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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는 원희룡지사

 
제주도지사로 당선되기 전에는 항상 ‘서울시민 원희룡’을 주장했던 인물
 
임병도 | 2015-09-12 09:42: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7월 24일 제주도청의 소식을 알려주는 ‘제주도정뉴스’에는 ‘중국 대표 포털 봉황넷, 제주 홍보 앞장선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메르스로 침체된 제주 관광 활성화를 위해 중국의 대표 포털 사이트와 제주가 손을 잡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 ‘QQ’, ‘시나닷컴’ 등은 들어봤어도 봉황넷은 처음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봉황망’을 도정뉴스가 봉황넷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름이 鳳凰網인데 이것을 봉황넷으로 호칭한다는 자체가 이상합니다. 마치 네이버를 네이넷으로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봉황망’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맞습니다. 제주도가 봉황망을 봉황넷으로 호칭하면서 엉뚱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이버에서 봉황망으로 검색하면 봉황망 사이트와 뉴스가 나옵니다. 봉황망이 제주 관광을 위해 협력했다는 뉴스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봉황넷으로 검색하면 제주 관련 소식이 계속 나옵니다. 제주도가 보도자료를 뿌리면서 봉황망을 봉황넷으로 했고, 언론사가 모두 봉황넷으로 받아쓰기를 한 결과입니다.

돈을 써가면서 봉황망 관계자들과 만났고 보도자료를 배포해 뉴스는 나왔지만, 봉황넷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받아쓰기에 나선 언론만 알 수 있는 봉황넷이라는 이상한 뉴스가 생성된 셈입니다.
 
봉황망이라는 명칭만 제대로 썼어도 검색 등에 노출돼 홍보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었지만, 봉황넷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효과는커녕 망신만 당했습니다.

제주도 공무원이 착각하고 일을 잘못했다고 합시다. 제주에서 천재라고 불렀던 원희룡 지사마저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당하게 ‘봉황넷’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원 지사의 글을 읽는 사람 중 중국을 아는 사람이라면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중국을 찾고 관심이 있었다면 봉황넷을 봉황망이라고 한다는 정도는 금방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봉황넷이라고 하니 원 지사도 아무 생각 없이 봉황넷이라고 부르고 다녔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주도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중국에서 마케팅을 한다고 홍보했습니다. 제주도정뉴스는 ‘특히 이번 상하이시 마케팅에는 지난 17일 서울시 명동 거리 제주 관광마케팅에 참여한 바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다시 참여, 공동으로 마케팅을 추진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고 밝혔습니다.

제주도의 이런 주장만 보면 제주도가 중국 마케팅을 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여하는 모습입니다. 즉 제주도가 차려 놓은 밥상에 서울시가 숟가락을 얹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였습니다. 원래 중국 마케팅은 서울시가 메르스 사태로 발생한 관광 침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예산을 투입해 기획한 행사입니다. 다 만들어 놓은 서울시 계획에 막판에 제주도가 숟가락을 얹었습니다.

아이엠피터가 만난 서울시 관계자들은 원희룡 지사와 수행원들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일은 서울시가 다했는데 막판에 와서 마치 자기들이 다 한 것처럼 생색을 내거나, 원희룡 지사를 돋보이려고 무리수를 뒀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얘기하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도민으로 창피했습니다.

원희룡 지사는 봉황망을 봉황넷으로 당당하게 부르면서 ‘제주도는 대한민국입니다.’를 외칩니다. 사실 원희룡 지사가 언제부터 제주도를 그리 사랑했는지 의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원희룡 지사는 제주도지사로 당선되기 전에는 항상 ‘서울시민 원희룡’을 주장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서울시민 원희룡, 그래도 제주도민은 열광
 
‘제주도는 지금 대한민국 마케팅의 최전방에 서 있습니다’라며 자신이 제주와 대한민국 마케팅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자랑하는 원희룡 지사를 보면서, 제주도민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면서 왜 저리 자랑을 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원희룡 지사님 !
 
자랑스러운 제주도지사가 되지 못할 바에는 망신이나 시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민으로 부끄럽습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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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북 핵무력 강화에 당황"?

 
'미국 군사적으로 조선 전복 불가능'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9/12 [09: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화성 13호, 북의 조건없는 대화에 응하지 않던 미국이 더는 물러 설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어 이번 한미 당국의 회담 결과가 주모 된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러시아 전문가와 언론이 미국이 군사적으로 핵무력을 가진 조선을 전복시킬 수 없으며 조선정권 붕괴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러시아통신인 스프티니크는 지난 11일 대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문가의 이 같은 견해를 대서특필했다.

스프티니크는 '미국과 남한 북한의핵억제력 개발결정에 당황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6자회담은

이미 죽었으며 회담 자체의 성사를 무산 시킨 것은 조선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이라고 분명히 했다.

 

이 신문은 미국과 서방 등은 현실 가능성이 없는 북 정권 붕괴를 위한 군사적 행동이나 싸이버 행동들을 중단하고 대북정책의 변화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는 13일 한국의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해 당국자 회담을 통해 정책을 선회해야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스프티니크는 황준국 한국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 10일 국회연설에서 "미국과 한국은 6자 회담 재개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며 "그러나 북은 핵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형태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통신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양연구소 한국 및 몽골 담당자인 알렉산드르 보론쪼프는 6자 회담과 관련한 이런 해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많은 언론들이 말하듯이 '6자'라는 말은 매우 유용한 장치로 검토되고 있으나 서울이나 워싱턴 어디서든 6자 회담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면서 "2009 년 이후 여러 차례 회담은 중단됐고 상황을 어렵게 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는 핵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 핵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과 미국의 조선에 대한 비건설적인 정책(대북적대정책)이 회담 재개와 성공적인 회담 개최를 가로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론쪼프 연구원은 "조선은 최근 다양한 형태로 대화 재개 제안을 해왔으나 미국과 한국은 이를 조선의 선전행위나 차후 도발을 위한 준비라고 여겼다."면서  "조선은 6자 회담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변함없이 먼저 예비 조건들을 이행하라고 다그쳤고 국제 핵사찰단이 조선에 들어갈 수 있게 하라고 했으며 모든 핵시설을 폐쇄하고 사실상 일방적으로 무장해제하라고 몰아 부쳤다.

조선 입장에서는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임이 분명하나 미국과 한국은 물러서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의)평화로운 시도에 대한 이런 예기치 못한 반응에 직면한 평양 정권은 올해 마침내 미국과 한국과의 대화는 이들의 목표가 정권 교체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런 사실은 버락 오바마의 올해 1월 회견문이 입증해 주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평양 정권이 충분히 강할 뿐만 아니라 핵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방법으로는 전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미국은 대중매체나 인터넷을 통한 방법을 포함하여 외부에서 정권을 와해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고발했다.

 

또한 "이후 평양 정권은 오바마 행정부와의 건설적인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결정하고 조선은 대화를 하고자 하는 시도를 중지하고 핵 억제 수단 및 경제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했다고 천명했다.


따라서, 6자 회담을 재개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현재 많은 사항들이 황준국의 워싱턴 방문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말해, 미국과 한국이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브론쪼프 연구원은 라디오 '스푸트니크'과의 대담에서 "미국과 한국은 자신들의 정책을 비방하고 핵억제력 개발에 제재를 가하는 비건설적(대북적대정책)인 태도에 실망한 평양 정권의 결정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위협으로 북한이 이 길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 정권과의 동등한 대화를 위한 서방의 진실한 노력을 보여주고 침략 거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평양 정권의 교체는 그 실현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못 박았다.


한편 한국의 황준국 평화교섭본부장의 이번 미국행은 8.25합의 이후 결정된 것이어서 회담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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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해, 이토 히로부미 무덤 아래 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9/12 12:52
  • 수정일
    2015/09/12 12:5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서평] 김월배 교수의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

15.09.12 12:13l최종 업데이트 15.09.12 12:13l

 

 

서울 효창운동장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 사진을 본다. 정면 오른쪽에 흑대리석으로 된 안내석이 서 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유해가 없는 '가짜 무덤'이 가묘다. 안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가묘는 '주인'을 맞을 수 있을까.

안 의사의 사형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에 집행되었다. 105년이 지났다. 1세기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안 의사는 이국 땅 차디찬 곳에 묻혀 있다. 국민들로부터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유해 봉환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눈에 띄는 게 없다.
 

기사 관련 사진
▲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
ⓒ 청동거울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은 김월배 다렌외국어대학교 교수가 "10년 동안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관하여 연구하고 추적한 현장의 세세한 기록"(13쪽)이다. 안 의사 유해 매장지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와 사료, 뤼순 감옥 수감 당시 중국 측 근무자나 수감자 관련 자료와 그들의 증언, 1970년대 뤼순 감옥 주변 거주자들의 증언 들이 실려 있어 사료적 의의가 큰 책이다.

책명의 '간양록'은 조선 중기 문신 강항(1567~1618)이 정유재란 때 왜군 포로가 되었을 당시를 기록한 책 이름인 <간양록>에서 빌려온 것이다. '간양'은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간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한다. 소무, 강항, 안중근으로 이어지는 애국충절의 계보를 강조한 저자의 뜻이 제목에 담겨 있다.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아야 하는 이유

저자가 안 의사의 유해 찾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일제의 부당했던 안중근 의사 재판으로 안 의사의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우리 국민들에게 사실대로 알리기 위해서"(13쪽)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안 의사의 유해에 대한 모든 자료와, 중국 내에서 진행된 발굴 사업의 성과,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에 참고가 될 만한 모든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다.

저자는 안 의사 유해의 매장지가 뤼순, 곧 '관동도독부 감옥서'라고 단정한다. 일제가 남긴 '관동도독부 사형집행 보고서'와 '안 사형 집행전말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도쿄일일신문> <만주신보> <만주일일신문> 등 다수의 당대 신문 들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뤼순과 관동도독부 감옥서 공공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는 주장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히신 자리까지 입증할 순 없지만, 1910년 3월 26일 오후 1시에 관동도독부 감옥서 공동묘지에 묻히신 것은 자명하다. 그동안 수많은 이견들이 떠돌던 안중근 의사 유해의 도쿄 매장설, 이토 히로부미 무덤 밑 매장설, 하얼빈 공원(현 조린 공원) 매장설, 바다 수장설 등은 모두 근거가 없다. (92쪽)

저자가 안 의사의 의거 이후 공판과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의 사정들을 서술한 대목을 보면 일제가 안 의사(의 의거)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1909년 10월 30일 처음 열린 제1회 심문에서 일본 미조부치 검찰관은 안 의사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조'를 듣고 안 의사를 '동양의 의사'라고 말했다. 당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는 안 의사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무기징역 판결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 외무성이 12월 2일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라는 비밀명령을 내리면서 바뀌었다. 공판은 1주일간 6회에 걸쳐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안 의사가 일제 사법기관에 맞서 벌인 투쟁을 저자는 '안중근 의사 관동도독부 공판 투쟁기'로 명명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일제는 안 의사를 사형대에 세웠다. 조선통감부의 통역 촉탁(通譯囑託) 소노끼 스데요시(園木末嘉)가 보고한 <안중근 사형 집행 상황>에 순국 상황, 순국 후 유해 매장 시간과 매장지역, 유해 교부와 관련된 상황 등이 명기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두 아우(안정근, 안공근-기자 주)는 오늘 사형집행의 취지를 전해 듣고 그 시체를 사정해 얻어 내어 곧 귀국하기 위해 여장을 갖추고 감옥서에 출두할 준비 중이라는 보고에 접했으므로 급히 수배를 해 그들의 외출을 금하고 형의 집행 후에 이르러 소환한 다음 전옥으로부터 피고의 시체는 감옥법 제74조 및 정부의 명에 의해 교부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언도하고 특별히 시체에 대한 예배는 허가한다는 뜻을 유고(諭告)한 데 대해 두 아우는 몹시 분격하면서 (중략) 울부짖으며 쓰러진 채 막무가내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찰의 힘을 빌려 실외로 끌어내어 다시 백방으로 간곡히 타이른 결과 간신히 약간 정상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대로 정거장으로 호송해 두 명의 형사 경호 하에 오후 5시발 대련행 열차로 귀국시켰던 것입니다. (하략) (88쪽에서 재인용)

2014년 1월 19일, 중국 정부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열었다. 개관 직후인 1월 20일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중국에 거세게 항의했다.

극에 달한 안중근 의사 의거 폄하
 

기사 관련 사진
▲ 일제강점기 순교자 안중근 의사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빌렘 신부와 면회를 갖고 있는 안중근(맞은편) 의사. 왼쪽에 안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공근 형제가 함께하고 있다.
ⓒ 안중근의사숭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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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에서 최근 일본 위정자들 사이에서 안 의사에 대한 폄하와 왜곡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 살인자, 범죄자로 보는 왜곡된 시선들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무덤에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라는 비문이 버젓이 새겨지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들일 것이다.

저자는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나 범죄자로 보는 스가 요시히데 류의 시각이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단면만을 본 단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을 바로잡음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이 대외정책을 시정하지 않는 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은 요원할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해법을 따르지 않고 1910년 한국의 강점, 1931년 만주사변에 의한 중국 동북지역 지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확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전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다가 1945년 8월 세계의 보복을 받고 원자탄에 의하여 전쟁에 패망하고 말았다. (53쪽)

스가 요시히데 류의 '망언'은 자국의 부당한 침략 역사를 부인하고 '신군국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일본 아베 정권의 반동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우리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고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건국' 관련 내용을 운운하는 게 올해로 3년째라고 한다.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대한민국 수립 66주년"이라고 했다.

'건국 67주년' 식의 표현은 이명박 정부 이후 뉴라이트와 보수 우파들이 추진하고 있는 '건국절'과 동궤의 역사의식을 갖는다. '건국절' 추진 세력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를 한사코 외면하려 한다. 박 대통령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끈질기게 밀어부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 시안에서 임시정부 법통성 관련 내용이 제외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정권 입맛에 맞는 역사만을 가르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뤼순 감옥 지하 어느 자리에 묻힌 안 의사가 무덤을 박차고 나올 일들이 아닐까.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김월배․김종서 지음 / 청동거울 / 2015.8.15. / 319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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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순이들, 노동운동에서 평화를 찾다


평화여성회, 70~80년대 여성노동자 목소리 듣기 개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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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1  16: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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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불리할 때는 분단을 이용한다. 노동운동을 빨갱이라고 해서 위협했다. 북한에서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때는 슬프고 안타깝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이라면 읽어봤을 책 『서울로 가는 길』을 쓴 여성노동자 송효순 씨는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통일된 한반도를 소망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상임대표 안김정애)는 10일 오후 서울 당산동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라는 라운드테이블을 마련, 세 번째 주제로 '70~80년대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다뤘다. 이 자리에는 남영나이론 노동자였던 김연자, 대일화학 노동자로 일한 송효순 씨가 나섰다.

   
▲ 평화를만드는여성회가 10일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세 번째 70~80년대 여성노동자 목소리 듣기 라운드테이블을 마련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가난 속에서 '공순이'의 길을 걷다"

1960~70년대 한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가난과의 전쟁을 벌이던 시기다. 그리고 집안의 딸들은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가야했고, 그것도 자신이 아닌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공순이'라고 불렸다.

1955년생인 김연자 씨도 마찬가지였다.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그는 7남매 중 여섯째로 다섯 명의 오빠를 뒀다. 공부를 잘해 천안의 한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어려운 살림에 통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셋째 오빠가 전쟁 트라우마로 자리에 눕자 학교를 그만두고 병수발을 도맡아야 했다.

16살에 천안 가발공장에 처음 취업한 김연자 씨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다. 기숙사가 있는 공장이라고 하지만 문짝 하나가 일터와 기숙사의 경계선일 뿐이었다. 게다가 월급도 못받았다.

"그때 일하는 것은 집에있는 것보다 일단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좋았어. 그런데 월급을 안주는 거야. 3개월만 하다가 나왔어. 사장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용한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

19살이 된 김연자 씨는 서울 문래동 허리를 펼 수 없는 하꼬방에서 바로 위 오빠와 생활하며 가발공장인 서울통상에 발을 들였다. 당시 서울통상은 최대 가발생산업체로 최준규 사장은 1971년 종합소득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종합소득세 1위의 배경에는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통상은 지각한다고 때리고, 일 못한다고 때리는 등 대우가 상당히 열악했다. 그래서 어린 김연자는 그 광경에 놀라 친구의 소개로 남영나이론에 취업했다. 남영나이론은 우리가 잘 아는 '비비안'을 만드는 회사다.

"내가 지금도 키가 작지만 그때도 작았어. 150cm였거든. 1년반을 시다만 시키는거야. 거기가 브래지어, 팬티같은 거 만드는 곳인데. 원단이 얼마나 무거운지...한 달에 100시간 넘게 잔업을 했어. 일당 210원이었거든. 야간작업하고 그러면 한 달에 만원 넘게 받았어."

"남영나이론은 다른 공장보다 좀 좋았는데. 출.퇴근하면 카드를 찍어야해. 그런데 출근해서 카드를 찍으면 카드를 숨겨놔. 퇴근 안 시키려고. 그럼 그때 실업계 야간학교 다니는 애들은 울고불고 난리나는 거야 카드 달라고... 그때 위장병이 생겼어. 맨날 약을 달고 살았지."

   
▲ '남영나이론'에서 노동운동을 한 김연자 씨. 취업 당시 사진 속 모습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957년생인 송효순 씨도 당시 공장에서 일한 소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언니 둘, 남동생 둘을 뒀다. 둘째 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돈벌러 갔듯이 그도 같은 길을 걸었다.

"꿈을 가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어요. 내가 돈벌어서 남동생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웠지요. 어떻게 꿈이라는 게 있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죠."

16살에 서울로 올라와 목욕탕 심부름꾼으로 일한 송효순 씨는 18살이 돼야 취업이 가능했지만 17살에 나이를 속여 '대일화학'에 취업했다. '대일화학'은 '대일밴드'를 생산하는 업체다.

"8시 반에 출근해서 6시 퇴근이지만 야간작업이 많았죠. 일당이 188원이었는데 점심은 주지 않아서 회사식당에서 60원을 내야 밥을 먹을 수있었어요. 남영나이론은 점심이 꽁짜였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지. 우리에 비하면 남영은 천국이었어요."

"내 별명은 '송순진'이었어요. 그럴 정도로 일만 했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회사에서 모범상을 받아서 밍크이불을 선물로 받았어요. 최고의 모범직원이었죠. 내가 열심히 일하면 동생이 열심히 공부하겠지 생각했어요.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지요."

   
▲ 영등포산업선교회. 도시산업선교회로 출발한 이 곳은 1970년대 노동운동 성장의 통로였다. [사진출처-영등포산업선교회 홈페이지]

"우리는 '산선대학' 출신..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1970년대 열악한 노동현실을 깨기 위한 노동운동 성장의 통로가 있었다. 바로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 '도시산업선교회(도산)'로 출발한 이 곳을 거쳐간 노동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없을 정도다. 그래서 '도산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언론에 나올 정도였다.

김연자 씨와 송효순 씨가 산선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당시 산선이 운영하던 신용협동조합(신협)이었다. 은행에 월급을 저금하러 갈 시간조차 없던 이들에게 산선의 신협은 1원, 10원 짜리도 받아줬다. 하지만 처음 이들이 바라본 산선은 '빨갱이 소굴'이었다.

"월급날 한 친구가 10원짜리만 모아서 저축을 한다고 모아갔어. 그걸 보고 난 빨갱이단체다. 빨갱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혹한다는 문구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걸 확인해보려고 갔어. 1974년도에 가니까 시범아파트 지하에 사무실이 있더라. 아 여긴 정말 빨갱이다라고 생각했지."(김연자)

"그때 똘똘한 어떤 언니가 1원도 저축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얘기를 듣고 많이 망설이다가 따라가봤어요. 한발 넣고 여차하면 한발 빼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공장에서 할 수없는 꽃만들기, 바느질하기 등등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라. 기대가 됐어요."(송효순)

공부의 기회에서 멀어졌던 이들은 신협 저축으로 산선과 인연을 맺고 많은 것을 배웠다. 꽃꽂이, 인형만들기 등에서 시작한 이들에게 산선은 노동자의 권리, 인권, 여성인권 등을 깨우치게 했다.

그리고 영국노동운동사, 종교, 문학 등의 공부를 했고 문동환, 문익환, 고은, 장명국, 김근태, 백기완, 김동길, 김옥길 등이 강사로 나섰다. 쟁쟁한 강사들을 둔 이들은 그래서 '산선대학' 출신이라고 자부한다.

   
▲ '대일화학'에서 노동운동을 한 송효순 씨. '서울로 가는 길'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내적 성장의 계기가 됐어. 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지. 나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내가 노동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했어. 활동 전에는 관심이 나에게 머물렀다면 활동 후에는 '전체 속의 나'를 볼 수있게 됐지. 그때는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됐어."(김연자)

"노동법도 배우고 문인이 와서 강의도 했어요. 그것이 너무 좋아서 야간을 빼먹고 오기도 했지요.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이 변화됐어요. 주눅이 들어있을 때인데 '너희들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은 안 돌아간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존감이 높아졌어요."(송효순)

이를 토대로 김연자 씨는 회사의 부당한 처우개선에 앞장섰다. '강제잔업거부', '생리휴가', '잔업수당' 등을 요구했다. 6시 퇴근시간이 되자 동료들과 미싱기의 전원을 끄고 버티고 앉는 투쟁도 벌였다. 그리고 성과를 거두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에 나섰다.

"대의원 진행연습도 했지. '가하면 예하시오. 나하면 뭐하시오' 얼마나 연습했는지 몰라. 그런걸 잘 몰랐으니까. 그렇게 회의가 열렸는데 계속 정회되는 거야. 회의가 열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노조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어. 깡패가 끌고가서 누굴 겁탈했다느니 소리도 듣고. 무서웠고 힘들었지." (김연자)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하더라구. 내가 모범을 보여야 동료들이 나와 함께할 거 아니야. 그래서 많이 성숙해졌지."(김연자)

"산선 야유회에 간다고 일요일에 7명이 빠졌어요. 그걸 회사가 알고 산선에 다니지 말라고 협박하고 회유하는 거야. 그래서 산선에 이야기했죠. 노동법 지키라는 탄원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서명을 받았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강제야간금지, 식당 밥 질 높이기, 동복 작업복 지급 등이 바뀌었어요."(송효순)

"우리는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지각하지 말고 조퇴하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내가 일의 기준이었는데. 내가 60개면 다른 사람은 55개해. 그럼 내가 더 해서 다른사람 채워주고 그랬어요. 그때 관심사는 당당하게 사는 거였죠. 그리고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생각을 했어요."(송효순)

사회가 무시하던 중퇴, 국졸들이 노동현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로 확대됐다. 그러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노동정화'는 이들에게 시련을 안겼다.

송효순 씨는 산선의 인명진 목사가 잡혀가는 모습을 목격했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어렵게 됐다. 게다가 경찰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경험은 『서울로 가는 길』에 녹아있다. 김연자 씨도 민주노조가 좌절되고 회사의 협박에 못이겨 1981년 퇴사해 결혼했다.

   
▲ 여성노동자로 1970년대 노동운동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한반도 평화통일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노동운동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찾다"

김연자 씨와 송효순 씨는 70~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 뛰어들면서 사회의식을 키웠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한반도 평화통일로 가 있었다.

"나는 아들이 크면 통일이 되어 군대가 없어질 줄 알았어. 한 사람은 2년이지만 그 기간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거지. 재원낭비, 시간낭비, 인간성낭비다. 그래서 평화는 꼭 필요해."(김연자)

"국가가 불리할 때는 분단을 이용해요. 정부에서 궐기대회할 때는 동원됐고, 불리할 때는 의식화교육시키고. 노동운동을 빨갱이라고 해서 위협했어요. 북한에서 쳐들어 올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때는 슬프고 안타깝죠."

김연자 씨는 노동운동의 경험을 살려 10년동안 구로의원,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상담소, 서울의료생협 이사장 등으로 일했다. 현재 인천 결식아동을 후원하는 도시락사업을 하고 있다.

송효순 씨는 해고 후에도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후배노동자에게 경험을 나누고 깃발도 만들어줬다. 그리고 가슴 한 켠에 1986년에 분신한 박영진 열사가 남아있다.

"1970년대의 저임금정책이 빚은 결과가 노인빈곤으로 연결되고, 지금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취업을 하기가 힘든 것이 노동자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어요. 분단사회에 사는 것은 상당히 고난이에요.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송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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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요정' 팔색조의 기막힌 둥지, 새끼 크면 부피 늘어

'숲속 요정' 팔색조의 기막힌 둥지, 새끼 크면 부피 늘어

김성호 2015. 09. 10
조회수 4182 추천수 0
 

가는 나뭇가지 이용한 돔 형태, 탄력 있는 구조여서 새끼 자라도 함께 커져 

부화 19일만에 새끼는 둥지 떠나…통통 뛰며 숲바닥서 지렁이 찾는 희귀새

 

fledging05.jpg» 가는 나뭇가지로 만든 팔색조의 둥지에서 훌쩍 자란 새끼가 먹이를 보채고 있다.

 

새가 번식할 곳이라면 들어가지 않았던 숲이 없었습니다. 대나무 숲, 딱 한 곳을 빼고는 말입니다. 

 

숲이야 기본적으로 울창하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먹이를 물고 분주히 둥지를 드나들어야 하는 일정이 번식인데, 바람도 스며들기 힘겨운 빽빽한 대나무 숲을 번식 장소로 선택할 새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습니다. 생각이 그러하니 번식의 계절에 대나무 숲으로 눈길을 준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자연이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예단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 곳은 다른 곳보다 천적의 간섭이 거의 차단된 아주 좋은 번식지였습니다. 게다가 대나무 숲에서 팔색조가 번식을 치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꿈에서조차 나타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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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잇, 호이잇’. 분명 팔색조 소리였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숨마저 잠시 멈춘 채 소리의 중심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이것 참…. 팔색조 소리는 겹겹이 늘어선 대나무 사이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다가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이 지역에도 팔색조가 살고 있네.” 하는 혼잣말을 흘리며 대나무 숲을 지나 더 깊은 숲으로 발길을 옮기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대나무 숲의 끄트머리를 막 지날 때였습니다. 어…, ‘호이잇, 호이잇’ 팔색조 한 개체의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다른 쪽에서 바로 ‘호이잇, 호이잇’ 소리가 이어집니다.

 

팔색조는 한 개체가 아니라 두 개체, 곧 한 쌍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제 그 대나무 숲에 말입니다. 대나무 숲은 모기의 소굴이지만 모기에 뜯겨 죽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대나무 숲을 비집고 들어가 봅니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니 속 모습은 겉모습과 또 달랐으며, 새는 내가 들어서는 경로가 아니라 하늘 쪽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대나무 숲에서 번식을 치를 새는 없으리라는 생각은 그날로 멈춰야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새가, 그것도 팔색조가 번식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fp02.jpg» 대나무숲의 팔색조.

  
팔색조는 ‘숲의 요정’이라 불립니다. 학명과 영명 모두에 요정을 뜻하는 ‘nympha’와 ‘fairy’가 들어가기에 붙여진 별명일 것입니다.

 

팔색조는 여덟 가지 색을 지닌 새를 의미합니다. 색깔을 어떻게 세분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제는 그보다 색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또 적어 보이기도 합니다.

 

숫자 8은 분명 여덟을 뜻합니다. 하지만 숫자 8에 ‘여러 가지’라는 뜻도 있으니 굳이 팔색조가 여덟 가지 색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겠습니다. 팔방미인의 팔방(八方)이 꼭 여덟 가지 방향을 뜻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팔색조의 영어 속칭은 일곱 빛깔의 새(seven-colored bird)입니다. 몸길이는 약 18㎝입니다. 
 
세계의 미조(美鳥) 중 하나로도 꼽히는 팔색조는 우리나라의 여름 철새입니다. 5월 중순 경 우리나라에 와서 여름을 지내며 숲에서 번식을 하고 찬바람 술렁이는 가을이면 떠납니다.

 

이렇듯 팔색조는 분명 우리나라의 숲에서 여름을 지냅니다. 그러나 마주하기 쉬운 새는 아닙니다. 탐조가가 만나고 싶은 여름 철새 목록 첫줄에 자리 잡을 새이지만 그 만남이 성사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팔색조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 몇 가지를 꼽아보겠습니다. 우선 개체 수 자체가 적습니다. 전 세계의 서식 개체를 최소 2500 개체에서 최대 1만 개체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나마 서식지 파괴로 인하여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어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의 적색목록에 올라있는 형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주도 한라산 둘레에 위치한 남사면, 거제도 동부면 학동, 전라남도 진도 등의 섬에서 번식하는 희귀한 새로서 1968년 천연기념물 제204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Ⅱ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만 해도 전라도 내륙, 충청도 내륙, 경기도, 심지어 강원도 지역에서도 번식 개체를 확인한 바 있으니 서식 범위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확대되었다 여겨집니다.

 

그렇더라도 팔색조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에는 그들의 서식환경 또한 한 몫을 합니다. 팔색조는 인적이 지극히 드물거나 아예 끊어진 깊은 산 속 음습한 지역에서 삽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제대로 열린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의 숲이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깊은 산 속을 더듬듯 뒤지다 ‘호이잇, 호이잇’ 팔색조가 내는 울림이 큰 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모습 한 번 보지 못하고 소리를 들은 것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팔색조는 까칠한 새를 대표할 정도로 무척 경계심이 강합니다.

팔색조는 이미 대나무 숲 경사면에 둥지를 짓고 알을 품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일단 철수합니다. 대나무 숲에서 이뤄지는 관찰이니 제대로 전략을 짜야할 상황입니다.

 

움막을 짓는 것은 기본인데 장소가 마땅치 않습니다. 게다가 대나무 몇 개는 잘라야 하겠으니 소란을 떨지 않고 움막을 지을 길은 없겠습니다.

 

움막을 짓는 시간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둥지를 막 짓기 시작했을 때 움막을 짓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차선이라도 찾아야 합니다. 팔색조의 포란 기간은 17일 정도입니다. 언제부터 알을 품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알 품는 일정을 간섭하는 것은 피하기로 정합니다.

 

부화한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기까지는 약 18일 정도가 걸립니다. 부화 초기도 간섭은 피하기로 합니다. 먼발치서 위장천 뒤집어쓰고 지켜보다 부화가 일어난 후 5일째 되는 날 미리 정한 곳에 가능한 빨리 움막을 짓기로 합니다.
 
움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짧은 소란도 끝나 이제는 원래 대나무 숲의 고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행스럽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자 팔색조가 경계심을 풀고 먹이를 문 채 둥지 앞 대나무에 내려앉습니다. ‘호이잇, 호이잇’.  
 
팔색조가 어린 새를 키우기 위해 잡아오는 먹이의 95% 정도는 지렁이입니다. 거의 지렁이를 먹인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입니다. 나머지 5% 정도는 애벌레와 거미를 포함하여 번식지의 환경에 따라 다양한 곤충을 잡아옵니다.

 

성체의 주요 먹이 역시 지렁이입니다. 주식이 지렁이다 보니 둥지는 지렁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습하고 음침한 숲에 자리합니다. 번식 시기 또한 우리나라의 장마철과 겹칩니다. 모두 주요 먹이가 지렁이인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팔색조의 둥지는 낮에도 음침한 숲에 위치하는 데다 장마까지 겹치니 번식 일정에 동행하는 관찰자로서는 최악의 조건일 때가 많습니다. 둥지는 경사진 땅, 굵은 나뭇가지 사이, 바위 위에 나뭇가지를 엮어 짓는데 어느 곳이라도 모양은 윗부분이 둥그런 돔(dome) 형태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팔색조의 체형 또한 지렁이를 잘 잡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땅을 헤쳐 지렁이를 잡아야 하니 다리가 무척 길고, 꼬리 깃은 땅에 끌리지 않을 만큼 짧습니다. 화려한 몸 색에 비해 꼬리가 너무 짧아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부리 역시 땅을 뒤져 지렁이를 잡는데 맞춤형입니다.

 

팔색조가 지렁이를 잡는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땅바닥에서 통통 튀듯 이동하며 낙엽을 헤치고 지렁이를 잡으면 옆으로 던져놓습니다. 그렇게 금방 예닐곱 마리의 지렁이를 잡은 뒤 땅 위로 던져놓은 지렁이를 한꺼번에 수거합니다. 

 

■ 어린 새를 키우는 주요 먹이인 지렁이를 물고 대나무에 앉은 팔색조의 다양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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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렁이 이외의 다른 먹이를 문 팔색조의 여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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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색조가 땅바닥에서 지렁이를 잡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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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면 나올 수밖에 없는 배설물입니다. 성체 새들의 배설물은 거의 액체 수준이지만 어린 새의 배설물은 얇은 막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부리로 물어 처리하기 위한 생리학적 배려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미 새들은 먹이를 준 뒤 잠시 기다립니다. 먹이를 먹으면 먹이가 장을 자극하여 바로 배설을 유도하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먹이를 받아먹은 어린 새는 엉덩이를 살짝 둥지 밖으로 돌려 배설을 하여 어미 새들의 배설물 처리 수고를 덜어주고 도와줍니다.

 

먹이를 주고 배설물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 부모 새는 고개를 돌리고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이미 먹이는 다 주고 빈 부리인데 먹이를 받아먹지 못한 어린 새는 계속 먹이를 달라고 고개를 내밀며 보채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팔색조뿐만 아니라 다른 새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린 새한테 받아낸 배설물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둥지에서 가능한 멀리 가져다 버리는 방법이며, 또 하나는 부모 새가 먹어버리는 방법입니다.

 

배설물을 먹는 것이 좀 그래 보일 수 있지만 어린 새는 아직 소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먹이에 담긴 영양분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은 채로 배설되기 때문에 아직 영양 가치가 충분한 것이 이유입니다. 팔색조는 부리로 받은 배설물을 멀리 가져가 버립니다.

 

■ 배설물을 처리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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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새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큽니다. 부화 16일째가 되니 이제는 둥지가 좁아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가느다랗고 긴 나뭇가지를 엮어 돔 형태로 지은 팔색조 둥지는 역학적으로 완벽해서 마치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부피만 늘어날 뿐이며 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 둥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크는 팔색조 어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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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 19일째입니다. 오랜만에 비가 없는 날입니다. 시간도 찰만큼 찼고 날씨도 좋고, 오늘이 둥지를 떠나는 날이겠다 싶은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새가 하나씩 하나씩 둥지를 떠납니다. 둥지에는 모두 4마리의 어린 새가 크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둥지를 떠나고 막내까지 둥지를 떠나는 데에는 6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걸어서 떠난 새도 있었고, 둥지 입구에서 휙 날아 둥지를 떠난 새도 있었습니다. 팔색조 어린 새는 하루 안에 모두 둥지를 떠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부모 새가 골고루 잘 키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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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색조의 경우 둥지를 떠난 어린 새는 이틀이나 사흘 쯤 부모 새의 돌봄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둥지를 떠난 어린 새를 추격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둥지를 떠나면 그것으로 만남은 끝이었는데, 어린 새들이 큰 선물도 안겨줍니다. 둥지를 떠난 어린 새들이 멀리 가지 않고 움막 앞에서 이리저리 통통 튀며 자주 오가는 것입니다.

 

어린 새가 움막 근처에 있으니 부모 새도 움막 가까이 다가와 어린 새에게 먹이도 건네주며 돌봅니다. 비좁은 둥지를 벗어난 어린 새는 틈틈이 스트레칭도 하며 날개와 근육에 힘을 붙입니다. 그 날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 둥지를 떠난 어린 새의 다양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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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입니다. 하루 종일 움막을 지키고 있었지만 주변에서 소리만 들릴 뿐 어린 새의 모습을 다시 마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새의 생존확률은 20%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확률로 말하면 어린 새 넷 중 하나만 살아남기 쉽습니다. 그 하나라도 제대로 살아남아 내년 여름 대나무 숲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baban03.jpg» 대나무 숲의 팔색조 어린 새.

 

나무 숲에서 팔색조의 번식 일정에 동행할 수 있었던 이번 여름은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은 내가 생각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 가장 특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나무 숲에서는 팔색조뿐만 아니라 긴꼬리딱새도 번식을 치르고 있었고, 호반새도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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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pfc02.jpg» 대나무 숲에서 번식을 치르고 있는 긴꼬리딱새.

 

rudkf01.jpg» 대나무 숲의 호반새.

 

글·사진 김성호/ 서남대 생명과학과 교수, <물바람숲>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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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쟁중독증과 난민 위기

[주간 프레시안 뷰] "미국 군사주의, 극소수만 배 불린다"
 

지난주 '프레시안 뷰'에서 저는 '난민 위기의 근원은 미국이 촉발했거나 개입한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은 지구상에서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입니다. 지금도 이라크, 아프간, 시리아, 예멘 등에서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동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유로 미국과 러시아가 준전시상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미국 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수천만 난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전쟁을 계속하는 걸까요?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또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은밀한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군산복합체를 비롯해 미국의 지배 계층에게 전쟁이 최고의 돈벌이 수단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쟁은 미국경제를 지탱하는 중대한 버팀목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난민 희생자의 절반은 어린이 

미국의 전쟁경제를 얘기하기 전에 지난 2일 터키 해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의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Rafat Alkhateeb


위의 만평은 요르단의 만평가 라파트 알카팁의 작품입니다. 자유와 안전과 인권이 보장된 대륙과 허허벌판의 대양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있고, 세 살의 쿠르디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대양 한가운데 주검으로 버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실제로 이런 철조망은 미-멕시코 국경 사이에 설치돼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밀입국햐려는 중남미인들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분쟁 지역 사망자의 절반이 어린이라고 합니다. 1995년 유니세프는 이전 10년간 군사분쟁에 의한 어린이 사망자가 200만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1차 걸프전이 끝난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로 이라크에서만 50만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1999년 당시 미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강변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왔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생필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어린이 50만 명을 비롯해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참담한 고통 속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아가 2003년 미국의 침공 이후 이슬람국가(IS)가 국토의 3분의 1을 점거하는 등 이라크는 무법천지가 됐습니다. 이라크 내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국내 난민만 310만 명입니다.

미국과 영국 등 서유럽은 냉전이 끝난 1990년대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제3국에 대한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을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구유고연방을 비롯해 아프간, 이라크, 리비아의 정권이 무너졌고 시리아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등의 인도주의적 개입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혼란과 파괴를 불러왔습니다. 수천만 명의 전쟁 난민들이 살 길을 찾아 지구 도처를 헤매가다가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영국 트리니티대학의 비제이 프랴사드는 "서방은 (자신들의 대외활동의 근거로)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로 행동한다"고 비판합니다. 대외 개입의 대상이 된 제3세계 국가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기는커녕 혼란과 고통만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서방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서방의 자유, 서방의 평등일 뿐 보편적 인류의 자유와 평등은 아니라는 겁니다.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IMF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자본의 이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반면 국제자본의 횡포로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제3세계 국민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서방으로 이주하는 것은 철저히 봉쇄합니다. 한마디로 자본에는 국경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국경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국제자본의 일방적 횡포에 반대하는 제3세계의 지도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의해 제거됩니다. 프라샤드는 현재 서방이 추구하는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돈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돈의 자유'를 위해 무력이 행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Regime Change Refugees: On the Shores of Europe)

20세기 이후 미국의 무력행사는 돈벌이를 위한 것

1953년 이라크, 1954년 과테말라, 1973년 칠레 등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벌인 정권전복 공작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이들 나라의 민주정부는 석유메이저를 비롯한 미국 대기업의 돈벌이에 방해가 됐기 때문에 제거된 것입니다. 미국 대기업의 돈벌이를 위해 미국의 군사력과 정보기관이 동원된 것은 20세기 초 이래 미국의 전통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우선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됐습니다. 1900-1910년대 미국의 전설적 해병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멕시코, 니카라과 등 중남미 국가들에 군사 정벌을 나선 것은 미국 대기업의 돈벌이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버틀러 장군은 1935년 <전쟁은 사기다>라는 책을 통해 예전의 자신은 '자본가들을 위한 조폭'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군사행위가 미국의 안보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매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고백한 것이죠. 

1차 대전 참전의 결정적 이유도 대기업의 돈벌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최고 금융재벌 J. P. 모건이 영국과 프랑스 등에 대출한 수십억 달러의 전쟁 자금을 회수하려면 이들 연합국이 승리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1934년 제랄드 나이 상원의원은 미국의 1차 참전 경위에 관한 청문회를 개최했습니다. 결론은 "은행가들(모건)이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을 불가피하게 만든 중심이자 핵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전 당시 윌슨이 내세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은 사실상 거짓이라는 얘깁니다. 

이에 앞서 193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대통령 취임 직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실은 (…) 자네나 나도 알다시피 이 나라 정부는 앤드류 잭슨(1829~1837년 재임) 이래 금융계가 소유하고 있다는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금권에 의한 미국 정부 통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정부기구가 아니라 민간 은행가들이 비밀리에 만든 민간기구입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전 세계로 확대합니다. 미국 자본의 세계적인 이윤 추구 활동을 돕기 위해 동원된 것이 핵무기를 비롯한 미국의 군사력과 CIA 등 비밀공작기관입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민족주의를 내세워 미국 대기업의 이윤 추구를 방해하는 이란, 칠레 지도자 등은 비밀공작으로 축출하고, 소련을 비롯한 다른 강대국들의 반대는 압도적 핵무기의 우세로 잠재운 것입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1964~75년)의 패배로 미 군사력의 신뢰도에 중대한 균열이 생깁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 베트남을 굴복시키지 못함으로써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 자본의 이윤 추구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대리전 전략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군사주의의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소련과 데탕트에 나서는 한편, 대리인을 앞세운 은밀한 전쟁을 추진한 것입니다. 우선 닉슨은 1972년부터 이란에 미국의 신무기를 무제한 공급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 지상군의 해외 파병이 불가능해졌고, 그동안 중동의 안보질서를 유지해왔던 영국이 1968년 이 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안보 공백이 생긴 데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미국 신무기를 원하는 대로 제공할 테니 이란이 미국을 대신해 중동의 경찰 노릇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가' '중동의 안보는 중동 국가가' 맡으라는 닉슨 독트린의 적용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그동안 전쟁 특수를 누렸던 미국 방위산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몰린 것이었습니다. 

닉슨의 결정으로 미 방위산업의 상업화가 빠르게 진전됩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의 대외무기 이전은 퇴역 단계의 구식 무기를 정부 차원에서 무상원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란에 신형무기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미 방위산업체를 노다지를 만나게 됐습니다. 1971년 14억 달러에 불과했던 미국의 무기 수출은 1975년 160억 달러로 11배 이상 늘어납니다. 이 가운데 이란이 80억 달러, 사우디가 60억 달러를 차지합니다. 전체 수출의 87.5%입니다. 1960년대까지 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던 중동 지역은 이후 미국제 첨단무기의 핵심 구매자가 됩니다. 주목할 것은 1971~75년간 한국의 미제 무기 수입은 200배로 폭증했다는 점입니다.

중동 지역에 미제 무기가 범람하게 되는 또 다른 요인이 발생합니다. 1973년 10월의 1차 석유 위기입니다. 석유가격이 일거에 4배나 뛰어오르자 미국도 막대한 석유 대금 결제로 심각한 무역적자에 직면하게 됩니다. 미국은 사우디와 비밀 협정을 맺습니다. 앞으로 모든 석유대금 결제는 달러로만 한다, 사우디가 벌어들인 석유 수입금을 미국 금융기관에 예치한다, 그리고 미제 무기를 대량 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의 두 약속은 달러의 국제결제통화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뒤는 미국의 석유 수입에 따른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사우디는 미제 무기의 최대 구입국이 됩니다. 사우디는 석유 대금을 미국에 제공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하는 형식입니다. 2011년 미국의 무기 수출액은 663억 달러로(러시아는 48억 달러) 전체 무기 거래의 79%를 차지했는데 이 가운데 사우디의 수입액은 절반이 넘는 334억 달러입니다. 중동 지역에 미제 신무기가 넘쳐나게 된 것이죠. 미국의 무기산업은 미국 경제의 매우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무슬림 용병을 앞세운 대소련 아프간 전쟁

한편 미국은 1978년부터 아프간의 무슬림 전사들을 앞세워 소련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1979년 말 아프간의 안정화를 위해 소련군이 군사 개입을 단행하자 당시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카터 대통령에게 "드디어 소련에게 '그들의 베트남'을 선사할 기회가 왔습니다"고 말했답니다. 10년 간 30억 달러의 자금이 투입된 CIA 역사상 최대 비밀 공작으로 결국 소련을 무릎을 끓고 맙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사마 빈 라덴,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이슬람국가 지도자) 등 10만 명 이상의 무슬림 전사들이 탄생했습니다. 미국의 자금과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오늘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또한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1980~1988년) 당시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동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무려 55억 달러의 정부 신용보증으로 이라크의 무기 구매를 돕는 한편 함께 화학무기 기술 이전 등 이라크의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9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1차 걸프전을 일으켰고, 2003년에 이어 지난해부터 3차 걸프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차 아프간 전쟁에서 3차 걸프 전쟁에 이르기까지 중동 전쟁의 과정을 보면 모두 미국이 개입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민영화-전쟁 자체가 돈벌이가 되다

미국 드레이크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인 이스마엘 호세인 자데는 <미 군사주의의 경제학>(2007년)이란 책을 통해 미국의 군사주의가 탈냉전(1990년)을 경계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고 지적합니다. 이전의 군사주의는 미국 대기업의 해외팽창을 돕기 위한 것으로 그 경제적 과실이 일부나마 미국 국민들에게도 돌아간 반면 냉전 이후에는 전쟁 자체를 위한 전쟁이 됨으로써 방위산업 등 전쟁산업에 직접 연관된 극소수 엘리트만 이익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네오콘 딕 체니가 전쟁의 민영화를 적극 추진한 탓입니다. 체니는 1992년 말 미 육군과 핼리버튼의 자회사 브라운루트 간에 5년간의 군대 업무 외주를 성사시키면서 전쟁 민영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후 체니는 세계 최대의 석유개발기업인 핼리버튼의 회장을 맡게 됩니다. 당시의 군대 외주는 병참 등에 국한된 것인 반면 클린턴 정부 때인 1994년 보스니아 내전부터는 미국 퇴역군인으로 구성된 MPRI란 기업이 크로아티아군의 훈련 및 전투 지휘를 맡습니다. 이 전투용역에 투입된 금액은 자그마치 4억 달러나 됩니다. 이후 미국의 다인콥스, SAIC, 블랙워터 등 미국의 민간 용병 집단은 코소보전쟁(1999년), 아프간전쟁 및 2차 걸프전 등에서 맹활약을 펼칩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럼스펠드 역시 군대 외주화의 신봉자였는데, 그의 임기 말인 2006년 이라크에는 미군 병사와 맞먹는 10만명의 민간 용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민간 용병은 전투를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요인 및 주요 시설 경호, 외국 군대의 훈련 및 지휘 등을 맡고 있습니다. 한 추계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용병산업의 연 매출 규모는 1000억 달러에 달합니다.

미국 정보 관련 예산의 70%가 외주화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CIA 등 정보 수집도 외주화되고 있습니다. 탐사전문기자인 팀 셔록이 2008년에 낸 <청부 스파이(Spies for Hire)>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의 연간 정보 관련 예산 6백억 달러 줄 70%가 외주화돼 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 수혜기업이 부즈 알렌 해밀턴으로 이 기업의 일감 중 99%가 정부 용역입니다. 부즈 알렌 해밀튼은 유명한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이 일하던 곳이죠. 더 놀라운 것은 부즈 알렌 해밀튼이 CIA 용역을 수주한 것은 알렌 덜레스가 국장을 맡은 1953년부터였다는 것, 그리고 이 회사의 소유주는 아버지 부시, 영국 존 메이저 총리 등 미영의 고위 관리들이 주주로 있는 카알라일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국가안보국(NSA) 국장을 지낸 마이크 매코넬이란 인물은 이후 클린턴 정부 때 부즈 알렌의 임원으로 옮겼다가 아들 부시 때는 미 정보기관의 총수인 DNI(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를 역임했고, 그 다음에는 부즈 알렌 부사장으로 옮겼습니다. 이렇듯 한 인물이 정부와 기업 사이를 오가면서 미국의 전쟁정책을 요리하고 그 과정에서 이윤을 챙긴다는 것이죠. 이렇듯 미국의 정관계와 기업에는 전쟁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세력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 재정적자의 대부분은 전쟁 부채

전쟁과 금융에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익은 사유화되고 위험은 사회화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쟁의 이익은 정치가와 고위 지휘관, 그리고 방위산업체들이 독차지 하는 반면 그 피해는 군인들의 목숨과 국민들의 혈세로 부담하는 것이죠. 금융 역시 이익은 소수 주주들이 독점하는 반면 위기가 닥치면 국민들의 세금으로 때웁니다.

미국의 과학자 윌리엄 에드스트롬이란 분이 최근 <카운터펀치>에 미국의 정부 부채와 전쟁 및 금융 간의 관계에 관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결론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전쟁을 일삼지 않았다면 정부 부채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의 GDP는 18조 달러, 부채는 17.52조 달러입니다. 내년도 우리 정부 부채가 645조원에 GDP의 40%를 돌파한다고 하는데, 우리 형편은 미국보다 훨씬 나은 편입니다. 미국은 부채 비율이 100%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드스트롬은 미 정부의 통계가 부채는 실제보다 적게, GDP는 높게 계산돼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2014년 미국의 실제 GDP는 14.77조 달러, 연방정부의 부채는 23.1조 달러입니다. 부채 규모가 커진 것은 정부신탁기금으로부터의 차입금, 공무원 연금의 부족분, 헬스케어 비용 등을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23.1조 달러의 부채 중 군사/정보/전쟁 비용에 의한 빚이 22.5조 달러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연방정부 부채의 대부분이 전쟁 등 군사비용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1996년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연방정부의 부채는 5.5조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1940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 1996년까지 핵무기의 개발, 생산, 배치, 유지에 든 비용이 5.5조 달러였다고 합니다. 즉 핵무기 관련 비용 전체가 정부 부채가 된 것입니다. 이후 20년 간 미국이 군사/정보/전쟁 비용으로 쓴 돈은 연간 8500억 달러로 지난 20년간 17조 달러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5.5조+17조=22.5조 달러'라는 계산이 나오는 겁니다.

이 막대한 부채는 결국이 미국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갚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기축통화국이라는 점을 이용해 달러를 찍어내는 것으로(2008년 10월부터 4.5조 달러 발행) 적자 위기를 모면하고 있지만 중국 위앤화 등에 의해 달러 헤게모니가 무너질 경우 그 후과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미국의 전쟁중독증이 미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동안 전쟁으로 경제를 유지해온 미국이 전쟁중독증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 위기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Wall Street and the Military are Draining Americans High and Dry)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
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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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의 두기 둥-전쟁과 기독교-1

 
 
미국인 스스로가 선언한 제국주
 
최천택. 김상구 공저 
기사입력: 2015/09/11 [09:0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최천택 교수와 김상구 선생이 공동으로 쓴 미국제국주의 역사를 폭로한 제국의 두기둥-전쟁과 기독교의 책표지.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살쪄 온 미국의 본질을 파헤친 '미제국의 두기둥-전쟁과 기독교'의 공동 저자인 전 한신대 최천택교수와 역사학자 김상구 선생이 자주시보에 연제를 동의했다.

 

독자들의 미국연구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연재를 위해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신 최천택 교수님과 김상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편집자주)

 

미국인 스스로가 선언한 제국주의

 

미국의 형성 과정은 역사 이래 인류가 건설한 수많은 국가들과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수한 국가다.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 대개의 학자들은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서유럽 국가들이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형성된 전통적 개념의 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나라다.


19세기 미국의 애국주의 역사학자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그러나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났다고 치장된 미국이, 실제로는 끊임없이 지속된 전쟁을 바탕으로 지속된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힘의 정치'와 '도덕주의적 외피'라는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두 가지 모순된 외교정책의 밑바탕에는 기독교의 소명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전쟁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외교적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한다. 어쨌든 미국은 오늘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불리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가졌으며,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나라다.

 

이러한 미국의 성장 동력은 전쟁으로 획득한 독점적 지위와 방대한 원료자원 그리고 노예무역으로 상징되는 노동력의 확보였다.

 

미국은 건국이후 전쟁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자국의 산업을 끊임없이 성장시켜왔다. 미국이 지금까지 수행한 전쟁은 300여 차례에 이른다.

 

1년에 평균 한 차례 이상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미국 전쟁의 역사는, 1만년 역사를 가진 중국의 전쟁 횟수에 비견될 정도다.

 

이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이미 전 세계의 눈총과 질타를 받고 있으며 기정화된 사실이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열흘 정도가 지날 무렵 알자지라 방송은 럼스펠드를 인터뷰하며 미국이 “제국 건설(empire building)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럼스펠드는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럼스펠드는 왜 화를 냈을까? 과연 미국은 제국이 아닐까? 그리고 미국은 정말 제국을 추구한 과거가 없었을까? 우리의 오해는 ‘고립주의’라고 배운 “먼로 독트린”이 미국 외교의 출발선이라고 알고 있는 미국의 외교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해 먼로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유럽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주장한 선언이다.

 

즉,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국제정치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유럽에 알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으로 오해해 왔다.

 

럼스펠드가 보인 과민한 반응의 이유와 우리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선, 미국 인디아나 주 상원의원(공화당) 앨버트 비버리지(Albert Jeremiah Beveridge, 1862–1927)가 1900년 미국 상원에서 행한 “미 제국을 지지하며(In Support of an American Empire)”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 연설은 “MR. PRESIDENT, the times call for candor. The Philippines are ours forever,…"라고 시작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이다.…게다가 필리핀 건너편에는 중국이라는 무한한 시장이 있다.…태평양은 이제 우리의 바다다.”“태평양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제압할 것이다.…그 자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할 인종이다.…우리는 세계의 문명화를 담당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특별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역할을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신은 우리를 선택하셨다.…야만스럽고 망령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신은 우리를 통치의 달인으로 만드셨다.”

 

비버리지가 자신의 조국 미국을 제국으로 선언하고, 제국의 영위를 위해 제안한 몇 가지 사안 즉 필리핀 식민지 문제, 중국 시장 개척, 태평양 블록화 등은 당시 미국 대통령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의 주요 정책이었을 뿐 아니라

 

후임 대통령 T.루즈벨트를 거쳐 21세기 현재까지도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고 있는 정책들이다.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백인·기독교 선민주의라는 미신도 이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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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사위’ 둔 김무성의 기막힌 반전

 
 
 
‘정치 비리 드라마에서 막장 애정 드라마로 바뀌다’
 
임병도 | 2015-09-11 09:42: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9월 10일 동아일보는 ‘재산가의 아들이 2년 반 동안 코카인 등 마약류를 15차례 투약한 혐의로 구속됐으나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검찰은 항소하지 않아 ‘봐주기’ 논란이 일고 있다’며 ‘마약 상습 투약 유력 정치인 인척’ 관련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동아일보는 정치인의 이름이나 자산가의 아들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은 ‘상습 마약 투약자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사위’라며 실명을 공개했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마약 상습 투약자가 자신의 사위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회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어, 자신은 판결을 나중에 알았고, 파혼을 요구했으나 딸의 간곡한 요청과 사위의 뉘우침 때문에 결혼을 허락했다고 밝혔습니다.


‘누가 봐도 봐주기, 대권이 위험하다’

마약 상습 투약자로 집행유예를 받은 사람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차녀 김현경씨의 남편 이상균씨입니다. 이상균씨는 충북 지역 출신의 재력가인 신라개발 이준용 회장의 아들입니다.

보통 마약 사범에 대한 양형 기준은 4년~9년 6개월입니다. 그러나 이상균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습니다. 법원이 '이번에 한해 피고인에게 개전의 기회를 준다'는 판결 자체는 누가 봐도 명백한 봐주기입니다.

대권주자로 꼽히는 여당 대표의 사위, 거액 재력가의 아들을 향한 불공정한 판결은 이미 논란의 소지가 충분했습니다. 특히 ‘뽕쟁’이라며 마약 관련 범죄자들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정서는 대권을 향해 가는 김무성 대표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그래, 박지만이 있었잖아’

김무성 대표의 사위가 마약을 상습 투약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참 고민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유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이자 박정희의 아들인 박지만씨입니다.

박지만씨는 1989년부터 상습적으로 히로뽕을 투약했습니다. 사창가를 돌며 윤락녀와 함께 히로뽕을 투약했던 사람이 만약 연예인이었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지만씨는 불구속됐습니다. 이유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부모가 모두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동정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박지만씨가 처음 히로뽕 상습 투약으로 불구속됐던 나이가 31살이었습니다. 20대 초반도 아니었지만,  대통령의 아들이자 부모가 숨진 불쌍한 아이로 법의 처벌을 피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일반인이나 연예인이었으면 쌍욕을 해댔을 박지만씨의 히로뽕 상습 투약에 관대했고, 오히려 그를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비리 드라마에서 막장 애정 드라마로 바뀌다’

김무성 대표가 사위의 마약 상습 투약 이슈를 피하는 방법은 박지만씨의 경우처럼 동정 여론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사위가 아닌 딸을 내세웠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딸이 32년간 한 번도 속을 썩인 적 없었다고 말하며 딸의 선택에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긴급 간담회에서 말한 얘기는 바로 뉴스 속보로 종편에 도배됐습니다.

도대체 김무성 대표의 딸이 아버지를 속 썩인 적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뉴스 속보’이자 ‘긴급’이 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마약을 투약한 사위에 대한 처벌보다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원했던 그림은 ‘딸이 울면서 결혼을 원했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어, 마약 투약 사실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다’입니다.

한국의 언론과 여론은 ‘자식을 이길 수 없었던 불쌍한 아빠’로 김무성 대표를 포장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대권주자의 딸이 유명 클럽이나 지방 리조트에서 코카인을 투약했던 방탕한 부잣집 아들을 사랑한 순정파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김무성 대표의 사위 이상균씨의 아버지 이준용 신라개발 회장은 2006년에 10억 뇌물 사건으로 구속됐던 인물입니다. 뇌물과 히로뽕, 정치인. 부당한 판결이 연루된 정치 비리 법정 드라마가 갑자기 막장 애정 드라마로 쪽대본이 바뀐 셈입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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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경련이 발표한 ‘남북경협 신5대 원칙’이 평화체제를 추동하기 위한 조건

[한반도 현안 톺아보기 4] 조성찬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조성찬  |  landjustic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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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0  16: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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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찬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 전경련은 지난 7월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정·관·학·경제계 등 각계 인사 120여명이 모인 가운데 남북경제교류 세미나를 개최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경제위기를 의식한 전경련, 새로운 대북 경협 원칙 발표

북한을 상생의 동반자로 대하려는 인식 전환이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으로부터 나왔다. 전경련은 지난 7월 15일 “남북경제협력의 뉴 패러다임과 경제교류 활성화 방안”이라는 큰 주제로 남북경제교류 세미나를 개최했다. 전경련이 20년 만에 남북경협 원칙을 수정한 것이라는 발표 및 보도가 이어졌다. 핵심 원칙은 ① 남북한 당국 간 대화의 진전과 조화, ② 남북 상호이익(신설), ③ 북한 주도 북한경제개발(신설), ④ 남북한 산업 장점 결합 산업구조 구축, ⑤ 동북아경제권 형성을 위한 주변국 참여와 지지 확보(신설) 등 5가지였다. 그동안의 경협 원칙이 ‘일방적 지원과 압박’이었다면, 새로운 원칙은 ‘북한의 시장 경제화에 입각한 자기주도적 경제개발’ 및 ‘남북한 산업의 장점 보완·발전’을 핵심으로 한다.

전경련이 20년 만에 남북경협 원칙을 수정했다고 하는데, 그 배경이 궁금하다. 전경련이 보도자료를 통해 밝힌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중국이 G2로 부상했고, 둘째, 북·중·러 접경지역 개발이 이뤄지고 있으며, 셋째, 북한에도 시장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전경련 보도자료, 2015.7.15).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 외에도 남한 경제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 요인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은 올해 4월에 “한국경제 3% 성장, 위기 징후”라는 보고서를 발간하고, 한은의 경제전망치(2015년 4월)에 기초하여 한국의 경제성장률(3.1%)이 금융위기 이후에 세계성장률(3.4%)에도 미치는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았다. 심지어 ‘일본화Japanization’라는 용어까지 쓰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저성장・저물가(디플레이션), 생산・투자활동 위축, 저물가・저소비 등 20년 전 일본과 닮은꼴의 징후들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경련이 남북 경협 원칙을 전환한 본래 목적은 새로운 시장 개척이지만, 남북 경협은 남북 간 긴장을 완화하고 새로운 차원의 평화체제를 이끌어 내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인지 과학자이자 진화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교수(하버드대)가 인류 문명사에 나타난 인간의 폭력성의 변화과정을 탐구한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결론에서, 인간 내면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 내어 폭력을 감소시킨 외생적인 힘 중의 하나로 ‘상업’을 제시했다. 교역 상대가 살아있어야만 자기의 이익도 유지 내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악마화 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이다(핑커, 2014). 핑커가 제시한 ‘상업의 폭력 감소 가설’(이하, 경협의 평화체제 추동 가설)은 전경련이 새롭게 발표한 경협 원칙이 더 높은 차원의 평화체제를 추동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지해준다.

그런데 핑커의 가설에서, 상대방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오늘날 미국과 중국 등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원 확보 경쟁을 벌이고 시장을 개척하면서 해당 국민들의 상황이 더 악화되고 각종 국제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경협 그 자체가 평화체제를 추동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관건은 ‘어떻게’ 경협을 펼칠 것인가이다.

‘남북경협 신5대 원칙과 7대 전략과제’가 주는 우려

전경련이 발표한 신5대 원칙과 7대 전략과제는 북한을 경제성장의 동등한 파트너로 인식한다는 점, 그리고 북한의 주도적인 경제성장을 중요한 원칙으로 정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큰 진전일 뿐만 아니라, 통일방안에 주는 의미 또한 크다. 전경련이 제시한 새로운 경협 패러다임이 급작스런 흡수통일이 아닌 점진적인 평화체제 구축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북경협 신5대 원칙과 7대 전략과제에 우려되는 점들은 없을까? 이번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최수영(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남북경협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4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중에서 두 가지는 북한의 자원 및 토지 활용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첫째 패러다임인 ‘북한경제의 자생력 강화’ 하위에 ‘지하자원 공동 개발 및 자원가공 산업 육성을 통한 산업화 자본 축적’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둘째 패러다임인 ‘북한경제발전을 위한 개발협력’ 하위에 경제특구 개발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한국의 성장 경험과 지식을 북한지역 개발협력에 접목시키려는 내용도 담겨 있다.

   
▲ 세미나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최수영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제시한 남북경협의 전략적 과제. [자료-최수영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두 번째 발표자인 곽강수(포스코경영연구원 글로벌연구센터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가진 잠재력으로 ‘원가 경쟁력’과 ‘풍부한 지하자원’에 주목하고 있다. 먼저 아시아 도시 생산직 근로자 연간 임금(실지급액)을 비교하며, 북한의 개성공단이 1,540달러로, 프놈펜(1,424달러)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수준임을 보였다. 그리고 경제특구 지정을 통해 우대조건을 제공받게 되면 기업소득세, 토지분양가 등에서 우위를 보인다고 밝혔다. 다음으로, 북한 지하자원의 전체 잠재가치가 7000-9000조원으로 추정된다는 언론 보도를 인용해, 세계 상위 수준의 광물자원 매장량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들을 볼 때, 동반성장을 겨냥하는 새로운 차원의 남북경협은 사실상 남한의 자본이 북한의 공유자원(토지, 지하자원 등)을 ‘어떻게’ 소유 및 사용하는지에 크게 의존한다.

본고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 및 기업 전략에 대한 한계와 문제점을 자세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그동안 전개된 자본에 의한 ‘공유자원 사유화’ 개발방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정의하는 ‘공유자원 사유화 모델’이란 외생 자본이 토지와 자연자원, 광물자원 등 ‘천연’ 공유자원을 사유화(독점)하고, 해당 정부로부터 규제 완화, 조세 및 부담금 완화 등의 혜택을 제공받아, 지대추구(rent-seeking)를 통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개발방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유화’는, 사유재산권을 설정하지 못하더라도 특권적인 위치를 활용하여 경제지대(economic rent)를 사유화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조성찬, 2015). 한 경제체가 공유자원 사유화 모델을 활용하려는 외생 자본에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할 경우 그러한 경제체는 역설적으로 특권이익을 향유하는 계층과 소외되는 계층이 형성되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남북한 동반성장 또는 상생이라는 철학에 기초한 신5대 원칙과 7대 전략과제가 ‘공유자원 사유화 모델’에 의존할 경우 ‘경협의 평화체제 추동 가설’은 역설적인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전경련이 세미나를 통해 직접적으로 ‘공유자원 사유화 모델’을 적용하겠다고 밝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곽강수의 발표에서 보인 북한에 대한 관점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포스코그룹의 통일준비 사례로 제시한 중국 훈춘 물류산업단지나, 7대 전략과제 중 3째에 해당하는 개성공단에서도 엿보인다. 두 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은 저렴한 토지비용을 부담하며 장기 임차하고 있다. 그런데 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의 토지재산권 구조를 보면, 훈춘 물류산업단지는 중국의 경제여건상 추후에 토지사용권을 매각하고 큰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는 구조이다. 개성공단은 아직까지 시세차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이지만, 지나치게 저렴한 부지이용료를 납부하고 있어 동반성장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경협 구조를 보이고 있다. 공단에 진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자원개발에 진출하는 기업에 의해서도 광물자원의 투기적인 개발을 예상할 수 있다.

북한을 혁신적인 상생경제의 실험장으로 인식해야

저렴한 노동과 풍부한 자원 및 지경학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는 북한과, 기술 및 자본이 풍부하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남한의 자본이 상생할 수 있는 구조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지하자원 개발권을 헐값에 넘기거나, 토지사용을 헐값에 허용하지 않으면서 남한 기업과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 대신 북한은 남측 기업이 요구하는 예측가능한 국제적인 수준의 투자관련 법률 체계 등을 구축해야 한다.

필자는 그동안 북한이 남한에게 남은 마지막 블루 오션(blue ocean)이라고 강조했었다. 이는 남북한 간 경협이 활성화되어 경협이라는 레버리지를 통해 군사적 긴장감이 해소되고 평화체제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전경련의 발표는 북한을 블루 오션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만약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정작 북한에게는 블루 오션이 아니라면 어찌할까? 아직 그럴 여지는 높지 않지만, 북한에 투자하려는 남한의 자본이 내적 관성에 따라 ‘공유자원 사유화 모델’을 요구할 경우 북한에게 남한의 자본은 또 다른 경제적 침략자로 인식될 수 있다. 이제는 남한의 자본과 기업이 북한을 마지막 남은 블루 오션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뛰어 넘어, 북한을 혁신적인 상생경제의 실험장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핑커가 제시한 ‘경협의 평화체제 추동 가설’이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조성찬 (토지+자유 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중국인민대학교 공공관리학원 토지관리학과에서 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공저인「중국의 토지개혁 경험(부제: 북한 토지개혁의 거울)」(한울, 2011.6.), 「토지정의, 대한민국을 살린다」(평사리, 2012.1.)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중국 토지연조제 실험이 북한 경제특구 공공토지임대제에 주는 시사점”, 『한중사회과학연구』(KCI, 2012년 1월, 통권 22호)와 “Introducing Property Tax in China as an Alternative Financing Source”, Land Use Planning(SSCI) 38(2014) 등이 있다.

현재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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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력 구축하여 2017 대권 탈환 하겠다”

 
 
 
 
 
경희대 강연회 “12월 말 ~1월 창당…새정치와 합당·복당 없다”
 
임두만 | 2015-09-10 08:58: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천정배의 로드맵이 나왔다. 무소속 천정배 의원은 9일 경희대 강연회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신당을 빠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1월에 출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강연 중에 청중의 질문을 듣고 있는 천정배 의원 © 임두만

이날 천 의원은 “내년 4월 13일 총선이다. 이를 역산하면 늦어도 내년 1월이면 신당이 출범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보채는 분들이 있지만 중요한 건 당을 만드는 데 한 달이면 된다고 한다”며 “당을 만들면 정권을 교체할 파괴력 있는 엄청난 당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신당을 말하는 분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래와 한국 정치의 재구성’ 대해 역설하는 천정배 의원 © 임두만

그는 “지금 제가 꿈꾸는 건 먼 미래가 아니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집권하려고 한다. 대선이 2년 3개월 정도 남았으니까 짧은 시간에 위력적인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며 “새정치연합과 합당할 일은 없다. 제가 거기에 복귀할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즉 새정치민주연합과 관계없이 자신이 만든 신당으로 정권교체를 하겠다고 각오를 피력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현재 신당을 말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발언과 관련해서도 “기성정치인 누구와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단 한 명도…”라며 “저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여러분과 같이 싱싱하고 패기있는 사람을 찾을까에 집중돼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천 의원은 “조만간 어떤 신당을 왜, 어떻게, 어떤 일정으로 만들지 제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겠다”고 말한 뒤 강연 참가 청중의 “문재인 대표의 재신임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정치연합은 가망이 없다”면서 “문 대표의 거취가 새정치연합의 부활과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강연회에 앞서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만난 천 의원은 “새정치 혁신위의 혁신은 실패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 공감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10시 천 의원이 안철수 전 대표의 의원회관 방으로 찾아가서 만난 이날 회동은 안 의원 사무실에서 배석자 없이 40분가량 진행됐다. 이후 두 사람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호남의 민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새정치연합 혁신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데 대해 공감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회동 후 안 전 대표는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천 의원의 역할이 있다. 함께해야 한다는 당의 입장을 전달했다”며 “서로 각자의 입장을 나눴다”고 말했다. 이는 안 의원은 천 의원이 다시 당으로 복당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하지만 천 의원은 “새판을 짜는 게 불가피하다”며 자신의 신당 구상을 말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같이했다”고 전했다.

이후 오후 늦게 시작된 강연회에서 천 의원은 자신의 생각을 유감없이 피력했다. 장소가 대학인 관계로 청년정치의 필요성, 기성정치의 퇴출 및 새로운 정치의 길에 대하여 제한선 없이 발언했다. “새 정치세력은 무엇보다 청년정당이 돼야 한다”며 “청년들이 마음껏 참여하고 청년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있는 당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천 의원은 “청년들 사이에서 ‘망한민국’ ‘헬조선(지옥(헬)+한국(조선)’이란 말이 회자되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청년들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잠작하게 하는 언어로서 그 같은 말을 듣는 것이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로서 부끄럽다”면서 “헬조선을 극복하겠다는 사람들이 좌절할 게 아니라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질의를 한 대학생이 “신당 창당보다 다음 달 중간고사가 급하다”며 서울법대 수석입학의 비결을 묻자 천 의원은 “저는 공교육도 사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제멋대로였던 것 같은데 지금보니 그게 자기주도학습이었던 모양”이라며 공부를 즐겁게 했으면 한다고 답했다. 이후 뒷풀이 장소에서도 천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위력적 신당’의 포부를 밝혔다. 아래는 이날 강연회의 이모저모를 담은 사진이다.

▲학생들이 천 의원의 강의를 메모하며 집중하고 있다. © 임두만

▲강연에 열중인 경희대 대학원 학생들 © 임두만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는 대학원생에게 하는 답변도 천의원은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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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의 권고, 지역화 통해 행복한 경제 전환을

 
김정수 2015. 09. 09
조회수 1009 추천수 0
 

인터뷰: <오래된 미래> 지은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구촌 다양한 환경·사회 문제엔 세계화 추구 경제 구조가 밑바탕”

“국제연대 통해 부자나라 더러운 빨랫감 가난한 나라 떠넘기기 막아야”

노르베리 호지 .jpg» 국제 지역화운동 단체인 '로컬 퓨터스' 설립자이자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70)가 3일 전북 전주시 팔달로 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는 불행들, 우울증과 마약중독, 자살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기후변화 같은 환경 문제를 한 걸음 물러서서 지구적 시각에서 보면 그 핵심에 세계화된 경제 구조가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하지만 개인들은 이런 문제들이 자신들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행이 왜 발생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요. 파괴적인 소비문화를 강요하는 주장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반면, 환경과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바로 옆 나라까지도 제대로 전파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대안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지역화를 주창하는 국제단체 ‘로컬 퓨처스’의 설립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3일 전주 팔달로 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이처럼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이 전세계를 넘나들며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듯이 수조 달러의 돈을 벌어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시민들이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방향이 수정될 수도 있다”며 “이를 위한 국제 연대에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뜻을 같이해 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5[503].jpg» 전주시과 공동주최로 4~5일 전주에서 열린 ‘행복의 경제학 국제회의’에서 노르베리호지가 발표하고 있다. 사진=전주시

 

환경 분야 고전의 하나가 된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의 지은이로 잘 알려진 그는 4~5일 전주에서 열린 ‘행복의 경제학 국제회의’를 전주시와 공동 주최하려고 방한했다. 이 국제회의는 인간과 생태가 조화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려면 세계화에서 벗어나 지역화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을 확산시키려고 로컬 퓨처스가 여는 행사다.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를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인도 등에서 열렸으며, 이번 전주 회의가 7번째다.
 

40년 전 영국 런던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던 스물아홉살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티베트고원 지대에 위치한 북인도의 라다크를 찾았다. 지정학적으로는 인도의 일부이지만 문화적으로는 티베트에 속해 ‘작은 티베트’로 알려진 라다크의 언어를 연구하려는 목적이었다.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을 가진 그는 라다크 체류 1년여 만에 라다크말을 불편 없이 구사하게 됐고, 라다크 사람들한테 매료됐다. 그들은 ‘여름에는 탈 듯이 뜨겁고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 8개월 동안 온 지역이 얼어붙는’ 혹독한 환경의 오지에서 ‘범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는 건강하고 튼튼하며, 십대 소년이 극히 자연스럽게 어머니나 할머니한테 다정하게 대하는 사회’를 이루어 세상 누구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라다크는 그가 처음 발을 디딘 1975년부터 인도 정부의 개방 정책으로 개발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 뒤 16년 동안 라다크가 변화해간 과정의 관찰 기록에 해당하는 것이 <오래된 미래>다.
 

라다크가 세계화 경제 시스템에 편입돼 붕괴돼 가는 것을 지켜보던 노르베리호지는 1980년 지역에 기반을 둔 생태적 개발 모델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라다크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로컬 퓨처스’는 이 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37년 전 결혼한 영국 출신 남편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그는 일흔이 된 지금도 1년에 4개월가량은 국외 여러 곳을 돌며 로컬 퓨처스가 추구하는 가치를 알리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의 경제학은 다국적 거대 기업들과 은행,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이 세계 시장을 넘나들며 일으키는 사회·환경 파괴 등 불행을 해소하려면 세계화에 저항하고 지역 경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핵심 메시지로 한다.
 

“사람들이 지역사회와 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상호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즉 젊은 사람과 노인, 가족 간의 상호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 사이에 더 행복감이 넘쳐흐른다는 많은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역화를 통해서 에너지 소비와 환경오염이 줄어들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8[125].jpg» "세계에서 지역으로!". 행복의 경제학 국제회의에서 채택한 전주 선언문. 사진=전주시
 

행복의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먹거리를 어떻게 생산하느냐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지역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달하느라 에너지 사용과 쓰레기가 늘어나고, 암 유발, 기후변화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다품종 소량으로 재배해 소비하는 것이 더 많은 일자리 창출과 생산성 증대, 물 이용의 효율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잡은 생선이 중국으로 보내져서 뼈가 발라진 뒤에 다시 노르웨이로 오고, 영국에서 잡은 새우는 타이로 가서 껍질이 벗겨진 다음 다시 영국으로 와서 판매된다. 그런 운송과 그 과정에서의 냉장·포장의 필요가 지구 온난화를 점점 심화시키고 있다”며 “지구가 맞닥뜨린 가장 심각한 환경 문제인 기후변화는 부유한 나라가 자신의 더러운 빨랫감을 가난한 나라에 전가하는 것처럼 이산화탄소를 이전하는 것을 막는 정책적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40년 전 라다크와의 만남이 이후 그의 삶을 결정했다. 그는 “라다크에서 늘 활기에 넘치고 유머 감각 있고, 즐겁게 살던 사람들이 개발 압력에 밀려 엄청난 변화를 겪는 것을 본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좀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40년 동안 그는 거의 해마다 라다크를 찾았다. 이번에 방한하기 직전에도 3주 동안 라다크에서 머물다 온 길이었다.
 

“과거에는 재생에너지 보급 등의 사업을 하며 현장에서 뛰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교육을 위해서 갑니다. 현지 엔지오들과 협력해 워크숍이나 강연 등을 진행하는 것 외에 라다크를 찾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진보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지요.”
 

그는 “라다크의 중심 도시인 레를 가보면 엄청난 교통 체증과 환경오염,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질병들이 나타나고, 예전에는 한 세대에 한 번 정도 있던 자살이 이제는 한 달에 한 번꼴로 특히 청년들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점점 많은 라다크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라다크가 나아가는 방향을 선회시킬 때가 됐다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주/글·사진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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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변화 큰 물결, 서울을 확 바꿔보겠습니다"

 

[인터뷰] '서울 혁신' 이끄는 전효관 서울특별시 혁신기획관

15.09.09 20:29l최종 업데이트 15.09.09 20:2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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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효관 서울혁신기획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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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행정의 힘만으로 거대도시 서울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습니다. 혁신을 통한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참여가 시대적 흐름인 이유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4년차. 그동안 서울특별시의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혁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정 구석구석에 '혁신'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시청 신청사 2층에는 혁신기획관실이 들어서서 '혁신'을 진두지휘하고 있고, 은평구 3만평부지에 자리 잡은 서울혁신파크는 '혁신'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박 시장은 급기야 지난 6월 영국 <가디언>지로부터 '세계 5대 혁신시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조직이나 단체들은 어려움에 당할 때마다 너도나도 혁신으로 스스로를 확 바꿔보겠다고 부르짖는다. 선거를 앞둔 정당들도 혁신 대열에 동참한다. 그럼 과연 서울시가 말하는 혁신은 무엇이고 왜 혁신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

지난 3일 기자와 만난 전효관 서울시 혁신기획관. 박원순표 서울 혁신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그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관계의 단절'로 풀이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개인들이 지나치게 고립됐고, 그로인해 관계가 단절되다보니 많은 문제가 파생됐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문제는 고스란히 서울시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전 기획관은 이같이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을 혁신으로 본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회복된 '보다 인간적인 도시'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사실 간단하고 작은 것들이다. 외로운 노인과 갈 곳 없는 청년들이 같이 살고, 손편지 쓰기로 층간소음문제를 해결하고, 이웃과의 공유로 주차장 부족을 해소하고, 시민의 제안으로 새벽에도 다니는 버스를 만들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이면 거대한 물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위해 마을공동체센터, 청년허브, 인생이모작센터와 같은 중간조직을 만들어 민간단체들을 지원하는 것이 혁신기획관실의 일이다. 

전 기획관은 서울시의 혁신 사업이 "지금은 확산되는 단계라고 본다"며 "확산되면 반드시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고 새로운 행정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서울시가 선도하면 다른 지자체들이 따라오는 '서울모델'이 만들어진 것 같다며 뿌듯해 했다.

'박 시장이 퇴임하면 혹시 다 흐지부지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마을공동체사업 모델은 경기, 대구 등 새누리당 소속 단체장이 있는 지자체에서 오히려 훨씬 더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게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청년정책 지원기관인 '청년허브' 센터장을 지낸 뒤 작년 7월 부임한 전 기획관은 남은 임기 중 "민간 역량을 강화하는 보다 전향적인 조치로 혁신 노력이 단발로 끝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다음은 전 기획관의 일문일답.

성미산마을에 학교폭력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

- 서울시가 말하는 '혁신'은 무엇인가.
"혁신에는 기술혁신도 있고, 행정혁신도 있다. 서울시가 주목하는 혁신은 사회혁신이다. 사회 문제를 국가가 행정의 힘으로 푸는 방법도 있고 시장이 경제논리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국가나 시장이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할 때, 다양한 해법들을 새롭게 찾아보는 것이 사회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는 마을공동체나 사회적경제 같은 조직을 통해, 그리고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해법을 찾을 수도 있고, 작게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찾을 수도 있다."

- 서울은 왜 혁신이 필요한가.
"서울은 문제가 많은 도시이기 때문이다.(웃음) 고령화 문제, 지나친 경쟁, 도시빈민, 공해 등등 도시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고 행정의 힘만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 또한 그 다음 서울의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참여와 역량이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서울혁신기획관실은 사회혁신, 공유도시, 마을공동체, 청년생태계 조성, 거버넌스, 갈등조정 등 낯선 일들을 추진하는 조직들이 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사실 서울시와 같은 거대 도시가 사회혁신이나 공유도시와 같은 플랜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사회혁신이나 협치의 실험이 행정영역과 결합되게 된 것은 박원순 시장이 희망제작소와 같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왔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아직은 불충분하지만 다른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요즘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과 나라에서 이런 일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서로 연결해서 효과를 만들어낼지 묻는 일들이 아주 많아졌다.

이런 사회적 흐름이 새로운 가치영역과 새로운 행정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민간에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아주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런 흐름들은 한국사회에 아주 결정적인 변화를 만들 사회적 기반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새로운 흐름은 때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이런 흐름들이 연결되고 상호학습하는 장이 마련된다면, 담론이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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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효관 서울혁신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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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시민사회 영역에 있는 조직들 아닌가. 시민사회를 행정조직 안으로 끌어들인 거라고 볼 수 있겠다.
"마을공동체센터 같은 경우는 지역에 있는 마을활동들을 지원하는 민간과 행정의 중간 역할을 한다. 서울시는 자원을 지원하고 민간의 성과가 축적되도록 상호협력을 한다."

- 그럼 서울을 어떤 모습으로 바꿔놓겠다는 건가.
"개인들이 워낙 고립되어 있으니까 관계를 맺으며 풀어보자는 것이 하나의 측면이고, 또 다양한 영역간의 연결을 통해 새로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거다."

- '관계'를 많이 강조하는 것 같다. 관계를 맺으면 서울시의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보나.
"그렇다. 마포의 성미산마을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그 동네 아이들을 다 아니까 학교폭력 같은 게 잘 안 일어난다. 관계라는 것 속에서 굉장히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지만, 함께하면 문제가 풀리고 인간다움이 가능해진다.

영국에서 나온 <관계국가>라는 보고서를 보니, 그 전에는 국가가 서비스를 전달하는 '전달국가'였지만 이제 '관계국가'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즉, 예전의 질병은 공공의료를 강화하면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늘어난 만성질환, 우울증 등은 관계 없이는 치료나 발생억제가 안 된다. 이런게 거버넌스나 혁신이 행정모델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흐름인 거 같다. 공공은 판만 짜주고, 주민들이 풀어가는 영역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외로운 노인과 집 없는 젊은이가 한 집에 산다면?

- 결국 서울 혁신의 목표는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도시를 만들어가자는 것인가.
"그렇다. 어느 사회나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그런 문제들을 행정과 민간이 공동으로 해결해가자는 것이다."

-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혁신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달라.
"성북구 등에서 많이 하고 있는 '한지붕세대공감'이란 사업이 있다. 청년들은 주거할 곳이 없다고 난리인데, 노인들은 아파트에 혼자 사는 분들이 많다. 이런 청년과 노인들을 결합해주는 것이다. 청년들은 주거문제를 해결하고 노인들은 외로움을 덜면서 약간의 수입까지 생긴다. 모르는 사람들이 같이 살려면 불편한 게 있을 수 있다. 그럼 시에서 약간의 주거 리모델링비를 지원해준다.

층간소음이 심각한 아파트에서는 손편지 쓰기 같은 걸 하는 사례도 있다. 위아랫층 간에 서로 알고 지내면 갈등이 해결된다. 아파트의 지하에 대피소가 있는데 이것을 문화공간으로 만든다든지 주민들의 휴식처로 만들기도 한다.

심야에 다니는 '올빼미 버스'는 시민이 아이디어를 낸 거다. 밤에도 다니는 버스가 없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통신회사 빅데이터로 분석해보니 시민들이 야간에 제일 많이 다니는 노선도가 나온 것이다. 기업의 데이터와 행정서비스가 결합되는 것이지만 시민의 제안이 없었으면 아마 그런 거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주차장을 공유하는 사업은 서울시 입장에선 주차장 확보하는 데 드는 돈이 줄어들고 이 공유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이같이 당면한 도시 문제를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푸는 게 혁신이다."

- 재미있고 의미있는 아이디어이지만, 무언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 같지는 않다. 
"혁신학교로 유명한 남한산초등학교와 같은 사례는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이것이 정책과 맞물리면서 혁신학교 정책이 됐다. 일부 사례가 정책과 만나 확산된 것이다. 2, 3년 전만 해도 '공유도시'라고 하면 다들 낯설어 했다. 집에서 공구 쓸 일 1년에 몇 번이나 있나. 공유하면 소비를 절약해주고, 창고에 가야 하고 이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작은 동네 비즈니스가 될 수도 있다. 작을 일로 볼 수도 있지만 여러 곳에서 함께 한다면 큰 사회적 효과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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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함께 나눠 쓰면 소비가 위축된다고?

- 그러면 공유경제가 소비를 위축시킨다는 반론이 나오지 않을까.
"숙박 관련 공유사례로 유명한 '에어비앤비'를 보자. 미국에서 빈 방 하나를 빌려주면 방 하나에 연 600~700불의 수입을 올린다. 자기 집에 노는 빈 공간을 이용해 수입이 올라가는 것이다. 참여자들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경제 활성화가 되는 거다. 몇 년에 한번 쓸까말까한 여행가방이나 취업면접 보러 갈때나 입는 양복정장을 왜 사야 하나. 이런 것을 빌려 쓰면 문화나 경제차원에서 이득이다."

- 이전 시장님들은 큰 사업들을 선호했다면, 박원순 시장은 작은 일을 꼼꼼하게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민들이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지금은 확산되는 단계라고 본다. 확산되면 반드시 시스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기존의 제도 안에서라도 서로 협력해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면, 새로운 행정이 나올 수도 있다 최근 이뤄진 주민센터 개편을 보자. 지금까지는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복지서비스를 받았다. 앞으로는 행정이 찾아온다. 또 동사무소라는 공간을 공무원들의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행정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동사무소일 것이다. 행정이 변하는 거다. 행정이 찾아다닌다는 것은 굉장히 큰 혁신이다. 동사무소가 변하면 행정의 시스템 변화를 초래한다. 행정이 주민 사이에 있다는 혁신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 다 좋은데 시민들은 '이게 박원순이 한 거다'라는 생각을 안 할 것 같다.
"누가 했든, 굉장히 중요한 전환기에 있는 것은 맞다. 서구도 사회적으로 잘 안 풀리면 다른 해법을 모색하는 방식을 많이 추구한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6월 영국 <가디언>지로부터 '세계 5대 혁신시장'으로 선정됐다. 서울이 혁신의 브랜드가 되고 있다."

박원순 시작 퇴임하면 혁신사업 흐지부지 된다?

- 박 시장이 퇴임하면 다 흐지부지 되는 거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약간 부침은 있겠지만. 마을공동체사업 모델은 새누리당 소속인 권영진 시장의 대구, 남경필 지사의 경기도 같은 곳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이것은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으로 그런 게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사회적경제센터는 거의 모든 지자체들이 다 하고 있다."

- 서울시 혁신기획관 같은 조직이 다른 지역에도 있나.
"시민소통이라고 하든, 시민참여라 하든 이름은 달라도 광주와 제주 등 많은 지역에서 시도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한 혁신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일종의 '서울모델' 같은 게 형성되고 있다."

- 서울시가 추진하는 사회혁신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추진될까.
"먼저, 사회 내부에 사회혁신을 실천할 수 있는 단위들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난 민선 5기, 행정에서는 낯선 중간지원조직들이 만들어졌다.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청년허브, 인생이모작센터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런 센터들은 민간의 새로운 흐름들을 촉진하고, 지원하고, 연결하는 일들을 해왔다.

두 번째로는 행정 내부의 변화 노력이다. 내부적으로는 많은 행정혁신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의전에 대한 혁신, 절차에 대한 혁신, 계약 관계에 대한 혁신 등을 통해 행정 내부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만들어내야만 행정이 유의미하게 민간의 자발적 흐름과 연계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사회혁신의 기반을 만들어내려는 다양한 시도다. 정보공개를 통해 행정정보를 가공해 시민의 서비스를 증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바 있다. 공공데이터를 통해 항생제를 많이 쓰는 병원을 추려내 시민들에게 알려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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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효관 서울혁신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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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같은 공간' 서울혁신파크의 가슴 벅찬 미래

- 은평구에 조성하고 있는 서울혁신파크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인터뷰에서 서울혁신파크를 '서울의 보석같은 공간'이라고 칭했던데,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
"지금 입주단체 1차 모집이 끝나고 2차에 들어간다. 올해 안으로 단체와 기업들 200~300개가 입주하게 된다. 그러면 혁신을 꿈꾸는 청년들 수천 명이 모여들게 될 것이다. 담장이 헐리고 야외는 빈 공간을 활용해서 시민들과 교류, 공유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 넣으려 한다. 혁신적인 사람들이 많아지면 서로 알게 되고 새로운 활동이 일어날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있을 거라고 본다. 아마 기반조성사업이 끝나는 내년말 내후년초 되면 크고 작은 건물들도 정비되고 어린이 복합시설이 들어서면 공간의 모습도 많이 바뀔 거다."

- 개방직으로 서울시에서 일하고 있는 개인 입장에서 해야 하는 일과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스템 내에서 일하는 것은 매우 낯선 경험이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80년대에 청년시기를 보내고, 1990년대 후반에 하자센터 등을 통해 문화 시대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과 30대 후반을 보냈다. 각각의 가능성과 한계를 지금 시점에서 많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고, 사실은 마지막으로 하려고 했던 일이 미래를 살아갈 청년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논의하고 동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마당을 깔아보는 일이었다. 서울시 청년허브를 만든 맥락이다. 

그 정도가 내가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다, 서울시에 들어와서 일하게 되어 이 시간 동안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일지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행정 내부에서 사회혁신에 속하는 일이 변방처럼 존재하지 않고, 행정 내부에서 그 의미를 인정받게 하는 일 아닌가 싶다. 그 다음은 사회혁신의 흐름이 작은 흐름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는 하나의 큰 흐름이라는 것을 실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서울혁신파크 내 여러 조직들이 이미 몇 년 동안 그러한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그 다음 단계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일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해야 하는 일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노력이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일인데, 이는 민간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좀 더 전향적인 조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거버넌스 2단계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대략의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10일부터 서울시가 박람회 2개를 한꺼번에 연다. 무슨 일인가.
"하나는 서울광장에서 여는 함께서울정책박람회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혁신파크에서 여는 서울마을박람회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추석 전에 열려고 하다보니 겹쳤다. 둘 다 이번이 4회째인데, 정책박람회는 이번에 1인가구문제, 젠트리피케이션 등 예민한 문제를 많이 다룬다. 마을박람회는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여 집단작업으로 마을선언을 만들어 발표한다. 지금까지 마을은 뜻맞는 사람들이 재밌게 살자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져줄 계획이다. 지방정부협의회가 출범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 기초단체만 50개가 혁신파크에 모이니 아마 떠들썩 할 거다. 시민 여러분들도 많이 오셔서 잔치에 참여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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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발소총 차고 9.11테러14주기 경계근무 강화 ...평화미국원정단 26일째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9/10 08:30
  • 수정일
    2015/09/10 08:3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연발소총 차고 9.11테러14주기 경계근무 강화 ...평화미국원정단 26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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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미국원정단은 8일 펜타곤, 백악관앞에서 26일째 평화적인 피켓시위를 전개했다.
     
    원정단은 펜타곤지하철역앞에서 출근시간인 오전7시부터 1시간동안 카톨릭워커회원들과 피켓시위를 진행했다.
     
    펜타곤앞을 지키는 경찰은 카톨릭워커회원들과 원정단을 향해 인사를 한 후 피켓시위참가자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보고했다. 무전기와 권총을 찬 채 근무를 서던 평소와 다르게 이날 어떤 경찰은 연발소총을 몸에 걸친 채 펜타곤지하철역주위를 돌며 피켓시위대앞을 지나치는 등 긴장을 조성시켰다.
     
    카톨릭워커회원은 <9.11테러14주기가 다가오면서 경찰들이 총들고 경계근무를 서는 것은 테러위협에 대비하려는 것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긴장감을 조성시키며 이데올르기공세를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출근시간에 시민들과 펜타곤직원들은 대부분 원정단의 피켓시위를 대충 훑고 지나갔지만 몇몇사람들은 원정단의 피켓에 유다른 관심을 보이며 한참동안 서서 읽기도 했다. 
     
    펜타곤으로 출근하는 한 여성직원은 카톨릭워커회원과 잠깐 인사를 나눈 다음 원정단의 피켓문구를 읽더니 수고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미소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이어 출근자들이 원정단의 피켓시위에 연달아 관심을 보였다. 어떤 한 흑인은 오랫동안 서서 피켓을 끝까지 읽은 후 옅은 웃음띤 얼굴로 인사를 나눴으며 시위대와 눈이 마주친 한 군인은 눈을 피한 채 바삐 걸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펜타곤역 <Free Speech Zone>시위장에서 반전평화를 외치던 10여명은 1시간의 투쟁을 마무리하고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원정단이 피켓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도 경찰들은 여느 때와 다르게 차량을 세운채 운전자를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속해서 원정단은 백악관앞에서 11시30분부터 1시간동안 평화적인 피켓시위를 24일째 전개했다.
     
    노동절연휴가 끝나 관광객들은 줄어들었지만 50여명의 단체관광객들이 백악관앞에 와 원정단의 피켓시위에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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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

[역사속 오늘]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
 
 
 
nk투데이 이동훈 기자 
기사입력: 2015/09/09 [21:01]  최종편집: ⓒ 자주시보
 
 

9월 9일은 북한의 주요 기념일 중 하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입니다. 1948년 9월 9일에 창건했다고 하여 '9·9절'이라고 하거나 '공화국 창건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임시 인민위원회에서 정부 수립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신은 북조선인민위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이후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행정기구입니다.

1945년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조직은 8월 말까지 남북 전역에 140여개의 지부가 건설되었으며, 실제 자치권과 치안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행정조직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9월 6일, 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해방된 조선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38선 이남에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탄압을 받았습니다. 미군정이 자신들을 유일한 정부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불법조직이 되어 강제로 해산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했습니다. 정해구 교수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구체적인 행정은 도인민위원회에서 직접 시행되었고 소련은 핵심적인 지침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6년 2월, 북한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1946년 11월 도, 시, 군 지방선거를 통해 1947년 2월 '임시'자를 떼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민족21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민족21

 

 

남북의 조건이 달라지면서 남북에는 다른 성격의 임시 기구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북조선인민위원회도 통일이 되기 전 임시기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분단이 가시화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945년 12월 미국과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갖고 조선의 독립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입니다. 서중석 교수의 책 '현대사 이야기'에 따르면 3상회의 결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남북의 민주적 정당들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세우며, 미·소·영·중 4개국은 임시정부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신탁통치(또는 후견)를 하고 그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된다고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어떤 단체들이 미소공동위원회와 함께 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서 1947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1947년 9월 16일)하면서 분단이 가시화되자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벌어졌습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논문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47년 10월 3일 북한의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회의에서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를 제안했습니다. 남한에서도 중도파를 중심으로 남북회의를 하자는 제안이 나오는 등 여러 제안이 오갔습니다. 비밀 협의가 이루어진 끝에 1948년 4월 18일 역사적인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4인회담'(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가나다 순) 등이 평양에서 열려 단독선거 불인정 등을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가시화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처하는 조치들도 있었습니다. 1947년 11월 북조선인민회의 3차회의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임시헌법초안'을 마련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은 북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아직 통일이 되기 전이므로 '임시헌법'을 만들고 통일 이후 이를 통합하거나 정식으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북한 뿐 아니라 남한도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7장 58조로 구성된 임시헌법을 만든 바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가 치러지게 됩니다. 남한에는 국회가 구성되었으며 헌법을 심의, 제정하는 등 정부 수립이 진척되었습니다.

북한은 이에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는 5.10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남북 총선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회의 이후 대의원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북한지역에서는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 212명의 대의원이 당선되었습니다.

38선 이남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합법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7월부터 지하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신철 교수의 논문 '북한 민족주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한국 총유권자의 77.5%가 선거에 참여했으며 선거 결과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1080명의 대표가 선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남측 대표들은 1948년 8월 21일, 38선을 뚫고 해주에 모였는데 38선을 넘는 도중 일부가 참가하지 못해 결국 997명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북한의 첫 최고인민회의에는 북한 대의원 212명에 남측 대의원 360명을 합쳐 57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 중 528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가운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가 9월 2일 열렸습니다.

 

1차최고인민회의 
1948년 열린 1차 최고인민회의

 

 

북한은 남측의 지하선거와 남측 대의원을 근거로 자신들의 정부가 남북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북한은 정부 수립 이후 첫 내각을 구성할 때 구성 비율에서 남북을 각각 10명 씩 두어 균형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5일 헌법 초안을 약간 수정한 뒤 통과시켰고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과국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를 통해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에 홍남표, 홍기주 등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이 정권이양에 관한 성명 진술을 한 뒤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권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양했으며 수상으로 김일성 위원장이 선임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9월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을 발표했습니다.

정부 수립 3일 후인 9월 12일 평양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군중대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김일성 수상은 '모두 다 공화국정부 주위에 굳게 단결하여 민주조선창건을 위하여 전진하자'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부수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북한 사람들 연도 미상 ⓒ민족21 
정부수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북한 사람들. 연도 미상 ⓒ민족21

 

 

 

북한에서 공화국 창건일이란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을 "우리 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인민의 국가를 세운 뜻 깊은 날"이라고 규정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날인만큼 북한에서는 9월 9일이 되면 행사를 치릅니다. 지난해의 경우 '공화국창건 66돌' 경축 중앙보고대회가 열렸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당, 국가, 군대 책임일꾼들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고 조국해방전쟁참전열사 묘에 헌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의 무도회가 평양을 비롯한 전국 주요 시군에서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흔히 북한에서 '꺾어지는 해'라고 표현하는 5년 10년 단위 기념일의 경우에는 더욱 성대하게 행사가 치러집니다. 지난 2013년에는 '공화국창건 65돌'을 맞아 로농적위군 열병식 및 평양시 군중시위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공화국 창건 65돌 열병식 장면 ⓒputevki43.ru 
공화국 창건 65돌 열병식 장면 ⓒputevki43.ru

 

 

9월 9일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중요한 내용이 발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8년 창건일 40주년이던 때, 당시 김일성 주석은 '연방제 통일 논의'를 전제로 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습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서는 북과 남 사이에 대화와 협상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며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는 진정한 의사를 가지고 우리를 만나러 평양에 찾아오는 데 대해서는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북남 최고위급회담'이라고 언급해 사실상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2013년 65돌 행사에서는 중앙보고 대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조국통일 3대헌장을 비롯한 강령적 지침과 6.15통일시대가 개척되어 조국통일의 앞길에 밝은 전망이 펼쳐지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67주년 경축대회에서도 남북관계 개선 의사를 읽을 수 있는 표현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박봉주 내각 총리는 경축대회 연설자로 나서 "북남관계에서 대전환·대변혁을 일으켜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려는 것은 우리 공화국의 시종일관한 입장"이라며 "공화국정부는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적극 확대 발전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동훈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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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이슬람 경제 : 진화하는 '아시아적 가치'
이병한 역사학자 2015.09.08 08:06:50
 
 

1997 : 복습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가는 길은 버스를 이용했다. 1965년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가기 전까지 한 몸이었던 나라이다.

과연 입출국 절차는 간단했다. 출국 수속을 공항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에서 밟았다는 점이 특이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쿠알라룸푸르까지 직행하면 다섯 시간 남짓 걸린다. 착공 중인 고속철이 완공되면 한 시간 대로 줄어든다. 탈식민의 여로에서 갈라섰던 두 나라가 재차 긴밀히 엮이고 있는 것이다. 분리 독립에서 대통합으로 판세가 뒤바뀌고 있다.

견문이 늘 계획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다. 예기치 않게 싱가포르 일정이 다소 늘어났다. 탓에 말레이시아 일정은 단축되었다. 왕년의 해상 무역 도시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한 말라카는 보는 둥 마는 둥이었다. 고즈넉한 옛 도시에서 지긋하게 역사를 음미해보고자 했던 애초의 기대는 접어야 했다.

곧장 쿠알라룸푸르로 향했다. 처음부터 말레이시아 행의 목적은 뚜렷했다. 과거보다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이슬람 경제를 집중적으로 살피고자 했다.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금융과 할랄 산업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조바심은 기우였다. 쿠알라룸푸르 버스 역에 내리자마자 이슬람 금융 상품을 선전하는 간판들이 여럿 보였다. 숙소를 향해 걷는 20여 분 동안에도 이슬람 은행에서 발행하는 신용카드와 이슬람 보험 상품의 광고를 수시로 접할 수 있었다. 이슬람 경제는 이미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듯 보였다.

말라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새내기 시절을 한참 회상했다. 1998년 최초의 정권 교체와 더불어 대학생이 되었다. 외환 위기(IMF 구제 금융 사태)로 나라가 한참 혼란스럽던 시절이었다. 원인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참 많았다. 베스트셀러도 확연히 갈렸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 펴냄)가 '내 탓'에 치중했다면,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 펴냄)은 '남 탓'을 하는 쪽이었다. 덩달아 '아시아적 가치' 논쟁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나는 오락가락이었다. 개발 독재를 엄호하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탐탁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로의 재편 또한 내키기가 않았다.

돌아보니 커다란 착시가 있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에 맞서 '아시아적 가치'를 가장 소리 높여 외친 주역은 마하티르 모하마드였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수상이었다. 이슬람 국가의 총리였던 것이다. '유교'로 퉁 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싱가포르가 정치적 영역에서 서구형 민주와 일선을 긋는 독자적인 통치 모델을 실현했다면, 말레이시아는 경제적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에 편승하지 않으며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차이를 깊이 인지하지 못했다. 솔직히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의 나의 사고 지평이란 서구의 이론과 한국의 현실 사이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동남아는커녕 동북아도 잘 몰랐다. 응당 이슬람 세계는 더더욱 멀었다. 그래서 17년이 더 지난 2015년이 되어서야 1997년 당시 말레이시아의 담론 지형을 복기하고 복습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 말라카. ⓒ이병한

 

 

1997년 중엽부터 말레이시아 통화인 링깃의 가치가 급락하고 주식 시장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즉각 국제 투기 자본을 지목했다. 아시아 금융 위기는 해외 투기꾼들의 탐욕과 무책임의 소산이며, 투기적 활동을 규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국제 금융 시장의 구조적 문제라고 성토했다. 그래서 고정 환율제와 자본 통제로 맞대응했다. IMF의 처방과는 정반대로 응수한 것이다. 그리고 조기에 금융 위기에서 벗어났다.

평판은 크게 갈라졌다. 서구에서는 이단자로 취급했다. 말레이시아서는 경제 주권을 지킨 민족주의자로 받들었다. 양쪽 모두 일면적이고 편파적이었다. 마하티르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경제 개방과 세계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가 발표했던 '비전 2020'은 말레이시아를 선진 산업 국가로 변모시킴으로써 가장 현대적인 무슬림 국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었다. 즉 민족주의도 반서구주의도 반쪽자리 독법이다. '비서구적 세계화'를 추진했다고 하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일국적 발전주의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슬람과 세계화를 결합시킴으로써 무슬림 세계의 첨단이 되기를 도모했다.

그런데 마하티르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당시의 금융 위기를 진단하는 세력도 있었다. 제 1야당, 파스이다. 당시 말레이시아의 정치 세력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여당이 암노(UMNO·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 )였고, 야당이 파스(PAS·Parti Islam Se-Malaysia)였다.

암노는 말레이 중산층에 화인 자본가들이 연합하여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파스는 이슬람에 기초한 정당이었다.

물론 말레이시아는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이슬람 가였기에 암노 역시 이슬람을 적극 동원했다. 다만 근대화와 세계화를 성취하기 위한 훈육 기제로서 이슬람을 활용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암노가 말하는 이슬람이란 초기 자본주의 정신을 일구었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거의 판박이였다. 마하티르가 주창했던 '신 말레이인'이 바로 자본주의에 적응한 이슬람의 상징이었다.

반면 파스는 이슬람에 기반을 두고 근대화와 세계화를 교정하려는 세력이었다. 여와 야가 보수/진보, 좌/우로 나뉜 것이 아니라, 이슬람과 근대화에 대한 태도로 갈라진 것이다. '어떤 이슬람인가'가 관건이었다. 파스의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한 독법은 한층 과격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간 앙숙 관계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십자군 전쟁에 빗대는 견해도 분출했다. 유태인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래서 금융 위기의 근본적 원인 또한 세속화와 서구화 자체에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만이 근본적 해법이라 주장했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설득력도 떨어진다. 1997년 금융 위기를 함께 겪은 태국(타이)이나 한국 등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지극히 내부적인 발언이라고 하겠다. 마하티르의 집권 세력과 척을 지고 무슬림을 정치적으로 최대한 동원하기 위한 내수용 언설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음미할 대목 또한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라는 당대의 지배 질서가 윤리와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지점은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다. 종교와 철저히 단절된 세속주의가 경제 위기의 근원이라는 지적 또한 막 싱가포르에서 만나고 온 프라센지트 두아라의 독법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프라센지트 두아라와의 대화)

게다가 이들은 서구의 자본주의만큼이나 마하티르의 경제적 민족주의에도 비판적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상징이 된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부터 호사스러운 새 총리 관저까지 낭비가 심한 건설 프로젝트를 단호하게 성토했다. 절제와 검소를 강조하는 이슬람 윤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실은 그런 대규모 사업이 서구가 비판하는 정경유착과 부패의 핵심 고리이기도 했다. 집권당과 결탁한 친인척 기업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파스가 더 많은 경제 개방과 더 시장 친화적인 구조조정을 주문하는 IMF와 달리 독자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이슬람 경제'로의 전환이었다. 문득 갈팡질팡하던 새내기 시절 읽었던 또 다른 책들이 떠올랐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펴냄) 등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불교 경제학을 설파하고 있었다. 종교(영성)와 경제(세속)의 재결합을 꾀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이슬람과 불교의 차이를 넘어 공명하는 바가 있었다.
 

▲ 말레이시아 익스프레스 버스. ⓒ이병한


2057 : 예습

1950~60년대 많은 신생 독립 국가들이 출범했다. 그러면서 자국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던 서구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 체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주지하듯 일부는 소련을 전범으로 삼아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반면 자신의 문명에 근거한 변화를 꾀하는 쪽도 있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이슬람 부흥(dakwah) 운동이 그것이다. 더불어 이슬람 경제에 대한 관심도 점차 증가하였다. 1960년대 중엽에 이미 독자적인 분과 학문으로 확립되었고, 1980년대 초부터는 정책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란, 수단, 파키스탄이 선도적이었다. 즉 '경제의 이슬람화'는 새 천 년에 불쑥 등장한 핫 트렌드가 아니다. 20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의 탈식민과 함께 점진적으로 확산, 심화되어온 것이다. 일종의 이슬람 판 '개혁 개방'이다.

이슬람 경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추구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라는 환상, 혹은 허상에 도취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이익 추구를 맹목적으로 숭배한다. 반면 공산주의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총체적인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되고 만다. 따라서 이슬람 경제는 개인의 이익 및 사회적 책임 사이에 균형을 도모한다. 애초 종교와 경제, 정신적 생활과 물질적 생활은 불가분이었다. 근대 경제학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물질적 생활만을 절대시하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경제는 인간 생활의 한 요소일 뿐이다.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근거는 역시 이슬람의 성경, 코란이다. 코란은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 상업과 산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가를 독려한다. 빈부 차이 또한 속세의 불가피한 현실로 수용한다. 그럼에도 가진 자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정의로워야 하고,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 생산적 경제 활동이 곧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예배와 합치되도록 살아야 한다. 그래서 코란은 사기, 독점, 매석, 투기, 고리대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도박성, 불확실성, 착취적 요소를 포함한 경제 활동을 일절 금지시킨 것이다. 무함마드가 메디나를 통치했던 마다니 사회(masyarakat madani)가 이상적인 이슬람 경제의 원형적 모델로 거듭 환기되었다.

말로만 그치지도 않았다. 파스가 집권한 지방이 실제로 있었다. 클란탄(Kelantan) 주와 트렝가누(Trengganu) 주가 대표적이다. 중앙의 세속적인 암노 정부에 맞서서 이슬람 사회를 건설하는 실험장이 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신정 국가'의 비관용성과 종교적 극단주의만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비관용성과 극단주의의 산물이다. 이참에 살펴보니 의외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일단 지방과 농촌에 기반을 둔 정당답게 '農本(농본)'을 중시했다. 도시 중산층을 핵심 지지층으로 삼는 암노와 달리 농업과 산업의 공진화를 추구했다. 그래서 집권 5년 만에 클란탄 주를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사회 복지의 향상과 부패의 척결도 돋보였다. 농민층의 빈곤율은 크게 떨어졌고, 출산 휴가는 60일로 크게 늘어났다. 저렴한 공공 주택 보급도 확산되었다.

주지사가 앞장서서 일상의 변화도 선도했다. 이슬람 교사 출신의 주지사는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었다. 사치와 낭비 대신에 '적절한 소비'를 강조했다. 그 자신이 몸소 '깨끗한 정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균형과 조화도 도모했다. 오피스, 쇼핑 센터, 호텔 등 상업과 관광이 발전하는 만큼이나 이슬람 사원과 이슬람 학교도 늘어났다.

고리대를 없앤 이슬람 전당포도 성업을 이루었다. 이슬람 경제에서는 이자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불로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전당포에서는 대여금 이자 없이 저렴한 수수료만 부가하도록 했다. 혹시 기일 내에 갚지 못하더라도 저당물을 몰수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매에 붙여 대여금과 밀린 수수료를 공제하고는 차액은 저당자에게 돌려주도록 한 것이다.

코히랄(Kohilal) 이라는 생활협동조합도 눈길을 끈다. 식품과 화장품 등 신체와 관련된 이슬람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협동조합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대항마로써 이슬람적 생산-소비망을 개척한 것이다. 전자를 이슬람 금융의 원형으로, 후자를 할랄 산업의 원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슬람 경제의 창조적 근대화를 꾀한 지방 정부의 실험이 새 천 년 말레이시아의 국책으로 승격된 것이다.

1997년과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서구 자본주의에 맞서 '아시아적 가치'를 항변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 경제로부터 대안적 발상을 얻고 현장에서 실험하며 부단하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남아시아의 역동적 변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글로벌 이슬람 세계에도 새로운 영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식 세속화도 아니요 중동식 근본주의도 아닌, 이슬람의 새 출로와 새 활로를 열어가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 100주 년을 맞이하는 해는 2057년이다. 21세기의 한복판, 말레이시아의 장래와 이슬람 세계의 미래를 예습하는 차원에서라도 이슬람 금융과 할랄 산업의 현재를 한층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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