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가 세상을 나누는 ‘분류’라는 기준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산호는 분명 동물이지만 그 몸 안에는 식물인 조류(藻類)를 품어 에너지를 얻고 몸 바깥으로는 탄산칼슘이라는 광물질을 쌓아 단단한 집을 짓는다. 동물이라는 존재 하나에 식물성과 광물성이 뒤엉켜 있는 셈이다. 자연은 원래 교과서처럼 칸칸이 나뉘어 있지 않다. 인간이 그 위에 이름표를 붙이고 있을 뿐이다.

룰루 밀러의 2020년 책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가』(Why Fish Don’t Exist)가 날카롭게 파고드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우리는 상어와 연어, 폐어(Lungfish)를 모두 ‘물고기’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전부 다른 동물들이다. 놀랍게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지동물은 폐어와 같은 육기어류(肉鰭魚類)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 물에 산다는 이유로 이들을 묶어 ‘물고기’라 부르는 것은 산에 사는 모든 짐승을 ‘산고기’라 부르는 것만큼이나 거친 편의주의다. 폐어는 생물학적 계통으로는 연어보다 인간에 훨씬 더 가깝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이러한 오류가 생물학 책장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난 80년간 한국 사회는 미국을 대등한 국가라기보다 일종의 ‘구원자’로 투영해 왔다. 미국이 설계한 질서 안에서는 안전할 것이며, 한미동맹만 굳건히 지키면 번영과 평화가 영원하리라는 믿음이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동맹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한 전략과 거래의 영역이다. 2004년 자이툰 부대 파병과 2007년의 파병 연장은 ‘동맹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고, 2016년 역시 동맹의 이름으로 결정된 사드 배치 이후에는 중국의 보복이라는 청구서를 받아야 했다.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3자 합의는 북핵을 넘어 중국 문제까지 대응 수위를 높였고, 그 결과 2024년 타결된 방위비 분담금 협정에 따라 2026년 한국의 분담금은 1조 5,192억 원으로 8.3%나 껑충 뛰게 되었다. 이어 2025년 트럼프는 주한미군 비용을 관세와 엮어 협상하는 ‘원스톱 쇼핑’식 접근까지 들고 나왔다. 우리는 ‘보호’라는 수사 뒤에 반드시 ‘비용’이 따라붙는 냉혹한 현실을 거듭 목격하고 있다. 말이 보호지 사실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주한미군임에도 우리는 주둔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미동맹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동맹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처럼 떠받들어 한국 스스로의 전략적 판단 능력이 마비된다는 데 있다. 국가는 우정을 맺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공존한다.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이 진정으로 동맹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더욱 냉정해야 한다. 무엇을 함께하고 무엇은 거리를 둘 것인지, 어디까지는 부담하고 어디서부터는 거절할 것인지 스스로 선을 긋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동맹은 바야흐로 종속이 아니라 협력이 된다.

주한미군의 성격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미동맹을 한반도 방어용으로만 국한하지 않았다. 2021년 미 국방장관은 동맹을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으로 정의했고, 2025년 한미 연례안보협의는 그 역할을 동북아 지역 안보 유지와 연결 지어 설명했다. 미국은 한국 내 기지 재배치가 미국과 한국 공동의 국가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리가 동맹을 안보의 축으로 설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한국만을 위해 존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지독할 정도로 편의적이었다. 우리는 북한을 ‘절대 악’ 아니면 ‘언젠가 껴안을 형제’ 중 하나로만 보려 했다. 하지만 실제의 북한은 늘 그 두 얼굴이 뒤섞인 채 존재해 왔다. 2018년 판문점 선언과 남북 군사합의가 비핵화와 긴장 완화를 약속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2024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을 헌법상 ‘불변의 주적’으로 못 박은 사건도 있었다. 동일한 북한이 한 때는 협력의 파트너였고 지금은 적대의 대상이다. 북한의 본질을 어느 한 단어로 고정하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의 대북정책도 신앙이나 감정이 아니라 현실 감각 위에서 다시 짜여야 한다. 북한을 무조건 악마화하면 대화의 문을 스스로 닫게 되고, 반대로 막연한 화해의 대상으로만 보면 적대의 실체를 외면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선악의 언어가 아니라 관리의 언어다. 군사적 억지는 유지하되 대화의 채널은 복원하고, 원칙은 분명히 하되 접촉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는 접근 말이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배척이 득세하고 포용도 환상으로 흐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파란 약은 안락한 허구 속에 남는 것이고, 빨간 약은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직면하는 선택이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삼켜온 것은 동맹이라는 이름의 ‘블루필’이었다. 미국의 질서를 자연 섭리처럼 여기고 분단의 적대감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레드필을 먹는다고 해서 세상이 단숨에 명쾌해지지는 않는다. <매트릭스>는 체계의 배후를 폭로했지만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가』는 체계를 벗겨낸 자리에도 선명한 ‘본질’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진실은 단순한 곳에 있지 않다. 우리가 믿어온 이름과 질서들이 사실은 얼마나 임의적인 것이었는지 인정하는 데서 진실은 시작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맹 해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동맹을 ‘영원불변한 본질’로 숭배하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물고기가 본질이 아니고 산고기도 본질이 아니듯 ‘영원한 한미동맹’ 또한 본질이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계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 조정될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미국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국가이며, 북한 또한 적과 형제라는 낡은 이분법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미국을 신성시하던 인식과 북한을 단순화하던 인식, 그 두 개의 낡은 분류표를 동시에 걷어내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질서를 수호하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이제는 인식을 초월해야 할 때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가, 왜 산고기도 존재하지 않는가, 그리고 왜 영원한 한미동맹이란 존재할 수 없는가. 답은 명확하다. 세계는 처음부터 그토록 단순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