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한 춘자씨는 부산의 여인숙에서 '조바'(여인숙 종업원)로 일하다가 "전라도에 가면 떼 돈 번다고 하더라!"는 소문을 듣고 여천공단 공사판에서 노가다 인생들을 상대로 밥과 술을 파는 함바를 운영하다 일반 시민들은 무서워서 지나기를 꺼려하는 여수극장 휘파리 골목에서 '충청도집'이란 '색싯집'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신정동 오목교 판자촌에 살던 3형제를 급히 데려왔는데 그 까닭은 남편 조씨가 행방불명됐기 때문이었습니다. 행려병자로 발견된 조씨는 시립병원에서 1977년 사망했습니다.
춘자씨 큰아들은 어머니 떠난 후 고등공민학교를 때려치웠습니다. 그리고는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를 하고 불우 청소년들과 어울려 패싸움을 하고 물건을 훔쳤습니다. 소년원을 시작으로 경찰서와 교도소를 드나들던 그는 '법자'(법무부의 자식) 인생을 살았습니다. 술에 취하면 소주병과 유리창을 깨면서 "당신이 나를 버려서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다"며 피투성이로 울부짖었습니다. 공소시효도, 특별 사면도, 가석방도 없는 '자식 버린 죄의 감옥'에 평생 갇혀 살던 장기수 춘자씨는 2026년 3월 28일 봄 밤에 석방됐습니다.
순천에서 홀로 살던 춘자씨가 인천 검단의 한 요양원에 입소한 2026년 1월 19일, 춘자씨가 담배 한 대 피우게 해 달라 요청하자 원장이 "공동체 생활에서는 규칙을 지켜야 된다"면서 거듭 안 된다고 하자 춘자씨가 느닷없이 교도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감방 생활을 경험했으니 요양원 규칙을 따르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란 의도로 말한 것인데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흑역사를 까 버린 것입니다.
독고다이로 떠돌며 살아온 춘자씨는 타관 객지 세상에서 누군가 텃세를 부리면 '젠장,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며 맞짱을 떴고, '어디서 굴러왔냐!'고 시비 걸면 '버려진 짱돌처럼 구르고 깨지며 살아왔다'며 들이 박았고, 누군가 '거칠게 산 인생'이라고 깔보면 '내 인생이 어때서!'라며 당당했습니다.
춘자씨는 1980년 전두환의 삼청교육대 명단에 포함되면서 순천교도소로 끌려갔습니다. '오찌'(뇌물)가 판을 치던 당시, 휘파리 골목 술집에서 삥을 뜯고 봐주면서 공생하던 경찰들이 삼청교육대 할당량 지시가 떨어지자 검거 실적을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검거하는 속칭 '후리가리'에 나섰습니다. 휘파리 골목 건달들도 삼청교육대에 끌려 갔는데 무슨 죄가 있어서 잡혀간 것이 아니라 전과자라는 이유로, 술값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보원 노릇을 소홀히 했다는 등의 이유로 끌려갔습니다.
사전 정보를 입수한 춘자씨 큰아들이 도망쳐 검거에 실패하자 약이 오른 경찰들이 약점 많은 술집 주인 춘자씨를 순천교도소로 넘겼던 것입니다. 악으로 깡으로 살아온 춘자씨는 자신의 생존 투쟁 이력을 숨기거나 쪽팔려 하지 않았습니다. 휘파리 골목 건달들이 춘자씨를 큰 누님이라 부른 까닭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숨김도 거침도 없는 화끈한 성격으로 건달들을 감싸주면서, 보증까지 서주다 망하기까지 하면서 한 식구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춘자씨는 '늙고 병들었다고 가오를 버리겠느냐!', '내 인생이 뭐가 어때서 살아온 세월을 감추겠냐!'라면서 당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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