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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일제의 만행을!

한미일 군사 동맹 저지, 평화 염원 사진전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4/04/16 [14:2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제국주의의 만행을 잊는 것은 미래를 버리는 것이다.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고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일본 군국주의 부활ㄴ을 막는 첫 걸음이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최근 일본의 군국주의 재무장에 대한 안팎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 시민사회단체의 최대 조직인 전쟁평화실현국민연대(이하 전쟁반대 국민연대)가 일본의 만행과 재침략 의도를 고발하는 특별 사진전을 시작했다. 

전쟁반대 국민연대는 16일 정오 청계 광장에서 아베 정부 등장 이래 과거사 왜곡, 영토분쟁 움직임이 격화된데 이어,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및 무기수출 금지정책 폐기 등 군국주의 우경화 정책이 계속 강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평화 사진전을 개막했다.

사진전 개막식에 앞서 전국여성연대 손미희 상임대표는 “이번 사진전은 보수단체들의 허구와 진보진영의 평화의 싸움”이라며 “분단을 만들어 낸 일본과 미국을 향한 진실의 고함”이라고 사진전의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살기 방현섭 목사는 “미국은 전범 국가인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등 한미일 동맹 강화를 통해 동북아 긴장을 고조 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통합진보당 민병렬 최고위원은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려는 것은 과거 군국주의 만행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번 사진전이 일본의 군국주의 의도를 막고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왜(倭, WHY) 침략의 역사는 되살아나는가." 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사진전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관동 대지진과 제암리 학살 사건, 종군 위안부 사진 등 일제의 잔학상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어 보는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한편 이번 전시회는 오늘부터 19일 까지 청계광장 소라 탑 옆에서 진행되며 21일부터 25일까지는 광화문 미대사관 앞으로 옮겨 열릴 계획이다.



 
▲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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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6> 4월혁명, 다섯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16 09:36:21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 4월혁명의 원인을 3.15 부정 선거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일각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몰랐다는 강변과 맞닿은 흐름으로 보인다. 이는 4월혁명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에 더해, 중요한 여러 현상(예컨대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한 것 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3.15 부정 선거와 '피의 화요일' 4.19 시위, '승리의 화요일' 4.26 시위 같은 각종 시위에는 이승만 정권의 전반적인 성격이 집약돼 있다. 단순한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라고 볼 수 없는 면이 그 시기에 너무나도 강하게 드러난다.

 

2.28 시위 하나만 보더라도 학생들을 일요일에 강제 등교시키고 어떤 학생들은 토끼몰이에 보내버리는 것을 단순한 부정 선거 문제라고 볼 수가 없지 않나. 무서운 강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재 사상, 폭정이라고 볼 수 있는 식의 사고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눈뜨고 지시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그건 이승만 정권이 어떤 정권인지를 말해준다.

 

2.28 시위에서 3.15 시위 사이에 여러 고등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제일 많이 나오는 구호가 뭐냐 하면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우리 학교를 감시하지 말라', 이런 요구다. 특히 사찰계 경찰을 동원해서 국민과 학생을 감시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이 시기에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4월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산 시민들의 항쟁이다.

 

서중석 : 4월 11~13일 사이에 마산에서 두 번째 항쟁,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3월 15일에 일어난) 제1차 항쟁도, 제2차 항쟁도 굉장히 중요하다. 부정 선거가 일어났는데도 (많은) 국민이 침묵했다. 선거 종사자들도 침묵했다.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했다. 사실 교원노조가 빨리 만들어진 것도 (그간 정권의 간섭에 시달리고 부정 선거에 거듭 동원됐던)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승만 하야 발표 이틀 후인 4월 28일 바로 교원노조 발기인회가 소집된다. 어쨌건 부정 선거에 대해 (많은) 국민이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산 시위가 3월 15일에 벌어졌다는 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가) 있긴 있었다. 광주에선 약간 크게 있었고 서울, 춘천, 진주에서 조그마하게 있었는데, 그렇게 눈에 띌 만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더더군다나 제1차 (마산) 시위에서 8명이나 죽었다. 도대체가 폭력 강권 정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사태가 났겠나.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러 나오면서 어떻게 실탄을 장전하고 나오느냐, 이 말이다. 참 무서운 일이지 않나. 시민을 향해 총탄을 막 쏴서 8명이나 죽고 수십 명이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게 나중에 논란이 된다. (발포가 주요 문제로 떠오르면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물러났다. 이기붕은 "총은 쏘라('쓰라'로 들었다는 이도 있다)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1960년 김주열과 1987년 박종철…어머니는 강했다

 

프레시안 : 제2차 마산의거는 4.19와 직결된다.

 

서중석 : 그렇다. 그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제2차 마산의거는 (3.15 시위 때 경찰 발포로 사망한)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오전 10시 조금 넘어서 떠오르고 그 시신이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러면서 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시신 모습이 전국적으로 신문에 나오는데, 얼마나 몸서리쳐지는 모습인가. 김주열은 마산상고 예비 학생이었다. 4월 1일 마산상고에 들어가게 돼 있었는데 시위에 나섰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마산에서 3일간 계속 시위가 일어난 것도 (1980년) 광주항쟁, (1979년) 부마항쟁 같은 걸 제외하면 아주 드문 일이다. 연달아 계속 일어나는 일이 별로 없는데, 마산에서는 3일간 일어났다. '김주열 시신이 저렇게 끔찍하게 나타났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양심이 있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 이런 분노가 전국을 맴돈 것이다. 그러면서 서울을 들끓게 해 4.19가 난 것이다.

 

사실 제2차 마산의거가 없었으면 4.19는 조금 늦게 일어났거나 어쩌면 상당히 늦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던 이승만·이기붕 정권은 어차피 망하게 돼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2차 마산의거가 없었으면) 시간을 더 끌었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더 크게 겪었을 거다. 제2차 마산의거 덕분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4.19로 바로 이어지는 도화선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프레시안 : 제2차 의거 당시 마산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으로 학생들도 막 뛰어오고 그랬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도 많이 달려왔다. 놀라운 건 여성이 굉장히 많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주열이를 살려내라', '내 아들도 이렇게 안 될 거라고 누가 보장하느냐'고 울부짖고 소리치고 하면서 다시 시위가 시작된 거다. 그런데 첫날 시위에서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정말 놀랄 만한 구호가 나왔다.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 "이기붕을 죽여라", "학살 경관 처단하라", 이것이다.

 

4월 11일에 어머니들, 여자들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는 사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시위는 지금까지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만큼 어머니들이 분노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1987년) 6월항쟁 때 박종철 군 시신을 보면서 어머니들이 그렇게 분노한 것과 똑같은 거다. '내 자식도 저렇게 당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면이 있었던 거다.

 

그 플래카드를 보면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쓰여 있다.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19일 시위에서도 '이승만 물러가라'고 직접 요구하는 건 일부에서만 나온다. 주된 구호가 아니었다. 이게 주요 구호로 등장하는 건 4월 25일 교수단 시위 후반부에 가서다. 그런데 4월 11일에 '국부', '민족의 태양'으로 떠받들어야 했던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정면으로 나온 거다. AP통신이 이걸 전 세계에 타전했다. '한국에서 지금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식으로. 그다음 날부터 시위는 크게 벌어지지만 이런 구호는 (한동안) 안 나온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등의 다른 구호가 많이 나온다. 그만큼 첫날 시위는 굉장히 강렬했다.

 

 

▲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 ⓒ연합뉴스

▲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 ⓒ연합뉴스

 

 

부정 선거에 대한 단순한 항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프레시안 : 4월 11일에 정권 퇴진 구호가 나왔다는 점은 여러모로 눈여겨볼 만하다.

 

서중석 : 왜 이런 구호가 나왔느냐, 이걸 생각해야 한다. 얼마만큼 마산 시민들이 분노했는가, 이게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거다. 그렇게 된 데는 3.15 부정 선거도 역할을 했지만, 그 부정 선거에 대해 시위를 했더니 정권이 어떤 식으로 나왔느냐(도 크게 작용했다). 중앙에서는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난동, 폭동이라고 얘기했고, 현지에서는 경찰이 도처에서 청년이나 학생들을 잡아갔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검문검색을 하고 사람들을 연행해서 굉장히 심한 고문을 했다. 데모 주동자를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 또 당시 몇 개 파출소가 불타지 않았나. 방화범으로 몰아세우려 한 것이었다. (북마산파출소 방화 사건은 경찰이 시민을 고문해 조작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편집자>)

 

(정말 무서운 건) 그것 정도가 아니라 '공산당 지하 조직이 좌익 폭동을 일으켰다' 하는 걸로 의거를 몰고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져) 도립병원에 안치된 세 젊은이의 시체 호주머니에다가 '인민공화국 만세', '이승만 죽여라' 이런 쪽지까지 집어넣었다. 나중에 도립병원 원장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정하긴 하지만, 세상에 이승만 정권이 어떤 정권이었느냐 하는 걸 이 과정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경찰은 10대 학생의 시신에 문제의 쪽지를 집어넣고, 시위를 빨갱이 폭동으로 몰아가려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도립병원장에게 시신에 그런 쪽지가 있었다는 내용의 검안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병원장은 검안서를 그렇게 작성하는 것을 거부했다. <편집자>)

 

이러니까 마산 시민들이 그야말로 격앙될 대로 격앙됐다. 그 이전에 몇몇 시신을 못 찾고, 김주열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내 아들 찾아내라'고 마산 시내를 소리 지르고 다니고 그랬다. 바로 이런 점이 마산 시민들을 그렇게 격앙시켜 '물러나라', '죽여라', '처단해라' 같은 강한 구호가 첫날 나오게 만든 것이다. 제2차 마산 항쟁은 단순히 3.15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 전체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점이 아주 중요하다.

 

프레시안 : 친일 청산 문제가 왜 중요한지도 마산 항쟁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서중석 : 이런 일을 저지른 자들이 대개 친일파였다. 이 점도 중요하다. 당시 마산경찰서 사찰계장이 강상봉이었는데 이 사람이 현장 지휘를 한 셈이고, 사찰계 형사 주임이던 노장현이라는 사람이 아까 이야기한 쪽지를 집어넣게 한 걸로 나중에 드러났다. 김주열 시체를 바다에 유기한 사람은 경비 주임 박종표였는데, 일본군 헌병 출신이다. 일제 때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이니까 이승만 정권 때 또 비슷한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가 되는 거다. (강상봉과 노장현은 1950년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인물로 유족들에게 지목됐다. 친일, 학살, 반민주 행위가 한국 현대사에서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편집자>)

 

제2차 마산 항쟁이 일어나자 중앙 정부에서 어떻게 나왔느냐. 이것도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빨갱이몰이에 나선 정권, 4.19 없었다면? 생각하기도 무섭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4월 12일 국회 답변에서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마산은 과거의 역사를 볼 때 공산 계열이 많이 준동할 수 있는 곳으로 공산당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고 말했다. 신언한 법무부 차관은 한술 더 떴다. 홍진기가 법무부 장관을 하다가 (내무부 장관이) 됐기 때문에 법무부 장관은 궐석이었다. 신 차관은 '시위의 양상이나 규모를 볼 때 공산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다'면서 '당국이 일본 조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에서 마산 학생들을 격려하는 무전을 입수했고 어떤 사람은 당시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국회에서 서슴없이 했다. 두 사람은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서 '마산 사태는 적색 마수가 배후 조종한 혐의도 있어서 수사 중', 이런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3일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이걸 읽어보면 글자 한 자 한 자를 그렇게 공들여 썼을 수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레드 콤플렉스를 아주 교묘하게 자극했다. 요즘 사람들처럼 직설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4월 15일 특별 담화문은 더 심하다. 여기엔 공산당이란 단어가 아홉 번이나 나온다. 훨씬 심하게 몰아붙인다. 마산의거를 '철모르고 덤빈 폭동'으로 비하하고 '해내외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참 이 양반, 전혀 이런 일이 아닌 건데 이렇게 표현했더라.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는 것', 도대체 이런 해내외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공산당의 선전에 이런 일을 한다면 가증스러운 일이다. 몰지각한 사람들이 선동하여 난동을 하다가 필경 이러한 불상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을 우리가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담화문에서 막 하고는 '난동을 일으켜서 결국 공산당에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딱 못을 박아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글의 앞부분을 보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여수에서 조그만 아이들이 수류탄을 제 부모들에게까지 던졌다'고 하는 (사실과 전혀 다른) 말도 나온다. 참 이 양반, 굉장히 교묘하게 마산의거를 여순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하게끔 한 것이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와 정의를 요구한 국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이 13일 담화에서 '지금 조사 중'이라고 한 것도 간단한 게 아니다. 그날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건 한국전쟁 때 (이른바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무대, 검찰, 경찰로 구성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생긴 이후 처음 생긴 것이다. (합동수사위원회 구성원은) 대검찰청 오제도 검사, 조인구 치안국장, 하갑청 육군 특무부대장이었다. (사상 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검사, 무서운 사람이다. 조인구 치안국장은 조봉암 진보당 사건 때 담당 검사였던 사람이다. 엄청난 빨갱이 사건을 조작하려고 이걸 만든 것 아니겠나. 마산 사건이 어떻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그런데 이걸 빨갱이 사건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19가 났기에 망정이지, 4.19가 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겠나. 6월 12일 <경향신문>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혁명이 며칠만 뒤늦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일이다." 마산 사람들, 정말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이런 걸 보면 이승만 정권이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서울대 문리대에서 나온 4.19 선언문에 잘 집약돼 있다. 이렇게 쓰여 있지 않나. "적색 전제"와 함께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을 비판했다. 이게 중요하다.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를 하고 있다고 못을 박았다. 이건 반공 전제와 같은 것이다. 파시즘적인 통치를 이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서 관료, 경찰을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라고 못을 박았다. 김주열의 시신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이라고 불렀다. 그냥 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며 우리도 싸우겠다고 얘기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4월혁명은 제2의 해방

 

프레시안 :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도 4월혁명의 밑바탕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 <4월혁명 사료 총책>이 나왔는데, 편집위원장으로서 그것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거기에 중요한 사료가 있다. 연세대 4월혁명 연구반에서 1960년에 만든 목격자 수습 조사서다. 4.19를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본 건데, 4.19와 제일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40문항 정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 4.19 사태를 가져온 동기는 뭣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이다. 거기 보면 "독재 정치(독단적인 일당의), 자유당 정부의 실정, 일당 독재,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평등", 이런 것들도 들어가 있다, 부정 선거는 이보다 꼭 많은 게 아니더라. 부정 선거, 마산 사건에 자극받아 4.19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보다 오히려 이게 더 많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3.15 부정 선거와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 전체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것에 대한 전반적인 단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런 상태에서 두 차례에 걸친 마산의거, 그리고 4.19, 4.26이 일어난 것이다.

 

진영숙이라는 한성여중 2학년 학생이 있었다. 몇 살이었을지 짐작되지 않나? 이 학생이 4월 19일 가난한 홀어머니한테 써놓고 나간 쪽지가 있다. 거기에 이런 마음이 실려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돼 있다. "민족의 해방", 무서운 말이다. 그래서 내가 4월혁명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르지 않나. 무수한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2.28부터 나선 거다. 4월 19일, 이 학생은 유탄에 맞아 죽었다.

 

며칠 후인 4월 23일 모 신문에다가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 학생이 시를 하나 놓고 갔다. 수송국민학교는 4.19 한복판에 있던 학교여서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 오빠와 언니들이 / 왜 피를 흘렸는지". 이런 심정, 이런 정의감으로 이렇게 어린 학생들까지 이런 글을 쓰고 그랬다.

 

 

▲ 1960년 4월 19일,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경찰. ⓒ연합뉴스

▲ 1960년 4월 19일,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경찰. ⓒ연합뉴스

 

 

부정 선거범보다 부정 축재자가 더 욕먹었다

 

프레시안 : 4월혁명에서 도시 하층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희생자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들이다. 그럼에도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서중석 : 4월 19일에 불우한 아동, 청년 학생들이 많이 가담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4월 25일과 26일도 비슷했는데, 4월혁명 때 이 사람들이 중등 학생들과 함께 제일 많이 죽었다. 대학생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이건 광주에서도 마찬가지다.

 

1958년부터 우리나라가 또 불황에 들어갔다. 미국 원조가 그때부터 많이 줄면서다. (그로 인해) 상황이 나쁘기도 했지만, 1950년대가 전반적으로 참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불우한 소년 소녀가 참 많았다. 그 가운데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소년들이 무척 많았다. 당구장에 가면 맨 실업자투성이였다. 한 집 건너 다방, 한 집 건너 당구장이 있었고 다방 앞에는 반드시 구두닦이들이 있었다. 내가 (1960년대 후반) 서울에 와서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하여튼 4월 19일 낮 12시 전후,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태평로 국회 의사당 앞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대개 거기만 가곤 했다. 그런데 이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자 동국대생, 서울대 사범대생, 일부 고등학생들이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하면서 광화문 쪽(지금의 청와대 즉 경무대 쪽. <편집자>)으로 틀기 시작했다. 이게 4.19에서 결정적인 전환이다. 여기서 전환이 일어난 거다. (1948년 제헌 국회가 첫 회의를 연 곳은 중앙청이었다. 한국전쟁 후 국회는 태평로에 있던 옛 부민관 건물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975년 국회 의사당은 여의도로 옮겨간다. 태평로 국회 의사당 건물은 오늘날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은 해방 후 미군정청, 중앙청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철거됐다. <편집자>)

 

이들이 광화문 쪽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하고 중앙청 쪽 담을 돌 때 이 사람들(불우한 아동, 청년 학생들)이 막 쏟아져 나온 거다. 돌팔매질을 한 건 이 사람들이 먼저라고 난 본다. 4월 19일에 이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제일 많이 했을 거다. 그러면서 많이 죽었다. 이 사람들이 돌팔매질 같은 걸 막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면서 데모대가 효자동에 있는 제2저지선을 뚫고 제3저지선으로 갈 때, 오후 1시 40분 무렵 경찰이 콩 볶듯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이게 '피의 화요일'로 변하는 순간이다.

 

프레시안 : 도시 하층민이 적극 나선 것은 높은 실업률, 부정 축재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이어져 있다.

 

서중석 : 불우한 소년 소녀들뿐만 아니라 실업자 청년들도 (시위대에) 참 많았다. 이 사람들이 4.19에 적극 참여한 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제일 큰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특권층, 부정 축재자들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크다는 게 나중에 드러난다.

 

민석홍 서울대 교수가 4월혁명이 혁명인 이유 중 두 번째로 든 게 있다. '이건 특권적인 재벌이나 기업가층 몰락의 바탕을 마련했다.' 무서운 말이다. 지금 들어보면 불온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우리한테 서양사를 가르쳤던 분이다. 민석홍 선생이 1960년 6월 <사상계>에 그렇게 썼다.

 

장면 정부 국무원 사무처에서 (1960년 말) 제1회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3.15 부정 선거범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건 33.1퍼센트 나왔는데 '부정 축재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건 37.3퍼센트가 나왔다. 4.2퍼센트포인트가 더 나온 것이다. 총을 쏘고 부정 선거를 저지른 사람들보다도 특권층인 부정 축재자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컸던 거다.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번 자들이 정상적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국민 의식, 서민층의 불만이 쌓여 있었고 이게 4.19 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부정 축재자 처벌을 들고나와서 허정 과도 정권이나 장면 정부를 무척 애먹인다고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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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여객선 구조 학생... "못 빠져나온 학생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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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0여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해양경찰청이 공개한 구조작업 모습이다.
ⓒ 해양경창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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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 : 16일 낮 12시 30분]
침몰 여객선 구조학생 "물이 차서 못 나온 학생 있는 듯"

16일 오전 수학여행 고교생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가운데, 침몰 직전에 배에서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침몰 여객선에서 구조된 안산 단원고의 박수빈양은 'KBS 뉴스특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배에) 남아있는 학생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양은 "헬기로 구조됐다. 진도에 있는데 어딘지 모른다"며 "(배에) 남아있는 학생도 많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부 친구들은 껴서 못나왔다(는 말이 있다)"며 "물이 차서 못 나온 학생도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박양은 "(선내)방송에서 침몰 얘기가 나와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전달하라고 했다"며 "(당시) 기상시간이 지나 자는 친구는 없었다"고 전했다. 박양은 배가 기울고 침수가 시작되자 "갑판으로 올라가거나 바다에 뛰어내리라고 했다"면서 "당시 배가 기울어져 갑판에 못 올라온 아이가 많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진도 여객선 내부 수색에 군 특공대원을 투입했다"며 "내부 수색 결과는 차후 브리핑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침몰 여객선 소속 회사인 청해진해운의 김재범 기획관리부장은 "안산고 학생들은 전원 무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경미한 부상 정도는 있을 수 있고,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해경은 침몰 원인을 "암초에 의한 좌초"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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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가 기울어진 선체에서 빠져나오는 승객들을 구조하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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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쏟아진 컨테이너 박스 등 물건들이 물위에 떠다니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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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이 기울어진 선체에서 줄을 잡고 탈출하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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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 16일 낮 12시 3분]
"침몰 여객선 사망 1명"... 중대본 "161명 구조"

침몰 여객선에서 사망자 1명이 발견됐다. 해경은 16일 오전 11시 46분경 "침몰 된 여객선 인근 해상에서 여성 1명이 사망한 것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사망자는 해운사 직원 박지영(27)씨로 알려졌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아래 중대본)는 이날 오전 11시 35분경 브리핑을 통해 "현재 구조된 사람은 161명"이라고 밝혔다. 중대본은 이어 "해경 외에도 민간 어선 등에서도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로 구조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학생·교사 338명 전원이 구조됐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오보로 확인됐다.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사고대책본부의 한 관계자가 잘못된 내용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단원고등학교에는 학부모 250여 명이 몰려와 항의 중이다. 정확하게 구조 상황이 확인이 되지 않았는데 왜 학생 전원이 구조됐다는 얘기를 했느냐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30분 전까지만해도 "학생 전원 구조"라는 TV 자막을 보고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던 학부모들은 다시 침통한 표정으로 변했다.

한편 이날 오전 11시 30분경 침몰선에서 구조가 된 이아무개 학생과 통화를 한 한 어머니는 "내 아이는 일단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배를 통해 구조가 됐다"며 "함께 구조된 학생은 11명인데, 한 학생은 다리가 부러졌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구조된 학생 47명이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고, 이들은 병원에 이송 중이다.

중대본은 "해군특수부대 21명을 사고해역에 투입해 추가 구조자 수색에 나섰다"고 밝혔다. 세월호는 오전 11시 40분 현재 머리 부분을 남기고 완전히 침몰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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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에서 촬영한 세월호의 모습.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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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세월호 상공에 헬기들이 모여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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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보강 : 16일 오전 11시 24분]

제주도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고교생 등 450여명을 태운 여객선이 진도 해상서 좌초돼 해경이 긴급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다.

16일 오전 8시 55분께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6825t급)가 "선체가 기울어져 있다"며 조난신호를 보냈고, 해경·해군이 긴급 구조에 나섰다.

세월호는 전날(15일) 오후 8시 30분께 인천항에서 출발,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4명과 교사 14명을 포함해 약 450명이 승선하고 있다.

선체는 90% 이상 기울어 침몰 직전이다. 이날 오전 11시 5분경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 등 338명을 구조 중이다. 경찰 측에 따르면 승선 중인 한 학생이 부모에게 "침몰 중이다"라는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에서는 "여객선의 침몰이 임박했으니., 탑승객은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선내방송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안전행정부는 여객선 침몰 사고에 대응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아래 중대본)를 구성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중대본에 따르면 사고 현장에는 해군·소방·경찰·해경 헬기 18대와 선박 34척이 급파돼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1994년 건조된 세월호는 길이 146m, 폭 22m 규모의 여객선으로 여객 정원 921명, 차량 150대, 20피트 컨테이너 152개를 동시 적재할 수 있는 대형 카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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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 보이지 않는 플라스틱 알갱이의 위협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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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4/04/16 12:01
  • 수정일
    2014/04/16 12: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정수 2014. 04. 16
조회수 331 추천수 0
 

수십년 섞여든 플라스틱 미세 입자 수산물 내장서 잇따라 검출

한국 해역 오염 세계 최고 수준, 먹이그물 거쳐 인체 도달 가능성도

 

pl2.jpg» 미세 플라스틱을 먹이인 줄 알고 먹은 요각류 동물성 플랑크톤들의 모습. 형광색으로 처리한 것이 미세 플라스틱이다. 사진=<인바이런먼틀 사이언스·테크놀로지>

 

바닷물은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의 ‘칵테일’이다. 해저 지각에서 녹아 나온 물질, 육지에서 바람에 날리거나 강물을 타고 흘러든 온갖 물질이 모두 섞여 있어서다.

 

과학을 무기로 지구의 모습을 바꿔온 인간은 지표의 70%를 덮고 있는 바닷물의 구성 성분까지 바꿔놓았다. 인류는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마이크로 플라스틱(미세 플라스틱)’이라는 새로운 물질을 대량으로 섞어 넣었다. 그 결과 지금의 바닷물은 과거와 전혀 다른 상태가 됐다.
 

‘미세 플라스틱’은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 크기에서부터 최대 길이 1~5㎜까지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인데, 이제 지구 모든 곳의 바닷물에서 발견된다. 미세 플라스틱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영국 플리머스대의 리처드 톰슨 교수와 영국 엑스터대 스테파니 롸이트 교수 등이 지난해 2월 국제 과학저널 <환경오염>에 함께 실은 리뷰 논문을 보면, 한국 주변까지 순환하는 해류인 북태평양 아열대 순환류에는 미세 플라스틱이 1ℓ에 최대 0.25㎎꼴로 들어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640px-Nurdles_01_gentlemanrook.jpg» 플라스틱 제품의 원료인 너들. 생산공장 주변에는 이런 알갱이가 퍼져 있기도 하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희귀원소인 알루미늄·구리·은·금·인·몰리브덴·주석·납·수은·안티몬 등을 모두 합한 것보다 100배 이상 높은 함량이다. 국내의 대표적 미세 플라스틱 연구자인 심원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유류유해물질연구단장은 “미세 플라스틱은 세계 어느 바다를 조사해도 나온다. 많은 곳은 동물 플랑크톤의 양과 비슷한 수준인 곳도 있다”고 말한다.
 

해양 미세 플라스틱 오염원으로 최근 주목받는 것은 각질 제거나 세정, 연마 등의 기능을 위해 화장품이나 스크럽제, 치약 같은 생활용품에 넣는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들이다. 이 알갱이들은 하수처리장에서 걸러지지 않은 채 바다로 그대로 흘러든다.

 

생활용품 속 미세 플라스틱 추방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미국의 환경단체 ‘파이브 자이어스(5Gyres)’가 조사한 것을 보면, 이런 제품 가운데는 지름 500㎛ 이하의 플라스틱 알갱이들이 많게는 수십만개까지 들어 있는 것도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바다에 떠다니는 다양한 플라스틱계 쓰레기가 풍화 작용과 자외선에 의한 광화학 반응으로 부서져 만들어지기도 한다. 따져 보면 이런 2차 미세 플라스틱의 비중이 더 높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합성섬유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릴 때 떨어져 나오는 미세한 섬유 부스러기도 주요 발생원으로 지목된다.

 

pl4.jpg» 하와이 제도의 산 산호초에서 죽은 채 발견된 바닷새 알바트로스 한 마리의 위장에서 발견된 플라스틱 조각. 뉴질랜드 더니든 왕립 알바트로스 센터에 전시된 것이다. 사진=케이트 휴슨(Kate Hewson) 
 

미세 플라스틱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해양 쓰레기와 관련한 사람들의 관심은 버려진 그물과 낚싯줄에 걸리거나,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먹이로 잘못 알고 삼켰다가 소화기관이 막혀 죽어가는 해양 생물들의 불행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2004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한 편의 논문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톰슨 플리머스대 교수는 ‘바다에서 사라지다:플라스틱은 모두 어디 있나’란 제목의 논문에서 플라스틱이 바닷속에서 미세 플라스틱 형태로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고 보고했다. 그 뒤 미세 플라스틱이 해양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규명하려는 후속 연구들이 이어졌다. 
 

해양 생물들이 먹이로 잘못 알고 먹거나, 물과 함께 체내로 빨려들어온 미세 플라스틱은 생물체에 포만감을 줘서 영양 섭취를 저해할 수 있다. 체내 장기의 좁은 부분에 걸려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난연제·가소제·열안정제·자외선차단제 등의 플라스틱 첨가제에 함유된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과 중금속 성분은 체내에 축적돼 생물체의 성장을 저해하거나 생식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실제 지난해 12월 생물학 분야 유명 저널인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동시에 실린 영국 플리머스대와 엑스터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미세 플라스틱 오염도가 높은 곳에 사는 갯지렁이들은 먹이를 덜 먹게 될 뿐만 아니라 미세 플라스틱과 함께 체내로 들어온 유해 화학물질 탓에 건강이 나빠질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세 플라스틱이 인간에게도 위협이 될지를 두고는 과학자들도 아직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심 단장은 “결국 미세 플라스틱의 크기 문제”라고 짚었다.

 

pl3.jpg» 한 치약 제품을 현미경으로 본 모습. 까맣게 보이는 것이 연마제로 들어간 지름 0.03㎜ 가량의 미세 플라스틱 알갱이다. 사진=댄터, 위키미디어 코먼스 

 

생물체의 소화기관에 들어온 미세 플라스틱이 세포막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크면, 생물체의 위나 내장 속에만 머물다 배설될 것이다. 하지만 세포막을 통과할 정도로 충분히 작으면 세포에 흡수돼 축적될 수 있다. 미세 플라스틱이 생물체 체내에 축적된다면, 먹이사슬을 통해 인간에게까지 전달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심 단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플라스틱이 마이크로(100만분의1m) 크기보다 더 작게 쪼개질 수 있다는 걸 연구자들 대부분이 예상하지만 아직 이를 증명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 실험실에서 양식장 부자로 사용되는 스티로폼을 조금 세게 풍화를 시켰더니 나노(10억분의1m) 크기까지 쪼개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바닷물 속 미세 플라스틱 가운데) 나노 입자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밝혀지면 (미세 플라스틱 문제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도 있다.”

 

나노 입자는 생체에서 주요 장기는 물론 뇌 속까지 침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외에서는 물고기·홍합·굴·바닷가재 등 다양한 수산물의 내장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프랑스에서 열린 관련 전문가 국제 워크숍에선 북해산 새우의 조직에서 합성섬유를 분리했다는 벨기에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 먹는 작은 물고기나 조개류를 즐기는 이들은 수산물의 체내에서 미처 배출되지 못한 플라스틱 조각까지 함께 섭취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셈이다. 
 

한국의 남해 연안 바닷물 속의 미세 플라스틱 오염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유류유해물질연구단이 조사한 것을 보면, 거제도 해역 바닷물 1㎥에는 평균 21만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가 들어있다.

 

pl1.jpg» H5s2012년 9월 중순 태풍 산바가 지나갈 때 양식장 스티로폼 부자에서 부서져 나온 미세 플라스틱이 경남 통영시 인평동 민양마을 북신만해상공원 앞 바다를 눈처럼 하얗게 뒤덮고 있다. 이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수거 되지 않아 파도에 쓸려 먼 바다로 모두 흩어졌다.사진=이종호, ‘동아시아 바다 공동체 오션’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싱가포르 해역 바닷물 속 미세 플라스틱 평균(2000개) 보다 100배 넘게 많은 것이다. 남해 바닷물 속 미세 플라스틱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은 양식장 등에서 대량 사용되는 스티로폼 부자다.

 

스티로폼은 다른 플라스틱보다 잘 깨지고 더 잘게 부서진다. 62ℓ짜리 스티로폼 부자가 2.5㎜ 크기까지 모두 깨지면 760만 조각이 되고, 마이크로미터 단위까지 더 쪼개지면 조각 수는 수천조 개까지 늘어날 수 있다.
 

한국의 바닷물 속 미세 플라스틱 오염 실태가 심각하지만, 우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나 조개 속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발견한 사례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어느 연구기관도 그런 목적의 조사를 시도해보지 않은 탓이다.
 

심 단장은 “유럽에서는 미세 플라스틱이 수산물의 안전성 등에 끼칠 영향을 두고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수산물에 대한 민감도가 워낙 높아 조사를 미뤄놓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미세 플라스틱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10년도 안 돼 아직 심각성과 관련해 말하기 어렵지만, 우려할 순간이 되면 이미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예방적 관점에서 좀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 미세 플라스틱 대응책은?

생활용품 다른 재료 사용

스티로폼 부이 유입 차단

 

microplastics.jpg» 풍화돼 잘게 쪼개진 플라스틱 쓰레기. 사진=미국해양대기국(NOAA)

 

바닷물 속 미세 플라스틱에 촛점을 맞춘 국제사회의 구체적인 행동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다. 심원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유류유해물질연구단장은 “행동을 취하기에는 과학적 연구 성과가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실제 과학계는 미세 플라스틱의 기준에 대해서도 최대 길이 1㎜로 할 것인지, 5㎜로 할 것인지 사이에서 합의하지 못한 상태다.
 

유엔환경계획(UNEP)·국제해사기구(IMO) 등 유엔 산하 기구에 해양환경 보호와 관련한 과학적 측면을 자문하는 전문가 그룹(GESAMP)은 2010년에야 미세 플라스틱 해양 오염에 주목하고 본격적인 평가 작업에 들어갔다. 심 단장도 참여하고 있는 이 그룹의 최종 보고서는 오는 11월에 나올 예정이다. 
 

미세 플라스틱의 실태와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 등은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지만,  미국의 ‘파이브 자이어스’, 영국의 ‘플라스틱 오션’과 같은 비정부기구(NGO)들은 예방 차원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추방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이들은 비닐 봉지와 같은 플라스틱 제품의 생산·소비 줄이기와 미세 플라스틱이 바닷물 속에 추가로 흘러드는 걸 막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미 바다에 흘러 들어간 플라스틱 쓰레기를 의미 있는 수준까지 제거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치약, 세정용 스크럽과 같은 생활용품에 미세 플라스틱 알갱이를 넣는 제조업체들에게 호두 껍질이나 코코넛 껍질과 같은 유기물질로 플라스틱을 대체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소비자를 상대로는 미세 플라스틱이 함유된 생활용품을 쓰지 않도록 하는 캠페인을 진행중이다.

 

캠페인은 성과를 내고 있다. 2013년 다국적 기업인 유니레버는 2015년까지 자사의 글로벌 제품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단계적으로 추방하기로 했다. 이어 로레알, 콜게이트, 프록터앤갬블, 존슨앤존슨 등도 시한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유니레버와 비슷한 약속을 했다.
 

국내에선 아직 미세 플라스틱 문제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양환경보전 단체인 ‘동아시아 바다 공동체 오션(대표 홍선욱)’의 활동이 눈에 띈다.

 

이 단체는 스티로폼 부자가 부서져 생기는 2차 미세 플라스틱 오염을 줄이기 위해 정부에 부자 소재를 다른 재료로 바꾸거나 사용을 줄이는 양식법을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올해부터 시행되는 해양수산부의 제2차 해양쓰레기관리기본계획에 반영됐다. 올해부터는 남해안 양식 어민들과 함께 스티로폼 부자 폐기물 발생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찾아 적용하는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이 단체 부설 한국해양쓰레기연구소 이종명 소장은 “국내는 아직 외국과 같은 포괄적인 캠페인을 진행할 근거가 되는 연구 자료가 부족해 우선 해양 쓰레기 중에 미세화 문제가 큰 스티로폼 부자 문제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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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국방위, “무인기 소동은 제2의 천안함 모략극”

 

남측에 공동조사 제의,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 나와라” (전문)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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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5  0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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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가 14일 무인기 추락 사건이 북측 소행이라는 우리 정부의 중간조사발표를 반박하고 이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를 남측에 제의했다.

<조선중앙통신> 14일발에 따르면, 북한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이날 ‘무인기 사건의 북소행설은 철두철미 천안호 사건의 복사판’이라는 제목의 진상공개장을 발표하고 “우리는 발생한지 4년이 된 ‘천안’호 사건이 흐지부지되고 있는 마당에서 남조선당국이 제2의 모략극을 날조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방위는 ‘터무니없는 북소행설’의 하나로 우리 정부가 무인기의 기관축전지 앞면에 쓰인 ‘기용날자 2013.6.25’를 제시한 것과 관련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품에 ‘기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며 “우리나라 조선말대사전에는 애당초 ‘기용’이라는 단어의 해석조차 없다”고 일축했다.

아울러, 국방위는 “이것은 마치 ‘천안’호 사건의 ‘북소행’설을 입증하는 절대적 증거의 하나로 ‘1번’ 글씨를 내세웠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그때 우리는 생산제품에 ‘1호’, ‘2호’라는 표현은 써도 체육선수들처럼 ‘1번’, ‘2번’이라고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국방위는 “‘천안’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이번 무인기 사건은 남조선당국이 추구하고 있는 불순한 범죄적 기도를 여지없이 폭로해주고 있다”며 △“우리를 무인기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붙여 악화되고 있는 북남관계와 조선반도의 첨예한 전쟁국면 조성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것” △“또 하나의 ‘천안’호 사건을 조작하는 것으로 제2의 ‘5.24대북조치’를 취하여 북남관계를 영원한 대결관계로 만들어놓으려는 것” △“그 무슨 ‘안보태세강화’를 구실로 미국상전을 저들의 무력증강에 깊숙이 끌어들여 ‘전력공백’의 허점을 메우고 우리에 대한 군사적 압살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 것” 등을 열거했다.

나아가, 국방위는 “‘천안’호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농협’ 금융컴퓨터망 마비사건, ‘3.20해킹 공격사건’, ‘GPS 전파교란사건’에 이어 무인기 사건 등을 우리와 연계시키는 것은 곧 북남대결을 추구하는 것이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공공연한 파괴로 된다”며 그간 우리 정부가 북소행설로 규정했던 사건들을 부정했다.

특히, 국방위는 “우리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남조선당국이 아직까지 ‘천안’호 사건의 ‘북소행’설을 걷어 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2, 제3의 ‘천안’호 사건을 계속 날조해내고 있는 조건에서 이 모든 것을 해명할 용의가 있다”면서 “‘천안’호 사건을 포함한 모든 ‘북소행’ 관련 사건들을 공동조사하자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방위는 “민족의 거대한 관심 속에 진행될 진상조사에는 남조선의 ‘국가안보’를 총괄한다는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이 남측을 대표하여 나오면 될 것”이라고 정식 제의했다.

한편, 이날 오전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발표한 진상공개장에서 “(남한) 국방부는 4월 11일 무인기 사건과 관련한 중간조사결과라는 데서 결정적 근거는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작정 ‘북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하면서 기어코 우리와 연관시켜 제2의 ‘천안’호 사건을 날조해낼 흉심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은 철두철미《천안》호사건의 복사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검열단 진상공개장--

지금 남조선당국이 동족대결의 범위를 정치,군사분야만이 아닌 사회의 모든 령역에까지 확대하기 위한 반공화국날조극,모략극들을 계속 꾸며내고있다.
그것이 온 남녘땅을 대혼란속에 몰아넣고있는 그 무슨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이다.
《중앙합동조사단》이라는것을 조직하여 발견하였다는 무인기들에 대한 정밀조사를 진행한다 어쩐다 하며 복닥소동을 피워대던 남조선당국은 드디여 4월 11일 《북소행》으로 단정한 《중간조사결과》를 공식발표하였다.
이미전부터 무인기사건의 배후에 《북이 있다.》고 정해놓은 상태에서 그를 립증하는데로 조사방향을 집중하고있었다는것을 놓고볼 때 《중간조사결과》발표는 별로 놀라운것이 아니다.
우리는 발생한지 4년이 된 《천안》호사건이 흐지부지되고있는 마당에서 남조선당국이 제2의 모략극을 날조해낼수도 있다는것을 예감하였던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남조선당국이 떠들어대고있는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이 철두철미 《천안》호사건의 복사판이라고 락인하면서 지금까지 밝혀진 사건진상을 그대로 세상에 공개한다.

1. 무인기사건의 실상

지난 3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봉일천주변 야산에서 한 민간인이 추락된 무인기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한주일후인 3월 31일 백령도 사곶근처에서도 무인기가 발견되였다고 한다.
초기 남조선군당국은 《대공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 무인기가 《골동품》으로써 《민간에서 만든 수준》이기때문에 《안보위협》은 크게 없다고 하였다.
이 무인기들을 남조선에 있는 애호가들이 띄웠을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 정형을 조사해보려 한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무인기 1대가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청옥산중턱에서 더 발견되였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4일경 약초채취를 하던 한 주민이 야산에 추락한 무인기를 보았다는 신고를 받고 찾아냈다는것이다.
남조선국방부는 강원도에서 발견된 소형무인기에 대해서는 시작부터 《북소행》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그를 립증하기 위해 《중앙합동조사단》에서 정밀분석할것이며 조속한 시간내에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할것이라고 하였다.
청와대 대변인도 공식석상에서 백령도와 파주에 국적불명의 무인기가 추락한데 대해 《북소행》으로 단정하고 검토하고있으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가 나오면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수도방위사령부》 등이 대비책을 발표하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말하자면 《북소행》에 초점을 맞추고 《짜맞추기식수사》를 진행한다는것을 꺼리낌없이 공개한것이다.
남조선군당국은 4월 2일 무인기들이 북에서 날려보낸것이라고 결론한 1차《조사결과》라는것을 서둘러 발표하였다.
무인기의 발견위치와 시점,카메라에 촬영된 내용,내부장치와 외부도색 등이 서로 류사하기때문이며 백령도에서 추락한 무인기가 북쪽에서 날아왔고 파주에서 발견된 무인기에 《북쪽글씨》가 씌워져있다는 점에서 모두 《북의 제품》으로 판단할수 있다는것이다. 여기에 2012년 4월 우리의 열병식때 등장하였던 무인기와 비록 차이는 있지만 도색방식과 기관종류,착륙용락하산탑재방식 등이 비슷한것도 증거라고 덧붙이였다.
남조선국방부는 《조사결과》에서 이번 무인기의 추락원인에 대한 분석자료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자체결함으로 추락하였거나 북이 의도적으로 추락시켜 저들의 대응태세를 타진해보는것과 함께 남조선사회에 긴장과 혼란을 조성해보려 하였을수 있다는 어정쩡한 소리뿐이였다.
다만 무인기추락이 박근혜를 향한 《무언의 협박》일수 있다는것은 확정적인것처럼 강조하였다.
초기 공개했던 자료들도 대폭 수정변경하였다.
무인기기체에 없었다던 송수신장치도 꼬리부분에 달려있었다는것으로 바뀌였으며 청와대에 근접하지 않았다던 무인기가 숙소까지 촬영한 사진들도 내놓았다.
무인기사건을 《북소행》으로 공개한 즉시 남조선당국은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놓고 3시간이 넘도록 무인기조사결과에 따른 대응방안을 론의하였다.
이어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긴급소집되였다.
특히 박근혜는 청와대수석비서관회의를 소집해놓고 우리의 로케트발사와 추가핵시험가능성 등에 대하여 비난해대다 못해 《북의것》으로 추정되는 무인비행체들이 발견되면서 《불안》이 커지고있다는 식으로 무인기의 《북소행》설을 기정사실화해버렸다.
남조선민심은 이러한 당국의 움직임에는 아랑곳없이 《정체불명의 무인기 군방공망을 무인지경으로 헤집고다녀》,《무인기 하나에 온통 뒤집힌 이남땅》,《호언하던 청와대방공망에 치명적인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무인기가 북의것이라고?!…》,《아닐세라 이번에도 북에 책임 떠넘기는 당국》 등 신랄한 야유조소를 쏟아내고있으며 군사불한당 김관진이가 무인기의 《북소행》을 떠들며 자폭기능까지 가능하다고 한데 대해서는 《파괴력이 더 굉장하고 정확한 미싸일을 보유하고있는 북이 굳이 무인기로 공격할 리유가 없다.》고 일축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심에는 관계없이 남조선국방부는 4월 11일 또다시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을 고집하는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것이 거센 반발과 의혹만 불러일으키게 되자 현재 발견된 무인기의 GPS에 입력된 복귀좌표가 《훼손》될것이 우려돼 해독을 못하고있다고 하면서도 《북소행》인것만은 분명하다는 식으로 계속 여론을 확대시키고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벌어진 무인기사건의 객관적인 실상이다.

2. 터무니없는 《북소행》설

남조선당국의 《중간조사결과》를 비롯하여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은 발표되자마자 앞뒤가 맞지 않는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상식적인것으로 하여 내외의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있다.
《북소행》으로 《확실시》된다고 지적한 사실자료들만 보아도 정체불명의 무인기사건은 《천안》호사건때를 신통히도 련상케 하고있다.

말못하는 《증인》으로 나선 사진들

남조선당국은 무인기들에서 나온 촬영사진들이 《북소행》을 립증하는 가장 위력한 증거라고 하였다.
파주에서 수거한 무인기의 경우 북쪽에서 서울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청와대를 포함한 서울과 경기도북부의 주요시설들을 촬영한 사진 193장이 나왔다고 하였다.
백령도에서 수거한 무인기도 소청도에서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로 날아가는 도중 남측의 군사시설물들을 100여장이나 촬영하였다고 하면서 이것만 보아도 북에서 무인기를 보냈다는것을 강하게 뒤받침해준다고 하였다.
남측의 론리대로 한다면 북에서 남으로,남에서 북으로 오가는 비행체는 다 《북의것》으로 되며 그것이 어떤 물체이든 남측지역을 촬영한 사진들이 나오면 모두 《북의것》으로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군사분계선 북측지역에서 남과 북으로 오가는 비행체는 다 남조선의것이며 북측지역을 촬영한 사진이 나오면 그 비행체 역시 남조선의것이라는 귀결이 주어지지 않는가.
사건해명치고는 단순함을 벗어나 유치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다.
하긴 얼마나 궁색했으면 무인기의 비행방향과 말못하는 사진을 《증인》으로까지 내세웠겠는가 하는것이다.
아마도 사진들이 《입》을 열게 된다면 《북소행》을 떠드는 모략가들의 뺨을 정신이 번쩍 들게 후려갈겼을것이다.

무식의 결정체 조선글자표기

《중앙합동조사단》은 무인기가 《북의것》이라는 가장 위력한 증거의 하나로 기관축전지에 표기되여있는 우리 글자를 들고나왔다.
현재 무인기의 기관축전지 앞면에는 《기용날자 2013.6.25》, 《사용중지날자 2014.6.25》라고 씌워진 상표가 붙어있다고 한다.
이것이 북에서 일반적으로 쓰고있는 제품표기법이며 저들이 쓰고있는 《날짜》를 《날자》라고 쓰는것이 《북조선식표기》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초보적인 상식조차 결여된 우격다짐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품에 《기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우리 나라 조선말대사전에는 애당초 《기용》이라는 단어의 해석조차 없다.
사람들은 《기용》이라는 표현은 남조선에서 많이 쓰는것으로 알고있다.더구나 무인기에 표기된 글자서체가 남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서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많다.
이것은 마치 《천안》호사건의 《북소행》설을 립증하는 절대적증거의 하나로 《1번》글씨를 내세웠던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때 우리는 생산제품에 《1호》,《2호》라는 표현은 써도 체육선수들처럼 《1번》,《2번》이라고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리명박일당은 누구에게도 통할수 없는 《1번》글씨를 《북소행》설을 립증하는 결정적증거로 내놓고 한사코 우겨댔던것이다.
이번 《조사결과》에서는 축전지뒤면에 중국어와 일본어표기가 있다는것과 무인기의 비행자세를 유지해주는 장치가 일본 후따바의 제품이라는 자료도 발표되였다.
만약 조선어표기가 있기때문에 무인기가 《북의것》이 된다는 론리라면 중국어와 일본어표기,일본산 장치가 있는것은 무엇이라고 주장할수 있겠는가.
오죽하면 우리에 대한 체질적인 대결의식과 병적거부감을 가지고있는 통일부장관 류길재까지도 그런 엉터리《조사결과》라는것을 내놓은데 대해 얼마나 민망스러웠던지 그런 서체를 가지고 《북소행》이냐 아니냐를 따지는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참다 못해 핀잔을 하였겠는가.
남조선당국이 글자표기를 근거로 무인기를 《북의것》이라고 우겨대면 댈수록 자기의 무지와 몰상식만을 드러낼뿐이다.

귀신도 곡할 지문확인놀음

이번 무인기의 《북소행》설을 립증하기 위한 하나의 증거로 지문이 거론되였다.
무인기에서 식별된 지문을 정밀감지한 결과 남조선에는 없는 《미등록지문》 6개를 확인했다는것이다. 따라서 그 지문들이 북조선사람들의것이 분명하며 결국 무인기가 《북의것》으로 된다고 하였다.
무인기에서 발견되였다는 지문이 남조선사람들의것이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북조선사람들의것으로 된다는 주장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했다면 과연 누가 믿을수 있겠는가 하는것이다.
남조선땅에 숱한 외국사람들이 들어와있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지문도 남조선사람들의 지문과 다를터인데 남조선당국은 《북조선지문》만을 확인하는 《특별도구》라도 가지고있는지는 귀신도 모를것이다.

초보적인 지리상식도 없는 무인기리륙지점

남조선국방부 대변인은 초기 《국방예산으로 30조원이상을 써도 북의 무인기가 어디서 발진했는지 리륙지점을 파악하는것은 쉽지 않을것이다.》라고 발표한바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에는 같은 입으로 무인기의 리륙지점이 확인되였다고 하면서 황해남도 온천비행장이라고 찍었다.
거짓말을 꾸며대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아무러한 과학적증빙자료도 없이 무인기의 리륙지점을 북쪽지역으로 서둘러 단정한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지명조차도 제대로 모르면서 확인되였다고 밝힌것이 더욱 가관이다.
우리 나라 온천비행장은 평안남도에 있지 황해남도에 있지 않다.
국방부 대변인은 백령도와 가까운 지역이 황해남도라는것만 알고있다나니 온천비행장이 황해남도에 있는것으로 발표해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것 같다.
그가 《북소행》설을 립증시키는데 얼마나 몰두하였는지 초기 실언한 지명을 며칠후에 다시 정정하여 발표한다는것이 오히려 더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번에 잘못 발표한 지명을 정확히 밝힌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무인기리륙지점이 황해남도 옹진부근의 한 비행장이라고 한것이다.
우리는 옹진부근에 비행장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다.
이제 GPS복귀좌표를 해독하고 비행경로를 검증하여 리륙지점을 밝힌다고 하는데 모름지기 그 리륙지점이 북이라고 조작해낼것이다.

《북조선색갈》로 공인된 하늘색과 흰색

남조선당국은 무인기들이 《북의것》이라고 확증할수 있는 증거로 동체색갈이 하늘색이기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동체에 하늘색바탕과 흰색구름무늬를 하였기때문에 우리의 무인기이며 그 색갈이 열병식에 나타난 우리 장비색갈과 같기때문에 《북의것》이 분명하다는것이다.
그러면서 동체의 도색을 놓고 무작정 우리를 걸고들기가 아무래도 멋적었던지 전파탐지 및 육안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장도색을 한것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날조에 이골이 난 능수라고 하여도 《북소행》임을 립증하기가 여간 조련치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동체색갈까지 우리와 련계시키니 말이다.
남조선당국의 주장대로 한다면 하늘색이나 흰색은 다 《북조선색갈》이라는것인데 이에 공감할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하겠는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현재 하늘색과 흰색으로 된 옷을 입거나 물품을 소유하고있는 남조선사람들은 즉시 다른 색갈로 교체하여야 할것 같다.
자칫하면 그들모두가 《종북》으로 몰려 족쇄를 차고 감옥에 갈수 있기 때문이다.

《북이 아니면 누구?!》로 된 항속거리

《주변국에서 발진하기에는 짧은 거리이고 그렇다고 남한내에서 한것은 아니기때문에 북에서 했다고 볼수밖에 없다.》, 이는 《중간조사결과》발표에서 무인기의 항속거리를 《북소행》으로 판단한 대목이다.
남조선군당국은 연료통크기와 기관배기량,촬영된 사진 등을 검토한 결과 무인기가 최저 180㎞에서 최고 300㎞의 항속거리를 가진것으로 분석됐다고 하였다.
남조선당국은 이러한 항속거리를 놓고 《북소행》으로 단정짓기에는 제스스로도 부끄럽고 게면쩍었던지 기상조건이나 왕복거리까지 더 고려해보았다고 덧붙였다.
항속거리가 짧으면 짧아서 《북소행》이고 항속거리가 길면 길어서 《북소행》으로 된다는 격이다.
그렇다면 항속거리가 짧은 이 세상의 모든 비행체는 그것대로,항속거리가 긴 비행체는 또 그것대로 다 《북 비행체》란 말인가.
제 흉심을 달성하자니 이런 생억지도 꺼리낌없이 부려대는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남조선내부에서 단마디로 반박해나섰다.
총체적무게가 12㎏인 무인기가 항속거리 300㎞에 필요한 연료를 5㎏이나 장착하면 뜨지조차 못한다는것이다.
그야말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이 아닐수 없다.

조소만 자아낸 《비행고도측정》놀음

남조선국방부는 3월 31일 공군지휘기 《E-8》의 전파탐지기가 북에서 백령도로 날아오던 무인기를 포착하였으므로 이 무인기들이 우리측 지역에서 발진했다는것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발견한 즉시 3차례에 걸쳐 300여발의 발칸포탄을 발사했으나 발칸포의 최대사거리가 2㎞밖에 안되기때문에 5~6㎞고도를 유지하며 비행하는 무인기를 격추할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중앙합동조사단》은 제편에서 이런 말을 내뱉았는지에 대해 감감 잊었는지 백령도에서 발견된 무인기가 1.4㎞의 고도에서 시속 100~120㎞로 지그자그형태로 비행하다가 연유부족으로 추락됐다고 발표해버렸다.
그것이 여론의 의혹을 증폭시키게 되자 백령도에 당국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무인기가 출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이외에도 무인기가 《금형틀》로 제작되고 전자회로기판을 나무에 부착한것이 남조선식이 아니며 무인기리륙에 필요한 발사대와 추가장비를 남조선땅에서 발견했다는 목격자나 신고자가 없다는것까지도 《북소행》의 근거로 내든것을 비롯하여 말이 되든 안되든 마구 꾸며댄것이 《중간조사결과》이다.
남조선당국은 아무래도 《북소행》을 안받침하는 근거자료들이 미미한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2010년 3월 《천안》호가 《북 어뢰공격》에 의해 침몰될 때도 전파탐지기에 걸리지 않는 무인기로 《천안》호의 항로를 추적하고 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였을것이며 그해 11월 연평도포격전때 저들의 포진지가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된것도 무인기가 사전정찰을 하였을수 있기때문이라는 황당한 억측까지 내놓는것으로 어떻게 하나 저들의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해보려 하고있다.
사람들은 이 석연치 않은 행동을 두고 《북소행》설을 조작하고 립증시키기가 여간 수월치 않은 모양이라고 수군거리고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사실자료가 공개되면 될수록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이 완전히 날조라는것은 더 명백히 드러나게 될것이다.

3.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에 비낀 범죄적기도

모략과 날조는 동족대결에 환장이 된자들이 추구하는 상투적수법이다.
지난 시기에도 그러하였지만 이번에도 례외가 아니다.
《천안》호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이번 무인기사건은 남조선당국이 추구하고있는 불순한 범죄적기도를 여지없이 폭로해주고있다.
첫째로, 우리를 무인기사건의 주범으로 몰아붙여 악화되고있는 북남관계와 조선반도의 첨예한 전쟁국면조성의 책임을 전가시켜보려는데 있다.
지금 조선반도의 정세는 첨예하다.
남조선당국이 외세를 끌어들여 광란적으로 벌려놓고있는 《키 리졸브》,《독수리》합동전쟁연습,군사분계선 전지역에 추악한 인간쓰레기들을 내몰아 로골적으로 감행하는 반공화국삐라살포행위,어용보수언론매체들의 대대적인 비방중상,군부호전광들을 부추겨 무고한 우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무지막지한 해상깡패행위 등만 보아도 그것을 알수 있다.
이것은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국방위원회의 중대제안과 공개서한을 발표한데 이어 흩어진 가족,친척상봉을 성사시켜준 우리 군대와 인민의 대범하고 아량있는 동포애적조치에 대한 남조선당국의 전면도전으로 된다.
내외여론들은 구태의연한 대결관념에 사로잡혀 북남관계를 파국에로 몰아가고있는 남조선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강하게 비난하고있다.
더우기 우리의 정상적인 로케트발사훈련을 그토록 목에 피대를 세우고 악착스럽게 헐뜯던 남조선당국이 뒤에 돌아앉아 500㎞사거리를 가진 탄도미싸일발사시험을 남몰래 강행한 안팎이 판판 다른 이중적행태에 쓰디쓴 환멸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에 바빠맞은 남조선당국은 저들에게 쏠리는 내외의 비난을 막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구실마련이 필요했다.
사건수사가 종료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박근혜가 돌연 공개석상에 머리를 내밀고 우리의 그 무슨 《추가도발》을 운운하며 《즉각차단,격퇴할수 있는 대비책강구》를 력설해댄것도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켜보려는 술책에서이다.
둘째로, 또 하나의 《천안》호사건을 조작하는것으로 제2의 《5.24대북조치》를 취하여 북남관계를 영원한 대결관계로 만들어놓으려는데 있다.
2010년 5월 리명박역도가 《천안》호사건을 계기로 취한 《5.24대북조치》는 북남화해와 협력을 위한 인원들의 래왕까지도 차단한 극악무도한 동족대결조치이다.
지금 북남관계개선을 가로막는 《5.24대북조치》를 철회하라는 불같은 독촉앞에 급해맞은 현 남조선당국은 《특례적인 사례》,《편의적인 례외》와 같은 희귀한 표현을 써가며 북과 남사이의 인원래왕과 접촉을 마지 못해 묵인해주고있다.
사실상 《5.24대북조치》는 이미 시대의 페물이 되여 제스스로 시궁창에 처박히고있다.
이를 달가와하지 않고있는 극우보수패당에게는 어떻게 하나 북남관계의 단절을 고수하고 우리에 대한 고립압살을 지속시킬 제2의 《5.24대북조치》를 만들어낼 모략극이 절실하였다.
이로부터 발생한 무인기사건을 《북소행》으로,우리의 《도발》과 《위협》의 련속으로 날조해대는 억지공사를 벌려놓고있는것이다.
사병들의 목숨까지 반공화국대결의 제물로 바치면서 특대형모략극을 연출해내는 남조선군부가 국적도 증거도 불투명한 무인기사건을 《북소행》으로 조작해낸것을 보면 앞으로 제3,제4의 《천안》호사건으로 대결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
셋째로, 그 무슨 《안보태세강화》를 구실로 미국상전을 저들의 무력증강에 깊숙이 끌어들여 《전력공백》의 허점을 메우고 우리에 대한 군사적압살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데 있다.
지금 다계단으로 소형화되고 집약화된 고도의 화력타격능력과 첨단전략무기를 보유한 우리의 자위적군사력에 질겁한 남조선당국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영구강점을 실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있다.
여기에서 기본은 전시작전통제권전환시기를 연기하는것으로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는것이다.
그러자면 파격적인 《안보불안》이 필요하였다.
이미 연평도포격전을 도발한후 그 후과를 만회한다는 구실밑에 미국의 도움을 받아 조선서해5개섬일대에 《서북도서방위사령부》라는것까지 만들어낸 남조선당국은 같은 수법을 되풀이하려 하고있다.
남조선군당국은 벌써부터 무인기에 10㎏의 탄저균을 탑재하여 서울상공에 살포할 경우 24만명을 살상할수 있다느니,무인기가 자폭무기로 리용될수 있다느니 하면서 해외에서 전술정찰비행선을 도입하고 저공목표발견용 전파탐지기 등을 구입하여 지상탐지능력을 보강하겠다고 떠들어대고있다.
무인기침투사건이 정전협정과 유엔헌장의 위반이라면서 이 사건을 국제무대로 끌고가기 위한 꿍꿍이에 골몰하고있는가 하면 총련이 련루되였다는 《증거》를 확보할 경우 일본정부와 련계하여 제재를 가하겠다는 비렬한 흉계도 숨기지 않고있다.
이에 대해 많은 언론매체들은 《군 뒤늦게 〈무인기는 북한제〉라고 주장》,《군의 여전한 뒤 북대응이 문제》,《군 얻어맞고야 〈방공작전체제보안〉》,《일이 터진 후에야 북을 치는 군의 고리타분한 〈뒤 북대응〉행태》라고 개탄하고있다.
제반 사실은 제2의 《천안》호사건을 조작하는것으로 북남관계를 영원히 파탄시키려는 남조선당국의 대결광기가 더는 걷잡을수도 수습할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4. 《북소행》설은 영원히 통할수 없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충격적인 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우리와 련결시키며 반공화국대결광기를 부려대는것이 남조선당국의 체질화된 악습이다.
그를 립증하고있는 사실자료들은 부지기수이다.
2011년 4월 2일에 발생한 남조선《농협》(농업협동조합중앙회)금융콤퓨터망이 통채로 마비된 사건을 《북소행》으로 매도한것도 남조선당국이다.
정보원과 검찰 등을 동원하여 《합동조사》를 벌려놓은 남조선당국은 어용언론매체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대남싸이버테로를 자행》하고있다느니, 우리 군대가 《해킹부대를 운영》하고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여론을 내돌리면서 나중에는 똑똑한 증거도 없이 《북소행》이라고 최종결론을 내렸다.
당시 커다란 피해를 당한 《농협》당사자들이 《북소행》이라고 밀몰아붙인 당국의 발표가 과학성이 없는 《서뿌른 결론》이라고 항변해나서고 남조선군 기무사마저 벌어진 사태를 《북군부의 공격》이라고 밀어붙일수 있는 혐의가 없다고 공식발표하였으나 리명박일당은 막무가내였다.
2013년에 있은 그 무슨 《3.20해킹공격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은 3월 20일 오후 2시부터 남조선의 주요방송업체들과 크고작은 금융업체들이 련속적인 싸이버공격을 받아 일제히 마비되고 남조선전역이 《사상초유의 대혼란》에 빠진것을 말한다.
수천수만대의 봉사기들과 콤퓨터들이 파괴되고 관련망들이 《먹통》이 되여 방송사들의 보도업무가 중지되고 금융망들의 모든 봉사가 마비되는 《전산대란》이 벌어진것이다.
이것 역시 《북소행》일수 있다는 결론부터 내리고 남조선당국이 전면수사에 착수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해킹공격이 제3국에서 시작된것으로 판명되고 나중에는 《후이즈》라는 이름을 가진 국제해커팀이 저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통에 세계면전에서 톡톡히 망신만 당하였다.
마지 못해 《3.20해킹공격사건》의 막을 내렸던 박근혜일당은 날과 달이 바뀐 4월 10일 갑자기 싸이버전공격이 《북소행》으로 판명됐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물론 이 엉터리조사결과는 남조선각계로부터 《북에 책임 떠넘기는 만능정부》,《북소행이라는 정부발표 예상했더니 아닐세라…》,《해킹코드에서 발견된 수많은 1번, 참 희한하다.》,《어제 농작물망치게 내린 눈도 북이 만들었을것이다.》는 야유조소만 쏟아져나오게 하였다.
이외에도 《GPS전파교란사건》을 비롯하여 저들내부에서 비정상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북소행》설을 들고나오는것은 남조선당국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하긴 다른 나라의 문서까지 조작하여 애매한 서울시공무원을 간첩으로 매도하는 당국일진대 무슨 짓인들 날조해내지 못하겠는가.
남조선당국이 제 땅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와 련계시키지 않으면 조사결과라는것을 도무지 발표할수 없게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남조선에서 급작스레 걷어들였다는 11대의 무인기들에 대해 과연 어떤 조사결과를 내놓겠는가를 주시하고있다.
아마도 모략가들이 이제는 기력이 진하여 《북소행》설조작을 중도반단할수 있다는 소리도 나오고있지만 두고보아야 한다. 원래 모략과 날조에 이골이 난 자들은 죽을 때까지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기때문이다.
명백한것은 남조선당국이 《북소행》설을 들고나올수록 자기의 뿌리깊은 대결적정체만을 더욱 드러낼뿐이라는것이다.
《천안》호사건과 연평도포격전,《농협》금융콤퓨터망마비사건,《3.20해킹공격사건》,《GPS전파교란사건》에 이어 무인기사건 등을 우리와 련계시키는것은 곧 북남대결을 추구하는것이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공공연한 파괴로 된다.
유치하고 졸렬한 모략극을 계속 날조해대면서 동족대결에 미쳐날뛰는것은 제무덤을 파는 길이다.
민족의 리익을 해친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
그가 누구든 우리를 걸고드는 반공화국대결정책에 매달릴수록 민족사에 모략극날조의 주범으로,천하무도한 악질대결분자로,통일의 훼방군으로 락인될것이며 천추만대를 두고 저주와 규탄을 받게 될것이다.
우리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남조선당국이 아직까지 《천안》호사건의 《북소행》설을 걷어들이지 않았을뿐아니라 제2,제3의 《천안》호사건을 계속 날조해내고있는 조건에서 이 모든것을 해명할 용의가 있다.
《천안》호사건을 포함한 모든 《북소행》관련사건들을 공동조사하자는 우리의 립장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 검열단은 지금까지의 모든 《북소행》설을 구체적으로 조사,해명하고 모략극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치게 될것이다.
민족의 거대한 관심속에 진행될 진상조사에는 남조선의 《국가안보》를 총괄한다는 청와대 김장수안보실장이 남측을 대표하여 나오면 될것이다.
북남관계를 악화시키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의지가 있다면 뒤구석이 아닌 공식석상에 나와 문제해결에 당당히 림하라는것이다.
민족의 평화와 안전이 직결되여있는 중대사를 즉시 명쾌하게 해결하는것이 쌍방당국앞에 지워진 첫째가는 의무이며 겨레를 위한 옳바른 처사로 된다.
남조선당국이 꺼릴것이 없다면 《천안》호사건발생초기부터 요구하여온 우리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외면할 아무런 리유가 없을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남조선당국의 호응을 기다릴것이다.

주체103(2014)년 4월 14일
평 양 (끝)

(출처-조선중앙통신 2014.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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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녀의 비극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송파 세 모녀 49재 봉행, 이정희 대표 등 진보당 인사 참여
 
진보정치
기사입력: 2014/04/15 [22:39]  최종편집: ⓒ 자주민보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을 남겨두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송파 세 모녀의 49재가 15일 오후 광화문 해치광장에서 봉행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노동위원회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이 주최한 49재에 통합진보당에서는 이정희 대표, 안동섭 사무총장, 이정희 최고위원, 이상규 의원, 정태흥 서울시장후보 등이 참석했다.
 
 
 
주최 측에서는 세 모녀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운동이 광화문역 지하보도에서 1년 이상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 해치광장에서 49재를 봉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조계종 노동위원장 종호 스님과 여러 스님들이 염불을 외며 세 모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후 진보당을 비롯한 정당과 노동·시민단체 대표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차례로 술을 따르며 세 모녀의 넋을 달랬다.
추모 발언에서 이정희 대표는 "대기업들의 민원에 대해서는 규제개혁 끝장토론까지 열어가며 원스톱 서비스로 처리해주면서 빈곤 관련 문제에는 실질적인 조치가 없다"고 정권의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숨 쉬고 있다면 살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생존권은 개개 가정이 아니라 이 사회전체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 대표는 "세 모녀가 남긴 공과금만 해도 무려 20만원이 넘는다. 가난한 사람들도 아껴 쓰기만 한다면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국가에서 필수에너지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진보당의 새 공약인 생활필수공공재 기본권 보장정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49재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광화문 KT 사옥에서 일본대사관을 거쳐 조계사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진보당에서는 이상규 의원이 행진에 참여했다. 이정희 대표는 49재 참석 이후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추진하는 420 명예장애인권위원에 가입하고 박경석 대표와 앞으로도 활발한 연대 활동을 벌여 나갈 것을 약속했다. 

 
 
 
 


 
 


 
 
글= 진보정치 허수영 기자
사진= 진보정치 백운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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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스캔들 생산 국정원장, 검찰에 의해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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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 급한 속도광 삼치, 나보다 빠른 건 못참아

 
황선도 2014. 04. 15
조회수 90 추천수 0
 

생생 수산물 이야기 ② 삼치와 방어

전속력 질주 끌낚시 멸치로 알고 물어

살살 녹는 삼치회, 씹지 않고 혀로 즐긴다

 

sa-10.jpg» 삼치(위)와 방어. 사진=국립수산과학원

   
■ 생생 수산물 이야기 ① 털게

 

■ 상위 오르자마자 '젓가락 전쟁'
 

늦은 밤, 인천 삼치 골목 풍경. 타닥타닥 삼치 굽는 냄새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연탄불 위에 익어가는 삼치가 고소한 냄새와 부드러운 맛으로 사람들의 코와 혀를 자극한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은 이 골목에 집집마다 손님이 다 넘친다. 
 
여기는 수십 년째 단골인 분들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삼치집으로 통하는 이곳 식당들은 1960년대 후반에 만들어져 40여년 이상 성업 중이다. 가격도 몇 천원대로 싸다. 

 

이 덕분인지 그 당시 대학이나 직장을 다녔던 이들에게는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로, 사회 초년생에게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삼치구이를 놓고 한잔할 수 있는 곳으로 인기이다.

 

손님들마다 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부분이 있어서 ‘저는 어느 부분으로 주세요.’라고 할 정도이다. ‘봄 春’자를 써서 ‘춘어’라고도 하는 등 푸른 생선의 최고봉, 삼치! 삼치구이를 상위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젓가락 전쟁이 시작된다. 특히 한번 먹어보면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진다는 삼치 한 점에 구수한 막걸리를 곁들이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sa2_동인천 삼치거리_박미향.jpg» 동인천 삼치거리의 모습. 사진=박미향 기자

 
올해 초 어느 경제신문에 한 대형마트에서 참치 매출이 삼치보다 70% 이상 높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2009년 이후 연도별 삼치와 참치 매출을 집계한 결과를 보면, 2013년 참치 매출이 처음으로 삼치 매출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삼치 매출을 100%로 환산했을 때 참치 매출은 2011년까지만 해도 삼치 매출의 절반 수준을 유지했지만, 2013년에는 119%를 기록해 삼치보다 매출이 많아졌단다. 
 

조기, 고등어 등과 함께 대표적인 구이용 생선으로 꼽히는 삼치가 맥을 못추고 있는 것이다. 구운 생선을 밥반찬으로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을 고려하면, 횟감으로만 취급되는 참치가 삼치 매출보다 늘어난 것은 매우 이례적이란다. 

sa3.jpg» 어판장에 위판되는 삼치.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안에서 잡히는 생선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겼고, 주로 원양에서 잡아오는 참치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거기에 우리나라 원양어선이 잡는 참치의 90%는 일본으로 수출하였는데, 지난해 엔저 현상으로 일본 수출량이 20% 가량 줄었다. 
 

반면에 국내 유통 물량이 대폭 늘어 저렴해진 가격 때문에 참치 소비가 늘어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치 같은 회유성 어류도 지역마다 지역 계군이 있어 다른 계군끼리 잘 섞이지 않을 수 있고, 아직까지 우리나라 해역에는 방사성 물질이 오염되었다는 보고가 없음에도 소비자들의 지나친 우려는 이와 같이 수산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
 

지난 2006년 3월7일 해양수산부와 한국원양산업협회가 삼치와 참치의 소비 촉진을 위해 ‘삼치·참치 데이’를 마련했다. 그래서 3월의 물고기는 삼치라고 하면 어떨까.
 
■ 7년생이면 1m 길이에 7㎏ 넘는 대물
 
삼치는 농어목(目) 고등어과(科, Family Scombridae)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우리나라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와 서해 남부 그리고 중국과 일본 아열대 해역의 표층에 주로 서식한다.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삼치는 봄부터 여름까지 산란과 먹이 섭취를 위해 연안 또는 북쪽 고위도로 회유하고,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월동을 위해 남쪽 먼바다로 남하한다.
 
산란기는 12∼18℃의 수온을 보이는 4월에서 6월 사이로 서해와 남해 연안에 몰려와 알을 낳는다. 부화 후 3년이 지나면 산란을 시작하는데 50만∼90만개의 알을 낳는다. 성장 속도는 매우 빨라서 부화 후 6개월이면 30∼40㎝까지 자라고, 만 1년이면 약 57㎝, 7년이 지나면 103㎝까지 자라는데 가끔 더 큰 놈이 발견되기도 한다. 
 
삼치는 크기가 1m에 체중이 7㎏이 넘는 대형어류이며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다. 몸은 고등어에 비해 가늘고 긴 측편형이며 얼핏 보기에 비늘이 없는 듯하나, 실은 매우 작은 비늘로 덮여 있다. 
 
몸 빛깔은 등쪽이 회청색이고 배쪽은 은백색을 띠고 있어 전형적인 표층에 사는 회유성 물고기임을 알 수 있다. 가슴지느러미와 등지느러미 그리고 꼬리지느러미 가장자리는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꼬리자루 위와 아래 정중선에는 고등어과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토막지느러미가 7∼8개씩 있어 5개를 가진 고등어와 구분된다. 
 
옆줄은 한 개로 일직선에 가깝지만 꼬리 쪽으로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 있다. 일반적으로 가오리나 상어와 같이 연골어류에는 부레가 없고, 경골어류에는 부레가 있어 위 아래로 뜨고 가라앉는데 이용하지만 삼치는 경골어류인데도 부레가 없다. 아마 빠른 유영속도를 가지고 있어 자유자재로 상하이동이 가능하므로 부레가 퇴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Robbie Cada.gif» 삼치의 모습. 그림=로비 카다(Robbie Cada), 위키미디어 코먼스 

 

삼치는 어릴 때에는 갑각류나 어류를 먹지만 성어가 되면서 어류만 먹는데, 주로 멸치와 까나리나 어린 고등어 등을 먹는 육식성이다. 삼치가 이들 청어목 어류를 먹이생물로 많이 먹을수록 빨리 성장하고 생존율도 높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지난 40여년 동안 수온이 높을수록 삼치와 고등어 그리고 멸치의 어획량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서로 먹이사슬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지만 적당한 서식수온이 주어지면 먹이가 되는 소형어류도 이를 먹는 대형어류도 서로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치의 학명은 Scomberomorus niphonius로 속명인 Scomberomorus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scomber(고등어)’와 그리스어인 ‘moros(어리석은)’의 합성어로 삼치가 ‘고등어를 닮은 고기’인 것은 맞는데, 왜 어리석은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가짜 미끼라도 덥석 잘 무는 습성 때문이 아닐까? 종명인 niphonius(Nippon, 일본)는 삼치가 일본 표본으로 최초로 이름이 붙여졌는데, 가끔 신종 발견자들이 자기 나라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삼치는 지방에 따라서 마어(서해) 또는 망어(동해), 망에(통영), 고시(전남), 사라(경남) 등의 방언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삼치’란 표준명으로 통하고 있다. 
 
영명으로는 ‘King mackerel’ 또는 ‘Spanish mackerel’로 부른다. 그만큼 고등어보다 큰 고등어 비슷한 따뜻한 바다에 사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일본에선 ‘사와라(サワラ)라 부르는데, 사하라(サハラ, 狹腹)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삼치의 몸이 측편 되어있기 때문에 배가 좁은 모양을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경남지방에서 ‘사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일본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고등어에 비하여 가늘고 긴 체형과 체측에 푸른색의 둥근 반점이 7∼8줄 세로로 줄지어 있어 지어진 이름은 분명하다. 
 
지금은 별미로 인정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푸대접 받았던 삼치였다. 서유구는 <난호어목지>에서 삼치를 마어(麻어), 망어(亡魚)라 부르며, 그 이름을 싫어해 좋아하지 아니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아무개가 삼치 맛에 빠져서 자신을 보내준 한양의 정승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큼직한 삼치 수십 마리를 보냈다. 삼치를 받아든 정승은 큼직하고 미끈한 모양새에 만족했지만 그날 밥상에 오른 삼치 맛을 본 그은 썩은 냄새에 비위가 상해서 며칠 동안 입맛을 잃어버렸다. 
 
그 후 ‘망할 亡’자를 써 망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고사를 지금 와서 해석해보면, 쉬 상할 수 있는 삼치를 교통편도 마땅치 않은 시대에 강원도에서 한양까지 보냈으니 부패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좋은 생선도 현장에서 제철에 맛보는 것만 못하다.
 
우리가 보통 ‘등푸른생선’으로 부르는 삼치, 고등어, 다랑어, 방어는 체형이 방추형으로 빠른 속도로 멀리까지 헤엄치는 고도 회유종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류학상으로는 고등어, 삼치, 다랑어가 고등어과에 속하는 반면, 방어는 전갱이과에 속한다. 고등어과에는 체고가 낮은 삼치 외에 체고가 높은 다랑어와 중간인 고등어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 삼치속(屬) 어류에는 삼치, 평삼치, 동갈삼치, 재방어 등 4종이 보고되어 있다. 평삼치는 체고가 상당히 높고 혀 위에 이빨이 있는 점으로 삼치와 구별된다. 
 
제주지방에서 ‘저립’ 또는 ‘제립’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재방어는 2m까지 성장하는 삼치류 중 가장 몸집이 큰 초대형급 어종이다. 재방어 가슴지느러미 윤곽은 둥글고 꼬리지느러미 뒷 윤곽이 반달 모양을 이루며, 몸에 뚜렷한 반문이 없고 측선이 몸 중앙에서 아래로 급히 휘어지는 특징과 혀 위에 이빨이 있는 점으로 삼치와 구별할 수 있다. 
 
삼치속은 아니지만 외형이 비슷한 꼬치삼치는 주둥이가 매우 뾰족한 편이고, 줄삼치는 체형이 삼치와 달리 가다랑어에 가까워 체고가 높고 몸에 막대모양 무늬가 세로로 줄지어 있어 삼치와 구별된다.
 
■ 고등어와 참치 중간쯤 방어

640px-Hiroshige_A_Shoal_of_Fishes_Fugu_Yellowtail.jpg» 일본의 19세기 미술가 히로시게가 그린 방어와 복어 그림.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방어는 고등어나 참치의 중간을 닮은 물고기로 제주도에서 겨울철에 선상 줄낚시로 많이 잡는 비슷한 모양의 부시리, 잿방어와 함께 같은 과에 속한다. 
 
방어(Seriola quinqueradiata, Japanese amberjack, ブリ)의 학명을 보면 방어를 알 수 있다. 라틴어 Seriola는 ‘토기 항아리’란 뜻으로 체고가 높은 방추형으로 항아리를 닮아 붙여졌다. 
 
또 다른 영명으로 ‘꼬리가 노랗다’고 하여 ‘Yellow tail’이라고도 부르는데, 모양새 뿐만 아니라 색깔을 보고 물고기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어의 체형은 참치와 비슷하게 대양을 활보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방추형이지만 약간 옆으로 납작하다. 
 
opencage.jpg» 어시장에 전시된 방어. 사진=오픈케이지, 크리에이티브 코먼스

 

제1등지느러미는 아주 짧고, 제2등지느러미는 매우 길다. 비늘은 작고 둥글다. 몸빛은 등쪽이 철색을 띤 청색이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무게에 따라 소방어(2㎏ 미만), 중방어(2∼4㎏) 그리고 대방어(4㎏ 이상)로 구분된다. 방어는 수명이 6년 정도이며 큰 것은 1m 정도에 13㎏까지 자라는 대형어중 하나이다. 
 
한국, 일본에서 하와이에 이르는 태평양에 분포하는 온대성 어류이다. 일본 큐슈∼동중국해 북부∼우리나라 남해에서 2∼7월에 산란하며, 1년이면 30㎝까지 크고 4년이면 80㎝ 정도까지 자라 산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다. 
 
좋아하는 먹이는 전갱이, 정어리, 멸치, 고등어 등으로 어식성 어류이다. 방어는 겨울을 제주 근해에서 월동하다가 봄철이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여름까지 섭이활동을 하며, 가을철 수온이 떨어지면 다시 따뜻한 남쪽으로 남하한다.

 

sa4.jpg» 수조 속의 방어. 
 
방어는 생김새가 비슷한 친구인 부시리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둘은 주둥이 위턱의 생김새와 가슴지느러미, 배지느러미 길이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방어와 부시리는 위턱 뒤쪽 모서리가 각을 이루면 방어, 둥글면 부시리로 일반인들은 구별하기 쉽지 않다. 
 
부시리는 가슴지느러미가 배지느러미보다 작은데 반하여 방어는 두 지느러미 크기가 비슷하여 구분할 수 있다. 부시리(Seriola lalandi, Yellowtail amberjack, ヒラマサ)는 맛과 형태가 방어와 유사하나 다른 종이며, ‘히라스(ヒラス)’는 부시리의 일본명이다. 
 
부시리의 산란기는 4∼6월경이고 알은 부성란이며, 최대 12살로 2m 정도까지 사는 초대형어류이다. 18∼24°C 범위의 따뜻한 연안에서 혼자 또는 작은 무리 짓기를 좋아하며 때로는 바위 주변에서 발견된다. 
 
먹이는 소형어류, 오징어류, 갑각류 등이다. 몸은 방추형이며 위턱의 뒤끝이 둥글고, 가슴지느러미는 배지느러미보다 짧다. 몸의 등쪽은 암청색을 띠며 배쪽은 희다. 측선을 따라 황색 세로띠가 꼬리자루까지 이어진다. 방어와 구분할 수 있겠는가.
 
sa5.jpg» 방어와 부시리 구별법. 사진=일식조리원, 네이버블로그 

 

눈의 위치가 위턱과 일직선상에 있는 방어, 부시리와 달리 아까방어라 부르는 잿방어(Seriola dumerili, Greater amberjack, カンパチ)는 눈이 위턱보다 등 쪽으로 위에 위치하고 몸통 옆에 눈을 가로지르는 노란색 넓은 띠 줄이 있는 것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최대 2m까지 자라는 역시 초대형어류에 속한다. 방어보다 따뜻한 물을 좋아하는 남방계 어류로서 전 세계의 온대, 열대 해역 표층에 서식한다. 
 
우리나라 전 연안, 일본 연안, 황해, 동중국해, 대만, 인도네시아, 남태평양 등에 분포한다. 산란기는 5∼8월로 알은 분리부성란이며 부화된 새끼는 처음에는 표층에서 부유생활을 하다가 성장하면서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해조류 밑에서 자라는데, 몸길이 10여 ㎝로 자라면 이곳에서 이탈하여 연안의 중층과 하층의 넓은 바다에서 산다. 육식성 어류로서 물속을 활발히 헤엄치면서 어류, 오징어류, 갑각류 등을 잡아먹는다.
 
■ 겨울 방어의 아성을 잇는 삼치 만나러 출발
 
연중 따뜻한 수온이 유지되어 우리 바다에서 가장 다양한 수산생물자원을 품고 있는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도. 그중에서도 제주 서남쪽에 위치한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은 마라도와 가파도 해역에서 올라오는 방어, 자리돔 등의 수산물이 풍성하다.
 
’제일’ 만능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적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최남단’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겨울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방어의 대표적인 생산지인 모슬포는 매년 11월이면 ’최남단 방어축제’가 열려 그 유명세를 더한다. “방어 맛을 모르면 모슬포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울 생선하면 방어!, 방어하면 모슬포가 딱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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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6-1.jpg» 모슬포항 방어축제. 사진=김준상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제주지사 수산자원조사원
 
제주지역 겨울바다의 진객인 방어와 삼치가 돌아왔다. 방어와 삼치는 겉모습이 다소 다르지만 겨울철 제주 근처 바다에서 어장을 형성하는 공통점이 있다. 
 
회로 썰었을 때 방어는 두툼한 식감, 삼치는 연한 맛이 일품으로 겨울철 대중적인 횟감이다. 마라도 주변 해역에 방어 어장이 형성되면서 모슬포항에서는 40∼50여척의 외줄낚시 어선이 하루평균 1000∼1500여 마리를 어획한다. 방어 어획량은 매년 변동이 심한 편으로 풍어일 때는 연 1000t을 넘었다.
 
위판 가격은 4㎏ 이상 대방어가 마리당 5만원 선이고 4㎏ 이하 중방어는 2만5000원 선으로 크기에 비하여 저렴한 편이다.

sa7.jpg» 마라도 해역에서 갓 잡은 방어를 산채로 배송하기 위해 활어차에 싣고 있다. 현지에선 이를 ‘당일바리’라 부른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가는 바로 이맘때가 되면 방어보다 삼치가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겨울 끝물이 방어와 삼치의 임무교대가 이뤄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바다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은 방어 철이 끝나고 삼치가 올라오는 걸 보면 봄이 왔다며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보고 계절을 말한다. 
 
고등어나 꽁치와 같이 등푸른생선의 대부분이 동해산인 것과 달리 삼치는 주로 청산도, 추자도, 거문도, 모슬포 등의 서남해안에서 조업을 한다. 특히 마라도 해역에서 잡힌 삼치는 물살이 센 곳을 헤엄치다 보니 근육질이 탄탄해져서 식감이 좋다고 선호한다. 
 
이 시기 제주 마라도에서 잡히는 이유는 계절에 따른 이동경로 때문이다. 4∼6월에는 남서해 연안에서 산란하고, 9∼11월에는 먹이가 풍부한 남쪽 먼바다로 이동하여 월동하다가 겨울이 지나면서 다시 북상하면서 돌아온다. 11∼3월에는 고소한 지방질이 평소보다 40%가 많아지면서 어획도 이시기에 이루어진다.
 
이른 새벽, 출항한 삼치잡이 어선이 어장에 도착했다.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급한 성질을 지닌 삼치. 자기보다 빠른 무엇이 있으면 기어코 따라잡고 보는 성질이 있어 낚싯줄을 바다에 늘어뜨리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잡는다. 예전에는 그물을 펼쳐 삼치를 잡기도 했지만 요즘엔 산 채로 잡기 위해 이런 끌낚시 어법을 많이 사용한다.
 

sa8.jpg» 삼치를 잡는 끌낚시와 가짜 미끼. 사진=고혜웅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제주지사 수산자원조사원 

삼치 끌낚시 어업은 낚시에 반짝이는 은박지로 만든 가짜 미끼를 달고 배의 속도를 높여 끌면 물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멸치와 흡사해 삼치들이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멸치라면 죽고 못 사는 삼치의 습성을 꿰뚫어 본 것이다. 
 
삼치잡이는 잠시도 한 눈을 팔수가 없다. 입질이 언제 시작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낚시를 드리운 그 순간부터는 줄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얼마 후 툭툭 치는 듯한 입질이 오고 드디어 삼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짜 미끼로 삼치를 유혹한 뒤 낚싯줄이 팽팽해지는 순간 빠르게 끌어올리는데, 무엇보다 손의 감각이 중요하다. 엄청난 질주 본능을 가진 삼치는 웬만해선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다. 
 
그러다보니 손맛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떼로 몰려다니는 삼치의 특성 덕에 한번 물었다 하면 서너 마리는 기본이다. 하지만 쉽게 보다가는 큰코다친다. 
 
삼치는 몸도 육중한 데다 이빨이 날카로워 자칫하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만큼 항상 조심해야 한다. 거친 바다가 허락해준 마라도의 보물, 삼치. 삼치와 바다에 삶과 인생을 모두 바친 사나이들의 힘든 여정이 드라마틱하다. 
 
삼치 또한 방어와 참치처럼 시속 수십㎞의 빠른 속도로 바다를 질주하여 ‘바다의 풍운아’로 불리는 그룹에 속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여 괴력을 보여주었던 새치가 흔치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앞으로 삼치의 트롤링 낚시에 관심을 가져봐도 좋은 듯싶다. 
 

sa9.jpg» 삼치잡이 배가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 
 
성질이 급해 금방 죽어버리는 삼치의 신선도를 잃지 않으려면 어민들은 잡자마자 급히 항구에 들어와 삼치를 팔고 또 바다로 나가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슬포 수협 위판장의 경매방식이 좀 특이하다. 
 
새벽에 나갔던 삼치잡이 배들이 들어오기도 전인 오전 11시께 경매인들이 모여 서면입찰을 한다. 가장 높은 가격을 적어낸 낙찰자가 그날 나온 삼치를 전량 수매한다. 어획량이 많으면 그 다음 가격을 제시한 경매인이 나머지를 살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삼치의 특성상 신선도를 잃지 않으려면 바닥에 늘어놓고 경매할 여유가 없다. 들어오는대로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을 채우고 빙장포장하여 바로 수송한다. 똑같은 크기의 삼치라고 해도 이렇게 재래식 끌낚시로 잡은 삼치가 맛이 더 좋다고 한다.
 
sa10.jpg» 바로 잡아온 ‘당일바리’ 삼치.
 
제주와 전남 사이에 위치한 추자도에서는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삼치 어업이 이루어진다. 추자수협 소속 10t 미만 연안어선들이 길이 60∼70㎝, 무게 5∼7㎏으로 튼실한 삼치를 잡는다. 
 
삼치는 제주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어종으로 회를 비롯해 소금구이, 조림, 찜 등으로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삼치는 대개 저렴한 생선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추자도 삼치는 다르다. 
 
추자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삼치는 일본 수출이 80% 가량을 차지하고 나머지가 내수용으로 나간다. 그러나 최근 가격이 크게 떨어져 어업인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추자 선적 채낚기어선(끌낚시) 70여 척은 최근 척당 100㎏의 삼치를 잡고 있다. 2012년도 이전까지 삼치가격은 ㎏당 1만1000원으로 제값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7500원까지 떨어져 어민들이 울상이다. 최근 우리나라 연안에서 삼치 어획량은 연간 3∼4만t 정도이다. 그중 제주에서 500∼700t, 모슬포에서 100∼200t 정도를 어획한다.
 
제주 북쪽 남해안에 위치하는 완도군 청산도. 이곳에선 제주 삼치보다 한발 먼저 9월부터 잡이가 시작된다. 6∼70년대엔 삼치 배가 청산도 앞바다를 가득 메우고 선착장에는 비릿한 삼치 내음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 시절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지금도 청산도 바다는 풍성한 먹을거리를 내어주는 황금어장이다. 이곳에선 기다란 대나무에 연결한 낚싯줄을 바다에 늘어뜨리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잡는다. 
 
배 양옆으로 대나무를 묶어 매어둔 다음 줄 한 부분을 굵은 고무줄로 묶어두는데 삼치가 물면 그 무게의 변화 때문에 고무줄이 늘어난다. 이때 배의 속력을 줄이면서 빠른 동작으로 줄을 당기면 낚시에 매달린 커다란 삼치가 몸통을 퍼덕이며 매달려온다. 
 
고기가 언제 물지 모르니까 줄을 잡고 있으면 기척이 온다. 삼치 어장을 찾을 때까지 바다를 돌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하는 삼치 잡이. 
 
드디어 삼치 입질이 시작됐다. 줄줄이 올라온다. 특히 청산도에서는 크기가 킬로 반은 돼야 삼치로 쳐주는데, 이 크기가 일본으로 수출할 수 있는 하한선이란다. 
 
그 이하는 ‘고시’로 불리는데 삼치로 보지 않을 정도이다. 얼마나 규모가 크고 성대했던지 교과서에 실렸을 만큼 유명세를 탔던 청산도 삼치 파시. 이젠 바다도 삼치도 예전 같진 않지만 아직도 기억 속엔 만선의 희망으로 가득하다.
 
■ 10㎏ 큰 방어를 10여명이 함께 먹어야 제 맛
 
제주에서 여름을 나기 위해서 자리돔을 먹어야 한다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방어 신세를 져야 한다. 요즘엔 제주사람만 아니라 뭍사람들도 방어를 찾아 제주로 식도락 여행을 온다.
 
방어는 2∼6월이 산란기로 11월에서 2월까지 맛이 좋은 때이다. 산란을 앞둔 겨울 방어는 ‘한(寒)방어’라고 따로 부를 만큼 맛이 유별나다. 
 
이때쯤이면 10㎏이 넘는 ‘대방어’가 잡히는 경우도 흔하다. 덩치가 큰 만큼 횟감으로 뜰 살점이 많고, 씹히는 맛이 좋아 참치 뱃살보다 낫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여름에는 기생충이 있어 개도 안 먹는다고 할 정도이니 회를 먹을 때도 제 철이 있다. 방어는 11∼2월이면 따뜻한 남쪽에서 월동하기 위해 비교적 먼 바다를 회유하는 까닭에 몸에 지방이 많아져 살이 부드럽고, 겨울이 지나는 3월부터는 몸에 기생충이 있어 주로 겨울철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방어는 어린 치어를 채집해서 양식을 하기도 한다.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몇 달만 잘 키우면 1㎏ 정도 자란다. 하지만 온대성 어류이기 때문에 겨울 전에 모두 출하해야 한다. 방어는 남해 일대에서는 정치망으로, 부산 일대에서는 선망으로 잡는다. 
 
제주도에서는 주로 연안채낚기로 잡는다. 온대성 어류인 방어는 대표적인 붉은살 생선으로 일본에서는 양식량이 제일 많은 어종이다.반면에 부시리는 4∼6월에 산란하며, 연안 가까이 살면서 운동성이 강해 살이 단단하여 여름 이전까지는 회로 먹을 수 있다. 잿방어는 5∼8월에 산란하며, 1.9m까지 자라고 그 식감이 좋다.
 
방어는 클수록 맛이 좋다. 대방어는 하얀 뱃살, 붉은 속살, 그리고 지느러미 부근의 담기골살, 꼬리살 등 부위별로 맛볼 수 있다. 중방어나 소방어는 이렇게 부위별로 맛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방어를 제대로 맛보려면 10여명이 어울려 먹어야 한다. 이래서 일정 크기를 넘어서면 맛과 향이 떨어지는 다른 어종과는 달리 방어는 크면 클수록 맛이 좋다는 이유이다.

sa11.jpg» 방어 회

 
방어를 잡아 회를 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갇혔던 수족관에서 나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운명을 읽었을까. 바닥에 내려놓자 펄쩍펄쩍 뛰었다. 
 
안주인은 익숙한 솜씨로 나무망치로 방어 머리를 가격했다. 방어가 부르르 떨더니 조용해졌다. 그리고 바로 아가미 안쪽에 칼을 꽂아 피를 빼냈다. 회맛을 결정하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다음은 칼질이다. 활어회는 얇고 넓게 썰어내야 한다. 피를 빼낸 후 즉시 칼질을 해야 가능하다. 숙성이 된 후에는 두껍게 썬다. 식감을 고려해 두께를 조절하는 것이다. 
 
방어는 일본에서 가장 선호되는 횟감 중 하나로 주로 회나 소금구이로 먹는다. 방어의 눈 주위에 있는 젤라틴질을 꼭 먹어보길 권하며, 지방이 많은 생선이므로 기름의 양을 적게하여 구워내야 맛있다. 
 
sa11-1.jpg» 방어 머리구이.

 

그러나 지방이 많은 생선이므로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 방어는 가다랑어 다음으로 비타민 디가 풍부하다. 비타민 디는 체내에서 칼슘과 인의 흡수를 도와주기 때문에 고혈압, 동맥경화, 심근경색, 뇌졸중 등 순환기계 질환은 물론 골다공증과 노화 예방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어에는 DHA, EPA 같은 불포화 지방산이 많고 불포화지방산의 산화를 방지하는 비타민 E와 니아신도 들어있어 피부활성화에 효과가 있다. 
 
‘살짝 기름지고, 진한 맛’을 제주 말로 ‘배지근하다’라고 한다.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배지근한 맛 때문에 한번 방어회를 먹으면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어쨋튼 냉동 참치밖에 먹을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겨울철 제주에서 날 회로 맛볼 수 있는 ‘히라스’는 참치 대용 이상이다.
 
■ 비린내 없고 건강에 좋은 생선, 삼치 
 
바다의 펄떡이는 생명력을 품고 우리를 찾아온 삼치. 맛도 영양도 크기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특한 생선이다. 지금 제주도는 푸르른 영양 덩어리 삼치로 가득하다. 그저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삼치는 커다란 몸 가득 단백질을 품고 있어 소고기보다 참치 맛이 더 낫다고 할 정도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만 해도 이 삼치가 조선 사람이 먹기엔 아까운 생선이라 해서 잡히는 족족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남해 바다에서 잡힌 삼치는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는데 아마 그 시대 살았으면 삼치 맛도 못 봤을 것이다.
 
사실 다른 생선들과 달리 삼치는 살이 물러서 횟감으로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접했던 생선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삼치가 진짜 맛있는 생선인데 그 매력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고등어보다 세 배 맛있어서 이름에 ‘삼’자가 붙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삼치 한 배만 건지면 평양감사도 조카 같다’는 속담은 삼치 맛이 좋아 높은 가격에 팔렸으며, 한밑천 톡톡히 건질 수 있는 생선이었음을 말해준다.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운 삼치 회는 치아의 도움 없이도 즐길 수 있다. 
 
특히 지방 함량이 높은 은백색을 띤 배쪽 배받이살은 최고의 맛이다. 구이, 조림, 찜, 튀김 등 가열조리를 하면 맛이 고소하고 부드럽다. 삼치는 고등어과 생선중 유일하게 비린내가 없어 아이들도 좋아한다. 살이 단단하고 탄력있는 광택이 있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것이 좋다.
 
삼치는 지방의 함량이 높은 편이지만 EPA와 DHA라는 오메가-3 지방산과 같은 불포화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노인들의 치매 예방, 기억력 증진, 고혈압 예방에 효과적이다. 오메가-3 지방산과 열량은 고등어가 삼치보다 높으나, 비타민 D는 고등어보다 삼치가 2배 가량 높아 뼈가 약한 사람은 삼치를 자주 먹는 게 좋다. 또한 삼치에 많이 있는 비타민 B2와 나이아신은 피로 해소에 좋고 설염, 피부염, 심장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수산 관련한 프로그램을 해오고 있는 지역의 한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가깝고 친숙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바닷물고기에 대한 알짜배기 정보를 전문가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달하는 프로이다. 
 
물고기에 대한 생태와 신비는 물론 문화와 역사 그리고 연구 현장에서 겪은 에피소드까지 바다와 물고기에 대해 풀어낸다는 컨셉이다. 나는 거기서 다양한 제철 수산물들, 그 중에서도 삼치를 첫 방송 대상으로 소개하였다. 
 
sa12.jpg» 지역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삼치를 소개하고 있는 필자.
 
촬영 중에 삼치 요리를 소개하기 위해 들른 제주의 한 삼치전문식당. 살이 연하고 지방이 많아 산지가 아니면 회로 즐기기 어렵다는 삼치 회를 맛보기로 했다. 
 
회를 뜨는 과정을 살펴본다. 먼저 비늘을 조심스레 벗겨내고 회를 썰어보는데, 워낙에 살이 부드럽고 물러서 숙련된 손길이 아니라면 회가 부서지고 만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회 썰 때랑 다르게 결을 거슬러 두껍다 썬다.
 

sa13.jpg» 두툼하게 썰어내는 삼치 회. 

sa13-1.jpg» 썬 뒤의 삼치 회 모습.
 
흔히 삼치를 씹지 않고 혀로만 즐긴다는 말이 있다. 삼치 회를 먹어보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보통 생선회는 쫄깃한 식감 때문에 많이 먹는데, 이건 부드러운 살점이 입안을 가득 감싸는 느낌에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삼치 회는 다른 회와 달리 간장 양념을 찍어 밥에 싸 먹는다. 때에 따라 묶은 김치나 신 파김치를 곁들인다.
 
그런데 이 집의 압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삼치를 숙성시킨다. 추자도에서 현지 주민들이 삼치를 집안 어느 한구석에 걸어 놓고 먹을 때마다 쓱싹 썰어 먹던 그대로 재연한다고 한다. 육질이 더 부드럽다.

sa14.jpg» 숙성 중인 삼치.   
 
또 다른 어느 식당에서는 시쳇말로 삼치로 퓨전 음식을 만든다. 삼치깐풍기, 삼치스테이크, 삼치추어탕 등등…. 전통적인 생선 음식을 싫어하는 신세대에 어울리는 음식을 개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집의 별미는 밀감백김치를 만들어 회와 함께 먹는데 있다. 귤의 상큼함과 삼치의 부드러움이 잘 어울린다. 세상이 변하듯 음식도 진화한다.

sa15.jpg» 진화하는 삼치 음식.  
 
너무 크면 맛이 떨어지는 다른 생선과는 달리 삼치는 크기도 큼직하고 살이 통통하게 올라야 제 맛이 난다. 삼치회가 대중화된 지는 한 10여 년 전. 잡히면 바로 죽어버리는 삼치의 특성상 청산도, 추자도, 거문도 등 해안가에서만 생것으로 먹어오다 냉장시설이 발달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신선하게 먹을 수 있게 됐다. 
 
횟집에서 삼치 회는 선어를 사용한다. 통상 섭씨 1∼3도 정도에서 보관한다. 요즘은 일반인들도 집에서 냉동을 해놓고 참치처럼 썰어 먹기도 한다. 
 
그래서 삼치 회를 참치 회로 착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삼치는 귀한 고기임에도 가격이 싼 점도 미덕이다. 
 
살이 연하고 지방이 많아 다른 생선에 비해 유난히 부패속도가 빠른 삼치는 산지가 아니면 회로 즐기기 어렵다. 그래서 육지서 주문을 해놓고 비행기로 날아와 먹고 간다고 한다. 부드러운 식감에 담백한 맛으로 최근 미식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봄은 제주 바다로부터 온다! 
 
글·사진 황선도/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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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60년, 잔치는 끝났다

[좋은 나라 이슈 페이퍼] <28> 9.15 시대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한국

이혜정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15 07:07:41

 

 

 

 

 

 

 

9.15
 
2008년 9월 15일 국제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전 세계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갔다. 9.15는 미국에 대한 테러(9.11)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11.9)를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미국 국내적으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은 공화당 부시 정부 집권 8년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대테러전쟁의 정치적 파산 선고였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담대한 희망"을 선거 구호로 내세운 민주당 후보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는 대외적으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 종식, 대내적으로는 대침체로 명명된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동시에 금융 규제와 건강보험과 같은 개혁을 동시에 추구했다. 우선순위는 분명하게 국내 정책에 있었다. 2010년 미국의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최우선적 목표로 설정된 것은 미국의 국가재건이었다.
 
대침체는 정파적 분열을 넘어 통합된 미국을 만들겠다는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을 앗아갔다. 막대한 규모의 구제 금융과 경기부양책에도 실업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건강보험 개혁에 대한 반대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에 대한 우려와 맞물리면서,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2010년 말 의회의 초당파적 위원회는 '진실의 순간'이라는 제목의, 증세와 더불어 사회복지는 물론 국방비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재정지출의 삭감이 불가피하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2010년 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증세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하면서 부채 감축을 주장하는 티파티 세력에 의해 '포획'되었다.
 
2011년 8월 미국의 신용등급이 역사상 최초로 강등되었다. 미국의 경제적 능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부채 상한 증액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분열 때문이었다. 타협책은 재정절벽의 배수진이었다. 2011년 예산관리법은 양당 동수의 상하 양원 의원으로 구성된 슈퍼 위원회가 부채 감축안을 마련하도록 하고, 만약 이에 실패할 때는 회계연도(10월-9월) 2012년부터 2021년까지 10년에 걸쳐 최소한 1조2000억 달러의 부채를 감축할 것을, 그 연간 적자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일률적으로 재정지출을 삭감하는 자동예산삭감(sequester)을 명령했다. 2011년 11월 슈퍼 위원회는 합의안 도출에 실패했다. 미국의 (재정 지출의 차원에서) 9.15시대는 2022년까지 끝나지 않게 되었다. 
       
2013년 오바마 정부 2기가 출범했고, 미 합참의장 뎀시가 지적하듯,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지만 지켜야 할 법률인 자동예산삭감이 시작되었다. 2012년 대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분열에 따른 선거구 확정으로 안정적 지역구를 보유한) 공화당의 티파티 세력은 정부 부채와 건강보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티파티 세력이 끝내 건강보험 시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거부하면서 의회의 2014년 예산처리가 실패했고, 2013년 10월 연방정부가 폐쇄되었다. 
 
역사의 귀환
 
9.15 이후 중국의 부상은 가속화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는 심화했다. 중국은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지던 2008년 9월 이후 일본을 제치고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 되었다. 2009년부터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 및 경제 대화가 시작되었고,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추월해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989년 냉전이 무너지던 와중에 역사의 종언을 주장했던 후쿠야마는 9.15 이후 2011년에는 금융 자유화의 위험, 국가 산업 정책과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에 대한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의 부상을 지적하더니, 2012년에는 지구화에 의한 중산층의 쇠퇴와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역사의 미래'로 명명했다.
 
역사가 돌아온 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 혹은 오바마 정부의 개입축소정책과 맞물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혼돈을 초래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의 힘으로 봉인되었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년)이 미제로 남겨놓은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및 영토분쟁의 역사가 되살아났다.
 
중국의 부상을 관리하기 위해 오바마 정부는 2011년부터 아시아 회귀(이후의 용어는 재균형)를 추진했다. 그 전제는 기존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고 그 전력과 외교적 관심을 아시아로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내 정치와 중동의 혼돈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2010년 오바마의 인도네시아와 호주 방문은 건강보험 입법 과정의 진통과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로 두 번이나 연기되었다. 2011년 11월 오바마가 호주 의회에서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직후에는, 미 의회의 슈퍼 위원회가 부채 감축안에 실패하면서, 미 국방성은 국방비 운용의 기조 자체를 바꿔야만 했다. 2012년 1월에 발표된, 2020년까지 미 군사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에 배치한다는 국방전략은 이러한 재정적 한계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동에서 이라크의 약화는 이란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안보불안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이 리비아와 시리아의 내전, 그리고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 이슬람세력의 집권, 다시 군부 쿠데타라는) 정국 불안으로 이어졌다. 오바마 정부는, 국제사회의 리비아나 시리아에 대한 직접적 군사 개입 요청을 거부했지만, 중동에서 외교적 노력과 관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2012년을 전환점으로 동아시아에 새로운 정권들이 탄생했다.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다시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소련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했고, 일본의 아베 총리는 경기침체의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근대화에 성공한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복원하고자 했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는 최근 경제적 부상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중국제국의 역사를 새롭게 중국 민족주의로 통합하는 한편,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국제적 규범의 연성권력에 도전하는, 대안적인 질서의 기획을 중국의 꿈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물론, 중견국을 자부하는 한국과 김정일의 사망으로 급작스럽게 출범한, 핵무장과 경제발전의 병진 노선을 천명한 북한의 김정은 정권까지도 모두, 기존 동아시아 질서의 대안을 요구하는 '수정주의' 국가들이다. 이들의 경쟁은 새로운 세력 균형이나 지역 질서뿐 아니라 과거사와 영토문제에도 걸쳐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아세안 국가들과 동중국해에서는 일본과 해상 영유권 분쟁을 벌이면서, 과거사에서는 한국과 연합해 일본과 대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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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된) 시작: 2013년 10월
 
2013년 오바마 정부는 재균형의 이름으로, 그리고 군사동맹과 자유무역협정(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TPP), 지역 제도의 망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관리하고자 했다. 세 개의 S(sequester, Snowden, shutdown)가 2013년 미국의 재균형 정책, 아니 대외정책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자동예산삭감이 시작된 데 이어 7월 미·중 정상회담 직전에 스노든의 미국 정보국의 첩보활동에 대한 폭로가 터져 나왔다. 환율조작이나 해킹, 사이버 절도는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미국은 이미 9.15 이후 대규모 양적 완화를 시행한데다, 미국 정보기관이 유엔사무총장이나 독일 총리, 중국의 주요 국영기업, 미국 정부나 기업에 맞서는 변호사들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도청과 해킹을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미국이 법치와 사이버 범죄, 인권보호 측면에서 오히려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2013년 8월에는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국제적 조사와 비난이 이어졌다. 아시아 회귀 혹은 재균형에 대한 관심은 다시 희석되었고, 제한적인 군사개입을 추진하다가 러시아의 중재안(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포기)을 받아들인 오바마 정부의 외교적 리더십에 대한 비판도 쏟아졌다.
 
오바마는 9월 유엔 연설을 통해 반전을 시도했다. 이란 핵 협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이란 야심 찬 대 중동 외교를 시작한 것이다. 한편, 10월에는 APEC과 동아시아정상회담(EAS)에 참석하고 중국과 해상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를 방문함으로써, 미국의 개입 의지를 천명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할 계획이었다. 한·미 동맹 60주년 기념 및 연례 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 중이던 헤이글 국방장관은 한·일의 협력을 촉구하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일 외교, 국방장관(2+2) 회담을 통해서 미·일 동맹 강화를 추진할 예정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전작권 환수 시기의 재조정을 협의해나가고 북한에 대한 맞춤형 억지를 강화하기로, 일본과는 1997년의 방위협력지침의 개정과 집단자위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 등 미·일 동맹의 전면적인 전환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협력을 촉구한 헤이글 장관은 냉랭한 표정의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 부정에 대한 강의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10월 1일 연방정부가 폐쇄되면서, 오바마의 필리핀, 말레이시아 방문이 우선 취소되고, 이후 인도네시아(APEC)와 브루나이(EAS) 방문까지 취소되었다. 미국 대통령이 APEC에 불참한 것은 1995년 연방정부 폐쇄로 인한 클린턴 대통령의 불참 이후 처음이었고, 중국 견제의 주요한 제도적 장치로 여겨진 EAS에 오바마가 불참한 것은 특히 큰 타격이었다. 오바마의 부재로 이들 포럼은 시진핑의 독무대가 되었다. (미국이 TPP와 함께 새로운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의 기축으로 삼고 있는) 유럽과의 무역협정 협상을 위한 무역대표부 대표의 유럽 출장도, 인력과 비용이 없어서 무산됐다. 오바마를 대신한 케리 국무장관은 10월 24일 오바마의 대선 당선을 도운 싱크탱크, 미국 진보센터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개입 의지와 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한 우려를 들어야 했던 자신의 곤혹스러움을 통탄하며, 민주주의의 모범이라는 미국의 외교적 자산이 철저히 파괴된 이런 사태가 절대로 재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대적 과제
 
2013년 10월 1일 시작된 연방정부 폐쇄는 공화당 지도부가 정부 부채 상한의 증액마저 봉쇄하려는 티파티 세력을 마침내 통제하고 민주당과 협상에 나서면서, 16일 만에 끝났다. 오바마의 정치적 반격이 시작되었다. 10월 17일의 연설에서 재정 건전성과 경제 성장을 균형적으로 추구하는 예산, 이민 개혁, 농촌지원법의 연내 입법을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 오바마는 건강보험의 시행, 교육과 연구개발, 인프라 투자, 실업급여 지급 기간의 연장 등을 연이어 주창했다. 이 정치적 캠페인의 정점은 12월 4일의, 레이건 시기 이후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사회적 유동성의 정체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 해결을 아메리칸 드림의 회복을 위한 시대적 과제로 규정한 연설이었다. 
 
대외관계에서 타격을 만회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11월 4일, 상원 외교위원장 출신으로 오바마를 대신해서 주요한 외교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해온, 그리고 시진핑과 각별한 친분을 쌓아온, 바이든 부통령이 12월 초에 한·중·일 삼국을 순방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11월 24일에는 국가안보보좌관 라이스가 조지타운 대학에서 한 연설을 통해서 2014년 4월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계획을 밝혔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미래'란 제목의 연설에서 라이스는 현재가 21세기 아시아의 미래가 만들어지는 결정적 순간임을 강조하며, 안보와 경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의 측면에서 재균형 정책의 청사진을 펼치고 있다. 
 
라이스가 밝히는 안보정책의 핵심은 세 가지이다. 첫째, 미국의 군사력 운용으로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아시아 지역에 배치한다. 둘째, 동맹과 관련해서는 미·일 동맹을, 1990년대의 동맹조정을 뛰어넘어 21세기의 현실에 맞게 전폭적으로 개편하고, 한·미 동맹의 억지력을 높이며,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을 강화한다. 셋째, 중국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경쟁은 관리하고 협력은 확대, 강화하는, 신형대국관계의 조작화(operationalize)한다. 경제정책의 핵심은 포괄적이고 (지재권 보호, 환경, 노동 규정, 정부의 조달 체계 등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자유무역협정(TPP)을 통해서 2016년까지는 미국과 아시아의 경제관계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12월 초 바이든의 한·중·일 순방은 11월 말 중국의 일방적인 방공식별구별 선포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바이든은 중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지만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새로운 관계에서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갈등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첫 방문지 일본에서 아베와의 공동성명 발표 자리에서 그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 TPP 협상의 진전, 그리고 한일관계의 개선을 압박하며, 착오와 의도하지 않은 갈등의 대가는 너무나 크다고 경고했다. 중국에서 미국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는, 양국의 새로운 관계를 협력과 경쟁, 그리고 21세기의 새롭게 합의된 국제규범의 틀로 정의하고, 그 주요한 수단으로 (자신과 시진핑의 4시간 반에 걸친 회담처럼) 각국의 입장과 차이를 직접 솔직하게 소통하는, 양국 지도자들의 ‘신뢰외교’를 들었다. 중국의 부상으로, 경제는 물론 안보의 영역에서도 너무도 커져 버린 양국의 공동이익이 지니는 현실의 구속력이 이러한 정책 처방의 근거였다. 중국 부상의 현실이나 미·중관계에서 갈등이 불가피하지 않다는 점에 대한 강조는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동맹간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압박도 반복되었다. 한국에서 바이든의 새로운 메시지라면, 중국으로의 편승이나 경제적 의존(구체적인 사안은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한국 시장 진출)을 경고하는, 미국 편에 서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오바마의 곡예
 
오바마 정부의 새로운, 중국의 부상을 신형대국관계의 미국적 조작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재균형 정책은 대단히 복잡하고 불안정한 프로그램이다. 경쟁과 갈등의 임계점도 불분명하고, 경쟁을 건설적으로 관리할 기제나 ('신뢰외교'의) 리더십 구축도 어려운 작업이고, 경쟁과 협력 변주의 기반이 되는 공동의 이익과 규범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미국이 중국의 어떤 이익을 어디까지 수용할지, 중국을 공동의 규범 제정자로 인정할지 등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재정의 제약, 여타 지역의 갈등, 동아시아의 수정주의, 역사와 영토 갈등 등) 대내외적 장애가 여전한 상태에서, 새로운 재균형 정책의 추진은 미국의 외교적 곡예로 이어지는 한편, 박근혜 정부의 용어를 빌리자면, 경제와 안보의 단층에 이어서 역사문제까지 교착되는 아시아 패러독스의 심화를 초래했다.  
 
바이든 순방 이후 재균형 정책은, 역내에서는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격화된 한·일의 불화, 그리고 역외에서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으로 귀결된 우크라이나 사태의 역풍을 맞았다. 바이든의 한·일 관계 개선 압박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한국과 중국의 격렬한 비판이 이어졌고, 2014년 1월의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은 한·중·일 경제적 성장의 선전장과 동시에 역사 전쟁의 무대가 되어버렸다. 아베는 일본의 부활을 가져온 아베노믹스 비법을 선전하고, 중국을 1차 세계대전의 독일에 비유했다. 그는 창조경제와 '통일대박'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강연을 경청하며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연기'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에게 예의 차가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과거로는 중화제국의 영화와 미래로는 중국의 꿈과 연결해 선전하는 한편,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여느 국가의 정치인이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아베의 변론을 일본 제국주의와 나치의 역사에 대한 일장 훈계로 비판했다.  
 
한·일의 불화는 미국으로서는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미국은 일본에 군사기지와 주둔비용은 물론, 집단자위권을 통해서는 북한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 견제를 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군사적 기여를, TPP를 통해서는 경제적 부흥을, 그리고 공동 가치를 통해서는 역시 아시아는 물론 전 지구적인 일본 기여를 기대하고 압박하고 있다. 중국이 국방비를 10% 이상 늘리고 있고, 북한 핵과 미사일 능력도 향상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적 시각에서 보면,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역시 시급한 과제다. 한국과 일본은, 대내적으로 자동예산삭감이 2022년까지 걸려 있고, 유로존 실업률이 여전히 10%를 웃돌고, 아세안 국가 중 강국인 태국마저 정치적 불안정을 겪고 있음을 고려하면 미국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병력과 자원의 책임 분담을 요구하며, 손을 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특히 바이든 입장에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아베의 행위는 미국에 대한 '배신'이다. 아베 입장에서 더 넓게는 집단자위권을 통해서 일본의 군사 대국화, 보통국가화를 추구하는 일본의 보수 민족주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일본에 집단자위권의 추진을 압박하면서, 그를 추진하는 자신들의 이념적, 역사적 인식을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일본의 집단자위권은 근본적으로 기존 미·일 동맹, 평화헌법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베는 '해석 개헌'을 통해 집단자위권을 추진하고 있고, 이를 지지하는 일본 보수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 전반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이른바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한다. 친미 보수와 극우 반미의 경계, 일본의 '망언'이 반한, 반중에서 반미로 넘어가는 경계는 무너져가고 있다. 아베가 임명한 NHK 경영위원 햐쿠타 나오미는 최근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을 넘어, 도쿄 전범 재판을 미국의 도쿄 공습과 원폭 투하의 대량학살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로 비판했다.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햐쿠타 '망언'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베가 햐쿠타를 감싸고 돈 것이, 어쩌면 오바마 정부가 4월 아시아 순방에서 일본만 방문하려는 원래 계획을 수정해 박근혜 정부 요청대로 한국도 방문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오바마가 직접 3월 6일 아베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 정상의 화해를 압박하게 된 배경이다. 군사력과 외교적 관심의 아시아로의 재균형이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음을, 그에 따라 중국과의 경쟁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그래서 동맹의 협력 필요성은 늘어가는 걸 절실히 깨닫는 '진실의 순간'이 온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삼일절 기념사에서 식민 지배,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오바마의 직접적인 압박 이후 아베 정부는 재검토를 천명했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담은 고노 담화를 인정한다고 물러섰다. 오바마는 시진핑에게 친서를 보내고, 아내를 친선 사절로 중국에 보냈다. 3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 안보 정상회담 참석을 계기로 한미일 정상 회담이 성사되었다.
 
헤이그에서 중국의 부상이 새삼 확인되었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지만 G-8에서 축출되었다. 미국은 냉전 이후 나토의 무리한 동진의 역사적 '후과'를 감수하고, 스노든 폭로의 여파로 메르켈 독일 총리와 최악의 관계가 된 걸을 후회하며, 우크라이나 사태를 배경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 협상이 좌초되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투자 자금을 뿌리며 유럽을 순방한 시진핑이 진정하고 유일한 '승자'였다. 25일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23일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고, 24일에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선전했지만, 중국 입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평화적 자주적 통일과 6자회담 재개의 기본 입장에 대한 재확인, 달리 말하자면 통일의 방법론에 대한 환기 혹은 그 부재에 대한 경고였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앞서 시진핑은, 중국을 여행 중인 미셀 오바마가 자신에게 오바마를 만나면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다. 이어 그는 신형대국관계에 대한 오바마의 친서 내용을 소개했다. 공동이익을 추구하고, 공동의 도전을 실용적으로 처리해나가자는 제안에 감사를 표하면서, 그는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상호존중과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신형대국관계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오바마는 핵 안보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에서, 중국,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러시아를 사례로 들며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데, 이를 우려하느냐는, 또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후보 롬니가 주장했던 것처럼, 러시아가 미국의 최대 지정학적 위협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후자에 대한 그의 대답은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은 냉전 시대의 세계적 강대국 러시아가 이제는 인접국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지역 세력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독설'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질문의 전제에 대한 반론을 펼쳤다. 미국이 원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미국이 원하는 바를 다른 국가가 즉각 행하지 않는다고,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한다고는 볼 수 없고, 그런 기준이라면, 20세기 전체 역사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렇게 반론을 끝맺었다. "진실은 세상이 항상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코리아 패러독스
 
3월 25일 핵 안보 정상회담에 이어서, 백악관이 재균형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회담으로 규정한, 한·미·일 삼각 정상회담이 열렸다. 핵 안보 정상회담을 창설하고 또한 삼각 정상회담을 주최한 미국 측에 대한 '성의' 표시로, 회담 직전에 일본은 사용 후 핵연료 일부를 미국이 보관하도록 넘겨주었고, 핵연료 재처리 문제로 기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에 실패한 한국은 F-35와 무인정찰기 구매 결정을 발표했다. 언론에 공개된 인사말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재균형 정책에서 동맹의 중요성, 북핵 문제에 대한 삼국의 공동 대응 및 연합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예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를 북한에 촉구하며 북핵에 대한 공동대응을, 아베 총리는 두 정상에게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삼국 합동 군사훈련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미 해병은 2월에는 일본과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의 센카쿠 점령을 격퇴하는 모의 상륙(무쇠주먹) 훈련을 했고, 3월 27일부터는 한국과 93년 이래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쌍용) 훈련을 할 예정이었다. 3월 26일 북한은 노동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중국 외교부는 6자회담의 재개 및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3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은 드레스덴에서 북한에 통일 3대 제안을 발표했다. 북한은 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지 않고, 드레스덴 제안은 체제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30일 북한은 새롭고 다종한 핵실험을 경고했고, 31일 남북은 서해에서 포격을 주고받았다. 4월 4일 한국 외무부는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교과서를 검정한 것에 대해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서 항의했다. 일본의, 아베의 '진정성'에 대한 비난이 한국의 조야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지 않고, 터져 나왔다. 4월 7일 지난달 삼국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로 삼국의 6자회담 대표가 모여 북한의 노동 미사일 발사가 유엔의 제재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은, 지난달 한국의 사거리 500Km 미사일 발사를 비난하며, 반발했다. 
 
한국의 중국의 무역규모는 일본, 미국과의 그것보다 크다. 그러면서, 한미일 삼각 동맹의 연합성 강화를 논의하는 한국은, 아시아 패러독스의 표본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세우며 북한의 진정성을, 동북아평화구상을 내세우며 역사전쟁에서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의 진정성을 요구하지만, '통일 대박'을 외치면서 기존의 남북 합의를 존중하지 않는 박근혜 정부는, 아시아 패러독스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달력에는 이 패러독스를 재생산할 남북의 군사적 충돌 기념일들, 한·미, 미·일 군사훈련과 일본의 교과서 검정과 야스쿠니 신사의 일정, 일제의 기념일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작년에 합의한 쌍용 훈련을 밀어붙인 것이, 특히 2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한·미 군사훈련의 수위를 조절했던 것과 비교하면, 드레스덴 제안을 좌초시킨 건 아닐까? 싸늘한 눈길과 진정성으로 이 패러독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일본이 진정 과거사를 사과하면, 같이 북한으로, 센카쿠로 갈 것인가? 이러한 훈련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이지만, 미국의 '신뢰외교'는 적어도 중국과의 군사적 의사소통의 채널을 개발하고 있다. 교전 수칙은 강화하면서, 진정성의 이름으로 북한과의 모든 채널을 끊어놓으면, 우발적 사고는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결정적 국면: 1954년, 2021년, 그리고 2016년
 
한·미 동맹의 기점은 조약의 서명을 기준으로 1953년으로 인식되지만, 실제 발효를 기준으로 보면 1954년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북진을 주장하고 일본과의 경제적 통합을 요구하는 미국과 대립했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은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지만, 원조의 전면적 중단을 위협하고, 실제 석유의 공급을 끊었다. 이승만 정부가 1954년 11월 '백기투항'해 한·미 합의의사록에 서명하면서, 조약 발효의 조건이었던 양국 의회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비준서가 교환되고, 한미동맹은 시작되었다. 1954년 봄 미국은 한국과의 비준서 교환을 거부하고 있었다.
 
2014년 봄, 한·미 동맹 60주년의 잔치는 끝났다. 돌이켜 보면, 작년 10월은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 정책, 동맹정책의 기점이었다. 물론 그 출발은 연방정부 폐쇄로 유예되었다. 그래서 이달 말 오바마가 온다. 일본을 거쳐서다. 1997년 이래 최대의 미·일 동맹 전환이 추진되고 있다. 그해 한국은 'IMF 위기'를 맞았다. 당시 일본은 한국의 단기외채 '돌려막기'를 도와주려 했지만, 미국이 말려 그럴 수 없었다. 1997년의 조정은 냉전의 종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 기간을 최대한 길게, 1989년부터로 잡으면 8년이 걸렸다. 지금의 미·일 동맹 조정은 2008년 9.15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다. 그로부터 8년을 잡으면, 오바마 2기의 임기가 끝나가는 2016년이다. 오바마 정부는 2016년까지는 TPP를 통해서 아시아의 경제 지도를 통째로 바꿔놓겠다고 벼르고 있다. 아베 정권도 그때까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바마가 떠나면, 곧 시진핑이 올 것이다. 그리고 올해 APEC은 중국이 개최한다. 미국은 2011년 APEC을 하와이에서 개최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세기와 아시아 회귀를 선언했었다. 중국은 이미 미국에 대해서는 신형대국관계의 건설을 요구했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주변국 외교의 원칙도 천명했다. 올해 APEC은 중국이 신형대국관계와 주변국 외교를 바탕으로 미국의 재균형에 대응하는 더 정교한, 그리고 더 야심적인 아태 지역 정책을 내놓는 자리가 될 것이다. 중국은 또한, 미래 중국의 꿈을,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전면적 소강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2021년은 미국의 자동예산삭감이 끝날 무렵이다. 그때쯤 중국은 비상할 수 있을까? 미국은 현재의 상대적 쇠퇴를 극복하고 부활할 것인가? 중국과 미국의 꿈이 서로 부딪히거나 혹은 결탁할 때, 일본의 부활과 보통국가화는, 한국의 신뢰외교와 평화구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한국은 어떤 삶을 원하는가? 숙제는 던져졌다. 일례로, 미국이 추진하는 TPP는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다. 경제의 거버넌스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9.15 시대를 헤쳐갈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동아시아의  포스트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한국의 위상과 좌표에 대한 청사진과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시아 패러독스의 심화로는, 신자유주의의 파탄을 가져온 조건 없는 탈규제로는 이들 도전에 맞설 수 없다. 국민은 청와대 비서관이 아니다. 청와대 비서관 회의의 모두 발언으로는, 청와대 민원을 밤낮없이 읽는다고 한다. 그런다고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없다. 박근혜 정부는 2018년까지 집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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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정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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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와 설전 김진태, 오히려 북한 주장과 유사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이 SNS상에서 거친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김진태 의원은 SNS에 "미치도록 친북이 하고 싶다. 최고 존엄이 다스리는 주체의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할 리 없다. 미치도록 대한민국이 싫다. 대한민국 정부가 하는 것은 다 조작이다= 정청래 생각"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김진태 의원이 "너의 조국으로 가라= 진태 생각"을 올리자, 정청래 의원도 SNS에 "<정청래 생각> 김진태 의원, 미치도록 감방에 가고 싶나? 너의 안식처 감방에 보내주마"라며 반박했습니다. 

정청래 의원과 SNS상에서 설전을 벌인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막말과 종북 발언 타령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의 말이 합리적이면서 상식적인지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통해 우리 시대 정치인의 정치,역사,가치관이 어떻게 삐뚤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무인기에 대한 반론조차 허용되지 않는 나라, 그럼 CNN도 친북?' 

김진태 의원과 정청래 의원 간의 설전이 벌어진 이유는 정청래 의원이 이번에 발견된 무인기의 출처가 북한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반론이나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이자, 합리적 지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친북'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더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4월 9일 CNN은 <북한 추정 무인비행기,한국에 위협이 되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습니다. CNN은 기사에서 이번 무인기가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원격 조정 무인 비행기와 비슷한 비행기일 뿐"이며 "한국은 이 때문에 영공을 지키고자 법석을 떨었다"고 보도했습니다. 

CNN 제임스 하디 편집장은 무인기에 대해 "장난감 가게에서 살 수 있는 원격조정 비행기와 매우 유사하게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은 그저 군대판의 장난감 원격조정 비행기일 뿐"이며 확실한 증거 없이 북한제라고 단정하는 이유가 "저고도용 레이더 등 대규모 군사물자 수입하려는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진태 의원의 주장과 논리라면 CNN은 '친북'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이것을 친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근거와 논리에 따른 주장을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막을 필요도 막아서는 안 되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말할 권리와 자유를 박탈하는 나라가 오히려 북한이기 때문입니다. 


' 공안검사 출신의 어처구니없는 논리' 

김진태 의원은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이나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유독 국정원의 주장과 그들의 편을 들어준 인물입니다. 

특히 김진태 의원은 국정원 사건의 주임검사가 '운동권 출신'이라며 검찰의 국정원 수사와 국정조사를 계속 파행으로 이끌었습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운동권 이력을 문제 삼았던 진모 검사는 김진태 의원의 후배검사이기도 합니다. 춘천지검 원주지청 부장검사 출신이었던 김진태 의원과 함께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박용진 전 민주당 대변인은 검찰 쪽 표현으로 "자기 자식 같은 새끼검사"를 아버지가 무참히 짓밟은 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김진태 검사는 후배 검사와 일했던 기억이 없다면서 "검륜"을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진짜 후배 검사가 운동권 이력으로 제대로 검사직을 하지 못했다면 선배이자 부장검사였던 김진태 의원의 책임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정원 사건 검사의 공소장은 문제 삼으면서, 이상하게 간첩조작 사건 검사의 증거 조작에 대해서는 '중국 음모론'만 자꾸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김진태 의원의 억지 논리는 조봉암 사건 기록을 봤던 검사로 '조봉암 사건은 이승만의 사법살인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진태 의원은 조봉암 사건이 사법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사건 기록을 보면 그런 정황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미국 국무부 문서>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미 국무부 문서는 정확히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을 이승만이 선거에서 그들을 방해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하며, 조봉암의 평화통일 지지를 반역으로 모는 행위가 오히려 유엔총회에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부장검사 출신의 국회의원이 사건기록에 나온 다양한 증거와 문서를 제대로 보지 않고 단편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멀쩡한 사람을 살인한 사건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마치 북한에서 '너는 무조건 반동이야'라고 낙인 찍어 놓고 수용소로 보내거나 총살해버리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변호인 접견 금지, 북한 주장과 똑같아' 

김진태 의원은 2013년 12월 반국가활동을 한 자에 대한 변호인 접견및 교통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김진태 의원은 1992년부터 시작한 검사생활의 절반가량을 공안수사를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김 의원은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혐의 사례를 들며, 변호인 접견과 교통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진태 의원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에서 독일 형사소송법에서도 "모든 변호인은 참여가 배제된다"고 말하며, 이런 변호인 접견은 선진국에서도 다 하는 일인 양 적어놨습니다. 
 

 

 


김진태 의원의 주장과 다르게 법무부에서 발간한 '독일 형사소송법'에서는 '국가안전의 위해를 목적으로 남용할 소지가 있는 변호인을 절차에서 배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변호인 접견을 막는 것이 아니라  '해당 변호인'만 배제하는 것입니다. 일본과 영국 사례도 들었지만, 일본은 기소 이전까지, 영국은 36시간만 변호인 조력권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김진태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헌법에 명시되고 보장된 기본권을 짓밟는 법안이며, 외국 사례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외국에서 이런 사례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은 2009년 3월 30일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 씨를 체포해 무려 136일 동안 억류했습니다. 

북한은 유성진 씨가 북한의 '체제를 비난하고 탈북 책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요청한 접견권과 변호사 조력권을 거부했습니다. 
 

 

 


김진태 의원이 발의한 법안의 내용과 가장 비슷한 논리와 주장이 북한과 유사합니다. 김진태 의원의 법안은 북한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친북 행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종북 법안'을 발의한 사람이 태연하게 '종북저격수'를 자처하고 강의료를 받으며 '종북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나라입니다. 

국회의원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막말을 하던, SNS를 하던 그것조차 자유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친북,종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공안검사 출신이라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과 유사한 주장을 펼친 김진태 의원을 왜 검찰이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하지 않는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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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국방위, “무인기 소동은 제2의 천안함 모략극”

 

남측에 공동조사 제의,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 나와라” (전문)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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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5  0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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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가 14일 무인기 추락 사건이 북측 소행이라는 우리 정부의 중간조사발표를 반박하고 이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를 남측에 제의했다.

<조선중앙통신> 14일발에 따르면, 북한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이날 ‘무인기 사건의 북소행설은 철두철미 천안호 사건의 복사판’이라는 제목의 진상공개장을 발표하고 “우리는 발생한지 4년이 된 ‘천안’호 사건이 흐지부지되고 있는 마당에서 남조선당국이 제2의 모략극을 날조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방위는 ‘터무니없는 북소행설’의 하나로 우리 정부가 무인기의 기관축전지 앞면에 쓰인 ‘기용날자 2013.6.25’를 제시한 것과 관련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품에 ‘기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며 “우리나라 조선말대사전에는 애당초 ‘기용’이라는 단어의 해석조차 없다”고 일축했다.

아울러, 국방위는 “이것은 마치 ‘천안’호 사건의 ‘북소행’설을 입증하는 절대적 증거의 하나로 ‘1번’ 글씨를 내세웠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그때 우리는 생산제품에 ‘1호’, ‘2호’라는 표현은 써도 체육선수들처럼 ‘1번’, ‘2번’이라고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국방위는 “‘천안’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이번 무인기 사건은 남조선당국이 추구하고 있는 불순한 범죄적 기도를 여지없이 폭로해주고 있다”며 △“우리를 무인기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붙여 악화되고 있는 북남관계와 조선반도의 첨예한 전쟁국면 조성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것” △“또 하나의 ‘천안’호 사건을 조작하는 것으로 제2의 ‘5.24대북조치’를 취하여 북남관계를 영원한 대결관계로 만들어놓으려는 것” △“그 무슨 ‘안보태세강화’를 구실로 미국상전을 저들의 무력증강에 깊숙이 끌어들여 ‘전력공백’의 허점을 메우고 우리에 대한 군사적 압살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 것” 등을 열거했다.

나아가, 국방위는 “‘천안’호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농협’ 금융컴퓨터망 마비사건, ‘3.20해킹 공격사건’, ‘GPS 전파교란사건’에 이어 무인기 사건 등을 우리와 연계시키는 것은 곧 북남대결을 추구하는 것이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공공연한 파괴로 된다”며 그간 우리 정부가 북소행설로 규정했던 사건들을 부정했다.

특히, 국방위는 “우리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남조선당국이 아직까지 ‘천안’호 사건의 ‘북소행’설을 걷어 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2, 제3의 ‘천안’호 사건을 계속 날조해내고 있는 조건에서 이 모든 것을 해명할 용의가 있다”면서 “‘천안’호 사건을 포함한 모든 ‘북소행’ 관련 사건들을 공동조사하자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방위는 “민족의 거대한 관심 속에 진행될 진상조사에는 남조선의 ‘국가안보’를 총괄한다는 청와대 김장수 안보실장이 남측을 대표하여 나오면 될 것”이라고 정식 제의했다.

한편, 이날 오전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발표한 진상공개장에서 “(남한) 국방부는 4월 11일 무인기 사건과 관련한 중간조사결과라는 데서 결정적 근거는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작정 ‘북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하면서 기어코 우리와 연관시켜 제2의 ‘천안’호 사건을 날조해낼 흉심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은 철두철미《천안》호사건의 복사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검열단 진상공개장--

지금 남조선당국이 동족대결의 범위를 정치,군사분야만이 아닌 사회의 모든 령역에까지 확대하기 위한 반공화국날조극,모략극들을 계속 꾸며내고있다.
그것이 온 남녘땅을 대혼란속에 몰아넣고있는 그 무슨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이다.
《중앙합동조사단》이라는것을 조직하여 발견하였다는 무인기들에 대한 정밀조사를 진행한다 어쩐다 하며 복닥소동을 피워대던 남조선당국은 드디여 4월 11일 《북소행》으로 단정한 《중간조사결과》를 공식발표하였다.
이미전부터 무인기사건의 배후에 《북이 있다.》고 정해놓은 상태에서 그를 립증하는데로 조사방향을 집중하고있었다는것을 놓고볼 때 《중간조사결과》발표는 별로 놀라운것이 아니다.
우리는 발생한지 4년이 된 《천안》호사건이 흐지부지되고있는 마당에서 남조선당국이 제2의 모략극을 날조해낼수도 있다는것을 예감하였던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남조선당국이 떠들어대고있는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이 철두철미 《천안》호사건의 복사판이라고 락인하면서 지금까지 밝혀진 사건진상을 그대로 세상에 공개한다.

1. 무인기사건의 실상

지난 3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봉일천주변 야산에서 한 민간인이 추락된 무인기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한주일후인 3월 31일 백령도 사곶근처에서도 무인기가 발견되였다고 한다.
초기 남조선군당국은 《대공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 무인기가 《골동품》으로써 《민간에서 만든 수준》이기때문에 《안보위협》은 크게 없다고 하였다.
이 무인기들을 남조선에 있는 애호가들이 띄웠을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 정형을 조사해보려 한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무인기 1대가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청옥산중턱에서 더 발견되였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4일경 약초채취를 하던 한 주민이 야산에 추락한 무인기를 보았다는 신고를 받고 찾아냈다는것이다.
남조선국방부는 강원도에서 발견된 소형무인기에 대해서는 시작부터 《북소행》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그를 립증하기 위해 《중앙합동조사단》에서 정밀분석할것이며 조속한 시간내에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할것이라고 하였다.
청와대 대변인도 공식석상에서 백령도와 파주에 국적불명의 무인기가 추락한데 대해 《북소행》으로 단정하고 검토하고있으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가 나오면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수도방위사령부》 등이 대비책을 발표하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말하자면 《북소행》에 초점을 맞추고 《짜맞추기식수사》를 진행한다는것을 꺼리낌없이 공개한것이다.
남조선군당국은 4월 2일 무인기들이 북에서 날려보낸것이라고 결론한 1차《조사결과》라는것을 서둘러 발표하였다.
무인기의 발견위치와 시점,카메라에 촬영된 내용,내부장치와 외부도색 등이 서로 류사하기때문이며 백령도에서 추락한 무인기가 북쪽에서 날아왔고 파주에서 발견된 무인기에 《북쪽글씨》가 씌워져있다는 점에서 모두 《북의 제품》으로 판단할수 있다는것이다. 여기에 2012년 4월 우리의 열병식때 등장하였던 무인기와 비록 차이는 있지만 도색방식과 기관종류,착륙용락하산탑재방식 등이 비슷한것도 증거라고 덧붙이였다.
남조선국방부는 《조사결과》에서 이번 무인기의 추락원인에 대한 분석자료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자체결함으로 추락하였거나 북이 의도적으로 추락시켜 저들의 대응태세를 타진해보는것과 함께 남조선사회에 긴장과 혼란을 조성해보려 하였을수 있다는 어정쩡한 소리뿐이였다.
다만 무인기추락이 박근혜를 향한 《무언의 협박》일수 있다는것은 확정적인것처럼 강조하였다.
초기 공개했던 자료들도 대폭 수정변경하였다.
무인기기체에 없었다던 송수신장치도 꼬리부분에 달려있었다는것으로 바뀌였으며 청와대에 근접하지 않았다던 무인기가 숙소까지 촬영한 사진들도 내놓았다.
무인기사건을 《북소행》으로 공개한 즉시 남조선당국은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놓고 3시간이 넘도록 무인기조사결과에 따른 대응방안을 론의하였다.
이어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긴급소집되였다.
특히 박근혜는 청와대수석비서관회의를 소집해놓고 우리의 로케트발사와 추가핵시험가능성 등에 대하여 비난해대다 못해 《북의것》으로 추정되는 무인비행체들이 발견되면서 《불안》이 커지고있다는 식으로 무인기의 《북소행》설을 기정사실화해버렸다.
남조선민심은 이러한 당국의 움직임에는 아랑곳없이 《정체불명의 무인기 군방공망을 무인지경으로 헤집고다녀》,《무인기 하나에 온통 뒤집힌 이남땅》,《호언하던 청와대방공망에 치명적인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무인기가 북의것이라고?!…》,《아닐세라 이번에도 북에 책임 떠넘기는 당국》 등 신랄한 야유조소를 쏟아내고있으며 군사불한당 김관진이가 무인기의 《북소행》을 떠들며 자폭기능까지 가능하다고 한데 대해서는 《파괴력이 더 굉장하고 정확한 미싸일을 보유하고있는 북이 굳이 무인기로 공격할 리유가 없다.》고 일축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심에는 관계없이 남조선국방부는 4월 11일 또다시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을 고집하는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것이 거센 반발과 의혹만 불러일으키게 되자 현재 발견된 무인기의 GPS에 입력된 복귀좌표가 《훼손》될것이 우려돼 해독을 못하고있다고 하면서도 《북소행》인것만은 분명하다는 식으로 계속 여론을 확대시키고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벌어진 무인기사건의 객관적인 실상이다.

2. 터무니없는 《북소행》설

남조선당국의 《중간조사결과》를 비롯하여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은 발표되자마자 앞뒤가 맞지 않는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상식적인것으로 하여 내외의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있다.
《북소행》으로 《확실시》된다고 지적한 사실자료들만 보아도 정체불명의 무인기사건은 《천안》호사건때를 신통히도 련상케 하고있다.

말못하는 《증인》으로 나선 사진들

남조선당국은 무인기들에서 나온 촬영사진들이 《북소행》을 립증하는 가장 위력한 증거라고 하였다.
파주에서 수거한 무인기의 경우 북쪽에서 서울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청와대를 포함한 서울과 경기도북부의 주요시설들을 촬영한 사진 193장이 나왔다고 하였다.
백령도에서 수거한 무인기도 소청도에서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로 날아가는 도중 남측의 군사시설물들을 100여장이나 촬영하였다고 하면서 이것만 보아도 북에서 무인기를 보냈다는것을 강하게 뒤받침해준다고 하였다.
남측의 론리대로 한다면 북에서 남으로,남에서 북으로 오가는 비행체는 다 《북의것》으로 되며 그것이 어떤 물체이든 남측지역을 촬영한 사진들이 나오면 모두 《북의것》으로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군사분계선 북측지역에서 남과 북으로 오가는 비행체는 다 남조선의것이며 북측지역을 촬영한 사진이 나오면 그 비행체 역시 남조선의것이라는 귀결이 주어지지 않는가.
사건해명치고는 단순함을 벗어나 유치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다.
하긴 얼마나 궁색했으면 무인기의 비행방향과 말못하는 사진을 《증인》으로까지 내세웠겠는가 하는것이다.
아마도 사진들이 《입》을 열게 된다면 《북소행》을 떠드는 모략가들의 뺨을 정신이 번쩍 들게 후려갈겼을것이다.

무식의 결정체 조선글자표기

《중앙합동조사단》은 무인기가 《북의것》이라는 가장 위력한 증거의 하나로 기관축전지에 표기되여있는 우리 글자를 들고나왔다.
현재 무인기의 기관축전지 앞면에는 《기용날자 2013.6.25》, 《사용중지날자 2014.6.25》라고 씌워진 상표가 붙어있다고 한다.
이것이 북에서 일반적으로 쓰고있는 제품표기법이며 저들이 쓰고있는 《날짜》를 《날자》라고 쓰는것이 《북조선식표기》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초보적인 상식조차 결여된 우격다짐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품에 《기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우리 나라 조선말대사전에는 애당초 《기용》이라는 단어의 해석조차 없다.
사람들은 《기용》이라는 표현은 남조선에서 많이 쓰는것으로 알고있다.더구나 무인기에 표기된 글자서체가 남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서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많다.
이것은 마치 《천안》호사건의 《북소행》설을 립증하는 절대적증거의 하나로 《1번》글씨를 내세웠던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때 우리는 생산제품에 《1호》,《2호》라는 표현은 써도 체육선수들처럼 《1번》,《2번》이라고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리명박일당은 누구에게도 통할수 없는 《1번》글씨를 《북소행》설을 립증하는 결정적증거로 내놓고 한사코 우겨댔던것이다.
이번 《조사결과》에서는 축전지뒤면에 중국어와 일본어표기가 있다는것과 무인기의 비행자세를 유지해주는 장치가 일본 후따바의 제품이라는 자료도 발표되였다.
만약 조선어표기가 있기때문에 무인기가 《북의것》이 된다는 론리라면 중국어와 일본어표기,일본산 장치가 있는것은 무엇이라고 주장할수 있겠는가.
오죽하면 우리에 대한 체질적인 대결의식과 병적거부감을 가지고있는 통일부장관 류길재까지도 그런 엉터리《조사결과》라는것을 내놓은데 대해 얼마나 민망스러웠던지 그런 서체를 가지고 《북소행》이냐 아니냐를 따지는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참다 못해 핀잔을 하였겠는가.
남조선당국이 글자표기를 근거로 무인기를 《북의것》이라고 우겨대면 댈수록 자기의 무지와 몰상식만을 드러낼뿐이다.

귀신도 곡할 지문확인놀음

이번 무인기의 《북소행》설을 립증하기 위한 하나의 증거로 지문이 거론되였다.
무인기에서 식별된 지문을 정밀감지한 결과 남조선에는 없는 《미등록지문》 6개를 확인했다는것이다. 따라서 그 지문들이 북조선사람들의것이 분명하며 결국 무인기가 《북의것》으로 된다고 하였다.
무인기에서 발견되였다는 지문이 남조선사람들의것이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북조선사람들의것으로 된다는 주장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했다면 과연 누가 믿을수 있겠는가 하는것이다.
남조선땅에 숱한 외국사람들이 들어와있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지문도 남조선사람들의 지문과 다를터인데 남조선당국은 《북조선지문》만을 확인하는 《특별도구》라도 가지고있는지는 귀신도 모를것이다.

초보적인 지리상식도 없는 무인기리륙지점

남조선국방부 대변인은 초기 《국방예산으로 30조원이상을 써도 북의 무인기가 어디서 발진했는지 리륙지점을 파악하는것은 쉽지 않을것이다.》라고 발표한바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에는 같은 입으로 무인기의 리륙지점이 확인되였다고 하면서 황해남도 온천비행장이라고 찍었다.
거짓말을 꾸며대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아무러한 과학적증빙자료도 없이 무인기의 리륙지점을 북쪽지역으로 서둘러 단정한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지명조차도 제대로 모르면서 확인되였다고 밝힌것이 더욱 가관이다.
우리 나라 온천비행장은 평안남도에 있지 황해남도에 있지 않다.
국방부 대변인은 백령도와 가까운 지역이 황해남도라는것만 알고있다나니 온천비행장이 황해남도에 있는것으로 발표해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것 같다.
그가 《북소행》설을 립증시키는데 얼마나 몰두하였는지 초기 실언한 지명을 며칠후에 다시 정정하여 발표한다는것이 오히려 더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번에 잘못 발표한 지명을 정확히 밝힌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무인기리륙지점이 황해남도 옹진부근의 한 비행장이라고 한것이다.
우리는 옹진부근에 비행장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다.
이제 GPS복귀좌표를 해독하고 비행경로를 검증하여 리륙지점을 밝힌다고 하는데 모름지기 그 리륙지점이 북이라고 조작해낼것이다.

《북조선색갈》로 공인된 하늘색과 흰색

남조선당국은 무인기들이 《북의것》이라고 확증할수 있는 증거로 동체색갈이 하늘색이기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동체에 하늘색바탕과 흰색구름무늬를 하였기때문에 우리의 무인기이며 그 색갈이 열병식에 나타난 우리 장비색갈과 같기때문에 《북의것》이 분명하다는것이다.
그러면서 동체의 도색을 놓고 무작정 우리를 걸고들기가 아무래도 멋적었던지 전파탐지 및 육안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장도색을 한것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날조에 이골이 난 능수라고 하여도 《북소행》임을 립증하기가 여간 조련치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동체색갈까지 우리와 련계시키니 말이다.
남조선당국의 주장대로 한다면 하늘색이나 흰색은 다 《북조선색갈》이라는것인데 이에 공감할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하겠는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현재 하늘색과 흰색으로 된 옷을 입거나 물품을 소유하고있는 남조선사람들은 즉시 다른 색갈로 교체하여야 할것 같다.
자칫하면 그들모두가 《종북》으로 몰려 족쇄를 차고 감옥에 갈수 있기 때문이다.

《북이 아니면 누구?!》로 된 항속거리

《주변국에서 발진하기에는 짧은 거리이고 그렇다고 남한내에서 한것은 아니기때문에 북에서 했다고 볼수밖에 없다.》, 이는 《중간조사결과》발표에서 무인기의 항속거리를 《북소행》으로 판단한 대목이다.
남조선군당국은 연료통크기와 기관배기량,촬영된 사진 등을 검토한 결과 무인기가 최저 180㎞에서 최고 300㎞의 항속거리를 가진것으로 분석됐다고 하였다.
남조선당국은 이러한 항속거리를 놓고 《북소행》으로 단정짓기에는 제스스로도 부끄럽고 게면쩍었던지 기상조건이나 왕복거리까지 더 고려해보았다고 덧붙였다.
항속거리가 짧으면 짧아서 《북소행》이고 항속거리가 길면 길어서 《북소행》으로 된다는 격이다.
그렇다면 항속거리가 짧은 이 세상의 모든 비행체는 그것대로,항속거리가 긴 비행체는 또 그것대로 다 《북 비행체》란 말인가.
제 흉심을 달성하자니 이런 생억지도 꺼리낌없이 부려대는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남조선내부에서 단마디로 반박해나섰다.
총체적무게가 12㎏인 무인기가 항속거리 300㎞에 필요한 연료를 5㎏이나 장착하면 뜨지조차 못한다는것이다.
그야말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이 아닐수 없다.

조소만 자아낸 《비행고도측정》놀음

남조선국방부는 3월 31일 공군지휘기 《E-8》의 전파탐지기가 북에서 백령도로 날아오던 무인기를 포착하였으므로 이 무인기들이 우리측 지역에서 발진했다는것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발견한 즉시 3차례에 걸쳐 300여발의 발칸포탄을 발사했으나 발칸포의 최대사거리가 2㎞밖에 안되기때문에 5~6㎞고도를 유지하며 비행하는 무인기를 격추할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중앙합동조사단》은 제편에서 이런 말을 내뱉았는지에 대해 감감 잊었는지 백령도에서 발견된 무인기가 1.4㎞의 고도에서 시속 100~120㎞로 지그자그형태로 비행하다가 연유부족으로 추락됐다고 발표해버렸다.
그것이 여론의 의혹을 증폭시키게 되자 백령도에 당국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무인기가 출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이외에도 무인기가 《금형틀》로 제작되고 전자회로기판을 나무에 부착한것이 남조선식이 아니며 무인기리륙에 필요한 발사대와 추가장비를 남조선땅에서 발견했다는 목격자나 신고자가 없다는것까지도 《북소행》의 근거로 내든것을 비롯하여 말이 되든 안되든 마구 꾸며댄것이 《중간조사결과》이다.
남조선당국은 아무래도 《북소행》을 안받침하는 근거자료들이 미미한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2010년 3월 《천안》호가 《북 어뢰공격》에 의해 침몰될 때도 전파탐지기에 걸리지 않는 무인기로 《천안》호의 항로를 추적하고 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였을것이며 그해 11월 연평도포격전때 저들의 포진지가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된것도 무인기가 사전정찰을 하였을수 있기때문이라는 황당한 억측까지 내놓는것으로 어떻게 하나 저들의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해보려 하고있다.
사람들은 이 석연치 않은 행동을 두고 《북소행》설을 조작하고 립증시키기가 여간 수월치 않은 모양이라고 수군거리고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사실자료가 공개되면 될수록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이 완전히 날조라는것은 더 명백히 드러나게 될것이다.

3. 무인기사건의 《북소행》설에 비낀 범죄적기도

모략과 날조는 동족대결에 환장이 된자들이 추구하는 상투적수법이다.
지난 시기에도 그러하였지만 이번에도 례외가 아니다.
《천안》호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이번 무인기사건은 남조선당국이 추구하고있는 불순한 범죄적기도를 여지없이 폭로해주고있다.
첫째로, 우리를 무인기사건의 주범으로 몰아붙여 악화되고있는 북남관계와 조선반도의 첨예한 전쟁국면조성의 책임을 전가시켜보려는데 있다.
지금 조선반도의 정세는 첨예하다.
남조선당국이 외세를 끌어들여 광란적으로 벌려놓고있는 《키 리졸브》,《독수리》합동전쟁연습,군사분계선 전지역에 추악한 인간쓰레기들을 내몰아 로골적으로 감행하는 반공화국삐라살포행위,어용보수언론매체들의 대대적인 비방중상,군부호전광들을 부추겨 무고한 우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무지막지한 해상깡패행위 등만 보아도 그것을 알수 있다.
이것은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국방위원회의 중대제안과 공개서한을 발표한데 이어 흩어진 가족,친척상봉을 성사시켜준 우리 군대와 인민의 대범하고 아량있는 동포애적조치에 대한 남조선당국의 전면도전으로 된다.
내외여론들은 구태의연한 대결관념에 사로잡혀 북남관계를 파국에로 몰아가고있는 남조선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강하게 비난하고있다.
더우기 우리의 정상적인 로케트발사훈련을 그토록 목에 피대를 세우고 악착스럽게 헐뜯던 남조선당국이 뒤에 돌아앉아 500㎞사거리를 가진 탄도미싸일발사시험을 남몰래 강행한 안팎이 판판 다른 이중적행태에 쓰디쓴 환멸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에 바빠맞은 남조선당국은 저들에게 쏠리는 내외의 비난을 막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구실마련이 필요했다.
사건수사가 종료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박근혜가 돌연 공개석상에 머리를 내밀고 우리의 그 무슨 《추가도발》을 운운하며 《즉각차단,격퇴할수 있는 대비책강구》를 력설해댄것도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켜보려는 술책에서이다.
둘째로, 또 하나의 《천안》호사건을 조작하는것으로 제2의 《5.24대북조치》를 취하여 북남관계를 영원한 대결관계로 만들어놓으려는데 있다.
2010년 5월 리명박역도가 《천안》호사건을 계기로 취한 《5.24대북조치》는 북남화해와 협력을 위한 인원들의 래왕까지도 차단한 극악무도한 동족대결조치이다.
지금 북남관계개선을 가로막는 《5.24대북조치》를 철회하라는 불같은 독촉앞에 급해맞은 현 남조선당국은 《특례적인 사례》,《편의적인 례외》와 같은 희귀한 표현을 써가며 북과 남사이의 인원래왕과 접촉을 마지 못해 묵인해주고있다.
사실상 《5.24대북조치》는 이미 시대의 페물이 되여 제스스로 시궁창에 처박히고있다.
이를 달가와하지 않고있는 극우보수패당에게는 어떻게 하나 북남관계의 단절을 고수하고 우리에 대한 고립압살을 지속시킬 제2의 《5.24대북조치》를 만들어낼 모략극이 절실하였다.
이로부터 발생한 무인기사건을 《북소행》으로,우리의 《도발》과 《위협》의 련속으로 날조해대는 억지공사를 벌려놓고있는것이다.
사병들의 목숨까지 반공화국대결의 제물로 바치면서 특대형모략극을 연출해내는 남조선군부가 국적도 증거도 불투명한 무인기사건을 《북소행》으로 조작해낸것을 보면 앞으로 제3,제4의 《천안》호사건으로 대결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
셋째로, 그 무슨 《안보태세강화》를 구실로 미국상전을 저들의 무력증강에 깊숙이 끌어들여 《전력공백》의 허점을 메우고 우리에 대한 군사적압살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데 있다.
지금 다계단으로 소형화되고 집약화된 고도의 화력타격능력과 첨단전략무기를 보유한 우리의 자위적군사력에 질겁한 남조선당국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영구강점을 실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있다.
여기에서 기본은 전시작전통제권전환시기를 연기하는것으로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는것이다.
그러자면 파격적인 《안보불안》이 필요하였다.
이미 연평도포격전을 도발한후 그 후과를 만회한다는 구실밑에 미국의 도움을 받아 조선서해5개섬일대에 《서북도서방위사령부》라는것까지 만들어낸 남조선당국은 같은 수법을 되풀이하려 하고있다.
남조선군당국은 벌써부터 무인기에 10㎏의 탄저균을 탑재하여 서울상공에 살포할 경우 24만명을 살상할수 있다느니,무인기가 자폭무기로 리용될수 있다느니 하면서 해외에서 전술정찰비행선을 도입하고 저공목표발견용 전파탐지기 등을 구입하여 지상탐지능력을 보강하겠다고 떠들어대고있다.
무인기침투사건이 정전협정과 유엔헌장의 위반이라면서 이 사건을 국제무대로 끌고가기 위한 꿍꿍이에 골몰하고있는가 하면 총련이 련루되였다는 《증거》를 확보할 경우 일본정부와 련계하여 제재를 가하겠다는 비렬한 흉계도 숨기지 않고있다.
이에 대해 많은 언론매체들은 《군 뒤늦게 〈무인기는 북한제〉라고 주장》,《군의 여전한 뒤 북대응이 문제》,《군 얻어맞고야 〈방공작전체제보안〉》,《일이 터진 후에야 북을 치는 군의 고리타분한 〈뒤 북대응〉행태》라고 개탄하고있다.
제반 사실은 제2의 《천안》호사건을 조작하는것으로 북남관계를 영원히 파탄시키려는 남조선당국의 대결광기가 더는 걷잡을수도 수습할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4. 《북소행》설은 영원히 통할수 없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충격적인 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우리와 련결시키며 반공화국대결광기를 부려대는것이 남조선당국의 체질화된 악습이다.
그를 립증하고있는 사실자료들은 부지기수이다.
2011년 4월 2일에 발생한 남조선《농협》(농업협동조합중앙회)금융콤퓨터망이 통채로 마비된 사건을 《북소행》으로 매도한것도 남조선당국이다.
정보원과 검찰 등을 동원하여 《합동조사》를 벌려놓은 남조선당국은 어용언론매체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대남싸이버테로를 자행》하고있다느니, 우리 군대가 《해킹부대를 운영》하고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여론을 내돌리면서 나중에는 똑똑한 증거도 없이 《북소행》이라고 최종결론을 내렸다.
당시 커다란 피해를 당한 《농협》당사자들이 《북소행》이라고 밀몰아붙인 당국의 발표가 과학성이 없는 《서뿌른 결론》이라고 항변해나서고 남조선군 기무사마저 벌어진 사태를 《북군부의 공격》이라고 밀어붙일수 있는 혐의가 없다고 공식발표하였으나 리명박일당은 막무가내였다.
2013년에 있은 그 무슨 《3.20해킹공격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은 3월 20일 오후 2시부터 남조선의 주요방송업체들과 크고작은 금융업체들이 련속적인 싸이버공격을 받아 일제히 마비되고 남조선전역이 《사상초유의 대혼란》에 빠진것을 말한다.
수천수만대의 봉사기들과 콤퓨터들이 파괴되고 관련망들이 《먹통》이 되여 방송사들의 보도업무가 중지되고 금융망들의 모든 봉사가 마비되는 《전산대란》이 벌어진것이다.
이것 역시 《북소행》일수 있다는 결론부터 내리고 남조선당국이 전면수사에 착수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해킹공격이 제3국에서 시작된것으로 판명되고 나중에는 《후이즈》라는 이름을 가진 국제해커팀이 저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통에 세계면전에서 톡톡히 망신만 당하였다.
마지 못해 《3.20해킹공격사건》의 막을 내렸던 박근혜일당은 날과 달이 바뀐 4월 10일 갑자기 싸이버전공격이 《북소행》으로 판명됐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물론 이 엉터리조사결과는 남조선각계로부터 《북에 책임 떠넘기는 만능정부》,《북소행이라는 정부발표 예상했더니 아닐세라…》,《해킹코드에서 발견된 수많은 1번, 참 희한하다.》,《어제 농작물망치게 내린 눈도 북이 만들었을것이다.》는 야유조소만 쏟아져나오게 하였다.
이외에도 《GPS전파교란사건》을 비롯하여 저들내부에서 비정상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북소행》설을 들고나오는것은 남조선당국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하긴 다른 나라의 문서까지 조작하여 애매한 서울시공무원을 간첩으로 매도하는 당국일진대 무슨 짓인들 날조해내지 못하겠는가.
남조선당국이 제 땅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와 련계시키지 않으면 조사결과라는것을 도무지 발표할수 없게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남조선에서 급작스레 걷어들였다는 11대의 무인기들에 대해 과연 어떤 조사결과를 내놓겠는가를 주시하고있다.
아마도 모략가들이 이제는 기력이 진하여 《북소행》설조작을 중도반단할수 있다는 소리도 나오고있지만 두고보아야 한다. 원래 모략과 날조에 이골이 난 자들은 죽을 때까지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기때문이다.
명백한것은 남조선당국이 《북소행》설을 들고나올수록 자기의 뿌리깊은 대결적정체만을 더욱 드러낼뿐이라는것이다.
《천안》호사건과 연평도포격전,《농협》금융콤퓨터망마비사건,《3.20해킹공격사건》,《GPS전파교란사건》에 이어 무인기사건 등을 우리와 련계시키는것은 곧 북남대결을 추구하는것이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공공연한 파괴로 된다.
유치하고 졸렬한 모략극을 계속 날조해대면서 동족대결에 미쳐날뛰는것은 제무덤을 파는 길이다.
민족의 리익을 해친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
그가 누구든 우리를 걸고드는 반공화국대결정책에 매달릴수록 민족사에 모략극날조의 주범으로,천하무도한 악질대결분자로,통일의 훼방군으로 락인될것이며 천추만대를 두고 저주와 규탄을 받게 될것이다.
우리 국방위원회 검열단은 남조선당국이 아직까지 《천안》호사건의 《북소행》설을 걷어들이지 않았을뿐아니라 제2,제3의 《천안》호사건을 계속 날조해내고있는 조건에서 이 모든것을 해명할 용의가 있다.
《천안》호사건을 포함한 모든 《북소행》관련사건들을 공동조사하자는 우리의 립장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 검열단은 지금까지의 모든 《북소행》설을 구체적으로 조사,해명하고 모략극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치게 될것이다.
민족의 거대한 관심속에 진행될 진상조사에는 남조선의 《국가안보》를 총괄한다는 청와대 김장수안보실장이 남측을 대표하여 나오면 될것이다.
북남관계를 악화시키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의지가 있다면 뒤구석이 아닌 공식석상에 나와 문제해결에 당당히 림하라는것이다.
민족의 평화와 안전이 직결되여있는 중대사를 즉시 명쾌하게 해결하는것이 쌍방당국앞에 지워진 첫째가는 의무이며 겨레를 위한 옳바른 처사로 된다.
남조선당국이 꺼릴것이 없다면 《천안》호사건발생초기부터 요구하여온 우리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외면할 아무런 리유가 없을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남조선당국의 호응을 기다릴것이다.

주체103(2014)년 4월 14일
평 양 (끝)

(출처-조선중앙통신 2014.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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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으로 치닫는 남북관계

 
 
 
 
문경환 동북아의 문 대표
기사입력: 2014/04/14 [23:05]  최종편집: ⓒ 자주민보
 
 
 
 
연초에 개선 가능성 보이는 듯 했던 남북관계가 급격히 파산으로 치닫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때만 해도 키리졸브·독수리 한미연합군사연습이 끝나면 남북 사이에 본격적인 대화와 협상이 재개되리라 예상됐지만, 지금은 남북관계가 과연 회복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드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올해 남북 사이에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고위급접촉 합의였다. 첫 번째 합의인 이산가족 상봉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두 번째 합의인 상호 비방 중상 중단은 사실상 파기되었고, 세 번째 합의인 추가 고위급 접촉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있는 동안 갑자기 남북관계를 파산으로 몰아넣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에서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포함해 북한에 중대제안을 하고, 이를 통해 남북관계가 급격히 개선되리라는 예측과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와 군부의 문제점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일단 박근혜 정부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시종일관 북한의 국가노선인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북핵폐기를 남북대화의 선행조건으로 내걸었다. 핵안보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는 북한 영변 핵시설이 체르노빌보다 위험하다며 과학적으로도 틀린 주장을 펼치며 북핵폐기를 강조했다. 이른바 <드레스덴 선언>에서는 북한 경제를 비하하고 탈북자를 언급하면서 북한을 자극했다. 대북 제안이라는 것도 <중대> 제안이라고 하기에는 김빠지는 내용이 전부였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을 이야기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별다른 내용 준비도 없고 그저 북한을 굴복시켜 흡수통일 하겠다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수준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특히 군부의 행태는 매우 심각했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중이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북한을 자극하지 않아야 함에도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우선 3월 24일 서해 5도 일대에서 포사격 훈련을 하면서 바로 옆에서 반북단체가 대북전단을 살포하도록 용인하면서 남북고위급접촉의 비방 중상 중단 합의를 위반하였다. 군대가 훈련하는 바로 옆에서 위험천만한 대북전단 살포를 한 것은 군의 협조 없이 불가능하다. 협조를 넘어서서 대북전단 살포로 북한을 자극하고 북한이 이에 대응할 경우 곧바로 맞대응할 수 있도록 포사격 훈련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27일에는 표류하던 북한어선을 나포해 어부들의 귀순을 타진하며 북한을 자극했다. 군은 부인하지만 북한은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을 통해 갑자기 어선 앞에 쾌속정이 나타나 사격을 하고 배에 올라타 쇠몽둥이로 구타를 하면서 족쇄를 채우고 눈을 가린 채 납치, 총으로 위협하며 귀순을 강요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31일 20여 년 만에 최대 규모의 한미연합 상륙훈련인 쌍용훈련을 진행하면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한 점은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키리졸브·독수리 연습과 겹치는 시기에 하면서 정부는 이 연습을 <로우키(Low-Key:영화나 사진에서 조명이나 노출을 조절해 어두운 작품을 만드는 것)>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즉, 언론에 최대한 노출하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면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드레스덴 선언>이라는 대북제안을 한 지 3일 만에 갑자기 공격형 대규모 훈련을 <하이키(High-Key)>로 진행한 의도가 뭘까? 남북대화 파탄을 바라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할 수 없다.
 
무인기 사건도 의심스럽다. 국방부는 무인기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정황증거만 가지고 북한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 이후 언론들은 무인기에 생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실어 보낼 수 있다는 황당한 소설을 쓰면서 반북의식을 고취했다. 북한은 무인기와 연관을 공식 부인했다. 마치 제2의 천안함 사건을 보는 듯하다.
 
최소한의 남북대화도 가로막는 미국
 
미국의 행태도 문제가 있다. 자신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연습을 진행하면서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는 유엔 결의 위반이라며 안보리에 회부한 것은 형평성의 문제도 있지만 북한을 압박해 반발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남북대화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숨어있다. 또 한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3국의 대북압박공조를 요구하고 한일 협력 강화, 삼각동맹 강화를 강조한 것 역시 한국과 일본에게 북한과 대화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이은 대규모 한미연합훈련도 문제다. 키리졸브·독수리 연습이 끝나기도 전인 4월 11일 미 공군은 한국 공군과 함께 맥스 선더(Max Thunder) 훈련을 시작했다. 이 훈련은 미 공군의 <붉은기(Red Flag)> 훈련을 본 딴 훈련으로 이번 훈련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03대의 항공기가 참가한다고 한다. 여기에 14일부터는 전투탐색구조훈련인 퍼시픽 선더(Pacific Thunder) 한미연합훈련을 시작했다. 이 훈련은 전시 한반도에 전개될 미군 구조전력이 오산기지에 실제로 전개해보는 훈련이다.
 
이처럼 미군은 역대 최대규모의 각종 훈련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하면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있다.
 
애초에 남북이 고위급 접촉을 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할 때 한국 정부가 미국과 정책 조율 없이 단독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그간 한미관계를 통해 볼 때 매우 낮다. 물론 이산가족 상봉 실무협상을 진행하는 날 B-52 전략핵폭격기를 서해에 출동시키는 등 미국은 처음부터 남북대화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단순한 대화추진, 관계개선이 아닌 대북압박을 통한 흡수통일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남북대화를 용인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모습은 최소한의 남북대화조차 용인하지 않겠다는 모습이다. 아마도 아시아 재균형 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전체 해군, 공군, 우주 및 사이버 전력의 60%를 배치하려는 계획이 우크라이나 사태로 차질을 빚을 위기에 처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한계와 연이은 북한 자극 사건들, 그리고 미국의 남북관계 개선 방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은 남북관계를 급격히 파산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한반도에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북한은 연이은 미사일 발사 훈련에 이어 미국에 <레드라인>을 설정하고 4차 핵시험까지 경고하고 나섰다. 특히 김정은 제1위원장은 4월 1일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마친 연합부대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조국통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중대제안을 발표하고 현실적인 조치들을 연속 취하였지만 지금 나라에 조성된 정세는 매우 엄중하다≫며 ≪오직 총대로 최후 승리를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미국과 ≪총결산≫을 선포했다.
 
이대로 간다면 지난해 3월 전쟁위기를 뛰어 넘는 심각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당면한 한반도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환시켜야 하며, 특히 군부의 남북고위급접촉 합의문 파기 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또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남북관계 파탄 정책, 군사적 압박 정책을 반대해야 한다. 미국과 박근혜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시급히 대북정책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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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법이 최대의 민생법안이다

새누리당의 싸움질은 공방이고 새정치연합의 싸움질은 분란?
 
임두만 | 2014-04-14 10:26:1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오래간만에 KBS 뉴스를 시청하다 귀와 눈만 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든 의문은 KBS에 기자가 되려면 상당한 실력을 겸비했을 터인데 요새는 해바라기만 뽑는지 실력도 경륜도 전혀 보이지 않는 이들이 기자라고 설친다. 어용질도 눈치껏 해야 시청자가 속아넘어갈 것인데 너무 티나게 어용질을 하니 속아넘어갈 시청자도 없을 것 같다.

오늘(13일) KBS 9시 뉴스는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정몽준의 주식 백지신탁을 두고 정몽준 김황식이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보도했다. 그런데 이 사안은 ‘공방’이라고 명명했다. 반면 새정치연합 광주지역 국회의원들이 광주시장으로 윤장현 예비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에 강운태 예비후보가 반발한 내용을 보도하면서는 ‘분란’이라고 했다.

새누리당의 싸움질은 공방이고 새정치연합의 싸움질은 분란이란 것이다. 이 싸움질의 목적이 여당이나 야당의 다 같음에도그렇게 보도했다. 따라서 이는 KBS가 야당만 각자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싸움질을 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심어주기 위한 레토릭을 쓴 것이다. 이런 나쁜 짓을 뉴스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공연히 저질렀다.

모름지기 정당은 정당 안에서 정책을 놓고 다투는 민주주의가 첨예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런 사안들도 야당에서 일어나면 분란이고 여당에서 일어나면 공방이다. 지금까지 그랬다. 특히 지금까지 여야 각 정당 안에서 특정한 자리를 놓고 하는 싸움은 거의가 이전투구였다. 지금 정몽준 김황식의 쌔움이 바로 이전투구다.

하지만 광주지역 국회의원들의 특정인 지지선언은 맥이 다르다. 정몽준 김황식의 경선전이 개인사를 두고 한 이전투구인 반면 광주는 좋은 후보를 세우려는 지지경쟁이므로 그렇다. 때문에 특정 후보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지지선언에 상대후보가 반발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이나 서울시장 후보 등 경선에는 매번 각 국회의원들의 지지선언이 뒤따랐다. 그로 인해 승부가 갈리기도 했다. 하여 각 후보는 더 많은 지지선언을 끌어내려는 노력들을 하고 이는 김황식도 정몽준도 같다. 이런 경쟁이 어찌 분란인가? 그래서 정 제목을 붙여야 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새정치연합이 공방이고 새누리당이 분란이다.

더구나 강운태 시장은 현직이다. 그가 임기 4년 동안 광주시정을 훌륭하게 이끌었다면 같은 당 소속이며 같은 지역의 국회의원 거의 전부가 비토할 리 없다. 그런데 후보로 출마한 이용섭 의원 한 명을 제외한 5명 전원이 현직 시장이 아닌 사회운동가였던 윤장현 후보를 지지했다.

특히 그는 안철수 그룹을 대표해서 시장후보로 나왔다. 그렇다면 이치적으로 안철수 그룹에게 광주를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구 민주당 소속 광주지역 국회의원들이었으니 그가 달가울리 없어야 한다. 때문에 그를 배척하고 현 시장이거나 동료 의원인 이용섭 후보를 지지해야 맞다. 하지만 이들 5명은 윤장현 후보를 지지했다.

그렇다면…이 사안을 취재 보도하는 기자라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취재하고 그 이면에 담긴 내용을 보도하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올바른 행위다. 그런데 이런 일은 도외시하고 강운태 시장의 반발이라는 팩트 하나로 ‘분란’으로 몰아가는 작태를 저질렀다.

정말 나쁜 기자이고 언론이다. 특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데스크다. 현장 취재기자가 잘못된 ‘야마’를 뽑았다면 이를 고쳐주는 것이 데스크가 할 일인데, 이를 그냥 메인으로 보도하게 승인했다. 따라서 이는 기자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KBS의 행위라고 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이 언론사는 또 바로 이 뉴스 뒤에 방송법 관련 뉴스를 하면서 예의 ‘민생법안’타령을 했다. 야당이 방송법을 볼모로 무려 127건이나 되는 민생법안을 표류시킨다는 거다. 자가당착도 그런 자가당착이 없다.

지금 방송법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는 방송 편집권에 관한 사안이다. 즉 편성위원회의 노사 동수 구성에 관한 것이다. 특정 권력이 공영방송인 KBS, MBC와 준 공영방송이라고 할 수 있는 YTN의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그 힘으로 인사권, 편집권, 보도본부를 모두 장악, 방송을 어용 앵무새로 만들었다. 그래서 새누리당도 자기들이 야당일 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방송을 장악, 정부에 편향적인 방송을 한다고 반발했다.

반대로 지금은 야당이나 언론노조,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KBS, MBC, YTN 등을 명박방송, 근혜방송이라고 지탄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방송사에서 수많은 양심적 언론인들이 해고되고 좌천되고 귀양을 가면서 현재 이들 방송사의 보도라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정부찬양, 여당편향, 야당죽이기 뿐이다. 혹여 여당에 불리한 방송이 하나라도 나가면 숫적 우세를 무기로 방통위에서 제제라는 무기로 압박한다.

여기다 이명박이 어거지로 통과시킨 방송법에 의해 설립된 종편은 하루종일 종북타령 좌파타령 일변도다.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복리, 정치의 흑막과 경제의 쏠림현상, 이런 것은 이들 종편에서 전혀 뉴스거리도 아니다. 다만 종북집단 척결과 좌파척결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양 일방적 공해방송을 하루 종일 내보내고 있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는 국민들의 요구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최소한의 장치로 각 방송사마다 노사 동수로 구성되는 편성위원회 설치를 법으로 강제하자는 안이 현재 방송법 개정안의 골자다. 그런데 이를 이들 방송사가 반대하고 있다. 특히 KBS부터 위헌 운운하면서 거센 반발 중이다. 가장 어용행각을 표나게 하는 자신들이 어용행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오늘(13일), 앞서 거론한대로 제대로 편파적인 뉴스를 내보낸 뒤,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구성은 안 된다는 뉴스를 바로 내보냈다. 멍청해도 참 멍청하다. 정말 이 뉴스를 하고 싶으면 여러 꼭지를 하고 난 뒤 앞에 했던 편파뉴스를 잊을만 할 때 했어야 하는데, 그런 분별력도 없이 바로 내보냈다.

그래서다. KBS여…오늘 당신들의 뉴스를 보면서 나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127건의 산적한 민생법안은 다 미루더라도 방송법만은 이번에 확실하게 개정하는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아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야당을 지지하는 많은 시청자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다. 새정치연합이여…여당이 어떤 민생법안으로 압박하든, 방송사가 어떤 여론으로 압박하든 굴하면 안 된다. 시청자가 최소한의 중립적 보도를 뉴스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시청할 수 있게 하려면 편성위원회 노사동수 구성안에서 후퇴하면 안 된다. 당신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다. 여기서도 밀린다면 당신들은 야당이 아니다. 혹여 ‘새정치’라는 명분으로 상생국회, 민생국회라며 슬그머니 물러서면 당신들은 죽는다. 당신들이 원하는 정권교체는 죽어도 없다. 오늘 KBS뉴스를 시청하면서 지금 최대의 민생법안은 방송법임을 다시한번 느꼈다. 당신들도 그것을 느꼈어야 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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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에 비친 사진 한 장, ‘박근혜 사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4/14 10:58
  • 수정일
    2014/04/14 10:5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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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 못한 기독교, 예수 복음과 달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14 10:20:09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근현대사 해석은 '대화'가 아닌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친일파 문제, 대한민국 정통성 문제, 교학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 굵직하고도 해묵은 논쟁은 모두 '근현대사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와 맥을 같이 하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 그는 평생을 역사학계에 몸담아 왔다. 그리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했고, 이 자유가 인간의 창의성을 자극하면서 경제적인 열매로서 산업화도 이뤄졌다. 산업화를 통한 민주화가 아니라 민주화를 통한 산업화다. 여기에 그 민주화와 창의성을 담보한 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분단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카시즘적 '종북몰이'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과 작금의 현상에 대해 이만열 교수는 허탈해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북주의자로소이다'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북'이라는 말 자체를 희화(戱畵)화시켰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까지 입에 거품을 품고 '종북'을 외치는 자들이 오히려 머쓱해질 때가 오지 않겠나."
 
엄혹한 군사독재였던 시절, 민주화의 불꽃은 늘 청년들로부터 시작됐다. 청년들이 시대의식을 공유하고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끝없는 경쟁과 승자독식으로 청년이 아파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스펙 쌓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피로한 세대가 되었다. 이만열 교수는 젊은 청년들에게 시대의식을 가지고 입을 열기를 당부한다.
 
"젊은이들이 먼저 정의로운 나라와 옳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쓰고, 역사 의식을 통한 시대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직장 문제와 장래 문제가 해결된다. 지금처럼 알알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 연대가 없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 이만열 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이만열 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1938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식민지 조선인으로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유소년기 1945년 식민지 해방과 1948년 남북분단, 1950년 6.25 한국전쟁과 영구분단 등 한반도 격정의 순간을 다 겪었다. 어릴 때 이야기가 궁금하다.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나 1945년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됐다. 그때까지는 시골에서 자라 특별히 민족교육을 받은 적 없고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별로 들은 것이 없었다. 해방될 무렵부터는 기억나는 게 많은데, 8월 15일 해방되던 날, 마을 어르신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손에 대한민국 국기를 들고 "만세, 만세!"하면서 기뻐했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면사무소 앞에 신사(神社)가 있었는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지 얼마 안 돼 신사를 불태웠다. 그때야 우리나라에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원래 우리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교를 받아들여 교회에 다녔다.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이 힘을 합쳐 세운 교회였다. 개울가의 큰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참 아름다운 교회였다. 그러나 일제 말,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져 문을 닫았다. 나는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배웠다기보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우리 민족의 고단한 역사를 배웠다고 자부한다.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했는데, 우리 역사와 관련한 설명에 감명 깊은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 
 
애굽(Egypt)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모세,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다윗,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삼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자기 조국을 향해 열심히 기도한 다니엘 등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부리던 애굽이 우리를 압박하는 일본으로, 골리앗은 일본군으로 생각하게 됐다. 어린 마음에 애국심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겼다. 이때 가지게 된 나라 사랑의 마음이 평생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 주일학교에서 그런 역사의식을 가르쳐 준 선생님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한다. 
 
해방 직후, 나라를 찾은 기쁨이 컸지만 동시에 좌우대결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내가 살던 곳은 비록 남쪽 시골이었지만 좌우대결로 비극적인 경험을 했다. 자고 나면 간밤에 어느 동네 구장(동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면 돌아간 분을 위해 면민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도 거기에 참석시켰다. 이런 걸 보면서 어렴풋이 '무엇 때문에 서로 죽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고장에서 일제 강점기 때 대학을 나온 사람 중 몇몇은 몸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거나 집에 있더라도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은인자중(隱忍自重)했다. 당시 들리는 말로, 그들은 소위 '빨갱이'라고 했다. 아이들 사회에서도 그 집 애들을 약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여름방학이 되기까지 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우리 국군이 잘 싸워 승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짓 정보를 계속 유포했던 것이다. 여름방학 한 달이 채 안 돼 마산에서 진주로 가는 화물열차가 미국 군인과 탱크를 가득 싣고 바쁘게 움직였다. 며칠 뒤, 포 소리가 들리고 집 앞 도로변 개울에 미군이 포대를 설치했다. 부모님은 내게 동생과 생질을 데리고 경상남도 의령 자형 댁으로 피난시켰다. 그날, 합천과 의령을 거쳐 함안 쪽으로 후퇴하는 국군 패잔병을 많이 목격했다. 한 달 이상 객지에서 어려운 피난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과 3.8선 이남에 있던 사람들이 많은 고생을 했지만, 남쪽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도 전쟁에 대한 아픈 상처가 있었고, 나 또한 그렇다. 
 
아버지는 6.25 전쟁 전, 당시 낙동강 유역에서 유행하던 간디스토마에 걸렸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약을 구하지 못해 1년 반 만에 돌아가셨다. 막내 자형은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같이 있던 분 말에 의하면,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에 은신하던 중 친구 고자질로 납치돼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사촌 형 중 몇 명도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했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삼촌 두 분이 눈물을 흘리며 자식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전쟁의 아픔은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이다.     
 
- 어릴 때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했었다고 들었다. 어릴 때 꿈을 바꿔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나. 
 
경상남도 마산에 있는 숙모 댁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숙모님은 신앙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하셨다. 숙모님은 내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나의 길은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성(聖)과 속(俗),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인간의 삶과 신앙의 삶 등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며 목사가 되어야만 성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다 속된 일이라고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가르침이다. 하나님이 모든 영역을 다스린다면 모든 일은 다 하나님 일로 귀결되는데, 어떻게 목사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목사가 되려면 신학교에 가야 한다고들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고학년이 될수록 주변에서 신학교로 바로 가는 것보다 일단 대학에서 공부한 후, 신학교에 가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앞으로는 대학을 나온 목사가 필요할 것 같다고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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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크리스천 청소년들에게 울릉도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의사로도 활약하던 이일선 목사에 의해 독일의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가 소개됐다. 슈바이처는 목사, 신학자, 오르간연주자(organist) 및 의사이기도 했다. 슈바이처는 훗날 신학 교수직을 버리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서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에 의대에서 공부한 후 신학교로 갈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녹색 색약 판정을 받고, 의대 진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신학 공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철학, 역사, 종교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역사학을 선택했다. 역사 공부를 하면 철학이나 종교학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며 신학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대학에 와 보니,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기대했던 그런 학문이 아니었다. 실망도 많이 했지만, 철학·종교학을 기웃거리며 '앞으로 신학 공부를 하려면 서양사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학 1·2학년을 보냈다.  
 
당시에 학생이나 교사는 군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왕 갈 것, 얼른 갔다 오자'고 생각하고 대학 2학년 때 입영했다.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6사단 공병 대대 대대장실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근무하던 선 중위가 자신이 사단 정훈교육을 맡게 됐는데, 국사 강의를 하게 됐다며 국사 교육 교안을 만들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2학년을 마칠 때까지 국사는 이병도 박사의 '국사개설', 그것도 절반 이상을 휴강한 강의 밖에 들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안 만드는 것을 못하겠다고 했더니, "S대학 다니다 온 놈이 그것도 못해"라면서 온갖 모욕을 줬다. 당시에는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의 말이 옳았다. 대학을 다니다 왔으면 으레 역사는 좀 알아야 하고, 역사를 공부하려면 서양사가 먼저가 아니라 국사부터 공부해야지 국사도 모르면서 서양사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목사가 되겠다는 놈이 역사 공부를 한다면서 자기 나라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무슨 서양사를 공부한다고 하나' 싶어 심한 가책이 들었다. 군을 제대하자마자 마음을 고쳐먹고, 복학 후 2년 동안은 국사 과목 강의를 많이 들었다. 
 
- 그래도 끝내 신학을 했다고 들었다.  
 
대학을 졸업 후, 신학교를 갈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내가 속한 고신교단 학교는 부산에 있었는데, 신학교에 가려면 부산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고신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공부할 신학도 교단신학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고신파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가 하면, 주일에 버스를 타거나 음식을 사서 먹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례로 대학 사학과에서 한 학기에 한 번씩 고적답사를 가는데, 보통 주일날을 끼워서 갔다. 나는 8학기 동안 이 답사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보수적이었다. 
 
보수는 지키는 무슨 가치가 있어야만 보수인데, 당시는 이런 외형적인 것을 보수라고 했으니 맹탕이었던 셈이다(웃음). 의식도 없이 형식만 맹종했던 것이다. 부산에 내려갈 용기가 없던 마당에, 취직돼 대학원부터 진학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예순 살 넘은 노모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기만을 기다렸고, 동생도 세 명이나 있었다는 것이 지금의 내 변명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도 부산행을 망설이다 대학 강사로 학교에서 강의하다 보니 자연스레 신학공부와 목회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졌다. 어릴 때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으로 서원도 했는데, 계속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1980년 전두환 정권 초기 학원을 안정시킨다며 비판적인 교수들을 대학에서 내쫓았는데, 겁이 많은 나도 거기에 끼었다. 전국적으로 약 80명 정도 됐다. 학생 간부들도 학교에서 내쫓겼다. 뿐만 아니라 신문, 방송사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내쫓았다. 그동안 신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교회법에 따른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 일제 치하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계에서 민감한 사안이었다. 기존 역사학계는 목회자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종교적으로만 한정시켰는데, 얼마 전 손양원 목사 중동고 명예졸업 세미나에서 "목회자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가장 적극적인 민족주의 운동이다"라고 했다. 어떻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민족운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가.
 
내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되풀이하자면, '기독교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는 민족운동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자체를 '민족운동'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 32년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상해사변, 37년에 중일전쟁에 이어 41년에는 태평양전쟁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전쟁을 위해서는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대만, 조선 사람들까지 옥죄어 전시체제를 강화해야 했다. 이런 체제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의 말과 글, 역사를 말살했고 더 나아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들은 이것을 '황국신민화' 정책이라 했지만, 사실상 ‘민족 말살’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위시한 당시 현존한 천황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전쟁 무사들을 포함해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들도 신으로 모시고, 신사에 참배하라고 했다. 
 
내가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과 관련시킨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신사참배가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면 거기에 반대한 것은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저항한 셈이다. 따라서 민족말살 정책에 투쟁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한글운동과 관련해 최현배·김윤경·이희승·이윤재 선생 등이 한글수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다만, '민족운동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정도로만 말한 이유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이라고 표방하면서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 십계명 중 1,2계명에 나오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굉장히 강했다. 주기철 목사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다. 거창 지역 주남선 목사는 젊을 때 3.1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었고 후에 국내에서 만주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했다. 그도 나중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돼 신사참배문제가 터졌을 때 반대투쟁 선봉에 나섰다.  
 
둘째는 손양원 목사와 관련해 볼 때 신사참배 반대가 일본의 국체를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한 다른 사람들은 검사나 경찰 심문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비해, 손양원 목사 자료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손양호 목사 외 다른 사람들은 주로 평양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료를 구하기 힘들거나 기록이 망실됐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손양원 목사는 서울·광주·청주 교도소에서 3년 이상 심문을 받았다. 심문의 내용을 보면 손양원 목사의 입장은 분명하다. 당시 일본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이라고 하면서 숭배했는데, 손양원 목사는 '어떻게 인간을 신이라고 할 수 있느냐'며 부정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헌법에 나온 국체(國體)를 부정한 것이다. 물론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입장에서 부정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는 국체를 부정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었다. 일본의 국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큰 '민족운동'이 있을 수 있을까? 이보다 더 강력한 '독립운동'이 있을 수 있을까? 교회사(史) 연구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는 않지만, 이제 죽을 나이가 돼서인지 이런 말을 하게 된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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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강의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책임이 교회 안에서 친일 잔재청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한국 교회가 친일파청산에서 간과한 것이 무엇인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 여러 변명을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마땅히 '그때 본인들이 인간적으로 나약해서 넘어졌다'고 고백하고, 교회와 교우(敎友)에게 용서를 구한 뒤 자기의 거취를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적어도 3개월 동안 설교도 하지 않고 자숙하며, 3개월 후 교회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제안했다. 이 정도가 최소한의 제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했다며 자기변명에 열을 올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은 셈이다. 
 
일제 강점기 말, 한국 교회의 친일행위는 신사참배로 집약될 수 있다. 신사참배 후 교회에 가미다나(神棚, かみだな) 같은 신단(神壇)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하고, 교회 종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국방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 교회의 타락을 이해하기 전에는 해방 후  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하게 회개운동을 외쳤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한 사람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생겨난 교단이 '고려파'다. 옥에서 나온 성도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 개혁을 외치다 기득권 세력에서 밀려나 세워진 교단이다. 그들이 세운 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다.) 
 
만약 당시 교회가 내부의 친일문제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어떤 효과가 있었겠나. 종교의 영적 힘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본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우리가 이렇게 친일잔재를 청산했으니 우리 사회도 친일잔재를 청산합시다!"라고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친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됐다. 해방 정국에서 교회가 예언자로서 친일청산을 외쳤어야 하데, 외칠 영적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 오늘날 기독교가 심하게는 '개독교'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신앙인으로, 역사학자로 기독교의 변천사를 지켜본 입장에서 안타까운 심정일 것 같다. 
 
친일 행위로 기득권을 잡은 세력은 이후에도 '교회를 이렇게 이끌어가도 되는 구나'라며 교회 이권화(利權化) 작업을 계속했다. 개혁의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없어져 버렸다. 거기에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온갖 세속적 방법을 동원했다. 이런 문제 모두가 꼭 친일잔재 청산과 관련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큰 책임이 있다.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바른 목회 활동에 나선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해방 후 특히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양적 성장을 추구하던 시기에 한국 교회가 저지른 많은 잘못 가운데 하나만 지적하겠다. '복(福)'과 관련된 문제다. 그들은 요한복음 3서 2절에 나온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을 '예수 잘 믿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고 풀이하면서 '3박자 축복'이라고 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가르친 '복'과는 달랐다. 
 
예수가 마태복음 5장에서 팔(八)복을 이야기할 때는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 애통해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 △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 △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 추가해 사도행전 20장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수가 가르친 '복'을 비틀어서 세상 사람들이 즐겨 찾는 복으로 만들어 버렸다. 돈 잘 벌고 건강해지는 것을 복이라고 한 것이다. 무교(巫敎)에서 구하는 복과 다를 것이 없게 됐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이런 복을 구하고 있으니, 예수가 말하는 '복'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복으로 유혹하면서 신자를 기복적인 신앙으로 끌어가고 있다. 결국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영적으로는 침체돼 버렸다.  
  
한국 교회 운영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와 대형교회 중심이 된 것 또한 지적하고 싶다. 목회자의 목표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키우고 교인을 수적으로 늘리는가'에만 있다. 여기에는 성숙보다는 성장이 우선이었다. 그런 존재양식이 물질적 왕국을 형성하고 교권(敎權)을 형성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영성을 그르치고 있다. 기업을 경영하듯이 한국 교회를 경영하느라, 예수의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다. 교회와 지도자의 세속화는 각종 스캔들로 뒤범벅이 되었고, 세상으로부터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교회가 정화(淨化)되어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종교의 타락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사회 전체를 동반 타락시키는 법이다. 걱정할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 2003년부터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관여했다. 민족문화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지원 예산 반환을 추진했고, 반대 측에서는 '살생부'라며 소송을 벌였다. 결국 법정 공방 끝에 승소해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반대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같은 견해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출하고 다른 위원들에게도 알렸다. 그 뒤, 국사편찬위원장이 됐다(2003년 6월부터 2006년 8월까지 역임). 
 
친일인명사전은 내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되기 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진하던 것이었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1∼2년 내 인명사전을 내자고 논의했는데, 살펴보니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료를 더 수집해서 정확한 근거를 갖고 편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전이 출간되면, 이름이 거론된 이들의 후손들이 틀림없이 법적 대응을 할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사전에는 '이 사람은 이렇기 때문에 친일파다'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이런 자료에 의해 그 사람의 행적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정도로만 서술하자고 했다. 그가 친일파인지 아닌지는 제시된 자료에 의해 독자가 판단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현재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사전편찬위원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그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을 사전에 올리되 '이 사람이 이래서 친일파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아무개가 언제 났으며,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는 것만 제시해 놨다. 그렇다 보니, 후손들도 인물에 대한 서술을 가지고는 항의할 수 없다. 다만, 사전에 기록된 행위와 관련해 '왜 그런 기준을 사용했는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있다.   
 
그 후 2005년 국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법'이 제정, 법적 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규정하는 데 있어 군인은 장교급 이상, 법관은 판사급 이상 등을 기준으로 1005명을 명단에 올렸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한 것과 조금 달랐는데,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더 엄격한 잣대로 총 4389명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백년전쟁>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다기보다는 격려한 정도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하는 일은 자주 격려했다. 숙명여대 교수와 국사편찬위원장 은퇴 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근현대사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며 자문을 구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역사적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인물들이다. 새누리당 정권의 뿌리가 되는 역대 정부에서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심판을 받아 쫓겨난 존재이며, 박정희의 5.16은 김영삼 정권이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이야기하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이것을 뒤집으려 하고 진실을 호도하려고 했다. 
 
이승만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분명하게 내세울 만한 근거가 있는지 의문이다. 해방 후 그의 선창(先唱)으로 남한이 단정정부 설립을 도모했는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에 번영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요즘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완전통일독립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승만의 결정이 과연 옳았냐 하는 문제 제기도 있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민주국가의 토대를 닦아야 할 시점에 이승만이 얼마나 심한 독재를 했는가. 정부수립 초기에 함께 활동했던 김구 등 많은 인사가 테러와 죽음을 당한 과정에서 이승만이 정말 무관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6.25 전쟁을 전후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는 이승만이 북쪽에서 남침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반증이다. 또 자신은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서울에 있는 것처럼 속이고 한강철교를 폭파해 한강 이북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1.4 후퇴 시기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을 부정 착복한 결과 철수 도중에 많은 병력들을 병사시킨 사건) 등으로 무고한 생명을 얼마나 많이 희생시켰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했는데,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 스스로가 직선제를 해야 한다고 들고 나왔다. 국회 의석만으로,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자기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국민들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발췌개헌을 통해 전시(戰時) 중에 직선제로 바꿨다. 그것을 마치 직선제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1952년 1월 8일 국회는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그해 7월 경찰과 군인이 국회를 둘러싼 강압적인 상황에서 개헌안은 통과됐고,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선출됐다.)  
 
어릴 때였지만, 이승만·이범석 등 대통령 후보 사진이 벽보로 붙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승만은 그 뒤 자신의 종신 대통령직을 위해서 1954년 11월 '사사오입' 불법 개헌을 했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의해 결국 쫓겨났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불온한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사사오입(四捨五入)'은 대통령 3선 금지조항에 대한 국회 투표 결과를 이승만 정권이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해 뒤집은 것으로,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개정한 선례를 남겼다.)
 
- '교학사' 교과서의 역사 왜곡 논란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좌편향이다, 우편향이다' 등 친일미화와 역사 왜곡 논란을 넘어 '국사 교과서를 검정교과서에서 국정교과서로 전환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한숨). 교과서 발행 양식에는 국정(國定), 검(인)정(檢認定) 그리고 자유발행제가 있다. 국정은 사상이나 제도를 통제하는 국가에서 쓰는데, 오늘날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채택하는 방식이다. 검인정은 정부에서 교과내용을 정하고 그 내용에 따라 각 출판사가 제작하여 정부의 검정(승인)을 받아 시행하는 것으로, 역사 교과서의 경우 저자(출판사)가 정부에서 정한 교과 과정 기준에 따라 집필하고 그것을 정부가 검열해 적합하다고 인정이 되면 학교에서 그것을 교과서로 채택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가 이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해서 2014년 새 학기 사용을 목표로 나온 검인정 역사교과서는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총 8종이다. 8개의 교과서를 시장에 내놓으면, 각 중고등학교에서 선택해서 교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발행제는 특별하게 교과서로 사용할 것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검열을 따로 하지 않는다. 시장에 나오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채택하여 쓰는 것이다. 주로 선진 자유국가에서 쓰는 방법이다. 검인정제도를 국정으로 바꾸겠다면 그것은 후퇴요, 사상적 통제를 가하겠다는 의도로밖에는 볼 수 없다. 
 
우리나라는 유신시대 때,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했다가 2001년부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변화가 왔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사용하는 고대-전근대까지의 역사는 국정교과서로 필수로 가르치고, 고등학교 2,3학년에 따로 배울 근현대사는 선택으로 하되 검인정 교과서로 하기로 했다. 그 결과 2001년에 근현대사 교과서가 '금성사'를 비롯해 6종류가 나왔는데, 2004년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금성사' 교과서를 두고 색깔 논쟁을 펴기 시작했다. 내용인즉, '금성사' 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더욱 문제 삼았던 것은 교과서에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방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사진에 대해 교과서에 이승만 사진은 없고, 김대중과 김정일 사진만 넣었다고 지적했다(웃음). 언론사 중에서도 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곳이 있다.  
 
국사 교과서는 그 교과서에 반드시 담아야 할 헌법적 가치(價値)를 중요시한다. 첫째,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 이후 세워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으로, 이는 독립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헌법적 가치이기도 하다. 둘째, 4.19 혁명을 통한 민주정신이다. 이것은 현행 헌법에서 강조하고 있다. 셋째, 평화적 통일 원칙이다. 이 세 가지 원칙 모두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적혀 있다. 
 
한나라당이 문제 제기를 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악수 사진은 헌법적 가치를 살려 평화통일을 원칙으로 하는 가치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보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남북이 손을 잡으면서 마치 북한을 용납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과서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문제를 터트렸다. 그 뒤 교육부에서 재검정을 했는데, 몇 개를 고치고 나서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한 뒤에도 계속 한나라당에서 꼬투리를 잡다가,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자 아예 정부 직권으로 교과서를 '개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을 달랐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이 과정을 통해 한나라당 정권에서 교과서 개정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이 소위 뉴라이트가 갖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됐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을 거쳐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서 대한민국이 산업화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의 대한민국 정통성에 소극적이고, 이승만과 박정희로부터 정통성을 찾으려 한다. 그렇다 하니 헌법적 가치와 충돌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교학사' 교과서의 경우,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오류가 많다. 이 정도면 교육부가 헌법적 가치와 교과서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결정을 해야 하는데도 미적거렸다. 이를 알게 된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는가. 불문이가지(不問而可知)다.  
 
이번에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부모, 심지어 학생들이 '교학사' 교과서 채택 거부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며, 이들의 역사 의식이 매우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민의 역사 의식과 상식이 승리했다고 본다. 일본 후소사 판 교과서가 나왔을 때 일본도 그랬다. 2001년 일본의 후소사 판 극우 교과서가 나왔는데, 자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국 역사를 심하게 왜곡했다. 그 교과서는 전체 교과서 중 0.014%, 700권 정도밖에 채택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교사와 학부모가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이 '일본의 역사 교사와 학부모 및 NGO의 역사 의식에 기인한 결과였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극우정권에 끌려가고 있어 안타깝다.    
 
- 지난 대선, 국정원 선거 개입 문제로 박근혜 정권 1년이 복잡했다. 지금도 특검 요구와 함께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18대 대통령 부정선거 백서'를 들고 '불법-부정 대통령 선거 무효 기자회견'도 했다. 
 
박창신 신부가 낸 '18대 대통령 부정선거 백서'를 읽고, 대선 개표에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개표를 전산으로 했을뿐더러 수검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개표는 전산 개표를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다만 보궐선거에서는 허락을 받고 전산개표를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때에도 전산 개표를 했다가 당시 이회창 후보 측이 선거 소송을 내 재검표를 했는데, 오히려 격차가 더 벌어졌다. 
 
수검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거 당일 개표 상황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수검과 관련해 18대 대선 후 국회에서 시험을 했는데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온전히 수검만 했을 때 6000매 수검에 약 2시간 15분이 걸렸다. 이번 개표 상황표를 보면, 한 투표구 개표가 대부분 20분도 안 걸렸다. 이것은 제대로 검사하지 않고 그냥 넘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개표가 이뤄지기 전에 개표 상황이 방송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다. 각 투표구에서 수검 결과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해 결과를 방송국에 보낸 후 방송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하게 집계되기도 전, 방송에서 개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개표 부정과 관련해 많은 유권자가 지난해 1월 4일 대법원에 선거 무효 소송을 냈다. 그때는 22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6000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현행법상 선거소송을 내면 6개월 이내에 공판하게 되어 있는데, 벌써 1년하고도 수개월이 지났지만 대법원에서는 공판기일조차 지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젊은 목회자 몇몇이 대선 당시 개표상황과 방송국의 개표발표 시간을 대조하여 조사했는데, 그 결과 많은 선거구에서 개표발표에 문제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기각하거나 고소인 진술만 듣고 피고소인을 부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정치권과 언론은 묵살하거나 오불관언(吾不關焉)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같은 일이 우리 역사에 어떻게 남을 것인지 답답하고 안타깝다.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라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다. 전후에 세계를 움직인 신학자로, 윤리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의 기도 중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차분한 생각을 가지고 정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변화시킬 수 없는 일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게 있다. 지금 나에게도 그 기도가 절실하다. 혼자서 기도만 하고 있는데 너무 안타깝다. 젊은이들의 의식이 살아 있다면, 청와대가 선거 부정에 대해 저렇게 침묵 일변도로 버틸 수 있겠나. 지금 한국은 젊은이들이 죽어 있기 때문에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한국 사회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종북좌파' 공세에 대해 "차라리 종북을 희화화하고 싶다"며 "나는 화북(和北)주의자이고 공북(共北)주의자"라고 말했다. 교회 일각에서도 종북인사로 불리는데, 어떤가. 
 
내가 종북인사로 분류되고 있는지는 몰랐다(웃음).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역으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북주의자로소이다"라고 커밍아웃(coming-out)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북이라는 말 자체를 희화화시켰으면 좋겠다. 군사정권에서 거리에 붉은색을 못 쓰게 한 적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붉은색을 아예 간판격으로 사용함으로써 레드 콤플렉스를 없앴다. 위대한 공헌이다. 이처럼 종북이라는 말 자체를 희화화시켜면, 지금까지 입에 거품을 품고 '종북'을 외친 자들이 오히려 머쓱해질 때가 오지 않겠나. 
 
어느 글에서 '나는 북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북주의자'라고 한 적이 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북한과 평화를 이루며 살려고 하는 화북주의자'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남북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상황에서는 서로가 상대방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 특히 정권을 잡을 사람들이 그렇다. 
 
국정원 선거개입 파동 이후. 국정원에서 하는 꼴을 보라. 이쪽에서 정권을 잡는 사람들은 저쪽을 들어 이쪽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고, 저쪽의 지배자들도 이쪽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을 강화시켰다. 결국 적대적 공생관계를 누리는 사람들 입에서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북'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왜 종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청년들이 시대 의식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다. 역사 의식은 곧 시대 의식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면서 고민하는 것이다. 요새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도 못 가진 비정규직인 것에 대해 동정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자기 문제에만 몰두해 스펙 쌓기에 급급한 것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33절에 주목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길쌈도 하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 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 앞뒤 문맥을 연결하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에서 '이 모든 것'은 우리 삶과 관련된 경제 문제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해야 삶과 경제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인 정의(正義)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앞장서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경제적인 문제는 너희에게 해결될 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정규직을 얻기 위해서 자기중심적 성을 쌓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정의로운 공동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젊은이들은 먼저 정의로운 나라와 옳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쓰고, 역사 의식을 통한 시대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직장 문제와 장래 문제가 해결이 된다. 
 
정의로운 공동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고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금처럼 하나하나 알알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는 연대가 없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 자유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유는 극기(克己)를 통해서 주어지는 힘이고 그 힘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자기 절제(節制), 자기를 이기는 것을 통해서 개인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라고 부르고 싶다. 자유는 창의성의 기반이다. 나는 창의성이란 말을 중요시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했고, 이 자유가 인간의 창의성을 자극하면서 경제적인 열매 산업화도 이뤄졌다. 산업화를 통한 민주화가 아니라, 민주화를 통한 산업화다. 여기에 그 민주화와 창의성을 담보한 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선임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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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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