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모델을 친절히 설명하는 대표적인 한 기사도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다만 딜레마가 아니라 장점이라고 인식한 것 같습니다.
"시장에 나온 HDB는 분양 당시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곤 하는데, 이는 싱가포르 젊은이들의 자산 형성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누구나 내 집을 소유하는 사회, 이 나라가 증명했다">, 2026.4.7.오마이뉴스)
그 훨씬 높아진 가격은 누가 부담하는 걸까요. 한 세대나 집단의 자산 형성이 다른 세대나 집단에겐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또한 싱가포르 시민들은 노후를 위한 강제저축인 중앙적립기금(CPF)을 주택 구입에 미리 인출해 쓰다 보니, 많은 경우 집은 마련하긴 좋았지만 현금은 부족한 노후, 싱가포르 정부도 인정하는 이른바 '에셋 리치, 캐시 푸어(Asset Rich, Cash Poor)'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물론 싱가포르도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젊은 가구 우선 공급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노인가구가 주택을 줄여 이사할 경우 현금을 지원하는 실버주택보너스 제도 등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완책들은 구조적 해법이라기보다는 자산기반 복지의 한계를 다시 자산으로 메우는 고육지책에 가깝습니다.
싱가포르 CPF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55세 도달 경제활동 가입자 중 현금만으로 완전 은퇴기준(FRS·Full Retirement Sum)을 충족하는 비율은 절반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낮은 기초 은퇴기준(BRS·Basic Retirement Sum)조차 '집을 소유하고 임대료 걱정이 없는 사람'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자가소유 없이는 가장 낮은 노후 기준도 채울 수 없는 구조, 자가소유율은 높지만 비싼 집값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 그러다 보니 후속세대에게 높아진 진입장벽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 이것이 싱가포르 자산기반 복지의 딜레마라 하겠습니다.
'1가구1주택주의' 나 '주거중립성'을 넘어,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싱가포르 모델은 건물 분양 방식 하나가 아니라, 토지청(SLA)의 국유화, 주택개발청(HDB)의 배분, 중앙적립기금(CPF)의 금융조달, 토지지분 없는 건물주들의 주거권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도시재개발청(URA)의 재건축이 60년간 쌓아올린 하나의 독특한 주거 체제(Housing Regime)입니다. 이 주거체제는 고용체제 및 복지체제와도 연계되어 있습니다. 거칠게 종합해보자면, 싱가포르 모델은 권위주의적 고용기반 주거체제와 가족주의적 자산기반 복지체제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가소유가 정말 보편화되고 그 부담이 가볍다면, 이를 노후 보장의 한 축으로 삼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얽힌 시스템이라 해서 무조건 벤치마킹을 거부하고 담을 쌓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목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가율 90% 그 자체야 좋지만, 집이 있어야만 노후 기준을 채울 수 있는 복지체제, 집을 사기 전에 강제저축에 가입되어 있어야 하는 고용체제 등이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사회상일까요. 집을 가졌든 아니든 무관하게 공공의 책임이 고루 미치는 것, 그것이 더 안전한 사회의 기본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집밥'이 좋긴 합니다. 그러나 불량식품 문제의 해법으로 모두가 반드시 집에서 가족과 함께 밥을 지어 먹어야 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할까요? 가끔 사 먹고 혼밥을 해도, 집에서 밥해줄 가족이 있든 없든, 혹은 혼자서 밥해 먹을 수 있는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든 없든, 누구나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공공의 관심은 식자재 사재기를 막거나 물가를 관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음식점에 대한 위생 감독에도 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역복지관 등에서 직접 어르신들께 점심식사도 제공하는 공공식사 돌봄도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테고요.
우리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싱가포르와 같은 강제저축을 어렵게도 하지만, 그 문제는 별도로 해결한다 치더라도 국토공간구조도 고려해야 합니다. 싱가포르는 서울 면적의 1.2배 크기의 도시국가입니다. 그 안에서라면 어디에 집을 마련하든 통근과 통학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릅니다. 직장이 바뀌거나 가족 상황이 달라지면 멀리 이사를 가야 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자가소유는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임차로 살면서도 충분히 주거 안정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구구조, 산업·고용구조, 국토공간구조와 복지체제의 유사성으로 따지자면 싱가포르 보다는 오히려 주거중립성이 어느 정도 실현된 나라들이 한국의 처지에 더 가까운 참고사례가 될 것입니다. 예컨대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등은 자가점유율이 한국보다 낮거나 비슷하지만, 세입자의 주거 안정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나라들입니다. 이른바 '주거복지 선진국'은, '내 집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세입자도 마음 편히 살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 나라도 한국과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사회주택 비중이 높고, 수도권 집중도 심하지 않습니다. 정책 한두 개만 가져온다고 될 일이 아니며, 당장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은 쪽만 골라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바라는가입니다. '권위주의적 고용체제와 가족주의적 자산기반 복지 시스템'인가요, '가족이나 점유형태를 구별하지 않는 주거복지 체제'인가요.
한국에도 이미 해법의 싹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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