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월6일 오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심판 6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은 헌법 규범의 실효성을 담보하는 헌법 보장 제도입니다. 헌법재판은 독일과 우리나라처럼 헌법재판소를 별도로 설치해서 할 수도 있고,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일반 법원이 담당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헌법에서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기 위한 헌법위원회와 탄핵 사건을 심판하기 위한 탄핵재판소를 각각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헌법위원회는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의 위원으로 구성했습니다. 탄핵재판소는 부통령을 재판장으로 하고 대법관 5인과 국회의원 5인이 심판관을 맡도록 했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심판할 때는 대법원장이 재판장 직무를 하도록 했습니다.
1952년 발췌개헌으로 국회를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구성하는 양원제가 도입됐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참의원을 아예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법위원회 기능을 정지시켰습니다. 탄핵재판소도 이름만 유지했을 뿐 탄핵재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1960년 2공화국 헌법은 위헌법률 심사, 탄핵재판 등을 다룰 헌법재판소를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1962년 개정된 3공화국 헌법은 위헌법률 심사와 위헌정당 해산 심판은 대법원이, 탄핵심판은 탄핵심판위원회가 하도록 했습니다.
대법원은 1971년 국가를 위한 직무 도중 사망하거나 부상한 군인, 경찰 등의 국가에 대한 배상청구를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조항을 위헌으로 판결했습니다. 화가 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대법원의 헌법재판 권한을 빼앗아 헌법위원회로 넘겼습니다. 헌법위원회가 위헌법률, 탄핵, 정당 해산을 심판하도록 했습니다. 헌법위원회 위원은 9인으로, 대통령이 임명했습니다. 3인은 국회 선출, 3인은 대법원장 지명을 거쳐 임명하도록 했습니다.
헌법위원회는 유명무실했습니다. 재판부가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하려면 반드시 각급 법원 합의부,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대법원 합의부를 거치도록 제동 장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5공화국 헌법도 이런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4공·5공 헌법위원회는 단 한 건의 사건도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제대로 된 헌법재판은 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들어선 6공화국에서 비로소 시작됐습니다. 1987년 개정 헌법과 1988년 8월 5일 제정한 헌법재판소법을 근거로 헌법재판소가 설치됐습니다.
1988년 9월 19일 조규광 헌법재판소장 등 재판관 9명이 임명됐습니다. 처음에는 상임 재판관 6명, 비상임 재판관 3명이었습니다. 1991년 헌법재판소법 개정으로 전원 상임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한병채 전 의원을 초대 헌법재판소장에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한병채 전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대구에서 네 차례 국회의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정치색이 옅은 조규광 변호사로 교체했습니다. 조규광 후보자는 국회 임명동의를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한병채 전 의원은 민주정의당 추천 국회 선출 몫으로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대법원판사 출신으로 12대 국회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이성렬 전 의원도 대법원장 지명 몫으로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6년 뒤 2기 재판부에는 13대 국회 평화민주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조승형 전 의원이 평민당 추천 국회 선출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이처럼 헌법재판소 설립 초기에는 전직 국회의원들도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정치인 출신 재판관 임명이 가능했던 것은 1987년 헌법이 다양한 이념과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인물들을 재판관에 임명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헌법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정치인 출신 재판관은 사라졌지만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성향의 인물을 재판관에 임명하는 관행은 이어졌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역사에 비추어 보면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재판관의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보수 언론의 공세는 말도 안 되는 투정에 불과합니다.
2020년에는 헌법재판소법이 개정되어 당원이었거나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 대선 캠프에 들어갔던 사람은 3~5년 동안 재판관으로 임명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재판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헌법 정신에 비추어 보면 올바른 개정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헌법재판소 설립 초기 헌법재판소 담당 기자였습니다. 헌법재판소 사람들은 “한겨레신문과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함께 탄생했으니 형제지간”이라고 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1987년 6월 시민항쟁 속에서 탄생한 신문이었기 때문입니다.
6월 항쟁으로 태어난 기관답게 헌법재판소는 지금까지 37년 동안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헌법 질서를 수호하며 위상을 높여왔습니다. 헌법재판소 덕분에 동성동본 결혼이 가능해졌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1인 2표제가 도입됐습니다. 간통죄가 없어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흑역사도 있었습니다. 2004년 관습헌법 위반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신행정수도건설법을 위헌으로 결정한 것, 2014년 통합진보당을 무리하게 해산시킨 것 등입니다.
어쨌든 헌법재판소는 이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기나긴 역사에서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은 중대한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면 헌법수호 기관으로서 입지가 더욱더 탄탄해질 것입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출석해 메모지를 살펴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 가지 걱정은 헌법재판소의 신뢰를 깎아내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극우 세력의 무모한 기도입니다.
3월6일 발표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과정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52%가 ‘신뢰한다’, 43%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변했습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누리집 참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너무 높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극우 세력, 국민의힘, 보수 논객들이 헌법재판소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려는 윤석열 대통령과 어떻게든 정권을 내주지 않으려는 보수 세력이 대한민국 공동체를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위험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여론에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불복 사태가 벌어지며 나라 전체가 분열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차례 진행한 탄핵심판 심리와 검찰·경찰의 수사로 윤석열 대통령이 저지른 위헌·위법 행위가 대부분 확인됐습니다.
첫째, 헌법이 정한 계엄의 요건인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둘째, 포고령으로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했습니다.
셋째, 우원식 국회의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넷째,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의결을 막기 위해 의원들을 본회의장에서 끌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섯째,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 민간인이 비상계엄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월 8일 ‘윤석열 퇴진 10차 대학생 시국대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현 시국에 대한 의견과 자신들이 바라는 세상에 대한 바람을 바닥에 분필로 적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그런데도 상당수 국민의힘 의원, 보수 논객, 정치 평론가들은 헌법재판소가 기각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내려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하도 간절해서 애처로울 지경입니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에 대한 증오심에 눈이 멀고 이성이 마비된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받아내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현실적으로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탄핵심판을 지연시켜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어떻게든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 선고 이후로 늦추려는 의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처럼 궤변을 늘어놓아서야 하겠습니까?
이제 좀 정직해져야 합니다. ‘김건희 특검법’ 막으려고 부정선거를 명분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을 대한민국이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윤석열 대통령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친일파 민영휘, 송병준, 이정로 등의 후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재산환수에 불복하며 2008년 5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참여한 자들이 64명에 이른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3월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친일재산 환수는 진정한 사회통합 추구이자 헌법적으로 부여된 임무라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친일재산환수법이 만들어지고 이듬해인 2006년 7월, 친일재산의 조사와 처리를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4년간 친일파 462명과 후손 3만884명의 재산을 조사해 민영휘, 이완용 등 168명의 부동산 2475필지 1306만 9403㎡(시가 2373억 원)를 국고로 환수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해체 후 친일재산 조사는 법무부로 이관됐다.
"'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2019년) 기획 등 오래전부터 충북지역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흔적을 찾아왔다. 청주의 상징과 같은 상당산성 안에 무덤을 비롯해 환수된 줄 알았던 친일파 민영휘 일가 재산이 남아 있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재산이 제대로 환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주변 토지를 모두 조사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구 토지대장을 전수조사하니, 미환수 된 친일파 토지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2023년 8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취재에 들어갔다. 친일재산 환수가 왜 안 됐는지, 제대로 환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심층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어떨 때 희열을 느끼는가.
"친일재산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무작정 살펴봐야 하는데, 특정지역에 존재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 때가 있다.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감인데 절반은 맞더라. 촉으로 시작했는데 친일재산이 발견되면 아주 기분이 좋다."
- 힘들 때는 언제인가.
"친일파 후손들이 풍족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불편하다. 해방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해외로 유학을 떠나며 군·경찰·정계 등 기득권층에 자리 잡아 권력이 이어져온 것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다."
▲<충북인뉴스> 김남균 기자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민주언론시민연합
자료조사만 수천만 원, 정부가 나서야 한다
- 토지 열람 비용이 상당할 텐데.
"기자라고 시민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자료를 그냥 취재할 수는 없다. 구 토지대장의 경우 땅 1필지당 열람 300원, 등본발급 700원의 수수료가 든다. 보통 리 단위가 700~2000필지 정도인데 2000 필지를 열람만 해도 60만 원이 나온다. 군 단위로 넓히면 몇 천만 원이 들어간다. 이리저리 부탁해보고 협조를 구하지만 쉽지 않다. 그나마 국가기록원 아카이빙에 토지자료 등이 포함되면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자료가 생겨나고 있다."
- 친일재산 찾는 과정 자체가 어려움이 많은 텐데.
"과거부터 현재까지 재산 소유권 이전과정을 살펴봐야 하는데 돈도 돈이지만, 시간과 노력이 정말 많이 든다. 친일파 재산규모가 워낙 방대해 찾기가 좀 수월하다는 게 다행이랄까(웃음). 하지만 친일재산을 찾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전산화된 자료도 있고, 국가가 권한을 갖고 접근하면 수집이 쉽다. 지금 국가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아 나섰을 뿐 정부나 기관이 적극 나서주길 촉구하고 알리는 게 우리 보도의 목적이다."
- 친일가계도 작성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가계도가 개인정보이다 보니 재산 찾기보다 더 힘들다. 친일파 주소지를 찾아가면 집터, 비석 등 옛 발자취가 남아 있다. 가족 이름을 기록한 묘비나 구 토지대장 등 자료를 통해 소유 분포도를 정리하면서 가계도를 만들었다. 친일파 민영휘처럼 첩과 자식이 많으면 정리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비석에 깨진 글자가 더러 있는데 일제 연호인 '대정', '소화' 같은 글자다. 당시 '영세불망비'(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를 세워서 친일 공덕을 찬양해 놓고는 나중엔 후손들이 부끄러웠는지 그런 행적을 지웠놨더라."
대대손손 이어진 친일세력 기득권
- 일제강점기 최대 갑부라던 민영휘 일가 재산은 얼마나 되었나.
"조선 최고 땅 부자로 알려진 민영휘 토지는 전국적으로 약 2300만 평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작성된 구 토지대장을 열람해 보니 충북에는 연고가 없음에도 11개 시군에 모두 20~30만 평 이상의 민영휘 일가 재산이 있더라.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산 속 땅들을 포함해 숨겨진 재산이 아직도 많다."
- 최세경 전 KBS 사장 등 친일파 후손은 여전히 잘 살고 있는데.
"최세경은 최연국의 조카다.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최연국은 단종 태실지가 있던 자리에 자신의 무덤을 썼다. 조선 왕가의 기운을 차단하려 일제가 태실을 파헤친 뒤 친일파에 땅을 넘겼는데 단종 태실지가 최연국의 손에 들어갔다. 최연국 집안은 세 아들과 세 명의 사위 모두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다. 특히 3남 최문경은 조선총독부 경부를 지내고, 해방 이후엔 경기도지사와 외무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최연국의 동생 최연무 역시 조선총독부 경남 평의원을 지낸 친일파로 그의 아들이자 최연국의 조카인 최세경도 일본제6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최세경은 <부산일보>와 KBS 사장을 지내고 한국방송협회 회장을 역임했는데, 단종태실지에 세워진 최연국의 공덕비도 최세경이 썼다.
친일파 일가 이야기를 더 하자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측근이자 '차떼기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최돈웅 전 국회의원(강릉, 제8·14·16대)이 있다. 친일재산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권력이 이어진 집안인데, 그의 부친 최준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로 일본의 전쟁용 비행기 성금 모금에도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돈웅 전 의원도 서울대를 나와 경월주조 회장, 강릉상공회의소 회장, 강릉MBC 회장 등을 지내며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 제대로 과거청산을 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친일가계도를 보면 반민족행위를 통해 얻은 부와 인적 관계가 대대손손 이어진다.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 군부독재 정권과 유착하고 정·재계 혼맥으로 기득권 카르텔을 공고히 했다. 친일은 지나간 역사가 아닌 계속 진행 중인 최상위 지배층들의 역사다. 친일재산 환수를 넘어 지연된 정의, 청산되지 못한 왜곡된 지배구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본다."
- 비상계엄 회동이 벌어진 '삼청동 안가'도 친일재산이었다고?
"삼청동 대통령 안가(안전가옥)는 친일파 민영휘 아들 민규식이 소유한 친일재산으로 환수대상이었다. 이후 후손들에게 공동 상속되었는데 세금 체납으로 2009년 국세청에 압류됐다. 정부는 해당 부지를 친일재산으로 환수하지 않고, 압류자산으로 공매에 부쳤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이 감정가 절반인 40억 원에 낙찰받았고, 이명박 정부는 2011년 경호처 소유 '창의궁 터'(당시 시세 65~93억 원으로 홍 회장은 2년 만에 최대 53억 원의 차익을 본 셈이다)와 맞교환 방식으로 소유권을 넘겨 받아 안가로 사용했다. 친일재산으로 국가로 귀속시켜야 할 곳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업총수에게 뇌물을 받아 국정농단이 일어났고,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회동을 벌였다."
지금도 편법으로 빼돌려, 친일재산조사위 재개해야
- 친일재산으로 확인됐는데도 땅 매매가 가능한가.
"친일파 후손들은 여전히 땅을 매매한다. 환수대상인 땅은 매매가 불가능하지만, 매입한 사람이 친일재산인지 모르고 선의로 취득했다면 거래 자체를 무효로 하지 않는다. 대신 거래를 통해 얻은 땅 값은 환수대상이 된다. 땅은 취득한 개인의 소유로 남고, 돈만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짜고 치는 거래를 하면서 땅을 헐값에 매매하고 이후 친일파가 땅을 다시 되사는 편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 편법 거래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서울 그랜드힐튼호텔 부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거래됐는데 환수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후작 작위까지 받은 친일파 이해승이 소유한 홍은동 임야는 손자 이우영에게 넘어갔다.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던 땅은 1966년 경매를 통해 제일은행 소유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이우영이 다시 땅을 사들여 그랜드힐튼호텔(구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지었다. 이 땅도 친일파 재산으로 국가에 귀속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법원은 제일은행이 친일재산임을 모르고 경매로 취득했으므로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경우'에는 귀속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근거를 들어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청주시 산성동 전 통장 A씨 역시 상당산성 내 민영휘 일가 토지를 여러 차례 매수했는데 같은 이유로 합법성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부가 친일재산 환수에 손 놓고 있는 사이 친일파 후손들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부를 챙기고 있다."
- 정부가 찾아낸 재산 상당수가 환수되지 못했다고?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활동 당시 친일재산을 많이 찾아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10%도 환수하지 못했다고 본다. 충북도지사를 지낸 친일파 이명구의 경우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조사에선 토지가 8만 9100㎡이라고 진술했지만, 환수된 토지는 겨우 6.6㎡다. 토지 내력이 같은 수십 억대 알짜배기 땅은 손도 대지 못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도 딜레마가 있었던 것 같다. 친일파 후손들은 재산환수에 불복하며 행정소송, 헌법소원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반발했다. 재판에서 지면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갈 수 있으니 친일재산조사위원회도 100% 확실한 친일재산 위주로 추렸던 듯하다."
- 소극적으로 환수가 추진된 사례를 들자면.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다면 친일행위로 얻은 관직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법원 판결을 종합하면 친일파가 1904년 러일전쟁 개시부터 1945년 해방까지 획득한 재산은 대가성이 있다고 보고, 환수대상에 포함했다. 그런데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누적된 친일행위 결과물로 관직을 보지 않고, 관직 이전에 취득한 재산은 환수대상에서 뺐다. 또한 친일파 당사자 이름만 조사하고 후손에게 차명으로 남긴 재산은 포함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 법무부에 친일재산 국가귀속 신청도 냈던데.
"친일재산 조사업무를 이관 받은 법무부는 광복회, <충북인뉴스> 등에서 친일재산으로 의심된다고 민원을 넣은 것을 빼고 자체 발굴한 친일재산이 한 건도 없다. 지난해 11월엔 법무부에 몇 건의 친일재산에 대한 국가귀속 신청서를 접수했다. 그때 1주일 안으로 연락 준다더니 감감무소식이다. 친일재산을 제대로 환수하려면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활동 재개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강일 국회의원이 친일재산귀속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올해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친일재산귀속법 개정운동에 주력하려고 한다. 진일보한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기자공동체'라서 벅찬 일도 가능했다
- 추가로 추적 중인 친일 후손이 있는가.
"많다. 지금까지 찾은 것만 200필지, 공시지가 730억 원 정도의 목록을 작성해 놨는데 친일재산 찾기에 계속 주력할 생각이다. 공시지가로만 최소 2000억 원, 시세로는 조 단위가 넘는 친일재산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국가가 찾지 못한 친일재산을 제대로 환수해 독립운동가 선양 등 제대로 된 곳에 써야 하지 않겠는가."
- 어려운 취재를 이어온 원동력은.
"<충북인뉴스>는 지역의 작은 언론사다. '친일청산·재산환수 마적단' 기획취재는 비용이나 시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충북인뉴스>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구성원들은 형식상 직급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기자들의 공동체다. 작고 가난하지만, 선의의 공동체인 <충북인뉴스>가 '마적단' 기획의 원동력이다."
-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보도'란.
"강한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힘없는 소외된 사람의 시각에서 쓰는 따뜻한 기사가 좋은 보도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 기사가 모두를 정의롭게 할 수 없고, 모두에 유익할 수 없을지라도 약자에게 이익이 되고, 그들을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좋은 보도가 아닐까."
▲2024년 12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시상식에 참석한 <충북인뉴스> 김남균 기자(가운데) ⓒ 민주언론시민연합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2025.2.8. 연합뉴스
시민들의 분노는 8일 최저 기온 영하 13도의 혹한도 녹였다. 내란수괴 피의자인 대통령 윤석열이 헌법재판소 탄핵 변론에서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한 모습이 달군 열기다. "윤석열 탄핵" 함성이 추운 거리에 울려퍼졌다.
촛불행동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 안국역 1번 출구 앞에서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산! 126차 전국집중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주최 쪽 추산 1만 여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내란 수괴 윤석열을 즉각 파면하라" "특급범죄자 김건희를 구속하라" "내란정범 국힘당을 해산하라" "내란범들을 철저히 단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김은진 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집회를 여는 발언으로 "내란 세력은 흑을 백, 백을 흑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며 "지금도 절대 느긋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내란범들과 극우 세력은 총력전을 벌이고 있으니 우리는 매일 촛불을 들고 한마음으로 싸워야 할 때"라며 결의를 다졌다. 이어 "다시는 윤석열과 같은 희대의독재자를 맞이할 수 없다"며 "우리 국민들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싸워서 불법과 폭력으로 하는 극우 적폐 세력을 끝장내자는 것이다. 내란범 소탕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은진 촛불행동 공동대표가 126차 전국집중 촛불문화제에서 "윤석열과 같은 희대 독재자를 맞이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25.02.08. 이호 작가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은 육군사관학교 수업 커리큘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려던 걸 시민들과 함께 막았다. 그런데 육사와 해사는 작년 1월 교육 커리큘럼에 북한학과 안보학을 추가했다"고 전했다. "수도방위사령부, 국군방첩사령부 등에만 (친위 쿠데타를) 지시한 게 아니라 육사 교육에 심어놓았다"라며 "국회에 있는 종북 좌파를 싹쓸이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통분했다. 방 실장이 "윤석열을 감옥에 보내고 사관학교에서 친일과 뉴라이트가 아닌 독립운동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한 이유다.
대중가요 '먼지가 되어'를 '파면이 되어'로 개사해서 부른 가수 성국 씨의 노래가 집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은 추운 날씨 집회에 나온 시민들을 격려했다. 그는 "탄핵 심판 변론기일이 진행될수록 윤석열의 거짓말과 뻔뻔함에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며 "의원을 요원으로 바꾸고 국민 여러분을 반국가 세력으로 매도하고 부하를 팔아서 거짓말을 했다. 윤석열 파면의 일등 공신은 윤석열"이라고 짚었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왼)과 더불어민주당 추미애의원(오)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2025.02.08. 이호 작가
박 의원은 "우리는 가장 추운 겨울을 이곳에서 보냈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며 "촛불 시민들이 내란을 막았고 윤석열 파면의 끝을 보여줬다. 수감 번호 0010 피고인 겸 탄핵 심판 피청구인 윤석열은 내란수괴로 처벌받고 파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국회와 광장이 함께 해야 윤석열을 파면시킬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란 사태가 벌써 2달이 훌쩍 지나났지만, 윤석열이 헌재를 거짓말 대잔치장으로 여기고 법치를 우롱하고 있으니 아직도 내란 사태"라며 현상황을 요약했다. "법원을 습격한 초유의 사태도 일어났다. 내란범 김용현은 법원 습격 폭도들에게 영치금을 보내고 최상목은 국회가 합의해서 마은혁 헌재 재판관의 임명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윤석열은 지금 비밀 병기 비화폰만을 믿고 있다. 그래서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김건희 라인 경호처가 비화폰 서버 접근을 철통같이 막고 있다"라며 "이런 상황에도 최상목 권한대행은 국회에 내란 수사 특검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들은 촛불문화제 집회를 마친 뒤, 헌재 앞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해 범시민대행진에 합류했다. 오후 5시부터 광화문(경복궁역 4번 출구) 앞에서는 주최 쪽 추산 10만 여명이 모였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은 제10차 범시민대행진을 개최했다. 일반 시민, 선장, 선생님 등과 함께 일본에서 온 시민이 집회에서 목소리를 냈다.
이용길 비상행동 공동의장은 집회의 문을 열며 "이 광장은 국민의힘이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지켜냈다"며 "시민의 힘은 탄핵과 내란 종식의 힘이다. 단결하는 시민의 힘으로 사회대개혁을 열어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했다. 또 "윤석열은 무기징역이나 절대적 종신형에 처해야 한다. 이제는 다시 내란 수구 세력이 고개를 들 수 없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추위가 계속된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은박담요를 덮어주고 있다. 2025.02.08. 연합뉴스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자신을 '선장'이라고 소개한 박성모 씨는 "강릉에서 울릉도나 독도로 여행 가본 적 있느냐"며 "그 여객선의 선장으로 일을 했는데, 하루 16시간 일을 하고 임금 체불까지 당했다. 노조에 가입한 14명이 4년째 법적 싸움을 하면서 7차례 모두 이겼다"고 소개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법을 이용해 시간을 끌고 (노동자를) 괴롭힌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와 국민의 처지가 같다고 생각 들었다. 우리 모두 분노와 스트레스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 공감을 샀다. "윤석열과 내란 세력이 하는 짓이 어쩜 이리 똑같은지 뻔뻔함은 태생부터 존재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라고도 말했다.
마트 노동자 김미정 씨는 "마트 노동자들은 윤석열 탄핵 배지를 옷에 달았다는 이유로 극우의 표적이 됐다"며 "극우 세력들은 (온라인에) 좌표를 찍어 배지를 달고 있는 노동자를 매장에 찾아가 욕설을 했다"고 고발했다. 이어 "개인 신상을 온라인에 올리기도 한다. 이들은 법치국가를 무시하고 자신과 반대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 내전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일본 시민의 발언도 있었다. 히시야마 나오코 씨는 "오늘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독립선언으로부터 106년이 되는 날"이라며 "이런 '민주주의의 날'에 불러줘서 감사하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뉴스로 보고 충격받았다"고 심경을 밝혔다.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2025.2.8. 연합뉴스
나오코 씨는 "(한국 시민의) 투쟁은 대단했다"며 "주저하거나 당황하지 않았고 리허설을 해본 것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길고 긴 투쟁을 이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치하했다. "여러분의 싸움은 군사정부를 저지시키고 한국 민주주의를 지켰으며 전 세계에 진행되는 민주주의 파괴에 일격을 가했다"라고 평가했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12월 5일 한국 시민과 연대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일본과 한국은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친구"라고 덧붙였다.
밤이 어두워지자 시민들이 손에 든 응원봉이 밝게 빛났고, 시민들은 "시민의 힘으로 사회 대개혁을 완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끝자락에는 합창단이 '유월의 노래'를 합창했다. 합창단이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 타도 민주 쟁취 하나 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고 노래 불렀다. 이어서 '농민가',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이어갔다. 시민들도 뜨겁게 호응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정형식 헌법재판관이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5차 변론에서 증인심문을 하고 있다. 2025.2.4. [헌법재판소 제공] 연합뉴스
'우려가 현실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의 주심을 맡고 있는 정형식 헌법재판관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만에 하나 탄핵에 반대의견을 낼 재판관이 존재한다면 1순위일 것이라고 꼽혀온 정 재판관은 최근 윤 대통령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한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과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을 상대로 다른 재판관들과는 달리 유독 증언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지며 심지어 신경질적인 모습까지 드러내 많은 시민을 의아하게 했다.
정 재판관은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 출석한 곽 전 사령관에게 12·3 비상계엄 당시 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직접 확인하겠다며 약 6분간 질문을 던졌다. 정 재판관 신문에 앞서 곽 전 사령관은 이날 증언을 통해 지난해 12월 4일 0시 30분쯤 윤 대통령이 비화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아직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거 같다. 빨리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했으며, 여기서 말하는 '인원'은 707특수임무단 '요원'이 아닌 국회의사당 내 '의원'이 맞다고 수차례 분명히 밝혔다. 이는 곽 전 사령관이 국회 국방위와 내란국조 특위에 출석했을 때도 변함없이 일관되게 증언했던 사안이다.
검찰과 국회 등에서의 진술이 달라졌다고 윤 대통령 대리인단이 공격하자 곽 전 사령관은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거친 표현을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어서 검찰 자수서를 쓸 때 '부수고'를 '열고'로, '끌어내라'를 '데리고 나와라'고 하는 등 일부 용어를 순화한 것이지 말을 바꾼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또 계엄 선포 직후부터 특전사 전투통제실에서 예하 지휘관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할 때 마이크가 켜져 있었던 탓에 윤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지시한 내용을 회의 참석자들이 실시간으로 듣게 됐고, 자신이 당시 경황이 없어 기억하지 못하던 내용도 이들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됐다고 충분히 설명했다.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피청구인인 윤 대통령 측 대리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5.2.6. [헌법재판소 제공] 연합뉴스
그럼에도 정 재판관은 지엽적인 대목에 집착해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되풀이하며 증언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몰아갔다. 다음은 정 재판관과 곽 전 사령관의 문답 요지다.
-(윤 대통령 대리인단의) 반대신문에서 계속 얘기하는 게, 증인의 진술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사람'이라고 그랬다가, 나중에 '의원'이라고 그랬다가, 또 '데리고 나와라' 그랬다가 '끄집어내라'고 그랬다가. 이런 것들이 지금 혼재가 되어 있어요. 법률가들은 그 말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신빙성을 다시 판단합니다. 말이 달라지니까. 증인은 아까 그것을 순화시켜서 얘기했다고 했습니다. 말이 달라지니까 자꾸 문제가 되는 거예요. 몇 번 답을 하긴 하셨는데 명확하게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의결정족수) 150명 얘기했습니까?
"12월 3일 당시에는 150명이라는 기억이 없었는데 나중에 제가 그 말을 했다고 누가 그렇게 얘기를 해 줘서 150명이라는 상황을 다시 인식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기억에는 그 150명이 안 채워진 것 같다고 들었다는 얘기입니까?
"아닙니다.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증인의 기억에 의해서만 말하라는 겁니다. 자꾸 말이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150명 얘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12월 3일 당시에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잊었다가) 이후에 제가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들었다고요?
"아직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이게 정확하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들은 얘기냐고요.
"네, 맞습니다."
-그러면 150명도 들은 얘기입니까?
"150명은 나중에 제가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들은 겁니다."
-들은 얘기가 '인원'입니까?
"네, 인원을 끄집어내라."
-인원을 끄집어내라. 국회의원을 끄집어내라, 이랬습니까?
"안에 있는 인원을 끄집어내라, 그랬습니다."
-국회의원이라는 말은 안 했습니까? 들은 기억이 없습니까? 있습니까? 전화로.
"전화로 들었던 표현은 안에 있는 인원을 밖으로 끄집어내라,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하면 국회 내에 의결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으니 문을 부수고라도 안으로 들어가서 의원을 다 끄집어내라?
"제가 표현한 내용하고 말씀이 또 다른데 아직 의결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빨리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 인원, 인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
-150명 얘기는 언제 했어요?
"150명 얘기는 대통령 얘기가 아닙니다."
-자꾸 말이 달라지잖아요. 아까 분명히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냐고 했더니 150명 들은 기억이 생각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건 김용현 장관하고 했던 얘기고 대통령님 워딩은 제가 방금 말했던 세 마디 그게 (다입니다)."
-그러면 150명 이야기는 들은 바는 없습니까?
"네, 그때 당시 제가 나중에 기억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말씀하신 워딩은 딱 그 세 줄이었습니다."
정 재판관은 150명이라는 말을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는지 구분해서 질문한 적이 없다. 그냥 "150명 얘기했느냐?"고 물으니까 곽 전 사령관은 당시 윤 대통령과 김 장관 전화를 교대로 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지 150명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고만 답한 것이다. 처음부터 150명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는지 구분해서 물었다면 곽 전 사령관은 '김용현 장관으로부터' 들었다고 명확하게 답했을 텐데 정 재판관은 도리어 곽 전 사령관이 자꾸 말을 바꿨다고 역정을 냈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이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5.2.4. [헌법재판소 제공] 연합뉴스
지난 4일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출석했을 때도 비슷했다. 정 재판관은 이번 탄핵심판 통틀어 가장 긴 약 12분에 걸친 직접 신문을 통해 계엄 당일 홍 전 차장이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으로부터 체포 명단을 듣고 받아 적은 메모가 부정확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부각시켰다. 의도적으로 증언의 신빙성을 흔드는 것으로 비쳤다.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던 홍 전 차장이 밤 11시가 넘어 국정원장 관사 앞 공터 어두운 곳에서 선 채로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다 당혹감 속에 주머니에 있던 메모지를 꺼내 빠르게 요점만 휘갈겨 적은 것을 두고 왜 또박또박 주도면밀하게 기록하지 않았냐고 따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짜증 섞인 말투로 언성을 높이는 등 감정적인 모습도 보였다. 메모할 당시엔 본인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될 뿐 외부에 공개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홍 전 차장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홍 전 차장은 "여러 가지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기승전결에 맞춰서 할 수 있겠냐. 정확하게 기재 못 해서 죄송하다"고 뼈있는 사과를 했다.
-방첩사령관이 쓸데없이 아무 데다가 막 얘기를 퍼뜨리고 다녔다 이런 얘기도 될 수 있는데, 정보 같은 거는 굉장히 민감하게 보존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얘기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명단을 주니까 증인이 체포 뭐 그래서 그때는 뭐 거의 듣기도 싫었다는 취지 아니에요. 증인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용을 자세하게 또 여기다가 메모를 해놓은 게 선뜻 이해가 안 돼서. 하여튼 들은 얘기가 맞다는 거죠? 검거를 요청한 것도 맞아요?
"총리께서도 충격적인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어떤 얘기들을 다 기승전결에 맞춰서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제 써놓은 순서나 이런 게 그래서 그래요. 검거를 요청…
."제가 그러면 여인형 사령관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일부러 이런 거를…."
-아니 그런 취지가 아니고. 여기 이렇게 적혀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그리고 주신문 사항에서도 검거 요청 얘기는 나오지 않은데 메모에는 딱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여쭤보는 거예요. 검거 요청했어요?
"위치 추적을 해서 방금 얘기했던 10여 명의 대상자를 검거하겠다는 것 자체가 저는 검거 지원을 요청했다라고…."
-그럼 검거 지원 요청이라고 안 쓰고 왜 검거 요청이라고 썼어요? 이 말은 다르잖아요. 검거를 요청한다는 건 국정원에서 검거를 진짜 한다는 얘기고.
"제가 공문서를 작성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간단한 메모이지 않습니까?"
-메모는 왜 작성해 놨어요?
"제가 나름대로 그 상황을 기억하기 위해서 메모해 놓은 거죠."
-그럼 정확하게 기재를 해야죠.
"예. 정확하게 기재 못 해서 죄송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의 답변을 들은 뒤 발언을 하고 있다. 2025.2.6. [헌법재판소 제공]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이 같은 문답에 고무된 듯 정 재판관의 증인신문이 끝나자마자 발언권을 신청해 "저 메모가 12월 6일 박선원 (민주당) 의원에게 넘어가면서부터 탄핵이니 내란이니 모든 프로세스가 시작된 거라고 본다"며 홍 전 차장 진술의 신빙성을 전면 부정했다. 그러면서 "계엄 관련 얘기는 이미 국정원장과 했기 때문에 홍 전 차장과 통화를 하기로 한 김에 격려 차원에서 전화한 것"이라며 "간첩 업무와 관련해 국정원은 정보가 많으니 방첩사를 지원하라고 한 것"이라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펼쳤다. 윤 대통령은 곽 전 사령관 증인신문이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발언권을 얻어 "12월 6일 홍장원의 공작과 특전사령관의 '김병주TV' 출연부터 바로 이 내란 프레임과 탄핵 공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궤변을 당당하게 늘어놨다.
탄핵심판 초반엔 비교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인 심리를 벌여 애초 우려와 달리 '윤석열 파면'에 무난히 동참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정 재판관이 시간이 갈수록 윤 대통령의 내란 행위를 입증하는 국회 측 핵심 증인들에게 부쩍 예민하거나 공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고 이제 '본색'을 나타내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정 재판관은 ▲윤 대통령이 유일하게 직접 지명한 재판관이고 ▲자신의 처형(부인의 언니)인 박선영 전 의원이 계엄 사태 와중에 윤 대통령에 의해 장관급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탄핵 방탄 사전뇌물'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으며 ▲무엇보다 그간 판결에서 극보수적 경향성을 보였기 때문에 많은 시민이 불안한 시선으로 주시해왔다.
최근엔 박선영 위원장과 특수 관계인 김계리 변호사가 윤 대통령 대리인단에 돌연 합류해 의구심을 더 키웠다. 이제 41세인 김 변호사는 이렇다 할 경력은 없지만 박 위원장이 지난 2022년 서울시교육감 예비후보로 뛸 때 박 위원장 캠프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투입돼 홍장원 전 차장에 대한 주공격수로 나서 마치 검사가 피의자 취조하듯이 공격적인 질문으로 일관했다. 정 재판관도 이날 홍 전 차장을 매섭게 다그친 것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에 윤 대통령 측으로부터 유무형의 압박을 받은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여러 측면에서 윤 대통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 재판관이 얼마간 '보여주기식 연출'을 했을 뿐이지 내란 사태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입장 변화를 시사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 그가 나중에 탄핵 기각 편에 설 것인지 여부는 속단하기 어렵다. 계엄 선포의 위헌성과 불법성이 워낙 명백하기 때문에 재판관 만장일치로 파면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은 우세하다. 그럼에도 탄핵을 결사반대하는 내란동조 세력 측에서는 5차‧6차 변론기일을 거치며 정 재판관에게 본격적으로 열띤 환호와 찬사를 보내고 있어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정형식 헌법재판관이 '송곳 질문'으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의 거짓말을 밝혀냈다고 환호하는 극우 유튜브 채널의 영상들
극우 유튜버들은 성창경TV <명재판관 탄생. 송곳 질문으로 홍장원 곽종근 허위 진술 밝혀낸 정형식 재판관의 빛나는 활동>, 고성국TV <홍장원 박살낸 정형식 재판관>, 배승희 변호사 <내란공작자 4인! 정형식 재판관이 밝혀내!>, 펜앤드마이크TV <곽종근-김병주 홍장원-박선원 공작 의혹 드러났다. 판 뒤집는 정형식 재판관의 매서운 활약>, 고영신TV <정형식 재판관 송곳 추궁. 곽종근 홍장원 진실 실토. 내란 프레임 흔들>, 손상대TV2 <정형식 헌법재판관 홍장원에 질타!>, 진성호방송 <정형식 재판관 집요한 질문에 무너진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 이재명 난리 났다!> 등의 제목으로 정 재판관의 활약상에 열광하는 동영상을 앞다퉈 쏟아내고 있다.
각 영상에는 "좌파 소굴 헌재에 정형식 같은 명재판관이 있다는 것에 힘이 됩니다" "진정한 법관입니다" "나라 살리는 데 큰일 하십니다" "정형식 재판관님이 대한민국의 희망" "정의로우신 분" "이런 분이 목소리를 크게 내셔야 합니다" "정형식 재판관님, 윤석열 대통령님 복귀시켜주세요"와 같은 댓글이 잔뜩 달리는 중이다.
권오헌 명예회장이 7일 남민전 사건 재심 판결에서 46년 만에 무죄 확정을 받았다. 권 명예회장은 말기암으로 투병 중에 있어 재판에 출석하지 못했지만 김혜순 양심수후원회 회장을 비롯해 양심수후원회 회원들, 남민전 동지와 친지 등 약 20명이 재판정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7일 열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46년 만의 일이다.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권 명예회장의 남민전 사건 재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이같이 무죄를 선고하고는 “1979년의 적법한 활동에 대해 폭행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판결한 것을 오늘에 이르러서야 무죄를 선고하게 됐다”며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권 명예회장은 남민전 사건과 관련 1979년에 반국가 단체에 가입해 적을 이롭게 한 점, 회합·통신·이적표현물 소지 등 혐의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형을 받아 옥살이를 했다.
권 명예회장은 2023년 12월 21일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인 2024년 4월 2일에 재심 개시 결정이 났고, 이날 무죄가 확정되었다. 재심과 관련 권 명예회장의 무죄 확정은 남민전 사건 관계자들 중 16번째이다.
권 명예회장은 이번 무죄 선고에 대해 “지난 1월 10일 재심 첫 결심 공판에서 검사가 무죄 구형을 했기 때문에 예상은 했다”면서도 “그때 유신체제라는 아주 엄혹한 시절에 유죄판결 받은 것을 이제 뒤늦게라도 무죄를 선고하니 감사하다”고 재판부에 감사를 표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의 남민전 사건 재심 무죄 확정을 알리는 웹자보. [사진제공-국가보안법폐지교육센터]
이날 재판정에는 김혜순 양심수후원회 회장을 비롯해 양심수후원회 회원들, 남민전 동지와 친지 등 약 20명이 재판을 지켜보았고,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자 조심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판결 확정 후 장경욱 변호사는 말기암으로 투병 중에 있어 재판에 출석하지 못한 권 명예회장을 대신해 참석한 조카인 맹영선 씨에게 꽃다발까지 준비해와 전달해 주었다.
한편, ‘남민전 사건’은 1976년 2월 비밀단체를 조직해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79년 84명이 검거된 유신말기 최대 공안사건으로, 당시 검찰은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법원은 최고책임자인 이재문에게 사형 선고를 비롯해 관련자들에게 사형, 무기, 징역 15년 등 대부분 중형을 선고했다.
다음은 투병 중인 권 명예회장과의 전화를 통한 미니 인터뷰 내용이다.
[미니 인터뷰] 권오헌 “남민전 사건,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무죄 확신했다”
성북구 소재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인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 이계환 기자: 이른바 ‘남민전 사건’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소감은?
■ 권오헌 명예회장: 지난 1월 10일 재심 첫 결심 공판에서 검사가 무죄 구형을 했기 때문에 예상은 했지만, 어쨌든 그때 유신체제라는 아주 엄혹한 시절에 유죄판결 받은 것을 이제 뒤늦게라도 무죄를 선고하니 감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또한 사실 남민전 사건 관련 모든 사람들은, 돌아가신 이재문 선생님이나 신향식 선생님을 비롯해서 누구든지 유신체제 타도 투쟁만 했지 다른 거 한 게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역사적으로 무죄가 당연히 되는 거고 법적으로도 무죄를 받아야 된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 남민전 사건이 역사적으로도 무죄지만 법적으로도 무죄이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그럼에도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 중에 아직 재심 청구를 안 하신 분들도 계시지요?
■ 그렇죠. 아직 재심 청구를 안 하신 분들도 계시지요.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남민전 산하 조직) 관련자는 다 했고 남민전 관련자들도 한 10여 명 정도는 한 것 같아요.
□ 남민전 사건은 유신시대 때 최대 공안사건으로 기억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무죄라고 확신했나요?
■ 저는 제가 이렇게 재심을 청구했을 때부터 남민전 우리 동지들은 다 재심 청구해도 무죄 나온다, 우리가 한 게 뭐 있느냐, 사람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사상이나 이념적인 문제라든가 이런 거는 오직 그 사람의 지성이나 지식에 관한 문제이지 실제 행동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말해 왔거든요.
□ 그러니까 선생님은 이미 그때부터 그러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그런 주장을 하시고 또 주변에도 그런 말씀을 해오신 거네요. 그러면 선생님께선 아직 진행 중인 다른 분들도 다 선생님처럼 무죄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고요.
■ 물론이지요. 그렇게 믿습니다. 실제로 유신체제 타도 투쟁밖에 한 게 없거든요. 어디 외부와 접속을 했다거나 뭐 이런 것도 없었고...
□ 그러니까 그때 박정희 정부의 부당한 유신체제에 대한 투쟁이니까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군요.
■ 그렇죠. 반인권 반헌법적인 그런 체제를 두고서는 그렇죠. 게다가 국민 저항권이라는 게 그때부터 개념이 있었지요. 아무튼 유신체제는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냥 참을 수가 없었지요.
□ 투병 중이신데, 건강은 어떻습니까?
■ 아직까지 정신은 말짱한데 이제 몸은 좀 아무래도 약해지고 있어요. 건강을 유지하려고 어떡하든 매일 걷기 운동을 하고 있지요.
□ 건투를 빕니다. 투병중이신데도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습니다.
다음은 권 명예회장이 지난 1월 10일 재심 첫 결심 공판에서 한 최후진술이다.
최후진술
공판 준비 기일이 돌아왔는데 내가 거동이 불편해서 도저히 법정에 갈 수가 없습니다. 우선 관계자 관계 여러분께서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말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고 민주 회복을 위해서 정말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를 느끼고 살아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완전히 폭압 정치 속에서 사람이 사법 살인 당하고, 수천 명이 죽고, 수천 명이 감옥 가고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자기 권리를 다 행사하지 못하는 이런 정치 속에서 더 견딜 수가 없어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일단 뒤로 미루고 유신독재를 타도해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렇게 생각해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을 한 비밀 비공개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때 공소장에는 반국가 단체 활동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반국가 단체라는 걸 알지도 못하고 사람이 사는데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것이 가장 존중되어야 하고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른 거 생각할 것 없이 또 긴급조치 시대에 비공개로 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폭압 정치를 물리치고 그리고 민주 회복을 이뤄내게 된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뒤로 국가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라든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라든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라든가 이런 데서 다 인정을 하고 국가에 재심을 청구해서 그때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라고 이렇게 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내 나이가 90이고 이제 가서 또 바로 잡은들 내게 오는 것이 뭐겠습니까마는 그러나 한 시대의 잘못된 것을 당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 잘못된 것을 소리치고 이렇게 잘못된 것을 밝혀내는 것,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 뒤에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 당시에 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 해야 효과가 있는 겁니다.
저는 지금 힘이 없습니다. 방 안에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그만두기로 선언할 정도로 이제 저한테는 치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게 된 몸이 과거 지난 일 가지고 뭘 지금 또다시 시시비비를 따지나 그런 생각이 나긴 하지만 나 개인 문제가 아니라 당대를 산 피해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공정하게 판단돼서 그런 억울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새로 재판 준비 기일을 맞아서 새로 옛날 것을 돌아본다는 거 당당합니다. 유신시대 긴급조치 시대 때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감옥에 보냈던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때 억울했던 사람들한테 그 피해를 보상하든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제 이 판단이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그 안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누가 언제 죽든지 말든지 한 시대를 살던 사람이 어떤 시대 상황에 따라서 행동을 했다면 그것이 정당한 건지 부당한 건지를 밝혀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저 자신은 그 세 단체에서 자문위원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지만, 옛날 검사로 돌아가지 말고 새로운 검사로 해서 오늘의 검사는 이 시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 판단하고, 재판장님께서 올바르게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계엄령이 계몽령이라는 '호수 위 달 그림자' 같은 논리마저 박살낸 건 윤석열 본인이다. 그가 포고령 위반으로 싹 다 잡아들이라는 명단의 면면을 보면 이건 계몽이 아니라 흔하디 흔한 치정 복수극에 가깝다.
타깃으로 추정된 인물들은 '김건희 디올백 스캔들'의 최재영 목사(포렌식으로 복구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메모), 해병대 박정훈 대령 항명 혐의 재판을 맡은 군 판사 4명, 김건희와 갈등 관계인 한동훈, 윤석열의 대선 경쟁자였던 이재명은 물론, 이재명에게 위증교사 혐의 무죄 선고를 한 현직 판사 등이다. 명태균은 윤석열 부부와 대화 내용이 다수 담긴 '황금폰'을 수사기관에 제출하자 윤석열이 '쫄아서' 계엄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건 지극히 사적인 계엄이다.
'치정 복수극'을 계몽이라고 우기니, 기왕 이렇게 된 바 우린 계몽주의의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때 유시민이 김정은을 계몽군주의 면모를 보인다고 평가하자 득달같이 달려들던 무지의 함성은 이제 윤석열 찬양으로 변하고 있다. 계몽군주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절대왕정시대의 유물로 군주 독재를 말한다. 천공 스승, 건진 법사, 현생 미륵(명태균), 버거 보살(노상원)을 거느린 '미신에 빠진 계몽주의자'란 건 존재 그 자체로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17세기 발현한 계몽주의가 음모론과 미신으로 귀결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윤석열과 그 일파들의 탄생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계몽주의의 끝은 음모론에 가 닿는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 전복을 위해 1776년 결성된 일루미나티(Illuminati, 라틴어로 계몽하다, 혹은 계몽된 자) 비밀 결사로 모여드는데, 이후 '유럽 민중의 미몽을 깨운다'며 전쟁을 일으킨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그 의미는 크게 퇴색되고 만다. 하지만 일루미나티의 '정신'은 살아 남아 최근 유행하는 음모론의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됐다.
미스터리와 오컬트 세계관에서 일루미나티에는 사회 유력 인사, 정치인 셀러브리티 등이 속해 있고, 그들은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면서 세계의 전쟁과 재난을 주도하고 움직인다.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 퍼진 큐아난의 '딥스테이트' 음모론, 프리메이슨 음모론 등 '세계 그림자 정부' 음모론의 원조격이 일루미나티다.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마크 저커버그와 일론 머스크는 '렙틸리언'이라는 파충류형 외계인으로 지구 정복을 노리는 세력의 하수인이고,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은 소아성애자인데다 아동의 피를 섭취하는 흡혈귀로 세계 정복을 꿈꾸는 자들의 노예다.
이 음모론은 한국에 수입되면서 '분단 국가'라는 초현실적 상황을 맞닥뜨리는데, 토착화와 다양한 변주를 겪다가 최근엔 '중국 공산당과 북한의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귀결되었다.
부정선거론을 설파하고 있는 윤석열은 체포되면서 공개한 자필 편지에서 "투개표 부정과 여론조사 조작을 연결시키는 부정선거 시스템은, 이를 시도하고 추진하려는 정치세력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으로 가동된다고 주장했고 윤석열 변호인인 배진한은 "저희는 이 불법선거가 사실 중국과 크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 보낸 답변서에서 "전산시스템의 비밀번호 '12345'는 중국 중앙 정부와 지방정부의 연결 번호로서 중국 등 외부에서 풀고 들어오라고 만들어 놓은 듯이 기이한 일치성을 보였다"고 했다.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부정선거론자들은 중국 공산당과 북한 세력이 그들의 꼭두각시인 이재명 등 '숙주'를 이용해 수백만 명을 동시에 속이는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을 망하게 해서 중국과 북한에 헌납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계몽파들은 중국 공산당과 북한 노동당이라는 딥스테이트라고, 그 조직의 수족인 이재명 일파는 '렙틸리언'들이라고 믿는 듯하다. 또한 조선족이 한국으로 대거 침투해 한국 땅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몽령을 내려 군인들이 선관위를 털어 중국인들을 체포했는데, 그들이 비밀리에 주일미군 기지로 압송됐다'는, 실소가 나올만한 가짜뉴스를 신성한 헌법재판소에서 버젓이 인용한다.
이런 류의 스토리는 많다. 이를테면 문재인은 코로나 팬데믹 때 군인들을 생체 실험에 동원했고(무려 윤석열 정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을 지낸 극우 유튜버의 주장), 부산 문현동에 있던 일본군 해군 어뢰 공장에 일제가 숨긴 금괴 1000톤을 몰래 탈취했다거나(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는지, 나중에 금괴 200톤으로 수정된다.) 코로나 백신에 인간을 조종하는 나노 로봇을 집어 넣었다는 식의 스토리 말이다. 어쩌면 이 사회 곳곳에 숨겨졌다고 (일부 사람들에게) 믿어지는 '집게손가락' 형상은 딥스테이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가 심어 놓은 어떤 심볼이 아닐까?
계몽주의에서 뻗어나온 일루미나티류의 사이비 음모론 광신도들이 계몽주의자를 자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계몽주의와 음모론의 만남은 이렇게 대한민국 땅에서 '한국 버전'으로 현현한다. 윤석열은 "저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이 위기 상황임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계신 국민들께, 상황의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계엄을 했다고 주장했다.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국민 '계몽'을 위해 알리고자 분연히 나섰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국민이 "국제법이 금지하는 군사도발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공격과 책임 주체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회색지대 하이브리드전을 주권 침탈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공격과 책임 주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전쟁을 감지했다니, 대한민국은 윤석열의 위대한 직감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인가?
물리적 형체가 없는 주장에 반박하기란 매우 어렵다.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통해 '내 차고 안의 용'(The dragon in my garage)이라는 비유를 들어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했다. 여기 두 명이 '차고 안의 용'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우리 집 차고에는 불을 뿜는 용이 살고 있습니다. "
"보여주세요. 용은 어디에 있습니까?"
"용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용은 보이지 않는 용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었군요."
"그렇다면 차고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용의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봅시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 용은 하늘을 납니다."
"적외선 감지기를 사용해서 보이지 않는 불을 탐지해 봅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보이지 않는 불은 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용에게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봅시다."
"좋은 생각인데요, 우리 용은 물질로 되어 있지 않아서 페인트가 묻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물질로 되어 있지 않고 날아다니며 뜨겁지 않은 불을 뿜는 용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용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윤석열이 주장하는 "국제법이 금지하는 군사도발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공격과 책임 주체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회색지대 하이브리드전을 주권 침탈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까? "선거 조작으로 언제든 국회 의석을 계획한 대로 차지할 수 있다든가 행정권을 접수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는 윤석열의 주장에 "선거 조작이 원래 없었다면?"이라는 의문을 단다는 건 미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이나 할 일이다. 그렇게 우린 미몽에 갇힌 국민이 된다. 미몽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칼 세이건은 해법은 이렇다.
"용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일단 부정하고 장래에 물리적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겉보기에 제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똑같은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다."
▲윤석열. ⓒ연합뉴스
박세열 기자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25.02.07 22:13l최종 업데이트 25.02.07 22:20l김성욱(etshiro)
▲심우정 검찰총장이 지난해 12월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검찰이 비상계엄의 스모킹건인 '비화폰(보안 핸드폰)'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비화폰을 써온 계엄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향한 경찰의 강제수사가 임박하자 심우정 검찰총장까지 나서 김 전 장관의 신병을 경찰이 아닌 검찰에서 확보하려 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국방부 차관 "12월 6일 심우정 총장이 전화, 김용현 전 장관 연락 방법 문의"
국회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국조특위) 의 내용을 종합하면, 지난해 12월 6일 경찰이 김 전 장관에 대한 압수수색을 검찰에 신청하자, 심 총장이 당일 저녁 김선호 국방부 차관에게 직접 전화해 김 전 장관에게 연락할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김 차관은 6일 국회 국조특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심우정)검찰총장이 (김용현 전 장관에게)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해달라고 해서, 제가 (김용현)전 장관께 전화를 드렸다"라며 "전화번호를 주시면 제가 (심 총장에게)알려주겠다고 했고, (김용현)장관께서 번호를 알려주셨다"고 했다.
이때 김 전 장관이 일러준 번호는 그가 갖고 있던 비화폰 번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장관은 지난해 12월 5일 면직됐기 때문에,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비화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진동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이 번호로 김 전 장관에게 문자를 보냈고, 김 전 장관이 이 차장에게 전화를 걸면서 둘 사이 통화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김 전 장관은 검찰 쪽과 통화 후 하루 정도 뒤인 12월 8일 새벽 1시 30분께 검찰에 돌연 자진 출석했다.
이진동 차장은 6일 국회 국조특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당시 김 전 장관 신병 확보가 제일 중요했다"라며 "수사팀에서 김 전 장관 설득이 잘 안 된다고 해서 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차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가까웠던 친윤 검사로 꼽힌다.
일각에선 이 차장과 김 전 장관간의 통화가 성사되기 전 윤 대통령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조특위에서 "(이진동·김용현 통화가 이뤄지기 전에)심 총장이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소속)이찬규 부장검사에게 얘기해서 이찬규와 김용현과 통화가 됐는데, 김용현은 '대통령과 통화 후에 얘기하겠다'고 했다"라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에게 '김주현 민정수석과 협의하라'고 얘기한 것으로 안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국조특위에 출석한 김주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은 윤 의원 질의에 "김 전 장관의 출석과 관련해 전화 통화하거나 한 일은 없다"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검찰 출신인 김 수석은 비상 계엄 다음날 저녁인 12월 4일 삼청동 대통령 안가에서 열린 '법조 4인 회동' 참석자 중 한 명이다. 계엄 수사 대응 작전을 짠 것 아니냐고 의심 받는 이 회동에는 김 수석 외에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이 참석했다. 판사 출신인 이 전 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검찰 출신이다.
"윤석열, 검찰 출석 김용현에 '민정수석과 협의하라' 했다" 주장 나와
▲이진동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내란 국조특위)' 3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김 전 장관이 검찰에 '셀프 출석' 하기 전 검찰 고위층과 비화폰으로 통화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검찰이 최근 경찰의 비화폰 수사를 일부러 막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더 커지고 있다. 검찰은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두 번 연속 반려한 바 있는데, 비화폰 통화 내역을 포함해 계엄 수사가 확대될 경우 검찰 수뇌부에게 그 여파가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 전직 경찰은 7일 통화에서 "김용현 출석 전 상황을 보면 정황상 김용현 쪽이 아닌 검찰 쪽에서 먼저 움직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라며 "아무리 엄중한 사건이라 해도 검찰총장까지 등판해 피의자의 전화번호를 구해다 주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국회 국조특위 관계자는 "검찰이 김용현 수사 때부터 이미 수사 범위를 관리하고 있었음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라며 "김성훈 차장 구속이 뭉개지고 늦어지는 것도 비화폰 수사가 본격화되는 걸 검찰이 꺼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지적했다.
검찰이 김성훈 차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비화폰 수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김 전 장관 등 계엄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이 사용해온 비화폰은 경호처에서 관리하는데, 김 차장이 이끄는 경호처가 군사 비밀 등을 이유로 경찰의 비화폰 서버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국회 국조특위 관계자는 "검찰은 윤석열 대통령 공소장을 쓸 때도 '검찰'을 굳이 '수사기관'으로 표현해 애써 연관성을 차단하기 바빴다"라며 "검찰 입장에선 계엄 수사를 통제 관리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현재 김 전 장관이 비화폰을 사용해 검찰 쪽과 통화했던 부분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측은 김성훈 차장에 대한 세 번째 구속영장 신청 계획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6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국민들 사이에 부정선거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선거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국민의힘에선 의원들 일부가 극우 유튜버들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동조하는 발언을 한 적은 있지만, 당은 공식적으로 부정선거 주장과는 선을 그어왔다.
권 위원장은 6일 국회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시스템에 대해 국민이 의구심을 갖지 않도록 투표 절차나 방법, 투표 제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국민이 의구심을 갖지 않도록”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부정선거 주장에 편승해 제도 변경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같은 당 박수민 의원이 ‘부정선거 논란 해소 특별법’을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선거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여론이 많고 부정행위를 우려하는 분도 많기 때문에, 선거 제도 자체를 정비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취지로 알고 있다”며 “충분히 검토할 만하다”고 힘을 실었다. 박 의원은 ‘특별점검위원회’를 꾸려 최근 5년간 실시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투·개표 시스템을 점검하는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다.
부정선거론자들이 폐지를 요구하는 사전투표와 관련해서도 “선거(운동 개시부터 투표일까지)가 2주 정도인데 사전투표를 하게 되면 10일 이내에 그분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과연 유권자들이 깊이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인지 의문이 있다”고 권 위원장은 말했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부정선거 이슈에 공감하는 사람이 꽤 되고, 이들 세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고 최근의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6일 서울 광화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트럼프의 ‘가자지구 점령’ 구상을 규탄하는 시민사회. [사진-팔레스타인긴급행동]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땅이다!”
“트럼프의 ‘가자지구 점령’과 ‘강제 추방’ 계획 강력히 규탄한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팔레스타인긴급행동)이 6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밝힌 ‘가자 지구 점령’ 구상을 비판했다.
“가자 지구는 미국이 점령(take over)하고 소유(own)하겠다”거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다른 지역에 재정착시켜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옹호하는 것이자, 미국이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이라고 규탄했다.
팔레스타인긴급행동은 이스라엘의 ‘학살’을 지원해온 미국이 바로 그 미국산 무기로 폐허가 된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쫓아내겠다고 을러대는 것은 “제2의 나크바이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을 완성하는 반인류적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인권이사회(UNHRC)와 국제형사재판소(ICC)를 비난하고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등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옹호하며 행위에 공모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팔레스타인긴급행동은 “트럼프 대통령은 무도하고 국제법의 종말을 고하는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의 평화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 종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면서 “미국이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이스라엘이 하루빨리 불법 점령을 끝낼 수 있게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의 답변을 들은 뒤 발언을 하고 있다. 2025.2.6.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6차 변론기일에서 자신의 잘못을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윤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빼라고 한 것이 맞다'고 증언한 뒤, 윤 대통령은 "곽종근과 홍장원이 내란 프레임"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궤변을 한 것이다. 6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나온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을 제외한 김현태 육군 특수사령부 707특수임무단장과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윤 대통령 측과 입을 맞춘 것으로 보였다.
내란죄 수사를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6차 변론 기일이 6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렸다. 윤 대통령은 오전 9시 법무부 호송차를 타고 헌재에 도착해 9시 5분에 헌재 대심판정으로 들어갔다.
이날 대통령 대리인단은 취재진에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국회 대리인단 김이수 변호사는 오전 9시 30분 탄핵심판 6차 변론에 출석하면서 "대통령과 대통령의 소송대리인이 주장하는바, 계엄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계몽령'이었다, 평화적 계엄이었다, 라는 말들은 형용모순의 궤변"이라며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책임감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며 "신속한 파면 결정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헌재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변론을 열고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 김현태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특수임무단장,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을 증인으로 불러 신문했다.
곽 전 사령관은 국회 대리인단이 '윤 대통령이 당시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한 대상이 국회의원이 맞냐'라는 질문에 "정확히 맞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요원'을 빼라고 한 것이라고 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답변을 반박한 것이다.
국회 측에서 곽 전 사령관의 검찰 신문조서를 읽으며 "12월 4일 밤 12시 30분 윤 대통령이 직접 비화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아직 국회 내 의결 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다. 빨리 들어가서 의사당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라'라고 (말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증인이 진술한 게 사실인가"라고 묻자 곽 전 사령관은 "그렇다"라고 했다.
이어 "당시 707특수임무단 인원이 국회 본관으로 가서 정문 앞에서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본관 건물 안쪽으로 인원이 안 들어간 상태였다"며 "그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말씀하신 부분들, 의결 정족수 문제와 안에 있는 인원들을 끌어내라는 부분이 본관 안에 작전 요원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국회의원이라 생각하고 이해했다"고 덧붙였다.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청구인인 국회 측 대리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5.2.6. 연합뉴스
"국회 봉쇄, 의원 데리고 나오라는 지시 받아"
곽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으로부터도 국회의원 150명이 되지 않도록 국회의사당 출입을 봉쇄하고,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의원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국회 대리인단은 곽 전 사령관에게 이상현 1공수여단장과 김현태 707특임단장에게 '유리창을 깨고서라도 국회 본관 안으로 진입하라. 국회의원 150명이 넘으면 안 된다.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라도 안으로 들어가서 다 끄집어내라'며 '대통령님 지시다'라고 지시했다는 공소장 내용이 사실이냐고도 물었다.
곽 전 사령관은 "여러 사항이 혼재돼 있다. 분명한 건 제가 이걸 하라고 지시한 게 아니라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이 지시한 내용을 참모들, 현장 지휘관과 논의한 내용이 그대로 (공소장에) 쓰여 있다"며 "결론적으로는 제가 국회의사당 들어가서 의원들을 끌어내는 것을 하지 말라고 지시해 중지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알았지만 전투통제실에서 화면을 보면서 지휘했는데, 마이크가 켜져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과 장관의 지시를 받고 얘기한 내용이 전체 인원에게 생방송됐다"고 했다.
윤 대통령 대리인단은 곽 전 사령관이 계엄 당시 윤 대통령과의 통화 횟수에 대한 진술을 번복해 왔다며 '끌어내라'는 지시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캐물었다. 송진호 변호사는 곽 전 사령관의 국회 증언 영상을 재생해 윤 대통령과의 통화 횟수를 1회라고 말했다가 이후 "3회 전화 왔는데 두 번 통화했고 한 번은 통화가 안 됐다"고 진술을 바꾼 게 아니냐며 물었다.
송 변호사는 "만약 대통령의 지시가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행하지 못한다고 얘기했을 것"이라며 "당시 요원이 15명밖에 국회에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 비춰보면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말이 없었던 게 아니냐. 어떻게 15명으로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하냐"고 곽 전 사령관에게 물었다.
또 "어떻게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상황을 설명하거나 이행 가능 여부를 얘기하지 않고 묵살할 수 있냐"며 "장관과 사령관의 지시도 복명·복창하는데 대통령의 지시에 대답하지 않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냐"고 하기도 했다.
곽 전 사령관의 자수서와 국회 진술 내용을 비교하며 "'사람'이 '인원'으로, '데리고 나와라'가 '끄집어내라'로 바뀌었고, 검찰 진술에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라'는 말도 나중에 추가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곽 전 사령관은 묵살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자수서에 '열고 들어가라. 데리고 나가라'고 적은 이유는 33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고 차마 쓸 수 없었다"며 "그래서 그 용어를 순화해서 자수서에 적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윤 대통령은 곽 전 사령관의 증언을 듣고 발언권을 얻었다. 그는 "제가 그저께와 오늘 상황을 보니까 12월 6일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의 공작과 곽 전 특전사령관의 '김병주TV' 출연부터 바로 이 내란 프레임과 탄핵 공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다시 궤변을 시작했다.
홍 전 차장은 지난해 12월 6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윤 대통령이 전화로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라고 말했다"며 체포 의혹을 처음 폭로했고, 곽 전 사령관도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의 유튜브 인터뷰에 출연해서 "장갑차 등은 일체 출동시키지 않았다"고 통제한 것 등을 말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곽 전 사령관에 대해 "무슨 대통령을 생각해서 감추는 척한다"며 "벌써 이미 전날 검찰에 가서 대통령에 관련된 얘기를 다 해놨다는 것은 다분히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잘못을 덮어씌우려 했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곽 전 사령관에게 "현장의 상황, 안전 문제 이런 것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며 "보고를 좀 받다가 '우리 사령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까 '저는 지금 지휘통제실에 있습니다'(라고) 해서 '그러면 화상으로 보는 거군요' 하고 수고하라고 (한 뒤) 전화를 바로 끊었다"고 했다.
또 "인원이라고 얘기를 했다는데 저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놔두고, 의원이면 의원이지 인원이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앞서 곽 전 사령관이 이날 헌재에서 윤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취지로 지시하면서 '인원'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한 반박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공소장에는 윤 대통령이 김 전 장관에게 '간부 위주로 인원이 얼마나 되나' 등의 지시를 한 것이 기록돼 있다.
김현태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특수임무단장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2025.2.6.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또 "만약에 지시했다면 투표가 끝날 때까지 한두 차례라도 저나 장관이 어떻게 된 거냐고 확인하는 게 상례"라며 "방법이 있겠냐고 상의하고 어떻게 해보라, 이렇게 말하는 게 상식이지 다짜고짜 전화해서 의결정족수 안 되게 막아라, 끄집어내라, 이런 지시가 공직사회에서 상하 간에 가능한 얘기인지, 재판관들께서 상식선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봐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비상 계엄령 선포'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태도였다.
국회에 출동한 것이 '적법한 출동'이라고
김현태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특수임무단장은 윤 대통령 측 신청으로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제가 받은 임무는 (국회의) 봉쇄 및 확보였다"며 "국회의사당과 의원회관을 봉쇄해 건물을 확보하라고 (부대원들에게 지시를) 했다"고 했다. 여기서 '봉쇄'의 의미에 대해서는 진입을 전면 차단하는 게 아니라 '매뉴얼에 따라 외부로부터 오는 테러리스트 등 적의 위협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윤 대통령의 공소장에는 김 단장이 병력 23명과 함께 국회의사당 후문으로 가 봉쇄를 시도했으나, 국회의사당 경비 인력 등 10여 명이 제지해 10분간 몸싸움을 벌여 봉쇄를 포기한 것이 기록돼 있다.
그는 "본회의장에 들어갈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며, '적법한 출동이었냐'는 윤 대통령 측 질문에 "지금은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전형적으로 윤 대통령이 유리한 답변을 했다.
김 단장은 "최근 다른 정보를 많이 입수하고 있어서, 현재 이해하는 것은 국회에 임무를 받고 가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고 국회의원의 국회 의정 활동을 방해했을 때 문제가 된다(는 것) 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눈을 감고 증언을 들었고 가끔 표정을 찌푸리고 김 단장을 쳐다봤다. 신문 도중 대리인단에 귓속말하거나 손으로 지시하기도 했다.
김 단장은 지난해 12월 4일 오전 0시 17분 곽 전 사령관에게 전화를 받았고 "(곽 전 사령관이) 테이저건, 공포탄을 사용하면 방법이 있느냐고 의견을 물었고 그건 제한된다, 불가하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국회 유리창을 깨고 진입한 이후인 오전 0시 36분 두 번째 통화에서는 "150명이 넘으면 안 된다는데 들어갈 수 없겠냐는 식으로, 강한 어조는 아니고 부드러운, 사정하는 느낌으로 (곽 전 사령관이) 말했다"며 "안 된다, 더 이상 못 들어간다고 답변하고 끝냈다"고 덧붙였다.
'150명이 넘으면 안 된다는데'라는 지시의 출처에 대해서는 "상급 지휘관이라고만 생각했고 누군지 명확하게 특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전 단장은 출동 당시에는 150명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고 나중에 국회의원의 숫자라는 점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 공소장에는 김 단장이 '국회의원 150명'을 정확하게 지시받은 바가 나와 있다.
그는 국회의 출입문을 모두 잠그려 외곽을 돌았는데 정문에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걸 보고 당황해 자신의 판단으로 창문으로 깨고 들어갔다며 곽 전 사령관이 지시한 건 아니라고 했다. 당시 국회에 최초 투입된 707특임대원은 자신을 포함해 총 97명이었는데 1차로 도착한 25명을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후문을 지키고, 다른 한 팀은 창문을 깨고 들어가 정문 쪽으로 이동시켰다는 게 김 단장의 설명이다. 특임대원은 이후 곽 전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100명이 추가로 투입됐다.
김 단장은 이후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자 곽 전 사령관으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았고, 이후 버스 도착과 최종 승인을 오전 3시 12분 철수했다고 밝혔다. 김 단장은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가 있었느냐'라는 질문에는 "그런 지시가 없었고 제가 기억하기에는 있었다고 한들 안 됐을 것"이라고 답했다. 곽 전 사령관과 반대되는 말을 한 것이다.
김 단장은 지난해 12월 9일 기자회견에서는 "끌어낼 수 있겠느냐는 뉘앙스였다"고 말했는데, 이날 헌재에서는 자신의 말을 뒤엎은 것이다. 그는 기자회견 당시엔 취재진의 질문을 오해하고 그렇게 답했다는 입장이었다.
김 단장은 출동 당시 가져간 케이블타이는 문을 봉쇄하려던 것이고 대인 용도가 아니라고 했다. 대원들이 1인당 10발씩 챙긴 공포탄은 훈련용으로 지급된 것이고 실탄으로 무장하거나 저격수를 배치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청구인인 국회 측 대리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5.2.6. 연합뉴스
국가비상사태인지는 '헌재'가 판단한다고
마지막 증인은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이었다. 그는 윤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선포한 이유에 대해 "탄핵, 재정 부담이 되는 일방적 입법, 예산의 일방적 삭감이 종합적으로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 측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국회 측이 '헌법 제77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 사태가 존재할 것이란 요건이 있다. 전시나 사변은 아니었고, 국가비상사태라고 볼만 했느냐'라고 묻자, 박 수석은 "그 부분은 헌재가 판단해 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박 수석은 국회 측의 계엄 선포 이후 당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계엄 관련된 대화를 나눈 게 있냐는 질문엔 "없다"고 했으며 '경제를 책임지는 사령탑들이 이런 얘기를 안 하시냐'고 묻자 "직접 한 적 없다"고 했다.
또한 윤 대통령이 최 부총리에게 전달했다고 알려진 '국가비상입법기구 관련 예산을 편성하라'는 쪽지에 대해선 "계엄 선포 전이나 후에도 본 적 없다"고 답했다.
박 수석은 여야 합의 없는 정부 예산안을 단독 처리는 헌정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체 금액은 4조 1000억원 규모로 낮아 보이지만 구체적인 항목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수석은 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이 '기획재정부에서 30년 넘게 공직생활하며 정부 예산안을 여야 합의 없이 야당이 단독 처리한 경우가 있었나'라고 묻자 "헌정사 처음"이라고 했다.
박 수석은 "금액 자체는 크지 않지만 감액 내용이 문제가 된다"며 "예비비 절반을 2조 4000억원 삭감하는 등 내용의 문제가 있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국회 측과 윤 대통령 측은 변론 마무리 발언 중 예산안 삭감 문제를 두고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소추위원인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헌법에 예산 편성권은 정부, 국회는 편성된 예산에 대한 심의 의결권이 있다. 국회에서 심의·의결된 예산이 맘에 안 들 수 있다"며 "마음에 안 드는 예산이 의결됐다고 해도 그때마다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면 매년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 측 윤갑근 변호사는 "계엄 선포한 이유가 예산 삭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줄탄핵, 방탄입법 문제가 있었다"며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이지 예산 문제 하나로 계엄을 선포한 것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린다"고 했다.
한덕수, 김용현 주장 반박
"계엄 국무회의는 없던 것"
"국무위원 모두 반대했다"
윤 손절? 이해 안 되는 해명
어제 내란 피의자 윤석열의 자백에 이어, 국조특위에서도 이번 계엄이 불법이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계엄 직전 국무회의에 제대로 된 의안 번호도 부여되지 않은 것이 확인됐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전체회의(청문회)에 출석하고 있다. ⓒ 뉴시스
6일 열린 내란국조특위(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3차 청문회.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계엄 전 국무회의에 대해 “워낙 절차적, 실체적 흠결이 많으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부승찬 민주당 의원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다. 계엄을 해제했던 국무회의록에는 2123호라는 의안 번호가 붙었다. 그러면 계엄 직전 회의록은 2122호라는 의안 번호가 붙어야 한다. 그러나 부 의원의 자료에 따르면 의안 번호 2122호는 ‘군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었다.
계엄 직전 국무회의는 의안 번호도 부여받지 못해 절차적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난 거다. 어제(5일) 윤석열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서는 윤석열이 “선거관리위원회에 군인을 보낸 것은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이번 계엄이 불법이었다는 정황이 연이어 드러난 셈이다.
한 전 총리도 “정상적인 국무회의라고 보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부 의원은 “계엄 선포와 관련한 국무회의는 실제적으로 없던 것”이라며 “계엄이 애초에 불법이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국조특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 전 총리와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은 “비상계엄에 찬성한 국무위원도 있었다”는 김용현 전 장관의 주장에도 “국무위원 전부 반대했다”며 반박했다.
‘계엄은 불법적이었고 반대했다’며 뒤늦게 거리 두는 모양새인데, 납득되지 않는 해명으로 동조했다는 의심은 지우기 어려워 보인다.
최 대행이 출석하자, 계엄 당시 윤석열에게 받은 문건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최 대행은 윤석열에게 받은 문건을 확인하지 않고 차관보에게 줬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해당 문건에는 국회 예산 완전 차단, 국가 비상 입법기구 예산 편성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주 민주당 의원은 “45년 만에 비상계엄인데, 대통령이 준 지시 문서를 부총리가 안 봤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며 “만약에 안 봤다면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추미애 민주당 의원도 “문건에 담긴 내용대로 비상입법기구가 국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국회를 대체하는 기구라면 위헌적 기구”라고 비판했다.
박선원 민주당 의원은 “문건을 어떻게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나"라며 "세로로 접었나, 가로로 접었나” 물었다. 최 대행은 “가로로 세 번 접혀있었다”고 답했는데, 박 의원은 “최 대행이 검찰에 제출한 문서에는 접힌 흔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문건을 펴 가지고 검찰에 제출한 것이냐”고 묻자 최 권한대행은 “내가 제출하지 않았고, 펴지도 않았다”고 답했다.
한 전 총리는 비상계엄 선포문 인지 시점에 대해,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당시에는 제가 전혀 인지를 하지 못했고, 비상계엄 해제 국무회의를 마치고 그리고 사무실로 출근해서 제 양복 뒷주머니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답했다.
본디부터 정해진 길은 없다. 방향을 정하고 가다보니 없던 길이 뚫렸던 것이다. 길 위에 있더라도 가야할 방향을 정하지 못하면, 길을 잃었다고 한다. 방향을 정했더라도 그 방향으로 길을 뚫지 못하면, 또 길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길을 잃었다. 방향을 정하지 못하여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되는 길로 뒷걸음치기도 하고, 방향을 정했더라도 길을 뚫지 못하여 오고가던 길들 사이로만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기도 한다.
공동체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 학술이다. 수많은 논란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 충돌과 분쟁으로 치닫지 않도록 담론을 정리하고, 대안이 나오지 않을 때 정체되지 않도록 논리를 펼치고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제시하여야 하는 임무가 학술에 주어져 있다. 공동체도 그런 임무 수행에 대한 기대로 역사 이래 학술 영역을 배려하고 지원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학술은 공동체와 더불어 길을 잃었다. 연구 논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공동체에 대한 학술적 기여는 점점 위축되고 있다. 공동체로서도 학술 영역을 배려하고 지원해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지원이 적어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연구자는 공동체의 여타 구성원과 다를 바 없이 각자도생을 자연법칙처럼 수용하여 무한경쟁 체제를 가속화하게 되었고, 학문후속세대조차 안정적으로 생산하지 못하여 학술생태계의 여러 영역이 붕괴되고 있다. 제 살 길도 찾지 못하는 학술에 공동체가 무슨 미련을 남겨두겠는가.
그렇다고 연구자들이 논문의 계량적 평가 체제에 완전히 투항한 채 각자도생에 노심초사하면서 골방 문을 닫아걸고 공동체의 고통에 무심한 작금의 현상을 관습으로 아주 굳혀버린다면, 학술이 오히려 공동체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며 학술 자체의 길마저 완전히 끊길 것이다. 공동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뚫는 데에 기여해온 지적 전통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복원해야 한다.
독립 열망으로서의 의실구독(依實求獨)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實學)은 본디 있던 학문이 아니다. 공동체의 고통과 마주하고 공동체의 현실을 돌파하려는 지식인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온 학문이다. 실학은 20세기 초반 민족적 독립과 학술적 독립의 필요에 의해 구성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중후반 근대화와 민주화의 필요에 의해 정립되었다. 실학이 구성되고 정립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면서 공동체의 고통과 마주했던 지식인들의 지적 전통을 이을 길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학술에서 귀중한 것은, 작고 은밀한 것을 뚜렷하게 밝혀내고 본말과 시종을 드러냄으로써 인민의 삶을 보좌하는 것이다."(정인보, 성호사설 서문, 이익, <성호사설 유선>, 문광서림, 1929, 5면)
정인보(鄭寅普, 1892~1950)가 1929년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 유선>을 간행하면서 서문에 적은 말이다.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본말을 파악하는 등의 모든 학술 활동의 가장 고귀한 목표는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라는 명제로서, 학술이 나아갈 방향을 정리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인보가 이 서문을 적어가던 시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지 20년가량 지난 식민지시기였다. 10년가량 지났을 때 3.1운동이 민족적 저항으로 끓어올랐고, 곧이어 임시정부도 수립되었다. 그러나 다시 10년이 지나도록 독립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양심적 지식인의 노선을 견지하고 싶어도 길을 잃지 않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통 지식을 활용하여 국학의 범주를 확장하며 근대화 계몽의 동료로서 한몫을 담당하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편수회에 합류하여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해가 1928년이었다.
이 대목에서 정인보는 학술과 공동체의 관계를 숙고하며 지식인의 자세를 다잡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선언 뒤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정인보는 학술로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학술은 실제에 기반하여 독자성을 추구해야 하고, 그렇게 하여야 학술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핵심 이치를 터득할 수 있으며, 핵심 이치의 효능이 다시 인민과 만물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인보는 공동체의 현실에 기반하여 핵심 이치를 터득하고, 다시 핵심 이치가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하는 과정으로 학술의 전체 순환 활동을 설정해본 것이다. 이 전체 과정을 달성한 학문으로서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문을 내세우며 정인보는 "의실구독(依實求獨)의 학문"이라고 지칭하였는데, 그 말 자체가 실제에 기반하여 독자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니 학문이 기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각하는 것으로 전체 과정을 제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동체와 학술의 관계에 대한 정인보의 선언은 간단한 듯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야 할 맥락을 담고 있다. 민족의 학술이 추구해야 할 민족적 독자성은 민족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통해 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쪽에 담으며, 그 공정을 통해 확보되는 이치의 효능이 삶을 개선해주는 대상은 인민과 만물이라 하여 민족의 범주에만 갇힌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까지 포괄한다는 주장을 다른 한쪽에 담으려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지향하는 민족적 독자성이 세계 문명의 보편성으로 연결되는 구조로 맥락화한 것이다.
정인보는 이 글에서 의실구독의 맥락을 실현하는 논리를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 을지문덕에 대한 평가 문제를 보면 맥락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통해 수나라 양제의 침공을 완벽하게 물리쳤고, 수나라는 침략 실패의 결과로 나라가 망하는 지경까지 초래하였다.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이 행위 자체가 중화 문명을 존중하는 존화(尊華)의 의리를 배반한 것이므로 비난받을 행위라는 것을 전제한 후, 다만 수나라 양제는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후궁을 간음한 흉역한 자였으니 을지문덕의 행위는 도덕 문명을 바로잡은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송시열, 평양부(平壤府) 을지공(乙支公) 사우기(祠宇記))
정인보는 발끈하였다. 수나라 양제의 도덕적 하자가 없었다면 고구려 침공 자체는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토지와 인민이라는 주권적 실체가 있는 고구려가 자기의 정치적 독자성을 부정해야 했는가, 수나라도 존화의 대상인 중국 민족이니 그들의 침공을 환영해야 했겠는가 하고 되묻는다. 게다가 공자가 존화의 의리를 주장한 것은 자기의 민족적 독자성에서 나온 자각을 뿌리로 하는 것인데, 각자가 자기의 실체에 기반하여 독자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실구독의 그 뿌리는 무시하고 공자에게서 말단으로 발현된 존화의 의리만 따르는 성리학자들은 몽매한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의실구독을 추구할 생각을 못하고 중국인들의 존화사상이라는 말단에 부화뇌동하여 타인의 의실구독에 투항한 것이니 몽매하다는 것이다. 존화는 중국 민족의 경계 안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우리 민족은 별도의 가치를 갖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고, 각자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의실구독의 학문들로서만 국제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이 독립해야 할 학술적 근거와 독립될 조선의 학술이 세계 문명의 보편에 기여할 바를 함께 제시하려 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실학(實學)
정인보를 위시하여 식민지시기 일군의 지식인들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서세(逝世) 100주년을 전후하여 정약용을 재발견하고 각종 강연회 및 학술연구를 활발히 전개하며 식민지 조선의 현상을 돌파할 담론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정약용을 비롯한 양심적 지식인의 계보를 구상하고 학술 담론을 정비하여 대중적 계몽에 나섰던 일련의 사업 전체를 "조선학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조선학운동의 핵심은 바로 조선후기 양심적 지식인 계보에 대한 연구였다.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의 걸출한 양심적 지식인들이 역사에서 아주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이 요구하는 인상을 고스란히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황현(黃玹, 1855~1910)은 19세기말까지 정약용의 저술 중에 <흠흠신서>와 <목민심서>가 지방 행정과 형사 소송에 절실한 실용적 가치가 있어서 수백 본의 이본이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기록하였다.(황현 저, 임형택 외 역, <역주 매천야록> 상, 문학과지성사, 2005, 108면) 조선왕조 행정 체계 아래에서 활용할 만한 실용적 가치만 부각되고 있었으며, 진보적 개혁의 가치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식민지 상황에 의미 있게 적용할 만한 해석을 새로이 수행해야 했다.
정인보를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문일평(文一平, 1888~1936)과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의 지식인들은 다산 정약용에게서 조선후기 현실을 돌파할 개혁가 이미지를 찾으려 하였고 그것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돌파할 에너지를 얻으려 하였다. 특히 현상윤(玄相允, 1893~?)은 다산 정약용의 개혁이 "성공되었다면 필연적으로 구미 물질문명이 훨씬 용이하게 또는 일찍이 조선에 수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현상윤, 이조 유학사상의 정다산과 그 위치, <동아일보>, 1935.7.16.)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게 된 내재적 원인을 쇄국주의로 인한 조선의 지연된 개화에서 찾았던 당시 지식인의 현실 인식에서 나온 주장이다. 정약용의 개혁을 수용하지 못한 조선후기의 실패로 인해 식민지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니, 식민지 현실에서라도 정약용의 개혁 정신을 공부하고 계승해보자는 취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정인보는 다산 정약용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서 찾아내어 "널리 탐구하는 것이 하나에 집중되기를 목적으로 하고, 한 몸을 큰일에 바치기를 결심"하자고 하였다.(정인보, 다산선생의 생애와 업적, <동아일보>, 1935.7.16.) 여기서 집중해야 할 하나는 민족공동체이며 몸 바쳐야 할 큰일은 공동체의 고통을 구제하는 일이다. 공동체를 구하자는 양심적 지식인의 주장은 당시 큰 호소력을 얻는다. 1935년 9월 8일 '다산 정약용 선생 서거 99주년 기념회'에서 학술발표를 들은 청중들은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는 보도 기사가 남아 있다. "각 지방에서 온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한국의 지난 역사를 다시 한번 회상하니 감개무량하였다. 강연자의 열렬한 웅변에 상하 2층에 모인 천여 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신조선> 1934.9.) 천여 명의 시민이 학술 강연장에 모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이 시기 민족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다산 정약용 등을 조선후기 개혁사상가로 재해석해내고 그것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돌파할 에너지를 얻고자 하였기에, 조선후기 개혁사상을 품은 양심적 지식인의 계보를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익․정약용 외에도 남인 계열의 안정복․윤동규․신후담․이병휴․이중환 등이 소환되었고, 소론 계열의 정제두․최명길․이이명 등이 부각되었으며, 노론 계열의 홍대용․박지원 그룹 등이 거론되면서 당파도 다르고 활동 양상도 달랐던 이들을 묶어줄 하나의 개념이 필요하였다. 처음에는 현실학파․경제학파․실증학파 등 다양한 개념어가 경쟁하다가 20세기 중반 실학(實學)으로 정리되었는데, 원래 유학 이외의 학문을 허학(虛學)으로 지칭하며 유학의 가치를 강조할 때 사용되던 개념이었다. 20세기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실학에는 실용․실천․실증․실심 등의 내포가 담기게 되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론을 내포의 핵심으로 제시하기 위해 '실사구시설'을 지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20세기 중후반 실학자로 포함되어 부각되기도 하였다.
20세기 후반기의 실학(實學)
해방 이후 실학 연구는 대학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학술장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당색과 지향 등을 고려하여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로 실학의 계보를 정리하고, 현재 우리가 실학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 대부분을 완성하였다. 공동체의 현실에 깊이 참여하려는 식민지시기 양심적 지식인들이 구축한 실학 연구를 계승한 해방 이후의 연구자들은 현실에 필요한 담론을 찾아내는 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았다.
"조선후기 실학은, 첫째로 전근대의식에 대립되는 근대의식 내지 근대지향의식, 둘째로 몰민족의식에 대립되는 민족의식을 척도로 하여 재구성된 조선후기 유학의 개신적 사상으로서 '조선후기에 일어난 개신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 두 척도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존립 번영을 전제로 한 근대지향, 근대지향을 전제로 한 민족의 존립 번영이라는 일체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천관우, 한국실학사상사, <한국문화사대계> 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0, 1044면)
20세기 중후반 실학 연구를 담론적으로 주도하던 천관우(千寬宇, 1925~1991)는 근대주의-민족주의 결합 담론을 실학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서구적 근대화에 뒤쳐서 식민지를 겪게 되었다는 결핍감과 침략적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로 독립을 추구했다는 자부심이 결합한 근대주의-민족주의 결합 담론은, 일부 개발독재정권의 주장과 겹치기도 했지만 1960~70년대의 상황에서 일정하게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근대 조선의 양심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의 계보를 완성해 놓고 근대주의를 찾으려는 20세기 후반 당시 실학 연구의 경향은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자생적 근대론" 등으로 불리는데, 제국주의 일본의 개입 없이는 근대를 이룰 수 없었다는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 이념을 제공하였다. 전근대 지식인에게서 매우 근대적인 개념인 민족주의를 찾으려는 당시 실학 연구의 경향은 친일파 세력과 그 비호 세력인 당시 정권을 비판하는 감성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는 근대주의와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파괴적 속성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침략과 차별의 깃발인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이 충분히 설득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감각으로 훑어보면 이 시기 실학 연구는 학술의 공과 과가 착종된 느낌이다. 다시 그러나 개혁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통으로서 실학자의 상을 구현한 실학 연구는, 개혁과 양심의 가치를 연구 현장에서 완전히 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 실학 연구의 정점이 근대주의-민족주의 결합 담론에 머물러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정한 '분단시대 사학'에 있어서의 실학자는 근대지향적 사상가나 민족주의자일 것이 요청되었지만, '분단시대 이후의 사학'이나 그것을 지향하는 사학에 있어서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 권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실학자, 민중에게서 진정한 민족의 주체를 구하고 민족 내부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 전개에 앞장섰던 사상가로서의 실학자가 요구될 수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사회사상이나 경제사상이 한층 더 빛을 내게 될 것이다."(강만길, 실학론의 현재와 전망, <창작과비평>, 1974 겨울호, 1139면)
실학사상에서 민족주의와 근대지향성을 탐색해온 연구 경향이 분단시대 사학의 특징이라면, 분단시대 이후를 지향하는 사학은 그 특징을 발전시켜서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근대화의 필요에 의한 담론을 완성한 동시에, 1970년대에 민주주의의 필요에 의한 담론을 제출한 것이다. 지금은 당시보다는 소홀히 여기는 개념이 되었지만, 당시 분단은 남한 사회의 모든 모순과 질곡을 설명해줄 만한 고통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다. 실학을 통해 분단시대의 극복과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민족국가 수립의 과제를 제기하여,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서 실학의 이념을 다시 천명한 것이다.
21세기 양심적 지식인의 지적 전통을 되살리는 길
1970년대 실학연구자들은 양심적 지식인의 지적 전통에 따라 공동체의 필요에 대한 대응으로 학술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그들의 주장이 산업화 세력의 구호와 일부 맞물리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남한 사회의 비인간적 퇴영에 저항하였다. 양심적 지적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학문적 자부심으로, 식민지시기의 잔영인 식민사관과 해방 후의 후진국 변방 의식 및 군사정권시대의 개발독재주의와 싸우며 학술 담론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담론 층위는 이제 퇴적물 아래 깔렸고, 우리는 21세기의 지층 위에 서 있다. 21세기 우리 공동체의 동료 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20세기와는 또 다른 양상이다. 경제규모와 문화수준에서 세계 일류를 넘보는 사이에도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놓은 약자들의 지옥은 한없이 깊어졌다. 멀쩡해 보이는 직장을 가진 사람들도 무한경쟁의 연옥에서 혹독한 단련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너덜거리고, 그 좌우에서 멀쩡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시간 일해서 햄버거 1.8개를 콜라 없이 먹을 돈이 생긴다. 아예 착취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고, 자식에게 차마 노예 이하의 삶을 물려줄 수 없는 사람들은 진작에 연애도 결혼도 포기했다.
학술연구자들도 이 지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인보의 말처럼 내가 받는 이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마음 깊이 느낄 때 공동체와의 간격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정인보, 양명학연론, <담원정인보전집> 2, 238면.) 간격 없는 학술 담론이야 말로 의실구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은 전통적으로 문명의 최첨단에 놓여 있었다. 1차적 감각과 욕망을 넘어 인위적으로 구성해온 문명의 힘으로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것이고, 학술은 문명의 첨병 역할을 해왔다. 이제 학술연구자들 자신이 공동체의 고통 받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공동체가 한 단계 높은 문명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학술이 살고 공동체가 사는 길이 거기서 뚫릴 것이다.
▲1960년 4월 2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거리에 나선 대학교수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0022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미국이 가자 지구를 점령해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과 관련, 유럽과 아랍 나라들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성토했다.
[CNN]에 따르면, 프랑스 외교부 대변인은 5일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 이주에 대한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모든 강제 이주는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당한 열망에 대한 공격”이라며 “‘두 국가 해법’에 대한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장관도 “서안 및 동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가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속한다”고 일축했다. “팔레스타인 주민을 가자 지구에서 추방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제법에 위배되고 새로운 고통과 증오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데이비드 라미 영국 외교장관은 “우리는 두 국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늘 분명히 해왔다”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국가 해법으로 가는 길에서 (가자 지구) 재건도 함께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부에노 스페인 외교장관도 “가자는 가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고 그들은 가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뿐만 아니라 중동권 수니파의 맹주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트럼프의 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통신사 [와파]에 따르면, 5일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은 “우리는 수십년 동안 고군분투하고 큰 희생을 통해 달성한 우리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는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노력을 계속할 것이고 이것 없이는 이스라엘과 수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5일 뉴욕에서 ‘팔레스타인’ 행사에 참석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해법을 찾는 중에 문제를 더 악화시켜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우회적으로 트럼프 구상을 비판한 셈이다. “국제법의 근간에 충실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어떠한 형태로든 인종 청소를 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출석해 있다. 2025.1.23. [사진공동취재단]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과정 등에서 ‘12·3 계엄 사건’은 “부정선거 의혹을 확인하고 야당의 입법 독주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윤 대통령 쪽의 주장이 강조되고 있다. “구국을 위한 결단”, 과연 계엄의 본질적 동기가 그것일까.
그러나 ‘김건희 공천개입’ 사건을 수사해오던 검찰이 명태균 휴대폰 등에서 결정적 증거 등을 확보하자 윤 대통령이 수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민언론 <뉴탐사>와 권력감시 탐사보도그룹 <워치독> 공동취재팀은 ‘김건희 공천개입 의혹 사건’의 중요 당사자와 이들 변호인 등을 접촉해온 끝에 최근 이와 관련해 중요한 증언을 확보했다.
“윤석열과 김건희가 명태균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280개 내용이 확인된 검찰 수사보고서가 상부에 전달된 뒤부터 수사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었다. 문자 메시지가 확보되어 수사에 활력이 붙기보다, 되레 수사가 멈추는 느낌이었다. 12·3 계엄 내란이 무산된 뒤 그런 분위기는 더 짙어졌다. 계엄은 검찰의 수사보고서가 윗선에 보고되면서 시작된 것 같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분석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타임라인이 있다.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 등의 공소장 내용을 종합하면,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날은 2024년 12월 3일이었지만 앞서 계엄준비가 직접 실행되기 시작한 때는 2024년 11월 초이다. 2024년 11월 4일 창원지검은 ‘윤석열과 김건희가 명태균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280개 내용이 확인된 검찰 수사보고서’를 작성했다. 2024년 11월 9일 노상원 전 육군 정보사령관은 안산의 한 음식점에서 문상호 육군 정보사령관 등에게 ‘조만간 계엄이 선포될 것이고 합동수사본부 수사단 단장은 내가 맡을 것이다’고 알렸다. 같은 날인 11월 9일 김용현 당시 국방장관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국방장관 공관에서 윤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시국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취지의 설명을 들었다. 2024년 12월 2일 명태균 쪽은 ‘황금폰’을 민주당에 제출할 의사를 보냈다.
창원지검이 2024년 11월4일 작성한 김건희 명태균 게이트 수사보고서. 2025.2.6. 뉴스타파 자료
2024년 11월 4일 창원지검이 작성한 수사보고서 내용은 적나라했다. 2021년 7월 김건희 씨가 대선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를 전송한 명태균에게 “충성” 이라고 보낸 메시지뿐 아니라, 2021년 7월 윤석열 후보가 명태균에게 언론 인터뷰 방향을 직접 묻는 문자메시지, 2022년 11월24일 김건희 씨가 명태균에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관련한 자문을 구하고 명태균이 답변하는 메시지, 2022년 12월 31일 명태균이 윤 대통령과 신년인사를 주고받으며 창원 국가산단 지정 기원문 이미지 파일을 전송한 내역 등이 담겼다. 강혜경 씨의 컴퓨터에서 나온 ‘명태균-김건희-윤석열 메시지’ 내용만 이정도라서 만약 추가로 더 공개되면 특검은 피할 수 없다고 윤 대통령 쪽은 판단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한편 이런 의문도 들어야 한다. ‘왜 검찰은 명태균-김건희-윤석열 문자메시지 내용에 대해서만 급히 수사보고서를 만든 것일까?’ 그간 쏟아진 ‘명태균 게이트’ 관련 의혹은 단순히 ‘명태균 문자메시지’ 확인 차원이 아니었다. 수사의 시발점이 된 김영선 전 국민의힘 의원의 공천 대가로 전해진 돈 거래 흔적, 오세훈 서울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도 연루된 여론조사 비용 대납 의혹, 창원 산업단지 지정 관련 국정 농단 의혹 등에 대한 수사 경과는 보고서에서 모두 빠졌다.
수사가 안 돼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워치독>이 창원지검에 피의자 및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한 명태균 게이트 관련자들, 법조계의 설명을 두루 들어보면 창원지검에서는 이와 관련해서도 상당한 수사가 이뤄졌다. 오세훈, 홍준표 관련해 명태균이 진행한 여론조사 자료와 비용 대납 관련 자료가 검찰에 제출됐고, 창원 산단 국정농단 의혹 관련 검찰이 별도로 확보한 녹취록만 수백 건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창원지검이 2024년 11월 4일 작성한 수사보고서는 유독 ‘명태균과 김건희 윤석열 사이 문자메시지’ 분석에만 집중했다. 일상적인 수사보고서가 아니라 명태균과 강혜경 씨에게 윤석열 정권에 타격을 줄 만한 자료가 있는지 윗선에 보고하려는 보고서로 비칠 정도이다. ‘검찰 수사보고서’가 아니라 ‘대통령실 민정수석 보고서’로 의심된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과 미래한국연구소의 불법 여론조사 의혹 등 사건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가 14일 오후 경남 창원시 성산구 창원지방법원(창원지법)에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2024.11.14. 연합뉴스
<워치독> 취재에 따르면, 보고서가 작성된 11월 4일까지 검찰은 제보자 등에게 “포렌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검찰은 포렌식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급히 ‘명태균-김건희-윤석열 문자메시지’ 내용만 추려서 윗선에 보고한 것이다. 검찰에 이런 보고서가 왜 급하게 필요했던 것일까. 이 보고서는 박성재 법무장관을 거쳐 김주현 민정수석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 강진구 <뉴탐사> 기자가 대검에 질의 했지만, 대검은 답변하지 않고 있다.
명태균 게이트 주요 관련자들은 “계엄 실패 이후 창원지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어떤 진술을 해도 이전과 달리 검사와 수사관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했던 질문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변호인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수사 초기 검찰이 열심히 수사하겠다고 해서 진술을 열심히 하고 자료도 적극 제출했는데, 검찰의 속내는 명태균 게이트를 그들 선에서 덮을 수 있는지 견적을 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제 보니 속은 느낌까지 든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22일 이른바 ‘명태균과 창원지검장 충성맹세’ 관련 보도가 나오자 창원지검 내부는 발칵 뒤집혔고 검사들이 주요 제보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명태균씨를 수사한 창원지검의 검사가 ‘왜 휴대폰을 전자렌지에 넣고 돌려버리지 처남에게 맡겨두었냐’ 고 말했다”는 의혹 사건도 이즈음 벌어졌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내란 특검법’을 거부하며, “윤석열 대통령이 이미 기소됐다”는 이유를 댔다. 최 권한대행은 지난달 31일 “현재는 비상계엄 관련 수사가 진전돼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군·경의 핵심인물들이 대부분 구속기소되고 재판절차가 시작돼, 앞으로의 사법절차 진행을 지켜봐야 하는 현 시점에서 별도 특검 도입 필요성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1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탄핵안이 통과되면서 국정운영은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된다. 사진은 2023년 12월 12일, 네덜란드 국빈 방문 당시 차량에 탑승한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2024.12.14. 연합뉴스
그러나 대통령이 수사팀에 출석도 하지 않은 채 가까스로 기소했고, 애초 논란이 됐던 김건희 공천개입 의혹 사건 등은 모두 공소장에서 빠졌다. 내란의 동기가 대통령 부부 개인 비리를 덮기 위한 것인지, 부정선거 의혹 확인과 야당을 경고하기 위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공교롭게도 “김용현 전 국방장관은 검찰에 출석해 ‘11월24일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감사원장, 국방부 장관 탄핵 등을 이야기하며 명태균 사건도 언급했다’ 고 두 차례나 반복해 진술했다”고 <JTBC>가 5일 보도했다. 그러나 윤석열 공소장 등에 이러한 내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렇게 수사를 끝내선 안 된다. 내란 특검법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이유다.
국회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내란 우두머리 혐의 윤석열 대통령이 수감된 서울구치소 등을 찾아 현장 청문회를 실시했지만, 윤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증인들의 불출석으로 청문회는 결국 불발됐다.
국조특위는 5일 오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수감된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이어 오후엔 윤 대통령과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이 수감된 경기 의왕의 서울구치소를 찾아 현장 방문조사 형태의 '구치소 청문회'를 실시했다. 그러나 오전과 오후 일정 증인들은 모두 불출석했다.
동부구치소의 김 전 장관은 재판 준비와 변호인 접견 등을 사유로 증인 출석에 불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위 야당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한병도 의원은 이날 오전 동부구치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증인인 김 전 장관이) 현장조사에 부담을 느낄 수 있어 비공개로 인원도 5명으로 줄여서 하겠다고 했다"며 "구치소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는데 (김 전 장관이)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특위는 이어 이날 오후엔 서울구치소로 자리를 옮겨 윤 대통령 등을 증인으로 채택한 청문회를 실시하려 했으나, 핵심 증인인 윤 대통령과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김용군 전 대령 역시 모두 청문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김문태 서울구치소장은 "증인 출석 요청 사항을 전달했지만 3명 수용자 모두 출석 요청을 본인 의사로 거절했다"고 했다. 이에 민주당 김병주·민병두·백혜련·추미애 의원이 구치소 내 접견실을 직접 방문해 증인들을 만나려 시도했지만, 이 또한 거부당해 성과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특위는 불출석 증인 3인(윤석열·노상원·김용군) 모두에 대해 고발 조치를 예고했다. 민주당 소속 안규백 특위 위원장은 "위원회는 (증인들에게) 고발 및 재출석 요구 등에 대한 조치를 할 수 있다"며 "(증인 3인에 대해) 간사 간 협의를 통해 증언 등에 관한 법률 제12·13조에 명시된 '국회 모욕죄'로 고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특위는 앞서 이날 오전 동부구치소 조사에서 출석을 거부한 김용현 전 장관에 대해서도 고발 및 재출석 요구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동부·서울 구치소 현장 방문을 마친 국조특위는 수도방위사령부 미결수용소로 이동해 증인으로 채택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만나 청문회를 시도할 예정이다.
한편 국조특위 내 여당 측 위원들은 윤 대통령 증인 채택 등 특위 결정 사항에 반발, 오전 동부구치소와 오후 서울구치소 현장 조사 모두에 불참했다.
▲5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안규백 위원장과 김문태 서울구치소장이 윤 대통령이 있는 수감동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예섭 기자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최근 댓글 목록