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도 하나도 기쁘거나 감개무량하지 않다. 2011년 희망버스의 복권은 나와 몇 명의 사면복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시 300여 명의 이름없는 사법탄압 피해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의 복권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나의 복권은 도리어 희망버스 운동에 대한 또 다른 왜곡과 폄훼이자, 모독이다.
더더욱 2011년 희망버스를 이끌었던 해고자 김진숙 동지에 대한 명예회복과 복직을 이 정부는 끝내 거부했다.
신부님, 목사님 등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48일간의 집단 단식을 하며 호소하고, 암 투병을 거부한 채 김진숙 지도위원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걷기행진에 나서고, 심지어 국회 환노위와 부산 시의회 여야 의원 전원의 복직촉구 결의안이 나오고, 국가인권위원장 등이 복직 촉구에 나섰지만 이 정부와 청와대는 이동걸 산업은행장과 함께 끝까지 김진숙 동지의 복직을 막아섰다.
그러면서 2011년 희망버스 운동을 박근혜 사면복권의 들러리로나마 써먹으려 하다니 미안하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고, 도리어 분노가 치민다.
노동 존중을 위해서라는 멘트도 가당찮다. 얼마 전에도 나는 서울중앙지법 법정 앞을 서성거려야 했다. 고 김용균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건 진상규명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비정규직 악법 폐지와 불법 파견 대법원 판결 이행 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와 국회와 대검찰청 면담에 나섰다는 이유로, 김수억 등을 포함한 17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22년 6개월의 구형이 언도된 현장이었다(관련기사:
김수억과 그의 친구들을 위한 헌사 http://omn.kr/1w5p0).
이미 끝나버린 집행유예에 대한 뒤늦은 복권은 필요없다. 그것이 박근혜 석방을 위한 구색 맞추기용이라면 더더욱 치욕스럽다. 지금 필요한 것은 김수억을 비롯한 17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기소 철회와 사과다. 조삼모사의 짝퉁 비정규직 양산을 멈추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공약부터 지키는 일이며, 비정규직 양산법이나 다름없는 비정규 악법들 폐지에 나서는 게 그나마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일일 것이다.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 여전히 길거리에
문화예술인 한 놈쯤 끼어 넣어두는 게 필요하다는 얕은 속셈도 사양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청와대·문체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불법적으로 공모해 2만여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사찰하고 배제하고 탄압했다.
헌법에 명기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등을 부정한 희대의 국가범죄로 그 하나만으로도 박근혜 정부는 파면감이었다. 파면 사유에 블랙리스트 사건 실행이 인용되지 않아 현재 문화예술인들이 헌법소원을 내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정부는 미안하지만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민간 예술인들과 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역 없이 투명한 진상규명을 이뤄내지 못했다. 한시적이고 권한 없는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명박·박근혜 시절 청와대와 국정원, 문체부 상층 관료들에 대해서는 접근조차 힘들었다.
그런 틈을 타고 핵심 연루자들인 송수근 전 문체부 차관은 계원예술대 총장으로 가고,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은 다시 오세훈과 손잡고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되어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들의 존엄을 짓밟고 있다(송수근 전 차관은 '블랙리스트를 본 적도 없고, 관리를 총괄한 바 없다'라고,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은 '이미 소명이 끝난 일로 블랙리스트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오세훈이나 계원예술대 이사회를 뭐라 할 일도 아니다. 현 정부는 블랙리스트 피해 규명을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제기한 민사법정에서도 1심에서 패소하자 문화예술인들을 상대로 항소를 하며 블랙리스트 최소 진상마저 인정하지 않고 있다(2017가합200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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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인 대행진 "블랙리스트 블랙라스트" 적폐청산과 블랙리스트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2018문화예술인 대행진 - 블랙리스트 블랙라스트(Blacklist Blacklast)’가 3일 오후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주관으로 여의도 국회앞을 출발해 청와대앞까지 열렸다. 광주민예총, 민족미술인협회, 터울림 등 131개 단체와 문화예술인 2,166명 개인은 선언문을 통해 ‘블랙리스트 불법공모 131명 책임규명 권고안 즉각 이행’ ‘진상조사 및 책임규명이행 축소, 왜곡, 방해, 셀프 면책 책임자 문책’ ‘국회의 블랙리스트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2018.11.3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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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인지, 박근혜 정부인지 알 수가 없다. 보다 못한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서 2018년 11월 3일 당시 민주당 당대표(이해찬) 항의 면담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특별법TF' 구성 약속을 재차 받아냈지만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정부의 이런 비호 속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 세력들은 기지개를 켜는 것을 넘어서 적반하장으로 문제 제기한 예술인을 역고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연극인인 이양구 연출에게 행한 일이다.
24일 금요일 그래서 다시 또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박근혜 퇴진운동 당시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퇴진 광화문 캠핑촌'을 꾸리고 근 다섯 달을 노숙 농성해야 했던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여전히 이렇게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기뻐할 수 있을까. 나 혼자 복권시켜 주었다고 감사할 수 있을까. 도리어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 알량하고 기만적인 복권은 치욕이니 다시 가져가길 바란다. 김진숙이나 복직시키고, 비정규 악법이나 폐지시키고, 종전 선언에나 나서고, 중대재해기업처벌 시행령이나 제대도 제정하고,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내 친구들인 비정규직 노동자 17명에게 언도한 22년 6개월 구형이나 취소하길 바란다.
할 일이 많아 죽겠는데, 어쩔 수 없이 앉아 이런 글이나 쓰게 만들다니, 선물이란 것도 누가 언제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주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박근혜 사면복권에 들러리나 치장물이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내가 밴댕이 속인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 주변의 속들이 썩어 있는 것이다. 그 구린내가 만천하를 오염시키며 진즉 없어졌어야 할 시대의 구더기들이나 다시 키워주고 있으니 돌아보라. 메두사의 머리처럼 한 몸으로 얽혀 있는 그 흉측한 몰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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