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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김복동 할머니 빈소 첫날의 기록... 약 1300여 명 조문
19.01.30 07:58l최종 업데이트 19.01.30 09:41l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2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이희훈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요."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찾은 조문객의 말이다. 그래서일까? 딸의 제안으로 조문을 왔다는 남성과 여성은 빈소를 앞에 두고 두리번거렸다. 시계를 봤다. 오후 8시 56분이다. 이 가족과 대화하는 사이 빈소에 들어가는 이는 없었다.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단 이들만이 빈소로 향하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별세했다. 향년 93세다. 김 할머니는 28일 오후 10시 41분,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할머니가 투병 생활을 해온 병원에 빈소가 마련됐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이다. 29일 오전 11시, 정의기억연대는 기자 설명회를 열고 김복동 할머니의 유언과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의 장례 일정을 발표했다.
[관련 기사 :
"끝까지 싸워달라" 김복동 할머니의 유언]
29일, 김 할머니 빈소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 글은 그 기록이다.
"남은 숙제들은 남겨진 사람들이 잘 해결해야"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빈소로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희훈
김 할머니의 빈소가 처음부터 적막했던 건, 아니다. 낮 동안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과 시민단체 활동가, 대학생들, 일반인 등이 잇따라 조문했다.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하루 약 1300명(오후 9시 25분 기준)이 김 할머니 영정에 국화꽃을 바쳤다.
낮의 분주함이 저녁엔 사그라들었다. 조문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오후 6시 40분, 장례식장 건물 앞이 북적거렸다. 가방을 둘러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하 2층에 있는 빈소로 향했다. 개중엔 눈시울이 붉히고, '꺽꺽' 소리 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중 김 할머니 빈소로 가는 이는 적었다.
그렇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TV 브라운관에 나오는 유명인의 장례식장과 달랐다. 길게 늘어진 조문 행렬도 '퇴근길 추모 물결'도 없었다.
조문객 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김 할머니처럼 진실규명을 외치는 이였다. 유경근 4.16 세월호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다. 유 집행위원장은 "(김복동) 할머니와 특별한 인연은 없다, 보도를 통해서 싸우는 모습을 봤을 뿐"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에게 하고픈 말을 물었다. 그는 "글쎄요,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죠. 지금은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남은 숙제들은 남겨진 사람들이 잘 해결해야죠. 그 약속을 하는 것 말고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라고 답했다.
저녁 7시, 빈소 옆 한 귀퉁이에서 첫 번째 추모의 밤이 열렸다. 평화 나비네트워크가 마련한 자리였다. 김 할머니의 육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사랑 잊지 않고 그 뜻 기억할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올해로 92세 된 김복동입니다."
햇수로 2년 전, 김 할머니를 인터뷰 한 영상이었다. 옆에 앉은 조문객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소녀는 빨개진 코를 소맷자락으로 문댔다. 김 할머니가 말했다.
"올바르게 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 여러분 힘내세요.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다운 일을 못 해봤어. 사랑이라는 거가. 자슥들 가진 부모들 좋다고 물고 빨고 하지만 저렇게 좋은가. 난 귀염을 안 해봤어..."
추모식은 김 할머니를 기억하는 자리였다. 사람들 앞에 선 이들은 각자 김 할머니와 얽힌 추억을 꺼내며, 미리 준비한 편지를 읽었다. 때론, 목이 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때론, 울먹이면서.
편지를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추모글을 남겼다. 빈소 입구 벽면에 있는 '내가 기억하는 여성 운동가 김복동'이라 적힌 펼침막에 색색의 나비 모양 종이에 적은 글을 붙였다.
"김복동 할머니!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기 내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노란 나비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 이화나비 이연수"
"한 행사에서 할머니 옆에 앉아 있었는데 나비~라면서 활짝 웃어주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게 떠오르네요. 그리고 항상 수요시위든 어디든 당차게 이야기해주시던 모습. 존경하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김복동 할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곳에서는 고통 없이 편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남은 할머니들이 잘살아갈 수 있도록 또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사과하는 그날까지 기도하며 싸우겠습니다. - 서대문구의 한 젊은 청년이"
"역사를 잊은 자 미래는 없다. 김복동 할머니의 행동을 본받아 저희 젊은 세대가 늘 깨어있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임재환"
"김복동 할머니 1993년부터 할머니를 지켜보았습니다. 제주에서 온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자장면 사주게 예약하라며 윤미향 대표를 찾으셨죠? 이젠 그 친구들이 그 사랑 잊지 않고 그 뜻 기억할 것입니다. 이젠 편히 안식하소서."
"할머니를 알고 있다면, 조문 와 달라"
29일 밤 9시,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취해하던 방송 카메라팀이 모두 철수했다.ⓒ 정대희
조문객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다. 오후 7시 55분, 추모 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이 떠나자 시끄럽던 빈소가 조용해졌다. 조문객만 떠난 건 아니다. 기자들도 자리를 떴다. "고생하세요"란 말을 남기고 방송 카메라 팀이 짐을 꾸렸다. 오후 8시 2분, 김 할머니 빈소 옆에 마련된 기자실이 텅 비었다. 사진 기자 한 명만이 홀로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다. 나머진 '퇴근'이라고 귀띔하고 가방을 둘러맸다.
오후 9시, 남아 있던 방송 카메라가 철수했다. 조문객을 세어봤다. 빈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딱 10분간만. 화환을 들고 온 아저씨가 빈소로 향했다. 1분 뒤, 조문객 1명이 들어가고 2명이 나왔다. 근조 리본을 가슴에 매단 장례위원회 사람들이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오후 9시 4분, 1명이 빈소로 향하는 입구를 통과했고, 여기서 2명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들어가는 사람보다 빠져나오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됐다. 오후 9시 18분, 홀로 기자실을 지키던 사진기자도 떠났다.
오후 9시 30분, 윤미향 공동장례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오늘) 사람들이 많이 와줬다. 대통령도 오고, 정치인과 학생들, 시민단체까지 정말 고맙다"라며 "하지만 그동안 (김복동) 할머니가 만났던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수요집회 때 (보통) 50명 정도 만나는데, 지금까지 27년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겠냐. 못해도 5만 명은 넘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윤 위원장은 "많은 분이 조문 와줬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할머니가 훨훨 날아 갈 수 있도록 많이들 찾아오길 바란다"라며 "사실 걱정이다. 마지막 영결식을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하는데, 사람들이 적게 와 목소리를 제대로 못 낼까 봐. 이러면 할머니의 27년 삶을 오히려 축소하는 거다. 할머니를 알고 있다면, 조문을 와 달라"라고 말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후 11시 50분,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 앞에는 아무도 없다.
김복동 할머니 빈소 입구 앞에 마련된 펼침막에는 조문객들이 쓴 추모글이 붙어 있다.ⓒ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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