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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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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다.

오랜만에 두 아들 다 군대 보내놓고 허전할 것 같은 오빠네 집에 갔다.

큰애는 말년휴가를 받아서 집에 와 있다.

 

요리가 취미인 큰애는 만두피를 빚어 만두를 만든다고 수선이다.

그 옆에서 거들고 있는데

오빠가 와서 "그걸 사다하지 어쩌구 저쩌구" 잔소리가 많다.

조카는 살짝 성질을 내며 "아빠 오늘 왜그래?" 한다.

 

썰렁해질 뻔 한 상황.

이제 오십이 넘은 새언니가 아들에게

 "고모들 와서 좋아서 그러지"한다.

뻘쭘해진 오빠는 슬쩍 소파에 가서 앉는다.

갑자기 분위기는 스르르 풀리고

각자 다들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자기 일을 한다.

티브이를 보거나 만두를 빚거나 개랑 놀거나...

 

직면.

감정에 직면하는 것. 몰라서 못본 것.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은 것.

우리 오십이 넘어도 새언니인 우리 언니가 한 것은 그것이었다.

 

몇십년을 얽혀서 산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잘 못 본다.

엉켜있는 복잡한 감정이 그걸 가리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관계성에서 무능한 가부장인 우리오빠.

마누라님 없으면 어찌살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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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 09:08 2007/02/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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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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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동자석일까..
밤이면 무서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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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5 01:23 2007/02/15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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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작된 게임은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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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엠님의 [산타 이벤트] 에 관련된 글.

알엠님 덕분에 1년전 글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올해는..

올해 쭌이는 7세반을 일년 더 다니게 되어 유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치원에도 역시 산타가 온다.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산타에게 원하는 선물을 편지로 쓰게하고 그걸 부모에게 몰래 붙이는 정도..

역시 난 선물을 몰래 가져다 주어야 했기에 우체국택배로 유치원으로 붙이고.

 

쭌에게 올해는 산타가 뭘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냐고 했더니

**전사세트란다. 뭔가 쪼잔해 보여서..( 그 쪼잔하다고 생각했던 **전사세트는 4만원이나했다 - -) "일년에 한번인데 너무 약소하지 않아?" 했더니만

"전세계 애들에게 다 선물을 주려면 바쁠거야 "한다.

 

쭌이 선물을 받아들고 온날

"올해는 직접오셨든?" 했더니

그렇단다. 근데 너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수염이 많아져서 한쪽 눈이 안보였다나 어쨋다나..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나 했더니만 24일 밤.

"오늘 밤엔 뭘가져다 주실까?"

허걱.. 무방비 상태의 어른들은 쭌이몰래 부랴부랴 마트에 갔고.

이미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한 나는 아아주 실용적인 책가방을 사왔다.

다음 날 아침.

쭌이는 이 실용적인, 그리고 제 소원과도 다른 선물을 놓고 매우 실망스런 모양이다.

 

나...은근히 떠 본다.

"근데 이제부터 초딩인데 초딩한테도 산타가 선물을 가져다 줄까?"

"글쎄.."하는 쭌. 그러나 이미 시작한 게임이다. 내가 멈출수는 없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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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4 13:33 2007/01/0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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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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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나나님의 [이유식 제대로 하기 쉽지 않다] 에 관련된 글.

미루 이유식 이야기를 보고 기억을 더듬어 내가 쭌이 키울 때를 생각해보니

내가 해준 이유식이라고는 쌀죽이 전부였던것 같다.

그리곤 바로 밥상에 앉아 밥풀먹이기로 시작해서 밥으로 넘어갔다.

 

요즘도 식사는 거의 할머니가 준비하시기 때문에 엄마가 해주는 밥이라고는 일주일에 한번만 먹기로 한 라면을 토요일 점심에 끓여주는 것.

물론 쭌이가 좋아하는 메뉴라 무척 좋아한다.

 

사람이 나이 들면 엄마가 해준 밥 어쩌구 하면서 엄마=밥이랑 연결해서 떠올리곤 하던데 갑작스레 민망해지면서

 

"우리 쭌이는 나중에 엄마가 해준 음식이라곤 라면밖에 생각나는게 없겠다."

했더니 쭌이 "엄마. 만두도 있잖아" 한다.

 그래.. 고향만두도 있지.. - -; 고맙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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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30 15:17 2006/11/3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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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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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태어난지 이.삼년된 아가들과 지내고 있다.

 

나는 내가 좋은 교사인지 늘 고민한다.

아니.교사란 어휘가 이 사회에서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싫어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에 좋은 어른인지 늘 고민한다.

 

보통 유능한 교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이들을 통제하고 일과를 유연하게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거기다가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좋은교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능한 교사'라거나 '좋은교사'라는 애매한 기준보다 '행복한 교사'라는 기준을 선택했다. 그래서 오늘도 난 나는 행복한가? 나와 지내는 아이들은 행복한가? 라고 나에게 묻는다.

 

노동자인 나의 행복지수를 결정하는 여러가지 요인들 중에서 내 스스로 조절이 가능한 항목은 별로 없다. 그나마 내가 속한 공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과 나의 관계이다.그래서 내 고민은 이곳에 집중한다.

아이들과 나.

 



 

신발을 신발장에 넣지 않으면 고양이가 물어 가고.

낮잠을 안자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가는데 그러려면 소나무에 잠자지 않는 아이를 걸어 놓아야 한다.

지하실에 내려가면 지하도깨비가 있어서 아이들은 지하실에 가면 안된다.

밥을 안먹으려고 하면 그 밥을 빼앗아가려고 창밖에서 기다리는 지빠귀가 있다.

아이들은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으며,

함께 지내는 어른들은 그 귀신들로 부터 아이들을 지킬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게다가 아가처럼 굴면 형아가 될 수 없어서 큰반으로 올라갈 수 없고.

반대로 아기가 되어 작은반으로 내려 갈 수도 있다.

이를 안닦으면 곰곰이 벌레가 이를 다 파먹어버린다.

손가락을 빨면 손가락이 다 달아져서 없어진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전달할 뿐이다.

'자율적인'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침에 엄마와 헤어지기 힘들어서 현관앞에서 들어가기를 저항하는 아이 옆에 앉아

닥친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며 위로를 하고 있는데 대문이 스스르 열린다.

아무 생각없이 "어 아무도 없는데 대문이 왜 열리지?"하고 말했다.

아이는 공포스런 얼굴로 두말도 없이 재빨리 현관으로 들어간다.

이제 태어난지 삼년이 된 그 아이의 머리속에서 재빠르게 일어난 연상은 굳이 유추해석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좀 살만한 곳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난 일상적으로 일과를 유연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이러한 언어들에 '공갈협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상에서 사실이 일목요연하게 들어나고, 그것의 목적과 효용을 확인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하는 행위의 의미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행위를 인식하면서 그 공간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귀신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이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마음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지금 밥을 안먹으면 나중에 줄 수 없는데 그럼 이따가 배고파서 어떻게 놀겠니"

"지금 안에 친구들만 있어서 나는 너를 더이상 도와줄 수 없는데 빨리 들어가자"

"니가 지하실에 내려가면 위험한 것이 많은데 난 니가 다치는게 싫다."

기타등등..

 

"도깨비 온다" 한 마디면 될 상황에 긴 이야기를 늘어 놓아야 하니

이야기를 나누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더 분주하고 어수선하기도 하다.

목도 아프고 힘도 더 든다.

아이들이 내가 하는 이야기의 전후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마음은 편안하다. 그 아이와 나 사이에 거짓은 없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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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1 00:35 2006/10/1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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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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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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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0 23:53 2006/10/1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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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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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엠님의 [한별의 사정] 에 관련된 글.

아이를 어린이집이라는 첫 사회로 들이밀면서 첨에는 아이가 교사에게 사랑받으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마음을 지배한다.

3.4세의 영아들의 경우 친구란 같이 노는 존재이긴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친구는 옆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하거나. 내 놀이감을 빼앗거나 나누어야 하는 존재인것 같다. 그 또래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른과의 상호작용이다.

이맘때는 맘에 드는 교사를 만나면 부모의 맘은 편해진다.

 

그러나 5세가 되고나면 또 다른 걱정이 든다.

이 시기 아이들은 친구들과의 연합놀이가 발전하게 되고 아이들 사이의 인기도는 어린이집 생활에서 중요한 만족요인이 된다. 아이에 따라서 자기만의 세계가 더 중요한 경우는 좀 덜하지만 관계지향이 많은 아이들은 늘 친구들 때문에 맘이 상한다.

이맘때 부모는 좌절한다. 아이의 친구와 함께 놀고자 하는 욕구는 내가 어찌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교사는 아이에 따라 적절한 놀이구조를 짜주고 아이들 각자가 소외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지만 아이의 기질상 다른 친구들과 갈등을 많이 만들경우 교사의 어쩌지 못하는 한계에 다다른다.

 

5세때 쭌이는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역시 2월생인 쭌이는 기저귀도 늦게 떼었고, 침도 오래 흘렸다. 그래서 친구들은 쭌이를 아가취급했다.

그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쭌이는 관계지향이 많은 아이였고 어린이집 생활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에 몹시 당황하고 속이 상했다. 내가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 쭌이가 놓여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상황을 개선해 주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화도 났었다. 나름대로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우리집에 친구를 초대해서 같이 놀게도 해주고. 쭌이가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뒤지지 않도록 열심히 집에서 놀아주어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7세가 되어 새로 선생님이 바뀌었고. 쭌이도 컸다. 새로온 친구중에 쭌이의 베스트 프랜드도 생겼고 상황은 많이 호전되었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나는 쭌이를 입학유예시키고 유치원에 보냈다. 친구들이 다 학교에 간 어린이집에 다시 보낼 수가 없어서.

 

쭌이가 유치원에가서 얼마 후 자기가 역할놀이에서 아빠를 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한다. 쭌이도 역시 어린이집에서 강아지였다. 강아지로서도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도 있지만 쭌이는 아빠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나보다.

그러나 상황이 종료된것은 아니다. 여전히 쭌이는 내가 모르는 세계에 속해있고, 나는 쭌이의 세계의 1/10도 알지 못한다. 불안은 여전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내 맘속에서는 쭌이의 몫을 쭌이에게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의 사생활을 인정하려는 것이다.

여전히 한쪽 귀는 열어둔채 쭌이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때를 기다리며..

 

요즘은 가끔 둘만의 저녁 산책을 나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들의 사생활을 캐내는 시간이다.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준 반지가 다른 여자아이 손에 들어간 사실이며. 그때 쭌이의 기분은 어땠는지. 기타등등..

우리 아들의 태도와 또 그 여자아이의 태도가 다 맘에 안든다.

으이구..좀 더 쿨하게 살면 안되나..하면서..

 

이대로 그냥 가면 못말리는 시어머니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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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3 01:12 2006/09/23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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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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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들을 처음 만나면서 느낀 느낌은 뭐랄까??

이랬다.. 왜 쬐그만 아가들이 화가 나 있는 걸가?

혹시 이래서는 아닐까?

한달만에 우린 좀 편해졌지만.. 이 그림이 오래도록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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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9 23:27 2006/09/1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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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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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놓기에 열중하고 있는 쭌이 옆을 뒹굴거리다가 책꽂이에 눈에 잡히는 책이 있어 뽑아들었다.

첫장에 "1999년 9월29일 아기를 기다리며..."라고 써있다.

 

"쭌. 여기 이 아기가 누구게?"

"나겠지뭐. 그럼 내가 그걸 다 읽었다는 뜻이네. 한번읽어봐"

 

헉.223쪽의 책을 읽어보라고??

"다 읽기는 그렇고...내가 골라서 읽어줄께.."하고 띄엄띄엄 읽기 시작한다.

 

..저자는 그러한 부모의 역할을 한마디로 자신의 집을 찾아와 잠시 머물렀다가 길을 물어 떠나는 손님을 환대하는 주인의 마음가짐으로 설명합니다. 주인은 손님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손님에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믿음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대의 아이라 해서 그대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은 생명의 소망이 낳은 아들이며 딸이다.

그대를 거쳐왔지만 그대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지만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가졌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는 아이와 같이 되려고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삶이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 것이므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

엄마 왜 안읽어?

으...응. 끝이야...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꿈속에서도 가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이 대목에서. 갑자기 삼년 사귄 애인한테 청첩장을 받은 것 처럼 띵~ 하다.

 

그렇구나. 그걸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부모 노릇이구나...

그렇구나.



이건 덤..

저자는 이런 것이 아이들에게는 삶의 무기라고 한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분명한 척도

 

-과거의 유산 중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는 예민한 감수성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하고.삶의 공간을 넓혀 가는 자유로운 창조적 사고

 

-컴퓨터에는 없는 인간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의 논리

 

-곤경과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자세와 의지력

 

-낙관적인 삶의 태도

 

-신의 피조물인 자연에 대한 경외심. 그것은 가령 삼림을 해치는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고 불필요한 자동차 이용을 자제하는 일과 같이 사정에 따라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솔찍한 심정을 표현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갈등을 해소하고 타인과 화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자세

 

-사랑의 능력. 곧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나도 이런 사람이고프다..근데 이것이 내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기가 될 것이라는 것에 동의?

반쯤..또 반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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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9 23:02 2006/08/2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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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교사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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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상에 태어난지 겨우 이,삼년이 지난 어린 것들과 지낸지 삼 주가 되어간다.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덕분에 '아이=천사'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가끔은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한다.

함께 지내는 어른들에게 불가항력이 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으니까.

 

개성넘치는 열명의 아이들은 함께 지내는 두명의 어른에게 하루종일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 '요구'가 내 몸이 부서져라 다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안타깝게도 그 요구는 대충 이렇다.

 

첫째,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아이: 엄마 언제 와?

나:    음..낮잠 자고 일어나서 간식 먹으면 오지

아이: 엄마 보고싶어..으왕~

나:    엄마 보고 싶어? 엄마도 너 많이 보고 싶을꺼야. 우리 코 자고 나서 엄마 만나자

아이: 엄마 보고싶어~~~~~~~~~~~~~~~~~~~~~~~~~~~~~~~~~~ 

 

안아서 달래주고. 재미있는 놀이로 꼬여보기도 하고. "엄마한테 전화하자, 여보세요 00엄마지요? 예..그때 오신다구요..그때 뵈요.." 가짜 전화로 사기도 치고..그래도 저 울고 싶은 만큼 다 울고 나서야 그친다....

이럴 때는 나도 우리엄마 보고 싶다.

 

두번째, 우긴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애꺼 슬쩍 가져온다.

물론 억울하게 빼앗긴 아이는 바로 달려들어 뺏어오거나. 상대편에게 상해를 가하거나. 운다. 날 쳐다보면서.

 

나:    그거 00가 가지고 놀는건데 그냥 가져오면 00화나잖아. 빌려달라고 해야지.

아이:아니야! 내꺼야.

나:   그거 니꺼야?

아이: 내꺼야.

나:    그거 00가 가지고 놀던거잖아? 너도 가지고 놀고 싶어? 저기 있네. 저거 줄까?

아이: 아니야. 내꺼야.

 

정의와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저 내가 00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럴때는 다른 대체물도 필요없다. 똑같은 다른 놀이감도 필요없다. 내가 쥐고 있는 이것만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귀중한 것도 아니다. 상황종료후 다시 보면 그 놀이감은 모두의 관심을 못받고 한쪽에서 뒹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째, 나만 봐...한다.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슬프거나 억울하거나 속상하거나 아프거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나에게 자기를 보아달라는 것임으로 당장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다른 아이가 온다. 나에게 요구한다

 

아이: 우르릉 꽝꽝 틀어줘(천둥이라는 제목의 노래)

나   : 00이가 속상한가봐 잠깐만 기다려봐 00이 이야기좀 들어보고 틀어줄께.

아이: 우르릉 꽝꽝 틀어줘(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나   : 알았어.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 노래를 틀러간다)

다른 아이: 나 그 노래 싫어. 그 노래 틀지마...

 

00는 내가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았음으로 더 서럽게 운다. 노래를 요구한 아이는 옆에서 노래를 틀지 말라는 아이의 요구를 듣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들으면서 "노래 틀어줘"를 소리친다.

이 순간 또 다른 아이 하나가 문을 열고 맨발로 마당으로 뛰쳐나간다면?? 상황은 더 끔찍해진다.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쓴다.

오늘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더러는 기술적으로 요령이 부족했고.

더러는 아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해서 헛다리를 짚었고.

더러는 평상심을 잃어 상황을 악화시켰고....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아이들도 나도 그곳에서 하루종일 행복했으면 좋겠다.

근데 그 균형이 일시에 깨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난 나를 돌아본다.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 진심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초보 보육교사의 일기는 매일 밤 계속된다.

그것이 내가 무능하지 않다는 걸,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유일한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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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4 01:21 2006/08/24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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