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제 1차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동학접주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규합한 제1차봉기가 1893년 말 시작되었다.
1894년 2월 15일 1천여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말목장터에서 봉기해 고부관아를 접수한 뒤 원한의 대상이었던 만석보를 허물고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후임군수로 박원명이 임명되고 안핵사 이용태가 파견되면서 농민군은 해산하고 전봉준은 4월 18일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를 떠났다.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탄압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전봉준은 4월 25일 무장(茂長)에서 손화중과 함께 재봉기(무장 기포)하여 고창과 부안을 거쳐 고부를 점령(고부 점령 4.28)한 뒤 백산으로 이동해 전열을 정비(백산대회 5.1)한 후 전주를 향해 진격했다.
태인점령(5.4)과 부안 점령(5.8) 후 세력을 크게 불린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5.11)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했으며, 이후 차례로 정읍 점령(5.11), 고창 점령(5.12), 무장 점령(5.13), 영광 점령(5.16), 함평 점령(5.20)으로 호남 일대를 장악한 뒤 전주를 향해 북상하다 장성 황룡촌 전투(5.27)를 승리로 이끌며 노령을 넘어 금구 원평에 진을 치고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5.31)했다. 이때 농민군의 숫자는 2~3만명에 달했다.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해 6월 9일 섭지초(葉志超)와 섭사성(聶士成) 휘하 2,500명 군대(북양군)가 아산만에 상륙했으며,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은 조선 정부가 청에 원병을 요청한 사실을 확인한 후 6월 2일 혼성여단 파병을 결의하고 6월 5일 처음으로 설치한 천황 직할 전시대본영은 다음날 임시 편성된 혼성여단 선발대의 출발을 명령했다.
청일의 출병 소식이 들려오자 농민군은 6월 11일 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철수했다.
동학농민군은 이후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추진했으니,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이다.
<청일전쟁인가, 일청한전쟁인가>
일본의 파병은 10년 전인 1885년 4월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텐진조약(天津條約, 청·일 양국의 조선주둔군 동시 철수, 일방이 조선에 파병시 상대방에게 통보하기로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일방적 조치였다.
1884년 자신들이 지원했던 갑신정변이 청 군대에 의해 진압된 후 조선에서 실추된 영향력을 만회할 기회를 노리던 일본이었다.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휘하 혼성여단 선발대 7,000명이 인천에 상륙한 것은 전주화약 다음 날인 6월 12일이었다.
이들은 6월 13일 서울로 진입했으며, 6월 29일 도착한 본대가 용산 만리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둔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은 후 청일 양국에 철군을 요청했으며 철군 요청을 청은 수용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대신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 내정개혁을 제의했으나 이번엔 청이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군은 청군 철수와 조약폐기 요구를 거부한 조선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7월 23일 새벽 경복궁을 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켰으며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구성한 뒤 7월 25일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향해 공격명령을 내렸다.
7월 25일 선전포고 전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 수송선단을 습격(풍도해전)하고 나흘 뒤에는 아산만에 주둔하던 청 육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성환전투) 평양으로 퇴각하는 청군을 향해 8월 1일 공식 선전포고를 했다.
9월 15일 일본군 1만 2,000명이 평양 주둔 청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해 당일 오후 함락시켰으며,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도 승리했다.
이후 일본군 제1군은 10월 말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하여 금주성(錦州城)을 점령하고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
본국에서 증원된 제2군은 단동으로 진격해 뤼순(旅順) 요새와 다렌(大连)을 함락시켰으며, 이 무렵 일본 연합함대는 압록강 입구 해양도 앞바다에서 청의 주력인 북양함대를 상대로 한 해전에서 승리한 뒤 1895년 1월 산동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진격해 북양함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청으로부터 △2억냥의 전쟁배상금 지불 △랴오둥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 할양 △통상 특권 부여 등을 약속받았으나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3국간섭을 벌여 랴오둥반도 반환을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청일전쟁은 마무리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보국안민 깃발들고 일어선 항일농민봉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이 수립되자, 동학 지역조직들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 준비에 나섰다.
1894년 7월말 호남에서 시작해 8, 9월에는 경상, 충청 등 삼남지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재봉기에 나선 지도자는 9월 말 남원 대회를 열어 재봉기를 선언한 남접의 김계남이었다.
전봉준은 정국 추이와 전쟁 상황을 지켜보다 10월 초에 이르러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해 재봉기를 준비했다.
남접 농민군이 봉기하자 동학 최고지도자인 최시형은 각 포의 대접주들을 청산에 소집해 10월 16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0월 말에는 항일 농민봉기가 전라, 총청, 경상도 뿐만 아니라 강원, 경기, 황해도까지 확산되었다.
전봉준의 남접 농민군은 11월 9일께 삼례를 출발해 논산에 도착하고, 손화중의 농민군은 나주로 이동해 바다를 통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김개남의 농민군은 남원을 떠나 11월 13일 전주를 점령했다.
손병희의 북접 농민군은 음성에서 출발하여 청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11월 13일께 논산에서 남접 농민군과 합류했다.
이렇게 논산에 집결한 남북접 연합 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에 달했으며, 1차 목표는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에 관군을 파견하고, 일본군은 11월 13일 농민군의 논산집결 전후에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중심으로 한 진압부대를 남하시켰다.
일본군의 계획은 부대를 서·중·동 세 갈래로 나누어서 남하하되, 먼저 동로분진대를 출발시켜 강원도와 경상도로 진출한 농민군을 전라도에 몰아넣은 뒤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공주로 향한 농민군은 11월 20일부터 이인, 효포, 웅치 등에서 일본군, 관군과 전투를 벌이다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한 뒤 2차 공격을 준비했다.
농민군의 운명을 건 우금치전투는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 사이에 벌어졌다.
1만여명의 농민군은 조선 정부의 최정예부대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수십차례의 처절한 공방을 거듭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이곳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논산 황화대에서 관군, 일본군과 다시 맞섰으나 또 다시 패배했고, 청주 전투에서 진 김개남 부대는 남쪽으로 내려와 강경에서 합류한 뒤 함께 전주로 향했다.
이후 전봉준·손병희 부대는 고부방향으로, 김개남 부대는 남원방향으로 흩어졌다.
12월 말 원평과 태인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한 뒤 전봉준과 손병희는 농민군을 해산했으나 이중 일부는 1895년 초까지 장흥 석대들, 보은 북실, 완주 대둔산 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농민 혁명 지도자들이 이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고부 농민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고 농민들의 꿈은 좌절됐지만, 이들의 정신은 항일 의병을 거쳐 3.1혁명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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