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습니다. 군인이 마땅히 따라야 할 명령은 '정당한' 명령이지 '부당한' 명령이 아닙니다. 아무리 상관이 명했다고 하더라도 부당하다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서울의 봄>을 본 많은 관객들이 영화의 실존인물들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에 대해 감동하는 이유도 이들이 힘의 논리와 상황 논리에 따르지 않고 군인의 원칙과 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 나아가 이들의 행동은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헌법정신과도 그 맥이 맞닿아 있습니다.
기자는 <서울의 봄>을 보면서 자연스레 박정훈 대령을 떠올렸습니다. 박 대령은 법과 규정에 따라 채 상병 사건을 조사하고 경찰로 이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박 대령이 처해있는 현실은 한국 사회가 아직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과 상관의 명령을 동일시했던 과거의 망령에 발목 잡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명죄'는 그 명령이 정당하다는 전제 아래서만 성립이 가능합니다.
얼마 전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했던 한 예비역 장성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장성은 "왜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꽤 긴 시간 동안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 비판의 대상은 박정훈 대령이 아니라 군 수뇌부와 국방부를 향하고 있었다고 임 소장은 전했습니다. 해병대의 최고 수장을 지냈던 이 인사의 상황 인식은 대다수 국민들이 채 상병 사건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과도 일치합니다.
박정훈 대령 혼자만의 싸움 되지 않으려면
지난 8일 박정훈 대령은 공익제보자에게 주는 시민단체상을 연달아 수상했습니다. 한국투명성기구가 주는 투명사회상을, 호루라기재단으로부터는 호루라기상을 받은 겁니다. 박 대령은 투명사회상을 받으면서 "이 상의 주인공은 제가 아닌 저를 믿고 따르면서 채 상병 사망원인을 철저하게 수사하려고 했던 부하들"이라면서 "이 상이 부하들에게 '너희들의 선택과 행위가 옳았다는 걸 보여주는 의미를 주길 바란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안타깝지만 다가오는 2024년에도 박정훈 대령은 긴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1심인 군사재판 결과는 아무리 빨라도 4월 총선 이후에나 나올 걸로 예상됩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집권 여당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아 보이기에 속전속결 식으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입니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연말 인사이동에 따른 재판부 교체와 추가 증인 채택 등으로 심리가 길어질 걸로 보입니다.
박정훈 대령을 지원하고 있는 군인권센터는 만약 1심에서 박 대령이 패소한다면 군 당국이 그를 기소휴직 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행 군 인사법에 따르면 기소된 군인이 재판을 받는 동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 등이 인정되면 지휘관 판단 아래 강제로 휴직 처리될 수 있습니다. 기소휴직 상태가 되면 박 대령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원래 받던 월급의 반만 받게 됩니다.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게 될 테지만, 현역 군인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습니다. 1971년생인 박정훈 대령은 정상대로라면 대령 계급정년에 따라 오는 2026년 전역해야 합니다. 대법원이 박정훈 대령의 손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동안 못 받은 급여를 한꺼번에 지급 받을 수 있을 뿐 현실적으로 그가 입은 피해를 보상받을 길은 없습니다. 해병대수사단장으로 군인의 정도를 걷고자 했을 뿐인 박 대령에게만 모든 짐을 오롯이 짊어지게 하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채 상병 사건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이슈가 묻히게 되면 박정훈 대령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관건은 여론의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여러분이 채 상병을 잊지 말고 계속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셔야 정의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박정훈 대령의 호소처럼 앞으로도 기나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절대로 박 대령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지 않도록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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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채상병, #서울의봄, #박정훈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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