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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못하는 사람" 박정훈 대령,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取중眞담] 1심 판결 빨라도 4월 총선 후에나... 혼자만의 싸움 되지 않게 국민 관심 절실

23.12.31 17:04l최종 업데이트 23.12.31 17:04l

김도균(capa1954)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이첩 관련 항명 및 상관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수사단장(대령)이 12월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관련 첫 공판 출석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가 오늘 왜 이 자리에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겁니다."

 

기자는 지난 8월 11일 전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이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취재진에게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당시 박 대령은 채 상병 순직 관련 조사 자료를 경찰에 넘기지 말라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수사단장 보직에서 해임된 후 '군 형법상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군 검찰에 입건된 상황이었습니다.

 

지난 몇 달을 돌이켜보면 그날 이후로도 박 대령은 더 험한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국방부 검찰단은 끝내 그를 항명 및 상관명예훼손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겼고, 해병대사령부는 박 대령이 맡고 있던 군사경찰 병과장 보직도 박탈해 버렸습니다. 1996년 임관 후 28년 동안 군복을 입은 박 대령이 자신에게 닥칠 일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박 대령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마 지난 몇 달은 하루하루가 마치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는 일과 같았을 겁니다.

 

지금도 박정훈 대령은 경기도 화성시 해병대사령부로 출근하고 있지만, 일터였던 해병대수사단에서 멀리 떨어진 별도 장소에서 하루 종일 대기해야 합니다. 해병대사령부가 그에게 아무런 업무도 맡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다분히 감정적인 조치로 보입니다.

 

박정훈 대령에 대한 주변인들이 공통된 평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혹시라도 그동안 박 대령의 생각이 바뀌진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지난 7일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첫 번째 공판에 출석하던 박 대령의 모습은 여전히 의연해 보였습니다. 그는 이날이 채 상병이 순직한 지 141일째 되는 날임을 상기시키면서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채 상병의 사망에서 비롯됐다. 특정한 항명 사건만을 떼놓고 재판하고 결론을 낸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정훈 대령의 말처럼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사와 재판은 모두 세 건입니다. '해병대수사단 조사 결과 경찰 이첩 보류지시'를 어겼다는 혐의를 받는 박 대령의 군사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또 사망 책임을 둘러싼 수사는 경북경찰청이, 대통령실과 국방부의 외압 의혹을 규명하는 수사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맡고 있습니다. 채 상병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선 각각의 수사와 재판이 서로 유기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특별검사를 도입하는 방안 외에는 별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채 상병 사건 취재를 하면서 기자는 박정훈 대령을 잘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임관 동기를 비롯한 박 대령의 옛 전우들, 해병대 군사경찰 전·현직 수사관들, 또 이런저런 근무 인연으로 그를 알고 지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박 대령에 대한 공통적인 평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해병대사령부의 한 간부는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 사무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던 "공명정대"란 액자를 아주 인상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글귀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마침 박 대령 사무실에 걸려있었기에 이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남달랐다고 이 간부는 말했습니다. 박 대령이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든 공평하고 사심 없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군인으로 느껴졌다는 겁니다.

 

부당한 명령이라면 절대로 따라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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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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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을 두 번 보았습니다. 영화 속에는 많은 군인들이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처음엔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던 육군본부와 수도권 부대의 많은 장군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반란을 용인하거나 묵인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지휘관들이 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대세가 반란군 쪽으로 기울어진 후에도 끝까지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했던 장군들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흔히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습니다. 군인이 마땅히 따라야 할 명령은 '정당한' 명령이지 '부당한' 명령이 아닙니다. 아무리 상관이 명했다고 하더라도 부당하다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서울의 봄>을 본 많은 관객들이 영화의 실존인물들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에 대해 감동하는 이유도 이들이 힘의 논리와 상황 논리에 따르지 않고 군인의 원칙과 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 나아가 이들의 행동은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헌법정신과도 그 맥이 맞닿아 있습니다.

 

기자는 <서울의 봄>을 보면서 자연스레 박정훈 대령을 떠올렸습니다. 박 대령은 법과 규정에 따라 채 상병 사건을 조사하고 경찰로 이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박 대령이 처해있는 현실은 한국 사회가 아직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과 상관의 명령을 동일시했던 과거의 망령에 발목 잡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명죄'는 그 명령이 정당하다는 전제 아래서만 성립이 가능합니다.

 

얼마 전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했던 한 예비역 장성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장성은 "왜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꽤 긴 시간 동안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 비판의 대상은 박정훈 대령이 아니라 군 수뇌부와 국방부를 향하고 있었다고 임 소장은 전했습니다. 해병대의 최고 수장을 지냈던 이 인사의 상황 인식은 대다수 국민들이 채 상병 사건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과도 일치합니다.

 

박정훈 대령 혼자만의 싸움 되지 않으려면

 

지난 8일 박정훈 대령은 공익제보자에게 주는 시민단체상을 연달아 수상했습니다. 한국투명성기구가 주는 투명사회상을, 호루라기재단으로부터는 호루라기상을 받은 겁니다. 박 대령은 투명사회상을 받으면서 "이 상의 주인공은 제가 아닌 저를 믿고 따르면서 채 상병 사망원인을 철저하게 수사하려고 했던 부하들"이라면서 "이 상이 부하들에게 '너희들의 선택과 행위가 옳았다는 걸 보여주는 의미를 주길 바란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안타깝지만 다가오는 2024년에도 박정훈 대령은 긴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1심인 군사재판 결과는 아무리 빨라도 4월 총선 이후에나 나올 걸로 예상됩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집권 여당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아 보이기에 속전속결 식으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입니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연말 인사이동에 따른 재판부 교체와 추가 증인 채택 등으로 심리가 길어질 걸로 보입니다.

 

박정훈 대령을 지원하고 있는 군인권센터는 만약 1심에서 박 대령이 패소한다면 군 당국이 그를 기소휴직 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행 군 인사법에 따르면 기소된 군인이 재판을 받는 동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 등이 인정되면 지휘관 판단 아래 강제로 휴직 처리될 수 있습니다. 기소휴직 상태가 되면 박 대령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원래 받던 월급의 반만 받게 됩니다.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게 될 테지만, 현역 군인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습니다. 1971년생인 박정훈 대령은 정상대로라면 대령 계급정년에 따라 오는 2026년 전역해야 합니다. 대법원이 박정훈 대령의 손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동안 못 받은 급여를 한꺼번에 지급 받을 수 있을 뿐 현실적으로 그가 입은 피해를 보상받을 길은 없습니다. 해병대수사단장으로 군인의 정도를 걷고자 했을 뿐인 박 대령에게만 모든 짐을 오롯이 짊어지게 하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채 상병 사건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이슈가 묻히게 되면 박정훈 대령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관건은 여론의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여러분이 채 상병을 잊지 말고 계속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셔야 정의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박정훈 대령의 호소처럼 앞으로도 기나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절대로 박 대령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지 않도록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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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채상병, #서울의봄, #박정훈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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