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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24
    [근조]정태영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평발

[근조]정태영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정태영 선생이 돌아가셨다.

 

나는 그 분을 민주노동당 당사에서 뵌 적이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이 막 나왔을 때라고 기억한다.

 

그 분은 그 책들을 손에 들고 정책연구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써가며 책을 주고 계셨다.

 

난 정책연구원도 아닌 주제라서, 옆에서 어색하게 '저 아저씬 누구지?'라며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조봉암과 진보당>을 꺼내들게 되었다.

 

그리곤 기억에 묻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선생의 부고기사가 눈에 띠었다.

 

아~ 그 때 그분이 돌아가셨구나.

 

난 그 책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소위 개량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방식에 대해,

 

그리고 그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 대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아주 쉽게 '개량'이라고 붙인 이름이 부끄럽다. 개량이 있으려면, 진본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생각했던 진본은 무엇이었을까? 실체가 있는 것이었을까?

 

결국,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내안의 진본에 기대어 '개량'이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니.

 

허망하고 허망했다.

 

정태영 선생은 작년 민주노동당의 당내 갈등에 대해 많은 상처를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마음이 아프다. 살아있는자에겐 지속되는 삶에 의해 '새로움'이 보일 테지만, 삶이 멈춰진 선생의 기억속엔 지금 모습만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당장 빈소는 찾아뵙지 못하지만, 나중에 아무도 찾는 이 없을 때 소수한병을 사들고 인사를 가야겠다.

 

날씨만큼, 기분도 쓸쓸하다.

 

 

'진보당 사건'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박사 별세
[弔辭] 진보 정당 실천 위해 일생 바친 큰 스승
등록일자 : 2008년 03 월 23 일 (일) 14 : 07   
 

  1956년 진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정태영(78) 박사가 지난 2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빈소 : 강남성모병원, 발인 3월 24일).
  
  정 박사는 진보당 사건 때 "북한에서 교육 받은 이론가"로 몰려 조봉암과 나란히 재판을 받았으나 3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는 4·19 혁명 직후 혁신계에 참여하는 등 그 후에도 진보 정당을 향한 정치적 실천을 계속했다.
  
  말년에는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를 연구·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그 노력은 <조봉암과 진보당 :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후마니타스 펴냄)과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후마니타스 펴냄)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갈무리됐다. <프레시안>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조사를 싣는다. <편집자>

  
  진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정태영 박사. ⓒ경향신문

  정태영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청년기를 살았다.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지만,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당시의 현실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어 스물여섯 되는 해 조봉암을 만나 진보당에 가입했다. <동양통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진보당 안에서는 '동화'라는 가명으로 청년 조직을 확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봉암 사건 때 "북한에서 교육받은 당 이론가"로 몰려 조봉암과 나란히 재판을 받았다. 3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감옥을 나오면서 옥중의 조봉암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때 조봉암은 자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은 진보당을 재건하는 것이라 당부했다. 그 말을 깊이 간직하면서 선생은 평생 진보정당에 대한 신조를 굽히지 않고 살았다. 4.19 직후 혁신계에 참여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3선개헌 반대특위에 참여했으며 신민당 노농국장을 지냈다.
  
  이처럼 청ㆍ장년기를 '정치적 실천'의 단심으로 보낸 뒤, 60세가 다 되어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에 입학해 때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석사를 마친 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저술활동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매진해온 선생은, 요즘 진보파들이 과거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주 토로하곤 했다.
  
  지병인 간경화와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2007년 겨울 쓰러지기 전까지 활발한 사회 참여와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자문위원 혹은 고문의 이름으로 여러 모임을 정신적으로,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 사회운동 단체들의 모임 뿐 아니라 학술행사에도 늘 참여했고, 민주노동당이 행사를 할 때마다 그는 청중석 한 자리에 꼭 앉아 있곤 했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민주노동당 행사에 가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포함한 제1세대 진보파가 50년 전에 겪었던 오류와 실패를 민주노동당이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2006년 7월 27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선생은 50년대 진보당과 4·19 혁명 직후 혁신 세력이 좌절한 원인은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조직 내 건전한 작풍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 때문에 분열하고,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면서 민주노동당이 성공하려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2006년 8월 2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죽산 조봉암 47주기 제사에 참석한 선생은 옆에 있던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민주노동당은 진보당의 실패에서 배우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내부 파벌 다툼에 치중하고 투쟁중심 노선만 고집해서는 국민들에게 외면 받다가 수십년 내에 그 소중한 진보정당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문제를 제기했지만 민주노동당 안에서 자신의 문제제기가 수용되지 않는 것에 선생은 계속해서 실망했다. 2007년 9월 선생의 마지막 저작<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을 내면서 "이제는 젊은 사람들을 닦달하는 일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도 말했다. 과거 1세대 진보정당 운동과 민주노동당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명분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반목을 만들어낸 작풍의 문제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문제를 분단 때문으로 보는 분단환원주의와 통일지상주의의 폐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늘 정치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운동을 앞세워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치의 영역에서 보수 세력의 영향력은 공고화되었고, 진보 세력과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정당의 사회적 기반 역시 소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다가 진보 세력은 시민사회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뿐 정치체제의 운영은 보수 양당에 의해 주도되는 한국 정치 고유의 패턴이 고착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크다." (13~14쪽)
  
  정태영 선생은 자서전을 쓰고 싶어 했다. 스스로의 나이를 생각할 때 현실 개입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국 현대사를 다시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겨울에 들어서면서 몸은 빠르게 쇠약해졌다. 2008년 봄이 되어 날씨가 좋아지면 몸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국 겨울을 다 이기지 못하셨다. 지금 한국 사회 진보정치 운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선생의 마지막 삶이 실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선생 특유의 파안대소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지금, 명복을 기원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박상훈/후마니타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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