들이 우울증을 겪거나 학교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하는 것 등에 의해서 고통과 아픔을 잘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으로서의 부모님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단사의 노조를 통해서 조직되기도 하지만 지역을 통해 서로 다른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사이의 협의와 연대를 통해 모든 문제를 개인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풀어가는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부모들도 새로운 노동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역운동을 지역의 노조 중심으로 풀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둘째, 대학 학생 운동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학 학생 운동 방향은 대체로 노동운동과 직접 결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에 있을 때 노동자 계급투쟁에 대한 소양을 넓히고, 노동자 집회에 참가하며, 노동자들의 투쟁 일정에 따라 학생운동의 사업 방향을 정하고 집행한다. 그런 과정을 다 거치고 난 후 졸업하게 되면 노조의 상근자, 또는 활동가로 진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학생 운동 활동가들의 기본적인 진로 경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생운동을 하겠다는 학생도 소수이지만, 졸업이 다가오면 대다수는 이 운동과정에서 이탈하여 개인의 생존을 위해 취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을 고립화시키는 것이며, 대학생 대중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대학생 대중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도록 한다.

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생산력의 생산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학생 도우미(대학학생운동 활동가)들을 일단 봉사 동아리 형태로 활동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대학생 도우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동아리 형태로 확보한다. 그 공간 속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학습, 취미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펼쳐 나간다. 이후에 각 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 안에 대회 협력부를 만들고 그 대외 협력부가 총괄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아이들과 관련된 여러 층위의 계급운동, 그리고 진보 운동과 연관한 사업을 공공연맹의 각 지부 또는 각 노조와 연대하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좀더 힘 있는 활동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에 종속된 하위 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코뮌 건설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대학은 대학생들과 새로운 세대의 연대와 소통, 그리고 이러한 연대와 소통을 바탕으로 하는 각 코뮌 단위들의 연대와 소통의 광장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코뮌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나이별, 학습별, 취미별의 여러 자치 활동 등으로 코뮌을 형성할 수 있으며, 어느 한 코뮌에만 속하지 않고 여러 코뮌에 속하게 된다. 이 코뮌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억압 받을 수 없다. 대학생 언니, 형 들의 코뮌은 노동계급 아이들 코뮌에 대한 대화 상대자이자 도우미 역할을 한다. 서로가 각자의 코뮌을 구성하고 운영해 나가되, 각각의 코뮌이 어떤 방식으로 자유로이 결합하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각자의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대학생과 아이들의 코뮌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해야 하는 아이들의 부모와 지역 노조 등이 모인 대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모이고 가르는 광장의 관계를 통해서 노동계급 아이들은 분업적인 인간이 아니라 총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차이를 이해하는 비판적 인간으로 자신을 매순간 새롭게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대학은 일상적으로 대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강사와 교수들 그리고 노동계급 활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하여 교육 프로그램의 방향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협의해 나갈 수 있는 연대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의 장을 통해 노동계급 아이들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통일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존 노동계급(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자신의 생산력을 새롭게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4. 

 

새로운 생산력의 증대는 노동자 계급인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 개인으로서 각 노동자의 단순한 임금 인상으로는 절대로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 증대시킬 수 없다. 그러한 임금 인상분은 자본에 적합한 인간을 재생산하는 비용으로 소비되어서 결국은 자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계급의 임금투쟁은 새로운 생산력 생산을 위한 진지 건설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다. 그럴 때 노동자는 고립적으로 투쟁하다 패배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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