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북한에서는 조선노동당 8차 대회가 열렸다. 미국에서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했다. 북·미 내부적으로는 ‘쇄신’과 ‘부흥’ 담론이 흘러넘쳤으나, 양국 간 관계는 지난해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대미방침으로 ‘강대강, 선대선’을 천명한 북한은 대화재개 조건으로 ‘적대시정책 철회’를 완강하게 고수했다.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자’던 미국 새 행정부는 대화 재개에 필요한 유인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공 넘기기’로 한 해가 저물었으나, 대화의 모멘텀이 소진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 유예’를 지키고 있는데다, 미국 역시 ‘북한(DPRK)에 대한 적대 의도가 없다’며 대화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한국은 대화 재개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북, 중·러와 밀착하며 미국에는 ‘적대시정책 철회하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월 초순 ‘노동당 8차 대회’ 보고를 통해 “우리 당의 자력갱생전략은 적들의 비렬한 제재 책동을 자강력 증대, 내적동력강화의 절호의 기회로 반전시키는 공격적인 전략”이라고 밝혔다.
“최대의 주적”은 미국이라며, “대외사업부문에서 대미전략을 책략적으로 수립하고 반제자주력량과의 련대를 계속 확대해 나갈 데” 대해 강조했다. 아울러 “새로운 조미관계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는데 있다”며, “앞으로도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먼저, ‘반제자주역량’이란 중국과 러시아 등을 말한다. ‘하노이 노딜’ 여파로 불확실해진 남북-북미관계 개선 전망,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 격화되는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의 공조 강화에 눈을 돌렸다.
북한은 “오랜 력사적 뿌리를 가진 특수한 조중관계의 발전에 선차적인 힘”을 넣었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추대(1월), 리용남 주중 북한대사 취임(3월), 중국 공산당 창건 100주년 및 북중우호협력조약 체결 60주년(7월), 신중국 창건 72주년 계기 등에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 사이에 축전 또는 친서가 오갔다.
5월 워싱턴 한·미정상회담 직후에는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리용남 북한대사가 팔꿈치를 맞댄 사진을 공개했다. 6월 서울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 당일에는 리용남 북한대사가 [인민일보]에, 리진쥔 중국 대사가 [노동신문]에 기고하는 등 노골적으로 맞불을 놨다.
김정은 위원장은 또한 6월 1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조로친선관계”를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도 8월 15일 축전을 통해 2019년 4월 블라디보스톡 상봉과 합의가 호혜적인 쌍무협조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다가서자, 중국과 러시아가 한반도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8월 류샤오밍 중국정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 안드레이 데니소프 주중 러시아 대사가 ‘한미 후반기 연합지휘소연습’을 겨냥해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희망한다면 정세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10월 중·러가 공동으로 ‘대북 결의 내 가역조항을 발동하라’는 초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했다. ‘2018년 이후 북한이 취한 비핵화 조치에 맞춰 민생 분야 제재를 일부 해제하라’는 취지였으나, 미국의 완강한 반대에 가로막혔다.
‘한미연합군사연습 중단’과 ‘제재 해제’는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의 구체적 내용이다. 북미대화의 재개 조건이자 유인책들인데, 중·러가 대신 총대를 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미·중 전략경쟁에 더 깊게 연루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12월 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개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에는 약 110개국 정상이 초청됐는데 중·러와 함께 북한도 제외됐다. 지난 10일(‘인권의 날’) 미국 재무부가 ‘인권침해’를 명분으로 제재한 개인 10명과 단체 15개는 모두 중국과 러시아, 북한 국적이었다.
미, ‘일단 대화하자 그러나 유인책은 없다’
1월 20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출범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올드보이들’이 대거 귀환하면서 ‘전략적 인내 시즌2’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신속하게 대북정책 검토를 진행했다. 북한 문제를 미·중 간 협력 사안으로 분류했고, 북한 측에 ‘만나자’고 제안했다.
올해 한·미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북한과 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은 전·후반기 한미연합 지휘소훈련을 넘지 못했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뒤따랐다. 세 번째 시도는 현재 진행형이다.
첫 번째 시도는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 사이에 있었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대북정책을 검토하는 한편, ‘뉴욕채널’과 ‘제3국’을 통해 ‘이메일’과 ‘전화통지문’ 방식으로 북한에 ‘접촉’을 제안했다.
북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3월 17일 담화를 통해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조미접촉이나 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미국의 접촉시도를 무시할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 이틀 전(3.15)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 거부 이유를 밝혔다. “우리 당중앙은 이미 남조선 당국의 태도여하에 따라 3년전 봄날과 같은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에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립장을 천명하였다”면서 “이것이 해마다 3월과 8월이면 되살아나는 남쪽동네의 히스테리적인 전쟁연습광기를 념두에 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북한은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재개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테스트한 특정 미사일들은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 위반”이라며 “대응”을 거론했다. 북한 리병철 노동당 비서는 “우리 국가의 자위권에 대한 로골적인 침해이며 도발”이라며, “미국의 새 정권이 분명 첫시작을 잘못 떼였다”고 맞받았다.
3월 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이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자 북한 외무성은 ‘이중기준’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 등은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을 추진했으나,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두 번째 시도는 대북정책 검토가 끝난 4월말부터 후반기 연합지휘소훈련이 시작된 8월 하순 사이에 있었다.
4월 30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대북정책 검토가 끝났다”고 발표했다. 트럼프의 ‘일괄타결’이나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가 아니라며, “북한과의 외교에 열려 있는 잘 조정된 실용적 접근”이라고 말했다.
당시 만난 정부 고위당국자는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건 분명한데 무엇을 할지는 공백 상태”라며 “한·미가 함께 채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5월 21일 워싱턴 정상회담 계기에 한·미는 ‘유인책’을 조율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검토가 끝난 대북정책을 설명하겠다’는 미국의 거듭된 접촉 제안에 대해, 북한은 “우리는 아까운 시간을 잃는 무의미한 미국과의 그 어떤 접촉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리선권 외무상, 6.23)고 잘랐다.
8월 방한한 성김 대북특별대표는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북한 측 대표와 만날 뜻이 있다”고 했다. ‘적대시정책 철회’ 요구에 대해서는 “적대 의도가 없다”고 답했을 뿐, 유인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먼저 마주앉아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별개로 한국의 시도는 작은 결실을 맺었다. ‘판문점선언 3주년’(4.27)에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친서가 7월 27일(정전협정 체결일)에 남북통신연락선 복원으로 이어진 것. 그러나, 8월 하순 후반기 연합지휘소 훈련에 막혀 대화 복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9월 들어 북한은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 시험발사, 철도 기동 미사일 발사 훈련,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를 잇따라 실시했다.
남, ‘종전선언’ 고리로 동분서주
세 번째 시도의 주역도 한국이었다. 문 대통령이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에 의한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정의용 외교장관은 미국외교협회(CFR) 대담에서 ‘신뢰구축조치’로서 종전선언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북한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9월 24일 담화를 통해 “조선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상태를 물리적으로 끝장내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시를 철회한다는 의미에서의 종전선언은 흥미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평가했다. ‘적대시정책과 이중기준 철회’라는 “선결조건이 먼저”라는 단서를 달았다.
10월 4일에는 후반기 연합지휘소훈련 때 차단했던 남북통신연락선을 다시 복원했다.
현재, 한·미는 ‘종전선언’ 문구에 대한 조율을 거의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을 대화로 유인할 수 있으면서도 ‘미군 철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미국 측의 우려를 해소하는 간단한 내용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이 발신한 신호도 나쁘지 않다. 지난 17일 CFR 대담에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단계적 진전(step by step progress)을 위해 외교적으로 관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잘 조정된 실용적 접근”이라는 모호한 표현에서 한발 더 나간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이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내년 한반도 정세를 좌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내년 초 남북-북미대화 재개 가능할까?
2022년 1~3월은 남북-북미 대화 재개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과 ‘반제자주연대’하는 북한이 베이징 동계올림픽(2.4~20)과 패럴림픽(3.4~13) 기간에 ‘전략 도발’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적 보이콧’으로 베이징이 외교 무대가 되기는 어려워졌지만, 올림픽 기간 한반도에서 남북이 만나거나 제3국에서 북미가 만날 가능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북한과 미국 모두 협상 재개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측 간 이견의 해소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라고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지적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노동당 8차 대회’ 보고에서 거론했듯, 북한은 가혹한 제재와 ‘코로나19’ 장기화, 빈발하는 자연재해라는 3중고에 처해있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한이 사고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북·미 간 입장 차이를 어떻게 좁히느냐가 관건이다. 한·미가 3월 전반기 연합지휘소훈련을 연기 또는 중단한다면 확실한 대화 재개 카드가 될 수 있다. ‘종전선언’이 대화 재개의 우회로가 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코로나19’ 상황도 중요한 변수다.
대화 재개 없이 4월로 넘어간다면 북한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커진다. 4월 15일은 김일성 주석 탄생 110주년이다. 10년 전(2012년) 4월 13일 북한은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이용해 ‘광명성 3호’ 위성을 쏘아올렸고, 이로 인해 북·미 간 ‘2.29합의’가 파기됐다.
5월에는 한국의 ‘누리호’ 2차 발사가 예정되어 있다. ‘이중기준 철회’를 요구해온 북한이 이를 빌미로 ‘위성’ 발사에 나설 수도 있다. 올해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가까운 기간 내에 군사정찰위성을 운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북한이 위성 발사에 나서면, ‘핵·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라는 한반도 정세 안전판이 깨지게 된다. 상당기간 ‘도발-제재’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의 분투를 촉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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