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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 6.

따라서 맑스는 상품을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의 물질화”로서 고찰하였고, 그가 규정하고자 한 것은 우선 첫째로 양적인 교환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성격이다.(주19-) 맑스가 이 특수한 성격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정식화하고 있기 때문에, 맑스는 두 개의 상품에 포함된 “공통적인 제3의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노동을 이러한 제3의 것의 실체로 규정하기 위한 “배제방식”도 사용하지 않는다. 뵘-바베르크뿐만 아니라 새로운 비판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이의의 본질적인 부분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논증 과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증 형태들은 아주 그럴 듯하게 맑스가 『자본』 1판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대중화”에 근거한다.(주-20) 맑스가 분명하게 노동가치론에 대한 그 어떤 성질의 “증명”에도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노동을 교환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특징짓는 것이 동어반복일 수 있다라고 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의 그의 주장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Ⅱ.2/114; 13/22).

 

사람들이 맑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오해의 기원을 위에서 언급했던 비판가들을 통해 그들의 개인적인 한계에서 찾는다면, 그건 거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의 논증이 그의 고유한 경험적 문제 틀(Problematik)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가치론에 대한 증명의 결함에 주목하는 여러 비판가들에게 공통적이다. 맑스에게는 맑스가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현상들(이 현상들은 또한 하나의 모델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일 수 있다)로부터 출발하고 단순한 추상을 통해 그 현상의 (개념) 규정 요소들을 찾아내고자 한다는 사실이 가정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앞 장에서 서술되고 있듯이, 맑스는 곧바로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장에서 나타나는 경험주의와 손을 끊었다. 맑스는 경험론에서 단순히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여러 규정들의 연관이며, 따라서 개념적 구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경험적 현상들은 항상 이미 구성되어 있고, 단순한 직관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형태들로서 간주되는 특정한 사회적 형태들 안에서만 존재한다. 물론 맑스는 경험주의와의 이러한 단절을 단지 불충분하게만 반영하였다. 게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맑스는 사회적 형태들을, 즉 “경제적인 형태 규정들”을 찾아내는 것을 모든 정치경제학의 과제로 편성하였다.(주22-) 이에 반해서 『자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정치경제학이 비록 불완전하긴 하였지만 가치와 가치량을 분석하였고 이러한 형태들에 숨어 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내용이 왜 그러한 형태를 취했는지에 대한 문제를 결코 취급하지 않았다…” (23/94f)

 

 

맑스가 여기서 고전 정치경제학으로부터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문제로서 인식되지 못하는 문제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경험적인 현상들이 존재하고 단순하게 “주어진 것(또는 소여)”으로서 나타나는 그러한 사회적 형태들을 고찰함으로써, 맑스는 말하자면 모든 경험주의에 의해서 명백하게 감추어지고 맑스에 대한 현대의 비평가들이 그들 자신의 경험주의에 기초해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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