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실은 여러 이유에서 대단히 문제가 있다.
‘가짜뉴스’라는 어휘부터가 부정확한 단어다. 이처럼 가짜 어휘를 매개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정치 판단이 올바를 리 없다. 억지와 과장과 비약으로 점철된 가짜 판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짜 단어, 가짜 판단에 의존한 정치 행위가 정당할 여지는 거의 없다. 따라서 토론, 교섭, 경합의 ‘정치’ 대신 독단, 처벌, 제압의 ‘가짜정치’가 파생된다.
가짜뉴스라는 가짜단어
가짜뉴스가 부정확한 단어라는 건 기초적인 미디어 안내서에서조차 잘 설명되어 있다. 가짜뉴스(Fake news)는 ‘틀린 뉴스(False)’가 아니다. 진짜처럼 모조 된 대상을 의미한다.
까다로운 문제는 가짜가 진짜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판단하는 인식론적 문제와 연관된다. 그 누구도, 권위 있는 기관이든 국가 원수이든지 간에 진짜와 가짜를 완벽하게 분별할 절대적 능력이나 권위를 지닌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부정확한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합의된 개념은 우리말로는 ‘허위 조작 정보’, 더 자세하게는 ‘미스인포메이션(misinformation)’과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으로 구분되는 개념들이다. 디스인포메이션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왜곡한 정보이고, 미스인포메이션은 우연한 오류로 오도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 정보다.
현재 정부가 가짜뉴스라고 처벌하려는 뉴스가 디스인포메이션인지 미스인포메이션인지를 정확히 구분한 후에야 정부 조치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 반대로 이 같은 판단에는 무지하거나 게으르면서 무조건 가짜라며 벌하려 달려드는 처사처럼 무지하고 악한 일도 없다.
가짜뉴스 대신 디스/미스인포메이션 개념을 적용하는 접근의 또 다른 장점은 ‘뉴스’와 ‘정보’가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잘못된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부르면 그게 진짜건 가짜건 어쨌거나 이 대상을 ‘뉴스’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뉴스가 ‘진짜뉴스’와 ‘가짜뉴스’의 두 종류로 나뉘는 셈이다. 하지만 뉴스의 절대 원칙은 ‘모든’ 뉴스는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이른바 가짜뉴스라고 불리는 이 대상은 절대로 ‘뉴스’가 될 수 없다. 대신 단지 ‘정보’의 일종으로서 나쁜 정보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모든 뉴스는 옳고 정확해야 한다,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따라서 의도적(디스인포메이션)이든 비의도적(미스인포메이션)이든 이 뉴스의 기준에서 이탈한 대상은 뉴스 자격이 박탈되고 단지 정보라고 불려야 한다.
다시 말해 가짜뉴스란 말을 쓰지 않으려는 식견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준엄한 노력인 것이다. 반대로 가짜뉴스를 없앤다는 핑계로 가짜뉴스를 외치는 건 저널리즘을 망치려는 가짜권력의 치사한 본성과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때때로 현 정부가 공격하는 ‘진짜’ 목표는 가짜뉴스 자체라기보다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 혐의를 씌운 미디어 조직으로 보이곤 한다. 정말 순수하게 가짜뉴스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 뉴스에 대한 개별적인 조치를 취하고 뉴스 품질을 높이도록 지원하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가짜뉴스라는 낙인→해당 미디어 조직에 대한 수사→최고책임자 징계→마지막으로 수십 년 전에나 본 적이 있었던 옛 인물의 부활’의 공식이다.
이 모든 과정이 과연 저널리즘의 품질을 향상시키며 미디어 생태계를 풍요롭게 성장시킨다는 본연의 목적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같은 냉소, 좌절, 우려가 가짜뉴스 / 가짜권력 /가짜정치의 삼위일체가 낳은 가장 가슴 아픈 사회적 손실 중 하나다.
자유의 실천으로서 진실
진짜가짜를 따지는 유치한 게임은 중단될 필요가 있다. 가짜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전체를 질식시키는 위험한 책략 역시 중지돼야 한다. 정치는 진짜가짜 처벌 게임이 아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가 말했듯이, 정치는 진실을 위한 열린 경합이고 투쟁이어야 하며, 이 모든 정치 행위의 근간은 진실 실천의 자유에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대단히 좋아하는 듯하다. 자유의 수호자가 되어 자유를 해치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엄벌하겠다고 틈만 나면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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