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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7
    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3)
    곰탱이
  2. 2006/09/11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2
    곰탱이
  3. 2006/08/23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1(5)
    곰탱이

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

아래의 내용들은 어제 배웠던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의 일부를 강사 선생님의 말씀과 강의록, 그리고 그 말씀과 강의록을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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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화이론연구소-08여름강좌>


# 유물론적 페미니즘 #

(강사 : 문은미 tothemoon00@naver.com)


@ 2강. 가사노동 논쟁 @ 


**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은 나의 졸고들에서 이야기되었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렇지만 결이 다르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은 벌써 3,40년 전에 했던 논쟁들이다. 60년대 말서부터 70년대 말까지 이루어졌던 논쟁들이다. 그 이후엔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요즘 들어 다시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의들이 살살 고개를 들고 있단다.

여기에 나와 있는 가사노동 논쟁들은 가사노동을 협소하게 기능적 측면(예를 들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 기르고 등등)에만 한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 지점이 결과적으로 가사노동이 자본을 생산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치 있는’ 노동인가 아닌가 또는 이 두 논의들을 부정하면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이 논의에서는 사회화된 무엇이라고 하는데 사회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함으로써 신비화된 무엇으로 남게 된다)으로 봐야 한다는 데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의의 지점을 이런 기능적 측면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인간을 생산’한다는 총체적인 측면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자본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이다. 이는 자본이 가정, 가족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가족 이데올로기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엄마가 뿔났다]라는 주말 연속극을 보라. 엄마(정한자)가 안식년 휴가 1년을 달라고 했을 때 가족 구성원 대다수가 엄청 반대했다).

그런데 자본은 이 구체적인 자본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인 가사노동의 비용을 전혀 감당하지 않는다. 만일 자본이 이 비용을 떠안게 되면 그 즉시 자본은 자본이 아니게 된다. 자본은 그 비용을 개별 남성 노동자에게 떠넘기게 되었고, 그 개별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생산노동을 여성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만일 이렇게 여성 노동자에게 노동력 재생산 노동을 떠넘기지 않게 되면, 자본은 남성 노동자에게 그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따로 계산해야 되고, 그러면 현재 임금의 몇 배를 남성 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도 자본이 모두 대야 한다. 한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들어가는 총비용을 1억 정도라고 치고, 그 아이들을 500만으로만 잡는다 하면 과연 얼마인가! 아마도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이다. 자본이 이 비용들을 댄다면 자본은 또한 더 이상 자본이 아닐 것이다.

자본이 자본이기 위해서는 <자본 = 남성 노동자 임금 = 여성 가사노동>이라는 먹이사슬 구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맑스의 상품교환관계 형태로 바꾸게 되면 <여성 가사노동 = 남성 노동자 임금 = 자본>이 된다. 여기서 자본은 ‘등가 형태’인데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절대적인 보편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남성 노동자 임금은 자본에 대해서는 ‘상대적 가치형태’인데 자본에 의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개별자이지만, 여성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등가형태’로서 보편자가 된다. 자본은 이러한 먹이사슬 형태를 끊임없이 유지해야 자신의 몸집을 끊임없이 불려나가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자본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계급 문제와 연관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먹이사슬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은 자신 속에 이러한 가사노동의 착취와 억압을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해방을 이루려면 먼저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착취와 억압 관계 방식을 철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철폐는 자본 생산의 물적 토대인 <여성 가사노동(상대적 가치형태, 개별자) = 남성 노동자 임금(등가형태, 보편자)>라는 관계 구조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야 한다. 뒤바꾼다는 것은 이 둘 사이의 위치를 단순히 바꾸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단순히 바꾸는 것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착취, 억압의 구조는 그대로인 채 얼굴마담만 바꾸는 격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뒤바꾼다는 것은 보편자가 되는 형식을 바꾼다는 것이다. 즉 등가형태의 자리를 차지하여 영원히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등가형태의 자리를 여성과 소수자에게 넘겨주어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문제를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관계 맺음 방식을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최근의 촛불집회에서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그 의견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좀더 깊이 있고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통일시킴으로써) 자신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광장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가타리는 이 광장문화 만들기를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로 표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생산되는 인간을 맑스는 공산주의 인간, 즉 각기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의 사회적 인간이라고 하였다.

이제 나의 얘기는 일단 접고, 나의 얘기가 여기에 나와 있는 페미니즘에서의 가사노동 논쟁과 어떻게 결이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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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틀 ★


1. 여성 노동

- 이것과 관련해서 크게 3가지의 논쟁 흐름이 있다고 한다.

- ① 노동 X ---> “노동”   ② 가치 절하(미숙련) ---> 제대로 된 “가치평가”(숙련)   ③ 노동의 성별 분업

- 이 3가지의 논쟁 흐름의 문제의식은 <왜, 여성의 노동이 저임금, 불안정, 미숙련 노동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 ①과 관련해서 이전에는 여성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현재 와서는 노동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여기에서 노동이라는 것을 자본주의 시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노동’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상품(가치)을 만들어 내는 노동’, 즉 직접적으로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해야 이해하기가 훨씬 쉽고, 논의의 맥락을 잘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②나 ③의 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②와 관련해서 이전에는 여성노동이 가치 절하되었는데 현재 와서는 이 여성 노동이 제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가사노동 중에서도 특히 감정노동이 임금노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마트 판매직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웃으며 친절하게 손님을 맞아 물건을 판매하는 것은 미숙련 노동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기간을 거쳐 아주 숙련된 노동에 속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여기서 가치 절하라는 것은 가치 즉 자본을 생산하는 데 있어 쓸모없다거나 아주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으로 봐야 하고, 제대로 된 가치평가는 여성노동이 충분히 상품화되어 자본을 직접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③과 관련해서 노동의 성별 분업은 바로 이전의 여성노동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같다.   

▶(나의 생각) ①과 ②의 논쟁의 결과로서 ③이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 노동이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성별 분업의 철폐는 여성 노동을 모두 임금노동, 즉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으로 만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성별 분업의 철폐는 자본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자본은 상품화가 가능하다면 무엇이든지 상품화시키려고 한다. 이 논의는 자본의 상품화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2. 가사노동 

- 가사노동과 관련해서 크게 2가지의 논쟁 흐름이 있다고 한다.

- ① 생산노동/비생산노동     ②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

- ①과 관련된 논쟁 틀은 맑스주의 문제의식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생산노동과 관련하여서는 다시 이 생산노동이 ㉠ 소외된 노동 ㉡ 소외되지 않은 노동 2가지로 나뉘게 된다고 한다.

▶(나의 생각) ①에서 생산노동/비생산노동이라고 할 때 ‘생산’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자본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설명 가능한 것이 되려면, 어쨌든 가사노동이 자본의 이익을 생산하는 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②와 관련된 논쟁 틀은 ①의 논쟁 틀이 가사노동을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가사노동을 사적인 영역의 노동으로 봄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체제 안에서 가사노동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게 되는 꼴이 됨으로써 가사노동을 통한 여성의 억압과 착취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그 무엇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②의 견해는 어찌 보면 ①의 비생산노동의 견해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후자는 어쨌거나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만, 전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가사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런 관계도 맺지 말아야 할 것들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촉발되었던 ‘신 존재 증명’ 논쟁에서의 딜레마를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똑같은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 또한 이것은 바로 다음에 ‘여성노동’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 가부장제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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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2

<여성의 임노동은 매우 값싸기 때문에 자본에 유리하다. 여성들의 임금은 여성들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지불받고, 노동력의 가치 면에서 남성보다 낮은 상황에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노동의 이런 면들은 명백히 자본에 유리하다. 왜냐하면 임금 수준을 전체적으로 낮추어 주기 때문이다. 비치는 여성이 자본에 이런 이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9쪽)
<기혼여성 노동자의 경우 국가보험과 사회보장 제도에 의해 남편의 피부양자로 간주되어 여성이 실업 상태에 있을 때 그녀의 재생산 비용은 남편 임금으로부터 충당된다. 그러므로 기혼여성을 고용하는 개별 자본가는 여성의 임노동이란 아내와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이용해서 임금을 매우 낮게 지불하고, 여성이 하나의 노동자로서 자신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여성들이 재정적으로 남편(혹은 동거인)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가족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으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낮은 임금을 지불받게 되는 것이다.>(이 역시도 비치의 견해) 
(40쪽)
⇒ 그런데 이러한 비치의 주장이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가족이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가족만을 단순히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공동체(코뮌)를 염두에 두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미셀 바렛이 비치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봐서) 또한 비치가 단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주장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하다. 만일 비치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문제 삼는다면,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이중적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남성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착취 받는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가사노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이중적 구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개량적인 측면이 강하다. 만일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체계를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자본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하여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화시키거나, 아니면 동일 임금 체계의 영역에서 벗어난 노동자들(하위 주체)의 상대적인 임금 삭감을 하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가 아니다(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성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에 기여한다는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기본적인 전략은 노동을 개별화하는 데 있다. 자본은 자기 자신을 보편자(인간 실천 활동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 활동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착각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초역사적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동자를 추상적이고 순수한 개별적 개인(예를 들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개인)으로서의 개별자로 만들고자 하고, 또한 만든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가 인간(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되는 사회적 인간, 즉 유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부터 보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간(개인)은 사회적 인격(사회적으로 인간임을 인정받는 보증서와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 비인간이 된다. 자본은 바로 자기가 이러한 보편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이것을 자본의 물신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자본은 노동자에게 보편성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은 보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는 자본의 보편성과 완전히 다르다. 이 보편성은 인간 실천 활동(생산 활동, 노동)의 결과물로서의 보편성이며, 절대적 보편성이 아닌 역사적 보편성(상대적 보편성)이며, 과정으로서의 보편성이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보편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의 보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노동은 보편성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발전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산물인 노동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으로 대표되는데, 이 임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은 노동자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1대1의 계약 관계를 통해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노동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노동자의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노동의 보편성을 자본으로부터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노동에는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임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에는 임노동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필수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노동이 있다. 이 노동은 임노동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철저하게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삶을 계획하며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인간 유적 존재의 보편성을 현실화시키고 실현시키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노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은 여성의 노동, 특히 여성의 가사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노동이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노동이며, 인간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노동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을 생산하는 노동이며, 계급의식을 형성하며 보편화시킬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는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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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1

이 글은 얼마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 것입니다.

< > 부분은 아래의 책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고,

화살표(==>)로 된 부분은 제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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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 정치학』(미셀 바렛 외 지음, 신현옥?장미경?정은주 편역, 여성사, 1995)

 

Ⅰ. 미셀 바렛 : 오늘날의 여성 억압

 

■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문제점>

 

<“비록 자본가 계급 남성과의 결혼이 여성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그녀를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녀 자신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부르주아 남성의 부인들은 대부분 임노동자나 월급쟁이처럼 자신의 생계비를 벌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한다. 그래서 사실상 여성들은 (나이나 전문 직종의 훈련 부족이라는 추가적인 불리함과 함께) 본질적으로 존재해 온 프롤레타리아트이다.”(크리스틴 델피, The Main Enemy)>
(28쪽)

⇒가부장적 착취 체계 : 자본가 계급과 결혼한 여성은 자본가 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PT 계급의 일원으로서 PT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부장제 개념을 특정한 배경 하에 사용하는 방식은 최근의 이론 작업에서 상대적으로 드물어지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현대 자본주의를 ‘가부장제’로 좀더 일반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들이 많다. 이렇게 할 경우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첫째,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관계의 조직과는 완전히 독립된 지배 체계로 이해되며, 따라서 이런 분석은 앞서 논의했던 생물학주의처럼 보편적?초역사적 양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남성지배 체제로서 가부장제를 구성하려고 할 때, 이 개념은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경직성을 띠게 된다. 이런 문제는 최근에 유물론적 페미니즘에 정신분석학적 전망을 통합해 정식화해 보려는 복잡한 시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가부장제를 현재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버지의 지배로서의 가부장제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로서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논의가 근본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가부장제 개념을 맑스주의 분석과 결합하여 사용하려는 최근의 시도들 가운데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 Einsenstein)이 편집한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입장』(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은 이런 주제 하에 여성억압과 자본주의에 대한 몇 가지 흥미 있는 글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결국 대립적인 두 이론적 접근 방법을 화해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딜fp마에 봉착하고 있다. 아이젠슈타인 자신은 가부장제란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것이며, 오늘날 ‘성역할에 기초한 남성권력’에 의존하고 있고, 또 핵가족 내에 제도화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의에서 가부장제는 어느 정도까지 자율적인 체계를 형성하는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이젠슈타인은 가부장제가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이용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단순히 언급하고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급은 자본주의가 곧 가부장제이다라는 주장과는 병존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이젠슈타인은 가사노동을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관점에 따라 매우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가부장제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가부장제’를 자본주의로부터 분석적으로 독립시키는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외재적인 남성권력 체계로서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쪽과 가부장적 조직관계가 자본에 기능적이라고 주장하는 쪽 사이에서 그녀의 분석은 동요하고 있다.>
(29~31쪽)

⇒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단지 기능적 결합이라거나 (서로 독립적으로 병존하면서) 어느 쪽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그런데 이것을 애초에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켜 버린다면, 환원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기초는 (현실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또는 새로이 생산하는 개별적 여성의 가사노동이다. 이 속에서 개별적 여성의 노동력은 착취되고, 사적인 것으로 타자화된다. 이러한 착취와 타자와의 해체를 통한 여성해방은 곧 자본주의의 기초를 해체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즉 여성해방은 곧 노동해방과 직결된다. 이는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라고 불렸던) 기존의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을 남성?정규직 노동자로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노동계급의 외연과 내연의 양 측면 모두에서 그 규정을 새로이 구성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 기존 맑스주의에서의 노동해방을 통해 여성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여성해방을 통해서는 노동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

⇒ ① 페미니즘(특히 이리이가레)이 처하고 있는 난점 - 여성과 여성과의 관계(연대)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위 논문의 3장 1절에 나오는 상품 관계 도식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 ②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을 통한 공동체 형성은 개별적 가족, 개별적 여성의 가사노동의 해체를 통한 여성의 주체화와 그러한 가사노동의 공공화?사회화를 통해 가능하다. 학위 논문 3장 1절에 나오는 상품 관계 도식을 참조해 보면 일단 보편의 자리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억압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에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란 여차저차한 현상이 어떤 경우에 나타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른 조건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능주의라기보다 오히려 환원주의이다. 이 경우에 성별 관계(gender relation)는 자본의 작용 결과로 환원되고 있다.>
(38쪽)

⇒ 환원주의적 설명에 따라 성별 관계가 자본의 운동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타자에 머물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이때 노동자의 의식은 ‘사물화된 의식’(즉자적 의식)에 머무르고 만다), 주체로서의 여성을 타자에 머물도록 한다. 이럴 경우 맑스주의 운동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며, 결국 자본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돼 버리고 만다.

⇒ 노동자의 이중적 모순 : 노동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와 비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 사이의 모순(이때 노동자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은 → 계급과 젠더 사이의 모순으로 나타나며 → 이는 곧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 이러한 모순의 지양(해체)(지배와 억압의 지양)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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