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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가짜권력, 가짜정치

  •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  입력 2023.10.14 23:05
  •  
  •  댓글 4
 

 

[미디어와 문화정치]

가짜뉴스의 팬?

이 제목은 소란스럽고 선정적이다. 이 ‘가짜뉴스-가짜권력-가짜정치’ 삼위일체는 ‘가짜’라는 선정적인 용어를 반복적으로 강화하는 전략으로 심각한 정치 왜곡 효과를 낳고 있는 현 정부의 오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쯤 되면 현재 한국의 당정은 이른바 ‘가짜뉴스’의 진정한 팬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가짜뉴스 근절이라는 명목으로 한국 사회의 미디어 생태계 파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없었으면 이 정부는 무엇을 먹고살았을지 궁금하기조차 하다.

▲ 지난 9월12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가짜뉴스 방지에 대해 발언했다. 사진=윤석열 유튜브

이 현실은 여러 이유에서 대단히 문제가 있다.

‘가짜뉴스’라는 어휘부터가 부정확한 단어다. 이처럼 가짜 어휘를 매개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정치 판단이 올바를 리 없다. 억지와 과장과 비약으로 점철된 가짜 판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짜 단어, 가짜 판단에 의존한 정치 행위가 정당할 여지는 거의 없다. 따라서 토론, 교섭, 경합의 ‘정치’ 대신 독단, 처벌, 제압의 ‘가짜정치’가 파생된다.

가짜뉴스라는 가짜단어

가짜뉴스가 부정확한 단어라는 건 기초적인 미디어 안내서에서조차 잘 설명되어 있다. 가짜뉴스(Fake news)는 ‘틀린 뉴스(False)’가 아니다. 진짜처럼 모조 된 대상을 의미한다.

까다로운 문제는 가짜가 진짜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판단하는 인식론적 문제와 연관된다. 그 누구도, 권위 있는 기관이든 국가 원수이든지 간에 진짜와 가짜를 완벽하게 분별할 절대적 능력이나 권위를 지닌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부정확한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합의된 개념은 우리말로는 ‘허위 조작 정보’, 더 자세하게는 ‘미스인포메이션(misinformation)’과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으로 구분되는 개념들이다. 디스인포메이션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왜곡한 정보이고, 미스인포메이션은 우연한 오류로 오도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 정보다.

현재 정부가 가짜뉴스라고 처벌하려는 뉴스가 디스인포메이션인지 미스인포메이션인지를 정확히 구분한 후에야 정부 조치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 반대로 이 같은 판단에는 무지하거나 게으르면서 무조건 가짜라며 벌하려 달려드는 처사처럼 무지하고 악한 일도 없다.

가짜뉴스 대신 디스/미스인포메이션 개념을 적용하는 접근의 또 다른 장점은 ‘뉴스’와 ‘정보’가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잘못된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부르면 그게 진짜건 가짜건 어쨌거나 이 대상을 ‘뉴스’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뉴스가 ‘진짜뉴스’와 ‘가짜뉴스’의 두 종류로 나뉘는 셈이다. 하지만 뉴스의 절대 원칙은 ‘모든’ 뉴스는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이른바 가짜뉴스라고 불리는 이 대상은 절대로 ‘뉴스’가 될 수 없다. 대신 단지 ‘정보’의 일종으로서 나쁜 정보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모든 뉴스는 옳고 정확해야 한다,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따라서 의도적(디스인포메이션)이든 비의도적(미스인포메이션)이든 이 뉴스의 기준에서 이탈한 대상은 뉴스 자격이 박탈되고 단지 정보라고 불려야 한다.

다시 말해 가짜뉴스란 말을 쓰지 않으려는 식견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준엄한 노력인 것이다. 반대로 가짜뉴스를 없앤다는 핑계로 가짜뉴스를 외치는 건 저널리즘을 망치려는 가짜권력의 치사한 본성과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때때로 현 정부가 공격하는 ‘진짜’ 목표는 가짜뉴스 자체라기보다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 혐의를 씌운 미디어 조직으로 보이곤 한다. 정말 순수하게 가짜뉴스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 뉴스에 대한 개별적인 조치를 취하고 뉴스 품질을 높이도록 지원하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가짜뉴스라는 낙인→해당 미디어 조직에 대한 수사→최고책임자 징계→마지막으로 수십 년 전에나 본 적이 있었던 옛 인물의 부활’의 공식이다.

이 모든 과정이 과연 저널리즘의 품질을 향상시키며 미디어 생태계를 풍요롭게 성장시킨다는 본연의 목적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같은 냉소, 좌절, 우려가 가짜뉴스 / 가짜권력 /가짜정치의 삼위일체가 낳은 가장 가슴 아픈 사회적 손실 중 하나다.

자유의 실천으로서 진실

진짜가짜를 따지는 유치한 게임은 중단될 필요가 있다. 가짜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전체를 질식시키는 위험한 책략 역시 중지돼야 한다. 정치는 진짜가짜 처벌 게임이 아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가 말했듯이, 정치는 진실을 위한 열린 경합이고 투쟁이어야 하며, 이 모든 정치 행위의 근간은 진실 실천의 자유에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대단히 좋아하는 듯하다. 자유의 수호자가 되어 자유를 해치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엄벌하겠다고 틈만 나면 맹세한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21일(현지시간) 뉴욕대학교에서 열린 '뉴욕 디지털 비전 포럼'에서 가짜뉴스가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그의 큰 착오는 자유를, 권력이 보증해 주면 되는 전리품 정도로 여긴다는 점에 있다. 자유는 박제의 대상이 아니다. 자유는 남이 대신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 자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가 ‘스스로’ 그리고 ‘실천’할 때만이 비로소 자유로서 성립되고 본래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양질의 정보와 뉴스, 다양한 주장과 비판은 자유가 제대로 실행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동맥이다. 정치란 다양한 정보, 뉴스, 의견, 주장, 비판이 겨루면서 최선의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계속 푸코를 따라가자면, 현대 민주주의는 하나의 진실 체제로서 진실에 대한 열린 투쟁을 근거로 진행된다. 통치 권력은 진실을 결정하는 가장 막강한 힘을 지니는데 이에 대해 비판은 시민이 발휘하는 진실 실천의 자유다. 비판은 위로부터 부여되는 진실에 대한 ‘숙고된 불복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통치 권력이 진짜와 가짜, 아니 진실과 허위를 심판할 권위를 독점할 때, 체제에 대한 어떤 비판도 가짜라고 징벌할 때, 진실을 둘러싼 모든 정치적 노력은 가짜정치라는 파국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가짜정치의 진짜 가짜 게임판에서 걸려 넘어지는 건 가짜정치 자신이다. 가짜를 먹으며 증식하는 권력이 진실의 정치를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이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짜의 생명력은 의외로 짧다. 이는 가짜뉴스를 먹고 자라는 가짜정치가 유념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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