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단단한 철이 인간 내면에서 정신으로 바뀌는 과정

떼이야르 드 샤르댕 ‘물질의 심장’ 

 

 

샤르댕03370_starrynight_800x480.jpg

*출처 : 인터페이스리프트

 

우주는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 그 자체이다. 약137억 년 전 ‘빅뱅’은 우주의 시작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인식되는 현상의 시작일 뿐이다. 샤르댕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우상과 같은 -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단단하고 질기고 오래가는 ‘충만감’을 주는 - 철(鐵)에서, “가장 쉽게 부패되는 것(인간의 몸)이 어떻게 종합의 효력으로 가장 부패 될 수 없는 것(정신)으로 바꿔질 수가 있는가?” 깨닫기까지 60년이 걸렸다고 했다. 필자 또한 이 말을 알아듣는 데 50년이 걸렸다. 누가 이 단단한 철(鐵)이 인간의 내면에서 정신으로 바꾸어지는 현상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물질의 의식화 현상 - 이것이 샤르댕의 진화이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물질의 소산 - 기능이며 그 의식에 의해 생성된 생명과 정신은 제3의 물질 - 에너지이다. “거기에는 좀먹는 일이 없다.(Quo tinea non corrumpit...)"

 

현상에서 우리는 질량의 크기를 kg로 표현하는 물질과 J(줄) 또는 cal(칼로리)로 표현하는 에너지가 있으며 여기에 생명과 의식과 정신이 인식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물질은 소립자, 원자, 무기 분자 등 무기질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물질은 ‘공간을 갖는 형체’로서 무기질, 유기질, 생물을 포함하는 언어로서 저울로 측정이 가능하나 에너지, 생명, 의식, 정신은 저울로 측정이 불가능하다. 언제부터 인류는 이와 같은 현상을 인식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약40만 년 ~ 50만 년 전 인류가 불을 이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 통나무가 타서 뜨거운 열기로 바뀌는 모습에서 - 물질과 에너지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이 연장선에서 삶과 죽음의 현상이 - 생명과 의식과 정신이 - 인간(물질)의 ‘안’과 ‘밖’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5세기 일련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神과 예수를 해석함에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原動子)’를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자기는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 로 바꾸어 - 神으로 인식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혼(식물), 각혼(동물), 영혼(인간)이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오늘날 가톨릭 신학에서 형이상학과 이원론의 근간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이원론으로 알고 있지만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그의 사상은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실제가 결합된 하나로 수렴된 일원론 사상이었다.

 

기원전 6세기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인식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밀레토스 학파의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철학사상이 오늘날 유물론의 근간이 되었으며 생명, 의식, 정신은 물질이 소멸되면 사라지는 물질의 소산으로 이것의 확장은 ‘물질양의 증가에 의한 질적 변화의 법칙’에 따른 현상일 뿐이다. 나아가 사회의 구조와 질적 변화는 오로지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인도의 철학자들은 우주와 현상을 전체와 부분으로 인식하였다. 누구든지, 어떤 사상으로 살아가던지 그 길의 종착점은 같은 하나, 소멸이다.........소멸은 끝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가?

 

샤르댕은 그가 서품을 받고 예수회 사제로서 갓 발을 떼어 놓을 당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위생병으로 징집되었다.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참호 속에서 그는 인간 정신의 광란을 체험한 것이다. 전쟁은 개체가 아닌 인간 집단의 거대한 소용돌이 - 정신의 소용돌이였다. 샤르댕에게, 개체(種)의 변이를 관찰함으로써 터득한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 사상이, 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의 생명, 하나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도 ‘생성’과 ‘소멸’이 물질이라는 인식에 익숙해진 그에게, 하나로 수렴되는 생명, 정신으로 사고의 전환이 쉽지가 않았다. 생명과 정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하나의 사고 - “1898년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Radium)과 폴로늄 (Polonium)은 우라늄 방사성 붕괴의 생성물이다.” 에서 물질의 소멸은 새로운 에너지의 생성일지도 모른다는 - 사고와, 1905년 발표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E=mc²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가역성, 그리고 전쟁 후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발굴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물질과 생명과 정신의 단선적인 연속성이, 시간의 축적성과 공통점으로 수렴되는 전체와 부분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의 ‘소멸’은 새로운 에너지의 생성으로 이어지고 에너지의 ‘소멸’은 새로운 물질의 ‘생성’으로 이어지는 물질 - 에너지 순환과정에서, 생명과 정신은 새로운 에너지일지도 모른다는 사고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생성’에서 물질과 에너지 중, 어느 것이 더 우위라는 인식은 없었으며 지금까지 그에게 있어서 생명과 정신은 신앙의 문제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과학의 문제가 되었다. 즉 존재론이 아니라 발생학이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 생명과 정신은 물질의 부대현상인가? 아니면 실체인가? - 종교의 문제가 아닌 과학으로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약137억 년 전 -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식한 ‘원동자(原動子)’가, 샤르댕이 말한 ‘모든 것의 재료’가 - ‘빅뱅’에 의해 물질은 ‘공간을 갖는 에너지’로 에너지는 ‘공간이 없는 물질’로 출현하였다. 이 둘 사이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E=mc²에서 가역성이며, 에너지의 ‘공간형성’과 물질의 ‘공간상실’을 의미한다. 즉 물질의 ‘소멸’은 새로운 에너지의 생성으로 이어지고 에너지의 ‘소멸’은 새로운 물질의 ‘생성’으로 이어지는 물질 - 에너지 순환과정의 시작이며 시간의 시작이다. 시간은 변화의 인식이며 정보로 축적된다. 이 축적된 정보 속에 생명, 의식, 정신이 있다. 
생물은 개체에 따라 일정 영역의 물질로서 한계성이며, 그로인해 독립성(종의 특성)이며, 선택의 폭이 다르다. 생물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살아가기(생존, 성장, 번식)위해 외부로부터 끈임 없는 물질과 에너지의 공급(획득)이 필연인 절대 외부 의존성 존재물이다. 또한 번식을 통해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가며 당대에 획득된 변이는 다음 대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개체의 소멸(죽음)을 통해 개체의 풍요성과 종의 다양성(생물진화)을 만들어낸다.

 

샤르댕03439_sunsetofthegods_1024x600.jpg

*출처 : 인터페이스리프트

 

1953년 미국의 생화학자 Stanley MILLER(1930~2007)는 수소, 암모니아, 메탄이 가득했을 원시지구의 대기상태를 일부 재현하여 생명물질 합성실험을 한 결과 일부 아미노산과 유기산이 생성된 것을 확인하였다. 실제로 오늘날 남아프리카에서 약31억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암석 속에서 22종의 아미노산을 검출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유기질은 지구가 식어 저온, 저압 하에서 외부 에너지에 의해 C, H, O, N, S 등이 에너지-무기질 공진화에 의해 암모니아(NH₃), 메탄(CH₄), 수증기(H₂O)가 생성되었고, 이들 유기분자가 에너지-유기질 공진화에 의해 단백질이 출현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의 직접 물질화 현상은 ‘빅뱅’ 직후 단 한 번만 일어났으리라 추측되며(여기에서 단 한 번만 이라는 의미는 어느 시점의 발생시간개념이 아니라, 더 이상 에너지의 물질화가 불가능한 까지 시간영역이다. 이 후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무기질 - 유기질 - 생물로 이어지는 물질화 현상은 새로운 에너지에 의한 ‘물질의 재조합’ 현상이다. 이 에너지는 ‘물질의 재조합’ 전 단계 물질의 소멸에 의해 생성된 에너지 로서, ‘밀러’의 실험실에서 이용된 전기방전이나 원시지구의 대기상태에서 발생된 번개 에너지, 태양 빛, 화산 열 등은 ‘빅뱅’ 직후 수백억 온도와 기압 하의 에너지가 아니라 무기질이 소멸하면서 생성된 무기질 에너지이다.

 

생물은, 현상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재조합 현상’이 체 내에서 일어남으로서 살아있는 동안 성장을 하며 어느 시점에서 양적성장이 없이 유기질 에너지에 의해 단백질 구조변화만 일어나 씨앗으로 변신한다. 생명체 내에서 유기질 에너지에 의한 양적, 질적 물질화 현상을 우리는 생명 또는 생명현상, 때로는 의식현상이라고도 하며 유기질 에너지를 생명에너지라고 한다. 생명현상은 생물체 밖에서는 불가능하여 복제현상을 통해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가며 이 과정에서 진화가 일어난다. 생물체 내에 일어나는 ‘물질의 재조합 현상’이, 인간에 의해 다시 생물체 밖에서 ‘물질의 재조합 현상’이 일어난다. 문화, 문명의 발생이다. 여기에는 생명에너지가 아닌 정신에너지가 관여함으로서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물출처위키미디어코머스.jpg

*출처:위키미디어 코머스

 

식물은 씨앗 -싹트기 -자라기 -꽃대 형성기 -개화 -씨앗이라는 순환 일생을 한다. 식물학에서 씨앗이 싹트고 잎과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는 기간을 영양생장 또는 생육(growth)이라하며, 꽃대 형성기에서부터 개화와 씨앗까지를 생식생장 또는 발육(development)이라 하여 이 둘을 합하여 식물의 성장단계라 한다.1932년 소련의 생물학자 Lysenko에 의해 처음으로 단계발육설로 제창하였으며 이 후 여러 학자들이 보강하여 오늘날에는 상적발육설로 발전시켰다. 영양생장 기간에는 식물의 질량만이 커지고 생식생장 기간에는 질량의 크기는 정지되고 압축현상이 단계적으로 일어나 거대한 식물의 개체가 작은 씨앗으로 변신한다. 식물에서 영양생장 기간이 ‘양의 질적 변화’ 과정이며, 생식생장 기간이 ‘양의 증가가 없는 질적 변화’의 과정이다. 동물과 인간의 성장단계에서도 상적발육설이 적용되며 특히 인간에게는 의식 성장단계가 함께 나타난다. ‘양의 질적 변화’ 와 ‘양의 증가가 없는 질적 변화’는 ‘물질의 재조합 법칙’이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지식덕분으로 손톱 넓이의 메모리 칩 속에 신문 2500장을 저장 할 수 있는 압축현상이라는 말을 쉽게 알아듣는다. 우리가 손바닥에 올려놓고 사용하는 계산기가, 1946년 에커트와 모클리가 진공관을 이용하여 만든 계산기의 크기가 교실 두 칸 넓이를 차지했다. 부피는 작아지고, 사용되는 전력은 적어지며, 성능은 월등히 향상되어 정보처리 속도가 마이크로 초에서 피코초(ps. 1조분의 1초) 단위로 진화되었다.

반도체의 구조변화와 정보양식의 변화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달이 곧 컴퓨터의 역사로서 이미 생물의 성장단계마다 질적재조정작용의 현상이지만, 컴퓨터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샤르댕은 이 압축현상에 의한 진화를 ‘똬리틀기’라고 했으며 생전에 출현한 진공관식 컴퓨터에 몹시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류 뇌의 진화에 컴퓨터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 오늘날의 정보사회를 예견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의식(意識)이란 인간 고유의 정신현상이라 인식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심적 현상의 총채로 정의하고 있다. 철학과 심리학에서 의식(意識)이란 꽃을 본다. 문제를 생각한다. 기쁨을 느낀다. 등 개체가 현실에서 체험하는 모든 정신작용과 그 내용을 포함하는 일체의 경험 또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 경험, 현상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며 ‘깨어 있는 상태’와 동일시되고 있다. 임상심리학에서는 자신과 환경을 확실히 알고 있는 상태를 의식청명(意識淸明)이라 하며, 그 청명도나 충실도 등이 어느 정도 이상 상실된 경우를 의식장애라 한다.

 

지질학자와 생물학자, 동물학자는 암석과 식물, 동물과 소통을 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학자들의 축적된 지식의 관찰인식이긴 하지만 철이 녹슬거나, 식물은 물이 부족하거나 태양 빛이 강렬하면 시드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학자들의 지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물질 자체의 상태 표현이며 정보이다. 이 정보를 물질의식청명(植物意識淸明) 정도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질은 공간을 갖는 응축된 에너지로서 자체가 운동이며 운동의 크기만큼 공명현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한다. - 의식현상이다. 원자는 분자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듯이 아메바는 인간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즉 10개의 공간이 있는 물질은 100개의 공간이 있는 물질의 10개 밖에 공명현상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라마르크와 샤르댕은 생물의 진화에서 “생물의 복잡성은 의식의 증대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물질의 의식화 현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명, 정신, 의식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공명현상이기 때문이며 무기질에서는 반응이라는 말을 쓴다. 의식은 인식과 동의어로서 단 백질 구조변화 현상이다. 의식(인식)은 개체가 소멸(변화)되면 사라지는 공간물질의 부대현상으로 에너지에 의식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관념은 약137억 년 간 우주의 질서와 변화가 축적되고 압축된 인간 내부 의식의 총합이며 유물론자들이 그렇게 저주하는 상상은 허구가 아니라 개체가 살아있는 한 실체의 영상으로서 단지 현상화가 안 되었을 뿐이다. 한글 프로그램이 깔려있지 않은 컴퓨터에서 한글이 실행 될 수 있는가? 유리창 넘어 현상이 바로 인간의 내면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소나무의 현상인식(감각인식 또는 과학인식) 뿐만 아니라 흙에서부터 소나무의 생성의 전과정을 관념으로 소나무를 객관화하여 인식할 수 있다. 관념인식의 동시성이다.

 

지나간 수많은 성현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과학자들이 깨달은 현상의 진리는 바로 이 관념을 통해서 이다. 신앙의 언어가 동시성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현상인식인 과학과 충돌하여 온 이유이며 오늘날 모든 학문, 특히 물리, 화학, 생물, 수학 등 과학에 역사성을 갖게 된 연유가 과학지식이 축적되고 발달한 이유도 있지만 관념의 동시성이기 때문이다. 관념 또한 개체가 소멸하면 사라지기 때문에 인류는 문화, 문명을 발생시켜 자신의 지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왜 누구나 저절로 현상을 깨닫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약5억 4천만 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로 돌아가 동물의 진화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약30억 년 간 바다에서 벌레 같은 부드러운 몸으로 생활하던 동물들이  캄브리아기에 삼엽충이나 조개 굴 같은 딱딱한 외투를 입고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진화과정에서 우리의 한 다면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鐵(무기물질)과 생명진화가 인간의 정신의식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리라 믿는다. 정신현상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개체의 선택과 자유의 본질을 통해 의식 확장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관념이 실체라면 왜 샤르댕은 스콜라 철학과 독일의 관념론을 그렇게 경원시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일화를 소개함으로서 대신하고자 한다.

 

“235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식물학’에서 ”식물은 흙을 먹고 산다“ 고 했다. 18세기 근대 과학의 여명이 오기까지 이 말은 식물학에서 절대 진리였다.

19세기 들어서 식물학자들은 “식물은 뿌리에 입이 있어 흙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흙속에 있는 N, P, K ,Ca, B 등 식물의 양분을 선택 흡수하며 살아간다.”고, 의기양양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틀렸다고 천명하였다.
식물학자들은 N, P, K ,Ca, B 등 식물의 양분을 비료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비약적인 농업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되었다.

20세기. 여러 분야의 과학이 발달해지면서 식물학자들은 그 N, P, K ,Ca, B 등 식물의 양분이 바로 지각을 이루는 흙의 한 요소임을 알게 되자 “식물은 흙을 먹고 산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식물은 흙을 먹고 산다”는 말과 오늘날 식물학자들이 “식물은 흙을 먹고 산다”는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말에 내포하고 있는 인간 의식의 크기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인간 개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 문명에도 의식의 증대에 따라 같은 현상이라도 달리 보이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밥이 우선인 시절, 아버님은 통일을 외치셨다”

 

고 이종린 민족통일장 추도식 열려..남북해외 공동장례위 구성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4.08  00:31:16
트위터 페이스북
   
▲ '통일애국열사 송석 이종린 선생 민족통일장' 추도식이 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이창복 공동장례위원장이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제 고단한 몸을 누이시고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삼가 의장님의 명복을 빌며, 의장님의 영전에 통일 애족의 면류관을 바칩니다.”

7일 오후 7시 20분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통일애국열사 송석(松石) 이종린 선생 민족통일장’ 추도식에서 공동장례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14번에 걸친 검거와 8번에 투옥 그리고 끊임없는 탄압, 가히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겁고 큰 시련이었다”며 이같이 추모했다.

지난 5일 타계한 이종린 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1945년 일본에서 현병에 구속돼 8월 15일 석방된 것을 시작으로 한 평생 민족통일운동에 헌신해왔으며, 2000년부터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을, 2003년부터 명예의장을 맡아왔다.

이창복 의장은 “지금도 통일선봉대를 이끌고 전국을 휘몰아치던 의장님의 모습이 선연하며, 국가보안법의 철쇄를 끊겠다고 단식단의 선봉에 서셨던 백발의 의장님을 잊을 수 없다”며 “이것은 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신념에 기반한 헌신의 실천이었다”고 기렸다.

   
▲ 추도식 참가자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역시 공동장례위원장을 옥중에서 맡게 된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김규철 의장 대행이 낭독한 추도사를 통해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대통령은 통일대박을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흡수통일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은 한반도 일대의 군사적 긴장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고 있다”며 “범민련 남측본부 모든 성원들은 자주통일의 길에서 한생을 바쳐 오신 이종린 명에의장님의 투쟁정신, 실천정신을 따라 언제나 의연히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북해외 공동장례위원회 구성..공동장례위원장에 최진수 북측본부 의장.임민식 해외본부 의장

장례위원회는 “고 이종린 명예의장 장례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남과 북과 해외가 함께 공동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며 “범민련 북측본부 최진수 의장, 범민련 해외본부 임민식 의장이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위촉됐다”고 발표했다.

남북해외가 공동장례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2005년 고 신창균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후 처음이다.

범민련 북측본부는 추도사를 보내와 “우리는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쳐온 리종린 명예의장 선생이 별세하셨다는 뜻밖의 비보에 접하여 유가족들과 남측본부에 깊은 위로의 마음과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면서 “리종린 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가 범민련의 결성과 강화발전을 위하여, 그리고 남녘에서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조국통일을 위하여 바친 고결한 생과 애국의 넋은 온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명예의장님께서는 벌써 해방 전부터 애국운동을 시작하시여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시였으며, 통일운동의 구심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시기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범민련 운동의 맨 선두에 서있었으며 일생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바쳐오셨다”며 “명예의장님의 고귀한 정신과 자주통일 위업에 남기신 업적은 온 겨레의 가슴 속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기렸다.

   
▲ 호상 김영옥 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유족을 대표해 장남 원구 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호상을 맡은 김영옥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은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하다”고 사례하고 “이종린 선생이 현세에서는 영면하셨지만 이종린 선생님께서 이루고자 한 그 정신, 그 뜻 모두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겨놓고 가셨다”며 “반드시 함께 선생께서 이루고자 했던 그 뜻을 이루어내자”고 호소했다.

유족을 대표해 장남 원구 씨는 “무수히 많은 역경 속에서도 아버님께서는 한평생 조국통일을 이룩하고자 하시는 신념을 가지고 사셨다”며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밥이 우선인 시절 아버님은 통일을 외치셨다”며 눈물을 훔쳤다.

원구 씨는 “비록 이 자리가 통일된 조국은 아니지만 아버님이 뿌리신 통일의 씨앗은 머지않아 발아하여 멋진 꽃송이를 피우리라 믿는다”며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범민련 여러분들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애쓰시는 여러분들에게 가족을 대표하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인사했다.

   
▲ 노래극단 희망새와 휘파람이 추모 노래를 공연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날 추도식에는 김을수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상임의장이 약력보고를,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대독 한충목 공동대표)과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이 추도사를 했으며, 박종화 시인이 조시를, 민족춤패 ‘출’이 추모 춤을, 노래극단 희망새와 휘파람이 추모 노래를 공연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와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강정구 평통사 상임공동대표,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등 150여명의 참가자들은 합동헌화로 추도식을 마무리했다.

장례위원회는 8일 오전 6시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을 갖고 고인이 일했던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실을 거쳐 장지인 전북 임실군 가족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유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운동 원로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백령도 초근접해상에 떨어진 100여 발의 포탄

한호석의 개벽예감 <10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4/04/07 [20:0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1> 2014년 3월 말 미국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참가한 '쌍룡훈련'이 경상북도 포항시 영일만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위의 사진은 지난 3월 29일에 있었던 상륙전연습현장을 공중촬영한 것이다. 특히 올해 쌍룡훈련'은 해상돌격전과 공중돌격전을 결합한 대규모 상륙전연습이었다. 여러 날 동안 계속된 이번 합동상륙전연습은 미국군과 한국군이 원산만에 상륙하여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이른바 '평양점령작전'을 실전 분위기 속에서 연습한 것이다. 미국군은 지난 3월 31일 영일만 일대에서 실시한 '쌍룡훈련' 현장을 취재진에게 공개하여 자기들의 '무력우세'를 크게 선전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선전계획은 조선인민군의 대응공세에 밀려 실패로 끝났다.     © 자주민보, 한호석소장 제공



‘쌍룡훈련’에 맞서 전격적으로 실시된 대규모 실탄사격

지난 3월 31일 미국군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해안에서 미국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참가한 ‘쌍룡훈련’이라 부르는 대규모 상륙전연습현장을 내외언론 취재진에게 공개하였다.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올해 ‘쌍룡훈련’은 1993년까지 해마다 실시되었던 ‘팀 스피리트’라는 이름의 대북전쟁연습이 ‘키 리졸브-독수리’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바뀐 이후 21년 만에 해상돌격전과 공중돌격전을 결합하여 가장 큰 규모로 실시되었다. 강원도 원산만과 지형이 비슷한 경상북도 영일만 일대에서 그처럼 대규모 상륙전연습을 실시한 것은, 원산만에 상륙하여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이른바 ‘평양점령작전’을 실전 분위기 속에서 연습한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은 미국군과 한국군이 연합하여 그처럼 도발적인 상륙전연습을 감행할 뿐 아니라 언론보도를 통해 그 연습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그리하여 조선인민군은 미국군과 한국군이 영일만 일대에서 대규모 연합상륙전연습을 시작하기 직전인 3월 31일 오전 7시경 서해 5도 분쟁수역에 선박항행금지구역을 선포하였고, 곧이어 오전 8시에는 한국 해군 2함대사령부에 전통문을 보내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오늘 실탄사격연습을 실시할 것임을 통보하였다. 

미국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참가한 대규모 연합상륙작전연습이 동해안 영일만 일대에서 벌어진 시간대에 맞춰 조선인민군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태로운 무력충돌위험지역인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대규모 실탄사격연습을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은, 전쟁연습에 전쟁연습으로 맞서는 단호한 반격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대규모 상륙전연습과 대규모 실탄사격연습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실시된 지난 3월 31일, 한반도에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었다. 

원래 미국군은 자기들이 주도하고 한국군을 참가시킨 대규모 연합상륙전연습이 벌어진 현장을 내외언론 취재진에 공개하여 자기들의 ‘무력우세’를 전 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이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실시한 대규모 실탄사격연습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자기들의 ‘무력우세’를 전 세계에 알리려고 하였던 미국군의 선전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된 지난 3월 31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실탄사격연습은 낮 12시 15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서해 5도 분쟁수역을 향해 대구경 화력타격수단들인 장거리포, 해안포, 방사포를 연속-집중발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남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미리 설정된 7개 구역을 향해 모두 14차례에 걸쳐 각종 포탄 500여 발을 쏘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쏜 포탄 500여 발 가운데 100여 발이 이른바 ‘북방한계선(NLL)’ 이남 해상에 떨어졌고, 백령도에 주둔하는 한국군 해병6여단은 그 100여 발이 떨어진 탄착점에 인접한 ‘북방한계선’ 이북 해상을 향해 즉각 300여 발을 쏘는 대응사격을 하였다고 한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완패한 이후 한국군이 정해놓은 새로운 교전규칙에 따르면, 만일 조선인민군이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으로 사격하는 경우 ‘월선’하여 탄착한 포탄보다 3배가 많은 포탄을 쏘는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한다는 것인데, 이번에 한국군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으로 각종 포탄 100여 발을 쏘았으므로 300여 발로 즉각 대응사격을 하여 “북한군의 군사도발에 단호한 대응조치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남측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으로 100여 발을 사격하였을 때, 백령도에 주둔하는 한국군 해병6여단이 300여 발을 쏘아 대응사격을 하였으니, 한국군이 조선인민군을 3배나 압도하는 대단한 화력을 과시하였다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그런 보도만 읽어본 국민들은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보도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른 허위보도였다. 남측 국방부가 언론에 흘려준 관련정보를 정밀분석하면, 놀랍게도 남측 언론보도내용을 완전히 뒤집는 정반대의 상황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3월 31일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긴박하게 전개된 실탄사격상황을 관련정보에 따라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당일 미국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참가한 대규모 연합상륙전연습에 대응하여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실시한 실탄사격은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1차 사격은 미리 설정된 7개 구역을 향해 발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2차 사격은 백령도 동북쪽 해상에 설정된 제2구역을 향해 발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에 떨어진 포탄 100여 발은 백령도 동북쪽 해상에 설정된 제2구역에 떨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1차 사격에서 7개 구역을 향해 동시에 각각 400여 발을 쏘았고, 2차 사격에서는 제2구역을 향해서만 100여 발을 쏜 것이다. 이것은 실탄사격상황을 파악하는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보인데, 남측 언론매체들 가운데 <조선일보> 2014년 3월 31일 보도기사에서만 그에 관해 정확히 언급하였고, 다른 언론매체들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바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2014년 4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7개 구역을 향해 각종 포탄 400여 발을 쏜 1차 사격은 낮 12시 15분경에 개시되었고, 제2구역을 향해 각종 포탄 100여 발을 쏜 2차 사격은 그로부터 약 25분이 지난 낮 12시 40분경에 개시되었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1차 사격에서 7개 구역을 향해 동시다발로 쏘았으므로 1차 사격에서는 일곱 차례 사격하였고, 제2구역을 향해 쏜 2차 사격에서는 네 차례 사격한 것이다. 그 네 차례 사격에서 100여 발을 쏘았으니, 한 차례에 25발씩 쏜 셈이다. 2차 사격에 나선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낮 12시 40분경부터 오후 3시 30분경까지 약 2시간 50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100여 발을 쏜 것은 어느 한 타격방향으로 포탄을 퍼붓는 일제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해상타격좌표를 명중시키는 집중조준사격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 <사진 2> 미국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참가한 '쌍룡훈련'을 계속 진행하면서 그 현장을 공개하는 대외선전까지 강행한 것으로 하여 정세가 극도로 긴장되었던 지난 3월 31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무력충돌위험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대규모 실탄사격연습으로 그에 대응하였다. 사진은 조선인민군 포병들이 130mm 해안포를 사격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사거리가 35km인 대구경 해안포들은 원래 해안갱도진지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 사진은 갱도진지를 외부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바닷가에 해안포를 끌어다 놓고 사격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민보, 한호석소장 제공

남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2차 사격에 동원한 각종 화력타격수단은 해안포, 평곡사포, 방사포였다고 하는데, 그 밖에도 북에서 ‘주체포’라 부르는 170mm 자행평사포를 함께 쏘았던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제2구역의 해상타격좌표를 조준하여 사거리가 35km인 130mm 해안포, 사거리가 40km인 152mm 평곡사포, 사거리가 50km인 240mm 22관 방사포, 사거리가 60km인 170mm 자행평사포를 사격한 것이다. 

이처럼 사거리가 서로 다른 네 종류의 대구경 장거리포를 서로 다른 사격지점에서 일정한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쏘아 동일한 타격목표를 동시에 명중시키는 사격방식을 동시탄착사격(TOT, Time on Target)이라 하는데, 포사격에 컴퓨터기술이 도입된 요즈음에는 각종 포탄들의 사거리, 비행거리, 탄도각을 컴퓨터로 정밀하게 계산하는 화력통제장치를 사용하여 타격목표를 동시에 명중시킨다. 이전 시기의 동시탄착사격보다 타격정밀도가 더 높아진 새로운 사격방식을 동시다발 밀집사격(MRSI, Multiple Rounds Simultaneous Impact)이라 한다. 

지난 3월 31일 서로 다른 네 종류의 대구경 장거리포를 서로 다른 사격지점에서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동시다발 밀집사격은 백령도 동북쪽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의 어느 타격좌표를 향해 일제히 사격하여 동시에 명중시킨 것이다. 

그런데 남측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네 차례에 걸쳐 동시다발 밀집사격으로 쏜 포탄 100여 발이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에 떨어졌고 그 가운데 일부 포탄은 ‘북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3km나 들어온 해상에 떨어졌다고 한다. ‘북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3km나 들어온 해상은 백령도 해안에서 불과 3∼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초근접해상을 뜻한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동시다발 밀집사격이 7개 구역 가운데 유독 제2구역에서만 실시된 까닭은, 직선거리로 11km밖에 되지 않는 백령도와 월내도 사이의 좁은 수역 안에 제2구역을 설정하면 백령도 해안에서 3∼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초근접해상에 포탄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군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그처럼 백령도 초근접해상으로 포탄을 쏘았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으로 포탄을 쏘았다고만 밝혔으니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백령도 초근접해상에 포탄 100여 발이 떨어지는데도 잠잠하였던 한국군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쏜 포탄이 ‘북방한계선’ 이남 해상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한국군 서북도서방위사령부는 즉각 한국군 해병6여단 포병부대에 대응사격을 명령하였고, 그 명령에 따라 K-9 자주포와 벌컨포를 ‘북방한계선’ 이북 해상을 향해 세 차례에 걸쳐 300여 발 대응사격하였다는 것이 당시 남측 국방부가 발표한 내용이다. 남측 언론매체들은 그런 발표에 한 술 더 떠서 해병6여단 포병부대가 300여 발을 쏜 ‘대응사격’의 의의에 대해 크게 보도하였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연평도 포격전 이전에는 한국군 포병부대가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민군이 쏜 포와 같은 종류의 포를, 같은 포탄수만큼 쏘는 식으로 대응사격을 한다는 유엔군사령부 교전규칙을 따랐는데, 이번에는 그런 교전규칙을 사실상 폐기하고 “신속성의 원칙에 따라 북한군 포탄이 NLL 이남 해상에 떨어지고 나서 수 분 이내에 대응사격이 이뤄졌고, 충분성의 원칙에 따라 세 배 이상 포탄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 

 
▲ <사진 3> 지난 3월 31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백령도 초근접해상의 해상타격좌표를 향해 대구경 장거리포 100여 발을 2시간 50분 동안 계속 쏘았을 때, 백령도에 주둔하는 한국군 해병6여단은 대응사격을 한 발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백령도를 향해 접근하던 미확인 소형 비행체를 향해 20mm 벌컨포 300발을 5분 동안 쏘았을 뿐이다. 사진에 나오는 벌컨포는 사거리가 1km밖에 되지 않는다.     © 자주민보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일보> 2014년 4월 5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2차 사격을 개시한 때로부터 약 1분이 지난 낮 12시 41분경 한국군 해병6여단 포병부대가 벌컨포 3문을 5분 동안 300발 쏘았는데, 그것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2차 사격에 맞서 대응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미확인 소형 비행체가 백령도 북쪽 상공으로 접근하자 그 비행체를 향해 쏜 것이었다.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사거리가 1km밖에 되지 않는 20mm 벌컨포를 2km 고도에서 날아오는 미확인 소형 비행체를 향해 쏘았으므로 그 포탄은 ‘북방한계선’ 근처에도 날아가지 못하고 백령도 해안 부근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군 해병6여단은 자기들에 대한 조준사격을 상정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대규모 실탄사격에서 심각한 위협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대응사격을 전혀 하지 못하였고, 미확인 소형 비행체를 향해 20mm 소구경 ‘헛총’ 300발만 쏘고 이내 잠잠해진 것이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낮 12시 40분경부터 오후 3시 30분경까지 2시간 50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백령도 초근접해상의 해상타격점을 향해 100여 발을 조준하여 쏘는 동시다발 밀집사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도, 한국군 해병6여단 포병부대는 2시간 50분 동안 대응사격을 한 발도 하지 못하고 잠잠하였던 것이다. 

백령도 조준사격을 상정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동시다발 밀집사격이 언제 끝날지 당시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던 미국군과 한국군에게는 3년 반 전 연평도 포격전에서 겪은 악몽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특히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틀어쥔 주한미국군사령부는 이러다가 혹시 백령도가 기습타격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를 느끼며 안절부절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주한미국군사령부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동시다발 밀집사격을 개시한 때로부터 약 1시간 10분이 지난 오후 2시 50분경 조선인민군에게 긴급히 전화통지문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화통지문을 통해 사격중단을 요구하면서 “유엔사-북한군 장성급회담을 위해 본 통지문 수령 이후 2시간 이내에 유엔사가 북한군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통보하였다. 이것은 포사격은 제발 그만하고 쌍방이 급히 만나 대화로 위기상황을 넘기자는 뜻을 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통해 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타격을 받고 반박이나 경고가 아니라 대화를 요청한 미군의 행동을 달리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주한미국군사령부의 긴급전화통지문을 받고서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약 40분 동안이나 동시다발 밀집사격을 더 계속하였다. 이것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주한미국군사령부의 다급한 사격중지요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원래 정해진 사격연습계획대로 동시다발 밀집사격을 완료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선인민군이 백령도 초근접해상으로 100여 발을 2시간 50분 동안 계속 쏘았는데도 한국군은 왜 대응사격을 한 발도 하지 못하였으며, 주한미국군은 왜 조선인민군에게 사격을 중지해달라고 다급히 요구하였던 것일까? 그 까닭은, 만일 백령도에 주둔하는 한국군 해병6여단이 ‘북방한계선’ 이북 해상으로 K-9 자주포를 쏘는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순간 백령도와 연평도가 조선인민군의 집중공격을 받게 될 매우 위험천만한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인민군 육해공군은 한국군 해병6여단이 쏠 대응사격포탄이 ‘북방한계선’ 이북 해상에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백령도와 연평도를 집중공격할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 중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의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측 언론매체들은 당일 낮 12시 15분경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1차 사격을 개시할 때, 조선인민군 항공군 미그-29 두 대가 이미 서해 상공에 출격하였다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미그-29 두 대가 출격한 것은 물론이고, 황해남도의 굴곡진 해안과 크고 작은 섬들에 배치된 1,000여 문에 이르는 대구경 해안포들이 갱도진지에서 나와 백령도와 연평도를 겨냥한 즉시사격태세를 취하고 있었으며, 황해남도 내륙 각지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배치된 대구경 장거리포와 방사포, 각종 단거리미사일들도 백령도와 연평도를 겨냥한 발사준비태세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황해남도 해안에 배치된 서해함대 소속 전투함들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민군 육해공군이 백령도와 연평도를 집중공격할 전투태세를 취하였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김정은 조선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유사시 백령도와 연평도를 집중공격하라는 작전지침을 이미 내린 바 있고, 그 작전지침에 따라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들이 백령도-연평도 집중공격을 상정한 대규모 실탄사격연습까지 실시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8월 16일 연평도가 지척에 바라다 보이는 장재도 방어대와 무도 방어대를 연이어 시찰하면서 그 두 섬에 주둔하는 포병들에게 “우리의 자주권이 행사되는 수역 또는 지역에 단 한 발의 포탄이 떨어져도 지체 없이 섬멸적인 반타격을 가함으로써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적들이 감히 서툰 불질을 해대며 우리의 령토에 단 한 점의 불꽃이라도 떨군다면 그것을 서남전선의 국부전쟁으로 그치지 말고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으로 이어가라고 단호히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또한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3년 3월 1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도 밑에 백령도와 연평도 타격에 인입되는 열점지역 포병부대들의 실탄사격훈련이 실시되었을 때도, 그 포병부대들은 “적들이 감히 우리의 령해, 령토에 단 한 점의 불꽃이라도 떨군다면 무자비한 포병화력타격으로 적진을 아예 벌초해버릴 데 대한 최고사령관 동지의 전투명령”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이번에 백령도에 주둔하는 한국군 해병6여단이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실탄사격에 맞서 ‘북방한계선’ 이북 해상으로 사격하는 경우, 조선인민군은 백령도와 연평도의 화력진지 및 군사시설을 향해 지상, 해상, 공중에서 강력한 화력을 총동원하여 집중공격을 개시할 판이었다. 이처럼 극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을 간파한 한미연합군사령부는 백령도에 주둔하는 해병6여단에게 K-9 자주포로 대응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차마 내리지 못하고 조선인민군에게 사격중지요청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 보는 함선 두 척이 나타나 로켓포 80발을 더 쏘았다

당시 남측 언로보도에서 국방부 관계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인민군이 지난 3월 31일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실시한 실탄사격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방사포고속정 두 척이 실탄사격에 참가한 것이다. 방사포고속정이 서해 5도 분쟁수역에 나타나 실탄사격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백령도에 주둔하는 해병6여단은 자기들이 처음 보는 함선이 나타나 실탄사격을 하는 현장을 멀리서 목격한 것이다. 

방사포를 탑재한 고속정을 남측에서는 ‘화력지원정’이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로켓정(rocket boat)’이라 부르는데, 북에서 쓰이는 공식명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이 글에서는 방사포고속정이라 부른다. 방사포고속정은 포병부대가 아니라 해군부대가 운용한다. 
황해남도 옹진반도 맨 끝 가까이에 마압도라는 섬이 있는데, 매우 작은 섬이라서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지난 3월 31일 바로 그 마압도 남쪽 앞바다에서 대기 중이던 조선인민군 해군 방사포고속정 두 척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낮 12시 40분경 제2구역의 해상타격좌표를 향해 2차 사격을 개시하는 때에 맞춰 고속기동으로 마압도 서쪽 앞바다까지 올라가 제2구역의 해상타격좌표를 향해 방사포를 발사하였다. 

 
▲ <사진 4> 이 사진은 조선인민군 해군이 운용하는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에서 방사포를 장전하는 장면과 속사포(벌컨포) 사격태세를 취한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 나온 방사포는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이고, 사진에 나온 속사포는 30mm 6열 속사포다. 이 방사포고속정은 시속 64km로 고속기동하면서 적함대를 향해 방사포와 속사포를 집중조준사격할 수 있는데, 방사포는 일반탄은 물론 산포탄(집속탄)까지 쏠 수 있다.     © 자주민보

조선인민군 해군이 운용하는 방사포고속정은 청주급과 차호급 두 종류다. 청주급이나 차호급이라는 분류명칭은 미국군이 자의적으로 붙인 것인데, 북에서 쓰이는 공식명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만재배수량이 205t인 청주급 방사포고속정은 122mm 40관 방사포 1문을 탑재하였고, 85mm 함포 1문, 14.5mm 쌍열 함포 2문을 장착하였으며, 항해속도는 시속 36km다. 그에 비해,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은 만재배수량이 82t밖에 되지 않는 소형함정이지만 122mm 40관 방사포 1문을 탑재하였고, 30mm 6열 속사포(벌컨포) 1문, 14.5mm 쌍열 함포 1문을 장착하였으며, 항해속도가 시속 64km로 매우 빠른 것이 특징이다. <사진 4>에 나온 것이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인데, 122mm 방사포 40발을 재장전하는 모습과 30mm 6열 속사포가 사격태세를 취한 모습이 보인다. 
 
▲ <사진 5> 이 사진은 200mm 8관 방사포를 탑재한 1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을 촬영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해군은 1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을 1980년대까지 운용하였고, 1990년대에는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으로 교체하였는데, 남측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서해 5도 분쟁수역에 출동한 방사포고속정에 대해 보도하면서 30여 년 전에 찍은 오래 된 사진을 실어 독자들을 혼동시켰다.     © 자주민보

그런데 남측 언론매체들은 122mm 방사포가 40관이 아니라 20관이라고 오보하였을 뿐 아니라, <사진 5>에서 보는 것처럼 200mm 8관 방사포를 탑재한 1세대 방사포고속정 사진을 실었다. 초기형 200mm 8관 방사포를 탑재한 1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이 퇴역하고 신형 122mm 40관 방사포를 탑재한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으로 교체된 적이 언제인데, 남측 언론매체들은 1980년대에 운용하였던 1세대 방사포고속정을 찍은 오래 된 사진을 아직도 싣고 있으니 오보에 오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2013년 6월 초 나는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에 전시된, 4축9륜 장갑차량에 탑재된 1990년식 122mm 40관 자행방사포를 직접 보았는데, 그 앞에 놓인 해설판에는 “일반탄 사거리 20.7km”라고 적혀 있었다.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에 탑재된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는 일반탄만이 아니라 산포탄(집속탄)까지 발사하는 매우 위력적인 화력타격수단인 것이다. 

러시아에서 생산된 122mm 방사포는 사거리가 30∼45km인데, 북에서 생산된 122mm 방사포는 사거리가 왜 20.7km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이 의문도 무장장비관에 전시된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 앞에 놓인 해설판에서 풀렸다. 해설판에는 “정밀타격 능력”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에서 생산된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의 포탄에는 정밀타격기능을 수행하는 유도장치가 들어갔고, 그만큼 로켓연료가 줄었기 때문에 사거리가 20.7km 이상 늘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일반탄은 물론 산포탄도 쏠 수 있고, 집중타격은 물론 조준타격도 할 수 있는 이 위력적인 방사포는 초당 2발씩 고속발사를 할 수 있으므로, 40발을 모두 쏘는 데 2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만일 시속 64km로 돌진하는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 다섯 척이 122mm 방사포 5문에 장전한 산포탄 200발을 일제사격으로 발사하면, 20초 동안 집중조준타격으로 미국군 7함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3년 3월 11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백령도에서 1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월내도 방어대를 시찰하면서 “적함선들이 군사분계선 해상수역을 침범할 때에는 강력한 조준격파사격을 가할 데 대한 새로운 해상작전규정을 비준하여 주시였다”고 하였는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비준한 새로운 해상작전규정에는 방사포고속정 편대의 집중조준사격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122mm 방사포탄에도 뚫리는 백령도와 연평도의 신설 방호진지들 

조선인민군 해군은 그처럼 위력적인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을 60척 이상 실전배치하였는데, 서해함대에 25척 이상 배치되었고, 동해함대에 35척 이상 배치되었다. 실정이 그런데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이 서해함대와 동해함대를 합해 모두 18척밖에 배치되지 않은 것처럼 축소보도하였다. 북에서 생산된 1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 세 척을 이란이 수입해간 때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7년 4월이었는데, 지금 북에 실전배치된 방사포고속정이 18척밖에 되지 않는다는 축소보도야말로 엉터리다.  
 
조선인민군 해군은 2014년 3월 31일 낮 12시 40분경부터 개시된 2차 사격에서 122mm 40관 방사포를 각각 1문씩 탑재한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 두 척을 동원하여 해상기동사격을 하였으므로, 백령도 초근접해상의 제2구역 해상타격좌표를 향해 122mm 방사포탄 80발을 사격한 것이다. 그 방사포탄 80발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백령도 초근접해상의 제2구역 해상타격좌표를 향해 쏜 100여 발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므로, 2차 사격에서 쏜 포탄은 모두 180여 발이었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각종 포를 조준하여 동시다발 밀집사격으로 100여 발을 쏘고, 조선인민군 해군이 2세대 차호급 방사포고속정 두 척을 동원하여 일제사격으로 122mm 방사포탄 80발을 쏜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백령도와 연평도를 기습공격할 화력준비태세를 과시한 매우 대담한 군사행동으로 보인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4년 3월 11일 월내도 방어대를 시찰하면서 “현재 우리의 화력밀도가 대단히 높다. 백령도의 적대상물들을 3중, 4중으로 타격할 수 있다. 백령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하면서 “싸움의 날 불바다에 잠기고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적진을 방어대장이 직접 사진을 찍어 최고사령부에 전송하라”고 지시하고, “월내도 방어대의 포병들도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내리면 조국통일대전의 첫 포성, 신호탄을 쏘아올려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3중, 4중으로 타격한다는 것은 불마당질로 초토화한다는 뜻이다. 

백령도의 화력진지와 군사시설들을 3중, 4중으로 타격할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화력준비태세가 그러하면, 백령도에서 그것을 방어할 한국군 해병6여단의 방호진지들은 그처럼 강력한 화력타격에 과연 견딜 수 있을까? 2011년 8월 16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민주당(당시 명칭) 국회의원이 대한토목학회에 용역을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백령도와 연평도에 새로 건설된 방호진지들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쏘는 122mm 방사포 직격탄에 취약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유사시 백령도와 연평도를 향해 조준격파사격으로 쏘게 될 각종 포탄들 가운데 122mm 방사포탄은 구경이 가장 작은 것인데, 백령도와 연평도에 새로 건설된 방호진지들이 122mm 방사포탄에도 뚫린다면 유사시에는 그보다 구경이 훨씬 더 큰 포탄이 더 많이 떨어질 텐데 그에 대한 방호력은 사실상 없는 것이다. 백령도와 연평도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관련기사
 
북, 육.해.항공. 반항공군 복수결의모임
 
북, 무인기 서울 상공 자유자재로 날아다녀
 
끝나지 않은 백령도 포격사태, 막을 방도는
 
북, NLL 서해지역 500발 사격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세훈의 길'을 걷는 무모한 야당

[편집국에서] 지방선거 포기하고 '수권정당'?

임경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07 07:42:21

 

 

 

 

 

 

 

 

야당 정치인들이 유난히 게으르거나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저마다 실력이 출중하고 똑똑할뿐더러, 비교적 약속도 잘 지키려 노력한다. 그런데도 야당이 선거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야당이라서다. 지금의 야당은 비주류다. 일시적 비주류가 아니라 구조적 비주류다. 130석이라고 하지만 야당의 힘이 덩치에 비례하지 않는 까닭이다. 
 
새누리당은 과거 야당 시절에도 과반 여당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등에 업은 야당에 대통령도 쩔쩔맸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연정 제안으로 난리가 났던 일이 대표적이다. 권력의 절반을 내줘서라도 주류와의 타협을 꾀해보려던 비주류 대통령의 딱한 처지는 그 정도였다. 비주류 권력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반면,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는 그토록 죽을 쒔어도 정권을 재창출했다. 주류는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고, 그 권력을 유지·관리할 수단이 대단히 많으며, 설령 실패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여당을 상대하는 야당은 웬만큼 집요하지 않고선 어림없다. 
 
 
지방권력을 다투는 선거철이다. 이번에도 야당이 지면 총선, 대선 패배에 이은 3연패다. 승패를 떠나 지방행정의 각도에서 봐도 정권 독주의 방지턱이 사라진 상황은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암 덩어리', '쳐부술 원수'라고 한 규제 문제. 현재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대립하고 있는 재벌의 경복궁 옆 호텔 건립 문제는 여권이 서울시를 접수하면 끝난다. '규제완화 끝장토론'에서 화제가 된 당산초등학교 옆 관광호텔 건립 문제도 그동안 영등포구청이 버티고 있었다. 
 
정치와 행정의 대동맥부터 모세혈관까지 여야는 갈등하고 대립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정부의 막무가내식 규제 완화가 걱정이라면, 야당이 할 일은 선거에 관한 집요함을 보이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정책의 거대한 유턴을 막고자한다면, 당면한 선거를 통해 더 많은 지방 일꾼들을 당선시키는 일이다. 그게 책임 있는 야당이 할 일이다.
 
그런데도 새정치민주연합 일각에선 '지방선거 보이콧' 주장까지 나왔다. 논리는 이렇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기초선거 무공천 요구를 끝내 거부하면 6.4 지방선거 전면 거부 운동을 전개한다. 투표율을 20% 미만으로 떨어뜨리면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성립된다. 9월 정기국회에서 기초선거 무공천 특별법을 제정한 후 지방선거를 다시 치른다.'
 
'선거 보이콧' 캠페인이 효과를 발휘했던 가까운 경험이 있다. 지난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직을 걸고 던진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 때다. 야당의 보이콧 캠페인으로 투표율이 25.7%에 그쳐 투표함은 개봉도 못했다. 오 시장은 자진사퇴했고, 두 달 뒤 열린 재보궐 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이 당선됐다. 이래도 저래도 지방선거에서 패할 가능성이 높은 야권으로서는 오세훈의 무리수가 박원순의 당선으로 이어진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의 선거가 남긴 실제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정치의 정상 경로를 이탈시키면 심판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 전 시장의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기 중반에 대선 욕심으로 가벼이 처신한 오 전 시장이 그래서 심판을 받았다. 당초 오 전 시장의 자신감과 달리 중도층이 꿈쩍 않고 투표장에 가지 않은 결과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선거'에 25.7%나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헛발질을 해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골수 지지층이 최소한 4명 중 1명 꼴이라는 의미다. 굉장한 숫자다.
 
이를 6.4 지방선거에 대입하면 야당이 낭패를 볼 가능성이 크다. 기초선거 공천 문제 때문에 선거를 보이콧 하겠다는 야당은 3년 전 무상급식 때문에 시장 직을 건 오 전 시장만큼이나 무모해 보인다. 유권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정치 경로를 이탈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여기에 60%에 육박하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 45% 안팎의 새누리당 지지율을 감안하면 야권의 투표율 끌어내리기 전략은 현실적이지도 않다.
 
김한길 대표는 일단 이런 극단적인 방안에 선을 긋고 있다. 그는 "당 일부에서 그런 목소리가 있지만 당 공식 기구에서의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야당도 안철수 대표가 박 대통령에게 기초선거 무공천에 관한 회답을 요구한 7일 이후엔 어떤 쪽으로건 결정을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무공천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현재로선, 보다 강력한 정치 투쟁이 유력하다고 한다. 전멸 수준의 패배를 감수하더라도 무공천에 올인하는 방안이다. 
 
야권의 선거 보이콧 주장이나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 지키기에는 지방선거에 어떤 명분을 세워 패하면 다음 선거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깔려있다. 안철수 대표는 최근 "우리의 목표는 2016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고 2017년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라며 "다수당이 되고 정권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김효석 의원은 무공천으로 인한 지방선거 패배 가능성을 예상하면서도 "우리가 폐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잿더미 속에서 결국 새싹은 돋아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를 폄하할 건 아니다. 그러나 당면한 선거를 포기한 듯한 야당의 행보는 대선에서 야당을 지지한 48%의 유권자, 총선에서 130석을 만들어준 유권자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당이 지지층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느냐의 문제다. '구조적 비주류'인 야당이 선거에서 패해도 박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다. 코앞에 닥친 선거를 송두리째 포기한 채 '수권정당'을 꿈꾸는 야당이 지금 무슨 말로 치장해도 허풍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페이스북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미투데이 보내기 요즘 보내기 C로그 보내기 구글 북마크

 임경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표 공안 검사'가 언론계를 망치다

 
[인물탐구] 박만 방송통신심의위원장... '편파 논란' 끊이지 않아
14.04.07 08:10l최종 업데이트 14.04.07 09:23l
 
 
 
 
 
 
 
 
 
 
 
 
 
 
 
 
 
 
 

 

 

기사 관련 사진
▲  지난 1월 23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박만 위원장이 주재한 가운데 '2014년 제2차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정기회의'가 열리고 있다.
ⓒ 양태훈

관련사진보기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방송사가 잇따라 중징계를 받았다. 지난 3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JTBC에 '프로그램 관계자 징계와 경고'라는 최고 수위의 법정제재를 내렸다. 지난 2월 18일 JTBC <뉴스큐브6>이 이 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씨와 그의 변호인을 출연시킨 것을 두고 공정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앞서 지난해 9월 유씨의 무죄 판결을 다룬 KBS <추적 60분> 역시 방심위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방송사 재허가 때 감점으로 이어지는 중징계였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국정원·검찰에 대한 비판이 거센 가운데, 유독 방심위가 공안 검사들을 감싸고 있다. '공안검열위원회'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이 같은 논란의 배후에는 공안 검사 출신인 박만 위원장이 있다.

2011년 5월 박만 위원장은 방심위 2기 집행부의 수장을 맡았다. '공안 검사가 방심위를 접수한다'는 언론단체의 우려가 나왔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편파 심의' 논란이 잇따랐다. 정부 비판 언론에는 과도한 제재를 내렸다. 반면, 종편에는 봐주기 심의가 이뤄졌다. 박만 위원장의 과거를 보면, 이는 예상된 수순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잘나가던 공안검사, 옷을 벗고 언론계로 입성하다

박만 위원장은 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1년부터 검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농담을 즐기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 위원장이 "A씨를 조만간 소환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몇 억 년 된 삼엽충 화석을 가리키며 "저것 입장에서 '조만간'은 얼마일까"라고 대답해 폭소를 유발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서울지방검찰청 공안 1부장검사, 대검찰청 공안기획관을 역임하면서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소설 <태백산맥>에 대해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다 봤다, 재밌더라"라면서도 "국가보안법상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방검철청 1차장 검사였던 그는 노무현 정부 당시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해 10월 검찰은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면서 법원에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곧바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박 위원장은 당시 "사안이 중대하고, 개전의 정이 없으며,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있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면서 "반국가단체에 가입해 간부 또는 주요 요직에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고 20여 차례 방북했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불구속 수사 원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송 교수를 구속 기소했다. 송 교수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하지만 2004년 7월 2심 재판부는 송 교수의 혐의를 대부분 무죄로 판단해 집행유예 선고를 내렸다. 이는 박 위원장에게 '치명타'가 됐다. 

박 위원장은 2005년 4월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자 사표를 냈다. 당시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송 교수 사건을 언급하며 "권력에 맞서다가 피해를 본 측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송 교수는 2008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았다. 

박만 위원장은 검찰을 떠난 지 2년 만에 KBS에 입성한다. 2007년 1월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이 박 위원장을 KBS 이사로 추천한 것이다. 당시 기자협회는 "한나라당이 향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KBS를 공안검사의 수중에 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KBS에 경찰 불러들이고, 정연주 사장 몰아내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방송장악은 현실이 됐다. 감사원은 KBS 감사를 진행해,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의 부실경영 책임을 물어 해임을 요구했다. 여당 쪽 이사들은 2008년 8월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을 처리하기 위해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 과정에서 KBS 구성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KBS 이사회는 경찰을 KBS로 불러들였다. 

박 위원장은 그해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나와 "신체의 위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도 않으니까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밝혔다. 

이사회에서 야당 쪽 이사들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박만 위원장을 비롯한 6명의 여당 쪽 이사들은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을 처리했다. 당시 정연주 사장은 "6명의 이사는 공영방송 KBS의 역사에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사에 영원한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곧 정 사장을 해임했다. 

정 전 사장은 해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2012년 2월 정 전 사장의 해임은 위법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가 방만경영을 했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정 전 사장은 위법행위에 가담한 모든 이들을 향해 "마땅히 본인과 국민 앞에 사죄하고, 응당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박만 KBS 이사'는 이에 앞서 2011년 5월 장관급 대우를 받는 방송통신심의위원장으로 영전했다.

법원 판결 아랑곳 없이 계속 영전... 그는 여전히 '공안'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지난 2008년 8월 25일 KBS이사회에서 정연주 전 사장의 후임 사장 후보 면접이 진행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방송장악 네티즌탄압저지범국민행동 소속 회원들이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유재천 이사장을 비롯해 여당 추천이사인 강성철 권혁부 박만 방석호 이춘호 이사 등을 '방송 6적'으로 규정하고 방송장악 음모를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보수 편향적인 박만 위원장이 이끄는 방심위가 '정권옹호위원회'라는 비판을 받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심위는 2012년 1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이들을 출연시킨 CBS 라디오 <김미화의 여러분>이 공정성·객관성 조항을 위반했다며 주의처분을 내렸다. CBS가 재심을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CBS는 결국 소송을 냈고, 1·2심 재판부는 CBS의 손을 들어줬다. 방심위가 편파 심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방심위는 귀를 닫았다. TV조선 <뉴스쇼 판> 징계를 둘러싼 논란 역시 편파 심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방송은 지난해 1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김성환 노원구청장을 '종북'으로 규정하는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의 주장을 내보냈다.

지난해 12월 방심위는 이 방송이 공정성·객관성 조항을 위배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가장 낮은 행정제재인 '의견 제시' 처분을 내리는 데 그쳤다.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법원은 정 전 아나운서가 이재명 시장과 김성환 구청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편파 시비를 부른 방심위의 심의 결과는 법원에서 잇따라 뒤집어 지고 있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박만 위원장은 자신이 지금도 공안검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느냐"면서 "박만 위원장 체제의 2기 방심위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더욱 노골적인 정치 심의 행태를 보이며 '비판 언론'에 칼을 휘두르는 '정권 친위대'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태그:박만 방송통신심의위원장 태그입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수상한 무인기 '전작권 또 연기' 하필 19대 대선

 
 

 

 


북한제로 추정되는 무인기가 3번째로 발견됐습니다. 국방부는 이모 씨가 파주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소형 무인기를 2013년 10월에 목격했다는 신고를 2014년 4월 3일 접수받고 수색한 결과, 2014년 4월 6일 강원도 삼척에서 소형 무인기를 발견했습니다. 

이번에 삼척에서 발견된 무인기는 파주에서 발견한 하늘색 계열 삼각형 모양의 무인기와 동일 기종이며, 길이는 1.22m, 날개폭은 1.93m, 중량은 15kg, 무인기 하부에 카메라 장착 홈이 있었습니다. 

국방부는 이번에 발견한 무인기도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기체를 수거하여 조사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소형 무인기가 북한제라고 믿어도 이번에 발견된 무인기는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어떤 점이 이상한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추락해도 멀쩡한 무인기 기체, 북한의 신기술?' 

파주,백령도와 함께 삼척에서 발견된 북한제 소형 무인기의 가장 큰 특징은 기체가 모두 멀쩡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무인기들의 평균고도가 1,2~1,5km로 알려졌는데, 이 높이에서 추락한 기체치고는 너무 멀쩡합니다. 

 

 

 


비슷한 크기의 RC 비행기들은 비슷한 고도에서도 추락하면 기체가 파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펠러가 멀쩡한 경우는 거의 없고, 기체가 두 동강 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조정하다가 잔디밭에 추락해도 파손이 심한데, 1,400m 야산의 940m 지점에 추락한 무인기가 프로펠러조차 멀쩡하게 있습니다. 

빽빽한 나무가 있는 야산에 추락한 비행기 기체치고는 너무 멀쩡합니다. 혹자는 눈이 있으니 눈이 완충작용을 했으니 멀쩡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국방부가 발표한 2013년 10월 4일 발견 당시 날씨는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신고자 이모씨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동해 기상청의 2013년 10월 날씨를 모두 조사해봤지만, 눈은 오지 않았습니다. 2013년 첫 눈은 10월 15일 설악산 중청봉에 내린 눈이 처음이었습니다. 

낙하산이 작동했다고 해도, 낙하산에 매달린 물체가 장애물에 부딪히면 충격과 파손이 납니다. 그래서 낙하산으로 군장비를 투입할 경우 외관은 견고한 박스로 포장을 합니다. 

특히 낙하산이 펼쳐진 상태였다고 해도 프로펠러가 멀쩡한 이유가 이상합니다. 대부분의 RC 전문가들은 낙하산이 개방됐어도 나무가 많은 곳에 떨어진다면 프로펠러가 망가질 확률이 높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재 지지대 기반의 폴리카보네이트 기체가 천 미터가 넘은 야산 중턱에 추락했는데도 나무에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착륙(?)해 기체가 멀쩡하다는 사실은 누가 갖다 놨거나, 북한의 기술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운이 너무 좋았을까요? 

' 신고자 이모 씨의 수상한 진술' 

국방부는 삼척에서 발견된 무인기를 신고한 사람이 53세 심마니로 일하고 있는 이모 씨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모 씨는 무인기에 달린 카메라를 현장에서 주웠으나 물이 들어가 사용할 수 없어 폐기했고, 카메라 속의 메모리칩은 꺼내 이미지를 지우고 개인 촬영에 이용했다고 진술했습니다. 

53세의 심마니 이모 씨는 보통 심마니와 다르게 카메라의 메모리를 빼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에 비해 대단한 카메라 지식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인기가 일반적으로 누가 버린 것이 아닌 추락한 기체이며, 카메라의 메모리에 촬영된 이미지도 누군가 찾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모 씨는 무인기와 카메라 발견에 대해 5개월이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2014년 4월 3일에야 신고를 했습니다. 
 

 

 


연합뉴스는 이모씨가 최초에 발견했을 때 촬영한 사진을 보도했습니다. 당시는 눈도 없는 상태에서 기체가 낙하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두 사진을 비교하면 몇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1. 이모 씨는 15킬로가 넘는 무인기를 나무에서 내려 평탄한 곳에 기체를 완벽하게 똑바로 놨습니다. 만약 카메라만 빼서 갖고 올 생각이었다면 굳이 뒤집혀진 무거운 기체를 저렇게 평탄한 곳에 놓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2. 국방부 조사단과 군인들이 저렇게 놨을 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원도에는 4월 1일부터 눈이 내렸고, 군당국이 무인기를 발견한 날짜는 4월 6일이었습니다. 눈이 묻지 않았던 바닥의 기체를 똑바로 놨다고 눈이 묻어있을 리는 없습니다. 

3. 무인기의 날개가 접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육안으로 봐도 기체의 날개 사이즈가 달라 보입니다.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이와 같은 사건을 분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상하게 최초 발견 당시 상황이나 이모 씨의 신고 후 수색으로 발견된 당시 상황을 자세히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 소설을 쓰는 언론, 묵과하는 국방부' 

국방부가 자세한 발표를 하지 않으니 언론은 삼척에서 발견된 무인기를 놓고, 또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언론 대부분은 무인기에 35라는 숫자가 적혀있으니 북한이 제작한 35번째 무인기라는 추측성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정말 근거도 희박하고 논리도 없는 무책임한 기사입니다. 

북한은 분명 무인기를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증적인 자료를 가지고 해야지, 단지 '35'라는 숫자만을 가지고 그렇게 유추할 수 있는 그들의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북한이 무인기를 수십 대 만들고 있다는 논리를 펼치기 위해 아무거나 막 갖다 붙이는 그들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삼척에서 무인기가 발견되자, 전문가들은 무인기가 울진 원자력 발전소 부근도 촬영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하기 위해 정찰 무인기를 활용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휴전선 부근에서 무인기를 출발시켰어도 추락한 삼척까지 130km입니다. 여기서 울진을 가려면 최소 30~40km를 더 가야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최첨단 UAV(무인기)를 개발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의 운용반경도 80km에 불과합니다. 

GPS, 항법감지장치,비행조정컴퓨터,극초단파 대역확산 수신기,영상 2세대 감지기 센서,방향성안테나 등을 탑재한 한국 최신 UAV도 고작 80km 이내에서 운용할 수 있는데, 486컴퓨터를 장착한 북한제 무인기가 무려 200km의 운용반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이엠피터는 삼척에서 발견된 무인기가 북한제 무인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이런 모습이 비상식적이라고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 하필 2017년으로 전작권 연기'

2014년 4월 7일 조선일보는 1면에 무인기 관련 소식과 함께 한국 정부가 전작권을 다시 연기한다는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 는 '우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환수하는 시기와 관련, 양측이 향후 전환 시기를 합의했더라도, 한국군 준비 상황에 따라 최대 2년 더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미국에 제안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원래 한국은 2015년 12월 1일에 전작권을 환수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2년 연기하면 2017년 12월 1일입니다. 

'2017년 12월 1일 전작권 VS 2017년 12월 20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날'

굳이 1년도 아니고 3년도 (참여정부가 정한 날짜는 2012년 4월 17일, MB정부가 연기한 날은 2015년 12월 1일)아닌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17년 12월 1일에 전작권 환수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19대 대선에서도 안보, 국방, 전작권이 주요 쟁점이 될 것이며, 보수세력은 이런 점을 엄청나게 이용할 것입니다. 
 

 

 


보수언론과 새누리당은 연일 무인기 대책을 세우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무인기를 방어하기 위해 '저고도 레이더'를 휴전선 부근에 설치하려면 수천억 원의 예산이 소요됩니다. 그렇게 해도 막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백군기 의원 (육군대장 출신)과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보면, 1994년 북한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도입된 대포병 레이더는 장비수급 문제로 연평도 포격 당시에도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이후에 도입하려고 했던 '전술비행선'도 페이퍼컴퍼니와 계약하는 바람에 사업 자체가 흐지부지됐습니다. 

전작권도 없는 한국군이 북한 무인기를 출발하는 원점을 타격할 수 있을까요? 전작권도 없는 한국군이 자폭 무인기가 주요시설을 파괴했다고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까요? 
 

 

 

 

 


TV조선은 4월 6일 백령도에 무인기가 수시로 출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TV조선은 4월 3일에는 해병대가 무인기를 발견하고 벌컨포를 발사했지만, 무인기 고도가 4~5km라서 격추에 실패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해병대원들이 사거리도 몰라서 공중에 포탄을 낭비했을까요? 실제 국방부가 발표한 무인기 평균 고도는 1,4km였습니다. 발견하고도 격추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아직도 국방부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무인기는 분명 차후에는 위협이 될 수 있는 전략 무기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박근혜 정부,언론,국방부의 대비책이나 분석은 너무 엉터리입니다.

주적이라고 부르는 북한을 타도하자는 목소리만 있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누가 하는지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없습니다. 안보를 입으로만 떠들다가는 진짜 아무것도 못 하고 한반도가 전쟁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부, 여수 침몰 화물선 구조 北 선원 송환

 

해경 측, 침몰 화물선 및 선원 탐색 중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4.06  18:47:09
트위터 페이스북
   
▲ 정부는 전남 여수 인근 공해상에서 침몰된 몽골 국적 화물선에 탑승한 북한 선원 중 구조된 3명과 시신 2구를 6일 오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사진제공-통일부]

정부는 전남 여수 인근 공해상에서 침몰된 몽골 국적 화물선에 탑승한 북한 선원 중 구조된 3명과 시신 2구를 6일 오후 송환했다.

통일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지난 4일 여수 공해상에서 구조한 김 씨 등 선원 3명과 시신 2구를 오늘 오후 2시 5분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인계하였다"고 밝혔다.

   
▲ 시신 2구도 함께 송환됐다. [사진제공-통일부]

앞서 지난 4일 오전 1시 19분경 여수 거문도 남동쪽 34마일 공해상에서 항해 중이던 몽골 선적 화물선 '그랜드포춘1호'가 침몰, 이 배에 타고 있던 북한 선원 16명 중 3명이 구조되고 2명이 숨진채 발견됐다.

이에 북한 '조선적십자회중앙위원회'는 판문점 연락채널을 통해 "구조된 시신 및 선원을 빨리 돌려보내고 앞으로 구조되는 인원들과 시신들도 속히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정부도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발견 즉시 송환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한편, 해경과 해군 측은 침몰 화물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머지 북한 선원 11명을 탐색 중에 있으나 공해상이라는 점과 해류를 따라 일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점을 감안, 일본 측에도 협조를 요청하고 탐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송환되는 한 북한 선원이 판문점 분계선을 넘으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수구골통 아줌마의 통일이야기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4/07 10:07
  • 수정일
    2014/04/07 10: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친미도 하고 친일도 하자는데 친북은 왜 못해"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4/04/06 [15:1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완강한 보수주의자 였던 재미동포 신은미 교수가 통일의사도가 되어 통일을 외치고 다닌다. 김대중 도서관에서 5일 강의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4월 5일 오후4시 개나리 진달래 벗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오후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다. 재미 동포 수구골통(자칭) 아줌마와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 할아버지의 방북 이야기와 통일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20대 청년으로 부터 90대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김대중 도서관은 남녀노소로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찼다.


한핏줄로 뜨겁게 흐르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면서도 헤어져 살아야 하는 비극의 운명을 지닌 우리 북녘 동포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강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호기심과 기대에 부풀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다.
첫번째 강사로 스스로 수구골통 아줌마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신은미 선생이 연단에 올랐다. 
 
▲ 보수주의로 반북적 사고를 가졌던 신은미 교수가 통일의 사도가 되기까지는 남편의 방북여행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방북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신은미 선생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진 소위 대구 경북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제헌의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직업군인이었다. 더욱이 보수 교단인 장로교 기독교인으로 어려서는 반공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하니 얼마나 보수적 성향이 짙겠는지 짐작이 간다.


완고한 보수적 성향으로 북은 온 사회가 괴뢰군으로 가득하고, 자유가 엄격히 통제 된 사회라는 생각만 들었던 그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여행을 좋아 하는 남편이 인터넷으로 여행지를 검색하다 조선여행을 제안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인터넷에는 의외로 조선관광 상품이 많았는데 패키지 여행으로 부터 '기념비적 건축물을 돌아 볼수 있는 상품',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백두산 등 산을 중심으로 하는 상품' '강을 주 관광지로 여행 할 수 있는 상품' 등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남편은 "우리 이번 여행은 북한(조선)으로 갈까"하는 제안을 내놓았고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의 뜻에 따라 방북하게 되었고 이후 6번의 방북을 통해 북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한핏줄, 한형제, 한겨레임을 느끼며 갈라져 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세상에서 함께 가슴 부둥켜 안고 평화롭게 공동번영을 이루며 살아야한다는 의식을 가지게되었다고 한다.


신은미 선생은 50평생을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음악전공 교수로 살면서 방북하기 전까지는 '통일'이니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을 가슴에 두고 살지 않았지만 북
을 다녀오면서 민족과 통일을 이야기 하고 책까지 북녘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일이라고 말했다.


이질감만 가득할 것 같았던 생각 평양 방문 단 3-4시간만에 깨지다'      


호기심과 남편의 반 강제에의해 택한 조선 여행 신은미 선생의 머리는 복잡했다고한다. 베이징에서 고려항공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뿔만 나지 않았지 뭔가 우리(남쪽)와는 다를 것만 같은 북녘 사람들, 오로지 호전적 이미지와 군사적이미지로 가득 찼던 그의 호기심 반 걱정반의 생각은 평양도착 3-4시간후 부터 깨졌다고 한다.  

우선 보이는 풍경부터가 너무도 똑 같았고 인간의 희노애락을 느끼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남편 얘기를 하고 시부모 얘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구나 여느 어머니들 처럼 자녀 교육에 관한 얘기를 가장 많이 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질감이 아닌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신은미 선생은 북녘 동포들과 첫 대면을 하면서 "북녘 동포들 또한 민족 분단의 아픔을 짊어지고 사는 이웃이였구나하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며 북녘 동포 들을 만나면 이질감을 많이 느낄 것 같지만 만나보면 동질감을 금방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산의 아픔 통일로 치유해야'


신은미 선생 부부는 2013년 8월과 9월에 2차례에 걸쳐 두번 북을 방문했는데 이유는 방북기간 동안 안내원을 하는 설경이라는 처녀를 수양 딸을 삼았는데 결혼을 해서  아이를 출산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신은미 선생은 수양딸 (김)설경씨와 태어난 아이의 출산물을 선물로 준비하며 가슴이 뛰고 만날 기쁨에 잠못이루면서 생각했다고 한다. "수양딸을 만나러 가는데도 가슴이 박차고 뛰는데 헤어진 친부모 자식과 형제 자매들을 만난다면 오죽할까? 그런데 그렇게 조차 만 날수 없는 이산가족의 마음은 어떠하랴 이는(이산)야만이다 이세상 어디에도 천륜을 갈라 놓는 곳은 없다. 천륜을 갈라 놓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인권 유린이며 죄를 짓는 것"이라며 

일부에서는 "우리는 이제는 너무나 달라서 함께 할 수 없어 라고 말하지만 우리 혈육이고 동포인데 어떻게 이질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이산의 아픔을 통일로 치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자신이 쓴 방북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며 서명하는 신은미 교수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통일은 우리민족끼리'


신은미 선생은 통일로 가는데 있어 중요 한 것은 남과 북 동포들에 있는 '마음의 분단장벽'을 허무는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도 마음을 열지 못했을 때는 남편을 불그스레한 빨갱이로 알고 남편은 자신을 수구꼴통 개독교(기독교)인으로 지칭하며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방북 후 서로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 남북 동포들은 "동질성 회복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편협한 생각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통일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 것이냐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남과북을 오가면서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북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통일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붙잘고  통일의 주체가 우리라며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하자고 하는데 남쪽에 와서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통일과 민족에 대한 말만 해도 종북, 친북이라며 대화를 꺼린다. 그래서 남에서는 나에게 '종북' '친북'이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않으면서 "민족과 통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그냥 종북하겠다"고 말해 청중을 웃겼다.


신은미 선생은 가족이 싸워 마음이 갈라져 있을때 가족이 해결하지않고 이웃집과 동네를 다니면서 "우리 가족 화해해야하느냐고 묻고 다닐 수야 없지 않느냐"며 왜 우리의 분단 문제를 다른 나라에 맡겨야하느냐며 통일은 6.15선언에서 밝혔듯이 우리민족의 힘으로 우리민족끼리 이루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민족의 하나 됨으로 공동 번영을'


신은미 선생은 콩한쪽도 나눠먹는 민족이 우리민족이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하라는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사상을 가진 것도 우리민족인데 남북이 서로 사랑으로 감싸 않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지금 북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와 중국에게 중요한 북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6.15 시대로 되돌아 가야한다고 역설했다.


6.15와 10.4 시대로 돌아가면 통일 대박이 아니라 '왕 대박'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 처럼 한가하게 강의들을 시간이 없고, 북에 올라가서 손에 손 잡고 열심히 무엇인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즉 민족 공동번영의 시대를 위해 연구하고 사색하고 창조적 일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미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아 그렇게 된다면 청년실업이라는 말도, 미래가 전망이 없어 절망에 빠진 사람들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한줄기 빛 처럼 기자의 머리 속을 비췄다.
 
▲ 북녘동포들의 생생한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민족이 하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신은미 선생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북녘 동포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신은미 선생은 자신이 방북해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북녘 동포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들려 주었다.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두른 여학생들의 모습, 굶어 죽는다는 곳에 꽃 매대(화원)가 많다는 사실, 고급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심지어 농촌에서 모내기가 끝나고도 양산을 쓴다), 


쌍거플 수술을 한 젊은 처녀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을 맨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 소학교 3학년 부터 공식적으로 영어 공부를 한다는 사실, 평양이나 지방이나 할 것 없이 롤러스케이트 열풍이 불고 있다는 소식, 아디다스와 나이키 같은 유명 브랜드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 하이힐은 물론 신발에 많은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 스마트 폰을 이용하는 학생들, 사진을 찍자고 하면 달려와 자세를 잡는 사람들, 언제나 공손한 학생들과 청년, 다정하게 팔짱을 끼거나 손가락을 걸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 신부가 힘들어 하는 것이 안타까워 다해주겠다며 위로하는 신랑, 결혼을하면 조국을 지켜준 혁명열사릉(항일혁명 독립군들이 묻혀 있는 곳 (굳이 남쪽으로 보면 국립묘지)을 찾아 참배하는 신혼 부부들, 


뚝딱하면 생기는 평양의 아파트와 건축물들, 창전거리아파트와 김일성종합대학교원 연구사 살림집과 예술인 아파트 그좋은 아파트 입주자들이 대부분 재건축 지역 주민들과 노동자들이라는 사실, 퇴직후 대동강변에서 낚시를 즐기는 시민들, 인민대학습당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중. 장년층, 소풍을 나온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도 먹을 것을 나누자고 하는 모습, 장고와 악기를 가지고 노래를 하며 문화 정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 교회에 가서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교인들, 


프로펠러 국내선 비행기로 백두산 관광을 하며 천지에 올라 조국통일 만세를 부르는 장면, 외국에서 일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경하는 가족과의 통일 대화, 멋진 구두를 신은 성불사 주지와의 가곡 열창, 길주 명천 한적한 곳에 놓인 쓰레기통과 외칠보, 내칠보 해칠보의 아름다운 풍경, 폐차에 가까운 차를 타면서도 근심을 모르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 선사시대 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재 구성 해놓은 평양민속공원, 


택시와 승용차가 많이 생긴 평양거리에 자체로 생산한(평화자동차) 뻐꾸기, 죽마 등의 조선식 상표를 단 차가 질주하는 모습,백화점과 빵집, 평범한 근로자들과 여성들이 거의 무료로 즐길 수 있다는 맥주집과 대형 고급 음식점, 강냉이 국수를  먹는 모습 등은 우리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한 혈육임을 느끼게 했고, 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었던 언론들의 보도가 왜곡되었거나 악의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강연이 끝나고 질의 응답을 위해 한자리에 앉은 오인동 박사(왼쪽)와 신은미(오른쪽)선생이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친미도 하고 친일도 해야 된다고 하는데 친북은 왜 못해'


신은미 선생은 자신의 남편과 북 여행중 차량 운행을 맡았던 운전기사가 전에는 서로의가슴에 총뿌리를 겨눈 국군이고 인민군이었지만 여행을하면서 만나고 보니 사랑스런 가족이자 동포요 민족이었다며 이제 민족이자 형제인 가슴에 겨눈 총뿌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신은미 선생은 강연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외쳤다. "친미도하고, 친일도하는데 친북은 왜 못하냐. 조국통일과 민족의 하나됨을 위해서라면 나는 친북하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연장은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소리에 우리민족의 염원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다 분단을 지속하자는 것은 매국이요 배족이자 인간의초보적 양심과 도리를 저버린 금수와 한가지이다. 같은 시조를 모시고 한 혈육으로 온만년을 살아 온 우리 겨레의 하나됨을 위해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애국. 애민.애족의 숭고함이다. 


수구골통 아줌마가 통일의 사도가 되었 듯 정견과 사상, 직업과 성별을 떠나 우리모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정신으로 6.15 10.4정신의 기치를 높이들고 조국통일에 한사람 같이 떨쳐 나서자. 

이역만리 먼곳에서 북조국과 남조국을 찾으며 민족의 하나됨을 위하여 피곤함 잊은채 시간을 쪼개어 가는 신은미 선생 부부에게 조국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월 19일 범국민촛불...민주주의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될 것”

‘관권 부정선거’, ‘간첩조작’ 특검 촉구 위한 39차 촛불문화제 열려

옥기원 기자 ok@vop.co.kr
입력 2014-04-05 20:52:34l수정 2014-04-05 23:04:35
남재준 파면 촉구 구호 외치는 김재연 의원

5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총체적 대선개입 및 박근혜정부의 수사방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제39차 범국민대회 촛불집회를 열고 남재준 국정원장의 파면, 특검을 촉구를 했다.ⓒ김철수 기자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간첩조작 의혹에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을 촉구했다.

28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 시국회의’는 5일 오후 7시 서울시 중구 청계광장에서 ‘관건 부정선거, 간첩조작 특검 촉구 39차 촛불문화제’를 열고 국정원을 정치공작의 본산으로 만든 남재준 국정원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주말 오후,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200여명의 시민들이 청계광장을 찾아 ‘검찰은 성역없이 수사하라’ ‘남재준 파면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박석운 한국 진보연대 공동대표는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선거조작 혐의가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지른 국정원과 관계자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다”며 “선거조작을 저지르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 국가기관에 앉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다가오는 6.4지방선거에서 또 다른 선거조작이 재발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와 국가기관, 검찰이 하나 돼서 범죄를 왜곡·은폐하려 해도 양심 있는 시민들이 일어나서 진상을 규명할 것”이라며 “다가오는 4월 19일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현 정권과 국가기관을 심판하는 계기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간첩조작 사건의 피고인 유우성씨의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는 “우리 사회의 극우세력들이 국가보안법을 미끼로 끊임없이 간첩을 조작해왔고, 여론을 조성하여 사회의 기득권을 지켜왔다”며 “어김없이 국정원이 간첩을 조작하려던 사실이 밝혀졌지만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경찰과 검찰이 나서서 사실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제는 남재준 국정원장부터 고위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간첩조작을 지시한 사람들을 정확히 특정할 수 있다”며 “조만간 고발할 계획이니 검찰은 이 범죄자들을 모두 소환해서 철저히 조사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재준 파면 청계광장 촛불 밝혀

5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총체적 대선개입 및 박근혜정부의 수사방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제39차 범국민대회 촛불집회를 열고 남재준 국정원장의 파면, 특검을 촉구를 했다.ⓒ김철수 기자

 
이날 촛불문화제에는 1960년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4,19혁명회’ 회원 20여명 현장을 찾아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정혜열(81) 4월 혁명회 여성위원장은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진지 50년이 훌쩍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위기를 겪고 있다”며 “관건 부정선거, 간첩조작 등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아 한탄스럽다”고 호소했다.

이어 “4월 혁명의 기운을 받아서 다시 한 번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며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 관권 부정선거의 진상을 밝히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말했다.

한편,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와 백은종 서울의소리 대표는 선거조작과 간첩조작사건 특검을 촉구하고, 4.19 범국민 촛불대회 참가를 호소하기위해 지난 29일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8일차를 맞는 이들은 범국민 촛불행진이 개최되는 4월 19일까지 청계광장에서 단식농성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이명박 구속 박근혜 퇴진!

5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총체적 대선개입 및 박근혜정부의 수사방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제39차 범국민대회 촛불집회를 열고 남재준 국정원장의 파면, 특검을 촉구를 했다.ⓒ김철수 기자

 
남재준 파면 요구 소중한 촛불

5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총체적 대선개입 및 박근혜정부의 수사방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제39차 범국민대회 촛불집회를 열고 남재준 국정원장의 파면, 특검을 촉구를 했다.ⓒ김철수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독]표창원 “앞으로 정치 문제는 입 닫고 살겠다”

이명희 기자 minsu@kyunghyang.com

 

“앞으로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편들기’를 하지 않고, ‘사회적 정의’와 관련되지 않은 정치문제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겠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48)가 “앞으로 정치 관련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고정 출연하던 방송과 신문 칼럼 기고 등을 모두 중단하며 정치권으로 갈 뜻을 내비쳤던 것에서 진로를 전면 수정한 것이다.

그는 범죄분석전문가로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최근 자신의 이름을 내건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를 설립해 ‘표창원 소장’이 됐다.

그는 또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언제든 함께 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방송 출연을 자주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방송인으로서 시사 프로그램만 고집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미 몇몇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 정지윤기자

 



표 소장은 지난 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적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했다.

그는 정치 관련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 변화에 대해 “객관적 사실이 근거가 되지도 않고, 차선의 선택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 정치의 속성이다. 나는 정치를 직업으로 사는 삶과 맞지 않는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제 내가 할 역할은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한다”며 “나도 생활인이고, 가족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대 교수직을 그만 둔 뒤의 1년 3개월에 대해서는 “사회 현안에 휩쓸리면서도 ‘살아남자’, ‘버티자’고 하는 것이 있었다”며 “시민들과 함께 하면서 나도 치유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라는 존재가 내 뜻과 상관 없이 하나의 스피커가 된 듯 하다. 무엇인가를 기대하시는 분들도 있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지난 1년 3개월 동안 나 개인에게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 그냥 갈데까지 달려보자는 생각이었다. 대통령이든 동료든 잘못된 점은 다 지적하고 문제제기를 했다”며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 그만한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연구소를 만들어서 그 일을 하다보면 내가 하는 말들도 공적인 영역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표 소장은 지난 1일 자신의 범죄과학연구소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하지만 아직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태다. 그는 “나를 더 이상 정치에 연루시키지 말아달라는 강력한 의사 표시로 연구소를 차렸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10월 방송과 신문 활동을 그만 둘 때의 상황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몇 군데서 영입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번 6·4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경기 용인시장 출마를 권유하면서 그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표 소장은 “특정 지역의 교육감 출마 제안도 있었고, 선거에 출마하시는 분들의 ‘도와달라’는 요청도 있었다”며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입제안을 받고 정계 진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표 소장은 국내 경찰학 박사 1호이자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로 활약해온 범죄심리 전문가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고정출연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프로파일링협회 회원자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는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적극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힌 뒤 “경찰대의 정치적 중립성에 부당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사직한다”며 사표를 냈다. 이후 진보 진영에서는 박수를, 보수 진영에서는 ‘종북’, ‘좌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대선 후 광주로 내려가 시민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서울 강남과 광화문 등에서 시민들과 포옹하는 ‘프리허그’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그는 “프리허그 퍼포먼스 이후 한국을 떠날 결심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진지하게 이민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위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대한민국을 떠나라”고 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서 “오기가 발동해” 이민을 안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의견 개진을 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왔다. 최근 피부과 전문의 함익병씨의 ‘독재가 뭐가 나쁘냐’,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등의 인터뷰에 대해 “의대에서는 기본적인 윤리나 철학 전혀 안 가르치나? 아니면 이 사람만 이런 건가? 21세기 대한민국 의사 맞나?”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솔직히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나는 성소수자를 지지한다. 이 부분은 굳이 나눈다면 진보쪽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관습을 따르는 정도를 보면 보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 소장은 얼마 전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탐정특집편’에 출연한 것이 논란이 될 만큼 보수진영의 공격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무한도전> 팀 자체를 비난했고, “MBC 사장을 자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표 소장은 “이런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일 때문에 정치권과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경찰대 교수직을 그만두는 계기가 됐던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사법적인 영역만 남았다”며 “이제 내 역할도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잘못된 부분이 있어 문제제기를 했고, 객관적인 사실은 다 드러났다. 나머지는 역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당시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한다면 2012년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 개혁 방향에 대해서는 “해체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정보원은 말 그대로 정보 기능에 중심을 두는 것이 맞다고 본다. 다만, 정치적 이용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대문에 해외정보 파트와 국내정보 파트를 분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이 합친 것에 대해서는 “참신하고 희망적”이라고 평가했다. “거대 여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민주당과 친노, 안철수 신당 등 야권이 분열돼서는 안되는데 그 중심에 서있던 분들이 합친다고 하니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는 의미”라고 했다. 하지만 통합 신당의 전망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통합 자체에 대한 발언이 나의 정치적 발언의 마지막이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앞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에도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을 글을 올리지 않겠다고 했다.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 정지윤기자



그는 신문 칼럼의 고정 독자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파워라이터’이면서 방송인이기도 하다. 그는 앞으로도 글쓰기와 방송출연은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 원천으로 반성문을 들었다. “학창 시절 말썽을 많이 피워 반성문을 자주 쓰다보니 이야기거리를 자꾸 생각해내야 하고, 그러다보니 책도 많이 잃으면서 문장력이 많이 늘었다”며 웃었다. 방송인으로서는 시사 프로그램만 고집하지 않고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언제든 함께 할 준비가 돼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생인 딸과 초등학교 6학년생인 아들을 둔 아빠다. 한국의 보통 중년 남성들과 달리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고 한다. 술·담배는 하지 않는다. 등산 외에는 운동을 하지 않는 그의 아들은 축구를 하고 있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타고난 재능이 없는데 축구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이 있다”며 “본인이 좋아하니까 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만든 그의 연구소는 국내 최초의 민간 범죄과학연구소다. 그는 “이곳에서 미해결 사건들을 처리하고, 전에 국가를 위해서 했던 일들을 민간 영역으로 넓혀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CSI체험 프로그램도 만들고, 각종 범죄 및 추리와 관련한 문화 콘텐츠도 만들 생각이다. 그는 “프로파일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싶다”고 했다. 경찰과 검찰이 자체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민간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국 등이 그렇게 하고 있다.

표 소장은 “그동안의 것을 모두 잊어달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건 지고 가겠다. 그동안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행복하고 감사했다”며 “앞으로 혹 저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좌지우지되지는 않겠다. 저한테 ‘변했다’고 하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글로벌 포스트, 조직적 대선 조작 “가짜 대통령” 선출 논란 보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재준 그대로 있는 한 지방선거 하나마나"

 

[인터뷰] 8일째 단식 중인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14.04.05 21:27l최종 업데이트 14.04.05 21:27l

 

 

기사 관련 사진
▲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8일째 단식 중인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그는 5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나 오는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진행되는 10만 국민 촛불 행진 참여를 호소했다.
ⓒ 강민수

관련사진보기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이 국회에 많이 가 있죠. 그래서 누군가 말을 하죠. 다들 (정치권에) 가는데 당신은 안 가냐고. 저는 바빠서 갈 여유가 없다고 말해요. 왜 바쁘냐고요? 우리 사회 민주화가 덜 됐잖아요."

또 단식이다. 몇 번째인지 가물가물하다. 마지막이 지난 2012년 한미-FTA 발효 반대 단식이었다. 더 이상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다시 거리에서 단식 중이다. 이번에는 민주주의 문제다. 그는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상 규명이 부족하고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단식의 이유였다. 

4·19 혁명 54주년, 부정선거 규탄 10만 국민 행진 벌인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앞 농성장에서 8일째 단식 중인 박석운(60)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를 만났다. 농성장은 지난달 29일 '국정원 시국회의'가 ▲ 남재준 국정원장, 황교안 법무부장관, 김관진 국방부장관 파면 ▲ 국정원의 대선 개입 증거 조작 특검을 요구하기 위해 설치됐다. 

농성장을 세우면서 그는 백은종 '서울의소리' 대표와 단식을 시작했다. 3일 후 무송스님이 단식에 동참해 세 사람이 나란히 농성장에 앉게 됐다. 지난해 6월 28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 시국회의는 주말 촛불집회를 주관하는 등 국정원 대선 개입 책임자 처벌과 특검 요구 등의 활동을 벌여 왔다. 

농성장이 들어선 이후 경찰과 충돌도 있었다. 비를 막기 위해 비닐을 씌웠더니 경찰이 불법 설치물이라며 철거해간 것이다. 집회를 신고한 합법 농성이지만 경찰 개입으로 단식이 쉽지 않은 상태다. (관련기사: 경찰의 시국회의 집회탄압, 도를 넘었다

그가 쓴 몸자보에는 앞뒤로 '박근혜 OUT', '대선부정 특검실시'가 적혀 있었다. 그들 뒤로는 청계광장 소라탑이 솟아 있다. 20m 높이의 탑은 이름처럼 꼬여 있었다. 풀리지 않는 국정원 대선 개입을 보는 듯 했다. 

이날 농성장에 관심을 가져주는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한 시민은 모금함에 돈을 넣었다. 그는 "비 올 때는 우산도 주고 덮으라고 담요도 준 시민도 있었다"며 "한 시민은 김밥을 싸 왔는데 단식 한다니 다시 물을 사왔다,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는 한 분, 한 분의 시민 참여가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시민의 힘을 모으기 위해 대규모 집회가 준비된다. 그가 속한 '국정원 시국회의'는 오는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AGAIN 4·19, 10만 국민 촛불행진'을 추진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국가기관 대선 개입 사건에 시민이 불을 붙이기 위해서다.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이 거리로 나와 항의하면서 촉발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하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단식 때문인지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또렷했다. "절박한 심정"이라며 그는 국민 행진 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관건 부정 선거를 심판한 것이 4·19혁명"이라며 "국정원 대선 개입을 심판하기 위해 혁명 54주년에 이제는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소를 멈추지 않았다. 

"국민의 선거권을 도둑질 한 것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 방치하게 되면 한국 민주주의는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4·19 혁명의 정신을 54년 만에 재현해 봅시다."

"안철수 대표 면담 요청, 박 대통령 눈도 깜짝 안 할 것"
 
기사 관련 사진
▲ '진실은 성역없이...' 박석운 진보연대 공동대표가 지난2월 13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국정원 시국회의 주최로 열린 '국가기관 대선개입 특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 양태훈

관련사진보기


야당을 향해서 그는 쓴소리를 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낭만적 낙관론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또 그럴까'하는 '나이브'한 생각은 더 이상 안 된다"며 "(국정원 사건) 특검 관철과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내걸고 박근혜 정권과 전면전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안철수 대표가 청와대 가서 면담 신청한다고 해도 박 대통령은 눈도 깜짝 안 할 것"이라며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국회에서 집단 단식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야당과는 함께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어깨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희망만으로는 세상이 안 바뀝니다. 다르지만 '따로, 또 함께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갈래의 물을 모아서 큰 강물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다로 갈 수 있습니다."

그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우려했다.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와 같은 관건 부정선거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달라지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남재준·황교안·김관진이 그대로 있고 국군 사이버 사령부도 그대로다"며 "그들이 처벌 받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지방선거는 해보나 마나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그런 우려가 없기를 박 대통령에게 당부했다. 당부는 남재준·황교안·김관진 장관을 파면하고 특검을 수용해달라는 요구였다. 

"박 대통령은 선거 3일 앞두고 토론회에서 말했어요. 국정원 댓글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니 문재인 후보가 책임져야 한다고요. 당시는 그랬지만 이후, 검찰 수사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밝혀졌습니다. 이제는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때입니다."

그는 오는 19일까지 단식을 이어갈 예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주민보 폐간 저지 성명 모음]

 
 
범대위. 양심수후원회. 개인성명(해외에서도 속속 성명)
 
자주민보 편집국 
기사입력: 2014/04/05 [22:53]  최종편집: ⓒ 자주민보
 
 


자주민보 폐간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는 자주민보 폐간을 시도하는 현 정부와 새누리당, 서울시를 규탄하는 성명을 단체는 물론 전국민 누구나 한줄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자주민보 폐간을 저지하고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내용의 글이나 구호를 형식에 관계 없이 보내주면 자주민보에 게재한다.


이름은 본명이이나 가명, 별명 등을 사용해도 무관하며 지역은 광역 단위로 기입하면 된다.

예: 자주 평화 통일의 선봉 자주민보의 붓대를 꺽으려는 자들은 매국 배족자이다. (임꺽정
 전북) 보낼 곳(leejs3131@naver.com)
 
<양심수 후원회>자주민보폐간음모 중단하고 언론자유 보장하라
 
불법으로 대통령자리를 찬탈한 박근혜와 수구보수세력들이 사실보도와 진실보도로 일관해 온 인터넷신문 자주민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2013년 11월 4일 서울시 심의위원들이 자주민보를 폐간시키기 위한 행정심판청구를 결정한데 이어 2014년 4월 23일에는 인천지방법원에서 행정심판소송이 시작된다는 것을 자주민보 이정섭 대표에게 알려왔다. 
  
보수단체들의 압박을 못이긴 서울시는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자주민보가 반복적으로 북에 대해 동조하고 찬양하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으며 북체제를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주민보 폐간 시도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세력과 언론은 모조리 없애겠다는 독재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저들이 입버릇처럼 내뱉고 있는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에도 어긋나며 지난 2월 14일 남북의 고위급이 합의한 상호비방중단과 이후 이산가족상봉 등으로 풀려가는 남북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통일시대를 개척하는 방향타가 되고 조타수’가 되겠다는 자주민보는 국제정세 및 한반도 정세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며,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북에 대한 심층적 정보를 제공하고 남북경제협력 관련 정보, 통일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자주민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였으며 2000년 8.15행사 등 다수의 방북취재를 통해 행사보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북녘 사회에 대한 진실된 모습을 전하고자 노력했고 중국 항일유적지를 취재해 잘 알려지지 않은 만주지역의 항일운동도 보도했다. 더불어 매향리 사격장, 백운산 등 미군기지 피해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미군들의 범죄 현장을 낱낱이 보도했다.
  
남북정상이 합의한 통일의 이정표인 6.15선언과 10.4 평화번영선언을 이행하는데 앞장 서 온 통일애국언론인 자주민보에 대한 폐간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언론사 폐간은 만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민주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각계각층의 단체와 개인들과 함께 자주민보 폐간 시도 음모를 분쇄할 것이며 이를 통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고 이땅의 참된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을 앞당길 것이다.
  
2014년 4월 3일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성명) 자주민보에 대한 언론탄압을 중단하라

서울시는 남과 북의 2.14 합의를 기준으로 언론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남과 북은 올 해 2월 14일 고위급회담에서 상호비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최근 이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남북관계에 다시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론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자주민보는 보수단체와 새누리당의 압박에 못이겨 서울시(시장 박원순)에서 제기한 등록취소 행정심판소송을 받고 있다. 인천지법은 4월 23일 첫 재판에 대한 공소장을 자주민보 이정섭 대표에게 발송했다. 

서울시의 소송제기 이유는 반복적으로 북에 동조, 찬양하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북의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북 체제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합뉴스를 비롯한 보수 진보 언론 할 것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통일부 역시 북의 보도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북 체제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 체제에 대한 입장 문제는 독자들이 충분이 판달 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객관적인 사실 보도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자주민보는 4월 1일 관련기사에서 ‘최근 기사 삭제 명령을 내린 근거, 재판에서 문제시 되었던 내용 등을 참고로 최대한 현행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한호석, 김상일 교수와 같은 기고가들은 자주민보 외에도 다른 진보언론에도 글을 연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이런 기고가들의 글을 모두 문제시 하는 것은 보수단체에서 비난하고 있는 자주민보에 대한 찍어 내기식 언론탄압이 아닌가. 일부 극우보수단체들과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의 눈치가 보여 서울시가 자주민보에 대한 소송을 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상호 비방에 의해 남과 북 사이 긴장이 격화되고 더 나아가 전쟁위기도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서울시는 남북정상이 합의한 자주평화통일의 이정표인 6.15와 10.4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 온 자주민보에 대한 행정심판소송을 취하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나서길 바란다.

또한 통일은 대박이라며 거의 매일 같이 통일론을 들먹이는 박근혜 정부는 자주통일의 기치를 높이들고 민족화해와 협력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주민보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자주민보폐간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는 국내외 양심적 언론 단체와 인권단체와 굳게 손잡고 표현의자유와 언론의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매진할 것을 천명한다.

만일 박근혜 정부와 서울시가 우리의 요구를 귓등으로 들어 넘긴다면 언론과 표현의 자유, 자주와 평화 민족통일을 바라는 8천만 겨레와 세계 진보적 양심의 규탄과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4년 4월 2일

자주민보폐간범국민대책위원회

<개인 한 줄 성명>

1. 자주독립, 자주, 민주, 자주평화 자주통일의 참언론 자주민보 발전 건승!!(경기도 조영건)

2. 언론의 자유, 표현의자유 침해에 맞서 적극대응하자!!! (서울 권선생)

3. 평화통일을앞당기는 자주민보 탄압은 심각한 불법이다. 자주민보 탄압 중단하라(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 일동)

4. 자주. 평화 통일언론이 불법이면 사대, 전쟁, 분단 부추기는 것이 정당하단 말니냐? 겉으로는 통일 안으로는 반민족 반통일 행동으로 나아가는 박근혜 정부와 보수세력의 압력에 못이겨 자주민보 등록취소심판 청구한 박원순을 규탄한다!(김아영 경기도)

5. 합법적 언론 탄압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언론탄압 자행하는 박근혜 박원순은 각성하라.(강태영 인천)  

6. 내가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자주민보와 같은 민족통일언론을 탄압하는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부끄러웠다(프란치스코 리 뉴질랜드)
 
7.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7.4공동성명과 우리민족끼리 정신인 6.15 10.4 정신에 입각한 자주통일 언론 자주민보 폐간은 민족에 대한 엄중한 범죄다. 자주민보 폐간 음모 행동을 멈춰라!(이하나 경기)

8. 시각이 다른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자주민보는 또 하나의 다른 창입니다.(이홍우 인천)


9. 자주민보 폐간은 조국통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주통일 가로막는 미군은 가라(이성원 서울)


10. 자주민보 폐간은 민주주의의 포기입니다.(홍휘은 서울)


11.자주민보 지켜내지 못하면 통일의 길도 위태로워 집니다. (강선일 서울)


  

12. 우리는 무려 100년 이상을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다. 

남북이 하나되어 힘을 합쳐 외세에 맞선다면 그 어떤 국가도 감히 한민족에게 대들 수 없다. 

자주민보는 이러한 위대한 일을 해왔던 것인데 이를 탄압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사랑한다 자주민보여! (아리랑)

  

13. 자주. 평화 통일언론이 불법이면 사대, 전쟁, 분단 부추기는 것이 정상적인 언론인가? 

겉으로는 통일 안으로는 반민족 반통일 행동으로 나아가는 사대 매국노들의 은신처 새누리 박근혜 일당과 그에 세뇌되어 수족노릇하는 보수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주민보 등록취소심판 청구한 서울시도 한심스럽구나! (손정규)

  

14.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민족 통일위하여 전진 자주민보 만세 만세 만만세(정명철)

  

15. 같은 민족간의 평화와 화해, 번영을 성원하려 오랜 기간 힘을 써온 자주민보를 폐간하려

저의가 무엇인가. 결국 민족간의 반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안위와 영화를 노리려는 부류들의 의도적 작태가 아닌가. 자주민보를 폐간하겠다는 것은 결국 한국이란 나라도 오랜 역사의 한민족도 모두 폐국/폐족 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아니다. 자주민보 폐간 조치를 중단하라!

(갯가용/미국에서)

  

16. 참 자주 언론이 없는 우리나라에 자부민보는 우리에게 횃불이었습니다. 사대매국세력에게 빼앗긴 우리 자주 언론이 가야 할 바를 명확히 제시해주는 자주민보 강제폐간을 반대 합니다^^ (유병서)

  

17. 언론의 폐간은 독자의 권리다. 자주민보 폐간을 중지하라!!(조광성)

  

18. 이 땅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어떠한 경우에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자주민보 폐간 반대!!! 나의 iPhone에서 보냄(고광칠)

  

19, 물론 절대로 안 될 이야기다.현재의 전반적 언론은 모든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마치 저들의 거짓 정보통해 우롱과 조롱 받는느낌에,매번 분노가 끓어 몸살이 날 지경 이다. 국민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이 불법 매채가 되는 알 수없는 세상,,,, 진실함은 세상무엇으로도 감출수 없다는 진리를 자주민보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질 것이리라~~~~!(홍우표)

  

20. 진실보도 자주민보 사수하자 (독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北, 南 미사일발사실험 비난...北 로켓 훈련 비난할 체면 있나


<北전략군 대변인 기자 문답> 미국식 기준·행동방식 재평가 주장...무인기 北과 무관 강력 암시 주목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4.06  12:17:02
트위터 페이스북

북한은 한국군이 최근 비공개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진행한 후 10여일이 지나서야 언론에 공개한 사실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로켓발사와 같은 자위적 억제력 강화 조치를 함부로 걸고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전략군 대변인은 5일 <조선인민군신문>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조선반도에서 벌어진 우리의 로켓사격 훈련과 괴뢰들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두고 어떤 입장을 보이는 가에 따라 미국식 기준과 행동방식을 다시 평가할 수 있게 됐다"며, "남조선 괴뢰들은 이제는 입이 둘이라도 우리의 정정당당한 로켓발사와 같은 자위권 행사에 대하여 더 이상 줴쳐댈 체면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5일 보도했다.

앞서 대변인은 "남조선 괴뢰들이 지난 3월 23일 충청남도 태안의 안흥사격장에서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이라는 것을 비공개리에 진행하고 그때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언론에 공개"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전략군 화력단위들의 정상적인 로켓발사훈련이 지난 2월 하순부터 3월 말까지 사이에 성과적으로 진행됐다"는 사실을 대비시켰다.

이어서 대변인은 "그때 남조선 괴뢰들은 마치 우리가 발사한 로켓탄들이 서울 한복판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미국 상전과 함께 청을 돋구며 못되게 놀아댔"을 뿐만 아니라 "'유엔결의위반'이요, '도발'이요 하고 떠들어대면서 우리에 대한 새로운 '제재'까지 몰아오려고 제일 악질적으로 놀아댄 것이 바로 남조선 괴뢰들이었다"며 몰아부쳤다.

또 "요즘 남조선에서는 우리 군대의 정상적인 포병 해상사격훈련에 대한 괴뢰들의 초라한 군사적 대응을 놓고 비난의 목소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여기에 설상가상이라고 난데없는 무인기 사건까지 발생하여 가뜩이나 땅바닥으로 떨어진 괴뢰들의 체면을 더 구겨박아 놓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민끝에 내놓은 것이 비공개리에 진행한 미사일 발사시험을 서둘러 공개하되 그것도 대단한 것으로, '크게 성공한 것'으로 광고하여 높아지는 비난과 야유, 조소를 눌러보자고 획책한 것"이라고 대변인은 풀이했다.

대변인은 특히 무인기와 관련해서는 "정체불명의 무인기가 청와대와 경복궁 일대를 포함한 서울 도심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얻어맞고 있는 백령도 상공까지 누비고 유유히 비행했다며 '수도권 방공망이 통채로 뚫린 셈이다', 그처럼 든든하다고 허세를 부리던 '안보태세의 허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괴뢰당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고 표현해 자신들이 이와 무관함을 강하게 시사해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한편, <연합뉴스>는 4일 충남 태안의 국방과학연구소 안흥시험장에서 지난달 23일 500㎞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했으며 이 미사일을 내년에 실전 배치할 계획이라고 군 관계자를 인용해 밝힌 바 있다.

희떠운 미싸일발사시험소동으로 하여 남조선괴뢰들은 더 큰 수치와 망신만 당하게 될것이다
--조선인민군 전략군 대변인 기자의 질문에 대답-- (전문)


남조선괴뢰들이 지난 3월 23일 충청남도 태안의 안흥사격장에서 탄도미싸일발사시험이라는것을 비공개리에 진행하였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10여일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남조선괴뢰들은 지금까지 숨기고있던 발사시험을 느닷없이 언론에 공개하여 뭇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고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인민군 전략군 대변인은 4월 5일 조선인민군신문사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지금 남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괴뢰들이 외세의 기술을 전수하여 사거리를 500km로 늘인 탄도미싸일발사시험에 성공하였다고 요란스럽게 광고하고있다.
그러면서 이 탄도미싸일들을 다음해에 실전배비하게 되면 함경북도를 제외한 공화국북반부의 전 지역을 타격권안에 넣게 될수 있다고 공개해대고있다.
이제 겨우 500km까지 날아가는 탄도미싸일발사시험이나 한번 해보고 큰일이나 친것처럼 희떱게 놀아대는 괴뢰들의 꼬락서니도 가관이고 지금까지 숨기고있던 발사시험을 오늘에 와서 공개한 속내도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희극이 아닐수 없다.
이미 알려진바와 같이 우리 전략군 화력단위들의 정상적인 로케트발사훈련이 지난 2월하순부터 3월말까지 사이에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그때 남조선괴뢰들은 마치 우리가 발사한 로케트탄들이 서울한복판에 떨어지기라도 한것처럼 미국상전과 함께 청을 돋구며 못되게 놀아댔다.
《유엔결의위반》이요,《도발》이요 하고 떠들어대면서 우리에 대한 새로운 《제재》까지 몰아오려고 제일 악질적으로 놀아댄것이 바로 남조선괴뢰들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미국상전의 비호밑에 남조선괴뢰들이 뒤에 돌아앉아서는 도적고양이처럼 미싸일발사시험을 몰래 벌려놓았던것이다.
그러면 남조선괴뢰들이 무엇때문에 지금에 와서 발사시험소식을 그것도 《크게 성공한것처럼》 여론에 공개하고 확산시키고있는가 하는것이다.
요즘 남조선에서는 우리 군대의 정상적인 포병해상사격훈련에 대한 괴뢰들의 초라한 군사적대응을 놓고 비난의 목소리가 끝없이 쏟아져나오고있다.
일을 다 치른 다음에야 북을 치는 《뒤 북대응》,상대가 보지도 못하는 뒤골목에서 해대는 《뒤 주먹질》,앞에서 얻어맞고 《두덜거리는 식의 한심한 대응》이라고 하면서 비굴하고 무능한 오합지졸의 괴뢰군무리들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조소는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여기에 설상가상이라고 난데없는 무인기사건까지 발생하여 가뜩이나 땅바닥으로 떨어진 괴뢰들의 체면을 더 구겨박아놓았다.
정체불명의 무인기가 청와대와 경복궁일대를 포함한 서울도심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얻어맞고있는 백령도상공까지 누비고 유유히 비행했다며 《수도권방공망이 통채로 뚫린셈이다.》,그처럼 든든하다고 허세를 부리던 《안보태세의 허점이 적라라하게 드러났다.》고 괴뢰당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욱더 높아지고있다.
서남전선 열점수역에서 진행된 포병해상사격훈련과 무인기사건으로 불판우에 오른 개미신세가 된 괴뢰당국으로서는 사태를 수습할 방도가 절실하였던것이다.
그래서 고민끝에 내놓은것이 비공개리에 진행한 미싸일발사시험을 서둘러 공개하되 그것도 대단한것으로,《크게 성공한것》으로 광고하여 높아지는 비난과 야유,조소를 눌러보자고 획책한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그랑수를 부려도 그 처지가 달라질수 없게 되였으며 오히려 제 수치와 망신만 초래하게 되였다.
사람들은 남조선괴뢰들의 미싸일발사시험을 공개한데 대해 미국은 과연 어떻게 나오겠는지 궁금해하고있다.
조선반도에서 벌어진 우리의 로케트사격훈련과 괴뢰들의 미싸일시험발사를 두고 어떤 립장을 보이는가에 따라 미국식기준과 행동방식을 다시 평가할수 있게 되였기때문이다.
세상에 공개된바와 같이 미국식기준이란 저들에게 추종하고 맹종하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불망종짓을 저지르든지 《정의》로 둔갑시키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기준 아닌 기준이다.
미국식행동방식 역시 남의 나라 땅에 기여들어 평양강점을 노린 훈련을 강행하면서도 그것을 《년례적》이요,《방어적》이라고 강변하는 행동방식,자주적인 나라가 자기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벌리는 자위권행사에 대해서도 무작정 《도발》과 《위협》으로 매도하고 압력과 《제재》를 가하다못해 군사적침공까지 서슴지 않고 단행하는 날강도적이며 파렴치한 행동방식이다.
제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남조선괴뢰들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미국의 날강도적인 이 기준과 파렴치한 행동방식에 무작정 추종하여 상전이 하라는대로 못되게 놀아대고있는것이다.
남조선괴뢰들은 이제는 입이 둘이라도 우리의 정정당당한 로케트발사와 같은 자위권행사에 대하여 더이상 줴쳐댈 체면이 없을것이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애당초 전시작전권도 없이 상전의 한갖 전쟁사냥개에 불과한 남조선괴뢰들의 처사에 대하여 크게 눈여겨본적이 없다.
한것은 아무리 날쳐도 개는 역시 개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동족대결에 환장이 되여 제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헤덤비고있는 저들의 처지가 참으로 가련하게 되여가고있다는것을 남조선괴뢰들은 똑바로 알아야 한다.
희떠운 미싸일발사시험소동으로 하여 더 큰 수치와 망신만이 차례지게 될것이다.
미국도 이제는 우리의 자위적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에 대하여 함부로 걸고들지 말아야 한다.

<출처-조선중앙통신 2014.4.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3>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05 10:39:42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
[학살, 다섯 번째 마당] 일본도로 국민 목 친 학살자가 이순신과 동급?
[학살, 여섯 번째 마당] "좌익이 영광에서 5만6000명 학살? 그건 아니다"
[학살, 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세력은 왜 합동 묘지를 파헤쳐야 했나
[해방·분단, 첫 번째 마당] "일본은 곧 망한다"…그들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해방·분단, 두 번째 마당] 자유는 미국이 준 선물? 그들은 점령군이었다
[해방·분단, 세 번째 마당] 한국 '최고의 혁명가'가 친일파? "극우, 참 비열하다"
[해방·분단, 네 번째 마당] 일본도 차마 못한 그 일 감행한 미국…한국 '폭발'
[해방·분단,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에서 애국자로…역사를 바꾼 신분 세탁
[해방·분단, 여섯 번째 마당] 나라 판 좌익? 김일성 '엉터리 신년사'의 비밀
[해방·분단, 일곱 번째 마당] 12번 테러와 암살도 '정의로운 바보'를 못 꺾었다
[해방·분단, 여덟 번째 마당] 북한, 남측 인사에게 '전쟁 안 하겠다' 다짐?

[해방·분단, 아홉 번째 마당] 한국의 친미는 어쩌다 미국을 들이받았나

[해방·분단, 열 번째 마당] 북한은 왜 전면전의 유혹에 빠져들었나

[해방·분단, 열한 번째 마당] '<지슬> 사람들'이 폭도? "극우, 터무니없다"

[해방·분단, 열두 번째 마당] 박정희 정권은 어쩌다 일본에 퇴짜 맞았나 

[해방·분단, 열세 번째 마당] 두 번 쫓겨난 대통령 띄워 북한 무너뜨린다?

[해방·분단, 열네 번째 마당] 한국은 왜 '쓰레기통'이라는 조롱을 당해야 했나

[해방·분단, 열다섯 번째 마당] 쫓겨난 대통령 덕에 잘사는 한국? "결코 아니다"

[해방·분단, 열여섯 번째 마당] 수준 낮은 한국, 민주주의 능력 없었다? "왜곡"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은 3.15 부정 선거를 몰랐다'고 주장한다.

 

서중석 : 그런 주장은 그 시기에도 있었다. 특히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부 시민까지 '그런 심한 부정 선거를 대통령이 알았다면 가만뒀겠느냐'(는 식이다). 상당히 소시민적인 발상이라고 할까. 황제는 잘못이 없는데 그 밑의 신하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사고하고 연결돼 있는 것 같다. 하여튼 뉴라이트 일각에서 또 그런 주장을 하지 않나 싶다. 사료나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그 시기를 살피는 연구가 드물었기 때문에, 또 그런 연구가 있더라도 그걸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당 간부들이나 장관들, 경찰 최고위 간부들, 이자들은 장면 정권 때도 재판을 받았고 5.16 군부 쿠데타 이후에도 재판을 받았다. (3.15 부정 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 이 사람은 나중에 처형되는데, 이 한 사람을 빼놓고 전부 '난 모른다'고 했다. '어디선가 내려온 명령대로만 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서로 책임을 미뤘다. '우리 책임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 하나 없더라. 그래서 '그래도 최인규가 남자다', 그런 이야기조차 그 시기에 나왔다. '저런 나쁜 놈들이 있느냐. 자기들이 다 저질러놓고도 누구 하나 그걸 인정하지 않고 발뺌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또 이 대통령이 '난 관여한 게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15 마산의거만 없었더라면 모든 게 잘됐을 텐데, 그 사건 때문에 일이 헝클어졌다'. 자유당 간부들이나 경찰 책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3.15 마산의거 후부터 이 대통령이 그저 역정을 부르르 낸다든가 신경질적인 말씀을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국무회의록이나 여러 가지 글을 보면 꽤 나온다. 그러면서도 역시 노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너희들 잘못'이라는 식으로 장관이나 자유당 간부들 쪽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발언들도 나온다. 3.15 의거 이후 사태가 달라지니 서로 태도도 좀 차이가 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3.15 부정 선거를 몰랐다? 삼척동자도 다 알던 일이다. 선거에 임한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꼬맹이들조차 이 시기에 어른들이 하는 짓, 그 분위기를 보면 알 수가 있었다. 또 신문에 부정 선거 이야기가 매일, 그것도 조그맣게 나는 게 아니라 크게 났다.

 

프레시안 : 주요 일간지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도했나.

 

서중석 : <동아일보>에는 여러 면에 걸쳐 나올 때도 많았다. 아주 큰 사건으로 계속 뽑아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주요 일간지가 다 그랬다. 4대 일간지 중에서 <경향신문>은 폐간됐으니까 빼고 3대 일간지(<동아>, <한국>, <조선>)를 보면 '하루가 멀다' 정도가 아니(라 부정 선거 기사가 계속 나왔)다. (정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서울신문사는 4월혁명 때 불길에 휩싸였다. 이와 달리, <경향신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다음 날인 1960년 4월 27일 복간됐다. <편집자>)

 

'이 대통령은 국내 신문은 안 본다', 이런 말까지 일부에서는 하지만, 아무리 신문을 안 본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한 상황에서 하루치만 신문을 봐도 '이럴 수가 있어?' 할 정도(였는데 그걸 몰랐다?). 특히 1960년 3월 3일자에,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선거 부정을 저지르려고 하는가를 민주당에서 폭로한 게 있다. 이것을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는 몇 면에 걸쳐서, 지면을 거의 이걸로 메우다시피 할 정도로 상세하게 썼다. 이렇게 부정 선거의 구체적인 내용이 자세하게, 또 그렇게 크게 났는데 그것도 몰랐다?

 

재미난 것은 당시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유당 내각에서 대단한 관심을 보였는데, 최인규가 (민주당 주장에 대해)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는 했지만 고소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과 다른 주장을, 그것도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했다면 민주당을 고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당에서 거짓말을 한 거라면) 나쁜 짓을 해도 보통 나쁜 짓을 한 게 아닌데.

 

또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을 개정한 제일 큰 이유가 언론 탄압이었다. '허위 사실' 보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개정안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언론과 민주당을 다 고소해야 하는 건데, 최인규는 '사실이 아니다. 그건 명백히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고소는 안 했다. 모든 게 탄로 났다는 걸 안 거다. 실제로 3.15 부정 선거는 3월 3일자에 나온 것하고 대동소이하다. 거의 똑같이 치러진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2월 24일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2.4파동으로 불린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의 주요 표적은 언론과 혁신계였다. 언론에 물린 대표적인 재갈은, 사실을 왜곡해 보도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이른바 '인심 혹란죄'였다. '인심 혹란죄'는 4월혁명 후 폐지된다. <편집자>)

 

그리고 그전에 이 대통령이 조기 선거를 치르자고 하면서 신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도 신문을 안 봤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신문에 부정 선거 이야기가 그렇게 났는데 이 대통령은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봤다면, 그 신문을 가만두면 안 되는 거였다. 허위 사실을 보도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대통령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승만을 얕잡아보지 말라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언론이 아니라 외신을 중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은 외신을 중요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때는 부정 선거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외신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아주 구체적인 내용까지 보도했다. 그런데도 모른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도대체가 국내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사안을 모른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하겠다(는 건 말이 되는 건가)? 그런 분이 계속 대통령을 하겠다며 후보로 나오고 자유당은 그분을 꼭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한 건데,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또 뉴라이트 일각에서 그런 사람을 훌륭한 분이라고 한다면, 그건 문제 있는 것 아닌가. 이승만 대통령이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여기는 건, 이 대통령을 너무 얕잡아보는 거다. 그런 분이 아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다른 건 몰라도 개표 결과는 봤을 것 아닌가. 그 결과를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대통령이 단일 후보이기 때문에 88퍼센트 넘게 득표했다? 이건 그럴싸하기도 하다. 문제는 부통령이다.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9퍼센트, 833만 표나 얻고 현직 부통령이던 민주당 후보 장면은 184만 표밖에 못 얻은 걸로 돼 있다. 아무리 천치 바보라고 하더라도 이기붕과 장면의 표가 이렇게 큰 차이가 난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겠나.

 

더더군다나 서울에서 이기붕이 무려 50만 표 넘게 차지하고 장면은 37만 표밖에 못 얻은 걸로 돼 있다. 그런데 1956년 선거 때는 자유당이 부정 선거를 많이 저질렀어도 장면과 이기붕의 전체 표차는 21만 표였다. 장면 401만 표, 이기붕 380만 표로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결과 발표로만 보면 그렇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서울에서 어땠느냐. 장면이 45만 표, 이기붕이 9만 표를 얻은 걸로 돼 있다. (이기붕은 장면의) 5분의 1밖에 못 얻은 거다.

 

그렇게 서울에서는 이기붕이든 이승만이든 인기가 없었다. 1956년 선거 이후에 자유당과 이승만, 이기붕에 대한 원성이 더 높아졌다. 무능이 더 입증됐고. 이건 세상이 다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기붕이 79퍼센트를 얻었다? 이런 걸 믿는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가 있었다고 하면 이건 정말 우습지 않나. 한 50만 표나 30만 표 차이라고 하면 애교로 받아들일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은 개표 결과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여기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얘기를 한 게 나오지를 않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보통 '틀림없이 누가 당선됐다' 하면 당선 인사를 하지 않나. 이 선거에선 3월 15일 밤늦게 이미 이승만, 이기붕 후보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식으로 발표됐다. 빠르면 그때 당선 인사 비슷한 걸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적어도 3월 16일에는 모든 게 판명된 걸로 발표된다. 그러면 '이렇게 나를 찍어준 사람이 많아서 감격했고 고맙다'든가 하는 당선 인사를 바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양반들, 이승만 후보건 이기붕 후보건 너무 미안했던 것 같다. 내가 신문을 열심히 찾아보니까 3월 19일에야 이승만 대통령 후보의 당선 인사가 나온다. 이것도 앞부분은 3.15 마산의거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마산에서 일어난 난동에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앞장세워", 이건 민주당이 그랬다는 뜻 아니겠나. "두 번 다시 이러한 난동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며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고 으름장을 딱 놨다. 이렇게 3.15 의거를 난동으로 딱 규정하고 나서 끄트머리에 간단한 당선 인사를 몇 마디 했다. 이럴 수 없는 것 아닌가. 늦었더라도 당선 인사를 맨 앞부분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기붕은 더 미안했던 것 같다. 3월 20일에야 당선 인사를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국민 저버린 문제 인사들, 감싸는 데 앞장선 대통령

 

프레시안 : 유례를 찾기 어려운 당선 인사다.

 

서중석 : 최인규 장관 경질을 보더라도, 이 대통령이 3.15 부정 선거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니냐고 난 보고 있다. 뭐냐 하면 최인규가 3월 18일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수리는 3월 23일에 됐는데, 그건 뜸을 들이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국회에서 또 여론이 '이 사람을 경질해야 한다'고 거세게 비판해도 그런 것에 아주 초연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4년 말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 쪽에서 야당 의원들 집에 불온 문서를 투입한 적이 있다. '불온 문서 투입 사건', '올가미 사건'으로 불리는 유명한 사건인데. 원용덕이 이걸 시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태도를 알기 위해) 그런 것을 하는 게 헌병 총사령관의 임무다', 이런 식으로 딱 얘기했다. 야당뿐 아니라 온 국민과 언론이 분노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서 원용덕을 끝까지 두둔하는 걸 볼 수 있다. 사실 헌병 총사령관이라는 것도 재미난 직제다. 이승만이 임의로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하여간 법에는 없는 것이다. (이승만이 총애한 정치군인 원용덕은 '올가미 사건' 때 자신과 같은 특수 군인은 정치에 관여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편집자>)

 

또 '낙루(落淚) 장관'으로 유명한 신성모가 국방부 장관일 때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크게 터졌다는 얘기를 전에 하지 않았나. 그때도 누구나 '신성모 장관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아주 강하게, 그 물러나라는 소리를 비판한다. '그럴 수가 있느냐. 외신 같은 데 우리나라를 나쁘게 얘기하는 기사가 나도록 하는 게 잘하는 짓이냐', 이런 식으로 나무라면서 신성모를 상당히 오랫동안 두둔한다. 나중에 하도 문제가 심각해지고 조병옥 내무부 장관 같은 사람들이 그만두겠다고 하고 그전에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는 상황이 되니까 그때서야 경질했지만, 또 (요직인) 주일 대사로 보내지 않나.

 

이익흥 내무부 장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경찰이 깊이 관여한 게 드러나면서 이익흥도 의심을 사게 된다. 그때 야당이 '이익흥이 물러나야 한다'며 불신임 제안을 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이익흥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며 "수만 명 경찰이 있는 중에 그 몇 사람 부하의 잘못으로 내무 장관이 책임을 지면 장관 할 사람이 없을 것", 이렇게 얘기한다.

 

최인규도 내무부 장관 취임 며칠 후에 불신임안이 거론된다. 그렇지만 이 대통령은 최인규를 굳게 신임해서, 물러나게 하지 않는다. 그런 최인규가 3.15 의거 3일 만에 사임서를 썼다는 건 보통 빠른 게 아니다. (마산의거, 그리고 발포로 인한 8명 사망이라는) 엄청난 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국민을 저버리고 대통령에게만 충성한 문제 인사들을 중용한 건 권력욕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은 1960년에 85세였다. 그 당시 85세는 지금 85세와 다르다. 환갑 넘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환갑잔치가 중요하던 때였다. 고희는 정말 적었다. 그런데 고희보다도 훨씬 많은 85세였다. 이 양반은 생일이 3월 26일인데, 당선됐을 때가 만 85세가 될 무렵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인다. 권력에 대한 아주 강한 집착을 보인 거다. 그것은 권력 문제에 예민했다는 걸 얘기해준다.

 

영구 집권과 절대 권력을 추구한 분이다. 그래서 이승만 하면 독재, 독재 그러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박정희하고 차이가 나는 점이 뭐냐 하면, 이승만은 선거를 통해 영구 독재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헌법도 쿠데타로 바꾸는 게 아니라, 형식은 국회를 통해 바꾸는 방식이다. (1954년) 사사오입은 불법이었지만 국회를 이용해 한 것이다. 그렇게 이 양반은, 미국에서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거라는 형식을 중요시했다. 그러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3.15 선거를 치른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이분이 선거에 대해선 굉장히 예민했다는 거다. 역대 선거를 쭉 보면 이분이 선거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는 걸 잘 알 수가 있다.

 

4월 11일에서 13일 사이에 제2차 마산의거 또는 마산 항쟁이 크게 일어난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13일과 15일에 연이어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85세 노인으로서는 초인적인 담화를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하나하나를 굉장히 신경 써서 썼다. 이분은 담화문을 비서 손에만 맡기지 않았다. 비서가 써온 것도 다 뜯어고쳤다고 하지 않나. 담화문을 읽어봐라. 이승만 특유의 문체다. 이렇게까지 4.13 담화, 4.15 담화를 하나하나 본인이 신경 써서 썼다는 건 전 과정에 대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잘 알고 있었느냐, 이런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3.15 부정 선거가 이뤄지는 과정을 보면 누가 총괄 기획한 것인가, 어떤 식으로 이 선거가 배치되고 진행됐는가, 이걸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3.15 부정 선거를 향한 진군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1960년 정부통령 선거는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 통과에서 막이 오른다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 이 대통령의 의사가 얼마만큼 깊이 관여됐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자료는 안 나온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한 제일 큰 이유는 언론을 때려잡기 위해서다. 그래서 얼마 후, 장면 부통령과 깊이 연관돼 있다며 이 대통령이 몹시 나쁘게 봤던 <경향신문>이 정간 처분을 당하고 나중에 폐간으로 가는 걸 볼 수가 있다. 선거와 관련해 더 중요한 문제는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지자체장을 임명하게 한 것이다. 그전에는 선거를 했다. 그래서 대구 같은 데에서는 야당 시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지방자치법이 개정되자 '공무원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는 비판이 많이 나왔다. 그다음부터는 이 대통령 의사에 의해 아주 중요한 사항들이 결정되는 걸 볼 수가 있다.

 

프레시안 : 어떤 결정인가.

 

서중석 : 1959년 3월, 1960년 선거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6인 위원회란 게 국무위원 6명으로 구성된다. 국무위원 중에서 중요한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 대통령이 믿을 만하다고 본 사람들 중심으로 구성된 걸로 보인다. 6인 위원회가 바로 공무원을 선거에 동원한 데, (즉) 국무위원급에서 부정 선거에 총괄적으로 관여한 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나중에 일체 얘기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걸 알기가 쉽지는 않다. (특이한 건) 교통부가 그렇게 중요한 부서가 아니었는데도, 교통부 장관이던 최인규는 들어가 있었다(는 거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6인 위원회 구성 직후) 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이 됐다는 거다. 언론이 깜짝 놀랐다. 내무부 장관이 바뀐다는 설은 알고 있었지만, 최인규가 된다는 건 한 신문도 쓰지 않았다. 최인규가 될 걸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었느냐 하면, 최인규라는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 양반이 교통부 장관 된 지가 몇 달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바로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느냐, 이런 생각이 작용했던 것 같다. 모든 신문이 그다음 날 '임명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식으로 써 놨다. 최인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하는 건 나중에 다 입증된다. '자유당이 마지막에 써먹을 총알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이렇게 애기했다.

 

최인규가 보통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즉각 드러났다. 취임사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 대통령을 절대적으로 떠받들어야 한다, '이 대통령을 모시고 우리 모두 국가 중대사를 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졌다. '위대한 이 대통령을 모실 수 있게끔 공무원들이 선거에 관여하라', 이런 뜻이라는 것이었다. 취임 일성부터 대단한 소리를 한 거다. 그래서 야당이 불신임안을 내는 걸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중요한 다른 일은 어떤 것인가.

 

서중석 : 1959년 6월에 자유당 전당 대회가 있다는 건 자유당 사람들도, 언론도 다 알고 있었다. 당헌 개정 같은 걸 중심으로 당 정책 등을 다가올 선거에 맞춰 고치기 위한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당 대회) 그날 밤과 그다음 날 새벽에 걸쳐 자유당 간부들한테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라'. 후보를 (조기에) 지명하라는 것이었다.

 

이건 1952년, 1956년에 자유당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정하던 방식과도 아주 다르다. 이 명령은 한 사람밖에 내릴 수가 없다. 긴장한 자유당 간부들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거니까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신문이건 자유당 간부들이건 '대체 왜 이렇게 빨리 후보를 정해야 하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선거를 보통 5월에 치른 걸 생각하면, 이것은 얼마나 일찍 정한 것인가. 어째서 이런 지시가 내려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뭣 때문에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데 대해 제대로 추측을 못 하고 있더라. 다만 '참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만 돼 있다.

 

내 생각엔 이 대통령이 아무리 기력이 좋은 분이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더라도 노인네니까 안심이 안 됐던 것 아닌가 싶다. 빨리 후보를 결정하면, 후보가 (당선)되도록 노력해야 할 사람이 있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두 분이 결정됐으니까 이제 자유당이건 행정부건 그전 선거와 달리 두 분이 (모두 당선)되도록 노력해야 하게 된 것이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느닷없는 조기 선거 방침과 야당 대통령 후보의 죽음

 

프레시안 : 6인 위원회, 최인규 내무부 장관 깜짝 기용, 후보 조기 지명에 이어 조기 선거 문제가 불거진다.

 

서중석 : 1959년 12월 21일, 이 대통령이 중요한 담화를 한다. 그 당시엔 이게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잘 몰랐다. 이날 이 대통령은 끝부분에 가서 '선거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까지 선거는 농번기에 치러졌으니까 앞당겨야 한다는 거다. 이른바 조기 선거를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거는 대개 5월에 치러졌다. 1948년 5.10선거, 1950년 5.30선거, 1954년 5.20선거, 1956년 5.15선거, 1958년엔 5.2선거. 다만 1952년 8.5선거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발췌 개헌을 하는데, 발췌 개헌안 통과 자체가 7월 4일에 이뤄졌다. 그래서 이게 헌법상 맞느냐,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다. 대통령 임기가 언제까지냐, 여기까지 논란이 되고 그랬다. 하여튼 '적어도 8.15에는 대통령이 취임해야 한다. 8.15를 넘기면 정말 이상해진다'고 해서, 7월 4일 통과 후 7월 26일까지 입후보를 하도록 했다. 선거 운동 기간을 9일밖에 안 주고, 선거일을 8월 5일로 빨리 잡은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싶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긴급 시기여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 선거는 5월에 치러졌다.

 

지금은 5월 중하순부터 농번기라고 볼 수 있지만, 1960년대까지는 하지 때가 농번기였다. 5월 초엔 중요한 농사일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모내기하고는 상관없는 계절이기 때문에 아무도 농번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걸 농번기라고 한 것이다. 왜 그렇게 선거를 앞당겨서 해야 하느냐, 이것에 대해 지금까지 명확히 해답을 줄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들이 '5월은 농번기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조기 선거 방침을 관철한다.

 

서중석 : 왜 조기 선거를 해야 하는 것인지를 해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왕설래하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던 차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조병옥이 중병에 걸렸다는 보도가 1960년 1월 중순 나온다. 이 양반이 정확히 언제 중병에 걸렸느냐는 건 알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건 얘기를 안 하는 거다. 병원에 가서 치료는 받고 했기 때문에, 알 사람은 알지 않았을까는 싶다. 국내에서 도저치 치료가 안 되자, 이 양반은 1960년 1월 29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 한국인들이 최고 병원으로 쳐준 게 월터 리드 미국 육군 병원이었는데, 거기에 입원했다. 갈 때 이런 애기를 했다. '내 등에 대고 총을 쏘는 비겁한 행위는 제발 말아줬으면 좋겠다.' 뭘 가리키는 것이겠나. 조기 선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조병옥은 "낫는 대로 지체 없이 달려오겠다"는 성명을 내고 떠났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기붕조차 조기 선거를 하더라도 '4월쯤 하지 않겠나', 이렇게 얘기한 게 신문에 꽤 크게 보도되고 그랬다. 그런데 2월 3일, 정부가 3월 15일 선거를 치른다고 공고했다. 야당, 언론 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날씨도 4월이 따뜻해서 선거하기 더 좋은데, 3월 15일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발했다). 어느 신문 사설엔 이런 내용이 실렸다. '3월 15일 당선된 사람이 8월 15일까지 5개월이나 어떻게 기다릴 수 있나. 당선 후 한두 달 또는 두세 달 후에 취임하는 게 원칙인 거지, 어떻게 다섯 달이나 기다리는 식으로 한다는 말이냐'. 거기에는 '야당에서 당선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었다.

 

그렇게 여론이 악화됐는데도 왜 그렇게까지 조기 선거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는데, 그해 2월 15일 조병옥이 미국에서 죽었다. 1956년에도 선거 중간에 (민주당 대선 후보) 신익희가 죽었는데 1960년 선거에서도 죽으니 참 많은 사람이 눈물을 뿌리며 조병옥을 '민주 인사'로서 아쉬워했다. (미군정 때 친일 경찰 중용, 4.3사건 당시 강경 진압 흐름 조성 등 조병옥의 해방 후 행적은 '민주 인사'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 후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적잖은 사람에게 '민주 인사'로 인식된 것 또한 사실이다. <편집자>) 그래서 개사곡이 많이 나왔다. 그때부터 유행이었다. 신익희가 죽었을 때도 개사곡이 나왔지만, 특히 조병옥이 죽고 나서 학생들이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심정으로 개사곡을 많이 부르고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걸 쭉 보면 가장 중요한 지시를 누가 내렸는가를 알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페이스북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미투데이 보내기 요즘 보내기 C로그 보내기 구글 북마크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